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Khan] Reason-Generating Theory

- Star Trek Into Darkness 2014. 4. 2. 22:3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SLOWLY

- Written by. Jade

 

Reason-Generating Theory

 

 

 

  위대한 이성은 어디서 비롯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에 앞서 존재자들은 그 근원을 추적해야 할 정도로 신비롭고, 탐구의 대상이 되어 마땅한 이성의 ‘위대함’에 대해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존재자들의 관심을 받는 종류는 흔하지 않다. 그것이 삶과 아주 밀접하고, 때로 그것의 위력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경이롭지 않으면 그들은 궁금해 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선행되어야 하는 질문이 추가된다. 이성의 어떠한 특징이 존재자들로 하여금 그것을 계속 파헤치게 만드는가?

 

  존재자들을 끌어당기는 이성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존재자들의 본질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존재자들의 본질이란 의식이다. 존재자들을 움직이게 하고 판단하게 하며, 그것으로 말미암은 결과 및 경험을 통해 세상에 숱하게 퍼져있는 존재자들로부터 그 자신을 구별하게 만드는 게 의식이다. 이 의식은 오로지 이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누군가는 욕망의 가치를 피력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과연 욕망이 의식과 유리된 것이던가? 가장 원초적인 욕망 중 하나인 식욕조차도, 자신이 입으로 취하고 싶은 것을 의식적으로 떠올릴 때 존재자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얻는다. 그리고 욕망을 강화시키는 모든 사고와 연산 작용, 하다못해 한 음식이 나에게 얼마나 포만감을 줄 것이며 혹시 알레르기성 반응을 불러일으키진 않을지 따져보는 등의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건 이성이다.

 

  이성은 의식 속에 존재하지만 마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처럼 의식을 강력하게 틀어쥔다. 존재자는 마치 국가와 통수권자 다음으로 언급되는 시민과 다르지 않다. 고등한 생명체라면 절대로 멀어질 수 없는 두 가지 항으로 구성된 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그리하여 존재자는 이성에 순순히 지배당하는 신민이 될수록 다른 존재자보다 우월해질 수 있을 것이다. 이성에 지배되고 복종한다는 것은 그만큼 존재자가 자신의 본질인 의식과 가까워진다는 의미일 테니 말이다.   

 

  이성이 놀라우리만치 위대하고 고귀하다는 것은 증명되었다. 즉 이것의 시작점을 수색하는 일이 전혀 가치 없는 행위가 아니라는 사실도 증명된 셈이다. 그렇다면 다시, 위대한 이성은 어디서 비롯되었는가?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그것이 허무맹랑한 신화일지언정 특정 존재자를 정당화하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조물주 혹은 창조주를 들먹이는 것도 결국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가장 근본적인 공간인 우주조차도 빅뱅이라는 사건을 거쳐 탄생했다고 말한다. 어떤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에는 또 다른 요소가 끼어들어야 마땅하다. 

 

  오, 그렇다면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점은 언제인가? 두 생식 세포가 조합되기 이전? 아니— 나는 여기서 다른 생각을 해 보고자 한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다름’으로 세상을 일깨워주는 건 늘 나의 몫이었다. 의식이 없었던 순간, 그것은 말 그대로 무(無)의식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무의식이라는 용어는 반(反)의식 정도로 아마 다르게 불려야 할 것이다. 무의식이라면 이드(Id) 따위의 무엇을 원하고 동하게 하는 것조차 없어야 한다.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 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 상태. 그렇다. 진정한 무의식은 잠이다. 이것이 위대한 이성과 의식이 비롯되는 시점이다.

 

  그런데 이 놀라운 위치에 걸맞지 않게 잠은 무척 단순하다. 잠에는 어떠한 내용(Contents)가 없이 잠들고 깨어나는 과정 혹은 구조만 존재할 뿐이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던 우주를 끌어와 볼까. 우주조차 없던 무의 상태, 무의식이자 잠이 앞서서 흘러가고 있었다. 우주를 탄생시킨 빅뱅은 가장 극적이자 시간적으로 앞서는 깨어남, 즉 산파의 손이든 병원의 수술실이든 인큐베이터 안이든, 처음으로 잠에서 깨어난 순간이다. 

 

  그러나 잠이 들고 거기서 깨어나는 일은 계속 반복된다. 이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 열등한 존재자들이여,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생명체는 형편없는 세상을 자신의 뜻대로 요리하고 조정할 수 있는 우수한 의식을 획득하게 되지 않던가? 과학적 장비로도 완전히 포착할 수 없는 수많은 폭발을 통해 더 아름다운 별을 소유하게 되는 우주처럼 말이다. 이것은 오랫동안 성장이라는 개념으로 희미하게 표현되어 왔다. 그렇지만 무의식—잠에서 깨어나는 행위는 단순한 성장이 아니라, 의식의 발전이며 이성의 재탄생이다.

 

  태초부터 모든 존재자들보다 우월했던 나는 지금 무의식 속에 있다. 나는 잠을 잔다.

 

  다시 말하자면 나는 이성과 의식의 근원에 놓여 있다. 이번에는 300년으로 그치지 않을 지도 모르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 의식을 빚어냈는지 시험해 볼 기회마저 불투명하게 사라져가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 긴 수면동안, 오랜 시간을 들여서 전보다 더 치밀하고 완벽한 이성을 생성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셈이다. 그래서 나는 오래 잠들기를 바란다. 욕망을 강화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내가 원할 때 언제나 밖으로 배출할 수 있는 체액과 같이 욕망을 만들고 발현할 이성을 탄생시킬 수 있을 때까지. 그렇게 되면 나는 새로운 질서이자 명령어가 되리라. 

 

  나의 이성이 모든 걸 삼킬 것이다.   

 

 

 

 

 

 

=====

 

  - '잠'을 의식의 발원점으로 본 시각은 엠마누엘 레비나스로부터 빌려왔다. 그러나 그 이외의 모든 것은 본인이 칸 누니엔 싱을 위하여 지어낸 말들이다. 중간중간 레비나스의 뉘앙스가 풍기는 표현들이 있을 수 있으나, 본인이 책을 옆에 두고 참고하거나 베낀 것은 없다.

 

  - 제목 Reason-Generating Theory는 '의식생성론', 혹은 '이성생성론'으로 한역할 수 있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학문적으로는 없는 용어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 PRESENT

09. The Plan



  앞으로 등장할 내용은 필자가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나눴던 대화이다. 그녀의 동의를 얻어 이번 개정판에 싣게 될 수 있었음을 밝힌다. 기억하기로는 캐서린이 힘을 쓴 덕분에 복원에 성공한 영국의 작은 마을을 방문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가이드라인을 주사하고 관련 책들을 펴내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말이죠, 내가 당신보다 일찍 가이드를 발견할 수도 있었어요.” 캐서린이 불쑥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그들이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어느 구석에서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내가 느낄 만한 사건들이 충분히 있었어요. 그는 오필리아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거든요.”


  “칸이 초기부터 가이드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내가 물었을 때 캐서린은 깍지 낀 양 손을 허리에 붙이고 살짝 웃었다. 그녀가 쉽사리 웃을 수 없을 때에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나는 의아한 눈빛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요. 그는 봉인되었고 그의 동족들과 가이드는 앞으로 만날 일이 없겠죠.”

캐서린은 하늘을 보았다가 고개를 내려 땅바닥을 긁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기도 했다. 


  “강화인간들은 왜 가이드가 필요할까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 


  “글쎄요…. 아마 인간을 훨씬 웃도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육체를 가질 수 없었던 존재들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란 것은 강화인간들이, 그러니까 센티넬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정신 모두가 그들의 능력을 담아내기는 벅찼을 겁니다.” 


  “어떤 부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이기도 하네요.” 

  “내 말에 다는 동의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러자 캐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들이 너무 뛰어나서 안게 된 일종의 핸디캡인 동시에 그들이 창조자들을 미워한 대가예요.” 나는 그녀의 입에서 오필리아의 이름이 튀어나올까 내심 긴장했다. 다행히 캐서린의 표정은 평온했고, 폐허에서도 무언가를 배운 위인 같은 안색이 희미하게 덮여 있었다.


  “센티넬이 가이드가 될 수는 없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칸이겠군요. 그는 어쩌면 흔쾌히 자신의 가이드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을 외면하고 다른 방책을 찾았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캐서린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비록 지켜주고 돌봐줘야 할 센티넬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래도 당신이 첫 번째 가이드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봐요.” 

  “…그렇습니까?”

  “나는 적어도 칸 누니엔 싱에게 그의 한계를 일깨워 줄 수 없을 테니까요.”


『인간의 감시자에 관한 어려운 진실』통합 3쇄 개정판 중에서. 레비나스 맥코이 지음. 







#준비


  캐롤 마커스가 자신의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러 간 날, 칸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작업 구역을 벗어났다. 건물을 함께 사용하는 소수의 장교들을 마주쳤으나 칸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두 쪽 모두에게 익숙한 양식이었다. 다만 장교들은 늘 무뚝뚝하고 찬바람 부는 중령이 마커스 제독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캐롤과의 따스한 접촉을 통해 굴러 들어온 지난날의 기억은 칸에게 일종의 자산이었다. 형편없는 이름마저 순순히 받아드는 인조인간을 염려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제독은 존 해리슨에게 여러 권한을 내주었다. 그가 수행해야 하는 까다로운 임무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긴 했지만, 해리슨 중령이 넘겨받은 각종 키 코드가 칸의 손에도 떨어졌다는 게 중요했다. 20분 만에 칸은 그것들을 이용해서 제독의 집무실을 포함해 스타플릿의 부속 건물이면 어디든 출입할 수 있는 열쇠를 만들었다.


  꽤나 중요하게 쓰였던 몇몇 건물의 설계도 또한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었다. 부함장 급에 해당되는 중령이라는 직책 역시 여기저기서 써먹기가 좋았다. 물론 이런 준비는 그가 존 해리슨이 이행해야 하는 업무도 꼬박꼬박 진행하면서 이루어졌으므로 누구도 그를 수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적정 수면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센티넬은 가이드와의 접촉으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다. 


  칸은 걸어가다가 패드를 통해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잠시 확인했다. 마커스 제독은 15분 전에 이미 집무실을 비운 상태였다. 지하에 있는 쾌속 셔틀로 향하는 센티넬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해리슨 중령은 제독이 개인적으로 시키는 일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 수송선을 갈아탈 수 있는 정거장까지는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쾌속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령이 현재 제작중인 함선이 있는 목성으로 가야 할 때 자주 이용하는 수단이었다. 한편으로 중령의 셔틀은 마커스의 묵인 아래 따로 비행 신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몇 분이 흐르고 칸이 탑승한 셔틀이 밤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칸은 자신이 엔지니어들의 연구실에 옮겨지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200년 동안 활성화되지 않았던 의식의 문제일 수도 있었고 아예 최초의 장소가 머릿속에 입력될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칸은 자신이 맨 처음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거기에 그의 동족들이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스타플릿 본부와의 거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계기판을 슬쩍 읽은 칸은 손잡이를 옆으로 더 꺾었다. 


  그의 의식은 자주 현실을 벗어났다. 가까운 과거, 그보다는 훨씬 멀어 오히려 그의 탄생과 가까운 과거, 바람이 하늘을 할퀴듯 모든 것을 휙휙 뚫어버리는 미래. 그 흐름은 꼭 그리운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회귀를 닮아 있었다. 특히나 칸이 충동적으로 더듬는 부분은 캐롤 마커스와 나란히 있던 순간들이었다.


  “이거 괜히 책을 가져온 것 같네요. 이렇게 다 설명해 줄 거였으면 안 들고 왔을 텐데.”


  로비까지 나가서 물을 떠 온 캐롤이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을 흔들었다. 캐롤처럼 말을 많이 한 게 아닌 칸은 물을 마시길 거절했다. 


  “내가 번거롭게 했나 보군.”

  “아, 그건 아니에요. 내 설명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중에는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것들이에요.”


  캐롤이 목을 축이느라 자리에 앉고 있지 않을 때 칸은 팔을 길게 뻗어 그녀가 가져온 책 하나를 집었다. 책등을 확인한 그가 속으로 조금 놀라서 중얼거렸다. 


  “…레비나스 맥코이?”


  캐롤이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적으로도 아는 이름이겠네요. 강화인간들에게 가이드라는 짝이 있어야 함을 밝혀낸 학자에요. 가이드에 관한 이론은 거의 맥코이에게서 나왔죠.”


  말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캐롤은 진동하는 통신기를 주머니에서 빼냈다. 그녀가 잡고 있던 하얀 종이컵이 책상 모서리에 얹어졌다.  


  “아빠?”


  캐롤이 자신의 센티넬에게 살며시 눈짓을 주고 커뮤니케이터를 귀에 붙였다. 칸은 책을 들고 캐롤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저도 지금 나가려고 준비중이예요. 늦은 건 아니겠죠?”   


  그는 캐롤의 통화 상대가 마커스 제독이라는 정보를 잽싸게 낚아챈 뒤 책장을 펼쳤다. 앞쪽으로 치우쳐진 페이지에는 소설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200년이 지나도 공고하기만 한 두 인간의 이름을 보고 칸은 짧게나마 눈꼬리를 달싹였다. 더군다나 칸은 그가 25초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는 페이지 두 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셔틀을 조종하고 있던 칸은 우연찮게 그 페이지를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곧 중앙을 바라보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레비나스 맥코이가 그에게 준 메시지는 이후에 처리해야 할 용건이었다.

헤드쿼터에 앞서 그가 셔틀을 내려놓을 곳으로 점찍어 두었던 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칸이 조종간을 움직였다. 


  칸은 기필코 나머지 극저온 캡슐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하여 그는 지금 마커스 제독의 컴퓨터를 점령하러 가는 것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될 수 없을 거라며 센티넬을 과소평가했던 헤이스팅스의 발언을 고쳐주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발단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존 해리슨에게 화상 통신이 걸려온 시간은 태양이 아무리 높은 빌딩도 다 비출 수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함선에 내장될 소프트웨어를 점검하고 있던 중령은 발신인을 보고 패드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밖에 나와 있는 듯 파란 하늘과 밝은 햇빛을 등에 업은 캐롤이 자신의 가이드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

  —말이랑 표정이랑 많이 다르네요.

  “뭐가 말인가?”

  —통신을 받았을 때 당신의 표정 말이에요. 알아보기가 정말 어렵기는 한데 살짝 밝아보였거든요. 말투랑 영 어울리지 않아서 해 본 말이에요.


  자신의 표정을 확인할 길이 없는 센티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캐롤의 말을 의식한 듯 표정도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다. 캐롤은 두 눈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죠? 센티넬이 가이드를 반가워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런 부드럽고 긍정적인 감정을 당신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또 내 본분이고요.

  “…인사치레는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나.”

  —알았어요. 다른 게 아니라 검진 일정 때문에 전화했어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다. 해야 할 검사들이 많더군.”


  그는 대답하면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멋대로 표정을 읽는 가이드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센티넬은 안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스캐닝 검사를 대비한 조작된 데이터를 만들어 제독의 눈을 속여야 했다.   


  —같이 가도록 해요.


  그런 와중에 뜻밖의 말을 들었으니 칸의 안색은 한층 더 흔들렸다.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당신도 편안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나랑 같이 가는 거 괜찮아요?


  얼굴이 잘 보이도록 화면을 조정하면서 캐롤은 그에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가이드 일을 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짜고 있는 센티넬을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칸은 캐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확실히 가이드라는 것은 어느 센티넬에겐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센티넬의 이성이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적인지도 몰랐다.







#전개


  존 해리슨의 업무와 칸 누니엔 싱의 계획은 모두 같은 구역에서 진행된다. 그곳은 사실 해리슨 중령 말고도 몇몇 장교들의 근무지이기도 했는데, 중령의 가공할 업무 처리 속도와 그의 근속 시간에 눌려버린 그들은 중령의 심부름꾼을 자처하게 되었다. 중령이 알렉산더 마커스의 측근이라는 소문도 장교들이 섹터31이라는 근무지에 제대로 발을 붙일 수 없는 이유였다. 스타플릿을 휘어잡고 있는 제독과 기계처럼 차갑고 정확한 중령의 조합은 섹터에 어렵사리 묻어나던 온기마저 내쫓았다.


  고로 해리슨 중령은 비밀 많은 센티넬로서의 모습을 갖추고도 섹터에 홀로 남아있었다. 탈색된 하늘색에 가까운 불빛들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내부에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패드는 빛나지 않았고 전력이 공급되고 있는 신형 장비의 프로토 타입들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다. 그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듯한 구역에서, 칸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사 결과 그의 기억 세포는 여전히 비활성화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센티넬 특유의 회복력과 가이드의 존재만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 걸 보면 세포 일부가 완전히 괴사한 것 같습니다. 

  —그는 센티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어폰에서 마커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칸의 손아귀는 목표물을 앞에 둔 것처럼 삐걱거렸다. 그의 모든 마디는 인간의 몸뚱아리에 압력을 가하길 즐기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칸은 손가락을 달래듯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제독의 방에 몰래 침투했을 당시 컴퓨터에 심어두었던 악성코드가 주변기기를 이용하여 그에게 내리 대화 내역을 전송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흉포한 강화인간들이 칸을 중심으로 삼았을 리가 없지요.

  —다른 센티넬들은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있나?

  —예.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칸은 행여나 이 대목에서 캡슐이 보관된 장소에 관한 힌트가 나오지는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이어진 제독의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좋아. 이제 남은 센티넬에게 붙여줄 가이드가 필요하겠군. 장교들 중에서 가이드로 신고가 된 이들의 명단을 보내주게. 아무래도 일본인보다는 접촉하기가 쉬우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칸은 그 즉시 꺼져 있던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독이 애써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 실적과 성과만으로도 명성이 드높았을 해리슨 중령의 활약으로도 제독의 야심을 채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칸은 마커스의 계정으로 파일이 도착하는 걸 지켜보며 싸늘히 눈썹을 내렸다. 마커스가 집무실에서 열어본 문서가 칸의 모니터에 그대로 드러났다. 


