- When Bruce Wayne meets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7. 24

- Written by. Jade


 

Essence of Justice




 

  브루스 웨인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그 장소의 테이블 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구전처럼 도시를 돌아다니는 그의 버릇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무언가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매너를 발휘하게 했다.


  브루스 웨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빛을 내뿜을 것 같은 책상에 붙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입니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 건설한 시설의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하여 조성된 공간인 만큼 브루스는 앉은 자리에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반대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를 바라보았던 작은 스코프는 분명 존재했었다.


  브루스 웨인은 회상했다.


  그는 여기서 알프레드에게 온갖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경영학이 아니라 공학이나 신소재 학문을 전공했을 거라는 얘기부터 자신은 미술에 소질이 없다며 손수 그린 설계도를 팔락거린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는 소리를 했다가, 알프레드에게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그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당장 집사 일을 그만두었을 거라는 일격을 당했었다.


  물론 끝없는 번뇌와 고통도 있었다.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모니터 화면 위에 이제는 자신의 비틀린 동력이 되어가는 과거를 출력하며 스스로를 짜냈다. 울진 않았어도 기이하게 신음한 일은 한 두 번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마지막에서야 발견했던 스코프가 어떠한 모습들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넓은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저격용 스코프 같은 게 숨어 있을 만한 위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이 어느 건물 옥상에서 그것을 결국엔 발견하게 된 사건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의 관찰자는 그 자신의 임무를 종료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브루스 웨인은 쪽지를 힐끗했다. 그조차도 스코프를 쥐고 있던 장본인에 대해 고작 메모지 한 장에 들어가는 정보를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적힌 이름이 그 자의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담시의 뒷골목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암살자 같은 족속들도 그토록 은밀하고 비밀스럽지는 않았다. 브루스 웨인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어둠보다 조용하고 은닉의 화신들보다 비밀이 많은 관찰자가 붙게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의 관찰자에게 사연을 물었었다.


  바람이 참 요란스럽게 불었던 날이었다. 고층 건물의 옥상이라는 공간적 특징으로 인하여, 평소에는 별로 경험해 볼 일도 없는 온갖 대기의 성질들을 몸소 체험하며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응시했었다. 남자의 얼굴은 평범했다. 특징도 없이 그저 짧게 자르기만 한 머리칼에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말이 없었다.


  삼각대가 달린 장총은 아직 옥상의 난간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브루스 웨인을 쏘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브루스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사고 속의 브루스 웨인은 목소리로, 그리고 현재의 브루스 웨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그렇게 물었다.


  알프레드는 두 사람이 케이브라고 부르는 기지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브루스의 유리 별장에도 누군가가 침입하거나 감시 데이터를 읽은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었다. 달리 말하면 브루스는 그 남자가 언제부터 나타나 어느 곳까지 자신을 주시했던 건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상상해야만 했다.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리더인 브루스 웨인을 본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려받게 된 회사에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모양이었다. 성실한 기업인이라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자체에 꽤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범죄 단신을 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이번에 생긴 일 때문에 새로운 아이들 몇 명이 방문할지도 모르겠다며, 그들을 잘 대해달라는 당부를 그가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 전했다. 전화를 마친 그가 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힌 것 같았다.


  추가적인 일정이 없으면 브루스 웨인은 퇴근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주제의 잡지나 책을 읽거나 집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니면 혼자서 한 잔의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 그는 밤을 흘려보냈다. 이 모든 수가 빗나간다면 브루스 웨인은 십중팔구 묘소에 있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묘비 근처의 꽃을 갈아주고 그 앞에서 침묵하며 생각하는 브루스 웨인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탄에 시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고귀한 폭력이 되려는 브루스 웨인을 보았다.


  남자는 너무 오랫동안 브루스 웨인을 관찰하면서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지만 브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발견했는데도 왜 날 쏘지 않았지?


  브루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일종의 자연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브루스에게 시선을 보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받은 이의 행동 양식이었을까. 그렇지만 브루스가 지금 거울을 봤다면 남자가 그 때에 자신의 몫으로 가진 회상과 추측을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터였다.


  남자가 아는 많은 것들이 순서를 지켜 부상했다.


  저 억만장자가 비밀리에 꾸미고 있는 시설을 발견했을 때 그가 받은 임무 저변에 깔린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자들은 진실하고 충실한 자경단을 제일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억지와 같은 희박한 가능성을 들어 그 존재를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저들이 더욱 성장하게 될 때, 권력과 법을 대체하고 소름 돋도록 민주적인 신임을 얻을 때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공포로 여기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들의 궤변은 그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변질되는 정의들 덕택에 힘을 얻었다.


  브루스 웨인은 그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맹세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고민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남자를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남자에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굴었다. 브루스 웨인은 단 한 번도 총을 잡지 않았다. 그의 품은 펼쳐 보인 두 손바닥처럼 깨끗했다. 그 때도 그러하였다.


  정의로 인정받은 것은 더 이상 정의가 되려 하지 않고, 아직 정의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정의에 가까워지려 한다.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문장이 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인가?


  남자는 마침내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돌아가.

  —…나를 처리하는 게 당신의 임무였을 것 같은데. 날 돌려보내줘도 된다는 건가?


  남자는 브루스 웨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듯 바라보는 용도로 쓰였던 총을 문득 떠올렸다. 슬프게 솟구친 물감처럼 무성하던 풀밭 뒤편의 묘소로 그를 따라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브루스 웨인은 기어코 또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위해서 죽으려 하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총에 대해 알기라도 하듯이 브루스 웨인은 남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생명이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그래야 했다. 남자는 많은 걸 생각했으나 정작 그 안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한 마디를 꺼냈다.


  —괜찮아.


  브루스는 남자의 시선을 잃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브루스의 표정이 남자의 눈동자를 사선으로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브루스가 몸을 돌리면서 다시 하나의 선상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어.


  남자는 그 짧은 말이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질책하였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실현하고 싶다면 인간을 재단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 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모두가 남자를 향해 질릴 정도로 주입하던 법칙이었다. 정작 남자는 이태까지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역사는 이제 부정되었다. 남자는 혼자서 항이 비어있는 부등호를 채웠다.


  —그것이 정의의 본질이야.


  브루스 웨인은 어느새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의 모서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자의 말을 끝으로 회상을 중단했다. 정체불명의 감시자가 던진 충격에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지상으로 내려갔을 무렵에는 까맣게 타고 있는 자동차만 있었을 뿐이었다. 기름을 먹고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 강렬해서 사고 현장에는 제대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브루스 웨인은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었다. 그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전에 어떤 남자를 죽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모든 것은 재가 되었다. 남자가 두고 갔던 총은 아마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에 넘어갔겠지만 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본명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과 너무도 짤막하기만 했던 몇 마디의 말들이었다.


  브루스가 이름을 적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보았다. 잉크가 다 말라서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선명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이 잠시 브루스의 표정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섰다.


  오늘 그가 기지에 온 이유는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브루스는 벽면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모든 것을 가려주되 그에게 남은 것을 이루어줄 갑옷이 완성된 형태를 드러냈다. 회상을 마친 브루스 웨인은 현재에 다시 입성했다.




In Flames by Lungley


오늘 밤 천사는 죽을 것이고

천국은 그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걸 잊으리

불길 속에서 우리의 이름은 맹세된다

  불길로부터 우리 둘은 태어난다



[BvS/숲뱃(클락브루스)] Becoming God

- DC Movie Universe 2016. 8. 31. 16:11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Superman/Batman

- Original Date 2016. 08. 21

- Written by. Jade


Becoming God




  하얀 옷을 입고 붉은 날개를 단 천사가 말했다.


  "피란델로라는 작가를 알아요?"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대답했다.


  "이탈리아 문학이라도 읽는 건가."

  "역시 알고 있었네요.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알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쓴 작품 중에 우리 둘 모두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 있어요."

  "한가로운가보군."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죽음의 천사이자 인간의 지배자인 남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밝았다.


  "당신은 언젠가 나에게 나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당신의 그 통찰력이 얼마나 희귀하고 또 고귀한 것인지 그 때는 몰랐어요. 그래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봐야 해요. 그런데 당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간들은 나를 신으로 봤어요. 태양만 있으면 그 누구보다 강력해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 행성을 초월한 세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가보죠. 적어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나는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어요."


  "그것으로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겠다는 건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쳐서 정권을 잡은 독재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궤변이야." 


  "나는 당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공포정치에 대한 가장 든든한 벗으로 태양을 두고 있는 독재자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왕이면 좀 더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야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죽고 나서 나는 물어야 했어요. 나는 누구지? 이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지? 당신의 시선은 논리적이고 모든 면에서 다 옳았지만 그래서 따뜻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장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지극히 옳은 걸 외면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게 물었고 대답을 얻었어요. 피델리오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인공적인 신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바란 그대로의 것이 되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파괴하는 신이 되기로 한 건 네 자신이 선택한 거야."


  밤의 영웅도 아니고, 이 순간엔 오직 한 명의 인간일 뿐인 남자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녀를 잃은 바로 그 시점에서 너는 인간에 가까워지길 포기한 거야. 그렇게 되면 그녀를 죽인 자와도 닮아질 테니까. 일시적으로 해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른 자들이 신이 되어달라는 소망을 보낸 건 너에겐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을 걸. 네가 납득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자비로운 신은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었지. 네가 노력과 자비를 베풀어서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네가 반드시 없애야 할 자들만 남았으니."


  인간이 원하지 않은 신이 입술을 물었다.


  "나를 봐."

  "보고 있어요."

  "아니야."

  "당신을 보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클락, 나를 봐. 뭘 불안해하지?"


  파괴신과 천사와 외계인과 인간을 오가는 존재가 표정을 찡그렸다.


  "로이스 레인이 죽던 날 이후로 너는 나를 보지 않아. 그러나 넌 태양과 심판의 신이 될 수는 있어도 지혜의 신이 될 수는 없어. 피란델로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응시해보라고.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 테니."


  인내심과 자애로움이 있는 고목과 같이 인간은 계속해서 그에게 자신의 눈동자를 제공하려고 했다. 정의내리기 애매해진 존재는 결국 인간의 시선을 받아들고야 말았다.


  ―나의 육신이 거만한 나의 정신에서 분리되는 것을 저기 내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아, 마침내! 저기 그가 있구나! 


  존재는 책의 구절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아니었다.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한 가련하고 무기력한…

  "그 날 나는 너를 이렇게 보고 있었어."


  그를 정의내릴 수 있는 한 단어는 클락 켄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클락 켄트가 입술을 떨었다.


  "아니…."

  "그 때 너는 나를 보지 않았어."

  "그렇지 않…."

  "너무 좌절스러워서 모든 걸 다 속단하기에 이르렀던 거야."

  "나는…."

  "그렇지만 나는 너를 차갑게 보지 않았다, 클락."


  인간에 의해 신이 된 자는 자신이 억지로 신이 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십만 명의 시선이 되기에도 바빠 그 자신은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비합리적인 무게감을 벗게 되었다. 






인용된 책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BvS/숲뱃(클락브루스)] Learning Love

- DC Movie Universe 2016. 8. 31. 16:10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Superman/Batman

- Original Date 2016. 08. 09

- Written by. Jade


Learning Love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자가 말했다.

 

  "생명과 도시를 구하는 데 애정이 필요하진 않더군. 구원은 형벌만큼이나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해.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다루어야 하지. 모두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그 자에 의해서 한 번 죽어 보았던 이가 말했다.


  "당신은 아마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겠죠?"


  "그래."


  "만약에 당신이 모두를 사랑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봐요. 그러면 그 안엔 당신도 들어가겠죠? 당신이 구하는 건 사람들이고, 당신도 한 명의 인간이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니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던 자를 대신해 울상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적인 일이야 신이나 성인들이 주로 하는 행위지 않나. 이타적이며 동시에 건설적이지.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저급하게 인간적이야. 결국엔 호숫물 아래로 머리를 박고 말 결말을 가져올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당신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은 건 아닌가요?"   


  그러자 자본주의의 정점에 선 인물의 모습을 꺼내든 자가 말했다.


  "어차피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그러한 행동을 할 수도 없지."


  "그건 무슨 뜻인가요?"


  "아주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뜻이지. 다른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를 이용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판단은 무의미해지고, 개인은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겠어요." 

  

  손에 잡히는 이득보다는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더 추구해온 인물이 말했다.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따르겠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한 다음에,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준다면 문제될 건 없는 게 아닌가요?"


  "…아니야."


  "왜요?"


  "그건 잘못된 평가야."


  "어째서요?"


  슈퍼맨의 물음에 배트맨이 답했다.


  "너를 한 번 죽게 만들었던 사람이 나니까."


  슈퍼맨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이야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금언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에요."


  "내가 사회적 동물이라고?"


  "당신은 모든 분야에 대해 현명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고 말죠. 당신에겐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타인이 필요한 거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야말로 당신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요?"


