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 PRESENT
08. Awakening
캐롤 마커스는 근래 발을 내뻗는 동작 하나하나에도 집중하면서 걸었다. 낯설기도 하고 공연히 피곤해지기도 일쑤였지만 그녀는 일주일 정도는 심혈을 기울인 걸음걸이를 이어갈 생각이었다. 갑작스럽게 자신의 몸이 전과 달라졌다는 걸 자각하면 평소와는 다른 행동이라든가 걱정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200년간 임상실험을 거쳤다는 물질이 유발한 변화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녀는 자신이 스타플릿 제독의 딸이라는 걸 밝히고 싶지 않을 때 꺼내들곤 했던 어머니의 성씨가 남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최근에서야 알았다. 아주 먼 옛날에 전범을 생산한 꼴이었던 인류에게 일침을 던진 월리스라는 의사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카데미에서 진화전쟁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레비나스 맥코이라는 의학자의 책임감에 고개를 주억거렸던 캐롤에게는 어쩐지 기분 좋은 진실이었다. 갑자기 월리스 가문의 전통을 따라줬으면 좋겠다는 아버지의 말에도 크게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녀의 아버지인 마커스 제독은 아카데미의 수업에서 다뤄지지 않는 이야기를 여럿 들려주었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위대한 업적을 세운 인물이지만, 그의 목소리가 더 멀리 퍼질 수 있게 지원해준 사람도 많다면서 월리스를 언급했다. 캐롤은 자신이 잘 알지 못하는 분야에 관해서라면 늘 귀를 세우고 다녔다. 그녀는 제독으로부터 인류가 잘못 창조한 피조물들과 그들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피해자 모두를 위했던 운동도 들었다. 200년이 지나고 그것은 맥코이나 월리스 같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의무 혹은 가풍처럼 자리 잡게 되었다.
캐롤이 들고 있는 서류는 이를테면 그 흔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최근 가이드라인을 주입받고 이를 신고하러 스타플릿 산하 메디컬 센터로 향하고 있었다.
마커스는 딸에게 신고만 마치고 오면 왜 캐롤에게 월리스들이 따라야 하는 역사에 합류하길 권유했는지 알려주겠다고 했다. 캐롤은 어렴풋하게 보이는 센터의 지붕을 보고 더 열심히 발을 놀렸다. 그녀의 몸에 처음 들어온 가이드라인도 그녀와 함께 흔들리고 있을 것이었다.
캐롤은 서류를 옆구리에 끼고 계단을 빠르게 올라 메디컬 센터로 들어갔다. 그녀는 안전하게 안내 데스크로 찾아갔다.
“안녕하세요. 가이드라인을 주입받은 걸 신고하고 싶은데 어디로 가면 되나요?”
직원은 머릿속에서 오래된 정보를 뒤지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이드라인과 관련해서 따로 업무부서가 있는 건 아닙니다. 레너드 맥코이 소령님께 가 보시는 건 어떨지요. 스타플릿에 소속되어 있는 가이드들은 맥코이 소령님이 관리하시는 걸로 압니다.”
직원의 제안은 꽤나 논리적이었다. 세상에서 가이드에 관해 맥코이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리라. 캐롤은 직원에게 맥코이 소령의 사무실까지 안내를 받은 뒤 승강기가 마련된 구역으로 이동했다.
비범한 양심을 발휘한 학자의 자손으로서 지키면 바람직한 일, 즉 가이드라인을 주입받기 전후로 캐롤은 진화전쟁과 얽혀 있는 책들을 탐독했다. 캐롤은 전쟁의 원흉이었던 강화인간들은 이제 레비나스 맥코이의 의견을 따라 센티넬이라 불리고, 그들이 잠든 뒤에야 생겨난 센티넬의 반쪽이 가이드라는 것부터 정립했다. 어느 서적에나 조금씩은 언급되어 있는 맥코이의 이론이나 사상들도 그녀의 머리에 차근차근 쌓였다. 자신의 센티넬을 만나지 못하고 반성을 거듭해야만 했던 그의 일화들은 캐롤의 가슴에 잠시 머물다 간 것 같기도 했다.
여하튼 가이드가 되어 맥코이를 만난다는 건 우습게 여길 일은 아니라고 캐롤은 판단했다. 덕분에 캐롤은 평상시보다 정중하게 소령의 방문을 두드렸다.
