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대단원 1. 센티넬의 탄생

02. 센티넬의 두 가지 요소 - 우월성과 폭주




  칸이 밝혔던 연구원들의 만행 중에서도 가장 여론의 질타를 받았던 것은 이른바 ‘심정지 실험’이었다. 말 그대로 의학적인 방법으로 심장을 강제로 멎게 만든 다음 센티넬들의 자체적인 치유력만으로 박동이 가능한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끝까지 제세동기를 작동하지 않았으며, 스스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데 너무나 많은 시간을 소비한 센티넬들은 며칠 동안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야 했을 정도로 잔혹했던 테스트는 이후의 역사에 굵직하게 관여하게 될 결과들을 낳았다.


  제일 큰 것은 진화전쟁의 기간과 그 양상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센티넬의 1차 진격 이후 2년 8개월 동안 양 진영은 휴전기를 겪었다. 이 때 센티넬의 피로도와 정신 붕괴 수치는 극에 달했고 칸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이 심정지 실험을 통해서 성립하게 되었던 뿌연 가설을 증명해야만 했다. 그것은 바로 강화인간들에게 하나의 안전장치가 필요하다는 가정이었다. 인간학의 중심 주제인 가이드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 무렵에 등장했다. 유사-가이드 관계(Half-Guide Relationship)이라고 후에 명명된 칸의 비책은 센티넬들이 끝까지 전쟁을 이어나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맥코이와 칸을 함께 다루는 챕터에서 더 자세한 설명이 이어지겠지만, 여기서 간단히 언급하면 유사-가이드 관계에서 센티넬에게 필요한 가이드는 같은 센티넬로 정해진다. 그래서 이것은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았으며, 센티넬들이 휴식을 가지는 동안 캐서린의 아이디어가 실현될 말미를 얻자 불완전하게 유지되고 있던 센티넬들의 안정은 끊어지게 된다.


  밀레이스 역시 센티넬의 고삐를 잡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낀 것 같다. 이를 위해 밀레이스는 적극적으로 강화인간들을 심층적으로 연구해야 한다며 외부 인사를 영입할 것을 주장했고 그 결과 헤이스팅스가 잠시 골턴 연구소에 드나들게 되었다. 그러나 레비나스 맥코이가 나타나기 전까지 인간들에게 위와 같은 생각은 전파되지 않았다.


  이와 더불어 그 실험은 강화인간들이 연구원들뿐만 아니라 인류 자체를 겨냥하게 된 원인이 되어버렸다. 칸이 금방이라도 길을 잃을 듯한 동족들에게 심정지 실험을 구실로 들어 인간들에게 죄를 물을 것을 유도한 덕택이다. 시기를 따져 보자면 겨우 인큐베이터와 작별을 고한 그들이 시작부터 받아든 게 심정지 실험이었다. 예민한 강화인간들의 정신이 들끓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게다가 그들이 절박한 심정으로 매달렸던 담당 박사들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뒤처리도 제대로 하지 못할 거면서 자신들을 잔뜩 자극만 해 놓았으니, 파괴욕구로까지 번져가는 센티넬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에 그럴 듯한 방향을 제시해주는 건 칸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이 때문에 몇몇 역사가들은 심정지 실험만 아니었어도 진화전쟁이 불거지지는 않았을 거라고 주장한다.


  센티넬의 이상 행동과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들의 골이 깊어지는 가운데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골턴 연구소에 찾아왔다. 그리고 그 이틀은 전쟁 전 인간들의 마지막 평화였다.







