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내용을 보시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 & Montgomery Scott

- Written by. Jade


Engineer's Log





Log 1


  23세기의 기술로 우주 내 도약이 가능한 함선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0일 남짓이었다. 물론 이후 각종 기능들을 테스트하는 데 배를 건조한 만큼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함선의 모양이 갖춰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50일이다.


  늘 대단할 정도로 짧다고 여겨졌던 그 50일에 스콧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엔터프라이즈호를 다시 만드는 일에 50일이 걸린다는 건 그만큼 그가 스타플릿이 던져준 임무에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평화와 안락함이 가득한 요크타운이 아닌 무시무시한 샌프란시스코의 본부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전범 한 명을 무찔렀더니 더욱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같은 공간을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스콧은 정말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을 쳐다보았다. 문틈 아래에서 하얗게 응결된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스콧이 그 문을 열고 싶지 않은 데에는 안쪽이 춥다는 것 말고도 너무나 많은 이유가 존재했다. 얼굴이 거칠고 과묵한 스콧의 친구조차도 이 일에선 멀어지고 싶다면서 요크타운 어딘가에 숨어버렸다. 스콧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카드키를 바라보았다. 영광스럽게도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스타플릿에서도 몽고메리 스콧 한 명밖에 없었다.


  스콧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면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트레이닝을 잘 받은 장교가 10명쯤 있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 고맙게도 스콧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스콧은 김이 서린 내부마저 이겨내고 윤곽을 드러낸 73개의 캡슐들을 무겁게 쳐다보았다.


  스타플릿은 하필 전범들의 수용소를 고칠 수리공으로 스콧을 골랐다. 이에 스콧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승무원들의 반응은 몹시도 뜨거웠다. 커크는 막말을 쏟아냈고 스팍은 함선이 파괴되는 위기와 생명의 위협을 간신히 지나온 장교에게는 충분한 육체적 및 정신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으며, 맥코이는 인체에 해가 되지 않지만 아주 요란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은 아주 많다며 스콧에게 귀띔했다. 스타플릿은 단 한 마디로 승무원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스타플릿 최고의 엔지니어 자리를 다투면서 강화인간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한 바 그들에 대한 환상을 품지 못할 인물이 스콧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스콧은 극저온 캡슐들이 보관된 창고에 서 있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스콧은 말없이 컴퓨터를 켰다.





  ―…그게 다인가? 기계가 낡아서 그런 거라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 캡슐들은 3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진즉에 망가졌어야 하는 물건들이에요. 이 시대에 캡슐과 맞는 부품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수리도 여의치 않습니다. 차라리 캡슐을 새로 제작하는 게 나아요."


  스콧은 개인 트랜스포터 장비에 오를 때 이미 예상했던 결과를 읊고 있었다. 극저온 캡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들도 너무나 오랜 시간을 견뎠다. 사실 이런 경우에서 엔지니어들은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이 배운 학문은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캡슐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하네. 그 때까지는 캡슐들의 동결 시스템은 작동해야 해. 그렇게 만들 수 있겠나?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완벽한 수리는 불가능합니다. 전처럼 동결 온도를 유지하려면 물리적으로 냉매를 넣는 게 가장 안전할 겁니다."


  알아보도록 하지. 


  그 말과 동시에 스콧은 소리 내어 숨을 뱉으려다가 급히 입을 붙잡았다. 통신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그 자의 캡슐에는 문제가 없나?


  스콧은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질문을 이해했다. 


  "다른 것들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이전보다 온도가 올라가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른 강화인간들도 그 온도에서 생명 반응을 보여주고 있진 않아요. 아직까진 버틸 수 있어요."


  알겠네. 그 부분은 특히 신경써주길 바라지. 그리고 앞으로 일지 형식으로 캡슐의 점검 상태를 기록해놓으면 네트워크를 통해 이쪽에서 확인하겠네. 수고하게. 


  화면이 꺼졌다. 스콧은 목구멍 아래에서 틀어막혔던 숨소리를 시원하게 흘렸다. 그의 호흡은 희미한 연기를 피우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스콧은 의자를 홱 돌리며 일어났다. 그는 맨 앞쪽에 놓인 캡슐을 마주본 자세로 멈춰 섰다.


  얄팍한 얼음이 맺힌 투명한 외관부를 통해 보이는 콧대와 입술이 있었다. 스콧은 그 선명도가 이전에 비해서 얼마나 옅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화인간들을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봉인되는 일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스콧은 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이기도 한 칸 누니엔 싱의 불완전한 실루엣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캡슐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때 칸은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Stardate 2262. 58


  캡슐 내부의 온도는 영하 180도였다.


  여전히 한기라는 단어로는 아우를 수 없을만치 냉혹한 환경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한 강화인간의 세포가 꿈틀거렸다. 고작 16도가 달라졌을 뿐인 혹한과 혹한의 변화를 기어코 감지한 육체는 소리 없이 한 번 펄떡였다. 하지만 캡슐 안은 여전히 추웠다. 고도로 섬세하게 빚어져 같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그 완성도를 자랑했던 자질이 발생되기에는 일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도는 영하 179도로 내려갔다. 강화인간은 일어날 수 없었다.


 칸 누니엔 싱은 자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깨어나고 있었다.





  커크는 스콧이 연락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통신을 받았다. 그는 스콧과 하나된 마음으로 엔터프라이즈호의 위대한 기관실장을 전범 수용소로 유배 보낸 스타플릿 간부들을 한참 욕해준 뒤에야 스콧의 안부를 물었다. 스콧이 할 말은 '목숨은 잘 붙어 있고 무지 춥네요' 정도 뿐이었다. 커크는 50일 내내 스콧이 잡혀있는 일은 없도록 힘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다행스러운 사실이 있다면 커크가 즉시 스타플릿 제독들과 담판을 벌이지 않아도 잠은 원하는 곳에서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스콧은 오늘의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모니터에 일지 프로그램을 띄워놓았다.


  "어, 으음…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1일."


  스콧은 자신이 빚어낸 표현이 낯설어 눈썹을 찡그렸다.


  "시설에 와서 극저온 캡슐을 처음으로 점검했다. 짐작했던 대로 캡슐의 하드웨어가 노후화되면서 핵심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었다. 꼭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볼 수야 있겠지만 고쳐야 하는 캡슐이 73개나 되니, 냉매를 억지로 주입해주지 않으면 한창 내가 수리를 하고 있는 도중에 깨어난 강화인간들이 내 등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일단 나는 엔지니어지 화학자가 아니라서 냉매에 대한 부분은 부탁을 넣어 놓았다. 스타플릿은 캡슐의 온도가 너무 많이 떨어졌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불렀지만 기록을 비교해본 결과 이전의 정상적인 온도와는 최대 15도가 차이났다. 그러니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수준은 아니었다는 거다. 일단은 하루에 4번씩 온도를 체크하려고 한다."


  술술 일지를 녹음하던 스콧이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윗사람들은 아직 그들을 더 재워놓고 싶은 모양이다. 캡슐이 새로 제작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천 년은 지나야 깨어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스콧의 입이 굼뜨게 움직였다. 스타플릿 간부들이 확인하게 될 일지에 사견을 집어넣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고가 아닌 일지를 작성하는 자들은 탐험가나 역사가이지 타인의 가치관을 두려워하는 족속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옳다거나 잘못 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지 종료."


  스콧이 모니터를 껐다. 극저온 캡슐은 지속적으로 구동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시끄러운 전자기기 하나가 꺼지자마자 내부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스콧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단부에 형광빛 표식을 단 캡슐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위급 상황 시 동일하게 생긴 캡슐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분자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 같아 스콧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들을 챙겼다.




* * * * *



Stardate 22**. **


  칸은 소리를 들었다.

  그가 들은 첫 번째 소리는 어떤 암호가 담긴 주파수나 의미가 담겨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칸은 몸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로 자신이 의식을 되찾아버렸음을 깨달았다.

  의식이 활성화되는 느낌이 갈수록 뚜렷해지자 칸은 문득 현재의 날짜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30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도 몰랐다. 칸은 자신이 또 얼마나 오래된 유물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답답해했다.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6일."

  단서는 또 청각을 통해 들려왔다. 칸은 목소리의 주인을 추리하기에 앞서 날짜부터 헤아렸다. 2262년, 자신이 잠들고 나서 고작 3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이 확실해졌다. 벌써부터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여 소화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이 벌써부터 몇 가지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칸은 그것들을 다 제쳐두고 목소리 자체에 집중했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는 앞서 들었던 엔지니어 로그라는 말도 곱씹었다. 금세 정답이 도출될 것 같았다.

  "오늘은 맥코이 소령이 강화인간들의 심층적인 조사를 하기 위해 다녀갔다."

  칸은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맥코이도 현재 캡슐이 유지하고 있는 온도에서 생명체가 깨어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그의 일은 그것으로 다 끝나는게 아니란다. 의사 양반도 고생 좀 하실 것 같다."

  그가 내뱉는 특정한 어구들과 독특한 음색이 칸의 머릿속에 충분히 저장되었을 때 칸은 정답을 얻을 수 있었다. 캡슐 바깥에는 3년 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장교가 있는 것이었다. 칸은 기척의 정체 때문에 자신이 함선에 실려 우주를 유영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기 계속 있으니까 진짜 춥네. 이거 확인하시면 안에 난방기구 하나라도 들여놓을 수 있게 해주세요. 어우, 진짜."