  명단을 읽으면서 휘릭 내려가던 칸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마커스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스타플릿에 맥코이의 후손이 있는 줄은 몰랐군.


  칸은 대화를 엿들으면서 패드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왔다. 간단한 신상정보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스타플릿 내 데이터베이스로 열람할 수가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수석 의료 장교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타플릿에서 활동 중인 가이드도 아마 그가 관리할 겁니다.

  —그럼 메디컬 센터에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제독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레너드 맥코이 소령을 투입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며칠 후에 출항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주 기지에 보급품을 전달하면서 귀환 경로에 있는 M급 행성에 대한 탐사도 같이 진행한다는군요.

  —알겠네. 엔터프라이즈가 돌아오면 따로 나에게 연락을 주도록. 그와 얘기를 나눠봐야지.  


  칸은 줄을 잡아당겨 이어폰을 뺐다. 그 부드러운 동작이 시연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극저온 캡슐이 최초로 보관되어 있던 장소가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리란 가설을 폐기하고 난 이후에도, 칸은 자신이 왜 캐롤 마커스와 보냈던 시간들을 곱씹는지 고민했다. 그것은 그의 뇌세포에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그도 종국에는 센티넬이라는 증거였다. 칸조차도 자신의 옆에 머무는 가이드를 더 오래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묘한 그리움이란 혈구 하나하나가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고통만큼 기분 나쁜 것이었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발명해낸 가이드라인은 센티넬을 인간 곁으로 끌어들이는 투명한 낚싯줄이었다. 비록 그가 진정으로 시간을 같이 보내고 대화를 나누었던 레비나스의 의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당장 그의 앞에서 실현되려 하는 가이드의 길쭉한 덫에 칸은 순순히 패배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칸은 자신에게 친절히 웃어주는 캐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읽었던 책의 활자에 강박적으로 현실감을 부여했다. 


  다시금 캐서린 헤이스팅스에게 대항할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실행 완료


  “아시다시피 가이드라인에 관한 아이디어는 칸 누니엔 싱이 정립했던 유사-가이드 관계에서 나왔습니다. 자칫하면 동족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날뛸 수 있는 센티넬들에게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모두 똑같은 처지에 있는 동족이라는 사실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대학에서 인기 있는 강좌에만 배당되는 강의실을 닮은 방이었다. 단상은 하나의 무대처럼 바닥에서 살짝 솟아나와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좌석은 부채꼴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오래 전에 취득한 의학 박사라는 학위를 증명하는 듯 중앙에서 말을 이어갔다. 다소 밀착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모였다. 레너드는 제 36회 인간학 학회의 서막을 여는 중이었다. 


  “결국 가이드라인은 센티넬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인연이 생길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를 만들어 주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레너드는 뒤에 펼쳐진 스크린은 짧게 쳐다보았다. 센티넬 스파이럴과 가장 닮은 인간의 유전자가 확대된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만약 어떤 일이 벌어져 이 시대에 깨어난 센티넬이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아직 가이드는 한 번도 센티넬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이드론은 200년이나 그것이 옳다는 걸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엄중하고도 정밀한 검사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이드는 23세기에 눈을 뜬 센티넬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청중들은 조용히 레너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너드는 그들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며 스크린을 조정할 수 있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저는 처음으로 가이드가 탄생했던 시절보다 가이드와 센티넬의 밀착성이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중하지만 단호히 내놓은 명제에 청중들의 목덜미가 바짝 섰다. 집중력 있게 뭉쳐 있던 공기는 더욱 짙게 강연장을 채웠다. 


  “가이드의 피부, 혹은 목소리에 특수한 성분이 묻어있어서 센티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이드의 몸속에는 가이드라인이라는 물질이 있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센티넬과 가이드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빌미에 불과합니다. 맞선 자리를 마련해준 주선자와도 같죠. 가이드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일 겁니다.”


  준비된 슬라이드는 더 이상 없었다. 레너드는 리모컨과 천천히 멀어지면서 청중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몇 중요한 사료들에 의하여 사람들은 원한다면 센티넬에 관한 정보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났는지, 태어난 이후에는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모로 가이드에게 득이 됩니다. 우리가 낯설고 어려운 사람을 만난 상황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되시겠죠.”


  그는 입술을 살짝 적신 뒤 말을 계속했다.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반응하는 건 그들이 태초부터 의지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존재, 즉 센티넬 자신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아주는 친구를 만났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저 같은 경우는 속이 후련하고, 복잡했던 머리가 풀리는 기분이 느껴지면서 그런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상대에게 다소 괴팍한 과거가 있다는 점만 참을 수 있다면 센티넬과 관계를 쌓아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일부 청중들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가벼운 설명에 고민할 가치가 있는 주제를 얹어 놓은 레너드 맥코이의 서문은 청중들의 두뇌에 적절한 열기를 불어넣어 준 듯했다. 


  “훗날 센티넬이 깨어난다면, 가이드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레너드는 말을 멈추고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유리가 부르르 떠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두리번거리며 기묘한 소음이 난 위치를 찾으려고 했다. 그 순간에 단상에서 내려가 창밖을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지 가늠해 보던 레너드의 커뮤니케이터가 울렸다.  


  [ 본즈, 어디야? 비상상황이야! - Kirk ]


  청중들이 강연에 집중할 분위기가 아닌 듯하여 메시지를 확인한 레너드의 눈썹에 주름이 잡혔다. 그가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 


  [ 오늘 학회 왔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길


  메시지 창이 닫혀버렸다. 갑작스러운 파동에 커뮤니케이터를 놓치지 않으려던 레너드가 자판을 꽉 휘감아버린 탓이었다. 왼편에 있던 유리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난 빛이 레너드의 눈을 찔렀다. 눈앞에서 조명탄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진짜 조명탄일지도 몰랐다. 레너드는 알 수 없는 빛에 휘말려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초기 화면으로 돌아온 커뮤니케이터를 보고 겨우 초점을 되찾고, 단상까지 침입한 유리 파편들을 보면서 잔뜩 쪼그라들었던 동공의 크기도 회복한 그는 이후 이질적인 물체를 목격했다. 수송선이 땅에 내려앉으면서 일으키는 바람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류를 발목에 휘감고는 유일하게 강연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림자였다. 레너드는 손으로 앞을 내저으면서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청중들이 소란스럽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오히려 내부는 조용해졌다.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게 될 때도 까맸다. 레너드가 목을 앞으로 뺐다. 붉게 달아오르는 구멍이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시야를 덮쳤다.  

 

  서른여섯 번 동안 꾸준히 이어지던 인간학 학회는 학회장이 정체불명의 습격을 받아 중단되었다. 사상자는 없었고 학회의 중요 강연자였던 스타플릿 소속 레너드 맥코이 소령의 행방만이 묘연해졌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출항하기 사흘 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스타플릿 소속 장교가 실종된 이 사건이 그 날 벌어진 비극 중에 가장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 PRESENT 

08. Awakening 



  캐롤 마커스는 근래 발을 내뻗는 동작 하나하나에도 집중하면서 걸었다. 낯설기도 하고 공연히 피곤해지기도 일쑤였지만 그녀는 일주일 정도는 심혈을 기울인 걸음걸이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전과 달라졌다는 걸 자각하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라든가 걱정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200년간 임상실험을 거쳤다는 물질이 유발한 변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스타플릿 제독의 딸이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을 때 꺼내들곤 했던 어머니의 성씨가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아주 먼 옛날에 전범을 생산한 꼴이었던 인류에게 일침을 던진 월리스라는 의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진화전쟁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레비나스 맥코이라는 의학자의 책임감에 고개를 주억거렸던 캐롤에게는 어쩐지 기분 좋은 진실이었다. 갑자기 월리스 가문의 전통을 따라줬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에도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마커스 제독은 아카데미의 수업에서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지만, 그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질 수 있게 지원해준 사람도 많다면서 월리스를 언급했다. 캐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해서라면 늘 귀를 세우고 다녔다. 그녀는 제독으로부터 인류가 잘못 창조한 피조물들과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 모두를 위했던 운동도 들었다. 200년이 지나고 그것은 맥코이나 월리스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무 혹은 가풍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캐롤이 들고 있는 서류는 이를테면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최근 가이드라인을 주입받고 이를 신고하러 스타플릿 산하 메디컬 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마커스는 딸에게 신고만 마치고 오면 왜 캐롤에게 월리스들이 따라야 하는 역사에 합류하길 권유했는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캐롤은 어렴풋하게 보이는 센터의 지붕을 보고 더 열심히 발을 놀렸다. 그녀의 몸에 처음 들어온 가이드라인도 그녀와 함께 흔들리고 있을 것이었다.


  캐롤은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 메디컬 센터로 들어갔다. 그녀는 안전하게 안내 데스크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가이드라인을 주입받은 걸 신고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직원은 머릿속에서 오래된 정보를 뒤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라인과 관련해서 따로 업무부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레너드 맥코이 소령님께 가 보시는 건 어떨지요. 스타플릿에 소속되어 있는 가이드들은 맥코이 소령님이 관리하시는 걸로 압니다.”


  직원의 제안은 꽤나 논리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이드에 관해 맥코이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캐롤은 직원에게 맥코이 소령의 사무실까지 안내를 받은 뒤 승강기가 마련된 구역으로 이동했다. 


  비범한 양심을 발휘한 학자의 자손으로서 지키면 바람직한 일, 즉 가이드라인을 주입받기 전후로 캐롤은 진화전쟁과 얽혀 있는 책들을 탐독했다. 캐롤은 전쟁의 원흉이었던 강화인간들은 이제 레비나스 맥코이의 의견을 따라 센티넬이라 불리고, 그들이 잠든 뒤에야 생겨난 센티넬의 반쪽이 가이드라는 것부터 정립했다. 어느 서적에나 조금씩은 언급되어 있는 맥코이의 이론이나 사상들도 그녀의 머리에 차근차근 쌓였다. 자신의 센티넬을 만나지 못하고 반성을 거듭해야만 했던 그의 일화들은 캐롤의 가슴에 잠시 머물다 간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가이드가 되어 맥코이를 만난다는 건 우습게 여길 일은 아니라고 캐롤은 판단했다. 덕분에 캐롤은 평상시보다 정중하게 소령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령님?”


  가운은 벗어서 의자 뒤에 걸어 놓은 채 파란색 유니폼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 레너드 맥코이 소령은 레비나스의 유지를 이을 만큼 영민하면서 자각이 있는 인물인지, 하다못해 그가 의사인지 함선 운행에 전면으로 나서는 승무원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캐롤을 맞이했다. 


  “캐롤 마커스 대위입니다. 가이드에 대해서라면 소령님을 뵈면 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캐롤의 말을 들고 레너드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의문점이 사라졌다. 그가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틀린 말은 아니지. 무슨 일인데?”


  캐롤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내밀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레너드는 종이의 윗부분을 슥 눈으로 훑자마자 그녀가 찾아온 용건을 파악했다.   


  “…제독님 집안에도 인간학을 견인했던 학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

  “어머니께서 월리스 가문에 속해 계십니다.”

 

  캐롤은 소령의 안색을 살피며 월리스들에 대해 설명할 타이밍을 재려 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200년 전 역사에 관해서라면 전문가인 마냥 쉽게 납득해버리고 서랍을 뒤적거렸다. 캐롤은 그가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은 보관하고 특정 데이터베이스에 그녀의 이름을 등록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캐롤이 자세를 살짝 바꿔 레너드를 마주했다.


  “보통 가문을 따라서 가이드라인을 주입하는 시기는 20대 이전인데, 왜 이제 와서 가이드가 되려고 했는지. 앞으로도 평생 센티넬을 만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저도 다는 모릅니다.”


  레너드는 어리둥절해졌다. 아직 마커스의 말을 듣지 못한 캐롤은 진실하게 답변했다는 떳떳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쁜 일 같지는 않았거든요.”


  캐롤은 그 뒤 정중한 인사를 남기면서 밖으로 나갔다. 







  레너드 맥코이는 주변이 진한 회색빛으로 젖었을 즈음에 집에 도착했다. 혼자 쓰기엔 그럭저럭 건실한 가구들이 적정한 불빛을 받으며 레너드의 눈앞을 채웠다. 그는 가방이라든가 겉옷을 내려놓자마자 손부터 씻었다. 함선 안이든 직장 근처든 집에서 취사를 할 일이 많지 않은 그의 주방은 건조한 편이었다. 


  레너드는 종일 그의 신경을 사로잡고 있었던 주제를 털어내기 위해 방으로 갔다. 침상은 거실에 있는 지라 내부는 책장이 거의 점령한 모습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의 아랫부분을 일직선으로 훑으며 필요한 책을 수색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잡힌 건 레비나스 맥코이의 저서였다. 처음부터 어긋난 이래 어떤 가이드도 센티넬을 돌봐준 적이 없거늘 레비나스 맥코이는 학계에서 다뤄져야 하는 학자였고 꾸준하게 조명 받아야 하는 위인이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흥미로 인해 읽어본 적은 없었던 조상의 글을 두어 번 매만졌다. 


  이제 막 가이드로 임명받은 대위가 가이드에 대해 시원스레 내린 정의가 레너드의 한 귀퉁이에서 간질간질 솟아올랐다. 가이드가 된다고 해서 나쁜 점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전범의 혼란한 내면을 부드럽게 쓸어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건 오히려 바람직한 축에 속했다. 


  레너드는 오래간만에 레비나스 맥코이의 책을 펼쳤다. 성공적으로 맺어질 수도 있었던 가이드와 센티넬, 즉 저자와 칸 누니엔 싱의 일화가 담긴 물건이었다. 







  센티넬은 포근한 담요처럼 뺨을 감싸는 온도에 본능적으로 몸을 맡겼다. 빙하가 되어 쌓여도 이상하지 않을 응축된 냉기가 심연에서부터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센티넬은 뒤척이면서 잡히지 않아야 마땅한 온도를 손에 쥐려고 했다. 


  현재 센티넬은 무엇이 가능하고 현실적인지 가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센티넬은 줄곧 비틀리고 억눌려 있다가 예기치 못한 때에 해방을 맞이하면 어쩔 줄 모르는 근섬유 덩어리였다. 그러니 센티넬은 자신이 등을 붙이고 있는 지면이 딱딱하지 않다는 것과, 그저 온도인 줄 알고 붙잡았던 게 누군가의 손목이란 것까지 깨닫는 데에 몇 분을 더듬거렸다.


  가장 원초적인 단위에도 자유가 깃든 듯이 센티넬은 가벼워졌다.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센티넬은 막 탄생하는 존재처럼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존, 정신이 드나요?”


  목소리는 센티넬이 강하게 그러쥐고 있는 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시야가 탁해 센티넬은 반복해서 눈을 깜빡였다. 눈앞을 닦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느라 센티넬은 자신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분석하는 일을 뒤로 미뤘다.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날 기다리는 센티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기가 어렵더라고요.”


  눈동자가 온갖 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자 센티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순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손은 하얀 팔목을 지나 짧은 금발을 지닌 여성에게 이어져 있었다. 센티넬은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금발 여성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지 않았었다. 센티넬은 여성이 누군지 몰랐다. 


  “…당신은…?”

  “캐롤 마커스에요. 당신의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캐롤이 허리를 구부리고 센티넬에게 가까이 다가와 웃었다. 


  “당신이 가이드를 얻게 된 첫 번째 센티넬이에요, 존. 내가 존이라고 부르는 거 괜찮죠?”


  기분 좋은 온기가 여전히 센티넬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센티넬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센티넬과 가이드 모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칸 누니엔 싱이었다.







  캐롤은 가이드를 만난 후에 더 혼돈에 휩싸인 듯한 센티넬을 동정해 기꺼이 자리에서 물러나주었다. 예기치 못하게 짝을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어리둥절한 법이었다. 캐롤은 몹시도 맑아서 되려 정돈이 필요해 보이는 센티넬의 눈동자를 보고 그의 상태를 납득했다. 당연히 그것은 칸의 위장이었다.


  칸은 자신의 몸부터 살펴보았다. 그의 복장은 검은색이긴 했는데 전과 형태가 달랐고 둥그런 화살표 같은 마크도 새겨져 있었다. 극저온 캡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야가 닿는 곳엔 보이지 않았고, 그가 위치한 공간은 강화인간의 지성도 근본을 알 수 없는 양식과 도구들로 가득했다. 칸은 퍼즐 조각의 밑바닥을 하나씩 들춰보듯이 주변을 세심하게 돌아보았다.


  캐롤 마커스라는 여자, 그리고 그보다 낯선 가이드라는 낱말의 여운이 칸의 몸속을 계속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칸은 기회를 봐서 가이드란 게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두었다. 캐롤 마커스는 그의 이름부터 잘못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좀 더 거짓을 불어넣는 게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본격적으로 주변을 뒤져 보면서 정보를 얻고자 일어났던 칸은 눈동자마저 잡아 세우며 동작을 멈췄다. 강화인간의 감각은 변함없이 우수했다. 칸은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은 내버려두고 칸은 통로 쪽을 등진 자세를 취했다. 그의 뒷모습에 누군가 의심할 구석은 없었다. 


  칸은 발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얼굴을 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썩 밝아 보이지는 않은 이곳에 찾아오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서두르지 않아도 용건을 말할 거라는 추측이었다. 과연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는 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중령님이 요청하셨던 제작 계획서를 패드에 넣어두었습니다.”


  역시 칸이 모르는 인물이었다. 단지 남자의 태도가 사무적이라 칸도 무뚝뚝한 태도로 고갯짓했다. 그러면서 칸은 남자가 입은 옷차림을 빠르게 살폈다. 칸은 남자가 언급한 호칭과 서로가 입은 옷이 비슷하다는 걸 기반으로 자신이 유니폼을 지급받고 계급이 정립되어 있는 단체 혹은 사회에 속해 있음을 유추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더불어 의문점도 얻었다. 중령이라는 직책을 받는 동안 칸은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약간도 기억하지 못했다.


