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vS/숲뱃(클락브루스)] Becoming God

- DC Movie Universe 2016. 8. 31. 16:11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Superman/Batman

- Original Date 2016. 08. 21

- Written by. Jade


Becoming God




  하얀 옷을 입고 붉은 날개를 단 천사가 말했다.


  "피란델로라는 작가를 알아요?"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대답했다.


  "이탈리아 문학이라도 읽는 건가."

  "역시 알고 있었네요.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알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쓴 작품 중에 우리 둘 모두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 있어요."

  "한가로운가보군."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죽음의 천사이자 인간의 지배자인 남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밝았다.


  "당신은 언젠가 나에게 나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당신의 그 통찰력이 얼마나 희귀하고 또 고귀한 것인지 그 때는 몰랐어요. 그래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봐야 해요. 그런데 당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간들은 나를 신으로 봤어요. 태양만 있으면 그 누구보다 강력해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 행성을 초월한 세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가보죠. 적어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나는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어요."


  "그것으로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겠다는 건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쳐서 정권을 잡은 독재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궤변이야." 


  "나는 당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공포정치에 대한 가장 든든한 벗으로 태양을 두고 있는 독재자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왕이면 좀 더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야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죽고 나서 나는 물어야 했어요. 나는 누구지? 이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지? 당신의 시선은 논리적이고 모든 면에서 다 옳았지만 그래서 따뜻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장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지극히 옳은 걸 외면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게 물었고 대답을 얻었어요. 피델리오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인공적인 신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바란 그대로의 것이 되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파괴하는 신이 되기로 한 건 네 자신이 선택한 거야."


  밤의 영웅도 아니고, 이 순간엔 오직 한 명의 인간일 뿐인 남자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녀를 잃은 바로 그 시점에서 너는 인간에 가까워지길 포기한 거야. 그렇게 되면 그녀를 죽인 자와도 닮아질 테니까. 일시적으로 해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른 자들이 신이 되어달라는 소망을 보낸 건 너에겐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을 걸. 네가 납득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자비로운 신은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었지. 네가 노력과 자비를 베풀어서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네가 반드시 없애야 할 자들만 남았으니."


  인간이 원하지 않은 신이 입술을 물었다.


  "나를 봐."

  "보고 있어요."

  "아니야."

  "당신을 보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클락, 나를 봐. 뭘 불안해하지?"


  파괴신과 천사와 외계인과 인간을 오가는 존재가 표정을 찡그렸다.


  "로이스 레인이 죽던 날 이후로 너는 나를 보지 않아. 그러나 넌 태양과 심판의 신이 될 수는 있어도 지혜의 신이 될 수는 없어. 피란델로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응시해보라고.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 테니."


  인내심과 자애로움이 있는 고목과 같이 인간은 계속해서 그에게 자신의 눈동자를 제공하려고 했다. 정의내리기 애매해진 존재는 결국 인간의 시선을 받아들고야 말았다.


  ―나의 육신이 거만한 나의 정신에서 분리되는 것을 저기 내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아, 마침내! 저기 그가 있구나! 


  존재는 책의 구절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아니었다.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한 가련하고 무기력한…

  "그 날 나는 너를 이렇게 보고 있었어."


  그를 정의내릴 수 있는 한 단어는 클락 켄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클락 켄트가 입술을 떨었다.


  "아니…."

  "그 때 너는 나를 보지 않았어."

  "그렇지 않…."

  "너무 좌절스러워서 모든 걸 다 속단하기에 이르렀던 거야."

  "나는…."

  "그렇지만 나는 너를 차갑게 보지 않았다, 클락."


  인간에 의해 신이 된 자는 자신이 억지로 신이 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십만 명의 시선이 되기에도 바빠 그 자신은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비합리적인 무게감을 벗게 되었다. 






인용된 책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

[BvS/숲뱃(클락브루스)] Learning Love

- DC Movie Universe 2016. 8. 31. 16:10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Superman/Batman

- Original Date 2016. 08. 09

- Written by. Jade


Learning Love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자가 말했다.

 

  "생명과 도시를 구하는 데 애정이 필요하진 않더군. 구원은 형벌만큼이나 비인격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해.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다루어야 하지. 모두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거나."


  그 자에 의해서 한 번 죽어 보았던 이가 말했다.


  "당신은 아마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겠죠?"


  "그래."


  "만약에 당신이 모두를 사랑하는 쪽을 선택했다고 가정해봐요. 그러면 그 안엔 당신도 들어가겠죠? 당신이 구하는 건 사람들이고, 당신도 한 명의 인간이잖아요."


  "아니, 그렇지 않을 거야."


  "어째서요?"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 미덕이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죄악이니까."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이는 죽음과 같은 삶을 살았던 자를 대신해 울상을 지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아닌 다른 존재를 사랑하는 것, 그것은 일종의 신적인 일이야 신이나 성인들이 주로 하는 행위지 않나. 이타적이며 동시에 건설적이지. 하지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저급하게 인간적이야. 결국엔 호숫물 아래로 머리를 박고 말 결말을 가져올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해요?"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이 당신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으로 낙인찍은 건 아닌가요?"   


  그러자 자본주의의 정점에 선 인물의 모습을 꺼내든 자가 말했다.


  "어차피 나의 가치를 확인하는 건 나 자신이 아니야. 그러니 나는 그러한 행동을 할 수도 없지."


  "그건 무슨 뜻인가요?"


  "아주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뜻이지. 다른 사람들이 나의 가치를 알아주고 나를 이용해주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세상이 되어버렸어. 나 자신에 대한 나의 판단은 무의미해지고, 개인은 누군가의 평가를 기다리는 대상이 되어버린 거야."


  "그렇다면 나는 당신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하겠어요." 