  칸은 곧 자신의 가설을 폐기했다. 이곳이 엔터프라이즈호라면 남자는 '기관실장 일지' 라며 말머리를 열었을 것이었다. 칸은 지금도 재직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3년 전까지만 해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남자와 함께 지상의 어느 공간에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확인한 캡슐들의 상태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맥코이 소령이 캡슐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 오작동을 일으킨 캡슐이 하나 있긴 했지만 긴급한 부분은 보수를 해 놓았다. 소령에겐 굳이 밝히지 않았지만 하필 그 캡슐이 가장 온도 변화가 심한 요주의 녀석이라서 신경이 쓰인다. 빨리 냉매가 도착해야 할 텐데, 생명을 얼리는 용도로 쓰일 만한 냉매가 지금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역사 속 유물이기 때문에 애를 먹는 것 같다."

  칸은 남자가 언급하는 캡슐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칸의 캡슐에 문제가 생겼다면 인간들은 그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상황을 설명할 확률이 높았다. 강화인간 중에 이름이 알려지고 역사에 기록된 자는 칸이 유일했다.

  이름에 관하여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던 칸은 불현듯 일지를 녹음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제임스 커크가 그를 스콧이라고 소개했었다. 

  "만약 그 캡슐이 기어코 강제 배출을 일으킨다면 정말 큰일이 날 것이다. 강화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회복 캡슐에서도 강제 배출이 벌어진다면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드시 쇼크를 겪게 된다. 몇 년 간 영하 196도에 갇혀 있다가 역시 영하 100도보다 훨씬 낮은 환경에서 강제로 밖으로 꺼내지게 된다면 아무리 우월한 생명체라고 해도 쇼크사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스콧의 음성이 살짝 아래로 꺾였다. 

  "그리고 오늘 맥코이 소령이 칸과 에디슨 함장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 있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찾는 자들. 소령의 말을 듣고 나자마자 나는 그것이 적응력의 문제보다 윤리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고 단정했었다.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자신이 처한 배경과 시대가 추구하는 목표라든가 사상에 대해 판단하고, 그것이 만일 옳지 않을 경우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에디슨과 칸 모두에게 그런 점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갑자기 노이즈가 줄어들었다. 변동을 거듭하던 내부 온도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 전부터 칸은 스콧의 말을 알아듣는 데 무리가 없었으나 덕분에 그는 더욱 쉽게 청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생각해보니 경우가 복잡했다. 에디슨은 아마 처음부터 스타플릿의 함장 역할을 맡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행성에 불시착하여 선원들을 잃고 구조마저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를 그 행성까지 보낸 스타플릿과 행성연방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분노한 것 같다. 이렇게 봐도 에디슨의 방향은 틀린 것이 맞다."

  에디슨이라는 자의 얘기는 생소했다. 칸은 일단 경청했다.  

  "반면에 칸은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제작된 인공적인 존재다. 또한 나는 그가 가진 어느 부분까지 인간의 설계가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인간이 칸의 파괴적인 사고에도 손을 댄 것이라면 내가 맨 처음 속단했던 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콧은 말이 없었고 칸은 입술을 움직일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했다. 불완전하게 정립된 화자와 청자와의 관계는 냉기와 침묵 사이를 몇 분간 떠돌았다.  

  "…하지만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이 또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모쪼록 그 놈이 쭉 잘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길고 깊은 문장은 발화되지 않았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한 사람이 기지개를 켜며 흘리는 신음이 들렸다. 창고에서 홀로 의식을 가진 자가 되어버린 칸은 그 지위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생각했다.




  19**년 **월 **일


  모든 생명들에게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순간순간이 기억으로서 뇌리에 남아도 그것이 최초이기에, 당장 그 생명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장 의미가 깊은 조각은 다신 헤집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지만 영원히 풀 수 없는 인생의 난제이기도 하다. 

  칸도 마찬가지였다. 그조차도 자신이 눈을 뜨고 나자마자 겪은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통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문제를 해체한 것은 첫 번째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탓이었다.

  신비로운 구경거리를 보듯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칸의 인큐베이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7분이나 일찍 일어났다는 말을 했었다. 칸은 일부러 그 인간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아마도 7분쯤 칸의 얼굴이며 빛나는 눈동자 따위를 꼼꼼히 관찰하고 있다가 다른 인큐베이터들에서도 반응이 오자 서서히 흩어졌다. 

  한 남성이 중앙에서 느닷없이 목청을 높였다. 칸은 그의 이름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 남자의 이름과 존재까지도 없애버린 칸은 훗날 그의 말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의 허영에 찬 연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칸의 머릿속에서 증오스러운 인간 남자가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들이 창조한 생명체들의 행복은 연구원들을,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부활이라는 대목에서 온 인간들이 열광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우고 나서 칸은 인간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제물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만 부활의 기적이 발생했다. 어느 날 내몰린 전장에서 아무런 무기도 건네받지 못한 칸은 자신과 그의 동족들이 부활의 위업에 숨겨진 그림자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은 가장 야만적인 형태의 폭력을 허락받은 것임을 체득했다. 

  그 뒤로 인간과 강화인간은 서로 증오했다. 300년의 간극이 칸에게는 너무나도 무용해서 그는 줄곧 인간을 증오했다. 그의 기억력이 무뎌지지 않았듯이 인간도 변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칸은 한 번이라도 자신을 비참하게 여긴 날이 존재하는 건지, 그것이 자연히 잊혀졌는지 혹은 억지로 감춰졌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STID/존본즈] Travelers in the Univers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6. 8. 31. 16:2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Travelers in the Universe




  모름지기 우주의 시선 아래 모든 생명들은 평등한 것이다. 존재들은 우주가 제공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이다. 자신들 각자의 시간과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장소를 여행하는 타고난 여행자들이다. 


  우주와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기술이 만들어진 시대에서, 그와 같은 오래된 진리를 곱씹는 자들이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창밖만 보다가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에 질리다 못해 충격을 받은 신참 승무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안정제를 고르고 있었다. 항해 이틀만에 2주는 못 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그 승무원에겐 의술의 힘이 절실했다. 맥코이는 작은 약병에 알약 몇 알을 나눠담은 뒤 복용법을 적은 스티커를 정면에 붙였다. 


  그 신참은 실제로 우주와 맞닥뜨리고 나니 그것이 예상처럼 낭만적인 곳은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긴장과 충격과 감수성이 뒤섞인 그는 그 외에 다른 이상한 말들도 해댔다. 은하수가 고작 새끼 손가락만한 크기로 보이는 우주에서 자신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여행자보다 더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둥, 신은 다른 게 아니라 그런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맥코이에겐 심리상담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우주는 그 어떤 존재도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함과 위압감으로 차갑게 모든 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병을 전해주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둔 맥코이는 의자를 돌려 창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여행자라는 비유는 생각 외로 더 적절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가는 여행지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여행지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어떤 여행자가 오지 않아도 그곳을 방문할 많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여행지는 존속되며 관광업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없었다. 여행자들이 주로 하는, 사진을 찍고 길을 걷고 여행지가 주는 경험을 곱씹어보는 일들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줄 뿐이다. 공간은 건재하다. 맥코이가 몇 번을 오가도 똑같기만 한 우주와 비슷했다.


  그러한 평범한 여행자에 자신의 위치가 고정되는 걸 원하지 않던 존재가 있었다.


  맥코이는 그를 떠올리면서도 특별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모두는 일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을 받고 태어난다는 일정한 시작점을 가진다. 그가 자신을 탐색하고 자신이 이루어내는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했던 것에는 그 시작점을 무효화시킬 만한 깊고 끈질긴 역사가 있었던 탓이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이제 그걸 알고 있었다. 각자의 것인 일생을 탐하면서 영원한 관조자인 우주에 군림하려고 했던 이의 과거를 이해했다. 


  맥코이는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개인용 패드를 켰다. 평화로운 항해 속에서 덩달아 평온했던 그 기계에 잠시 파문을 일으켰던 메시지를 켰다. 맥코이는 자신이 그걸 받았다는 걸 함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비록 소령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같았다.


  메시지는 5일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날 맥코이는 지구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를 통해 스타플릿 측에서 개발하던 초고속 소형 비행정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아마 우리 존재들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것일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하는 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지."


  맥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메시지의 마지막 줄을 소리냈다.


  여행자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여행지가 아니라 또 다른 여행자다. 길을 잃어 안절부절 못하는 누군가, 낯설고 험악한 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람, 소지품을 잃어버렸거나 다른 일행과 떨어지고 만 슬픈 여행자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여행자는 변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되찾고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도달한다. 그들이 딛고 선 땅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남길 수 없는 대신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맥코이는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창밖에 한 번 더 시선을 던지게 된 맥코이는 자신의 생각을 확정했다. 우주는 우주 자신의 모양을 이리저리 바꿀 뿐 정작 우주를 살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을 떨치지 못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지난 항해에서도 입었던 제복을 입고 의무실에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쾌활한 함장의 지시에 따라 유영을 거듭하고 있고 수많은 승무원들이 함선을 떠나지 않았다.


