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 PRESENT
09. The Plan
앞으로 등장할 내용은 필자가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나눴던 대화이다. 그녀의 동의를 얻어 이번 개정판에 싣게 될 수 있었음을 밝힌다. 기억하기로는 캐서린이 힘을 쓴 덕분에 복원에 성공한 영국의 작은 마을을 방문했던 때였던 것 같다. 그 때 나는 가이드라인을 주사하고 관련 책들을 펴내고 있던 중이었다.
“사실 말이죠, 내가 당신보다 일찍 가이드를 발견할 수도 있었어요.” 캐서린이 불쑥 말했다.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그들이 아무리 대단해보여도, 어느 구석에서 채워지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내가 느낄 만한 사건들이 충분히 있었어요. 그는 오필리아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비슷한 태도를 보였거든요.”
“칸이 초기부터 가이드를 찾아다니고 있었다는 뜻입니까?” 내가 물었을 때 캐서린은 깍지 낀 양 손을 허리에 붙이고 살짝 웃었다. 그녀가 쉽사리 웃을 수 없을 때에 그녀와 많은 시간을 보냈던 나는 의아한 눈빛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요. 그는 봉인되었고 그의 동족들과 가이드는 앞으로 만날 일이 없겠죠.”
캐서린은 하늘을 보았다가 고개를 내려 땅바닥을 긁는 자신의 발을 바라보기도 했다.
“강화인간들은 왜 가이드가 필요할까요? 생각해 본 적 있어요?” 그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나는 조금 시간을 지체했다.
“글쎄요…. 아마 인간을 훨씬 웃도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간이 아닌 다른 종의 육체를 가질 수 없었던 존재들의 한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이란 것은 강화인간들이, 그러니까 센티넬들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훌륭한 형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체와 정신 모두가 그들의 능력을 담아내기는 벅찼을 겁니다.”
“어떤 부분은 내가 생각했던 것이기도 하네요.”
“내 말에 다는 동의하지 못한다는 뜻으로 들리는군요.” 그러자 캐서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들이 너무 뛰어나서 안게 된 일종의 핸디캡인 동시에 그들이 창조자들을 미워한 대가예요.” 나는 그녀의 입에서 오필리아의 이름이 튀어나올까 내심 긴장했다. 다행히 캐서린의 표정은 평온했고, 폐허에서도 무언가를 배운 위인 같은 안색이 희미하게 덮여 있었다.
“센티넬이 가이드가 될 수는 없었잖아요. 그런데 그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칸이겠군요. 그는 어쩌면 흔쾌히 자신의 가이드가 될 수 있었던 사람을 외면하고 다른 방책을 찾았죠.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살아있을 수 있는 거 아닌가요?”
나는 캐서린처럼 웃으면서 그녀의 말에 맞장구를 쳐 주었다.
“비록 지켜주고 돌봐줘야 할 센티넬을 만날 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래도 당신이 첫 번째 가이드가 되어서 다행이라고 봐요.”
“…그렇습니까?”
“나는 적어도 칸 누니엔 싱에게 그의 한계를 일깨워 줄 수 없을 테니까요.”
『인간의 감시자에 관한 어려운 진실』통합 3쇄 개정판 중에서. 레비나스 맥코이 지음.
⁂
#준비
캐롤 마커스가 자신의 아버지와 저녁 식사를 하러 간 날, 칸은 은밀하고 재빠르게 작업 구역을 벗어났다. 건물을 함께 사용하는 소수의 장교들을 마주쳤으나 칸은 그들을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것은 두 쪽 모두에게 익숙한 양식이었다. 다만 장교들은 늘 무뚝뚝하고 찬바람 부는 중령이 마커스 제독의 집무실로 향하고 있다는 건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었다.
