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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9.21 [Crossover/다수] Human and Being 上 2

[Crossover/칸로저스] Possibility of Loneliness

- Anything/Crossover 2014. 4. 27. 21:4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 Captain America : The Winter Soldier Crossover

- Khan Noonien Singh & Steve Rogers

- Written by. Jade





Possibility of Loneliness

 

 

  중앙을 기점으로 세 갈래 길이 나왔을 때, 로저스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이 왼쪽을 맡겠다고 했다. 그가 잽싸게 왼편으로 사라지자 남은 인원은 재량껏 오른쪽과 직선 통로로 흩어졌다. 메인 시스템이 작동시킨 비상등이 붉은색으로 번쩍거리는 통에 복도는 캄캄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망자에게 썩 협조적인 환경은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그러했듯이 로저스는 자신이 추격하고 있는 자를 잘 알지 못했다. 보통은 이러이러한 해로운 단체에 속해 있고, 과거에 이런 경력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이니 참고하여 신중을 기하라는 부가 설명이 따라오기 마련이었는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로저스는 힐이 제공해준 자료를 통해 얼굴과 이름을 겨우 확인했을 뿐이었다. 로저스가 판단하기에 도망자는 얼굴만 봐서는 국적을 알 수 없는 기묘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더불어 그는 통신이 두절된 상태에서 로저스에게 왼쪽으로 가야 한다는 직감까지 안겨 주었다. 

 

  로저스는 빨간 복도를 달렸다. 등에 단단히 맨 방패는 그가 뛰는 속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좌우로 움직이는 건 목표물을 수색하는 로저스의 두 눈동자였다.

 

  —혹시 그가 어디서 도망쳤는지는 알 수 있습니까?

  —네?

  —출발점을 안다면 어디서부터 추적하는 게 좋을지 정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까.

  —미안해요, 제 영역 밖이라 저도 알기 힘듭니다.

 

  로저스가 곱씹고 있는 힐의 목소리는 그의 머릿속에서만 울리고 있었다. 그의 귓가에는 오래 전부터 바람 지나가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로저스는 막혀 있는 벽이 나타나자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다. 생각해 보니 그는 이 구역을 처음 밟고 있었다. 아무도 밝은 양지가 어울리는 그에게 건물의 으슥한 귀퉁이를 소개해주지 않았다. 로저스는 처음 보는 길을 스스로 뚫으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로저스는 다시 한 번 통신 전파를 잡아보려고 귀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노이즈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이곳은 쉴드의 헤드쿼터 건물이었다. 통신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타격을 받지 않는 이상 작전실과 연결이 끊길 리가 없었다. 로저스는 고개를 내젓고 빈 통로를 날카롭게 살폈다. 유독 갈라지는 길이 많았는데, 그 때마다 로저스는 망설이지 않고 한 길을 선택했다.

 

  새로운 코너로 접어든 순간 로저스는 앞이 어두워진 걸 느꼈다. 붉은 빛이 사라졌다. 

 

  —영역 밖이라고요?

  —국장님이 직접 관리해 오신 사항에 대해서 저는 접근 권한이 없습니다.

 

  로저스는 힐도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던 은밀한 비밀을 보고 있었다. 혹은 직감의 근원을 보고 있었다. 경보 시스템마저 아득히 멀어진 어느 공간에서 검은 머리의 도망자가 무기 하나 쥐지 않은 채로 로저스를 마주했다. 로저스는 조심스럽게 귓구멍을 막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빼냈다. 그는 도망자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힐에게 들었던 이름을 생각해내려고 했다. 도망자의 이름은 흔했다. 그러니까….

 

  “아니.”

 

  로저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도망자는 로저스의 뒤편을 힐끗 살핀 뒤 손가락을 움직였다. 로저스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서 키패드가 튀어나왔다. 

 

  “옳지도 않은 걸 애써 기억해내려 할 필요는 없지.”

  “…무슨 소릴 하는 건가?”

  “그쪽에선 어차피 내 가명을 알려줬을 테니까.”