  궁전의 창문을 가리는 고급스러운 천의 색깔처럼 붉은 실루엣이 입구에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타원형으로 뚫린 구멍에서 끈이 넓은 목걸이가 휙 튀어나왔다. 실루엣은 자신의 일부를 넓게 팔락이면서 그것을 손에 쥐었다. 너그럽게 열려 있는 듯 보이지만 초대받지 못한 불청객이 들이닥칠 경우 강렬한 사이렌과 장애물을 내뱉는 마지막 은색 관문에서 그림자는 목걸이에 달려 있던 카드키를 내밀었다.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골턴 연구소의 심장부로 들어가면서 가운을 입지 않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캐서린이 임시로 지급받은 카드키는 무리 없이 작동했지만, 그녀가 홀에 우뚝 서자 모두가 의심쩍다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오필리아가 업무적인 이유로 자리를 비웠을 거란 걸 알면서도 이 시간을 고집한 것이었기에 캐서린은 언짢게 받아들이진 않았다.


  오히려 캐서린은 자신을 맞이하기 위해 오는 남자를 보고 살짝 놀랐다. 그녀가 마주 걸었던 팔을 풀었다.


  “일찍 오셨군요, 오필리아는 아직 안 왔는데.”


  강화인간에 관련된 프로젝트를 총괄하고 있는 지라 연구소장보다 입김이 세진 리처드 버비지는 이제 학계에선 꽤 유명했다. 캐서린이 그를 알아보고 악수를 했다. 


  “여길 조금이라도 오래 보고 싶어서요. 반갑습니다. 캐서린 헤이스팅스입니다.”

  “리처드 버비지입니다. 오필리아가 추천하는 분이라고 하기에 살짝만 살펴봤는데 그간 쌓으신 업적들이 아주 훌륭하더군요. 듣자하니 여기에 들어오실 뻔 하셨다던데.”

  “제가 그냥 안 한다고 했어요. 누굴 잘 돌봐줄 만한 성격은 아니거든요.”


  리처드가 크게 웃었다.


  “오필리아를 기다리실 겁니까? 라운지가 있으니 거기서 잠시 쉬셔도 됩니다.”

  “사실 저는 지금 일을 하고 싶군요. 저한테 필요할 만한 자료들을 미리 읽을 수 있을까요?”


  리처드는 캐서린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계속 웃는 낯으로 그녀를 인도했다. 리처드는 오필리아의 책상을 찾아갔다. 연구원들의 책상은 모두 똑같이 생겼으나 이름이 새겨진 은색 명판이 있어 캐서린은 친구의 자리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필리아가 두꺼운 책으로 눌러 놓은 파일보다 연구소에서 지급하는 옥스퍼드 노트부터 눈에 담았다. 오필리아는 늘 거기에 편지를 써서 보냈다. 허나 연구소의 직원들에겐 매우 흔한 물건이었고, 리처드는 건조하게 파일을 건넸다.


  “자료는 오필리아가 준비한 걸로 압니다. 부족하진 않을 것 같군요.”


  캐서린은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적어준 오필리아의 서체를 감상했다.


  “앉으실 만한 자리를 안내해 드릴까요?”

  “그 전에 한 가지만 더 부탁드릴게요.”


  가운 자락에 가려지는 법도 없이 카드키를 겸하는 이름표가 캐서린의 가슴팍에서 빛났다. 그녀 자신은 누군가와 책임을 분담할 여지도 없는 자녀 같은 실험체는 인정하기 싫다면서 한사코 거부했던 표식이었다. 


  “실험 장면은 언제나 녹화가 된다고 들었는데 그 중 하나를 좀 봤으면 좋겠네요.”







  리처드가 넣고 간 CD를 재생하기 전에 캐서린은 오필리아에게 어떤 식으로 미안함을 고백할지 머리를 굴렸다. 이틀 동안 그녀가 연구소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실험체와 맞닥뜨리지 않을 가능성은 없는데도 그 담당자인 오필리아를 배제했기 때문이었다. 캐서린은 미간을 꽉 눌렀다가 기어코 모니터를 켰다. 어차피 오필리아와 같이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재생 버튼은 마치 모니터 안에 숨어 있는 램프를 켠 것처럼 강하고 좁은 불빛을 보여주었다. 캐서린은 CD 안에 들어있던 또 다른 영상을 켜고 둘을 나란히 놓았다. 똑같은 공간에서 똑같은 숫자의 사람들이 고무로 만든 보호 장갑을 끼고 있었다. 미리 약물을 투여했는지 중앙에 앉은 실험체는 움직이지 못했고, 실험체에게 이것저것 선을 연결하던 박사들은 재빠르게 어딘가로 사라졌다. 