캐롤과의 따스한 접촉을 통해 굴러 들어온 지난날의 기억은 칸에게 일종의 자산이었다. 형편없는 이름마저 순순히 받아드는 인조인간을 염려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처럼 제독은 존 해리슨에게 여러 권한을 내주었다. 그가 수행해야 하는 까다로운 임무를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긴 했지만, 해리슨 중령이 넘겨받은 각종 키 코드가 칸의 손에도 떨어졌다는 게 중요했다. 20분 만에 칸은 그것들을 이용해서 제독의 집무실을 포함해 스타플릿의 부속 건물이면 어디든 출입할 수 있는 열쇠를 만들었다.
꽤나 중요하게 쓰였던 몇몇 건물의 설계도 또한 어렵지 않게 얻어낼 수 있었다. 부함장 급에 해당되는 중령이라는 직책 역시 여기저기서 써먹기가 좋았다. 물론 이런 준비는 그가 존 해리슨이 이행해야 하는 업무도 꼬박꼬박 진행하면서 이루어졌으므로 누구도 그를 수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적정 수면 시간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센티넬은 가이드와의 접촉으로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수도 있는 존재였다.
칸은 걸어가다가 패드를 통해 감시 카메라의 영상을 잠시 확인했다. 마커스 제독은 15분 전에 이미 집무실을 비운 상태였다. 지하에 있는 쾌속 셔틀로 향하는 센티넬의 발걸음은 더욱 빨라졌다.
해리슨 중령은 제독이 개인적으로 시키는 일을 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아, 수송선을 갈아탈 수 있는 정거장까지는 무리 없이 갈 수 있는 쾌속선을 보유하고 있었다. 중령이 현재 제작중인 함선이 있는 목성으로 가야 할 때 자주 이용하는 수단이었다. 한편으로 중령의 셔틀은 마커스의 묵인 아래 따로 비행 신고를 할 필요도 없었다.
몇 분이 흐르고 칸이 탑승한 셔틀이 밤공기를 날카롭게 갈랐다.
칸은 자신이 엔지니어들의 연구실에 옮겨지기 전에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200년 동안 활성화되지 않았던 의식의 문제일 수도 있었고 아예 최초의 장소가 머릿속에 입력될 여지가 없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칸은 자신이 맨 처음 어디에 있었는지 알아야만 했다. 거기에 그의 동족들이 남아있을 게 분명했다.
스타플릿 본부와의 거리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계기판을 슬쩍 읽은 칸은 손잡이를 옆으로 더 꺾었다.
그의 의식은 자주 현실을 벗어났다. 가까운 과거, 그보다는 훨씬 멀어 오히려 그의 탄생과 가까운 과거, 바람이 하늘을 할퀴듯 모든 것을 휙휙 뚫어버리는 미래. 그 흐름은 꼭 그리운 무언가를 찾아 떠나는 회귀를 닮아 있었다. 특히나 칸이 충동적으로 더듬는 부분은 캐롤 마커스와 나란히 있던 순간들이었다.
“이거 괜히 책을 가져온 것 같네요. 이렇게 다 설명해 줄 거였으면 안 들고 왔을 텐데.”
로비까지 나가서 물을 떠 온 캐롤이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을 흔들었다. 캐롤처럼 말을 많이 한 게 아닌 칸은 물을 마시길 거절했다.
“내가 번거롭게 했나 보군.”
“아, 그건 아니에요. 내 설명이 완벽한 것도 아니고, 당신도 나중에는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것들이에요.”
캐롤이 목을 축이느라 자리에 앉고 있지 않을 때 칸은 팔을 길게 뻗어 그녀가 가져온 책 하나를 집었다. 책등을 확인한 그가 속으로 조금 놀라서 중얼거렸다.
“…레비나스 맥코이?”
캐롤이 잊고 있던 게 생각난 듯이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당신은 사적으로도 아는 이름이겠네요. 강화인간들에게 가이드라는 짝이 있어야 함을 밝혀낸 학자에요. 가이드에 관한 이론은 거의 맥코이에게서 나왔죠.”
