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3. 인간학의 탄생

06. 한 과학자의 양심



  맥코이가 헤이스팅스를 도와준 부분은 크게 두 영역이다. 먼저 가이드의 보살핌을 받지 못한 센티넬들이 육체적으로 얼마나 상해 있는 지를 세세하게 밝혀내 헤이스팅스로 하여금 승산이 없는 게 아니라는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게다가 어디까지나 과학자였던 헤이스팅스가 미흡할 수 있는 부검과 해부 작업 등을 철저하게 실시해 헤이스팅스가 센티넬 스파이럴을 발견할 수 있는 여지도 열어주었다.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맥코이는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었다. 만약 레비나스의 학문적 수준이 뒤졌다면, 그가 헤이스팅스의 의견을 비집고 드러내는 데에 앞장서진 못했으리라.


  무시할 수 없는 위치를 이용해 칸과의 면담을 따낸 맥코이가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을 때 기자들도 바쁘게 제 몫을 해냈다. 적어도 전쟁과 관련해서 내용을 자르고 편집하는 일은 옳지 않다고 합의를 본 유명 저널리스트들이 앞 다투어 칸의 증언을 전부 실은 기사를 내놓았다. 파장은 예상대로 굉장했다. 심정지 실험을 비롯한 몇몇 논쟁점들이 전쟁에서 승리는 했으되 전후 우울함도 만만치 않았던 사람들을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갔다. 


  더불어 여론은 언제 2차 공판이 열릴 것인지 촉각을 곤두세웠다. 2차 공판만큼은 일반인들도 참관하게 해 달라는 청원도 끊이지 않았다. 멀쩡하게 살아있는 강화인간으로는 거의 유일한 자의 말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언론도 완벽히 닿을 수 없는 정치인들의 수군거림은 강화인간의 멸종이라는 의견을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헤이스팅스가 바깥 흐름과 관계없이 센티넬을 죽이는 법을 발달시켜야 했던 이유다. 더불어 그녀는 수호자 같은 이미지를 떠안고 연구소를 나와야 하는 일도 잦았다.






 

  오랫동안 익은 와인색을 닮은 머리카락을 가진 여인은 눈앞에서 타오르는 거대한 불덩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개성 따위는 모두 묻어버리는 불로 수렴될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름들과 삶이 연기를 뿜어댔다. 여인은 불 속의 사람들을 다 알지는 못했다. 그녀가 아무리 비상한 머리의 소유자였어도 그 수많은 이름들을 외우는 건 불가능했다. 그녀는 사실 자신의 한 가운데에 깊게 새겨진 몇 가지의 그림자와 웃음과 공식들을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여인의 표정은 갈수록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자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죽어간 이들을 추모하는 한편, 저 불덩이가 커지고 커져 지구를 다 삼키지 않은 것에 안도하는 자리에 인류를 구한 빛나는 과학자가 빠져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너무나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머리가 힘들어 하는 또 한 가지 요소였다. 그녀의 이름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였고 먼 역사의 예카테리나 여제가 아니었다. 날개를 감춘 구원자도 아니었다.


  하늘까지 닿을 듯 팽창하던 불덩이가 조금씩 줄어드는 것 같았다. 태울 거리들을 소모한 모양이었다. 이토록 대규모로 실시하는 화장(火葬)을 처음 보는 캐서린은 이제서야 자신이 서 있는 자리의 낯설음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저 무리 중에 강화인간이 있었던가? 칸 누니엔 싱의 수족들을 마침내 인간이 없애버리는 위업을 달성했던가? 캐서린은 생각을 하면 할수록 자신이 여기에 있어도 괜찮은지 의구심을 품었다.


  “불길이 거의 꺼져갑니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해 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요, 헤이스팅스 씨.”


  캐서린은 살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숫자가 팍 줄어버린 인류 중에서 성직자라는 특수한 직업군의 명맥을 유지시키고 있는 남자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의 성경은 아직 펼쳐지지 않았다.


