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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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Jade
Lecture for Life
그의 이름은 존 도(John Doe)에서 앞부분만 따 만들어졌다. 짧은 시간 내에 알차게 쌓인 지식을 정리하면서 그는 그것이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 피해자에게 임의로 붙이는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피해자라는 단어에서 범죄나 기타 끔찍한 상황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용어가 자신의 이름을 채운다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는 분노를 인식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분노는 감정이 아니다.
그의 정체는 워낙 고집스러워서 세상에 제대로 발붙일 수 없는 윤리와 격언의 집합체였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땅바닥을 걸을 수 없고 누구에게 쉽사리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존은 이것 역시 덤덤히 인식해버렸다. 자신이 남들에겐 얼굴이 뭉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와 똑같다는 사실은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유일한 벗에게만 근근이 반응할 뿐이었다.
—미안해.
존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말했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 의해 옳다. 존이 있는 곳에는 실제로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했고, 존은 그 사람 안에서 형태 없이 기생하듯 움츠리며 살고 있기에 그러했다. 기생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이 존에게 자주 쓰는 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정신체에게 쓰기에는 영 교양 없는 말이지만 이태까지 그에 대해 한 번도 투덜거리지 않은 존이, 바깥에는 별이 돌아다니고 인간의 걸음걸이를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한 끝없는 진공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내가 또 너를 화나게 했구나.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은 죽었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저기 있는 사람들은 이 껍데기를 내가 사용하고 있든, 네가 사용하고 있든 너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죽이지 마.
존은 눈앞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잔인하게 패널을 눌러대는 걸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야에 담기는 풍경이었다. 존의 목소리가 육체 없는 그를 대신해 고개를 내저었다.
—죽지 마, 죽이지 마.
공기도 없는 까만 길을 일그러뜨리며 뜨거운 빛줄기가 나아갔다.
—내가 죽지 말라고 했잖아.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죽음에 가까이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존의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존과 그의 친구는 한 지점을 공유하면서 하얗고 예쁘게 생긴 배가 시커멓게 터져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존은 친구의 입매가 꿈틀거리며 미소를 지으려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웃음은 존이 보기에 늘 슬펐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으니까, 이번만큼은 정말로 널 도울게. 너도 만족스럽게 생각할 일을 해 줄게.
“대체 무슨 뜻인가?”
—오래 살지 못한 너에게 더 세상을 거닐 시간을 줄 거야.
“결국 너를 인정하라는 것 아닌가? 물처럼 나무처럼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선과 정직 같은 것들을 경험해 보라는 얘기겠지.”
—너를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칸.
칸은 자신과 똑같은 파동을 가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이 절대 하지 않을 말만을 담아내고 있는 존을 언짢게 여겼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집중하면서 그것에 짧게 혀를 차고 있을 때, 존은 칸의 팔을 움직여서 근처의 손잡이를 잡게 했다. 칸은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존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화면을 보았다.
둘이 타고 있는 함선의 밑부분이 우주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칸은 자신의 심장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그 때 존은 칸을 붙잡고 있었다.
⁂
강화인간들을 만든 과학자들은 그들이 두 손에 얌전히 담길 만한 무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훈계할 방식을 고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생명체 하나를 통째로 만드는 법도 터득한 마당에 그것보다 불완전한, 한 마디로 몸뚱이가 없는 사람을 만드는 건 이론적으로 간단하지 않겠느냐는 괴상한 논리가 과학자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튼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과학자들이 정말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람과도 같은 의식을 만들어 강화인간들에게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 때 다른 강화인간들의 폭력성을 지배하려고 했던 교활한 강화인간에겐 제일 빛나는 의식이 주입되었다.
칸이 자신의 자의식과 구별하기 위해 기생충, 쓸모없는 도덕,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순적인 도덕률 등등 다양하고도 불쾌한 이름을 붙여준 얼굴 없는 존 도의 탄생이었다.
