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ver/본브루스] Blue Ocean Floor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9 posted by Jade E. Sauniere

- When Bruce Wayne finds his hope

- Original Date 2016. 08. 18

- Written by. Jade


Blue Ocean Floor




Piano cover of Blue Ocean Floor originally by Justin Timberlake

Cover by The Theorist





  배의 머리에 매달린 작은 종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항구에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루스는 물길을 이용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한 생명의 씨앗은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생하며 그밖에도 숨을 쉴 줄 아는 모든 것들은 물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어린 브루스 웨인이 장례식장을 뛰쳐나오다 곤두박질친 곳도 우물 안이었다. 물은 시작점이었다.


  마치 그 진리의 연장선처럼 브루스 웨인이 맑은 눈의 암살자를 만난 것도 바다에 떠 있던 요트 안이었다.


  딴생각을 하다가 브루스는 자신이 종소리가 울린 횟수를 얼마나 세었는지 잊어버렸다. 물론 종소리를 헤아린 것도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장치였기에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열리며 종의 울림에 다시 숫자를 붙여 주었다. 하나. 브루스는 종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것은 종소리를 하나의 걸음처럼 삼고 있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물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기보다는 끝에 더 가까웠다. 물은 냉정하게 무언가를 죽이기도 한다. 그는 물 속에서 죽어간 사람을 보았고, 그 외에도 물이 아주 많은 걸 없앨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바로 물 속에서 데이비드 웹이라는 남자가 지워져갔고 그의 기억이 부식되었다. 아무런 인정도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물의 흐름엔 너무나도 많은 종결이 묻어 있었다.


  그가 서 있는 판자 아래에서 찰랑이고 있는 물에는 데이비드 웹이 없었다. 거기에 흘러가지 않은 이름들이 몇 개 존재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들은 모두 똑같았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에 붙어 있는 종이 울리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는 거기서 마땅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12년의 고뇌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이후로 본은 무엇의 의미를 수색하는 일을 쉽게 단념하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 양면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사물의 존재나 형태 자체를 역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12년을 돌아 본은 그것을 깨달았다.


  총을 쥔 자는 다시 배 위에 올랐다.


  브루스는 언젠가 선상 위의 암살 사건으로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던 하루를 더듬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게감도 없는 지루함이었다. 브루스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잠을 자려고 비어있는 선실로 들어갔었다. 그는 확실히 어느 순간까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연스럽게 닫히려고 하던 눈동자를 열었다. 그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브루스가 고개를 젖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옛날과는 다르게 그는 똑바른 시야에서 자신을 향하는 총을 목격했다.


  종이 울렸다.


  브루스 웨인은 총을 보면서도 종을 생각했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그걸 배에 매달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군번줄을 걸어둘 수가 없어 다른 금속성의 물체를 고른 것 같기도 했다. 본은 맨 처음에 브루스에게 군번줄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그 뒤에 자신이 기관의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버렸었다고 밝히긴 했지만, 본은 데이비드 웹의 증표를 잃어버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직 암살자가 털어놓은 최초의 인식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뜻밖의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 브루스는 총을 지나 한 명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학습했으면서도 그걸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자가 보였다. 과거를 결코 자의에 의해 버렸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이 순수를 엿보았던 몇 안 되는 남자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제이슨."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졌다. CIA가 키워낸 최고의 암살자라는 인물이 감행한 행동치고는 무척 비논리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브루스의 시야에 포함되지 않았던 총구가 불쑥 나타났으나 브루스는 개의치 않았다.


  약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이비드 웹의 군번줄과,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었던 제이슨 본의 노력을 떠올렸다. 


  "당신은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지. 나도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고 있어."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물의 표면에서 브루스 웨인은 길을 논했다. 그들이 최초로 만났던 요트는 다른 선택을 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브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물 속에서 그대는 크게 소리치지만 침묵이 그대를 감싸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걸 들었어

그대가 깊이 낙하해도 나는 그대를 찾으리

나의 붉은 눈동자가 더는 그대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색 소음 속에서 그대를 듣지 못해도


그대의 맥박을 보내줘

그러면 나는 푸른 바다 층으로 가리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

그 푸른 바다 층으로

[Crossover/본브루스] In a Dreamy Mission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8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in the dream of Bruce Wayne

- Original Date 2016. 08. 16

- Written by. Jade


In a Dreamy Mission




  꿈의 내용은 상상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제이슨 본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발탁되고 나서 참가했던 첫 트레이닝 시간에 들었던 말이었다. 꿈은 상상력이 발현되는 장소가 아니다. 잠들기 전 경험했던 가장 강렬한 현실이 꿈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꿈은 어떻게 보면 과거가 된 현실을 추적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단서이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또한 현실적이다. 그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고 양쪽을 넘나들며 필요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면 요원은 최고의 자산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은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 말들을 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본은 조용히 튜브를 꺼내 한 남자의 팔에 둘렀다. 만약 꿈이 상상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꿈을 꾸었을 남자였다. 아니, 꿈이 마지막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도 남자가 신나는 꿈을 꿀 것 같지는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지루함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한 팔을 통째로 본에게 내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제이슨 본에겐 그저 읽혀야 하는 대상이었다. 


  고담시의 모든 것에 신경을 기울인다는 도시의 황태자는 그 지역의 살아있는 명물이자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은 자경단원에 대해서는 유독 불분명한 태도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청장조차도 은근히 '배트맨'의 편을 들고 있는 가운데 브루스 웨인만이 그를 비난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다. 공권력이 아닌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이라는 웨인의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CIA는 배트맨이 출현한지 1년이 넘어가던 해에 그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고담은 CIA가 지부를 두지 못한 미국 내 유일한 도시였다. 기관을 중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6시간 이내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지고도 유일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암흑 지대를 언제까지고 내버려둘 수 없었다. 중앙정보국이 고담의 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주시해온 이유였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옆에 자신이 누울 만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와 한 침대에 눕기가 껄끄러워 본은 이불을 바닥으로 적당히 끌어내렸다. 가구를 사용하면 후에 정리를 하기가 불편했다. 본은 두툼한 이불을 최대한 고르게 펼치고 자신의 팔에도 튜브를 연결했다. 


  제이슨 본은 브루스 웨인의 마지막 현실을 볼 것이다.


  필름이 순간적으로 튕기면서 발생하는 약간의 번뜩임이 되어 브루스 웨인의 꿈으로 흘러들어갈 때, 제이슨 본은 트레이닝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특정 개인들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비밀로 꿈을 빚어내기도 한다. 비밀을 꿈의 재료로 삼는 부류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혼자만의 메아리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이다. 메아리는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또 다르게 따지면 완벽하게 그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다. 자기와 타자가 반씩 섞인 공간에서 안정을 찾아야만 하는 이들의 꿈은 그래서 정보의 천국이다. 꿈에 흡수되어 꿈을 흡수하는 요원들은 그런 곳에서 가장 짜릿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본은 자신이 브루스 웨인의 꿈에 안착했음을 느꼈다. 질량은 사라졌으나 감각은 더욱 깨어났다. 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도시의 설계도를 연상케 하는 배경이었다. 서늘하면서 습한 공기가 공중을 떠다녔고 빛은 결핍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시가 발전했다는 증거로 꼽히곤 하는 뮤지컬 극장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은 누렇고 까맣게 번뜩이는 간판을 보았다. 간판이 광고하는 것은 조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이 행해지고 있어도 그곳의 본질은 지하였다. 본은 어떤 구석으로도 빛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아닌 불빛으로 깨어나는 도시는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영원한 밤에 시달리는 땅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엉뚱한 뮤지컬과 기대할 수 없는 낮은 브루스 웨인의 현실인가, 망상인가, 혹은 비밀인가.


  신중하게 걷던 본은 박쥐가 푸드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빈 손으로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박쥐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꿈에 흘러들어온 요원은 자신이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본은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다. 박쥐도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박쥐는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후 더 많은 박쥐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나타나고 날아가길 반복했다.


  제이슨 본은 이제 그만 브루스 웨인을 찾아야 했다. 꿈의 주인은 어떤 형식으로든 그 안에 존재하는 법이었다. 본은 혹시 날아가버린 박쥐 중에 브루스 웨인의 의식이 섞여있지는 않았기를 바라면서 지하도이자 대로이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길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박쥐들은 날아올랐다. 본은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가 박쥐들이 나타나는 방향이 다 똑같다는 걸 간파하고 움직임을 수정했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들이 탄생하는 곳에서 그 까만 날갯짓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본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꿈에 속한 요소처럼 보여야 하는 본은 브루스 웨인이 자신을 알아채주길 기다려야 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는 허망할 뿐 시끄럽기만 한 반복에서 무슨 의미를 찾는 것인지 박쥐들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가 본을 발견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의자가 필요한가?"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본의 옆에 가죽 의자가 등장했다. 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상식인 한편 타인의 꿈에 침입하는 CIA의 기술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극비 사항이었다. 본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브루스 웨인이 본을 보았다. 본은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기관에서도 인정받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꿈은 으레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질문할 게 있어서 나타난 게 아닌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하면 도움이 된다고들 하니까. 내 머리가 그런 흔한 조언을 새기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질문자를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내가 나약하다는 건 인정할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질문해봐."


  여러 사람의 꿈에 출입해봤지만 이런 식의 흐름은 처음이었다. 본은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피상적인 질문을 골라보았다.


  "왜 그렇게 박쥐들을 보고만 있는 거지? 시끄럽지 않나?"

  "…날카로운 질문이군."


  본이 의아해했다. 혼자만의 흐름을 갖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사실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우연하게 마주쳤던 기억이고 스쳐 지나가는 영감이었지. 여기에 박쥐가 있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군."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인정함과 동시에 박쥐들이 사라졌다. 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쥐를 다루는 브루스 웨인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어둡지?"

  "내가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니까."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 철학적이라는 정보를 받은 적이 없는 본은 자신의 대응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본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매우 특이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꼭 애증했던 선생님이나 잃어버린 부모님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을 연민하고 있었다. 


  본은 혼란스러웠다.


  "꿈에서조차?"

  "그 어느 곳에서도."

  "…힘들겠군."

  "그래서 살아있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빛을 뿌려주기 위함이지."


  본은 조금씩 이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목적을 알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의 질문을 빌려 그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본의 전략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 입증되면 아무리 입을 여는 게 어색한 성격의 사람이라도 올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한 행동은?"

  "내 정신을 제외한 모든 걸 희생했다. 기부를 하고 수많은 자선사업을 벌이고, 무법지대와 폐허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했어.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이타성을 모조리 끌어내서 변화를 만들어보려 했지…."

  

  브루스 웨인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을 했나?"

  "나는 실패했어. 그래, 나는 이 말을 들어야 했던 거군. 실패했다고."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아 본이 얼굴을 돌렸다. 뮤지컬 간판이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웨인 부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뮤지컬을 보고 나오던 도중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브루스 웨인만이 알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웨인 부부는 그저 고담 시민들의 바닥난 도덕성에 희생당한 불행한 위인들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본은 최후의 질문을 던질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배트맨인가?"


  꿈 속에서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배트맨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언제까지 그런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하룻밤의 자조를 마친 그가 눈을 감았다. 의미를 다한 꿈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제이슨 본은 노련하게 꿈에서 빠져나왔다.


  본은 배운대로 꿈에서 깨어난 즉시 튜브를 거두고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지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브루스 웨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얼핏 보면 꿈 하나 꾸지 않고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은 배트맨이 그런 모습으로 자기 자신의 모든 걸 폄하한다는 걸 배우고 말았다.


  본은 들어올린 이불 자락을 브루스의 몸에 덮어 주었다. 제이슨 본은 그 날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Crossover/본브루스] The Cat Doesn't Forget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Ex-CIA Agent and Strange Black Cat

- Original Date 2016. 08. 07

- Writeen by. Jade


The Cat Doesn't Forget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무리 괴짜에 정신 나간 인간처럼 보이는 작자들에게도 사람다운 점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악당들이 펄펄 끓는다는 고담시에서도 아주 고약한 악질을 담당하고 있는 조커라는 자에게도 물론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 박쥐 인간과 숨바꼭질을 하는 게 인생의 낙이지만, 그 친구가 워낙 인기가 많아져서 자신과의 데이트에 소홀해지자 이 이상한 악당이 그만 질투심을 느끼고 만 거죠. '내 귀염둥이를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어!' 같은 심리라고 해둡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박쥐 인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조커는 온갖 과학자들의 주리를 틀고 손톱을 뽑은 끝에 약물 하나를 얻게 됩니다. 일주일간 사람을 아주 귀엽게 만들 수 있는 효능을 가졌다나요? 조커는 낄낄거리며 박쥐 인간과 일주일쯤 아주 오붓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는 때로 놀라움을 발휘합니다. 조커가 결국 그 박쥐 인간, '배트맨'애게 약물을 노출시켰거든요. 


  '아주 귀엽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뱃시가 어린애처럼 키가 줄어들기라도 하나? 너무 귀엽겠다! 아니면 애완용 박쥐로 변하는 거 아니야? 오, 뱃시. 뱃시. 우리 뱃시!'


  하지만 이런 귀여운 바람이 조커같은 악당의 것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커는 온갖 종류로 구비해 둔 케이지를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배트맨이 사라졌거든요. 조커는 배트맨 대신 악당들을 족치면서 우리 뱃시를 어디로 감춘 거냐며 발악을 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커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요. 배트맨이 귀엽게 변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당연히 고양이부터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배트맨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면 멀었군요, 조커.


  네. 첨단 기술이 50가지쯤 적용된 거대한 수트를 입고 다니는 배트맨은, 대상이 아주 귀엽게 변한다는 약물의 효과에 따라서 조금 거대한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집 큰 검은 고양이요. 뚱뚱한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더 귀엽지 않겠냐고요? 좋을 대로 하시죠. 아무튼 고담을 비밀스레 수호하던 암흑의 기사는 지금 까만 고양이입니다.


  우리야 뭐 배트맨의 가면 속에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고 얘기하도록 하죠.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님이자 고담시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은 참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두말할 것 없는 재력에 외모도 아주 훤칠하고, 부모님은 없지만 부모님처럼 그를 훌륭하게 챙겨주는 보호자도 있고 침대 한 구석이 서늘하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불러들일 수 있는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거대 기업의 회장님 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도 좋고 행동력에 책임감도 가졌죠.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다보니 보통 사람이 그를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이겁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배트맨이라니.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위대한 배트맨이자 빈틈없는 브루스 웨인인 존재는 너무도 인간다워서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담의 수호자 배트맨은 배가 고파요.


  통신기가 부착되어 있는 수트는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바뀌어버린지라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고양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뉴페이스를 경계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고양이가 된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배트맨 겸 브루스 웨인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죠. 그 와중에 그는 지금 배가 고프군요. 큰일입니다. 브루스 웨인께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본래 그는 어떤 욕구도 잘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이 있지만 이 망할 몸뚱아리가 정신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인지 서서히 허기를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니야― 하고 힘없이 울었습니다. 귀엽긴 한데 좀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런 감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멈춰섰을 리가 없거든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정체도 참 귀여움이라곤 없을 것 같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슨 본이라고 알고 있지만 본명은 다릅니다. 으음, 이건 몇몇 분들에겐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당장은 말을 아끼죠. 아무튼 그는 CIA의 일급 기밀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은 프로 중의 프로이며,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인데도 그 훈련의 여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며칠 전에는 볼펜으로 칼 든 암살자를 때려잡았습니다. CIA의 기밀 프로그램이란 게 다 그렇죠. 


  그는 현재 자신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적들과 거리를 벌리고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잠시 고담에 왔습니다. 고담시는 워낙 괴팍한 곳이라서 CIA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데다, 미국 내에서 CIA 지부가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악당들이 지부에 들이닥쳐 기밀이라도 빼가면 답이 없으니까요. 그는 진짜로 기억을 잃은 상태인데 어떻게 그런 사실은 잘 느끼고 고담을 찾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암살자와 고양이가 된 자경단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네요. 


  "……"

  ―…니야아.


  지금의 제이슨 본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그는 현재 굉장히 순수한 상태입니다. 사람 죽이는 기술은 몸에 남았지만 인격을 지워버리는 CIA의 프로그램은 기억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순수하고 착한 영혼들은 동물에 약한 법이죠. 