  

  손에 잡히는 이득보다는 사람들이 알아야만 하는 것을 더 추구해온 인물이 말했다.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따르겠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받을 수 있는 사람으로 평가한 다음에, 당신에게 당신 자신의 사랑이 아니라 나의 사랑을 준다면 문제될 건 없는 게 아닌가요?"


  "…아니야."


  "왜요?"


  "그건 잘못된 평가야."


  "어째서요?"


  슈퍼맨의 물음에 배트맨이 답했다.


  "너를 한 번 죽게 만들었던 사람이 나니까."


  슈퍼맨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생각하기엔 당신이야말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금언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에요."


  "내가 사회적 동물이라고?"


  "당신은 모든 분야에 대해 현명하지만 당신 자신에 대해서는 장님이 되고 말죠. 당신에겐 다른 시선을 가진 사람이 필요해요. 타인이 필요한 거죠.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야말로 당신은 '사회적 동물'이 아닌가요?"


  "…나는 이미 혼자서 너무 많은 시간을 살아왔어."


  "시간이 언제나 본질을 바꾸는 건 아니에요."


  인간의 생김새로 자주 그려지는 조물주 이후로 인간을 가장 가까이서 보아왔을지 모르는 영장목의 일원이 말했다.


  "당신 자신을 평가해줘요. 남의 사랑, 당신의 사랑을 받아도 괜찮은 사람이라고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당신의 그 안타까운 논리를 꼭 뒤집어야 할까요?"


  인간은 말이 없었다.


  "당신은 누구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죠. 사랑한다는 표현이 너무 지나친 것 같으면 믿는다고 할게요. 신조차도 당신처럼 끈질기게,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해서 인간에게 자원과 희망을 쏟아붓지는 않을 거에요."


  "그런데?"


  "당신의 화법을 사용해볼게요. 인간에 대한 사랑은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면 구체적인 개인들과의 접촉에 의해 생겨나는 것이죠. 종 자체를 무한히 사랑하지 않는 한은요. 그런데 뒤집어 생각해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 전제되지 않고서 어떻게 특정한 사람에 대한 사랑이 탄생할 수가 있나요? 그렇다고 해서 그 '특정한 사람'에 들어갈 인물과 아닌 인물을 어떻게 선험적으로 구분할 수가 있죠?"


  인간이 아닌 이에게 인간에 대해 배우고 있는 인간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원칙적으로 당신은 나 같은 타인과 마찬가지로 당신이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에요. 타인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이에요."


  순식간에 거짓된 마음으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한 꼴이 되어버린 검은 기사의 시선이 떨렸다.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던 거예요."


  "…그래."


  "왜 그렇게 단정지어야 했던 거죠?"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어. 나 때문에 죽은 사람도 있지."


  "그건 나도 마찬가지에요. 우리 둘은 신이 아니에요."


  "네 앞에서 나는 인간의 고유함에 대해 떠들었었지만 박쥐 가면을 만든 그 순간부터, 나는 반쪽짜리 신이라도 되겠다고 결심한 것이나 다름없어. 그렇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반쪽에라도 닿으려고 노력해야 해. 내가 도시를 책임지겠다고 정했어. 내가 사람들을 구하겠다고 정했고 내 행복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안전을 추구하겠다고 정했어. 왜냐하면…."


  "왜냐하면?"


  "나와 같은 인생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길 바라니까."


  아무리 가진 것이 많아도, 그 모든 걸 포기해서 자신이 원하는 단 한 가지를 얻을 수 없는 지친 영혼이 읊조렸다. 


  "삶은 등가교환이 되지 않아. 내가 나를 희생한다고 해서 반드시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지는 않지. 그렇지만 나는 그걸 바라면서 이 일을 해. 불가능한 걸 목표로 삼은 자가 짊어져야 할 무게야. 네가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언제 당신을 사랑해줄 거예요?"


  "내 목표를 이루고 나면."


  "불가능한 거라고 했잖아요."


  "맞아."


  모순을 긍정으로 삼켜버리는 남자를 막을 방법은 없을 것이었다. 그래서 부드러운 붉은 망토의 사나이는 전부터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그럼 당신이 당신을 사랑할 방법을 알게 될 때까지, 내가 대신해서 당신을 사랑할게요."


  유효기간이 정해지지 않은 손이 건네졌다.


  "나는 그럴 수 있어요."


  모든 인류를 지키는 존재의 손 위에는 그 순간 분명히 세상 모두와 공평하게, 그렇지만 더 깊은 따뜻함을 받아야 하는 사람의 손가락이 얹어져 있었다.   

  몇몇 과학자들은 인류가 태양 때문에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언제고 실현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가설이다. 인간에게는 태양을 견딜 수 있는 기반도, 자격도 존재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개별적인 인간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생명을 연장당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태양은 언제나 그들을 노리고 있다. 나의 눈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열쇠를 가진 건 인간이 아닌 인류다. 


  브루스 웨인은 아직까지 한 명의 인간이다. 


  그대가 아직도 인간이라는, 그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내 눈 앞에 적나라하게 펼쳐진 광경은 오묘하다. 나는 그것을 증오하면서도 몹시 탐스럽다고 생각한다. 피어나지 않은 꽃봉오리를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나는 어떠한 호기심과 기대감으로 그대가 벌어지지 않은 꽃잎으로 꼭꼭 가리고 있는 걸 강제로 열어버리길 원한다. 그대의 심장은 참으로 아름다운 모양일 것 같다. 빛나는 혈관들이 꼭 작고 예쁜 전구가 달린 전선처럼 주변을 휘감고 있고 그것의 핵심은 경이로운 리듬감으로 박동할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것을 볼 수 있지만 손에 쥐지는 못하고, 대신 그대의 두 번째 심장을 입에 가득 머금는다. 피가 모이고 수축과 팽창을 할 수 있으며 창조를 해내는 생명력을 가진 그것은 그야말로 나를 위해서 툭 튀어나온 그대의 두 번째 심장이다.