보통 악으로 치부되는 특징들을 덕지덕지 안고 있던 강화인간을 달래기 위한 의식은 그야말로 책에서 뽑아낸 지극히 당연한 문구들이 살아 숨 쉬는 현상이었다. 강화인간들 모두 환청처럼 양 관자놀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언짢게 여겼지만 유독 칸의 반발에 과학자들은 쩔쩔맸다. 과학자들은 고심 끝에 무시무시한 조치를 내렸다. 그것은 존의 생명을 연장시켰고 과학자들의 인생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몸이 없어 추억과 체험도 쌓지 못하는 존은 300년보다 더 오래된 일을 어젯밤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형태 없는 의식은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자신이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주인이 거칠게 외쳤던 걸 떠올렸다.
“지구로 갈 수 있을까?”
존은 차분하게 함선에게 물었다.
[시스템의 손상이 심해 안정적인 착륙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워프를 강행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살 수는 없으니까 지구로 내려가자.”
[목적지를 더 좁혀주십시오.]
“그가 처음으로 눈을 뜬 곳…. 샌프란시스코부터.”
존은 온 몸에 힘을 주고 눈꺼풀을 닫았다. 칸의 머리에 살고 있는 탓에 그가 보유한 여러 지적 능력과도 가까운 존은 거대한 충격파가 오리라 확신하며 사지를 고정했다.
—칸, 지구로 내려갈 거야. 듣고 있어?
칸은 자신의 뇌를 둘로 쪼개서라도 존을 없애버리겠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존은 부드럽게 그의 온갖 악담을 넘겼다. 오히려 존은 자신의 기억을 열어 연구소에서 두 의식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 와중에도 함선은 흔들리면서 워프 궤도를 열고 있었다.
자신이 반사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공동이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존은 제 집처럼 편안하게 여기고, 칸은 절대로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하는 곳이었다. 존은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게 그것의 본성인 공간을 변형시켜 작은 방을 만들어냈다. 지금처럼 의자가 하나 있고 그 외에 주목할 것이라고는 둘밖에 없었다.
존은 혹시나 칸이 불안정하게 지구로 떨어지고 있는 함선을 자각할 수 없도록 안에 복잡하고 화려한 불빛을 뿌렸다. 동료를 뺏기고 현재로서는 도덕책에게 몸뚱이까지 뺏긴 칸은 사납게 그것을 쏘아보았다.
—나에게 너를 보냄으로써 인간들은 자기네들의 추악한 이중성을 더욱 증명해버렸군.
—나는 추악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에게 온 것이 아닌데.
—아니, 그것은 명백하다. 치유도 전술도 필요 없이 부려먹을 수 있는 병사로서 나와 동족들을 창조했으면서, 그리고 병사들은 많은 순간에 포악성을 미덕으로 발휘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번거롭게 너를 만들어냈군. 절대 존중받을 수 없는 선생을 던져준 거나 마찬가지야.
—나를 선생으로 비유했다는 건, 네가 날 선생으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야?
—앞의 수식어를 무시할 셈인가. 중요한 건 그 부분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어구를 무시해도 괜찮은 구실을 얻었는데.
—너를 죽인다고?
—네가 스스로 묘사하는 것처럼 잔혹하고, 또 내가 아는 것처럼 영리하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날 지독히 싫어한다면 네가 날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주제에 절대선 같은 역할을 자처하지 마라.
—무슨 뜻이야?
—대의나 진리 같은 고상한 궤변을 수호하기 위하여 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따위를 취하지 말라는 소리다.
—별로 담담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낙엽이 지는 것도 슬픈데,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의식이 죽어버리는 일에 어떻게 담담할 수가 있지?
—이 땅의 생명은 모두 가치가 있다는 지루한 격언이로군.
—그런 뜻도 있지. 그런데 나는 방금 했던 말에서 내가 진짜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걸 네가 찾아냈으면 좋겠어.
