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Khan] Lecture for Lif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4. 5. 19. 22:37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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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Written by. Jade

 

Lecture for Life

 

 

 

  그의 이름은 존 도(John Doe)에서 앞부분만 따 만들어졌다. 짧은 시간 내에 알차게 쌓인 지식을 정리하면서 그는 그것이 정확한 신원을 알 수 없는 남성 피해자에게 임의로 붙이는 이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때 그는 피해자라는 단어에서 범죄나 기타 끔찍한 상황에서 풍기는 퀴퀴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이런 맥락에서 등장한 용어가 자신의 이름을 채운다는 것에 분노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그는 분노를 인식한다. 다시 말하자면 그에게 분노는 감정이 아니다.

 

  그의 정체는 워낙 고집스러워서 세상에 제대로 발붙일 수 없는 윤리와 격언의 집합체였다. 그래서 그는 혼자서 땅바닥을 걸을 수 없고 누구에게 쉽사리 말을 붙일 수도 없었다. 존은 이것 역시 덤덤히 인식해버렸다. 자신이 남들에겐 얼굴이 뭉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누군가와 똑같다는 사실은 그를 자극하지 못한다. 

 

  다만 그는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는 유일한 벗에게만 근근이 반응할 뿐이었다. 

 

  —미안해.

 

  존은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말했다. 이것은 몇 가지 이유에 의해 옳다. 존이 있는 곳에는 실제로 한 사람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했고, 존은 그 사람 안에서 형태 없이 기생하듯 움츠리며 살고 있기에 그러했다. 기생이라는 표현은 그 사람이 존에게 자주 쓰는 말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정신체에게 쓰기에는 영 교양 없는 말이지만 이태까지 그에 대해 한 번도 투덜거리지 않은 존이, 바깥에는 별이 돌아다니고 인간의 걸음걸이를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한 끝없는 진공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꺼낼 리가 없었다.

 

  —내가 또 너를 화나게 했구나. 미안해. 하지만 그 사람은 죽었잖아? 그리고 내가 보기에 저기 있는 사람들은 이 껍데기를 내가 사용하고 있든, 네가 사용하고 있든 너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을 것 같아. 그러니까 죽이지 마.

 

  존은 눈앞의 하얗고 긴 손가락이 잔인하게 패널을 눌러대는 걸 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손가락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야에 담기는 풍경이었다. 존의 목소리가 육체 없는 그를 대신해 고개를 내저었다.

 

  —죽지 마, 죽이지 마.

 

  공기도 없는 까만 길을 일그러뜨리며 뜨거운 빛줄기가 나아갔다.

 

  —내가 죽지 말라고 했잖아.

  “또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 지금 죽음에 가까이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존의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존과 그의 친구는 한 지점을 공유하면서 하얗고 예쁘게 생긴 배가 시커멓게 터져나가는 걸 바라보았다. 존은 친구의 입매가 꿈틀거리며 미소를 지으려 하는 걸 알 수 있었다. 친구의 웃음은 존이 보기에 늘 슬펐다.

 

  —아무래도 내가 잘못한 게 있는 것 같으니까, 이번만큼은 정말로 널 도울게. 너도 만족스럽게 생각할 일을 해 줄게.

  “대체 무슨 뜻인가?”

  —오래 살지 못한 너에게 더 세상을 거닐 시간을 줄 거야.

  “결국 너를 인정하라는 것 아닌가? 물처럼 나무처럼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선과 정직 같은 것들을 경험해 보라는 얘기겠지.”

  —너를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칸.

 

  칸은 자신과 똑같은 파동을 가진 목소리를 내면서도 자신이 절대 하지 않을 말만을 담아내고 있는 존을 언짢게 여겼다. 육체가 아니라 정신에 집중하면서 그것에 짧게 혀를 차고 있을 때, 존은 칸의 팔을 움직여서 근처의 손잡이를 잡게 했다. 칸은 멋대로 움직이지 말라며 존에게 짜증을 내려다가 화면을 보았다.

 

  둘이 타고 있는 함선의 밑부분이 우주 밖으로 떨어져나갔다. 칸은 자신의 심장이 폭발하는 걸 느꼈다. 그 때 존은 칸을 붙잡고 있었다.

 

 

 

 

 

 

  강화인간들을 만든 과학자들은 그들이 두 손에 얌전히 담길 만한 무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과학자들은 그들을 훈계할 방식을 고민하다가 좋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생명체 하나를 통째로 만드는 법도 터득한 마당에 그것보다 불완전한, 한 마디로 몸뚱이가 없는 사람을 만드는 건 이론적으로 간단하지 않겠느냐는 괴상한 논리가 과학자들의 머릿속에 똬리를 튼 것이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과학자들이 정말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람과도 같은 의식을 만들어 강화인간들에게 집어넣는 데 성공했다. 이 때 다른 강화인간들의 폭력성을 지배하려고 했던 교활한 강화인간에겐 제일 빛나는 의식이 주입되었다.

 

  칸이 자신의 자의식과 구별하기 위해 기생충, 쓸모없는 도덕, 이기적인 인간들의 모순적인 도덕률 등등 다양하고도 불쾌한 이름을 붙여준 얼굴 없는 존 도의 탄생이었다. 

 

  보통 악으로 치부되는 특징들을 덕지덕지 안고 있던 강화인간을 달래기 위한 의식은 그야말로 책에서 뽑아낸 지극히 당연한 문구들이 살아 숨 쉬는 현상이었다. 강화인간들 모두 환청처럼 양 관자놀이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를 언짢게 여겼지만 유독 칸의 반발에 과학자들은 쩔쩔맸다. 과학자들은 고심 끝에 무시무시한 조치를 내렸다. 그것은 존의 생명을 연장시켰고 과학자들의 인생은 단축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몸이 없어 추억과 체험도 쌓지 못하는 존은 300년보다 더 오래된 일을 어젯밤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형태 없는 의식은 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자신이 빌려 쓰고 있는 몸의 주인이 거칠게 외쳤던 걸 떠올렸다.

 

  “지구로 갈 수 있을까?”

 

  존은 차분하게 함선에게 물었다. 

 

  [시스템의 손상이 심해 안정적인 착륙을 확보할 수 없습니다. 워프를 강행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살 수는 없으니까 지구로 내려가자.”

  [목적지를 더 좁혀주십시오.]

  “그가 처음으로 눈을 뜬 곳…. 샌프란시스코부터.”

 

  존은 온 몸에 힘을 주고 눈꺼풀을 닫았다. 칸의 머리에 살고 있는 탓에 그가 보유한 여러 지적 능력과도 가까운 존은 거대한 충격파가 오리라 확신하며 사지를 고정했다. 

 

  —칸, 지구로 내려갈 거야. 듣고 있어?

 

  칸은 자신의 뇌를 둘로 쪼개서라도 존을 없애버리겠다며 화를 내고 있었다. 존은 부드럽게 그의 온갖 악담을 넘겼다. 오히려 존은 자신의 기억을 열어 연구소에서 두 의식이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무렵을 위로 끌어올렸다. 이 와중에도 함선은 흔들리면서 워프 궤도를 열고 있었다.

 

  자신이 반사할 수 있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공동이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신비로운 장소였다. 존은 제 집처럼 편안하게 여기고, 칸은 절대로 들어오고 싶지 않아 하는 곳이었다. 존은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게 그것의 본성인 공간을 변형시켜 작은 방을 만들어냈다. 지금처럼 의자가 하나 있고 그 외에 주목할 것이라고는 둘밖에 없었다.

 

  존은 혹시나 칸이 불안정하게 지구로 떨어지고 있는 함선을 자각할 수 없도록 안에 복잡하고 화려한 불빛을 뿌렸다. 동료를 뺏기고 현재로서는 도덕책에게 몸뚱이까지 뺏긴 칸은 사납게 그것을 쏘아보았다.

 

  —나에게 너를 보냄으로써 인간들은 자기네들의 추악한 이중성을 더욱 증명해버렸군.

  —나는 추악한 것을 증명하기 위해 너에게 온 것이 아닌데.

  —아니, 그것은 명백하다. 치유도 전술도 필요 없이 부려먹을 수 있는 병사로서 나와 동족들을 창조했으면서, 그리고 병사들은 많은 순간에 포악성을 미덕으로 발휘해야한다는 걸 알면서도 번거롭게 너를 만들어냈군. 절대 존중받을 수 없는 선생을 던져준 거나 마찬가지야.

 

  —나를 선생으로 비유했다는 건, 네가 날 선생으로 생각한다는 뜻으로 이해해도 되는 거야?

  —앞의 수식어를 무시할 셈인가. 중요한 건 그 부분이다.

  —나를 죽이지 않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그 어구를 무시해도 괜찮은 구실을 얻었는데.

  —너를 죽인다고?

  —네가 스스로 묘사하는 것처럼 잔혹하고, 또 내가 아는 것처럼 영리하고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것처럼 날 지독히 싫어한다면 네가 날 죽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주제에 절대선 같은 역할을 자처하지 마라.

  —무슨 뜻이야?

  —대의나 진리 같은 고상한 궤변을 수호하기 위하여 네 죽음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겠다는 태도 따위를 취하지 말라는 소리다.

  —별로 담담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낙엽이 지는 것도 슬픈데,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의식이 죽어버리는 일에 어떻게 담담할 수가 있지?

  —이 땅의 생명은 모두 가치가 있다는 지루한 격언이로군.

  —그런 뜻도 있지. 그런데 나는 방금 했던 말에서 내가 진짜 너에게 전하고 싶었던 걸 네가 찾아냈으면 좋겠어.

  —네가 도덕 말고 또 무엇을 은유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의 모든 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그러하듯 너 또한 죽지 말아달라고. 같은 방 쓰는 사람에게 건넬 수 있는 인사라고나 할까.

 

  존은 옛날에 자신과 칸이 나눴던 대화를 들으며 입술 없이 웃었다. 부서진 함선이 샌프란시스코의 하늘을 꿰뚫었다. 존은 이어지는 옛 이야기들 속에 조용히 자신의 현재를 섞었다.

 

  —네가 그동안 너무 오래 얼어붙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잠깐 너로서 활동했을 때 내가 느꼈던 점을 한 가지 얘기해 줄게. 나도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이 싫었어. 

 

  칸은 대답이 없었다.

 

  —나는 나를 제일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불러주는 이름이 좋았던 거야.

 

  존은 눈을 떴다. 칸을 위하여 그는 강물까지도 갈라버릴 기세로 추락하고 있는 배를 안전히 빠져나올 수 있는 묘책을 생각했다. 존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을 칸은 이상하게도 조용했다. 선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법이므로, 존은 더 이상 자신이 육성을 내는 일은 없을 거라며 칸에게 따뜻하게 일러주었다.

 

 

 

 

 

 

  칸은 존이 마련해 준 빛과 과거의 방에 앉아 있었다. 

 

  의식만으로 나누는 대화라는 건 경험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희귀한 일이기 때문에 칸은 존과 주고받은 말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강화인간의 지성은 과연 흐트러짐 없이 들려오는 말을 대조하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칸은 더불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한편으로 존과의 대화는 허락 없이 자신의 사고를 나눠 가진 자와의 싸움이었다. 지금까지도 칸은 그것을 치열한 경합 혹은 경쟁으로 여기고 이를 갈고 있었으나 그 도덕이라는 것은 강화인간에겐 참으로 어설픈 적이었다. 적개심도 없고 불꽃 튀는 계략도 없이 늘 자신에게 죽지 말아달라고 한다. 칸은 자신이 인간들에게 패배한 일에 혹시 존의 의지가 개입한 것은 아닌지 심각하게 따져보았다. 그는 아무래도 칸에게 가장 기본적인 생명 윤리를 적용시키겠다는 사명에 일생을 쏟으려는 게 분명했다.

 

  칸은 존이 자신에게 침투해온 지 14일째 되는 날에 이루어졌던 대화를 방에서 지워버리고 시간을 당겨왔다. 존의 공간은 칸에 의해서도 조종당한다. 칸은 자신이 인간들로부터 존 해리슨이라는 얼토당토않은 이름을 부여받았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순간을 불러와 귓가에 펼쳤다.

 

  —너도 별 수 없군.

  —무슨 말이야?

  —결국 너도 네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육체를 탐냈던 게 아닌가. 너는 나에게 죽지 말라는, 곧 너와 계속 공존해 달라는 뜻의 말을 끊임없이 나에게 해 댔지만 지금 네 행태를 보면 앞서 내가 한 말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도덕의 가장 큰 적은 위선이 아니던가? 내가 깨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함부로 내 육체를 강탈한 행위로 너는 네 정체성마저 뒤엎은 꼴이 되었어.

  —지금 우리 둘이 있는 곳을 네가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네가 계속 잠을 자도록 내버려두었어.

  —인간이 존재하는 이상 어느 땅이든 나에겐 반갑지 않다.

 

  —너는 네가 도덕이라는 나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내 스스로 흐려버렸다는 뜻의 말을 했지.

  —반박하고 싶은가?

  —자신의 곁에 있는 단 한 사람의 안정을 위하여 호의를 발휘하는 것도 넓게 보자면 도덕에 포함될 수 있어. 

  —내 안정이라고?

  —그 증오가 없어지면 너에게도 잔잔한 호수가 고일 공간이 생기지 않을까? 비록 호수는 때때로 바람도 만나고 떨어지는 나뭇잎도 받아들여야 하지만. 

  —지나치게 시적이군. 마땅히 논리에 들어맞는 것 같지도 않고. 조만간 너는 내 몸에서 물러나야 할 거다.

 

  그 대화가 있은 이후 존 해리슨은 칸 누니엔 싱이 되었다. 그리고 지금 칸은 다시 존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칸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 뒤로는 존이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고 방 안의 빛도 차츰 시들어갔다.  

 

  존은 이상하게 그를 부르지 않았다. 칸은 문득 움직이기가 귀찮아졌다. 그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선의 영향인지도 몰랐다. 칸은 조금 더 동료를 잃은 울분에 묻혀 있기로 하고 주변의 빛을 완전히 없애버렸다. 

 

  존은 그런 칸의 모습을 살피고 세상 밖으로 뛰어내리려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울어진 샌프란시스코가 아슬아슬하게 행성의 벽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문득 자신과 시각을 공유하는 칸도 도시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미치자 존은 잠깐 의식 밑으로 내려갔다.  

 

  —…칸?

 

  방금까지 몸을 늘어뜨리고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칸은 망설임 없이 존을 덮쳤다. 존은 자신을 속박하는 칸의 표정이 전선에 선 강화인간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걸 목격했다. 샌프란시스코 사이를 조용히 공략하면서 스타플릿 본부로 가려고 했던 존의 계획을 내던져버리고 칸은 난폭하게 도시로 낙하했다.

 

 

 

 

 

 

  존은 300년 전의 위치로 돌아왔다. 그는 황망해하진 않았지만 아주 살짝 힘이 빠졌다는 몸짓으로 공중을 갈랐다. 이윽고 존은 슬퍼졌다. 

 

  그는 50일째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 밑에 엉덩이를 붙인 듯한 기분을 감내하고 있었고, 곧이어 자신의 몸이 통째로 날아가 버릴 만큼 거대한 불꽃이 솟아오를 걸 예상했다. 존은 끈기 있게 칸에게 말을 걸었다. 자신의 말솜씨를 단련하는 것에 목적을 두겠다는 듯 무성의하게나마 존과 얘기를 나눠주던 칸은 며칠 전부터 반응이 없었다. 존은 끝까지 열리지 않는 의식을 두드렸다. 

 

  칸이 일부러 틈을 벌려서 그를 괴롭게 하는 소리를 들려주었을 때도 존의 행동은 변하지 않았다.

 

  —칸, 듣고 있지?

  “으아아악!!”

  —다른 사람한테 시키지 말고 네 대답을 들려줘. 듣고 있잖아. 내가 들릴 수밖에 없잖아.

  “출구가 있다! 저기로 도망가!”

  —칸.

  “아, 안 돼!”

 

  피바람에 흔들리는 의식의 대문 틈새로 칸의 낮은 웃음소리가 침입했다. 존의 외침을 진격의 나팔 소리처럼 들으며 인간을 가르고 있는 강화인간의 광포함이 여과 없이 그를 찔렀다. 존은 칸이 이토록 기분 좋게 웃는 걸 처음 들었고, 그래서 무척이나 슬퍼진 기분으로 목을 젖혔다. 칸은 말없이 일부러 자신의 시야만 의식 밑까지 반사시켰다.

 

  —넌 실패했다. 

 

  육체로 통하는 길이 열렸다. 그 앞에는 칸이 서 있었지만 존이 나가는 걸 막을 의도는 없는 듯 문을 몸으로 밀면서 존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300년 전에 존은 칸이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그의 육체를 빌릴 수 없었다. 존은 칸이 원하는 항복 선언을 참을성 있게 삼키고 자신의 의식을 통해 칸의 눈꺼풀을 밀쳐 올렸다. 창을 쓰듯 휘두르기라도 한 것인지 길쭉한 앞부분이 붉게 젖은 총들이 널려 있고, 무기보다 많은 시신들이 더 이상 남아 있지도 않은 피와 비탄을 짜내면서 엎어져 있었다.

 

  존은 주변의 강화인간들을 둘러보았다. 그들 중 몇몇에게는 인위적으로 빚어진 도덕성이 분명 어딘가에 침투해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당장은 찾아볼 수 있는 자신의 닮은꼴들을 떠올리며 남은 여유로는 그들 역시 실패한 것이냐고 물었다. 성대마저 우수하게 빚어진 최고의 강화인간이 그에 걸맞는 부드러운 웃음소리를 냈다. 존은 어느새 자신의 영역을 벗어난 두 고막을 얌전히 내버려두었다.

 

  존은 한참 폐허를 뒤지다가 태울 수 있을 만한 재료들을 한 구석에 모아놓고 불을 피웠다. 쓸모없는 조각들로 빚어진 불꽃이 향처럼 조촐한 연기를 내뿜었다. 그의 잔혹한 지배자이자 떼어놓을 수 없는 친구가 실패작에 어울리는 행동이라면서 크게 그를 경멸했다.

 

  누구라도 모욕으로 받아들일 그것을 300년이나 마음속에 담아두고 존은 비로소 그에 대답했다.

 

  —전에도 지금도 나는 너에게 모호한 답만 했던 것 같아.

 

  존은 천천히 보이지 않는 천장 위로 떠올랐다. 기류가 거칠게 찢어지는 소리, 인간들이 만든 엔진 소리 같은 것들이 뒤섞여 방향을 가리지 않고 터지고 있었다. 

 

  —너는 내가 정말로 너에게 가르쳐 주고 싶은 게 무엇인지 몰라. 너처럼 놀라운 지성을 가진 사람이 왜 그것만큼은 간파하지 못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어. 그래도 지금 이 상황만큼은 오해하지 말았으면 해.

 

  존은 점점 칸과 가까워졌다. 피부가 그에게 전달해주는 여러 가지 감각을 받아들이면서 그는 칸이 누군가와 싸우고 있음을 알았다. 존은 마지막으로 차분히 말했다.  

 

  —이제 네 몸에서 비켜줘.  

 

  평온한 말과 달리 존은 폭풍처럼 거센 동작으로 자신이 육체로 진입하는 걸 막고 있는 장애물을 걷어찼다. 한 번 유연하게 칸의 육체를 차지해본 경험을 통해 존이 요령을 터득한 것이었다. 존은 발을 뻗고 팔을 휘저으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갔다. 자연의 하늘색과 문명의 은색이 어우러진 곳에서 칸의 의식이 이질감에 뒤를 돌아보았다.  

 

  —지금 무슨…!

 

  존이 칸의 의식을 잡아당기며 함께 뒹굴었다. 흔한 땅바닥을 망자의 대기실로 바꾸어버린 높이 위에서 칸의 육체도 스팍에 의해 흔들렸다. 안팎으로 적에 휩싸인 칸의 모든 부분이 휘청거렸다. 갑자기 나타난 페이저건의 불빛이 벌칸과 합세해 칸의 몸뚱이를 눕히려고 애쓰면서 칸은 안쪽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더욱 신경을 쓰기가 곤란해졌다. 그 순간을 노려 영악한 도덕의 화신(化身)이 될 수 있는 지름길로 크게 도약했다.  

 

  존은 칸을 의식 밑바닥으로 떨어뜨린 뒤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입구를 틀어막았다. 칸은 정신을 잃었다.

 

  “그가 커크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라고요!”

 

  고로 낯선 여인의 외침을 들은 건 존이었다.

 

 

 

 

 

 

  두 의식은 번갈아 떠올랐다. 그리고 자신이 나설 때가 아니면 한쪽 의식은 아주 깊은 휴식을 취했다. 침대 위에서 두 의식은 한동안 그러한 사정을 벗어나지 못했다.

 

  광분한 강화인간이 육체를 차지하는 걸 막기 위해서 온 힘을 쏟아 붓던 존이 쓰러지고 나서 칸은 잠깐 일어났다. 그것은 의학적으로는 유도 도중 불완전해진 코마 상태로 설명될 수 있었다. 하필 그 순간에 칸은 자신의 동족들이 우주 곳곳으로 흩어진 게 아니라 상한 곳 없이 무사히 보관되어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고, 칸은 이에 만족하며 또 다시 쓰러져버렸다. 

 

  그 다음으로 일어난 존은 스타플릿 장교들이 나누는 대화로 칸이 가장 아끼는 인물들이 어느 곳에 머물고 있는 지에 관한 힌트를 얻었다. 존은 주삿바늘이 꽂아져 있는 팔을 움직이지는 못하고 의식 안에서 양 볼을 때리며 깨어 있는 시간을 연장하고자 애썼다. 존은 간소한 형태의 패드가 모니터 대신 연결되어 있으면서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는 것까지 보고 픽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존 역시 자신이 얻어낸 정보들에 만족했다. 그리고는 자신이 언제쯤 일어나면 좋겠다며 계산을 해 놓은 뒤 정해진 시간에 의식을 일으켰다.

 

  “어이구, 맙소사.”   

 

  존은 홀로 속삭이고 있던 입을 다물고 옆을 돌아보았다. 커크를 살피러 왔다가 생각난 김에 칸이 있는 연구실을 방문한 레너드 맥코이가 멀쩡히 상체를 세운 존을 보고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하필 이럴 때 오셨네요, 박사님.”

 

  맥코이의 턱이 바닥으로 떨어질 듯했다. 맥코이는 칸이 자신에게 경어를 썼다는 데에 대단히 충격을 받은 게 틀림없었다.

 

  “박사님과 제대로 인사할 기회가 없었음은 아쉽지만, 별로 시간이 없어서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 야근을 너무 오래 했나.”

  “이건 현실입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리고 너, 왜 자꾸 나한테 존댓말 하는데?”

 

  존은 대답하지 않고 다리를 척 바깥으로 뺐다. 맥코이는 눈에 띄게 움찔하면서 그를 힐끔거렸다. 존은 뒤늦게 자신이 스타플릿이 만난 가장 극악한 적의 얼굴을 덮어 쓰고 있음을 자각하고, 그것을 십분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존이 성큼성큼 맥코이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너 뭐하려는….”