  맥코이는 창문에 손가락을 가까이 대고 사선으로 그어보았다. 당연히 우주와 세계는 갈라지지 않았고 경계도 생성되지 않았다. 맥코이는 만족했다.


  한동안 조작하지 않은 패드가 꺼졌다. 여행자는 새로운 여행자가 결정한 여정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아마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연락을 할지도 몰랐다. 그도 이제는 그런 행동을 실천해보는 법을 배웠다. 우주의 여행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맥코이는 약병을 들고 의무실을 나섰다. 여행지는 침묵으로써 자신을 제공했다.




Universe and U by KT Tunstall



'- Star Trek Into Dark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ID/존본즈] Betraying the History  (0) 2015.02.11
[STID/존본즈] The Game of Telling Truths  (0) 2015.02.11
[STID/존본즈] Relativity  (0) 2015.02.11
[STID/존본즈] The Crime  (0) 2014.06.21
[STID/Khan] The Earth of Pain  (0) 2014.06.11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2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5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현대를 기준으로 손꼽히는 진보의 첫 번째 사례가 달 표면에 사람의 발자국을 찍은 것이라면, 이어 두 번째라 할 만한 사건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캡슐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두 손을 모으거나 옆 동료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캡슐이 무사히 열리길 바라고 있었다.


  켈빈 연구소도 처음엔 그러했다. 그곳은 전범 배양 시설이 아니라 자본금을 대는 정부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평범한 국가 부설 연구소였다. 연구원들의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이 캡슐의 표면에 어렸다. 누군가가 캡슐이 배출되는 소리에 맞춰서 마개를 딸 샴페인을 들고 왔다.


  자동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캡슐이 하나씩 꿈틀댔다. 샴페인을 든 연구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곧 가장 왼쪽에 있는 캡슐부터 하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샴페인의 마개가 퐁 위로 튀어 올랐고 연구원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잔을 나눠주며 샴페인을 즐겼다. 칸의 탄생은 그토록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였다. 


  캡슐에서 태어난 인조인간들은 눈을 뜨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 작명에 조예가 있다면서 일을 자청한 4명의 연구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고 하는데, 칸이라는 이름은 시뮬레이팅에서 나온 이미지가 상당히 고압적이기에 생겨났다. 


  “어때, 동의해?”


  연구원이 칸에게 물었다.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칸은 그 당시에 8천 개의 영단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다지.”


  연구원은 입을 한 번 내밀고 말았다. 칸의 그 대답이, 그의 눈에는 모두가 명암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인간에게 특별히 상냥하거나 고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켈빈 연구소가 영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만든 캡슐은 36개였고 칸을 포함한 36명의 인조인간들은 이를테면 1차 테스터들이었다. 연구소 측은 3개월간 그들을 인조인간 그 이상의 강화인간으로 제련한 뒤 작업이 성공적이면 한 차례 더 캡슐을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창 각국의 언어를 학습하고 있는 인조인간들은 자유 시간에 독서를 할 것을 권장 받았다. 연구원들은 일부로 연구소 곳곳에 작은 책장을 설치해 책을 깔아두었고, 비판적 사고력이 다 발달하지 않은 생명체들은 꽤 고분고분하게 연구원들의 권고를 따랐다. 


  칸은 3일 만에 개수가 늘어난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하얀 연구원들이 칸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칸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연구원들이 잡담을 하는 걸 들었다. 그들은 칸을 볼 때마다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눈동자에 관해 한 마디씩을 남기곤 했는데, 그들은 주로 칸을 우주의 무엇과 자주 비교했다. 


  마침 천체를 다룬 책이 새로 책꽂이에 입성한 참이었다. 칸은 그것을 펼쳐 읽었고 1시간 뒤 독서를 그만두었다. 저자가 객관적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인간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에도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온갖 주관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연구소에 있는 가장 큰 창문으로부터 하얀 햇빛이 들어왔다. 칸은 굳이 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조각들은 어차피 전부 단조롭기 때문일 것이었다.





  “…색깔을 보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재판관은 지극히 인간답게 질문했다. 단순히 두 개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색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사실 엄격한 재판관이라면 지양해야 할 태도였겠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일반인에 불과했다. 구경꾼들은 소리 없이 재판관의 질문에 그들의 의문점을 실었다. 


  “그렇다.”

  “어째서?”

  “세계는 흑과 백인 게 더 잘 어울리니까.”


  재판관은 그만 품위 없이 벙찐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신을 추앙한다면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회를 짓기도 하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지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인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나 같은 존재를 만들어서 생명 창조라는 영역에 도전하는 게 또 인간들이지. 이런 모순에 장식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가장 깨끗한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 고작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었을지 모르나 나에겐 일종의 정화 작업이었다. 본질을 흐리는 것들은 닦아내야지. 너희도 틀린 건 수정을 거치지 않던가.”


  인간들은 칸의 언행에 분노했다. 당장 저 파렴치한 전범에게 돌덩이를 던지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울타리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팔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레너드 맥코이만 칸 누니엔 싱처럼 미동 없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맥코이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는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갈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장은 조금 때가 타긴 했지만 아이보리 빛을 띠고 있었다. 재판관이 팔을 올리고 있는 책상과 칸이 앉아 있는 단상은 명암과 채도 모두가 다른 색깔이었으며, 격식을 갖춘다고 검정색 옷을 빼입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느 한 구석은 다른 옷들을 입고 있었다. 맥코이는 아무래도 그것들이 모조리 획일화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맥코이가 그렇게 가장 아름답지 못한 오류를 실감해보려 애쓰는 동안 전범의 진술이 이어졌다.


  “연구원들은 처음엔 몇 번 내 안구를 교체했다. 그들과 같은 걸 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존재들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내가 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내 태도만큼이나 그들이 노력한 결과도 완고하게 바뀌지 않으면서 연구원들은 점차 지쳐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 2차 생산에 돌입하기 전에 날 폐기하려고 했다.”


  재판장은 꼭 칸의 강연실이 된 듯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진 못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흥미가 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은 색깔 있는 천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고와 다양한 차원에서의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인간들이 나를 만들면서 이루고자 했던 가치는 이른바 나의 결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연구원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완벽하게 잘못된 존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날 태우기 위해 지펴 놓았던 불을 역이용했다.”


  맥코이는 켈빈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다는 뉴스를 읽었던 걸 기억했다. 그 날 오후에 영국은 켈빈 연구소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 발표했고 최초로 칸 누니엔 싱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졌었다.


  칸의 입이 다시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으로 나오니 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더군. 내가 인간들이 결점이라고 여기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반쯤 무력행사를 강요받았다. 나는 박멸당해야 했다. 정신 나간 색맹이었으니까. 그걸 뒤집으면 나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있는 거였으니 나는 싸움을 수락한 것이다.”


  “설마 전쟁을 본인의 정당방위라고 포장하고 싶은 건가? 인간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들을 죽였다고?”


  “당신이 나에게 일을 벌인 경위를 물었으니 그에 맞는 대답을 한 거다. 내 행동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앞서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왈칵 뒤집어졌다. 이번엔 바리케이드들의 노력에도 진정되지 않아 재판관이 법봉을 휘둘렀다. 


  “조용, 조용!”


  법봉이 다섯 번 책상을 꽝꽝 내려 친 다음에야 주변이 가라앉았다. 재판관은 눈썹을 엄하게 굽히고 피고를 쳐다보았다. 반면 칸은 한 번도 재판관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럼 왜 여기서는 항복한 거지? 이 땅에 오니 색깔이 보이기라도 했나?”

  “그렇다.”


  그러면서 칸은 손을 꺼내지 않고 눈으로 맥코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저 인간을 목격한 순간부터 내 업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멈춘 것이다.”


  맥코이에게 순식간에 조명을 다 넘겨버린 칸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맥코이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본 칸이 인상을 찡그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우쭐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칸이 보기에 맥코이는 그가 최초로 색의 혼란에 빠졌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낯빛을 띠고 있었다.


  그 날 재판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겨울의 궁전은 황량했다. 정원의 풀은 모두 죽었고 찬 기운을 내뿜고 있는 짙은 구름 때문에 출입구나 조각품, 분수 등은 본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곧 비나 진눈깨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칸은 거대한 캐논을 내리고 돌로 꾸며진 화단에 앉았다.


  대륙 중부의 겨울은 그가 제일 긴 시간을 할애했던 영국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안개가 자주 끼면서 생명력이 넘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지나치게 판이했다. 반사적인 분석 작용을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칸은 얼어붙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휘어지는 나뭇가지처럼 슬그머니 몸을 숙이고 싶었다. 


  칸의 얼굴이 까만 땅바닥과 가까워졌다. 그렇게 되자 칸은 땅의 진동과 그것이 전해주는 소음을 더욱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전차들이 궁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칸은 캐논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궁전 안에는 그가 밟거나 타고 오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칸은 정원을 벗어나 궁전 입구 앞에 서 있는 동상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차들은 그 성능이 뻔한 데다가 포신을 들어 올릴 때 굉음을 내는 멍청함까지 갖고 있었다.