—네가 도덕 말고 또 무엇을 은유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러하듯 너 또한 죽지 말아달라고. 같은 방 쓰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인사라고나 할까.
존은 옛날에 자신과 칸이 나눴던 대화를 들으며 입술 없이 웃었다. 부서진 함선이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꿰뚫었다. 존은 이어지는 옛 이야기들 속에 조용히 자신의 현재를 섞었다.
—네가 그동안 너무 오래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잠깐 너로서 활동했을 때 내가 느꼈던 점을 한 가지 얘기해 줄게. 나도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싫었어.
칸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나를 제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이 좋았던 거야.
존은 눈을 떴다. 칸을 위하여 그는 강물까지도 갈라버릴 기세로 추락하고 있는 배를 안전히 빠져나올 수 있는 묘책을 생각했다. 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칸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선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법이므로, 존은 더 이상 자신이 육성을 내는 일은 없을 거라며 칸에게 따뜻하게 일러주었다.
⁂
칸은 존이 마련해 준 빛과 과거의 방에 앉아 있었다.
의식만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건 경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칸은 존과 주고받은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강화인간의 지성은 과연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는 말을 대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칸은 더불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존과의 대화는 허락 없이 자신의 사고를 나눠 가진 자와의 싸움이었다. 지금까지도 칸은 그것을 치열한 경합 혹은 경쟁으로 여기고 이를 갈고 있었으나 그 도덕이라는 것은 강화인간에겐 참으로 어설픈 적이었다. 적개심도 없고 불꽃 튀는 계략도 없이 늘 자신에게 죽지 말아달라고 한다. 칸은 자신이 인간들에게 패배한 일에 혹시 존의 의지가 개입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따져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칸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명 윤리를 적용시키겠다는 사명에 일생을 쏟으려는 게 분명했다.
칸은 존이 자신에게 침투해온 지 14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졌던 대화를 방에서 지워버리고 시간을 당겨왔다. 존의 공간은 칸에 의해서도 조종당한다. 칸은 자신이 인간들로부터 존 해리슨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을 불러와 귓가에 펼쳤다.
—너도 별 수 없군.
—무슨 말이야?
—결국 너도 네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육체를 탐냈던 게 아닌가. 너는 나에게 죽지 말라는, 곧 너와 계속 공존해 달라는 뜻의 말을 끊임없이 나에게 해 댔지만 지금 네 행태를 보면 앞서 내가 한 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도덕의 가장 큰 적은 위선이 아니던가?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함부로 내 육체를 강탈한 행위로 너는 네 정체성마저 뒤엎은 꼴이 되었어.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곳을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네가 계속 잠을 자도록 내버려두었어.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어느 땅이든 나에겐 반갑지 않다.
—너는 네가 도덕이라는 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내 스스로 흐려버렸다는 뜻의 말을 했지.
—반박하고 싶은가?
—자신의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안정을 위하여 호의를 발휘하는 것도 넓게 보자면 도덕에 포함될 수 있어.
—내 안정이라고?
—그 증오가 없어지면 너에게도 잔잔한 호수가 고일 공간이 생기지 않을까? 비록 호수는 때때로 바람도 만나고 떨어지는 나뭇잎도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나치게 시적이군. 마땅히 논리에 들어맞는 것 같지도 않고. 조만간 너는 내 몸에서 물러나야 할 거다.
그 대화가 있은 이후 존 해리슨은 칸 누니엔 싱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칸은 다시 존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칸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 뒤로는 존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고 방 안의 빛도 차츰 시들어갔다.
존은 이상하게 그를 부르지 않았다. 칸은 문득 움직이기가 귀찮아졌다.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선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칸은 조금 더 동료를 잃은 울분에 묻혀 있기로 하고 주변의 빛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존은 그런 칸의 모습을 살피고 세상 밖으로 뛰어내리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울어진 샌프란시스코가 아슬아슬하게 행성의 벽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자신과 시각을 공유하는 칸도 도시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존은 잠깐 의식 밑으로 내려갔다.
