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ver/본브루스] Blue Ocean Floor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9 posted by Jade E. Sauniere

- When Bruce Wayne finds his hope

- Original Date 2016. 08. 18

- Written by. Jade


Blue Ocean Floor




Piano cover of Blue Ocean Floor originally by Justin Timberlake

Cover by The Theorist





  배의 머리에 매달린 작은 종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항구에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루스는 물길을 이용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한 생명의 씨앗은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생하며 그밖에도 숨을 쉴 줄 아는 모든 것들은 물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어린 브루스 웨인이 장례식장을 뛰쳐나오다 곤두박질친 곳도 우물 안이었다. 물은 시작점이었다.


  마치 그 진리의 연장선처럼 브루스 웨인이 맑은 눈의 암살자를 만난 것도 바다에 떠 있던 요트 안이었다.


  딴생각을 하다가 브루스는 자신이 종소리가 울린 횟수를 얼마나 세었는지 잊어버렸다. 물론 종소리를 헤아린 것도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장치였기에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열리며 종의 울림에 다시 숫자를 붙여 주었다. 하나. 브루스는 종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것은 종소리를 하나의 걸음처럼 삼고 있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물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기보다는 끝에 더 가까웠다. 물은 냉정하게 무언가를 죽이기도 한다. 그는 물 속에서 죽어간 사람을 보았고, 그 외에도 물이 아주 많은 걸 없앨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바로 물 속에서 데이비드 웹이라는 남자가 지워져갔고 그의 기억이 부식되었다. 아무런 인정도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물의 흐름엔 너무나도 많은 종결이 묻어 있었다.


  그가 서 있는 판자 아래에서 찰랑이고 있는 물에는 데이비드 웹이 없었다. 거기에 흘러가지 않은 이름들이 몇 개 존재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들은 모두 똑같았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에 붙어 있는 종이 울리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는 거기서 마땅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12년의 고뇌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이후로 본은 무엇의 의미를 수색하는 일을 쉽게 단념하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 양면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사물의 존재나 형태 자체를 역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12년을 돌아 본은 그것을 깨달았다.


  총을 쥔 자는 다시 배 위에 올랐다.


  브루스는 언젠가 선상 위의 암살 사건으로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던 하루를 더듬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게감도 없는 지루함이었다. 브루스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잠을 자려고 비어있는 선실로 들어갔었다. 그는 확실히 어느 순간까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연스럽게 닫히려고 하던 눈동자를 열었다. 그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브루스가 고개를 젖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옛날과는 다르게 그는 똑바른 시야에서 자신을 향하는 총을 목격했다.


  종이 울렸다.


  브루스 웨인은 총을 보면서도 종을 생각했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그걸 배에 매달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군번줄을 걸어둘 수가 없어 다른 금속성의 물체를 고른 것 같기도 했다. 본은 맨 처음에 브루스에게 군번줄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그 뒤에 자신이 기관의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버렸었다고 밝히긴 했지만, 본은 데이비드 웹의 증표를 잃어버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직 암살자가 털어놓은 최초의 인식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뜻밖의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 브루스는 총을 지나 한 명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학습했으면서도 그걸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자가 보였다. 과거를 결코 자의에 의해 버렸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이 순수를 엿보았던 몇 안 되는 남자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제이슨."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졌다. CIA가 키워낸 최고의 암살자라는 인물이 감행한 행동치고는 무척 비논리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브루스의 시야에 포함되지 않았던 총구가 불쑥 나타났으나 브루스는 개의치 않았다.


  약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이비드 웹의 군번줄과,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었던 제이슨 본의 노력을 떠올렸다. 


  "당신은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지. 나도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고 있어."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물의 표면에서 브루스 웨인은 길을 논했다. 그들이 최초로 만났던 요트는 다른 선택을 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브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물 속에서 그대는 크게 소리치지만 침묵이 그대를 감싸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걸 들었어

그대가 깊이 낙하해도 나는 그대를 찾으리

나의 붉은 눈동자가 더는 그대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색 소음 속에서 그대를 듣지 못해도


그대의 맥박을 보내줘

그러면 나는 푸른 바다 층으로 가리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

그 푸른 바다 층으로

[Crossover/본브루스] In a Dreamy Mission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8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in the dream of Bruce Wayne

- Original Date 2016. 08. 16

- Written by. Jade


In a Dreamy Mission




  꿈의 내용은 상상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제이슨 본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발탁되고 나서 참가했던 첫 트레이닝 시간에 들었던 말이었다. 꿈은 상상력이 발현되는 장소가 아니다. 잠들기 전 경험했던 가장 강렬한 현실이 꿈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꿈은 어떻게 보면 과거가 된 현실을 추적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단서이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또한 현실적이다. 그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고 양쪽을 넘나들며 필요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면 요원은 최고의 자산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은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 말들을 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본은 조용히 튜브를 꺼내 한 남자의 팔에 둘렀다. 만약 꿈이 상상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꿈을 꾸었을 남자였다. 아니, 꿈이 마지막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도 남자가 신나는 꿈을 꿀 것 같지는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지루함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한 팔을 통째로 본에게 내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제이슨 본에겐 그저 읽혀야 하는 대상이었다. 


  고담시의 모든 것에 신경을 기울인다는 도시의 황태자는 그 지역의 살아있는 명물이자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은 자경단원에 대해서는 유독 불분명한 태도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청장조차도 은근히 '배트맨'의 편을 들고 있는 가운데 브루스 웨인만이 그를 비난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다. 공권력이 아닌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이라는 웨인의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CIA는 배트맨이 출현한지 1년이 넘어가던 해에 그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고담은 CIA가 지부를 두지 못한 미국 내 유일한 도시였다. 기관을 중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6시간 이내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지고도 유일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암흑 지대를 언제까지고 내버려둘 수 없었다. 중앙정보국이 고담의 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주시해온 이유였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옆에 자신이 누울 만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와 한 침대에 눕기가 껄끄러워 본은 이불을 바닥으로 적당히 끌어내렸다. 가구를 사용하면 후에 정리를 하기가 불편했다. 본은 두툼한 이불을 최대한 고르게 펼치고 자신의 팔에도 튜브를 연결했다. 


  제이슨 본은 브루스 웨인의 마지막 현실을 볼 것이다.


  필름이 순간적으로 튕기면서 발생하는 약간의 번뜩임이 되어 브루스 웨인의 꿈으로 흘러들어갈 때, 제이슨 본은 트레이닝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특정 개인들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비밀로 꿈을 빚어내기도 한다. 비밀을 꿈의 재료로 삼는 부류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혼자만의 메아리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이다. 메아리는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또 다르게 따지면 완벽하게 그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다. 자기와 타자가 반씩 섞인 공간에서 안정을 찾아야만 하는 이들의 꿈은 그래서 정보의 천국이다. 꿈에 흡수되어 꿈을 흡수하는 요원들은 그런 곳에서 가장 짜릿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본은 자신이 브루스 웨인의 꿈에 안착했음을 느꼈다. 질량은 사라졌으나 감각은 더욱 깨어났다. 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도시의 설계도를 연상케 하는 배경이었다. 서늘하면서 습한 공기가 공중을 떠다녔고 빛은 결핍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시가 발전했다는 증거로 꼽히곤 하는 뮤지컬 극장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은 누렇고 까맣게 번뜩이는 간판을 보았다. 간판이 광고하는 것은 조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이 행해지고 있어도 그곳의 본질은 지하였다. 본은 어떤 구석으로도 빛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아닌 불빛으로 깨어나는 도시는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영원한 밤에 시달리는 땅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엉뚱한 뮤지컬과 기대할 수 없는 낮은 브루스 웨인의 현실인가, 망상인가, 혹은 비밀인가.


  신중하게 걷던 본은 박쥐가 푸드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빈 손으로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박쥐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꿈에 흘러들어온 요원은 자신이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본은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다. 박쥐도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박쥐는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후 더 많은 박쥐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나타나고 날아가길 반복했다.


  제이슨 본은 이제 그만 브루스 웨인을 찾아야 했다. 꿈의 주인은 어떤 형식으로든 그 안에 존재하는 법이었다. 본은 혹시 날아가버린 박쥐 중에 브루스 웨인의 의식이 섞여있지는 않았기를 바라면서 지하도이자 대로이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길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박쥐들은 날아올랐다. 본은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가 박쥐들이 나타나는 방향이 다 똑같다는 걸 간파하고 움직임을 수정했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들이 탄생하는 곳에서 그 까만 날갯짓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본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꿈에 속한 요소처럼 보여야 하는 본은 브루스 웨인이 자신을 알아채주길 기다려야 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는 허망할 뿐 시끄럽기만 한 반복에서 무슨 의미를 찾는 것인지 박쥐들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가 본을 발견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의자가 필요한가?"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본의 옆에 가죽 의자가 등장했다. 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상식인 한편 타인의 꿈에 침입하는 CIA의 기술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극비 사항이었다. 본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브루스 웨인이 본을 보았다. 본은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기관에서도 인정받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꿈은 으레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질문할 게 있어서 나타난 게 아닌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하면 도움이 된다고들 하니까. 내 머리가 그런 흔한 조언을 새기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질문자를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내가 나약하다는 건 인정할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질문해봐."


  여러 사람의 꿈에 출입해봤지만 이런 식의 흐름은 처음이었다. 본은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피상적인 질문을 골라보았다.


  "왜 그렇게 박쥐들을 보고만 있는 거지? 시끄럽지 않나?"

  "…날카로운 질문이군."


  본이 의아해했다. 혼자만의 흐름을 갖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사실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우연하게 마주쳤던 기억이고 스쳐 지나가는 영감이었지. 여기에 박쥐가 있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군."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인정함과 동시에 박쥐들이 사라졌다. 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쥐를 다루는 브루스 웨인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어둡지?"

  "내가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니까."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 철학적이라는 정보를 받은 적이 없는 본은 자신의 대응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본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매우 특이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꼭 애증했던 선생님이나 잃어버린 부모님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을 연민하고 있었다. 


  본은 혼란스러웠다.


  "꿈에서조차?"

  "그 어느 곳에서도."

  "…힘들겠군."

  "그래서 살아있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빛을 뿌려주기 위함이지."


  본은 조금씩 이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목적을 알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의 질문을 빌려 그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본의 전략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 입증되면 아무리 입을 여는 게 어색한 성격의 사람이라도 올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한 행동은?"

  "내 정신을 제외한 모든 걸 희생했다. 기부를 하고 수많은 자선사업을 벌이고, 무법지대와 폐허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했어.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이타성을 모조리 끌어내서 변화를 만들어보려 했지…."

  

  브루스 웨인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을 했나?"

  "나는 실패했어. 그래, 나는 이 말을 들어야 했던 거군. 실패했다고."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아 본이 얼굴을 돌렸다. 뮤지컬 간판이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웨인 부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뮤지컬을 보고 나오던 도중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브루스 웨인만이 알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웨인 부부는 그저 고담 시민들의 바닥난 도덕성에 희생당한 불행한 위인들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본은 최후의 질문을 던질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배트맨인가?"


  꿈 속에서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배트맨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언제까지 그런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하룻밤의 자조를 마친 그가 눈을 감았다. 의미를 다한 꿈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제이슨 본은 노련하게 꿈에서 빠져나왔다.


  본은 배운대로 꿈에서 깨어난 즉시 튜브를 거두고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지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브루스 웨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얼핏 보면 꿈 하나 꾸지 않고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은 배트맨이 그런 모습으로 자기 자신의 모든 걸 폄하한다는 걸 배우고 말았다.


  본은 들어올린 이불 자락을 브루스의 몸에 덮어 주었다. 제이슨 본은 그 날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Crossover/본브루스] The Cat Doesn't Forget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Ex-CIA Agent and Strange Black Cat

- Original Date 2016. 08. 07

- Writeen by. Jade


The Cat Doesn't Forget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무리 괴짜에 정신 나간 인간처럼 보이는 작자들에게도 사람다운 점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악당들이 펄펄 끓는다는 고담시에서도 아주 고약한 악질을 담당하고 있는 조커라는 자에게도 물론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 박쥐 인간과 숨바꼭질을 하는 게 인생의 낙이지만, 그 친구가 워낙 인기가 많아져서 자신과의 데이트에 소홀해지자 이 이상한 악당이 그만 질투심을 느끼고 만 거죠. '내 귀염둥이를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어!' 같은 심리라고 해둡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박쥐 인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조커는 온갖 과학자들의 주리를 틀고 손톱을 뽑은 끝에 약물 하나를 얻게 됩니다. 일주일간 사람을 아주 귀엽게 만들 수 있는 효능을 가졌다나요? 조커는 낄낄거리며 박쥐 인간과 일주일쯤 아주 오붓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는 때로 놀라움을 발휘합니다. 조커가 결국 그 박쥐 인간, '배트맨'애게 약물을 노출시켰거든요. 


  '아주 귀엽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뱃시가 어린애처럼 키가 줄어들기라도 하나? 너무 귀엽겠다! 아니면 애완용 박쥐로 변하는 거 아니야? 오, 뱃시. 뱃시. 우리 뱃시!'


  하지만 이런 귀여운 바람이 조커같은 악당의 것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커는 온갖 종류로 구비해 둔 케이지를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배트맨이 사라졌거든요. 조커는 배트맨 대신 악당들을 족치면서 우리 뱃시를 어디로 감춘 거냐며 발악을 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커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요. 배트맨이 귀엽게 변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당연히 고양이부터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배트맨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면 멀었군요, 조커.


  네. 첨단 기술이 50가지쯤 적용된 거대한 수트를 입고 다니는 배트맨은, 대상이 아주 귀엽게 변한다는 약물의 효과에 따라서 조금 거대한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집 큰 검은 고양이요. 뚱뚱한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더 귀엽지 않겠냐고요? 좋을 대로 하시죠. 아무튼 고담을 비밀스레 수호하던 암흑의 기사는 지금 까만 고양이입니다.


  우리야 뭐 배트맨의 가면 속에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고 얘기하도록 하죠.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님이자 고담시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은 참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두말할 것 없는 재력에 외모도 아주 훤칠하고, 부모님은 없지만 부모님처럼 그를 훌륭하게 챙겨주는 보호자도 있고 침대 한 구석이 서늘하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불러들일 수 있는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거대 기업의 회장님 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도 좋고 행동력에 책임감도 가졌죠.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다보니 보통 사람이 그를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이겁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배트맨이라니.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위대한 배트맨이자 빈틈없는 브루스 웨인인 존재는 너무도 인간다워서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담의 수호자 배트맨은 배가 고파요.