말을 완전히 마치지 못하고 캐롤은 진동하는 통신기를 주머니에서 빼냈다. 그녀가 잡고 있던 하얀 종이컵이 책상 모서리에 얹어졌다.
“아빠?”
캐롤이 자신의 센티넬에게 살며시 눈짓을 주고 커뮤니케이터를 귀에 붙였다. 칸은 책을 들고 캐롤의 뒤통수를 응시했다.
“저도 지금 나가려고 준비중이예요. 늦은 건 아니겠죠?”
그는 캐롤의 통화 상대가 마커스 제독이라는 정보를 잽싸게 낚아챈 뒤 책장을 펼쳤다. 앞쪽으로 치우쳐진 페이지에는 소설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200년이 지나도 공고하기만 한 두 인간의 이름을 보고 칸은 짧게나마 눈꼬리를 달싹였다. 더군다나 칸은 그가 25초 정도면 다 읽을 수 있는 페이지 두 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셔틀을 조종하고 있던 칸은 우연찮게 그 페이지를 생각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그는 곧 중앙을 바라보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와 레비나스 맥코이가 그에게 준 메시지는 이후에 처리해야 할 용건이었다.
헤드쿼터에 앞서 그가 셔틀을 내려놓을 곳으로 점찍어 두었던 터가 보이기 시작했다. 칸이 조종간을 움직였다.
칸은 기필코 나머지 극저온 캡슐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것을 위하여 그는 지금 마커스 제독의 컴퓨터를 점령하러 가는 것이었다. 센티넬은 가이드가 될 수 없을 거라며 센티넬을 과소평가했던 헤이스팅스의 발언을 고쳐주는 일은 그 다음이었다.
⁂
#발단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존 해리슨에게 화상 통신이 걸려온 시간은 태양이 아무리 높은 빌딩도 다 비출 수 있는 정오 무렵이었다. 함선에 내장될 소프트웨어를 점검하고 있던 중령은 발신인을 보고 패드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밖에 나와 있는 듯 파란 하늘과 밝은 햇빛을 등에 업은 캐롤이 자신의 가이드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이지.”
—말이랑 표정이랑 많이 다르네요.
“뭐가 말인가?”
—통신을 받았을 때 당신의 표정 말이에요. 알아보기가 정말 어렵기는 한데 살짝 밝아보였거든요. 말투랑 영 어울리지 않아서 해 본 말이에요.
자신의 표정을 확인할 길이 없는 센티넬은 입을 꾹 다물었다. 캐롤의 말을 의식한 듯 표정도 평소보다 더 딱딱하게 굳었다. 캐롤은 두 눈을 찡그리면서 웃었다.
—부끄러워하는 거 아니죠? 센티넬이 가이드를 반가워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그런 부드럽고 긍정적인 감정을 당신이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게 또 내 본분이고요.
“…인사치레는 이쯤이면 충분하지 않나.”
—알았어요. 다른 게 아니라 검진 일정 때문에 전화했어요. 알고 있었어요?
“알고 있다. 해야 할 검사들이 많더군.”
그는 대답하면서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멋대로 표정을 읽는 가이드의 눈길이 신경 쓰였다. 센티넬은 안 그래도 시간을 쪼개서 스캐닝 검사를 대비한 조작된 데이터를 만들어 제독의 눈을 속여야 했다.
—같이 가도록 해요.
그런 와중에 뜻밖의 말을 들었으니 칸의 안색은 한층 더 흔들렸다.
—나한테 도움이 될 것 같기도 하고, 당신도 편안하게 검사를 받을 수 있으니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요? 나랑 같이 가는 거 괜찮아요?
얼굴이 잘 보이도록 화면을 조정하면서 캐롤은 그에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가 가이드 일을 중히 여기며 최선을 다하는 것은 인간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짜고 있는 센티넬을 거슬리게 할 뿐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칸은 캐롤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확실히 가이드라는 것은 어느 센티넬에겐 달갑지 않았다. 어쩌면 센티넬의 이성이 반드시 쓰러뜨려야 하는 적인지도 몰랐다.
