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7. 인간학



  이 장은 그야말로 레비나스 맥코이를 위한 챕터이다. 더불어 강화인간들을 잠재워 버릴 캡슐을 만들 엔지니어와, 무너진 고향을 보살피러 영국으로 떠났어도 여전히 사람들이 주목하는 헤이스팅스의 뒤편에서 노력한 의학자의 결실에 관한 이야기이다. 현재 인간학에는 신유전학이나 상호구조론과 같은 여러 분과가 있다. 허나 맥코이가 살던 시대 인간학은 곧 가이드론이었으며 여기서 집중적으로 탐구할 것도 그것이다.


  센티넬이라는 용어가 생겨난 계기라고 알려진 맥코이의 발언은 『인간의 감시자에 관한 어려운 진실』이라는 책에서 나온 말이다. 제목에도 ‘감시자(Sentinel)’이라는 표현이 들어가 있다. 이 책은 맥코이가 감옥 안에서 나누었던 칸과의 대화를 세세하게 옮겨 적고 그에게서 알아내거나 과학적 영감을 받은 부분들을 설명해 놓은 인간학의 고전이다. 이번 챕터는 상당부분 그 책에 의존하여 진행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첫 페이지에는 ‘캐서린과 오필리아를 위하여’라고 적혀 있다.)


  헤이스팅스가 출국하고 나서 맥코이는 칸 말고도 인류가 붙잡아 두고 있던 강화인간들의 전체적인 상태를 모두 관리하게 되었다. 강화인간들의 주치의와 마찬가지인 직무를 맡은 셈이었다. 맥코이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강화인간들이 사망하지 않고 형을 집행 받을 수 있게 관리하는 한편 칸에게 집중되어 있는 자신의 연구도 이어갔다. 


  학자의 말을 직접 살펴보기 이전에 결론을 먼저 정리하자면 맥코이가 칸과 함께 있으면서 정확히 알아낸 건 두 가지였고 한 주제에 관해 아이디어를 얻었다. 그리하여 강화인간들이 동결된 후까지 연구한 끝에 자신이 힌트를 얻었던 한 가지 사항에 대하여 이론을 집성했다. 가이드라인의 발명과 맞물린 가이드론의 서막이다. 







  철문의 빗장이 풀리는 소리는 이 시간에 칸이 익숙하게 들을 수 있는 소음의 종류였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예전 대학병원에서 회진을 도는 것처럼 면담 시간을 칼같이 지켰다. 칸은 가운 위에 코트까지 덧입으면서 감옥의 낮은 온도에 맞서려는 의사의 실루엣이 나타나길 가만히 기다렸다. 


  그런데 오늘은 전과 같지 않았다. 레비나스가 힘을 쓰면서 신음하는 게 들려오더니 사각형에서 두 선분을 지워낸 모양을 한 수레가 나타났다. 책들이 여럿 쌓여 있고 분류대로 묶인 것 같은 파일들, 그뿐 아니라 작은 스탠드부터 과자봉지들이 비죽 튀어나와 있는 바구니 등 아무리 봐줘도 살림살이 품목에 들어갈 법한 물건들이 수레 위에 놓여 있었다. 칸은 그 중에서도 제일 큰 부피를 차지하는 컴퓨터를 바라보았다. 


  레비나스는 칸에게 손을 빌릴 생각은 없는 듯 느릿하게나마 수레를 밀어 비어 있는 감방에 넣어두었다. 그러고는 감옥 안을 나가더니 물을 묻힌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칸이 그제야 미간을 좁혔다. 레비나스는 감방 안에서의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뭐하는 거지.”


  레비나스는 용케도 칸의 말을 듣고 대답했다.


  “짐을 풀기 전에 주변은 닦아야 하지 않겠어요?”

  “여기에 있겠다는 소린가.”


  칸이 행동반경을 조금도 넓히지 않고 딱딱하게 물어오는 태도에서 속도만을 빌린 레비나스의 답변이 이어졌다.


  “하루 종일은 아니라도 당신과 있는 시간을 좀 늘려보려고요.”


  레비나스가 부지런히 책상을 닦았다. 두 달간만 운영될 그의 연구실이 차근차근 먼지를 벗고 있었다.