  "…같이 갈래?"


  배트맨에게 보호자가 생겼군요.




* * *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고양이를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는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고양이는 남자가 먹을 걸 찾아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최대한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다가 혼자서 중심을 한 번 잃었다. 생수를 꺼내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지붕에서도 끄떡없는 고양이가 바닥에 앉으려다 휘청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락없는 고양이 생김새를 한 진짜 고양이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그릇에 물과 통조림의 내용물을 쏟았다. 고양이는 음식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또 휘청했다. 남자는 고양이가 부상을 입은 게 아닌가 싶어 고양이의 다리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고양이는 고양이다운 균형 능력을 되찾고 물을 할짝였다.


  골목길을 서성이던 것치고 고양이의 털은 꽤나 깨끗했다. 그는 당장 고양이를 씻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검은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남자가 꺼낸 것은 중간 크기의 상자였다.


  고담으로 도망쳐온 남자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피난처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들어본 적도 없는 박쥐 옷차림의 자경단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는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던 무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근처에 놓아두고, 조금 전 뒷골목에서 산 총을 꺼냈다. 그가 총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발끝이 간지러워 밑을 내려다봤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총에서 난 찰칵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듯했다. 남자는 무언가 부끄러웠다.


  "…누굴 쏘려고 산 건 아니야."


  고양이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참 사람 같은 시선이었다.


  "난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가 갑자기 그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 했다. 남자는 묘하게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고양이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고양이가 총을 만질 수 없도록 총을 잡은 손을 머리까지 들었다. 고양이가 가만히 꼬리를 흔들다가 침대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뚜껑이 열린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 안에는 일반인이 소지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개의 여권과 다량의 현금 다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몇 가지 종이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가 발로 슬금슬금 가장 앞에 있는 여권을 건드렸다. 여권의 표지를 들어올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야옹.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거야?"

  ―야아옹.

  "……"   


  남자가 여권의 앞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남자에게도 고양이에게도 낯선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양이는 곧 그의 미국 여권에서 관심을 끊고 나머지 여권들을 이리저리 발로 밀었다. 브라질, 러시아, 프랑스, 파리 등등 온갖 나라들의 여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가 가만히 발을 뗐다.


  "…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고양이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남자가 상자를 회수했다. 고양이는 동그란 눈동자를 남자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권을 한 뭉치로 모은 다음 그 위에 총을 올렸다. 


  "…내가 처음 봤던 금고 안이랑 똑같아졌네."


  남자가 상자를 침대 밑으로 다시 감췄다. 고양이는 여전히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더 안 먹어?"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훈련을 받은 고양이를 대하듯 물었는데, 고양이는 용케 그것을 알아듣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점프하는 모양새가 아주 깔끔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 특이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고양이는 남자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물건을 가지고 놀지 않으려는 행동은 독특했으나 대신 고양이는 조용했다. 그 덕에 남자는 자신의 작업, 즉 무언가를 메모하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가 일기를 적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수집해온 정보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다가 그걸 옮겨 적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대체로 남자의 얼굴과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 가운데 밑줄이 몇 번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취리히 은행]


  고양이가 눈길을 올렸다. 남자는 온 힘을 다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가, 고양이가 서서히 피로함에 젖어갈 즈음에 주변을 정리했다. 남자가 고양이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는 옷이 젖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의는 바깥에 벗어두고 물을 받았다. 고양이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잘 짜여진 몸에 미세한 상처들이 있었고 총자국처럼 보이는 동그란 흔적도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참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익숙하게 해치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몸집도 큰 고양이를 요령 있게 씻겼다. 몸 구석구석을 슥슥 밀어주는 감촉이 좋아서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고양이는 원래 너처럼 다 사람 같니?"


  고양이는 이번에도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고양이 배트맨과 CIA 출신 킬러의 일상을 왜 좀 더 보여주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실은 말이죠, 이른바 집사와 고양이들이 서로 하는 일은 놀랍도록 똑같습니다. 고양이는 집사에게 귀찮은 일거리과 애교를 반반씩 섞어 던저주고 집사는 당근과 채찍에 휘둘리면서 고양이를 간지럽히죠. 그렇다고 청년 제이슨 본이 벌써 '집사' 단계까지 올랐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고양이가 좀 까칠해서요. 그래도 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제이슨에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배트맨은 더욱 행복해했을 테지만요. 그 자신은 정체도 모르는 집단에게 쫓겨다니느라 제이슨 본은 주변에 어떠한 전자 기기도 두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PC 카페를 갔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에 그런 시설이 남아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날로그식 삶을 고집하는 제이슨에게 짜증이 나서 한 번은 고양이 배트맨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죠. 안타깝게도 고도로 훈련받은 정보부의 암살자는 별다른 위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심심해?

  

  그리고 배트맨은 성심성의껏 자신과 놀아주는 그에게 휘말려 배를 뒤집고 야옹거리다가 진한 자괴감을 느끼고 저녁 내내 구석에서 고개를 박고 있었답니다.   


  한편 바깥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지요. 고담의 모든 악당들을 다 쓸어버리고도 배트맨을 찾지 못한 조커가 결국 엉엉 울면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조커는 훌쩍이며 자신이 배트맨에게 이러이러한 약을 썼는데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뭔가 배트맨 같은 분위기가 나는 생물체를 발견하면 즉시 연락을 달라고 번호까지 남겼습니다. 악당이 자기 혼내주는 놈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조커가 그리운 뱃시를 잊지 못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엉겁결에 득을 본 쪽은 배트맨의 유일한 지원군이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였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는 과연 은밀히 사람을 풀어서 몸집이 평균 이상인 검은색 고양이를 끌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입니다. 이걸 보면 조커는 아직도 멀은 것 같지요. 


  그리고 조커의 기자회견을 들은 배트맨 역시 원거리에서 알프레드와 호흡을 맞추기에 이릅니다.




* * *




  ―니야옹, 니야아아….


  검은 고양이는 몇 번 힘 없이 울더니 바닥에 철푸덕 누웠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다고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며칠새 힘이 없네."


  남자는 고양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니이야.

  "이 주변에 동물 병원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하자마자 고양이의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꼬리는 미동도 없었고 뜨다 만 눈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냥 외면하지 못할 가련한 동물이 보내는 신호였다. 남자가 결국 재킷을 챙겼다. 남자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묘하게 흡족해 보였다.


  남자와 고양이는 주변의 대로에서 택시를 타고 고담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남자는 이제 그 곳에서 동물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는 고담의 사방 어디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건물을 등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담시에 와서 제일 먼저 도시의 지도부터 외운 남자는 이곳의 토박이들만큼이나 길을 잘 알았지만 그가 외운 지도에는 동물 병원의 위치가 나와있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옷에 말려 남자의 가슴 속에 쏙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움찔대기 시작했다. 그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가며 은색 빌딩들을 지나쳤다. 둘은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섰다. 무엇이든지 살피는 버릇이 있는 남자는 신호등의 기둥에 무언가가 붙어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그걸 읽었다.    


  [고양이를 찾습니다. 약 6일 전 실종. 검고 몸집이 다소 큼. 교육을 잘 받아 얌전하고 사람을 많이 경계하지 않아 다른 길고양이들과 구분됨. 아래의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씩 커졌다.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고양이도 놀라움을 표현하듯이 목을 빼고 있었다.


  "주인이 있었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고양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서 얼핏 보면 남자가 그냥 옷가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전화를 건 이를 기다리면서 그 주인이 정말 고양이를 잘 훈련시켰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도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 분명 존재할 거라는 데에 상념이 닿자 남자는 무겁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고양이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전화를 주신 분이십니까?"


  남자를 맞이한 건 훌륭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다. 검은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는 감상이 단번에 들었다.


  "예."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남자가 옷을 걷었다. 얼굴을 드러낸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꼬물거렸다. 


  "고양이가 먼저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군요."

  "…네, 제가 키우던 아이가 맞습니다."


  남자가 서서히 팔을 풀자 고양이는 곧장 노신사에게 뛰어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가 짐이 되어버린 옷을 팔에 걸었다.   


  "감사합니다. 답례를 하고 싶은데 성함이라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노신사가 그를 붙잡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노신사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나셨군요, 도련님."

  ―야옹.

  "약물을 만든 당사자에게 물어보니 약효가 지속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독된다고 하더군요."

  ―야옹.

  "수트와 장비들은 벌써 점검을 다 마쳤으니 나중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조커를 꼭 붙잡으셔야겠군요.

  ―…야옹. 




* * * 


 


  거처로 돌아가는 제이슨의 손에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간밤에 터진 소식들은 고담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최대한 그걸 감추는 법을 알았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비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돌아온 배트맨, 조커를 체포하다]


  제이슨 본은 다양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의 문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침입자의 그림자부터 부비트랩의 여부까지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는 현관의 틈새에서 그는 하얀색 봉투를 발견했다. 훈련받은 요원이 자신의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 얇은 편지봉투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은 발명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은 복도의 양쪽을 한 번씩 살핀 뒤에 봉투의 앞면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웨인 엔터프라이즈 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으며, 봉투의 안에 들어있는 쪽지엔 본이 더욱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날 만나러 와주길. - 브루스 웨인]


  제이슨은 봉투를 그대로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 2분 뒤 그는 옷 속에 무기를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 * *




  그 날은 브루스 웨인 회장을 위해 일하는 비서가 너무나도 기다린 하루였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적힌 웨인 회장의 공식적인 일정이 최근 두 달간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웨인 회장은 그녀에게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오늘도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충성을 맹세한 사원이 한 명 늘었다.


  고요해진 빌딩의 최상층에서 브루스 웨인은 홀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신중하게 서류를 나누던 그가 문득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다리는 손님은 어쩌면 노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경력을 고려하자면 기대하기 어려운 매너였다. 브루스는 양쪽이 모두 편할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그 후 보육기관 지원 사업과 관련된 서류를 집중해서 읽던 브루스 웨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신의 손님이 서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루스가 그를 보고는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제이슨."

  

  제이슨 본이 순간적으로 권총을 들었다.


  "날 어떻게 알지?"

  "우린 만난 적이 있어."

  "원하는 게 뭐야?"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나보단 당신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어서 공유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당신이 의문을 갖는 모습들을 창조해낸 사람들을 찾아냈어."


  브루스가 서류 밑에 있던 파일 하나를 들었다. 미 중앙정보국의 엠블럼과 함께 일급 기밀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제이슨이 눈을 좁혔다.


  "…CIA?"

  "저녁에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면서 보지 않겠나?"


  제이슨은 파일 하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당신과 나는… 무슨 관계지? 당신은 왜 날 도와주지?"


  브루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상한 기운을 읽은 제이슨 본이 그의 미간을 조준했다. 브루스의 대답이 지체되자 암살자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20초 뒤에는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판단할 작정이었다.  


  제이슨이 숫자 12를 셌을 때 브루스 웨인이 대답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동물은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끄트머리에서 떨렸다. 그렇지만 제이슨 본은 그것이 거짓말에서 비롯된 긴장감 탓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제이슨이 약간의 혼란에 빠진 사이 브루스는 홱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기나 해."


  브루스가 제이슨 본의 품에 파일을 안겨주었다. 제이슨은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되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부끄러움에 시달리는 웨인 회장님을 따라갔다.


  "왜 얼굴이 빨개진 거지?"

  "…시끄러워."

  "아까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나랑 당신이 무슨 관계였냐고 물었잖아. 잠깐, 미스터 웨인!"

[Crossover/본브루스] Better Life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 Bruce Wayne Crossover

- Written by. Jade


Better Life




  브루스 웨인의 한쪽 눈동자는 조금 전에 확인해서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린 핸드폰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알 수 없는 이름unknown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는 일밖에 알지 못하던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는 하필 그가 이 순간에 최고의 능동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을 것은 뻔했으므로 브루스는 곧장 비상구로 향했다. 도중에 핸드폰을 한 번 켜보았지만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문을 크게 열고 난간을 잡은 브루스는 절실하고 정확하게 달렸다. 30층도 넘는 층을 계단만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다소 좌절스러운 사실은 브루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브루스가 핸드폰을 꺼냈다.


  "알프레드, 웨인 엔터프라이즈로 배트윙을 보내줄 수 있어요?"

  ―진심이십니까, 도련님?

  "이 시점에서 내 정체를 숨기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보내줄 수 있죠?"

  ―…준비하겠습니다. 15분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드론 조종 모드로 수트까지는 배달해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브루스는 통화를 끊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이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브루스는 달리면서 부디 자신의 손이 기계의 진동으로 움찔하기를 바랐다. 다급한 인영이 비상계단에 온도와 숨소리를 남겼다. 지상 로비보다는 옥상에 더 가까운 그의 위치에서 아래의 혼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트맨의 몫이었고, 브루스 웨인은 그러한 이유에 의해 계단을 올랐다.


  아직 배트맨이 오지 않은 지상의 소요에는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이 하나의 문자 메시지를 눈동자 위에서 완전히 지워내고 있지 못하듯이, 몇 개의 음성들을 귓가에서 떨쳐내지 못했다. 그 소리들은 그가 본래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번만은 반쯤 그 말에 동의해보기로 했다. 그가 코너 뒤로 사라지자마자 건물의 입구에서 폭발음이 났다. 무장경비에게 빌린 총이 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알프레드는 원격 조종으로 배트윙을 몰면서 배트케이브 밖에서 펼쳐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차들이 적은 도로를 고른 경찰차들이 모여드는 중이었고 멀찍이서 보이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은 아직 성한 모양새였다. 알프레드는 고도를 조정하면서 빌딩을 스캔해보았다. 층마다 빼곡하게 있어야 하는 직원들의 열기가 감지되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브루스 웨인은 난간을 잡은 자신의 팔로 몸을 밀어가면서 계단을 올랐다. 10층 정도만 더 올라가면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가 단어 하나라도 찍어서 보내주길 바라고 있는 인물은 핸드폰이 아니라 다른 걸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 본의 손에 감긴 총이 처음으로 불을 뿜었다. 수제 폭탄을 의기양양하게 내던지려던 놈이 발목을 맞고 미끄러지면서 폭탄이 엉뚱하지만 적절한 폭발을 일으켰다. 본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라고는 침착하게 발휘할 수 있는 사격 실력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이 쏠 수 있는 탄환의 갯수를 하나 줄이다가, 그 가운데서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배트맨이 있다고 알려진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는 악당들과 경찰들에게 겹겹이 싸인 꼴이 되었다.


  "경찰이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모두가 그 말이 악당들에게 보내는 미란다 법칙처럼, 경찰 쪽에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대사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무시당했다. 악당들은 대답 대신 총알을 뿌리기 시작했고 경찰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과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여겼던 총성을 태연하게 들으며 제이슨 본은 전진했다. 


  마침 그가 걷는 길에 소화기가 있어 본은 냉큼 그걸 들고 바닥에 던졌다. 알맞은 힘을 받은 소화기는 어려움 없이 총격전 현장까지 굴러가다가 어떠한 세련됨도 없이 그저 빗발치기만 하는 총알에 맞았다. 하얀 가루가 터져나오며 연기를 일으켰고 그 순간 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두 팔을 들었다.


  한편 빌딩의 옥상에 배트윙을 앉히려던 알프레드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 경찰 측에서 띄운 헬리콥터가 배트맨에게 경고를 보냈다.


  ―배트맨, 가까운 착륙장에 내려라. 지시를 어길 시 사격하겠다.


  알프레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시점에 브루스는 마지막 문을 발로 차고 옥상에 막 당도한 참이었다. 착륙장에 배트윙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브루스는 경찰 표식을 단 헬기 2대에 꽁무니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배트윙을 발견했다. 


  "알프레드."


  알프레드의 목소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옥상에 도착하셨군요.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보이시겠지요.

  "일단 경찰이 원하는 걸 들어줘요. 내가 탈 때까지 조종간은 놓지 말고요."

  ―배트윙이 착륙하는 곳에 도련님이 계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배트맨이 영영 활동을 못하게 되지는 않아요."


  브루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알프레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제이슨은 위험해질 겁니다."