 

  로저스는 도망자가 어떻게 자신의 머릿속에 짧게 지나간 고민을 간파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도망자가 하는 모든 말에 설득력이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로저스는 가만히 도망자를 바라보았다. 도망자는 건장한 체격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비무장 상태였다. 로저스는 일단 자신의 방패는 계속 등 뒤에 꽂아두기로 했다.

 

  “당신에 대해서 아는 건 없지만, 보아하니 여기를 빠져나가려는 것 같군.”

  “그런데?”

  “안타깝지만 그렇게 놔둘 수는 없네.”

 

  도망자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그는 계속 키패드를 만지고 있었다. 긴 다섯 개의 손가락이 몇 초 동안 계속 쉬지 않고 움직였는데도 아직 작업할 게 남은 모양이었다. 로저스가 그에게 다가갔다. 도망자가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곧 로저스의 손에 도망자의 팔목이 잡혔다.

 

  그 순간 로저스는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로저스는 도망자가 반쯤 등지고 있는 까만 벽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벽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로저스는 그 뒤에 차가운 공기가 돌아다니는 공동이 있음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어울릴 듯한 은색 실루엣이 끝없이 나열되어 있는 그곳이 도망자가 목표로 하는 지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당신도 캡틴Captain이라던데.”

 

  로저스는 더 이상 남자를 도망자로 칭하지 못했다. 비로소 기억난 이름은 남자가 가짜라고 못 박아서 쓸모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가 저편으로 가려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겠지.”

 

  로저스가 남자의 팔목을 들어 키패드에서 떼어놓았다.

 

  “혹시 당신… 나보다 앞선 인물인가? 원래 내 자리는 당신이 맡기로 되어 있었나?”

  “내 말을 그런 식으로 알아들었다니 의외로군.”

  “쉴드에 나 말고 다른 캡틴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 없어. 하지만 당신은 방금 당신 역시 캡틴이라는 지위를 가지고 있는 듯이 말했잖나.”

  “그 단어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그를 믿고 따르는 선원이 있다는 거지. 한 나라의 마스코트에게 붙는 별명이 아니야.”

 

  동료가 아닌 선원이라는 표현이 낯설었다. 사실은 남자가 구사하는 악센트라든가, 손에 쥔 팔목에서 느껴지는 급격한 체온 변화 등 모든 게 미심쩍고 이상했다. 다만 로저스는 그 무엇보다 남자의 본명을 자연스럽게 떠올린 자신을 제일 수상하게 여기고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로마노프 요원, 내 말 들립니까?

 

  로저스와 정 반대방향으로 달려 나가고 있던 로마노프는 힐의 부름을 들었다.

 

  “이제야 회선이 복구된 거예요?”

  —이거 돌려놓는 데에도 진땀 뺐습니다. 그건 그렇고 잘 들어요. 왔던 길을 되돌아가서, 캡틴이 갔던 왼쪽으로 가요. 그 다음부터 방향을 알려주도록 할게요.

  “거기 있대요? 아니, 근데 그렇다면 내가 굳이 갈 필요가 없잖아요. 로저스가 거기 있을 텐데 지원이 필요한 상황인가요?”

  —아뇨. 캡틴이 그를 만나면 안 되는 상황이죠.

 

  로마노프는 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본래 의문을 가지는 걸 거추장스러워했지만 이번만큼은 질문을 꺼내야 했다.

 

  “대체 캡틴과 그 존 해리슨이라는 자가 무슨 관계인데 그러죠?”

 

 

 

⁂ 

 

 

 

  고요했던 복도에 툭 하고 사이렌 소리가 떨어졌다. 경보음은 곧 커지면서 간격을 좁혀갔고, 얼마간 물러나 있던 붉은빛도 슬금슬금 어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중앙 시스템에서 비껴나 있던 이 구역에도 본부의 탐색망이 뻗쳐오고 있는 것이었다. 남자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로저스에게서 멀어지려고 했다.

 

  “칸, 잠깐…!”

  

  로저스는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아무도 가르쳐준 적 없는 남자의 본명이 흘러나왔다. 

 

  “한 가지 진실을 말해주지, 캡틴.”

 

  아슬아슬하게 로저스의 양옆을 빗나가고 있던 남자의 눈길이 로저스의 눈앞에 바로 꽂혔다.