⁂
#전개
존 해리슨의 업무와 칸 누니엔 싱의 계획은 모두 같은 구역에서 진행된다. 그곳은 사실 해리슨 중령 말고도 몇몇 장교들의 근무지이기도 했는데, 중령의 가공할 업무 처리 속도와 그의 근속 시간에 눌려버린 그들은 중령의 심부름꾼을 자처하게 되었다. 중령이 알렉산더 마커스의 측근이라는 소문도 장교들이 섹터31이라는 근무지에 제대로 발을 붙일 수 없는 이유였다. 스타플릿을 휘어잡고 있는 제독과 기계처럼 차갑고 정확한 중령의 조합은 섹터에 어렵사리 묻어나던 온기마저 내쫓았다.
고로 해리슨 중령은 비밀 많은 센티넬로서의 모습을 갖추고도 섹터에 홀로 남아있었다. 탈색된 하늘색에 가까운 불빛들이 드문드문 켜져 있는 내부에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패드는 빛나지 않았고 전력이 공급되고 있는 신형 장비의 프로토 타입들은 그의 손길이 닿지 않는 한 깨어나지 않는다. 그에 의해 모든 것이 통제되는 듯한 구역에서, 칸은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하고 있었다.
—검사 결과 그의 기억 세포는 여전히 비활성화 상태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센티넬 특유의 회복력과 가이드의 존재만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 걸 보면 세포 일부가 완전히 괴사한 것 같습니다.
—그는 센티넬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고 하지 않았던가?
이어폰에서 마커스의 목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칸의 손아귀는 목표물을 앞에 둔 것처럼 삐걱거렸다. 그의 모든 마디는 인간의 몸뚱아리에 압력을 가하길 즐기던 시절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칸은 손가락을 달래듯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제독의 방에 몰래 침투했을 당시 컴퓨터에 심어두었던 악성코드가 주변기기를 이용하여 그에게 내리 대화 내역을 전송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 흉포한 강화인간들이 칸을 중심으로 삼았을 리가 없지요.
—다른 센티넬들은 주기적으로 체크하고 있나?
—예. 별다른 변화는 없습니다.
칸은 행여나 이 대목에서 캡슐이 보관된 장소에 관한 힌트가 나오지는 않을까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런데 이어진 제독의 말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좋아. 이제 남은 센티넬에게 붙여줄 가이드가 필요하겠군. 장교들 중에서 가이드로 신고가 된 이들의 명단을 보내주게. 아무래도 일본인보다는 접촉하기가 쉬우니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칸은 그 즉시 꺼져 있던 모니터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제독이 애써 숨겨주지 않았다면 그 실적과 성과만으로도 명성이 드높았을 해리슨 중령의 활약으로도 제독의 야심을 채우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칸은 마커스의 계정으로 파일이 도착하는 걸 지켜보며 싸늘히 눈썹을 내렸다. 마커스가 집무실에서 열어본 문서가 칸의 모니터에 그대로 드러났다.
명단을 읽으면서 휘릭 내려가던 칸의 눈동자가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마커스의 음성이 다시 들려온 것도 그 무렵이었다.
—스타플릿에 맥코이의 후손이 있는 줄은 몰랐군.
칸은 대화를 엿들으면서 패드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왔다. 간단한 신상정보는 번거로운 절차 없이도 스타플릿 내 데이터베이스로 열람할 수가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수석 의료 장교로 일하고 있습니다. 스타플릿에서 활동 중인 가이드도 아마 그가 관리할 겁니다.
—그럼 메디컬 센터에 있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당장 제독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레너드 맥코이 소령을 투입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엔터프라이즈호가 며칠 후에 출항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우주 기지에 보급품을 전달하면서 귀환 경로에 있는 M급 행성에 대한 탐사도 같이 진행한다는군요.
