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ver/본브루스] The Cat Doesn't Forget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Ex-CIA Agent and Strange Black Cat

- Original Date 2016. 08. 07

- Writeen by. Jade


The Cat Doesn't Forget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무리 괴짜에 정신 나간 인간처럼 보이는 작자들에게도 사람다운 점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악당들이 펄펄 끓는다는 고담시에서도 아주 고약한 악질을 담당하고 있는 조커라는 자에게도 물론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 박쥐 인간과 숨바꼭질을 하는 게 인생의 낙이지만, 그 친구가 워낙 인기가 많아져서 자신과의 데이트에 소홀해지자 이 이상한 악당이 그만 질투심을 느끼고 만 거죠. '내 귀염둥이를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어!' 같은 심리라고 해둡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박쥐 인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조커는 온갖 과학자들의 주리를 틀고 손톱을 뽑은 끝에 약물 하나를 얻게 됩니다. 일주일간 사람을 아주 귀엽게 만들 수 있는 효능을 가졌다나요? 조커는 낄낄거리며 박쥐 인간과 일주일쯤 아주 오붓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는 때로 놀라움을 발휘합니다. 조커가 결국 그 박쥐 인간, '배트맨'애게 약물을 노출시켰거든요. 


  '아주 귀엽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뱃시가 어린애처럼 키가 줄어들기라도 하나? 너무 귀엽겠다! 아니면 애완용 박쥐로 변하는 거 아니야? 오, 뱃시. 뱃시. 우리 뱃시!'


  하지만 이런 귀여운 바람이 조커같은 악당의 것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커는 온갖 종류로 구비해 둔 케이지를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배트맨이 사라졌거든요. 조커는 배트맨 대신 악당들을 족치면서 우리 뱃시를 어디로 감춘 거냐며 발악을 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커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요. 배트맨이 귀엽게 변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당연히 고양이부터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배트맨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면 멀었군요, 조커.


  네. 첨단 기술이 50가지쯤 적용된 거대한 수트를 입고 다니는 배트맨은, 대상이 아주 귀엽게 변한다는 약물의 효과에 따라서 조금 거대한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집 큰 검은 고양이요. 뚱뚱한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더 귀엽지 않겠냐고요? 좋을 대로 하시죠. 아무튼 고담을 비밀스레 수호하던 암흑의 기사는 지금 까만 고양이입니다.


  우리야 뭐 배트맨의 가면 속에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고 얘기하도록 하죠.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님이자 고담시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은 참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두말할 것 없는 재력에 외모도 아주 훤칠하고, 부모님은 없지만 부모님처럼 그를 훌륭하게 챙겨주는 보호자도 있고 침대 한 구석이 서늘하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불러들일 수 있는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거대 기업의 회장님 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도 좋고 행동력에 책임감도 가졌죠.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다보니 보통 사람이 그를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이겁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배트맨이라니.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위대한 배트맨이자 빈틈없는 브루스 웨인인 존재는 너무도 인간다워서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담의 수호자 배트맨은 배가 고파요.


  통신기가 부착되어 있는 수트는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바뀌어버린지라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고양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뉴페이스를 경계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고양이가 된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배트맨 겸 브루스 웨인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죠. 그 와중에 그는 지금 배가 고프군요. 큰일입니다. 브루스 웨인께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본래 그는 어떤 욕구도 잘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이 있지만 이 망할 몸뚱아리가 정신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인지 서서히 허기를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니야― 하고 힘없이 울었습니다. 귀엽긴 한데 좀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런 감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멈춰섰을 리가 없거든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정체도 참 귀여움이라곤 없을 것 같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슨 본이라고 알고 있지만 본명은 다릅니다. 으음, 이건 몇몇 분들에겐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당장은 말을 아끼죠. 아무튼 그는 CIA의 일급 기밀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은 프로 중의 프로이며,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인데도 그 훈련의 여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며칠 전에는 볼펜으로 칼 든 암살자를 때려잡았습니다. CIA의 기밀 프로그램이란 게 다 그렇죠. 