“소령님?”
가운은 벗어서 의자 뒤에 걸어 놓은 채 파란색 유니폼을 드러내고 있는 남자가 눈썹을 올렸다. 레너드 맥코이 소령은 레비나스의 유지를 이을 만큼 영민하면서 자각이 있는 인물인지, 하다못해 그가 의사인지 함선 운행에 전면으로 나서는 승무원인지 겉으로 보기에는 알 수 없는 모습으로 캐롤을 맞이했다.
“캐롤 마커스 대위입니다. 가이드에 대해서라면 소령님을 뵈면 된다고 해서 찾아왔습니다.”
캐롤의 말을 들고 레너드의 눈동자에 맺혀 있던 의문점이 사라졌다. 그가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틀린 말은 아니지. 무슨 일인데?”
캐롤이 가지고 있던 서류를 내밀고 나서 자리에 앉았다. 레너드는 종이의 윗부분을 슥 눈으로 훑자마자 그녀가 찾아온 용건을 파악했다.
“…제독님 집안에도 인간학을 견인했던 학자가 있을 줄은 몰랐네.”
“어머니께서 월리스 가문에 속해 계십니다.”
캐롤은 소령의 안색을 살피며 월리스들에 대해 설명할 타이밍을 재려 했다. 그러나 레너드는 200년 전 역사에 관해서라면 전문가인 마냥 쉽게 납득해버리고 서랍을 뒤적거렸다. 캐롤은 그가 복사본을 만들어 원본은 보관하고 특정 데이터베이스에 그녀의 이름을 등록하는 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뭐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캐롤이 자세를 살짝 바꿔 레너드를 마주했다.
“보통 가문을 따라서 가이드라인을 주입하는 시기는 20대 이전인데, 왜 이제 와서 가이드가 되려고 했는지. 앞으로도 평생 센티넬을 만날 일은 없을 텐데 말이야.”
“저도 다는 모릅니다.”
레너드는 어리둥절해졌다. 아직 마커스의 말을 듣지 못한 캐롤은 진실하게 답변했다는 떳떳한 태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실히 나쁜 일 같지는 않았거든요.”
캐롤은 그 뒤 정중한 인사를 남기면서 밖으로 나갔다.
⁂
레너드 맥코이는 주변이 진한 회색빛으로 젖었을 즈음에 집에 도착했다. 혼자 쓰기엔 그럭저럭 건실한 가구들이 적정한 불빛을 받으며 레너드의 눈앞을 채웠다. 그는 가방이라든가 겉옷을 내려놓자마자 손부터 씻었다. 함선 안이든 직장 근처든 집에서 취사를 할 일이 많지 않은 그의 주방은 건조한 편이었다.
레너드는 종일 그의 신경을 사로잡고 있었던 주제를 털어내기 위해 방으로 갔다. 침상은 거실에 있는 지라 내부는 책장이 거의 점령한 모습이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책의 아랫부분을 일직선으로 훑으며 필요한 책을 수색했다.
잠시 후 그의 손에 잡힌 건 레비나스 맥코이의 저서였다. 처음부터 어긋난 이래 어떤 가이드도 센티넬을 돌봐준 적이 없거늘 레비나스 맥코이는 학계에서 다뤄져야 하는 학자였고 꾸준하게 조명 받아야 하는 위인이었다. 레너드는 자신의 흥미로 인해 읽어본 적은 없었던 조상의 글을 두어 번 매만졌다.
이제 막 가이드로 임명받은 대위가 가이드에 대해 시원스레 내린 정의가 레너드의 한 귀퉁이에서 간질간질 솟아올랐다. 가이드가 된다고 해서 나쁜 점은 정말이지 하나도 없다. 독특한 유전자를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전범의 혼란한 내면을 부드럽게 쓸어줄 수 있는 입장이 될 수도 있으니 그건 오히려 바람직한 축에 속했다.
레너드는 오래간만에 레비나스 맥코이의 책을 펼쳤다. 성공적으로 맺어질 수도 있었던 가이드와 센티넬, 즉 저자와 칸 누니엔 싱의 일화가 담긴 물건이었다.