  전차가 쿵쿵 달려왔다. 칸은 전차의 정면을 겨냥해 캐논포를 쐈다. 광선은 무척 아슬아슬하지만 대신 깔끔하게 포탄이 날아가는 부분만을 도려냈다. 전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칸은 캐논을 손에 쥔 상태로 동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전차들은 사이좋게 커다란 구멍을 나눠가졌다. 칸은 자신이 처음으로 내려앉게 될 전차의 위쪽에 다시 한 번 캐논을 날려준 뒤 자신의 몸을 통째로 내부로 내리꽂았다. 안에 있던 두 인간 군인이 삽시간에 절명했다. 칸은 뒤를 돌면서 그들의 기관총을 메고 캐논에 의해 뚫린 옆면을 이용해 곧바로 사격에 돌입했다.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던 군인들은 족족 이마에 총을 맞고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 칸은 그가 포구처럼 쓰던 자리를 통해 지상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투기가 굵은 구름덩이들을 뚫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칸은 묵묵히 캐논을 주웠다. 


  비행기의 아랫배 부분이 열리면서 미사일이 튀어나왔다. 칸은 왼쪽 어깨에 멘 기관총을 반동을 이용해 왼손에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미사일이 공중에서 조각났다. 더불어 미사일을 내려놓을 때 날개를 아래로 내려 살짝 비껴 비행하는 인간 조종사들의 전통적인 습성을 알고 있는 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캐논으로 다른 쪽보다 아래로 내려온 날개를 쏴 부러뜨렸다. 


  거짓말처럼 신속하게 전투기가 추락하며 궁전을 들이받았다. 하얀색 연기는 꼭 구름을 닮아 있었다. 촉촉한 자연의 상징과 핏기 어린 음울함 사이에 차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칸은 그렇게 세상을 인식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멎었다. 칸이 출력이 다 떨어진 캐논을 밟았다. 오늘도 그는 그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눈을 붙일 것이었다. 


  그 나날들이 가끔 지루했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기에, 칸은 지금 와서 온갖 종류의 혼돈을 끌어안고 있었다. 


  재판장이 닫히기 직전 재판장은 칸과 맥코이 중 누구를 특정하지도 않고 서로를 아냐고 물었다. 아마 재판장은 그것보다는 대체 상대가 다른 이에게 어떤 존재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칸은 그 숨겨진 맥락에 따라 맥코이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실상 칸은 맥코이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어 그를 ‘저 인간’이라고 칭할 만큼 그를 몰랐다. 


  멀리서 아득하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부르짖는 인파들의 외침이 전해져 왔다.


  레너드 맥코이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잠깐 창밖을 보다 커튼을 쳤다. 맥코이가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할 건 칸 누니엔 싱의 목숨을 논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아무도 레너드 맥코이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코이는 무언가를 찾는 노력이라도 하고 싶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온통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서적들로 가득했다. 맥코이는 입술에 힘을 주고 그곳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Nothing Else Matters by David Garrett

Originally sung by Metalica


Original Date 2015. 11. 07.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1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4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Nothing Else Matters Piano & Cello Cover by Brooklyn Duo

Originally sung by Metalica



  레너드 맥코이는 끝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걷어차이던 라이플이 끝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물건과도 같은 그 라이플을 만지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라이플은 몇 초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닥에 남아있던 가장 적나라한 전쟁의 흔적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 존재가 차근차근 인류를 몰살해가던,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횡단의 종착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물의 잔해들을 치워내고 잠시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으로 무너지지 않은 금문교가 서 있었다. 맥코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졌으나 한때는 너무나도 사악했던 라이플을 바라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커다랗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바라보던 모습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맥코이는 그 다리가 어떻게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동안 다리를 보고 있던 맥코이가 어깨와 목을 풀었다. 그는 의사였으나 부상자는 거의 없고 사망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라 그만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맥코이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부서진 건물들과 씨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속보에요, 속보! 모여보세요!”

 

  누군가가 종이 한 장을 급하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맥코이는 약간 느리게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무슨 일인데?”

  “그 미친놈의 재판 일정이 벌써 잡혔대요.”

  “남아있는 법원이 있었나?”

  “전범한테 뭐 얼마나 거창한 법원이 필요하다고. 대충 재판장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사형일 텐데.”

  “그런데 그 놈은 그렇게 금세 항복을 해 버렸나 봐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몰라. 아무튼 재판은 언제래요?”

  “이틀 뒤요.”


  호들갑스럽게 가져온 정보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칸 누니엔 싱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해서 화제는 아주 빠르게 통일되었다. 


  맥코이는 혼자 맨 처음 소식을 물어왔던 사람에게 접근했다. 


  “가져오신 종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는 맥코이에게 종이를 넘겨주고 곧장 파렴치한 전범을 깎아내리는 일에 동참했다. 맥코이는 사람들을 등지고 종이를 읽었다.


  급하게 찍어낸 공문 같은 종이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칸 누니엔 싱으로 알려진 전범을 엄격하게 구금하고 있으며 이틀 뒤 그에 대한 공개 재판을 행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인간이 살고 있는 대륙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존재가 어떻게 항복을 하게 되었는지, 그가 항복한 자리에 누가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다. 


  맥코이는 그때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의사로서 바깥에 나가 있었다. 과연 단신으로 여러 국가들을 소멸하고 다녔던 자의 무력은 악마적이었다. 의사가 굳이 살리려 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는 사람들일수록 다시 한 번 살해되는 자비 없는 현장에서 맥코이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비무장인 그가 살 수 있는 확률은 어차피 낮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영국과 반대 방향의 땅에 살고 있었던 덕택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맥코이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렇게 맥코이는 얼핏 초연한 듯하나 사태를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후퇴! 후퇴해!”


  전범은 검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전진했다. 맥코이는 전장에 나간 의사면서 한 명도 살리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때마침 총성이 울렸고 맥코이는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도 맥코이의 몸은 멀쩡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맥코이는 눈을 떠야 했다. 그가 눈을 뜨는 동안 도시는 참으로 조용했다. 더 이상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고 총탄도 발사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전범이 무기를 내린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저절로 탄식 같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당신, 지금….”


  전범은 맥코이가 서 있는 쪽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맥코이는 급히 물러나려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전범은 경악하고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평범한 의사일 뿐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전쟁의 일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맥코이는 전범을 응시했다. 그는 새하야면서 동시에 새카맸다. 그리고 진리를 본 회의주의자, 혹은 신을 본 무신론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맥코이만의 감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전범이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용감하게 팔을 뻗어본 것은 그러한 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전범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이 더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맥코이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의사가 되어 누구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전범은 맥코이의 정체를 물으며 무기를 놓았다. 하얀색 가운이 그를 부드럽게 가려주듯이 휘날렸다.


  맥코이는 그 나름대로의 충격을 받고 정지했다. 


  멀찍이서 최후의 전선을 짜려던 군이 웅성거렸다. 무시무시한 전범이 의사 가운을 팔에 걸친 남자 한 명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군인 하나가 돌격을 제안했다. 비로소 전범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는 걸 안 인간들이 그를 덮쳤다. 


  즉 칸 누니엔 싱은 레너드 맥코이를 직면한 순간부터 무력해진 것이었다.


  맥코이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칸의 이상 행동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공개 재판장에 가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아직 멀쩡한 쓰레기통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레너드 맥코이?”


  군용 재킷으로 자신이 관료임을 증명하고 있는 남자가 맥코이에게 손짓했다. 맥코이는 당국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수정했다.


  “잠깐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켈빈 연구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칸 누니엔 싱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그 외에 켈빈 연구소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곳의 연구원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연구소의 관계자들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은?”


  맥코이는 그쯤에서 발끈했다. 


  “없습니다. 이거 뭔가 취조당하는 기분인데요, 왜 자꾸 저에게 켈빈 연구소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10년 넘게 의사로 일해 왔어요. 런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단 말입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자신의 중얼거림도 질문자의 물음에 포함이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아뇨.”

  “그 반대의 경우는요? 칸이 당신에게 말을 걸었었습니까?”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했습니까?”

  “아니요.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워서 대답할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왜 그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는지 짚이는 점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에 관하여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그 질문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는 칸이 자신을 보고 공격을 멈췄다는 결과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맥코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문을 품어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본인도 왜 자신이 칸을 멈추게 만들었는지 모르는군요.”

  “맞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안전보장 위원회의 위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맥코이 씨는 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이틀 뒤 열리는 재판에 꼭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호출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죠. 나가셔도 좋습니다.”


  맥코이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고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는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지만, 뒤이어 맥코이는 상념에 사로잡혀 느릿하게 걸었다.

  




  임시 재판장으로 채택된 곳은 한때 창고형 매장의 일부였던 건물이었다. 재판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주최 측은 다소 품격이 떨어지긴 하나 최대한 사람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곳에 재판장을 꾸밀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조금 못 되는 시간동안 철제 진열대며 남아있는 상품들이 치워졌고 의자와 작은 단상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성한 의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일반 관람객들은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주최 측은 사람을 바리케이드처럼 세워놓고 의자가 마련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을 구분했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형편없는 재판장이었으나 맥코이는 차마 혀를 차진 못했다. 범죄자는 한 번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대단히 문명화되고 이성적인 사고는 오히려 박수를 받을 만했다. 맥코이는 재판장을 한 번 더 바라본 뒤에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는 맥코이를 의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무리가 웅성대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해는 되지만 불편한 광경이었으므로 맥코이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곧 재판관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말이 있은 뒤 5분이 지나자 검정색 가운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나타났다. 군중들이 환호했다.