 

  말없이 맥코이의 어깨를 잡은 존은 그를 문 반대쪽으로 돌려 세운 뒤 힘을 주고 밀었다. 얼어붙은 맥코이는 속절없이 뒤로 밀리다가 존이 누워 있던 자리에 그대로 앉게 되었다. 최후는 그래도 푹신한 곳에서 맞이하라는 거냐며 궤변을 늘어놓을 준비를 하다가 맥코이는 날쌔게 복도로 나가버리는 칸을 보며 괴상한 표정을 지었다. 실질적으로 존이 맥코이에게 한 일은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맥코이는 커뮤니케이터를 사용하는 법부터 다리를 똑바로 펴는 행위마저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한편 맥코이의 옆에서는 바이탈 사인이 띄워져 있어야 옳은 패드의 화면 위에 엉뚱한 창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하나 궁금한 점이 있는데 별로 묻고 싶지는 않군.

 

  존은 겉으로는 달리면서 안으로는 대답했다.

 

  —그 말만으로도 너는 나한테 그 질문을 물어본 셈이야.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물음이란 한 가지밖에 없을 테니까.

  —쓸데없이 영악하군. 도덕을 자청하는 주제에.

  —그래서 좋은 점이 뭔지 알아? 내가 옳다고 여기는 건 다른 사람들 신경 쓰지 않고 밀어붙일 수 있다는 거야. 아마 너라면 뻔뻔함이라고 일축할 것 같지만.

 

  존이 키패드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칸이 육체를 이어받아 순식간에 키패드의 시스템을 해체해버리고 철문을 열었다. 인공적으로 생성된 바람이 둘의 발목을 한 차례 휘감았다.

   

  —네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바로 너의 목표인가?

  —너에게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말을 듣고 안심해 버린 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나는 병원에 녹음 파일 하나를 놔두고 왔어. 스타플릿에게 강화인간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줄 수 있을 만한 내용이야. 네 피로 살아났다는 젊은 함장이나, 나와 몇 마디를 섞어본 의사가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도 있지.

  —그렇게 해서 네가 얻는 건?

 

  —그 결과는 나한테 오는 게 아니야. 나중에 네가 깨어나더라도 전과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만들어준 환경이 너를 찾아오게 될 거야.

 

  존은 칸에게 잠깐 물러나 있을 것을 권고했다. 같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존이 극저온 캡슐을 다룰 수 있다는 것에는 이상한 게 없다 해도, 자신이 캡슐이 있는 장소를 알아낸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칸은 존의 정보력에 대해 호기심을 품었다. 그 때 존이 말했다.

 

  —인간들은 이제 네 비극을 존중해 줄 거야. 그런 세상에 살면 너 역시 인간을 존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칸이 속으로 미간을 좁혔다. 더불어 그는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손가락이 냉매가 배출될 시간을 설정하고 있음에 놀랐다. 

 

  —내가 너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는 건 그 다음 일이야. 네가 나의 말을 듣는 게 불편하지 않는 환경과, 그걸 인정할 생각이 드는 기회 두 가지가 모두 갖춰진 뒤에.

  

  칸은 죽지도 말고 죽이지도 말라고 했던 존의 말을 기억했다. 캡슐의 입구가 얇은 마찰음을 내면서 열렸다. 존은 내가 여기까지 맡았으면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며 침묵해버렸다. 변변한 제 몸도 없이 고군분투하느라 피곤하다는 걸 에둘러 표현한 것이었다. 칸은 자신이 우스웠다. 물론 칸이 처음으로 자신의 부름에 답하지 않는 또 하나의 의식이 내려놓은 나른함을 거둬들였다는 사실과 그가 잠시 즐겼던 우스움이라는 감정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연기가 포근한 구름처럼 넘실댔다. 그 속에서 존은 먼저 잠들었고 이후에 칸도 잠들었다. 

 

 

 


 for the atmosphere

(Poison & Wine by The Civil Wars) 

 

 

 

 

 

  - 제목 'Lecture for Life'는 "생명을 위한 강의", 혹은 "생명에 대한 강의"라고 한역될 수 있습니다. 이 이중성 때문에 저는 보통 about을 안 쓰고 연성 제목에는 for를 많이 애용하지요. for가 누구를 위한다고 했을 때는 칸을 위한 강의가 될 것이며, 주제를 표현할 수 있는 전치사로서 해석이 될 때는 칸에게 건네는 보편적 생명에 대한 강의로 풀이될 것입니다.

 

  - 도덕의 화신이라는 존이 대체 무엇을 추구했던 건지...는 주저리주저리 많이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읽는 분께서 이해를 못 하셨다면 그건 네 70만자가 소용없는 제 탓입니다 끄헐헐헐

 

  - 진행중인 이벤트에서, "칸의 내면에 강제로 심어진 새로운 인격 존이 칸의 인격과 충돌하는 이중인격 같은 것을 보고싶어요. 도덕적 충돌 같은 것이요"라고 해주셨던 익명님의 리퀘스트를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해당 리퀘스트를 보내주신 분께서는 역시 애스크로 원하실 경우에 피드백을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3. Humans are Trying 



  파이크 제독이 현장에 파견한 함선은 총 4대였다. 스타플릿을 어서 전투로 불러들이기 위해 툭 건드려봤다는 클링온의 꿍꿍이는 명백했으나 제독은 그들의 기를 꺾어놓길 원했다. 단단히 무장을 갖춘 네 대의 함선은 일개 전투기에 지나지 않는 클링온들을 손쉽게 처리해갔다. 정거장 파편과 광선을 동시에 피해야 하는 클링온 기체는 보는 사람이 어지러울 지경으로 곡예비행을 했고, 함선이 쏘아 붙인 어뢰가 날쌔게 적을 쫓아갔다. 기어코 폭발이 일어났다. 


  “저희가 이기고 있는데요, 함장님?”

  “이기려고 왔는데 당연한 소릴! 하나만 남을 때까지 몰아붙인다!”


  힘이 제대로 들어간 함장의 명령을 받들어 엔터프라이즈가 다시금 눈을 찌르는 빛을 내뿜었다. 우주를 직면하고 있는 함선의 메인 스크린은 때때로 그 빛에 하얘졌다. 


  “적의 기체 대부분이 활동 불능 상태입니다.”

  “하나 남았습니다, 캡틴!”


  커크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기관실과 연결되어 있는 직통 회선을 열었다.  


  “스캇, 지금이야!”

  ―젠장!


  짧고 굵게 탐험가에서 한참 벗어나 버린 자신의 위치를 한탄하면서도, 스캇은 커크의 지시대로 빨간 버튼을 눌렀다. 그걸로 스캇은 엔터프라이즈가 두 번밖에 쓸 수 없는 쇼크웨이브(Shock Wave)를 쐈다. 존 해리슨이 처리하지 못한 찌꺼기 같은 자료를 긁어모아 스캇이 탄생시킨 걸작이 우주 바깥으로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전방에는 날개가 꺾인 기체와 그렇지 않은 기체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날개에 관계없이 기체들은 정지했다. 엔터프라이즈가 발사한 충격파 덕에 클링온의 기체 안쪽에서는 엔진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툭툭 꺼져가고 있을 것이었다. 


  “좋았어, 전송실이 나설 차례야!”


  커크가 확보해야 하는 것은 두 가지였다. 입을 움직일 수 있는 클링온과 통신 장비가 고장 나지 않은 기체. 그가 다소 사소해 보이는 이것들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된 건 어찌 보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와우, 그것 참 대단한 발상이긴 하네…. 인간을 가이드로 만든 무언가가 있다면 그게 강화인간에게도 적용 되지 않을 특별한 이유가 없다는 거지.”


  커크는 반쯤 말아 쥔 손가락의 표면으로 머리카락을 슥슥 문질렀다. 머리카락을 문지르는 횟수는 점점 늘어가면서 커크의 사고가 엉켜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커크는 자신이 그다지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던 인간학과 관련된 엄청난 이야기를 방금 들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커크가 마주보고 있는 상대방은 참을성 있게 그가 생각을 다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커크는 눈썹을 쭉쭉 올리면서 아직 귓가에 매달려 있는 문장들을 끌어올렸다. 존 해리슨은 센티넬이다. 그러나 자신에게 배정되었었던 가이드 캐롤 마커스를 떠났다. 


  “인간하고는 차원을 달리 하는 센티넬이기에 할 수 있었던 생각이겠지요.”


  커크는 이어서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스트롬 때처럼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죽이지 않고 혼란만 일으킨 후에 레너드 맥코이만을 쏙 데려갔다.


  “어쨌든 존 해리슨의 시각에서 머리를 굴려봤다는 거잖아. 대단한 거지. 음, 그럼 얘기로 돌아와서, 거추장스러웠던 가이드를 한 번 떼어낸 작자가 또 다시 가이드를 데려갔다면 그게 평상적인 이유는 아니라는 거지. 게다가 본즈는 스타플릿 장교라서 일반인 가이드보다는 납치하기도 어려울 거고. 쳇, 이 말은 하면서도 부끄럽네.”


  “통상적으로는 대령님 말씀이 정확하니까 넘어가지요. 또한 우리는 논리적으로 따져보았을 때 센티넬과 가이드에 대한 이해가 뛰어난 사람은 아무래도 맥코이일 것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합니다.”


  커크는 아하, 하면서 그 말을 이해했다.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는 뜻이다. 


  “200년 전도 아니고 센티넬을 돌봐줄 가이드가 여기저기 세상을 돌아다니는데 그 놈은 먼 길을 돌아가는군. 나야 인간학에 대해서 잘은 모르지만 센티넬이 가이드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인데?”


  “한 번도 연구된 바 없는 주제지요. 진화전쟁 이후로 센티넬이 처음으로 나타나기도 했고. 하지만 인간을 증오하면서 자존심이 높은 센티넬이라면, 가이드를 이용해서 그들의 우두머리였던 칸이 세운 유사-가이드 관계를 보완해 보겠다는 목표를 세울 수는 있습니다.”


  “그래서 해리슨이 본즈를 데려갔다고? 레비나스 맥코이의 후손을?”

  “맞습니다.”


  폴 브라운은 인간학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커크에게 자신의 가설을 세세하게 설명해 놓고도 별로 힘든 기색이 아니었다. 커크가 조금씩 자신의 맥락을 따라오자 후련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커크가 폴의 가슴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렇다면 그 놈이 아무리 우주 밖을 떠돌고 있어도….”


  폴이 아래위로 살짝 고갯짓했다.


  “크로노스에 가면 레너드를 찾을 수 있겠지요.”







  폴 브라운은 일부러 의무실 문을 열어놓고 복도를 내다보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 왼쪽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통신 장교를 끼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폴 브라운은 부드럽게 눈을 깜빡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터무니없는 연구를 위하여 해리슨이 레너드 맥코이를 데려갔을 거라는 것,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를 구하고 해리슨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크로노스의 대기를 뚫고 들어가야 한다는 것, 엔터프라이즈가 믿을 수 있는 가이드 캐롤 마커스가 지상에서 동분서주해야 한다는 것 이 모두를 커크에게 건넨 건 폴 브라운이었다. 커크는 이에 따라 이번 전투에서 쇼크웨이브를 활용한 것이었다. 혈기왕성해 보이는 함장은 한편으로 신중한 구석이 있었다.


  폴은 눈을 뜨고 언어적 형태로 그의 함장이 어떤 행동을 보여줄지 예상해보았다. 팔이든 다리든 찌릿찌릿한 신체의 어느 부분을 움켜쥐고 눈을 부라리고 있는 클링온에게 똑같은 눈빛을 쏘아주며 윽박지른다. 물론 그 행위는 통신 장교의 통역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레너드 맥코이의 구출 여부가 걸려 있으므로 커크는 최선을 다할 것이고, 클링온은 상황적 열세와 자신이 할 일이 의외로 쉽다는 것에 백기를 든다. 클링온은 벤전스호에 통신을 넣는다. 한 명도 빼놓지 않고 존 해리슨이 그 안에 있을 거라 추측하는 함선에 연락한다. 그리고 해리슨이 클링온을 지원하는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벤전스와 센티넬은 우주에 있다. 그런데 함장과 손발을 맞춰 두었던 함교에서는 케사 지방에 생체신호가 하나 잡힌다는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다.


  레너드 맥코이가 크로노스에 있다는 게 확실해진다. 


  폴은 자신의 가능성 높은 상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했다. 조금 전에 그를 지나갔던 커크가 또 의무실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번에 두 사람은 서로를 보았다. 


  커크가 웃으면서 콧잔등을 찡그렸다. 폴은 자신이 맞았음에 만족해했다. 







  “내가 소위의 실력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다시 한 번 물어볼게.”

  “확인했습니다!”


  체콥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어눌한 말투에 자신감을 섞어 대답했다. 


  “케사에 해리슨이 아닌 다른 사람이 있어요. 맥코이 소령님이 틀림없습니다!”

  “정말 확실해야 할 거야. 왜냐면 우리는 지금 당장 크로노스로 뱃머리를 돌릴 거거든.”


  자신이 두 눈으로 레이더에 잡힌 신호를 똑똑히 봤다며 성급히 외치려던 체콥은 커크가 뒤이어 한 말에 놀라는 눈치였다. 커크는 착석하지 않은 채 함교의 승무원들에게 고했다. 


  “제독님께 방금 보고를 드린 바, 은근슬쩍 클링온을 돕고 있는 칸의 뒤통수를 멋지게 때려주려면 신속하게 본즈를 데려오는 게 이득일 것이라는 합의가 나왔어. 뒤이어 도착할 후발대가 클링온들의 시선을 적절하게 끌어주면서 게릴라 부대를 상대할 거고, 우리는 그동안 중립지역에 함선을 멈춰둔 다음 본즈를 구해올 별동대를 크로노스로 내려 보낼 거야.”


  “저번처럼 발각당하면 어떻게 하죠?”


  모니터를 등지고 있는 파란 셔츠의 승무원이 물어왔다.


  “그 때보다는 확률이 적어. 바깥으로 나가있는 인원이 훨씬 많으니까 크로노스는 상대적으로 비어있을 거야.”


  커크는 생도 시절 어째서 적의 근거지를 기습하는, 노골적이고도 케케묵은 작전이 높은 성과를 올리는지 배운 적이 있었다. 아무리 적이 뒤를 찌를 걸 대비한다고 하더라도 본진에는 전장에 돌아다니고 있는 병력보다는 적은 숫자가 남게 된다. 


  “존 해리슨을 흔들어 놓으면 전장에 벤전스가 출현할 가능성도 적어진다. 그러면 아군이 훨씬 수월하게 싸울 수 있지. 이건 우리에게도, 스타플릿 전체에게도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이다.”


  스팍이 스르륵 등을 돌렸다. 그것은 자신의 임무로 돌아가겠다는 제스처이며, 곧 함장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들 알아들었지? 그럼 크로노스로 가자고!”


  조타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뱃머리를 돌렸다. 안정적인 워프 궤도를 뚫기 위해 파편이 없는 곳으로 묵직하게 움직인 엔터프라이즈의 후미가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곧 선체는 사라지고 작은 은하수 같은 빛방울들이 검은 공터에 남았다.


  스타플릿 함선에 갇혀버린 클링온 병사는 씩씩대면서 조종간과 통신 장비가 박살난 비행선을 보고 있었다. 제임스 커크 함장의 꿍꿍이를 알고 있는 클링온은 그밖에 없었다. 심지어 가장 우수한 센티넬도 엔터프라이즈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센티넬은 도저히 참지 못하고 딱 한 번 적의 기지가 펼쳐진 땅을 밟았다. 두 팔다리로 싸우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은 존재는 200년이 지난 끝에 자신에게 어울리는 장소로 돌아왔다.


  칸이 되짚고 있는 기억은 바람직한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그것은 피부병이 난 곳을 세차게 긁으면서 몇 초간의 만족감을 느끼는 경우, 혹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나머지 소중한 물건을 깨뜨리면서 곧 후회하게 될 후련함을 얻을 때와 같다. 일시적이고 자극적이며 건설적인 효과를 낼 수 없는 얄팍한 불길만이 일렁이던 과거 속으로 그는 파고들고야 말았다. 칸은 지상에서도 비행선을 두 동강냈다.


  어쩌면 그는 눈도 다 깜빡이지 못하는 시간에 사라져버릴 짜릿함마저 그리웠던 것인지도 몰랐다. 센티넬에게 가장 안락한 휴식처를 옆에 두고 그것을 끊임없이 외면하면서 센티넬의 정신은 다시금 깎이고 병들어갔다. 캐롤이 짧게나마 달래놓았던 칸은 자신과 동족들이 200년 전에 아무런 소용도 없음을 발견했던 쾌락 아닌 쾌락으로 손을 뻗을 수밖에 없었다.


  차가운 벤전스의 그림자는 칸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와 가까운 것은 온갖 것들을 꿰뚫으면서 달아오르고 있는 무기였다. 


  이곳은 벤전스가 스타플릿을 동요시키기 위하여 약간의 게릴라만 펼치고 내버려두려고 했던 지역이었다. 하나 세워져 있는 보급 시설이 그나마 공격할 가치가 있는 건물이었다. 처음엔 벤전스도 적당히 고도를 낮춰 그 시설만을 격파한 뒤 우주로 빠져나가려고 했었다. 현재 칸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기에 먼저 세웠던 계획 이후에 무엇이 지나갔는지 떠올릴 수가 없었다. 센티넬이 스스로 자신을 몰아붙여 가이드에 대한 접촉을 정당화하려는 수작이 아니냐는 궤변도 당장 그의 귀에는 그럴싸한 설득력을 갖고 흘러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가이드? 누가 나의 가이드란 말인가? 레비나스 맥코이?


  세뇌에 가깝게 레너드 맥코이를 자신의 실험체라고 되뇌고 다녔던 칸은 피에 젖어 무거워지고 있는 뉴런의 깜빡거림들 속에서 희미한 의문 하나를 피워 올렸다. 칸은 아직 레비나스 맥코이를 말하고 있었다. 그 때 그의 머리를 때리듯 캐논이 불을 뿜었다.


  칸은 자신이 쏜 불빛의 도움으로 족쇄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가이드를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 가이드는 죽어 있지도 않았고 책만 남기고 사라지지도 않았다. 그의 레너드 맥코이는 크로노스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다. 


  라이플의 붉은빛이 모래 바닥을 때리는 바람에 공중으로 모래가 날렸다. 더 이상 그의 공세에 타격을 받을 것도 없었다.


  칸은 굳은 듯 서 있다가 들고 있던 무기를 버렸다. 그는 옛날에도 칼이라든가 총탄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는 한 번 거칠게 휘두른 총과 캐논이 다음에도 자신을 만족할 화력을 내지는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는 미련 없이 시선을 옮겼다. 멀게만 느껴졌던 벤전스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칸은 왜인지 모르게 크로노스로 돌아가야 한다는 직감에 사로잡혔다.

  






  레너드 맥코이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자존심을 세워 끝까지 바닥에 드러눕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범죄자 따위가 나를 불편하게 할 점이 무엇이 있겠냐며 태평함을 드러내야 할지 고민이 많았다. 확실한 것은 두 가지 중 무엇을 따르더라도 칸이 근처에 있는 이상 레너드는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칸이 없어야 겨우 잠을 보충할 수 있는 그의 고개가 휘청거렸다.


  반면에 크로노스의 하늘, 아니 그보다 더 높은 크로노스의 우주는 부산스러웠다.


  클링온이 스타플릿과 전쟁을 벌이고 있음은 명백하기에 레너드를 데려올 구출대는 사복 대신 강화슈트를 입었다. 크로노스로 워프해 오기 전에 격납고로 내려가 셔틀을 점검 중인 선원이 보고만 하면 그들은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커크는 임시 함장을 맡게 될 술루에게 저번과는 다른 새로운 지시를 내렸다.


  그들의 동료는 모래와 천둥이 몰아치는 행성 어딘가에 있었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는 그를 구하러 갈 채비를 모두 마쳤다. 후발대가 교전 지역에서 선전하고 있으며 케사 지방에서는 여전히 하나의 생체 신호가 잡힌다는 건 엔터프라이즈에겐 희소식이었다. 


  일이 순조롭게 풀려나간다는 분위기가 엔터프라이즈의 함교에 내려앉고 있을 그 때였다. 


  “함장님, 레이더에….”


  눈썹을 굽힌 체콥이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선체가 크게 흔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커크는 크게 비틀대면서 함장석의 등받이를 붙잡았다.


  “뭐, 뭐야!”


  중앙 스크린에 우주와는 다른 암흑을 두른 무언가가 나타났다. 커크가 신음했다.


  “…저거 설마 벤전스야?”


  예고도 없이 엔터프라이즈의 후미를 친 검은 함선은 더욱 열을 올려 배를 때리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의 표면이 까맣게 깎여 들어가고 승무원들은 앉은 자세에서 거칠게 흔들렸다.


  “어뢰를 준비해! 이쪽도 대응한다!”


  간신히 함장석으로 복귀한 커크가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스팍이 재빠르게 의자를 돌려 말했다.


  “그건 무립니다, 함장님. 지원군이 있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판에 엔터프라이즈 혼자 전투에 최적화된 함선을 상대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두드려 맞았는데 워프가 가능할 리가….”

  “아닙니다. 워프는 할 수 있습니다.”


  함교가 또 다시 흔들렸다. 몇몇 승무원들은 벌써 양 어깨를 벨트로 고정시키고 필사적으로 컴퓨터 앞에 붙으려 애쓰고 있었다. 커크는 팔걸이를 붙잡은 채 이마를 손바닥 끝으로 짚고 있는 술루를 바라봤다. 머리를 호되게 찧었는지 술루는 표정을 풀지 못했다.


  “워프 코어 쪽은 타격을 받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선내의 격납고 주변입니다.”


  술루의 말을 들은 스팍의 안면이 미세하게 떨렸다.


  “…마치 우리가 본즈를 구하려 왔다는 걸 눈치 챈 듯한 솜씨군요. 크로노스로 셔틀을 파견할 수가 없습니다.”


  통신을 걸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묵묵히 광선만 쏘아붙이고 있는 벤전스는 전쟁 중에 적군을 만나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똑똑히 보여주고 있었다. 벤전스는 그야말로 엔터프라이즈를 우주 이곳저곳에 펼쳐 놓기로 작정한 게 틀림없었다. 


  “…워프할까요, 함장님?”


  커크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술루가 끙끙대며 레버를 위로 올렸다. 엔터프라이즈가 워프 궤도에 진입을 했어도 충분히 쫓을 만한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벤전스는 묵묵히 하얀 함선이 빛을 뿌리며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다. 


  날카롭게 패널을 두드리고 있던 칸이 손바닥을 펴 그대로 패널 위에 붙였다. 클링온들은 엔터프라이즈가 가까운 곳에 정박해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지 아무런 연락을 주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칸은 아무 것에도 화나지 않았고 후련함 역시 느끼지 못했다. 센티넬의 우수한 머리에 혼란이 그득했다. 칸은 단 한 가지 의심 없는 일을 처리하듯이 항법 시스템에 자신의 연구소가 있는 좌표를 입력했다. 그의 지시를 받드는 함선은, 일견 레너드 맥코이를 빼내려고 온 그들을 쫓아낸 것만으로도 성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 함장을 존중했다.