  "…나는 이미 혼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아왔어."


  "시간이 언제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에요."


  인간의 생김새로 자주 그려지는 조물주 이후로 인간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을지 모르는 영장목의 일원이 말했다.


  "당신 자신을 평가해줘요. 남의 사랑, 당신의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당신의 그 안타까운 논리를 꼭 뒤집어야 할까요?"


  인간은 말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죠. 사랑한다는 표현이 너무 지나친 것 같으면 믿는다고 할게요. 신조차도 당신처럼 끈질기게,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해서 인간에게 자원과 희망을 쏟아붓지는 않을 거에요."


  "그런데?"


  "당신의 화법을 사용해볼게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구체적인 개인들과의 접촉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죠. 종 자체를 무한히 사랑하지 않는 한은요.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 어떻게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탄생할 수가 있나요? 그렇다고 해서 그 '특정한 사람'에 들어갈 인물과 아닌 인물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구분할 수가 있죠?"


  인간이 아닌 이에게 인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인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당신은 나 같은 타인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에요. 타인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순식간에 거짓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꼴이 되어버린 검은 기사의 시선이 떨렸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


  "왜 그렇게 단정지어야 했던 거죠?"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나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둘은 신이 아니에요."


  "네 앞에서 나는 인간의 고유함에 대해 떠들었었지만 박쥐 가면을 만든 그 순간부터, 나는 반쪽짜리 신이라도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나 다름없어.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반쪽에라도 닿으려고 노력해야 해. 내가 도시를 책임지겠다고 정했어. 내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정했고 내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추구하겠다고 정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와 같은 인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길 바라니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그 모든 걸 포기해서 자신이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얻을 수 없는 지친 영혼이 읊조렸다. 


  "삶은 등가교환이 되지 않아. 내가 나를 희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지는 않지. 그렇지만 나는 그걸 바라면서 이 일을 해. 불가능한 걸 목표로 삼은 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야. 네가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언제 당신을 사랑해줄 거예요?"


  "내 목표를 이루고 나면."


  "불가능한 거라고 했잖아요."


  "맞아."


  모순을 긍정으로 삼켜버리는 남자를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붉은 망토의 사나이는 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내가 대신해서 당신을 사랑할게요."


  유효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손이 건네졌다.


  "나는 그럴 수 있어요."


  모든 인류를 지키는 존재의 손 위에는 그 순간 분명히 세상 모두와 공평하게, 그렇지만 더 깊은 따뜻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손가락이 얹어져 있었다.   

[StarWarsⅦ/카일로레이] Integration of Dreams

- Star Wars 2016. 8. 31. 16:09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Wars : The Force Awakens, Kylo Ren/Rey

- Written by. Jade


Integration of Dreams





    그곳은 육지와 바다가 똑같은 넓이로 펼쳐진 행성이었다. 


  레이는 다리를 끝까지 뻗은 채 발끝으로 파도를 즐기고 있었다. 바닷물이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발가락을 적셨다가 물러나길 반복했다. 레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발을 흔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지금과 같은 일을 꿈꿨다. 작은 게가 서슴없이 모래사장 위를 굴러다니고, 둥근 자갈들이 맑은 바닷물 아래 깔린 그곳은 레이의 소원 그 자체였다.


  레이의 작대기를 빌려갔던 츄이는 그것을 가지고 낚시라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츄이는 바닷속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작대기를 한 번 바닥에 꽂고 울었다. 레이가 그걸 보고 악의 없이 웃는 순간 츄이가 들어 올린 작대기 끝에 물고기 한 마리가 대롱대롱 걸린 채 나타났다. 레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츄이가 아까와는 사뭇 다른 만족스러운 울음소리를 냈다.


  레이는 바닷가에 왔으니 생선을 먹는 게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영 안 할래?”


  핀이 레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핀은 당장에라도 물속으로 들어가도 좋을 듯한 차림새를 갖추고 있었다.


  “나 수영 못 해.”

  “진짜?”

  “사막에서 자란 애가 수영을 배울 일이 있었겠어? 나 정말로 수영 못 해.”

  “그럼 오늘부터 배우면 되겠네!”


  핀이 레이의 손목을 잡고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가는 바람에 레이도 덩달아 몸을 일으키게 되었다. 기우뚱거리는 다리가 첨벙첨벙 소리를 내면서 바닷물을 밟았고 튀어 오른 물방울은 레이의 허리 위까지 올라왔다. 핀이 뛰는 속도는 줄어들지 않았다. 레이는 핀에게 붙잡힌 팔을 이리저리 흔들다가 볼썽사납게 물속에 빠졌다. 


  핀이 위에서 박장대소를 했다. 


  “나 수영 못 한다니까…!”


  핀은 우스꽝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레이가 수영을 못 한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영으로 레이를 따돌렸다. 분한 마음에 레이는 몇 번 물장구를 쳤다. 그러나 레이는 정말로 수영을 못 해서 핀을 향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뒤로 발랑 넘어갔다. 레이가 가라앉은 자리에 작은 물거품이 남았다.


  물을 젓는 레이의 팔이 나타나지 않자 핀은 곧장 레이가 걱정되었다. 핀이 한달음에 물거품이 사라져가는 지점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레이? 레이, 괜찮아?”


  그 순간 레이의 양 팔이 위로 솟구치더니 핀의 뒤통수를 내리눌렀다. 핀의 다리가 중력을 거슬렀으며 요란하게 물이 찰박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몇 분 뒤 바닷물을 쪼르르 토해내며 핀이 고개를 들었다.


  “한, 저 잘 했죠?”


  레이가 지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레이는 자신의 발 가까이에 있는 바닷가를 그리듯이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면서 칭찬을 기대하는 일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다른 사람에게 칭찬을 받은 적이 없었다.


  한 솔로가 레이를 향해 씩 웃었다. 그곳은 육지와 바다가 똑같은 넓이로 펼쳐진 곳이면서 동시에 레이가 행복할 수 있는 장소였다.


  느리게 모래 위를 걷는 한 솔로의 등 뒤에는 숲이 모래사장과 아슬아슬한 경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카일로 렌은 숲과 모래밭에 모두 발을 걸치고 서 있었다. 그는 해변에 어울리지 않는 복장을 입고 있었지만 적어도 얼굴을 가리거나 망토를 두르지는 않은 모습이었다. 렌의 발은 몇 번 태양이 내리쬐는 모래밭으로 나아가고 싶어 했으나, 그늘을 벗어나면 너무 눈이 부셔서 렌은 금세 숲의 안쪽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렌은 레이와 한 솔로가 있는 밝은 곳을 응시했다.


  그때 묵직한 바구니 하나가 렌의 눈앞에 불쑥 나타났다.


  “같이 들어주지 않겠니?”


  레아 오르가나가 부드럽게 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척 보기에도 양이 많아 보이는 열매들을 가슴에 안고 있었다. 렌은 반사적으로 그녀가 감당하고 있던 무게를 가져갔다. 


  “다른 사람들이랑 나눠먹자.”


  레아가 빛나는 땅을 고갯짓으로 가리켰다. 렌은 더듬더듬 자신의 어머니를 따라갔다. 


  츄이는 어느새 잡은 물고기들을 줄로 꿰어서 어깨에 메고 있었다. 많은 것들이 풍족했다. 레이와 핀이 물을 털어내고 있었고 한 솔로가 낚시에 취한 듯한 츄이를 불렀다.


  “잠깐만 기다리렴. 껍질을 벗길 만한 도구가 있을 거야.”


  렌이 천천히 열매들을 내려놓았다. 레아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소매를 전부 걷어 올린 레아의 옷차림은 아주 편안해 보였다. 게다가 아무도 그녀를 장군이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렌은 덜 익은 부분도 없이 구석구석 빨간 열매 하나를 매만졌다. 


  물 위로 올라오는 츄이의 그림자가 유독 길었다. 레이와 핀은 츄이의 몸이 물 밖으로 다 나왔는데도 끝없이 이어지는 물고기들의 행렬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렌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이 많은 걸 혼자 다 손질하려고?”


  한 솔로가 툭 한 마디를 던졌다. 그가 한쪽 눈썹을 올리고 렌에게 물었다. 


  “그건….”

  “그럼 당신도 좀 거들든가요.”


  어느새 나타난 레아가 당당하게 한에게 주머니칼을 건넸다. 마침 그녀가 챙겨온 칼은 세 개였다. 그리하여 한 가족은 당분이 가득한 과즙이 흐르는 열매의 껍질을 벗겼다. 


  렌은 미묘하게 표정을 찡그렸다.


  세 사람 중에서 그래도 유일하게 기사 수련을 받은 경험을 살려야 하지 않겠냐며 껍질을 빠르고 섬세하게 깎아내고 있던 렌은, 문득 자신이 세 사람을 고려한 생각을 해냈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다. 렌은 늘 혼자였다. 수련생들 중에서 루크 스카이워커를 벗어날 마음을 먹었던 것도 그가 유일했고 빛과 어둠을 나란히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과제를 받은 사람도 역사를 통틀어 그를 빼면 존재하지 않았다. 렌은 언제나 자신만을 생각해야 했다. 그것은 단순한 이기주의가 아니었다.


  칼을 쥔 렌의 손이 열매의 측면을 긁었다. 과육이 조금 붙은 껍질이 모래밭에 떨어졌다. 렌은 괜히 쑥스러웠다.


  “…하나 정도는 맛을 봐야 하지 않아요?”


  부지런히 껍질을 까고 있던 한과 레아가 나란히 고개를 들었다. 렌은 슬그머니 열매를 돌려서 약간 패인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그가 묵묵히 열매를 잘게 조각냈다.


  “맞는 말이군. 여기에 이상한 독이라도 들어있으면 어쩌려고.”

  “내가 설마 그런 걸 당신이랑 아들한테 먹이려고 하겠어요?”

  “당신이 야생 열매에 대해서까지 잘 아는 건 아니잖아. 잘 먹으마.”


  한이 열매를 입에 넣었다. 레아가 발끈하면서 뭐라 반박을 하려는 입모양을 만들자 그가 검지를 들었다. 레아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숨을 탁 뱉었다. 


  렌은 이상한 표정을 지은 채로 열매의 껍질을 계속 깠다. 확실한 건 렌이 지금 슬프거나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것이었다.


  레이와 핀은 츄이가 잘 꿰어 놓은 물고기들을 줄에서 하나하나 분리하고 있었다. 츄이는 바닷가에서 레이의 작대기를 씻었다. 작은 일이지만 꼼꼼하게 협동하는 모습은 레이의 꿈이 이루어지고, 렌이 분노하지 않는 이 행성과 참 잘 어울렸다.


  그 곳에서 레이와 렌은 서로를 바라보게 되었다.


  벤 솔로라고 언제나 그의 가족을 싫어했던 건 아니었다. 레이 역시 처음부터 혼자였던 게 아니었다. 얼핏 현실이 역전된 것 같아도, 사실 또 다른 진실이기도 한 환상 속에서 두 사람은 시선을 움직이지 못했다.





  카일로 렌이 눈을 떴다. 그가 머리 위로 손을 내젓자 그의 머리 위에 있던 전등에 천천히 불이 들어왔다. 렌은 눈을 깜빡이면서 전등이 완전히 밝아지는 걸 지켜보았다.


  자신이 쉽게 이용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소녀의 머릿속을 뒤지다가 오히려 자신의 치부를 들키게 된 사건 이후로, 렌은 여전히 자신이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소녀와 때때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렌은 그것을 아직까지 자신의 스승에게 밝히지 않았다. 그 막연한 연결이라는 걸 끊어버릴 이유가 확실하게 없다는 게 그의 이성적인 설명이었다.


 렌은 불을 켰던 자신의 손을 눈앞으로 가져갔다. 그의 손에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그가 단맛 나는 열매의 껍질을 깠던 건 모두 꿈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레이는 렌보다는 조금 야단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상체를 세우자마자 머리를 양쪽으로 털었다. 그러나 흩날린 것은 레이의 머리카락이었다. 이미 눈을 떴으니 레이가 방금 전까지 꾸었던 꿈은 사라졌다. 내실 없는 행동을 한 레이의 얼굴이 아래로 내려갔다.


  무의식을 공유해버린 두 사람은 침묵했다.


  레이가 곧장 루크에게 달려가지 않고, 렌이 으르렁대면서 처음부터 한껏 불쾌감을 표출하지 않은 이유는 같았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미련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막을 벗어난 레이는 한동안 섬에서 살기까지 했으나 그녀가 진정으로 바랐던 바다는 조금 다른 것이었다. 그리고 고독한 렌은 어쩔 수 없이 영원히 지나가버린 단란함을 그리워한다. 