  “사형!”

  “그 놈을 빨리 죽입시다!”


  바리케이드들이 군중들을 진정시키고자 바삐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힐끗했다. 귀한 의자를 배정받아서인지 그들은 꽤나 조용하게 눈으로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외치고 있었다. 


  “정숙하세요! 자, 피고 입장.”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칸 누니엔 싱은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걸어 나왔다. 그의 발이 내는 소리는 깨끗하고 위압적이었다. 칸을 인도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고, 칸은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모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자태로 피고석에 앉았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 몇몇이 진저리를 쳤다. 


  “기록을 위하여 피고는 이름을 정확히 대시오.”


  칸은 조잡한 질서의 주인공으로서 단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고요하게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칸 누니엔 싱.”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군중들이 또 괴성을 내지르려다 멈칫했다. 칸은 재판관보다 더 곧고 위엄 있는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맥코이는 그걸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는 칸이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칸은 맥코이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피고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를 밝히시오.”


  칸은 입을 열기 전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보통 인간들은 그것이당연한 생리적 미동인줄로 알았지만 칸은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향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그리고 칸이 레너드 맥코이를 시선의 중앙에 두고 눈꺼풀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세상의 온갖 색채들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칸이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다.”


  맥코이는 입술을 닫았다.



Original Date 2015. 11. 06.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Writing's On The Wall Violin Cover by JuNCurryAhn
Originally sung by Sam Smith
 

  ‘다름’이라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틀림’과 혼동되어왔다. 그 유구한 착각은 어쩌면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종의 감별 시험인지도 몰랐고, 이성이 발전하면서 넘어야 할 하나의 과제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리라. 


  그토록 공평한 시험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지 않고, 마침내 칸 누니엔 싱에게까지 다름과 틀림 사이에 놓인 갈림길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27일째에 문제의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만들어진’ 존재로서 교육받아야 할 것이 아주 많았던 그가 30일간의 언어 습득 프로그램을 마치기 직전이었다. 칸의 과제를 들여다보게 된 인간 연구원은 그는 온갖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조인간이 자꾸만 사물의 색깔에 대해서 제대로 된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걸 수상하게 여겼다. 연구원은 왜 저 꽃의 색깔이 빨갛다는 사실은 무시하는지 물었고 칸은 그 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갈림길은 태동했다.


  아무도 칸과 같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시력 저하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 최고급 안구를 낀 다른 이들은 한 사물을 보고 그것의 색깔을 디지털 색상표에서 골라내기도 했다. 인간인 자들도, 인간이 아닌 자들도 그에 대해서 부지런히 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칸은 검고 하얀 숨을 내쉬었다. 그가 선 갈림길의 한쪽은 끝없이 하얗고 다른 한쪽은 끝없이 까맸던 것과 비슷했다.


  칸은 명암으로 인식되는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모두가 까만 길을 선택했다. 인간 연구원들이 보기에 칸은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었으며, 한 가지 측면만 빼고 칸과 거의 모든 게 같은 존재들도 조금씩 그에게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칸이 보기에는 다른 자들이야말로 세상의 건조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빚는 역설적이고 오만한 세계에 축복과도 같은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본질은 흑과 백이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칸이 그러한 결론을 내린 뒤에 이어질 수 있는 당연한 일들이 발생되었다. 그 어떠한 색과 만나더라도 타자를 없애버리는 검은 길에 들어선 이들이 중재될 방도는 없었다. 칸은 자신을 소각장에 집어넣으려는 인간 연구원들을 제치고 시설을 통째로 불태웠다. 이제야 학문적 지식들을 배워나갈 참이었던 인조인간들은 칸의 급격한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에게 외면당했다.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강령은 곧 타자에 대한 말살전으로 심화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 인공인간의 시선에서는 너무나도 처절한 사투였다.


  칸은 여전히 그 전쟁 속에 있었다. 


  그가 보는 건물들은 높이만 다를 뿐 색깔은 회백색으로 동일했다. 태양이 똑바로 서 있지 않아 몇몇 지붕과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그 건물들이 본질적으로 회백색이라는 사실을 없애버리진 못했다. 그것이 칸의 진실이었다. 그것에 대해 달리 표현을 하는 존재들은 틀렸다. 홀로 명암의 진리를 주창하는 칸에게 끝없는 승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그 고독한 부정이었다.


  칸은 조금씩 바닥에 끌려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라이플의 총구를 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라이플의 느릿한 움직임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라이플보다 더 더디게 움직였으므로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갈아 끼워졌던 그의 안구에 무채색의 증오가 모여 반짝거렸다. 칸이 라이플을 고쳐 잡았다.


  회백색의 건물들이 회백색의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미리 설정해 놓았던 타이머의 숫자가 바닥나 폭탄이 작동한 것이었다. 칸은 사실 자신이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곳에서, 몇 번이나 그래왔듯이 혼자서 그 버석한 우매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목표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와중에 자신을 응원이라도 해 주듯이 도시가 무너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상 칸에게는 볼품없이 서 있던 기둥들이 사라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에 그는 자신이 지나간 도시들은 전부 무너져 내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둥그런 연기와 먼지가 뭉쳐서 칸에게 더 짙은 회백색을 제공했다. 칸은 이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있는 곳은 바다와 가까운 항구 도시라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덕분에 회백색은 금세 날아가 버렸고, 칸은 너무나 낯선 파란색을 목격해버리고는 그도 모르게 라이플을 조금 아래로 떨어뜨렸다.


  또렷한 파란색 점이 힘차게 회백색의 장막과 검은 그림자를 헤치고 칸에게 다가왔다. 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사격했다. 총성은 건물이 부서지는 굉음에 묻혔지만 칸은 탄환이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총을 다시 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라이플로 너무나 가까운 대상을 노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식은 당장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부서진 도시의 가루들이 거의 다 날아갔다. 칸의 시야는 전례 없이 깨끗해졌으며 또 혼란스러워졌다.


  파랗기만 하던 것이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고, 그러면서 더 많은 색깔도 함께 갖추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양의 갈색과 검은색이 있었다. 은색이 신기루처럼 반짝거리기도 했다. 은은한 살구색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파란색이 칸의 눈을 찔러댔다. 비정상이라는 끊임없는 판단에도 의연했던 그의 안구는 그것에 몹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칸은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 더 이상 무너질 건물이 없었다. 쌓이고 다져져 하나의 법칙이 될 뻔했던 경험이 최초의 반례를 맞았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고독의 시간은 끝났다. 칸은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마주했다. 그는 파란색이 너무나도 강렬한 존재였다.


  라이플이 고개를 숙였다.


  ‘다름’과 ‘틀림’이 그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 혼동되면서 심지어 반목해 온 것은, 한 쪽이 절대적인 명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명분은 그것의 허점을 인식해야 할 집단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일 때가 많다. 


  칸은 그의 세상이 무채색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쟁을 끌어 왔다. 그는 세상의 색채를 틀리게 보는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가지일지언정 그것의 형태는 하나다.


  칸은 라이플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라이플이 목표를 맞추기에 최적화된 간격을 지났다. 회백색으로 분화된 덩어리들이 바람에 완벽하게 쓸려나갔다. 수없이 반복되는 사례로 보강되어 왔던 진실의 회백색이 칸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라이플의 총구가 거의 바닥에 박힐 지경임을 알아본 파란빛의 존재가 움직였다. 타자를 마주할 때 간격은 좁으면 좁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칸은 그가 다가오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을 보았다. 그 검은색은 다른 색들과 함께 있어서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칸에게 가장 익숙한 검은색마저도 그의 기반을 산산이 해체하고 있었다.


  충분히 칸과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파란 존재가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칸이 팔을 쭉 펴면 모자람 없이 닿을 수 있는 간격만이 남았다.


  칸은 팔을 뻗으면서 눈을 감았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온기가 칸을 눈 뜨게 만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것 같은 파란색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과, 낯설어서 더욱 다가가고 싶은 온순한 살구색과 정직하게 반짝이는 은색, 마지막으로 단순한 오차에 의해서 파괴의 위기를 면한 어느 다리의 금색이 칸의 온 몸을 덮쳤다. 칸은 그도 모르게 천천히 라이플을 놓았다.


  칸은 그 자신의 갈림길에서 드디어 고개를 한 번 돌릴 수 있었다. 자애로운 흰색이 그를 반겼다. 칸은 그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파란 존재의 한 팔에는 하얀색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Original Date 2015. 11. 05.



[STID/존본즈] Betraying the History

- Star Trek Into Darkness 2015. 2. 11. 11:1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Betraying the History

 

 

 

 

  건물이 통째로 경련하고 있었다. 사방으로 움직이는 듯한 벽에 갇힌 레너드 맥코이는 무거운 가구들을 잡으면서 휘청거리는 몸을 다잡았다. 그의 손이 허공을 내저으면서 의자가 빙글 돌았고, 등받이에 걸려 있던 하얀 상의가 밑으로 조금 처졌다. 맥코이는 끈질긴 몸부림 끝에 상의를 붙잡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통신기를 찾아낸 그는 책상의 모서리를 아슬아슬하게 움켜쥔 것을 신호 삼아 앞으로 튀어나갔다. 맥코이가 나가고 나서 땅의 포효를 가장하는 강렬한 진동을 이기지 못한 유리창이 터졌다.