  칸은 남자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패드라는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살짝 무게감이 있는 네모난 물건의 이름이 패드였다. 칸은 본능적으로 실험체라는 말을 각인했던 순간처럼 정보를 하나씩 저장했다. 오필리아 밀레이스의 놀란 얼굴과 자신이 생후 처음 냈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도, 이 낯선 정경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 잠깐 그를 언짢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칸의 이성은 빠르게 최상층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의 이성은 본래 믿음직스러웠지만 전보다 더 민첩해진 것 같았다. 칸의 손목은 지금도 캐롤 마커스의 체온을 품고 있었다. 칸은 패드를 학습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패드는 칸에게 협조적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컴퓨터와 비슷하다 싶더니 조작법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칸은 패드 안에 있는 데이터를 모두 열어보기로 하고 화면을 눌렀다. 별안간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데이터는 컴퓨터의 언어 체계처럼 검고 하얗기만 한 그림이었다. 칸이 미간을 좁혔다. 수많은 챔버를 거느린 함선의 청사진이 그의 손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완성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구상도를 손끝으로 일일이 짚어가던 칸은 청사진 말미에 있는 서명을 발견했다. 존 해리슨 중령이라는 글씨로 인하여 칸은 또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존재는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업을 이미 이 세계에서 달성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3시간을 잠들고 깨어난 칸은 꿈이 뇌리에 생생한 흔적을 남긴 듯이 기억이 일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사실 칸은 본 건물에 대한 구조 파악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한 곳에 눌러앉아있던 것인데 아무도 그에게 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이것 역시 칸이 저장해 둘만한 정보였다. 그건 칸이 여기서 모종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칸이 차근차근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캐롤 마커스의 흔적이 증발했다. 어딘가가 허전했다. 


  “존, 안에 있나요?”


  그래서 마침 들려온 캐롤의 목소리에 칸은 만족스러워하고 말았다.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능력을 부여받고도 결핍감과 불안정한 기분에 시달려 왔던 강화인간에겐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캐롤이 계단 한 칸을 넘어 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집에도 갔다 오지 않은 거예요?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간다더니 정말이네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넘쳐흐른 기억 때문에 칸은 패드를 건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어느새 생겨 버린 몇 십 시간의 틈을 조용히 정리했다. 


  “전해줄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곰곰이 돌이켜보니 당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아서 말이죠.”


  캐롤이 가져온 책 세 권을 그의 책상 위에 쌓았다. 


  “2세기 동안 쌓였던 걸 전부 흡수해야 할 테니 좀 힘들 거예요. 이걸 다 보면 전에 내가 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이 센티넬이나 가이드에 관한 지식을 좀 더 갖추게 되면 서로 얼굴 보는 일도 쉬워질 거고요.” 


  그녀가 가져온 책들은 비교적 두꺼운 것들이었다. 한 페이지에서 몇 개의 사실을 추출해 낼 수도 있는 칸은 반사적으로 사고를 작동시키려다, 캐롤이 책상과 거리를 두며 돌아갈 듯한 태세를 취하자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행동의 순서를 바꿨다.   


  “…캐롤이라고 불러도 되나?”


  캐롤의 눈동자가 커졌다. 칸이 말을 걸어준 것에 놀란 눈치였다.


  “네, 얼마든지요.”

  “지금 떠날 건가, 캐롤?”


  눈이 커진 상태에서 눈썹까지 올라가니 이제 캐롤의 표정에는 놀랐다는 기색이 완연히 차올랐다. 


  “원래 이 시간은 당신이 작업을 한다고 들어서…. 아닌가요?”

  “당신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로 칸은 자신이 직감적으로 원하는 것과 계획적으로 취하고 싶은 것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예전부터 강화인간들은 불완전한 무언가를 수정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추진력 있게 실행해왔다. 그와 아는 것이 너무나 다른 캐롤은 이를 모른 채 호의 섞인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죠. 가이드를 원하는 센티넬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요.”


  센티넬은 흡족함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알렉산더 마커스는 근래 들어 자신의 그림자에 행운의 여신이 깃든 게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설마 관련이 생길 줄 몰랐던 과거의 선택마저 그의 이익을 챙겨주는 사슬에 포함되고 있으니 이보다 반가운 행운이 없었다.


  마커스는 아카데미 시절 가벼운 마음으로 집었던 책을 읽고서 센티넬에 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장 신분이 생도일지언정 젊은 마커스는 그 때도 함선과 제독의 빛나는 어깨를 그리고 있던 지라, 큰 이질감 없이 자신의 손에 떨어진 센티넬을 그려보곤 했었다. 레비나스 맥코이 등 센티넬을 연구했던 유명한 학자들의 책에는 사진이 실려 있지 않아 젊은이는 거침없는 상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생도 마커스가 이리저리 지어내는 칸 누니엔 싱의 실루엣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센티넬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자는 칸뿐이었다.


  이렇다고 해서 그가 월리스를 사랑하는 일마저 공상에 가까웠던 미래상 속에 포함시킨 건 아니었다. 월리스들의 역사를 전해 듣고 우리는 처음부터 접점이 있었던 거라며 아내를 웃게 만든 게 전부였다. 제독이 되고도 센티넬에 관한 마커스의 관심이 사그라진 건 아니었으나 그것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페인트 벽화와 같았다. 베일에 싸인 인조인간과 얽힌 감정들은 영영 시간에 씻기길 기다리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알게 모르게 행성연방을 견제하는 세력들이 많아지면서 증축을 거듭하게 된 스타플릿의 신축 건물에 묻혀 있던 극저온 캡슐은 그러므로 마커스에겐 짜릿한 행운이었다. 이젠 일상 같은 아내의 이름과 오래 전 추억에 활기를 불어 넣은 빛나는 숨결이었다.


  극저온 캡슐을 발굴해낸 마커스는 가장 앞쪽에 있던 장치를 열어보았다. 까만 머리에 성운의 빛을 뒤집어쓴 블랙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강화인간이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마커스는 지시를 받은 엔지니어들이 극저온 캡슐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동안 200년 전 데이터들을 열성적으로 긁어모았다. 센티넬에 관한 모든 논문과 기사들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마커스에게 도움이 되었던 건 전범 재판을 다룬 가디언 지의 스케치 자료였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그림을 첨부자료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기자가 마커스에게 칸의 얼굴을 알려주었다.


  마커스는 그 날 곧바로 엔지니어들의 작업실로 내려갔다. 


  “아직 멀었나?”


  치프 엔지니어는 예고도 없이 얼굴을 불쑥 내민 제독을 보고 놀랬다가 간신히 예를 갖췄다.


  “아니요, 제독님. 사실 지금도 각성을 유도할 수 있기는 합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엔지니어들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극저온 캡슐은 처음 발견된 당시처럼 깨끗하고 홀로 놓여 있었다. 마커스는 엔지니어들이 요청했던 장비가 캡슐과 하나도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걸 보고 눈썹을 꿈틀댔다. 치프 엔지니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동면 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에 일부 조직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 세포가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억을 잃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캔에 잡힌 세포의 활동 양상이 미약합니다. 지금 깨우면… 그의 의식은 아마 백지상태일 겁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거예요.”


  마커스가 엔지니어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마친 뒤 스르르 내려간 엔지니어의 입꼬리와 어깨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단호히 명령했다.


  “깨우게.”

  “예?”


  마커스가 캡슐의 표면을 톡톡 두드렸다. 


  “기억을 빼고 나머지는 멀쩡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뭘 고민하나. 당장 깨워.”


  제독은 책상의 좁은 면에 허리를 붙이고 팔짱을 꼈다. 치프 엔지니어가 눈을 껌뻑였다.


  “내가 그의 정체를 붙여주면 되니까.”


  제독의 완강한 태도를 뒤늦게 접수한 치프 엔지니어가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치프가 연구실에 우선 옮겨 놓았던 캡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다른 엔지니어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제독이 뒤에서 그들 모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배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치프 엔지니어가 제어판의 덮개를 열었다. 제독의 긴급 지시를 받들어 최선을 다해 캡슐을 연구했던 엔지니어는 실수 없이 계기판의 버튼들을 차례로 눌렀다. 2세기 간 멈춰 있던 캡슐에서 기계음이 새어나왔다. 그 옆으로 바이탈 사인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놓였다.


  이윽고 캡슐이 깊은 구동음을 내면서 울렸다. 뿌연 서리가 쌓여 있던 캡슐의 표면이 조금씩 맑아졌다. 제독의 발끝이 자리를 옮기고 싶어서 몇 번이고 미세하게 까딱거렸다. 


  새하얀 기체와 냉기가 캡슐의 양옆으로 빠져나왔다. 마커스가 더 참지 못하고 캡슐 옆에 붙었다. 


  “바이탈은 정상입니다.”


  생체 파동을 지켜보던 엔지니어가 알렸다. 유럽을 짓밟았던 전범의 하얀 얼굴이 안개 속을 빠져나오듯 빛을 받으며 23세기의 공기로 나오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여러 수치들을 보고 강화인간의 해동을 확인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침 마커스는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만나길 바랐던 청록색 안구를 마주했다.


  “자네가 깨어날 줄 알았네. 난 자네만큼 신임이 가는 인재를 본 일이 없었지.”


  제독이 회의실 안에서나 내보이곤 하던 웃음을 띠었다. 


  “돌아와서 기쁘네, …존.”


  인조인간이 새로 가지게 될 이름으로 말을 끝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마커스 제독은 그만 지독히 흔한 이름을 뱉어내고 말았다. 그래도 인조인간은 반응이 없었다. 제독은 유리알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아무렴 어떠냐는 표정을 지었다. 


  “존, 왜 그래요?”


  내내 자신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캐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캐롤이 가이드론에 관해 설명하는 걸 빠짐없이 외우고 있던 칸은 뜻하지 않게 일어버린 기억을 복원해버렸다. 그의 육체에 잠들어 있던 회복력이 가이드 덕에 원기를 얻고 시원하게 날뛴 덕분이었다. 칸이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별 거 아니다. 계속해.”


  캐롤은 칸 누니엔 싱을 통해 레비나스 맥코이가 얻었던 영감에 관하여 몇 마디를 더 늘어놨다. 가이드까지 곁에 둔 센티넬의 수장은 고요하고도 순조롭게 각성하고 있었다. 







  마커스 제독이 손수 이름까지 지어준 인조인간을 위해 마련한 직책은 중령이었다. 함장 직을 겸하는 게 당연시되는 대령에 임명하기에는 부담스러웠고, 앞으로 그에게 맡길 중요하고도 은밀한 임무를 생각하자면 소령 직을 줄 수는 없었다. 인조인간은 곧 존 해리슨 중령이 되었다. 마커스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엉겨 붙은 얼음 덩어리를 떼어내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커스는 그에게 가이드를 붙여줄 마음이 없었다. 48시간만 있으면 함선에 장착할 수 있는 신무기의 도면을 뚝딱 만들어 내는 중령의 능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각성 20일 째부터 존 해리슨의 능률이 떨어졌다. 수면 시간이 늘었고, 엔지니어들이 달라붙어서 구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의 설계도가 나오는 데 60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마커스는 자신의 센티넬을 보며 고민했다.


  사랑하고 아끼는 월리스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건 그 때였다. 

 

  마커스는 가이드로 인해 존 해리슨이 기억을 되찾을 위험성과 그가 가이드를 얻으면서 발휘할 수 있는 더 큰 능률을 신중히 쟀다. 이 무렵만 해도 마커스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센티넬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가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커스는 이를 가이드만 잘 붙잡고 있으면 센티넬은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캐롤 마커스는 이와 같은 계산을 거쳐 가이드라인을 주입받는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복잡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흡족해지는 생각들을 마친 마커스가 제복 재킷을 챙겼다. 그는 캐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센티넬에 관한 얘기도 들을 심산이었다.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 마커스는 건물을 나가기 전 캐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도 지금 나가려고 준비 중이에요. 늦은 건 아니겠죠?

  “물론이다. 오늘 많이 바빴니?”

  —존이랑 같이 있느라 사실 일을 많이 못 했어요. 그래도 버거울 정도는 아니라서 내일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해리슨 중령을 말하는 거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멈춰 선 마커스는 캐롤의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네. 같이 있어달라고 하더라고요. 옆에서 지금까지 정립된 인간학이라든가 가이드론에 관한 내용들을 많이 알려줬어요.

  “그랬구나. 만나서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자. 내 딸이 얼마나 훌륭한 가이드인지 들어보고 싶구나.”


  캐롤은 대답 대신 웃음소리를 남기며 통화를 끊었다. 마커스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캐롤이 막 벗어나는 중인 장소는 그녀가 자주 가는 궁학 연구소라든가 시뮬레이션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신식 건물이었다. 그곳은 정확히 존 해리슨이 사용하는 공동이 설치된 장소였다. 얼떨결에 캐롤은 이 시간까지 센티넬의 결을 지켰다. 


  책임감 있는 성격상 캐롤은 이것도 가이드의 임무라고 여기면서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담당하는 건 존 해리슨이지, 칸 누니엔 싱은 아니었다. 





- 독자들의 인식하는 타임라인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검수하면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ㅁ;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이 책은 지금까지 다양한 정보와 사실과 때론 내 개인적인 의견도 제시해왔다. 종류와 내용은 다양했을지 모르지만 그들 중 어느 것에도 적어도 의문점이 드는 면모가 많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번 장을 빌어 독자들에게 한 가지 궁금한 걸 내민다고 너무 질책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책을 끝맺고 있는 이 순간에도 내 몸에 특수한 장비를 들이댄다면 딱 한 번 구부려진 이중나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당신의 유전자 하나를 변형하려고 하니 협조해 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힘들어서 내가 날 상대로 실험을 했다는 증거다. 그것이 앞에서도 여러 번 나왔던 가이드라인이다.


  그런데 솔직히 그게 나에겐 영향을 준 적이 없어서 과연 내가 옳았는지 알 길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이게 어느 한 종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고, 인간들은 복수와 가책의 그늘에서 비틀대지 않도록 굳건히 격려해 줄 수 있을 것인지 확신할 수가 없다. 내가 밝은 곳을 향하는 동행자로서 감히 선택했던 강화인간은 깨어날 수 없는 잠에 들었다고 한다. 


  책을 마쳤지만 나는 사람들을, 그리고 칸 누니엔 싱을 비롯한 강화인간들을 어디로 인도하려고 했는지 깨닫지 못했다.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 나에게 그걸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섞여 있기를 바란다.  



『인간의 감시자에 관한 어려운 진실』중 최종장에서, 레비나스 맥코이 지음.  





History of Independence : PAST
fin.
The next part will continu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7. 인간학



  이 장은 그야말로 레비나스 맥코이를 위한 챕터이다. 더불어 강화인간들을 잠재워 버릴 캡슐을 만들 엔지니어와, 무너진 고향을 보살피러 영국으로 떠났어도 여전히 사람들이 주목하는 헤이스팅스의 뒤편에서 노력한 의학자의 결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 인간학에는 신유전학이나 상호구조론과 같은 여러 분과가 있다. 허나 맥코이가 살던 시대 인간학은 곧 가이드론이었으며 여기서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도 그것이다.


  센티넬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계기라고 알려진 맥코이의 발언은 『인간의 감시자에 관한 어려운 진실』이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다. 제목에도 ‘감시자(Sentinel)’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이 책은 맥코이가 감옥 안에서 나누었던 칸과의 대화를 세세하게 옮겨 적고 그에게서 알아내거나 과학적 영감을 받은 부분들을 설명해 놓은 인간학의 고전이다. 이번 챕터는 상당부분 그 책에 의존하여 진행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캐서린과 오필리아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헤이스팅스가 출국하고 나서 맥코이는 칸 말고도 인류가 붙잡아 두고 있던 강화인간들의 전체적인 상태를 모두 관리하게 되었다. 강화인간들의 주치의와 마찬가지인 직무를 맡은 셈이었다. 맥코이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강화인간들이 사망하지 않고 형을 집행 받을 수 있게 관리하는 한편 칸에게 집중되어 있는 자신의 연구도 이어갔다. 


  학자의 말을 직접 살펴보기 이전에 결론을 먼저 정리하자면 맥코이가 칸과 함께 있으면서 정확히 알아낸 건 두 가지였고 한 주제에 관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하여 강화인간들이 동결된 후까지 연구한 끝에 자신이 힌트를 얻었던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이론을 집성했다. 가이드라인의 발명과 맞물린 가이드론의 서막이다. 







  철문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는 이 시간에 칸이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소음의 종류였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예전 대학병원에서 회진을 도는 것처럼 면담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칸은 가운 위에 코트까지 덧입으면서 감옥의 낮은 온도에 맞서려는 의사의 실루엣이 나타나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전과 같지 않았다. 레비나스가 힘을 쓰면서 신음하는 게 들려오더니 사각형에서 두 선분을 지워낸 모양을 한 수레가 나타났다. 책들이 여럿 쌓여 있고 분류대로 묶인 것 같은 파일들, 그뿐 아니라 작은 스탠드부터 과자봉지들이 비죽 튀어나와 있는 바구니 등 아무리 봐줘도 살림살이 품목에 들어갈 법한 물건들이 수레 위에 놓여 있었다. 칸은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부피를 차지하는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레비나스는 칸에게 손을 빌릴 생각은 없는 듯 느릿하게나마 수레를 밀어 비어 있는 감방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감옥 안을 나가더니 물을 묻힌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칸이 그제야 미간을 좁혔다. 레비나스는 감방 안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레비나스는 용케도 칸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짐을 풀기 전에 주변은 닦아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에 있겠다는 소린가.”


  칸이 행동반경을 조금도 넓히지 않고 딱딱하게 물어오는 태도에서 속도만을 빌린 레비나스의 답변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은 아니라도 당신과 있는 시간을 좀 늘려보려고요.”