  “목사님이 아직 말씀을 안 하신 것 같은데요.”

  “여기서까지 성직자의 권위를 지켜주려 애써주시는 것은 고맙게 생각합니다만 모두 헤이스팅스 씨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어서 말입니다. 짧게 말씀해 주시고 제가 기도문을 읊으면 딱 저 불씨가 사라질 것 같습니다.”


  캐서린이 머리를 매만졌다. 그녀를 온전히 캐서린 헤이스팅스로 존재하게 만드는 몇 안 되는 유서 깊은 행동 중 하나였다. 그것을 떠올리니 캠퍼스의 콧대 높은 케이트의 옆을 지켰던 오필리아가 기억났고, 오필리아의 가장 복잡하고 격렬했던 시기를 다 가져가 버렸던 칸 누니엔 싱이 기억났다. 


  “사실 저 분들은 죽을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에요.”


  굳이 죽지 않아도 되었고, 마찬가지로 탄생할 이유가 없었던 존재들이 부지런히 캐서린의 위를 지나갔다.


  “진짜로 저 사람들에게 사과해야 하는 이들이 다 죽어버려서, 과연 제가 하는 말로 죽은 분들이 만족할 수 있을 지도 잘 모르겠네요. 그런데 여기 어쨌든 서게 되었으니까… 또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이렇게 끝내겠습니다.”


  캐서린이 잠시 목사를 돌아보았다. 목사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매캐한 냄새와 검은 연기와 붉은빛 제사가 마무리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 때 캐서린은 앞뒤를 재지 않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앞으로 인간은 인간으로만 존재하겠습니다. 하늘의 권위를 등에 업으려 하지 말라는 피 묻은 교훈, 역사로 후대에 전할게요.”


  캐서린이 표정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리려는 것을 그녀가 묵념하는 걸로 착각한 주변 사람들이 덩달아 얼굴을 숙였다. 캐서린은 엉겁결에 망자를 추모하기에 적합한 말보다는, 자신을 반성하는 듯한 발언을 하고 말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무게를 견디기가 어려웠으므로 자신의 위아래로 그림자를 끌어내렸다. 


  “…이제 저 분들이 천국 가실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캐서린은 목사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뒤돌아 걸었다.


  그녀는 목사와 불길 앞에서 차마 꺼낼 수 없었던 핸드폰을 만졌다. 핸드폰은 아까부터 캐서린을 움찔거리게 하면서 메시지를 모으고 있었다. 손으로 꼼꼼히 측면을 감싼 그녀가 문자를 읽었다.


  —오늘 공식 일정이 있다고 들었어요. 바쁠 테니까 굳이 주사 놓으러 오지 마요. 내가 칸한테 가는 중이거든요.


  캐서린은 답장 없이 레비나스의 메시지를 주머니 속으로 숨겼다.  


  여전히 그녀를 인류의 구세주로 칭송하고 싶어 하는 스포트라이트들이 쏟아졌다. 어둠 속에 있는 칸 누니엔 싱이 비웃을 듯한 얄팍한 빛이었다. 물론 그는 늘 인간을 조소하는 입장이므로, 캐서린은 레비나스가 이 인공적인 빛무리들을 어떻게 생각할지 곱씹을 뿐이었다.







  준비도 없이 맥코이의 명함을 받아들었던 저널리스트들을 포함해 헤이스팅스까지도 전범의 진실에 제일 민감하게 반응했던 의학자를 언급하지 않았다. 레비나스 맥코이는 1차 공판 때 칸이 흘렸던 유사-가이드 관계에 대한 힌트를 해석함과 동시에, 그것을 강하게 변호한 뒤로 헤이스팅스만큼 세간의 귀추(歸趨)를 끌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맥코이가 2차 공판 일정보다 사흘 일찍 발간된 뉴욕 타임즈에 실어 보냈던 글 한 편이다. 이로 인해 밀레이스와 교류를 가졌던 헤이스팅스만 알고 있었던 연구 일정들이 칸과 맥코이를 거쳐 모든 사람들에게 퍼졌다. 칸의 표현에 따르면 ‘자신의 담당자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채혈 실험과 여러 가지 충격 시뮬레이션에다, 심정지 실험에 관한 자세한 프로토콜까지 공개한 그 글은 내내 사실만을 진술하다가 마지막에서 독자들에게 충격을 안겼다.    