  손바닥 아래의 두근거림과 입 안의 압력감은 어떤 불편함을 유발한다기보다는 나를 너무나 즐겁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짜릿함은 한편으로는 브루스 웨인이 아직까지도 인류라는 테두리 안에 둘러쌓여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부터 그 역겹고 허술한 나무토막들을 하나씩 무너뜨릴 작정이다. 그것은 그대의 두 번째 심장에 그어진 작은 자국에 나의 조직과 열정이 들어가는 행위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대 역시 나에게 무언가를 주어도 좋다. 오, 바로 이 순간처럼. 내가 그대에게 칭찬의 속삭임을 들려주었을 때 그대의 피부 밑은 몸부림쳤다.  


  나는 그대가 준 것을 그대와 조금 나눠 가졌다. 살구빛 태양에 약간의 하얀 구름이 흘러 지나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본래 내 눈 안에 담기는 태양을 비우다가 그대의 살도 살짝 태워버렸다. 인류가 끈질기게 브루스 웨인을 붙들고 있다. 나는 그것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아서 창을 휘둘러 그대로 내리꽂았다. 내가 부러뜨린 울타리 조각이 그대를 약간 아프게 했다. 


  다른 인간들이 그대에게 붙여놓은 이름표가 너무도 많았다. 그것들은 하나같이 브루스 웨인이 그들의 소유라고 주장해대고 있었지만 나는 그대를 이따금씩 흔들면서 그것들을 전부 떼어냈다. 그대는 이미 소유권만 주장할 뿐 어떠한 관리 의식이나 책임감, 배려를 보여주지 않고 있는 다른 작자들에게 실망했다. 나는 마지막 이름표를 입으로 뜯어 먹으면서 포효했다. 그대는 큰 소리를 낼 필요 없이 그저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혈액을 흘려보내면 된다. 색깔은 나를 현혹시키지 못한다.


  당신은 혹시 내가 브루스 웨인을 범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갑작스러운 나의 변절에 대해 실망하면서 브루스 웨인을 애도하는가? 아니면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 인류의 절망에 무력해하고 있는가? 


  만약 당신이 세 번째 질문에 해당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대단히 어리석은 것이다. 독재나 배신은 절대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반역이나 혁명만큼이나 훌륭한 계획과 숙고를 필요로 한다. 당신이 인간 중에 그나마 현명한 편에 속한다면, 이쯤에서 두 번째 질문 역시 논리성에 어긋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대는 어떤 총명함으로 자신의 주변이 비워지고 있음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대의 심장이 조금 시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힘차게 날뛰게 할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내가 안전하게 그대를 보호하기 위해 목덜미를 잡고 있는지라 그대의 비상은 꽤나 볼썽사나웠다. 어쨌든 그대는 다시 흥분했다. 태양처럼 뜨거워졌다. 


  이쯤에서 나는 당신에게 질문을 하나 하고 싶다. 내가 판단했을 때 가장 현명하고 영특한 인간은 누구일까? 브루스 웨인이다. 그렇다면 그가 현재 파악하고 있는 상황이 내가 조금 전 당신에게 던져주었던 문제에 대한 답이 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나는 커다랗게 웃었다.


  그대의 두 번째 심장으로부터 녹아내린 인간의 껍데기가 하얗게 흘러내렸다. 이제 브루스 웨인은 인간이 아니다. 적어도 다른 자들은 그를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을 것이었다. 울타리는 다 부숴졌다. 나는 만족하면서 껍데기가 벗겨진 그대의 맨 피부에 나의 베일을 둘러주었다. 


  이제 인류는 정말로 나의 태양에 의하여 멸망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속삭임이었는데, 그대는 그 작은 말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언어여서 나는 다시 내 창을 들었다.




Original Date 2016. 04. 26.



[BvS/클락브루스(숲뱃)] The Power of Choice

- DC Movie Universe 2016. 6. 23. 15:35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Clerk Kent/Bruce Wayne

- Written by. Jade


The Power of Choice




  그들이 만나는 방에 어떠한 필기구도 둬서는 안 된다는 것은 브루스 웨인이 정한 규칙이었다. 거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므로 클락 켄트가 그 규칙을 거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하여 클락은 기자들의 필수적인 소지품인 펜과 종이가 아니라, 영장류의 축복이라 할 수 있는 손톱과 입술로 브루스 웨인을 기록하고 경험했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한 저널리스트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특권이었다. 클락 켄트는 다섯 번째로 브루스 웨인의 나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한 번 침상을 벗어나기만 하면 갑자기 모든 자유와 권리를 얻는 듯했다. 클락은 욕실에서 그새 드레스 셔츠까지 걸치고 나온 브루스 웨인을 바라보았다. 펜과 종이가 없고, 대신 이불에 휘감긴 뜨겁고 차가운 시간만 있는 방에서 네 번째 밤을 보낼 때 클락은 꽤나 발칙한 마음을 먹고 브루스 웨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니까 클락은 한 도시의 실권자이자 연출된 존재처럼 너무나 완벽한 유명인사의 몸을 씻겨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물방울이 흘러내리는 브루스 웨인의 피부라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답고 황홀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넷째 날과 같이, 클락은 그의 도움 없이도 또 다시 새롭게 태어난 듯한 브루스 웨인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하루만에 포기했나보군."


  거울을 보고 있던 브루스 웨인이 불쑥 말했다. 클락의 어벙한 시선이 거울에 비춰진 모양이었다. 클락은 맥락이 대폭 생략된 그의 말을 해석하기 위해 잽싸게 머리를 굴렸다. 훌륭한 기업가이기도 한 브루스 웨인은 효율적인 걸 좋아했다. 기자의 눈치며 일생동안 쌓아온 경험까지 모조리 끌어모았던 클락은 마침내 브루스의 말뜻을 이해하고서는 숨소리를 터뜨렸다.