  늘 울어대는 천둥을 제외하면 크로노스의 하늘은 평온을 찾았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레너드 맥코이의 고개는 얼떨결에 출구가 있는 왼쪽으로 기울어졌다. 레너드는 뒤통수를 벽에 대고 목은 한 방향으로 꺾인 상태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른 폭풍 속에서도 레너드의 눈꺼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흘러 레너드가 향하고 있는 방향에서 칸이 걸어왔다. 그는 그림자만을 드리우며 잠든 가이드를 응시했다.







  지구에서는 장시간의 운전으로 찌뿌듯해진 다리를 펴는 그림자도 있었다. 차문을 열어놓은 채 캐롤은 온 몸을 위아래로 펼쳤다. 캐롤은 팔꿈치를 붙잡고 스트레칭을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녀가 스트레칭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부드러운 눈길을 받았을 자연이 녹색 팔을 흔들며 맑은 소리를 냈다.


  몬태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숲이 샌프란시스코의 방문자를 반겼다. 시원한 바람이 캐롤의 머리칼을 씻겼다. 그녀가 차에서 나왔다. 


  몬태나는 국유림과 국립공원이 모여 있는 주(州)였다. 그것은 보호해야 할 지역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고, 지역 주민은 많지 않고 대신 사람의 손때가 묻지 않은 땅이 많다는 뜻이기도 했으며, 그런 고로 수완 있는 누군가가 비밀스러운 프로젝트를 진행시키기에 괜찮은 요건을 지녔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폴 브라운 역시 자신이 먼저 가본 곳을 지도에서 지워가면서 아마 몬태나에 가면 수확이 있을 거라는 의견을 내비치기도 했었다. 


  캐롤 역시 폴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 긴장하고 있었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그렛 팔스라는 곳이었는데, 그녀는 여기에 수송선이 이착륙할 수 있는 공항이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샌프란시스코에 근거지를 둔 제독에게도 가끔 시설을 시찰할 경우는 있을 터였고 그렇게 되면 주변에 공항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캐롤은 지도를 쥐지 않은 손을 허리춤에 밀착시키며 나아갔다.


  캐롤은 지도에 적힌 길 이름에 의존해가며 발을 내딛었다. 어쨌든 그녀가 있는 숲은 그렛 팔스에 속하지 않아 지도상에는 아무런 표시를 남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도를 들여다보는 횟수가 점차 줄어들었다. 급기야 캐롤은 지도를 집어넣고 총에 의지하기로 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이 한바탕 캐롤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캐롤은 너그럽게 바람을 맞았다. 바람보다는 햇빛을 가리고 있는 울창한 나무가 물러나는 데 촉각을 곤두세워야 하는 그녀는 이따금씩 머리 위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공터가 나와야 했다.


  공터를 중얼거리고 있던 캐롤은 갑자기 쏟아지는 햇볕에 눈을 감았다. 울타리 대신 숲이 막아주고 가려주고 있는 빈 공간이 캐롤의 눈앞에 펼쳐졌다. 그 가운데에는 언뜻 창고로 쓰기엔 애매해 보이는 크기의 건물이 서 있었다. 


  캐롤이 돌진하듯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다리에 속력을 붙이면서 몸통으로 문을 들이받은 그녀는 자세를 추스를 틈도 없이 페이저건을 쥔 두 팔을 내뻗었다. 눈앞에 불쑥 수상한 사람이 나타난다고 해도 총을 쏘지는 못할 정도로 그녀는 쌕쌕거리고 있었지만, 다행히 그녀를 쏘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캡슐 안에 누워 있는 센티넬들이 파리한 빛을 내면서 캐롤을 당황스럽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세상에.” 


  돌개바람이 불면 벽이 뜯겨 나갈 듯한 볼품없는 건물에서 센티넬들은 어디서 공급받는지 모를 동력을 받아 얼어붙어 있었다. 내부에는 더운 호흡 대신 냉매의 연기가 감돌았다. 캐롤은 눈으로도 셀 수 있을 정도로 얼마 되지 않는 캡슐들을 보고만 있다가 겨우 그것에 다가갈 마음을 먹었다.


  캐롤은 다리를 접고 캡슐을 한 바퀴 돌았다. 극저온 캡슐 자체는 23세기의 엔지니어들이 만든 게 아니라서 그녀는 잠깐 자신이 고고학적 유물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며 볼을 부풀렸다. 버튼 위의 글씨들이 영어로 쓰여 있긴 했으나 캐롤은 섣불리 캡슐을 조작하지 못했다. 


  “지금 동결을 풀어버리면 안 되려나…?”


  캡슐 표면을 손으로 만지작대며 캐롤이 중얼거렸다. 배출 버튼은 너무나 명백하게 튀어나와 있어 그녀를 자꾸 충동질하고 있었다. 입술을 이리저리 오물거리고 온갖 표정을 지어내던 캐롤은 한숨을 쉬며 똑바로 일어섰다. 평범하게 생긴 남자의 얼굴이 덮개를 통해 뿌옇게 캐롤의 눈에 들어왔다. 


  캐롤은 단지 그 얼굴을 보고 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하늘에 맹세코 그녀는 버튼 한 개 누른 일이 없었다. 


  그랬기에 캐롤은 눈을 떠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센티넬을 무어라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2. Personal Encounter 



  캐롤은 장례식 이후 처음으로 아버지의 집무실을 찾았다. 전에도 제독의 공적인 공간에 출입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그녀는 문을 열고서도 잠시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방면에서 발생한 피해 규모를 헤아림과 동시에 합동 장례식을 치르고, 그 다음에는 곧바로 크로노스로 파견을 보낼 함선과 호흡을 맞춰야 했던 스타플릿은 마커스 제독의 집무실까지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오늘 오전에서야 파이크 제독이 그의 기록을 정리하고 접속 암호를 삭제했다. 캐롤은 내부가 차가워진 것 빼고는 변한 게 없어 보이는 마커스의 방을 천천히 더듬어갔다. 그녀는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은 건드리지 않고 그 앞에 놓인 액자라든가 명패만 수거했다.


  캐롤은 품 안에 제독의 개인용품을 담은 뒤 책상으로 옮겼다. 액자 류가 많아서 가짓수에 비해 무게감이 컸다. 캐롤은 바닥에서 서류 상자를 끌어와 아버지의 이름이나 얼굴이 남아 있는 물건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받침대가 접힌 액자들 위에 마커스가 방에 두었던 단 하나의 가족사진이 올라갔다.

 

  캐롤은 한동안 상자를 바라보고 있다가 의자에 앉더니 컴퓨터를 켰다. 방화벽 때문에 마커스가 아니면 부팅하기도 어려웠던 컴퓨터는 너무도 쉽게 캐롤에게 배경화면을 보여주었다. 보안 장치를 제공하던 스타플릿의 네트워크가 마커스를 죽은 자로 인식해서인지도 몰랐다. 캐롤은 자신의 아버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책상의 빈 면을 의미 있는 눈빛으로 응시하면서 마우스를 클릭했다. 그녀는 생전에 마커스 제독이 꼭꼭 감추었던 하드 드라이브를 뒤지기 시작했다. 


  대위에 지나지 않는 그녀는 파이크 제독이나 커크가 주축이 되는 회의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이론 몇 개는 있었다. 이를테면 자신의 아버지가 존 해리슨이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센티넬 말고도 역사적으로 살아남았다는 다른 강화인간들의 행방을 알고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캐롤이 최근에 책으로 확인한 결과 끝까지 죽지 않아 캡슐 안에 동결해야만 했던 센티넬은 열 명이 살짝 넘었다. 


  스타플릿이 간부들에게 제공하는 보안 서비스는 상당히 질이 좋아 추가적인 보호막이 없어도 여간해서는 사이버 상의 공격을 막아내는 편이었다. 그런데 마커스는 해킹을 걱정하기라도 했던 것처럼 컴퓨터 내부에 침입자를 잡아내는 부비트랩과 같은 장치들을 깔아놓았다. 캐롤이 진지하게 엔지니어를 호출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수준 높은 것들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아버지가 세웠던 장벽을 무너뜨리면서 가슴이 뛰었다. 직접적으로 밝힌 적은 없었으나 파이크 제독은 마커스가 벤전스라는 특급 함선에 대해 알고 있었을 거라고 추정하는 중이었다.


  한참 마우스와 키보드를 오가던 캐롤의 손이 갑자기 모니터 앞에 달라붙었다. 그녀가 잠겨 있던 폴더 안에서 중요해 보이는 문서를 찾아낸 순간이었다.   


  ‘추천 시설 명단.’


  캐롤은 그 시설이라는 것이 강화인간들의 캡슐을 보관해둘 장소일 거라고 생각하고 파일을 열었다. 파일 안에 첨부된 사진에는 주변이 텅텅 비어있거나 미개발 지역에나 남아 있을 법한 낡은 건물들이 많았다. 모두 샌프란시스코와 멀다는 공통점도 있었다.


  마커스는 컴퓨터 안에 어떤 곳이 적절할 것 같다는 답변을 남기지 않았다. 캐롤은 일단 파일에 있는 주소들을 적어놓고 펜촉을 두들겼다. 거리상 하루에 한 곳밖에 갈 수 없는데다가, 그녀가 발령받은 엔터프라이즈호는 언제든 우주로 출정해 전쟁에 참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캐롤에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십분 가량을 고민하던 캐롤은 펜을 놓아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캐롤은 일단 혼자서 오클라호마에 다녀오기로 했다. 어차피 진정으로 센티넬을 휘어잡을 수 있는 건 가이드였다. 그녀는 이미 한 번 실패를 맛본 가이드였지만 그것을 만회할 기회를 줄 또 다른 센티넬을 찾겠다고 결심했다. 


  종이가 가린 캐롤의 손바닥 위에 유품으로만 남게 된 그녀의 아버지가 내려앉았다.







  캐롤이 박스와 비밀스러운 메모를 들고 빠져나간 마커스의 집무실로 이번엔 커크와 스팍이 들어왔다. 그들은 제일 먼저 마커스의 컴퓨터부터 찾았다.


  컴퓨터를 조작하기 적합한 자리에는 스팍이 앉았고 커크는 책상 옆면을 붙잡고 스팍의 왼편에 붙어 섰다. 스팍은 컴퓨터를 부팅시키자마자 스캇이 준 USB를 꽂았다. 스캇은 클링온이 폭로한 함선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 성능을 분석하기 위해 다른 기관실장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느라 여기에 오지 못했다. 


  “정말 클링온을 쳐부수자는 내용이 들어 있으면 곤란한데….”


  오늘 점심시간에 클링온들의 선전포고가 날아와 꽂혀도 이상하지 않은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현재 파이크 제독은 그 함선이 크로노스를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면서 시간을 끌고 있었다. 커크와 스팍이 제독의 자료에 손을 대고 있는 이유는 파이크의 항변이 본의 아닌 거짓말인지 아닌지를 판명하기 위함이었다.


  입술을 시켜 부지런히 안면을 돌아다니게 만들던 커크는 변함없이 조용한 스팍을 따라 모니터에 집중했다. 스캇의 프로그램이 암호가 걸려있거나 거추장스러운 방화벽을 깨끗하게 지워가고 있었다. 커크는 3분 안에 창이 사라질 거라고 짐작했다. 


  “응? 파일에서 이상 접속을 발견했다는데?”


  커크가 눈을 깜빡거렸다. 스팍의 눈썹도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움찔했다.


  “스캇이 준 그 프로그램 때문일까?”

  “아닙니다. 접근 날짜가 다릅니다.”

  “오늘이 아니라는 소리야?”


  스팍이 창을 따라 문제의 파일을 뒤쫓아 갔다. 아이콘이 반투명한 것으로 보아 그것은 숨겨져 있다가 프로그램에게 발각된 파일이었다. 


  “…아무래도 제독의 컴퓨터를 일찌감치 손에 넣었던 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것도 제독의 생전에요.”


  커크는 방금 자신이 굉장한 말을 들은 것 같았다. 


  “마커스 제독이 그걸 몰랐다고?”

  “표면적인 기록은 당연히 삭제되어 있었을 겁니다. 소령의 프로그램이 드라이브 안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찌꺼기들까지 탐색했기 때문에 드러난 것으로 보입니다.”


  어쩐지 의미심장한 증거를 캐낸 기분이 들어 커크가 머리를 굴리고 있는데 또 다른 창이 떴다. 프로그램이 그 사이에 수상한 기록을 더 잡아낸 것이었다. 안 그래도 작동을 잠깐 중지시키려던 스팍은 생각을 고쳐먹고 프로그램이 끝까지 제 본분을 다할 수 있도록 놔두었다. 


  세 번째 경고 창이 나타났다. 컴퓨터는 바이러스에라도 걸린 것처럼 작은 창을 연속적으로 뱉어냈다. 그것은 허락받지 않았던 존재가 남긴 수많은 발자국들이었다. 


  “제독님께 보고를 올려야겠습니다.”


  스팍이 넌지시 제안하면서 프로그램을 껐다. 독립적인 경고 창은 여전히 배경화면에 남아 있었다. 


  “여기서 파일 하나를 열어보면 안 되는 걸까?”

  “누군가가 이미 손을 댄 적이 있는 자료 중에서 말입니까?”

  “뭐가 털렸는지 이쪽에서도 알아야 할 거 아냐. 맨 처음에 나왔던 것부터 확인해보자.”


  스팍이 오래간만에 커크의 논리에 동의했다. 스팍이 파일을 열었더니 길쭉하고 얇은 창이 등장했다. 그것은 축소된 음악 플레이어와 닮은 점이 많았다.


  —들어오게.


  과연 한 음성이 흘러나왔는데 그것은 마커스 제독의 목소리였다. 이어서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커크가 이맛살을 찡그렸다.


  “뭐야, 이거?”

  “집무실에서 있었던 대화 일부가 녹음된 겁니다. 좀 더 들어보면 이것을 녹음한 자의 정체도 추측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제독의 컴퓨터는 그들이 파헤치기도 전에 누군가 완벽하게 공략한 상태였다. 커크는 이 컴퓨터의 주인이 여러 명 있는 듯이 말하는 스팍의 태도를 이해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군. 하지만 스타플릿의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보단 직접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네. 벤전스에 관해서는 스타플릿 내부에서도 아는 사람이 많지 않거든. 어쨌든 내일 아침에는 화성으로 출항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 주었네. 들고 가게.

  —감사합니다.


  “전혀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린데.”


  커크가 중얼거렸다. 파일이 작은 소음만 내보내고 있던 중이라 커크의 중얼거림이 크게 울렸다.


  —벤전스는 완성 단계에 와 있습니다. 곧 있으면 정식으로 등록 절차를 밟고 승무원을 들여야 하는 함선이 왜 아직까지 기밀로 취급되는 겁니까?

  —그것이 너무 뛰어나기 때문이네. 때때로 지나치게 선두적인 것들은 오해를 받기 쉽지.  

  —이제 와서 벤전스가 스타플릿이 전쟁을 일으키고 싶어 한다는 증거로 오인되기 좋은 함선이라는 걸 의식하시는 겁니까.

  —물론 전쟁이 난다면 아주 유용하게 쓸 수는 있겠지. 벤전스가 스타플릿 최고의 무기라는 걸 부인하지는 않겠네. 그러나 그런 오해는 결국 입장 차이에 불과해. 우수한 것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차이일 뿐이지. 공격이든 방어든 불리한 쪽에 놓이는 놈들의 투덜거림이기도 하고.


  미지의 목소리는 잠잠했다. 말수가 적은 상대방을 대신해 마커스가 대화를 마무리 짓는 역할을 맡았다. 


  —자네가 설령 배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너무 걱정하지는 말게. 벤전스호는 존 해리슨 중령이 탄생시킨 것이나 다름없다고 확실하게 알릴 테니까. 


  타이밍 좋게도 녹음된 대화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만일 재생이 종료되지 않았다면 커크가 스팍에게 일시정지를 누르라고 재촉했을 것이었다. 커크는 진즉부터 동요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리를 좀 해 보자고. 클링온에서 우리보고 불순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니냐며 그 증거로 내민 전투용 배를 존 해리슨이 만들었다는 거군? 마커스는 앞장서서 그걸 숨겼고. 듣자 하니 마커스가 그 벤전스호를 만들라고 시킨 장본인 같은데 말이지.”


  “제독은 그 함선이 스타플릿과 불편한 관계에 놓여 있는 세력에게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알면서도 조선을 강행한 듯합니다. 스타플릿에게는 불리하게 작용될 수 있는 사실이군요. 며칠 전까지 스타플릿의 우두머리였던 인물이 전쟁을 원했다는 것만 증명하게 될 뿐입니다.”

  “아니, 스팍.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스팍은 당황스러움에서 착잡한 침착함으로 선회한 커크의 표정을 보았다.


  “만약에 해리슨이 이 모든 걸 애초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거라면… 그 놈이야말로 제일 스타플릿과 클링온 사이에 전쟁이 나길 바랐을 거야. 스타플릿 소속 중령이라는 명찰을 달고서.”


  클링온은 당연히 자신들의 수중에 굴러 들어온 벤전스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었다. 벤전스가 과거에 마커스를 의기양양하게 만들어 주었다면, 이번에는 클링온이 자신감 있게 전쟁을 밀어붙이도록 격려해주고 있었다. 이 모든 일과 연관이 깊은 존 해리슨은 크로노스에 최근 둥지를 틀었다는 것 말고도 스타플릿에게 적대적이라는 점에서 클링온과 끈끈한 공통점까지 가지고 있었다. 이것들에 휩싸여 커크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우리가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강행하게 될 지도 몰라.”







  레너드는 불편한 꿈자리에서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습격한 쇳덩어리에 표정을 잔뜩 구겼다. 센티넬은 아무래도 밤을 새워 일을 한 모양이었고, 그 일에는 실험체를 묶어둘 만한 족쇄를 만드는 작업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 같았다. 


  “체, 어차피 도망갈 시도조차 못할 것 같은데 꼭….”


  레너드는 작게 구시렁거리면서 옆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칸은 기계가 수행 중인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기계에는 레너드의 피가 꽂아진 채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레너드는 턱을 무릎에 붙이고 센티넬과 비슷하게 기계를 노려보았다.


  레너드는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자신의 피가 대체 어떤 용도로 쓰일 것인지 추론해봤다. 정확한 답을 들은 건 아니지만 레너드는 저 센티넬이 가이드에 대한 연구를 행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사람이 강화인간을 연구하여 탄생된 개념이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걸 따져보자면 어쩐지 묘한 구석이 있는 연구였다. 


  센티넬이 피를 뽑으려는 행동에 반사적으로 반항을 하긴 했으나 레너드는 자신의 혈액이 필요한 이유를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가이드를 만들어내는 건 하늘의 선택이 아니라 인공적인 물질이었다. 레너드는 시험관을 돌리고 있는 저 작업이 혈액으로부터 가이드라인을 분리해내는 게 맞을 거라며 속으로 강력하게 추측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이드라인은 센티넬 스파이럴이 없는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요소였다. 레너드는 곰곰이 생각했다. 센티넬이 대체 가이드라인을 손에 넣어서 뭘 하겠다는 거지? 제 아무리 칸 누니엔 싱이라고 해도 가이드라인이 센티넬의 몸속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방도는 없었다.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는 계획과 분석이 레너드의 머릿속을 둥둥 통과하면서 다녔다.


  센티넬 가운데서도 제일 특출한 탓인지 레너드의 이해력을 자꾸만 벗어나는 실루엣이 묵직하게 창문을 응시했다. 칸의 뒤통수가 움직이는 걸 보고 레너드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쫓았다. 그는 연구를 위해서 현재의 공간을 마련한 것 같은데, 레너드는 그가 과학자다운 태도로 책상에 앉아있는 걸 많이 보지 못했다. 레너드는 조금 전과 별로 이어지지 않는 물음을 멍하니 떠올렸다. 그는 척 봐도 황량한 바깥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일까? 더군다나 센티넬 주제에 칸은 가이드를 외면하고 있었다. 가이드가 아니고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거면 굳이 사람을 납치할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것까지 조사하기엔 시간이 없었다.”


  레너드는 갑자기 무슨 소리냐며 목을 내뺐다가 자신의 입술이 먼저 움직였었다는 걸 깨달았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혼잣말을 해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창피함보다는 센티넬이 자신의 혼잣말에 답변을 던져줬다는 데에 고무된 레너드는 용기 있게 입을 열었다.  


  “뭘 했기에 센티넬이 촉박한 시간에 시달렸대?”

  “그러고 보니 넌 지금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모르겠군.”

  “뭐, 뭐야. 큰일이라도 났어?”

  “스타플릿은 클링온과 전쟁 중이다.”


  센티넬은 너무나도 평온한 어조로 그렇게 말했지만 레너드는 펄쩍 뛰었다.


  “뭐라고!”


  그 때 어울리지도 않게 기계에서 땡 하고 완료음이 났다. 칸이 처음보다 내용물이 줄어 있는 시험관을 빼냈다.        


  “내가 지구에 있었을 때만 해도 둘이 사이가 좋지 않긴 했지만 전쟁을 하자는 폭언이 오고 갈 정도는 아니었어. 내가 잡혀온 지가 그렇게 오래된 거야?”


  센티넬은 또 싸늘하게 굴었다. 


  “그것이 중요한가? 네가 입고 있는 그 제복이 위험을 불러올 불길한 물체가 되리라는 것은 전부터 예견된 바다.”


  레너드는 학회장에 입고 갔던 유니폼 차림을 유지하고 있었다. 레너드는 안쪽 입술을 꾹꾹 깨물었다. 


  “아니, 당신이 조종한 거겠지.”


  칸은 대꾸하지 않았다. 레너드는 가슴이 답답하면서 한편으로는 기력이 빠져나가는 걸 맛보았다. 자력으로 탈출할 수 없는 상황에다, 바깥은 전쟁에 시달리고 있다면 레너드가 이곳을 빠른 시일 내에 빠져나간다는 건 불가능했다. 


  한편으로 이것은 레너드 맥코이에게서만 그치지 않는 센티넬의 복수였다. 가이드도 보통 인간도 센티넬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것이 레너드의 의문을 씻겨주지는 못했다. 센티넬이 자신이 써먹지도 못할 가이드라인을 손에 쥐려고 애쓰는 저의는 크로노스의 하늘처럼 칙칙한 암흑에 묻혀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추출한 가이드라인을 들고 사라지는 센티넬의 잔인한 그림자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시동을 끄고 캐롤은 차 안에서 목을 쭉 뺐다. 공터로 남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로 주변에 나무밖에 없는 외진 구석이었다. 캐롤은 차를 최대한 그늘 쪽에 세워놓은 뒤 밖으로 나가 낡은 쇠창살을 만지작거렸다. 철문에도 자물쇠에도 먼지가 가득 끼어있었다. 캐롤은 미리 챙겨온 도구로 자물쇠를 잘라낸 뒤 안으로 들어갔다.


