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he King's Speech & The Imitation Game Crossover Fanfiction
- Stewart Menzies/George VI
- To My Bloody Smart Valentine
- Written by. Jade
Sundown Project
앨런 튜링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부스럭대는 움직임으로 시계를 끌어왔다. 새벽 3시 40분이었다. 시계를 엎어 놓은 앨런은 이번엔 라디오를 끌어당겼다. 정규 방송은 오전 1시 경이 되면 종료되므로 라디오에서는 희미한 잡음만 흘러나왔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앨런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종이 하나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는 피곤했고, 그래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방송이 흐르지 않는 채널의 적막함을 이용하고 있는 일련의 규칙성 정도는 포착할 수 있었다.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앨런이 어느 순간 연필을 놓았다. 4분이 지나 있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꽉 짜여 있는 미지의 법칙이 앨런의 의식에 동력을 불어넣었다.
앨런은 두 번째 서랍에 들어 있는 쪽지들을 꺼내 방금 작성한 메모와 같이 정렬했다. 대략 종이 한 장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암호들이 토막 난 채 줄을 잇고 있었다. 앨런이 깨끗한 종이를 찾아 책상을 더듬었다. 무엇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앨런은 잠시 정지해 있다가 곧 하던 일을 계속했다.
1940년 9월, 영국의 가을은 시원하지도 화창하지도 않았다.
⁂
앨런이 그 암호를 들은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발단은 여군들이 처음으로 독일군의 메시지를 가로채는 시각이 오전 6시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군인들은 수없이 많고 그들은 당연히 하나로 통일된 시간에 잠들지 않는다. 앨런은 오전 6시 이전, 영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심연보다 깊은 영역에 파묻혀 있을 독일군의 작전을 알고 싶었고 그래서 잠자리에 라디오를 놓아두기 시작했다. 백색 소음은 주변의 자잘한 소리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숙면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런 말소리도 나지 않는 라디오를 곁에 끼는 것은 앨런에게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앨런조차 자신이 라디오를 켜놓고 잠들기 시작한 최초의 이유를 잊어갈 때 즈음 앨런은 특별한 소음을 들었다. 그것이 8월 둘째 주의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호를 푼 적이 있는 앨런에게는 그저 살짝 시간을 요하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았는데, 여군들의 장비 없이 두 가지 소음을 분리해내는 것이 껄끄러웠다. 앨런은 완벽하지 않은 암호문을 약 5일에 걸쳐서 풀어나갔다.
새벽 5시 20분, 앨런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방에서 나갔다. 그의 크리스토퍼를 비롯해 모두가 잠잠했다.
앨런의 팀이 사용하고 있는 창고의 뒤뜰에는 벌써 스튜어트 멘지스가 와 있었다. 앨런을 발견한 멘지스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다 풀었나?”
“독일군이 버킹엄 궁을 목표로 한 두 번째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앨런이 해독된 암호문을 건넸다.
“끈질긴 놈들이군.”
“서서히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판단이 들 시기니까요. 단숨에 수장을 제압하는 것만큼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가져다주는 방법은 없잖습니까.”
“…맞는 말일세.”
멘지스는 불쾌해하지 않고 덤덤히 앨런의 말에 동의했다. 앨런 튜링만의 다소 독특한 화법에 관해서는 멘지스도 나름대로의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가서 눈 좀 붙이도록.”
“폐하는 대피시키실 거죠?”
앨런이 물었다. 그의 물음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고려해 볼 때 당연히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멘지스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네.”
앨런은 음성으로 표현된 암호를 만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폐하는 끝까지 궁에 남으려고 하실 거야.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가족 분들을 설득하시겠지.”
“정작 폐하는 대피하지 않으시고요?”
“아마도.”
앨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멘지스는 이것만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앨런은 예나 지금이나 농담을 모른다는 대단히 이성적인 안색을 띄워 올리면서 멘지스의 추측에 대한 단평을 내놓았다.
“정말 훌륭한 폐하시긴 한데, 정작 그 분께서 돌아가시면 이 모든 상황이 수포로 돌아갈 텐데요.”
멘지스가 살짝 웃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나 같은 인간이 있는 걸세. 다시 연락 주게.”
멘지스는 코트 깃을 정리하면서 들판을 밟았다. 앨런은 잠깐 멀어지는 멘지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가 등을 돌렸다. 유독 인간에 대해서 둔감한 앨런은 마지막 응답이 실렸던 멘지스의 목소리에 낯선 억양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을 뿐,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튜어트 멘지스가 자신의 직분을 져버릴 인물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으므로 앨런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
애석하게도 멘지스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간격으로 밀려들어오는 전투 결과들과, 그보다 더 짧고 빠르게 엄습하는 폭격음에 지친 국왕은 눈두덩을 꾹꾹 눌러대면서도 고집을 세웠다.