  “내가 듣기로 두 달이면 강화인간들의 명수에 맞게 극저온 캡슐을 제작할 수 있대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는 거예요.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집니다.”


  감방을 임시 연구실로 꾸미는데 3시간을 넘게 소비해버린 레비나스가 빨개진 손을 문지르며 말했다. 칸의 위치는 여전히 침대 위고 레비나스는 그가 용기 있게 빼냈던 의자에 앉아 있었다. 강화인간의 감옥은 당연히 흘러가는 시간조차 빨아들이는 곳 같았다. 


  죽음이든 첨단 족쇄든 자신이 봉인될 걸 알고 있었던 칸은 레비나스의 말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겠습니다. 왜 오필리아였는지.”


  이번에 칸은 레비나스를 정확히 바라보았다. 


  “…당신도 그녀를 알고 있었나.”  

  “캐서린만큼은 아니지만 친분이 있었습니다. 캐서린이 연구에 참여해달라면서 오필리아를 언급했을 때 마음이 흔들릴 정도로는 친했지요.”


  강화인간이 숨결에 섞어 내뱉은 웃음이 찬 공기에 흘러들었다. 그에게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던 창조자는 연구소 밖에서 그 위치가 더 컸던 모양이었다. 칸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닮은 구석이 있는 연구자에게 물었다.


  “헤이스팅스가 했던 물음을 되풀이할 생각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접전에 관해서는 남들이 아는 만큼만 아는 레비나스는 칸의 말뜻을 명료하게 알진 못했다. 그래도 레비나스에겐 그녀의 머리가 자신과 비슷하게 작동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짐작했다.


  “아니요, 나는 정말 당신이 왜 오필리아를 점찍었는지 궁금한 겁니다. 당신 말처럼 골턴의 과학자들이 뭘 해 줬다고 당신은 그렇게 창조자와 밀착하려 한 건지 알고 싶어요. 당신들에게 과학자들은 원수면 원수지 보통 우리가 말하는 부모님 같지는 않았을 텐데요.”


  레비나스는 잠시 쉬었다. 이태까지는 이 도시에 캐서린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꺼내기가 어려웠던 어느 무거운 덩어리였다.


  “아니면 그녀가 당신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당신을 좋아하고 있던 유일한 인간이라는 걸 눈치 채서 그랬습니까?”


  강화인간의 안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레비나스는 칸이 희미하게 다른 표정을 짓는 걸 지켜보았다. 어딘가에서 껄끄러움을 감지한 것 같았는데, 그와는 큰 인연이 없었던 감정적인 주제를 꺼내서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그의 우수한 지성을 언짢게 한 건지 구별되지는 않았다. 레비나스는 자신을 가다듬듯 눈을 깜빡이고 칸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모르겠군.”


  레비나스가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모르겠다고요?”

  “특별히 이유를 정해놨던 건 아니다. 깨끗하게 나뉘는 답을 주긴 어려운 질문이군.”

  “그럼 이건 어때요. 나는 당신이 모르겠다는 그 이유를 당신의 직감이나 본능에 의지해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당신이 보기에 이 접근은 타당한 것 같나요?”


  이상한 질문이었다. 칸이 이성과 계산을 통해 답변해 줄 수 없는 종류였다. 칸은 이때만큼은 번쩍 하고 떠오르는 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좋을 대로.”







  맥코이는 맨 처음 센티넬이 동시에 여러 명의 가이드를 거느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최소한 그들의 입장에서 센티넬과 가이드는 1:1로 대응해야 한다. 우연히 센티넬을 스쳐 지나가는 가이드는 있을지 모르나 센티넬이 온몸으로 품을 수 있는 존재는 하나밖에 없으리라는 거다. 그 누구보다 센티넬로서 자각이 뛰어났던 칸이 다른 박사들에게 가지 않고 오랜 시간을 들여 밀레이스의 자질을 파악하려 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칸이 밀레이스가 혼란을 일으킬 정도로 그녀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하필 모른다고 일축해버렸던 것도 맥코이에겐 하나의 단서였다. 그는 비상한 강화인간조차 제대로 단정 내릴 수 없는 것은 이성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게 분명할 거라 생각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센티넬은 본래 가이드가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으며, 그렇기에 가이드를 찾아 나서는 여정도 정교한 계획이 있다기보다는 본능적인 필요에 의해 좌우된다는 맥코이의 설은 시간이 흐르고 리서칭이라는 번듯한 학술 용어를 갖게 되었다.