이 글은 강화인간들이 일으킨 전쟁이 옳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류가 마냥 전쟁의 피해자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맥코이의 기고문은 다시 강화인간들의 죄에 집중하려 했던 2차 공판의 진행 방향을 뒤엎고 말았다. 심지어 사건을 담당하는 검사는 헤이스팅스에게 자신이 이러한 질문을 해도 괜찮을 것인지 검사를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 시점부터 맥코이와 헤이스팅스가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주제 하나가 생겨버렸다고 할 수 있다. 헤이스팅스는 칸의 진실에 조금이라도 위선이 있는지 찾아내려 한 반면, 맥코이는 인간의 잘못도 검증해야 한다는 편에 서 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검사와 칸 누니엔 싱이 나누었던 질답을 옮긴다. 실상 헤이스팅스와 칸의 대화라고 여겨도 상관이 없다. 둘 사이에 한참 학문적인 얘기들이 오고갔다는 것만 해도 2차 공판이 전범과 그 심판자 간의 대질이라는 양상에서 얼마나 많이 빗겨나갔는지 알 수 있다. 재판에서 헤이스팅스는 칸이 맥코이에게 고백한 사연들 중에 행여나 여론을 현혹시키기 위한 술수를 적발하기 위한 질문을 다수 배치했는데, 칸은 이를 적당히 받아치면서 대답할 때마다 연구소의 만행을 강조하는 걸 잊지 않았다. 본 책의 흐름과 부합할 만한 부분만을 추린 것으로, 아래 인용문이 2차 공판에서 있었던 심문의 전부는 아니다.  

 

  Q : 레비나스 맥코이에 대해 알고 있는가?

  A : 정해진 날짜마다 날 찾아오는 인물이다. 소속은 잘 모르지만 가운을 입고 다니는 걸 보면 연구원 같다.   

  Q : 연구원들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은데?

  A : 엄연히 따지자면 나는 그 어떤 인간도 좋아하지 않는다. 

  Q : 그를 만나면 주로 뭘 하나?

  A : 연구원들이 하는 일을 한다.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묻고, 답해줄 수 있는 것은 적당히 답해준다. 포도당과 연결된 게 아니면 나에게 주삿바늘을 꽂지 않는다는 게 조금 신선하긴 하다. 

  

  Q : 맥코이가 한 유력 일간지에 당신이 서술한 정보들을 그대로 전달했다는 건 알고 있나? 

  A : 감옥에 묶여 있는 무엇을 얼마나 파악하고 있는 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인간들에게 어떠한 변동을 가져올 지가 중요할 것이다. 당신이 보기에도 그는 인류 속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의식이지 않은가?


  칸은 의도적으로 레비나스 맥코이를 용기와 양심이 있는 인간으로 지칭했다. 극형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문제의 초점이 자신과 동족들에게 쏟아지는 것을 막으면서, 인류에게 때 아닌 도덕적 난제를 제기하는 효과까지 발생시킨 아주 영리한 발언이었다. 칸이 인간을 향한 적대적인 태도를 시종일관 잃지 않았던 점은 맥코이의 의견에 객관성을 부여하기까지 했다. 


  공판이 끝나고 더욱 불붙은 논쟁, 즉 진화전쟁이라는 인간의 비극에 인간의 탓이 있다는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에 관한 여론 충돌은 몹시도 격렬하고 다양했다. 그 부분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서적들도 많으니 이 책에서는 넘어가도록 하자. 그보다 중요한 건 3차 공판을 열어야 하는지 말이 많았던 시기에 헤이스팅스가 맥코이를 만나길 청했다는 거다.