 

  “내가 당신에게 누군가를 잃은 슬픔에 더해 생존의 안정감을 맛보게 해주었다.”

  “…무슨 뜻이지? 내가 살아 있는 것에 당신이 도움이라도 줬다는 뜻인가?”

 

  “그 정도로 뿌리 깊은 가치를 공유하지 않고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을까? 아무도 여기까지 오는 길을 알려주지 않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찰나의 고민도 없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당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당신이 내 생명의 은인이라면… 여기서 가짜 이름까지 뒤집어 써가면서 갇혀 있었을 이유가 없어.”

 

  “질문이 많군.”

 

  칸이 로저스에게 잡혀 있는 팔목을 조금 움직였다. 움찔한 로저스가 더욱 세게 그를 붙잡았다.

 

  “내 이름을 불렀을 때 내 행동이 어째서 정당한지도 깨달았을 줄 알았는데.”

 

  칸이 쉬고 있던 다른 쪽 팔을 들었다. 벽이 양쪽으로 열리면서 강력한 기류가 몰아쳤다. 세찬 바람이 지배한 로저스의 양 고막에 그를 부르는 로마노프나 힐의 외침은 전달될 수 없었다. 로저스는 매정하게 자신의 곁을 떠나버린 칸의 팔목을 잡고 있던 손 모양을 그대로 간직한 채 고개를 움직였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그의 피부가 묻어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아니면 그보다 더욱 깊고 강력한, 이를테면 칸의 살갗과 감정이 언제부턴가 자신의 몸에 흐르고 있었음을 뒤늦게 알아챈 느낌이기도 했다.

 

  “로저스!”

 

  로마노프는 그렇게 외치면서 총을 꺼내들었다. 로저스는 제 자리에서 얼굴만 살짝 돌리면 될 것을, 마치 로마노프를 방해할 속셈인 것처럼 몸도 조금 움직여 서서히 닫히고 있는 문의 틈 일부를 가렸다. 게다가 로저스는 로마노프를 제대로 보지 않았다. 로저스는 그 순간 엉뚱한 생각을 했다. 자신이 그의 이름을 늦게나마 깨우쳤지만, 그는 스티브 로저스를 알고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 왜 한 사람을 지칭하지 않는 복수적(複數的)인 표현을 사용했을까? 로저스의 이름을 날쌔게 낚아챈 로마노프가 그를 대신해 칸을 쫓았다. 

 

  로저스는 역광에 가려진 칸의 실루엣을 망막 뒤편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자신의 벗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적어도 통하는 부분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과의 채울 수 없는 거리감을 느꼈을 때 인간은 고독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냉담해진 칸의 발자국이 로저스의 온몸에 뚜렷이 남았다. 로저스는 외로워진 함장의 그림자를 쫓지 않았다.

 

 

 

 




Original Sound Track of 'Captain America : The Winter Solider'

End of the Line



[Crossover/다수] Human and Being 上

- Anything/Crossover 2013. 9. 21. 23: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Benedict Cumberbatch Filmography Crossover,

Stephen Hawking, Khan Noonien Singh, Sherlock Holmes and Julian Assange

- 인물만 크로스오버 주의!! 개연성 및 타임라인 무시 주의!!

- Written by. Jade


Human and Being

(Common Sense between Human and Being)




  순진한 청년이 무서워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불 꺼진 실험실의 풍경이다. 달빛을 받은 삼각 플라스크나 시험관이 빛나고 이따금씩 그 안에 남은 시약들이 빨갛고 보랏빛으로 반짝일 때도 있고, 인간의 피부를 벗겨 놓은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이 있는 데도 그러했다. 청년이 전공 교수들만큼 연구실에 자주 출입한다는 학생이란 별칭을 달고 다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책상 밑바닥에 붙어 있는 간이 서랍을 뒤졌다. 그의 손에 그가 두고 갔던 파일이 잡혔다. 청년은 뿌듯하게 그것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불부터 켰다. 스티븐 호킹이 어떤 구실로든 연구실에 들어온 이상 책상 한 번 어지르지 않고 물러날 리가 없었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빈 방을 슥 훑었다.