  밀레이스와의 일을 어떤 명분, 혹은 개인적인 역사가 아니라 논리적으로 접근했던 맥코이의 전략은 좋은 성과를 얻었다. 하지만 이것들보다 더 가치 있는 문제의식이 맥코이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된다.







  냉랭하게 방치되기만 하던 철제 책상에 뚜껑 있는 컵이 하나 올라갔다. 그것도 이번에 추가된 감옥 내 신선한 풍경 중 하나였다. 레비나스가 마시는 음료가 책상을 은근히 덥히는 동안 칸은 그에게 팔을 대주고 있었다. 몇 번의 시행착오로 칸의 두꺼운 피부층을 효과적으로 찌르는 방법을 알아낸 레비나스가 어렵지 않게 칸에게서 혈액을 채취했다. 


  “가급적이면 나 혼자서 당신이 했던 그 추상적인 발언을 이해하려고 했어요.”


  레비나스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시간이 촉박해지는 만큼 레비나스가 한 번에 여러 가지 작업을 하는 경우가 늘고 있었다. 칸은 주사기가 채워지는 찰나도 알뜰하게 쓰려는 인간의 노고를 무표정하게 기억해 두었다. 


  “앞뒤 맥락이 지나치게 생략되었군.”

  “2년 8개월 동안 당신이 만들게 되었다는 고통을 쌓는 제단 말입니다. 가시적이지 않은 감정이 당신한테는 정말 형체가 있는 물체로 취급되는 것 같더군요.”


  레비나스는 바늘을 빼고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거즈로 바늘이 들어갔던 주변을 닦았다. 핏자국이 거즈에 흡수되자마자 칸의 피부가 차오르듯 뾰족한 자국을 덮었다. 목덜미 뒤에서 샘플용 조직을 떼어 냈을 때나 가볍게 피를 뽑아갈 때나 그의 대응이 같았다.   


  “그걸 지금까지 묻지 않고 참고 있었나.”

  “충분히 노력한다면 밝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요.”


  레비나스가 쓰레기통 대신 준비한 비닐백에 용도를 다한 주삿바늘이 들어갔고 칸이 검은 소매를 내렸다. 여태 쓸모없던 책상 위에 레비나스의 물건들이 또 쌓였다. 


  “아마 그것은 우리들의 한계였을 거다.”


  칸이 깊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인간들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할 수 있는 자신만의 방식을 여럿 갖고 있지 않나. 우리는 인간들에게 없는 여타 능력들이 있는 대신 평안을 찾는 경로가 어렵게 설계된 건지도 모르지.”

  “…인간보다 뒤지는 점이 있다는 걸 인정한 겁니까, 지금?”

  “우리에게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건 부정하지 않겠다.”


  레비나스는 느릿하게 고개를 움직이면서 칸이 성실하게 대답해주는 정도가 늘어간다고 속으로 놀라워했다. 싸늘한 성격이라든가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을 고려하면 거의 훌륭하다고 여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레비나스는 그의 변화를 굳이 의심하려 하진 않았다.


  “그걸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요? 3년도 안 걸려서 반쯤은 접근했잖습니까.”


  레비나스에겐 사실 중요한 물음이었다. 다만 칸의 반응이 무심했다. 


  “나한테는 별 소용없는 얘기로군. 생각이 있다고 내가 행동에 옮길 수 있는 사항도 아니다.”


  강화인간은 여전히 빈틈없도록 이성적이었고 냉정했다. 할 말이 없어진 레비나스는 그만 연구실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런데 정말 당신은 날 연구하는 일 말고 할 게 없는 건가.”


  깊고 복잡한 사고 속으로 침잠할 것 같던 강화인간의 눈동자가 다시금 또렷해졌다. 정해진 속셈이 없으면 인간과 잘 닿지도 않는 시선을 레비나스는 의아하게 받아들었다.