⁂
센티넬은 포근한 담요처럼 뺨을 감싸는 온도에 본능적으로 몸을 맡겼다. 빙하가 되어 쌓여도 이상하지 않을 응축된 냉기가 심연에서부터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센티넬은 뒤척이면서 잡히지 않아야 마땅한 온도를 손에 쥐려고 했다.
현재 센티넬은 무엇이 가능하고 현실적인지 가늠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센티넬은 줄곧 비틀리고 억눌려 있다가 예기치 못한 때에 해방을 맞이하면 어쩔 줄 모르는 근섬유 덩어리였다. 그러니 센티넬은 자신이 등을 붙이고 있는 지면이 딱딱하지 않다는 것과, 그저 온도인 줄 알고 붙잡았던 게 누군가의 손목이란 것까지 깨닫는 데에 몇 분을 더듬거렸다.
가장 원초적인 단위에도 자유가 깃든 듯이 센티넬은 가벼워졌다. 눈을 뜨고 몸을 움직이는 게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을 거란 확신도 들었다. 센티넬은 막 탄생하는 존재처럼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존, 정신이 드나요?”
목소리는 센티넬이 강하게 그러쥐고 있는 손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부터 들려왔다. 시야가 탁해 센티넬은 반복해서 눈을 깜빡였다. 눈앞을 닦아내는 데 심혈을 기울이느라 센티넬은 자신이 어떤 말을 들었는지 분석하는 일을 뒤로 미뤘다.
“잠을 깨웠다면 미안해요. 그런데 날 기다리는 센티넬이 있다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기가 어렵더라고요.”
눈동자가 온갖 사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자 센티넬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순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손은 하얀 팔목을 지나 짧은 금발을 지닌 여성에게 이어져 있었다. 센티넬은 자신을 다정하게 대해줬던 금발 여성을 한 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머리카락은 짧지 않았었다. 센티넬은 여성이 누군지 몰랐다.
“…당신은…?”
“캐롤 마커스에요. 당신의 가이드이기도 하고요.”
캐롤이 허리를 구부리고 센티넬에게 가까이 다가와 웃었다.
“당신이 가이드를 얻게 된 첫 번째 센티넬이에요, 존. 내가 존이라고 부르는 거 괜찮죠?”
기분 좋은 온기가 여전히 센티넬에게 원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는데 그것과는 별개로 센티넬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그는 센티넬과 가이드 모두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이름은 칸 누니엔 싱이었다.
⁂
캐롤은 가이드를 만난 후에 더 혼돈에 휩싸인 듯한 센티넬을 동정해 기꺼이 자리에서 물러나주었다. 예기치 못하게 짝을 만나는 순간은 언제나 어리둥절한 법이었다. 캐롤은 몹시도 맑아서 되려 정돈이 필요해 보이는 센티넬의 눈동자를 보고 그의 상태를 납득했다. 당연히 그것은 칸의 위장이었다.
칸은 자신의 몸부터 살펴보았다. 그의 복장은 검은색이긴 했는데 전과 형태가 달랐고 둥그런 화살표 같은 마크도 새겨져 있었다. 극저온 캡슐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시야가 닿는 곳엔 보이지 않았고, 그가 위치한 공간은 강화인간의 지성도 근본을 알 수 없는 양식과 도구들로 가득했다. 칸은 퍼즐 조각의 밑바닥을 하나씩 들춰보듯이 주변을 세심하게 돌아보았다.
캐롤 마커스라는 여자, 그리고 그보다 낯선 가이드라는 낱말의 여운이 칸의 몸속을 계속 따뜻하게 덥히고 있었다. 칸은 기회를 봐서 가이드란 게 뭔지 알아봐야겠다고 머릿속에 단단히 박아두었다. 캐롤 마커스는 그의 이름부터 잘못 알고 있었으므로, 그녀에게 좀 더 거짓을 불어넣는 게 어렵지는 않을 듯했다.
본격적으로 주변을 뒤져 보면서 정보를 얻고자 일어났던 칸은 눈동자마저 잡아 세우며 동작을 멈췄다. 강화인간의 감각은 변함없이 우수했다. 칸은 약 300m 떨어진 곳에서 이곳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를 듣고 책상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용도를 알 수 없는 물건들은 내버려두고 칸은 통로 쪽을 등진 자세를 취했다. 그의 뒷모습에 누군가 의심할 구석은 없었다.