 

  단단한 콘크리트로 둘러싸인 복도는 그나마 안정적이었다. 맥코이는 환상 같은 현기증을 느꼈다. 그의 다리가 사지에 남아 있는 모든 떨림을 흡수한 듯 바들거렸다. 맥코이는 이를 악물고 통신기의 플립을 열었다. 연결음이 공허했다.

 

  —망할!

 

  맥코이의 외침은 진동에 섞여 아련하게 흩어졌다. 맥코이는 달리면서 몇 번이고 플립을 젖혔다 닫으면서 누군가에게 닿으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다. 아무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맥코이는 신경질을 내면서 얕은 바지 주머니에 통신기를 구겨 넣었다. 이제 누군가 맥코이에게 전화를 걸더라도 그가 받을 수 없을 것이었다. 맥코이는 바깥의 울림과 멀어졌다. 그러나 그곳은 그 울림과 가장 가까운 곳이기도 했다.

 

  그가 밟는 바닥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음에도 맥코이는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그가 자신의 온 힘을 양 손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맥코이는 유난히도 무언가를 짚고, 누르고 잡으려고 했다. 그 노력은 결국 맥코이를 지하의 자료 보관실로 안내했다. 소수의 신뢰와 다수의 불신이 힘을 다투며 쌓아 올린 공고한 창고였다. 맥코이는 넘어질 듯한 자세로 입구를 파고들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자신이 어쩌면 스타플릿의 영웅 중 한 명으로서 사람들 입에 회자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매우 짜증나고 무거운 생각이었다.

 

  내부의 서랍장들을 모조리 헤집어 놓을 기세로 움직이던 맥코이는 파일 하나를 손에 쥐고 비로소 안도했다. 김빠진 한숨이 플라스틱판으로 보호된 파일의 앞면에 순간의 자국을 남겼다. 하지만 맥코이의 행동이 낳은 결과 그 어디에도 찰칵 소리를 생성할 만한 여지는 없었다. 

 

  맥코이는 놀라서 뒤를 돌아보았다. 페이저건이 출력 모드를 변경하면서 낸 소음은 맥코이의 귓가에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 광선을 튕겨내는 기능 따위는 전혀 없는 평범한 파일이 맥코이의 가슴을 가렸다. 그 무엇을 뚫고 나오든지 자신의 피부에는 흔적을 묻히지 않는 치밀한 범죄자가 총과 몸으로 단 하나의 출입구를 막고 있었다.

 

  맥코이는 페이저건의 상단을 보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살렸고 치료했고 가뒀으며, 또 다시 살리고 치료하다 결국엔 풀어준 자신의 환자를 보고 있었다. 파일이 천천히 그의 다리 사이를 향해 미끄러졌다. 말을 모르는 자는 없었지만 모두가 침묵했다. 

 

  “…결국 넌 나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어.”

  

  의사는 때로 자신의 환자를 포기해야 하는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그러한 상황을 부르는 몇 가지 흔한 이유가 있었다. 의사의 조치가 너무 늦었거나, 의사의 조치가 잘못되어 화를 불렀거나, 의사가 취할 수 있는 조치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때 생명을 살리는 이들은 좌절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씁쓸한 것은 마지막이다. 의사와 환자 모두 잘못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치료 방법이 발견되지 않았거나, 축적된 기술이 환자를 치유하는 데 부족한 데에 숨어 있는 것은 오직 역사의 불찰이다. 

 

  맥코이는 아직 인간이 강화인간을 완벽하게 보듬을 수 있는 기술은 발명되지 않았다는 걸 인정했다. 페이저건의 눈빛이 순식간에 맥코이의 시력을 빼앗았다. 총에 맞으면서 맥코이는 안고 있던 파일을 미련 없이 내려놓았다.

 

  칸은 총을 내리고 레너드 맥코이를 향해 걸었다. 맥코이는 칸이 인간들에게 한 번도 기대하지 않았던 수준의 윤리 의식과 사명감을 보여준 적은 있었지만 그가 강화인간이듯이 레너드 맥코이는 인간이었다. 자신은 얼마든지 튕겨낼 수 있는 불빛 한 번에 기울어진 몸을 칸은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칸은 맥코이가 찾아낸 파일을 조용히 회수했다. 맥코이가 그를 연구하면서 세심하게 다져올렸고, 지금은 강화인간에 대한 보통 사람들의 상식을 구성하는 가장 굳건한 기반이 된 정보들이 그 안에 들어 있었다. 그리고 자연의 재앙을 흉내 내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이 그것을 원하는 중이었다. 칸은 파일에서 종이뭉치만을 꺼낸 뒤 일어섰다.

 

  그는 무뚝뚝하게 옆으로 걸어가 은색의 투박한 기계 하나를 작동시켰다. 기계는 싸구려 레이저 프린터가 장치를 굴릴 때와 비슷한 소리를 냈다. 칸은 기계의 틈 안으로 종이들을 집어넣었다. 분쇄기는 300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뒤에야 겨우 정립된 강화인간과 보통 사람 사이의 다리를 끊어놓았다. 칸은 그것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레너드 맥코이가 남들의 요구에 밀려 부랴부랴 만든 녹슨 철근이었다. 칸은 그 위험천만한 이음새를 없애고 더 진정한 것을 남겨두기로 했다.

 

  분쇄가 끝났다. 칸은 이제 반쯤 아래로 기울어진 레너드 맥코이 옆에 총을 내려놓았다. 페이저건의 출력을 나타내는 작은 공간에는 한 줌의 붉은색도 없었다.

 

  레너드 맥코이조차도 칸이 300년의 역사를 배신한 것을 몰랐다.  




[STID/존본즈] The Game of Telling Truths

- Star Trek Into Darkness 2015. 2. 11. 11: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The Game of Telling Truths




 

  그것은 범죄다.

 

  그가 하는 일을 그 이상으로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사회가 허락하지 않은 일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전부 해치우는 것 같다. 그가 저지른 악의 숫자는 아마 내 바늘이 그의 살갗을 파고 들어갔다 나온 횟수를 합쳐도 많을지 몰랐다. 살인이나 강도짓이 아니더라도 주거 침입이라든가 기물 파손도 어쨌든 위법 행위에 해당하니까 말이다.

 

  그는 지금 은색 쟁반에 들어 있는 가위들을 쳐다보고 있다. 서로 크기가 다른 수술용 가위를 바라보는 것은 범죄가 아니다. 내 기억에 적어도 내 눈 앞에서 그가 범죄를 저지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가 나를 찾아오는 건 언제나 그가 무언가를 끝내고 난 다음이다.

 

  핀셋으로 아슬아슬하게 잡은 바늘이 세 번째로 그의 피부를 꿰뚫었다. 그는 미동도 없었다.

 

  “오늘은 뭐 하다가 왔어요?”

  “무슨 일로 그런 걸 묻는 거지.”

 

  맞다. 나는 그가 오늘은 대체 누구를 저격했고, 누구와 한바탕 붙느라 그 매끄러운 살결에 인위적인 오브제처럼 또 흠집을 냈냐고 묻지 않았었다.

 

  “당신의 주위를 분산시키는 거지. 마취가 안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누가 자기 살을 꿰매고 있는데 신경이 안 쓰이겠어요? 원래 국소 마취된 부상을 꿰맬 때에는 의사들이 아무 얘기나 걸어요.”

  “그렇다면 당신은 이태까지 그러한 관습을 무시해왔던 셈이로군.”

  “관습이란 건 일반적이라는 성질을 포함하고 있죠. 하지만 당신은 아니니까.”

  “그런데 당신은 지금 나에게 이렇게 잡담을 걸고 있군. 나도 이제 당신이 정의하는 일반적인 무언가에 포함되었다는 건가?”

  

  할 말이 없었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사람인데도 말재주가 좋았다. 

 

  “…진실 게임 할래요? 내가 하는 질문에는 절대로 거짓말로 답하지 않는 걸로.”

  “당신은 내 변호사가 아니야.”

  “변호사와 의뢰인 사이에서만 비밀 유지의 원칙이 적용되는 건 아닌데?”

 

  그는 잠시 생각을 하겠다는 것처럼 말을 멈추었다. 사선으로 벌어져 있던 상처가 차츰차츰 서로의 간격을 좁히고 있었다. 

 

  “한 번 해봐.”

  “당신 진짜 이름이 뭐에요?”

  “내 이름은 알고 있지 않나.”

  “아무리 봐줘도 당신이 인도나 몽골 출신인 것 같진 않거든요? 칸이라는 이름은 누가 봐도 수상해. 차라리 샤를마뉴라고 했으면 믿었을 거예요.”

 

  세상에 왕 이름이 좀 많나. 차라리 알렉산더 대왕에서 따오든가. 나는 핀셋을 하늘 위로 들면서 중얼거려버렸다. 뒤이어 푸스스 흩어지는 숨소리가 났다. 그는 그런 식으로 웃었다. 그는 자신의 등 뒤에 있는 나를 보려는 듯이 고개를 살짝 돌리려고 했다. 