  “갑자기 뭔 소리에요? 여기 없는 시간에 나는 당신의 동료들을 돌봅니다.”

  “캡슐 제조에 전혀 참여하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이번 물음에는 칸이 극저온 캡슐에 대해 레비나스에 대해 알아낼 거리가 있을지 시험해보고 싶은 의도가 깃들어 있었다. 헌데 레비나스는 물 한 모금으로 강화인간의 복잡한 계산을 씻어내 버렸다.  


  “전공도 아닌 분야에 끼어들어서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기술자들이 튼튼하게 잘 만들 겁니다.”


  레비나스가 칸의 혈액을 가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말했다. 


  “나는 의사입니다. 당신들을 파멸시키는 데 솔직히 일조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의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 몹시도 좁습니다.”


  레비나스는 양손에 개인용품들을 꽉 채우고 멀지 않은 연구실로 들어갔다. 쇠창살도 구석으로 몰려서 변변한 출입문조차 없는 작고 열린 공간이었다. 칸은 거기에서 새어나오는 기계가 구동하는 소리, 책장 넘어가는 소리나 이따금 레비나스가 짓는 한숨 등을 다 들을 수 있었다.


  칸은 침상에 누웠다. 그에게 위해를 입히지 않는 기계의 소음이 안정적인 파동처럼 그의 귓가를 감쌌다. 







  칸은 고작 유사-가이드 관계를 짜내는 것으로 그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처지를 한계라고 표현했다. 실상 가이드는 센티넬의 한계가 맞다. 유전적 조작과 큰 차이점이 없는 조율 및 정착을 거쳤던 관계조차 가이드를 완벽히 대신할 수 없었으니, 센티넬들은 그야말로 어떤 점에서 독립성이 묶여 있는 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칸이 이것을 곱게 보지 못했던 건 당연하다. 반면 맥코이는 강화인간이 아니라서 새로운 접근법을 떠올릴 수 있었다.  


  유사-가이드 관계의 약점은 문제를 한 곳에서만 풀려고 했다는 점이다. 칸은 동족이 아닌 다른 존재를 끌어들일 생각을 못 했다. 자신들의 영원한 적에 불과한 인간을 안으로 불러들여 문제를 공유하고 그의 해결책을 들어보는 일 따위를 센티넬들이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맥코이는 여기서 칸과 다른 노선을 걸은 것이다. 전쟁도 끝난 상황에서 그는 강화인간들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안목을 정립했고, 가장 먼저 센티넬의 비극을 감싸준 장본인으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걸 꺼림칙하게 여기지 않았다. 맥코이는 센티넬의 가장 신비로운 부분이자 온갖 실마리가 숨어 있을 그들의 육체에 집중했던 칸의 관점을 받아들이면서도 강화인간의 본질 역시 결국 사람이라는 사실도 끌어왔다. 맥코이는 센티넬과 인간 사이의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공통점 혹은 다리를 찾으려 애썼다.


  맥코이는 완성한 작품을 하나씩 분해하듯 칸의 세포질에서 뽑아낼 수 있는 서로 다른 요소를 모조리 골라내 일종의 지도를 그렸다. 센티넬 스파이럴 아래 똘똘 뭉친 유전인자들을 보며 맥코이는 우선 고개부터 저었었다. 사람의 염색체를 그런 식으로 묶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맥코이의 앞길을 가로막는 건 센티넬 스파이럴이었다.


  한 달 하고도 2주가 더 지났을 때 맥코이는 인간이 센티넬 스파이럴과 비슷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으면 어떻게 될지 고심해보게 되었다. 어쨌든 사람에게도 어떤 끈이 있다면 센티넬과 정상적으로 맺어질 가능성도 생겨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맥코이는 이것을 확인해보고자 처음에 임상실험자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그는 곧 임상실험자가 나올 리가 없다고 단념해버렸다. 여태껏 없었던 형식의 실험이었고 도중에 어떤 돌발 상황이 발생할 지는 맥코이도 몰랐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자신의 일부를 변형해보기로 결심하기로 하고 미국행 티켓을 끊었다. 그는 칸을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가 없어서 러시아 땅에 머물고 있었을 뿐 한 번은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하고 있었다. 군데군데 부서진 유럽과는 달리 북미 쪽에는 멀쩡한 연구소와 최신 설비들이 많았다. 그러면서 맥코이가 소비한 날은 겨우 이틀이었다. 그 이틀 만에 극저온 캡슐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센티넬과 가이드의 결합은 그렇게 멀어져버렸다. 세상에 처음으로 나타난 가이드가 지체했던 2일은 200년으로 불어나 불과 몇 년 전까지 이어져 왔었다. 