  묵직하게 비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레비나스는 간신히 실내로 들어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우산을 흔들어 털고 습기에 엉겨 붙은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쉬지 않고 커피콩을 볶고 우유를 끓이는 카페 안마저 살짝 눅눅하게 느껴질 정도로 물기 어린 날씨였다. 레비나스는 출입문에 놓인 타원형 통에 우산을 넣고 고개를 움직였다.


  날씨가 좋지 않은 탓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레비나스는 한가한 카페 안에서 어렵지 않게 캐서린을 찾아내고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캐서린이 아이보리빛 머그잔을 들었다.


  “이야기가 길어질 지도 모르니까 한 잔 마시는 게 어때요? 마침 여기 커피도 괜찮네요.”


  기다렸다는 듯이 종업원이 메뉴판을 내밀자, 레비나스는 제일 가벼운 커피를 시키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마시는 커피에서 달콤한 크림 향기는 나지 않았다. 


  “밖을 돌아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더니 안도 마찬가지네요.”

  “잘 됐죠. 아는 사람 많아서 좋을 얘기가 아니니까요.”


  캐서린이 특별히 날을 세워서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레비나스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주제는 언제부턴가 무거워졌다. 경쾌하게 소리 내서 좋아할 일도 줄어갔다.


  커피 원액에 적당히 물을 타기만 한 간단한 음료가 레비나스의 앞에 놓였다. 종업원은 쟁반을 정리하더니 가게 관리자들이 출입할 수 있는 구역으로 사라졌다. 종업원의 예상으로도 오늘 더 이상 손님이 들어오진 않을 것 같은 모양이었다. 


  “강화인간들의 수가 얼마나 남았는지 칸이 물어보지 않던가요?”

  “…그런 적은 없었습니다.”

  “재판에 관한 얘기는요?”


  캐서린은 부드럽게 물어왔다. 레비나스도 그에 화답하고자 차분하게 문장들을 늘어놓았다. 


  “그는 보통 질문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궁금증을 갖는 건 내 쪽이죠. 내가 기억하기로는 칸이 물었던 건 한 가지였어요.”


  레비나스가 입가의 양 옆을 찡그렸다.


  “칸에게 가장 미스터리인 건 내 의도겠죠. 자신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으면서 왜 이런 일을 하는지.”


  캐서린은 짧게 웃었다. 레비나스의 것보다는 줄어 있는 커피잔의 불투명한 면에 그녀의 복잡한 미소가 얇게 비쳤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하는 절차를 밟듯 레비나스를 향해 시선을 조정했다.


  “…그래서 뭐라고 답해줬어요?”

  “그를 처음 만나서 한 얘기를 그대로 되풀이했죠. 나는 양쪽의 죄를 다 파악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고요. 그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나 봐요. 칸이 양심이니 의식이니 하면서 날 포장해 줄 이유가 그걸 빼고는 하나도 없어요.”


  강화인간의 마음마저 움직인 진심이니 그게 보통 사람들에게는 얼마나 크게 작용했겠어요. 캐서린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머리카락을 내렸다. 인간의 진심이라는 어구는 자연히 유품 하나 추릴 수 없었던 자신의 친구를 상기하게 만들었다. 캐서린이 표정을 수습하고 주제를 돌렸다.


  “사실 여기서 할 얘기는 이게 아니에요.”


  잔의 손잡이를 잡은 레비나스가 눈을 깜빡였다.


  “재판이 지연되는 동안 강화인간들이 전처럼 자살을 시도하는 횟수가 줄고 있어요.”

  “무슨 뜻입니까?”

  “그들이 끊어졌던 유전자마저 자체적인 능력으로 치료하고 있다는 거예요. 갇혀 있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동족들은 어디에 있을지 알아내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그림자 속에선 밖으로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겠죠. 당신은 모르겠지만 며칠간 칸은 굉장히 조용해졌어요. 그를 가시로 칭칭 감아놔야 했던 사연이 있었다고요.”