  "뭐에요, 알고 있었어요?"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 줄 알았나."


  브루스 웨인은 갈아 끼운 커프스 단추를 고정하면서 말했다. 커프스의 반짝거림이 브루스 웨인의 손끝까지 미쳐서, 클락이 있는 위치에서는 브루스 웨인의 손가락이 예리한 빛을 뿜어내는 듯이 보였다. 클락은 브루스의 등 뒤에서 그의 곡선을 보았다. 그 아름다움은 당분간 클락이 손에 담기지 않을 것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을 뽐내고 있었다. 클락은 왜 아직까지도 브루스 웨인이 하의를 입지 않는 것인지 진지하게 묻고 싶어졌다. 


  순간 반은 옷을 입지 않은 브루스 웨인의 몸이 클락의 시선을 휙 지나갔다. 그는 움찔하면서 시트를 손에 쥐었다. 브루스 웨인이 만든 두 번째 규칙은 그가 모든 옷을 입기 전까지 클락 켄트가 이동할 수 있는 권리가 소멸된다는 것이었다. 클락은 시트를 손끝으로 비비면서 깊게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브루스 웨인의 하반신이 가려졌다. 클락은 다시 그를 응시했다.


  "내 마음대로 움직여주지는 않겠다는 거네요, 그럼."

  "그렇게 파악한 건가, 아니면 자신을 위한 정당화인가?"

  "전자죠. 내가 아무리 들이받는다고 해서 넘어갈 것 같지가 않아서."

  "현명함으로부터 나온 결정은 칭찬해줘야지."


  브루스의 손목에 실크 넥타이가 감겼다. 그는 화려하지만 장식적이지는 않은 동작으로 넥타이를 바로잡고 그것을 셔츠의 옷깃 뒤로 감았다. 그 모습을 감상하며 클락이 한 마디 던졌다.


  "날 칭찬해주는 게 아니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째서?"

  "오늘 옷 입는 게 느려요."


  브루스 웨인이 웃었다. 농담을 한 게 아니었던 클락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건 너에겐 기회야."

  "왜죠?"

  "네가 나에게 질문을 할 수 있으니까."


  넥타이가 묶이고 있었다. 클락은 막연히 넥타이의 색깔이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양복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게 없었다. 기자는 면바지를 입고 뛰어다녀야 했다. 그렇지만 늘 그러했듯이 그것이 브루스 웨인을 절대 상처입히지 않을 것임을 확신할 수는 있었다. 클락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거울을 통하여 브루스 웨인이 그를 보고 있었다. 


  "솔직히 이해 안 가는 점이 하나 있어요."


  브루스는 조용히 넥타이를 잡아 당겼다.


  "그러니까… 당신은 그냥 내 밑에 있어주는 것 같아요."

  "나쁘지 않은 표현이군."

  "정확하기도 하겠죠?"

  "어느 정도는."

  "그리고 나는 그게 이해가 안 돼요. 이 일과 관련해서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사정이랄까요, 속마음이라고 하는 게 낫겠어요. 그런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클락은 혼잣말을 하듯이 이야기했다. 그것은 정말로 일종의 혼잣말이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직접 발언권을 얻어올 수 있는 경우가 흔치 않으므로 클락으로서는 그 아까운 기회를 한 번 사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넥타이를 다 매서 잠시간 자신의 주의를 집중할 곳을 잃은 브루스 웨인은 거울에 비춰지는 클락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때 헐벗은 기자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유명 인사의 시선을 다 받고 있었다. 그것은 클락 켄트에게는 분명한 호재였고 브루스 웨인에게는 자신이 특별히 외면하지 않아도 되는 찰나였다. 


  "귀찮아."


  클락이 눈동자에 물음표를 띄워올렸다. 브루스가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유일하게 주도권을 쥘 필요가 없는 순간이니까. 그런 드문 시간까지 애쓰기 귀찮다고."

  "…그게 이유에요?"

  "그런다고 내가 달라지나?"

  "네?"

  "나는 방금 잠자리에서까지 누구 위에 올라 타는게 귀찮다고 말했어. 내 입에서 그런 말이 나가고 난 뒤에 너는 지금 날 보고 있지. 말해봐, 네 눈에 비친 내 모습이 달라졌나?"


  클락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아니요."

  "그러니까 내가 귀찮아하는 거야.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 일에 굳이 힘을 쏟을 필요는 없어."


  갑자기 클락의 눈앞이 까매졌다. 브루스 웨인이 정장 재킷을 입은 것이었다. 한 번 펄럭거린 게 분명한 옷인데 뒤편에 주름이 없었다. 클락은 그게 정상적인 것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어차피 자신에게 무해한 행동은 하지 않는 인물이 브루스 웨인이었다. 그제서야 클락은 몇 분 전에 자신이 생각했던 바가 틀렸음을 깨달았다. 브루스 웨인은 단 한 번도 그의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클락은 어느새 틈이 메워져버린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쫓아간 브루스 웨인의 등을 떠올렸다. 그는 전날 밤에 입었던 것과는 다른 색의 양복을 입고 클락을 떠났다.   




Original Date 2016. 04. 23.


[BvS/클락브루스(숲뱃)] Beyond Guilt

- DC Movie Universe 2016. 6. 23. 15:34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Clerk Kent/Bruce Wayne

- Written by. Jade


Beyond Guilt





  “요새는 꿈자리가 괜찮으신가보군요.”


  알프레드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브루스 웨인은 놀라면서도 그걸 부정하지는 못했다. 알프레드는 버릇처럼 자신에 대한 짐을 만드는 도련님 특유의 표정을 간파해내고는 얼른 덧붙였다.