“부인과… 내 아이들을 부탁하겠네.”
“지금 제가 폐하께 권하는 것은 도망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폭격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궁으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여길 벗어날 수 없네.”
멘지스는 가까스로 국왕 앞에서 한숨을 쉬는 예의 없는 행동을 회피해냈다.
“폐하가 혹여 잘못되신다면 이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겁니다.”
“내가 자, 자네에게 일러두고 싶은 건 다 말했어.”
눈가에 머물러 있던 국왕의 손등이 미간과 이마까지 훑고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몹시도 피곤해보였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얄팍한 특권들을 누리는 대가는 너무도 컸다. 멘지스는 차마 입술조차 깨물지 못하고 국왕의 단호한 눈동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만 가보게.”
결국 멘지스는 자신의 국왕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
멘지스는 왕비와 그녀의 품에 안긴 두 명의 자녀를 국왕을 위한 방공호로 안내했다. 어린 공주들은 왜 아빠는 우리랑 같이 가지 않는 거냐며 혼잣말 하듯 질문했다. 이에 멘지스가 답변하기를 꺼려서, 엘리자베스 왕비가 대신 국왕의 의지와 그의 신념을 쉬운 말로 설명했다.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남자는 또 다시 해군 제독의 정복을 걸쳐 입고 버킹엄 궁의 집무실에 있었다.
멘지스가 벙커 제일 깊숙한 곳의 문을 닫았다. 그는 조용히 독일 공작 대원들을 몰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 날 밤, 버킹엄 궁의 지붕 반쪽이 부서져 내렸다. 집무실은 무사했으나 거의 방치 중이었던 국왕의 침실이 주저앉았다. 멘지스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앨런, 자네가 도와줄 일이 있네.”
⁂
“…모험입니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모험은 계획이 될 수 있어.”
“구하려고 하는 사람을 미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까? 영국 정보부의 전략은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을 벗어나나 보군요.”
앨런의 질책이 따끔했다. 멘지스는 표정을 더욱 굳히면서 단언했다.
“딱 한 번이야. 그 이후로 놈들은 버킹엄 궁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할 걸세.”
멘지스의 손에는 아직도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앨런은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멘지스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리다가 팔을 뻗었다. 필경 멘지스는 앨런이 봉투를 받기 전까지, 심지어는 앨런이 뒤를 돌아도 그것을 들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 거짓 정보를 독일 측에 흘리면 되는 겁니까?”
“그렇네.”
“버킹엄 궁 근위대원들의 교대 시간을 독일이 오해할 수 있게끔요.”
멘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국왕 폐하를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껏 버킹엄 궁의 폭격을 예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암호들과 유사한 형태가 여전히 새벽녘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다른 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자네의 노고는 늘 고맙게 여기고 있네.”
“암호문이 완성되면 또 알려드리도록 하죠.”
멘지스는 앨런을 먼저 보냈다. 그는 의도적으로 밤바람을 맞았다. 얄팍한 희망도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계획안에 녹여낼 수 있는 천재 해독가는 여러모로 멘지스의 구원투수였다. 그는 다소 도박적인 그림에 기반하고 있는 이 작전을 앨런 튜링이 튼튼하게 뒷받침할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
낯익은 잡음에 앨런이 기지개를 켰다. 그가 버릇처럼 시계를 끄집어왔다. 늘 보던 모양의 눈금이 아니었다. 새벽 1시 45분. 이르고 기이한 숫자에 앨런은 자신이 파악해야만 하는 변화점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잡음은 2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든 앨런이 입술과 손을 동시에 움직여가며 암호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냈다.
“…맙소사.”
앨런이 다급하게 일어났다. 의자와 책상이 부딪히면서 펜이 굴러 떨어질 뻔했다. 앨런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시간에는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뛰었다.
“스튜어트 멘지스 경 부탁합니다. 급한 용건이에요. 거기 있죠? 이 상황에서 퇴근할 양반은 아닐 텐데.”
—…본부에 계시긴 합니다만 멘지스 경께서는 이제 막 잠자리에 드셨는걸요.
“그럼 깨워요! 국왕 폐하에 관한 일이란 말입니다, 빨리요!”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교환원도 앨런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머리가 깨끗해짐을 느꼈다. 잠시 후 멘지스가 답했다.
—앨런? 무슨 일인가?
“당장 버킹엄 궁으로 가요. 당신의 그 계획이라는 게 엉켰습니다.”
—뭐라고?
앨런이 불안하게 전화선을 쥐면서 외쳤다.
“그들이 거짓 정보를 믿지 않았어요. 근위병들이 교대하는 그 3분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암호문은 내부의 공작원들에게 조지 6세를 암살하라는 지령이었습니다. 서둘러요!”