  브루스는 핸드폰을 집어넣은 손을 밖으로 빼지 않은 채 움직였다. 배트윙이 서서히 빌딩에 내려앉으려 했다. 브루스는 이제 핸드폰에서 관심을 떼기로 했다. 그는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를 위하여 그가 멀리 하라고 권했던 무기를 잡은 이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것이었다. 


  브루스가 재킷 안감에서 박쥐 모양의 표창을 꺼냈다.   


  자신이 간수해야 하는 물건인 것만 같아서 일단 옆에 두고자 했던 남자에게 비밀이 탄로났던 당시를 생각하면 브루스 웨인은 늘 웃음이 났다. 고담 시에 반년도 머무른 적이 없다던 남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트맨의 심판 현장에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다음의 기억은 더욱 실소가 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좀 궁금하군.

  ―서랍에서 무기 설계도를 찾았어. 그 이후에는 쉬웠고.


  잠금 장치에 위장까지 덧씌웠던 기억이 생생한 서랍을 열었다는 게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밀을 찾는 데 노련한 자들은 오히려 그 덕분에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브루스 웨인의 유리 별장으로 돌아갔었다.


  "웨인 씨?"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배트맨이 표창을 던졌고 잠자코 있던 배트윙이 승객 없는 헬리콥터의 날개를 쏴 맞췄다. 경찰들은 당황한 얼굴로 배트맨의 탈것에 탑승하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을 쳐다보았다.


  "배트맨은 우리 거야. 방해하지 마!"

  "저 놈들을 빨리 쏴버려!"


  킬킬 웃으며 동시에 화를 내는 악당들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지역의 특성상 그 어떤 차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고담의 경찰차에도 볼썽사나운 구멍이 났다. 기껏해야 45구경 권총을 소지하고 있을 뿐인 경찰들은 차를 방패 삼아 탄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으악!"


  기관총과 하나가 된듯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놈이 느닷없이 고개를 꺾었다. 차의 측면에 달라붙어 있느라 사격을 할 수 있는 경찰들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서로를 보며 눈을 굴렸다. 경찰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던 악당들도 비로소 고요한 빌딩 쪽에 관심을 두었다. 


  "뭐지?"

  "안에서 누가 우릴 돕나봐요. 진짜 배트맨이 저 건물 안에 있나본데요?"


  그러자 경찰 하나가 딱 봐도 그보다 다섯 살은 젊을 듯한 청년을 때렸다.


  "일단 앞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 그래야 배트맨을 체포하든 할 거 아냐! 뭐해, 갈기라고!"


  그제야 경찰들이 오리걸음으로 앞을 기어갔다. 


  본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숫자만이 있었다. 그가 소모한 시간과 그에게 남은 총알의 갯수였다. 본은 빌딩의 최상층부에 있는 브루스 웨인을 밖으로 대피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그의 집사가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마련했을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살아남는다. 본이 정확히 날짜를 댈 수도 있는 어느 시간에 정해진, 결코 변할 수 없는 명제였다. 마음이 더욱 편해진 그는 남은 탄약을 소비하고자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배트맨이에요!"


  줄곧 배트맨을 언급하던 청년이 기어코 소리쳤다. 남자의 코트가 배트맨의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청년은 악당을 제압하는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연신 자신의 앞에 있는 경찰의 어깨를 두드리며 배트맨의 이름을 읊조렸다. 참다 못한 경찰이 고개를 틀었다. 악당을 제압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에 익숙한 자가 분명히 로비 안에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의 머리 위에 악당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존재했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악당들이 혼비백산하여 몸을 숙였다. 기관총이 고정되어 있던 차량에 불이 붙고 이리저리 흩어진 무기가 조각났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내부에 배트맨이 있다고 믿었던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이 청년의 앞에 있었다. 청년은 지상과 상공을 번갈아 보았다. 


  제이슨 본은 기묘하게 각도를 바꿔가며 조종석을 빛으로 가리는 배트맨과 기어코 눈을 마주쳤다. 가면이 없어 얼굴을 가릴 수 없고, 수트가 없어 목소리를 바꿀 수 없지만 어차피 본의 눈에는 누구보다 순수한 형상으로 보이는 그는 어느 정도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은 탄창이 빈 총을 던지고 핸드폰을 꺼냈다. 브루스 웨인의 이름으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렇게 할 순 없어.]


  배트윙이 모두의 눈앞을 혼란하게 만드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곳에서 제이슨 본만이 온전히 서 있었다. 본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바람이 전보다 더 거세게 부는 것 같았다. 악당들은 배트맨의 등장에 꼼짝하지 못했고, 경찰들은 두 배트맨 사이에서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본은 빠르고 곧게 걸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청년은 마침내 자신의 기체로 돌아가는 배트맨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배트맨이 훌쩍 날아올랐다.


  본은 콕피트가 열리자마자 조종석 안쪽으로 안전하게 떨어졌다. 브루스가 그의 상태를 슬쩍 확인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브루스는 엉뚱한 말을 했다.


  "가서 나랑 기자회견에 발표할 내용이나 고민하지."


  본은 그 한 마디에 숨어 있는 많은 것들을 간파했다. 브루스는 자신이 한때 추억을 그리듯이 죽음을 상상했던 것처럼 본도 더 나은 죽음을 찾으러 다닌다는 걸 지적하는 한편, 불멸의 존재여야 하는 배트맨으로 지목당한 그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본은 굳이 말로써 자신이 브루스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걸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은 살아남는 것이 더 좋은 삶이었다. 본은 다시금 브루스 웨인의 곁에 자리잡았다.




There's no better love

That's laid beside me

There's no better love

That justifies me

There's no better love

So darling feel better love



Better love by Hozier

- When Bruce Wayne meets a reflection of himself named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8. 03

- Written by. Jade


At the edge of deadly skepticism


 천둥을 동반한 번개를 내리꽂을 것 같은 하늘이 멀고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대체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남자는 곧장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꼭 환풍기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것처럼 답답했다. 브루스 웨인은 문이 닫히기 직전 짧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소매를 열거나 타이를 밑으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건물 안의 무리들 중에서 가장 초연한 얼굴을 띠고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리들이 섞여 거대한 고함이 탄생하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가 시선을 힐끗했다. 두 차례를 기다리면 그가 주시해야 할 격투가의 순서가 오게 되어 있었다. 과연 브루스 웨인은 그에게 가장 적절한 시간에 그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고, 그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정작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이 다 갖지도 못하는 지폐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의외로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브루스 웨인이 노리는 자는 그보다 훨씬 이 도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 자리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다른 방향에서 싸움꾼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격정이 피어오르는 곳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행운과 다른 사람들의 피를 즐기는 동물적인 정열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한 번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외면하며 러시아인을 찾아다녔으나 수확을 얻지 못했다.


  환호하는 자와 격분하는 자들 사이에서 브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을 의미를 잃어버린 그가 마지막으로 미련처럼 실행한 행동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브루스 웨인은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러시아인을 찾은 것이었지, 어떤 믿음이나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바람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사선으로 꺾여갔다.


  표정이 없는 남자가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는 반사광이 터졌을 때 미간을 찡그리며 그 빛의 근원지를 자연스레 확인하게 되듯이, 브루스는 기울어 가라앉으려고 하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작은 분명히 격투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그걸 실행하는 이에게서는 투지와 흥분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또 어떤 추상적인 반사광을 본 것 같았다. 그의 발이 미끄러지는 바닥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문득 자신이 강화수트를 입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변신에 임하는지를 돌이켜보았다. 책임과 체념의 경계를 열고 닫으면서 이제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희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정과 미래를 잃어가는 것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희생을 감행하는 모순 속에서 건강한 무언가는 결코 자라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낯설게 브루스 웨인의 머리를 찔렀다. 


  러시아인은 오늘 아예 오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브루스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작고 피상적인 느낌마저도 이성에 녹아들어 버린 듯했고 이성은 느낌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장치였다. 붕대를 다 감은 남자 역시 비정상적인 초연함을 펼쳤다.    


  "곧 격투가 시작됩니다! 더 거실 분 안 계십니까?"


  격투장의 심부름꾼이 지폐를 팔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브루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남자에게 걸겠소."


  청년은 브루스가 쥐어주는 액수에 놀랐다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모두가 성이 나 있었다. 격투가들보다 더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구경객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간 청년은 관객들을 재미있게 여길 터였다. 기대와 탐욕과 호기심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이질성을 감추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사광이 눈을 가리는 기분은 사라졌다. 올바른 위치에서 상을 응시할 때 시야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장애물이 사라진 그 자신의 시야 속에서 많은 걸 목격했다.


  죽음을 바랐던 적이 있었다. 실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일은 많았다. 브루스 웨인은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죽음 또한 독립적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연과 신념과 소망이 연거푸 스러져가다 보면, 그 부스러기들이 지상에 깔려 생에 대한 의지를 땅보다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 때조차 브루스 웨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발을 담근 듯이 자꾸만 균형을 잃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덤덤하게 되짚었으나 그 시절 그는 아주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힘을 불어넣으려고 시도만 하면 도리어 휘청이는 관념에 화가 났던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물웅덩이를 얼려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밑은 더욱 미끄러워졌지만 환상 같은 두께와 강도를 가지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물이 얼어있는 지점에 서 있다는 건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몹시도 조심하면서, 자신의 발바닥 아래를 깨뜨릴 수 있는 건 뭐든지 의심하면서 움직이게 되었다.


  절망과 회의주의로 빚은 절벽으로 한 남자가 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눈을 깜빡여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선택한 남자는 두들겨 맞고 있었다. 브루스가 보기에 그는 오직 그간의 경험에 이끌려 두 팔을 올리고 있었고, 단련된 육체가 있어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것이었다. 광기와 욕설이 피 흘리는 남자에게 꽂혔다. 밀리기만 하던 남자는 급기야 브루스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 비틀거렸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중력에 휘감아 위장해보려던 남자는 또 다른 인력에 가로막힌 자신을 한 번 보았다가 뒤를 돌았다. 브루스는 자신의 양 손이 남자의 땀에 밀려나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브루스가 남자를 세웠다. 그에겐 일종의 반사광이었던 남자의 동공은 의외로 탁해 브루스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비쳐 보이는지 몰랐다. 그 찰나의 브루스 웨인은 오직 남자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일어섰다. 동시에 그는 싸웠다. 브루스는 마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인 양 남자가 처음으로 내뻗은 주먹의 의미를 추측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남자는 덤덤하게 승리를 가져왔다. 구경꾼들이 이건 말도 안 된다면서 발악을 해댔다.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붕대가 스르르 떨어졌다.  


  브루스는 천천히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소중히 다루는 자신의 소지품마저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듯했다. 남자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가방 하나를 옆에 두고 옷을 꺼내는 중이었다. 조금 전 브루스의 돈을 걷어갔던 청년이 눈을 찡긋하며 그에게 지폐 뭉치를 건넸다. 


  남자는 지폐를 세지도 않고 무심하게 가방 한 구석에 쑤셔넣었다. 그의 등에는 총알을 대보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상흔들이 있었다. 브루스는 그제야 남자의 외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훈련을 받았으며 총을 맞아본 적도 있는 데다 저급한 자들의 파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브루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브루스 웨인이 가장 털어놓고 싶은 것들이 한 번도 그의 음성에 실린 적이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의 소리를 공유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사실 브루스는 남자에게 이것 저것을 묻고 싶었다. 그의 발 밑은 자신과 같은지, 혹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당신은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현실과 닮았지만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위치에서 브루스 웨인은 한 번도 자신 이외의 인물을 본 일이 없었다.


  결국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가 가방을 들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브루스를 지나쳐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브루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벗어났다. 브루스는 그 뒤 돈을 걷는 청년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그는 이 주변에서는 누가 들어도 가명으로 생각될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브루스 웨인이 자신은 그림자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결말을 내려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진심으로 남자가 자신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When Bruce Wayne meets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7. 24

- Written by. Jade


 

Essence of Justice




 

  브루스 웨인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그 장소의 테이블 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구전처럼 도시를 돌아다니는 그의 버릇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무언가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매너를 발휘하게 했다.


  브루스 웨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빛을 내뿜을 것 같은 책상에 붙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입니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 건설한 시설의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하여 조성된 공간인 만큼 브루스는 앉은 자리에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반대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를 바라보았던 작은 스코프는 분명 존재했었다.


  브루스 웨인은 회상했다.


  그는 여기서 알프레드에게 온갖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경영학이 아니라 공학이나 신소재 학문을 전공했을 거라는 얘기부터 자신은 미술에 소질이 없다며 손수 그린 설계도를 팔락거린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는 소리를 했다가, 알프레드에게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그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당장 집사 일을 그만두었을 거라는 일격을 당했었다.


  물론 끝없는 번뇌와 고통도 있었다.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모니터 화면 위에 이제는 자신의 비틀린 동력이 되어가는 과거를 출력하며 스스로를 짜냈다. 울진 않았어도 기이하게 신음한 일은 한 두 번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마지막에서야 발견했던 스코프가 어떠한 모습들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넓은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저격용 스코프 같은 게 숨어 있을 만한 위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이 어느 건물 옥상에서 그것을 결국엔 발견하게 된 사건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의 관찰자는 그 자신의 임무를 종료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브루스 웨인은 쪽지를 힐끗했다. 그조차도 스코프를 쥐고 있던 장본인에 대해 고작 메모지 한 장에 들어가는 정보를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적힌 이름이 그 자의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담시의 뒷골목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암살자 같은 족속들도 그토록 은밀하고 비밀스럽지는 않았다. 브루스 웨인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어둠보다 조용하고 은닉의 화신들보다 비밀이 많은 관찰자가 붙게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의 관찰자에게 사연을 물었었다.


  바람이 참 요란스럽게 불었던 날이었다. 고층 건물의 옥상이라는 공간적 특징으로 인하여, 평소에는 별로 경험해 볼 일도 없는 온갖 대기의 성질들을 몸소 체험하며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응시했었다. 남자의 얼굴은 평범했다. 특징도 없이 그저 짧게 자르기만 한 머리칼에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말이 없었다.


  삼각대가 달린 장총은 아직 옥상의 난간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브루스 웨인을 쏘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브루스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사고 속의 브루스 웨인은 목소리로, 그리고 현재의 브루스 웨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그렇게 물었다.


  알프레드는 두 사람이 케이브라고 부르는 기지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브루스의 유리 별장에도 누군가가 침입하거나 감시 데이터를 읽은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었다. 달리 말하면 브루스는 그 남자가 언제부터 나타나 어느 곳까지 자신을 주시했던 건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상상해야만 했다.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리더인 브루스 웨인을 본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려받게 된 회사에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모양이었다. 성실한 기업인이라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자체에 꽤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범죄 단신을 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이번에 생긴 일 때문에 새로운 아이들 몇 명이 방문할지도 모르겠다며, 그들을 잘 대해달라는 당부를 그가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 전했다. 전화를 마친 그가 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힌 것 같았다.


  추가적인 일정이 없으면 브루스 웨인은 퇴근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주제의 잡지나 책을 읽거나 집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니면 혼자서 한 잔의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 그는 밤을 흘려보냈다. 이 모든 수가 빗나간다면 브루스 웨인은 십중팔구 묘소에 있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묘비 근처의 꽃을 갈아주고 그 앞에서 침묵하며 생각하는 브루스 웨인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탄에 시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고귀한 폭력이 되려는 브루스 웨인을 보았다.


  남자는 너무 오랫동안 브루스 웨인을 관찰하면서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지만 브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발견했는데도 왜 날 쏘지 않았지?


  브루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일종의 자연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브루스에게 시선을 보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받은 이의 행동 양식이었을까. 그렇지만 브루스가 지금 거울을 봤다면 남자가 그 때에 자신의 몫으로 가진 회상과 추측을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터였다.


  남자가 아는 많은 것들이 순서를 지켜 부상했다.


  저 억만장자가 비밀리에 꾸미고 있는 시설을 발견했을 때 그가 받은 임무 저변에 깔린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자들은 진실하고 충실한 자경단을 제일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억지와 같은 희박한 가능성을 들어 그 존재를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저들이 더욱 성장하게 될 때, 권력과 법을 대체하고 소름 돋도록 민주적인 신임을 얻을 때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공포로 여기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들의 궤변은 그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변질되는 정의들 덕택에 힘을 얻었다.