—알겠네. 엔터프라이즈가 돌아오면 따로 나에게 연락을 주도록. 그와 얘기를 나눠봐야지.
칸은 줄을 잡아당겨 이어폰을 뺐다. 그 부드러운 동작이 시연되는 동안 그의 머릿속에는 수십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극저온 캡슐이 최초로 보관되어 있던 장소가 기억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으리란 가설을 폐기하고 난 이후에도, 칸은 자신이 왜 캐롤 마커스와 보냈던 시간들을 곱씹는지 고민했다. 그것은 그의 뇌세포에 불빛이 들어오고 있다는 신호가 아니라 그도 종국에는 센티넬이라는 증거였다. 칸조차도 자신의 옆에 머무는 가이드를 더 오래 느끼고 싶었던 것이다.
그 기묘한 그리움이란 혈구 하나하나가 소리 없이 몸부림치는 고통만큼 기분 나쁜 것이었다. 레비나스 맥코이가 발명해낸 가이드라인은 센티넬을 인간 곁으로 끌어들이는 투명한 낚싯줄이었다. 비록 그가 진정으로 시간을 같이 보내고 대화를 나누었던 레비나스의 의도가 아니라 할지라도, 당장 그의 앞에서 실현되려 하는 가이드의 길쭉한 덫에 칸은 순순히 패배할 수가 없었다.
지금도 칸은 자신에게 친절히 웃어주는 캐롤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읽었던 책의 활자에 강박적으로 현실감을 부여했다.
다시금 캐서린 헤이스팅스에게 대항할 순간이 도래한 것이었다.
⁂
#실행 완료
“아시다시피 가이드라인에 관한 아이디어는 칸 누니엔 싱이 정립했던 유사-가이드 관계에서 나왔습니다. 자칫하면 동족조차 알아보지 못하고 날뛸 수 있는 센티넬들에게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심어준 것이지요. 그리고 그것은 너와 나 모두 똑같은 처지에 있는 동족이라는 사실을 통해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대학에서 인기 있는 강좌에만 배당되는 강의실을 닮은 방이었다. 단상은 하나의 무대처럼 바닥에서 살짝 솟아나와 있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좌석은 부채꼴 형태로 펼쳐져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오래 전에 취득한 의학 박사라는 학위를 증명하는 듯 중앙에서 말을 이어갔다. 다소 밀착된 의자에 앉은 사람들의 눈길이 그에게 모였다. 레너드는 제 36회 인간학 학회의 서막을 여는 중이었다.
“결국 가이드라인은 센티넬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 어떤 인연이 생길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를 만들어 주는 장치라 할 수 있습니다.”
레너드는 뒤에 펼쳐진 스크린은 짧게 쳐다보았다. 센티넬 스파이럴과 가장 닮은 인간의 유전자가 확대된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만약 어떤 일이 벌어져 이 시대에 깨어난 센티넬이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아직 가이드는 한 번도 센티넬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가이드론은 200년이나 그것이 옳다는 걸 세상에 알릴 수 있는 엄중하고도 정밀한 검사대에 오르지 못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가이드는 23세기에 눈을 뜬 센티넬을 안정시킬 수 있을까요?”
청중들은 조용히 레너드의 대답을 기다렸다. 레너드는 그들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내며 스크린을 조정할 수 있는 리모컨을 내려놓았다.
“저는 처음으로 가이드가 탄생했던 시절보다 가이드와 센티넬의 밀착성이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정중하지만 단호히 내놓은 명제에 청중들의 목덜미가 바짝 섰다. 집중력 있게 뭉쳐 있던 공기는 더욱 짙게 강연장을 채웠다.
“가이드의 피부, 혹은 목소리에 특수한 성분이 묻어있어서 센티넬에게 안정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가이드의 몸속에는 가이드라인이라는 물질이 있지만 이것은 말 그대로 센티넬과 가이드의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게 하는 빌미에 불과합니다. 맞선 자리를 마련해준 주선자와도 같죠. 가이드라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거기까지일 겁니다.”