칸은 발소리가 지척으로 다가올 때까지 얼굴을 돌리지 않을 작정이었다. 썩 밝아 보이지는 않은 이곳에 찾아오는 인간이라면 자신이 서두르지 않아도 용건을 말할 거라는 추측이었다. 과연 머리를 바짝 깎은 남자는 칸에게 인사하며 말했다.
“중령님이 요청하셨던 제작 계획서를 패드에 넣어두었습니다.”
역시 칸이 모르는 인물이었다. 단지 남자의 태도가 사무적이라 칸도 무뚝뚝한 태도로 고갯짓했다. 그러면서 칸은 남자가 입은 옷차림을 빠르게 살폈다. 칸은 남자가 언급한 호칭과 서로가 입은 옷이 비슷하다는 걸 기반으로 자신이 유니폼을 지급받고 계급이 정립되어 있는 단체 혹은 사회에 속해 있음을 유추해내는 데 성공했다. 그와 더불어 의문점도 얻었다. 중령이라는 직책을 받는 동안 칸은 자신이 무엇을 했었는지 약간도 기억하지 못했다.
칸은 남자의 그림자가 완전히 사라지길 기다렸다가 패드라는 물건으로 손을 뻗었다. 살짝 무게감이 있는 네모난 물건의 이름이 패드였다. 칸은 본능적으로 실험체라는 말을 각인했던 순간처럼 정보를 하나씩 저장했다. 오필리아 밀레이스의 놀란 얼굴과 자신이 생후 처음 냈던 목소리를 기억하면서도, 이 낯선 정경에 대해선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는 게 잠깐 그를 언짢게 만들었다.
다행스럽게도 칸의 이성은 빠르게 최상층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그의 이성은 본래 믿음직스러웠지만 전보다 더 민첩해진 것 같았다. 칸의 손목은 지금도 캐롤 마커스의 체온을 품고 있었다. 칸은 패드를 학습하는 작업에 몰두했다.
패드는 칸에게 협조적이었다. 백그라운드가 컴퓨터와 비슷하다 싶더니 조작법도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칸은 패드 안에 있는 데이터를 모두 열어보기로 하고 화면을 눌렀다. 별안간 화면이 까맣게 물들었다.
데이터는 컴퓨터의 언어 체계처럼 검고 하얗기만 한 그림이었다. 칸이 미간을 좁혔다. 수많은 챔버를 거느린 함선의 청사진이 그의 손 위에서 반짝거리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완성할 수 있을 만큼 정밀한 구상도를 손끝으로 일일이 짚어가던 칸은 청사진 말미에 있는 서명을 발견했다. 존 해리슨 중령이라는 글씨로 인하여 칸은 또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 200년 전에 살았던 존재는 그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업을 이미 이 세계에서 달성해 놓고 있었던 것이다.
⁂
3시간을 잠들고 깨어난 칸은 꿈이 뇌리에 생생한 흔적을 남긴 듯이 기억이 일부 돌아왔음을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눈을 떴다. 사실 칸은 본 건물에 대한 구조 파악이 끝나지 않은 관계로 한 곳에 눌러앉아있던 것인데 아무도 그에게 방으로 돌아가라고 지적하지 않았다. 오가는 사람이 많지는 않았으나 이것 역시 칸이 저장해 둘만한 정보였다. 그건 칸이 여기서 모종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칸이 차근차근 자신의 손목을 잡았다. 캐롤 마커스의 흔적이 증발했다. 어딘가가 허전했다.
“존, 안에 있나요?”
그래서 마침 들려온 캐롤의 목소리에 칸은 만족스러워하고 말았다. 인간보다 모든 면에서 우월한 능력을 부여받고도 결핍감과 불안정한 기분에 시달려 왔던 강화인간에겐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캐롤이 계단 한 칸을 넘어 칸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설마 집에도 갔다 오지 않은 거예요? 작업실에서 잘 안 나간다더니 정말이네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넘쳐흐른 기억 때문에 칸은 패드를 건드려 시간을 확인했다. 그는 어느새 생겨 버린 몇 십 시간의 틈을 조용히 정리했다.
“전해줄 게 있어서 잠깐 들렀어요. 곰곰이 돌이켜보니 당신에 대한 배려가 부족했던 것 같아서 말이죠.”