  레비나스가 떠나고 나서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 칸을 찾아왔다. 칸은 주인이 자리를 비운 연구실을 힐끗 보았다. 레비나스는 아직 자신이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다면서 그 증거로 연구실을 정리하지 않은 상태로 남겨두었다. 그가 어렵게 설치해놨던 컴퓨터라든가 자주 들고 다녔던 컵, 나중을 위해서 감방의 차가운 공기를 이겨내고 있던 책들이 그 안에 고스란히 있었다.


  적의 그림자가 이제 막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지만 칸은 그 순간에 복잡한 사고를 했다. 레비나스가 택시를 타고 국제공항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렸을지, 여기에서 미국까지 가는 데 비행시간은 어느 정도일 것이며 탑승 게이트가 열리기 전에 그가 소식을 들을 수는 있을 것인지 그의 연구자를 둘러싼 계산이 여럿 튀어나왔다. 칸은 레비나스가 누군가와 상의를 하고 일정을 짰을 지에 대한 확률도 고려해 보았다. 그는 인간을 믿을 수 없다.


  문득 레비나스 맥코이는 누구의 믿음도 얻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을 일으킨 대가를 지불받으러 온 인간들은 칸의 목덜미에 일단 주사기부터 꽂았다. 칸은 낯익은 무력감을 느꼈다. 신경안정제에 근육을 이완시키는 약물을 푼 게 분명했다. 옛날 동족들이 날뛸 때 연구원들이 애용하던 처방이었다. 


  “여기다 옮겨.”


  칸은 손에 힘을 불어넣으려고 했다. 그 때 그의 안구 위로 안약 몇 방울이 떨어졌다. 방울이 맺히는 모습부터 평범한 액체는 아니었던 안약은 칸의 눈동자와 그 주변에 달라붙어 불투명한 막을 형성해버렸다. 칸은 앞을 볼 수 없었다. 


  언제 강화인간의 회복력이 약물의 효력을 집어 삼킬지 몰랐으므로 인간들은 허겁지겁 칸을 들것에 옮긴 다음 그를 단단히 묶었다. 사형수들은 다 이런 취급을 받던가? 그러나 그 물음은 칸이 소리 내어 말한 게 아니라 사람들은 듣지 못했고, 그의 의식은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깜빡이는 중이었다.


  팔다리가 바짝 조여진 기분만 아니라면 숙면을 취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칸은 뜨고 있어도 소용이 없는 두 눈을 닫았다.


  뿌연 막이 여러 사람의 가운 자락을 닮은 듯했다. 


  “현재 죄수를 이송하고 있습니다. 아직 별 이상은 없습니다.”


  칸은 다른 사고력과 마찬가지로 꾸벅거리고 있는 수학적 감각에 대고 발길질을 했다. 그는 레비나스가 미국의 어느 공항에 도착하는지 알지 못했다. 대신 자신이 가장 많이 들어봤던 뉴욕의 JFK 공항을 도착지로 잡고 비행 거리와 소요 시간을 연산했다. 레비나스는 비행기 안에 약 9시간쯤 있을 예정이었다.


  물론 레비나스가 벌써 비행기에 탑승한 건 아니었다. 그는 방금 전에 가방을 부치고 티켓을 받았다. 두 손이 한결 가벼워진 레비나스는 일단 로밍 센터에 들르기로 했다. 


  레비나스는 아직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데 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아무도 그의 간이 연구실이 폐쇄되고 있음을 알리지 않았다. 그가 제일 신뢰할 수 있는 동료인 캐서린이 영국에 있는 탓인지도 몰랐다.