  레이가 침대에서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카일로 렌의 흔적이 잡히지 않았다. 그저 거의 웃을 일이 없어서, 웃는 법을 잊어버릴 지경까지 몰린 그의 미묘하지만 편안한 표정이 기억날 뿐이었다. 레이가 가만히 자신의 입술을 한 번 말았다.


  렌은 하얀색에 가까운 상의 위에 검은 옷을 걸쳤다. 기사의 복장이 하나씩 그의 몸 위에 쌓일 때마다 그가 맨 처음에 입고 있었던 하얀빛 옷은 흐릿해지고 다른 것에 의해 감춰졌다.


  렌은 가면을 쓰기 전에 조금 주저했다. 정녕 그 안정감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지 누군가에게 묻고 싶었다. 자신의 순수한 목소리로 그런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다. 


  레이가 말없이 베이지색 재킷을 걸쳤다. 그녀도 이제는 저항군의 표식이 달린 재킷을 입었다. 카일로 렌도 다른 방도가 없어 가면을 썼다.


  카일로 렌이 수련실로 향하는 동안 레이는 그녀의 방을 나섰다. 저항군의 회의실에서는 벌써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2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5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현대를 기준으로 손꼽히는 진보의 첫 번째 사례가 달 표면에 사람의 발자국을 찍은 것이라면, 이어 두 번째라 할 만한 사건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캡슐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두 손을 모으거나 옆 동료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캡슐이 무사히 열리길 바라고 있었다.


  켈빈 연구소도 처음엔 그러했다. 그곳은 전범 배양 시설이 아니라 자본금을 대는 정부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평범한 국가 부설 연구소였다. 연구원들의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이 캡슐의 표면에 어렸다. 누군가가 캡슐이 배출되는 소리에 맞춰서 마개를 딸 샴페인을 들고 왔다.


  자동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캡슐이 하나씩 꿈틀댔다. 샴페인을 든 연구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곧 가장 왼쪽에 있는 캡슐부터 하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샴페인의 마개가 퐁 위로 튀어 올랐고 연구원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잔을 나눠주며 샴페인을 즐겼다. 칸의 탄생은 그토록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였다. 


  캡슐에서 태어난 인조인간들은 눈을 뜨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 작명에 조예가 있다면서 일을 자청한 4명의 연구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고 하는데, 칸이라는 이름은 시뮬레이팅에서 나온 이미지가 상당히 고압적이기에 생겨났다. 


  “어때, 동의해?”


  연구원이 칸에게 물었다.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칸은 그 당시에 8천 개의 영단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다지.”


  연구원은 입을 한 번 내밀고 말았다. 칸의 그 대답이, 그의 눈에는 모두가 명암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인간에게 특별히 상냥하거나 고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켈빈 연구소가 영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만든 캡슐은 36개였고 칸을 포함한 36명의 인조인간들은 이를테면 1차 테스터들이었다. 연구소 측은 3개월간 그들을 인조인간 그 이상의 강화인간으로 제련한 뒤 작업이 성공적이면 한 차례 더 캡슐을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창 각국의 언어를 학습하고 있는 인조인간들은 자유 시간에 독서를 할 것을 권장 받았다. 연구원들은 일부로 연구소 곳곳에 작은 책장을 설치해 책을 깔아두었고, 비판적 사고력이 다 발달하지 않은 생명체들은 꽤 고분고분하게 연구원들의 권고를 따랐다. 


  칸은 3일 만에 개수가 늘어난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하얀 연구원들이 칸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칸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연구원들이 잡담을 하는 걸 들었다. 그들은 칸을 볼 때마다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눈동자에 관해 한 마디씩을 남기곤 했는데, 그들은 주로 칸을 우주의 무엇과 자주 비교했다. 


  마침 천체를 다룬 책이 새로 책꽂이에 입성한 참이었다. 칸은 그것을 펼쳐 읽었고 1시간 뒤 독서를 그만두었다. 저자가 객관적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인간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에도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온갖 주관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연구소에 있는 가장 큰 창문으로부터 하얀 햇빛이 들어왔다. 칸은 굳이 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조각들은 어차피 전부 단조롭기 때문일 것이었다.





  “…색깔을 보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재판관은 지극히 인간답게 질문했다. 단순히 두 개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색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사실 엄격한 재판관이라면 지양해야 할 태도였겠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일반인에 불과했다. 구경꾼들은 소리 없이 재판관의 질문에 그들의 의문점을 실었다. 


  “그렇다.”

  “어째서?”

  “세계는 흑과 백인 게 더 잘 어울리니까.”


  재판관은 그만 품위 없이 벙찐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신을 추앙한다면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회를 짓기도 하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지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인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나 같은 존재를 만들어서 생명 창조라는 영역에 도전하는 게 또 인간들이지. 이런 모순에 장식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가장 깨끗한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 고작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었을지 모르나 나에겐 일종의 정화 작업이었다. 본질을 흐리는 것들은 닦아내야지. 너희도 틀린 건 수정을 거치지 않던가.”


  인간들은 칸의 언행에 분노했다. 당장 저 파렴치한 전범에게 돌덩이를 던지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울타리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팔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레너드 맥코이만 칸 누니엔 싱처럼 미동 없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맥코이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는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갈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장은 조금 때가 타긴 했지만 아이보리 빛을 띠고 있었다. 재판관이 팔을 올리고 있는 책상과 칸이 앉아 있는 단상은 명암과 채도 모두가 다른 색깔이었으며, 격식을 갖춘다고 검정색 옷을 빼입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느 한 구석은 다른 옷들을 입고 있었다. 맥코이는 아무래도 그것들이 모조리 획일화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맥코이가 그렇게 가장 아름답지 못한 오류를 실감해보려 애쓰는 동안 전범의 진술이 이어졌다.


  “연구원들은 처음엔 몇 번 내 안구를 교체했다. 그들과 같은 걸 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존재들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내가 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내 태도만큼이나 그들이 노력한 결과도 완고하게 바뀌지 않으면서 연구원들은 점차 지쳐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 2차 생산에 돌입하기 전에 날 폐기하려고 했다.”


  재판장은 꼭 칸의 강연실이 된 듯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진 못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흥미가 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은 색깔 있는 천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고와 다양한 차원에서의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인간들이 나를 만들면서 이루고자 했던 가치는 이른바 나의 결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연구원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완벽하게 잘못된 존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날 태우기 위해 지펴 놓았던 불을 역이용했다.”


  맥코이는 켈빈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다는 뉴스를 읽었던 걸 기억했다. 그 날 오후에 영국은 켈빈 연구소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 발표했고 최초로 칸 누니엔 싱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졌었다.


  칸의 입이 다시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으로 나오니 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더군. 내가 인간들이 결점이라고 여기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반쯤 무력행사를 강요받았다. 나는 박멸당해야 했다. 정신 나간 색맹이었으니까. 그걸 뒤집으면 나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있는 거였으니 나는 싸움을 수락한 것이다.”


  “설마 전쟁을 본인의 정당방위라고 포장하고 싶은 건가? 인간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들을 죽였다고?”


  “당신이 나에게 일을 벌인 경위를 물었으니 그에 맞는 대답을 한 거다. 내 행동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앞서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왈칵 뒤집어졌다. 이번엔 바리케이드들의 노력에도 진정되지 않아 재판관이 법봉을 휘둘렀다. 


  “조용, 조용!”


  법봉이 다섯 번 책상을 꽝꽝 내려 친 다음에야 주변이 가라앉았다. 재판관은 눈썹을 엄하게 굽히고 피고를 쳐다보았다. 반면 칸은 한 번도 재판관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럼 왜 여기서는 항복한 거지? 이 땅에 오니 색깔이 보이기라도 했나?”

  “그렇다.”


  그러면서 칸은 손을 꺼내지 않고 눈으로 맥코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저 인간을 목격한 순간부터 내 업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멈춘 것이다.”


  맥코이에게 순식간에 조명을 다 넘겨버린 칸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맥코이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본 칸이 인상을 찡그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우쭐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칸이 보기에 맥코이는 그가 최초로 색의 혼란에 빠졌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낯빛을 띠고 있었다.


  그 날 재판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겨울의 궁전은 황량했다. 정원의 풀은 모두 죽었고 찬 기운을 내뿜고 있는 짙은 구름 때문에 출입구나 조각품, 분수 등은 본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곧 비나 진눈깨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칸은 거대한 캐논을 내리고 돌로 꾸며진 화단에 앉았다.


  대륙 중부의 겨울은 그가 제일 긴 시간을 할애했던 영국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안개가 자주 끼면서 생명력이 넘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지나치게 판이했다. 반사적인 분석 작용을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칸은 얼어붙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휘어지는 나뭇가지처럼 슬그머니 몸을 숙이고 싶었다. 


  칸의 얼굴이 까만 땅바닥과 가까워졌다. 그렇게 되자 칸은 땅의 진동과 그것이 전해주는 소음을 더욱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전차들이 궁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칸은 캐논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궁전 안에는 그가 밟거나 타고 오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칸은 정원을 벗어나 궁전 입구 앞에 서 있는 동상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차들은 그 성능이 뻔한 데다가 포신을 들어 올릴 때 굉음을 내는 멍청함까지 갖고 있었다.


  전차가 쿵쿵 달려왔다. 칸은 전차의 정면을 겨냥해 캐논포를 쐈다. 광선은 무척 아슬아슬하지만 대신 깔끔하게 포탄이 날아가는 부분만을 도려냈다. 전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칸은 캐논을 손에 쥔 상태로 동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전차들은 사이좋게 커다란 구멍을 나눠가졌다. 칸은 자신이 처음으로 내려앉게 될 전차의 위쪽에 다시 한 번 캐논을 날려준 뒤 자신의 몸을 통째로 내부로 내리꽂았다. 안에 있던 두 인간 군인이 삽시간에 절명했다. 칸은 뒤를 돌면서 그들의 기관총을 메고 캐논에 의해 뚫린 옆면을 이용해 곧바로 사격에 돌입했다.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던 군인들은 족족 이마에 총을 맞고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 칸은 그가 포구처럼 쓰던 자리를 통해 지상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투기가 굵은 구름덩이들을 뚫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칸은 묵묵히 캐논을 주웠다. 


  비행기의 아랫배 부분이 열리면서 미사일이 튀어나왔다. 칸은 왼쪽 어깨에 멘 기관총을 반동을 이용해 왼손에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미사일이 공중에서 조각났다. 더불어 미사일을 내려놓을 때 날개를 아래로 내려 살짝 비껴 비행하는 인간 조종사들의 전통적인 습성을 알고 있는 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캐논으로 다른 쪽보다 아래로 내려온 날개를 쏴 부러뜨렸다. 


  거짓말처럼 신속하게 전투기가 추락하며 궁전을 들이받았다. 하얀색 연기는 꼭 구름을 닮아 있었다. 촉촉한 자연의 상징과 핏기 어린 음울함 사이에 차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칸은 그렇게 세상을 인식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멎었다. 칸이 출력이 다 떨어진 캐논을 밟았다. 오늘도 그는 그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눈을 붙일 것이었다. 


  그 나날들이 가끔 지루했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기에, 칸은 지금 와서 온갖 종류의 혼돈을 끌어안고 있었다. 


  재판장이 닫히기 직전 재판장은 칸과 맥코이 중 누구를 특정하지도 않고 서로를 아냐고 물었다. 아마 재판장은 그것보다는 대체 상대가 다른 이에게 어떤 존재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칸은 그 숨겨진 맥락에 따라 맥코이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실상 칸은 맥코이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어 그를 ‘저 인간’이라고 칭할 만큼 그를 몰랐다. 


  멀리서 아득하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부르짖는 인파들의 외침이 전해져 왔다.


  레너드 맥코이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잠깐 창밖을 보다 커튼을 쳤다. 맥코이가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할 건 칸 누니엔 싱의 목숨을 논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아무도 레너드 맥코이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코이는 무언가를 찾는 노력이라도 하고 싶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온통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서적들로 가득했다. 맥코이는 입술에 힘을 주고 그곳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Nothing Else Matters by David Garrett

Originally sung by Metalica


Original Date 2015. 11. 07.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1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4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Nothing Else Matters Piano & Cello Cover by Brooklyn Duo

Originally sung by Metalica



  레너드 맥코이는 끝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걷어차이던 라이플이 끝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물건과도 같은 그 라이플을 만지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라이플은 몇 초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닥에 남아있던 가장 적나라한 전쟁의 흔적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 존재가 차근차근 인류를 몰살해가던,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횡단의 종착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물의 잔해들을 치워내고 잠시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으로 무너지지 않은 금문교가 서 있었다. 맥코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졌으나 한때는 너무나도 사악했던 라이플을 바라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커다랗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바라보던 모습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맥코이는 그 다리가 어떻게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동안 다리를 보고 있던 맥코이가 어깨와 목을 풀었다. 그는 의사였으나 부상자는 거의 없고 사망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라 그만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맥코이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부서진 건물들과 씨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속보에요, 속보! 모여보세요!”