  하지만 오늘 청년은 번쩍번쩍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의향이 없는 듯했다. 사실 그는 연구실의 자세하고 소소한 정경을 늘 궁금해 했다. 그가 한데 묶어서 들고 다니는 복사키로 열지 못할 서랍이나 상자는 없었으므로, 스티븐은 호기심에 십분 충실한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덮어쓴 뒤 내부를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책, 수첩, 여러 메모지가 붙은 종잇더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스티븐은 시종일관 싱글거렸다. 이것도 석학들의 자료를 모조리 이해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자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스티븐의 짙은 눈동자가 멈췄다.


  디지털 인쇄물이 아니었다면 진작 잉크가 날아가 알아보기 어려운 자료로 전락했을 게 뻔한 파일이었다. 종이 끝자락이 바래 있었는데 최근까지 교수들이 손댄 적이 없는지 옅은 먼지가 손에 묻어났다. 아마 교수들은 서랍의 틈새 어딘가에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던 게 뻔했다. 스티븐은 의자를 빼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일 처음 알아볼 수 있는 건 DNA를 형상화한 그림들이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합성과 분열이 아니라, 청년으로서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복제되고 다듬어졌다. 유전 공학은 스티븐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료를 외면하지 못하고 본래 가져가려던 파일에 끼워 넣었다.


  스티븐이 들고 떠난 자료의 맨 위에는 놀랍게도 이름이 붙어 있었다.




* * 




  그가 처음에 눈을 떴을 때 스티븐이 한 말은 혹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다소 허무맹랑한 질문이었다.


  뽀얗고 호리호리한 청년의 몸보다 창백하고 단단한 자신의 육체를 그는 말없이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그가 호흡하고 있는 시간을 셀 수도 있는 입장인 그에게 당장 육체적인 미를 품평할 감각은 모자랐다. 그는 별 불만이 없다는 뜻으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안경 쓴 청년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어진 그의 대답 또한 놀라웠다.


  자신의 유전 형질을 이것저것 변형시킨 부분이 많아서, 그가 자신의 외양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것은 자신의 탓이라 무척 슬플 것 같다는 말이었다.


  파일에 적혀 있던 대로 칸 누니엔 싱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가 자신의 창조자인 스티븐 호킹을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였다.




* * * 




  주욱 하고 탁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부탁한 책을 가지러 잠시 방에 들어갔던 칸은 소리를 듣고 빠르게 방으로 나왔다. 몸을 지탱하기 위한 탁자가 도리어 움직이면서 완전히 균형을 잃은 그의 창조자가 엎어져 있었다. 칸이 묵묵히 스티븐을 일으켜 세웠다. 팔이 당기고 무릎이 아플 텐데도 스티븐은 칸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유전공학자가 아닌 불치병에 걸린 케임브리지 대학원생이 탄생시킨 유사인간은 창조자를 소파에 부드럽게 앉히고 황급히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을 주웠다. 


  스티븐이 손을 쓰기 어려워진 이후로 집안에 있는 펜이나 연필들은 대부분 처분되었다. 행여나 스티븐이 넘어지면서 펜이 떨어지거나 굴러다니면 그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칸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뭉툭한 연필과 공책을 남겨두었을 뿐이었다. 스티븐은 무슨 말이 떠올랐는지 칸에게 연필을 달라고 눈짓했지만 그가 말했다.


  "쓰지 않아도 네 뜻은 다 보인다. 책은 그 정도면 됐는가."


  창조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하는 말씨를 스티븐은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스티븐이 칸에게 시종일관 보였던 것은 미소였다. 손이나 발보다 그가 그나마 더 잘 움직일 수 있는 얼굴로 여러 가지 표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덕분에 유사인간은 얼핏 비슷해 보이는 스티븐의 표정을 잘 읽는다. 