  통신기가 부착되어 있는 수트는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바뀌어버린지라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고양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뉴페이스를 경계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고양이가 된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배트맨 겸 브루스 웨인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죠. 그 와중에 그는 지금 배가 고프군요. 큰일입니다. 브루스 웨인께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본래 그는 어떤 욕구도 잘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이 있지만 이 망할 몸뚱아리가 정신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인지 서서히 허기를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니야― 하고 힘없이 울었습니다. 귀엽긴 한데 좀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런 감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멈춰섰을 리가 없거든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정체도 참 귀여움이라곤 없을 것 같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슨 본이라고 알고 있지만 본명은 다릅니다. 으음, 이건 몇몇 분들에겐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당장은 말을 아끼죠. 아무튼 그는 CIA의 일급 기밀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은 프로 중의 프로이며,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인데도 그 훈련의 여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며칠 전에는 볼펜으로 칼 든 암살자를 때려잡았습니다. CIA의 기밀 프로그램이란 게 다 그렇죠. 


  그는 현재 자신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적들과 거리를 벌리고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잠시 고담에 왔습니다. 고담시는 워낙 괴팍한 곳이라서 CIA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데다, 미국 내에서 CIA 지부가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악당들이 지부에 들이닥쳐 기밀이라도 빼가면 답이 없으니까요. 그는 진짜로 기억을 잃은 상태인데 어떻게 그런 사실은 잘 느끼고 고담을 찾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암살자와 고양이가 된 자경단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네요. 


  "……"

  ―…니야아.


  지금의 제이슨 본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그는 현재 굉장히 순수한 상태입니다. 사람 죽이는 기술은 몸에 남았지만 인격을 지워버리는 CIA의 프로그램은 기억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순수하고 착한 영혼들은 동물에 약한 법이죠. 


  "…같이 갈래?"


  배트맨에게 보호자가 생겼군요.




* * *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고양이를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는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고양이는 남자가 먹을 걸 찾아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최대한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다가 혼자서 중심을 한 번 잃었다. 생수를 꺼내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지붕에서도 끄떡없는 고양이가 바닥에 앉으려다 휘청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락없는 고양이 생김새를 한 진짜 고양이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그릇에 물과 통조림의 내용물을 쏟았다. 고양이는 음식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또 휘청했다. 남자는 고양이가 부상을 입은 게 아닌가 싶어 고양이의 다리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고양이는 고양이다운 균형 능력을 되찾고 물을 할짝였다.


  골목길을 서성이던 것치고 고양이의 털은 꽤나 깨끗했다. 그는 당장 고양이를 씻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검은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남자가 꺼낸 것은 중간 크기의 상자였다.


  고담으로 도망쳐온 남자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피난처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들어본 적도 없는 박쥐 옷차림의 자경단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는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던 무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근처에 놓아두고, 조금 전 뒷골목에서 산 총을 꺼냈다. 그가 총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발끝이 간지러워 밑을 내려다봤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총에서 난 찰칵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듯했다. 남자는 무언가 부끄러웠다.


  "…누굴 쏘려고 산 건 아니야."


  고양이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참 사람 같은 시선이었다.


  "난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가 갑자기 그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 했다. 남자는 묘하게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고양이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고양이가 총을 만질 수 없도록 총을 잡은 손을 머리까지 들었다. 고양이가 가만히 꼬리를 흔들다가 침대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뚜껑이 열린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 안에는 일반인이 소지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개의 여권과 다량의 현금 다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몇 가지 종이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가 발로 슬금슬금 가장 앞에 있는 여권을 건드렸다. 여권의 표지를 들어올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야옹.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거야?"

  ―야아옹.

  "……"   


  남자가 여권의 앞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남자에게도 고양이에게도 낯선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양이는 곧 그의 미국 여권에서 관심을 끊고 나머지 여권들을 이리저리 발로 밀었다. 브라질, 러시아, 프랑스, 파리 등등 온갖 나라들의 여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가 가만히 발을 뗐다.


  "…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고양이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남자가 상자를 회수했다. 고양이는 동그란 눈동자를 남자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권을 한 뭉치로 모은 다음 그 위에 총을 올렸다. 


  "…내가 처음 봤던 금고 안이랑 똑같아졌네."


  남자가 상자를 침대 밑으로 다시 감췄다. 고양이는 여전히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더 안 먹어?"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훈련을 받은 고양이를 대하듯 물었는데, 고양이는 용케 그것을 알아듣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점프하는 모양새가 아주 깔끔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 특이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고양이는 남자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물건을 가지고 놀지 않으려는 행동은 독특했으나 대신 고양이는 조용했다. 그 덕에 남자는 자신의 작업, 즉 무언가를 메모하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가 일기를 적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수집해온 정보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다가 그걸 옮겨 적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대체로 남자의 얼굴과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 가운데 밑줄이 몇 번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취리히 은행]


  고양이가 눈길을 올렸다. 남자는 온 힘을 다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가, 고양이가 서서히 피로함에 젖어갈 즈음에 주변을 정리했다. 남자가 고양이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는 옷이 젖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의는 바깥에 벗어두고 물을 받았다. 고양이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잘 짜여진 몸에 미세한 상처들이 있었고 총자국처럼 보이는 동그란 흔적도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참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익숙하게 해치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몸집도 큰 고양이를 요령 있게 씻겼다. 몸 구석구석을 슥슥 밀어주는 감촉이 좋아서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고양이는 원래 너처럼 다 사람 같니?"


  고양이는 이번에도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고양이 배트맨과 CIA 출신 킬러의 일상을 왜 좀 더 보여주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실은 말이죠, 이른바 집사와 고양이들이 서로 하는 일은 놀랍도록 똑같습니다. 고양이는 집사에게 귀찮은 일거리과 애교를 반반씩 섞어 던저주고 집사는 당근과 채찍에 휘둘리면서 고양이를 간지럽히죠. 그렇다고 청년 제이슨 본이 벌써 '집사' 단계까지 올랐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고양이가 좀 까칠해서요. 그래도 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제이슨에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배트맨은 더욱 행복해했을 테지만요. 그 자신은 정체도 모르는 집단에게 쫓겨다니느라 제이슨 본은 주변에 어떠한 전자 기기도 두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PC 카페를 갔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에 그런 시설이 남아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날로그식 삶을 고집하는 제이슨에게 짜증이 나서 한 번은 고양이 배트맨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죠. 안타깝게도 고도로 훈련받은 정보부의 암살자는 별다른 위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심심해?

  

  그리고 배트맨은 성심성의껏 자신과 놀아주는 그에게 휘말려 배를 뒤집고 야옹거리다가 진한 자괴감을 느끼고 저녁 내내 구석에서 고개를 박고 있었답니다.   


  한편 바깥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지요. 고담의 모든 악당들을 다 쓸어버리고도 배트맨을 찾지 못한 조커가 결국 엉엉 울면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조커는 훌쩍이며 자신이 배트맨에게 이러이러한 약을 썼는데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뭔가 배트맨 같은 분위기가 나는 생물체를 발견하면 즉시 연락을 달라고 번호까지 남겼습니다. 악당이 자기 혼내주는 놈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조커가 그리운 뱃시를 잊지 못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엉겁결에 득을 본 쪽은 배트맨의 유일한 지원군이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였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는 과연 은밀히 사람을 풀어서 몸집이 평균 이상인 검은색 고양이를 끌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입니다. 이걸 보면 조커는 아직도 멀은 것 같지요. 


  그리고 조커의 기자회견을 들은 배트맨 역시 원거리에서 알프레드와 호흡을 맞추기에 이릅니다.




* * *




  ―니야옹, 니야아아….


  검은 고양이는 몇 번 힘 없이 울더니 바닥에 철푸덕 누웠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다고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며칠새 힘이 없네."


  남자는 고양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니이야.

  "이 주변에 동물 병원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하자마자 고양이의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꼬리는 미동도 없었고 뜨다 만 눈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냥 외면하지 못할 가련한 동물이 보내는 신호였다. 남자가 결국 재킷을 챙겼다. 남자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묘하게 흡족해 보였다.


  남자와 고양이는 주변의 대로에서 택시를 타고 고담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남자는 이제 그 곳에서 동물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는 고담의 사방 어디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건물을 등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담시에 와서 제일 먼저 도시의 지도부터 외운 남자는 이곳의 토박이들만큼이나 길을 잘 알았지만 그가 외운 지도에는 동물 병원의 위치가 나와있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옷에 말려 남자의 가슴 속에 쏙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움찔대기 시작했다. 그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가며 은색 빌딩들을 지나쳤다. 둘은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섰다. 무엇이든지 살피는 버릇이 있는 남자는 신호등의 기둥에 무언가가 붙어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그걸 읽었다.    


  [고양이를 찾습니다. 약 6일 전 실종. 검고 몸집이 다소 큼. 교육을 잘 받아 얌전하고 사람을 많이 경계하지 않아 다른 길고양이들과 구분됨. 아래의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씩 커졌다.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고양이도 놀라움을 표현하듯이 목을 빼고 있었다.


  "주인이 있었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고양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서 얼핏 보면 남자가 그냥 옷가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전화를 건 이를 기다리면서 그 주인이 정말 고양이를 잘 훈련시켰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도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 분명 존재할 거라는 데에 상념이 닿자 남자는 무겁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고양이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전화를 주신 분이십니까?"


  남자를 맞이한 건 훌륭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다. 검은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는 감상이 단번에 들었다.


  "예."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남자가 옷을 걷었다. 얼굴을 드러낸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꼬물거렸다. 


  "고양이가 먼저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군요."

  "…네, 제가 키우던 아이가 맞습니다."


  남자가 서서히 팔을 풀자 고양이는 곧장 노신사에게 뛰어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가 짐이 되어버린 옷을 팔에 걸었다.   


  "감사합니다. 답례를 하고 싶은데 성함이라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노신사가 그를 붙잡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노신사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나셨군요, 도련님."

  ―야옹.

  "약물을 만든 당사자에게 물어보니 약효가 지속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독된다고 하더군요."

  ―야옹.

  "수트와 장비들은 벌써 점검을 다 마쳤으니 나중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조커를 꼭 붙잡으셔야겠군요.

  ―…야옹. 




* * * 


 


  거처로 돌아가는 제이슨의 손에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간밤에 터진 소식들은 고담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최대한 그걸 감추는 법을 알았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비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돌아온 배트맨, 조커를 체포하다]


  제이슨 본은 다양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의 문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침입자의 그림자부터 부비트랩의 여부까지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는 현관의 틈새에서 그는 하얀색 봉투를 발견했다. 훈련받은 요원이 자신의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 얇은 편지봉투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은 발명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은 복도의 양쪽을 한 번씩 살핀 뒤에 봉투의 앞면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웨인 엔터프라이즈 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으며, 봉투의 안에 들어있는 쪽지엔 본이 더욱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날 만나러 와주길. - 브루스 웨인]


  제이슨은 봉투를 그대로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 2분 뒤 그는 옷 속에 무기를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 * *




  그 날은 브루스 웨인 회장을 위해 일하는 비서가 너무나도 기다린 하루였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적힌 웨인 회장의 공식적인 일정이 최근 두 달간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웨인 회장은 그녀에게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오늘도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충성을 맹세한 사원이 한 명 늘었다.


  고요해진 빌딩의 최상층에서 브루스 웨인은 홀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신중하게 서류를 나누던 그가 문득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다리는 손님은 어쩌면 노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경력을 고려하자면 기대하기 어려운 매너였다. 브루스는 양쪽이 모두 편할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그 후 보육기관 지원 사업과 관련된 서류를 집중해서 읽던 브루스 웨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신의 손님이 서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루스가 그를 보고는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제이슨."

  

  제이슨 본이 순간적으로 권총을 들었다.


  "날 어떻게 알지?"

  "우린 만난 적이 있어."

  "원하는 게 뭐야?"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나보단 당신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어서 공유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당신이 의문을 갖는 모습들을 창조해낸 사람들을 찾아냈어."


  브루스가 서류 밑에 있던 파일 하나를 들었다. 미 중앙정보국의 엠블럼과 함께 일급 기밀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제이슨이 눈을 좁혔다.


  "…CIA?"

  "저녁에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면서 보지 않겠나?"


  제이슨은 파일 하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당신과 나는… 무슨 관계지? 당신은 왜 날 도와주지?"


  브루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상한 기운을 읽은 제이슨 본이 그의 미간을 조준했다. 브루스의 대답이 지체되자 암살자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20초 뒤에는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판단할 작정이었다.  


  제이슨이 숫자 12를 셌을 때 브루스 웨인이 대답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동물은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끄트머리에서 떨렸다. 그렇지만 제이슨 본은 그것이 거짓말에서 비롯된 긴장감 탓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제이슨이 약간의 혼란에 빠진 사이 브루스는 홱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기나 해."


  브루스가 제이슨 본의 품에 파일을 안겨주었다. 제이슨은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되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부끄러움에 시달리는 웨인 회장님을 따라갔다.


  "왜 얼굴이 빨개진 거지?"

  "…시끄러워."

  "아까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나랑 당신이 무슨 관계였냐고 물었잖아. 잠깐, 미스터 웨인!"

[Crossover/본브루스] Better Life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 Bruce Wayne Crossover

- Written by. Jade


Better Life




  브루스 웨인의 한쪽 눈동자는 조금 전에 확인해서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린 핸드폰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알 수 없는 이름unknown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는 일밖에 알지 못하던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는 하필 그가 이 순간에 최고의 능동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을 것은 뻔했으므로 브루스는 곧장 비상구로 향했다. 도중에 핸드폰을 한 번 켜보았지만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문을 크게 열고 난간을 잡은 브루스는 절실하고 정확하게 달렸다. 30층도 넘는 층을 계단만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다소 좌절스러운 사실은 브루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브루스가 핸드폰을 꺼냈다.


  "알프레드, 웨인 엔터프라이즈로 배트윙을 보내줄 수 있어요?"

  ―진심이십니까, 도련님?

  "이 시점에서 내 정체를 숨기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보내줄 수 있죠?"

  ―…준비하겠습니다. 15분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드론 조종 모드로 수트까지는 배달해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브루스는 통화를 끊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이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브루스는 달리면서 부디 자신의 손이 기계의 진동으로 움찔하기를 바랐다. 다급한 인영이 비상계단에 온도와 숨소리를 남겼다. 지상 로비보다는 옥상에 더 가까운 그의 위치에서 아래의 혼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트맨의 몫이었고, 브루스 웨인은 그러한 이유에 의해 계단을 올랐다.