  영상에서 두드러지는 변화는 없었지만 캐서린은 그들이 전압을 이용해 실험체의 심장을 마비시킨 걸 눈치 챘다. 


  연구원들의 품평을 담아내지 못한 영상은 무서울 만큼 조용했다. 두 실험체는 고개를 팍 숙인 채 미동도 없었다. 캐서린은 커서를 내려 영상의 시간을 확인했다. 


  재생 9분 째, 왼쪽 영상에 있던 강화인간이 몹시 경련하면서 몸을 젖혔다. 의자가 밑으로 바짝 가라앉을 때까지 사지를 늘어뜨리고 있던 그는 이윽고 튕겨나갈 듯이 상체를 웅크렸다. 발밑으로 그가 검붉은 핏덩이들을 쏟아냈다. 구석으로 나동그라질 것처럼 몸부림을 치던 그는 마지막으로 까만 피를 길게 후두둑 뱉으면서 입술을 쓸었다. 이제 막 생성된 듯한 새빨간 혈액이 그의 입 주변에 골고루 묻었다.


  그 즈음에 오른쪽에 있던 실험체 역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행동 양상은 조금 달랐다. 의자가 부서져라 펄쩍펄쩍 뛰던 그 실험체는 몸에 늘러 붙어 있는 전선을 떼어낼 생각도 하지 않고 앞으로 돌진하려 했다. 이에 놀란 연구원들이 주사기와 약물을 들고 나타났다. 실험체는 안전모로 얼굴을 가린 연구원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실험체는 한 명이 손사래를 치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면서 박사들의 가운 자락을 모두 한 번씩은 붙잡았다.


  캐서린이 오른쪽 영상을 정지시켰다. 인간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애처롭게 쓰러진 그림자는 멈추고, 화산이 서서히 요동치듯 들썩이는 강화인간의 모습만 흘러갔다. 용기 있는 연구원 하나가 슬며시 발을 내미는 게 영상의 귀퉁이에 잡혔다.  


  —오필리아.


  캐서린은 강화인간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다. 이 연구소에 있는 실험체들이 인간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게 확연히 다가왔다. 


  게다가 그는 캐서린의 순수한 벗을 부르고 있었다. 


  —오필리아를 불러줘.


  또 하나의 수족처럼 곳곳에 핏자국을 펼쳐 놓고 칸은 자신의 창조자를 찾으려 했다. 그 모습이 두렵기도 하고 무척 끈끈해 보이기도 해서 연구원은 곧바로 통신기를 들고 오필리아의 이름을 외쳤다. 다른 연구원이 들어와 칸의 기록을 종이에 적었다.


  영상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캐서린은 홀로 모니터를 끄고 CD를 정리했다. 그러나 그 손길은 빠르지 못했다. 







  캐서린은 짧은 시간동안 강화인간들의 심정지 실험에 관하여 반드시 논리적인 의견을 내고 가야 했다. 촉박한 일정과 어려운 과제는 캐서린을 계속 의자 위에 붙들고 있었지만 그녀의 펜은 잉크를 내뿜고 있지 못했다.


  벌써 자료를 두 번씩이나 읽은 캐서린은 완성 직전의 가설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는 중이었다. 심정지 실험을 겪은 강화인간들은 스스로 소생한 기록이 빠르면 빠를수록 심한 난동을 부렸다. 연구소 내에서는 이미 그러한 행동을 폭주라고 명명한 듯했다. 심장을 강제로 멈추게 한 것의 효과가 육체적 이상이나 기억력 감퇴가 아닌 정서적 문제를 일으켰다는 게 특이하기는 했으나, 문제되는 실험이 강화인간들에게 어마어마한 부담을 안겨주는 것은 분명했으므로 캐서린은 적당한 데이터들을 추려서 실험을 중지하는 게 좋다는 권고를 연구소에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캐서린의 가설에 하나하나 제동을 거는 것은 오직 칸의 기록이었다.