  “전보다 더 바빠지셨으니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한가했던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일이 한 가지 늘긴 했지 않습니까.”


  알프레드는 계속 사실만을 말하고 있어 브루스가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호수의 표면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이 유리로 만든 집까지 무사히 들어오는 밝고 아름다운 시각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빛이 그를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


  그 날은 브루스 웨인이 악몽을 꾸지 않고도 7일간의 밤을 편히 보냈던 놀라운 하루였고, 다른 세계의 별이 떨어진 지는 보름이 지나지 않은 시기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당연히 슈퍼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슈퍼맨은 그의 주요 활동지가 아닌 고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고담에는 반드시 슈퍼맨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했는데, 고담시에 무언가를 만들고 구축하는 일은 언제나 브루스 웨인의 몫이었다. 그는 도시의 한 부분을 떼어 슈퍼맨을 위해 꾸몄다. 그곳에서 짤막하게 연설까지 한 것이 고작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슈퍼맨을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없어도 그는 슈퍼맨을 잊을 수 없었다.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앞에 쟁반 하나를 두고 사라졌다. 그는 최선을 다해 브루스의 안색을 살피길 외면하였다. 알프레드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노련한 집사답게 신속하고 고요했으나, 알프레드가 언제나 브루스의 기만을 알아채듯이 브루스는 그가 자신을 염두에 두면서 발휘하는 조심스러움을 느꼈다. 브루스는 아주 짤막한 순간동안 입꼬리를 올렸다. 꿈속에서 슈퍼맨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양심에 심각한 구멍이 났다는 소리는 아니라고 단언하는 알프레드의 목소리를 벌써 들은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늘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져야만 하는 죄책감을 과대평가하면서 그것에 부응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의 가치를 낮게 잡았다. 그에게 브루스 웨인은 언제나 월리스 버논 키프의 다리를 구제하지 못했고, 고작 그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연금밖에는 줄 수 없는 사람에 머물듯이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총을 맞고 어머니가 강도를 말리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므로 늘 그에 대한 악몽과 부채감에 시달려야 마땅한 자였으며, 모든 사람들을 구해야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인간이었다. 동시에 그는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그 무거운 자리에 올라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상기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놓고 간 쟁반을 보았다. 알프레드는 그에게 절대로 술을 가져다주지 않는 대신 아침에 커피 한 잔은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허락해준 커피를 한 번 마시고 매일같이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는 노트북을 펼쳤다. 브루스 웨인보다도 잠을 덜 자는 여인이 그에게 남겨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브루스는 조금 시간을 끌다가 답장을 보냈다.


  한동안 조용하던 브루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익숙한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겉옷을 한쪽 팔에 끼워 넣으면서 말했다.


  “난 오늘도 늦게 올 것 같으니 저녁 먹어요, 알았죠?”


  그러자 알프레드가 휙 머리를 내밀었다.


  “오늘 오후에는 공식적인 일정이 없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방금 만들었어요. 다음엔 안 피할 테니 한 번만 봐줘요.”


  브루스가 집을 나섰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도련님이 여전히 자신과의 오붓하고 진지한 식사 시간을 일종의 상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마음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 * *



  혼자서 석양과 바람을 함께 맞고 있던 브루스 웨인이 입을 열었다.


  “…안 온다더니.”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흩어지고 나서 깔끔한 구두 소리가 차분하게 브루스의 뒤를 쫓아왔다. 다이애나가 가만히 그의 옆에 섰다.


  브루스의 등을 향해 가면서 그녀는 그의 신발과 옷에 흙이 거의 묻지 않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 켄트의 무덤 주변이 아주 깔끔하다는 걸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아직은 슈퍼맨뿐만 아니라 클락 켄트도 잊히지 않았다. 


  “여긴 왜 온 거야?”

  “잡초라도 뽑을까 해서.”


  다이애나가 시선을 올렸다. 브루스 웨인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한 발 늦었더군.”

  “아마 그의 어머니나 애인이 정리를 해 준 거겠지.”

  “그렇겠지.”


  비죽 솟은 부분도 없이 매끄럽게 잘 깎인 무덤의 주변에서는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애정을 받는 공간은 그처럼 안정적이었다. 또한 브루스 웨인은 작정하고 그것을 감상하며 사색하기로 한 것 같았다. 결국 다이애나가 먼저 목소리를 내야 했다.


  “정말로 여긴 왜 왔어?” 

  “아까 대답했지 않나.”

  “그럼 이렇게 묻지. 왜 그를 보러 왔어?”


  브루스의 시선이 슬쩍 틀어졌다. 


  “…그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아서.”


  다이애나는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당신의 꿈에 나타나야 해?”

  “내가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 그랬어.”


  그 순간 다이애나는 브루스의 대답을 듣기 위하여 그를 곧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에 스치는 모든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단념했으나 한편으로 인간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도 다양하고 무겁고 유구한 인간들이 한 사람 안에 비좁게 앉아 있다가 우수수 잠깐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그들 가운데서 100년 전의 자신도 찾을 수 있었다. 


  “당신을 믿긴 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시간은 충분히 흐르지 않았고 당신은 직접 나서서 그 흐름을 가속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니.”


  브루스는 그것을 부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책임감은 죄책감을 넘어서는 거야.”

  “…뭐?”

  “위대해진 책임감은 죄책감을 이겨버리지. 당신도 그 단계에 접어든 건 아닐까.”