  아직 배트맨이 오지 않은 지상의 소요에는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이 하나의 문자 메시지를 눈동자 위에서 완전히 지워내고 있지 못하듯이, 몇 개의 음성들을 귓가에서 떨쳐내지 못했다. 그 소리들은 그가 본래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번만은 반쯤 그 말에 동의해보기로 했다. 그가 코너 뒤로 사라지자마자 건물의 입구에서 폭발음이 났다. 무장경비에게 빌린 총이 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알프레드는 원격 조종으로 배트윙을 몰면서 배트케이브 밖에서 펼쳐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차들이 적은 도로를 고른 경찰차들이 모여드는 중이었고 멀찍이서 보이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은 아직 성한 모양새였다. 알프레드는 고도를 조정하면서 빌딩을 스캔해보았다. 층마다 빼곡하게 있어야 하는 직원들의 열기가 감지되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브루스 웨인은 난간을 잡은 자신의 팔로 몸을 밀어가면서 계단을 올랐다. 10층 정도만 더 올라가면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가 단어 하나라도 찍어서 보내주길 바라고 있는 인물은 핸드폰이 아니라 다른 걸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 본의 손에 감긴 총이 처음으로 불을 뿜었다. 수제 폭탄을 의기양양하게 내던지려던 놈이 발목을 맞고 미끄러지면서 폭탄이 엉뚱하지만 적절한 폭발을 일으켰다. 본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라고는 침착하게 발휘할 수 있는 사격 실력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이 쏠 수 있는 탄환의 갯수를 하나 줄이다가, 그 가운데서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배트맨이 있다고 알려진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는 악당들과 경찰들에게 겹겹이 싸인 꼴이 되었다.


  "경찰이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모두가 그 말이 악당들에게 보내는 미란다 법칙처럼, 경찰 쪽에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대사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무시당했다. 악당들은 대답 대신 총알을 뿌리기 시작했고 경찰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과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여겼던 총성을 태연하게 들으며 제이슨 본은 전진했다. 


  마침 그가 걷는 길에 소화기가 있어 본은 냉큼 그걸 들고 바닥에 던졌다. 알맞은 힘을 받은 소화기는 어려움 없이 총격전 현장까지 굴러가다가 어떠한 세련됨도 없이 그저 빗발치기만 하는 총알에 맞았다. 하얀 가루가 터져나오며 연기를 일으켰고 그 순간 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두 팔을 들었다.


  한편 빌딩의 옥상에 배트윙을 앉히려던 알프레드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 경찰 측에서 띄운 헬리콥터가 배트맨에게 경고를 보냈다.


  ―배트맨, 가까운 착륙장에 내려라. 지시를 어길 시 사격하겠다.


  알프레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시점에 브루스는 마지막 문을 발로 차고 옥상에 막 당도한 참이었다. 착륙장에 배트윙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브루스는 경찰 표식을 단 헬기 2대에 꽁무니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배트윙을 발견했다. 


  "알프레드."


  알프레드의 목소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옥상에 도착하셨군요.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보이시겠지요.

  "일단 경찰이 원하는 걸 들어줘요. 내가 탈 때까지 조종간은 놓지 말고요."

  ―배트윙이 착륙하는 곳에 도련님이 계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배트맨이 영영 활동을 못하게 되지는 않아요."


  브루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알프레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제이슨은 위험해질 겁니다."


  브루스는 핸드폰을 집어넣은 손을 밖으로 빼지 않은 채 움직였다. 배트윙이 서서히 빌딩에 내려앉으려 했다. 브루스는 이제 핸드폰에서 관심을 떼기로 했다. 그는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를 위하여 그가 멀리 하라고 권했던 무기를 잡은 이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것이었다. 


  브루스가 재킷 안감에서 박쥐 모양의 표창을 꺼냈다.   


  자신이 간수해야 하는 물건인 것만 같아서 일단 옆에 두고자 했던 남자에게 비밀이 탄로났던 당시를 생각하면 브루스 웨인은 늘 웃음이 났다. 고담 시에 반년도 머무른 적이 없다던 남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트맨의 심판 현장에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다음의 기억은 더욱 실소가 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좀 궁금하군.

  ―서랍에서 무기 설계도를 찾았어. 그 이후에는 쉬웠고.


  잠금 장치에 위장까지 덧씌웠던 기억이 생생한 서랍을 열었다는 게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밀을 찾는 데 노련한 자들은 오히려 그 덕분에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브루스 웨인의 유리 별장으로 돌아갔었다.


  "웨인 씨?"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배트맨이 표창을 던졌고 잠자코 있던 배트윙이 승객 없는 헬리콥터의 날개를 쏴 맞췄다. 경찰들은 당황한 얼굴로 배트맨의 탈것에 탑승하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을 쳐다보았다.


  "배트맨은 우리 거야. 방해하지 마!"

  "저 놈들을 빨리 쏴버려!"


  킬킬 웃으며 동시에 화를 내는 악당들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지역의 특성상 그 어떤 차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고담의 경찰차에도 볼썽사나운 구멍이 났다. 기껏해야 45구경 권총을 소지하고 있을 뿐인 경찰들은 차를 방패 삼아 탄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으악!"


  기관총과 하나가 된듯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놈이 느닷없이 고개를 꺾었다. 차의 측면에 달라붙어 있느라 사격을 할 수 있는 경찰들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서로를 보며 눈을 굴렸다. 경찰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던 악당들도 비로소 고요한 빌딩 쪽에 관심을 두었다. 


  "뭐지?"

  "안에서 누가 우릴 돕나봐요. 진짜 배트맨이 저 건물 안에 있나본데요?"


  그러자 경찰 하나가 딱 봐도 그보다 다섯 살은 젊을 듯한 청년을 때렸다.


  "일단 앞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 그래야 배트맨을 체포하든 할 거 아냐! 뭐해, 갈기라고!"


  그제야 경찰들이 오리걸음으로 앞을 기어갔다. 


  본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숫자만이 있었다. 그가 소모한 시간과 그에게 남은 총알의 갯수였다. 본은 빌딩의 최상층부에 있는 브루스 웨인을 밖으로 대피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그의 집사가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마련했을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살아남는다. 본이 정확히 날짜를 댈 수도 있는 어느 시간에 정해진, 결코 변할 수 없는 명제였다. 마음이 더욱 편해진 그는 남은 탄약을 소비하고자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배트맨이에요!"


  줄곧 배트맨을 언급하던 청년이 기어코 소리쳤다. 남자의 코트가 배트맨의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청년은 악당을 제압하는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연신 자신의 앞에 있는 경찰의 어깨를 두드리며 배트맨의 이름을 읊조렸다. 참다 못한 경찰이 고개를 틀었다. 악당을 제압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에 익숙한 자가 분명히 로비 안에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의 머리 위에 악당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존재했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악당들이 혼비백산하여 몸을 숙였다. 기관총이 고정되어 있던 차량에 불이 붙고 이리저리 흩어진 무기가 조각났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내부에 배트맨이 있다고 믿었던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이 청년의 앞에 있었다. 청년은 지상과 상공을 번갈아 보았다. 


  제이슨 본은 기묘하게 각도를 바꿔가며 조종석을 빛으로 가리는 배트맨과 기어코 눈을 마주쳤다. 가면이 없어 얼굴을 가릴 수 없고, 수트가 없어 목소리를 바꿀 수 없지만 어차피 본의 눈에는 누구보다 순수한 형상으로 보이는 그는 어느 정도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은 탄창이 빈 총을 던지고 핸드폰을 꺼냈다. 브루스 웨인의 이름으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렇게 할 순 없어.]


  배트윙이 모두의 눈앞을 혼란하게 만드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곳에서 제이슨 본만이 온전히 서 있었다. 본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바람이 전보다 더 거세게 부는 것 같았다. 악당들은 배트맨의 등장에 꼼짝하지 못했고, 경찰들은 두 배트맨 사이에서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본은 빠르고 곧게 걸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청년은 마침내 자신의 기체로 돌아가는 배트맨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배트맨이 훌쩍 날아올랐다.


  본은 콕피트가 열리자마자 조종석 안쪽으로 안전하게 떨어졌다. 브루스가 그의 상태를 슬쩍 확인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브루스는 엉뚱한 말을 했다.


  "가서 나랑 기자회견에 발표할 내용이나 고민하지."


  본은 그 한 마디에 숨어 있는 많은 것들을 간파했다. 브루스는 자신이 한때 추억을 그리듯이 죽음을 상상했던 것처럼 본도 더 나은 죽음을 찾으러 다닌다는 걸 지적하는 한편, 불멸의 존재여야 하는 배트맨으로 지목당한 그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본은 굳이 말로써 자신이 브루스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걸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은 살아남는 것이 더 좋은 삶이었다. 본은 다시금 브루스 웨인의 곁에 자리잡았다.




There's no better love

That's laid beside me

There's no better love

That justifies me

There's no better love

So darling feel better love



Better love by Hozier

- When Bruce Wayne meets a reflection of himself named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8. 03

- Written by. Jade


At the edge of deadly skepticism


 천둥을 동반한 번개를 내리꽂을 것 같은 하늘이 멀고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대체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남자는 곧장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꼭 환풍기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것처럼 답답했다. 브루스 웨인은 문이 닫히기 직전 짧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소매를 열거나 타이를 밑으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건물 안의 무리들 중에서 가장 초연한 얼굴을 띠고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리들이 섞여 거대한 고함이 탄생하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가 시선을 힐끗했다. 두 차례를 기다리면 그가 주시해야 할 격투가의 순서가 오게 되어 있었다. 과연 브루스 웨인은 그에게 가장 적절한 시간에 그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고, 그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정작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이 다 갖지도 못하는 지폐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의외로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브루스 웨인이 노리는 자는 그보다 훨씬 이 도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 자리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다른 방향에서 싸움꾼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격정이 피어오르는 곳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행운과 다른 사람들의 피를 즐기는 동물적인 정열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한 번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외면하며 러시아인을 찾아다녔으나 수확을 얻지 못했다.


  환호하는 자와 격분하는 자들 사이에서 브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을 의미를 잃어버린 그가 마지막으로 미련처럼 실행한 행동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브루스 웨인은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러시아인을 찾은 것이었지, 어떤 믿음이나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바람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사선으로 꺾여갔다.


  표정이 없는 남자가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는 반사광이 터졌을 때 미간을 찡그리며 그 빛의 근원지를 자연스레 확인하게 되듯이, 브루스는 기울어 가라앉으려고 하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작은 분명히 격투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그걸 실행하는 이에게서는 투지와 흥분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또 어떤 추상적인 반사광을 본 것 같았다. 그의 발이 미끄러지는 바닥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문득 자신이 강화수트를 입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변신에 임하는지를 돌이켜보았다. 책임과 체념의 경계를 열고 닫으면서 이제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희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정과 미래를 잃어가는 것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희생을 감행하는 모순 속에서 건강한 무언가는 결코 자라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낯설게 브루스 웨인의 머리를 찔렀다. 


  러시아인은 오늘 아예 오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브루스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작고 피상적인 느낌마저도 이성에 녹아들어 버린 듯했고 이성은 느낌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장치였다. 붕대를 다 감은 남자 역시 비정상적인 초연함을 펼쳤다.    


  "곧 격투가 시작됩니다! 더 거실 분 안 계십니까?"


  격투장의 심부름꾼이 지폐를 팔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브루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남자에게 걸겠소."


  청년은 브루스가 쥐어주는 액수에 놀랐다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모두가 성이 나 있었다. 격투가들보다 더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구경객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간 청년은 관객들을 재미있게 여길 터였다. 기대와 탐욕과 호기심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이질성을 감추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사광이 눈을 가리는 기분은 사라졌다. 올바른 위치에서 상을 응시할 때 시야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장애물이 사라진 그 자신의 시야 속에서 많은 걸 목격했다.


  죽음을 바랐던 적이 있었다. 실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일은 많았다. 브루스 웨인은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죽음 또한 독립적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연과 신념과 소망이 연거푸 스러져가다 보면, 그 부스러기들이 지상에 깔려 생에 대한 의지를 땅보다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 때조차 브루스 웨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발을 담근 듯이 자꾸만 균형을 잃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덤덤하게 되짚었으나 그 시절 그는 아주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힘을 불어넣으려고 시도만 하면 도리어 휘청이는 관념에 화가 났던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물웅덩이를 얼려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밑은 더욱 미끄러워졌지만 환상 같은 두께와 강도를 가지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물이 얼어있는 지점에 서 있다는 건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몹시도 조심하면서, 자신의 발바닥 아래를 깨뜨릴 수 있는 건 뭐든지 의심하면서 움직이게 되었다.


  절망과 회의주의로 빚은 절벽으로 한 남자가 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눈을 깜빡여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선택한 남자는 두들겨 맞고 있었다. 브루스가 보기에 그는 오직 그간의 경험에 이끌려 두 팔을 올리고 있었고, 단련된 육체가 있어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것이었다. 광기와 욕설이 피 흘리는 남자에게 꽂혔다. 밀리기만 하던 남자는 급기야 브루스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 비틀거렸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중력에 휘감아 위장해보려던 남자는 또 다른 인력에 가로막힌 자신을 한 번 보았다가 뒤를 돌았다. 브루스는 자신의 양 손이 남자의 땀에 밀려나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브루스가 남자를 세웠다. 그에겐 일종의 반사광이었던 남자의 동공은 의외로 탁해 브루스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비쳐 보이는지 몰랐다. 그 찰나의 브루스 웨인은 오직 남자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일어섰다. 동시에 그는 싸웠다. 브루스는 마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인 양 남자가 처음으로 내뻗은 주먹의 의미를 추측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남자는 덤덤하게 승리를 가져왔다. 구경꾼들이 이건 말도 안 된다면서 발악을 해댔다.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붕대가 스르르 떨어졌다.  


  브루스는 천천히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소중히 다루는 자신의 소지품마저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듯했다. 남자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가방 하나를 옆에 두고 옷을 꺼내는 중이었다. 조금 전 브루스의 돈을 걷어갔던 청년이 눈을 찡긋하며 그에게 지폐 뭉치를 건넸다. 


  남자는 지폐를 세지도 않고 무심하게 가방 한 구석에 쑤셔넣었다. 그의 등에는 총알을 대보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상흔들이 있었다. 브루스는 그제야 남자의 외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훈련을 받았으며 총을 맞아본 적도 있는 데다 저급한 자들의 파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브루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브루스 웨인이 가장 털어놓고 싶은 것들이 한 번도 그의 음성에 실린 적이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의 소리를 공유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사실 브루스는 남자에게 이것 저것을 묻고 싶었다. 그의 발 밑은 자신과 같은지, 혹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당신은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현실과 닮았지만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위치에서 브루스 웨인은 한 번도 자신 이외의 인물을 본 일이 없었다.