  브루스 웨인은 그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맹세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고민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남자를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남자에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굴었다. 브루스 웨인은 단 한 번도 총을 잡지 않았다. 그의 품은 펼쳐 보인 두 손바닥처럼 깨끗했다. 그 때도 그러하였다.


  정의로 인정받은 것은 더 이상 정의가 되려 하지 않고, 아직 정의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정의에 가까워지려 한다.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문장이 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인가?


  남자는 마침내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돌아가.

  —…나를 처리하는 게 당신의 임무였을 것 같은데. 날 돌려보내줘도 된다는 건가?


  남자는 브루스 웨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듯 바라보는 용도로 쓰였던 총을 문득 떠올렸다. 슬프게 솟구친 물감처럼 무성하던 풀밭 뒤편의 묘소로 그를 따라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브루스 웨인은 기어코 또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위해서 죽으려 하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총에 대해 알기라도 하듯이 브루스 웨인은 남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생명이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그래야 했다. 남자는 많은 걸 생각했으나 정작 그 안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한 마디를 꺼냈다.


  —괜찮아.


  브루스는 남자의 시선을 잃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브루스의 표정이 남자의 눈동자를 사선으로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브루스가 몸을 돌리면서 다시 하나의 선상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어.


  남자는 그 짧은 말이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질책하였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실현하고 싶다면 인간을 재단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 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모두가 남자를 향해 질릴 정도로 주입하던 법칙이었다. 정작 남자는 이태까지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역사는 이제 부정되었다. 남자는 혼자서 항이 비어있는 부등호를 채웠다.


  —그것이 정의의 본질이야.


  브루스 웨인은 어느새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의 모서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자의 말을 끝으로 회상을 중단했다. 정체불명의 감시자가 던진 충격에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지상으로 내려갔을 무렵에는 까맣게 타고 있는 자동차만 있었을 뿐이었다. 기름을 먹고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 강렬해서 사고 현장에는 제대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브루스 웨인은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었다. 그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전에 어떤 남자를 죽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모든 것은 재가 되었다. 남자가 두고 갔던 총은 아마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에 넘어갔겠지만 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본명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과 너무도 짤막하기만 했던 몇 마디의 말들이었다.


  브루스가 이름을 적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보았다. 잉크가 다 말라서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선명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이 잠시 브루스의 표정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섰다.


  오늘 그가 기지에 온 이유는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브루스는 벽면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모든 것을 가려주되 그에게 남은 것을 이루어줄 갑옷이 완성된 형태를 드러냈다. 회상을 마친 브루스 웨인은 현재에 다시 입성했다.




In Flames by Lungley


오늘 밤 천사는 죽을 것이고

천국은 그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걸 잊으리

불길 속에서 우리의 이름은 맹세된다

  불길로부터 우리 둘은 태어난다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4. (Incompleted)



  벤지는 눈을 뜨기 전부터 자신이 있는 공간이 변화했음을 알았다. 졸리지는 않지만 마땅히 힘이 펄펄 솟는 것도 아닌 기묘한 부유감이 몸 안을 돌고 있었다. 벤지는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는 다친 곳도 없이 병원에 누워 있었다.


  어쨌든 정체를 알 수 없는 기체를 흡입했으니 병원으로 실려 온 것 같다며 자체적인 판단을 마친 벤지는 의자의 등받이에 턱을 괴고 있는 브랜트를 발견했다. 식탁 사이에나 꽂혀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의 의자를 어디서 공수해 온 것인지는 몰라도, 브랜트는 꽤나 편하게 그것에 몸을 의지하면서 핸드폰을 만지고 있었다. 벤지가 뚱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터 느낀 건데, 그 자세 이상해.”

  “뭐가.”

  “첩보기관의 부국장이라는 사람한테는 안 어울린다고.”


  두 사람은 독특한 방식으로 서로의 안부를 확인했다. 브랜트가 의자 바깥으로 삐져나와 꺾여 있던 팔을 하나씩 회수했다. 


  “일반적인 수준의 신경가스였으니 네 몸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단은… 거기서 뭘 가져간 거야?”


  “기록청장의 도움을 받아 알아봤는데, CIA 내에서 발의는 되었지만 현실화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관한 거였어.”


  “보관소에 있었던 센티넬 프로젝트처럼?”


  “그거랑은 달라. 그 센티넬은 몇몇 인간들이 써먹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랭글리 안에 있었던 거고. 통제구역 안에 있던 건 만장일치로 버려진 것들이었어. 국장님은 CIA에 그런 미친놈도 있었냐며 황당해하시던데. 하나는 미국 시민만을 대상으로 한 암살 및 감청 프로그램이었고 또 하나는 조기 인재 선발이라고 포장해두긴 했는데, 결론적으로는 기관이 어린 생명들을 쓸 만한 녀석과 그렇지 않은 녀석으로 구분해놓겠다는 내용이었어.”


  브랜트의 말을 다 들은 벤지가 감탄하듯 중얼거렸다.


  “와, 진짜 미친놈인데?”


  “그리고 그런 미친놈의 아이디어가 정보기관을 씹어 먹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악당 손에 들어가고 말았지. 대중들은 당연히 선동될 거야.”


  “…막을 방법은?”


  “생각 중이야.”


  브랜트는 다시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벤지는 털썩 주저앉고 싶었지만 이미 누운 상태였기에 황망히 눈만 깜빡였다. 이단은 자신이 빼돌려야 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을까? 그가 늘 지키려 했던 조직에 지금 그 자신이 가장 큰 위협을 제공하고 있다는 것도 모를 만큼, 가이드 없는 센티넬이라는 게 그렇게 무력한 존재일까? 벤지는 이 모든 물음들을 해소하기 위해 필요한 기술이라든가 학문적 사실을 너무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벤지의 머릿속에 있는 건 이단이 자신을 보고서도 총을 쏘는 대신 어렵지 않게 해독될 수 있는 가스를 뿌렸다는 기억뿐이었다.


  그 때 브랜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브랜트는 전화벨이 한 번 다 울리기도 전에 스피커폰을 켰다. 


  “알아낸 게 있어요?”


  벤지의 눈동자가 잠시 커졌다. 


  —당신이 찾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병실 내부를 가득 채우는 일사 파우스트의 목소리를 들은 벤지는 더 크게 눈을 떴다. 



* * *




  그러니까 벤지가 아주 편하지만은 않은 잠에 빠져 있을 무렵 런던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브랜트의 연락을 받은 일사가 조지 더글라스라는 인물이 영국 정보부와 혹시 관련이 있는지 질문했을 때, 루퍼트의 머릿속에 특별히 떠올랐던 것은 없었다. 그는 외부인이 된 일사가 더는 접근할 수 없게 된 MI6의 데이터베이스에 이름을 돌려보겠다고 약속을 하긴 했다. 그러한 과정이 있어 루퍼트는 반만 채운 머그컵을 앞에 두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데이터베이스는 부지런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루퍼트는 지금까지 벌어진 사건을 돌이켜보았다. 그는 이태까지 CIA 내부의 비밀 아닌 비밀 기관에 대해 열렬한 관심을 표한 적이 없었다. 그는 유럽을 누비는 남자였고, 그가 예기치 않게 미국인들과 어울리게 된 것은 솔로몬 레인이 이단 헌트를 찾으라는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단 헌트가 숨기고 있는 정체와 관계없이 루퍼트에게는 유효한 하나의 임무였다.


  루퍼트는 데이터베이스의 검색 결과를 기다리는 짧고 의미 없는 시간에, 갑자기 아무런 묘사도 없이 단지 이단 헌트를 지목하기만 했던 솔로몬 레인의 의도를 추리해보게 되었다. 죽은 자가 누군가의 이름을 남겼다. 이 경우 이름의 주인공이 살인자이거나, 살인자를 알려줄 수 있는 중요한 고리일 수 있다는 두 가지 가능성이 생겨난다. 


  진전 없던 화면이 바뀌어 루퍼트가 허리를 폈다. 본부에 제출되었던 몇 개의 보고서에서 조지 더글라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듯했다. 루퍼트는 제일 위에 뜬 검색 결과를 클릭했다가 그가 솔로몬 레인과 엮여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루퍼트가 목을 좀 더 빼고 스크롤을 내렸다. 


  —루퍼트? 벌써 뭐가 나왔어요?

  “더글라스는 레인과 같은 생각을 했던 놈이었어요.”

  —네?

  “더글라스는 미국판 솔로몬 레인이나 다름없는 자란 말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이단 헌트는 당신이에요, 일사.”


  잠시 후 일사의 핸드폰으로 한 장의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을 열어본 일사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아예 눈동자를 사진에 고정해버렸다. 


  —이 사람이 레인이랑 같이 있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습니까?

  “아니요. 있어요.”


  일사의 핸드폰이 조금씩 아래로 미끄러졌다.


  “브랜트에게 알려줘야겠어요.”


  일사는 언제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옷을 벗을 수 있을지 헤아리는 것도 포기해가던 시절의 한 부분을 떠올렸다.


  일사는 레인의 방문 앞을 야닉 빈터가 지키는 걸 보고 일단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성큼성큼 화장대 서랍에서 작고 납작한 물건을 꺼낸 뒤 그것과 색깔이 같은 리시버를 귀에 끼고 머리카락으로 귓불 주변을 가렸다. 밖으로 나가니 야닉 빈터가 문지기 일이 지루한지 구두 앞코를 까딱거리고 있었다. 일사는 숨 쉬는 소리도 내지 않고 코너를 돌았다.


  그녀는 솔로몬 레인의 방과 인접해 있는 비상계단 쪽으로 숨어서 가지고 온 물건을 벽에 갖다 댔다. 그것은 일종의 증폭기 역할을 하면서 작게나마 일사에게 레인의 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화를 끌어왔다. 


  —배우와 감독, 두 영역에서 성공한 사람은 흔하지 않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왜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거지.


  일사가 모르는 목소리였다. 일사의 상체가 알아서 벽으로 바짝 붙었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이른바 ‘구조적 완성도’에 목을 매지 않나? 

  —일사 파우스트를 보면 꼭 나만 거기에 관심을 가진 사람 같지는 않은데.

  —일사는 그저 상관의 명령을 듣는 평범한 요원이야. 그녀에겐 언제나 별다른 선택지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게 약간 다를 뿐.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튀어나온 것에 놀랄 틈도 없이 일사는 증오스러울 정도로 냉철하고 정확한 레인의 단평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빼서 야닉 빈터의 발을 확인했다. 그의 발은 아예 허공에 대고 박자를 젓고 있었지만, 일사는 그것이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건 전혀 아니라는 걸 또렷하게 머릿속에 새겼다. 


  발각된 스파이의 움직임은 둔해지기 마련이다. 일사는 장비를 챙겨 철수하면서 누군가의 한 마디를 들었다.


  —그런 훌륭한 인재라면 내 곁에 두고 싶군.


  일사는 놀라운 빠르기를 발휘해 방으로 숨은 다음 얇은 틈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일사가 평생 동안 본 적 없는 얼굴이 솔로몬 레인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몇 달 뒤 일사는 지하실로 끌려 온 이단 헌트를 구했다. 그리고 그녀에겐 두 번째로 그를 구하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는 단서는 현대의 통신 시스템을 거쳐 미국 동부 땅에 있는 브랜트와 벤지에게 도달한 상황이었다. 


  “랭글리와 런던에서 온 정보들을 종합해보자고.”


  벤지의 병실은 간의 회의실이 되었고 그의 침대는 급한 대로 테이블 역할을 맡게 되었다. 브랜트가 화이트보드 대신 놓여 있는 타블렛에 번호를 썼다.


  “루터가 랭글리에서 긁어온 자료들에 의하면 이단이 훔쳐간 초안들을 작성했던 조지 더글라스라는 자는 CIA에서 활동할 때도 썩 얌전하진 않았던 것 같아. 임무 성공률은 상위권이었지만 지나치게 과격하고 공격적인 아이디어를 자주 제출했다고 해.”


  브랜트의 손가락이 이번에는 숫자 ‘2’를 그렸다. 


  “일사가 싱클레어 요원에게 물어봤는데, MI6가 가지고 있는 기록에서도 그가 등장했다더군. 두 사람은 요원으로 뛸 때 일을 같이 했었다는 거지. 더글라스는 스스로 CIA를 떠났다고 되어 있지만 그의 튀는 행동들을 보면 위에서 나가라는 압력이 있었을 거야. 여기에 더해서 우리는 레인이 MI6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지.”


  “죽이 잘 맞네. 그러니 레인의 신디케이트가 무력화된 이후에는 그 더글라스라는 놈이 날뛰는군.”


  “아마도. 그런데 일사가 재밌는 얘기를 했어. 두 사람이 꼭 서로를 경쟁자로 보는 것 같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대. 일사는 그들이 목표는 같을지언정 서로 택한 길이 달랐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레인은 아주 비밀스러웠잖아. 신디케이트라는 조직이 있다는 걸 알아내는 데에도 많은 시간이 걸렸으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조지 더글라스는 꽤 요란한 타입이겠지.”


  그러면서 타블렛 위에 쓰여 있는 숫자를 하나 더 늘리려던 브랜트가 멈칫했다. 벤지가 브랜트의 손목을 잡고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 사람의 얼굴을 띄워 올리고 있었다. 


  “…이단이 가져간 자료들 말이야, 그게 언제 작성된 거지?”


  “더글라스가 기관을 떠나기 3개월 전. 그 두 개가 마지막 제안서들이었어.”


  “그 놈이 일부러 그런 어처구니없는 내용을 써 낸 다음, 스스로 자신을 상부의 눈 밖에 나게 만들었다면? 그게 기록청의 지하로 직행할 거라는 걸 예상하고, 나중에 그게 세상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을 때 야기될 문제까지 다 계획해 놓은 거였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 일을 어쩔 수 없이 이단이 떠안게 된 것까지 전부 각본이었으면?”


  브랜트는 눈을 껌뻑거렸다. 벤지가 지휘자처럼 손을 흔들기 직전 그가 내뱉었다. 


  “이단은 CIA의 적이 됨과 동시에 버려지겠군.”


  타블렛이 휙 뒤집히고 벤지가 담요를 걷어찼다. 그의 양 발이 신발을 낚아채려고 부지런히 허우적거렸다. 브랜트가 아슬아슬하게 침대에 걸쳐져 있던 타블렛을 추락의 위기로부터 건져냈다. 


  “잠깐, 벤지. 침착해. 그 꼴로 나갈 거야?”


  대답을 하기에 앞서 몸부터 가눠야 했던 벤지의 다리가 한바탕 두 사람 사이를 갈랐다. 품이 넓은 환자복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벤지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내 옷은 어디 있는데?”


  브랜트가 침대 밑에서 가방 하나를 꺼내 벤지에게 건넸다. 벤지는 자신의 동료이자 상관에게 한 줌의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는 듯 환자복을 훌렁훌렁 벗었다. 브랜트의 눈동자가 조용히 천장을 향했다.


  “덧붙이자면 우리가 그렇게 불리한 입장인 건 아니야. 영향력 있는 언론사나 방송사가 CNN을 제외하면 다 뉴욕에 있으니까. 그 놈은 파급효과를 노릴 텐데 그럼 뉴욕만큼 괜찮은 곳이 없어. 애틀랜타에는 루터를 보낼 거야.”


  타이밍 좋게 벤지가 소리 없이 만세를 외치는 자세를 선보였다. 브랜트는 머리까지 안정적으로 쏙 밖으로 빼낸 벤지를 데리고 병실을 나섰다. 두 사람은 워싱턴 D.C를 떠나 더욱 동쪽으로 향했다.




Original Date 2015. 11. 05.

미완성작이라서 카테고리도 붙이지 않음..

[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3)

- Anything 2016. 6. 23. 15:45 posted by Jade E. Sauniere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 Ethan Hunt/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3. 부재하는 인도자]


  일사는 브랜트가 카페 메뉴판을 보기 전 루퍼트 싱클레어가 전부터 MI6 현 국장과 친했으며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다고 귀띔해주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IMF의 뜻을 영국 정보부 측에 전달해줄 메신저 역할로 싱클레어 요원이 최적의 선택이라는 확신을 브랜트에게 심어준 것이었다.