  다이애나가 팔짱을 끼면서 자신의 두 팔을 스스로 감싸 안았다. 해가 떨어지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바람이 차가워졌다. 브루스 웨인은 그녀의 몸짓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피부를 부여잡는 피부의 움직임에 꼭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는 점점 추워지는 것 같다는, 그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남기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브루스 웨인은 말끔한 클락 켄트의 무덤과 멀어져가는 다이애나의 사이에 서 있게 되었다. 그는 오늘 여기까지 와서 무덤 주변에 있는 풀 한 포기조차 만지지 않았다. 뽑을만한 잡초가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 켄트의 무덤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으리라는 걸 알았다.


  브루스가 무덤으로 마지막 시선을 보냈다. 그는 다이애나의 말을 완벽히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자신이 클락 켄트의 무덤을 쓸어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를 소망했다. 




Original Date 2016. 03. 26.



- DC Comics Movie Universe, Clark Kent/Bruce Wayne

- Written by. Jade


 

Breakfast at Glasshouse 

 



  켈리 알렌 기자는 자신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어진 한 나무의 울타리에 다리를 기대고 샌드위치를 뜯었다. 오늘도 굳게 잠긴 철문은 그녀를 위한 등받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칠면조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입구 쪽 CCTV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CCTV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묵묵히 샌드위치를 씹었다.


  켈리가 안쪽의 거주자만큼이나 무정하고 쌀쌀맞은 별장에 진을 치게 된 지 벌써 다섯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켈리가 다니는 직장은 독자들에게 무가지 수준의 싼 가격에 신문을 팔아치우는 한편, 논란거리가 될 만한 사진이나 제보를 다른 언론사에 팔아넘기면서 수익을 얻는 전형적인 타블로이드 신문사였다. 직감이 좋고 끈질긴 성미를 가진 그녀와 딱 맞는 일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철문과 별장을 앞세워 꽁꽁 숨어 있는 고담시의 황태자는 이를테면 그녀의 직감과 성미에 모두 걸려든 대상이었다.


  브루스 웨인의 날카롭고 냉정한 면모는 이미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었는데, 켈리는 그 얼음송곳 같은 성격이 한 번 대사건을 일으킬 거라 일찍이 예감하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브루스 웨인 주위에 덩치 좋은 남자 하나가 맴돌기 시작했다. 그 역시 기자 출입증을 달고 있었지만 그는 브루스 웨인과 이야기하면서 단 한 번도 수첩이나 녹음기를 꺼내지 않았다. 어쩌면 두 사람이 메모가 필요할 정도로 긴 대화를 나눈 일이 드물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타블로이드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켈리는 두 사람에게서 스캔들의 냄새를 맡았다.


  ‘브루스 웨인과 저 남자 사이에는 보다 더 특별한 것이 있을 거다!’


  물론 처음부터 브루스 웨인의 뒤를 캐기에는 부담이 상당했으므로 켈리는 보다 만만한 기자의 흔적을 우선 살폈다. 그는 데일리 플래닛 소속의 클락 켄트라는 인물이었는데, 외계인을 비롯해서 메트로폴리스에 뉴스거리가 들끓던 시기에 채용된 많은 기자 중 한 명으로 보였다. 켈리는 그가 주로 특파원으로 활동한다는 사실과, 하필 한 행사장에서 브루스 웨인과 첫 만남을 가진 후 고담시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게다가 브루스 웨인은 클락 켄트가 그의 눈앞에 등장할 때마다 그를 무시하지 않았다. 기자들을 상대할 때는 누구보다 고고해지는 황태자를 몇 번이고 본 켈리는 절로 브루스 웨인과 매번 눈빛을 주고받는 남자를 주시할 수밖에 없었다.

 

  켈리는 남몰래 펜대를 굴리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모르지. 브루스 웨인은 가진 것이 남다른 만큼 취향도 특별할 수도 있잖아.’


  그리고 그녀의 직감이 맞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그녀가 엿듣는 두 사람의 대화가 다채로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어제는 유독 일이 많았던 걸로 압니다만. 하루쯤은 집에서 쉬어도 괜찮지 않습니까, 웨인 씨?”

  “평소와 그다지 다르지도 않았소.”

   

  켈리는 갑자기 자신의 귀가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무도 어젯밤 브루스 웨인의 스케줄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데, 저 메트로폴리스의 기자는 놀랍게도 웨인의 사적인 밤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켈리는 이 순간 자신의 앞에 타자기가 없다는 게 진심으로 아쉬웠다.


  “그래도 무리하진 마시길 바랍니다. 웨인 씨는 중요한 분이잖아요.”


  웨인의 눈썹이 한 번 들썩였다. 켈리는 그 모습이 너무도 놀랍고 신기하여 브루스 웨인과 그만 눈을 마주칠 때까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과 클락 켄트의 미묘한 친밀함은 그야말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터져 나왔다. 심지어 켄트 기자는 웨인의 차를 잠깐 붙잡기도 했다.


  켈리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타블로이드지 기자의 필수품이라고 불리는 한 쪽짜리 원통형 망원경을 재빠르게 눈에 갖다 붙였다. 창문을 반 이상 내린 브루스 웨인이 켄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웨인은 운전석에 앉아 있었으니 그것은 당연한 구도였지만 켈리는 묘하게 그 장면이 의미심장하다는 생각을 했다. 천하의 브루스 웨인이 올려다보는 남자라니! 가십지 기자의 감성이 부글부글 들끓었다.


  클락 켄트는 사실 멀리서도 그러한 그녀의 불타는 투지를 느끼고 있었다.


  “그 기자한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해 주는 게 어때요?”


  클락이 창문을 내다보면서 말했다. 클락의 눈에는 별장 앞을 서성거리는 켈리 알렌이 또렷하게 보였다. 그렇지만 그녀가 보이지도 않고, 관심도 없는 브루스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내가 왜?”

  

  “연말이잖아요. 저런 사람이라 하더라도 약간의 호의는 받을 수 있는 시기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우리 둘 사이를 광고하라? 차라리 슈퍼맨과 배트맨이 화해 끝에 서로의 집을 드나드는 사이라는 기사가 나는 게 낫겠군.”