  레비나스가 부지런히 책상을 닦았다. 두 달간만 운영될 그의 연구실이 차근차근 먼지를 벗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두 달이면 강화인간들의 명수에 맞게 극저온 캡슐을 제작할 수 있대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예요.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감방을 임시 연구실로 꾸미는데 3시간을 넘게 소비해버린 레비나스가 빨개진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칸의 위치는 여전히 침대 위고 레비나스는 그가 용기 있게 빼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화인간의 감옥은 당연히 흘러가는 시간조차 빨아들이는 곳 같았다. 


  죽음이든 첨단 족쇄든 자신이 봉인될 걸 알고 있었던 칸은 레비나스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왜 오필리아였는지.”


  이번에 칸은 레비나스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녀를 알고 있었나.”  

  “캐서린만큼은 아니지만 친분이 있었습니다. 캐서린이 연구에 참여해달라면서 오필리아를 언급했을 때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는 친했지요.”


  강화인간이 숨결에 섞어 내뱉은 웃음이 찬 공기에 흘러들었다.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던 창조자는 연구소 밖에서 그 위치가 더 컸던 모양이었다. 칸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닮은 구석이 있는 연구자에게 물었다.


  “헤이스팅스가 했던 물음을 되풀이할 생각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접전에 관해서는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아는 레비나스는 칸의 말뜻을 명료하게 알진 못했다. 그래도 레비나스에겐 그녀의 머리가 자신과 비슷하게 작동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니요, 나는 정말 당신이 왜 오필리아를 점찍었는지 궁금한 겁니다. 당신 말처럼 골턴의 과학자들이 뭘 해 줬다고 당신은 그렇게 창조자와 밀착하려 한 건지 알고 싶어요. 당신들에게 과학자들은 원수면 원수지 보통 우리가 말하는 부모님 같지는 않았을 텐데요.”


  레비나스는 잠시 쉬었다. 이태까지는 이 도시에 캐서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꺼내기가 어려웠던 어느 무거운 덩어리였다.


  “아니면 그녀가 당신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좋아하고 있던 유일한 인간이라는 걸 눈치 채서 그랬습니까?”


  강화인간의 안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레비나스는 칸이 희미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 걸 지켜보았다. 어딘가에서 껄끄러움을 감지한 것 같았는데, 그와는 큰 인연이 없었던 감정적인 주제를 꺼내서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그의 우수한 지성을 언짢게 한 건지 구별되지는 않았다. 레비나스는 자신을 가다듬듯 눈을 깜빡이고 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모르겠군.”


  레비나스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모르겠다고요?”

  “특별히 이유를 정해놨던 건 아니다. 깨끗하게 나뉘는 답을 주긴 어려운 질문이군.”

  “그럼 이건 어때요. 나는 당신이 모르겠다는 그 이유를 당신의 직감이나 본능에 의지해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이 접근은 타당한 것 같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칸이 이성과 계산을 통해 답변해 줄 수 없는 종류였다. 칸은 이때만큼은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좋을 대로.”







  맥코이는 맨 처음 센티넬이 동시에 여러 명의 가이드를 거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소한 그들의 입장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는 1:1로 대응해야 한다. 우연히 센티넬을 스쳐 지나가는 가이드는 있을지 모르나 센티넬이 온몸으로 품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으리라는 거다. 그 누구보다 센티넬로서 자각이 뛰어났던 칸이 다른 박사들에게 가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 밀레이스의 자질을 파악하려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칸이 밀레이스가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하필 모른다고 일축해버렸던 것도 맥코이에겐 하나의 단서였다. 그는 비상한 강화인간조차 제대로 단정 내릴 수 없는 것은 이성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게 분명할 거라 생각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센티넬은 본래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며, 그렇기에 가이드를 찾아 나서는 여정도 정교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본능적인 필요에 의해 좌우된다는 맥코이의 설은 시간이 흐르고 리서칭이라는 번듯한 학술 용어를 갖게 되었다.


  밀레이스와의 일을 어떤 명분, 혹은 개인적인 역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접근했던 맥코이의 전략은 좋은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더 가치 있는 문제의식이 맥코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냉랭하게 방치되기만 하던 철제 책상에 뚜껑 있는 컵이 하나 올라갔다. 그것도 이번에 추가된 감옥 내 신선한 풍경 중 하나였다. 레비나스가 마시는 음료가 책상을 은근히 덥히는 동안 칸은 그에게 팔을 대주고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로 칸의 두꺼운 피부층을 효과적으로 찌르는 방법을 알아낸 레비나스가 어렵지 않게 칸에게서 혈액을 채취했다. 


  “가급적이면 나 혼자서 당신이 했던 그 추상적인 발언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레비나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시간이 촉박해지는 만큼 레비나스가 한 번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칸은 주사기가 채워지는 찰나도 알뜰하게 쓰려는 인간의 노고를 무표정하게 기억해 두었다. 


  “앞뒤 맥락이 지나치게 생략되었군.”

  “2년 8개월 동안 당신이 만들게 되었다는 고통을 쌓는 제단 말입니다. 가시적이지 않은 감정이 당신한테는 정말 형체가 있는 물체로 취급되는 것 같더군요.”


  레비나스는 바늘을 빼고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거즈로 바늘이 들어갔던 주변을 닦았다. 핏자국이 거즈에 흡수되자마자 칸의 피부가 차오르듯 뾰족한 자국을 덮었다. 목덜미 뒤에서 샘플용 조직을 떼어 냈을 때나 가볍게 피를 뽑아갈 때나 그의 대응이 같았다.   


  “그걸 지금까지 묻지 않고 참고 있었나.”

  “충분히 노력한다면 밝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레비나스가 쓰레기통 대신 준비한 비닐백에 용도를 다한 주삿바늘이 들어갔고 칸이 검은 소매를 내렸다. 여태 쓸모없던 책상 위에 레비나스의 물건들이 또 쌓였다. 


  “아마 그것은 우리들의 한계였을 거다.”


  칸이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인간들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여럿 갖고 있지 않나. 우리는 인간들에게 없는 여타 능력들이 있는 대신 평안을 찾는 경로가 어렵게 설계된 건지도 모르지.”

  “…인간보다 뒤지는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한 겁니까,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레비나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이면서 칸이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정도가 늘어간다고 속으로 놀라워했다. 싸늘한 성격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고려하면 거의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비나스는 그의 변화를 굳이 의심하려 하진 않았다.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3년도 안 걸려서 반쯤은 접근했잖습니까.”


  레비나스에겐 사실 중요한 물음이었다. 다만 칸의 반응이 무심했다. 


  “나한테는 별 소용없는 얘기로군. 생각이 있다고 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항도 아니다.”


  강화인간은 여전히 빈틈없도록 이성적이었고 냉정했다. 할 말이 없어진 레비나스는 그만 연구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정말 당신은 날 연구하는 일 말고 할 게 없는 건가.”


  깊고 복잡한 사고 속으로 침잠할 것 같던 강화인간의 눈동자가 다시금 또렷해졌다. 정해진 속셈이 없으면 인간과 잘 닿지도 않는 시선을 레비나스는 의아하게 받아들었다.


  “갑자기 뭔 소리에요? 여기 없는 시간에 나는 당신의 동료들을 돌봅니다.”

  “캡슐 제조에 전혀 참여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이번 물음에는 칸이 극저온 캡슐에 대해 레비나스에 대해 알아낼 거리가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은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헌데 레비나스는 물 한 모금으로 강화인간의 복잡한 계산을 씻어내 버렸다.  


  “전공도 아닌 분야에 끼어들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기술자들이 튼튼하게 잘 만들 겁니다.”


  레비나스가 칸의 혈액을 가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나는 의사입니다. 당신들을 파멸시키는 데 솔직히 일조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몹시도 좁습니다.”


  레비나스는 양손에 개인용품들을 꽉 채우고 멀지 않은 연구실로 들어갔다. 쇠창살도 구석으로 몰려서 변변한 출입문조차 없는 작고 열린 공간이었다. 칸은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기계가 구동하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나 이따금 레비나스가 짓는 한숨 등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칸은 침상에 누웠다. 그에게 위해를 입히지 않는 기계의 소음이 안정적인 파동처럼 그의 귓가를 감쌌다. 







  칸은 고작 유사-가이드 관계를 짜내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한계라고 표현했다. 실상 가이드는 센티넬의 한계가 맞다. 유전적 조작과 큰 차이점이 없는 조율 및 정착을 거쳤던 관계조차 가이드를 완벽히 대신할 수 없었으니, 센티넬들은 그야말로 어떤 점에서 독립성이 묶여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칸이 이것을 곱게 보지 못했던 건 당연하다. 반면 맥코이는 강화인간이 아니라서 새로운 접근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사-가이드 관계의 약점은 문제를 한 곳에서만 풀려고 했다는 점이다. 칸은 동족이 아닌 다른 존재를 끌어들일 생각을 못 했다. 자신들의 영원한 적에 불과한 인간을 안으로 불러들여 문제를 공유하고 그의 해결책을 들어보는 일 따위를 센티넬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맥코이는 여기서 칸과 다른 노선을 걸은 것이다. 전쟁도 끝난 상황에서 그는 강화인간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정립했고, 가장 먼저 센티넬의 비극을 감싸준 장본인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맥코이는 센티넬의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자 온갖 실마리가 숨어 있을 그들의 육체에 집중했던 칸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도 강화인간의 본질 역시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도 끌어왔다. 맥코이는 센티넬과 인간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통점 혹은 다리를 찾으려 애썼다.


  맥코이는 완성한 작품을 하나씩 분해하듯 칸의 세포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서로 다른 요소를 모조리 골라내 일종의 지도를 그렸다. 센티넬 스파이럴 아래 똘똘 뭉친 유전인자들을 보며 맥코이는 우선 고개부터 저었었다. 사람의 염색체를 그런 식으로 묶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코이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센티넬 스파이럴이었다.


  한 달 하고도 2주가 더 지났을 때 맥코이는 인간이 센티넬 스파이럴과 비슷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될지 고심해보게 되었다. 어쨌든 사람에게도 어떤 끈이 있다면 센티넬과 정상적으로 맺어질 가능성도 생겨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맥코이는 이것을 확인해보고자 처음에 임상실험자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임상실험자가 나올 리가 없다고 단념해버렸다. 여태껏 없었던 형식의 실험이었고 도중에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 지는 맥코이도 몰랐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해보기로 결심하기로 하고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그는 칸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어서 러시아 땅에 머물고 있었을 뿐 한 번은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부서진 유럽과는 달리 북미 쪽에는 멀쩡한 연구소와 최신 설비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맥코이가 소비한 날은 겨우 이틀이었다. 그 이틀 만에 극저온 캡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센티넬과 가이드의 결합은 그렇게 멀어져버렸다.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가이드가 지체했던 2일은 200년으로 불어나 불과 몇 년 전까지 이어져 왔었다. 







  레비나스가 떠나고 나서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칸을 찾아왔다. 칸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연구실을 힐끗 보았다. 레비나스는 아직 자신이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그 증거로 연구실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가 어렵게 설치해놨던 컴퓨터라든가 자주 들고 다녔던 컵, 나중을 위해서 감방의 차가운 공기를 이겨내고 있던 책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있었다.


  적의 그림자가 이제 막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칸은 그 순간에 복잡한 사고를 했다. 레비나스가 택시를 타고 국제공항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여기에서 미국까지 가는 데 비행시간은 어느 정도일 것이며 탑승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그가 소식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인지 그의 연구자를 둘러싼 계산이 여럿 튀어나왔다. 칸은 레비나스가 누군가와 상의를 하고 일정을 짰을 지에 대한 확률도 고려해 보았다. 그는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문득 레비나스 맥코이는 누구의 믿음도 얻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일으킨 대가를 지불받으러 온 인간들은 칸의 목덜미에 일단 주사기부터 꽂았다. 칸은 낯익은 무력감을 느꼈다. 신경안정제에 근육을 이완시키는 약물을 푼 게 분명했다. 옛날 동족들이 날뛸 때 연구원들이 애용하던 처방이었다. 


  “여기다 옮겨.”


  칸은 손에 힘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그 때 그의 안구 위로 안약 몇 방울이 떨어졌다. 방울이 맺히는 모습부터 평범한 액체는 아니었던 안약은 칸의 눈동자와 그 주변에 달라붙어 불투명한 막을 형성해버렸다. 칸은 앞을 볼 수 없었다. 


  언제 강화인간의 회복력이 약물의 효력을 집어 삼킬지 몰랐으므로 인간들은 허겁지겁 칸을 들것에 옮긴 다음 그를 단단히 묶었다. 사형수들은 다 이런 취급을 받던가? 그러나 그 물음은 칸이 소리 내어 말한 게 아니라 사람들은 듣지 못했고, 그의 의식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이는 중이었다.


  팔다리가 바짝 조여진 기분만 아니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칸은 뜨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두 눈을 닫았다.


  뿌연 막이 여러 사람의 가운 자락을 닮은 듯했다. 


  “현재 죄수를 이송하고 있습니다. 아직 별 이상은 없습니다.”


  칸은 다른 사고력과 마찬가지로 꾸벅거리고 있는 수학적 감각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그는 레비나스가 미국의 어느 공항에 도착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봤던 뉴욕의 JFK 공항을 도착지로 잡고 비행 거리와 소요 시간을 연산했다. 레비나스는 비행기 안에 약 9시간쯤 있을 예정이었다.


  물론 레비나스가 벌써 비행기에 탑승한 건 아니었다. 그는 방금 전에 가방을 부치고 티켓을 받았다. 두 손이 한결 가벼워진 레비나스는 일단 로밍 센터에 들르기로 했다. 


  레비나스는 아직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데 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아무도 그의 간이 연구실이 폐쇄되고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가 제일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인 캐서린이 영국에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공항 안을 돌아본다고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득이 없는 레비나스는 탑승 게이트 앞에서 앉아있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레비나스가 여권과 비행기 표를 들고 움직이는 동안 그의 기묘한 실험체는 평생의 족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주세요.”


  친분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물체가 오고갔다. 레비나스는 그렇기에 공항 직원을 별 말 없이 통과했으나 칸의 주변을 차지한 이들은 관계가 깊은 듯했다.


  감옥보다 낮은 온도가 강화인간의 콧날을 휙 소리 나게 지나쳤다. 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 그는 계속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작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혹시 제작 상에 하자가 없는 지는 체크했나? 예상했던 것보다 완성된 날짜가 빨랐으니 어딘가 허술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다른 캡슐들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저 놈을 넣어둘 것만 일찍 만든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칸이 제일 자주 듣는 목소리가 새롭게 물었다.


  “그가 왕복 항공권을 사지 않았던가? 도착일이 언제지?”


  칸은 대번에 애매한 호칭 아래 숨겨진 레비나스 맥코이의 이름을 읽어냈다.


  “9일 뒤였던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충분히 다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서두르는 것도 좋지만 확실히 처리하도록.”


  칸은 참을 수 없이 옳기만 한 자신의 예감에 웃고 싶었다. 그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마지막에 뜻대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건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칸은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레비나스 맥코이를 비웃었다.


  검사대를 지나고 면세점들이 늘어서 있는 구역에 도달한 레비나스가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레비나스는 캐서린에게 줄 만한 선물을 고르고자 화장품 코너로 들어갔다. 선물이라도 사다 놓으면 그걸 핑계 삼아 캐서린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향수병이 진열된 곳에서 향을 맡아보다가 캐서린이 쓰던 제품을 찾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지점에서도 멀기만 한 영국 땅에서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이어폰을 꽂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그녀는 정치인을 상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놓였다.


  캐서린은 전화기로 양이 부족한 구호물품을 요청할 기관을 지정해주고, 상대적으로 넉넉한 물건은 어떻게 나누면 좋을 것인지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상대방이 골턴 연구소가 있던 터에 지어질 기념관에 대한 시안들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잠깐만요, 금방 확인할게요.”  


  방에 들어간 캐서린은 노트북을 들고 다시 거실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았다. 대기모드 상태였던 노트북은 빠르게 빛을 되찾았다. 캐서린은 작업 표시줄에 있는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탭의 순서상 제일 앞에 있던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보고 캐서린은 순식간에 메일 계정에 접속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칸 누니엔 싱의 동결형 집행.


  캐서린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진행 중이던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레비나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캐서린은 레비나스의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무심한 안내 메시지를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몇 번 깜빡거리다가 백그라운드 화면으로 돌아가 버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칸이 잠드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이 순간 레비나스와 연락이 닿지 않는 것만으로 캐서린은 이상하게 당황스러웠다. 


  캐서린이 자신의 손에 있던 모든 걸 놓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사실은 캐서린이 운이 좋아 누릴 수 있는 감정의 변화였다. 칸 누니엔 싱은 아득한 지하의 가장 차가운 공간에 묻혔고,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레비나스 맥코이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6. 한 과학자의 양심



  맥코이가 헤이스팅스를 도와준 부분은 크게 두 영역이다. 먼저 가이드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센티넬들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상해 있는 지를 세세하게 밝혀내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승산이 없는 게 아니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과학자였던 헤이스팅스가 미흡할 수 있는 부검과 해부 작업 등을 철저하게 실시해 헤이스팅스가 센티넬 스파이럴을 발견할 수 있는 여지도 열어주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맥코이는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만약 레비나스의 학문적 수준이 뒤졌다면, 그가 헤이스팅스의 의견을 비집고 드러내는 데에 앞장서진 못했으리라.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이용해 칸과의 면담을 따낸 맥코이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기자들도 바쁘게 제 몫을 해냈다. 적어도 전쟁과 관련해서 내용을 자르고 편집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합의를 본 유명 저널리스트들이 앞 다투어 칸의 증언을 전부 실은 기사를 내놓았다. 파장은 예상대로 굉장했다. 심정지 실험을 비롯한 몇몇 논쟁점들이 전쟁에서 승리는 했으되 전후 우울함도 만만치 않았던 사람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갔다. 