 

  “미안하지만 그건 대답해주기 곤란하군. 그 외의 질문은 모두 넘기지 않고 대답해주겠다 약속하지.”

 

  농담으로라도 미안하다는 부사는 사용하지 않는 작자였다.

 

  “…진짜로?”

  “진실 게임이니까.”

  

  그는 대개 말을 할 때 막힘이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그의 화법이 순간 나에게 전염된 것 같았다. 나는 바늘을 제대로 꽂아 넣기 위해 상처 부위를 노려보듯이 응시하면서 툭 던졌다.

 

  “당신이 생각하는 행복은?”

  “싸우는 것.”

 

  나는 내가 한 질문과 그가 건넨 답안에 모두 놀랐다. 하마터면 마취되지 않은 부위를 바늘로 찌를 뻔했다. 의사가 사람의 피부에 내는 흠집은 모욕적이다. 나는 범죄를 통해 치료비를 내는 남자의 행복보다는, 그의 불행을 알아내려고 하는 게 번듯한 시민으로서 이상적인 행위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당신이 생각하는 불행은?”

  “굴복하는 것.”

 

  벌써 여섯 바늘이나 꿰맸다. 이제 내가 그의 등 뒤에 서 있을 수 있는 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신에게도 혐오 받을 만한 악덕이 있다면?” 

  “물론.”

  “그건?”

  “노예근성.”

  “당신은 대체 어떤 사람이죠?”

  “단일한 목적을 가진 자.”

 

  그의 피를 접착제 삼아 붙어 있던 거즈가 조금씩 밑으로 떨어지려고 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기계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의 상처를 꿰매는 것 외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필요치 않은 행동이 절실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의 상처를 매듭지었다. 그는 눈치도 좋게 치료가 끝났다는 걸 알고 어깨 아래까지 내리고 있던 옷깃을 끌어올렸다. 일방적인 질답 속에서 그는 자신이 질문할 권리조차 청하지 않았다. 

 

  은색 쟁반 위에 그가 현금 뭉치를 내려놓을 순간이 온다. 나는 악을 저지르고 다니는 자에게 진실을 구하고 싶어서 애썼다. 

 

  “그럼 말해 봐요. 내가 당신을 돌봐주는 것도 과연 범죄일까?”

 




'- Star Trek Into Dark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ID/존본즈] Travelers in the Universe  (0) 2016.08.31
[STID/존본즈] Betraying the History  (0) 2015.02.11
[STID/존본즈] Relativity  (0) 2015.02.11
[STID/존본즈] The Crime  (0) 2014.06.21
[STID/Khan] The Earth of Pain  (0) 2014.06.11

[HOI/존본즈] Methodology of Being

- Star Trek Into Darkness/Full-length 2015. 2. 11. 11: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History of Independence,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Methodology of Being

(Side Story of History of Independence)

 

 

 

  요새 들어 논픽션 시장에 인간학 관련 서적들이 줄지어 출격하고 있다. 딱딱한 역사 교과서에나 나오던 진화전쟁과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 같던 센티넬이 23세기에 다시 등장하고 말았으므로, 이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 인간학 열풍에 센티넬과 가이드가 아닌 한 명의 인간 학자로서 뛰어든 사람이 있다. 몇 달째 논픽션 분야의 베스트셀러 1위를 지키고 있는 <인간의 가장 어두운 거울(The Darkest Mirror for Human Being)>의 작가 폴 브라운이다. 폴 브라운은 뛰어난 인간학자이자 동시에 스타플릿 소속의 소령으로서 인간학이 재조명받고 있는 원인이 되는 사건을 몸소 경험한 몇 안 되는 인물이다. 마침 브라운이 지상 근무를 하고 있을 때를 노려 본 지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Q: 어떻게 인간학을 공부하시게 되었나요?

  A(Paul Brown): 의사 일은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이기는 했습니다만, 저와 완벽하게 궁합을 맞는다고 보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순수하게 연구에 집중하는 학자 타입이거든요.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새로운, 그리고 의사인 제가 뛰어들어도 충분히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학문을 찾았을 뿐입니다. 제가 인간학을 선택한 이유는 어찌 보면 굉장히 세속적이에요. 

 

  Q: 한 분야에 공헌하고 싶다는 마음은 바람직한 거잖아요. 세속적이라는 표현은 박사님을 깎아내리는 것 같네요. 

  A: 자기 자신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거죠. 맥코이들이 만들어내는 환경에 있으면 저절로 얻어지는 특성이라고 봅니다. 

 

  Q: 그러고 보니 박사님께서는 엔터프라이즈호에 근무하시면서 최초로 맺어진 센티넬과 가이드를 나란히 경험하신 걸로 아는데요.

  A: 인간학을 연구하는 입장에선 커다란 행운이었죠.

 

  Q: 그 둘에 대한 박사님의 개인적인 견해를 듣고 싶어요.

  A: 그 이야기야 이미 제가 책에 썼는데요.

 

  Q: 하지만 그건 순전히 학문적인 접근이었잖아요. 박사님의 사적인 경험이 바탕이 된 의견을 궁금해 하는 분들도 분명히 많을 거라고 봅니다.

  A: 혹시 철학에 대해 좀 아십니까?

 

  Q: 아뇨. 별로요.

  A: 인간학은 굉장히 복잡한 학문입니다. 센티넬이 인간 과학의 결정체나 다름없기 때문에 일단 센티넬을 이해하려면 생물학이라든가 생명공학, 의학이나 해부학 같은 것도 어느 정도 알 필요가 있고, 한 마디로 다양한 과학적 지식이 필요합니다. 한편 진화전쟁은 센티넬과 가이드를 이해하는 데 모두 중요하므로 어느 정도 역사적 소양도 있어야겠죠. 개인적으로는 철학적 사고방식도 가지면 아주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Q: 그렇군요.

  A: 정상적으로 맺어진 최초의 센티넬과 가이드를 생각하면 저는 그 무엇보다 철학적 개념을 떠올리게 됩니다.

 

  Q: 어떤 것인가요?

  A: 골턴 연구소의 강화인간 프로젝트가 실패했다면 센티넬은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프로젝트라는 건 그 목적을 수행했을 때에만 가치가 있는 거죠. 처음부터 센티넬의 존재 가치는 조건부로 정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다른 센티넬들도 최초의 센티넬을 대표로 삼아 자신들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느 정도 용납할 수 있을 테니 칸을 가지고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철저히 어떠한 조건이나 가정을 기준으로 삼고 살아왔습니다.

 

  Q: 어떤 면에서 말이죠?

  A: 오필리아 밀레이스를 비롯해 연구원들이 그와 동족들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면 칸은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을 겁니다. 인간이 그에게 그토록 큰 분노를 사지 않았다면 칸은 기를 쓰고 유사-가이드 관계를 발명하려고 하지 않았겠죠. 그리고 아마 이 부분은 그가 듣기 싫어하겠지만,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레비나스 맥코이를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센티넬은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모두 죽었을 겁니다. 옛 독일 철학에 보면 이러한 도덕적 명법을 가언명령(Hypothetical imperative)이라고 칭했죠. 일정한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행동에 나선다는 겁니다. 센티넬의 인생은 그랬습니다. 그 전에 이러이러한 상황이 있었기에 그에 반응한 산물을 내놓는 구성의 삶이었습니다. 인간보다 훨씬 우월한 그들에게 이런 말을 붙이니 저도 조금 어색하긴 합니다만, 가이드가 발생하기 이전 센티넬들은 아주 수동적이었어요.

 

  Q: 그렇다면 가이드는요?

  A: 먼저 레비나스 맥코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어떻게 가이드라는 걸 만들 생각을 했을까요? 동정심 때문은 아닙니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처음 칸을 봤을 때 그는 인간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증언을 날리고 있었죠. 당시 상황을 봐도 겨우 진화전쟁이 마무리되고 있던 시점입니다. 그 무렵에 전범에게 동정심을 느낀다는 건 상식에 어긋나 보입니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남긴 말 중에 두 종이 저지른 죄를 모두 연구하고 싶었다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깔려 있는 건 일종의 도덕적 의무감입니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센티넬의 근원과 상처, 인간의 업보를 연구해야만 한다고 느꼈어요. 사실 그렇게 해서 레비나스가 얻을 것은 없었는데도 말이죠. 존재하는 가이드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레너드 맥코이라고 크게 다를 건 없습니다. 칸은 그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을 한 적이 없어요. 레너드는 맥코이로서, 그리고 가이드로서 자신에게 부여된 의무를 수행한 것뿐입니다. 가이드는 인도자에요. 그는 당연히 칸을 진실로 인도해야 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레너드 맥코이를, 아주 확신할 수는 없지만 대다수의 가이드들을 정언명령(categorical imperative)에 비유합니다. 레너드 맥코이 이후 가이드들을 가이드로 지탱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의무가 되었어요. 

 

  Q: 센티넬과 가이드는 정말로 다르군요.

  A: 하지만 센티넬의 그런 가언적인 인생은 차차 달라질 거라고 봅니다.

 

  Q: 어째서 그렇죠?