  브랜트는 유능한 대변인을 옆에 낀 것처럼 술술 이야기했다. MI6와 IMF 모두 이단 헌트를 추적해야 하는 명분이 있으니 그걸 막지는 않겠으며, 오히려 어느 정도 목표를 공유하는 사이로서 협력을 이뤄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역설했다. 다만 이단 헌트를 곧장 죽이는 일만큼은 반대하고 그가 자의로 범죄와 테러를 일삼을 인물은 아니므로 그를 생포한 뒤 자초지종을 듣는 게 먼저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와 같은 브랜트의 일장연설을 들은 벤지는 하마터면 박수를 칠 뻔했다. 


  루퍼트 싱클레어는 대답에 앞서 커피를 마셨다. 두 미국인은 느긋한 동작 아래에서 저 영국인 양반이 어떻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지 조용히 궁금해 하고 있었다. 브랜트와 벤지에게는 루퍼트가 꼭 1분씩이나 커피를 마시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초지종이라, 그쪽에서도 신디케이트 같은 게 있었던 것은 아닙니까?”

  “이단은 솔로몬 레인과는 달라요.”


  벤지는 본인이 그렇게 뱉어 놓고 놀라서 입술을 꽉 붙였다. 브랜트는 당황하지 않고 벤지의 의견에 동의했다. 그것이 영국 정보부 출신으로서는 꽤나 희귀한 풍경이었는지, 싱클레어 요원의 눈썹이 잠시 위로 올라갔다 가라앉았다. 


  “말씀하신 것 중에 틀린 점은 없는 것 같군요. 국장님에게 당신의 말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루퍼트는 커피를 깨끗이 비운 뒤 일어났고 일사가 뒤를 이었다. 주춤거리며 의자에서 물러날 준비를 하던 벤지가 눈을 굴렸다. 


  “벤지, 넌 나랑 얘기 좀 해.”


  브랜트가 옆에서 속삭였다. 루퍼트와 일사가 카페에서 천천히 벗어나고 있었다. 

 

  “너는 아는데 내가 모르는 게 있지? 미국에서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뭐?”

  “보관소에서 말이야. 거기서 대체 뭘 본 거야? 정말 싱클레어 말처럼 CIA도 신디케이트 같은 걸 키우고 있었어?”


  그제야 벤지는 무너지는 은행의 천장 아래에서 먼지와 함께 사라져버린 이단의 그림자가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수면 위에 떠오른 것은 너무나도 냉정한 글자들이었다. 일사 파우스트의 지적을 요원들의 진리로 자꾸만 격상시키려 하는, 소름 돋도록 효율적이면서 계산적인 낱말들 속에서 벤지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이단이 옛날 일사 꼴이 날지도 몰라.”

  “…무슨 소리야?”


  “레인은 정보부 요원을 이용해서 정보부라는 체계를 없애버리려고 했잖아. 그 과정에서 일사는 착취당했어. 이단도 그렇게 될지 몰라. CIA는 신디케이트가 아니라 신디케이트의 무기를 가지고 있었어, 브랜트. 그걸 폐기하지도 않고 때를 재면서 감춰두고 있었다고!”


  “일사는 어쨌든 임무 때문에 신디케이트에 잠입했던 거잖아.”


  “그런데도 그녀는 버려질 뻔했어. 정보부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명분이 있었는데도.”


  브랜트는 벤지가 왜 이단을 일사와 비교하고 있는지 이해했다. 이단에게는 일사처럼 공적인 명분도 없었음에도 첩보기관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행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벤지는 입가를 딱 굳히고 브랜트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필경 이단 헌트의 비극적인 최후를 논하고 싶지 않아서일 것이었다. 


  한편 루퍼트와 함께 MI6로 돌아가도 어색하지 않을 위치의 일사는 다시 두 사람이 앉아 있는 카페로 돌아오고 있었다. 멀리서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은 그녀가 고개를 갸웃했다.


  벤지가 의자에서 솟아오르듯이 일어났다. 그가 일사를 붙잡았다. 


  “일사, 만약 당신이 미국 정보부를 궤멸시키라는 임무를 받았다고 생각해봐요. 당신이라면 어떤 방법을 쓸 것 같아요?”


  “뭐라고요? 갑자기 그게 무슨….”


  “진짜 중요하다고요! 빨리요. 당신은 어떻게 할 거예요?”


  브랜트는 의자 등받이를 붙잡고 몸을 돌린 상태였다. 삽시간에 매우 복잡한 관심을 받게 된 일사는 어색해하면서도 두 사람이 원하는 답을 주었다. 


  “사실 한 나라의 중앙정보부를 위기로 몰아넣는 건 어렵지 않아요.”


  “…진심이에요?”


  “대중들에게 모든 것을 폭로하면 돼요. 정보국이 인권을 소홀히 하고 심지어는 자국민도 거침없이 이용하고 타락시킨 경우가 한 둘이 아니잖아요.”



* * *



  얇고 날카로운 물질이 주는 압박감이 버거웠다. 이단은 미간 근처까지 다가온 물체에 밀려 자연스럽게 머리를 뒤로 뺐다. 그러나 그것은 이단의 눈동자에 끈질기게 달라붙었고 이단은 결국 포기하여 눈앞의 종이가 무엇을 표현하는지 보았다. 그는 이태까지 미뤄두었던 포기의 기회들을 빠르게 소모하고 있었다.


  이단이 보고 있는 것은 어떤 청사진이었다. 이단은 눈 사이에 몰려든 무거운 감각이 이마를 타고 머리 곳곳으로 흡수되는 걸 간신히 이겨내면서 청사진에 나와 있는 통로를 따라갔다. 이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냈다.


  “이게 어딘지 알지?”

  “…이건 못 해.”

  “내 용건을 들어보지도 않고?” 


  이단은 끝내 눈을 조금 오랫동안 감았다가 떴다.


  “어쨌든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되는 일이겠지.”

  “자네가 지금까지 날 위해 한 일은 그렇지 않다고 보나?”

  “저긴… 들어갈 수 없어.”


  이단은 부국장급 이하의 요원으로서는 드물게 미국 국립문서 기록관리청의 지하통제구역을 알고 있었다. 내부에 숨어 있던 테러 조직의 끄나풀을 유혹하기 위해 그곳에 침입해야 했던 역사는 마냥 영웅적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나, 그 구역에는 이단이 당시 선택했던 자료가 아니라도 반체제적인 자들이 군침을 흘릴 만한 문건들이 너무도 많았다. 


  이단은 큰 용기를 내어 몸을 일으켰다. 한 장짜리 종이가 팔락이는 소리가 났다. 어차피 이단에게 허락된 공간은 너무나 좁아서 그는 침대 위에서 왼편의 스탠드로 옮겨간 것에 그치고 말았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고층빌딩을 질주했던 요원에게는 얼토당토않은 그 짧은 거리와 움직임이 이단의 기력을 앗아갔다. 


  남자는 계속 청사진을 들고 있었다. 이단은 최선을 다해 그를 외면했다.


  심연부터 탈진해가는 감각이 있다면 아마 이단의 온몸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것과 가장 닮아있을 게 틀림없었다. 이단은 몇 번의 경험으로 이것이 수면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혼신(魂神)이 가루가 되어 쌓여가는 기분은 저 남자가 주는 정체 모를 신호와 명령을 통해서만 잠시나마 해소되었다. 몇 가지 확실한 사실은 이단의 뇌리에 있었지만 이단은 그것이 탄생한 과정을 몰랐다. 


  “현재의 자네를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이단은 정말이지 간신히 뒤를 돌지 않고 버텼다. 


  “자네에게 생긴 문제는 나만 알아. 그러니 그걸 해결할 수 있는 법도 나만 알지 않겠나?”

  “…난 당신을 안 믿어.”

  “그렇지만 내 말을 완벽히 확인해보려면 자네는 통제구역에 갔다 와야 해.”


  남자의 언어가 취하고 있는 형식은 이단에게 낯설지 않았다. 이단이 솔로몬 레인으로부터 벤지를 돌려받기 위해 날렸던 반격의 한 수였다. 그것이 통하여 이단은 벤지를 되찾았고 레인을 체포했었다. 


  이단은 자신의 수법을 잃었고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그리고 이단의 곁에는 그것을 토로할 동료도, 그 이야기를 들어주면서 이단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해줄 친구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이 맛볼 수 있는 가장 비참한 무력감에 고개를 숙였다. 


  청사진이 한 번 더 팔락였다. 자신에게 진정한 인도자가 필요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이단은 결국 청사진을 받았다.



* * *



  브랜트와 벤지가 미국 행 비행기에 오른 지 벌써 두 시간이 지났다. 루터가 스캔한 ‘센티넬 프로젝트’의 파일을 완벽히 내려 받고, 지상에 있는 헌리 국장과 안정적인 위성 통화를 하기 위해 꽤 많은 시간을 허비한 둘은 그다지 넓지도 않은 비행기 안에서 잽싸게 흩어졌다. 지금 브랜트는 한창 헌리와 통화를 하고 있었으며 벤지는 타블렛으로 스캔된 서류를 읽고 있었다.

벤지는 파일들을 휙휙 넘겨서 그가 미처 미국에서 보지 못했던 부분에 집중했다. 센티넬이라는 걸 설계한 작자는 다행히도 제어장치보다 더 안정적인 무언가도 구상을 해 본 듯했다. 벤지는 약간 기대를 하며 내용을 읽었다.



  ‘센티넬’이 요원들에게 몇 가지 부작용을 초래할 경우, 그것은 칩과 연결되어 있는 제어장치가 감당할 수 없는 심각한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다. ‘센티넬’이 전달하는 스트레스 신호가 요원들의 정신에 일종의 트라우마처럼 임무 종료 뒤에도 잔상을 남길 수 있는 가능성이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그런 경우에 책임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방책이 ‘가이드’이다. ‘가이드’ 역시 ‘센티넬’처럼 인간의 몸에 정상적으로 주입이 가능한 마이크로칩인데, 따로 제어장치가 있지는 않으며 요원을 조종하기 위한 목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본질적으로 ‘가이드’는 ‘센티넬’의 신호를 나눠 받는 보조 도구이다. 


  ‘센티넬’이 감당하는 신호, 혹은 그것의 잔상이 지나치게 강하고 제어장치로도 관리할 수 없을 때 ‘가이드’가 주입된 요원은 ‘센티넬’이 주입된 요원과의 상호 작용을 통하여 신호를 떠안고 상대방의 판단 능력을 회복시킬 수 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한 사람에게 ‘센티넬’과 ‘가이드’를 모두 집어넣는 것은 효과가 없다. ‘가이드’는 아주 거칠게 말하면 ‘센티넬’이 발생시키는 부담을 현실적으로 떠안으면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이드’는 ‘센티넬’이 이식된 요원의 책임자, 혹은 그 요원과 짝을 이루는 파트너, 외부인 중에서 찾아야 한다면 요원의 아내나 가족 등에게 이식하는 것을 권한다.



  벤지는 자신의 행동이 별 효력이 없을 걸 알면서도 눈을 한 번 비비고 타블렛을 가까이 들었다. 당연히 활자는 달라지지 않았다. 벤지는 기가 막혀서 도리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시간이 난다면 이 제안서를 작성한 인간을 찾아서 머리카락을 아프게 비틀어주겠노라고 다짐했다.


  CIA의 비상식적인 잔인함에 다소 주의를 뺏겼던 벤지는 제안서의 내용을 곱씹어보다가, 말 그대로 의자에서 펄쩍 뛰었다. 


  “…뭐야, 벤지, 왜 그래?”


  통화를 마친 브랜트가 용수철마냥 뛰어오르는 벤지를 보고 한 발짝 물러났다. 벤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도리질을 치더니 급기야 저편으로 멀어졌다.


  벤지의 예상대로라면 이단은 나 홀로 센티넬을 주입받은 지경에 놓여있을 것이었고, 언젠가 그에게 ‘가이드’가 절실해지는 상황이 닥칠 것이었다. 그런데 가이드를 받는 자는 반드시 타인이어야 했으며 이단은 다수의 정보국을 노리는 범죄자의 손아귀에 떨어져 있었다.


  벤지는 그 자가 이단에게 절대로 ‘가이드’를 제공하지 않을 것임을, 어쩌면 그런 게 존재한다는 것조차 비밀에 부칠 거라는 가설에 자신의 비디오 게임 컬렉션을 걸 수도 있었다. 


  “벤지? 괜찮아?”

  “…아니. 전혀.”

  “그럼 너는 도착하면 쉬어. 이단이 나타날 것 같은 장소에는 팀 하나를 통째로 파견하지, 뭐.”


  멍하게 긍정을 표하려던 벤지가 정신을 차렸다. 


  “랭글리 말고 또 있어?”

  “워싱턴에 국가 문서를 관리하는 시설이 있잖아. 국장님은 거기에도 인력을 파견해야 할 거라고 하시는데? 거기에도 악당들이 눈독을 들일 게 많대.”


  말을 마치자마자 브랜트는 벤지의 놀라운 힘에 이끌려 털썩 의자에 앉았다. 벤지가 진지하게 타블렛을 브랜트 쪽으로 돌렸다. 그 덕에 브랜트도 그들이 구해야 하는 동료가 일촉즉발의 폭탄 위에 올라서 있다는 걸 실감하여 한동안 넋을 빼고 있었다.



* * *



  루퍼트 싱클레어는 두 번째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카페인에 예민한 육체를 가지고 있지는 않더라도 이 커피로 인해 새벽 2시까지는 깨어있을 수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천천히 커피를 머금는 루퍼트의 앞에는 배터리가 꽂혀 있어 화면이 꺼지지 않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이단 헌트가 산탄데르 은행에 출몰하여 한바탕 건물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놨던 건 비극이었고 MI6의 실책이었지만 덕분에 얻은 것도 있었다. 영국 정보부 측은 감시 카메라가 오작동을 일으킨 시점들을 정밀히 파악하여 도굴꾼 같은 침입자가 본부에 머문 시각과 목표 등을 거의 알아냈음에도 그가 무엇을 노렸는지는 알지 못하고 있던 차였다. 이단 헌트의 출현은 바로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공했다.


  파일이 복사된 흔적이 없었고 측정된 시간이 다소 짧았음을 고려하여 루퍼트는 침입자, 9할 이상의 확률로 이단 헌트일 그 범인이 상위 몇 개의 계좌 정보만을 외워갔으리라 추측했다. 이에 덧붙이자면 MI6 측에서 새로 정렬한 정보들의 맨 상단에는 영국의 은행들이 열거되어 있었다.


  루퍼트가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남은 양을 확인하는 그 순간에 노트북이 경보를 울렸다. 두 번째 습격이었다.


  아무리 체력 좋은 관광객이라도 아침을 다 날리지 않기 위해 침대로 기어들어가야 하는 야심한 시각, 루퍼트 싱클레어는 도로를 질주하며 진압 팀의 선두에 섰다. 차들이 시끄럽게 급정거하는 소리에 몇몇 건물의 창문이 열렸다.


  회전문 주변에서 망을 보는 자가 있어 루퍼트가 방아쇠를 당겼다. 차에 탑승하기 전 자동권총에 달아 놓았던 소음기는 멋지게 제 역할을 했는데, 안타깝게도 쓰러진 적의 몸이 요란하게 바닥과 부딪히면서 적들의 시선이 회전문 쪽에 집중되었다. 


  루퍼트는 은행 사설 경비가 앉는 데스크로 뛰었다. 놈들이 지폐 뭉치를 내려놓고 서둘러 무기를 잡았다. 루퍼트는 의자를 오른쪽으로 휙 빼고 자신은 정중앙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의자 바퀴가 끼익 밀리는 소리에 몇몇은 오른쪽을, 다른 몇몇이 한 번 뒤집어 생각해서 왼쪽으로 총구를 돌리는 사이에 루퍼트의 사격이 한바탕 적을 휘저었다. 게다가 절치부심한 기동대원들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오는 과격함으로 삼면을 봉쇄했다.


  상황이 자신에게 유리해지자 루퍼트가 훌쩍 책상을 타고 넘었다. 그는 돈을 가장 열심히 챙기고 있던 남자의 헬멧을 벗겼다. 각진 턱이 인상적인 그 남자는 루퍼트가 찾는 얼굴이 아니었다.  