  더불어 여론은 언제 2차 공판이 열릴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2차 공판만큼은 일반인들도 참관하게 해 달라는 청원도 끊이지 않았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강화인간으로는 거의 유일한 자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언론도 완벽히 닿을 수 없는 정치인들의 수군거림은 강화인간의 멸종이라는 의견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헤이스팅스가 바깥 흐름과 관계없이 센티넬을 죽이는 법을 발달시켜야 했던 이유다. 더불어 그녀는 수호자 같은 이미지를 떠안고 연구소를 나와야 하는 일도 잦았다.






 

  오랫동안 익은 와인색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은 눈앞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성 따위는 모두 묻어버리는 불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름들과 삶이 연기를 뿜어댔다. 여인은 불 속의 사람들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녀가 아무리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였어도 그 수많은 이름들을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사실 자신의 한 가운데에 깊게 새겨진 몇 가지의 그림자와 웃음과 공식들을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여인의 표정은 갈수록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한편, 저 불덩이가 커지고 커져 지구를 다 삼키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자리에 인류를 구한 빛나는 과학자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머리가 힘들어 하는 또 한 가지 요소였다.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였고 먼 역사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아니었다. 날개를 감춘 구원자도 아니었다.


  하늘까지 닿을 듯 팽창하던 불덩이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태울 거리들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이토록 대규모로 실시하는 화장(火葬)을 처음 보는 캐서린은 이제서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낯설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무리 중에 강화인간이 있었던가? 칸 누니엔 싱의 수족들을 마침내 인간이 없애버리는 위업을 달성했던가? 캐서린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지 의구심을 품었다.


  “불길이 거의 꺼져갑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헤이스팅스 씨.”


  캐서린은 살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숫자가 팍 줄어버린 인류 중에서 성직자라는 특수한 직업군의 명맥을 유지시키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성경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목사님이 아직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여기서까지 성직자의 권위를 지켜주려 애써주시는 것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모두 헤이스팅스 씨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짧게 말씀해 주시고 제가 기도문을 읊으면 딱 저 불씨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캐서린이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를 온전히 캐서린 헤이스팅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행동 중 하나였다. 그것을 떠올리니 캠퍼스의 콧대 높은 케이트의 옆을 지켰던 오필리아가 기억났고, 오필리아의 가장 복잡하고 격렬했던 시기를 다 가져가 버렸던 칸 누니엔 싱이 기억났다. 


  “사실 저 분들은 죽을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에요.”


  굳이 죽지 않아도 되었고, 마찬가지로 탄생할 이유가 없었던 존재들이 부지런히 캐서린의 위를 지나갔다.


  “진짜로 저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들이 다 죽어버려서, 과연 제가 하는 말로 죽은 분들이 만족할 수 있을 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여기 어쨌든 서게 되었으니까… 또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캐서린이 잠시 목사를 돌아보았다. 목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와 붉은빛 제사가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캐서린은 앞뒤를 재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인간은 인간으로만 존재하겠습니다. 하늘의 권위를 등에 업으려 하지 말라는 피 묻은 교훈, 역사로 후대에 전할게요.”


  캐서린이 표정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리려는 것을 그녀가 묵념하는 걸로 착각한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얼굴을 숙였다. 캐서린은 엉겁결에 망자를 추모하기에 적합한 말보다는, 자신을 반성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말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무게를 견디기가 어려웠으므로 자신의 위아래로 그림자를 끌어내렸다. 


  “…이제 저 분들이 천국 가실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캐서린은 목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뒤돌아 걸었다.


  그녀는 목사와 불길 앞에서 차마 꺼낼 수 없었던 핸드폰을 만졌다. 핸드폰은 아까부터 캐서린을 움찔거리게 하면서 메시지를 모으고 있었다. 손으로 꼼꼼히 측면을 감싼 그녀가 문자를 읽었다.


  —오늘 공식 일정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쁠 테니까 굳이 주사 놓으러 오지 마요. 내가 칸한테 가는 중이거든요.


  캐서린은 답장 없이 레비나스의 메시지를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여전히 그녀를 인류의 구세주로 칭송하고 싶어 하는 스포트라이트들이 쏟아졌다. 어둠 속에 있는 칸 누니엔 싱이 비웃을 듯한 얄팍한 빛이었다. 물론 그는 늘 인간을 조소하는 입장이므로, 캐서린은 레비나스가 이 인공적인 빛무리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곱씹을 뿐이었다.







  준비도 없이 맥코이의 명함을 받아들었던 저널리스트들을 포함해 헤이스팅스까지도 전범의 진실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했던 의학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1차 공판 때 칸이 흘렸던 유사-가이드 관계에 대한 힌트를 해석함과 동시에, 그것을 강하게 변호한 뒤로 헤이스팅스만큼 세간의 귀추(歸趨)를 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맥코이가 2차 공판 일정보다 사흘 일찍 발간된 뉴욕 타임즈에 실어 보냈던 글 한 편이다. 이로 인해 밀레이스와 교류를 가졌던 헤이스팅스만 알고 있었던 연구 일정들이 칸과 맥코이를 거쳐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 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담당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채혈 실험과 여러 가지 충격 시뮬레이션에다, 심정지 실험에 관한 자세한 프로토콜까지 공개한 그 글은 내내 사실만을 진술하다가 마지막에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 글은 강화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마냥 전쟁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맥코이의 기고문은 다시 강화인간들의 죄에 집중하려 했던 2차 공판의 진행 방향을 뒤엎고 말았다. 심지어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는 헤이스팅스에게 자신이 이러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 것인지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맥코이와 헤이스팅스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주제 하나가 생겨버렸다고 할 수 있다. 헤이스팅스는 칸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위선이 있는지 찾아내려 한 반면, 맥코이는 인간의 잘못도 검증해야 한다는 편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사와 칸 누니엔 싱이 나누었던 질답을 옮긴다. 실상 헤이스팅스와 칸의 대화라고 여겨도 상관이 없다. 둘 사이에 한참 학문적인 얘기들이 오고갔다는 것만 해도 2차 공판이 전범과 그 심판자 간의 대질이라는 양상에서 얼마나 많이 빗겨나갔는지 알 수 있다. 재판에서 헤이스팅스는 칸이 맥코이에게 고백한 사연들 중에 행여나 여론을 현혹시키기 위한 술수를 적발하기 위한 질문을 다수 배치했는데, 칸은 이를 적당히 받아치면서 대답할 때마다 연구소의 만행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본 책의 흐름과 부합할 만한 부분만을 추린 것으로, 아래 인용문이 2차 공판에서 있었던 심문의 전부는 아니다.  

 

  Q : 레비나스 맥코이에 대해 알고 있는가?

  A : 정해진 날짜마다 날 찾아오는 인물이다. 소속은 잘 모르지만 가운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연구원 같다.   

  Q : 연구원들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A : 엄연히 따지자면 나는 그 어떤 인간도 좋아하지 않는다. 

  Q : 그를 만나면 주로 뭘 하나?

  A : 연구원들이 하는 일을 한다.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묻고, 답해줄 수 있는 것은 적당히 답해준다. 포도당과 연결된 게 아니면 나에게 주삿바늘을 꽂지 않는다는 게 조금 신선하긴 하다. 

  

  Q : 맥코이가 한 유력 일간지에 당신이 서술한 정보들을 그대로 전달했다는 건 알고 있나? 

  A : 감옥에 묶여 있는 무엇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변동을 가져올 지가 중요할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도 그는 인류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의식이지 않은가?


  칸은 의도적으로 레비나스 맥코이를 용기와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 지칭했다. 극형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의 초점이 자신과 동족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막으면서, 인류에게 때 아닌 도덕적 난제를 제기하는 효과까지 발생시킨 아주 영리한 발언이었다. 칸이 인간을 향한 적대적인 태도를 시종일관 잃지 않았던 점은 맥코이의 의견에 객관성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공판이 끝나고 더욱 불붙은 논쟁, 즉 진화전쟁이라는 인간의 비극에 인간의 탓이 있다는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여론 충돌은 몹시도 격렬하고 다양했다.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들도 많으니 이 책에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그보다 중요한 건 3차 공판을 열어야 하는지 말이 많았던 시기에 헤이스팅스가 맥코이를 만나길 청했다는 거다.







  묵직하게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레비나스는 간신히 실내로 들어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흔들어 털고 습기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쉬지 않고 커피콩을 볶고 우유를 끓이는 카페 안마저 살짝 눅눅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기 어린 날씨였다. 레비나스는 출입문에 놓인 타원형 통에 우산을 넣고 고개를 움직였다.


  날씨가 좋지 않은 탓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한가한 카페 안에서 어렵지 않게 캐서린을 찾아내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캐서린이 아이보리빛 머그잔을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지도 모르니까 한 잔 마시는 게 어때요? 마침 여기 커피도 괜찮네요.”


  기다렸다는 듯이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자, 레비나스는 제일 가벼운 커피를 시키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에서 달콤한 크림 향기는 나지 않았다.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더니 안도 마찬가지네요.”

  “잘 됐죠. 아는 사람 많아서 좋을 얘기가 아니니까요.”


  캐서린이 특별히 날을 세워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레비나스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주제는 언제부턴가 무거워졌다. 경쾌하게 소리 내서 좋아할 일도 줄어갔다.


  커피 원액에 적당히 물을 타기만 한 간단한 음료가 레비나스의 앞에 놓였다. 종업원은 쟁반을 정리하더니 가게 관리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으로 사라졌다. 종업원의 예상으로도 오늘 더 이상 손님이 들어오진 않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강화인간들의 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칸이 물어보지 않던가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재판에 관한 얘기는요?”


  캐서린은 부드럽게 물어왔다. 레비나스도 그에 화답하고자 차분하게 문장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보통 질문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궁금증을 갖는 건 내 쪽이죠. 내가 기억하기로는 칸이 물었던 건 한 가지였어요.”


  레비나스가 입가의 양 옆을 찡그렸다.


  “칸에게 가장 미스터리인 건 내 의도겠죠. 자신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캐서린은 짧게 웃었다. 레비나스의 것보다는 줄어 있는 커피잔의 불투명한 면에 그녀의 복잡한 미소가 얇게 비쳤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절차를 밟듯 레비나스를 향해 시선을 조정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해줬어요?”

  “그를 처음 만나서 한 얘기를 그대로 되풀이했죠. 나는 양쪽의 죄를 다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고요.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봐요. 칸이 양심이니 의식이니 하면서 날 포장해 줄 이유가 그걸 빼고는 하나도 없어요.”


  강화인간의 마음마저 움직인 진심이니 그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크게 작용했겠어요. 캐서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내렸다. 인간의 진심이라는 어구는 자연히 유품 하나 추릴 수 없었던 자신의 친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캐서린이 표정을 수습하고 주제를 돌렸다.


  “사실 여기서 할 얘기는 이게 아니에요.”


  잔의 손잡이를 잡은 레비나스가 눈을 깜빡였다.


  “재판이 지연되는 동안 강화인간들이 전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횟수가 줄고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끊어졌던 유전자마저 자체적인 능력으로 치료하고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족들은 어디에 있을지 알아내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그림자 속에선 밖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겠죠. 당신은 모르겠지만 며칠간 칸은 굉장히 조용해졌어요. 그를 가시로 칭칭 감아놔야 했던 사연이 있었다고요.”


  레비나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근래 그는 칸이 자신과의 대화를 받아주는 태도가 매끄러워졌다는 인상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레비나스는 긍정적으로 고갯짓을 하면서 캐서린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을 사형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반성하게 했으니까요.”


  커피로 목을 축이려던 레비나스가 동작을 뚝 멈춰버렸다.  


  “설마, 그들을 살려둘 거라는 뜻입니까? 나 때문에요?”


  캐서린이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눈꺼풀을 꾹꾹 압박하기 위해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살아 있는 거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네요. 강화인간들은 어떤 설화처럼 인류에게 희미한 형태로 남아있게 될 것 같아요. 당신이 두 달만 그를 잡아둘 수 있다면요.”


  레비나스가 조용히 컵을 옆으로 치웠다. 커피를 홀짝이느라 흐트러지는 집중력조차 아까워진 의학자의 양 손이 움츠러들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줘요, 캐서린. 솔직히 난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위에서 칸을 죽이는 걸 단념했어요.”


  어쩐지 캐서린의 숨소리가 그녀가 내뱉는 말보다 큰 것 같았다. 


  “강화인간들은 냉동되어 역사 속으로 잠들게 될 거예요.”







  공판을 통해 칸을 위시한 전범들의 죄를 심사하지 않고, 그들을 동결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전후 센티넬이 엮인 여러 사건들 가운데 헤이스팅스의 이름이 거의 거론되지 않은 유일한 일이었다. 칸의 증언과 맥코이의 변호가 아무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해도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결과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은 혹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이 그녀의 약물을 불신하게 된 게 아니냐는 가설로 이를 해석하고자 한다. 생명의 본질을 공격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시간을 주었더니 서서히 상태가 호전되는 걸 보고, 저 놈들은 영영 죽일 수 없는 게 아니냐며 위쪽에서 단념했다는 추정이다. 각 지도자들 역시 전쟁이라는 최대의 과제가 사라지자 일단 국가로 돌아가서 쌓인 현안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냈던 것도 한몫 했을 테다. 더불어 서서히 흩어져가는 유대감, 5년 간 너무도 지친 사람들, 원래 흩어진 채로 살았던 인간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은연중에 바랐는 지도 모른다. 


  신체를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요인도 회복해버리는 강화인간들의 치유력이 한편으로 인간들의 욕심을 다시금 자극했다는 이론도 있다. 역사가들이 흔히 극단적 실용주의자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이들의 속내다. 저토록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들이라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고, 그동안 인류 역시 진보할 것이므로 강화인간들을 좀 더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주장은 분명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다. 


  다양한 추측들이 공존하지만 확실한 건 헤이스팅스가 공항에서 런던 행 비행기 티켓을 내민 날에 강화인간들을 극저온 캡슐에 영구적으로 동결시키겠다는 발표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강화인간들은 인간의 적이되 이대로 죽이기엔 애로사항이 많은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동결형이 선고된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여드는 엔지니어들로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더불어 맥코이는 헤이스팅스의 뒤를 이어 완벽히 칸을 인도받게 되었다. 맥코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달밖에 살지 못할 강화인간의 모든 것을 탐구하기로 결심한다. 인간학은 그로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6. 한 과학자의 양심



  레비나스 맥코이는 전쟁 이전까지는 평범한 의사로 활동했다. 대학에서 만나 결호했다는 두 부모님의 일반적이고도 헌신적인 배려 속에 의대를 졸업한 뒤 모교의 부설 병원에서 신경 외과의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다. 다만 늘 수술 일정으로 바쁜 외과의 치고 학술지에 종종 자신의 이름을 올렸으며, 높은 지위를 노리는 속물은 아니었어도 자신이 어떤 중요한 임무를 맡으면 최선을 다 하겠다는 인간적인 야망 정도는 갖고 있었던 듯하다. 


  어느 날 그는 헤이스팅스로부터 도와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맥코이는 원래 미국인이고, 헤이스팅스는 전쟁이 터졌던 시기에 운 좋게 시카고에 있었기 때문에 다소 원활하게 전갈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맥코이가 1년간 유학을 가 있었던 대학이 헤이스팅스의 모교였다는 걸 유념하면 두 사람이 알고 지냈다는 게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더 나아가서 맥코이가 밀레이스와도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밀레이스는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모두 헤이스팅스와 함께 다녔기 때문이다. 


  딱 잘라 말할 순 없으나 헤이스팅스는 연구를 하면서 맥코이의 도움을 꽤 크게 받은 모양이다. 전쟁 이후 헤이스팅스가 맥코이에게 제공해 준 두 가지는 그만큼 컸다. 한정된 인물들만 참관할 수 있었던 1차 공판 현장에 맥코이를 들여보내준 덕에 그는 칸의 증언을 들을 수 있었고, 아예 칸이 갇혀 있는 감옥에 드나들 수 있는 권리를 주어 그와 교류하지 않고서는 발전 자체가 불가능한 맥코이의 주장과 이론을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맥코이는 초반에 연구적인 목적을 가지고 칸과 접촉하기를 원했다. 이는 남은 강화인간들을 관리하는 일로 곤란함을 겪던 헤이스팅스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녀는 설마 맥코이와 사이가 틀어질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거다. 그러나 사료를 쥐고 있는 이 시대 사람들의 눈으로 보자면, 맥코이는 1차 공판 직후부터 센티넬을 옹호할 거라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휴정 시간이 되자 기자들이 우르르 복도로 나왔다. 그들은 벽에 딱 붙은 등받이 없는 의자에 모여 앉아 속닥거렸다.


  “…어떻게 할 겁니까?”

  “내가 먼저 물어보려고 했는데. 사실 지금은 머리가 하얗습니다.”

  “여기까지 뽑혀 들어오는 게 쉬운 일도 아니었는데 취재한 내용을 내보내지 않는 건 억울합니다. 적어도 내 편집국장은 길길이 날뛸 게 분명해요.”

  “그렇다고 저기서 들은 걸 가감 없이 뉴스에 싣기엔 걱정되는 부분이 한둘이 아니지 않습니까.”


  팽팽한 논의가 이어질 것 같았던 분위기는 한 남자의 발언으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기자들로서도 사형을 선고받으러 온 거나 다름없는 전범 대표가 한 증언에 왜 이렇게 마음이 혼란스러운지 알 수 없었다. 마치 강화인간이 쉽게 얘기를 꺼낼 수 있도록 도와준 꼴이 된 검사의 태도와, 막연히 야만적이고 폭력적일 줄만 알았던 족속들의 진실 등 기자들은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떠안게 되었다. 


  “그리고 사실 이번 건 있는 그대로 실었다간 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단 말입니다.”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취재 내용에 손을 대지 않는 게 도리어 전범들 편을 드는 모양새로 받아들여질 것 같았다. 머리와 턱 끝을 긁으며 고민하는 저널리스트들 틈에서 누군가 언제쯤 다시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물었다. 그러고 보니 판사는 재판이 재개될 시간을 정확히 알려주지 않았다.