캐롤이 가져온 책 세 권을 그의 책상 위에 쌓았다.
“2세기 동안 쌓였던 걸 전부 흡수해야 할 테니 좀 힘들 거예요. 이걸 다 보면 전에 내가 했던 말들을 이해할 수 있어요. 당신이 센티넬이나 가이드에 관한 지식을 좀 더 갖추게 되면 서로 얼굴 보는 일도 쉬워질 거고요.”
그녀가 가져온 책들은 비교적 두꺼운 것들이었다. 한 페이지에서 몇 개의 사실을 추출해 낼 수도 있는 칸은 반사적으로 사고를 작동시키려다, 캐롤이 책상과 거리를 두며 돌아갈 듯한 태세를 취하자 우선적으로 처리해야 할 행동의 순서를 바꿨다.
“…캐롤이라고 불러도 되나?”
캐롤의 눈동자가 커졌다. 칸이 말을 걸어준 것에 놀란 눈치였다.
“네, 얼마든지요.”
“지금 떠날 건가, 캐롤?”
눈이 커진 상태에서 눈썹까지 올라가니 이제 캐롤의 표정에는 놀랐다는 기색이 완연히 차올랐다.
“원래 이 시간은 당신이 작업을 한다고 들어서…. 아닌가요?”
“당신이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 한 마디로 칸은 자신이 직감적으로 원하는 것과 계획적으로 취하고 싶은 것을 한꺼번에 드러냈다. 예전부터 강화인간들은 불완전한 무언가를 수정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추진력 있게 실행해왔다. 그와 아는 것이 너무나 다른 캐롤은 이를 모른 채 호의 섞인 대답을 해 주었다.
“…그러죠. 가이드를 원하는 센티넬을 외면할 수는 없으니까요.”
센티넬은 흡족함을 참지 못하고 웃었다.
⁂
알렉산더 마커스는 근래 들어 자신의 그림자에 행운의 여신이 깃든 게 아닐까 하는 기분 좋은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다. 설마 관련이 생길 줄 몰랐던 과거의 선택마저 그의 이익을 챙겨주는 사슬에 포함되고 있으니 이보다 반가운 행운이 없었다.
마커스는 아카데미 시절 가벼운 마음으로 집었던 책을 읽고서 센티넬에 관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당장 신분이 생도일지언정 젊은 마커스는 그 때도 함선과 제독의 빛나는 어깨를 그리고 있던 지라, 큰 이질감 없이 자신의 손에 떨어진 센티넬을 그려보곤 했었다. 레비나스 맥코이 등 센티넬을 연구했던 유명한 학자들의 책에는 사진이 실려 있지 않아 젊은이는 거침없는 상상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 안에는 생도 마커스가 이리저리 지어내는 칸 누니엔 싱의 실루엣이 있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센티넬 중에서 이름이 알려진 자는 칸뿐이었다.
이렇다고 해서 그가 월리스를 사랑하는 일마저 공상에 가까웠던 미래상 속에 포함시킨 건 아니었다. 월리스들의 역사를 전해 듣고 우리는 처음부터 접점이 있었던 거라며 아내를 웃게 만든 게 전부였다. 제독이 되고도 센티넬에 관한 마커스의 관심이 사그라진 건 아니었으나 그것은 끈질기게 남아 있는 페인트 벽화와 같았다. 베일에 싸인 인조인간과 얽힌 감정들은 영영 시간에 씻기길 기다리는 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을 듯했다.
알게 모르게 행성연방을 견제하는 세력들이 많아지면서 증축을 거듭하게 된 스타플릿의 신축 건물에 묻혀 있던 극저온 캡슐은 그러므로 마커스에겐 짜릿한 행운이었다. 이젠 일상 같은 아내의 이름과 오래 전 추억에 활기를 불어 넣은 빛나는 숨결이었다.
극저온 캡슐을 발굴해낸 마커스는 가장 앞쪽에 있던 장치를 열어보았다. 까만 머리에 성운의 빛을 뒤집어쓴 블랙홀 같은 눈동자를 가진 강화인간이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버렸다. 마커스는 지시를 받은 엔지니어들이 극저온 캡슐을 올바르게 다룰 수 있는 방법을 익히는 동안 200년 전 데이터들을 열성적으로 긁어모았다. 센티넬에 관한 모든 논문과 기사들을 읽었다. 결론적으로 마커스에게 도움이 되었던 건 전범 재판을 다룬 가디언 지의 스케치 자료였다. 사진을 찍을 수 없어 그림을 첨부자료로 이용할 수밖에 없었던 기자가 마커스에게 칸의 얼굴을 알려주었다.