스튜어트 멘지스가 독일군에게 버킹엄 궁이 비는 시각이라며 귀띔해준 숫자는 오전 1시 24분이었다.
국왕을 습격하기 위해 조직된 독일군 특수부대가 올 거라는 첩보에 바짝 긴장해 있던 근위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근위병들의 교대가 진행되는 건 1시 57분이었다. 근위병들은 아직 오지 않은 적들을 기다려야 하는지, 관례와 규율을 준수하여 겨우 눈곱을 떼어내고 있을 동료들에게 성문과 궁을 내어줘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통화는 끊어졌으나 앨런 튜링은 곧바로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 했음에도 그는 불안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블레츨리 공원에서는 버킹엄 궁이 보이지 않았다. 스튜어트 멘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멘지스는 모든 것을 무시하며 달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버킹엄 궁을 테러했을 때부터 영민한 독일군들에게는 전략이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영국의 상징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영국군의 사기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다가, 두 번째 타격으로 국왕을 제외한 상당수 인원을 궁전에서 탈출하게끔 만든다. 독일 측은 미국 여자에 눈이 먼 형과 자신의 개인적인 단점까지 극복해낸 저 끈질긴 왕이 쉽게 약한 모습을 내보일 만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으리라는 걸 간파했다.
결론적으로 버킹엄 궁은 조지 6세와 그를 호위하고 위한 병력만이 남아 있는 다소 고요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독일군의 타깃은 조지 6세였다. 태양의 핵심을 저격해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원들이 신속하게 발을 놀렸다.
본디 태양은 밤과 싸우지 않는 법이었다. 멘지스는 너무도 섣부르게 그 진리를 뒤집어 버렸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영국의 빛이 져버리는 것은 멘지스의 생명이 유지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격수들과 그를 막으려는 단 하나의 남자가 대치를 위하여 궁전으로 집결했다.
조지 6세의 손이 자유로워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국왕은 잉크와 종이 냄새가 밴 손끝을 한 번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침실이 무너진 시점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리웠다. 국왕은 무거운 제복의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어둔 뒤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오래간만에 영국의 밤하늘이 까맸다. 총탄과 굉음이 몇 번인가 빚어냈던 부조리한 백야 현상이 오늘만큼은 몸통을 수그릴 모양이었다.
1시 55분, 태양을 겨냥한 공작부대의 저격이 개시되었다.
멘지스는 궁의 최전방 정문을 지켜야 하는 근위병이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총을 뽑아들었다.
“기습이다!”
궁의 내부는 벌써 아수라장이었다. 두꺼운 헬멧과 묵직한 보호구들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독일의 특수부대원들은 비슷한 숫자의 근위병들을 압도했다. 멘지스는 중앙 계단에서 힘싸움을 벌이고 있는 놈의 뒤통수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얼떨결에 타인의 피를 이마에 묻힌 근위병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폐하의 집무실로!”
근위병은 자신의 모자도 내팽개치고 네 발로 계단을 올랐다.
“기습이다! 독일군의 기습이다!”
“폐하를 지켜!”
근위병들은 궁 어딘가에 있을 그들의 지도자가 몸을 숨기길 바라면서 억지로 큰 소리를 냈다. 멘지스는 문득 자신의 코트 자락이 매우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걸 벗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는 단 3분만 자신의 빛을 보호하면 되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멘지스는 이번엔 독일군 한 명의 다리를 맞추었다. 그러나 둔탁한 보호구 때문인지 관통상을 면한 적은 뒤를 돌아보고는 그들만의 거친 억양을 내지르면서 멘지스를 가리켰다. 멘지스는 옆에 쓰러져 있던 근위병의 칼을 뺏더니 망설임 없이 그것을 던졌다. 독일군의 머리 중앙에 날카로운 구멍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멘지스가 뺏어서 쓸 수 있는 칼이 많았다. 그가 냉철하게 눈을 치켜뜨고 앞으로 내달렸다. 궁의 후문 쪽에 있던 근위병들이 홀에 도착했다. 그러자 독일군들은 한 가지 묘책을 발휘했다.
사실 전장에 배치되는 저격수는 대개 소수다. 부대원들은 최고의 스나이퍼를 몸으로 가려주면서 영국이 영원한 석양이 지도록 만들어달라는 뜻을 전했다. 선택받은 단 한 사람의 저격수가 몸을 돌렸다. 멘지스는 벌써 네 명 째 독일군의 머리통을 꿰뚫고 있었다.
스나이퍼는 아주 조심스럽게 조지 6세의 집무실로 접근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말아 쥔 최후의 총잡이가 확 손잡이를 잡아 빼면서 온몸으로 문과 충돌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길쭉한 조각을 흩뿌렸다.