  “이단 헌트는 어디 있지?”


  그는 그렇게 물으며 총을 더 똑바로 쥐었다.


  “이단 헌트는 어디 있냐고.”

  “혁명적 전환을 위한 자리에.”


  그러고 남자의 입에서는 피가 흘러나왔다. 루퍼트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맹신과 광기가 어우러져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그러한 악질적인 순교를 제일 싫어했고 혁명이란 위대한 단어를 더럽히는 족속은 더욱 경멸했다. 루퍼트는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있던 손을 폈다.


  기괴한 광경이 펼쳐졌다.


  총소리 한 번 나지 않았는데 범죄자들의 몸뚱이가 하나 둘씩 풀썩 쓰러졌다. 그들은 입 안에 똑같이 피를 물고 있었다. 일종의 전언 같은 모습을 목도하면서 루퍼트 싱클레어는 저러한 족속들 사이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갇혀 있는 이단 헌트를 생각하고 말았다. 그는 소요를 변화의 움직임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이 그들의 분수에 넘치는 수단을 가질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비행기는 워싱턴의 공항에 착륙한 뒤 승객을 태우지 않고 격납고로 들어갔다. 랭글리에는 보관소를 감시할 인원이 차고 넘친다는 벤지의 지적을 받아들인 브랜트는 벤지가 그 자신의 목적지로 마음에 두고 있던 워싱턴의 기록 관리청에 함께 가기로 했다.


  택시를 잡은 두 사람은 사이좋게 벤지의 타블렛을 보았다. 벤지는 행여나 민간인인 택시 기사의 귀에 국가 기밀로 취급될 수 있는 정보가 흘러들어갈까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단을 뒷조종하고 있는 놈들이 원하는 건 통제구역에 있을 거야.”

  “…너도 그걸 알아?”

  “이단을 백업하면 이래저래 머리에 들어오는 게 많아. 나도 IMF가 예민하게 다뤄줘야 하는 요주의 인물이라고.”


  브랜트는 한숨을 쉬었다.


  “네 파일에 그 문장을 추가하도록 할게.”

  “역시, 믿음직한 부국장님.”


  그 말에 브랜트는 자신의 지위가 생각났다는 듯이 중앙정보국 내 독립기관의 관리인다운 눈빛을 띠고는 벤지에게 딴 소리는 집어 치우고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벤지가 헛기침을 하며 화면을 넘겼다. 


  “크흠. 통제구역은 두 개의 층으로 이루어지는데 어느 층에 뭐가 있는지는 관리청장만 알아. 그래서 두 곳을 전부 살펴봐야 해.”


  “알아. 그러니까 흩어져야지.”


  “흩어지는 건 그렇다 쳐도, 문제는 위급 상황 시에 우리가 재빠르게 한 장소로 모여서 행동하는 것도 녹록치 않다는 거야.”


  “어째서?”


  벤지가 두 손가락으로 내부 구조도를 확대했다. 


  “보여? 통제구역에는 비상계단이 없어. 한 층 차이라도 이동을 하려면 복잡한 인식 단계를 거쳐야 하는 중앙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해.”

  “젠장.”

  “그러게 말이야.”


  택시가 신호에 걸려 잠깐 멈췄다. 브랜트가 창밖을 내다보았다. 링컨 기념관의 지붕이 그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속삭였다.


  “위층, 아니면 아래층?”


  동료를 되찾을 수 있는 적기의 시작이 동전 던지기와 다를 게 없다는 현실에 벤지의 표정이 조금 우울해졌다. 택시는 부지런히 워싱턴 DC의 주요 명소들을 지나쳐 마지막 커브를 준비했다.


  벤지가 전부터 따분하다고 생각했던 기록관리청의 건물이 훅 커졌다. 인도의 가로등들은 모두 켜져 있었는데 정작 관리청 입구에 세워진 기둥 모양의 전등은 깜깜해서 관리청이 상대적으로 새카맣게 보였다. 벤지는 출입구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미국의 국가 기관들 중에는 신전 같이 생긴 건물들이 참 많았다.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콘솔 게임과 동등하게 예술을 존중하는 벤지에게는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었다. 이단을 눈앞에 있는 석조 건물로 들여보내면서 벤지는 반쯤은 혼잣말로 그에 대해 불평을 했었다. 그러자 이단은 어쨌든 그것이 그 건물이 가진 최초의 모습이니 존중해주어야 한다고 했다. 세상에는 처음이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는 것들이 있다면서.


  벤지가 다른 상념에 빠져있는 동안 브랜트가 만약을 대비하여 백업 팀을 불렀다. 정말로 움직여야 하는 시간이었다.


  딱딱한 굽의 신발을 신은 사람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매끈한 대리석 바닥은 두 사람의 발소리를 크게 증폭시켜 사방으로 힘껏 던졌다. 온갖 비밀스러운 장치의 보호를 받고 있을 마그나카르타가 겉으로는 조용히 잠을 자고 있었고, 로툰다 형태로 조성되어 있는 정면의 공간에는 독립선언서의 원본이 성조기의 얇은 그림자를 둘둘 감고 있었다. 브랜트가 핸드폰으로 플래시라이트를 켜서 구석으로 쑥 들어가 있는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두 사람은 엄숙하게 동쪽과 서쪽을 감싸고 있는 그림을 지나쳐 더욱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일조차도 만만치 않아서, 벤지가 핸드폰으로 도식화된 코드를 받아 인식을 시키고 나서야 문이 열렸다. 그는 척척 두 개의 버튼을 눌렀다. 먼저 내리는 사람은 브랜트였다. 브랜트는 엘리베이터에서 나가기 직전 귀에 리시버를 찔러 넣었다.


  “네가 있는 층에 이단이 나타나면 무조건 지원을 불러. 알았지?”


  벤지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브랜트가 사라졌다.


  성능 좋은 엘리베이터는 20초도 안 되어 벤지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벤지는 곧바로 문이 닫히지 않게 엘리베이터 사이에 발을 끼우고, 승강기 내부의 밝은 빛을 최대한 등에 업고 눈을 홱홱 굴렸다. 


  벤지는 임시 손전등이 된 핸드폰을 들어 올리면서 자신에게 이단 헌트가 어디에 나타나길 바라는지 질문했다. 이단이 ‘센티넬’로 인하여 세상에서 가장 불우하고 위험한 인간이 되었다면 벤지는 그를 막을 수 없었다. 벤지는 그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이단이 했던 경험을 함께 공유하고 있는 IMF의 현장 요원에 불과했다. 그는 가이드가 아니었다. 벤지는 더 자세하게 자신에게 던진 질문에 답했다. 당장 이단에게 필요한 존재도 아니고, 몸싸움을 벌여서 이단을 막지도 못할 자신보다는 조금이라도 승산을 노려볼 수 있는 브랜트가 있는 위층이 여러모로 이단이 등장하는 장소여야 했다.


  벤지는 진심으로 자신이 흔드는 불빛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걸려들지 않기를 바랐다. 그 소망이 오히려 역효과를 낸 것이라고 벤지를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필 왼쪽부터 차근차근 더듬어보자는 계획을 탓할 수 있는 인물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도 벤지 자신뿐이었다.


  그리하여 벤지는 자신을 향하여 온 힘을 다해 혀를 찼다. 이단 헌트의 마른 동공이 갑작스레 나타난 빛에 의해 작아졌다. 


  “…이단.”


  순간적으로 벤지가 핸드폰을 든 팔을 아래로 떨궜다. 엉겁결에 빛을 맞은 이단의 재킷이 그만 벤지에게 무기를 노출하고 말았다. 벤지가 시선을 바로잡았다. 누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벤지의 앞에는 이단이 있을 것이었다. 벤지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들은 네 자신을 되찾아주지 않아, 이단.”


  그 말은 아무런 계산 없이 튀어나간 것이었다. 다행히도 이단은 벤지에게 총을 쏘지 않았다. 벤지는 빛을 감추며 핸드폰 단축키를 눌렀다. 기록관리청에서 2블록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는 팀에게 긴급 문자가 발송되었다.


  “…이단? 내 말 들었어? 난 너한테 뭐가 필요한 지 알아. 내가 도와줄 수 있어.”


  벤지는 적당한 때를 노려 다시 불빛을 앞으로 뿌리려 했다. 이단 헌트의 어둠은 고요했다. 벤지는 주춤거리다 마음을 굳게 먹고 빛을 들었다. 이단의 귓가에 거머리처럼 이어플러그가 붙어 있었다.


  이단이 소리 없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이어플러그를 보고 있던 벤지는 이단의 뜻을 읽지 못했다. 벤지는 한 발 늦었고 이단은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총소리가 나면서 바닥에 단단한 표면을 가진 물체가 떨어졌다. 현장 요원인 벤지는 탄피가 떨어지는 걸로는 그렇게 큰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에 목을 약간 빼서 바닥에 떨어진 게 무엇인지 확인하려 했다. 


  작고 동그란 원통을 포착한 벤지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단은 어느새 탁자 위를 쓸어 담고 있었다. 벤지는 속수무책이었다. 총성은 끝없이 이어질 듯했으며 이단은 자신의 말에는 한 단어도 덧붙여주지 않은 채 사라져버리려고 했다. 결국 벤지가 목구멍을 열었다.


  “이단, 넌 지금…!”


  하얀색 연기가 벤지를 덮쳤다. 벤지는 반사적으로 코과 입을 막고는 뒷걸음질로 자리를 피했다. 떨어진 물건은 어떤 가스가 들어있는 통인 모양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연기가 퍼지자 시야 확보가 어려워진 총잡이들이 더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벤지는 아직 연기가 침범하지 않은 구석으로 몸을 숨기고 있는 힘껏 공기를 들이마셨다. 그 상태에서 벤지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이단이 의미 없는 사격은 자신의 일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거라며 놀랍도록 짜증스럽고 고압적인 어투로 말했고, 벤지에겐 낯선 음성은 정보부 나부랭이가 죽지 않았다고 되받아쳤다. 그 날카로운 대화는 벤지에게 희망이 되어 날아왔다. 그는 슬쩍 그림자를 내밀어볼 작정으로 바닥에 붙은 엉덩이를 비볐다.


  경쾌한 효과음 한 마디가 울려 퍼졌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도착한 지원팀은 보호구를 쓰고 있었으므로 연기를 보고 야단법석을 떨지는 않았다. 단지 인위적인 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알기에 정석적으로 무기를 들었다. 아무리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여도 피할 수 없는 찰칵거림에 벤지는 놀라 엉덩이를 뒤로 끝없이 물리다가 벽에 부딪혔다. 그는 더 이상 총탄과 연기를 모두 피할 수 없었다.


  이단이 살포한 것은 신경가스의 일종인 듯했다. 벤지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싶은 현기증에 몸을 까딱거렸다. 자신이 사지를 붙이고 있는 모든 세상이 흔들리는 괴팍한 감각 속에서 벤지는 특이하게도 이단이 무시무시하게 화를 내는 걸 들었다. 벤지는 왜 이단이 화를 내는지 궁금했다. 가스를 뿌린 건 본인이었고, 설마 자신을 잡으려고 다른 팀이 대기하고 있었을 걸 예상하지 못한 것도 아닐 터였다. 벤지는 이단이 화를 내지 않길 바랐다. 이단 헌트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더는 나타나지 않아야 했다. 그는 이미 충분히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벤지는 제어장치와 가이드의 보호를 모두 받지 못한 센티넬의 최후가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했다. 이단 헌트 이전에 센티넬은 없었고, 세상에 존재하는 가이드가 없다. 벤지는 안타까움과 어지러움에 패배하여 의식을 놓았다.




Original Date 2015. 09. 09.



[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2)

- Anything 2016. 6. 23. 15:44 posted by Jade E. Sauniere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 & 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2. 의지를 잃어가는 자] 



  본 프로젝트는 요원의 충성도를 극대화하여 기관이 조직하는 임무와 그것의 성공 및 기밀 보장을 위해 최적화된 시스템을 제공하기 위해 설계되었다. 그동안 기관의 주요 작전들이 대중에게 노출되어 그 정당성을 설파하기도 전에 몰매를 맞고, 그 외 다양한 이유로 중단되고 폐기되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작전에 투입되었던 요원들의 변심 및 배신이었다. 이에 본 프로젝트는 현장 요원이 절대로 기관을 배신할 수 없도록 하는 장치를 만들 것이다.


  주요 장치는 ‘센티넬’이라고 가칭되며, 최첨단 신경과학 및 나노공학에 입각하여 제작되는 생체 주입용 마이크로칩을 일컫는다. ‘센티넬’은 강력한 스트레스 신호를 통하여 요원의 능력을 완벽하게 끌어올리고, 임무를 수행하는 동안에는 기관에 대하여 어떤 도덕적․윤리적 판단도 할 수 없게끔 요원을 조종한다. ‘센티넬’의 제어장치는 그것이 이식된 요원의 책임자가 가지고 있도록 하며 명령어 입력 및 신호 변환 기능과 중지 기능을 갖추게 된다….


  다음 문단은 제안서를 검토한 사람이 달아 놓은 코멘트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본 프로젝트는 과학적 비현실성과 윤리적으로 논란이 될 소지가 지나치게 많으므로 실행을 보류한다. 


  벤지는 CIA가 프로젝트를 깔끔하게 무효화하는 것도 아니고 실행을 보류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것만으로도 벤지가 그 뒤의 두툼한 서류들을 읽을 필요는 없어진 셈이었다. 벤지는 그 파일을 챙기기로 정했다. 


  “벤지?”


  브랜트가 출입문을 두드리면서 들어왔다. 벤지가 허겁지겁 파일을 닫으면서 음성으로 자신이 있는 쪽을 알렸다.


  “여기야!”


  브랜트는 단번에 벤지를 찾아냈다. 벤지는 브랜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는 손짓을 보내고 나서 급히 상자들의 뚜껑을 닫았다. 


  “마침 잘 왔네. 브랜트, 우리가 해야 할 얘기가 있어.”

  “나중에. 일사가 이단을 봤대.”


  벤지가 바람 소리가 날 것 같은 속도로 뒤를 돌았다. 


  “뭐? 언제?”

  “24시간도 안 됐어. 장소는 런던이야.”

  “맙소사, 그럼 당장 가야지!”

  “표는 이미 준비해놨어. 아, 그리고.”


  벤지가 브랜트를 바라보았다. 아마도 벤지가 오늘 브랜트에게 CIA가 흔적조차 남겨둬서는 안 되었던 프로젝트에 관한 얘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솔로몬 레인이 감방에서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군. 이단을 찾으라는 쪽지를 남기고 말이야. 덕분에 영국 정보부도 난리가 났어.”


  벤지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세탁되는 기분에 휘감겼다. 


  “…설마 이단이 죽인 건 아니겠지?”

  “그렇기야 하겠지만 우리가 장담할 수는 없지. 하여튼 15분 뒤면 출발이니까 준비해.”


  벤지가 입 안을 깨물었다. 그는 다른 상자들이 쌓여있는 틈에 문제의 파일의 윗부분이 약간만 보이도록 끼워 두고 브랜트의 등을 향해 부지런히 걸었다. 



* * *



  런던의 빈센트 스퀘어는 그다지 유명하지는 않지만 근처에 학교와 크리켓 경기장 등을 끼고 있어 꽤 자주 일반 시민들의 발길을 맞이하는 잔디 광장이었다. 벤치에 앉아 있는 브랜트는 일사의 선택이 나쁘지 않았다고 마음속으로만 품평을 했다. 


  브랜트는 벤지를 힐끗했다. 벤지의 입가가 이따금씩 씰룩댔다. 브랜트는 미국에서 벤지가 자신에게 할 말이 있다고 이야기를 꺼냈던 것을 기억했다. 브랜트는 혹시라도 일사가 오기 전까지 여유가 있을까 싶어 시계를 보았지만, 짙은 파란색 블라우스를 입은 일사가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브랜트가 벤지를 툭 쳤다. 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벤지는 숨겨 두었던 액정 화면을 확인하더니 브랜트를 향해 은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사는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리고 내 몸에 수상한 장치는 달려 있지 않아요, 벤지.”