  먼저 실험 직후 강화인간들은 일단 눈에 보이는 연구원들에게 매달렸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아무에게나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만 칸은 유독 오필리아를 원했고, 그녀의 고백을 통해 캐서린은 오필리아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알고 있었다. 캐서린은 오직 오필리아를 겨냥한 칸의 행동도 폭주의 일환으로 봐야 하는지, 혹은 자신과 애정을 쌓아가고 있던 인물에게 손을 뻗은 인간적이고도 본능적인 모습으로 봐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했다. 그리고 연구소의 약물이 동이 날 정도로 제어가 되지 않았던 대다수의 실험체들과는 달리 칸은 침착했다. 그는 강화인간으로서의 자질이 뛰어날수록 폭주 역시 걷잡을 수 없다는 잠정적 결론마저 부정하고 있었다.


  그러다 캐서린은 문득 풀어 놓았던 손목시계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조금 있으면 오필리아가 도착할 것 같았다. 캐서린은 탁자를 정리하면서 오늘 할 일을 두 개로 좁혔다. 계획을 세운 캐서린이 아무 의미 없이 나와 있던 펜촉을 눌러 집어넣었다.


  “케이트.”


  코트도 벗지 않은 오필리아가 나타난 건 그 순간이었다.


  캐서린은 칸의 자가 소생 기록이 그대로 적힌 보고서를 가리지 못했다.







  “정말 모든 게 다 헷갈리고 알 수가 없어도 이것만큼은 분명해. 오필리아, 아무도 실험체들에게 사랑이란 걸 가르친 적이 없어. 그들은 생명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본능을 발휘할 뿐이야.”


  “우리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건 얼마 되지 않아. 스스로 경험한 것과 우리가 하는 행동을 보고 학습할 수도 있지. 나는 그에게 말을 가르쳐준 적이 없지만 그는 깨어난 순간부터 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었어.”


  “그럼 네가 나한테 상처 받은 목소리로 한탄하던 건 뭐였어?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한다는 걸 안다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짓이야. 그 머리 좋은 강화인간들이 그걸 몰랐을까?”


  캐서린은 탁자 위에 있는 물건들을 금방이라도 팔로 치워버릴 기세였다. 


  “연구소에 목표로 하는 건 정서적인 발전이 아니야.”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않는구나. 그럼 이렇게 물을게. 왜 그를 변호하려고 하는 거야?”


  캐서린이 지급받았던 출입증이 오른편으로 돌아간 반면에 오필리아는 겉옷도 벗지 않은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오필리아는 무엇을 부정하는 건지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곤 캐서린이 제일 좋아하면서도 안타까워하는 미소를 지었다. 


  “케이트, 나는… 아니, 너는 내가 그를 미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뭐라고?”


  캐서린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그것은 어머니가 말썽쟁이 자녀를 위해 으레 꺼내 놓는 변명과 비슷한 말이었다. 캐서린은 눈을 크게 뜨고 믿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오필리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치렀던 실험의 영상을 한 번 봐봐. 활자와 현실의 그 깊은 괴리감이 한 사람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감정을 솟구치게 만든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오필리아는 리처드에게 가볼 일이 있다면서 캐서린을 향해 다시 한 번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캐서린이 몰래 녹화된 영상을 봤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캐서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필리아의 순수함을 동경했고 좋아한 끝에 지금까지 곁에 남은 거였지만, 촘촘하고도 끈끈했던 과거도 흔들거리는 기분이 들었다. 캐서린은 이따가 밥이나 같이 먹자는 오필리아의 제안에 어설픈 대답을 하는 걸 잊어버렸다. 


  이 와중에 강화인간은 문서 위에서 숨 쉬고 있었다.