  결국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가 가방을 들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브루스를 지나쳐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브루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벗어났다. 브루스는 그 뒤 돈을 걷는 청년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그는 이 주변에서는 누가 들어도 가명으로 생각될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브루스 웨인이 자신은 그림자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결말을 내려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진심으로 남자가 자신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When Bruce Wayne meets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7. 24

- Written by. Jade


 

Essence of Justice




 

  브루스 웨인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그 장소의 테이블 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구전처럼 도시를 돌아다니는 그의 버릇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무언가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매너를 발휘하게 했다.


  브루스 웨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빛을 내뿜을 것 같은 책상에 붙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입니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 건설한 시설의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하여 조성된 공간인 만큼 브루스는 앉은 자리에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반대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를 바라보았던 작은 스코프는 분명 존재했었다.


  브루스 웨인은 회상했다.


  그는 여기서 알프레드에게 온갖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경영학이 아니라 공학이나 신소재 학문을 전공했을 거라는 얘기부터 자신은 미술에 소질이 없다며 손수 그린 설계도를 팔락거린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는 소리를 했다가, 알프레드에게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그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당장 집사 일을 그만두었을 거라는 일격을 당했었다.


  물론 끝없는 번뇌와 고통도 있었다.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모니터 화면 위에 이제는 자신의 비틀린 동력이 되어가는 과거를 출력하며 스스로를 짜냈다. 울진 않았어도 기이하게 신음한 일은 한 두 번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마지막에서야 발견했던 스코프가 어떠한 모습들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넓은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저격용 스코프 같은 게 숨어 있을 만한 위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이 어느 건물 옥상에서 그것을 결국엔 발견하게 된 사건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의 관찰자는 그 자신의 임무를 종료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브루스 웨인은 쪽지를 힐끗했다. 그조차도 스코프를 쥐고 있던 장본인에 대해 고작 메모지 한 장에 들어가는 정보를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적힌 이름이 그 자의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담시의 뒷골목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암살자 같은 족속들도 그토록 은밀하고 비밀스럽지는 않았다. 브루스 웨인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어둠보다 조용하고 은닉의 화신들보다 비밀이 많은 관찰자가 붙게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의 관찰자에게 사연을 물었었다.


  바람이 참 요란스럽게 불었던 날이었다. 고층 건물의 옥상이라는 공간적 특징으로 인하여, 평소에는 별로 경험해 볼 일도 없는 온갖 대기의 성질들을 몸소 체험하며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응시했었다. 남자의 얼굴은 평범했다. 특징도 없이 그저 짧게 자르기만 한 머리칼에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말이 없었다.


  삼각대가 달린 장총은 아직 옥상의 난간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브루스 웨인을 쏘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브루스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사고 속의 브루스 웨인은 목소리로, 그리고 현재의 브루스 웨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그렇게 물었다.


  알프레드는 두 사람이 케이브라고 부르는 기지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브루스의 유리 별장에도 누군가가 침입하거나 감시 데이터를 읽은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었다. 달리 말하면 브루스는 그 남자가 언제부터 나타나 어느 곳까지 자신을 주시했던 건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상상해야만 했다.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리더인 브루스 웨인을 본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려받게 된 회사에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모양이었다. 성실한 기업인이라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자체에 꽤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범죄 단신을 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이번에 생긴 일 때문에 새로운 아이들 몇 명이 방문할지도 모르겠다며, 그들을 잘 대해달라는 당부를 그가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 전했다. 전화를 마친 그가 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힌 것 같았다.


  추가적인 일정이 없으면 브루스 웨인은 퇴근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주제의 잡지나 책을 읽거나 집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니면 혼자서 한 잔의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 그는 밤을 흘려보냈다. 이 모든 수가 빗나간다면 브루스 웨인은 십중팔구 묘소에 있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묘비 근처의 꽃을 갈아주고 그 앞에서 침묵하며 생각하는 브루스 웨인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탄에 시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고귀한 폭력이 되려는 브루스 웨인을 보았다.


  남자는 너무 오랫동안 브루스 웨인을 관찰하면서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지만 브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발견했는데도 왜 날 쏘지 않았지?


  브루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일종의 자연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브루스에게 시선을 보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받은 이의 행동 양식이었을까. 그렇지만 브루스가 지금 거울을 봤다면 남자가 그 때에 자신의 몫으로 가진 회상과 추측을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터였다.


  남자가 아는 많은 것들이 순서를 지켜 부상했다.


  저 억만장자가 비밀리에 꾸미고 있는 시설을 발견했을 때 그가 받은 임무 저변에 깔린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자들은 진실하고 충실한 자경단을 제일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억지와 같은 희박한 가능성을 들어 그 존재를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저들이 더욱 성장하게 될 때, 권력과 법을 대체하고 소름 돋도록 민주적인 신임을 얻을 때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공포로 여기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들의 궤변은 그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변질되는 정의들 덕택에 힘을 얻었다.


  브루스 웨인은 그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맹세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고민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남자를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남자에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굴었다. 브루스 웨인은 단 한 번도 총을 잡지 않았다. 그의 품은 펼쳐 보인 두 손바닥처럼 깨끗했다. 그 때도 그러하였다.


  정의로 인정받은 것은 더 이상 정의가 되려 하지 않고, 아직 정의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정의에 가까워지려 한다.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문장이 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인가?


  남자는 마침내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돌아가.

  —…나를 처리하는 게 당신의 임무였을 것 같은데. 날 돌려보내줘도 된다는 건가?


  남자는 브루스 웨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듯 바라보는 용도로 쓰였던 총을 문득 떠올렸다. 슬프게 솟구친 물감처럼 무성하던 풀밭 뒤편의 묘소로 그를 따라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브루스 웨인은 기어코 또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위해서 죽으려 하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총에 대해 알기라도 하듯이 브루스 웨인은 남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생명이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그래야 했다. 남자는 많은 걸 생각했으나 정작 그 안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한 마디를 꺼냈다.


  —괜찮아.


  브루스는 남자의 시선을 잃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브루스의 표정이 남자의 눈동자를 사선으로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브루스가 몸을 돌리면서 다시 하나의 선상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어.


  남자는 그 짧은 말이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질책하였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실현하고 싶다면 인간을 재단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 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모두가 남자를 향해 질릴 정도로 주입하던 법칙이었다. 정작 남자는 이태까지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역사는 이제 부정되었다. 남자는 혼자서 항이 비어있는 부등호를 채웠다.


  —그것이 정의의 본질이야.


  브루스 웨인은 어느새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의 모서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자의 말을 끝으로 회상을 중단했다. 정체불명의 감시자가 던진 충격에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지상으로 내려갔을 무렵에는 까맣게 타고 있는 자동차만 있었을 뿐이었다. 기름을 먹고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 강렬해서 사고 현장에는 제대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브루스 웨인은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었다. 그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전에 어떤 남자를 죽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모든 것은 재가 되었다. 남자가 두고 갔던 총은 아마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에 넘어갔겠지만 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본명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과 너무도 짤막하기만 했던 몇 마디의 말들이었다.


  브루스가 이름을 적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보았다. 잉크가 다 말라서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선명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이 잠시 브루스의 표정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섰다.


  오늘 그가 기지에 온 이유는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브루스는 벽면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모든 것을 가려주되 그에게 남은 것을 이루어줄 갑옷이 완성된 형태를 드러냈다. 회상을 마친 브루스 웨인은 현재에 다시 입성했다.




In Flames by Lungley


오늘 밤 천사는 죽을 것이고

천국은 그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걸 잊으리

불길 속에서 우리의 이름은 맹세된다

  불길로부터 우리 둘은 태어난다



- The King's Speech & The Imitation Game Crossover Fanfiction

- Stewart Menzies/George VI

- To My Bloody Smart Valentine

- Written by. Jade


Sundown Project







  앨런 튜링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부스럭대는 움직임으로 시계를 끌어왔다. 새벽 3시 40분이었다. 시계를 엎어 놓은 앨런은 이번엔 라디오를 끌어당겼다. 정규 방송은 오전 1시 경이 되면 종료되므로 라디오에서는 희미한 잡음만 흘러나왔다.


  순간 고개를 번쩍 든 앨런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던 종이 하나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그는 피곤했고, 그래서 눈을 감고 있었지만 방송이 흐르지 않는 채널의 적막함을 이용하고 있는 일련의 규칙성 정도는 포착할 수 있었다. 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앨런이 어느 순간 연필을 놓았다. 4분이 지나 있었다. 강박적일 정도로 꽉 짜여 있는 미지의 법칙이 앨런의 의식에 동력을 불어넣었다.


  앨런은 두 번째 서랍에 들어 있는 쪽지들을 꺼내 방금 작성한 메모와 같이 정렬했다. 대략 종이 한 장은 채울 수 있을 것 같은 암호들이 토막 난 채 줄을 잇고 있었다. 앨런이 깨끗한 종이를 찾아 책상을 더듬었다. 무엇인가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왔다. 앨런은 잠시 정지해 있다가 곧 하던 일을 계속했다. 


  1940년 9월, 영국의 가을은 시원하지도 화창하지도 않았다. 





  앨런이 그 암호를 들은 것은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발단은 여군들이 처음으로 독일군의 메시지를 가로채는 시각이 오전 6시라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군인들은 수없이 많고 그들은 당연히 하나로 통일된 시간에 잠들지 않는다. 앨런은 오전 6시 이전, 영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심연보다 깊은 영역에 파묻혀 있을 독일군의 작전을 알고 싶었고 그래서 잠자리에 라디오를 놓아두기 시작했다. 백색 소음은 주변의 자잘한 소리를 없애주는 효과가 있었으므로 숙면에 도움이 되기도 했다. 아무런 말소리도 나지 않는 라디오를 곁에 끼는 것은 앨런에게 하나의 습관이 되었다.


  앨런조차 자신이 라디오를 켜놓고 잠들기 시작한 최초의 이유를 잊어갈 때 즈음 앨런은 특별한 소음을 들었다. 그것이 8월 둘째 주의 일이었다. 그것은 이미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암호를 푼 적이 있는 앨런에게는 그저 살짝 시간을 요하는 수수께끼에 지나지 않았는데, 여군들의 장비 없이 두 가지 소음을 분리해내는 것이 껄끄러웠다. 앨런은 완벽하지 않은 암호문을 약 5일에 걸쳐서 풀어나갔다.


  새벽 5시 20분, 앨런은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방에서 나갔다. 그의 크리스토퍼를 비롯해 모두가 잠잠했다. 


  앨런의 팀이 사용하고 있는 창고의 뒤뜰에는 벌써 스튜어트 멘지스가 와 있었다. 앨런을 발견한 멘지스가 그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다 풀었나?”

  “독일군이 버킹엄 궁을 목표로 한 두 번째 폭격을 준비하고 있다는군요.”


  앨런이 해독된 암호문을 건넸다. 


  “끈질긴 놈들이군.”

  “서서히 자신들이 밀리고 있다는 판단이 들 시기니까요. 단숨에 수장을 제압하는 것만큼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가져다주는 방법은 없잖습니까.”

  “…맞는 말일세.”


  멘지스는 불쾌해하지 않고 덤덤히 앨런의 말에 동의했다. 앨런 튜링만의 다소 독특한 화법에 관해서는 멘지스도 나름대로의 면역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수고가 많네. 가서 눈 좀 붙이도록.”

  “폐하는 대피시키실 거죠?”


  앨런이 물었다. 그의 물음은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고려해 볼 때 당연히 이어질 수 있는 질문이었다. 그렇지만 멘지스는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나도 그러고 싶다네.”


  앨런은 음성으로 표현된 암호를 만났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폐하는 끝까지 궁에 남으려고 하실 거야. 오히려 이 기회를 이용해 가족 분들을 설득하시겠지.” 

  “정작 폐하는 대피하지 않으시고요?”

  “아마도.”


  앨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멘지스는 이것만큼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했다. 앨런은 예나 지금이나 농담을 모른다는 대단히 이성적인 안색을 띄워 올리면서 멘지스의 추측에 대한 단평을 내놓았다. 


  “정말 훌륭한 폐하시긴 한데, 정작 그 분께서 돌아가시면 이 모든 상황이 수포로 돌아갈 텐데요.”


  멘지스가 살짝 웃었다.


  “그런 일을 막기 위해 나 같은 인간이 있는 걸세. 다시 연락 주게.”


  멘지스는 코트 깃을 정리하면서 들판을 밟았다. 앨런은 잠깐 멀어지는 멘지스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가 등을 돌렸다. 유독 인간에 대해서 둔감한 앨런은 마지막 응답이 실렸던 멘지스의 목소리에 낯선 억양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을 뿐, 그 의미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스튜어트 멘지스가 자신의 직분을 져버릴 인물은 아니라는 건 확실했으므로 앨런은 더 이상 그를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애석하게도 멘지스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다. 반나절도 안 되는 간격으로 밀려들어오는 전투 결과들과, 그보다 더 짧고 빠르게 엄습하는 폭격음에 지친 국왕은 눈두덩을 꾹꾹 눌러대면서도 고집을 세웠다.


  “부인과… 내 아이들을 부탁하겠네.”

  “지금 제가 폐하께 권하는 것은 도망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폭격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궁으로 돌아오실 수 있습니다.”

  “나는 이 자리를, 여길 벗어날 수 없네.”


  멘지스는 가까스로 국왕 앞에서 한숨을 쉬는 예의 없는 행동을 회피해냈다. 


  “폐하가 혹여 잘못되신다면 이 나라가 통째로 흔들릴 겁니다.”

  “내가 자, 자네에게 일러두고 싶은 건 다 말했어.”


  눈가에 머물러 있던 국왕의 손등이 미간과 이마까지 훑고 무릎 아래로 내려갔다. 그는 몹시도 피곤해보였다. 사람들 눈에 보이는 얄팍한 특권들을 누리는 대가는 너무도 컸다. 멘지스는 차마 입술조차 깨물지 못하고 국왕의 단호한 눈동자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만 가보게.”


  결국 멘지스는 자신의 국왕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멘지스는 왕비와 그녀의 품에 안긴 두 명의 자녀를 국왕을 위한 방공호로 안내했다. 어린 공주들은 왜 아빠는 우리랑 같이 가지 않는 거냐며 혼잣말 하듯 질문했다. 이에 멘지스가 답변하기를 꺼려서, 엘리자베스 왕비가 대신 국왕의 의지와 그의 신념을 쉬운 말로 설명했다. 그들 모두가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기를 바라는 남자는 또 다시 해군 제독의 정복을 걸쳐 입고 버킹엄 궁의 집무실에 있었다.