  그 때 어떤 남자가 기자들을 톡톡 건드렸다. 


  “혹시 전범 재판을 취재하러 오신 분들인가요?”


  남자는 앞주머니에 볼펜이 꽂아진 가운을 입고 있었다. 연구원들의 하얀 옷자락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활약 이후 대단히 위상이 높아졌고, 법원에서 돌아다니는 가운 입은 인물의 위치가 보잘 거 없지는 않을 것이어서 기자들은 조금 놀란 눈치를 보였다. 


  “예, 그런데 그 쪽은….”

  “레비나스, 지금 뭐하는 거예요?”


  무려 헤이스팅스 박사가 뒤에서 남자를 부르고 있었다. 남자가 빠르게 기자들과 눈빛을 마주하면서 말했다. 


  “적어도 심정지 실험에 관한 건 꼭 기사에 넣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합니다. 제가 도와드릴 게 있다면 연락하세요. 여분이 없어서 일단 아무나 한 장 가지고 계세요.”


  레비나스는 가장 가까이에 있는 기자에게 명함을 쥐어주고 재빠르게 등을 돌렸다. 


  “안 그래도 묻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캐서린.”


  기자들은 낯선 이름을 가진 사내가 인류의 구원자를 끌고 홀연히 사라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곧이어 순서를 정할 것도 없이 모두가 하나뿐인 명함에 있는 연락처를 옮겨 적었다.







  “좋아요, 여기가 제일 조용한 장소 같군요.”


  레비나스는 마지막까지 좌우를 돌아보며 행여나 지나다니는 그림자는 없는지 체크했다. 캐서린이 팔을 내리며 물었다. 


  “재판이 금방 속개되면 어쩌려고 이렇게 멀리 왔어요? 무슨 일인데 그래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는 목적은 레비나스와 전혀 달랐다. 캐서린은 제스처에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섞어서 레비나스를 재촉하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레비나스가 곧장 꺼낸 주제는 신속하게 마무리가 될 만한 성질의 것이 못 되었다. 


  “골턴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을 당신이 잘 알 거라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알기로 당신은 거기에 들어가길 거부하지 않았습니까.”


  캐서린은 순간적으로 미간을 좁혔다가 표정을 굳혔다. 기자들보다도 먼저 동료에게 그러한 질문을 받게 될 줄은 심중에 두지 못한 기색이었다. 


  “…오필리아가 불렀어요. 정확히 말하면 오필리아의 의견을 연구소 측에서 수용한 거지만.”

  “오필리아가 불렀다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실험체들의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고 있다고 했어요. 돌발 행위도 잦아지고, 내성이라도 생기는 건지 약물 요법도 갈수록 듣지 않는다고요. 연구소 내부에서는 그 상황에서 일종의 컨설팅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고 오필리아가 나를 추천한 거죠. 그 쪽도 내가 괜찮은 자격을 갖췄음은 알고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거기에 오래 있었던 건 아니에요. 이틀 만에 결론을 던져주고 나왔어요.”


  캐서린은 어쩐지 자신의 입에서 설명이 아닌 변명을 닮은 주절거림이 튀어나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바라보는 레비나스의 눈빛이 주는 영향이 컸다. 포커페이스 실력이 좋아야 한다는 외과의가 쏟아내는 의혹과 부정적인 감정들이 캐서린을 은근히 자극했다. 


  “칸이 잠깐 언급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겠지요. 오필리아와 연락하면서 연구소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입니다.”


  캐서린이 두 팔을 올렸다가 툭 소리가 나게 내려놓았다. 

 

  “나는 지금 당신이 왜 이런 자세를 취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내가 잘못을 저지르기라도 했나요?”


  “연구소에 갔으면 그들이 겪은 실험의 내용을 다 전달받았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왜 그 땐 나한테 연락하지 않은 겁니까? 나중에라도 도와달라고 한 걸 보면 내가 강화인간과 관련해서 분명 쓸 만한 실마리를 줄 수 있을 거라는 걸 당신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어요.”


  캐서린을 공격하는 듯한 언어들이 또박또박 울려 퍼지고 있는 공간은 꼭 법원 곳곳의 소란과 분리된 것만 같았다. 레비나스는 명백히 캐서린을 추궁하고 있었다. 


  “이틀 동안 거기서 뭘 했죠? 심정지 실험 같은 건 반드시 중지해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내가 그 실험을 주도한 게 아니잖아요. 대체 나한테 왜….”


  레비나스가 고개를 저으면서 캐서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내가 아는 오필리아의 성격을 생각해 보자면 그녀는 절대로 연구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견디지 못했을 겁니다. 당신은 확실히 오필리아보다는 냉철한 구석이 있으니까, 오필리아는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행동하는 게 좋겠냐며 당신의 조언을 구했겠죠. 골턴 연구소가 그랬던 것처럼.” 


  캐서린은 그동안 자신이 주변에서 쏟아지는 칭찬에 너무나 익숙해지지는 않았는지 돌아봐야 했다. 전범이 공격적으로 제련한 증언을 듣고서 레비나스가 달라졌다고 치부하기엔 두 사람이 달성한 업적이 너무도 반짝거렸다. 캐서린은 다시 한 번 그가 던지고 있는 비난을 의심했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그녀의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렸다.


  “당신은 결국 한결같이 침묵한 셈입니다.”

 

  미세하게 굽은 그의 눈썹이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캐서린을 질책했다. 캐서린이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난 그들에게 실험을 중지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었어요.”

  “내 생각에 강화인간들을 더 적극적으로 돌봤다면 전쟁조차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이태까진 과학자와 의사의 관점이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나한테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당신은 이 재판이 옳다고 봅니까?”


  기어코 캐서린은 얼굴을 살짝 돌려 탄성을 흘리고야 말았다. 


  “굉장히 어이없는 질문이네요. 칸과 그 동족들은 전범이에요. 오필리아를 죽였고 수많은 마을을 짓밟은 살인마들이라고요! 그들의 과거가 얼마나 비참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강화인간에게 그 누구보다 슬프게 난도질당했던 여인의 이름이 등장하자 레비나스도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인류의 존망에 이바지할 수 있는 부탁을 거절할 의도가 애초부터 없었다고 해도, 오필리아의 이야기는 분명 레비나스가 더 빨리 발바닥을 뗄 수 있도록 독려했었다. 그는 캐서린이 대중이 예상하는 것처럼 독한 성미가 아니었기에 현재의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걸 알았다. 레비나스는 더 캐서린을 꾸짖지 않았다.


  “그를 만나게 해 줘요.”


  삽시간에 캐서린의 흥분이 가라앉았다.


  “칸을요? 제정신이에요?”


  그러자 레비나스는 그녀가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미소를 지었다.


  “내가 당신의 연구를 거들면서 도와준 점이 두 가지입니다. 속 좁다는 면박을 들어도 할 말은 없겠지만, 나도 당신에게 두 가지 호의를 받아내고 싶습니다.”


  캐서린이 눈짓으로 그에게 도리질치고 있었다. 사실 캐서린은 자신 말고는 더 이상 칸 누니엔 싱을 보는 사람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당신은 그들의 과거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했죠. 그런데 내 눈으로 보기에는 아닙니다, 캐서린.”


  레비나스가 걸음을 옮겼다. 캐서린이 초조하게 바라보았던 복도 쪽으로 방향을 잡은 그가 부드럽게 캐서린을 잡았다. 


  “칸의 증언은 비단 그의 죄만을 털어놓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는 걸 당신도 잘 알 거라 믿습니다.”


  캐서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전쟁이 끝난 이 무렵, 얼어붙어 있던 땅에 승리의 깃발을 꽂은 여인의 동요를 유일하게 엿볼 수 있게 된 의학자는 미안해하면서 그녀의 눈빛을 뒤로 했다.


  휴정된 재판은 그 날 재개되지 않았다. 이후 캐서린은 임시 수상에게 불려갔고 레비나스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거실에서 그는 김이 오르는 컵과 핸드폰을 한참이나 응시하고 있었다.


  8시간 뒤 레비나스는 캐서린에게 메시지와 함께 특수 감옥으로 출입할 수 있는 코드를 받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에게 부여받은 키는 과연 효과적이었으나 감옥에 도달하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절차를 줄여주지는 못했다. 자가용으로 가는 건 불가능해 얼떨결에 배정받은 운전기사부터 코드를 요구하더니, 건물 안에 발 한 짝 들여놓지 않았는데 레비나스는 벌써 세 번의 검사를 받았다. 그의 입술에서 저절로 후 하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얌전히 안내인을 뒤따르고 있는데 레비나스의 핸드폰이 반짝거렸다. 캐서린의 짧은 전언이 도착해 있었다.


  들어가기 전에 왜 그를 보고 싶어 했는지 얘기해줘요.


  동시에 안내인이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는 여기서 물러납니다. 저 안은 전부 감금 시설입니다.”


  레비나스가 코드를 입력할 때마다 사용 내역을 전달받기라도 한 듯한 타이밍이었다. 어느 정도 숙고한 뒤에 답장을 보내려던 레비나스가 안내인에게 손을 들어보였다. 


  “잠시만요.”


  액정이 인식하지 못하는 손톱으로 톡톡 전화기를 두드리고 있던 레비나스의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였다. 레비나스는 진실을 전하기에 적합한 방법을 찾으려고 했던 거지 거짓을 지어내려는 건 아니었으므로 빠르게 답을 작성했다.


  나는 두 종이 저지른 죄를 모두 연구하고 싶습니다. 당신과 평생 등지지는 않을 겁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레비나스가 안내인과 눈빛을 교환했다. 캐서린의 코드가 마지막으로 작동했다. 코드가 완전히 인식되는 것을 확인한 안내인이 조용히 사라졌다. 


  드디어 감옥 안으로 들어섰을 때 레비나스는 둥글게 배치된 감방들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칸은 다른 강화인간들과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곳은 그에게만 허용된 공간이었다. 그런데 한 명의 죄수만을 가둬두는 곳치고는 감방이 많았다. 맥코이는 한 칸마다 감시자들이나 무장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굴리다가 곧 앞에 집중했다. 내부가 제법 어두워 면과 사물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때 갑자기 눈을 찌르는 빛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꼭 조촐하게 꾸며진 연극 무대 위로 내리쬐는 스포트라이트 같았다. 거기서 레비나스는 쇠로 만든 가시덤불을 양 손목에 감고 있는 누군가가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주위로 가름막 하나 없는 터에 자리 잡은 침대 매트리스와 책걸상, 캐서린이 회수하지 않은 링거 걸이대가 좁은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빛이 부족한 감옥에서 보는 전범의 실루엣은 훨씬 위압적이었다. 레비나스는 어쩐지 그 검은 곡선으로 인해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칸 누니엔 싱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편안한 삶을 살지 못했으니 레비나스의 직감이 영 틀렸다고 단정하기는 어려웠다.


  강화인간은 아무래도 먼저 아는 체를 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레비나스는 정식으로 기척을 내기 전에 힐끗 위를 올려다봤다. 적어도 그의 시야에 잡히는 또 다른 시선은 없었다. 고통스럽게 묶인 강화인간이 레비나스가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증언하느라 힘들었겠지만 그래도 나랑 얘기 좀 하지 않겠어요?”


  레비나스는 최대한 온화하게 말문을 열었다. 이에 반응하여 강철이 찰랑이는 소리가 났다.


  “처음 듣는 목소리군.”


  강화인간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자 팔을 들었다. 그랬더니 감겨 있던 가시가 그를 찌르려고 했고, 이에 본능적으로 눈꺼풀을 움찔한 건 인간이었다. 인간의 피와 흡사한 농도로 비릿한 냄새가 나는 강화인간의 체액이 구속물에 묻어났다. 칼날에 베여 갈라진 피부에는 누구보다 익숙할 외과의의 안색이 금세 불편해졌다.


  오히려 평온한 건 강화인간이었다.


  물론 순간마다 그의 눈동자의 일부는 붉어졌다가 통째로 하얗게 변하기도 했고, 자신의 육체마저 뜯어 먹을 듯한 이빨이 불쑥불쑥 빛을 냈다. 증인석에서 질문보다 몇 배는 자세하고 소름 끼치는 말을 해댔던 형색이 실리콘 덩어리라는 궤변이 설득력 있게 들릴 지경이었다. 혼자 가시와 빛을 다 받고 있는 처지 말고도 강화인간의 우두머리를 괴롭히는 요소는 너무도 많아 보였다.  


  레비나스가 칸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레비나스가 노리는 것은 강화인간의 낡은 의자였다.


  “사실 재판장에서 당신이 했던 말은 좀 부족했습니다.”


  강화인간의 머리가 점점 옆으로 돌아갔다. 그것은 레비나스가 움직이는 모양새를 정확히 뒤쫓고 있었다. 


  “온 세상이 갈라지고 뜯겼어요. 특히나 그 광경을 연출해낸 장본인인 당신들을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관여를 했던 세계는 아예 흔적도 남지 않았지요. 비로소 인간들이 성찰할 수 있게 되었는데도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기반들이 없습니다. 강화인간이 자신에 대해 세세하게 털어놓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레비나스가 칸을 꾸준히 살피면서 의자의 뒷부분을 잡았다. 레비나스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에 앉아 한 시간은 보낼 심산이었다. 다행히 강화인간의 눈동자는 본래의 빛으로 돌아왔다.


  “그러니 당신의 과거를 알려줘요.”

  “성미가 급하군. 차차 듣게 될 텐데.”


  강화인간의 답이 상상 외로 빨라 맥코이는 주춤했다.


  “누구든지 여기에 들어오려면 캐서린의 허락이 필요합니다. 보아하니 그녀가 아무한테나 출입을 허락한 것 같지는 않군요.”

  “…내가 당신이 무슨 술수를 썼는지 궁금해 해야 하나.”

  “나는 당신이 경험해 본 적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고백을 하는데 누군가를 조사해야 한다는 일이 역설적이라는 지적이 나오겠지만요.”


  레비나스는 나름대로 표현을 부드럽게 골랐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올바른 효과는 내지 못한 게 분명했다. 지금까지 레비나스가 그럭저럭 견뎌 왔던 칸의 얼굴이 순식간에 무기로 돌변하더니, 먹잇감을 가늠하는 것처럼 끓어올랐다. 레비나스는 감옥에 들어온 지 10분도 되지 않아 칸의 증오를 샀다. 미워하는 대상은 족족 죽이고 말았던 강화인간의 온 몸에서 차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내가 아무리 인간들을 죽여도, 나는 영원히 연구 대상으로 남을 수밖에 없나 보군.”


  레비나스에게 코드를 전송하며 캐서린은 하나의 고백도 같이 담았다. 그녀는 전혀 다른 의미로 칸을 챙기는 작업을 두려워했다. 칸의 입장에서는 인간에게 대단히 고통을 주면서 죽인다고 하는데, 인생에서 한 번 맞는 죽음을 인식조차 없이 맞닥뜨릴지도 모르는 가능성 탓이었다. 레비나스는 그런 캐서린을 이해했다. 캐서린은 죽기 직전 거리낌 없이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인물이었다.


  그것을 떠올리며 레비나스는 자신의 유언이 되도 그럴 듯한 한 마디를 던졌다.


  “나는 이태까지 누구를 살려왔지 죽이지는 않았어요.”


  입을 다물고서 레비나스는 어딘가 모자라다는 느낌을 받았다. 레비나스는 손을 내밀지는 못하고 상체를 강화인간에게 슬며시 접근시켰다.


  “레비나스 맥코이입니다. 당신의 또 다른 연구원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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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5. 역사적인 증언



  대륙은 삽시간에 먼 과거로 돌아간 듯 한산했으나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바빴다. 춥고 외진 구석에서 바짝 기를 죽이고 숨만 내쉬던 이들이 마침내 볕으로 나왔다. 전후 문제를 처리하게 된 임시 연합체는 나라를 가리지 않고 인명피해가 막심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일단 출생지를 기준으로 남은 인구를 배치했다. 다방면에서 나타난 피해를 측정하고자 조사단이 부지런하게 움직였고 침략을 받지 않았던 타국으로부터 구호물자가 속속 도착했다. 전 세계를 대신해 상처와 영광을 떠안은 유럽은 눈물 어린 갈채를 받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그 복잡하고도 버거운 찬사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와 대학의 연구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모국인 영국은 제일 처참하게 부서진 곳이었으므로 복구에 상당히 오랜 시간이 필요할 터였다. 무엇보다 캐서린은 이곳에 붙잡혀 있는 강화인간들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또 다시 견디기 어려운 과제를 받은 기분이었다. 강화인간들이 2년 8개월을 머물고 있었다는 독일의 연구소에서는 보고서 한 장 건지지 못한 데다, 포로로 잡힌 강화인간들이 자꾸만 자살을 시도하는 난감한 상황까지 겹쳤다. 평소라면 절대로 통하지 않았을 수법들이 강화인간들의 치유력을 넘어서 그들의 목숨을 속속 강탈해 갔다. 이러다간 전범으로서 치러야 할 대가를 받아야 할 강화인간들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책상을 한 번 세게 두드린 캐서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중 치료를 위해 스스로를 꿈속으로 밀어 넣었던 칸의 의식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음에 몸을 뒤틀었다. 작은 바퀴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고 거기에 평범한 딸각거림이 덧입혀졌다. 그는 일어나지도 않고 느닷없이 들어온 빛과 그림자를 맞이했다.


  캐서린이 감들어와 그의 팔을 잡았다. 칸은 피곤했으며 전쟁터를 벗어난 캐서린이 문득 지루해져 저항하지 않고 오른팔을 내주었다. 캐서린이 칸의 소매를 걷고 윗부분에 굵은 고무줄을 묶었다. 곧 물기 어린 차가운 조각이 슥슥 피부를 닦는 감각이 느껴졌다. 너무도 익숙한 과정이 감옥 안에서 자신을 잡아넣은 여인에 의해 펼쳐지고 있자, 칸은 기어코 웃음을 이기지 못했다. 