  그는 현재 자신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적들과 거리를 벌리고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잠시 고담에 왔습니다. 고담시는 워낙 괴팍한 곳이라서 CIA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데다, 미국 내에서 CIA 지부가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악당들이 지부에 들이닥쳐 기밀이라도 빼가면 답이 없으니까요. 그는 진짜로 기억을 잃은 상태인데 어떻게 그런 사실은 잘 느끼고 고담을 찾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암살자와 고양이가 된 자경단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네요. 


  "……"

  ―…니야아.


  지금의 제이슨 본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그는 현재 굉장히 순수한 상태입니다. 사람 죽이는 기술은 몸에 남았지만 인격을 지워버리는 CIA의 프로그램은 기억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순수하고 착한 영혼들은 동물에 약한 법이죠. 


  "…같이 갈래?"


  배트맨에게 보호자가 생겼군요.




* * *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고양이를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는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고양이는 남자가 먹을 걸 찾아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최대한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다가 혼자서 중심을 한 번 잃었다. 생수를 꺼내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지붕에서도 끄떡없는 고양이가 바닥에 앉으려다 휘청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락없는 고양이 생김새를 한 진짜 고양이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그릇에 물과 통조림의 내용물을 쏟았다. 고양이는 음식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또 휘청했다. 남자는 고양이가 부상을 입은 게 아닌가 싶어 고양이의 다리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고양이는 고양이다운 균형 능력을 되찾고 물을 할짝였다.


  골목길을 서성이던 것치고 고양이의 털은 꽤나 깨끗했다. 그는 당장 고양이를 씻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검은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남자가 꺼낸 것은 중간 크기의 상자였다.


  고담으로 도망쳐온 남자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피난처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들어본 적도 없는 박쥐 옷차림의 자경단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는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던 무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근처에 놓아두고, 조금 전 뒷골목에서 산 총을 꺼냈다. 그가 총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발끝이 간지러워 밑을 내려다봤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총에서 난 찰칵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듯했다. 남자는 무언가 부끄러웠다.


  "…누굴 쏘려고 산 건 아니야."


  고양이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참 사람 같은 시선이었다.


  "난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가 갑자기 그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 했다. 남자는 묘하게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고양이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고양이가 총을 만질 수 없도록 총을 잡은 손을 머리까지 들었다. 고양이가 가만히 꼬리를 흔들다가 침대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뚜껑이 열린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 안에는 일반인이 소지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개의 여권과 다량의 현금 다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몇 가지 종이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가 발로 슬금슬금 가장 앞에 있는 여권을 건드렸다. 여권의 표지를 들어올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야옹.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거야?"

  ―야아옹.

  "……"   


  남자가 여권의 앞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남자에게도 고양이에게도 낯선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양이는 곧 그의 미국 여권에서 관심을 끊고 나머지 여권들을 이리저리 발로 밀었다. 브라질, 러시아, 프랑스, 파리 등등 온갖 나라들의 여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가 가만히 발을 뗐다.


  "…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고양이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남자가 상자를 회수했다. 고양이는 동그란 눈동자를 남자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권을 한 뭉치로 모은 다음 그 위에 총을 올렸다. 


  "…내가 처음 봤던 금고 안이랑 똑같아졌네."


  남자가 상자를 침대 밑으로 다시 감췄다. 고양이는 여전히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더 안 먹어?"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훈련을 받은 고양이를 대하듯 물었는데, 고양이는 용케 그것을 알아듣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점프하는 모양새가 아주 깔끔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 특이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고양이는 남자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물건을 가지고 놀지 않으려는 행동은 독특했으나 대신 고양이는 조용했다. 그 덕에 남자는 자신의 작업, 즉 무언가를 메모하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가 일기를 적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수집해온 정보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다가 그걸 옮겨 적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대체로 남자의 얼굴과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 가운데 밑줄이 몇 번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취리히 은행]


  고양이가 눈길을 올렸다. 남자는 온 힘을 다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가, 고양이가 서서히 피로함에 젖어갈 즈음에 주변을 정리했다. 남자가 고양이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는 옷이 젖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의는 바깥에 벗어두고 물을 받았다. 고양이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잘 짜여진 몸에 미세한 상처들이 있었고 총자국처럼 보이는 동그란 흔적도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참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익숙하게 해치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몸집도 큰 고양이를 요령 있게 씻겼다. 몸 구석구석을 슥슥 밀어주는 감촉이 좋아서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고양이는 원래 너처럼 다 사람 같니?"