준비된 슬라이드는 더 이상 없었다. 레너드는 리모컨과 천천히 멀어지면서 청중들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보이기 시작했다.
“다행히 몇몇 중요한 사료들에 의하여 사람들은 원한다면 센티넬에 관한 정보들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태어났는지, 태어난 이후에는 무슨 일들을 겪었는지 말입니다. 이것은 여러모로 가이드에게 득이 됩니다. 우리가 낯설고 어려운 사람을 만난 상황을 떠올려 보면 쉽게 이해가 되시겠죠.”
그는 입술을 살짝 적신 뒤 말을 계속했다.
“센티넬이 가이드에게 반응하는 건 그들이 태초부터 의지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존재, 즉 센티넬 자신과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아주 잘 알아주는 친구를 만났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십니까? 저 같은 경우는 속이 후련하고, 복잡했던 머리가 풀리는 기분이 느껴지면서 그런 친구가 있음에 감사하게 됩니다. 상대에게 다소 괴팍한 과거가 있다는 점만 참을 수 있다면 센티넬과 관계를 쌓아가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일부 청중들이 입꼬리를 피식 올렸다. 가벼운 설명에 고민할 가치가 있는 주제를 얹어 놓은 레너드 맥코이의 서문은 청중들의 두뇌에 적절한 열기를 불어넣어 준 듯했다.
“훗날 센티넬이 깨어난다면, 가이드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레너드는 말을 멈추고 창문 쪽을 돌아보았다. 유리가 부르르 떠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 역시 두리번거리며 기묘한 소음이 난 위치를 찾으려고 했다. 그 순간에 단상에서 내려가 창밖을 더 자세히 살펴봐야 하는지 가늠해 보던 레너드의 커뮤니케이터가 울렸다.
[ 본즈, 어디야? 비상상황이야! - Kirk ]
청중들이 강연에 집중할 분위기가 아닌 듯하여 메시지를 확인한 레너드의 눈썹에 주름이 잡혔다. 그가 빠르게 답장을 입력했다.
[ 오늘 학회 왔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길
메시지 창이 닫혀버렸다. 갑작스러운 파동에 커뮤니케이터를 놓치지 않으려던 레너드가 자판을 꽉 휘감아버린 탓이었다. 왼편에 있던 유리창과 함께 산산이 조각난 빛이 레너드의 눈을 찔렀다. 눈앞에서 조명탄이 터진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마 그것은 진짜 조명탄일지도 몰랐다. 레너드는 알 수 없는 빛에 휘말려 서 있던 자리를 벗어나지도 못했다.
초기 화면으로 돌아온 커뮤니케이터를 보고 겨우 초점을 되찾고, 단상까지 침입한 유리 파편들을 보면서 잔뜩 쪼그라들었던 동공의 크기도 회복한 그는 이후 이질적인 물체를 목격했다. 수송선이 땅에 내려앉으면서 일으키는 바람과도 같은 날카로운 기류를 발목에 휘감고는 유일하게 강연실 안으로 들어오는 그림자였다. 레너드는 손으로 앞을 내저으면서 그것을 향해 걸어갔다. 청중들이 소란스럽게 빠져나가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오히려 내부는 조용해졌다.
그림자는 더 이상 그림자가 아니게 될 때도 까맸다. 레너드가 목을 앞으로 뺐다. 붉게 달아오르는 구멍이 사물을 분별하기 위해 애쓰는 그의 시야를 덮쳤다.
서른여섯 번 동안 꾸준히 이어지던 인간학 학회는 학회장이 정체불명의 습격을 받아 중단되었다. 사상자는 없었고 학회의 중요 강연자였던 스타플릿 소속 레너드 맥코이 소령의 행방만이 묘연해졌다. 엔터프라이즈호가 출항하기 사흘 전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스타플릿 소속 장교가 실종된 이 사건이 그 날 벌어진 비극 중에 가장 피해가 적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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