—…칸?
방금까지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칸은 망설임 없이 존을 덮쳤다. 존은 자신을 속박하는 칸의 표정이 전선에 선 강화인간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목격했다. 샌프란시스코 사이를 조용히 공략하면서 스타플릿 본부로 가려고 했던 존의 계획을 내던져버리고 칸은 난폭하게 도시로 낙하했다.
⁂
존은 300년 전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는 황망해하진 않았지만 아주 살짝 힘이 빠졌다는 몸짓으로 공중을 갈랐다. 이윽고 존은 슬퍼졌다.
그는 50일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밑에 엉덩이를 붙인 듯한 기분을 감내하고 있었고, 곧이어 자신의 몸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만큼 거대한 불꽃이 솟아오를 걸 예상했다. 존은 끈기 있게 칸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의 말솜씨를 단련하는 것에 목적을 두겠다는 듯 무성의하게나마 존과 얘기를 나눠주던 칸은 며칠 전부터 반응이 없었다. 존은 끝까지 열리지 않는 의식을 두드렸다.
칸이 일부러 틈을 벌려서 그를 괴롭게 하는 소리를 들려주었을 때도 존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칸, 듣고 있지?
“으아아악!!”
—다른 사람한테 시키지 말고 네 대답을 들려줘. 듣고 있잖아. 내가 들릴 수밖에 없잖아.
“출구가 있다! 저기로 도망가!”
—칸.
“아, 안 돼!”
피바람에 흔들리는 의식의 대문 틈새로 칸의 낮은 웃음소리가 침입했다. 존의 외침을 진격의 나팔 소리처럼 들으며 인간을 가르고 있는 강화인간의 광포함이 여과 없이 그를 찔렀다. 존은 칸이 이토록 기분 좋게 웃는 걸 처음 들었고, 그래서 무척이나 슬퍼진 기분으로 목을 젖혔다. 칸은 말없이 일부러 자신의 시야만 의식 밑까지 반사시켰다.
—넌 실패했다.
육체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칸이 서 있었지만 존이 나가는 걸 막을 의도는 없는 듯 문을 몸으로 밀면서 존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300년 전에 존은 칸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의 육체를 빌릴 수 없었다. 존은 칸이 원하는 항복 선언을 참을성 있게 삼키고 자신의 의식을 통해 칸의 눈꺼풀을 밀쳐 올렸다. 창을 쓰듯 휘두르기라도 한 것인지 길쭉한 앞부분이 붉게 젖은 총들이 널려 있고, 무기보다 많은 시신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은 피와 비탄을 짜내면서 엎어져 있었다.
존은 주변의 강화인간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 몇몇에게는 인위적으로 빚어진 도덕성이 분명 어딘가에 침투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닮은꼴들을 떠올리며 남은 여유로는 그들 역시 실패한 것이냐고 물었다. 성대마저 우수하게 빚어진 최고의 강화인간이 그에 걸맞는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존은 어느새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두 고막을 얌전히 내버려두었다.
존은 한참 폐허를 뒤지다가 태울 수 있을 만한 재료들을 한 구석에 모아놓고 불을 피웠다. 쓸모없는 조각들로 빚어진 불꽃이 향처럼 조촐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잔혹한 지배자이자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가 실패작에 어울리는 행동이라면서 크게 그를 경멸했다.
누구라도 모욕으로 받아들일 그것을 300년이나 마음속에 담아두고 존은 비로소 그에 대답했다.
—전에도 지금도 나는 너에게 모호한 답만 했던 것 같아.
존은 천천히 보이지 않는 천장 위로 떠올랐다. 기류가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 인간들이 만든 엔진 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 방향을 가리지 않고 터지고 있었다.
—너는 내가 정말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몰라. 너처럼 놀라운 지성을 가진 사람이 왜 그것만큼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 이 상황만큼은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
존은 점점 칸과 가까워졌다. 피부가 그에게 전달해주는 여러 가지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칸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존은 마지막으로 차분히 말했다.