  “정말로요?”


  브루스는 대꾸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대뜸 클락에게 안경을 내밀었다. 


  “안경은 왜요?”

  “쓰고 싶으면 내 앞에서 써. 내가 곧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클락은 잽싸게 안경을 받아쓰고 브루스의 뒤를 쫓아다녔다. 일도 많고 인기도 많은 고담시의 유명인사는 아침부터 외출 준비에 바빴다.  


  “…진심이에요?”


  “저런 싸구려 기자보다는 당신이 처음 보도를 하는 게 낫겠지. 나 오늘은 시간 없어. 그리고 내 앞이 아니라면 노트북 두드릴 생각도 하지 마.”


  다방면의 경험을 통해 클락이 언젠가는 자신이 마음먹은 일을 해낸다는 걸 깨달은 브루스는, 차라리 그가 눈을 빛내는 일에 관해서는 일찍 허락을 해주는 게 속이 편하다는 자신의 판단을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그가 실수를 한 것 같았다. 클락은 광고지 뒷장에라도 기사의 초안을 쓸 기세로 브루스의 옆을 따라 붙으면서 그의 표정을 관찰하고 목소리를 들었다. 


  “아무리 바빠도 아침은 먹고 갈 거죠? 사람이 밥은 먹고 일해야죠.”


  브루스는 하마터면 네 녀석은 사람이 아니지 않냐며 반문할 뻔했다. 


  오전에 거실로 내려오는 두 사람은 알프레드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되었다. 알프레드는 아직 따뜻함을 유지하고 있는 빵 사이에 알차게 칠면조와 야채, 토마토가 들어간 샌드위치를 가져왔다. 클락은 브루스가 일을 마치고 오면 적어도 5개의 초안은 보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브루스는 말없이 눈썹만 움찔거렸다.


  그렇지만 켈리 알렌의 이름으로도, 클락 켄트의 이름으로도 브루스 웨인의 사생활을 다룬 기사는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도시와 기업을 동시에 이끄는 지도자의 관록이란 근근이 기자 생활을 이어가는 외계인이 쉽게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Original Date 2015. 12. 18.



[BvS/클락브루스렉스] The Last Hope

- DC Movie Universe 2016. 6. 23. 15:33 posted by Jade E. Sauniere

쉴 새 없이 자신의 이론을 설파하고 있는 렉스 루터의 눈과 입술에서는 광기가 번들거렸다.


  “인간은 가망이 없어요, 웨인 씨. 누구보다 당신이 잘 알잖아요. 인간은 정직한 정의로도, 가슴 아픈 어둠과 공포로도 계몽되지 않아요. 다들 너무나 멍청하잖아.”


  브루스 웨인은 잠자코 렉스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한낱 망토 두른 외계인한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기고 있잖아요. 더 이상의 가르침은 소용없어요. 인류를 리셋해야지. 우리들의 눈과 정신을 흐리는 그 외계인과 함께 말이에요.”


  렉스가 브루스의 어깨를 잡고 그의 귓가에 부드럽게 속삭였다. 브루스 웨인의 사고는 너무 지쳐서 작동하기를 포기한 것만 같았다. 브루스는 자신의 절망을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절망을 믿자 모든 게 진실로 변모했다.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Clerk Kent/Bruce Wayne and Lex Luthor

- Written by. Jade


The Last Hope



  한 무리의 가족이 지하도에서 길을 잃은 채 숨을 헉헉댔다. 그들은 여태껏 살아오면서 지하도를 걸어본 적이 없던 데다, 목숨이 걸린 급박한 상황이 웅웅대는 소리와 함께 밀려오자 완전히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가장 가까운 코너에 숨었다. 지하도는 세 갈래로 뚫려 있었으니 말하자면 그 가족은 자신들의 일생을 3할 남짓의 확률에 건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추격자는 언제나 그랬듯이 확률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자였다.


  기관총을 든 브루스 웨인이 내는 소리는 작지만 파괴적이었다. 그는 따라오는 무리들에게 눈짓으로 모든 갈래길에 총알을 쏟아 부을 준비를 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고글을 쓰지는 않았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눈동자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어쩌면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가 말없이 총을 들었다. 그림자 속에서 여린 생명이 눈물을 지었다.


  땅 밑이 울린 건 그 순간이었다.


  브루스의 안면이 경련하더니 그는 곧장 울림이 퍼진 근원지로 방아쇠를 당겼다. 기관총이 토해내는 탄환들은 냉정하게, 또한 집착적으로 바람을 꿰뚫으려 했다. 그때 브루스의 육체는 어느 숨구멍에서 피를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만 많은 이들은 그것을 변모한 황태자가 뿜어내는 광분의 일종이라고 여겼다. 사실 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다. 


  붉은 망토가 한순간 브루스의 시야를 가렸다. 총이 그의 손을 벗어났다.


  “도망가요!”


  숨어 있던 가족들은 그 말이 자신들을 위한 외침인 걸 깨닫고 부랴부랴 달렸다. 추격자들은 눈치껏 흩어지려고 했으나 붉은 망토가 그들의 머리를 덮고 의식을 끊어버렸다. 우왕좌왕하는 발자국 소리들이 차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브루스 웨인의 진정한 적은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는 한 손으로는 기관총을 줍고, 다른 손으로는 칼을 뽑았다.


  브루스가 울부짖으며 슈퍼맨에게 달려들었다.





  브루스 웨인은 어김없이 온 몸이 땀으로 젖은 채 잠에서 깨어났다. 아무리 강력한 수면제를 투약해도 되풀이되는 악몽의 굴레를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는 침대 위가 아니라 하루 종일 땅바닥에 있던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마스 웨인의 심장을 찢고, 브루스 웨인의 인생을 조각낸 총성이 마지막까지 브루스의 귓가에 붙어 있다가 겨우 떨어져나갔다. 그는 악몽이 자라는 침실을 벗어났다.