  멘지스가 벙커 제일 깊숙한 곳의 문을 닫았다. 그는 조용히 독일 공작 대원들을 몰살할 수 있는 방법을 궁리했다.


  그 날 밤, 버킹엄 궁의 지붕 반쪽이 부서져 내렸다. 집무실은 무사했으나 거의 방치 중이었던 국왕의 침실이 주저앉았다. 멘지스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전화기를 들었다.


  “앨런, 자네가 도와줄 일이 있네.”



 ⁂



  “…모험입니다.”

  “자네가 도와준다면 모험은 계획이 될 수 있어.”

  “구하려고 하는 사람을 미끼로 쓰는 경우도 있습니까? 영국 정보부의 전략은 아무래도 제가 알고 있는 상식을 벗어나나 보군요.”


  앨런의 질책이 따끔했다. 멘지스는 표정을 더욱 굳히면서 단언했다.


  “딱 한 번이야. 그 이후로 놈들은 버킹엄 궁에 그림자도 드리우지 못할 걸세.”


  멘지스의 손에는 아직도 갈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앨런은 정말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멘지스를 보면서 인상을 찡그리다가 팔을 뻗었다. 필경 멘지스는 앨런이 봉투를 받기 전까지, 심지어는 앨런이 뒤를 돌아도 그것을 들고 있었을 것이었다. 

  

  “…이 거짓 정보를 독일 측에 흘리면 되는 겁니까?”

  “그렇네.”

  “버킹엄 궁 근위대원들의 교대 시간을 독일이 오해할 수 있게끔요.”

  

  멘지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디 국왕 폐하를 잘 지키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껏 버킹엄 궁의 폭격을 예견할 수 있게 해 주었던 암호들과 유사한 형태가 여전히 새벽녘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고 있어요. 다른 큰 일이 벌어질 지도 모른다는 겁니다.”

  “자네의 노고는 늘 고맙게 여기고 있네.”

  “암호문이 완성되면 또 알려드리도록 하죠.”


  멘지스는 앨런을 먼저 보냈다. 그는 의도적으로 밤바람을 맞았다. 얄팍한 희망도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계획안에 녹여낼 수 있는 천재 해독가는 여러모로 멘지스의 구원투수였다. 그는 다소 도박적인 그림에 기반하고 있는 이 작전을 앨런 튜링이 튼튼하게 뒷받침할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낯익은 잡음에 앨런이 기지개를 켰다. 그가 버릇처럼 시계를 끄집어왔다. 늘 보던 모양의 눈금이 아니었다. 새벽 1시 45분. 이르고 기이한 숫자에 앨런은 자신이 파악해야만 하는 변화점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게다가 잡음은 2분도 채 지속되지 않았다. 정신이 번쩍 든 앨런이 입술과 손을 동시에 움직여가며 암호를 자신의 언어로 풀어냈다. 


  “…맙소사.”


  앨런이 다급하게 일어났다. 의자와 책상이 부딪히면서 펜이 굴러 떨어질 뻔했다. 앨런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이 시간에는 눈을 질끈 감고 잠을 청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잊은 채 뛰었다. 


  “스튜어트 멘지스 경 부탁합니다. 급한 용건이에요. 거기 있죠? 이 상황에서 퇴근할 양반은 아닐 텐데.”

  —…본부에 계시긴 합니다만 멘지스 경께서는 이제 막 잠자리에 드셨는걸요.

  “그럼 깨워요! 국왕 폐하에 관한 일이란 말입니다, 빨리요!”

  

  갈라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교환원도 앨런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머리가 깨끗해짐을 느꼈다. 잠시 후 멘지스가 답했다. 


  —앨런? 무슨 일인가?  

  “당장 버킹엄 궁으로 가요. 당신의 그 계획이라는 게 엉켰습니다.”

  —뭐라고?


  앨런이 불안하게 전화선을 쥐면서 외쳤다.


  “그들이 거짓 정보를 믿지 않았어요. 근위병들이 교대하는 그 3분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 암호문은 내부의 공작원들에게 조지 6세를 암살하라는 지령이었습니다. 서둘러요!”


  스튜어트 멘지스가 독일군에게 버킹엄 궁이 비는 시각이라며 귀띔해준 숫자는 오전 1시 24분이었다. 


  국왕을 습격하기 위해 조직된 독일군 특수부대가 올 거라는 첩보에 바짝 긴장해 있던 근위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실제로 근위병들의 교대가 진행되는 건 1시 57분이었다. 근위병들은 아직 오지 않은 적들을 기다려야 하는지, 관례와 규율을 준수하여 겨우 눈곱을 떼어내고 있을 동료들에게 성문과 궁을 내어줘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통화는 끊어졌으나 앨런 튜링은 곧바로 수화기를 놓지 못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 했음에도 그는 불안하게 창밖을 바라보았다. 블레츨리 공원에서는 버킹엄 궁이 보이지 않았다. 스튜어트 멘지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멘지스는 모든 것을 무시하며 달리고 있었다. 


  첫 번째로 버킹엄 궁을 테러했을 때부터 영민한 독일군들에게는 전략이 있었던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들이 언제든지 영국의 상징을 노릴 수 있다는 점을 드러냄으로써 영국군의 사기를 약화시키는 것으로 만족하다가, 두 번째 타격으로 국왕을 제외한 상당수 인원을 궁전에서 탈출하게끔 만든다. 독일 측은 미국 여자에 눈이 먼 형과 자신의 개인적인 단점까지 극복해낸 저 끈질긴 왕이 쉽게 약한 모습을 내보일 만한 선택지를 고르지 않으리라는 걸 간파했다. 


  결론적으로 버킹엄 궁은 조지 6세와 그를 호위하고 위한 병력만이 남아 있는 다소 고요한 곳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독일군의 타깃은 조지 6세였다. 태양의 핵심을 저격해 떨어뜨리기 위한 공작원들이 신속하게 발을 놀렸다.


  본디 태양은 밤과 싸우지 않는 법이었다. 멘지스는 너무도 섣부르게 그 진리를 뒤집어 버렸던 자신의 어리석음에 화가 났다. 영국의 빛이 져버리는 것은 멘지스의 생명이 유지될 명분이 사라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격수들과 그를 막으려는 단 하나의 남자가 대치를 위하여 궁전으로 집결했다.


  조지 6세의 손이 자유로워진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국왕은 잉크와 종이 냄새가 밴 손끝을 한 번 닦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필 침실이 무너진 시점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그리웠다. 국왕은 무거운 제복의 상의를 벗어 의자에 걸어둔 뒤 소파에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오래간만에 영국의 밤하늘이 까맸다. 총탄과 굉음이 몇 번인가 빚어냈던 부조리한 백야 현상이 오늘만큼은 몸통을 수그릴 모양이었다.


  1시 55분, 태양을 겨냥한 공작부대의 저격이 개시되었다.


  멘지스는 궁의 최전방 정문을 지켜야 하는 근위병이 고개를 숙인 것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총을 뽑아들었다. 


  “기습이다!”


  궁의 내부는 벌써 아수라장이었다. 두꺼운 헬멧과 묵직한 보호구들로 몸을 빈틈없이 감싼 독일의 특수부대원들은 비슷한 숫자의 근위병들을 압도했다. 멘지스는 중앙 계단에서 힘싸움을 벌이고 있는 놈의 뒤통수를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얼떨결에 타인의 피를 이마에 묻힌 근위병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폐하의 집무실로!”


  근위병은 자신의 모자도 내팽개치고 네 발로 계단을 올랐다. 


  “기습이다! 독일군의 기습이다!”

  “폐하를 지켜!”


  근위병들은 궁 어딘가에 있을 그들의 지도자가 몸을 숨기길 바라면서 억지로 큰 소리를 냈다. 멘지스는 문득 자신의 코트 자락이 매우 거추장스럽다는 생각을 했으나 그걸 벗을 시간조차 아까웠다. 그는 단 3분만 자신의 빛을 보호하면 되었다. 그것 말고는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멘지스는 이번엔 독일군 한 명의 다리를 맞추었다. 그러나 둔탁한 보호구 때문인지 관통상을 면한 적은 뒤를 돌아보고는 그들만의 거친 억양을 내지르면서 멘지스를 가리켰다. 멘지스는 옆에 쓰러져 있던 근위병의 칼을 뺏더니 망설임 없이 그것을 던졌다. 독일군의 머리 중앙에 날카로운 구멍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주변에 멘지스가 뺏어서 쓸 수 있는 칼이 많았다. 그가 냉철하게 눈을 치켜뜨고 앞으로 내달렸다. 궁의 후문 쪽에 있던 근위병들이 홀에 도착했다. 그러자 독일군들은 한 가지 묘책을 발휘했다.


  사실 전장에 배치되는 저격수는 대개 소수다. 부대원들은 최고의 스나이퍼를 몸으로 가려주면서 영국이 영원한 석양이 지도록 만들어달라는 뜻을 전했다. 선택받은 단 한 사람의 저격수가 몸을 돌렸다. 멘지스는 벌써 네 명 째 독일군의 머리통을 꿰뚫고 있었다.


  스나이퍼는 아주 조심스럽게 조지 6세의 집무실로 접근했다. 문은 잠겨 있었다. 최대한 소음이 나지 않도록 문고리를 말아 쥔 최후의 총잡이가 확 손잡이를 잡아 빼면서 온몸으로 문과 충돌했다. 나무로 만들어진 문이 길쭉한 조각을 흩뿌렸다. 


  조지 6세는 책장 뒤쪽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는 소란을 감지하자마자 제일 먼저 꺼내들었던 총을 두 손으로 꽉 잡았다. 안에 들어있는 탄환은 일곱 발이었다. 그는 눈을 감고 바닥을 천천히 압박하는 발자국 소리에 집중했다. 그가 팔을 서서히 옆으로 틀었다. 하나, 둘, 왕좌에 오르는 것조차 원치 않았던 남자는 살인을 준비하기 위한 셈을 중얼거렸다.


  셋. 보이지 않는 곳에서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것은 총성이 아니었지만 국왕은 개의치 않고 총구를 앞으로 뻗었다.


  “…멘지스.”


  옷이 잔뜩 찢어진 스튜어트 멘지스가 손에 묻은 핏방울을 털어내고 있었다. 


  “폐하.”


  멘지스는 정중한 음성과는 달리 매우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스나이퍼가 쥐고 있던 총을 발로 쳐냈다. 긴장해 있던 국왕의 어깨가 내려앉았다. 


  “…시, 십년감수했군.”

  “괜찮으십니까.”

  “다행히도 그렇네. 자네, 정말로 적절한 때에 나타나 주었어.”


  멘지스는 여전히 무엇인가에 화가 난 기색이었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무슨 소린가?”

  “이 기회에 폐하를 노리는 적들을 완전히 척결하려고 했었습니다. 거짓 정보로 그들을 유혹한 뒤 모두 잡으려고 했죠.”

  “…여기서?”


  잔당들을 처리한 근위병들이 앞 다투어 국왕의 집무실로 밀려들었다. 이리저리 베이고 구멍이 난 코트에 손을 닦고 있는 정보부의 간부 앞에 생채기 하나 나지 않은 국왕이 서 있었다. 조지 6세는 가벼운 손동작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무사함을 알렸다. 


  “절대로 폐하를 이런 곤경에 빠뜨리려던 의도는 없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젠장….”


  뒤편의 근위병들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공중에 물음표를 띄워 올렸다. 국왕이 근위병들에게 눈짓했다.


  “당신이 더 이상 죽음과 붙어 있는 꼴을 참을 수 없어서 그만 성급하게 굴었습니다.”

  “멘지스.” 

  “죄송합니다, 폐하.”


  새벽이 흘러가는 속도는 진실로 느릿해서, 장막 뒤편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해가 기어코 하품을 토해내게 만들었다. 빛은 오지 않았다. 고개 숙인 멘지스는 자신의 후각을 괴롭히며, 나아가서는 이 공간에 다시는 존재해서는 안 될 피 냄새만을 느꼈다. 침묵하는 조지 6세에게서는 태생적인 기품을 제외하면 어떠한 기류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모든 가치를 만족할 수 있는 상징적인 절대성은 태연하게 화약 냄새와 텁텁하고 비릿한 향들을 맡았다. 국왕이 입을 열었다.


  “날 구해줬으니… 그걸로 됐네.”


  국왕이 책상 위에 총을 내려놓고 멘지스에게 다가왔다. 


  “내가 죽음과 붙어 있다는 건, 무슨 뜻인가?”

  “…폐하가 한사코 피신을 거부하셨잖습니까.”

  “그럼 오, 오늘 일도 내 탓인가?”


  멘지스가 정말로 듣기 싫은 말을 들었다는 듯이 반응했다. 


  “젠장, 그게 당신 탓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조지 6세는 잠시간 그를 보고 있다가 갑자기 진로를 바꿨다. 사라진 빛의 그림자에 멘지스가 놀란 새에, 국왕은 완전히 가치가 추락한 멘지스의 코트를 아래로 당겼다. 한낱 천조각에 지나지 않는 코트에 의지하고 있던 멘지스의 상체에는 여기저기 균열이 가 있었다. 


  “내가 여기서 자네를 붙잡고 있으면 자네가 죽는 건 아, 아마도 내 잘못이겠군. 가보게.”

  “폐하.”

  “이런 것까지 명령하고 싶지는 않아.”

  “…사과는 안 받아주실 겁니까.”


  이에 조지 6세는 멘지스가 언제나 경애하는 미소를 지었다. 그가 문지방을 떡하니 가리고 있는 시신을 슬쩍 피해서 자신의 심부름을 할 수 있는 사람을 직접 불렀다. 멘지스는 점차 색깔이 변해가는 자신의 셔츠 상태를 아는지 모르는지 국왕의 측면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국왕은 멘지스의 곁으로 즉시 돌아오지 않고 책상 서랍을 열었다. 그가 잘 졉혀져 있던 손수건을 몇 장 꺼냈다. 멘지스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자네도 직접적인 표현은 즐겨 쓰지 않으면서.”