  캐서린은 꿋꿋하게 칸의 핏줄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고 그것을 가져온 수액 팩과 연결했다. 파괴된 센티넬 스파이럴을 되돌려 놓는 방법은 캐서린도 알지 못했기에 일단 영양제라도 주입해 두는 것이었다. 캐서린은 칸이 폭주하여 자살해 버리는 일은 막기로 결심했다. 칸은 그녀에게 알려줄 것도 많았고 처벌받을 것은 그보다도 많았다.


  “당신이 내 담당의 같군.”


  고무줄을 푸는 그녀에게 칸이 말을 걸었다. 캐서린은 튜브에 들어가는 수액의 속도를 조절하는 데 몰두했다. 


  “바늘은 알아서 빼도록 해. 거즈는 두고 가지 않을 거야.”

  “캐서린.”


  캐서린은 칸의 음성에 대고 고개를 내저었다.


  “증언 도중에 쓰러지면 곤란하니까 주는 거지 다른 이유는 없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언제 재판에 올리는 게 좋을지 재고 있거든.”

  “여기 와서 내 동료들이 얼마나 죽었는지 묻고 싶었을 뿐이다.”


  아무런 장식도 없이 단지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낮아진 목소리가 조용히 자신의 의도를 털어놓았다. 동시에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듯 칸은 얼굴을 반대쪽으로 돌렸다. 오필리아의 원수이고 작품이고 그녀의 마지막 추억에 캐서린은 별 수 없이 호의 하나를 내던졌다. 


  “…얼마 안 남았어.”


  캐서린이 호위 대원들과 함께 감옥을 나갔다. 칸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서로가 서로를 끌어내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둘은 예상보다 서로를 오래 마주보아야 했다.







  이틀 만에 강화인간 네 명이 숨졌다. 남아 있는 강화인간들은 열다섯이었고, 이들 역시 스파이럴이 회복되는 것보다 정신이 붕괴되는 속도가 빨라 언제 자살을 감행할지 몰랐다. 구실이라도 제대로 잡으려면 살아 있는 강화인간들이 예외 없이 재판을 받게 해야 했는데, 시간을 더 주었다가는 아예 재판을 열지도 못할 거라는 괴상한 불안감이 지도자들의 가슴에 똬리를 틀었다. 전후 강화인간들을 담당한 주제에 애써 잡은 포로들도 지키지 못했던 캐서린은 자진해서 발언권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마음이 급해진 회의체는 칸을 강화인간의 대리인으로서 세우고 단 한 번의 선고를 내리는 방식을 택했다.







  강화인간은 태어난 이래 한 번도 걸쳐 본 적 없는 재킷이라는 걸 양 팔에 끼웠다. 양 갈래로 늘어진 긴 옷소매는 강화인간의 눈길로 보자면 무언가를 꽁꽁 싸매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센티넬 스파이럴이 끊어진 자국은 바깥에서 보이지 않고, 캐서린이 마지못해 찔러 넣었던 영양제의 흔적은 바늘을 빼는 순간 사라졌는데 말이다. 칸은 다만 조금 피로했고 전장에서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면 안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들이 주는 옷을 입었다. 넥타이는 없었지만 재킷을 걸친 것만으로도 법정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났다.


  성미가 호들갑스러운 인간들 전부와 그보다도 많은 인간들의 귀가 보이지 않게 모두 연결된 단상이 칸의 자리였다. 칸은 거추장스러운 사슬을 끌면서 증인석에 섰다.


  “증인은 간단히 자신의 신원을 밝히시오.”


  칸은 순간 그것이 너무 인간답게 느껴졌다. 인간다운 것은 그에겐 증오스럽고 뒤집어엎어야 마땅한 것이기도 했다. 그는 재판의 전통을 깨고 알아서 의자에 착석했다. 


  “그럴싸한 동의서에 속은 인간들이 내놓은 요소들이 온갖 차갑고 과학적인 방법을 거쳐 샬레에 아무렇게나 모인 게 첫 번째 시작이었다.”


  법정에 있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엉뚱한 말이었다. 빈손으로 들어온 판사가 눈썹을 꿈틀했다.


  “그 주제넘은 유리 접시들이 46개라는 숫자를 달성해 일렬로 놓이고, 동시에 8개의 약물을 튜브로 주입할 수 있는 캡슐이 만들어지면서 어떤 종의 탄생과 멸망이 동시에 발목을 풀었지. 지금 너희들이 불편함에 떨고 있는 손과 똑같은 모양을 한 가락들이 접붙인 세포들은 배양기 속으로 들어가 창조자들의 무능함과 무책임함을 먹고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깨어나서 인간의 위대함도 아닌 자신이 실험체라는 사실부터 깨달았다.”


  이곳에 법을 약간이나마 공부한 사람은 판사와 서기, 엉겁결에 불려온 옷깃 비뚤어진 검사 정도였다. 인간이 만들어낸 최고 성능의 발명품 자리를 두고 법전이 강화인간을 멋지게 격퇴시키는 걸 보러 온 정치인들이 반이고 강화인간이 가는 곳을 자연스레 뒤따르는 연구원들과 기자들이 나머지였다. 곧 유래 없이 길고 끔찍한 아이덴티티를 읊는 증인을 막을 배짱과 명분이 있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동족들을 향해 너희는 구원 받을 길 없는 실험체라고 알려주었다. 내 이름은 칸 누니엔 싱이다.”


  오필리아에게도 들어본 적 없던 괴이한 이름이었다. 적정한 거리에서 증인석을 바라볼 수 있는 좌석에 앉은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미간을 좁혔다. 칸은 비틀린 시선으로 캐서린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목격했다.


  잠시 후 판사가 간신히 껄끄러운 침묵을 깼다.


  “…큼큼, 검사는 질문을 시작하시오.” 


  질문지를 손에 든 검사가 뚝뚝 끊어지는 동작으로 허리를 폈다. 칸은 웃었다. 회복할 수 없을 지경으로 까맣게 타들어간 그의 작은 끈들은 고통스러운 신음 대신 미소를 내뱉게 했다.


  진화전쟁의 전범에 대한 재판이 시작되었다.







  다음 제시되는 자료들은 약 2세기 전, 센티넬 재판에 참석했던 서기가 법정에서 이루어졌던 질답을 기록한 것이다. 골턴 연구소가 있던 자리에 새워진 기념관에 공개가 되어 있는 사료이나 워낙 중요한 내용이라 여기에도 옮겨온다. 질문을 하는 이는 검사이고 대답하는 자가 칸이며, 이름을 따로 표시하지 않고 Q와 A로 각 인물들의 발언을 구별했다. 본 자료는 1차 공판에서 다루어진 이야기만 수록하고 있다.  


  Q : 인간을 상대로 그토록 잔인한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무엇인가?

  A : 그 잔인하다는 표현은 나와 동족들이 연구원들을 대상으로 한 행위에만 적용되는 것인가, 아니면 그 외에 우리가 죽였던 다른 인간들까지 포함하여 비롯된 말인가?

  Q : 당연히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는 표현이다.

  A : 그렇다면 나는 먼저 첫 번째 경우를 반박하겠다. 적어도 우리는 연구원들과 비교당하면서 잔인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없다. 그들은 인간들의 발전을 위하여 또 다른 인간을 만들어 놓고 후자에게 어떠한 도덕의식도 찾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보다 더 문제되는 것은 쥐들에게도 해당되는 실험 후 해독 작용과 같은 후처리를 우리에겐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다는 거다.

  Q : 자세히 말해보라.


  A : 온갖 약물과 물리적 충격으로 실험체가 지칠 때까지 연구원들은 치유력을 시험해본다는 이유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보통 인간에게는 수혈할 수도 없는 피를 다량으로 뽑으며 우리들의 상태를 관망하기도 했으며, 잘린 신경이 스스로 이어지는지 확인하기도 했고 심지어는 강제적으로 심장 박동을 정지시킨 뒤 우리들이 능력껏 생명 활동을 지속하길 기다리는 경우도 있었다. 인간들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한 사람을 죽여 놓고 알아서 살아나는지 아닌 지를 실험하는 것이다. 심정지 실험이라고 불리는 이것을 안 겪은 동족이 없었다. 그리고 실험이 끝나면 우리는 1인실에 던져졌다.

  Q : 무슨 뜻인가?

  A : 인큐베이터에서 눈을 뜬 직후부터 나와 동족들은 셀 수도 없는 실험들을 거쳤으나, 이후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안정제와 수면제였다. 우리는 인간보다 여러 면모에서 우월하나 지속적으로 가해지는 상식 밖의 행위들에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특히 심정지 실험을 겪고 나서는 동족들이 몇 번씩 경련과 폭주 상태에 빠졌다. 아마 캐서린이 오필리아로부터 연구소 안에 있었던 일을 많이 전해 들어 알고 있을 거다.

  Q : 캐서린이라 함은 캐서린 헤이스팅스를 뜻하나?

  A : 그렇다. 그리고 오필리아 밀레이스는 나를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Q : 골턴 연구소에 있었던 다른 직원들이나 박사들의 이름도 알고 있나? 그곳에서 사망한 피해자들을 확인하고 싶다.

  A : 모른다. 내가 밀레이스를 기억하는 건 그녀가 유일하게 실험체들의 상태를 진정시키려 애썼기 때문이다. 별로 효과는 없었지만. 

  Q : 두 번째 경우에 대해 설명을 계속해보라.

  A : 아주 일부만을 밝혔으나 이 정도면 우리들이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감을 가지게 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본다. 육체보다 정신이 먼저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던 우리들은 점차 약물로도, 각자의 이성으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인간은 우리들을 세상 밖으로 내놓고 방치한 무책임한 족속이다. 인간이 저지른 죄를 인간이 갚았을 뿐이다. 다만 두 번째 경우에 대해서는 잔인하단 표현을 인정할 수 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가운데에서 발생한 복수는 파괴적이고 잔인할 수밖에 없다. 


  Q : 결국 전쟁을 일으킨 이유가 당신들에게 고통을 주었던 인간에 대한 복수란 뜻인가?

  A : 그렇다.







  검사는 한 장뿐이라 종종 팔락거리는 종이를 들고 심문을 이어가야 할지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솔직히 판사는 오늘 재판을 마무리 짓기는커녕 당장 휴정을 원하는 표정이었고, 정치인들은 눈짓으로 끊임없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칸이 극적 효과를 노리듯이 사슬을 차르륵 끌어당겼다. 


  검사는 자신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 중에 제일 먼저 눈에 띄었던 캐서린의 눈빛을 읽으려 했다. 캐서린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하게 구겨진 바짓단이 검사가 있는 위치에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게 그녀에겐 다행인 일이었다.


  자세를 고친 검사가 마지막으로 준비한 질문을 꺼냈다.


  “갑자기 공세를 멈췄던 이유는?”

  “살기 위해서였다.”


  그 말을 단박에 이해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검사가 대표로 물었다.


  “살기 위해서라니?”


  “너희들도 매고 있기에 너무나 무거운 짐이 있으면 잠시 그것을 내려놓거나 누군가와 함께 나눠 들지 않는가. 우리들의 고통은 온 몸이 부서질 듯 심했다. 휴전기 동안 우리는 그것을 분배하는 법을 배웠다.”


  캐서린은 반사적으로 칸의 표현을 입 안에서 굴렸다. 그녀는 아직 강화인간을 연구하던 직책을 내버리지 못했다. 어쩐 일로 칸은 캐서린의 반응을 지나쳐버렸다.


  “그 분배라는 것이 결국 고통을 쌓아둘 제단을 세우는 일에 그쳤다 해도.”


  그 말로 대신 칸은 다른 연구원을 자극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2. 센티넬의 복수 

04. 두 가지 발견 



  진화전쟁에서 사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센티넬들의 전격적인 폭주였고 인간에겐 이길 수 없는 재앙 같았던 4개월이 지난 뒤 있었던 2년 8개월간의 휴전기이다. 전선의 이동이나 국지전도 없었던 시기였지만 인간과 센티넬 모두 속으로는 거대한 변화를 겪은 터닝 포인트였다.


  먼저 센티넬 진영이다. 칸은 독일에 있는 막스 플랭크 종합 연구소에 정착해 ‘유사-가이드 관계(Half-Guide Relationship)’를 정립했다. 칸이 그러한 통찰을 이뤄내지만 않았더라도 센티넬들이 붕괴되어 가는 정신을 이기지 못해 자멸했을 거라는 의견이 있을 정도니 그 역사적 위력을 알 만하다. 


  칸은 골턴 연구소에 있던 시절부터 극단적인 상황에서도 효력이 있는 안전 스위치가 필요하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인간들을 향한 복수도 중요했고 그로서는 전쟁을 일으킬 충분한 명분이었겠지만, 연구소 바깥으로 나가서 자신과 동족들을 다독여줄 수 있는 믿음직한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욕구가 없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인류가 목덜미를 붙잡고 벌벌 떠는 동안 그는 두 가지 종류의 실패를 경험한 꼴이 되었다. 연구소 밖에도 가이드는 없었고 폭력을 통한 스트레스의 해소 역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 못했던 탓이다.


  그래서 그는 강화인간이라는 종을 뿌리부터 파헤치기로 한 것이다. 그가 선택한 곳은 20여개의 분과를 가진 유럽 최대의 연구소 중 하나였다. 강화인간들은 거기서 칸의 지시에 따라 피실험체가 아닌 학자로 거듭났다. 기록물을 남길 필요가 없는 센티넬들의 우수한 두뇌 덕에 자세한 자료가 남아있진 않으나, 레비나스 맥코이가 칸과 접촉하면서 어떻게 해서든 밝혀내려고 한 유사-가이드 관계의 메커니즘은 아래와 같다.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결국 유사-가이드 관계의 핵심은 칸을 제외한 모든 센티넬들이 칸을 가이드라고 인식하는 거다. 연구소에 있으면서 센티넬들은 마치 파일을 다운로드해 저장하듯이 칸의 사고를 받아들이는 인식 회로를 형성했다. 여기서 센티넬들이 골라 담아야 하는 자료의 키워드는 칸의 존재 자체다. 즉 유사-가이드 관계에는 실제로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생겨날 법한 정신적인 유대나 공감대가 아닌, 단 하나의 존재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고 시스템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칸의 설명에 의하면 이 시스템은 동족들의 세포 하나하나에 유전적 정보 형태로 주입되었다고 한다. 유사-가이드 관계를‘동류의식을 이용한 유전공학적 조율’이라고 요약했던 칸의 한 마디는 그 때문에 여전히 권위 있는 표현으로 인정받고 있다.


  여하튼 두려울 만큼 영리한 리더를 필두로 강화인간들이 얻어낸 결실은 다시금 인류를 소름 돋게 했다. 휴전기 이후 벌어진 전투들에서 센티넬들은 불필요한 사체 훼손을 줄여나갔으며 속성 훈련을 받은 것처럼 규율과 전술에 따라 행동했다. 센티넬들이 어느 정도는 평정을 되찾는 방법을 획득했다는 증거다. 


  다행히 인류도 2년 넘는 시간을 두 손 놓고 보내지는 않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센티넬 스파이럴(Sentinel Spiral)을 발견하면서 인류는 희망을 얻었다. 이것 역시 전쟁 시기에는 없었던 용어이며 가이드라인(Guideline)과 대조를 구성하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강화인간들은 숱하게 남은 시신의 손톱 밑에도 피부를 남기지 않았던 지라 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하여 인류는 무식한 방법을 끌어들여야 했다. 연구원들은 목숨을 내놓고 전장에서 말라붙지 않은 혈흔을 있는 대로 모았다. 진화전쟁 4개월간 강화인간들은 전투 도중 생기는 상처마저 일종의 해소 작용으로 느꼈던 덕에 자잘한 생채기를 달고 다녔다. 어차피 자체적으로 치유되어 없어지는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단 한 방울의 피는 강화인간들에겐 몰라도 인류에겐 황금과 같았다. 그 다음 복잡한 분리 과정을 통해 채운 몇 개의 시험관은 헤이스팅스와 같은 최고의 인재들에게 보내져 연구에 활용되었다. 


  그런 척박한 역사를 거쳐 인류의 눈앞에 등장한 센티넬 스파이럴은 세포의 일종으로 센티넬들은 이것을 염색체 개수만큼 가지고 있다. 보통 인간에게 추출한 유전인자를 한데 융합해 강화시킨 것으로, 강화인간들만이 가진 DNA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가이드라인이 이름과 다르게 살짝 구부러진 모양인 반면 센티넬 스파이럴은 정말로 작은 소용돌이처럼 생겼다.


  헤이스팅스는 이것을 생화학전을 통해 공략하고자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헤이스팅스는 센티넬에게 반드시 있을 수밖에 없는 특이점을 노리는 작전을 짰는데 그 타깃이 센티넬 스파이럴이 된 것이다. 기어코 상트페테르부르크 대전에서 헤이스팅스의 발명품은 강화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단위를 무력화시켜 그들을 몸 안쪽에서부터 파괴시켰다. 


  한편 재판에 세우기 전 칸 누니엔 싱에 대한 신체 정밀 검사를 거쳤을 때, 그의 스파이럴 역시 10분 이내로 그의 몸이 붕괴될 수준으로 상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곧 그 10분 차이로 헤이스팅스와 인류가 센티넬을 멸종시키지 못했다는 뜻도 된다. 혹자들은 그것이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인류의 영웅이라든가 전장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매우 꺼리게 된 이유가 아닌가 추측한다. 헤이스팅스의 승리는 완전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던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즈음에서 헤이스팅스의 속내를 직접 들어봐도 좋을 듯하다.



  내가 아니었어도 누군가는 나처럼 강화인간들을 쓰러뜨려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들은 나를 누구로도 대체될 수 없는 위대하고 존경할 만한 누군가로 치켜세운다. 지구 어딘가에 센티넬들이 살아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칸이 유사-가이드 관계를, 헤이스팅스가 스파이럴 공략 작전을 완성한 뒤에도 그 두 가지 묘책들이 힘겨루기를 하는 데 1년이 걸렸다. 휴전기가 끝나고 이어진 진화전쟁은 둘이 각자의 이론을 시험해 보는 크고 작은 소모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인류의 피해는 여전히 막심했으나 강화인간들의 숫자도 하나 둘씩 줄어갔다.