 

  누군가가 종이 한 장을 급하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맥코이는 약간 느리게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무슨 일인데?”

  “그 미친놈의 재판 일정이 벌써 잡혔대요.”

  “남아있는 법원이 있었나?”

  “전범한테 뭐 얼마나 거창한 법원이 필요하다고. 대충 재판장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사형일 텐데.”

  “그런데 그 놈은 그렇게 금세 항복을 해 버렸나 봐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몰라. 아무튼 재판은 언제래요?”

  “이틀 뒤요.”


  호들갑스럽게 가져온 정보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칸 누니엔 싱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해서 화제는 아주 빠르게 통일되었다. 


  맥코이는 혼자 맨 처음 소식을 물어왔던 사람에게 접근했다. 


  “가져오신 종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는 맥코이에게 종이를 넘겨주고 곧장 파렴치한 전범을 깎아내리는 일에 동참했다. 맥코이는 사람들을 등지고 종이를 읽었다.


  급하게 찍어낸 공문 같은 종이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칸 누니엔 싱으로 알려진 전범을 엄격하게 구금하고 있으며 이틀 뒤 그에 대한 공개 재판을 행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인간이 살고 있는 대륙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존재가 어떻게 항복을 하게 되었는지, 그가 항복한 자리에 누가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다. 


  맥코이는 그때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의사로서 바깥에 나가 있었다. 과연 단신으로 여러 국가들을 소멸하고 다녔던 자의 무력은 악마적이었다. 의사가 굳이 살리려 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는 사람들일수록 다시 한 번 살해되는 자비 없는 현장에서 맥코이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비무장인 그가 살 수 있는 확률은 어차피 낮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영국과 반대 방향의 땅에 살고 있었던 덕택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맥코이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렇게 맥코이는 얼핏 초연한 듯하나 사태를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후퇴! 후퇴해!”


  전범은 검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전진했다. 맥코이는 전장에 나간 의사면서 한 명도 살리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때마침 총성이 울렸고 맥코이는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도 맥코이의 몸은 멀쩡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맥코이는 눈을 떠야 했다. 그가 눈을 뜨는 동안 도시는 참으로 조용했다. 더 이상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고 총탄도 발사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전범이 무기를 내린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저절로 탄식 같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당신, 지금….”


  전범은 맥코이가 서 있는 쪽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맥코이는 급히 물러나려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전범은 경악하고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평범한 의사일 뿐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전쟁의 일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맥코이는 전범을 응시했다. 그는 새하야면서 동시에 새카맸다. 그리고 진리를 본 회의주의자, 혹은 신을 본 무신론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맥코이만의 감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전범이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용감하게 팔을 뻗어본 것은 그러한 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전범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이 더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맥코이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의사가 되어 누구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전범은 맥코이의 정체를 물으며 무기를 놓았다. 하얀색 가운이 그를 부드럽게 가려주듯이 휘날렸다.


  맥코이는 그 나름대로의 충격을 받고 정지했다. 


  멀찍이서 최후의 전선을 짜려던 군이 웅성거렸다. 무시무시한 전범이 의사 가운을 팔에 걸친 남자 한 명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군인 하나가 돌격을 제안했다. 비로소 전범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는 걸 안 인간들이 그를 덮쳤다. 


  즉 칸 누니엔 싱은 레너드 맥코이를 직면한 순간부터 무력해진 것이었다.


  맥코이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칸의 이상 행동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공개 재판장에 가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아직 멀쩡한 쓰레기통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레너드 맥코이?”


  군용 재킷으로 자신이 관료임을 증명하고 있는 남자가 맥코이에게 손짓했다. 맥코이는 당국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수정했다.


  “잠깐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켈빈 연구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칸 누니엔 싱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그 외에 켈빈 연구소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곳의 연구원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연구소의 관계자들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은?”


  맥코이는 그쯤에서 발끈했다. 


  “없습니다. 이거 뭔가 취조당하는 기분인데요, 왜 자꾸 저에게 켈빈 연구소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10년 넘게 의사로 일해 왔어요. 런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단 말입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자신의 중얼거림도 질문자의 물음에 포함이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아뇨.”

  “그 반대의 경우는요? 칸이 당신에게 말을 걸었었습니까?”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했습니까?”

  “아니요.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워서 대답할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왜 그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는지 짚이는 점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에 관하여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그 질문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는 칸이 자신을 보고 공격을 멈췄다는 결과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맥코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문을 품어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본인도 왜 자신이 칸을 멈추게 만들었는지 모르는군요.”

  “맞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안전보장 위원회의 위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맥코이 씨는 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이틀 뒤 열리는 재판에 꼭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호출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죠. 나가셔도 좋습니다.”


  맥코이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고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는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지만, 뒤이어 맥코이는 상념에 사로잡혀 느릿하게 걸었다.

  




  임시 재판장으로 채택된 곳은 한때 창고형 매장의 일부였던 건물이었다. 재판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주최 측은 다소 품격이 떨어지긴 하나 최대한 사람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곳에 재판장을 꾸밀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조금 못 되는 시간동안 철제 진열대며 남아있는 상품들이 치워졌고 의자와 작은 단상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성한 의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일반 관람객들은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주최 측은 사람을 바리케이드처럼 세워놓고 의자가 마련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을 구분했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형편없는 재판장이었으나 맥코이는 차마 혀를 차진 못했다. 범죄자는 한 번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대단히 문명화되고 이성적인 사고는 오히려 박수를 받을 만했다. 맥코이는 재판장을 한 번 더 바라본 뒤에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는 맥코이를 의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무리가 웅성대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해는 되지만 불편한 광경이었으므로 맥코이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곧 재판관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말이 있은 뒤 5분이 지나자 검정색 가운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나타났다. 군중들이 환호했다.


  “사형!”

  “그 놈을 빨리 죽입시다!”


  바리케이드들이 군중들을 진정시키고자 바삐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힐끗했다. 귀한 의자를 배정받아서인지 그들은 꽤나 조용하게 눈으로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외치고 있었다. 


  “정숙하세요! 자, 피고 입장.”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칸 누니엔 싱은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걸어 나왔다. 그의 발이 내는 소리는 깨끗하고 위압적이었다. 칸을 인도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고, 칸은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모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자태로 피고석에 앉았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 몇몇이 진저리를 쳤다. 


  “기록을 위하여 피고는 이름을 정확히 대시오.”


  칸은 조잡한 질서의 주인공으로서 단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고요하게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칸 누니엔 싱.”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군중들이 또 괴성을 내지르려다 멈칫했다. 칸은 재판관보다 더 곧고 위엄 있는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맥코이는 그걸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는 칸이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칸은 맥코이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피고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를 밝히시오.”


  칸은 입을 열기 전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보통 인간들은 그것이당연한 생리적 미동인줄로 알았지만 칸은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향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그리고 칸이 레너드 맥코이를 시선의 중앙에 두고 눈꺼풀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세상의 온갖 색채들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칸이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다.”


  맥코이는 입술을 닫았다.



Original Date 2015. 11. 06.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Writing's On The Wall Violin Cover by JuNCurryAhn
Originally sung by Sam Smith
 

  ‘다름’이라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틀림’과 혼동되어왔다. 그 유구한 착각은 어쩌면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종의 감별 시험인지도 몰랐고, 이성이 발전하면서 넘어야 할 하나의 과제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리라. 


  그토록 공평한 시험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지 않고, 마침내 칸 누니엔 싱에게까지 다름과 틀림 사이에 놓인 갈림길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27일째에 문제의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만들어진’ 존재로서 교육받아야 할 것이 아주 많았던 그가 30일간의 언어 습득 프로그램을 마치기 직전이었다. 칸의 과제를 들여다보게 된 인간 연구원은 그는 온갖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조인간이 자꾸만 사물의 색깔에 대해서 제대로 된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걸 수상하게 여겼다. 연구원은 왜 저 꽃의 색깔이 빨갛다는 사실은 무시하는지 물었고 칸은 그 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갈림길은 태동했다.


  아무도 칸과 같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시력 저하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 최고급 안구를 낀 다른 이들은 한 사물을 보고 그것의 색깔을 디지털 색상표에서 골라내기도 했다. 인간인 자들도, 인간이 아닌 자들도 그에 대해서 부지런히 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칸은 검고 하얀 숨을 내쉬었다. 그가 선 갈림길의 한쪽은 끝없이 하얗고 다른 한쪽은 끝없이 까맸던 것과 비슷했다.


  칸은 명암으로 인식되는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모두가 까만 길을 선택했다. 인간 연구원들이 보기에 칸은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었으며, 한 가지 측면만 빼고 칸과 거의 모든 게 같은 존재들도 조금씩 그에게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칸이 보기에는 다른 자들이야말로 세상의 건조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빚는 역설적이고 오만한 세계에 축복과도 같은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본질은 흑과 백이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칸이 그러한 결론을 내린 뒤에 이어질 수 있는 당연한 일들이 발생되었다. 그 어떠한 색과 만나더라도 타자를 없애버리는 검은 길에 들어선 이들이 중재될 방도는 없었다. 칸은 자신을 소각장에 집어넣으려는 인간 연구원들을 제치고 시설을 통째로 불태웠다. 이제야 학문적 지식들을 배워나갈 참이었던 인조인간들은 칸의 급격한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에게 외면당했다.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강령은 곧 타자에 대한 말살전으로 심화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 인공인간의 시선에서는 너무나도 처절한 사투였다.


  칸은 여전히 그 전쟁 속에 있었다. 


  그가 보는 건물들은 높이만 다를 뿐 색깔은 회백색으로 동일했다. 태양이 똑바로 서 있지 않아 몇몇 지붕과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그 건물들이 본질적으로 회백색이라는 사실을 없애버리진 못했다. 그것이 칸의 진실이었다. 그것에 대해 달리 표현을 하는 존재들은 틀렸다. 홀로 명암의 진리를 주창하는 칸에게 끝없는 승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그 고독한 부정이었다.


  칸은 조금씩 바닥에 끌려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라이플의 총구를 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라이플의 느릿한 움직임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라이플보다 더 더디게 움직였으므로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갈아 끼워졌던 그의 안구에 무채색의 증오가 모여 반짝거렸다. 칸이 라이플을 고쳐 잡았다.


  회백색의 건물들이 회백색의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미리 설정해 놓았던 타이머의 숫자가 바닥나 폭탄이 작동한 것이었다. 칸은 사실 자신이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곳에서, 몇 번이나 그래왔듯이 혼자서 그 버석한 우매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목표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와중에 자신을 응원이라도 해 주듯이 도시가 무너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상 칸에게는 볼품없이 서 있던 기둥들이 사라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에 그는 자신이 지나간 도시들은 전부 무너져 내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둥그런 연기와 먼지가 뭉쳐서 칸에게 더 짙은 회백색을 제공했다. 칸은 이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있는 곳은 바다와 가까운 항구 도시라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덕분에 회백색은 금세 날아가 버렸고, 칸은 너무나 낯선 파란색을 목격해버리고는 그도 모르게 라이플을 조금 아래로 떨어뜨렸다.


  또렷한 파란색 점이 힘차게 회백색의 장막과 검은 그림자를 헤치고 칸에게 다가왔다. 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사격했다. 총성은 건물이 부서지는 굉음에 묻혔지만 칸은 탄환이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총을 다시 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라이플로 너무나 가까운 대상을 노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식은 당장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부서진 도시의 가루들이 거의 다 날아갔다. 칸의 시야는 전례 없이 깨끗해졌으며 또 혼란스러워졌다.


  파랗기만 하던 것이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고, 그러면서 더 많은 색깔도 함께 갖추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양의 갈색과 검은색이 있었다. 은색이 신기루처럼 반짝거리기도 했다. 은은한 살구색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파란색이 칸의 눈을 찔러댔다. 비정상이라는 끊임없는 판단에도 의연했던 그의 안구는 그것에 몹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칸은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 더 이상 무너질 건물이 없었다. 쌓이고 다져져 하나의 법칙이 될 뻔했던 경험이 최초의 반례를 맞았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고독의 시간은 끝났다. 칸은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마주했다. 그는 파란색이 너무나도 강렬한 존재였다.


  라이플이 고개를 숙였다.


  ‘다름’과 ‘틀림’이 그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 혼동되면서 심지어 반목해 온 것은, 한 쪽이 절대적인 명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명분은 그것의 허점을 인식해야 할 집단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일 때가 많다. 


  칸은 그의 세상이 무채색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쟁을 끌어 왔다. 그는 세상의 색채를 틀리게 보는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가지일지언정 그것의 형태는 하나다.