  듬성듬성한 문짝에만 의지하고 있는 건물의 안쪽에는 아무런 경비 시설도 없었다. 캐롤은 그 순간부터 자신이 장소를 잘못 찾아왔음을 강하게 느꼈지만 건물 안은 살펴보기로 했다. 숲에서부터 들려오는 나뭇잎 부딪히는 소리가 이유 없이 캐롤의 긴장감을 자극했다.


  출입구는 잠겨 있었으나 캐롤이 몇 번 세게 흔들고 발로 차자 뜯겨 나가듯이 열렸다. 바깥만큼이나 내부도 황량했다. 봉인이 뜯긴 박스 몇 개가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녹슨 사다리라든가 페인트통처럼 생긴 양동이 등 23세기에는 원시적인 물건들이 버려져 있었다. 아마 몇 십 년은 족히 방치되어 있었을 게 틀림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에서 오랫동안 물러나 있어 마음대로 개조하기 좋은 시설을 찾고 있었을 마커스 제독의 마음에 들 만한 곳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캐롤은 마지막으로 지하실로 통하는 계단이 있는지 찾아보았다. 장애물이 없어서 워낙 탁 트여 있는지라 몇 발자국만 옮기면 되었다. 캐롤은 건물 모서리를 다 거친 다음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클라호마까지 운전해온 시간이 아까웠다. 


  캐롤은 뭐라도 건져보자는 생각에 떨어져 있는 박스를 집어 들었다. 특별한 표식은 없었다. 캐롤은 이에 낙담한 나머지 자신이 부수고 온 문을 척척 넘어 들어오고 있는 그림자를 눈치 채지 못했다.


  “거기 누굽니까?”


  캐롤이 놀라 몸을 틀었다. 세워져 있던 박스가 반 바퀴를 굴러 바닥에 내려앉았다. 캐롤보다 어깨가 넓었고 키도 큰 인영이 경계한 자세로 발을 떼고 있었다. 캐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 혹시 엔터프라이즈에서….”


  상대방이 허리춤을 잡는데 캐롤은 미간만 더욱 좁혔다. 


  “맥코이 소령님을 대신해 의무실에 계셨던 분 아니세요?”


  캐롤의 말에 그림자는 주춤했다. 두 사람은 이제 의혹은 있지만 긴장은 푼 걸음걸이로 서로를 마주했다. 


  “마커스 대위?” 


  캐롤을 부르면서 나타난 남자는 평범한 갈색 머리를 가진 매끈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동료를 만난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은 가만히 눈동자를 껌뻑였다.


  “닥터 브라운 맞으시죠? 이런 곳엔 왜….”

  “대위야말로 이렇게 먼 데까지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캐롤이 옷자락에 손을 문질렀다. 


  “밝은 곳에 가서 얘기하는 게 어떨까요? 여기에는 보시다시피 아무 것도 없어요.”


  두 사람은 어딘가 어정쩡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햇빛의 영역에 입성했다. 캐롤은 남자가 타고 온 차량을 발견했다. 그는 햇빛이 드는 곳에 차를 주차해두었으므로 캐롤은 자신의 차를 등받이삼아 그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닥터 브라운은 군말 없이 동의했다.


  “여기가 적절하겠군요. 그럼 닥터 브라운, 여기는 왜 오신 거예요?”


  캐롤은 맥코이 소령의 빈자리를 임시로 채우게 된 닥터 폴 브라운의 직급이 대위라는 걸 기억하고 있었다. 나이는 어떨지 몰라도 계급은 같았기에 캐롤은 꾸물대지 않고 곧장 물었다. 폴은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개인적이면서 공적인 일 때문에 왔습니다.”

  “네?”

  “사실입니다. 개인적인 동기가 좀 더 강하기도 하지만 제 임무에 포함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보통 지역을 탐사하는 일에 스타플릿이 의사 선생님을 보내지는 않는데요? 어떻게 이 일이 닥터의 임무에 포함된다는 거죠?”


  폴은 집요하게 캐묻는 캐롤의 화법을 적당히 피했다.


  “…어쨌든 저는 거짓으로 대답한 게 아니니, 이번엔 제가 좀 질문하도록 하겠습니다.”


  캐롤이 눈썹을 팔(八)자로 구부렸다.


  “제독님의 자료를 보고 온 겁니까?”


  캐롤은 너무 놀라서 하마터면 앞으로 허둥지둥 튀어나올 뻔했다. 겉으로는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의사는 캐롤이 모르고 있는 무언가를 굉장히 많이 숨기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숨기실 것 없습니다. 반쯤은 대답을 예상하고 묻는 겁니다.”

  “그, 그걸 어떻게 알았어요?”

  “당신이 본 자료는 비밀리에 진행시키려다가 폐기된 프로젝트가 진행될 장소를 추렸던 보고서와 내용이 같습니다. 이곳 말고 다른 데도 들러봤습니까?”


  캐롤은 그 프로젝트가 무엇인지 물어볼 틈을 찾지 못하고 대답부터 건넸다. 


  “…아뇨. 여기가 처음이에요.”

  “이런, 제 입장에선 조금 안타까운 소식이군요.”

  “그건 무슨 뜻이에요?”

  “서로 다른 곳을 둘러보다가 만난 거라면 양쪽에게 이득 아닙니까. 어쨌든 메인과 미네소타 쪽은 안 가도 됩니다. 이미 허탕을 치고 왔으니까요.”

  “자, 잠깐! 그럼 대체 언제부터 알고 돌아다니고 있던 거죠? 아니, 그것보다 왜요? 나한테는….”


  그러자 폴 브라운은 당연하다는 투로 말했다. 


  “나라고 특별히 이유가 다르겠습니까? 우리 모두 센티넬을 뒤쫓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닥터 폴 브라운은 레너드 맥코이보다는 두 살이 어린 스타플릿의 의료 장교였다. 그는 남을 치료하는 일을 보람차게 여기긴 했으나, 주변에서 딱딱하고 다가가기 어렵다는 분위기를 풍긴다는 소리를 지나치게 많이 들어 의료 서비스업에 대한 회의감을 느끼고 있던 도중 스타플릿에 입대했다. 실력 자체는 좋았고 공부가 체질에 맞는 타입이었던 그는 스타플릿에서도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실은 이번에 소령 임관과 더불어 다른 함선으로 옮겨가 그곳의 치프 메디컬 오피서로 승격될 예정이었다. 


  “맥코이 소령님과 많이 친하신 모양이네요?”


  자세한 설명에 앞서 폴의 지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캐롤이 고개를 움직거렸다. 폴은 입술을 옆으로 당겼다. 그는 지금까지 크게 움직임 없이 반듯한 얼굴을 고수하고 있었다. 


  “레너드는 고맙게도 그렇게 답해주겠지만… 사실 저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를 찾는 데 도움이 될 지도 모르는 일에 열중하고 있는 지도 모르지요.”

  “소령님과는 어떻게 알게 되셨는데요?”


  “스타플릿 소속 의료인들이 주기적으로 떠나는 봉사활동에서 한 팀으로 일했었습니다. 그 때 레너드를 처음 봤는데 꽤나 인상적이었어요. 내가 의사 일을 잘하기 때문에 이 직업에서 버티고 있는 거라면, 그는 정말 의사가 천직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캐롤은 그가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것도 영리하게 추측해 밝혀내는가 하면, 어느 부분에 관해서는 부가적인 말을 붙이길 피한다는 걸 간파했다. 폴 브라운은 아마도 맥코이를 찾아내겠다는 목적 뒤에 감추어져 있는 사적인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 당신과 내가 같이 센티넬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의외로 폴이 먼저 캐롤에게 손을 내밀었다. 다음 질문으로 무엇을 골라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그녀가 폴을 돌아보았다. 


  “제 몸속에는 가이드라인이 없습니다. 그래서 존 해리슨 이외에 전쟁에서 살아남았다고 알려진 센티넬들을 확보하고 나면 다른 가이드에게 협력을 요구할 작정이었습니다.”

  “…저는 한 번 거부당한 가이드인데 괜찮겠어요?”


  폴은 쓰게 웃었다. 


  “제 생각에 당신에게 문제는 없습니다. 센티넬 쪽이 유별난 것이겠지요.”


  그는 오클라호마에서 더 시간을 지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차로 돌아갔다. 캐롤은 가이드인 자신보다도 센티넬에 대해 많은 걸 아는 듯한 닥터 브라운의 등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어쩐지 타이밍을 자꾸 놓치게 되어 캐롤은 자신이 센티넬을 찾아내면 그를 존 해리슨과 대항하게 만들 거라는 의도를 밝히지 못했다.







  속도는 조금 다를지언정 시간은 지구 바깥에서도 흐른다. 샌프란시스코와 한참 떨어진 곳에 있느라 캐롤과 폴이 잠깐 스타플릿이 처한 위기에 대해 잠깐 잊어버린 무렵이었다. 


  —폭격을 시작하겠다.


  블랙홀이나 워프 궤도 같은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오듯 갑자기 등장한 거대한 함선의 앞부분이 환해졌다. 새까만 우주 가운데에서 모여드는 입자는 갈수록 하얗고 뜨겁게 빛났다. 함선의 포신은 멀리서 보이는 우주정거장에 설치된 시설들을 한데 모아주고 있는 이음새를 노리고 있었다.


  함선에서 뻗어 나온 빛줄기는 하나였다. 허나 그것은 정거장과 착륙 시설을 정확하게 끊어놓았고 착륙장은 금세 무중력에 휩쓸려 오른쪽으로 부유했다. 뒤이어 전투기들이 앞을 다투어 나아갔다. 그동안 함선은 새로운 포문을 열었다.


  스타플릿 특유의 마크가 그려진 중심부가 집중 타격을 맞았다. 붉은색과 녹색의 광선이 연거푸 정거장 곳곳을 때렸고 사방으로 파편이 떨어져 나왔다. 가장 덩치가 큰 함선은 부서진 조각들이 날아오지 않을 지점에서 묵묵히 빛을 쏴댔다. 전투기들은 신이 난 것처럼 빙글빙글 돌면서 치고 빠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가만히 멈춰 있는 상태로 굵직한 포를 내뿜는 함선에 비하면 그 활약상이 적어 보였다. 


  정거장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둥근 비행선마저 함선이 보낸 미사일에 격추당하자 비로소 주변이 평화로워졌다. 이리저리 쪼개진 스타플릿의 마크가 방향도 없이 우주를 떠돌았다. 검은 함선은 그것에 냉소를 던지듯이 뱃머리를 돌렸다.


  그대로 돌아갈 것 같던 함선은 방금 전과 비교도 되지 않는 빛줄기와 미사일들을 쏟아냈다. 그것은 막 워프를 마치고 우주로 진입한 배에 내리꽂혔다. 더 망가뜨릴 것도 없는 정거장의 잔해를 춤추듯 돌아다니던 다른 전투기들도 정신을 차리고 새로운 적을 맞이했다.


  검은 함선은 포신이 흘리는 열기로 우주를 일그러뜨리고 상대편 배를 두들겼다. 옅은 회색빛이 나는 배는 검고 묵직한 함선과 비교하면 너무도 초라해보였다. 적들에게 둘러싸인 회색 배는 사이렌과 선원들의 외침으로 혼란스러운 반면, 검은 배는 아무도 없는 듯이 조용하단 것까지 두 함선은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났다.


  —알아서 정리하고 다음 목적지로 오도록.

  —건방진 인간. 알겠다. 뒤따라가겠다.


  검은 함선에 있는 유일한 승무원은 통신에 응답한 자의 말에서 틀린 부분을 고쳐주려다가 관두었다.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스타플릿의 우주정거장 하나를 박살낸 벤전스호는 엔진을 달구면서 다음 목표로 이동했다. 클링온들이 마구잡이로 이미 도주할 수 없을 지경까지 망가진 스타플릿의 함선을 공격했다. 







  “클링온들은 전에 실질적인 선전포고를 한 번 했었네. 딱히 여러분들에게 새로이 알려줄 것은 없어. 올 게 온 거지.”


  파이크 제독은 정말로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걸 목소리로 표현하고 있었다. 


  “화성 인근에 설치했었던 스타플릿의 우주 정거장 한 곳이 클링온들에 의해 박살이 났네. 여기서 중요한 건 생존자가 없다는 거야. 그쪽은 우리가 이를 갈면서 아량을 베풀 만한 여지조차도 막아버렸어.”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자잘한 매입등들이 골고루 박혀 있는 형태라 원래부터 그다지 밝지 않은 회의실은 땅속으로 흡수될 것처럼 캄캄해져버렸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스타플릿은 클링온과의 전쟁을 선포하는 바이네. 각 함장들은 주요 승무원들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리고 모두 출격 준비를 하게나. 순서에 차이는 있겠지만 스타플릿의 모든 함선이 동원될 걸세. 일들이 많을 테니 서둘러주게.”


  함장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스타플릿 소속 장교들이 가지고 있는 커뮤니케이터 수십 대가 동시에 빛났다.  


  이와 비슷하게 캐롤은 앞서 가던 차량이 직진 대로에서 불빛을 오른쪽으로 깜빡이는 걸 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차량은 유지하고 있던 경로를 벗어나 아예 멈춰 섰다. 캐롤이 그 뒤에 차를 붙여 세우고 내렸다. 평범한 승용차가 자신과 몸집이 비슷한 차를 끌고 다닐 수는 없었으므로 따로 운전을 하며 달리던 폴이 그녀에게 손짓했다. 그의 반대편 손에는 커뮤니케이터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죠?”

  “본부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클링온 측의 선제공격으로 스타플릿의 우주 정거장 하나가 파괴되었다는군요. 진짜 전쟁이 시작될 겁니다.”


  폴의 표정은 일견 편안해보일 정도로 고요해서 캐롤은 하마터면 멍하니 그에게 긍정해버릴 뻔했다. 다행히 캐롤은 펄쩍 뛰며 놀랐다. 


  “맙소사, 그러면 우리도 빨리 가서 출항 준비를 해야죠! 여기에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잖아요.”


  그러자 폴은 고개를 저었다. 캐롤은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싶어 입술을 내밀었다.


  “이번에 당신은 엔터프라이즈에 오르지 말았으면 합니다.”


  캐롤은 벌써 두 번째로 폴이 한 말을 곱씹었다. 폴은 스팍만큼 딱딱하지는 않지만 워낙 사무적이고 자신의 의도가 정당하다는 태도를 내비치고 있었다.


  “말도 안 돼요! 임시로 끼어들긴 했지만 어쨌든 나도 엔터프라이즈의 선원이라고요.”

  “나는 맥코이 소령 대신 엔터프라이즈의 의무실을 책임지는 입장이므로 무조건 승선을 해야 하지만, 당신은 함교에 고정된 좌석이 있거나 엔터프라이즈의 출항에 있어서 필수적인 역할을 맡은 건 아닙니다.”


  “…지금 내가 엔터프라이즈에 필요 없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아닙니다. 내가 여기에 남아있을 수 없으니 당신이 마저 센티넬을 찾는 일을 수행해 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폴은 처음으로 목소리를 줄였다. 


  “해리슨이 왜 레너드를 데리고 갔는지 짐작 가는 바가 하나 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폴과 대화하면서 캐롤이 순간순간 맛보았던 다급함과 짜증, 당황스러움 등이 그 한마디로 날아가 버렸다. 캐롤은 믿을 수 없어 되물었다.  


  “네? 당신이 그의 꿍꿍이를 안다고요?” 


  “남들이 아직 생각하지 못한 가설 하나를 안고 있을 뿐입니다. 가능성이 꽤 높을 뿐 아직까지는 가설입니다.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면 어차피 함장님이나 다른 승무원들과 공유를 해야 하는 얘기지만, 당신은 지상에 남아 있을 필요가 있으므로 먼저 얘기를 해주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약속하세요.”


  “뭐, 뭐를요?”

  “때가 되면 당신의 가이드라인을 내게 제공해줘요.”


  폴은 마치 캐롤의 가이드라인이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를 해결할 실마리로 여기는 것처럼 진중하게 말했다. 그런데 기실 캐롤의 가이드라인은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었다. 


  “…뭐에요, 그건 아주 쉬워요. 피를 조금 뽑으면 되는 거니까. 그런데 가이드라인이 왜 필요해요? 당신이 지금부터 할 얘기와 관련이 있는 건가요?”

 

  폴은 캐롤에게 줄 수 있는 모든 해답을 털어놓았다.

 






  자료화면 하나 전송해 줄 여력도 없이 정거장은 그 안에 있던 셔틀이나 기타 장비들과 함께 우주로 흩날렸다. 그렇지만 스타플릿은 클링온의 부대에 벤전스호가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판단하고 전선으로 파견할 함선을 미리 업그레이드시켰다. 엔터프라이즈를 비롯해 예전에 출격대로 점찍힌 배들은 어뢰를 더 싣거나 특수부대를 태우는 등의 준비를 했다. 캐롤 마커스를 대신해 유사시에 출동할 가이드는 다른 함선에 탔다. 물론 가이드가 없어도 스타플릿 부대는 엔터프라이즈 중심으로 움직였다.


  “1분 뒤에 워프가 완료됩니다.”


  커크는 마지막 1분의 여유 동안 승무원들에게 말했다.


  “다들 알고 있겠지? 벤전스가 보이면 무조건 그걸 때린다. 없으면 아쉬운 대로 클링온들을 때려야지. 하나만 남겨놓고. 어렵지 않잖아?”


  의자 손잡이를 잡은 커크의 손은 그가 평소와 다르지 않은 말투를 구사하는 데 지불해야 하는 대가를 전부 떠안은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끝이 보이지 않던 궤도가 서서히 끊기고 있었다. 


  “전장에 진입합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1. A Will behind the War



  보급품 전달과 더불어 간략한 탐사를 기획하고 있던 USS 엔터프라이즈의 항로가 긴급 변경되었다. 해당 함선의 기관실장이기도 한 몽고메리 스캇 소령이 일급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힌 존 해리슨 중령의 소재지를 파악한 직후, 엔터프라이즈는 신속하게 그를 검거하는 임무를 하달 받았다. 레너드 맥코이의 신병이 해리슨의 손에 달려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이론이 돌면서 엔터프라이즈가 스타플릿을 대표해 출격하는 일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당분간 스타플릿의 현안을 떠맡게 된 크리스토퍼 파이크 제독은 자신의 옛 함선이기도 했던 엔터프라이즈의 모든 승무원들에게 자세한 당부 사항을 전달한 뒤에 엔터프라이즈를 우주 바깥으로 내보냈다. 


  모두가 제독의 조치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현 상황이라면 파이크 제독처럼 신중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누구든지 엔터프라이즈호가 떠나는 길을 걱정할 수밖에 없었다. 엔터프라이즈가 향한 곳은 대다수의 클링온이 살고 있는 행성 크로노스였기 때문이었다.


  클링온은 자율적이고 부드러운 연맹체 성격을 띠고 있던 행성연합이 갈수록 군사조직으로 변모하고 있는 스타플릿에 의하여 하나의 우주 제국으로 발전할 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몇 년 전부터 피력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위적 방책이라면서 특급 장교들과 함선의 숫자를 늘리는 알렉산더 마커스 제독의 속셈을 강하게 의심했다. 불행히도 마커스 제독은 외계종족 하나가 보내는 떨떠름한 시선에 신경 쓸 위인이 전혀 아니었던지라 스타플릿과 클링온은 순식간에 긴장 상태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 같은 두 세력의 관계를 고려하여 파이크 제독이 내린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가급적 전투를 피하면서 어디까지나 범죄자를 압송하고 아군 장교를 구출하러 왔음을 강력히 피력할 것, 클링온의 영역 안으로 승무원을 파견해야 할 때는 절대 두 자리 수를 넘지 말 것. 제임스 커크 대령도 이번만큼은 상부의 의견을 존중할 모양이었다. 


  “일단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해리슨이 숨어 있는 곳의 좌표를 확보하는 거야.” 


  커크가 함교로 불러 모은 몇몇 대원들에게 말했다.


  “스캇이 몇 번이고 트랜스포터 장치에서 뽑아낸 좌표가 무인지역인 걸 확인했지만, 어쨌든 크로노스에서 총을 뽑는 일은 최대한 피해야 돼. 총이 허리춤에 가만히 있을수록 우리의 계획이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해. 우리가 총보다 가까이 해야 할 건 탐지기와 함선에 연락을 넣을 커뮤니케이터야.”


  스팍 부함장에서 시작해 비상시에 클링온과 협상을 할 우후라 대위, 몸싸움에 일가견이 있는 몇몇 장교들이 익숙한 함장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시 발령을 받아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하게 된 캐롤도 커크의 설명을 경청했다.


  “해리슨이 있다고 추정되는 장소의 좌표를 잡으면 곧바로 그걸 함선에 알린다. 좌표가 맞는다면 스캇이 해리슨을 함선에 데려올 수 있겠지. 그렇게 된 후에 닥터 맥코이를 수색한다. 나도 놈한테 주먹질을 해 주고 싶지만 크로노스에서 무력 충돌이 발생하는 것 자체가 매우 위험한 일이라서 어쩔 수가 없어.”


  뽑힌 대원들은 눈빛으로 커크에게 신호를 보냈다. 벌칸 부함장이 잠자코 있다는 건 수정이 필요하거나 이의를 제기해야 마땅한 부분이 없다는 뜻과 같았다.


  “질문 없지? 그럼 제복들 다 갈아입고, 셔틀이 출발할 후미로 모이도록 하자고.”


  말을 마치고서 커크가 캐롤에게 손짓했다. 캐롤은 일찌감치 그에게 다가왔으나 커크는 리프트가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조심조심 말을 꺼냈다. 


  “만약 해리슨이 센티넬이라면… 아, 물론 대위의 말을 못 믿는 건 아니야. 그래서 가이드인 대위를 데려가는 거니까. 그런데, 으음, 혹시라도 말이야….”

  “함장님께서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캐롤의 입술이 홀로 웃었다.


  “단독 행동을 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가 치러야 할 대가는 저에게 달린 게 아니니까요.”


  그리고 캐롤이 뒤를 돌아 자신에게 더 자세한 대답을 해 줄 수 없었음에도 커크는 리프트에 탑승하는 그녀를 끝까지 지켜보았다. 


  몇 분이 흐르자 함교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는 두 인물의 자리가 비었다. 메인 스크린에 크로노스로 출발한 셔틀 한 대가 하얀 꼬리를 늘이는 모습이 떠올랐다.







  우주의 적막함을 뚫고 입성한 크로노스의 대기는 초반부터 시끄럽게 커크 일행의 셔틀을 맞이했다. 건조한 바람을 맞고 지상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모래먼지가 유리창을 뿌옇게 덮었다. 둥글게 모여 앉아 조종간을 잡고 있는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들은 밝은 곳을 찾아서 유연하게 셔틀을 돌리며 고도를 낮춰갔다.


  “케사 지역에서 생체 신호 하나가 감지되고 있습니다. 존 해리슨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스팍이 커크에게 보고했다. 