  

  그 말에 벤지뿐 아니라 브랜트도 무안하다는 듯 눈을 굴렸다. 팔꿈치로 서로를 찔러만 대던 두 사람의 신경전은 부국장이라는 지위에 반쯤 굴복해준 벤지가 손을 홰홰 내저으면서 일단락됐다. 


  “…직업병이라고 생각해요.”


  일사는 변하지 않은 낯빛을 두 사람이 볼 수 있는 경로를 지나 그들의 오른쪽 벤치에 앉았다. 브랜트가 입을 열었다. 


  “더는 당신이 MI6에서 일하는 요원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이 모르는 사항들이 몇 가지 있어요. 속으로는 아무런 조건 없이 그걸 당신과 공유하고 싶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당신이 우리 쪽에 보다 더 확실한 협력을 제공할 건지 알아야 합니다.”


  일사는 다리를 꼬고 잔디를 바라보았다. 


  “내가 MI6를 도울 것 같나요?”


  “가능성 없는 일은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제가 IMF 내에서 가지고 있는 위치와 제 개인적 입장을 모두 고려해도 저는 영국보다는 일찍 이단과 만나서 사태를 되도록 이단에게 큰 피해가 가지 않는 쪽으로 해결을 보고 싶습니다.”


  “MI6가 이단을 확보하면 그가 위험해지다고 보는군요.”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벤지는 어쩐지 자신이 표정을 관리해야 한다고 여겼고, 덕택에 입술에 힘을 주고 있느라 콧바람을 뿜을 것 같은 위기에 처해 있었다. 일사가 마침내 시선을 옮겼다. 


  “상당히 정치적인 화법을 쓰는군요. 저도 가급적 이단이 다치지 않기를 바라요. 그가 그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럼 간단하게 설명 드리죠. 이단이 마닐라로 파견을 나갔을 당시 폭탄 테러가 발생했고 그 뒤로 이단과 연락이 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당신이 런던에서 이단을 봤다던 그 날에 MI6 국장이 솔로몬 레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사건 현장을 수색했고, 이단을 찾으라는 친필 메모를 발견했습니다. 그 때문에 MI6에서는 이단이 레인을 죽였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세우고 있으며 설상가상으로 국장실에서는 침입자의 흔적까지 나왔다더군요. 신원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만 영국 정보부 쪽에서는 심증으로 범인을 이단이라고 지목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가 이단을 데리고 그를 이용하고 있다는 저희와는 의견이 다르죠.”


  브랜트는 말을 마치고 턱을 약간 들었다. 남자아이 하나가 잔디에 낀 공을 잡으러 오면서 소란을 피웠다. 그로 인해 머리를 정리할 시간을 번 일사가 교차해놓고 있던 다리를 풀었다. 


  “이단이 우리에게 단서를 줄 거예요.”


  일사가 일어나자 브랜트와 벤지도 잽싸게 엉덩이를 뗐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했다면서요. 마닐라에서 사라진 뒤 이단은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한테도 연락을 한 적이 없는데 무슨 수로요?”


  “IMF의 추측이 맞든, MI6의 추측이 맞든 상관없이 이단이 가는 곳이면 분명히 무슨 일이 벌어질 거예요. 거기서 우린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고요.”


  일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이렌 소리가 잠잠하던 공원을 휘젓고 갔다. 벤지가 중얼댔다.


  “감이 좋으시네.”


  세 사람은 한 마음으로 공원을 빠져나갔다.


  그들은 4차선 차도를 전속력으로 뛰어넘은 뒤 인도를 쭉 내달렸다. 유스호스텔이나 비즈니스호텔들이 많은 지역이라 주변은 런던답지 않게 조용했고, 경찰차들이 어디로 가는지는 알고 쫓아가는 거냐는 벤지의 외침에 일단은 차를 따라잡기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띄엄띄엄 말하는 일사의 목소리가 소음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셋은 중간 규모의 교회에 다다라서 잠시 숨을 골랐다. 


  “어느 쪽?”

  “아니, 그래서 어디로 가는 건데요?!”


  미국인 둘의 숨찬 질문을 받는 유일한 영국인의 표정이 복잡했다. 


  “오른쪽으로 가면 대학들이 몇 개 있고, 왼쪽으로 조금 더 가면 빅토리아 역이 나와요.”

  “워, 잠깐.”


  벤지가 두 손을 들고 브랜트와 일사의 사고를 막았다. 


  “경찰차 말고 특별 기동대가 울리고 다니는 소리도 나는 것 같은데요? 폭발물이 터지는 소리는 안 났으니까, 대형 인질극이라도 생겼나?”


  특별 기동대가 출동 시 타고 다니는 방탄 차량은 일반 경찰차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사이렌 소리를 갖고 있었다. 벤지는 손가락을 들면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해보라는 듯한 제스처를 지속적으로 취하고 있었다. 사방이 점차 소란해졌다.


  “어딘지 알 것 같아요.”


  일사가 다시 달렸다. 벤지가 준 두 가지 단서는 노골적으로 빅토리아 역 부근의 산탄데르 은행을 가리키고 있었다.



* * * 



  이단 헌트는 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자신의 혈관 하나하나가 휴식을 원하는 걸 너무도 절절히 느꼈다. 훈련받은 이들도 불가능하다며 손을 내젓는 현장에 셀 수도 없이 투입되었었던 과거를 돌이켜봐도 자신이 이토록 주저앉아 쉬고 싶어 했던 때가 없었다. 그리운 것들이 많았다. 약물 성분 없이 몸 안을 도는 깨끗한 피와 누구도 그의 수면시간에 대해서 왈가왈부하지 않는 조용하고 푹신한 침대, 그저 수고했다는 동료들의 말과 무언가를 지켜냈다는 뿌듯함이라는 소박한 대가만을 가지는 임무, 그리고 익숙한 얼굴들이 그리웠다. 언제나 이단의 절박함을 나눌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는 소중한 이들이 그에겐 절실했다.


  그러한 이단의 쓸쓸한 감상은 귀에 꽂혀 있는 이어플러그에 의해서 파괴되었다. 이단은 버텨보려 했지만 뒤쪽에서 몰려드는 무장한 인원들마저 그를 방해했다. 그는 여전히 손을 붙이고 있었고, 이단의 앞모습을 볼 수 있는 은행의 여직원이 눈동자도 깜빡이지 않으며 이단을 향해 고개를 모로 젓고 있었다.


  그녀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죽이지 말아주세요.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들어!”


  경찰인지 기동대 대원인지 모를 남자가 이단에게 윽박질렀다. 여직원은 이단의 허리에 꽂혀 있는 총을 보고 있었다.


  “손들라고 했어!”


  여자가 또 이단에게 말을 걸었다. 제발 절 죽이지 마세요. 이단은 두 번 그녀를 무시할 수 없어 역시 소리 내지 않고 답해주었다. 책상 밑에 숨어요. 


  이어플러그 너머의 음성은 머리끝까지 지쳐버린 이단에게 그가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던졌다. 이단은 돈이 잔뜩 들어있는 가방을 놓았다. 여직원은 그것을 신호 삼아서 책상 밑으로 들어간 다음 의자를 당겨 틈을 좁혔다. 그녀는 등받이와 팔걸이 사이의 빈틈으로 무언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의 눈빛이 돌변하는 걸 목격했다.


  이단이 총을 잡은 순간 은행의 정문 유리가 박살났다. 예상치 못했던 방향에서 공격을 받은 경찰들이 반은 뒤로, 반은 정면을 향한 채 나뉜 틈에 이단은 완벽하게 손가락을 방아쇠에 걸었다. 이단이 쏜 총알이 기동대 대원의 헬멧 앞부분을 깨뜨렸다. 이단 헌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 대원을 죽이려 한 것이었다.


  이단이 사격을 행할 기회를 준 사람들은 기동대와 거의 똑같은 복장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방탄복을 입지 않은 경찰들부터 처리했다. 각지에서 관광 혹은 공적인 업무를 보러 온 이들을 어렵지 않게 수용하던 산탄데르 은행의 로비에 죽은 자들이 빠르게 쌓여갔다. 


  “지원을 요청해야 해!”


  돌기둥 뒤에 숨은 대원이 내뱉었다. 그 말은 이단에게는 한 자루의 총이 모자를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린 모양이었다. 양손에 권총을 쥔 이단 헌트가 앞으로 거침없이 걸었다. 기둥 뒤에서 시간을 벌며 백업을 부르려던 기동대원은 차갑게 불타고 있는 병기의 눈동자를 본 걸 끝으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의 얼굴은 까맸고 동시에 무척 빨갰다.


  기동대원들은 수적으로 밀린다는 현실을 타개해보려고 구조물 여기저기에 숨어서 그들의 본부로 연락을 넣으려 발버둥 쳤다. 계단의 난간이나 자동인출기 옆 등등 몸을 구겨 넣을 수 있는 그림자 뒤에는 모두 이단 헌트의 적이 있었다. 이단은 그저 이태까지 몸이 학습한 대로 적을 처단했다. 그는 기계적으로 탄창을 갈았다가 더 이상 자신이 쏠 수 있는 대상이 없다는 걸 인식하고 총을 집어넣었다.


  이단은 가만히 눈을 깜빡거렸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자가 이단이 내려놓았던 가방을 대신 들었다. 


  느닷없이 총성이 연장되었다. 이단은 귀가 먹먹해지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자신을 대신해 가방을 챙긴 남자를 쏴버렸음을 깨달았다. 시각이 받아들이는 정보만으로는 기동대원들과 다를 게 없는 남자들이 이단을 응시했다. 이단은 스스로 가방을 들었다. 그는 실상 자신이 왜 총을 쐈는지도, 왜 그 가방을 다른 사람의 손에 맡겨서는 안 되는지도 잘 알지 못했다. 


  “오, 벌써 한바탕 난리가 난 것 같은데?”


  브랜트가 유리 조각들이 즐비한 은행의 입구를 보고 말했다. 그 말에 근소한 차이로 브랜트 뒤에 있던 벤지가 그를 추월하며 은행을 향하여 돌진했다. 브랜트는 벤지의 필사적인 속도에 반사적으로 가슴을 뒤로 뺐다.


  “워, 벤지, 잠깐!”


  브랜트는 벤지를 쫓았고 일사는 어떤 전조도 없이 찢겨지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들어가지 마요! 위험….”


  2층짜리 은행 건물의 정수리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일사가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귀를 막았다. 


  벤지만이 은행 주변의 블록에 더해 빅토리아 역이 통째로 얼어붙을 것만 같은 재앙 속에서도 악을 쓰고 있었다. 


  “이단!!”


  벤지는 시신에 걸려 앞으로 고꾸라질 뻔한 몸을 겨우 추스르고 소리 높여 이단을 찾았다. 끔찍한 이정표와 같이 바닥에 흩어진 시신들 사이에는 그 어떠한 형태로도 이단이 없었다. 벤지는 아주 긴 고함을 내지를 것 같은 안색으로 위를 쳐다보았다. 위에서 매우 수상쩍게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공기가 헬리콥터의 프로펠러에게 붙잡혀 휘청거리고 있었다. 벤지가 오른손으로 그늘을 만들었다. 로프를 타고 헬리콥터까지 올라가는 누군가의 모든 것이 익숙했다. 벤지는 자신도 모르게 발을 움직였고 자신에게서 사라지려고 하는 그림자가 이단 헌트라는 확신에 붙잡혀 있었었다. 새로운 시체가 또 다시 벤지의 신발에 무게를 더하기 전까지 그러했다. 벤지는 자신의 신발코에 척 손을 올리고 있는 이름 모를 남자를 본 뒤에야 자신이 정말로 잔혹한 현장에 와 있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리고 마치 그 인식에 대한 값을 치른 것처럼, 벤지는 이단이었을지도 몰랐던 그림자를 잃어버렸다. 벤지는 하다못해 이단을 믿기에 그를 구할 거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도 없이 주변은 그렇게 조용해졌다. 


  일사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 벤지와 그의 뒤를 지키고 있는 브랜트로부터 잠시 벗어나 다가오는 아우디에 시선을 주었다. 


  “…일사?”


  운전석에서 내린 남자는 일사의 이름을 불러놓고도 그녀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듯한 눈빛을 짓고 있었다. 


  “루퍼트.”

  “아직도 신디케이트에 대한 조사를 하고 다니는 겁니까? 당신이 왜 여기 있어요?”

  “친구를 도우려고요.”

  “하필 신디케이트가 구상될 당시 자금줄 중 하나로 지정된 곳에서 말입니까?”


  벤지를 달래 현장에서 함께 나오려던 브랜트의 시야에 일사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수석분석가를 지낸 브랜트는 어렵지 않게 일사의 상대를 알아보았다. 그가 벤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벤지, MI6 특수요원이 왔어. 어쩐지 우리한테 자초지종을 물을 것 같은데, 이단이 영국 은행을 털었다고 사실대로 얘기해?”


  벤지의 표정은 정말 오묘했다.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우리 모두의 동료에 관한 이야기잖아. 나 혼자서 정할 수는 없지.”


  동그랗게 모인 입술이 약간 우스꽝스럽긴 했지만 벤지는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다. 벤지는 여전히 동그랗게 말린 입술로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어쨌든 우린 이단의 신병을 확보해야 해.”

  “나도 정확히 그 생각을 하고 있었어.”


  브랜트가 날쌔게 방향을 틀었다. 공연히 당황한 벤지가 눈으로 브랜트를 따라갔다. 


  “싱클레어 요원? 반갑습니다. IMF의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브랜트는 대뜸 먼저 손을 내밀고 이어서 대사와 얼굴로 루퍼트 싱클레어 요원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루퍼트는 퍽 당황한 모양새였다. 


  “…여기서 IMF의 부국장님을 뵐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만.”

  “이 은행을 습격한 범인이 우리 쪽 요원이라면 당연히 제가 나서야죠.”


  평상적으로 악수를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중 안면에 급격한 굴곡이 생긴 것은 물론 루퍼트 쪽이었다. 일사는 잠자코 있었지만 브랜트의 대처법이 의외로 직선적이라는 감상을 눈빛을 통해 표현하고 있었다. 


  브랜트는 마지막 한 마디와 함께 루퍼트의 손을 놓았다. 


  “전 이단 헌트를 잡는 데 IMF와 MI6가 함께 협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Original Date 2015. 09. 04.



[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1)

- Anything 2016. 6. 23. 15:44 posted by Jade E. Sauniere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 & 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1. 신념을 도둑맞은 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무언가를 보려 하지도 않는 비목적성이 이단의 눈앞을 떠다녔다. 그것은 이를테면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씨앗이었다. 개별 의식이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하더라도 무기는 무기에 지나지 않는 법이었다. 이단은 자신이 제대로 시선을 준 적조차 없는 길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세상에 선과 악을 점유할 존재들이 그토록 넘쳐난다면 자신은 그저 탄창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총에 지나지 않았어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념들에 사지를 붙잡혔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들이 오히려 그를 무력하게 했다.


  일사 파우스트는 이단에게 신념의 상대성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지금 이단의 머릿속에는 일사의 언어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묶여버리는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어떻게든 선택과 판단의 영역으로 향해야 했던 일사의 배경은 희미하기만 했다. 대신 상대주의로 만들어진 밧줄로 묶인 회의주의의 합판을 지나서 얄팍한 무력함에 도달하는 길이 유래 없이 빛나고 있었다. 이단은 점차 고민을 할 수 있는 기력마저 잃어갔다. 가장 밝은 빛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면서 한바탕 팔을 휘두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이단은 이동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구두를 벗어던졌다. 요원들 중에 가장 활동량이 많은 이단의 신발은 늘 연구원들의 리허설 무대였다. 새로 개발된 소재들이 한데 모인 그 신발 한 켤레는 최고의 요원을 향한 IMF의 독특한 헌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이단에게는 밑바닥이 거슬릴 정도로 무거운 구두에 지나지 않았다. 이단은 신발을 벗은 채 두 걸음을 더 걸었다.


  그의 발목이 유난스럽게 피로감을 호소했다. 이단은 별수 없이 양말을 벗었다. 그런데 아무리 양말을 벗어도 맨발이 드러나질 않았다. 이단의 어깨가 늘어졌다. 평화롭고 피곤하지도 않은 허망함이란 과연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단은 누구보다 강인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뛰어다녔던 발바닥에 전가(轉嫁)의 대지를 닿게 해 주려고 수도 없이 양말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이단의 피부에 붙어 있는 것은 작은 열매가 그려진 양말이었다.