  자신이 상처를 감아주는 행동을 재량껏 해석해보라는 뜻이었다. 덕분에 멘지스는 국왕의 한 마디를 단순한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상대방이 그것을 원한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은 정보는 흘리지 않는다는 태도는 정보부에서 활동하면서 생긴 일종의 직업병이었다. 위대하지만 수줍음을 타는 국왕은 멘지스가 자신의 빛을 거부하지 않는 것으로도 애써 만족해하며 자신을 위로해왔고, 그의 그림자마저 찬미를 거듭할 준비가 되어 있는 멘지스는 그저 국왕이 대답을 요구한 적이 없다는 핑계를 들어 언어와 행동을 모두 아낀 채 무형의 애정만을 보냈다. 국왕과 자신만이 공유하고 있는 오래된 역사를 떠올린 멘지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매듭이 멘지스의 팔을 수호했다. 손수건의 끝자락을 묶으면서 그만 국왕의 손가락에 피가 묻었다. 국왕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닥에 떨어져 있는 멘지스의 코트가 저절로 몸을 들썩였다. 


  이윽고 의사가 시체를 보고 한 번 화들짝 놀란 뒤 방으로 들어왔다. 국왕이 자리를 비켜주었고 멘지스가 살짝 얼굴을 움직였다.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의 웃음을 목격하였다. 



  

 Sherlock with Kingsman: The Secret Service

- Sherlock Holmes & John Watson meet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Gentleman, Detective, and London Adventure







  존 왓슨은 노트북 자판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있었다. 입력창의 커서가 그에게 생각을 촉구하면서 깜빡거리고 있었다. 한참 입술을 오물거리며 머리를 굴리던 존이 조금씩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내가 이 블로그에 올리는 일들은 세상에서 지루한 걸 제일 참지 못하는 셜록 홈즈가 끌어 오는 게 대부분이다. 아마 앞으로도 내가 겪는 온갖 골치 아픈 사건들은 다 그 자문 탐정 때문일 터다. 하지만 오늘 기록하려는 이야기는 그에 대한 아주 드문 예외가 될 수 있겠다. 이번 사건은 나의 작은 행동으로부터 시작되었던 데다, 특별한 게스트까지 꼈기 때문이다….


  존 왓슨은 잠시 며칠 전 일을 더듬었다.





  사람들은 존 왓슨이 셜록 홈즈의 플랫메이트이자 그의 조수인 줄 알고 있지만, 그는 아직까지 유효한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의사였으며 셜록 홈즈의 파트너라는 건 그의 직업은 아니었다. 이틀 전에 셜록과 폐쇄된 지하철을 누비느라 클리닉에 지각을 하고 말았던 존은 자청하여 야간 진료를 마친 마지막으로 문단속을 하고 있었다. 다소 거친 방법이긴 해도 현실적 감각을 환기시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확인 차 문고리를 한 번 당겨본 존이 하품을 하며 돌아섰다. 베이커 가 221B번지로 귀가를 재촉할 때가 된 것이었다. 존이 양 다리에 힘을 불어넣으며 걸었다. 그러나 그의 기운찬 발걸음은 열 번도 이어지지 못했다.


  존은 울타리에 매달려서 거의 쓰러져가는 청년을 보고 미간을 찡그렸다. 드러내 놓고 울타리 속으로 얼굴을 들이밀려 하는 폼이 수상쩍으면서도 도둑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저기요?”


  야구 모자를 눌러쓴 청년은 존의 말소리보다 더 크게 헉헉대고 있었다. 청년은 행여나 울타리가 옆으로 기울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거기에 깔려 빠져나오지 못할 듯 보였다. 존은 청년이 대단히 탈진해 있다는 걸 간파했다.


  “괜찮아요?”


  청년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존이 탄식했다.


  “오, 세상에.”

  “저기, 저, 조금만 저 뒤쪽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청년은 펜스 안쪽의 수풀들을 간신히 가리켰다. 하지만 존은 그것을 다급히 치료를 요구하는 환자의 손짓으로 알아들었고 그 요청을 기꺼이 수락하기로 했다.


  “안으로 들어와요. 자, 날 잡고 일어나 봐요. 걸을 수 있겠어요?”


  청년이 조금씩 길가에서 벗어났다. 청년은 이제 자신을 부축하는 남자에게서 팔을 풀고 수풀 밑으로 미끄러져 숨으려고 했다. 그런데 동글동글한 얼굴의 남자는 의외로 악력이 셌고, 런던의 1/4을 순식간에 가로질러야만 했던 청년에겐 남자의 힘을 이길 여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청년은 얼떨결에 클리닉으로 들어갔다.


  그 때만 하더라도 청년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을 했고, 존 왓슨은 의사의 본분이 지나치게 내면화된 자신의 일면을 조금 멋쩍어 했을 뿐이었다.





  “늦었군.”


  셜록 홈즈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일이 좀 있었어.”


  존이 한바탕 눈을 문질렀다. 밤 10시 45분을 가리키고 있는 시계를 보자 갑자기 따뜻한 우유가 절실해졌다. 평온하게 주방으로 향한 존은 식탁 앞에 앉아 있는 셜록을 지나치려다가 뒷걸음질을 쳤다.


  “맙소사, 자네 약도 해?”


  자문 탐정이 식탁 위에 늘어놓은 가루가 설탕이나 소금 같은 평범한 종류일 리는 없었다. 존은 열 가지는 넘는 하얀 물질들의 향연에 입을 떡 벌렸다.


  “지금은 아니야.”

  “…경험은 있다는 소리군. ‘지금은’ 안 한다는 말로 미루어봐선 때때로 즐긴다는 뜻이야?”

  “이건 사건 때문이야. 고약한 신종 마약이 돌고 있다면서 레스트라드가 도움을 청했어. 전에 팔리던 약들에서는 쓰지 않은 성분이 들어가 있으니 경찰이 헤매는 거겠지.”

  “그게 지금 식탁 꼴이랑은 무슨 상관인데?”

  “그 미지의 화합물이란 걸 찾아내야 할 거 아냐.”


  셜록은 숨만 들이쉬어도 약물이 흡입될 것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존은 고개를 모로 저으며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냈다. 냉장고가 셜록의 뒤편에 있는 바람에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가장 좁아졌던 그 순간 셜록이 머리를 홱 들었다.


  “잠깐만.”

  “응?”


  셜록이 뒤로 팔을 뻗어 존의 손목을 잡았다.


  “약은 내가 아니라 자네가 한 것 같은데?”

  “뭐라고? 아냐.”

  “자네한테서 희미하게 냄새가 나는데.”


  존이 몸통으로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대꾸했다.


  “그거야 자네가 나 없는 동안 이런 이상한 가루들에 코를 파묻고 있었으니까 그렇지. 난 마약 안 한다니까?”


  셜록은 존을 붙잡은 상태 그대로 등을 돌렸다. 서늘하고 창백한 피부 위에서 둥둥 떠다니며 빛나는 눈동자가 존을 훑었다. 그의 두뇌가 팽팽 돌아가는 소리와 온갖 연역적 세포들이 기지개를 켜는 소음이 존의 귓가에까지 닿았다.

 

  “…아까 무슨 일이 생겼었다고 했잖아. 자세히 설명해봐.”


  셜록이 진지한 만큼 존도 진심으로 머그컵을 가지러 가고 싶었다. 존이 팔목을 털었다.


  “잘못 짚었어, 셜록. 난 그냥 다친 데다 탈진으로 거의 쓰러져가는 청년에게 포도당을 놔줬을 뿐이야.”


  그 말에 셜록이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누군지 봐야겠는데.”





  “그건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제가 판 건 더더욱 아니에요! 거짓말 아니라니까요!”


  에그시는 목청껏 외쳤다. 전날 밤 힘세고 친절한 남자가 수액을 놔 주고 조촐하게나마 쉴 자리를 마련해 줬었기 때문에 어제보다 몸에 생기는 돌았지만, 그는 아직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이었다. 에그시는 총알 자국이 잔뜩 나 있는 벽지와 난로 위 해골 따위를 보면서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간밤에 자신을 도와주었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방관자의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고, 대신 쏘아 붙이는 말투보다 더 정감 가지 않는 인상의 남자가 에그시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있었다.


  “그럼 그 약은 왜 가지고 있었지?”

  “젠장, 그건 딘 때문이에요!”

  “딘?”

  “제 양아버지에요. 영국에서 구제불능 양아치들의 순위를 매기면 둘째가라면 서러울 인간이죠. 요새 끝내주는 약이 하나 나왔는데, 마약상이 자기한테는 안 팔겠다고 해서 자존심이 상했나 봐요. 그래서 놈을 골려주고자 저한테 도둑질을 시킨 거죠.”


  그러자 셜록이 그가 하루에 한 번쯤은 구사하게 되는 말투를 선보였다. 


  “아니, 시킨다고 마약상 물건에 손을 대는 멍청이도 있나?”

  “사정 모르면 가만히 있어요. 누군 좋아서 했나, 빌어먹을.”


  잠깐 투덜댄 에그시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에그시는 어젯밤 처음으로 자신을 향한 살기가 가득한 총성을 들었다. 에그시는 그것이 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칠 가능성을 우려했다. 셜록이 금방 풀이 죽은 에그시를 곁눈질로 훑었다.


  “당분간은 여기 있어.”

  “네?”

  “셜록!”


  오늘도 셜록 홈즈를 향한 청자들의 놀라움은 이어졌다. 그것은 언제나 셜록이 감당해야 할 하나의 수고로움이었으나, 그는 이번엔 ‘목 위에 달려있는 것의 용도에 대해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묻는 것 같은 눈빛은 지어내진 않았다.


  “네가 훔친 물건은 내가 경찰서에 넘기겠지만, 너한테 당한 그 마약상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니 계속 널 쫓으려 할 거야. 이럴 때는 그들이 너와 연관점을 찾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게 현명하지. 아마 그들은 네가 집으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걸.”


  소파에서 거의 일어날 뻔했던 에그시가 몸을 수그렸다. 그는 입을 비죽이면서도 셜록의 말을 이해했다. 사실 그걸 인정하기까지의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조용히 에그시를 관찰하고 있던 셜록이 에그시에 대한 평가를 아주 약간 상향시키게 만들 정도였다. 에그시가 소파에 흡수될 듯한 상체를 꿈틀거렸다. 


  “…그럼 언제까지 여기 숨어 있어야 하는데요?”

  “내가 범인을 잡을 때까지.”

  “그게 언제일 줄 알고요?!”


  셜록은 대답보다 먼저 의자에 얹어져 있던 코트를 집었다. 지금 자신이 행하는 몸짓이 마치 에그시가 믿을 수 있는 하나의 보증과도 같다는 모양새였다. 


  “오래 안 걸려.”


  에그시는 셜록이 바람처럼 핸드폰과 장갑을 챙기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에그시가 가져온 마약이 든 봉지를 비롯하여 몇몇 물품들이 탐정의 큰 손에 빨려 들어갔다. 존이 이크, 하는 소리가 절로 들리는 인상으로 셜록의 뒤를 쫓아갔다. 


  “딱 봐도 이상하게 보이는 물건들은 건드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에그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플랫에 혼자 남아 있었다. 





  에그시는 25분 째 한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존이 급하게 던져놓고 간 주의사항은 간단했고 비논리적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에그시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손아귀 힘이 좋은 의사와 온 구석이 비범한 탐정이 거주하는 집이었다. 에그시는 자신이 안전을 확인한 소파 이외에는 어떤 것과도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에그시는 소파에 누우면서 모자를 안대 삼아 잠을 청할 준비를 했다. 그는 운동화를 벗고 탐정의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을 담요 대신 덮었다. 


  잠시 후 에그시가 모자 속에서 슬그머니 눈을 떴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이 누군가의 발에 밟히면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그시는 탁자 위에 있던 컵을 살며시 끌어온 다음, 그 위로 팔을 축 늘어뜨렸다. 여차하면 침입자의 머리에 그릇 조각을 박아줄 심산으로 에그시가 호흡을 가다듬었다.


  발소리가 멎었다. 정체불명의 인물이 플랫 안으로 들어왔다.


  “…오.”


  대뜸 침입자는 뜻 모를 음성을 흘렸다. 


  “예상 밖인데.”


  에그시가 얼굴을 덮고 있던 모자를 치웠다. 우산을 들고 양복을 입은 남자의 생김새는 퀴퀴한 냄새가 나는 골목과는 대단히 거리가 멀어 보였다. 에그시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손님을 맞았다. 


  “원래 여기 사는 두 사람은 외출했어요. 언제 들어올지는 모르고요. 메모라도 남겨드려요?”


  마이크로프트 홈즈가 짧게 손을 저었다.


  “아니, 됐다. 셜록이 여기 없다는 건 알고 있었어. 사실은 네가 궁금해서 온 거거든.”

  “저요?”


  가운을 걷다 말고 에그시가 동작을 멈췄다. 에그시가 눈동자를 가늘게 뜨는가 싶더니 무기 대신 갖다 놓았던 하얀 머그잔을 앞으로 흔들면서 소리쳤다. 


  “와씨, 진짜 지독한 족속들이네. 저한테 그 물건은 없어요! 그, 어딘가 무시무시한 양반이 경찰서에 제출한댔어요! 그리고 솔직히 제가 좋아서 가져간 것도 아니고!”


  마이크로프트는 언짢다기보다는 어이가 없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마약 파는 사람처럼 보이니?”


  까맣고 길쭉한 탐정이 한 번 선보인 바 있는 말씨였다. 타인이 주변에 존재하는 사실과 증거들을 제대로 소화할 줄 모른다는 게 정말로 한심하고 비참하다는 감상이 신사의 한 마디에서 뚝뚝 묻어났다. 에그시가 더듬더듬 팔을 내렸다.  


  “그, 그래도 경계는 해야죠…?”

  “난 그런 저급한 범죄자들과는 거리가 있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좋아. 세상을 살다보면 가끔 자신의 호기심을 만족시켜줄 수 있는 수단과 정보를 가진 부류들이 있기 마련이지.”


  에그시가 아랫입술을 꾹 눌렀다. 그가 엉덩이만을 살짝 떼서 컵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는 다시 마이크로프트를 마주했다. 자신에게 명확히 고정되어 있던 신사의 눈빛은 아무래도 경계를 풀라는 의미가 아니었던 듯했다. 에그시가 의아함을 담아 한쪽 눈썹을 올렸다.


  “…메달이 독특하게 생겼구나.”


  대개 안쪽에 걸어두던 펜던트가 상의 바깥으로 나와 있었다. 에그시는 신사가 무엇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그건 어디서 났지?”

  “옛날에 집에 찾아 왔었던 한 남자분이 주셨어요. 잘 간직하라면서. 오, 망할. 그러고 보니 이걸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네!”