  칸은 라이플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라이플이 목표를 맞추기에 최적화된 간격을 지났다. 회백색으로 분화된 덩어리들이 바람에 완벽하게 쓸려나갔다. 수없이 반복되는 사례로 보강되어 왔던 진실의 회백색이 칸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라이플의 총구가 거의 바닥에 박힐 지경임을 알아본 파란빛의 존재가 움직였다. 타자를 마주할 때 간격은 좁으면 좁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칸은 그가 다가오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을 보았다. 그 검은색은 다른 색들과 함께 있어서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칸에게 가장 익숙한 검은색마저도 그의 기반을 산산이 해체하고 있었다.


  충분히 칸과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파란 존재가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칸이 팔을 쭉 펴면 모자람 없이 닿을 수 있는 간격만이 남았다.


  칸은 팔을 뻗으면서 눈을 감았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온기가 칸을 눈 뜨게 만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것 같은 파란색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과, 낯설어서 더욱 다가가고 싶은 온순한 살구색과 정직하게 반짝이는 은색, 마지막으로 단순한 오차에 의해서 파괴의 위기를 면한 어느 다리의 금색이 칸의 온 몸을 덮쳤다. 칸은 그도 모르게 천천히 라이플을 놓았다.


  칸은 그 자신의 갈림길에서 드디어 고개를 한 번 돌릴 수 있었다. 자애로운 흰색이 그를 반겼다. 칸은 그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파란 존재의 한 팔에는 하얀색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Original Date 2015. 11. 05.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4. (Incompleted)



  벤지는 눈을 뜨기 전부터 자신이 있는 공간이 변화했음을 알았다. 졸리지는 않지만 마땅히 힘이 펄펄 솟는 것도 아닌 기묘한 부유감이 몸 안을 돌고 있었다. 벤지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는 다친 곳도 없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어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체를 흡입했으니 병원으로 실려 온 것 같다며 자체적인 판단을 마친 벤지는 의자의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는 브랜트를 발견했다. 식탁 사이에나 꽂혀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의 의자를 어디서 공수해 온 것인지는 몰라도, 브랜트는 꽤나 편하게 그것에 몸을 의지하면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벤지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그 자세 이상해.”

  “뭐가.”

  “첩보기관의 부국장이라는 사람한테는 안 어울린다고.”


  두 사람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브랜트가 의자 바깥으로 삐져나와 꺾여 있던 팔을 하나씩 회수했다. 


  “일반적인 수준의 신경가스였으니 네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단은… 거기서 뭘 가져간 거야?”


  “기록청장의 도움을 받아 알아봤는데, CIA 내에서 발의는 되었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관한 거였어.”


  “보관소에 있었던 센티넬 프로젝트처럼?”


  “그거랑은 달라. 그 센티넬은 몇몇 인간들이 써먹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랭글리 안에 있었던 거고. 통제구역 안에 있던 건 만장일치로 버려진 것들이었어. 국장님은 CIA에 그런 미친놈도 있었냐며 황당해하시던데. 하나는 미국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암살 및 감청 프로그램이었고 또 하나는 조기 인재 선발이라고 포장해두긴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기관이 어린 생명들을 쓸 만한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으로 구분해놓겠다는 내용이었어.”


  브랜트의 말을 다 들은 벤지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와, 진짜 미친놈인데?”


  “그리고 그런 미친놈의 아이디어가 정보기관을 씹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악당 손에 들어가고 말았지. 대중들은 당연히 선동될 거야.”


  “…막을 방법은?”


  “생각 중이야.”


  브랜트는 다시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벤지는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미 누운 상태였기에 황망히 눈만 깜빡였다. 이단은 자신이 빼돌려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그가 늘 지키려 했던 조직에 지금 그 자신이 가장 큰 위협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가이드 없는 센티넬이라는 게 그렇게 무력한 존재일까? 벤지는 이 모든 물음들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라든가 학문적 사실을 너무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벤지의 머릿속에 있는 건 이단이 자신을 보고서도 총을 쏘는 대신 어렵지 않게 해독될 수 있는 가스를 뿌렸다는 기억뿐이었다.


  그 때 브랜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브랜트는 전화벨이 한 번 다 울리기도 전에 스피커폰을 켰다. 


  “알아낸 게 있어요?”


  벤지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당신이 찾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병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일사 파우스트의 목소리를 들은 벤지는 더 크게 눈을 떴다. 



* * *




  그러니까 벤지가 아주 편하지만은 않은 잠에 빠져 있을 무렵 런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브랜트의 연락을 받은 일사가 조지 더글라스라는 인물이 영국 정보부와 혹시 관련이 있는지 질문했을 때, 루퍼트의 머릿속에 특별히 떠올랐던 것은 없었다. 그는 외부인이 된 일사가 더는 접근할 수 없게 된 MI6의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돌려보겠다고 약속을 하긴 했다. 그러한 과정이 있어 루퍼트는 반만 채운 머그컵을 앞에 두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는 부지런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루퍼트는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이태까지 CIA 내부의 비밀 아닌 비밀 기관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는 유럽을 누비는 남자였고, 그가 예기치 않게 미국인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단 헌트가 숨기고 있는 정체와 관계없이 루퍼트에게는 유효한 하나의 임무였다.


  루퍼트는 데이터베이스의 검색 결과를 기다리는 짧고 의미 없는 시간에, 갑자기 아무런 묘사도 없이 단지 이단 헌트를 지목하기만 했던 솔로몬 레인의 의도를 추리해보게 되었다. 죽은 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남겼다. 이 경우 이름의 주인공이 살인자이거나, 살인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고리일 수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생겨난다. 


  진전 없던 화면이 바뀌어 루퍼트가 허리를 폈다. 본부에 제출되었던 몇 개의 보고서에서 조지 더글라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듯했다. 루퍼트는 제일 위에 뜬 검색 결과를 클릭했다가 그가 솔로몬 레인과 엮여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루퍼트가 목을 좀 더 빼고 스크롤을 내렸다. 


  —루퍼트? 벌써 뭐가 나왔어요?

  “더글라스는 레인과 같은 생각을 했던 놈이었어요.”

  —네?

  “더글라스는 미국판 솔로몬 레인이나 다름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단 헌트는 당신이에요, 일사.”


  잠시 후 일사의 핸드폰으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을 열어본 일사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아예 눈동자를 사진에 고정해버렸다. 


  —이 사람이 레인이랑 같이 있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습니까?

  “아니요. 있어요.”


  일사의 핸드폰이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졌다.


  “브랜트에게 알려줘야겠어요.”


  일사는 언제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벗을 수 있을지 헤아리는 것도 포기해가던 시절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일사는 레인의 방문 앞을 야닉 빈터가 지키는 걸 보고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성큼성큼 화장대 서랍에서 작고 납작한 물건을 꺼낸 뒤 그것과 색깔이 같은 리시버를 귀에 끼고 머리카락으로 귓불 주변을 가렸다. 밖으로 나가니 야닉 빈터가 문지기 일이 지루한지 구두 앞코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일사는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코너를 돌았다.


  그녀는 솔로몬 레인의 방과 인접해 있는 비상계단 쪽으로 숨어서 가지고 온 물건을 벽에 갖다 댔다. 그것은 일종의 증폭기 역할을 하면서 작게나마 일사에게 레인의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끌어왔다. 


  —배우와 감독, 두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은 흔하지 않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일사가 모르는 목소리였다. 일사의 상체가 알아서 벽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이른바 ‘구조적 완성도’에 목을 매지 않나? 

  —일사 파우스트를 보면 꼭 나만 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일사는 그저 상관의 명령을 듣는 평범한 요원이야. 그녀에겐 언제나 별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약간 다를 뿐.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일사는 증오스러울 정도로 냉철하고 정확한 레인의 단평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빼서 야닉 빈터의 발을 확인했다. 그의 발은 아예 허공에 대고 박자를 젓고 있었지만, 일사는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건 전혀 아니라는 걸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겼다. 


  발각된 스파이의 움직임은 둔해지기 마련이다. 일사는 장비를 챙겨 철수하면서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들었다.


  —그런 훌륭한 인재라면 내 곁에 두고 싶군.


  일사는 놀라운 빠르기를 발휘해 방으로 숨은 다음 얇은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일사가 평생 동안 본 적 없는 얼굴이 솔로몬 레인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 달 뒤 일사는 지하실로 끌려 온 이단 헌트를 구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두 번째로 그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단서는 현대의 통신 시스템을 거쳐 미국 동부 땅에 있는 브랜트와 벤지에게 도달한 상황이었다. 


  “랭글리와 런던에서 온 정보들을 종합해보자고.”


  벤지의 병실은 간의 회의실이 되었고 그의 침대는 급한 대로 테이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브랜트가 화이트보드 대신 놓여 있는 타블렛에 번호를 썼다.


  “루터가 랭글리에서 긁어온 자료들에 의하면 이단이 훔쳐간 초안들을 작성했던 조지 더글라스라는 자는 CIA에서 활동할 때도 썩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아. 임무 성공률은 상위권이었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인 아이디어를 자주 제출했다고 해.”


  브랜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숫자 ‘2’를 그렸다. 


  “일사가 싱클레어 요원에게 물어봤는데, MI6가 가지고 있는 기록에서도 그가 등장했다더군. 두 사람은 요원으로 뛸 때 일을 같이 했었다는 거지. 더글라스는 스스로 CIA를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그의 튀는 행동들을 보면 위에서 나가라는 압력이 있었을 거야.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레인이 MI6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지.”


  “죽이 잘 맞네. 그러니 레인의 신디케이트가 무력화된 이후에는 그 더글라스라는 놈이 날뛰는군.”


  “아마도. 그런데 일사가 재밌는 얘기를 했어. 두 사람이 꼭 서로를 경쟁자로 보는 것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대. 일사는 그들이 목표는 같을지언정 서로 택한 길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레인은 아주 비밀스러웠잖아. 신디케이트라는 조직이 있다는 걸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조지 더글라스는 꽤 요란한 타입이겠지.”


  그러면서 타블렛 위에 쓰여 있는 숫자를 하나 더 늘리려던 브랜트가 멈칫했다. 벤지가 브랜트의 손목을 잡고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의 얼굴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이단이 가져간 자료들 말이야, 그게 언제 작성된 거지?”


  “더글라스가 기관을 떠나기 3개월 전. 그 두 개가 마지막 제안서들이었어.”


  “그 놈이 일부러 그런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써 낸 다음, 스스로 자신을 상부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다면? 그게 기록청의 지하로 직행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나중에 그게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야기될 문제까지 다 계획해 놓은 거였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일을 어쩔 수 없이 이단이 떠안게 된 것까지 전부 각본이었으면?”


  브랜트는 눈을 껌뻑거렸다. 벤지가 지휘자처럼 손을 흔들기 직전 그가 내뱉었다. 


  “이단은 CIA의 적이 됨과 동시에 버려지겠군.”


  타블렛이 휙 뒤집히고 벤지가 담요를 걷어찼다. 그의 양 발이 신발을 낚아채려고 부지런히 허우적거렸다. 브랜트가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걸쳐져 있던 타블렛을 추락의 위기로부터 건져냈다. 


  “잠깐, 벤지. 침착해. 그 꼴로 나갈 거야?”


  대답을 하기에 앞서 몸부터 가눠야 했던 벤지의 다리가 한바탕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품이 넓은 환자복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벤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내 옷은 어디 있는데?”


  브랜트가 침대 밑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벤지에게 건넸다. 벤지는 자신의 동료이자 상관에게 한 줌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듯 환자복을 훌렁훌렁 벗었다. 브랜트의 눈동자가 조용히 천장을 향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그렇게 불리한 입장인 건 아니야. 영향력 있는 언론사나 방송사가 CNN을 제외하면 다 뉴욕에 있으니까. 그 놈은 파급효과를 노릴 텐데 그럼 뉴욕만큼 괜찮은 곳이 없어. 애틀랜타에는 루터를 보낼 거야.”


  타이밍 좋게 벤지가 소리 없이 만세를 외치는 자세를 선보였다. 브랜트는 머리까지 안정적으로 쏙 밖으로 빼낸 벤지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를 떠나 더욱 동쪽으로 향했다.




Original Date 2015. 11. 05.

미완성작이라서 카테고리도 붙이지 않음..

[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3)

- Anything 2016. 6. 23. 15:45 posted by Jade E. Sauniere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 Ethan Hunt/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3. 부재하는 인도자]


  일사는 브랜트가 카페 메뉴판을 보기 전 루퍼트 싱클레어가 전부터 MI6 현 국장과 친했으며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IMF의 뜻을 영국 정보부 측에 전달해줄 메신저 역할로 싱클레어 요원이 최적의 선택이라는 확신을 브랜트에게 심어준 것이었다.