  고양이는 이번에도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고양이 배트맨과 CIA 출신 킬러의 일상을 왜 좀 더 보여주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실은 말이죠, 이른바 집사와 고양이들이 서로 하는 일은 놀랍도록 똑같습니다. 고양이는 집사에게 귀찮은 일거리과 애교를 반반씩 섞어 던저주고 집사는 당근과 채찍에 휘둘리면서 고양이를 간지럽히죠. 그렇다고 청년 제이슨 본이 벌써 '집사' 단계까지 올랐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고양이가 좀 까칠해서요. 그래도 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제이슨에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배트맨은 더욱 행복해했을 테지만요. 그 자신은 정체도 모르는 집단에게 쫓겨다니느라 제이슨 본은 주변에 어떠한 전자 기기도 두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PC 카페를 갔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에 그런 시설이 남아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날로그식 삶을 고집하는 제이슨에게 짜증이 나서 한 번은 고양이 배트맨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죠. 안타깝게도 고도로 훈련받은 정보부의 암살자는 별다른 위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심심해?

  

  그리고 배트맨은 성심성의껏 자신과 놀아주는 그에게 휘말려 배를 뒤집고 야옹거리다가 진한 자괴감을 느끼고 저녁 내내 구석에서 고개를 박고 있었답니다.   


  한편 바깥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지요. 고담의 모든 악당들을 다 쓸어버리고도 배트맨을 찾지 못한 조커가 결국 엉엉 울면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조커는 훌쩍이며 자신이 배트맨에게 이러이러한 약을 썼는데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뭔가 배트맨 같은 분위기가 나는 생물체를 발견하면 즉시 연락을 달라고 번호까지 남겼습니다. 악당이 자기 혼내주는 놈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조커가 그리운 뱃시를 잊지 못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엉겁결에 득을 본 쪽은 배트맨의 유일한 지원군이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였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는 과연 은밀히 사람을 풀어서 몸집이 평균 이상인 검은색 고양이를 끌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입니다. 이걸 보면 조커는 아직도 멀은 것 같지요. 


  그리고 조커의 기자회견을 들은 배트맨 역시 원거리에서 알프레드와 호흡을 맞추기에 이릅니다.




* * *




  ―니야옹, 니야아아….


  검은 고양이는 몇 번 힘 없이 울더니 바닥에 철푸덕 누웠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다고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며칠새 힘이 없네."


  남자는 고양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니이야.

  "이 주변에 동물 병원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하자마자 고양이의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꼬리는 미동도 없었고 뜨다 만 눈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냥 외면하지 못할 가련한 동물이 보내는 신호였다. 남자가 결국 재킷을 챙겼다. 남자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묘하게 흡족해 보였다.


  남자와 고양이는 주변의 대로에서 택시를 타고 고담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남자는 이제 그 곳에서 동물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는 고담의 사방 어디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건물을 등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담시에 와서 제일 먼저 도시의 지도부터 외운 남자는 이곳의 토박이들만큼이나 길을 잘 알았지만 그가 외운 지도에는 동물 병원의 위치가 나와있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옷에 말려 남자의 가슴 속에 쏙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움찔대기 시작했다. 그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가며 은색 빌딩들을 지나쳤다. 둘은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섰다. 무엇이든지 살피는 버릇이 있는 남자는 신호등의 기둥에 무언가가 붙어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그걸 읽었다.    


  [고양이를 찾습니다. 약 6일 전 실종. 검고 몸집이 다소 큼. 교육을 잘 받아 얌전하고 사람을 많이 경계하지 않아 다른 길고양이들과 구분됨. 아래의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씩 커졌다.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고양이도 놀라움을 표현하듯이 목을 빼고 있었다.