  말을 하다 말고 중요한 사실을 상기해낸 에그시가 펄떡 일어났다. 에그시가 전화기를 찾아 테이블과 탁자 위를 더듬었다.  


  “잠깐, 에그시.”


  신사는 이웃에 사는 청년을 부르듯이 에그시의 이름을 발음했다. 기회가 마땅치 않아 아직 플랫의 독특한 두 주인과도 통성명을 나누지 못한 에그시가 딱딱한 동작으로 등을 돌렸다. 책상 위에 있던 두꺼운 책 한 권이 에그시의 손과 밀착했다.


  한편 신사는 틈만 나면 사람을 가격할 만한 물건을 찾아내는 에그시의 긴장한 신경보다는 다른 것에 놀란 눈치였다. 

  

  “내가 따로 연락을 넣을 테니 수고로운 일은 안 해도 될 거다. 존은 아닐 것 같고, 아마 셜록이 여기 있으라고 했겠지? 이유 없는 행동은 하지 않는 아이니 잠시간은 그의 말을 들어주려무나.”


  신사가 에그시에게 작별하면서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에그시는 이쯤 되니 정체를 가늠할 수 없는 양반들에게서 벗어나기 전까진 자신의 사고를 꺼놓고 있는 게 좋겠다는 단정을 내리게 되었다.  





  템스 강변은 늘 그랬듯 시끄러웠다. 마이크로프트는 두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굳건히 억누르면서 장우산 끝으로 바닥을 긁었다. 단조롭기만 한 강바닥과 다리를 찬미하는 일군의 관광객들 덕택에 마이크로프트는 더욱 지쳐갔다. 그를 굳이 런던에서 제일 붐비는 장소로 끌어낸 장본인은 이번에도 약속 시간을 제때 지키지 않았다.


  마이크로프트가 한 오십 번쯤 바닥을 긁었을 즈음 누군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마이크로프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불러냈다고 시위하는 건가.”

  “사방이 뚫려 있으면서 인파가 많은 장소를 접선지로 고르는 건 기본이야.”

  “나는 자네처럼 스파이가 아니라서 조용한 곳을 선호하는데 말이지.”


  뿔테 안경을 쓴 신사가 마이크로프트에게 짧은 눈짓을 던졌다. 무표정한 가운데 뻔뻔함이 어린 반짝임은 마이크로프트에게 아무런 상해도 입히지 못했다. 그가 앞으로 밀려나 있던 우산을 발 옆으로 끌어당기면서 말했다. 


  “자네 조직에서 주는 메달을 걸고 있는 청년을 봤어.”


  신사의 표정이 미세하게 떨렸다. 영국 정보부 그 자체를 뒤집어쓰고 있는 자신과 그 복잡성을 겨룰 만한 신사의 위치를 알고 있는 마이크로프트는 흥미롭다는 듯이 눈썹을 올렸다. 


  “이름도 얘기 안 했는데 벌써 알겠다는 눈치군.”

  “…가장 최근에 그걸 받은 부인의 아들이겠지, 아마도.”

  “그 쪽으로 도움을 청하려고 했었는데 내가 제지했네.”


  신사가 아예 마이크로프트를 향하여 몸을 틀었다.


  “셜록이 그 청년을 붙잡아 두고 있어서 말이야. 그 청년이 필요한 일이 있는 모양이더군.”

  “자문 탐정이라는 자네 동생? 험하고 어려운 사건들만 도맡는다고 들었는데, 그렇다면 에그시가 위험한 것 아닌가?”

  “그래서 자네에게 알려주는 거 아닌가, 해리.”


  마이크로프트가 우산으로 땅을 가볍게 밀면서 방향을 바꾸었다. 보통 사람들은 살아가는 내내 접할 일 없는 정보와 사건들을 머리에 가득 쌓아두고 있는 두 남자가, 자신의 동생과 후견인쯤 되는 청년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마이크로프트는 그걸 조금 재미있게 여겼다. 


  “셜록이 자기 플랫메이트가 아닌 사람에게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타입이라서. 일만 끝나면 풀어주겠지만 그 전까지는 자네가 지켜보도록 해. 아무래도 그 청년이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것 같군.”


  해리는 말을 아꼈다. 마이크로프트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아, 저번 파일 건은 고마웠네.”


  화제는 사회적이지 못한 동생의 성격에서 순식간에 라이베리아에 거점을 두고 있던 불법 무기상을 소탕하게 만들어준 일급 정보로 옮겨갔다. 그 속에서 해리는 현기증 한 줌 느끼지 않고 먼저 강변에서 물러난 마이크로프트를 바라보았다. 주변을 어정쩡하게 서성대고 있던 인원들이 조금씩 마이크로프트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해리는 고개를 돌리고 안경다리를 약하게 눌렀다.


  “멀린, 부탁 하나만 하지.”   





  그 날 밤이었다. 모든 건 영리한 이들의 계산을 빗나가지 않았다.


  첫 번째로 들어맞은 것은 범죄자들은 아직도 에그시가 마약을 가지고 있다고 추측할 것이라는 셜록 홈즈의 예측이었다. 신종 마약을 만든 집단은 심지어 셜록이 작성해 놓았던 목록 안에 포함되어 있는 조직이었다. 뒤이어서 마이크로프트가 의문의 신사에게 에그시가 직면할 지도 모르는 위험을 알려준 행동이 현명했다는 게 밝혀졌다. 마약상들은 집착적으로 에그시의 꽁무니에 따라붙었다.


  다만 그들의 화가 상상 이상으로 깊었으며, 일개 권총이 아니라 온갖 흉악한 화기들로 무장했다는 건 모두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셜록, 경찰에 연락 안 했어? 왜 안 오는 거야!”

  “핸드폰을 잡고 있을 틈이 있어야지!”

  “망할!”


  그 와중에 셜록이 조준도 하지 않고 뒤편으로 총을 쐈다. 커다란 총들을 하나씩 쥐고 달려오던 마약상들이 멈칫했다. 존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두 번의 발포로 한 놈의 발목을 제압했다. 셜록의 코트 자락이 다시 사납게 나풀거렸고, 존은 셜록을 따라가기 위해 속도를 높였다.  


  “저 놈들 진짜 미친 거 아니에요?! 저런 바주카포 같은 걸 들고 오면 이쪽에서 어떻게 하라고!”


  한편 혼자서 비무장인 에그시는 운동화 바닥에 불이 붙을 지경으로 뛰고 있었다. 일평생을 살면서 들을 수 있는 총성이 한꺼번에 고막으로 밀려오는 통에 절로 험한 감탄사들이 튀어나왔다. 에그시가 고함을 내지르면서 팔을 저었다.   


  “그러니까 앞으로 누가 마약 훔쳐오라고 하면 꼭 무시하도록 해!”

  “제가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었다니까요!”


  존은 거의 절규나 다름없는 에그시의 외침을 무시했다.


  “셜록, 어느 방향이야?”


  셜록이 탄창에 들어 있는 총알의 개수를 슥 확인했다. 그가 침착하게 답했다.


  “그게 문제야, 존.”

  “왜?”

  “한 번 방향을 틀고 나면 그 이후로 갈 곳이 없어.”


  셜록은 일단 왼쪽으로 돌았다. 존이 그의 맞은편으로 가 엄호 사격을 준비하듯이 총을 쥔 손을 모았다. 에그시는 그들의 뒤에서 잔뜩 불안하게 눈을 굴렸다. 셜록이 코너 밖으로 조금씩 팔을 이동시키면서 다른 쪽 손으로는 전화를 걸었다.


  “지금 당장 지원이 필요합니다. 윔폴 스트리트, 아마도 90번지쯤 될 것 같군요. 마약상들에게 쫓기고 있고 총탄은 10발이 채 안 남았습니다. 서둘러요.”


  셜록은 신속하게 핸드폰을 넣고 양 손으로 단단하게 피스톨을 감쌌다. 


  “아무리 빨라도 5분은 걸릴 거 아냐?”

  “그렇겠지.”

  “그 때까지 버틸 수나 있을지 모르겠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존은 흔들림 없이 적들과의 거리를 재려 힐끗 고개를 내밀었다. 셜록과 존이 눈빛을 주고받았다. 손잡이 부분을 잡고 있는 셜록이 천천히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셜록과 존이 동시에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에그시가 안면을 잔뜩 찡그리면서 눈을 감았다.


  총성이 들리지 않았다.


  의사 양반이 다급하게 ‘셜록!’ 하는 목소리도 없었다. 에그시가 차근차근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셜록과 존은 그의 곁으로 돌아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부상을 입은 상태도 아닐 듯했다. 에그시는 속으로 물음표를 그리면서 조금씩 넓은 길목을 향해 발을 움직여보았다. 

 

  “세상에, 대체 이게 무슨….”


  소총이 하늘 위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에그시가 멍하니 빛깔 없는 불꽃놀이를 펼치고 있는 화기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저 사람이 레스트라드가 보낸 지원군은 아니겠지. 자네 형인가?”

  “…마이크로프트가 이런 일에까지 나서지는 않는데.”


  셜록과 존은 에그시보다 앞서 마약상들의 무기와 몸통이 재료가 되고 있는 구경거리를 감상하는 중이었다. 범죄자들은 마치 태풍의 핵심으로 박치기를 하듯이 한 방향으로 모여들었다가 일제히 나가떨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약간씩 흩날리는 정장 상의와 불쑥 솟구치는 장우산의 손잡이가 있었다. 


  험악한 목적으로 근육을 키운 마약상들을 제압하는 중인 주인공은 딱 붙는 슈트 때문에 일견 호리호리해 보이는 체격을 가진 신사였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굽히고 구둣발을 비비며 덩치들 사이를 누볐다. 단 하나의 목적을 공유하고 있을 뿐 제각각 움직이고 있는 신사의 사지는 한편으로는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나뭇결이 두드러진 우산은 거구들의 팔과 목을 가리지 않고 휘감으면서 그들을 신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집어던졌다. 


  셜록이 천천히 총을 집어넣었다. 우산 꼭지가 손가락 마디를 부러뜨리는 실감나는 소리에 맞춰 존도 들고 있던 총을 갈무리했다. 그 찰나에도 장총의 아랫부분이 분리되었고 신사의 팔꿈치가 한 놈의 명치를 찍었다.


  마무리를 고하며 신사가 팔목에 우산을 걸었다. 그의 정갈한 구두 앞코가 휙휙 총들을 밀어냈다. 


  “늦지 않아서 다행이군.”


  신사가 세 사람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안녕, 에그시.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구나.”


  에그시는 탄성 대신 바람 빠지는 소리를 흘렸다.


  “…아니 다들 제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예요? 모르는 사이에 제가 런던에서 유명인이라도 됐나?”

  “나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었다는 걸 아는 사람을 통해서 들었지. 모두들 다친 곳은 없는 것 같으니 다행일세.”


  에그시에게 살풋 호의가 담긴 미소를 짓던 신사는 삽시간에 표정을 바꾸고 셜록과 마주했다. 


  “자네가 셜록 홈즈?”

  “…마이크로프트와는 어떻게 아는 사이입니까?”

  “일하는 분야가 조금 겹친다고 해두지. 이제 이 청년의 신병은 내가 맡아도 되겠나?”


  셜록이 힐끗 존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눈동자에는 벌써 온갖 추측들이 담긴 피켓들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셜록이 소리 나게 팔을 상체에 붙였다.


  “범인을 잡았으니 뭐, 좋으실 대로.”

  “고맙군. 에그시, 함께 가지.”


  에그시는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신사의 뒤를 따랐다. 멀리서 경찰차의 사이렌이 다가오고 있었다. 





  엄밀히 말해서 이번 사건을 해결한 건 셜록 홈즈가 아니라 그 베일에 싸인 신사일 지도 모른다. 그는 나타났을 때만큼 아주 비밀스럽고 빠르게 사라져버려서 이름도 묻지 못한 만큼, 그를 그저 ‘신사’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게 안타까울 정도다.


  존은 잠시 자판을 치던 움직임을 멈추고 입가를 매만졌다. 훌륭한 맺음말을 고민하던 존이 무심코 화면을 보았다.


  “어, 어?”


  존이 2시간 가까이 써내려간 포스트 내용이 멋대로 지워지기 시작했다. 존이 놀라서 양손을 책상 밑으로 내렸지만, 커서는 망설임 없이 문장들을 지워갔고 마침내 노트북의 화면 위에는 아무런 글자도 남지 않게 되어버렸다.


  존이 입을 벌렸다. 그의 손은 여전히 책상 아래에 있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일은 대중들에게 공개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닥터 왓슨의 이해를 바라며, 좋은 밤 되시기를.


  이윽고 인터넷 창이 꺼져버렸다. 





  “진짜 저 구하러 와주셨던 거예요?”

  “그래.”

  “전 오늘 아저씨를 처음 봤는데요?”

  “그것이 우리 사이에 인연이 없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아.”

  “아저씨 정체가 대체 뭔데요?”


  마침 빨간 불이 켜져 있는 신호등으로 인해 신사가 멈춰 섰다. 그가 안경 너머에서 눈썹을 부드럽게 내렸다. 호기심과 경외감이 청년의 눈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내 이름은 해리 하트, 내가 너에게 그 메달을 줬었단다.”


  두 사람의 눈앞에 처음으로 웨스트민스터로 향하는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판이 등장했다.




[Crossover/칸쿠퍼] The First and Last Favor

- Anything/Crossover 2015. 2. 11. 11:15 posted by Jade E. Sauniere

Based on Interstellar by Christopher Nolan

Khan Noonien Singh & Joseph Cooper Crossover

Written by. Jade


The First and Last Favor






  세계가 종잇장처럼 펼쳐졌다. 칸은 100년간 준비한 자신의 망명이 성공했음을 알았다.


  아직 그의 위치는 애매했다. 그는 자신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살고 있는 세계로부터 탈출했으면서도, 그의 본질까지 일반적인 생명이 살아가는 근본을 벗어나지는 못했기 때문이었다. 칸은 모호한 상태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강화인간이라는 독특한 정체성으로도 다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덩어리(bulk) 안에서 그는 발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밟는다는 느낌은 나지 않았다. 시공간을 발바닥으로 지그시 눌러본다는 것은 언어의 형체 없는 힘을 빌리지 않으면 표현도 할 수 없는 것이기에 그것은 당연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깔을 섞으면 검은색이 되듯이, 모든 시간과 공간이 응축된 그곳은 새까만 색이었다. 칸은 자신이 이 공간이라도 할 수도 없는 거대함에서 얼마나 생명 활동을 이어갈 수 있을지 추정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자신이 인류와 영영 헤어진 것이 맘에 들 뿐이었다. 인간은 그 대상이 자신보다 미개하든 우월하든 상관하지 않고 소모해버릴 수 있었다.  