조지 6세는 책장 뒤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는 소란을 감지하자마자 제일 먼저 꺼내들었던 총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안에 들어있는 탄환은 일곱 발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바닥을 천천히 압박하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했다. 그가 팔을 서서히 옆으로 틀었다. 하나, 둘, 왕좌에 오르는 것조차 원치 않았던 남자는 살인을 준비하기 위한 셈을 중얼거렸다.
셋.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총성이 아니었지만 국왕은 개의치 않고 총구를 앞으로 뻗었다.
“…멘지스.”
옷이 잔뜩 찢어진 스튜어트 멘지스가 손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폐하.”
멘지스는 정중한 음성과는 달리 매우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스나이퍼가 쥐고 있던 총을 발로 쳐냈다. 긴장해 있던 국왕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시, 십년감수했군.”
“괜찮으십니까.”
“다행히도 그렇네. 자네, 정말로 적절한 때에 나타나 주었어.”
멘지스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화가 난 기색이었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 기회에 폐하를 노리는 적들을 완전히 척결하려고 했었습니다. 거짓 정보로 그들을 유혹한 뒤 모두 잡으려고 했죠.”
“…여기서?”
잔당들을 처리한 근위병들이 앞 다투어 국왕의 집무실로 밀려들었다. 이리저리 베이고 구멍이 난 코트에 손을 닦고 있는 정보부의 간부 앞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국왕이 서 있었다. 조지 6세는 가벼운 손동작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무사함을 알렸다.
“절대로 폐하를 이런 곤경에 빠뜨리려던 의도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젠장….”
뒤편의 근위병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공중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국왕이 근위병들에게 눈짓했다.
“당신이 더 이상 죽음과 붙어 있는 꼴을 참을 수 없어서 그만 성급하게 굴었습니다.”
“멘지스.”
“죄송합니다, 폐하.”
새벽이 흘러가는 속도는 진실로 느릿해서, 장막 뒤편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해가 기어코 하품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빛은 오지 않았다. 고개 숙인 멘지스는 자신의 후각을 괴롭히며, 나아가서는 이 공간에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 될 피 냄새만을 느꼈다. 침묵하는 조지 6세에게서는 태생적인 기품을 제외하면 어떠한 기류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가치를 만족할 수 있는 상징적인 절대성은 태연하게 화약 냄새와 텁텁하고 비릿한 향들을 맡았다. 국왕이 입을 열었다.
“날 구해줬으니… 그걸로 됐네.”
국왕이 책상 위에 총을 내려놓고 멘지스에게 다가왔다.
“내가 죽음과 붙어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폐하가 한사코 피신을 거부하셨잖습니까.”
“그럼 오, 오늘 일도 내 탓인가?”
멘지스가 정말로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반응했다.
“젠장, 그게 당신 탓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조지 6세는 잠시간 그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꿨다. 사라진 빛의 그림자에 멘지스가 놀란 새에, 국왕은 완전히 가치가 추락한 멘지스의 코트를 아래로 당겼다. 한낱 천조각에 지나지 않는 코트에 의지하고 있던 멘지스의 상체에는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자네를 붙잡고 있으면 자네가 죽는 건 아, 아마도 내 잘못이겠군. 가보게.”
“폐하.”
“이런 것까지 명령하고 싶지는 않아.”
“…사과는 안 받아주실 겁니까.”
이에 조지 6세는 멘지스가 언제나 경애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문지방을 떡하니 가리고 있는 시신을 슬쩍 피해서 자신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불렀다. 멘지스는 점차 색깔이 변해가는 자신의 셔츠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국왕의 측면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국왕은 멘지스의 곁으로 즉시 돌아오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가 잘 졉혀져 있던 손수건을 몇 장 꺼냈다. 멘지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네도 직접적인 표현은 즐겨 쓰지 않으면서.”
자신이 상처를 감아주는 행동을 재량껏 해석해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멘지스는 국왕의 한 마디를 단순한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방이 그것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정보는 흘리지 않는다는 태도는 정보부에서 활동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위대하지만 수줍음을 타는 국왕은 멘지스가 자신의 빛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도 애써 만족해하며 자신을 위로해왔고, 그의 그림자마저 찬미를 거듭할 준비가 되어 있는 멘지스는 그저 국왕이 대답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핑계를 들어 언어와 행동을 모두 아낀 채 무형의 애정만을 보냈다. 국왕과 자신만이 공유하고 있는 오래된 역사를 떠올린 멘지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매듭이 멘지스의 팔을 수호했다. 손수건의 끝자락을 묶으면서 그만 국왕의 손가락에 피가 묻었다. 국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멘지스의 코트가 저절로 몸을 들썩였다.
이윽고 의사가 시체를 보고 한 번 화들짝 놀란 뒤 방으로 들어왔다. 국왕이 자리를 비켜주었고 멘지스가 살짝 얼굴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의 웃음을 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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