  레비나스는 동요하지 않았다. 근래 그는 칸이 자신과의 대화를 받아주는 태도가 매끄러워졌다는 인상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레비나스는 긍정적으로 고갯짓을 하면서 캐서린의 입술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그런데 그들을 사형시킬 수는 없을 거예요. 당신이 우리 모두를 반성하게 했으니까요.”


  커피로 목을 축이려던 레비나스가 동작을 뚝 멈춰버렸다.  


  “설마, 그들을 살려둘 거라는 뜻입니까? 나 때문에요?”


  캐서린이 손가락을 올렸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눈꺼풀을 꾹꾹 압박하기 위해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그걸 살아 있는 거라고 표현할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네요. 강화인간들은 어떤 설화처럼 인류에게 희미한 형태로 남아있게 될 것 같아요. 당신이 두 달만 그를 잡아둘 수 있다면요.”


  레비나스가 조용히 컵을 옆으로 치웠다. 커피를 홀짝이느라 흐트러지는 집중력조차 아까워진 의학자의 양 손이 움츠러들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줘요, 캐서린. 솔직히 난 당신이 무슨 소리를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대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겁니까?”


  “위에서 칸을 죽이는 걸 단념했어요.”


  어쩐지 캐서린의 숨소리가 그녀가 내뱉는 말보다 큰 것 같았다. 


  “강화인간들은 냉동되어 역사 속으로 잠들게 될 거예요.”







  공판을 통해 칸을 위시한 전범들의 죄를 심사하지 않고, 그들을 동결시키기로 결정한 것은 전후 센티넬이 엮인 여러 사건들 가운데 헤이스팅스의 이름이 거의 거론되지 않은 유일한 일이었다. 칸의 증언과 맥코이의 변호가 아무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해도 조금은 이해하기 힘든 결과이기도 하다. 


  역사가들은 혹시 결정권을 쥐고 있는 인사들이 그녀의 약물을 불신하게 된 게 아니냐는 가설로 이를 해석하고자 한다. 생명의 본질을 공격당한 것이나 다름없는 존재들이 시간을 주었더니 서서히 상태가 호전되는 걸 보고, 저 놈들은 영영 죽일 수 없는 게 아니냐며 위쪽에서 단념했다는 추정이다. 각 지도자들 역시 전쟁이라는 최대의 과제가 사라지자 일단 국가로 돌아가서 쌓인 현안들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냈던 것도 한몫 했을 테다. 더불어 서서히 흩어져가는 유대감, 5년 간 너무도 지친 사람들, 원래 흩어진 채로 살았던 인간들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은연중에 바랐는 지도 모른다. 


  신체를 유지시키는 기본적인 요인도 회복해버리는 강화인간들의 치유력이 한편으로 인간들의 욕심을 다시금 자극했다는 이론도 있다. 역사가들이 흔히 극단적 실용주의자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이들의 속내다. 저토록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들이라면 반드시 쓸모가 있을 거고, 그동안 인류 역시 진보할 것이므로 강화인간들을 좀 더 유연하게 이용할 수 있지 않겠냐는 주장은 분명히 매력적으로 다가올 수 있는 요소를 갖고 있다. 


  다양한 추측들이 공존하지만 확실한 건 헤이스팅스가 공항에서 런던 행 비행기 티켓을 내민 날에 강화인간들을 극저온 캡슐에 영구적으로 동결시키겠다는 발표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여러 가지 정황상 강화인간들은 인간의 적이되 이대로 죽이기엔 애로사항이 많은 존재들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동결형이 선고된 직후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여드는 엔지니어들로 다시금 시끄러워졌다. 더불어 맥코이는 헤이스팅스의 뒤를 이어 완벽히 칸을 인도받게 되었다. 맥코이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두 달밖에 살지 못할 강화인간의 모든 것을 탐구하기로 결심한다. 인간학은 그로부터 꿈틀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