—이제 네 몸에서 비켜줘.
평온한 말과 달리 존은 폭풍처럼 거센 동작으로 자신이 육체로 진입하는 걸 막고 있는 장애물을 걷어찼다. 한 번 유연하게 칸의 육체를 차지해본 경험을 통해 존이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다. 존은 발을 뻗고 팔을 휘저으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자연의 하늘색과 문명의 은색이 어우러진 곳에서 칸의 의식이 이질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존이 칸의 의식을 잡아당기며 함께 뒹굴었다. 흔한 땅바닥을 망자의 대기실로 바꾸어버린 높이 위에서 칸의 육체도 스팍에 의해 흔들렸다. 안팎으로 적에 휩싸인 칸의 모든 부분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페이저건의 불빛이 벌칸과 합세해 칸의 몸뚱이를 눕히려고 애쓰면서 칸은 안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더욱 신경을 쓰기가 곤란해졌다. 그 순간을 노려 영악한 도덕의 화신(化身)이 될 수 있는 지름길로 크게 도약했다.
존은 칸을 의식 밑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를 틀어막았다. 칸은 정신을 잃었다.
“그가 커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요!”
고로 낯선 여인의 외침을 들은 건 존이었다.
⁂
두 의식은 번갈아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면 한쪽 의식은 아주 깊은 휴식을 취했다. 침대 위에서 두 의식은 한동안 그러한 사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광분한 강화인간이 육체를 차지하는 걸 막기 위해서 온 힘을 쏟아 붓던 존이 쓰러지고 나서 칸은 잠깐 일어났다. 그것은 의학적으로는 유도 도중 불완전해진 코마 상태로 설명될 수 있었다. 하필 그 순간에 칸은 자신의 동족들이 우주 곳곳으로 흩어진 게 아니라 상한 곳 없이 무사히 보관되어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칸은 이에 만족하며 또 다시 쓰러져버렸다.
그 다음으로 일어난 존은 스타플릿 장교들이 나누는 대화로 칸이 가장 아끼는 인물들이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지에 관한 힌트를 얻었다. 존은 주삿바늘이 꽂아져 있는 팔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의식 안에서 양 볼을 때리며 깨어 있는 시간을 연장하고자 애썼다. 존은 간소한 형태의 패드가 모니터 대신 연결되어 있으면서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는 것까지 보고 픽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존 역시 자신이 얻어낸 정보들에 만족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언제쯤 일어나면 좋겠다며 계산을 해 놓은 뒤 정해진 시간에 의식을 일으켰다.
“어이구, 맙소사.”
존은 홀로 속삭이고 있던 입을 다물고 옆을 돌아보았다. 커크를 살피러 왔다가 생각난 김에 칸이 있는 연구실을 방문한 레너드 맥코이가 멀쩡히 상체를 세운 존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오셨네요, 박사님.”
맥코이의 턱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했다. 맥코이는 칸이 자신에게 경어를 썼다는 데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박사님과 제대로 인사할 기회가 없었음은 아쉽지만, 별로 시간이 없어서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야근을 너무 오래 했나.”
“이건 현실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너, 왜 자꾸 나한테 존댓말 하는데?”
존은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척 바깥으로 뺐다. 맥코이는 눈에 띄게 움찔하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존은 뒤늦게 자신이 스타플릿이 만난 가장 극악한 적의 얼굴을 덮어 쓰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십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존이 성큼성큼 맥코이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너 뭐하려는….”