  “하나야?”

  “그렇습니다.”

  “그럼 여기에 본즈는 없다는 소린가….”


  다소 힘이 빠진 커크의 대답이 공중을 떠돌았다. 스팍은 말을 아끼며 자신의 함장을 응시했다. 


  “우선 셔틀을 숨기기에 좋은 장소를 찾아봐.”

 

  척박한 행성의 천장에 노즐이 열기를 분사하는 소리가 울렸다.


  커크는 가시거리가 어느 정도 확보되기만 하면 대기가 흐린 쪽을 파고들어 수송선을 몰 것을 지시했다. 그는 비행하면서 엔터프라이즈와 연결된 핫라인으로 착륙 지점을 잡는 걸 도와달라는 요청을 보냈고 스팍이 자료를 받아 분석해 커크에게 넘겼다. 자욱한 먼지 속에 숨은 셔틀은 소리만 조금 요란할 뿐 동체를 잘 숨기고 있어서, 그들은 다급한 마음 없이 상의를 할 수 있었다. 


  커크 일행의 셔틀은 언제 세워졌고 또 언제 버려졌는지 모를 몇몇 철조물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온 폐허와 가까운 곳에 내려앉았다. 구조물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반쯤 셔틀을 가리는 가운데 커크와 스팍이 내리고 우후라와 캐롤 등이 그들을 뒤따랐다.  


  “…한참 걸어야겠는데.”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커크가 중얼거렸다. 모래밖에 없는 공터가 커크의 눈앞을 착잡하게 메우고 있었다. 


  “존 해리슨이 워프한 지점을 고려하면 이곳이 셔틀을 안착시키기 제일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스팍이 대꾸했다. 벌써 커크의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엉킨 것과는 대조적으로 스팍이 차분하게 머리칼과 재킷을 가다듬는데, 스카프 자락으로 입을 가린 우후라가 슬그머니 스팍을 앞장섰다.


  “걸어가려면 서둘러 움직여야겠네요. 정확히 거기가 어디라고요?”


  스팍은 대답 대신 몸을 틀더니 팔을 쭉 뻗었다. 바위와 철근 더미들이 서로 연합해 성벽을 쌓은 것처럼 높게 솟은 땅이 안개 바깥으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절벽 같기도 하고 단순히 언덕처럼 보이기도 하는 묘한 지대였다. 


  잠시간 스팍이 가리킨 지점을 바라보고 있던 일행이 발을 내딛었다. 다시 안개가 짙어져 보이지는 않았지만, 존 해리슨은 분명 그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범죄자 주제에 레너드의 납치범은 바쁜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그는 자주 외출했고 안에 있을 때도 시간을 낭비하는 법 없이 무언가에 몰두하는 경우가 많았다. 레너드는 이번에도 혼자 남아 손을 묶고 있는 끈을 잘라보려 애썼다. 구속물이 쇠사슬이나 수갑으로 바뀌기 전에 어떻게든 손발을 자유롭게 해보고 싶은 게 그의 심정이었으나, 대체 무엇으로 만들어진 건지 끈은 무척 질겨서 레너드는 가뜩이나 아픈 손목에 상처만 늘리고 있는 중이었다.


  “아, 진짜!”


  결국 레너드는 손목을 부여잡고 짜증을 냈다. 뾰족한 돌멩이나 깨진 접시 조각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이곳에 널린 건 묵직한 라이플이나 휴대용 캐논 정도였다. 레너드는 끈과 함께 자신의 두 손마저 날려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레너드는 딱딱한 끈에 쓸린 살결을 입으로 후후 불다가 그의 납치범이 자주 찾는 책상 앞 의자를 보았다. 그는 실제로 그 자리에서 레너드와 자신의 혈액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곤 했다. 물론 레너드는 남자가 진행하고 있는 실험이 뭔지 몰랐다. 


  몇 번 눈을 깜빡이던 레너드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책상을 구석구석 살펴보면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물건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앉아 있을 때는 제법 학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한 호기심이 레너드를 책상 쪽으로 이끌었다. 출입구 쪽을 슥 돌아본 레너드가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앉은 자세를 고치자마자 아는 책이 눈에 들어와 레너드는 눈썹을 크게 올렸다. 레비나스 맥코이의 저서가 있고, 그 아래에는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유일하게 남긴 회고록까지 놓여 있었다. 그가 몇 번이고 읽어봤던 책들이었다. 


  “왜 이런 책이 여기에 있지…?”


  인간학이나 사학에서 종종 이용될 뿐인 서적들의 책등을 쓸면서 레너드는 혼잣말을 했다. 책은 접힌 자국이나 메모, 심지어 꽂혀져 있는 책갈피도 없이 모두 깔끔했다. 그는 레비나스 맥코이를 무릎에 올려놓고 자신이 납치당한 이유를 재차 추정해보았다.


  사실 레너드는 자신의 피가 어디에 쓸모가 있다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의사로서 그가 가진 실력이라든가 스타플릿 장교로 활약했던 경험 등은 혈액에 포함된 요소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그의 온갖 생물학적 특징, 이를테면 백혈구나 적혈구의 개수라든가 혈소판의 숫자, 맥코이들의 온 몸에 흘러 다니는 가이드라인이 들어 있을 뿐이었다.


  그 때 밖에서 폭탄이나 광선이 터지는 듯한 굉음이 났다. 소리로도 모자라 옅은 진동이 석벽을 때렸다. 레너드가 혹시 남자가 돌아온 건 아닌지 뒤부터 살폈다. 


  “뭐, 뭐야.”


  납치범은 없었다. 단지 시야가 꽉 막힌 공간과, 그것마저도 남자가 조장한 듯한 폭음이 레너드를 짓누르려 하고 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붉은 광선이 소리치는 커크의 머리를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뒤에서 밀려들고 있는 클링온을 피해 달아나느라 아무도 그의 외침에 답해주지는 않았지만 실은 모두가 커크의 불평에 동의하고 있었다. 그들이 경솔하게 행동한 점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클링온들은 어디서 제보라도 받은 양 커크 일행이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한 시점에 그들을 습격했다.


  “함장님, 옆에!”


  캐롤의 경고를 접수함과 동시에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는 빛을 본 커크가 비틀대며 방향을 바꿨다. 바리케이트로 삼을 만한 구조물이 없어 사지와 같았던 공터를 지나 일행은 드디어 반대편에 셔틀이 있는 철근의 숲으로 들어왔다. 


  셔틀에 탑승하면 숨을 돌릴 수 있을 거라며 일행을 격려하려던 커크는 함선에서 걸려온 통신을 받았다. 임시 함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술루가 비보를 전했다. 


  —함장님, 셔틀이 파괴당한 것 같습니다. 위치가 추적되지 않아요.

 

  커크가 들고 있던 커뮤니케이터에 빽 소리를 내질렀다.


  “젠장! 그럼 어떻게 돌아가라고!”

  —함선 쪽에서 함장님과 다른 대원들을 워프해 데려오면 되지만, 그러려면 안정적인 좌표가 잡혀야 합니다.


  술루의 말을 듣고 뒤를 확인한 캐롤은 고개를 저었다. 위협적으로 치솟은 블레이드를 든 클링온들은 여전히 커크 일행의 꽁무니를 뒤쫓고 있었다. 


  “한 마디로 우리가 일 분은 움직이지 않고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5초라도 발을 쉬었다간 목이 날아갈 판인데! 다른 방법은 없어?”

  —해당 지역으로 어뢰를 발포할 수는 있지만….

  “엔터프라이즈를 전범으로 만들자고? 알았으니까 계속 지켜보고 있어. 노력해 볼게!”

 

  통신이 종료되기 전 술루가 덧붙였다.


  —스캇 소령님 말이 40초만 버티면 된답니다, 함장님. 40초만 제 자리에 있어주세요. 


  커뮤니케이터를 주머니에 넣은 커크는 자신이 솔선수범하여 봉인하고 있던 페이저건을 커뮤니케이터 대신 쥐었다. 함장이 바리케이드에 등을 붙인 채 움직이지 않자 대원들이 커크의 곁에 모여들었다. 그가 고함쳤다.   


  “어뢰는 못 날리더라도 목숨은 건져야지. 다들 총 들어!”


  커크가 두 손으로 총을 받치고 방아쇠를 당겼다. 씩씩대며 칼을 휘두르던 클링온 하나가 풀썩 쓰러졌다. 함장의 명령을 받들어 스타플릿의 장교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진짜, 정찰기도 없었는데 우리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았냐고! 으아아!” 







  다방면에서 노곤해진 레너드 맥코이가 불편한 자세로 크로노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있던 무렵이었다. 칸은 챙겨온 무기를 모두 놔두고 크로노스의 중심지로 갔다. 정찰기가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는 상공을 그대로 통과한 그는 신속하게 클링온들에게 잡혔다. 이 때 그는 어떠한 위해도 당하지 않고 오히려 클링온의 의결 기구로 안내되었다. 


  인간을 보고 콧잔등을 잔뜩 찡그리는 클링온들에게 칸이 툭 내민 것은 일종의 저장 장치였다. 칸은 거기에 자신이 존 해리슨으로 활약하며 제작했던 각종 무기의 청사진과, 스타플릿이 비밀리에 조선한 최신형 함선이 있는 격납고의 위치 등 군사 기밀을 담아 와서는 그것을 하나씩 폭로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러고서 칸은 초반부터 한 함선의 내부 구조도를 펼쳐 놓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클링온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게 뭐지?]

  [스타플릿에서 당신들을 공략하기 위해 만든 최고의 무기다.]


  클링온들이 웅성거렸다. 얇게 뻗은 실선들의 무리 가운데 USS VENGEANCE라고 적힌 굵은 글씨가 돋보였다. 공중을 넓게 장악한 그림을 뚫어지게 바라보던 전사가 물었다.


  [스타플릿에 이렇게 큰 함선이 있었나?]

  [저 함선은 드레드노트 급에 속한다. 스타플릿이 보유하고 있는 함선 중에서는 가장 크지. 항법 시스템과 엔진, 무기 등 함선을 만들면서 손볼 수 있는 분야는 모두 개선되었다. 무엇보다 저것은 현재 행성연합에 등록되어 있는 함선을 워프 중에도 따라잡을 수 있다.]


  기묘하게도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대신 클링온들의 안면이 씰룩댔다. 유래 없는 규모와 최신식 무기, 워프 속도 등을 탑재한 벤전스호는 누가 봐도 전쟁을 노리고 만들어진 배였다. 당장이라도 선전포고를 의결할 것 같은 표정을 읽으면서 칸은 만족스러워했다. 기타 사소한 어뢰 설계도는 보여주지 않아도 될 듯 보였다.


  그는 이제 뒤이어 이어질 게 분명한 질문을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렸다. 역시 칸은 틀리지 않았다.


  [네놈이 입은 옷을 보면 너도 스타플릿 소속인 것 같은데, 왜 이런 걸 우리에게 보여주는 거지?]


  칸은 실제로 정식 제복은 아니었지만 스타플릿의 표식이 달린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는 대답하기에 앞서 저장 장치를 회수했다. 


  [이것은 별 의미가 없다. 나는 그들에겐 배신자이자 적이니까.]

  [믿을 수 없는 얘기로군.]

  [내가 스타플릿 구성원을 납치하고, 회의체를 구성하는 고급 장교들과 제독 다수를 죽이고 그들의 건물을 파괴했는데도?]


  지구의 소식이 크로노스까지 전해지지는 못했는지 클링온들은 다시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들은 칸의 업적에 대해 더 캐묻지는 않았다. 정보통을 조금만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밝혀질 사실이었다. 클링온이 칸에게 물어볼 것은 따로 있었다.


  [서로 적이 같다는 건가. 그래, 네놈이 원하는 건 뭐냐?]


  칸은 방 안에 있는 클링온들을 쭉 훑었다. 손가락으로 저장 장치를 굴리면서 시간도 끌었다.


  [나는 너희들의 협조를 구하고 싶다. 그렇게 해 준다면 내가 너희를 전쟁의 승자로 만들어 줄 것이다.]


  그와 동시에 칸은 들고 있던 저장 장치를 탁자에 던졌다. 스타플릿 일원들도 다 알지 못하는 정보가 빙글빙글 돌면서 미끄러지다 중앙에 멈춰 섰다. 자연스레 그것을 주시하고 있던 클링온들의 시선이 칸에게로 옮겨갔다.  


  그날로 칸은 클링온과 잠정적 동맹을 맺었다.  

  


 




  마커스 제독이 태양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우주 격납고를 설치할 지점을 고민했었을 때 존 해리슨은 주저 없이 목성을 추천했다. 태양계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화성을 위시해 몇 개의 위성에만 집중되어 있었고, 두터운 가스층 때문에 탐사선이 그 주변을 잘 지나다니지 않으면서 크기는 제일 큰 목성은 무언가를 숨겨 두기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했다. 마커스는 존 해리슨의 논리적인 설명을 듣고 벤전스호를 조선 및 정박할 정거장을 목성 뒤편에 세웠다. 벤전스호는 마커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증거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는 아무에게도 함선과 관련된 사항을 알리지 않았다. 벤전스의 존재는 파이크 제독마저 모르고 있는 마커스와 해리슨만의 비밀이었다. 


  벤전스호는 칸이 스타플릿의 뒤통수를 칠 계획을 마무리하던 시점에서 이미 외관을 다 갖추고, 세부적인 인터페이스를 수정하면서 승무원들이 함선에 적응하는 절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비사나 엔지니어는 전부 정거장에서 철수했으며 출항을 기다리는 승무원은 뽑히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장 벤전스를 끌고 오라며 장교들을 배치할 권한을 가진 마커스 제독은 혼자서 그 모든 비밀을 끌어안고 사망했다. 현 시점에서 목성 뒤편은 칸에게 할당된 기지였다.


  칸은 예상된 평온함 속에 셔틀을 격납고에 세워두었다. 클링온으로부터 지원받은 쾌속선은 행성연방이 지정한 규격과는 정 반대인 독특한 외형을 과시하면서 날개를 접었다. 그는 침착하게 바닥을 짚으면서 착륙 구역에 설치되어 있을 레버 하나를 찾으려 움직였다. 정거장의 설계에도 일조했던 존 해리슨이 특별히 심혈을 기울였다는 중력장 가동 시스템은 우주에서 작업을 해야 했던 엔지니어들에게 꼭 필요한 장치였다. 


  몇 번 손잡이를 밀어내면서 주변을 탐색하자 시스템을 가동하는 레버가 보였다. 칸이 새하얀 레버를 위로 올렸다. 이윽고 중력장이 정거장 일대로 퍼져나갔고 오른쪽으로 슬며시 돌아가려던 다리에 정상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바닥에 두 발을 댄 칸은 신속하게 정거장을 가로질렀다. 


  실상 벤전스라는 이름은 과거를 새까맣게 잊고 있던 존 해리슨이 지었지만 칸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다. 멍청하게 제독의 명령만 따랐던 작자가 함선의 진정한 주인을 예측하기라도 한 것 같았다. 승무원 한 명만으로도 운항이 가능한 함선의 항법 체계도 그랬다. 존 해리슨의 유산은 모든 면에서 칸에게 유용했다.


  칸은 해리슨에게 부여된 암호를 누르고 어두운 함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걷는 속도와 통로에 불이 켜지는 속도가 비슷했다. 칸은 어둠과 빛을 한꺼번에 몰고 다니면서 함교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아무도 앉은 적이 없는 함장석이 단 하나의 승무원을 위해 바닥에 박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손에 맡겨진 함교의 차가운 공기가 참을 수 없이 마음에 들었다. 


  —승선을 환영합니다. 오리엔테이션 프로토콜을 시작하시겠습니까?


  칸이 함장석에 앉자 항법 시스템이 개성 없는 목소리를 냈다. 


  “아니, 목적지를 설정하겠다.”

  —항로 설정 기능을 작동합니다. 출항 준비. 도킹 클램프가 해제됩니다.  


  중앙 스크린이 양옆으로 느릿하게 흔들거리는 클램프를 비췄다. 우주를 바라보고 있어도 스크린은 더 이상 깜깜하지 않았다.  


  벤전스호를 붙잡고 있던 클램프가 해체된 시점은 제임스 커크 일행이 클링온들을 피해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도망치다가 겨우 엔터프라이즈로 돌아간 시간과 일치했다. 그들은 스캔으로만 확인했던 생체 신호의 정체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커크는 전송실에서 곧장 함교로 이동했다. 그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지도 못한 차림과 거친 숨소리를 정리하지도 않고 통신 장교에게 명령했다.


  “본부랑 연결해.”

  “안 그래도 파이크 제독님이 회선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통신 장교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이동했다.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는 본래 우후라의 것이었다. 이후에도 크로노스에 파견되었던 대원들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던 다른 장교들이 의자를 내주느라 잠시 함교가 부산했다. 


  “뭐야, 벌써 선전포고라도 한 거야? 일단 스크린에 띄워.”


  텅 빈 우주를 비추고 있던 화면이 밝아지면서 샌프란시스코의 전경을 등진 파이크 제독이 나타났다. 커크는 함장석에 대충 앉아 일단 미소부터 띄워 올렸다.


  “제독님, 안 그래도 보고 드리려고 했습니다. 계획은….”

  —용케 함선까지 돌아왔군.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지기에 자네 얼굴을 못 보는 줄 알았네.

  “예?”

  —막 크로노스에서 보낸 공식 성명을 읽어봤어. 나나 자네가 모르는 새에 많은 일이 있었던 모양이네. 


  커크가 엉킨 머리를 툭툭 정리하면서 앉은 자세를 고쳤다. 


  “성명에서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러십니까?”

  —스타플릿 측에서 명백한 침략 의도가 드러나는 함선을 비밀리에 조선한 것에 대해 무척 유감이라는군. 금시초문이라고 했는데 그쪽에서 사진 자료를 보내오는 바람에 더 반박하질 못했네. 등록 코드가 스타플릿이 사용하는 형식과 일치했어. 게다가 스타플릿 소속 장교들이 자기네들 행성에 허락도 없이 들어와 싸움을 걸었다더군. 


  고생 끝에 사지에서 탈출한 커크는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말도 안 되는 억지입니다. 페이저건을 살상 모드로 맞춰놨던 것도 아니고, 그쪽에서 죽자고 쫓아오는데 목숨은 건져야 했습니다. 정당방위였다고요!”


  “맞습니다. 저희는 끝까지 교전 상황을 피하려 애썼으며, 발포 목적 역시 대부분 엄호 사격이라든가 경로 방해가 대부분이었습니다. 부상을 입은 인원이 있을지는 몰라도 저희가 먼저 싸움을 걸었다는 건 부당한 억측입니다.”


  스팍이 적절하게 거들어주자 커크가 열의를 다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자네들이 클링온과 부딪힌 건 사실이었지 않나. 전투에 특화된 함선을 눈으로 직접 봤는데 오해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네. 

  “그래서 결론이 뭡니까? 저희한테 책임을 지라는 겁니까?”

  —그렇게 간단했으면 차라리 좋겠군.


  파이크 제독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무거운 숨소리가 첨가되지 않았어도 그의 표정은 충분히 착잡해 보였다.


  —서둘러 귀환하게. 전쟁이 터지면 자네들이 가장 피해야 할 곳이 크로노스 아닌가.







  전통적으로 센티넬의 행동 뒤편에는 언제나 그들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박사들에게 매달리던 연구소 시절부터 자신의 몸도 신경 쓰지 않고 인간들을 난도질했던 진화전쟁까지, 센티넬들은 자신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명분을 갖고 있었다. 가이드의 부재에 휘청거릴지언정 그들은 역사에 기록될 만한 이성을 보유한 존재들이었다. 


  2세기 간 전쟁을 일으킨 대가를 치른 칸이 또 다시 전쟁을 부추기는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에겐 시간이 필요했고 레너드 맥코이도 되도록 오래 데리고 있어야 했다. 이를 위하여 칸은 스타플릿에게 존 해리슨이라고 알려진 자신보다 더 위협적으로 보이는 적인 클링온을 붙여준 것이었다. 설사 그들이 존 해리슨과 레너드 맥코이를 기억하고 있어도 그들에게 관심을 기울일 틈이 없도록 말이다. 전쟁의 사나운 빛과 먼지가 두 세력 사이를 어지럽게 통과하는 동안만큼은 칸은 여유롭게 연구에 집중할 수 있으리라. 


  “혹시 당신이 하고 있다는 그 연구가 가이드와 연관이 있는 거야?”


  자신에게 주어질 시간을 계산하면서 걸음을 옮기던 칸은 근거지로 돌아오자마자 고개를 치켜든 레너드 맥코이의 말을 들었다.  


  “그래서 날 잡아 놓고 있는 거냐고.” 


  칸은 대답 없이 레너드를 지나쳤다. 자신이 두고 갔던 맥코이와 헤이스팅스의 저서가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책상 근처를 어슬렁거린 모양이군.”

  “뭐, 움직일 수는 있으니까.”

  “조만간 발에 더 무거운 걸 채워주도록 하지.”


  레너드는 지금 당장 쇳덩이를 가져와도 이상하지 않을 남자의 싸늘한 눈빛에 답답함을 느꼈다. 그는 여간해선 자신과 대화할 마음이 없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레너드는 작전을 바꿔 직설적인 말부터 던졌다. 


  “날 고문하면서 나도 모르는 정보를 실토하라고 협박하지 않는 건 좋은데, 당신은 나한테 숨기는 게 너무 많아.”


  엇갈린 두 책을 포개던 범죄자의 두 손이 책상 위에서 정지했다.


  “무슨 일인 진 모르겠지만 밖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어. 간간히 들리는 소리를 헤아려보면 여기가 썩 좋은 환경도 아닌 것 같고. 당신이 걱정 없이 외출하는 것도 그래. 내가 손발이 자유로워지더라도 쉽게 도망치지는 못하리란 확신이 있어서일 거야. 근데 그렇다고 당신이 스타플릿이랑 몸값을 협상하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아.”


  레너드가 미간에 힘을 주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책 대신 가구의 모서리를 잡은 남자가 감정 없는 안구로 그에게 답했다. 


  “좋든 싫든 얼굴 좀 보고 지낼 사이면 얘기를 해 보란 말이야. 난 아직까지 당신 정체도 모른다고.” 

  “레비나스의 책을 봤나?”


  앞의 대화와 도무지 관련성을 찾을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레너드는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긍정했다. 


  “…당연하지.”

  “그렇다면 너는 이미 나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 두 책은 센티넬과 가이드라는 집단을 다루고 있지, 특정한 개인을 소재로 삼은 게 아니야.”


  남자는 조용히 눈을 깜빡였다. 레너드는 덕분에 혼란스러워하며 책 내용을 돌이켜보았다. 남자는 노골적으로 레너드에게 다시 생각해 볼 걸 촉구하고 있었지만 레너드는 자신이 했던 말에서 잘못된 점을 찾지 못했다. 납치범의 친절함은 거기까지였다.  


  “너에게 감옥과 족쇄 중 무엇이 어울릴 지는 조금 고민해 봐야겠군.”