  캐서린은 그 즈음에서 자신의 가설이 마지막 예외까지 덮지는 못할 것임을 직감했다. 오필리아 밀레이스와 그녀의 강화인간은 다른 이들과 같은 점이 한 개도 없었다. 가설의 기본적인 전제조건마저 충족시키지 못하는 케이스를 제외하고 나면 이제 캐서린이 할 일은 없었다.






 

  자리를 이동한 캐서린은 하얀 가운의 연구원 앞에서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담당 박사의 동의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소리죠?”

  “그렇습니다. 실험체를 단독으로 면담해도 좋다는 서명이 들어간 동의서가 필요해요. 메일로 간단하게 해결하기도 합니다만, 어쨌든 담당자가 허락을 해줘야 합니다.”


  캐서린은 머뭇거렸다. 오필리아에게 칸을 만나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는 것 자체가 부담스러웠다. 공식적인 일정을 방해하는 게 아닌가 하는 지나친 소심함까지 고개를 들 형편이었다. 엉뚱한 이유로 오필리아에게 연락을 하지 못하고 있는 캐서린에게 관심이 없어진 연구원은 등을 돌리고 컴퓨터를 들여다보았다.


  “어?”


  캐서린은 연구원의 어벙한 목소리를 무시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밀레이스 씨에게 방금 메일이 도착했어요.”

  “…네?”

  “혹시 헤이스팅스 씨가 찾아오면 HFX-1500을 면담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군요. 타이밍이 좋네요. 이런 식으로라도 절차를 밟아야 하거든요.”


  연구원은 의자를 발로 밀어서 연구소 어디에나 있는 일정표를 확인했다. 캐서린은 그녀가 내선전화로 누군가와 통화를 하면서 서랍 안에 있는 면담실의 열쇠를 꺼내는 걸 관찰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칸을 옛날 식별번호로 지칭하고 있었다. 오필리아만 자신의 실험체에게 이름을 지어준 것이 아닌데도 그러했다.


  “실험을 진행하고 있던 의사가 데리고 올 거예요. 먼저 면담실로 가 있죠,”


  찰랑거리는 소리도 없는 카드 형태의 열쇠가 휘릭 하고 연구원 손에 쥐어졌다. 캐서린은 혹시 오필리아의 메일이 보일까 싶어 몸을 옆으로 빼는 시도를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캐서린은 이후 조용히 안내인의 뒤를 쫓아갔다. 꼭꼭 닫힌 문 너머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는 눈동자를 굴린다고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다만 그녀는 앞서 가던 연구원이 한 팔을 가슴 쪽으로 불러오더니 걸음걸이가 느려지는 걸 보고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것만 추측했다. 골턴 연구소의 박사들은 휴대기기를 이용해 자주 실험체들의 상태나 응급 신호를 주고받았다. 


  미팅 룸(Meeting Room)이라고 적혀 있어서 얼핏 보면 회의실 같기도 한 면담실은 지루할 만치 개성이 없었다. 연구원은 통신기를 들여다보다가 무심하게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곧 온다고 하니 문을 두드리면 열어주세요.”


  연구원은 살짝 출입구를 좁혔을 뿐 꽉 닫지도 않았다. 캐서린은 일단 전등부터 켰다. 연구소 내부에 미적 요소를 기대하는 게 무리라고는 해도, 취조실 분위기가 나는 어둡고 건조한 첫인상에 그녀는 인상을 찡그렸다. 


  천장을 보고 있던 캐서린은 꼭짓점 끝에 달린 CCTV를 찾아냈다. 캐서린은 전보다 더 미간을 좁혔다. 눈에 띠는 것마다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어 그녀는 공연히 의자를 까딱거렸다.


  캐서린의 자잘한 동작을 멈추게 만든 건 두 번의 노크였다. 캐서린이 순간 놓아버린 의자가 얇은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닿았다.