  공항 안을 돌아본다고 해서 딱히 얻을 수 있는 득이 없는 레비나스는 탑승 게이트 앞에서 앉아있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 레비나스가 여권과 비행기 표를 들고 움직이는 동안 그의 기묘한 실험체는 평생의 족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여권과 탑승권을 보여주세요.”


  친분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작은 물체가 오고갔다. 레비나스는 그렇기에 공항 직원을 별 말 없이 통과했으나 칸의 주변을 차지한 이들은 관계가 깊은 듯했다.


  감옥보다 낮은 온도가 강화인간의 콧날을 휙 소리 나게 지나쳤다. 칸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아 그는 계속 얼음장 같은 공기 속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작동 준비를 마쳤습니다.”

  “혹시 제작 상에 하자가 없는 지는 체크했나? 예상했던 것보다 완성된 날짜가 빨랐으니 어딘가 허술한 점이 있을 수도 있다.”

  “다른 캡슐들은 아직 미완성입니다. 저 놈을 넣어둘 것만 일찍 만든 거니까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칸이 제일 자주 듣는 목소리가 새롭게 물었다.


  “그가 왕복 항공권을 사지 않았던가? 도착일이 언제지?”


  칸은 대번에 애매한 호칭 아래 숨겨진 레비나스 맥코이의 이름을 읽어냈다.


  “9일 뒤였던 것 같습니다. 그 안에 충분히 다 완성할 수 있습니다.”

  “서두르는 것도 좋지만 확실히 처리하도록.”


  칸은 참을 수 없이 옳기만 한 자신의 예감에 웃고 싶었다. 그가 슬그머니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마지막에 뜻대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건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칸은 자신의 위치에 걸맞게 레비나스 맥코이를 비웃었다.


  검사대를 지나고 면세점들이 늘어서 있는 구역에 도달한 레비나스가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레비나스는 캐서린에게 줄 만한 선물을 고르고자 화장품 코너로 들어갔다. 선물이라도 사다 놓으면 그걸 핑계 삼아 캐서린을 만날 수 있을 테니 더 이상의 고민은 필요하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향수병이 진열된 곳에서 향을 맡아보다가 캐서린이 쓰던 제품을 찾지 못해 발길을 돌렸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어느 지점에서도 멀기만 한 영국 땅에서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이어폰을 꽂은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전쟁 이후 그녀는 정치인을 상대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대개 지시를 내리는 입장에 놓였다.


  캐서린은 전화기로 양이 부족한 구호물품을 요청할 기관을 지정해주고, 상대적으로 넉넉한 물건은 어떻게 나누면 좋을 것인지 이런저런 제안을 내놓았다. 그러다 상대방이 골턴 연구소가 있던 터에 지어질 기념관에 대한 시안들이 올라왔다는 소식을 알렸다.


  “잠깐만요, 금방 확인할게요.”  


  방에 들어간 캐서린은 노트북을 들고 다시 거실에 있는 탁자 앞에 앉았다. 대기모드 상태였던 노트북은 빠르게 빛을 되찾았다. 캐서린은 작업 표시줄에 있는 인터넷 창을 클릭했다.


  탭의 순서상 제일 앞에 있던 포털 사이트의 메인을 보고 캐서린은 순식간에 메일 계정에 접속하는 일을 잊어버렸다.


  칸 누니엔 싱의 동결형 집행.


  캐서린은 말을 잇지 못하다가 진행 중이던 통화를 종료해버렸다. 그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레비나스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후 캐서린은 레비나스의 핸드폰이 꺼져 있다는 무심한 안내 메시지를 들었다. 그녀는 멍하니 몇 번 깜빡거리다가 백그라운드 화면으로 돌아가 버리는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칸이 잠드는 건 정해진 수순이었는데 이 순간 레비나스와 연락이 닿지 않는 것만으로 캐서린은 이상하게 당황스러웠다. 


  캐서린이 자신의 손에 있던 모든 걸 놓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것도 사실은 캐서린이 운이 좋아 누릴 수 있는 감정의 변화였다. 칸 누니엔 싱은 아득한 지하의 가장 차가운 공간에 묻혔고, 그리고 어쩌면 그에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레비나스 맥코이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