마커스는 그 날 곧바로 엔지니어들의 작업실로 내려갔다.
“아직 멀었나?”
치프 엔지니어는 예고도 없이 얼굴을 불쑥 내민 제독을 보고 놀랬다가 간신히 예를 갖췄다.
“아니요, 제독님. 사실 지금도 각성을 유도할 수 있기는 합니다.”
“다른 문제가 있는 건가?”
엔지니어들이 집중적으로 탐구하고 있는 극저온 캡슐은 처음 발견된 당시처럼 깨끗하고 홀로 놓여 있었다. 마커스는 엔지니어들이 요청했던 장비가 캡슐과 하나도 연결이 안 되어 있는 걸 보고 눈썹을 꿈틀댔다. 치프 엔지니어가 입술을 오물거렸다.
“동면 기간이 워낙 길었던 탓에 일부 조직에 이상이 생긴 것 같습니다. 특히 기억 세포가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기억을 잃기라도 했다는 소린가?”
“그랬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캔에 잡힌 세포의 활동 양상이 미약합니다. 지금 깨우면… 그의 의식은 아마 백지상태일 겁니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모를 거예요.”
마커스가 엔지니어를 돌아보았다. 대답을 마친 뒤 스르르 내려간 엔지니어의 입꼬리와 어깨가 무안할 정도로 그는 단호히 명령했다.
“깨우게.”
“예?”
마커스가 캡슐의 표면을 톡톡 두드렸다.
“기억을 빼고 나머지는 멀쩡하다는 얘기 아닌가? 그럼 뭘 고민하나. 당장 깨워.”
제독은 책상의 좁은 면에 허리를 붙이고 팔짱을 꼈다. 치프 엔지니어가 눈을 껌뻑였다.
“내가 그의 정체를 붙여주면 되니까.”
제독의 완강한 태도를 뒤늦게 접수한 치프 엔지니어가 동료들을 불러 모았다. 치프가 연구실에 우선 옮겨 놓았던 캡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다른 엔지니어들이 황급히 달려왔다. 제독이 뒤에서 그들 모두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럼 배출을 시작하겠습니다.”
치프 엔지니어가 제어판의 덮개를 열었다. 제독의 긴급 지시를 받들어 최선을 다해 캡슐을 연구했던 엔지니어는 실수 없이 계기판의 버튼들을 차례로 눌렀다. 2세기 간 멈춰 있던 캡슐에서 기계음이 새어나왔다. 그 옆으로 바이탈 사인을 측정할 수 있는 기계가 놓였다.
이윽고 캡슐이 깊은 구동음을 내면서 울렸다. 뿌연 서리가 쌓여 있던 캡슐의 표면이 조금씩 맑아졌다. 제독의 발끝이 자리를 옮기고 싶어서 몇 번이고 미세하게 까딱거렸다.
새하얀 기체와 냉기가 캡슐의 양옆으로 빠져나왔다. 마커스가 더 참지 못하고 캡슐 옆에 붙었다.
“바이탈은 정상입니다.”
생체 파동을 지켜보던 엔지니어가 알렸다. 유럽을 짓밟았던 전범의 하얀 얼굴이 안개 속을 빠져나오듯 빛을 받으며 23세기의 공기로 나오기 시작했다.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이 읽을 수 있는 여러 수치들을 보고 강화인간의 해동을 확인한 뒤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침 마커스는 자신이 빠른 시일 내에 만나길 바랐던 청록색 안구를 마주했다.
“자네가 깨어날 줄 알았네. 난 자네만큼 신임이 가는 인재를 본 일이 없었지.”
제독이 회의실 안에서나 내보이곤 하던 웃음을 띠었다.
“돌아와서 기쁘네, …존.”
인조인간이 새로 가지게 될 이름으로 말을 끝맺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마커스 제독은 그만 지독히 흔한 이름을 뱉어내고 말았다. 그래도 인조인간은 반응이 없었다. 제독은 유리알 같은 그의 눈동자를 보면서 아무렴 어떠냐는 표정을 지었다.