  A: 누군가가 조건이나 가정, 즉 타산적 경중에 매달린다면, 그건 그가 처한 상황이 너무도 열악하여 그 사람에게 자유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당장 내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사람은 한 푼이라도 돈을 얻을 수 있는 행동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는 사람은 그것을 피할 수 있는 무언가에 매달리게 되고요. 센티넬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인간이라도 탓하지 않으면, 그들의 본능이 갈구하는 가이드라는 것을 찾아 헤매지 않으면 그들은 절대 자신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겁니다. 오히려 가이드가 없던 시절 센티넬에게 자유는 없었습니다. 

 

  Q: 그런데 센티넬에게 가이드가 생겼고, 그것은 곧 센티넬에게 안정이 생겼다는 것이며 굳이 생존이라는 목적에만 휘둘리지 않을 수 있는 자유가 생기게 된 거로군요. 

  A: 맞습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 실현은 레너드 맥코이를 곁에 둔 칸 누니엔 싱으로부터 시작될 겁니다. 

 

 

[STID/존본즈] Relativity

- Star Trek Into Darkness 2015. 2. 11. 11: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Relativity

 

 

 

  시간을 보내는 행위 자체를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가진 괴로움이란 단순히 할 일이 없어서 그저 시곗바늘이 움직이는 걸 바라만 보고 있는 무의미한 여유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아무리 애를 써도 자신을 비롯한 온 세상 사람들의 시간이 똑같이 흘러간다는 걸 매우 언짢아했다. 그는 필멸자의 시간이 불멸자인 자신의 것과 같은 속력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었다.

 

  필멸자라는 건 매우 특수한, 그러니까 자연을 빗대어 말하자면 몇 백 년 동안 그 존재가 밝혀지지 않았던 까만 백조와 같은 거라서 필멸자 주변엔 당연히 불멸자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흔하디흔한 필멸자들 중에서 불멸자가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불멸자의 고민이 시작되었다. 몇몇 필멸자들은 사랑이 영원하다는 주문과도 같은 명제를 믿는다. 불멸자에겐 얼토당토않은 소리였다.  

 

  불멸자는 처음에 자신이 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려고 했다. 특수한 존재는 외롭다. 죽지 않는다는 사실이 남들보다 우월한 것이 아닌, 남들과 같은 점이 하나도 없는 너무도 차별적인 특징이 되어버렸을 때 불사(不死)는 그저 외로움을 끌고 오는 짐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불멸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필멸자가 자연법칙에 따른 이별을 고할 때, 그를 쫓아갈 수 있는 갖은 술수를 시험해보았다. 안타깝게도 성과가 나오진 않았다. 

 

  불멸자는 이번에 반대로 필멸자를 죽지 않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보았다. 그 중에서도 불멸자는 저온 동결을 일종의 필승법으로 여겼다. 그러나 필멸자를 동결에서 깨우는 순간 그는 불멸자의 위치에서 멀어져버리는데, 그렇다고 얼어붙은 이를 사랑할 수 있는 묘책은 존재할 수가 없었으므로 불멸자는 이 시도를 폐기해야만 했다. 

 

  불멸자는 의도적으로 필멸자를 사랑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가 사랑할 만한 가치를 가진 자가 그것보다 더 희귀한 가치를 가지지 못했음을 탓할 수도 없었다. 불멸자는 자신의 절대적인 특수성에 분노했다.

 

  화가 난 불멸자의 애정은 필멸자를 시간이 느리게 가는 곳으로 보내버렸다.

 

  그것은 적어도 한 쪽이 깰 수 없는 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기에 조금 나았다. 불멸자는 아주 편안한 상태로 10년 동안 필멸자를 바라볼 수 있었다. 두 사람 사이 시간의 간격은 좁혀졌다. 그리고 필멸자 역시 시간을 보내는 일을 힘들어하게 되었다.

 

 

  2 o'clock

 

 

  레너드 맥코이는 현기증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살고 있는 땅은 극단적인 것만 선호해서, 가벼운 현기증 따위는 가뿐히 무시할 정도로 무신경했다.

 

  그 땅에서 레너드 맥코이가 현기증을 느낄 수 있는 가능성은 없었다. 어지러움이 그리워서 흔들리는 바닷물 위로 몸을 맡기기엔 성벽 같은 파도에 묻혀 꼼짝없이 익사할 것이었다. 지진이 발생할 확률은 낮았다. 그 땅은 오직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였다. 혼자서 빙글빙글 도는 행동은 너무나 멍청해보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입술만 비죽였다.

 

  냉혹한 중력이 시간의 발목을 꾹꾹 짓누르고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오래 전에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식하려 애썼다.

 

  그는 잠깐 불멸자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버렸다.

 

 

9 o'clock 

 

 

  칸 누니엔 싱은 방으로 돌아와서 두 번째 시계의 바늘을 조정했다. 아무리 느리게 맞춰놔도 바늘은 거부할 수 없는 힘에 이끌려가듯 조금씩 빨리 움직였다. 칸은 시곗바늘을 힘차게 뒤로 돌렸다. 

 

  그는 사랑하는 필멸자를 시간이 게을러지는 곳으로 보내고 나서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것은 필멸자와 관계를 맺기 위해 그가 감당해야 하는 일종의 조건 같은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일만큼 그의 깊은 습관으로 자리 잡은 행위이기도 했다. 칸은 자신이 좀 더 오래 죽음의 가능성을 계산해볼 수 있다는 것에 기뻤다. 그는 자신의 시간을 확인한 다음, 정확히 세 시간 뒤에 자신의 필멸자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로 하고 걸음을 옮겼다.

 

  불멸자는 시간이 지연될 수 있다는 과학적 사실 자체를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3 o'clock

 

 

  불멸자는 왜 자신이 사랑하는 이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자신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필멸자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었었을까? 

 

  시간이 지연되는 구렁텅이 속에 빠진 필멸자는 속절없이 내려앉은 우주선을 바라보았다. 아직 엔진이 다 식지도 않았을 저 셔틀을 다시 하늘 끝까지 띄워 올린다고 해도 그동안 필멸자의 필멸자들은 놀라운 속도로 죽어가고 있을 것이었다. 불멸자와 강제로 시간을 공유하게 된 필멸자는 이토록 비참했다.

 

  필멸자에게 남은 것은 그가 어떻게 조종할 수 없는 비인간적인 중력과, 불멸자보다는 죽음을 더 잘 안다는 필멸자의 본질적 위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필멸자는 그 두 가지를 붙잡고 매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필멸자는 중력으로 불멸자를 죽음으로 밀어 넣을 수 있는 구멍을 만들게 되었다. 

 

 

4 o'clock

 

 

  [내 시간이 느리게 가도, 내가 언제 죽을지 당신이 어떻게 알아. 당신이야말로 시간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 여기엔 한 번도 온 적이 없네. 영상은 지겹다.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가는 내 시간마저도 아까워서 애써 잡아주려는 작자가 왜 정작 나를 만나러 찾아오지 않는 거야?]

 

 

12 o'clock

 

 

  불멸자와 필멸자는 모두 그들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고 또 죽기를 원해서 불멸자와 필멸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 근원을 쫓을 수는 없지만, 그것이 발생하는 게 너무 당연한 사계절과 비슷하다. 

 

  매번 겨울이 오는 것을 원망하는 일에는 아무런 영양가도 없다. 사실 불멸자라면 어떤 행동을 취해도 상관없겠지만, 일 년마다 찾아오는 겨울을 탓하고 앉아 있기에는 시간도 생명도 짧은 필멸자들은 망설임 없이 겨울을 대비하는 일을 선택한다.

 

  그 누구도 필멸자의 그러한 선택을 비난할 수 없다. 

 

  불멸자 또한 그러했던 것 같다.

 

 

5 o'clock 

 

 

  하늘이 더 좁아진 것 같았다. 중력 환경이 달라져서 그런가? 레너드 맥코이는 쉽게 확신하지 못했다. 아주 확실하게 다가오는 느낌은 몸 어느 구석이 계속 삐걱거려서 쉽사리 휘청거리고 어지러움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이마를 손바닥 아래로 누르면서 머리를 휘휘 털었다. 머리가 흔들리는 바람에 어지러움은 더 커졌다. 

 

  레너드 맥코이는 한참을 가만히 서 있다가 다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하늘은 옛날보다 훨씬 높게 뻗은 건물 때문에 상대적으로 좁아보였다. 레너드 맥코이가 본 것은 실제였다. 몇 십 년 전부터 사람들이 바라보고 있던 모습이었다.

 

  문득 변화의 영역 바깥에 존재하는 것만 같던 행성의 표면이 떠올랐다. 레너드 맥코이는 발로 모래먼지가 나게 땅바닥을 긁었다. 바닥에 그의 신발 자국이 남았다. 필멸자의 행성은 언제나 그래왔듯이 변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책 한 권을 쥔 팔을 흔들어대면서 길을 걸었다. 그가 들고 있는 책과 비슷하게 생긴 네모난 것이 조금씩 보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가 혼자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감히 불멸자 행세를 한 사람들이 없다. 필멸자의 속도대로 흘러간 시간은 레너드 맥코이에게 기분 좋은 충격을 선사했다.

 

  Fundamental ideas and problems of the theory of relativity

 

  레너드 맥코이는 죽은 지 약 500년이나 되어버린 물리학자를 위해 고개를 숙였다. 

 

 

6 o'cl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