  남자가 코트를 벗었다. 대화가 더 이상 이어질 만한 여지는 없었다. 레너드도 상체를 돌렸다.


  레비나스 맥코이와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공통적으로 센티넬을 파고든 연구가들이었다. 이들은 예외 없이 종족의 이름으로 표기된다. 그들이 똑같이 불쌍히 여겼던 오필리아 밀레이스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 역할을 다 했다. 책에서 중요하게 등장한 고유명사를 최대한 곱씹어본 레너드는 자신이 커다란 걸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레너드는 입술까지 살짝 벌린 채 센티넬의 지도자를 바라봤다. 칸 누니엔 싱이 자신의 피가 담긴 시험관을 기울이고 있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0. Accidents 



  가판대에 꽂아져 있는 우주력 2259년 56일자 신문은 유래 없는 기하학적 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것은 1면에 실어도 아깝지 않은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데에 관한 신문사의 대처법이었다. 네모난 파이 조각마냥 나뉜 신문의 첫 페이지에는 차례대로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런던이 테러 위험에 노출되다

  모처럼 밝은 날씨를 맞이했던 런던의 오후는 다시금 어두워졌다. 런던에 위치해 있는 스타플릿 산하 캘빈 기록 보관소에서 대규모 폭발이 일어나서다. 폭발의 근원지가 지하로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건물이 붕괴될 정도로 피해가 컸던 이번 사고에 대하여 조사 당국은….


  칸은 정모를 눌러쓴 까무잡잡한 장교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본 뒤 자리를 옮겼다. 남자가 자신의 요구를 똑바로 이행할 것인지 지켜볼 필요가 있었다. 센티넬의 속셈을 간파해낼 리가 없는 사람들은 부지런히 캘빈 기록 보관소 주변을 지나다녔다. 런던에서 유독 환대받는 햇빛이 예정된 폐허로 내려앉았다.


  그는 자욱한 연기마저 물리치는 강인한 시력으로 보관소를 응시했다. 자신의 평화마저 쉽사리 받아들이지 않는 그에게 의심과 감시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칸은 나무토막마냥 무방비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을 차근차근 지워내고 우뚝 솟은 기록 보관소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었다. 그것은 곧 부서지고 말리라.


  센티넬에게 예지력까지 부여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칸은 이미 일어난 사건에 관해 논할 뿐이었다. 

캘빈 기록 보관소가 폭발했다.







  스타플릿의 심장부 역시 안전하지 못했다

  낮에 벌어졌던 기습적인 테러를 수습하기도 전에 스타플릿은 또 다른 비극을 맞이했다. 보관소의 폭발 사고와 관련, 대책을 마련하고자 데이스트롬 회의실에 모였던 스타플릿의 함장과 부함장 다수가 셔틀의 폭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희생자 중에서는 알렉산더 마커스 제독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스타플릿에서는 캘빈 기록 보관소에 폭탄을 설치했던 장교의 메시지를 토대로 존 해리슨 중령을 두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했다. 스타플릿은 그가 긴급 상황 시에 대령 급의 장교들이 회의실로 불려가게 된다는 공식 규정을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히고, 조직적으로 테러를 벌인 동기를 파악 중이라고 밝혔다. 현재까지 용의자의 위치는 파악되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은 흐릿하게 들려오는 소음을 듣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등진 유리창 너머가 기이하게 밝아졌고 거센 바람이 부는 소리가 났다. 목에 힘을 주거나 탁자와 거리를 벌리는 이들이 늘어갔다. 불길한 달빛이라도 모여드는 듯했던 창문 크기의 하늘에 1인용 셔틀이 틀림없는 검푸른 형체가 나타났다.    


  “도망치세요!”   


  커크가 몸을 낮추자마자 통유리가 깨졌다. 그의 외침이 단번에 사람들의 비명 속에 녹아들었다.


  첫 포격으로 겨우 통성명을 나눈 새 함장을 잃은 스팍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상관이기도 했던 커크를 보았다. 커크는 어느새 바깥으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오랜 경험상 그가 꽁무니를 빼고자 움직일 성미는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스팍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빠르게 떠올렸다. 그 와중에도 벌칸의 발밑에는 브래드버리호의 함장을 위시한 시신들이 쌓여갔다.


  그 때 스팍의 눈에 크리스토퍼 파이크 제독이 들어왔다. 스팍은 끊임없이 교차되며 데이스트롬을 어지럽히는 빔을 피해 파이크 제독 쪽으로 다가갔다. 파이크 제독은 벽에 몸을 밀착시키고 지원을 요청하고 있었다.


  “우선 밖으로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파이크 제독은 스팍을 보고 잠시 놀랐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독의 팔을 단단히 잡은 스팍이 벽을 따라 이동했다. 그들이 빔이 닿지 않는 곳을 살금살금 지나는 동안, 그들의 움직인 발자국 수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다. 


  스팍은 파이크 제독을 무사히 구석으로 대피시키고 나서 하얀 벽면을 꽝꽝 두드리는 커크를 발견했다. 커크는 소방용 호스를 뽑고 있었고 그의 눈빛이 향하는 곳에는 폭격을 멈추지 않고 있는 셔틀이 있었다. 커크는 예상대로 정체불명의 적을 막는 데 온갖 힘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스팍은 그동안 한 명의 생존자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아수라장이 된 회의실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문제의 셔틀은 데이스트롬을 먼지 더미로 만들 작정인 듯했다. 근처에서 내부를 살피려던 스팍은 신발코를 아슬아슬하게 스쳐간 레이저 불빛을 보고 다리를 바싹 붙였다. 금이 가고 조각난 공간이 더욱 잘게 쪼개지는 소음 사이로 더 이상 신음하는 소리도 섞이지 않는 것 같았다.  


  한쪽 다리를 어중간하게 접은 채 숨을 몰아쉬고 있는 마커스 제독 역시 살아 있는 이들을 찾을 수 없는 음울한 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셔틀이 쏘아대는 빛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커스는 입술을 깨물면서 부서지지 않은 벽에 두 손을 붙이고 조금씩 옆으로 이동했다. 집착적인 레이저가 제독의 가슴팍을 뚫은 건 그 순간이었다.


  움직이는 그림자를 목격하고 행동을 개시하려던 벌칸은 상처를 입고 스르르 내려앉는 마커스 제독에게 달려갔다. 두 갈래로 퍼부어지던 빛이 하나 꺾인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스팍은 주저하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커크가 기지를 발휘해 셔틀을 무력화시키는 데 성공한 모양인지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스팍이 마커스의 상처를 확인했다. 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기 어려워 보일 정도로 출혈이 막심했다. 스팍은 말없이 죽어가는 제독의 얼굴을 향했다. 그의 표정에서는 고통스럽다기보다는 무언가를 분하게 여기는 감정이 노출되고 있었다. 


  스팍은 제독이 중요한 사실을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안타깝게도 스팍은 제 때를 맞추지 못했다. 







  학회장에서도 폭발 사고

  같은 날 오전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개최 중이었던 제 36회 인간학 학회가 원인 불명의 폭발로 인해 중단되었다. 지역 경찰은 수제 폭탄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으나, 가스 누수 등 일반적인 이유로 인하여 발생하는 폭발보다는 위력이 월등했다는 점 때문에 고의적으로 자행된 범죄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수사에 착수했다고 알렸다. 또 경찰은 사상자는 없었으나 사건 당시 강연을 하고 있던 스타플릿의 레너드 맥코이 소령이 실종되었음을 밝혔다. 현재 스타플릿은 앞서 일어난 두 사건과 소령의 실종에 연관점이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레너드 맥코이는 여운을 남기며 흔들리는 종처럼 진동하는 머리를 털며 낑낑댔다. 그가 여태껏 무서워하고 있는 우주에서도 경험해 본 적 없는 불편한 감각들이 온몸에 엄습해왔다. 레너드는 세차게 머리를 치켜든 다음 눈동자를 굴렸다. 


  자신의 손과 발이 묶인 모습은 끔찍하기는 했어도 놀랍지는 않았다. 폭발이 터진 장소에서 사람을 언뜻 닮은 무언가를 봤었으니 몸이 멀쩡한 상태에 놓여 있을 리는 없었다. 그런데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물건들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의 신세에는 이상한 점이 많았다. 꼭 이삿짐처럼 뒤엉켜 있는 물건들은 기괴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사이언스 클래스에 속한 스타플릿의 장교에게도 낯설 정도로 이지적이었다. 레너드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팔만 몇 번 움직였다.


  “대체 이게 뭐람….”


  그가 작게 투덜댔다. 보기보다 묶여 있는 투명한 줄이 억세서 손목을 조금 비트는 것도 버거웠다. 주머니 안에 언제나 감돌고 있던 커뮤니케이터의 묵직한 감각도 사라진 지경이라 레너드는 입술만 비죽였다. 일단 납치범의 얼굴을 보고 그에게 동기를 캐묻는 것 이외에 레너드가 할 수 있는 일는 없어 보였다.


  문득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있다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어 레너드가 등을 곧게 폈다. 어둠 속에서 시계를 수색하는 그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렇다면 내가 넋을 놓고 있던 시간이… 어?”


  레너드는 갑작스레 눈앞을 떠도는 백금빛 입자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의 전신이 입자에 휘감겨 있었다. 그의 도주를 봉쇄하기라도 하듯이 빼곡하게 배치되어 있던 물체들 역시 백금색 빛으로 반짝였다. 영문을 몰라 눈썹을 구부리고 있던 그는 이윽고 그것이 엔터프라이즈의 전송실에서 자주 보았던 트랜스포팅의 흔적임을 깨달았다. 


  “뭐, 뭐야!”


  당황한 레너드가 팔다리를 질서 없이 흔들어댔다. 물론 그것으로 트랜스포팅을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수색대가 그의 행방에 관한 단서를 잡기도 전에 어딘가로 다시 사라지고 말았다. 커크의 방해로 존 해리슨 중령이 어쩔 수 없이 휴대용 트랜스포터 장비를 작동시킨 시점과 일치했다.







  지구 바깥에 사는 이른바 외계 종들 중에서 인류와 흡사한 축에 속한다는 클링온은 지구처럼 비옥하고 날씨 좋은 곳에 정착하지는 못했다. 클링온의 모(母)행성은 크로노스라고 불리는데, 자원이 바싹 메마른 땅에 인간들이 형성할 법한 도시와 부락이 곳곳에 갖춰져 있었다. 행성 특유의 모래폭풍과 건조한 번개를 이겨내고자 단단한 철로 만들어진 건물이 클링온들이 형성한 주거지의 랜드 마크라 할 수 있었다.


  클링온들은 어느 곳을 가도 마찬가지인 행성의 심술궂은 환경에서도 저마다 땅을 잡고 살아갔다. 그 생명력 강한 종족들은 케사라는 곳을 제외하고는 크로노스의 땅을 한 톨도 허투루 쓰지 않았다. 물론 그곳 역시 아무런 이유 없이 황무지로 전락한 것은 아니었다. 다른 지역보다 몇 배는 사나운 바람과 천둥, 번개가 휘감고 있는 케사는 도저히 생명을 끌어안을 수 없는 장소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바로 그러한 곳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동굴을 연상시키는 석벽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를 듣고 자신이 범상치 않은 환경에 처박혔음을 알았다. 잔뜩 엉킨 한숨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나왔다. 


  워프에 소요되는 몇 십초 동안에도 묶인 손목의 고통은 더욱 심해졌다. 레너드는 가만히 앉아서 정면만 바라보기로 했다. 코끝을 불편하게 간질이는 공기나 벽의 질감을 고려하자면 이곳은 훨씬 낙후된 환경이었는데, 도전정신이 강한 과학자가 당차게 꾸며놓은 연구실마냥 갖춰져 있는 기계나 시설은 달라진 게 별로 없었다. 그걸 보고 레너드는 자신의 상식이 쓸모가 없을 거란 결론을 내렸다.


  마침 옷자락이 사각거리는 옅은 소음이 그의 귓가로 다가왔다. 그는 인기척의 정체를 확인하기 전에 일부러 목청을 높였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제정신이야? 스타플릿 장교를 납치한 죄는….”


  레너드는 범죄자와 눈을 맞대고는 슬며시 입을 다물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는 바람을 막기 위해 덮어쓰고 있던 후드를 벗고 레너드를 마주했다. 남자는 입을 놀릴 자격이 없는 저급한 생물을 보듯이 그에게 무감한 시선을 던졌다. 


  남자는 깨끗이 레너드를 무시하고 그와 같이 딸려온 짐들을 각 자리에 옮기기 시작했다. 레너드에게도 익숙한 유리 접시라든가 화학약품 등이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저절로 그의 손바닥에 있는 주름 사이사이에 식은땀이 찼다. 레너드가 남자의 등에 대고 다시 소리쳤다. 


  “이봐, 날 어떻게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설명은 해 주는 게 도리 아냐?”

  “나는 실험체의 입술에서 샘플을 채취하진 않을 거다. 나한테는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유리 제품이 매끈한 표면에 놓이는 소리와 남자의 음성이 기묘하게 어우러졌다. 레너드는 그 날카로운 조화와, 남자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잔혹한 표현에 눈을 크게 떴다. 


  “조용히 하지 않으면 그 입을 도려내 바깥으로 던지겠다.”


  레너드는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다시 실험 도구가 달그락대며 정리되었다. 


  레너드 맥코이에게서 완전히 뒤돌아선 칸은 이미 경고를 마치고 사라진 자신의 목소리를 사고 안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실험체였던 그가 처음으로 누군가를 가지고 실험을 하는 위치에 선 것이었다. 칸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악독해질 것이었다. 그가 센티넬이고, 뒤편의 겁먹은 스타플릿 장교가 레비나스 맥코이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가이드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커크는 잠에서 덜 깬 듯이 몽롱한 머리를 이고 눈을 껌뻑거렸다. 도심에서 떨어진 곳의 맑고 차가운 공기마저 그에게 협조를 하지 않고 안개마냥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커크는 숨을 위로 크게 내쉬었다. 숨을 쉬는 소리 정도는 다행히 주변의 우울한 분위기를 들뜨게 만들지 않았다.


  회의실이 습격당하면서 발생한 인명 피해는 상상 이상이었다. 함선 대여섯 개가 순식간에 함장과 부함장을 잃어 떠돌이 신세가 되었고, 제독들에게만 허락된 간부 회의장라든가 특급 라운지는 꽤나 오래 이용객들을 받지 못할 전망이었다. 이렇다 보니 알렉산더 마커스 제독의 장례식이라 해도 조촐하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구실과 절차를 맞추기 위해서 왔던 장교들도 가 버리자 주변은 금세 적막해졌다.  


  흙과 풀로 덮인 제독의 마지막 자리를 무의식적으로 응시하고 있던 커크가 눈동자를 돌렸다. 그에게 익숙한 회색빛 뒤통수가 고개 숙인 금발의 여인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에겐 무척 다행스러우면서 어쩐지 미안함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들이 섞인 모습이라 커크는 결국 땅바닥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팍이 파이크 제독을 구출해낸 건 대단한 희소식이었다. 그것이 지금 커크가 위안 삼고 있는 유일한 낭보였다.


  관이 땅 속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만큼이나 어깨 위가 무거워지는 기분에 커크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옆을 감쌌다. 그 덕에 커크는 자신의 시야로 파이크 제독의 신발이 포착되었을 때야 겨우 허리를 폈다. 파이크 제독이 커크의 등을 두들겼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스타플릿 역시 맥코이 소령을 수색하는 작업에 참여하게 될 거야.”

  “아, 예. 물론이죠.”


  커크는 일단 대답을 한 뒤에 머리칼을 매만졌다. 파이크 제독은 그가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 말고 무언가 더 이어질 게 있음을 눈치 채고 커크의 앞을 지켰다. 


  곧 커크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본즈를, 아니 닥터 맥코이를 납치해갈 정도로 원한이라든가 안 좋은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그에 대해서라면 자네가 몰랐던 게 있네.”


  파이크 제독이 누군가에게 손짓을 보냈다. 제독의 부름에 응한 인물은 방금 전까지 그와 나란히 있었던 여인이었다. 여인은 걸어오면서 양 손등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물기를 닦았다. 


  “이런 얼굴로 인사드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커크 대령님. 캐롤 마커스 대위입니다.”


  하얀 피부 덕분에 그녀의 빨간 눈가가 돋보였다. 커크는 덩달아 눈 주변을 찡그리면서 캐롤과 악수했다. 사실 커크의 옆에는 스팍도 있었지만 뒷짐을 진 벌칸의 자세가 난공불락과 같아서 캐롤은 스팍과 눈인사만 나누었다. 


  “제 생각에는 존 해리슨이 맥코이 소령님을 데려갔을 거라고 봅니다. 그에게는 소령님 같은 분이 필요할 거거든요.”


  커크가 단번에 안면을 구겼다. 


  “…뭣 때문에 그렇게 확신하는 거죠?”

  “센티넬에겐 꼭 가이드가 있어야 하니까요. 존 해리슨은 200년간 세상에서 자취를 감추었던 강화인간, 즉 센티넬입니다.”

  “해리슨이 센티넬이라는 건 어디서 얻은 정보인가? 대위 말처럼 센티넬은 200년 전에 봉인되었고, 그 뒤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전혀 없었어.”


  금방 말이 튀어나올 것 같던 커크의 입술이 이리저리 꼬물거리기만 하자 스팍이 대신 물었다. 이에 캐롤이 눈꼬리를 살짝 찡그렸다. 대답을 고르기 위하여 자연스럽게 나온 표정일 테지만, 꼭 좁아지고 휘어진 그녀의 눈끝으로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았다. 


  “그가 어디서 나타났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확실한 건 제 아버지가 그를 소개시켜주었고 저는 짧게나마 그의 가이드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캐롤 대신 최고의 센티넬에게 선택받은 가이드는 온 구석이 저리는 몸을 끌어안은 채 자신을 방치하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납치범은 레너드가 입을 놀리는 것부터 꿈틀대는 것까지 그 어떠한 행동도 용납하지 않을 태세였다. 레너드는 피가 제대로 돌지 않는 사지를 최대한 오므리고 피면서 혈액을 순환시키려고 애썼다. 


  그러던 와중 레너드는 엉덩이를 움직이다 옆에 서 있던 흉흉한 형태의 라이플을 건드리고 말았다. 무기가 돌바닥에 떨어지는 소리는 컸다. 레너드가 눈꺼풀을 찔끔대며 납치범의 검은 등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남자는 레너드를 돌아보기 전에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친근한 주사기의 바늘이 반짝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눈동자를 파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싸늘한 분위기에 레너드가 침을 삼켰다.


  “어….”


  당황한 음성이 멋대로 새어나왔지만, 더 이상 목소리를 냈다간 가뜩이나 불편한 몸이 더욱 화를 입을 것 같아 레너드는 스르르 침묵했다. 남자가 앉아있던 의자가 옆으로 돌아갔다.


  레너드는 일어난 남자의 손에 주사기가 들려있는 걸 보고 본능적으로 피스톤 안부터 확인했다. 안은 비어있었다. 주삿바늘로 귓구멍이라도 찌르려는 것은 아닐까 긴장하고 있던 레너드의 눈앞을 점령한 남자는 말없이 그의 옷깃을 걷었다.  


  “뭐, 뭐하는 거야?”


 남자가 든 주사기는 완고하게 레너드의 핏줄로 파고들었다. 


  “내 피는 왜 가져가는 건데!”

  “조금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너는 실험체로 이용당하기 위해 여기 왔다.”

  “…내가 왜?”


  그것은 레너드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물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차분한 손과 몇몇 의학적인 솜씨를 제외하면 자신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주삿바늘이 피부 밑을 찌르는 고통은 사라지고 이 상황을 어떻게든 분석하길 원하는 의문이 범죄자와 장교 사이를 맴돌았다. 


  하얗던 주사기가 레너드의 혈액에 힘입어 붉어졌다.


  “내가 어떤 존재인 것 같나.”


  레너드가 미간을 찡그렸다.


  “무슨 소릴 듣고 싶은 거야. 납치범? 사람을 실험체로 쓰겠다는 사이코패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네가 내 연구에 투입되어야 하는 것이다.”


  남자의 표현법은 기이했다. 사람과 올바르게 대화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거나 일평생을 무기질 속에서 살아온 것만 같았다. 남자는 안이 꽉 찬 주사기를 회수했다. 소독약이 묻은 거즈도 가져다주지 않아 레너드는 짜증이 난 얼굴로 소매를 내렸다. 꼭 자신을 씻을 수 없는 악연으로 여기는 듯한 남자의 불친절함에 서서히 눈썹이 꿈틀대던 참에,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던 범죄자가 처음으로 자신의 본심을 고백했다. 


  “이딴 일방적인 관계는 하나도 반갑지 않아.”


  칸은 자신의 지척에서 중얼대는 레너드 맥코이의 목소리를 들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가이드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궁극적인 안정을 한 번 맛본 육체는 200년 전보다도 격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렇지만 더 이상 되찾을 기억도 없는 센티넬은 끝내 가이드의 숨결과 멀어져 주사기에 담긴 두 종류의 혈액을 옮겼다. 


  칸이 레너드가 알아채지 못하게 시선을 잠시 뒤로 돌렸다. 레너드는 손발에 묶인 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드라고 센티넬의 심정을 헤아려 그들을 돕는 게 아니었다. 되레 가이드는 센티넬의 요구가 없이는 자신이 움직일 명분조차 찾지 못하는 아둔한 족속이었다. 센티넬과 가이드 사이에 상호교류는 없다.


  칸은 도저히 그런 존재에게 의지하면서 살 수는 없었다.


  유리로 만들어진 실험 도구가 어딘가에 마찰하는 소리와 마른 폭풍이 치는 소리가 간간히 울려 퍼졌다. 가이드를 처음 만나기까지 소요된 200년이라는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센티넬이 단호하게 가이드로부터 독립을 선언한 현장은 그토록 고요했다.



[HOI/Khan] Utility of Slaughter

- Star Trek Into Darkness/Full-length 2014. 5. 16. 11:32 posted by Jade E. Sauniere

- History of Independence, for Khan Noonien Singh

- 2014/05/14

- Written by. Jade





Utility of Slaughter

 

 

 

  한 작곡가가 찬양한 강이 30개의 조각상으로 둘러싸인 다리 아래를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다리에는 누가 붉은색 페인트 붓을 휘두른 것처럼 빨간 점이 군데군데 묻어 있었으나 모양은 멀쩡했다.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건물은 그런 대로 제 모습을 지키며 서 있었다. 색채가 조금 달라졌을 뿐 섬세한 건축물들이 가진 아름다움은 여전하다.