  브랜트는 유능한 대변인을 옆에 낀 것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MI6와 IMF 모두 이단 헌트를 추적해야 하는 명분이 있으니 그걸 막지는 않겠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 목표를 공유하는 사이로서 협력을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다만 이단 헌트를 곧장 죽이는 일만큼은 반대하고 그가 자의로 범죄와 테러를 일삼을 인물은 아니므로 그를 생포한 뒤 자초지종을 듣는 게 먼저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은 브랜트의 일장연설을 들은 벤지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루퍼트 싱클레어는 대답에 앞서 커피를 마셨다. 두 미국인은 느긋한 동작 아래에서 저 영국인 양반이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조용히 궁금해 하고 있었다. 브랜트와 벤지에게는 루퍼트가 꼭 1분씩이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초지종이라, 그쪽에서도 신디케이트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이단은 솔로몬 레인과는 달라요.”


  벤지는 본인이 그렇게 뱉어 놓고 놀라서 입술을 꽉 붙였다. 브랜트는 당황하지 않고 벤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이 영국 정보부 출신으로서는 꽤나 희귀한 풍경이었는지, 싱클레어 요원의 눈썹이 잠시 위로 올라갔다 가라앉았다. 


  “말씀하신 것 중에 틀린 점은 없는 것 같군요. 국장님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퍼트는 커피를 깨끗이 비운 뒤 일어났고 일사가 뒤를 이었다.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던 벤지가 눈을 굴렸다. 


  “벤지, 넌 나랑 얘기 좀 해.”


  브랜트가 옆에서 속삭였다. 루퍼트와 일사가 카페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너는 아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지? 미국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뭐?”

  “보관소에서 말이야. 거기서 대체 뭘 본 거야? 정말 싱클레어 말처럼 CIA도 신디케이트 같은 걸 키우고 있었어?”


  그제야 벤지는 무너지는 은행의 천장 아래에서 먼지와 함께 사라져버린 이단의 그림자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너무나도 냉정한 글자들이었다. 일사 파우스트의 지적을 요원들의 진리로 자꾸만 격상시키려 하는, 소름 돋도록 효율적이면서 계산적인 낱말들 속에서 벤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이단이 옛날 일사 꼴이 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레인은 정보부 요원을 이용해서 정보부라는 체계를 없애버리려고 했잖아. 그 과정에서 일사는 착취당했어. 이단도 그렇게 될지 몰라. CIA는 신디케이트가 아니라 신디케이트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 브랜트. 그걸 폐기하지도 않고 때를 재면서 감춰두고 있었다고!”


  “일사는 어쨌든 임무 때문에 신디케이트에 잠입했던 거잖아.”


  “그런데도 그녀는 버려질 뻔했어. 정보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는데도.”


  브랜트는 벤지가 왜 이단을 일사와 비교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이단에게는 일사처럼 공적인 명분도 없었음에도 첩보기관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벤지는 입가를 딱 굳히고 브랜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필경 이단 헌트의 비극적인 최후를 논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었다. 


  한편 루퍼트와 함께 MI6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을 위치의 일사는 다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카페로 돌아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벤지가 의자에서 솟아오르듯이 일어났다. 그가 일사를 붙잡았다. 


  “일사, 만약 당신이 미국 정보부를 궤멸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생각해봐요.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쓸 것 같아요?”


  “뭐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진짜 중요하다고요! 빨리요.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브랜트는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몸을 돌린 상태였다. 삽시간에 매우 복잡한 관심을 받게 된 일사는 어색해하면서도 두 사람이 원하는 답을 주었다. 


  “사실 한 나라의 중앙정보부를 위기로 몰아넣는 건 어렵지 않아요.”


  “…진심이에요?”


  “대중들에게 모든 것을 폭로하면 돼요. 정보국이 인권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는 자국민도 거침없이 이용하고 타락시킨 경우가 한 둘이 아니잖아요.”



* * *



  얇고 날카로운 물질이 주는 압박감이 버거웠다. 이단은 미간 근처까지 다가온 물체에 밀려 자연스럽게 머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의 눈동자에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이단은 결국 포기하여 눈앞의 종이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보았다. 그는 이태까지 미뤄두었던 포기의 기회들을 빠르게 소모하고 있었다.


  이단이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청사진이었다. 이단은 눈 사이에 몰려든 무거운 감각이 이마를 타고 머리 곳곳으로 흡수되는 걸 간신히 이겨내면서 청사진에 나와 있는 통로를 따라갔다. 이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냈다.


  “이게 어딘지 알지?”

  “…이건 못 해.”

  “내 용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단은 끝내 눈을 조금 오랫동안 감았다가 떴다.


  “어쨌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일이겠지.”

  “자네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보나?”

  “저긴… 들어갈 수 없어.”


  이단은 부국장급 이하의 요원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의 지하통제구역을 알고 있었다. 내부에 숨어 있던 테러 조직의 끄나풀을 유혹하기 위해 그곳에 침입해야 했던 역사는 마냥 영웅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나, 그 구역에는 이단이 당시 선택했던 자료가 아니라도 반체제적인 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문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단은 큰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켰다. 한 장짜리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가 났다. 어차피 이단에게 허락된 공간은 너무나 좁아서 그는 침대 위에서 왼편의 스탠드로 옮겨간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층빌딩을 질주했던 요원에게는 얼토당토않은 그 짧은 거리와 움직임이 이단의 기력을 앗아갔다. 


  남자는 계속 청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단은 최선을 다해 그를 외면했다.


  심연부터 탈진해가는 감각이 있다면 아마 이단의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것과 가장 닮아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단은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이 수면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혼신(魂神)이 가루가 되어 쌓여가는 기분은 저 남자가 주는 정체 모를 신호와 명령을 통해서만 잠시나마 해소되었다. 몇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단의 뇌리에 있었지만 이단은 그것이 탄생한 과정을 몰랐다. 


  “현재의 자네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이단은 정말이지 간신히 뒤를 돌지 않고 버텼다. 


  “자네에게 생긴 문제는 나만 알아. 그러니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법도 나만 알지 않겠나?”

  “…난 당신을 안 믿어.”

  “그렇지만 내 말을 완벽히 확인해보려면 자네는 통제구역에 갔다 와야 해.”


  남자의 언어가 취하고 있는 형식은 이단에게 낯설지 않았다. 이단이 솔로몬 레인으로부터 벤지를 돌려받기 위해 날렸던 반격의 한 수였다. 그것이 통하여 이단은 벤지를 되찾았고 레인을 체포했었다. 


  이단은 자신의 수법을 잃었고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단의 곁에는 그것을 토로할 동료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이단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줄 친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무력감에 고개를 숙였다. 


  청사진이 한 번 더 팔락였다. 자신에게 진정한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단은 결국 청사진을 받았다.



* * *



  브랜트와 벤지가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른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루터가 스캔한 ‘센티넬 프로젝트’의 파일을 완벽히 내려 받고, 지상에 있는 헌리 국장과 안정적인 위성 통화를 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한 둘은 그다지 넓지도 않은 비행기 안에서 잽싸게 흩어졌다. 지금 브랜트는 한창 헌리와 통화를 하고 있었으며 벤지는 타블렛으로 스캔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벤지는 파일들을 휙휙 넘겨서 그가 미처 미국에서 보지 못했던 부분에 집중했다. 센티넬이라는 걸 설계한 작자는 다행히도 제어장치보다 더 안정적인 무언가도 구상을 해 본 듯했다. 벤지는 약간 기대를 하며 내용을 읽었다.



  ‘센티넬’이 요원들에게 몇 가지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칩과 연결되어 있는 제어장치가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센티넬’이 전달하는 스트레스 신호가 요원들의 정신에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임무 종료 뒤에도 잔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그런 경우에 책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책이 ‘가이드’이다. ‘가이드’ 역시 ‘센티넬’처럼 인간의 몸에 정상적으로 주입이 가능한 마이크로칩인데, 따로 제어장치가 있지는 않으며 요원을 조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가이드’는 ‘센티넬’의 신호를 나눠 받는 보조 도구이다. 


  ‘센티넬’이 감당하는 신호, 혹은 그것의 잔상이 지나치게 강하고 제어장치로도 관리할 수 없을 때 ‘가이드’가 주입된 요원은 ‘센티넬’이 주입된 요원과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신호를 떠안고 상대방의 판단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한 사람에게 ‘센티넬’과 ‘가이드’를 모두 집어넣는 것은 효과가 없다. ‘가이드’는 아주 거칠게 말하면 ‘센티넬’이 발생시키는 부담을 현실적으로 떠안으면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이드’는 ‘센티넬’이 이식된 요원의 책임자, 혹은 그 요원과 짝을 이루는 파트너, 외부인 중에서 찾아야 한다면 요원의 아내나 가족 등에게 이식하는 것을 권한다.



  벤지는 자신의 행동이 별 효력이 없을 걸 알면서도 눈을 한 번 비비고 타블렛을 가까이 들었다. 당연히 활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벤지는 기가 막혀서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시간이 난다면 이 제안서를 작성한 인간을 찾아서 머리카락을 아프게 비틀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CIA의 비상식적인 잔인함에 다소 주의를 뺏겼던 벤지는 제안서의 내용을 곱씹어보다가, 말 그대로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뭐야, 벤지, 왜 그래?”


  통화를 마친 브랜트가 용수철마냥 뛰어오르는 벤지를 보고 한 발짝 물러났다. 벤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도리질을 치더니 급기야 저편으로 멀어졌다.


  벤지의 예상대로라면 이단은 나 홀로 센티넬을 주입받은 지경에 놓여있을 것이었고, 언젠가 그에게 ‘가이드’가 절실해지는 상황이 닥칠 것이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받는 자는 반드시 타인이어야 했으며 이단은 다수의 정보국을 노리는 범죄자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다.


  벤지는 그 자가 이단에게 절대로 ‘가이드’를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어쩌면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비밀에 부칠 거라는 가설에 자신의 비디오 게임 컬렉션을 걸 수도 있었다. 


  “벤지? 괜찮아?”

  “…아니. 전혀.”

  “그럼 너는 도착하면 쉬어. 이단이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는 팀 하나를 통째로 파견하지, 뭐.”


  멍하게 긍정을 표하려던 벤지가 정신을 차렸다. 


  “랭글리 말고 또 있어?”

  “워싱턴에 국가 문서를 관리하는 시설이 있잖아. 국장님은 거기에도 인력을 파견해야 할 거라고 하시는데? 거기에도 악당들이 눈독을 들일 게 많대.”


  말을 마치자마자 브랜트는 벤지의 놀라운 힘에 이끌려 털썩 의자에 앉았다. 벤지가 진지하게 타블렛을 브랜트 쪽으로 돌렸다. 그 덕에 브랜트도 그들이 구해야 하는 동료가 일촉즉발의 폭탄 위에 올라서 있다는 걸 실감하여 한동안 넋을 빼고 있었다.



* * *



  루퍼트 싱클레어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카페인에 예민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 커피로 인해 새벽 2시까지는 깨어있을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천천히 커피를 머금는 루퍼트의 앞에는 배터리가 꽂혀 있어 화면이 꺼지지 않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이단 헌트가 산탄데르 은행에 출몰하여 한바탕 건물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던 건 비극이었고 MI6의 실책이었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있었다. 영국 정보부 측은 감시 카메라가 오작동을 일으킨 시점들을 정밀히 파악하여 도굴꾼 같은 침입자가 본부에 머문 시각과 목표 등을 거의 알아냈음에도 그가 무엇을 노렸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이단 헌트의 출현은 바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공했다.


  파일이 복사된 흔적이 없었고 측정된 시간이 다소 짧았음을 고려하여 루퍼트는 침입자, 9할 이상의 확률로 이단 헌트일 그 범인이 상위 몇 개의 계좌 정보만을 외워갔으리라 추측했다. 이에 덧붙이자면 MI6 측에서 새로 정렬한 정보들의 맨 상단에는 영국의 은행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루퍼트가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남은 양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 노트북이 경보를 울렸다. 두 번째 습격이었다.


  아무리 체력 좋은 관광객이라도 아침을 다 날리지 않기 위해 침대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야심한 시각, 루퍼트 싱클레어는 도로를 질주하며 진압 팀의 선두에 섰다. 차들이 시끄럽게 급정거하는 소리에 몇몇 건물의 창문이 열렸다.


  회전문 주변에서 망을 보는 자가 있어 루퍼트가 방아쇠를 당겼다. 차에 탑승하기 전 자동권총에 달아 놓았던 소음기는 멋지게 제 역할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쓰러진 적의 몸이 요란하게 바닥과 부딪히면서 적들의 시선이 회전문 쪽에 집중되었다. 