  증오와 애정, 압도적인 다수 속에서 존재하는 단 몇 가지 예외를 겪으며 지친 강화인간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마음으로 공허를 걸었다. 어떠한 일도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의 지평선(Eventual Horizon)이었다.


  그곳에서 칸은 또 다른 공간이 펼쳐지는 소리를 들었다. 


  칸은 그저 인간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얻게 된 자유와 상실감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는 혹시 자신의 사유가 이 덩어리에 영향을 주었을 지도 모른다고 여기면서 지평선을 꾸준히 따라갔다. 어차피 사방은 모두 까만색 무기질로 뒤덮여 있었으나 칸은 자신이 이동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칸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검은색에 묻혀 있던 색채들이 프리즘에 의해 갈라진 것 같았다. 그는 지상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선과 면으로 이루어진 건너편을 바라보았다. 칸은 조심스럽게 건너편을 향해 다가갔다. 그는 아직 추상적인 암흑보다는 색깔과 면이 존재하는 곳에 자신이 속하는 게 옳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칸은 자신이 그토록 멀어지려고 했던 인간을 보고 걷기를 멈추었다. 하얀 슈트를 입은 사람이 색채들 위에서 떠다니고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칸은 이제 이곳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번엔 인간이 아니라 사각형 모양의 로봇이 블록을 사지처럼 움직이며 말을 걸고 있었다.  


  —혹시 ‘그들’ 중 하나인 겁니까? 쿠퍼는 어디 있죠?


  칸은 습관대로 자신이 대답할 수 있는 것만 말했다.


  “…저 인간을 말하는 건가?”


  칸은 고갯짓으로 면을 붙잡고 있는 사람을 가리켰다. 강화인간의 눈에는 연약해 보이고, 덩어리의 시선에서는 무한히 허망할 수도 있는 몸짓으로 그는 손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로봇은 칸이 가리킨 지점을 확인하고 다시 공간 속을 헤엄쳤다. 칸은 어둠과 색채가 한 조각의 기계로 이어질 듯한 환상을 보았다.

  

  “잠깐.”

  —뭐죠?

  “저 인간은 왜 이 곳에 왔나?”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죠.


  칸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여기는 인류와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영역이야. 그런데 여기서 어떻게 인류를 구할 방법을 찾아, 그걸 구하고자 하는 대상에게 전달할 수 있겠나?”


  —그건 저도 알 수 없군요. 쿠퍼가 아마 해결책을 제시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그 쪽도 혹시 블랙홀로부터 얻은 양자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는 방법이 생각나면 알려줬으면 좋겠군요.


  칸이 로봇이 알려준 정보를 다 흡수하기도 전에 가장 인간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지 마! 칸은 몸을 틀었고 동시에 인간과 조금 더 가까워졌다. 이 멍청한 놈아, 네 딸을 버리고 가지 말라고! 그 소리에 반응한 것은 로봇이었다. 로봇은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과 색의 경계에 걸쳐져 있었다. 

  

  인간의 목소리에 의해 덩어리는 순식간에 친숙한 곳으로 변모했다. 


  면으로만 명명할 수 있었던 관념들은 이제 두 사람을 가로막은 실체적인 벽이었고, 시공간이 어떤 미지의 방법을 통해 결합되어 있는 배경은 블랙홀이라는 다소 낯익은 무언가로 격하되었다. 세계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웠던 이 세계는 인간 남자가 딸을 그리워하는 사적인 장이 되었다. 칸은 로봇과 함께 가시화된 절망에 매달려 있는 쿠퍼를 응시했다. 그러면서 칸은 400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중력을 이용해보지 그러나.”


  로봇이 즉각 본체를 돌렸다.


  —뭐라고요?

  “시공간이 응축된 환경에서 유일하게 작용 가능한 힘은 중력뿐이야. 그러니 기댈 수 있는 것도 중력밖에 없지.”

  —중력에 데이터를 실어 보낸다고요?

  “중간에 매개물을 두면 되지 않나. 실존하는 모든 것들은 중력에 의해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으니까.”

  —참고하지요. 

  

  로봇이 색채의 밑바닥을 타고 올라갔다. 로봇은 더 이상 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아마 두 사람 사이에는 통신기가 있고, 그걸 통해서 진행되는 대화는 칸의 귀에 잘 들리지 않을 지도 몰랐다. 로봇이라 하더라도 이곳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이 인간 남자를 많이 안정시킨 모양인지, 그는 더 이상 크게 소리치지 않았다. 


  칸은 경계를 건너지 않고 인간 남자와 로봇을 올려다보았다. 인간의 모든 것과 멀어지고 싶어 선택한 탈주에서 그는 처음으로 인간을 위해 거짓 없는 해답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이 타자와 유착되길 원하는 인간의 증오스러운 특징에서 비롯되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사실 칸은 자신의 망명을 더럽힌 인간을 굳이 돕고자 한 이유를 알고 있었다.


  칸은 중력을 빌어서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동족을 기억했다. 그는 자신의 탄생과 진화와 비극에 모조리 기여한 인간을 더 이상 무엇이라고 한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고개를 다시 똑바로 드니 색채가 어둠에 빨려들고 있었다. 어쩐지 인간 남자와 로봇이 죽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신 칸은 시공간에 대고 자신은 이 끝없는 추상에 머물게 해달라고 속삭였다. 덩어리는 그에게도 호의를 베풀었다.


  사건의 지평선은 끝없이 흘렀다. 



[Crossover/칸웨인] Justifying Hero

- Anything/Crossover 2014. 6. 5. 12:23 posted by Jade E. Sauniere

 철근과 유리로 만든 건물이 이루는 숲에 청색 꽃이 피었다. 그 꽃의 뿌리는 포유류의 다리처럼 양쪽으로 뻗어서는 꼭 사람처럼 기우뚱대며 땅을 딛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에서 핀 파란색 꽃이 걸어 다닌다. 웨인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오감이 의식을 이기질 못했다. 지금이라면 천사와 악마가 서로의 날개를 바꿔 끼는 모습을 봐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웨인은 이 기막힌 상황의 문제를 파악해보려 애썼다.

 

  문제는 화신이 인간보다 강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미친 듯이 날뛰고 있는 감각이지만 결국 그 감각의 그물에 잡히는 것만 쓰러뜨릴 수 있다는 진리가 문제였다. 웨인은 용케도 자신이 사태를 옳게 파악하고 있음에 만족해했다. 그는 명확하게 윤곽이 잡힌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고민해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사방에 청색 꽃이 있었다. 웨인의 머릿속에도 그것은 존재했다.

 

 

  Based on Batman Trilogy by Christopher Nolan

  Khan Noonien Singh & Bruce Wayne Crossover

  Written by. Jade

 

  Justifying Hero


 

  인간의 무의식에 퍼져 있는 온갖 상념들을 양분처럼 빨아 먹으면서 자라는 꽃에 대하여 웨인이 자신 있게 표출할 수 있는 감상은 신비로움이었다. 새벽을 닮은 파란빛과 극지방을 제외한다면 대륙에서 가장 추운 산자락에서 자란다는 점, 시야를 어지럽히는 향기 등 그 꽃의 모든 것이 불가사의했다. 그런데 사실 그가 가장 의아하게 여기는 점은 꽃이 남성의 목소리를 낸다는 것이었다. 웨인이 들어본 것 중 제일 낮고 부드러우며 우아한 음성으로 꽃이 건넨 첫 마디는 이랬다. 특이하군. 

 

  웨인은 그 말을 꽃이 했다고 구별하기 위해 며칠을 소비했다. 그것은 자신의 잠꼬대 같기도 했고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본심의 일면 같기도 했다. 아주 빗나간 표현은 아니었다. 그는 눈 덮인 땅에서 청색 꽃을 꺾었으나 그것의 향기가 웨인의 머리에 박혀 성장을 했으므로, 꽃과 대화를 나눈다는 건 자신의 머릿속에다가 말을 거는 것과 같았다. 

 

  너는 화신을 담은 기반이며 단 하나의 법칙을 위해 일궈져야 하는 농지이다. 

 

  웨인은 놀라면서 필사적으로 그 목소리를 거부했다. 무의식은 굳이 현재에 머물러 있지 않아도 된다. 그것을 아는 웨인은 과거를 회상하고자 온 힘을 기울였다. 그의 시선을 스쳐 지난 청색 꽃이 순간 낯선 여성으로 보였다.

 

  꽃, 환상, 화신, 여러 가지로 칭할 수 있는 목소리를 만난 곳은 브루스 웨인이라는 이름이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거기서 화신은 유일하게 그가 브루스 웨인이라는 것에 주목해주었다. 나 말고도 그 꽃의 향기를 맡은 사람은 꽤 될 텐데? 듀카드도 그랬을 거고. 침대에서 뒤척이며 내뱉은 혼잣말에 화신은 대답했었다. 그들은 너보다 비옥하지 않았다, 웨인. 화신이 자신에게 어울리는 비옥도를 측정하는 기준은 독특했다. 웨인은 알쏭달쏭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않는다고 해도 너는 그의 아들이다. 웨인은 그 말에는 웃을 수 없었다. 

 

  청색 꽃의 화신에 대하여 웨인은 단 한 가지를 확신할 수 있다. 화신은 사적인 복수자를 꿈꾸었던 웨인에게 영웅의 꽃내음을 불어넣었다. 상징적인 의식에 불과한 줄 알았던 향을 맡는 일이 처음으로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그 때 그걸 신에게 빚진 걸로 생각하지 않았던 게 내 잘못이었나? 회상이 진행되고 있던 와중에 웨인이 툭 혼잣말을 하자 그걸 놓치지 않고 화신이 목소리를 냈다. 너는 영웅이다.

 

  “너는 영웅이다.”

 

  웨인은 진심으로 놀라 고개를 돌렸다. 

 

  녹색 천만으로 몸을 감쌌다거나 화관을 쓴 모습은 아니었다. 청색 꽃의 화신은 평범한 남자의 얼굴을 하고 웨인의 앞에 서 있었다. 다만 그의 피부는 꽃이 본래 자라는 눈 쌓인 산등성이를 의미하듯 하얬고 눈동자가 꽃잎처럼 파랬다. 웨인은 이것이 현실인지 아니면 무의식중에 펼쳐지는 환상인지 알고 싶었지만 목을 돌리는 게 불가능해 다른 곳을 볼 수가 없었다. 꼼짝없이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자유를 박탈당한 채 웨인은 화신의 말을 들었다.

 

  “부모를 잃은 자녀들에게 반드시 복수의 의무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야. 그들의 죽음에 대해 복수하지 않아도 성을 잃지는 않는다. 모두 네가 그 혹은 그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

 

  “이제 그 얘기는 내게 아무런 효력이 없어.”

  “그것이 왜 그런지에 관해서 궁금해 한 적은 없나?”

  “무슨 소리지?”

 

  “너는 훗날 사고를 당할 부모를 선택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내 영웅이 되기로 한 것은 네 선택이었다.”

  “뭐?”

 

  “언젠가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나를 태워서 그 향기를 맡은 사람은 한둘이 아니다. 나는 그들에게 비슷한 얘기를 해 줬었지. 사연들은 제각기 달랐지만 내가 그들에게 일깨워줄 것은 한 가지였다. 내가 보기에 너와 그들이 불우한 정도는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거울상 같은 허위로 뭉친 정체성에 더 강하게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당신의 말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나밖에 없었다는 소린가?”

  “웨인, 너는 영웅이어야 한다.”

 

  화신은 얼핏 듣기에 엉뚱한 말인데도 그것이 하나의 논리에 포함된 것처럼 읊조렸다. 그것이 식물의 논리인지 신의 논리인지는 불투명했다. 어쨌든 웨인은 그것을 파악할 수 없었다. 웨인은 단지 화신의 푸른 모습을 보고 있었으며, 밤을 망토처럼 두르고 다니는 자신의 영웅이 어느 역사가나 시기적절한 전쟁으로 비롯되지 않았다는 걸 아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복수라는 행동 없이도 너는 죽은 아버지의 아들이다. 그것은 첫 번째 탄생과 관련이 있다. 두 번째 탄생에서 너는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시계탑에서 눈에 보이는 암흑과 그렇지 않은 암흑에 휩싸여 있는 도시를 굽어보는 위인이 되었다. 한 번 태어나면 자신이 탄생했다는 사실로부터 절대 떨어질 수 없다. 다만 두 번 태어날 수 없는 인간의 삶을 뒤집을 수 있는 위업을 이뤄냈다는 것이 다른 것이다.”

 

  꽃이 변한 화신이 무의식과 닮은 언어를 내뱉고 있으니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웨인은 세상에서 가장 읽기 어려운 도면을 받아든 기분이었다. 그래서 웨인은 화신이 청색 눈동자를 묻힌 손을 자신을 향해 뻗고 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 

 

  “영웅으로 거듭난 너의 탄생을 번복하지 마라. 그것은 너의 성과이고 선택이며 독립이 불가능한 근원적인 구조이다.”

 

  환상이 부서졌다. 

 

  웨인은 소맷자락이 바람에 흩날리는 셔츠를 입고 있었다. 빌딩 숲 사이를 걸어 다니고 있는 건 사람들이었다. 아무도 손에 청색 꽃잎 같은 건 달고 다니지 않았다. 웨인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고개도 자연스럽게 돌릴 수 있었다. 웨인은 자신이 서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걸 확인한 뒤에 앞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위대함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화신이 의미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웨인은 그 미소가 잎사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잎사귀는 무의미하지 않다. 아무도 발견한 적 없는 들꽃도 기회만 얻으면 누군가의 기억에 남을 수 있는데, 보기 드문 청색 꽃이 화신이 되어 자아내고 있는 잎사귀에 의미가 없을 리 만무했다. 

 

  화신은 웨인과 거리를 더 좁히고 그와 이마를 맞댔다. 그러면서 아래로는 웨인의 손을 잡아당겼다. 딱딱하고 끝부분이 뾰족한 물건이 웨인에게 쥐어졌다.  

 

  태어나서 복수하고 진화하여 마침내 자신이 사랑했던 도시에 껍데기를 남겨주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했던 위인은, 그 모든 시간을 잊어버리고 활기를 느끼고 말았다. 박쥐같은 망토를 두른 웨인이 날아올랐다. 눈물 없이 눈동자를 흩날릴 수 있는 화신이 팔을 들어 올리자 웨인은 더 높이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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