  “오, 오늘도 잠을 잘 못 잤나 보네.”


  찻잔을 휘젓던 렉스 루터가 브루스를 보고 말했다. 렉스는 자신이 마시는 커피나 차는 꼭 제 손으로 타야만 만족하는 성미의 소유자였다. 렉스는 티스푼을 흔들며 브루스에게 무언가를 마시겠냐는 물음을 보냈다. 브루스는 고개를 저었다. 


  “어제는 특별히 잠 좀 잘 자라고 약효가 더 센 걸 줬는데 안 맞았나 봐요. 미안하게 됐네.”

  “…됐어.”

  “커피 마실래요?”


  브루스는 말없이 고개만 저었다. 누가 봐도 정신적으로 탈진한 듯한 안색을 띠면서 그는 유리잔에 냉수를 부었다. 렉스가 희미하게 웃는 낯으로 브루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렉스는 그가 슈퍼맨과 맞닥뜨린 날에는 평소와는 다른 수면제를 주었는데, 이번에는 그 약이 브루스를 제대로 괴롭힌 모양이었다. 렉스는 미소를 참지 못하며 티스푼을 빨았다. 


  하나의 반사 신경처럼 굳어지고 있으나, 실은 정교하게 설계된 비극의 반복 속에서 브루스 웨인은 절망과 분노만을 키웠다. 도시의 적이지만 동시에 도시의 영웅이기도 한 그 혁명적인 자리마저 지쳐 포기한 그에게 남은 것은 무성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렉스 루터에게 그것은 희열이었다. 렉스는 브루스 웨인의 비극이 중첩될 때마다 커지는 그의 힘이 너무도 짜릿해서 몸이 근질거릴 지경이었다. 곧 있으면 브루스는 슈퍼맨을 볼 때마다 눈앞에서 토마스 웨인이 쓰러지는 장면을 보게 될 수도 있었다. 렉스는 그 생각만 하면 언제든지 뜀박질을 할 수 있었다.


  “오늘은 당신이 힘드니까, 재밌는 일이나 할까요?”


  브루스가 눈꺼풀에 의해 반쯤 가려진 시선을 그대로 렉스에게 돌렸다. 정말이지 브루스 웨인은 외계인의 대항마로 훌륭하게 사육되고 있었다. 


  클락 켄트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사실들은 누구에게나 명백했다. 악의는 없었지만 클락은 브루스의 도시를 무너뜨렸고, 자립할 수 없는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게 만들어 브루스가 품고 있던 마지막 희망을 흩어 놓았다. 물론 거기에는 렉스 루터의 입김이 작용했으나, 클락이 브루스에게 저지른 일들은 고담시에 전설처럼 도는 웨인 가의 비극처럼 너무나도 뚜렷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클락은 브루스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그를 구해야 한다는 책임감만 느낄 뿐이었다.


  “어젯밤에 당신이 도련님을 만났다는 얘길 들었습니다.”


  알프레드 페니워스의 목소리였다. 클락은 묵묵히 브루스가 낸 상처를 옷을 내려 가렸다.


  “전보다 더 안 좋아지셨던가요?”

  “렉스 루터가 그를 끌어안고 있는 이상 그의 상태가 나아질 리는 없습니다.”

 

  클락은 마치 그러므로 브루스를 구출할 방법을 마련하는 게 좋겠다는 말투를 구사했으면서도 그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그러니 알프레드의 시선도 그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당신은 도련님의 과거 중 무엇을 가장 존중합니까?”


  클락이 상의의 단추를 잠그다 말고 뒤로 돌았다.


  “그게 무슨 뜻이죠?”


  “도련님에겐 아주 많은 과거가 있습니다. 그가 당신을 일종의 선의에서 오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 당신에 의해 그가 좌절당했던 과거, 당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누구나 동정하는 그의 과거까지. 당신은 그 중 무엇을 가장 존중합니까?”


  본래 클락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누구보다도 브루스 웨인을 구하고 싶을 사람을 눈앞에 두고 감히 그의 과거를 논하려고 하니 도무지 입술이 떨어지질 않았다. 클락은 결국 침묵했다. 한때 누구보다도 인간의 도덕성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그렇기에 그들에게 절망하고 그들을 탓할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인간이 가진 무게는 강철 같은 사지를 가진 클락에게도 버거웠다.


  알프레드는 클락의 표정을 신중하게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사람들은 당신을 인류의 희망이라고 칭하지요. 맞는 말입니다.”


  클락의 눈길은 미묘하게 알프레드를 빗겨가 있었다. 알프레드는 그에 개의치 않고 말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당신은 도련님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당신이 도련님의 희망을 가져간 게 아니니, 당신은 충분히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어요.”


  그 시각 지상에서는 렉스가 컵에 남아 있던 물을 버리고 있었다.


  렉스에게는 깜찍하고 사랑스럽지만 동시에 안쓰러운 자신의 용병에게 하루쯤 휴식을 내줄 수 있는 배포가 있었다. 순수한 안정제를 먹고 잠이 든 브루스의 얼굴은 인류를 통째로 소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는 냉혹함의 절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렉스는 그 인간다움도 마음에 들었다. 이기성은 자기 자신만 고려하면 되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는 반면, 이타성은 포괄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아 오히려 혼란이 침투할 수 있는 구멍이 많았다.


  렉스는 브루스를 한 번 보고 방에서 나갔다. 슈퍼맨이 상주하고 있다는 인류의 마지막 생존처를 또 한 줄기 무너뜨릴 시간이었다. 




Original Date 2015. 12.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