  루퍼트는 은행 사설 경비가 앉는 데스크로 뛰었다. 놈들이 지폐 뭉치를 내려놓고 서둘러 무기를 잡았다. 루퍼트는 의자를 오른쪽으로 휙 빼고 자신은 정중앙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의자 바퀴가 끼익 밀리는 소리에 몇몇은 오른쪽을, 다른 몇몇이 한 번 뒤집어 생각해서 왼쪽으로 총구를 돌리는 사이에 루퍼트의 사격이 한바탕 적을 휘저었다. 게다가 절치부심한 기동대원들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과격함으로 삼면을 봉쇄했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해지자 루퍼트가 훌쩍 책상을 타고 넘었다. 그는 돈을 가장 열심히 챙기고 있던 남자의 헬멧을 벗겼다. 각진 턱이 인상적인 그 남자는 루퍼트가 찾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단 헌트는 어디 있지?”


  그는 그렇게 물으며 총을 더 똑바로 쥐었다.


  “이단 헌트는 어디 있냐고.”

  “혁명적 전환을 위한 자리에.”


  그러고 남자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루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맹신과 광기가 어우러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러한 악질적인 순교를 제일 싫어했고 혁명이란 위대한 단어를 더럽히는 족속은 더욱 경멸했다. 루퍼트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총소리 한 번 나지 않았는데 범죄자들의 몸뚱이가 하나 둘씩 풀썩 쓰러졌다. 그들은 입 안에 똑같이 피를 물고 있었다. 일종의 전언 같은 모습을 목도하면서 루퍼트 싱클레어는 저러한 족속들 사이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갇혀 있는 이단 헌트를 생각하고 말았다. 그는 소요를 변화의 움직임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그들의 분수에 넘치는 수단을 가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비행기는 워싱턴의 공항에 착륙한 뒤 승객을 태우지 않고 격납고로 들어갔다. 랭글리에는 보관소를 감시할 인원이 차고 넘친다는 벤지의 지적을 받아들인 브랜트는 벤지가 그 자신의 목적지로 마음에 두고 있던 워싱턴의 기록 관리청에 함께 가기로 했다.


  택시를 잡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벤지의 타블렛을 보았다. 벤지는 행여나 민간인인 택시 기사의 귀에 국가 기밀로 취급될 수 있는 정보가 흘러들어갈까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단을 뒷조종하고 있는 놈들이 원하는 건 통제구역에 있을 거야.”

  “…너도 그걸 알아?”

  “이단을 백업하면 이래저래 머리에 들어오는 게 많아. 나도 IMF가 예민하게 다뤄줘야 하는 요주의 인물이라고.”


  브랜트는 한숨을 쉬었다.


  “네 파일에 그 문장을 추가하도록 할게.”

  “역시, 믿음직한 부국장님.”


  그 말에 브랜트는 자신의 지위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앙정보국 내 독립기관의 관리인다운 눈빛을 띠고는 벤지에게 딴 소리는 집어 치우고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벤지가 헛기침을 하며 화면을 넘겼다. 


  “크흠. 통제구역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층에 뭐가 있는지는 관리청장만 알아. 그래서 두 곳을 전부 살펴봐야 해.”


  “알아. 그러니까 흩어져야지.”


  “흩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위급 상황 시에 우리가 재빠르게 한 장소로 모여서 행동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는 거야.”


  “어째서?”


  벤지가 두 손가락으로 내부 구조도를 확대했다. 


  “보여? 통제구역에는 비상계단이 없어. 한 층 차이라도 이동을 하려면 복잡한 인식 단계를 거쳐야 하는 중앙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해.”

  “젠장.”

  “그러게 말이야.”


  택시가 신호에 걸려 잠깐 멈췄다. 브랜트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링컨 기념관의 지붕이 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속삭였다.


  “위층, 아니면 아래층?”


  동료를 되찾을 수 있는 적기의 시작이 동전 던지기와 다를 게 없다는 현실에 벤지의 표정이 조금 우울해졌다. 택시는 부지런히 워싱턴 DC의 주요 명소들을 지나쳐 마지막 커브를 준비했다.


  벤지가 전부터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기록관리청의 건물이 훅 커졌다. 인도의 가로등들은 모두 켜져 있었는데 정작 관리청 입구에 세워진 기둥 모양의 전등은 깜깜해서 관리청이 상대적으로 새카맣게 보였다. 벤지는 출입구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미국의 국가 기관들 중에는 신전 같이 생긴 건물들이 참 많았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콘솔 게임과 동등하게 예술을 존중하는 벤지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단을 눈앞에 있는 석조 건물로 들여보내면서 벤지는 반쯤은 혼잣말로 그에 대해 불평을 했었다. 그러자 이단은 어쨌든 그것이 그 건물이 가진 최초의 모습이니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처음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서.


  벤지가 다른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브랜트가 만약을 대비하여 백업 팀을 불렀다. 정말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딱딱한 굽의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은 두 사람의 발소리를 크게 증폭시켜 사방으로 힘껏 던졌다. 온갖 비밀스러운 장치의 보호를 받고 있을 마그나카르타가 겉으로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고, 로툰다 형태로 조성되어 있는 정면의 공간에는 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성조기의 얇은 그림자를 둘둘 감고 있었다. 브랜트가 핸드폰으로 플래시라이트를 켜서 구석으로 쑥 들어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엄숙하게 동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는 그림을 지나쳐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일조차도 만만치 않아서, 벤지가 핸드폰으로 도식화된 코드를 받아 인식을 시키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그는 척척 두 개의 버튼을 눌렀다. 먼저 내리는 사람은 브랜트였다. 브랜트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기 직전 귀에 리시버를 찔러 넣었다.


  “네가 있는 층에 이단이 나타나면 무조건 지원을 불러. 알았지?”


  벤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브랜트가 사라졌다.


  성능 좋은 엘리베이터는 20초도 안 되어 벤지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벤지는 곧바로 문이 닫히지 않게 엘리베이터 사이에 발을 끼우고, 승강기 내부의 밝은 빛을 최대한 등에 업고 눈을 홱홱 굴렸다. 


  벤지는 임시 손전등이 된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 자신에게 이단 헌트가 어디에 나타나길 바라는지 질문했다. 이단이 ‘센티넬’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불우하고 위험한 인간이 되었다면 벤지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벤지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단이 했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IMF의 현장 요원에 불과했다. 그는 가이드가 아니었다. 벤지는 더 자세하게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답했다. 당장 이단에게 필요한 존재도 아니고, 몸싸움을 벌여서 이단을 막지도 못할 자신보다는 조금이라도 승산을 노려볼 수 있는 브랜트가 있는 위층이 여러모로 이단이 등장하는 장소여야 했다.


  벤지는 진심으로 자신이 흔드는 불빛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걸려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 소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이라고 벤지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필 왼쪽부터 차근차근 더듬어보자는 계획을 탓할 수 있는 인물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벤지 자신뿐이었다.


  그리하여 벤지는 자신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 혀를 찼다. 이단 헌트의 마른 동공이 갑작스레 나타난 빛에 의해 작아졌다. 


  “…이단.”


  순간적으로 벤지가 핸드폰을 든 팔을 아래로 떨궜다. 엉겁결에 빛을 맞은 이단의 재킷이 그만 벤지에게 무기를 노출하고 말았다. 벤지가 시선을 바로잡았다.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벤지의 앞에는 이단이 있을 것이었다. 벤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들은 네 자신을 되찾아주지 않아, 이단.”


  그 말은 아무런 계산 없이 튀어나간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단은 벤지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벤지는 빛을 감추며 핸드폰 단축키를 눌렀다. 기록관리청에서 2블록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는 팀에게 긴급 문자가 발송되었다.


  “…이단? 내 말 들었어? 난 너한테 뭐가 필요한 지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벤지는 적당한 때를 노려 다시 불빛을 앞으로 뿌리려 했다. 이단 헌트의 어둠은 고요했다. 벤지는 주춤거리다 마음을 굳게 먹고 빛을 들었다. 이단의 귓가에 거머리처럼 이어플러그가 붙어 있었다.


  이단이 소리 없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이어플러그를 보고 있던 벤지는 이단의 뜻을 읽지 못했다. 벤지는 한 발 늦었고 이단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단단한 표면을 가진 물체가 떨어졌다. 현장 요원인 벤지는 탄피가 떨어지는 걸로는 그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목을 약간 빼서 바닥에 떨어진 게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다. 


  작고 동그란 원통을 포착한 벤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단은 어느새 탁자 위를 쓸어 담고 있었다. 벤지는 속수무책이었다. 총성은 끝없이 이어질 듯했으며 이단은 자신의 말에는 한 단어도 덧붙여주지 않은 채 사라져버리려고 했다. 결국 벤지가 목구멍을 열었다.


  “이단, 넌 지금…!”


  하얀색 연기가 벤지를 덮쳤다. 벤지는 반사적으로 코과 입을 막고는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했다. 떨어진 물건은 어떤 가스가 들어있는 통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기가 퍼지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 총잡이들이 더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벤지는 아직 연기가 침범하지 않은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상태에서 벤지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단이 의미 없는 사격은 자신의 일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며 놀랍도록 짜증스럽고 고압적인 어투로 말했고, 벤지에겐 낯선 음성은 정보부 나부랭이가 죽지 않았다고 되받아쳤다. 그 날카로운 대화는 벤지에게 희망이 되어 날아왔다. 그는 슬쩍 그림자를 내밀어볼 작정으로 바닥에 붙은 엉덩이를 비볐다.


  경쾌한 효과음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지원팀은 보호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연기를 보고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았다. 단지 인위적인 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에 정석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아무리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피할 수 없는 찰칵거림에 벤지는 놀라 엉덩이를 뒤로 끝없이 물리다가 벽에 부딪혔다. 그는 더 이상 총탄과 연기를 모두 피할 수 없었다.


  이단이 살포한 것은 신경가스의 일종인 듯했다. 벤지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싶은 현기증에 몸을 까딱거렸다. 자신이 사지를 붙이고 있는 모든 세상이 흔들리는 괴팍한 감각 속에서 벤지는 특이하게도 이단이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는 걸 들었다. 벤지는 왜 이단이 화를 내는지 궁금했다. 가스를 뿌린 건 본인이었고, 설마 자신을 잡으려고 다른 팀이 대기하고 있었을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닐 터였다. 벤지는 이단이 화를 내지 않길 바랐다. 이단 헌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더는 나타나지 않아야 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벤지는 제어장치와 가이드의 보호를 모두 받지 못한 센티넬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이단 헌트 이전에 센티넬은 없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가이드가 없다. 벤지는 안타까움과 어지러움에 패배하여 의식을 놓았다.




Original Date 2015. 09. 09.



[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2)

- Anything 2016. 6. 23. 15:44 posted by Jade E. Sauniere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 & 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2. 의지를 잃어가는 자] 



  본 프로젝트는 요원의 충성도를 극대화하여 기관이 조직하는 임무와 그것의 성공 및 기밀 보장을 위해 최적화된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동안 기관의 주요 작전들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그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전에 몰매를 맞고, 그 외 다양한 이유로 중단되고 폐기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작전에 투입되었던 요원들의 변심 및 배신이었다. 이에 본 프로젝트는 현장 요원이 절대로 기관을 배신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 것이다.


  주요 장치는 ‘센티넬’이라고 가칭되며, 최첨단 신경과학 및 나노공학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생체 주입용 마이크로칩을 일컫는다. ‘센티넬’은 강력한 스트레스 신호를 통하여 요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끌어올리고,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기관에 대하여 어떤 도덕적․윤리적 판단도 할 수 없게끔 요원을 조종한다. ‘센티넬’의 제어장치는 그것이 이식된 요원의 책임자가 가지고 있도록 하며 명령어 입력 및 신호 변환 기능과 중지 기능을 갖추게 된다….


  다음 문단은 제안서를 검토한 사람이 달아 놓은 코멘트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본 프로젝트는 과학적 비현실성과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소지가 지나치게 많으므로 실행을 보류한다. 


  벤지는 CIA가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무효화하는 것도 아니고 실행을 보류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것만으로도 벤지가 그 뒤의 두툼한 서류들을 읽을 필요는 없어진 셈이었다. 벤지는 그 파일을 챙기기로 정했다. 


  “벤지?”


  브랜트가 출입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왔다. 벤지가 허겁지겁 파일을 닫으면서 음성으로 자신이 있는 쪽을 알렸다.


  “여기야!”


  브랜트는 단번에 벤지를 찾아냈다. 벤지는 브랜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고 나서 급히 상자들의 뚜껑을 닫았다. 


  “마침 잘 왔네. 브랜트, 우리가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일사가 이단을 봤대.”


  벤지가 바람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도로 뒤를 돌았다. 


  “뭐? 언제?”

  “24시간도 안 됐어. 장소는 런던이야.”

  “맙소사, 그럼 당장 가야지!”

  “표는 이미 준비해놨어. 아, 그리고.”


  벤지가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벤지가 오늘 브랜트에게 CIA가 흔적조차 남겨둬서는 안 되었던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솔로몬 레인이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군. 이단을 찾으라는 쪽지를 남기고 말이야. 덕분에 영국 정보부도 난리가 났어.”