 그녀가 늦게 문을 연 것도 아니었는데 바깥에서 기다리는 실루엣은 하나였다. 발이 컸고, 하얀 가운이 아닌 검고 몸에 달라붙는 소재의 옷을 입은 단단한 선이었다. 캐서린은 차근차근 시선을 위로 옮겼다. 연구소의 사람들이 하나 같이 신기해했던 맑은 빛의 안구가 그녀의 앞에 버티고 서 있었다.


  칸은 명백히 흥미롭다는 웃음을 보였다.







  골턴 연구소에 잠시 머물면서 헤이스팅스는 칸을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 같다. 이 때 그녀는 미래를 내다본 듯한 기지로 그와 나누었던 대화를 녹취했다. 헤이스팅스는 자서전에서 이 사실을 기록하며 맥코이의 가이드론(Guide Theory)가 맞을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녀가 공개한 대화중에서 논의에 필요한 부분을 수록한다. 헤이스팅스와 칸의 말이 번갈아 이어지는 구성이다.


 

  마지막으로 이거 하나는 꼭 묻고 싶어요. 이건 내가 오필리아의 친구이기 때문에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의 가장 중요한 궁금증이 뭔지 기대되는군.

  감정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죠?

  당신은 연구소 안에 본인만 볼 수 있는 카메라를 갖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군. 그녀만의 고해실이 되어 여기서 나와 치른 행위들을 낱낱이 들었을 거야. 그렇지 않나?

  부끄럽게 여기지는 말았으면 좋겠네요.

  내가 제일 먼저 익혔던 어휘가 하얀 쥐와 크게 다를 바 없는 내 처지였다. 인간이었다면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지독한 첫 경험이지. 그래도 이후 배운 단어들은 꽤나 아름다웠다. 창조나 과학, 우수성과 같은 말들이었지. 그런데 내 주변에서 그런 표현들이 어울리는 존재는 나 한 명밖에 없는 것 같더군. 고로 나는 실망 외에 그 어떠한 감정도 알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필리아까지도?

  내가 왜 표본의 범위를 넓히고자 하겠는가?



  헤이스팅스는 비록 거절할 만한 위치가 아니었더라도 자신과의 대면을 순순히 받아들였다는 점과, 대상의 자질을 조심스럽게 판단해보고자 걸치게 되는 흥미 어린 탐색적 태도 등이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평했다. 헤이스팅스는 이것이 현 시점에서 일컫자면 리서칭(Researching), 즉 센티넬이 가이드를 물색하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하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레비나스 맥코이의 사후 용어까지 붙으며 학문적으로 연구 가능한 주제에 끼어들게 되었다.  


  칸이 헤이스팅스에게 가이드의 자질이 있는지 살펴보려 했던 명분은 너무도 명백하다. 그는 밀레이스와 관계를 가지면서까지 정신적 안정을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밀레이스에게 의지할 필요성마저 사라져가고 있는 와중 새로운 탐구 대상이 나타났으니, 칸은 그러한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심정지 실험으로 떠안은 끔찍한 불안을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제어했다고 한들 센티넬은 태생 상 가이드를 필요로 하는 종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헤이스팅스는 자신의 예감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알 방도가 없었으므로, 그녀는 강화인간들의 뛰어난 능력이 그만큼 실험체를 예민하게 만들기 때문에 폭주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지적하며 심정지 실험의 중지를 추천했다. 헤이스팅스는 끝내 칸이 마지막까지 오필리아에게 집착했던 이유를 찾아내지 못했다. 헤이스팅스뿐 아니라 맥코이가 센티넬-가이드 관계는 1:1 대응으로서만 성립한다는 걸 알아내기 전까지 누구도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살펴본 밀레이스와 헤이스팅스, 칸으로 이루어진 구조엔 긴장감은 있을지언정 적대 의식은 없었다. 칸이 자신의 창조자를 비롯한 골턴 연구소의 상주 인원을 모조리 살해하고 헤이스팅스가 필사적으로 강화인간을 멸종시킬 방도를 강구하려 애쓰게 된 것은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다. 다음 장에서는 인간과 센티넬의 비틀린 관계가 정점을 찍은 진화전쟁의 발발을 다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