  누군가가 옥스퍼드의 연구실에 남겨 놓았던 유전자 지도는 각 형질의 우성화를 꾀하고 있었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해 스티븐이 빚은 존재는 설계도의 목적을 훌륭하게 체화했다. 그런데 하필 칸 누니엔 싱이 처음으로 본 인간은 다른 이들보다 아픈 모습이었고, 덕분에 그는 애초에 지도의 제작자들이 바랐던 것과는 다른 특징들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칸은 어렵게 고개를 좌우로 젓는 스티븐을 보고 가만히 몸을 움직였다. 그가 스티븐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스티븐이 고른 두꺼운 과학 서적을 함께 읽었다. 반짝거리는 사진들 주변에 온갖 숫자들과 다양한 모양의 기호들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칸을 바라보는 스티븐의 눈동자는 사진의 별과 달보다 더 반짝거렸다. 그것은 유사인간을 유사인간으로 보지 않는 눈빛이었다.




* * *




  칸이 태어나고 나서 일 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러니까 스티븐이 아직 글씨를 쓸 수 있고 말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당시였다. 그는 활달하게 여러 제스처를 섞으면서 설명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는…."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스티븐은 열심히 칸에게 그가 살과 뼈를 가지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스티븐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지도에 그려져 있던 낡은 나선들과 알파벳들을 짚었다. 가만히 창조자의 말을 듣고 있던 존재가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설명해주는 건가?"

  "응?"

  "어쨌든 내가 당신에 의해서 태어난 건 명백하지 않나.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네가 나를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스티븐은 다소 의아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아닌데."


  이후의 말을 스티븐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나는 내가 아니라 너를 확실하게 해주고 싶어."


  그 이후 창조자의 손가락은 파일의 자료를 다 넘길 때까지 칸의 이중나선들을 세세하게 훑어 주었고, 그 다음엔 창조자와 거기서 비롯된 존재, 마지막에는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켰다. 점점 근육이 오그라들고 생기를 잃어가도 언제나 자신이 모험적으로 만든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티븐의 손가락이 자신을 보고서도 자신을 가리키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협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 * *




  온 몸을 통해 희미하게 전달되는 감각이 푹신했다. 스티븐은 자신이 쓸 휠체어의 세세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의자에 앉아있었던 걸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체적 제약에 걸려 스티븐의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있어 스티븐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먼저 교양 없는 처사에 대해서는 사과하도록 하겠네. 몇몇 친구가 좀 성급했어."


  스티븐이 차근차근 분석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의 음성은 그가 처음 듣는 종류였다.


  "그런 실속 없는 말을 듣기 위하여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니다."


  이건 스티븐이 아주 잘 아는 칸의 목소리였다. 스티븐이 몸을 조금 뒤척였다. 가끔 그와 외출을 할 때 어쩐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발견할 때가 심심찮게 있어 칸이 낯선 인간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그는 꽤나 날을 세운 언어들을 내뱉고 있었다.


  "먼저 어떻게 그러한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이나 듣지."

  "국내 유수의 대학원들은 사실 어느 정도 상층부와 연결되어 있는 점이 있다네. 인재들과 그들의 결과물을 주시하면서 발 빠르게 지원을 해주려는 것도 있고, 아예 정부 산하 조직으로 초대를 하거나 특별히 중요한 것들은 국가적으로 보안을 하기 위함이지."

  "아마 개인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고."

  "인간들은 이러한 부분에서는 은밀한 걸 좋아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티븐은 자신이 누워 있기 전에 발생한 일을 한 가지 더 기억해 냈다. 그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집 안에 들어왔었다. 하필이면 휠체어 제작에 필요한 자재들이 생겨 칸에게 부탁을 맡긴 시간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보고서나 논문을 제출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는 않았네. 순진한 청년이라고 들었지만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아. 아마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PC를 확인하면서 자료가 발견된 것 같네."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군." 


  스티븐이 침대 위에서 애를 쓰면서 몸을 뒤척인 결과 그는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이즈음 스티븐은 칸을 불러야 하나 생각했지만 침대에서 출입문까지 나아갈 기력 정도는 있었다. 걷는 일이 몹시도 힘든 그는 바닥을 몸에 밀착시켜 최대한 소리를 줄이면서, 벽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은 고리들을 붙잡고 일어난 다음 문을 열었다. 


  자신의 창조주 말고는 다른 이와 말을 섞는 것도 짜증내는 존재의 앞에 양복을 입은 낯선 이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