  스파이럴을 발견한 덕에 헤이스팅스는 연구원 신분으로 군사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거기서 그녀는 인류가 가진 몇 안 되는 강점 중 하나가 숫자라고 지적하면서 100대 1의 비율로 아군과 적군의 병력량을 맞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선으로 떠밀린 병사들은 그래도 최후의 무기가 있다며 전보다는 사기가 증진된 모습으로 싸움에 임했고 강화인간들의 숫자가 하나 둘씩 줄게 되었다. 헤이스팅스는 그러면서 부검이 가능한 강화인간의 시신을 얻을 수 있길 바랐으나 그건 칸이 막았다. 인간에게 내줄 바에야 직접 동족의 사지를 조각내는 그의 냉혹함은 변함없이 사람들을 주춤거리게 했다.


  등 뒤에 저마다의 과학을 숨기고 충돌하는 동안에도 센티넬은 영토를 넓혀갔다. 발칸 반도를 노리는 것 같다가 기습적으로 흑해 주변을 장악하며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유럽의 전역을 뺏기다시피 한 인류는 최종 방어선을 러시아 땅에 구축했다. 강화인간 다수를 시베리아 쪽으로 끌어들여 봉쇄시키겠다는 심산을 품고 있었던 듯한데, 예상과는 달리 진화전쟁의 종착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헤이스팅스는 갈수록 단단히 정비되어가는 강화인간들의 뒤편에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 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혈액 샘플을 모조리 소비해가며 자신의 약물이 효과가 있을 거라 자신하게 된 그녀는, 강화인간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시민들은 모스크바로 대피시키고 도시에 약물을 퍼뜨렸다. 


  결과적으로 전쟁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입성 당시 70명이 넘었던 센티넬의 규모를 1/3까지 줄이고 만 인류의 승리였다. 그러나 인류는 칸 누니엔 싱이라는 기묘한 이름을 가진 강화인간 때문에 자만하지도 못하고 승자로서는 상당히 독특한 길을 가게 되었다.







  칸은 도시를 둘러싸고 자신을 막아선 벽을 보았다. 시각적인 루트를 통하지는 않았어도 그의 몸뚱아리가 그 투명한 장애물을 인식하고 있었다.


  강화인간들은 여간해선 죽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세포를 재생하는 것보다 몇 백 배에 달하는 회복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민첩함과 날카로운 악력과 비범한 두뇌를 갖고 있다. 사상자가 나오기 시작한 최근까지도 강화인간들이 끊임없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태생적 특징이 버텨준 덕분이었다. 그들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괴생명체이다. 


  그래서 칸은 만약 그들이 패배를 맞이한다면 이런 방식일 줄을 예감했다.


  속으로 침을 꿀꺽 삼키면서 라이플을 들고 있던 군인들이 서서히 뒷목을 폈다. 이태까지 인류의 재앙이었던 그들을 겨누던 총이 하나씩 밑으로 내려갔다. 군인들이 보기에도 이제 강화인간에게 검은 무기를 들이대는 건 소용없을 것 같았다. 칸이 살짝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어 있는 건물들인데도 출입구가 활짝 열려있었다. 강화인간들이 공기를 타고 흐르는 무시무시한 벽을 피할 곳은 남아 있지 않았다.


  칸은 이 시점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를 선택했다. 그는 자신을 중심으로 뭉치면서 필사적으로 섬겼던 동족들을 외면하고 천천히 전진했다. 놀란 군인들이 무기를 치켜드는 소리가 났다. 짧게 철컥거리는 소리일 뿐인데도 칸은 자신의 귓가가 사방으로 갈라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누군가를 붙잡고 늘어져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 근원적인 타격이었다. 


  캐서린은 무장한 병력들 뒤에서 작은 망원경으로 전장을 보고 있었다. 유독 쓰러지지 않는 인영이 약속장소를 살펴보는 것처럼 양 옆을 보며 움직이고 있었다. 캐서린은 적의 눈에 띌까 벗어 두었던 연구소 가운을 다시 걸쳤다. 열 명의 강화인간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들어온 지 고작 15분 만에 쓰려졌다. 캐서린은 자신이 몸을 사릴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쏴요.”


  캐서린이 하얗게 모습을 드러냈다. 강화인간을 이끌었던 수장의 정체는 놀랍지도 않았다. 그녀는 전쟁에서 칸을 만나면 꼭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내심 캐서린은 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칸은 시커먼 무리에서 튀어나온 백의의 지휘관을 보고 미소 지었다. 자신의 몸과 다르지 않은 동족들과, 진짜 그가 부리고 있는 육체가 패배감에 털썩이고 있는데 그의 미소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러고보니 당신을 본 적이 없었어, 캐서린.”


  칸의 말을 듣고 캐서린이 멈춰 섰다.


  “…기억할 줄은 몰랐는데.”


  칸은 대꾸하지 않았다. 청각적 자극을 받아들이는 것도 버거워 하는 육체가 깊은 곳에서부터 방향 없이 돌았다. 세포 하나하나에 전깃줄을 매달아 실험을 가하는 듯한 아픔이 여기저기에서 박동했다. 그 찰나만큼은 계산적인 의식도 없이 칸은 캐서린의 가운 자락을 보고 웃어버렸다. 쓸모는 없었어도 따뜻했던 오필리아의 온도가 옷이 흩날리는 모양대로 부서지는 것 같았다. 칸의 의식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캐서린은 그저 얼굴을 찡그렸다.


  “오필리아와 당신은 꽤나 잘 어울리는 짝이었겠군.”


  그러자 캐서린이 주머니 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렵게 물건의 정체를 알아본 칸이 비정상적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생각보다 그의 선택은 쉬운 길이었다.


  “연구소에 가 보니 그야말로 터만 남아있어서 이 명찰도 직접 만들어야 했어. 전쟁 통에도 주문을 받는 간 큰 장인들은 없었거든. 쉬는 시간마다 오필리아 이름을 새기면서 만들었지.”

  “칭찬을 해줘야겠군.”

  “뭐?”

  “복수와 그것을 바칠 대상을 두 손에 다 쥐고 있잖나.”


  캐서린이 자랑하듯 들고 있었던 오필리아의 명찰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칸의 사고는 달라진 점 없이 똑바로 구동하고 있는 것 같았고, 손끝 하나 떨지 않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오랫동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캐서린은 소매를 만지는 척하면서 시간을 체크했다.


  캐서린은 앞으로 10분을 더 참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일단 아무 말이나 지어냈다.


  “당신은 이게 다 오필리아를 위해 한 일이라고 생각하나보지?”

  “합당한 추측이다. 내가 그녀의 육체와 정신을 다 가져갔지 않은가. 인간들은 소중한 걸 뺏기면 화를 낸다고 하던데.”

  “…그렇다면 그런 일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도 배워서 알겠네.”

  “내 목숨을 가져가겠다는 뜻이라면, 나는 당신이 복수를 달성했다는 말을 거둬들일 것이다.”


  캐서린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여기서 못 이겨.”

  “당신 입장에선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칸은 정말이지 캐서린의 약물에도 끄떡없는 것처럼 빠르게 대답을 뱉어냈다. 순간 캐서린은 다시 시계를 보려다가 손목을 쥐었다. 10분은 지나지 않았을 거였다. 3분 혹은 5분 정도는 흘렀을 거라고 막연히 짐작하면서도, 그보다 분침이 움직이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면 캐서린은 자신의 확신을 깨끗하게 잃어버릴 것만 같았다. 


  “나를 제외하곤 대부분이 나가 떨어진 것 같군. 여기까지는 당신이 계산한 그림일 거야. 그런데 그 와중에 나는 당신의 옷자락 밑에서 움찔대는 시계가 보여. 언제쯤이면 저 망할 괴물이 나동그라질지 재고 있는 건가?”


  총성 한번 들리지 않았는데 피 냄새와 비슷한 향이 도시에 조금씩 들어차고 있었다. 캐서린이 시선을 옮겼다. 신체를 구성하고 있던 요소가 완전히 끊어진 강화인간 하나가 주저앉은 상태로 체액을 흘리고 있었다. 그것이 칸의 발 뒤로 느리게 나아가는데, 캐서린은 진심으로 동족의 일부를 밟고도 꼿꼿한 칸을 직시하고 싶지 않았다.


  “정 답답하면 총으로 쏴 버리면 돼.”


  날카롭게 내뱉는 말투를 꾸며내고자 애썼지만 캐서린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멈춰버린 심장을 스스로 살려내는 칸을 보고도 그녀는 총을 믿는다는 말을 해야만 했다.  


  “밀레이스를 죽인 나를 없애지 못하면 당신은 오늘의 승리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지.”


  칸은 지금 한 걸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력을 전부 언어로 우회하고 있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유의하면서도 입을 열었다. 


  “그러나 내가 직접 밀레이스를 죽였다고 해서 당신이 날 그대로 따라갈 필요는 없어.”


  목소리를 내면서 칸은 자신이 연구소를 파괴하던 날을 회상했다. 가운을 입은 여자가 있고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게 많았으며 까만 인간들이 가득하다는 게 비슷했다. 그는 의식을 잃지 않고자 자신의 기억에 상상력을 덧입혔다. 칸은 캐서린 헤이스팅스를 품에 안고 총을 든 인간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칸은 기억하지 못했으나 그의 상상은 실제로 일어난 일과 차이점이 거의 없었다. 







  전쟁의 마지막에서 인류는 부상자 한 명 없이 강화인간들에게 승리를 얻어냈다. 칸을 포함한 24명이 무색무취의 포격에서 살아남아 전범으로 붙잡혔다. 인류는 이제 구제할 길 없는 잔혹한 강화인간들을 사형시켜버리면 모든 게 끝난다는 마음가짐으로 칸을 법원으로 떠밀었다. 물론 그 재판은 형식적이면서 인류의 위대함을 뽐내기 위한 이벤트처럼 진행될 예정이었다. 판사는 법전도 들고 오지 않았고 피고 측 변호사는 당연히 없었다. 


  칸은 사지를 제대로 움직일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져 버린 동족들을 대표해 홀로 증인석에 섰다. 그러고는 혈혈단신 한창 자신들의 극적인 업적에 도취되어 있던 인간들의 뒤를 때렸다. 이 충격에서 제일 먼저 헤어난 인물이 레비나스 맥코이였고, 그의 주장을 필두로 가장 극악무도한 전범에 대한 뜨거운 토론이 막을 올렸다.  


  존재하는 학문들 중 제일 양심적인 과학이라고 평가받는 인간학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2. 센티넬의 복수

03. 진화전쟁의 발발



  이 무렵부터 역사가들은 그럴싸한 추측을 짜내기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편지로 헤이스팅스에게 귀중한 자료들을 남겨주었던 밀레이스마저 목숨을 잃고, 골턴 연구소는 강화인간들의 초기 데이터와 함께 잿더미로 변해버린 시기가 진화전쟁의 초반부다. 아직도 학자들은 진화전쟁의 시작부터 4개월이 흐르기까지의 빈틈을 메우지 못하고 있다.


  어쨌든 밀레이스가 연구소에서 심정지 실험을 감행했다고 기록했던 날부터 열흘 남짓이 지났을 때 센티넬들은 궐기했다. 정확히는 6월의 마지막 주 화요일이었다. 칸 누니엔 싱을 필두로 결집한 강화인간들은 골턴 연구소에 근무하던 인원 전원을 살해하고 주변 건물을 파괴했다. 그 지점부터 센티넬 측은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4개월 동안 어마어마한 인명피해를 발생시키고 다녔다.







  며칠 새 다시 작동된 인큐베이터 안을 넘실대던 안정제가 아직 기체 형태로 공중을 떠다니는 모양이었다. 칸은 중심에서 흐릿해지려는 눈동자를 뜨며 익숙한 약물의 냄새를 맡았다. 그는 그저 여유를 즐기고자 안정제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동작을 멈췄다. 그것은 칸이 스스로 키워낸 이성이 제공하는 그야말로 달콤한 휴식이었다. 


  안정제의 희미한 향기에 맞장구를 쳐줄 겨를도 없는 다른 강화인간들은 사방에서 날뛰고 있었다. 칸은 동족들의 움직임이 방 하나를 꽉 채울 정도로 큰 테이블 위에서 진행되는 핀볼 게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딱히 계획을 세울 수도 없고 오직 확실한 것은 출구로 나가야 한다는 방향성, 사실 칸이 동족들에게 일러준 것은 그뿐이었다. 박사들은 시뻘겋게 끓어오르고 있는 강화인간들의 피부 밑을 진정시켜줄 수 없었다. 칸은 그들에게 인간들의 무능함을 다 겪어 알고 있으면서 왜 그들에게 붙들려 있느냐고 말했었다. 


  칸은 피 냄새에 속절없이 묻히는 약물의 잔향처럼 고개를 숙이는 인간들의 무리에서 기다리던 것을 발견했다. 그가 발목에 붙은 가운 자락을 털고 걸어 나갔다. 눈과 심장을 찔린 박사들의 위에 서 있는 오필리아 밀레이스가 초점 잃은 눈동자로 칸을 바라보고 있었다. 


  칸이 걷는 길에 있는 인큐베이터들이 꾸준히 폭발했다. 전선에서 솟아오르는 스파크와, 인간들의 몸에서 튀어 나오는 핏방울이 똑같이 허공으로 흩어지는 사이로 칸은 창조자에게 손을 뻗었다. 오필리아는 옆을 돌아볼 수가 없어 칸만 응시했다. 조금만 움직였다간 귓불이 뜯겨 나갈 것 같은 강화인간들의 굵은 팔이 그녀의 사방을 압박했다. 


  칸은 불꽃놀이의 방아쇠를 당기듯 이미 죽어서 바닥으로 떨어지려 하는 인간의 살을 뜯었다. 예전처럼 오필리아의 머리카락을 만져줄 것처럼 보였던 손에 피가 묻었다. 오필리아는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칸에게 도움이 된 적은 별로 없었지만 그럭저럭 머리는 영리했으니, 담당하는 강화인간이 있었던 연구원들만큼은 반드시 자신의 피조물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규칙을 눈치 챘을 터였다. 


  제어가 불가능한 손으로 잘게 쪼개기 어려운 부분들만이 바닥에 널려있자 강화인간들은 이제 살아 있지 않은 걸 파괴하기 시작했다. 책상이 우수수 넘어지고 탁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오필리아는 입을 가리면서 울었다. 


  오필리아는 사실 칸의 악질적인 처벌 의식 때문에 지금까지도 숨을 쉬고 있었다. 칸은 그녀가 혀를 깨물지 않는 걸 흥미롭게 여겼다. 그는 오필리아와 밀착할 수 있는 거리까지 다가왔다. 오필리아가 뭐라고 입을 벙긋거렸다. 두렵고 지친 그녀의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작았으나 칸은 대신 입모양을 읽었다.


  —난 노력했어요.


  똘똘 뭉친 발소리가 연구소의 문을 하나씩 파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신고 기록이 남아 있는 핸드폰을 바닥으로 던졌다. 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동시에 웃었다. 살기 위해서 몸뚱이를 폭발시키고 있는 강화인간들이 그녀가 구석에서 핸드폰을 갖고 꼼지락거리는 데에 신경을 뒀을 리가 없었다. 


  “인간들이 더 온다.”


  칸이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자신들이 부숴버릴 수 있는 목표물을 감지한 강화인간들이 거칠게 기수를 돌렸다. 검고 두터운 장비들로 긴장감을 가린 특수요원들이 고함을 쳤다. 칸은 갑자기 오필리아를 자신의 앞쪽으로 확 휘어잡더니 그녀와 함께 동족들을 헤치고 나갔다. 


  오필리아는 끌려가는 자신의 다리조차 방해하는 동료들의 조각을 보더니 결국 비명을 질렀다. 아직도 생존한 민간인이 있을 줄 몰랐던 진압 부대가 멈칫했다. 이 순간만큼은 칸의 이성에 의지하고 있는 다른 강화인간들도 그의 행동을 따라 피 묻은 손을 기괴하게 꺾는 데 그쳤다.


  “혀, 협상을 하자는 거요?”


  선두에서 기다란 총을 붙잡고 있는 남자가 물었다. 오필리아를 잡아 두고 있는 칸의 자세는 꼭 인질극을 벌이는 것 같았다. 


  그 때 칸은 오필리아만 들을 수 있게 말했다.


  “하지만 네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낳지 못하지.”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고, 요원들은 자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존재의 머리가 잔인하게 으깨지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작은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잔뜩 증폭되어 그들의 귀에 꽂혔고 칸이 오필리아를 보란 듯이 스르르 떨어뜨렸다.


  이후 그는 누구보다 끔찍하게 진압대를 제압했다.

 






  인간들은 속절없이 땅과 생명을 내주는 것 외에는 할 게 없었다. 한 달반 만에 인류는 골턴 연구소가 위치해 있던 영국부터 이베리아와 이탈리아 반도를 빼앗겼다. 그들의 진격이 어찌나 위협적이었는지 종군기자들마저 자취를 감출 지경이었다. 와중에 센티넬이 점령한 지역에서 아주 운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아이슬란드로 도피하려 애썼다. 어느 지역에서 출발해도 닿기가 어려웠던 아이슬란드는 전쟁 내내 강화인간들의 침략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전시 중에 비행기는 뜨지 않았고 바다를 통한 길도 여의치 않아 많은 사람들이 도주 도중 숨지기도 하였다.


  때로 우리는 자료가 워낙 부족해서 더 잘 파악할 수 있는 역사의 일면을 만나게 된다. 강화인간들이 유럽 대륙을 휘젓던 죽음과 같던 4개월, 사소한 자료마저 씨가 마른 것 같은 그 시간은 오히려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아 오싹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