  벤지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세탁되는 기분에 휘감겼다. 


  “…설마 이단이 죽인 건 아니겠지?”

  “그렇기야 하겠지만 우리가 장담할 수는 없지. 하여튼 15분 뒤면 출발이니까 준비해.”


  벤지가 입 안을 깨물었다. 그는 다른 상자들이 쌓여있는 틈에 문제의 파일의 윗부분이 약간만 보이도록 끼워 두고 브랜트의 등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 * *



  런던의 빈센트 스퀘어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근처에 학교와 크리켓 경기장 등을 끼고 있어 꽤 자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을 맞이하는 잔디 광장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브랜트는 일사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마음속으로만 품평을 했다. 


  브랜트는 벤지를 힐끗했다. 벤지의 입가가 이따금씩 씰룩댔다. 브랜트는 미국에서 벤지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기억했다. 브랜트는 혹시라도 일사가 오기 전까지 여유가 있을까 싶어 시계를 보았지만, 짙은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일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브랜트가 벤지를 툭 쳤다. 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벤지는 숨겨 두었던 액정 화면을 확인하더니 브랜트를 향해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내 몸에 수상한 장치는 달려 있지 않아요, 벤지.”

  

  그 말에 벤지뿐 아니라 브랜트도 무안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팔꿈치로 서로를 찔러만 대던 두 사람의 신경전은 부국장이라는 지위에 반쯤 굴복해준 벤지가 손을 홰홰 내저으면서 일단락됐다. 


  “…직업병이라고 생각해요.”


  일사는 변하지 않은 낯빛을 두 사람이 볼 수 있는 경로를 지나 그들의 오른쪽 벤치에 앉았다. 브랜트가 입을 열었다. 


  “더는 당신이 MI6에서 일하는 요원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모르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어요. 속으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걸 당신과 공유하고 싶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당신이 우리 쪽에 보다 더 확실한 협력을 제공할 건지 알아야 합니다.”


  일사는 다리를 꼬고 잔디를 바라보았다. 


  “내가 MI6를 도울 것 같나요?”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IMF 내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와 제 개인적 입장을 모두 고려해도 저는 영국보다는 일찍 이단과 만나서 사태를 되도록 이단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해결을 보고 싶습니다.”


  “MI6가 이단을 확보하면 그가 위험해지다고 보는군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벤지는 어쩐지 자신이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고 여겼고, 덕택에 입술에 힘을 주고 있느라 콧바람을 뿜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일사가 마침내 시선을 옮겼다. 


  “상당히 정치적인 화법을 쓰는군요. 저도 가급적 이단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요. 그가 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럼 간단하게 설명 드리죠. 이단이 마닐라로 파견을 나갔을 당시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그 뒤로 이단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런던에서 이단을 봤다던 그 날에 MI6 국장이 솔로몬 레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건 현장을 수색했고, 이단을 찾으라는 친필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그 때문에 MI6에서는 이단이 레인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국장실에서는 침입자의 흔적까지 나왔다더군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영국 정보부 쪽에서는 심증으로 범인을 이단이라고 지목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이단을 데리고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저희와는 의견이 다르죠.”


  브랜트는 말을 마치고 턱을 약간 들었다. 남자아이 하나가 잔디에 낀 공을 잡으러 오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로 인해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번 일사가 교차해놓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이단이 우리에게 단서를 줄 거예요.”


  일사가 일어나자 브랜트와 벤지도 잽싸게 엉덩이를 뗐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했다면서요. 마닐라에서 사라진 뒤 이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한테도 연락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요?”


  “IMF의 추측이 맞든, MI6의 추측이 맞든 상관없이 이단이 가는 곳이면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질 거예요. 거기서 우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고요.”


  일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렌 소리가 잠잠하던 공원을 휘젓고 갔다. 벤지가 중얼댔다.


  “감이 좋으시네.”


  세 사람은 한 마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4차선 차도를 전속력으로 뛰어넘은 뒤 인도를 쭉 내달렸다. 유스호스텔이나 비즈니스호텔들이 많은 지역이라 주변은 런던답지 않게 조용했고, 경찰차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쫓아가는 거냐는 벤지의 외침에 일단은 차를 따라잡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띄엄띄엄 말하는 일사의 목소리가 소음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셋은 중간 규모의 교회에 다다라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느 쪽?”

  “아니,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요?!”


  미국인 둘의 숨찬 질문을 받는 유일한 영국인의 표정이 복잡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대학들이 몇 개 있고,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빅토리아 역이 나와요.”

  “워, 잠깐.”


  벤지가 두 손을 들고 브랜트와 일사의 사고를 막았다. 


  “경찰차 말고 특별 기동대가 울리고 다니는 소리도 나는 것 같은데요?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는 안 났으니까, 대형 인질극이라도 생겼나?”


  특별 기동대가 출동 시 타고 다니는 방탄 차량은 일반 경찰차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사이렌 소리를 갖고 있었다. 벤지는 손가락을 들면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었다. 사방이 점차 소란해졌다.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일사가 다시 달렸다. 벤지가 준 두 가지 단서는 노골적으로 빅토리아 역 부근의 산탄데르 은행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이단 헌트는 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혈관 하나하나가 휴식을 원하는 걸 너무도 절절히 느꼈다. 훈련받은 이들도 불가능하다며 손을 내젓는 현장에 셀 수도 없이 투입되었었던 과거를 돌이켜봐도 자신이 이토록 주저앉아 쉬고 싶어 했던 때가 없었다.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약물 성분 없이 몸 안을 도는 깨끗한 피와 누구도 그의 수면시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조용하고 푹신한 침대, 그저 수고했다는 동료들의 말과 무언가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이라는 소박한 대가만을 가지는 임무,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그리웠다. 언제나 이단의 절박함을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소중한 이들이 그에겐 절실했다.


  그러한 이단의 쓸쓸한 감상은 귀에 꽂혀 있는 이어플러그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단은 버텨보려 했지만 뒤쪽에서 몰려드는 무장한 인원들마저 그를 방해했다. 그는 여전히 손을 붙이고 있었고, 이단의 앞모습을 볼 수 있는 은행의 여직원이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으며 이단을 향해 고개를 모로 젓고 있었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죽이지 말아주세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들어!”


  경찰인지 기동대 대원인지 모를 남자가 이단에게 윽박질렀다. 여직원은 이단의 허리에 꽂혀 있는 총을 보고 있었다.


  “손들라고 했어!”


  여자가 또 이단에게 말을 걸었다. 제발 절 죽이지 마세요. 이단은 두 번 그녀를 무시할 수 없어 역시 소리 내지 않고 답해주었다. 책상 밑에 숨어요. 


  이어플러그 너머의 음성은 머리끝까지 지쳐버린 이단에게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이단은 돈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놓았다. 여직원은 그것을 신호 삼아서 책상 밑으로 들어간 다음 의자를 당겨 틈을 좁혔다. 그녀는 등받이와 팔걸이 사이의 빈틈으로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의 눈빛이 돌변하는 걸 목격했다.


  이단이 총을 잡은 순간 은행의 정문 유리가 박살났다. 예상치 못했던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경찰들이 반은 뒤로, 반은 정면을 향한 채 나뉜 틈에 이단은 완벽하게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이단이 쏜 총알이 기동대 대원의 헬멧 앞부분을 깨뜨렸다. 이단 헌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대원을 죽이려 한 것이었다.


  이단이 사격을 행할 기회를 준 사람들은 기동대와 거의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방탄복을 입지 않은 경찰들부터 처리했다. 각지에서 관광 혹은 공적인 업무를 보러 온 이들을 어렵지 않게 수용하던 산탄데르 은행의 로비에 죽은 자들이 빠르게 쌓여갔다. 


  “지원을 요청해야 해!”


  돌기둥 뒤에 숨은 대원이 내뱉었다. 그 말은 이단에게는 한 자루의 총이 모자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양손에 권총을 쥔 이단 헌트가 앞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기둥 뒤에서 시간을 벌며 백업을 부르려던 기동대원은 차갑게 불타고 있는 병기의 눈동자를 본 걸 끝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의 얼굴은 까맸고 동시에 무척 빨갰다.


  기동대원들은 수적으로 밀린다는 현실을 타개해보려고 구조물 여기저기에 숨어서 그들의 본부로 연락을 넣으려 발버둥 쳤다. 계단의 난간이나 자동인출기 옆 등등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그림자 뒤에는 모두 이단 헌트의 적이 있었다. 이단은 그저 이태까지 몸이 학습한 대로 적을 처단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탄창을 갈았다가 더 이상 자신이 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걸 인식하고 총을 집어넣었다.


  이단은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가 이단이 내려놓았던 가방을 대신 들었다. 


  느닷없이 총성이 연장되었다. 이단은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을 대신해 가방을 챙긴 남자를 쏴버렸음을 깨달았다. 시각이 받아들이는 정보만으로는 기동대원들과 다를 게 없는 남자들이 이단을 응시했다. 이단은 스스로 가방을 들었다. 그는 실상 자신이 왜 총을 쐈는지도, 왜 그 가방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오,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난 것 같은데?”


  브랜트가 유리 조각들이 즐비한 은행의 입구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근소한 차이로 브랜트 뒤에 있던 벤지가 그를 추월하며 은행을 향하여 돌진했다. 브랜트는 벤지의 필사적인 속도에 반사적으로 가슴을 뒤로 뺐다.


  “워, 벤지, 잠깐!”


  브랜트는 벤지를 쫓았고 일사는 어떤 전조도 없이 찢겨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지 마요! 위험….”


  2층짜리 은행 건물의 정수리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일사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귀를 막았다. 


  벤지만이 은행 주변의 블록에 더해 빅토리아 역이 통째로 얼어붙을 것만 같은 재앙 속에서도 악을 쓰고 있었다. 


  “이단!!”


  벤지는 시신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몸을 겨우 추스르고 소리 높여 이단을 찾았다. 끔찍한 이정표와 같이 바닥에 흩어진 시신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형태로도 이단이 없었다. 벤지는 아주 긴 고함을 내지를 것 같은 안색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위에서 매우 수상쩍게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에게 붙잡혀 휘청거리고 있었다. 벤지가 오른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로프를 타고 헬리콥터까지 올라가는 누군가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였고 자신에게서 사라지려고 하는 그림자가 이단 헌트라는 확신에 붙잡혀 있었었다. 새로운 시체가 또 다시 벤지의 신발에 무게를 더하기 전까지 그러했다. 벤지는 자신의 신발코에 척 손을 올리고 있는 이름 모를 남자를 본 뒤에야 자신이 정말로 잔혹한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마치 그 인식에 대한 값을 치른 것처럼, 벤지는 이단이었을지도 몰랐던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벤지는 하다못해 이단을 믿기에 그를 구할 거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도 없이 주변은 그렇게 조용해졌다. 


  일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벤지와 그의 뒤를 지키고 있는 브랜트로부터 잠시 벗어나 다가오는 아우디에 시선을 주었다. 


  “…일사?”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일사의 이름을 불러놓고도 그녀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듯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루퍼트.”

  “아직도 신디케이트에 대한 조사를 하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친구를 도우려고요.”

  “하필 신디케이트가 구상될 당시 자금줄 중 하나로 지정된 곳에서 말입니까?”


  벤지를 달래 현장에서 함께 나오려던 브랜트의 시야에 일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수석분석가를 지낸 브랜트는 어렵지 않게 일사의 상대를 알아보았다. 그가 벤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벤지, MI6 특수요원이 왔어. 어쩐지 우리한테 자초지종을 물을 것 같은데, 이단이 영국 은행을 털었다고 사실대로 얘기해?”


  벤지의 표정은 정말 오묘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리 모두의 동료에 관한 이야기잖아. 나 혼자서 정할 수는 없지.”


  동그랗게 모인 입술이 약간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벤지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벤지는 여전히 동그랗게 말린 입술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어쨌든 우린 이단의 신병을 확보해야 해.”

  “나도 정확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브랜트가 날쌔게 방향을 틀었다. 공연히 당황한 벤지가 눈으로 브랜트를 따라갔다. 


  “싱클레어 요원? 반갑습니다. IMF의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브랜트는 대뜸 먼저 손을 내밀고 이어서 대사와 얼굴로 루퍼트 싱클레어 요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루퍼트는 퍽 당황한 모양새였다. 


  “…여기서 IMF의 부국장님을 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만.”

  “이 은행을 습격한 범인이 우리 쪽 요원이라면 당연히 제가 나서야죠.”


  평상적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중 안면에 급격한 굴곡이 생긴 것은 물론 루퍼트 쪽이었다. 일사는 잠자코 있었지만 브랜트의 대처법이 의외로 직선적이라는 감상을 눈빛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브랜트는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루퍼트의 손을 놓았다. 


  “전 이단 헌트를 잡는 데 IMF와 MI6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Original Date 2015. 09. 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