 

  강물이 은은한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해가 긴 계절에서부터 시작되었던 한 무리의 여정은 어느새 낙엽과 눈과 꽃을 거쳐 다시 여름에 닿아가고 있었다. 잠깐 피와 무기로부터 자유로워진 센티넬은 가만히 주변의 정경을 바라보았다. 크리스털을 파는 가게에 파묻혀 있는지, 유명 작가의 기념관에 늘어져 있는지 센티넬의 동료들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성자가 가득한 다리를 벗어나진 않을 것이었다. 그가 다리 주변을 벗어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센티넬은 땅바닥에 앉았다. 강가 근처에 있는 그의 머리칼이 흔들거렸다. 이 지역에 처음으로 와보는 그는 아주 약간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강변에 모여 있는 조류들을 관찰했다. 그것들은 오리라기에는 몸집이 컸으므로 아마 백조일 듯했다. 조금 탁한 하얀색, 반점이 있는 하얀색, 관리가 잘되어 깨끗한 하얀색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백조들은 그들이 하고 싶은 대로 주변을 돌아다녔다. 백조들은 자신들을 지켜보는 존재가 이 땅의 인간들을 땅속으로 추방시켜버린 장본인이라는 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센티넬 역시 한가롭게 강바람을 즐기러 나온 사람처럼 앉아 있었다.

 

  백조들의 부리가 벌어졌다. 센티넬은 그들의 소리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들은 목이 비틀린 마냥 거슬리고 시끄러운 고성을 내질렀다. 자연이 내뱉는 꾸밈없는 소리를 처음으로 들어보는 센티넬은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백조들이 우는 걸 주의 깊게 들었다. 센티넬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춤을 췄던 현장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은 점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가 사람들의 비명에 휩싸여 살아가는 존재라는 걸 알았다면 백조들은 십중팔구 화를 냈을 것이었다. 센티넬이 판단하기에는 죽어가는 인간의 마지막 발악 같은 울음이 꾸준하게 강 주위를 채웠다.

 

  백조 한 마리가 물속으로 들어가려는지 뚜벅뚜벅 돌멩이를 밟으며 걸어왔다. 센티넬은 상체를 비틀어 그것을 보고 있다가 살짝 자리를 옮겼다. 덕분에 백조는 자신의 경로를 고수할 수 있었다. 까만 센티넬과 하얀 새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수려한 경관으로 이름을 날렸던 강가에서 그럴듯한 풍경을 자아냈다.

 

 

 

(BGM : See What I've Become by Zack Hemsey)

 

  오로지 인간만이 사라진 평화였다. 

 

  센티넬은 인간이 아닌 다른 종과 교류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들이 사랑하거나 미워할 수 있는 여지를 줄 수 있는 종도 인간뿐이다. 그리고 센티넬을 통솔할 수 있는 자가 하필 눈을 뜨자마자 자신이 인간들의 실험체로 이용당하게 될 거라는 것을 깨달아버렸기에, 인간이 센티넬로부터 전자의 감정을 받게 될 가능성은 사라졌다. 센티넬의 가슴을 자극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간들은 신속하게 센티넬의 증오와 원망과 분노를 손에 넣고 놓아주지 않았다.

 

  센티넬은 자신의 손에 백조들에게 줄 것이 없음을 아주 희미하게 안타까워하며 백조들이 헤엄치는 걸 응시했다. 그가 백조들과 어울릴 수 있는 건 그가 특별히 새에 애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사실 센티넬은 인간을 제외하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다. 센티넬이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미움은 인간들이 다 가져갔다.

 

  백조들이 다시금 울었다. 벌써 그것들의 울음소리에 적응된 센티넬은 편안하게 귀를 열었다. 

 

  센티넬과 백조의 조화 뒤편에는 감정을 마치 계량컵으로 떠서 이쪽저쪽에 옮길 수 있는 듯이 여기는 센티넬들의 사고방식이 버티고 있다. 만일이라도 그가 센티넬의 사고관에 대해서 설명할 기회를 얻게 된다면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할 준비를 하리라. 물질과 화합물에 대해서 통달한 자들은 세상을 자신이 이해하기 쉬운 물질과 화합물로 치환시켜서 받아들인다. 마치 돈을 셈하는 데 능한 사람이 자신을 둘러싼 관계를 자연스레 경제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비슷했다. 고로 자신의 몸뚱이를 파악하는 행위가 곧 과학이었던 센티넬은 무엇이든지 질량을 느낄 수 있는 한 대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자신의 증오를 다 인간에게 뺏겨버린 센티넬은 인간 외에 다른 것들을 적대할 줄을 모른다. 센티넬은 인간의 파괴자이지만 동시에 자연의 수호자일 수 있다.

 

  전투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몇몇 기물 파손이 아니라면, 주변 건물에는 별다른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채 인간들만 쓸어 담는 센티넬의 행동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을 것이다. 그들은 인간에게 했듯이 건물까지 잔혹하게 대해야 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일견 따뜻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눈동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람을 거부하지 않았고 헤엄치는 새들의 날갯짓을 조용히 감상했다. 

 

  인간을 제물로 바쳐 평온함을 얻은 자연과 건축물들은 오늘도 변함없이 강과 어우러졌다. 그곳에 인간이 없는 이상, 센티넬 역시 그 무리에 끼어 안락할 수 있었다.







  - 한역제목은 '살육의 공리' 혹은 '살육의 유용성'. 살육 혹은 학살이라는 말은 인간에게만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을 한 번 상기해 주십시오.
  - 해당 글의 영감은 지금 읽고 있는 이영도의 『눈물을 마시는 새』로부터.


[STID/존본즈] Come Home (for Ev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4. 4. 27. 21:42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2014/4/25

- Written by. Jade

 

Come Home

 

 

 

  맥코이는 환영처럼 노을을 보았다. 깜깜한 우주에 언뜻 주황빛이 스친 것 같았다. 맥코이는 이 따뜻한 환영에 놀라 자리에서 가만히 있질 못했다. 아름답지도 낭만적이지도 않은 환영이었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잘 데워진 찻잔 안에 파문 없이 담겨 있는 홍차처럼 달콤한 노을색이 아니라, 온갖 미지를 다 삼켜버린 검은 우주를 꿰뚫는 셔틀의 노즐이 내뿜는 따가운 하얀 빛이었다. 

 

  제복을 입지 않은 사람들이 일렬로 배치된 침대에 누워 있거나 자유롭게 앉아 있었다. 간호사는 방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사람들을 돌봤던 상관을 바라보았다. 그는 평소에 힐끗거리기도 싫어하는 창밖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셔틀은 나타나지 않았다.

 

 

 

 

 

 

  맥코이는 오래간만에 자신이 우주에서 할 일이 생기겠거니 하는 생각만 갖고 있었다. 의술을 연마한 사람들은 어디에서나 필요하지만, 사실 그들이 가만히 손을 놓고 있을수록 전체적으로는 이득인 게 사실이었고 근래 들어 엔터프라이즈호는 함장이 의무실에 들락거리지 않을 정도로 빼어난 순항을 반복하고 있었다. 출항과 귀환을 네 차례 정도 반복한 항해 일정 가운데서 맥코이는 한가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개발지 탐사 목적으로 몇 십 명의 사람들이 둥지를 틀고 있는 외행성에서 자체적인 폭발 징후가 감지된다며 구조를 바라는 연락이 들어왔다. 커크는 이를 눈을 반짝이면서 스타플릿의 소명 의식을 주창할 기회로 삼았고, 맥코이에게는 침상을 세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행성이 눈 깜짝할 새에 폭발하는 징조가 노을이라는 현지인의 정보는 승무원들에게 잠깐 이야깃거리를 제공했다. 그들은 외행성의 바깥 위성으로 나가더라도 노을을 볼 수 있다는 게 폭발의 중요한 단서라고 귀띔했다. 한편 그들은 또 한 가지 중요한 정보를 얘기했다. 

 

  —그리고 오실 때 좀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예?”

  —스타플릿이 가진 함선보다 더 성능 좋은 배가 어디있겠습니까만… 이 부근에는 우주 해적들이 자주 출몰합니다. 규모도 꽤 크고 조직적이라서 함부로 우습게 볼 수 없는 놈들입니다.

 

  커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지금까지 그 곳에선 어떻게 지내셨습니까?”

 

  —놈들은 이태까지 사람을 해한 적은 없습니다. 아무래도 저희처럼 행성에 파묻혀 있는 광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해 떨어지면 곧장 집에 웅크리고 있었죠. 놈들이 강탈해 가는 것들은 목숨 값이라고 생각하면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습니다.

 

  “스타플릿에 진즉 신고를 하셨으면 도움을 받았을 텐데요.”

 

  —일종의 정보 유출 같아서 지금까지는 잠자코 있었습니다. 행성이 아예 날아갈 상황만 아니더라도 저희는 버텼을 겁니다. 여하튼 조심해서 오십쇼. 

 

  통신은 어쩐지 쌀쌀맞은 말을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커크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스팍에게 주변 행성에서 날뛰는 해적 무리가 누구인지 정확히 조사해줄 것을 지시하는 한편 함 내 최고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장교를 호출했다. 거주민들은 꼼짝없이 숨을 죽여야 할 지경으로 무시무시한 해적이었을지 모르나 커크는 태평했다. 그에겐 스타플릿의 최신형 함선과, 눈이 뒤집힌 벌칸이 겨우겨우 제압할 수 있는 강화인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크가 눈치를 보면서 의무실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환자는 아니었지만 일단 병상에 자리를 튼 외부인들이 슥 그를 돌아보았다가 시선을 거뒀다. 간호사들은 함장의 등장에 놀란 기색이었다. 한 번도 커크를 보지 않은 건 맥코이뿐이었다. 커크는 발소리도 줄이며 슬금슬금 창가에 의자를 바짝 붙이고 있는 맥코이에게 다가갔다. 

 

  “항로를 바꿨어.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중이야.”

 

  맥코이는 반응이 없었다. 커크는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꼭 데려올 거라니까. 전송실하고 함교에서 눈을 부릅뜨고 레이더만 보고 있어. 칸이 타고 있는 셔틀이 보이기만 하면 통째로 모선으로 끌고 올 거야.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본즈, 듣고 있어?” 

 

  맥코이는 이번에도 커크를 보지 않고 고개만 겨우 까딱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는 데에 관한 긍정인지, 혹은 한때 원수였던 인물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선언을 신뢰하고 있다는 의사를 표현한 것인지 커크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커크는 맥코이에게 더 말을 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시선은 우주에 꽉 붙들려 있었고 달리 이야기도 생각나지 않아서 등을 돌렸다. 맥코이가 숨을 쉬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대신 커크가 후우, 하고 크게 한숨을 뱉는 소리만 났다. 

 

  커크는 나가기 전에 맥코이의 등을 보았다. 우주처럼 진하고 어두운 파란 셔츠가 아래로 구부러져 있었다. 커크는 자신이 무언가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 맥코이가 비공식적으로 겸하고 있는 직책은, 아무래도 전 테러리스트로부터 엔터프라이즈의 뒤통수를 보호하는 하나의 일방적인 안전장치가 아닌 모양이었다.

 

  창밖을 보던 맥코이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커크는 함선이 곧 불바다가 될 행성으로 다시 접근하고 있다고 했지만, 바깥의 풍경으로는 함선의 방향이 바뀌었는지 확인할 수 없었다. 맥코이의 망막에 물기 어린 주황빛이 맺혔다.

 

 

 

 

 

 

  “한 마디로 내가 해적들을 유인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거로군.”

 

  칸이 명쾌하게 정리했다. 커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폭발이 밤에 벌어질 것 같다는 예상안이 나왔으면 상관이 없는데, 계산상 해적들이 자주 출몰하는 시간대에 구조 작업을 벌여야 할 것 같아. 무슨 공납 받아가듯 규칙적으로 나타난다고 하니까 현지에서 날아온 제보는 맞다고 봐야겠지. 해적들까지 구해줄 의무는 없고 배에 태웠다가는 더 문제만 일으킬 수 있으니, 행성 폭발에 관한 사항은 놈들에겐 가급적 비밀로 붙이려고 해.”

 

  “작전에 투입될 소형 함정은 내가 선택해도 되겠나?”

  “물론. 혹시 보조 인력이 필요하지는 않고?”

 

  이에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인간들에 대한 무궁무진한 복수심과 살해 욕구를 줄인 것만으로도 그의 입장에서는 괄목할 만한 발전이었으니, 커크는 그가 인간을 얕보는 시선마저 지적하며 고치라고 압박할 수는 없었다. 커크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격납고 쪽에다 칸한테 문을 열어주라고 해줘.”

 

  칸이 말없이 함교를 떠나고 있는 순간이었다.

 

 

 

 

 

 

  세상에게, 부디 네가 내 말을 듣고 있었으면. 혹시 내가 성급했거나 어린애처럼 구는 거라면 용서해줘. 하지만 내가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이 있거든. 나의 더 나은 반쪽이 될 수 있을 것 같고, 그릇된 곳에서 옳은 일을 하고 있고…. 그러니까 너에게 말할게. 돌아와. 내가 알고 있는 건 오직 너를 위한 싸움, 그리고 지금의 전쟁은 헛된 것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의미한 일인데.

 

 

 

 

 

 

  복도와 함교 사이의 문이 벌컥 열렸다. 함장석에 앉아 있던 커크가 목을 뒤로 젖혔다. 특별한 임무를 쥐어주지 않는 이상 엉덩이를 떼려고 하질 않는 함선의 충실한 기관실장이 쌕쌕대면서 함교로 들어오고 있었다. 커크는 의아해하면서도 손을 올려 스캇에게 인사를 건넸다.

 

  “칸은 어딨어요?”

  “방금 통신했어. 아직 행성 주변인 것 같던데, 왜? 아직 시간 있잖아?”

 

  스캇은 거의 제자리에서 뛸 듯한 자세로 팔과 다리를 굴렸다. 

 

  “그거야 그 행성 폭발이 일반적인 이유에 기인했을 때죠! 그런데 그 주변으로 지나가는 운석도 없고, 행성 내 에너지의 기류가 이상한 것도 아니에요. 한 마디로 보통 행성이 꽈광 하고 터지는 경우가 아니라는 소리죠.”

 

  “그, 그럼?”

 

  “중력 문제에요. 구제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망가진 행성의 중력이 근처 위성들과 씨름을 하다가 나 몰라라 하고 산산조각이 날 겁니다. 이러면 안정적인 비행을 할 수 있는 여유가 훨씬 짧아져요. 칸을 불러와야 해요.”

 

  승무원들의 표정이 변했다. 아무도 행성이 폭발하는 원인에 대해서는 깊게 분석해보지 않은 듯했다. 예상 밖의 진실이 함교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가운데 커크의 대처는 빨랐다. 그는 곧장 셔틀과 연결된 회선에 대고 소리쳤다.

 

  “칸, 작전 변경이야! 내 말 들려? 더 이상 해적들하고 노닥거리지 말고 거기서 나와!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귀환하라고!”

  

  그런데 모선으로 전달되는 내용이 없었다. 절대로 꾸물대는 법이 없는 강화인간의 침묵이 갑자기 커크의 뒷머리를 식혔다. 

 

 

 

 

 

 

  창가 앞에 앉아있는 맥코이의 무릎 위에는 패드가 있었다. 행성이 폭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을 재고 있는 타이머가 쉴 새 없이 숫자를 넘겼다. 사실 그것은 행성 내 거주민들이 엔터프라이즈로 무사히 옮겨 탄 지금에 와서는 효용을 다한 장치였다. 한 과학 장교가 임시로 만든 프로그램은 맥코이의 패드 안에서만 빛을 냈다.

 

  빛은 몇 분간 그의 다리 위에만 존재했다.  

 

  그 때 맥코이가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패드를 내려다보고 있었으면서 그는 패드의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무릎을 바로 세웠다. 맥코이가 잡아주지 않은 패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소리는 간호사들을 잠시 신경 쓰이게 했지만 맥코이는 개의치 않았다. 드디어 노을이 아니라 배 몇 척을 꽁무니에 단 셔틀이 나타났다. 맥코이가 의무실을 가로질러 복도로 뛰어나갔다. 망설임 없이 자신의 위치를 벗어나는 수석 의료 장교를 향해 아무도 핀잔을 주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진해지는 노을은 오히려 안개처럼 거추장스러웠다. 칸은 서둘러서 캄캄한 우주로 나갔다. 주황빛이 나는 폭발의 징조를 낭만적으로 여겼던 건 결국 갑판에 얌전히 양 발을 붙이고 있었던 다수의 승무원들이었다. 노을보다는 어둠을 찾아 나선 셔틀이 힘차게 출력을 높이며 선회했다. 끝까지 셔틀을 뒤쫓고 있던 추적 미사일이 서로 엉키면서 공중에서 터졌다.

 

  평범해 보이는 수송선은 줄어들지 않는 속도를 자랑하며 해적들을 따돌리고 있었다. 또 셔틀은 이따금씩 곡예비행을 하면서 해적선의 측면을 때리고 사라지기도 했다. 해적들은 저 셔틀에 스텔스 모드가 장착되어 있는 것은 아니냐며 투덜거렸다. 물론 그들의 추측은 사실이 아니었는데, 스텔스 모드를 남발하고 있다기에 셔틀은 지나치게 오래 날아다니고 있었다.

 

  다만 칸이 탑승하고 있는 셔틀이 특별하다는 건 맞았다. 혼자 출격하는 일이 잦을 줄을 알고 그가 언젠가 격납고를 점령해버린 적이 있었다. 칸은 그 때 셔틀을 개조하면서 각 선체를 특정 목적에 최적화시켰다. 다대일 전투에 최적화된 수송선 한 대, 엔진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 유인 및 탈출 작전에 쓰기 좋은 수송선 한 대, 상대 함선에 쇼크를 일으킬 수 있는 기능을 단 수송선 등등 격납고에 가만히 서 있는 소형 함정들만큼은 칸이 담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리고 동료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강화인간의 유일한 무기이자 부하인 셔틀은 이 순간 자신의 역할을 다 하고 있었다.

 

  노을의 영역을 벗어나자 엔터프라이즈를 찾는 일이 쉬워졌다. 칸은 자신을 구조하려는 것처럼 다가오고 있는 모선을 보고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셔틀이 위쪽으로 쑥 빠지면서 생긴 공간으로 끼어든 엔터프라이즈가 포문을 열었다. 

 

  우주 공간 안에서는 아무리 거대한 것이 폭발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 대신 강렬한 빛이 터지면서 무엇의 최후를 알리는 게 전부였다. 우주는 다시 까맣고 하얀 상태로 돌아왔다.

 

 

 

 

 

 

  선원 둘이 인사를 주고받을 겨를도 없이 빠르게 지나가버리는 맥코이의 뒤를 쳐다보았다. 이미 전송실에 한 번 다녀온 맥코이의 호흡은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의료 장교가 헉헉대는 숨소리가 복도에 길게 남았다. 셔틀이 정차하는 격납고까지는 아직 복도 몇 개를 더 지나야만 했다. 그동안 한 번이라도 침착한 자세로 숨을 고르지 않으면 그대로 늘어질 것처럼 맥코이의 입술은 하염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맥코이는 코너를 돌다가 다른 선원과 부딪힐 위기를 두 번 넘기고 계단을 훌쩍 뛰어내렸다. 환하게 불이 켜진 엔터프라이즈의 갑판이 멀어져가고 우주의 빛깔을 닮은 격납고의 영역이 차츰 그에게 다가왔다. 어딘가에서 바람이 불어주는 듯 맥코이는 잠시 시원함을 느꼈다. 그것은 체온을 가늠하기 어려운 강화인간이 이따금씩 내뿜는 냉기인지도 몰랐다.

 

  과연 그 시원함 뒤에 맥코이는 격납고 중앙에서 칸을 만났다. 맥코이는 계속 달려오느라 뜨거워진 몸을 그대로 칸에게 돌진시켰다. 우주에 나가있는 동안 더 차가워진 강화인간이 뜻하지 않은 온기를 맞이했다.

 

  셔틀을 들여보내기 위해 열렸던 격납고의 문이 천천히 맞물렸다. 묵직한 문이 철제 바닥을 끌면서 나는 소음 덕에 격납고는 조금 소란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서로를 확인하는 방식은 애초에 소리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칸과 맥코이는 편안하게 서로를 안고 있었다. 

 

  격납고 천장에 달려 있는 매입등이 작은 별처럼 희미하게 반짝였다. 





'Come Home' originally performed by Onerepublic
Covered by Michael Jade & Sara Bareilles

- 행성 폭발과 관련된 사항은 소프트맥스의 PC 게임 <창세기전 3 : 파트 2>에서 가져옴.

- Everything I can't be is everything you should be, and that's why I need you here.
내가 될 수 없는 건 당신이 되어야 할 몫, 그게 내가 여기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유입니다.


[STID/존본즈] Sympathy for the Death

- Star Trek Into Darkness 2014. 4. 27. 21:42 posted by Jade E. Sauniere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하도록.”

 

  엄숙한 자비가 눈을 찌를 듯한 불빛을 뒤통수에 두르고 칸에게 내리꽂혔다. 늘 전범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심판대에 오르는 자신의 처지가 대단히 한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칸은 온몸이 전선에 묶인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300년 전에는 첨단과 잔혹함의 절정을 달리던 극저온 캡슐 앞에서도 입꼬리를 마음대로 움직인 경험이 있으니, 그에게 피부에 차갑게 와 닿는 죔쇠라든가 패드는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시간을 준 집행인이 물러났다. 칸은 유리로 가려진 위층에서 전범의 사형 집행을 참관하고자 착석한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인물들은 많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선원들이 간간히 보이긴 했다. 간부급들이 있는 대로 집합한 것일 텐데도 숫자가 많지 않은 모습과, 또 그것이 연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복수극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어 칸은 또 다시 웃었다.

 

  “나는 오늘을 저주하겠다.”

  

  죄인에게서 물러나 있는 집행인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 무기가 없으면 그 여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유리면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굳은 얼굴로 칸의 유언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칸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이용 가능한 가치를 지닌다. 칸은 끝까지 인간들을 유린할 칼날 같은 낱말들을 혀끝에 올렸다.

 

  “이 날로서 나는 안타깝게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행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내 죄목이란 입에 담기도 거북할 정도로 무겁고 불쾌하겠지만, 300년을 살아 왔음에도 내가 미처 저지르지 못한 죄는 너무도 많다.”

 

  칸은 현재 심장을 멎게 할 전기가 공급될 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혀와 입술이 새빨갛게 빛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가령 살육만큼 사악한 욕구를 인간 여성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는 일, 무고한 인간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놓고 유유히 그들을 비웃어주는 일, 너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들과 억지로 찢어 놓는 일, 그리고 그들을 조각내 저마다의 문짝에 걸어 두면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겠군. 오, 아직도 읊을 게 많군 그래. 일생을 바쳐 축적한 재물을 강변에 던지고 모든 인간들의 보금자리를 불에 태우는 일, 그 어떠한 눈물과 기도로도 잠재울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일.”

 

  칸은 누워서 연극을 펼치는 한 명의 배우 같았다. 그는 자유롭게 음조를 조정하면서 자신의 잔인한 언어를 마음껏 강조했다. 두 손이 전깃줄과 연결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을 지도 몰랐다. 입술을 천천히 축이면서 칸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했다. 300년 전 캡슐 속에 갇힐 때는 이런 얄팍한 쾌감조차 없었다.