“존, 왜 그래요?”
내내 자신의 어깨에 얹어져 있던 칸의 손끝에 힘이 들어가자 캐롤이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캐롤이 가이드론에 관해 설명하는 걸 빠짐없이 외우고 있던 칸은 뜻하지 않게 일어버린 기억을 복원해버렸다. 그의 육체에 잠들어 있던 회복력이 가이드 덕에 원기를 얻고 시원하게 날뛴 덕분이었다. 칸이 길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별 거 아니다. 계속해.”
캐롤은 칸 누니엔 싱을 통해 레비나스 맥코이가 얻었던 영감에 관하여 몇 마디를 더 늘어놨다. 가이드까지 곁에 둔 센티넬의 수장은 고요하고도 순조롭게 각성하고 있었다.
⁂
마커스 제독이 손수 이름까지 지어준 인조인간을 위해 마련한 직책은 중령이었다. 함장 직을 겸하는 게 당연시되는 대령에 임명하기에는 부담스러웠고, 앞으로 그에게 맡길 중요하고도 은밀한 임무를 생각하자면 소령 직을 줄 수는 없었다. 인조인간은 곧 존 해리슨 중령이 되었다. 마커스는 그가 자신의 정체성에 엉겨 붙은 얼음 덩어리를 떼어내는 일을 용납할 수 없었다.
마커스는 그에게 가이드를 붙여줄 마음이 없었다. 48시간만 있으면 함선에 장착할 수 있는 신무기의 도면을 뚝딱 만들어 내는 중령의 능력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각성 20일 째부터 존 해리슨의 능률이 떨어졌다. 수면 시간이 늘었고, 엔지니어들이 달라붙어서 구체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제품의 설계도가 나오는 데 60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마커스는 자신의 센티넬을 보며 고민했다.
사랑하고 아끼는 월리스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간 건 그 때였다.
마커스는 가이드로 인해 존 해리슨이 기억을 되찾을 위험성과 그가 가이드를 얻으면서 발휘할 수 있는 더 큰 능률을 신중히 쟀다. 이 무렵만 해도 마커스가 고려하지 못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센티넬이 정상적으로 살아갈 수 있으려면 가이드가 꼭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마커스는 이를 가이드만 잘 붙잡고 있으면 센티넬은 자연스럽게 동반되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렸다. 캐롤 마커스는 이와 같은 계산을 거쳐 가이드라인을 주입받는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복잡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흡족해지는 생각들을 마친 마커스가 제복 재킷을 챙겼다. 그는 캐롤과 저녁 식사를 함께 하면서 센티넬에 관한 얘기도 들을 심산이었다.
사무실 문을 걸어 잠근 마커스는 건물을 나가기 전 캐롤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저도 지금 나가려고 준비 중이에요. 늦은 건 아니겠죠?
“물론이다. 오늘 많이 바빴니?”
—존이랑 같이 있느라 사실 일을 많이 못 했어요. 그래도 버거울 정도는 아니라서 내일 금방 할 수 있을 거예요.
“…해리슨 중령을 말하는 거니?”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느라 멈춰 선 마커스는 캐롤의 목소리에 바짝 귀를 기울였다.
—네. 같이 있어달라고 하더라고요. 옆에서 지금까지 정립된 인간학이라든가 가이드론에 관한 내용들을 많이 알려줬어요.
“그랬구나. 만나서 더 자세히 얘기하도록 하자. 내 딸이 얼마나 훌륭한 가이드인지 들어보고 싶구나.”
캐롤은 대답 대신 웃음소리를 남기며 통화를 끊었다. 마커스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캐롤이 막 벗어나는 중인 장소는 그녀가 자주 가는 궁학 연구소라든가 시뮬레이션실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신식 건물이었다. 그곳은 정확히 존 해리슨이 사용하는 공동이 설치된 장소였다. 얼떨결에 캐롤은 이 시간까지 센티넬의 결을 지켰다.
책임감 있는 성격상 캐롤은 이것도 가이드의 임무라고 여기면서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녀가 담당하는 건 존 해리슨이지, 칸 누니엔 싱은 아니었다.
- 독자들의 인식하는 타임라인이 지나치게 빠르거나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자체적으로 검수하면서 풀어나갈 예정입니다. ;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