  "주인이 있었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고양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서 얼핏 보면 남자가 그냥 옷가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전화를 건 이를 기다리면서 그 주인이 정말 고양이를 잘 훈련시켰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도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 분명 존재할 거라는 데에 상념이 닿자 남자는 무겁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고양이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전화를 주신 분이십니까?"


  남자를 맞이한 건 훌륭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다. 검은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는 감상이 단번에 들었다.


  "예."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남자가 옷을 걷었다. 얼굴을 드러낸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꼬물거렸다. 


  "고양이가 먼저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군요."

  "…네, 제가 키우던 아이가 맞습니다."


  남자가 서서히 팔을 풀자 고양이는 곧장 노신사에게 뛰어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가 짐이 되어버린 옷을 팔에 걸었다.   


  "감사합니다. 답례를 하고 싶은데 성함이라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노신사가 그를 붙잡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노신사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나셨군요, 도련님."

  ―야옹.

  "약물을 만든 당사자에게 물어보니 약효가 지속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독된다고 하더군요."

  ―야옹.

  "수트와 장비들은 벌써 점검을 다 마쳤으니 나중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조커를 꼭 붙잡으셔야겠군요.

  ―…야옹. 




* * * 


 


  거처로 돌아가는 제이슨의 손에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간밤에 터진 소식들은 고담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최대한 그걸 감추는 법을 알았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비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돌아온 배트맨, 조커를 체포하다]


  제이슨 본은 다양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의 문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침입자의 그림자부터 부비트랩의 여부까지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는 현관의 틈새에서 그는 하얀색 봉투를 발견했다. 훈련받은 요원이 자신의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 얇은 편지봉투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은 발명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은 복도의 양쪽을 한 번씩 살핀 뒤에 봉투의 앞면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웨인 엔터프라이즈 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으며, 봉투의 안에 들어있는 쪽지엔 본이 더욱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날 만나러 와주길. - 브루스 웨인]


  제이슨은 봉투를 그대로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 2분 뒤 그는 옷 속에 무기를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 * *




  그 날은 브루스 웨인 회장을 위해 일하는 비서가 너무나도 기다린 하루였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적힌 웨인 회장의 공식적인 일정이 최근 두 달간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웨인 회장은 그녀에게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오늘도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충성을 맹세한 사원이 한 명 늘었다.


  고요해진 빌딩의 최상층에서 브루스 웨인은 홀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신중하게 서류를 나누던 그가 문득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다리는 손님은 어쩌면 노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경력을 고려하자면 기대하기 어려운 매너였다. 브루스는 양쪽이 모두 편할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그 후 보육기관 지원 사업과 관련된 서류를 집중해서 읽던 브루스 웨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신의 손님이 서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루스가 그를 보고는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제이슨."

  

  제이슨 본이 순간적으로 권총을 들었다.


  "날 어떻게 알지?"

  "우린 만난 적이 있어."

  "원하는 게 뭐야?"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나보단 당신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어서 공유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당신이 의문을 갖는 모습들을 창조해낸 사람들을 찾아냈어."


  브루스가 서류 밑에 있던 파일 하나를 들었다. 미 중앙정보국의 엠블럼과 함께 일급 기밀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제이슨이 눈을 좁혔다.


  "…CIA?"

  "저녁에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면서 보지 않겠나?"


  제이슨은 파일 하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당신과 나는… 무슨 관계지? 당신은 왜 날 도와주지?"


  브루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상한 기운을 읽은 제이슨 본이 그의 미간을 조준했다. 브루스의 대답이 지체되자 암살자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20초 뒤에는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판단할 작정이었다.  


  제이슨이 숫자 12를 셌을 때 브루스 웨인이 대답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동물은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끄트머리에서 떨렸다. 그렇지만 제이슨 본은 그것이 거짓말에서 비롯된 긴장감 탓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제이슨이 약간의 혼란에 빠진 사이 브루스는 홱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기나 해."


  브루스가 제이슨 본의 품에 파일을 안겨주었다. 제이슨은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되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부끄러움에 시달리는 웨인 회장님을 따라갔다.


  "왜 얼굴이 빨개진 거지?"

  "…시끄러워."

  "아까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나랑 당신이 무슨 관계였냐고 물었잖아. 잠깐, 미스터 웨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