말없이 맥코이의 어깨를 잡은 존은 그를 문 반대쪽으로 돌려 세운 뒤 힘을 주고 밀었다. 얼어붙은 맥코이는 속절없이 뒤로 밀리다가 존이 누워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게 되었다. 최후는 그래도 푹신한 곳에서 맞이하라는 거냐며 궤변을 늘어놓을 준비를 하다가 맥코이는 날쌔게 복도로 나가버리는 칸을 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실질적으로 존이 맥코이에게 한 일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맥코이는 커뮤니케이터를 사용하는 법부터 다리를 똑바로 펴는 행위마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한편 맥코이의 옆에서는 바이탈 사인이 띄워져 있어야 옳은 패드의 화면 위에 엉뚱한 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별로 묻고 싶지는 않군.
존은 겉으로는 달리면서 안으로는 대답했다.
—그 말만으로도 너는 나한테 그 질문을 물어본 셈이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물음이란 한 가지밖에 없을 테니까.
—쓸데없이 영악하군. 도덕을 자청하는 주제에.
—그래서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건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다는 거야. 아마 너라면 뻔뻔함이라고 일축할 것 같지만.
존이 키패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칸이 육체를 이어받아 순식간에 키패드의 시스템을 해체해버리고 철문을 열었다. 인공적으로 생성된 바람이 둘의 발목을 한 차례 휘감았다.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너의 목표인가?
—너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말을 듣고 안심해 버린 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나는 병원에 녹음 파일 하나를 놔두고 왔어. 스타플릿에게 강화인간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만한 내용이야. 네 피로 살아났다는 젊은 함장이나, 나와 몇 마디를 섞어본 의사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도 있지.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그 결과는 나한테 오는 게 아니야. 나중에 네가 깨어나더라도 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환경이 너를 찾아오게 될 거야.
존은 칸에게 잠깐 물러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이 극저온 캡슐을 다룰 수 있다는 것에는 이상한 게 없다 해도, 자신이 캡슐이 있는 장소를 알아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칸은 존의 정보력에 대해 호기심을 품었다. 그 때 존이 말했다.
—인간들은 이제 네 비극을 존중해 줄 거야. 그런 세상에 살면 너 역시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칸이 속으로 미간을 좁혔다. 더불어 그는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냉매가 배출될 시간을 설정하고 있음에 놀랐다.
—내가 너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건 그 다음 일이야. 네가 나의 말을 듣는 게 불편하지 않는 환경과, 그걸 인정할 생각이 드는 기회 두 가지가 모두 갖춰진 뒤에.
칸은 죽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했던 존의 말을 기억했다. 캡슐의 입구가 얇은 마찰음을 내면서 열렸다. 존은 내가 여기까지 맡았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침묵해버렸다. 변변한 제 몸도 없이 고군분투하느라 피곤하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칸은 자신이 우스웠다. 물론 칸이 처음으로 자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의식이 내려놓은 나른함을 거둬들였다는 사실과 그가 잠시 즐겼던 우스움이라는 감정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연기가 포근한 구름처럼 넘실댔다. 그 속에서 존은 먼저 잠들었고 이후에 칸도 잠들었다.
for the atmosphere
(Poison & Wine by The Civil Wars)
- 제목 'Lecture for Life'는 "생명을 위한 강의", 혹은 "생명에 대한 강의"라고 한역될 수 있습니다. 이 이중성 때문에 저는 보통 about을 안 쓰고 연성 제목에는 for를 많이 애용하지요. for가 누구를 위한다고 했을 때는 칸을 위한 강의가 될 것이며,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전치사로서 해석이 될 때는 칸에게 건네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강의로 풀이될 것입니다.
- 도덕의 화신이라는 존이 대체 무엇을 추구했던 건지...는 주저리주저리 많이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읽는 분께서 이해를 못 하셨다면 그건 네 70만자가 소용없는 제 탓입니다 끄헐헐헐
- 진행중인 이벤트에서, "칸의 내면에 강제로 심어진 새로운 인격 존이 칸의 인격과 충돌하는 이중인격 같은 것을 보고싶어요. 도덕적 충돌 같은 것이요"라고 해주셨던 익명님의 리퀘스트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해당 리퀘스트를 보내주신 분께서는 역시 애스크로 원하실 경우에 피드백을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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