  비행기 표가 들어 있는 봉투나 받을 뿐인 이단의 책상에 열매가 걸린 날이 한 번 있었다. 이단이 3개국을 돌아야 했던 일정 끝에 귀국한 날짜가 성탄절이었던 건 그 당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동료들은 조직에서 제일 순수하고 성실한 이단 헌트가 임무를 마친 뒤의 보고를 올리러 본부로 돌아올 것임을 다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빨간색과 초록색 실을 엮은 철사를 곳곳에 건 다음 나무집게로 종이라든가 지팡이 모양의 사탕 따위를 고정해 놓았다. 센스가 있는 이는 50달러가 충전된 스타벅스 선불카드를 준비했고 유머감각이 있는 자는 이단이 절대 신지 않을 호랑가시나무열매가 촘촘히 박힌 신발을 널었다. 이단은 웃으면서 다음 날 그것을 벤지의 모니터에 걸었었다. 당시에도 벤지는 이단과 비교하면 경험이 부족한 요원이었기에 어떻게 내 선물을 돌려보낼 수가 있냐며 솔직하게 노발대발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이단은 팔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사고가 없는 영역으로 그를 안내할 로프와 판자가 썩어가는 중이었다. 이단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형체가 없는 것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부서지고 있는 것이 하필 형체가 없어서 이단은 하릴없이 손을 펼쳤다.



* * *


 

  벤지는 카드키를 휙 던지듯 리더기에 올려놓았다. 마닐라의 CIA 지부가 습격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벤지에게 복귀하라고 협박 같은 부탁을 남발했던 브랜트가 본다면 이마를 짚을 광경이었다. 벤지는 승강기 버튼부터 계단에 이르기까지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들에게 묘하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자각 있는 요원이자 친구이기도 한 벤지는 부국장실로 들어가면서 태도를 정돈했다.


  “나 왔어.” 

  “잠깐, 벤지.”


  브랜트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벤지는 입술을 한 번 오물거렸다가 입고 있는 옷에 달려 있는 모든 주머니들을 뒤집었다.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은 덮개와 배터리를 한 번 분리하고 별도의 검사 과정을 거쳤다. 벤지에게 성가신 요소가 들러붙어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브랜트는 벤지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네가 비행기를 타고 있던 18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뉴스에 특별한 얘기는 없던데?”


  “당연히 매스컴엔 실리지 않았지. 어느 나라가 자기들의 정보국 지부가 습격 받았다는 걸 소문내고 싶겠어.”


  브랜트가 벤지가 보기 좋도록 타블렛을 돌렸다. 빨간 점들을 본 벤지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무슨 뜻이야, CIA 말고 털린 데가 또 있다고?”


 브랜트가 화면을 가볍게 눌렀다. 한 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장소들 위로 주소와 그것이 숨기고 있는 실제 명칭이 나타났다.


  “마닐라에 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첩보 기관은 CIA를 합쳐서 모두 네 개였어. 그리고 20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쑥대밭이 됐지. 생존자는 아마 없을 거라더군.”


  “뭐야, 그럼 도스 에이전시가 CIA만 노리고 있다는 게 아니네? 전 세계의 정보부를 상대로 한 판 붙겠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지.”


  “맙소사. 아니, 그럼 날 왜 불렀어? 현지 경찰이 입수하는 정보들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게 뻔한데!”


  “표면적으로는 모두 반군의 자살 폭탄 테러야. 너보고 24시간 안에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는 나라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어. 게다가 각국의 첩보 체계 자체와 전쟁을 선포한 놈들이라면 우리가 따로 조사를 나간다고 해서 건질 수 있는 증거는 당연히 남겨놓지 않았을 거고. 여기서 시작하는 게 맞아, 벤지.”


  벤지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속이 두꺼운 정치인 일당들을 상대하면서 나날이 견고해지고 있는 브랜트의 설득력에 구멍을 낼 수가 없었다. 벤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짝이 없다는 점만 뺀다면 거의 모든 것이 동일할 자신의 오래된 위치를 그렸다.


  벤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단의 마지막 좌표로 옮겨갔다. 마닐라의 CIA 지부는 서브코프 오피스 빌딩으로부터 5km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 폭탄은 오롯이 이단에게 선물된 것이었다.


  “그런데 놈들의 첫 번째 타깃은 왜 이단이 된 거지?”


  브랜트의 고개가 움찔했다. 벤지는 브랜트의 주의를 사로잡으려는 것처럼 팔을 저었다.


  “이단이 IMF 국장인 것도 아니고, 타격이 크긴 하겠지만 이단이 없다고 해서 곧장 CIA나 IMF가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왜 놈들은 제일 먼저 이단을 노렸을까?”


  브랜트가 홀린 듯 벤지의 말을 받았다.


  “…이단이 누군가에게 굴복당할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지 않아?”


  영리한 브랜트와 벤지는 솔로몬 레인이 빚은 사태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방을 나가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린 그 순간부터 둘은 서로에게 적합한 임무가 무엇인지 정한 것이었다. 잠시 후 벤지는 다짜고짜 헌리의 방문을 두드렸고 브랜트는 영국 정보부와 교신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 *



  솔로몬 레인은 의도적으로 구성된 고독의 중심부에 앉아 있었다. 그가 갇혀 있는 독방의 앞에도, 양옆에도 분명히 문은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는 찬 공기만 흘러나왔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면 간수나 그 구역의 당번조차 내려오지 않았다. 과거를 반추하는 대신 이기적인 전복을 선택한 남자는 그곳에서 천 년을 더 지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인은 몇 번이고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려고 애썼으며 최근에는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 한 줄기의 소음이 그동안 레인이 쌓아 왔던 모든 노력을 무너뜨렸다. 레인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누군가가 레인과 MI6가 공유하는 규칙을 뒤흔들고 있었다. 레인은 일어나서 철문에 달려 있는 작은 덮개를 옆으로 밀고 미지의 반항인을 맞을 채비를 했다.


  철창 너머로 모자를 쓰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레인은 웃음과 한숨과 경멸을 모두 참아냈다.


  “더 일찍 올 줄 알았건만 못 보던 새에 인내심을 기른 모양이지.”


  “이단 헌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걸 고려하면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듣고 레인이 철창을 붙잡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성격 탓이었다. 레인이 보란 듯이 팔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서 있는 문 밖의 상대방은 간수의 유니폼을 하나도 갖춰 입지 않았다. 물론 그 팔이 철창 사이의 빈틈 대부분을 가려주어 레인은 상대에게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는 있었다. 그것으로 남자는 레인에게 작은 배려를 제공해주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하던 일들이 실현될 거야. 하지만 당신을 꺼내줄 수는 없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져야 당신에게 마음이 남아있던 인재들이 희망을 버릴 거고, 나도 사람들을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남자는 평이하게 레인의 죽음과 그가 가지고 있던 가장 그럴듯한 재산이 강탈당했음을 선언했다. 레인은 그의 검은색 팔이 물러나면서 그 빈자리를 작은 유리병이 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인의 입술에서 웃음이 샜다.


  “내가 왜 이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실패한 인생을 계속 살고 싶진 않잖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당신이 계획했던 그 교활한 완벽함은 다신 이루어질 수 없어. 당신은 당연히 이단 헌트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바치지 않을 거지만, 동시에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자기 자신 말고 누구한테 맡길 성미도 못 되니 당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이제이는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특정한 방법론이 그저 방법론으로 그치지 않는 때가 종종 있다. 레인은 전쟁으로 비대해진 나라와 그것의 모체가 이끄는 연합체를 물리치고자 나선 자신의 역사를 돌아본 순간, 단순한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 방법론의 매력과 그것의 의의를 먼저 실감했다. 레인은 일그러진 거울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그 모양이 흉해도 그것이 거울이라는 본질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인은 약병을 손에 쥐었다.


  “…한 가지만 묻지.”


  상대방은 레인이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조차 떼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단 헌트를 위해 희생시킨 사람은 누구지?”

  “없어.”


  솔로몬 레인은 굳었다. 남자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미래상을 끄집어내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눈동자를 움직인 뒤에야 바깥쪽에서 먼저 덮개를 닫았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도 다 듣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레인은 다시 고독해졌다. 사실 그는 애초부터 다른 사람과 무엇을 공유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 * *



  MI6에 있는 한 유선전화의 벨소리가 울리며 사건은 시작되었다.


  일상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던 영국 정보부의 국장은 책상을 창문 끝까지 밀어버릴 기세로 일어나면서 급하게 겉옷을 챙겼다. 국장은 손가락을 튕겨 요원 몇 명을 차출했다. 그들은 솔로몬 레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턱을 있는 힘껏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미 레인이 갇혀 있었던 감옥은 CCTV 영상을 확인하고 입구를 봉쇄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중이었고, 거기에 정보부 특유의 냉철함을 더하고자 세단 한 대가 MI6 헤드쿼터를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세단이 훑은 굴곡에 방금 전까지 없었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전화를 걸고 있는 국장과 운전 중인 요원 하나, 그리고 창밖을 살피는 또 다른 요원까지 무사히 따돌리고 전등 불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을 파고들었다. 그림자는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굳이 피하지는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카메라들은 그림자가 렌즈의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 반응을 보였고,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정상적으로 고개를 돌려댔다.


  MI6 본부가 위치한 런던 램버스 지역을 가까스로 벗어나는 블랙 프린스 로드에는 일사 파우스트가 희미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먼 곳에서 운반되는 강물의 냄새와 지척에 널린 커피 향기가 그럴듯하게 섞인 곳에서 일사는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팔꿈치를 대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고, 맞은편 의자를 바짝 끌어와 거기에 가방을 보관하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학도의 자태였다. 또한 그녀는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형태 중 하나를 뽐내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 주변을 돌던 점원이 일사가 끄트머리에 놔둔 빈 잔을 수거했다. 일사는 변함없이 책장을 넘겼다.


  국장은 발 빠르게 차에서 하차했다. 교도관은 일부 관리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통로로 그를 안내했다. 몇 번 꼬이고 꺾어진 뒤에는 계속 곧은 길이 이어져 국장은 성큼성큼 교도관을 앞질렀다. 이동하면서 그에게 언제쯤 경찰에 신고하게 해 줄 거냐고 물으려던 교도관은 입술만 툴툴 털었다.


  허상 같은 장식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기능할 수 있는 문 한 짝이 영국 정보국의 정상을 반겼다. 국장은 조용히 핸드폰의 불빛을 켰다. 사람이 원체 다니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백색의 불빛이 허공을 휘젓는데도 포착되는 먼지가 거의 없었고, 한 남자가 죽은 현장임에도 공기 중에는 악취가 아닌 차가움만 흘렀다. 국장이 출입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솔로몬 레인은 앉은 채로 뒤통수를 벽에 살짝 기대고 있었다.


  “내부를 더 밝게 할 수는 없나?” 

  “손전등을 가져올까요?”

  “아니, 됐네.”


  교도관은 우물쭈물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국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배타적인 독방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국장은 핸드폰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 오른손에는 장갑을 꼈다. 그가 레인의 옷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공간에는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과 분석가들, 일반 사무직 직원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서 솔로몬 레인의 죽음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본부는 누가 범인이며 그가 왜 레인을 죽였을지 추정해보는 목소리들로 들썩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조절하고 있는 진동이 그들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다. MI6의 침입자는 쉽게 코너를 돌았다. 국장실이 코앞이었다.


  한편 위협받고 있는 방의 주인은 솔로몬 레인의 옷에서 기어이 쪽지 하나를 찾아냈다. 그의 눈썹 위로 얇은 주름들이 그어졌다.


  “…이단 헌트를 찾아라?”


  다리를 굽히고 있던 국장이 똑바로 일어섰다. 국장은 한결 몸을 편하게 가누고 고차원적인 사고에 돌입하려다가 핸드폰이 울려 멈칫했다.


  “네.”

  —IMF의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국장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라운 타이밍이로군. 일단 그쪽의 용건을 듣도록 하지. 무슨 일인가?”


  —솔로몬 레인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영국의 교도소 시스템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어떤 식으로든 레인이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솔로몬 레인은 죽었네.”


  브랜트는 노련하게 기침이나 공기를 잘못 들이켠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브랜트가 당분간 말을 잇지 못할 것임이 자명했기에 영국 정보부의 수장은 거침없이 브랜트에게 질문했다. 


  “이제 내 차례로군. 왜 레인은 죽으면서 IMF의 요원을 찾으라는 말을 남긴 건가?”

  —…예?

  “이단 헌트는 어디 있지, 브랜트 부국장?”


  느닷없이 테이블이 흔들리는 바람에 일사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를 물색하고 있던 여성이 숄더백으로 일사의 테이블을 치고 간 듯했다. 여성은 재빠르게 사과를 했고 일사는 미소로 그것을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양손으로 테이블을 꼭 잡으며 남아 있는 진동을 억눌렀다. 일사가 그 자세로 시선만 옆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일사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단?”


  특수조직이 총애하는 요원은 과연 남달랐다. 이단 헌트는 일사의 혼잣말까지 들은 양 정말로 고개를 돌렸고, 일사는 이단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고 있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단은 일사를 지나쳤다. 그는 일사가 있는 쪽을 한 번 더 돌아보는 법도 없이 인파와 차량을 방패삼아 사라졌다. 생사의 위기를 함께 넘나들었던 깊은 인연의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은 일사에게 불쾌함이 아니라 불길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신속하게 짐을 챙겨 이단이 걸은 방향을 그대로 밟았다.


  일반도로를 자동차처럼 자유롭게 넘나든 끝에 일사는 이단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더 애를 쓴다면 이단의 옷자락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사는 몸을 옆으로 세우고 날렵하게 행인들의 틈새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단 헌트는 끝까지 일사를 향해 뜻 있는 눈빛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일사는 켄싱턴 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쉽게 횡단할 수 없는 넓은 차도들이 많아지는 걸 보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2개의 큰 보도를 더 넘어야 이단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때 남쪽에서 올라온 검은색 SUV들이 잇따라 정차했다. 일사는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차에서 내린 자들이 MI6 소속이라는 걸 눈치챘다. 일사에겐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정보부 사람들이 도심에 나타났다는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일사는 어쩔 수 없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그들이 출동한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이단 헌트가 불쑥 등장했던 방향은 남쪽이었다. 그리고 블랙 프린스 로드의 남쪽에는 MI6의 본부가 있다. 


  일사에겐 이제 이단 헌트를 쫓아가는 것만큼이나 IMF와 연락을 취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 * *



  벤지는 보관소의 관리자가 자신을 계속 힐끔거리는 것을 2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연장 근무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관리자를 위해 위대한 IMF의 부국장과 국장이 동시에 서명한 명령서를 팔락였다. 


  “난 멀었으니까 먼저 가고 싶으면 가요!”


  벤지는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파일을 읽어 내리면서 소리쳤다. CIA가 폐기했다는 온갖 종류의 프로젝트들을 검토하려면 없는 주의력도 끌어와야 할 판이었다. 


  “그럼 저 갑니다!”


  관리자가 마찬가지로 크게 외쳤다. 벤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산업에 적극 협력하면서 시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걸로 알려진 기관의 이미지를 제고해보자는 내용의 프로젝트 제안서는 기어코 벤지의 콧구멍을 으쓱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재미 삼아 읽어보려고 파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음 파일을 꺼내려던 벤지가 얼굴을 갸웃했다. 내용물이 한손에 다 잡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두 써서 파일을 들어 올린 벤지는 그 두께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건 뭔데 이렇게 두꺼워?”


  표지에는 대문자로 ‘센티넬 프로젝트’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벤지의 눈동자는 지금껏 여기서 변형된 솔로몬 레인과 신디케이트를 탄생시켰을지도 모를 단서를 찾아 헤매왔듯이 고요하고 빠르게 굴러다녔다. 그러면서 벤지는 런던의 일이나 머리가 복잡해진 브랜트가 있는 지상층과는 분리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탐독하고 있었다. 




Original Date 2016. 0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