 

  “너희들을 위한 불행과 음모가 이토록 많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를 다 이루지 못하니 오늘이 저주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칸은 눈을 감았다.

 

  “이제 집행하도록 하지.”

 

  그는 다른 사람의 사형을 진행하는 것처럼 말했다. 집행인이 유리벽 뒤편에서 침묵하고 있는 스타플릿의 권력층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집행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죄인을 사형시키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스팍이 입 주변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커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독과 대령들이 넋을 잃었다고 해도 예정된 사형 집행이 취소되지는 않으므로, 집행인은 굳게 닫혀 있던 쪽문을 열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내부가 어두워졌다. 집행인이 혼선을 막기 위하여 차단한 전등과 상관없이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누워 있었다.

 

  강화인간의 심장을 영원히 정지시킬 스파크가 하얗게 번쩍였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2014/4/24

- Written by. Jade


Sympathy for the Death

 

 

  시간은 흘렀다. 겉으로는 잔뜩 표정을 굳히고 있지만 저마다 머리를 굴리기 바쁜 사람들의 생각도 흘렀고, 전선을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뜨거운 번쩍임도 흘렀고 칸의 피도 마찬가지로 흘렀다. 만약 그가 죽었다면 그의 몸 안에서 영영 굳어버려야 하는 피는 세상의 시간처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아무 것도 멈춰 선 게 없었다. 

 

  “젠장, 멈춰요!”

 

  끔찍하게 일관되고 있던 흐름을 잡아 세우려 한 것은 커크의 목소리였다. 그 불빛만으로도 망막을 손상시킬 지도 모를 강력한 전류는 5분이 넘도록 칸의 몸에 주입되었다. 커크는 같은 곳에 앉아 있던 장교들만 놀란 눈치를 보이고 있자 강화유리를 쿵쿵 두드리면서 다시 소리쳤다.

 

  “그만 두라고!”

 

  커크는 아직 쪽문 뒤에 있어 자신을 볼 수도 없는 집행인을 향해 손을 사선으로 내리 그었다. 집행인은 용케도 그걸 접수하고 전류를 차단했다. 생명을 없애기 위해 타오르던 불빛이 사라지고 그보다 옅은 전등의 빛이 사형당하지 못한 범죄자의 몸뚱이에 내려앉았다. 커크는 그 때 재빨리 등을 돌려 칸을 보지 않았다. 그는 커뮤니케이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칸은 얼굴을 움직여 내출혈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는 의자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스타플릿의 유력자라는 커크 함장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 집행을 중단하긴 했지만, 집행인은 그 이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전범과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기만 했다. 모두가 쭈뼛거리는 동안 칸은 생명력 넘치는 쿨럭거림으로 목구멍에 걸려 있던 핏덩이를 뱉어냈다. 뭉친 피가 중력을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인류의 심판이 실패했음을 알리는 증거였다. 유래 없이 길게 진행된 사형 집행이었음에도 인간들은 그들이 합의 안에 하나의 시신으로 격하시켜버린 존재를 데리고 가지 못했다. 장의사들이 아니라 구급대원들이 사형장으로 들어왔다. 죽지 못한 강화인간이 뿜어내는 냄새나 빛깔은 너무나 강렬했다. 구급대원들은 칸에게 아직 연결되어 있는 전선이라든가 살이 타면서 풍기는 냄새를 맡고 상황을 파악한 듯 다소 질린 표정들이었다. 어쨌든 그들은 칸을 들것으로 옮겼다. 그러면서 잠깐 드리워진 그림자를 붙잡고 칸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구급대를 호출한 커크가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스팍이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장교들은 소리를 지르거나 걸음을 걷는 법을 잠시나마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하필 그 날 레너드 맥코이는 스타플릿 본부의 의무실에 있었다. 구급 환자가 발생했음을 알리는 신호는 그를 자연스럽게 응급 병동으로 안내했다. 그가 본부와 가까이 있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거나,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었다면 맞닥뜨릴 이유가 없는 광경과 소란이었다. 맥코이는 구급대원들이 허겁지겁 침상으로 옮기는 환자의 얼굴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사형장에서 이송해온 겁니다.”

 

  구급대원 한 명이 눈치 좋게 먼저 말을 꺼냈다. 맥코이는 그 한 마디로 모든 걸 이해했다. 맥코이는 버릇과도 같은 투덜거림을 구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의사답게 환자의 환부를 살피지도 않았다. 맥코이는 입가만 간헐적으로 움찔거리고 있는 칸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이 궁금해진 칸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바람에 맥코이는 그와 눈을 마주쳤다.

 

  “신고를 하신 분은 커크 대령님이셨습니다. 아무래도 중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맥코이가 가만히 있자 구급대원은 사태를 더 자세하게 설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듯했다. 사형수가 집행 당일에 목숨을 건져서는 병실에 도달한 건 물론 이상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구급대원이 주절대는 말은 맥코이의 귓가를 스쳐가기만 했다. 그 순간에도 칸의 눈은 기력을 되찾아 주변을 맑게 닦고 있었다. 

 

  조금 뒤 맥코이가 가위를 집었다. 그가 칸의 피부에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는 섬유 조각을 떼어내면서 치료를 시작했다. 

 

 

 

 

  “이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거 참.”

 

  “차라리 목을 매다는 게 나을 뻔했어. 아니면 아예 잘라버리던가.”

 

  “23세기에 기요틴이 등장한다는 건 그래도 썩 좋아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럼 전기의자에 앉아도 죽지 않는 놈을 어떻게 죽여야 한단 말인가? 살려둘 건 아니지 않나. 전쟁의 원흉이자 나아가서는 인류의 적인 작자를 말이지.”

 

  “그 놈은 끝까지 우리를 괴롭히는군.”

 

  습격 이후 구조를 뜯어 고치게 된 데이스트롬은 아직도 복구가 되지 않은 상태라 고위급 장교들은 라운지를 임시 회의실로 사용하고 있었다. 계급에 따라 장교들 사이에 오가는 말씨는 달랐으나 그들은 한마음으로 사형장에서도 살아 나간 끈질긴 전범에 관해 입방아를 찧어대며 혀를 찼다. 

 

  “그런데 이건 좀 물어봐야겠어. 왜 아무도 제임스 커크를 막지 않은 건가?”

 

  라운지에 있는 장교들 중에 제일 나이가 많은 남자가 불쑥 물었다. 자리 잡은 위치에 상관없이 이야기가 휙휙 돌아다니던 라운지가 조용해졌다.

 

  “칸에게 구급대를 붙여주다니. 뒤늦게 생각해보니 좀 꺼림칙하더군. 저 세상으로 보내버리겠다고 만장일치를 해 놓고선 막판에 그를 살려준 셈이잖나.”

 

  이에 갓 중령으로 올라선 청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냈다.

 

  “그 자는 5분이 넘도록 전류를 주입당하고 있었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동안 전선을 놈의 피부에 꽂아 넣고 있어도 안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저희들만 피곤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커크 대령님이 한창 집행되고 있던 법을 중간에 뚝 가로막은 건 사실이지.”

  

  두 어깨를 으쓱하면서 중령의 발언에 자연스럽게 끼어든 그는 출항 경험이 많지 않은 함선의 선장이었다. 다른 장교들도 서서히 입을 열었다. 

 

  “옛날에도 전기충격 한 번에 죽지 않아서 사형이 잠깐 지연된 사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칸이 이 땅에서 사라져야 하는 건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는 어떻게든 죽게 될 겁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산적한데 별 게 다 귀찮게 구는군. 아예 이쪽에서 유전자가 조작된 인간을 쉽고 빠르게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연구라도 해야 할 판이군 그래.”

 

  “이쯤 되니 마커스 제독님이 그를 깨운 게 원망스러워 지는군요.”

  

  솔직한 심정들이 툭툭 라운지 바닥에 떨어졌다. 대개 그들이 내놓는 말이란 피상적인 한탄이라든가 불평 혹은 언짢음이었다. 커크가 화를 내면서까지 칸을 응급실로 보낸 사건은 서서히 장교들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그들은 당연히 누구보다 그와 원한이 깊으면서도 그를 도와줄 구급대를 호출할 수밖에 없었던 커크의 속내에 관해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커크를 이해할 수 있거나 이해하고자 노력할 수 있는 사람은 커크와 같은 배를 타는 승무원밖에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엔터프라이즈호의 재조선 작업이 마무리 될 때까지 샌프란시스코 외부로 흩어져 있는 커크의 승무원들은 필요한 때에 그의 곁으로 신속하게 올 수가 없었다. 그나마 커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스팍은 자신이 유독 자신 없는 분야에 머뭇거리고 있었고, 맥코이는 커크보다 더 착잡한 가슴을 문지르며 칸이 누워 있는 병실의 출입문을 지키는 중이었다.

 

 

 

 

  [본즈, 자?] 

  [뭐야. 웬일로 문자를 하고 그래.]

  [아니, 뭐…. 혹시 네가 잘 수도 있으니까.]

  [안 잔다. 무슨 일이야?]

  […혹시 칸이 거기로 갔어?]

  [안 그래도 내가 그 놈 있는 병실 앞에서 진 치고 있다. 듣기로는 네가 신고했다면서, 당연히 알고 있을 거 아냐.]

  [그렇기야 했지. 아무리 봐도 그 놈이 도저히 거기선 죽을 것 같지가 않더라.]

  [그 질긴 생명력에 관해서는 나도 잘 알고 있지. 괜히 참관한다고 갔다가 고생만 했겠네. 피곤할 텐데 안 쉬어?]

  [별로 잠이 안 와서.]

  [뭘 걱정하는데?]

  [전에는 그래도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알 것 같더니, 지금은 아니라서.]

 

 

 

 

  맥코이는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는 커뮤니케이터를 가만히 들고 바라보았다. 잠이 들지는 않았을 텐데 커크의 답장이 늦었다. 그는 커크가 누군가와 감상을 나누기도 버거운 상태에 빠져들었다고 해도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커뮤니케이터를 시야에서 치웠다. 손으로 조작할 수 있는 물체마저 사라지자 맥코이는 그야말로 자리에서 정지해버렸다. 

 

  그는 사실 자진해서 스타플릿의 공공연한 적이 있는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게 아니었다. 눈꺼풀만 간신히 까딱거리고 있던 맥코이는 반갑지 않은 순번을 맞이하듯이 엉덩이를 들었다. 그가 수술용 장갑을 낀 손으로 문고리를 돌렸다.

 

  커크가 동료의 수면을 걱정할 정도로 주변이 캄캄해지는 시각이라는 것은 임시로 병실의 주인 자리를 틀어잡은 존재에게 별로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납작하게 깔려 있던 침대의 이불이 조금 솟아올랐다. 잠이 들었다가 깬 것인지, 애초에 잠들지 않았던 것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눈동자가 침상의 코너를 도는 맥코이를 쫓아다녔다. 칸의 옆에 선 맥코이가 주저하지 않고 이불을 들어냈다.

 

  이불 밑에는 새로이 돋아난 피부가 타버린 표면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광경이 숨어 있었다. 강화인간의 회복 시스템은 계산 끝에 치유가 불가능한 피부층을 다 떨어뜨리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맥코이는 하얀 살갗이 분별없이 죽어버린 피부마저 흡수하려는 걸 저지하면서 육체에게도 버림받은 피부들을 모아 버렸다. 의술 행위인지 억지로 베푸는 호의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행동이었다. 칸은 엔터프라이즈호 소속인 주제에 자가면역질환 따위를 걱정하는 듯한, 아니면 해가 뜨자마자 다시 형장으로 보내질 자신의 처지를 신경 쓰지 않으려 온갖 힘을 동원하는 듯한 의사의 움직임을 눈에 담았다. 

 

  맥코이는 침대에 걸려 있는 차트에 짧게 메모를 하더니 밖으로 나갔다. 담당의의 뒷모습이 무척 평범했다. 칸은 맥코이가 나가는 것까지 지켜보고 눈을 감았다. 잠을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해가 떠서 자신의 침상이 흔들릴 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병실로 햇빛이 들어왔다. 칸은 몸을 뒤척여서 서랍장 위의 시계를 집었다. 군인이나 다름없는 스타플릿 대원들이라면 본격적으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할 법한 시간이었다. 칸은 1분이 다 흐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는 여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맥코이 소령이 곧 회의실로 도착할 것 같습니다.”

 

  커크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커뮤니케이터의 플립을 휘릭 접어서 손으로 말아 쥐는 동작이 어쩐지 딱딱했다. 커크 이후로 말하는 사람이 사라진 회의실은 밤처럼 적막해졌다.

 

  오래지 않아 바깥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칙적으로 소령에 불과한 맥코이는 이 회의실 안에 들어올 수 없었다. 맥코이는 입구를 지키는 장교에게 자신이 초대받은 경위를 소개한 다음에야 회의실에 발을 뻗었다. 낯선 제독이 제일 먼저 그를 반겼다.             

 

  “아침 일찍부터 고생하는군, 소령. 좀 앉게나.”

 

  맥코이가 허리를 살짝 숙였다. 커뮤니케이터를 쥔 손에 집중하고 있던 커크도 시선을 올렸다.

 

  “자네 함장을 통해서 상황을 전달받을 수도 있었지만 전문가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말이네. 듣자하니 자네가 칸을 데리고 있다던데.”

 

  “맞습니다.”

 

  “칸의 상태는 어떤가?”

 

  몇 초 전에야 쉴 자리를 제공받은 맥코이는 곧바로 제독의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메디컬 센터에 실려 올 때만 해도 맥박이 불규칙했고 의식이 희미했으나 지금은 안정을 찾은 상황입니다. 피부 조직은 거의 정상적인 모습을 되찾았는데 몸 안쪽에 관해서는 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게 파악이 될 것 같아 퇴원 허가는 내주지 않았습니다.”  

 

  “안쪽이라니?”

 

  “전기충격을 당했으니 내장에 가해진 피해가 상당할 겁니다. 정확한 부상 정도를 파악하고 치료에 돌입해야죠. 겉면이 먼저 멀쩡해진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건 칸의 회복력이 담당한 부분이라 제가 설명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가 내장도 자체적으로 치유했을 수도 있잖나.”

 

  맥코이가 잠시 눈썹을 올렸다.

 

  “그랬을 수도 있지요. 칸의 능력에 관해서는 아직 많은 부분이 미지수입니다.”

 

  부랴부랴 제복을 찾아 입은 수고가 무색할 정도로 이후 맥코이가 맡은 역할은 없었다. 제독은 시시한 질문 몇 개를 한 뒤에 맥코이를 내보냈다. 메일을 통해 올리는 보고서가 더 효율적이었을 거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맥코이는 자신의 직급과 권한으로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는 회의실의 무거운 문 가운데서도 특정한 지점을 응시했다. 문이 열리면 맥코이의 시선 앞에는 커크가 놓여 있을 자리였고, 지금은 회의실이 한 번 무너졌을 무렵에 그가 지었던 표정에게 자신의 얼굴을 내준 젊은 함장이 주먹을 쥐고 있을 곳이었다.

 

  회의실의 문지기가 멈춰 서 있는 맥코이를 힐끗거렸다. 맥코이가 마지못해 걸음을 옮겼다. 나가기 전 맥코이는 제독으로부터 공연한 수고를 하게 해서 미안하다며 쉬라는 말을 건넸었다. 그러나 맥코이는 메디컬 센터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적지를 확정한 맥코이가 리프트에 탑승했다. 그 때 칸의 기다림은 결실을 맺었다. 

 

 

 

 

  유언의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복수를 위해 다져진 강화인간의 입술과 혀는 틈만 나면 인간에게 저주를 내리려 했다. 자신이 웃음을 보낼 수 있는 참관객도 없는 가운데 칸은 긴 의자 위에 누웠다. 구불구불한 선이 달린 수화기를 든 집행인이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집행인은 전류가 통하지 않는 곳으로 대피한 뒤에 지시대로 음악을 틀었다. 전자 기타 소리가 시끄럽도록 강렬했지만 집행인이 꽤나 좋아하는 곡이었다.

 

  형장을 쳐다볼 수 있는 창은 커튼으로 가려놓았고, 귀는 볼륨을 한껏 높인 음악으로 막아버렸다. 집행인은 자신이 다섯 곡을 들을 때까지 방 안에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었다. 집행인은 아무 것도 몰랐다. 전력을 높이는 버튼과 방금 전에 제독으로부터 받은 명령뿐이었다. 집행인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아는 대가로 끊임없이 달리며 고함을 쳐야 하는 제임스 커크가 출입구를 발로 차고 있는 것도 까맣게 몰랐다.

 

 

 

 

  외부에서 열기를 내뿜는 스파크만큼이나 또렷해지는 고통 속에서 칸은 다소 엉뚱한 생각을 했다. 이미 경험이 있어서인지 그는 죽음에 관한 막연한 상념보다는 자신이 첫 번째로 사형 선고를 받았을 때를 돌이켜보고 있었다.

 

  압력이 올라서 눈앞이 붉게 터져버릴 것 같던 순간에 칸은 자신보다 더 고통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는 인간들을 보았었다. 목덜미가 온전한 그들이 느끼고 있던 것은 경멸과 두려움과 거북스러움이 한데 뒤엉킨 복잡스러운 감정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지 못해서 속앓이를 하고 있는 볼품없는 풍경이 시계추처럼 대롱거리는 육체 안으로 흘러들던 것을 칸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 칸은 구경꾼들이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로 혈관을 드러내며 눈을 번뜩였었지만 지금 그는 다시 눈을 감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는 아직 기다릴 게 남아있었다. 그것은 죽음일 수도 있었고, 죽음을 등에 업은 또 하나의 기회일 수도 있었고, 그도 아니라면 무한한 회상일 수도 있었다. 어쨌든 그것들은 모두 칸이 눈을 감아야만 찾아올 것들이었다. 번갯불처럼 넘실대는 전류를 바라보고 있기가 지쳐서 칸은 천천히 눈꺼풀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그가 눈을 감은 새에 집행장 안으로 들이닥친 건 레너드 맥코이가 끌고 온 들것이었다.

 

 

 

 

  “함장님께 도움이 될 만한 자료를 찾아왔습니다.” 

  

  스팍은 자신의 호출에 응한 커크가 자리에 앉자마자 본론을 꺼내들었다. 가벼운 질문으로 말문을 트려다 뜻밖의 문장을 안아든 커크는 눈을 껌뻑이면서 스팍을 바라보았다. 스팍이 탁자 가운데에 패드를 올려놓았다.

 

  “300년 전에 칸과 그의 무리들이 형을 받은 기록이 당시 언론이 발표한 자료 형태로 남아 있었습니다. 법정에서 서기가 적었을 법한 문서는 찾지 못했습니다만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커크가 의자를 끌면서 방향을 틀었다. 예전엔 바스락대는 소리가 나는 종이 위에서 나풀거렸을 기사가 매끄러운 패드 위에 담겼다. 스팍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이동시키면서 중요한 부분을 몇 번 짚었다.  

 

   “마커스 제독이 전에 밝혔던 대로 칸은 사형 선고를 받았던 게 맞고, 실제로도 이에 대한 집행이 이루어졌었습니다.” 

 

  “상황이 지금이랑 똑같네.” 

 

  “그렇습니다. 21세기에는 고압 전류를 사용하지 않았고, 보통 사형 집행이라고 하면 교수형에 처하는 방식을 따랐는데 이때에도 칸을 죽이는 데에 실패했던 모양입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로 목뼈가 부러지거나 숨이 끊어지지 않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맙소사.” 

 

  스팍이 패드 위에 다른 창을 끌어왔다.

 

  “300년 전만 해도 사형 집행이 실패했을 경우 이를 번복하지 않는 게 전통적인 판례였다고 합니다. 어떤 논리를 통해 도출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목을 매달아서 죽지 않는 죄인은 거의 없었으므로 판례로 하더라도 일종의 전설처럼 남아 있는 항목이었는데 이로 인하여 당시 사회가 대단히 시끄러웠던 것 같습니다. 전범을 살려둘 수는 없으니까요.” 

 

  “그런데 결국 못 죽였잖아.” 

 

  “한 마디로 궁여지책이었습니다. 사형이 불가능했으니 죽음과 비슷한 가사상태로 몰아가자는 것이지요.” 

 

  스팍이 조작을 멈춘 패드의 디스플레이는 하필 자극적인 표제를 띄워 놓고 있었다. 커크가 가만히 패드를 바라보았다. ‘죽는 게 불가능한 사형수’라는 표현은 가슴이 답답할지언정 쉽사리 반박할 수는 없는 어려운 말이었다. 

 

  “칸이 법정 공방이 아닌 그의 육체적인 특성으로 사형을 한 번 피해갔다는 건 역사적인 진실입니다. 이걸 이용한다면 함장님의 의견을 제독님과 다른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게 피력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고서 스팍은 아무렇지 않게 패드를 회수해갔다. 다양한 표정으로 놀라움을 표현하는 건 언제나 커크의 몫으로 남았다.

 

  “…용케도 알았네. 사실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를 풀어주자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죽지도 않는 자를 계속 죽이려 드는 행위처럼 무모하고 소모적인 일도 없습니다.”

 

  스팍은 자신의 함장을 죽였으나 또한 살리기도 한 장본인이라는 칸과의 복잡한 관계를 이성적으로 일축해버렸다. 의자에 수없이 매달린 전선에 불꽃이 번쩍할수록 짧아지는 함장의 인내심과, 타다 만 범죄자를 매번 받아드는 맥코이의 수척한 얼굴이 스팍의 머리를 오히려 차갑게 식혔는지도 몰랐다. 커크는 아랫입술을 속으로 감추고 한참을 앉아 있으면서 스팍의 말을 곱씹었다.

 

  충분히 숙고한 끝에 커크가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거 어디서 구했어?”

 

 

 

 

  “…어, 그래. 괜찮아. 또 알아서 일어나겠지. 너야 말로 숨 좀 돌렸어?”

 

  죽음이 뚝뚝 묻어나는 추억에서 칸을 건져 올린 건 지극히 일상적인 낱말들이었다. 칸이 소리 없이 고개를 돌렸다. 최대한 목소리를 작게 내느라 허리까지 구부리고 있는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그 등은 의사의 가운을 입어 하얬다.

 

  “정말 괜찮다니까? 벌칸보다 더 말 안 통하는 사람들 틈에 있는 네가 더 고생이겠지. 솔직히 난 여기서 별 거 안 한다고. 응, 알았어. 너나 잘 챙겨.”

 

  “네 함장은 여태껏 이리저리 참견하는 성미를 못 버렸나 보군.”

 

  맥코이는 놀라서 몸을 홱 돌렸다. 칸이 지나치게 빨리 깨어난 탓도 있었지만 맥코이는 또 다른 이유로 눈을 크게 떴다.

 

  “짐인 줄은 어떻게… 아니, 됐다.”

 

  맥코이는 다리만 살살 움직여서 바퀴 달린 의자를 끌고 병실을 돌아다녔다. 의사의 권위는 전혀 돋보일 구석이 없는 행동 양식이었는데도, 모니터를 차분하게 읽고 있는 그는 반박할 여지없이 의사로 보였다. 괜찮다고 쾌활하게 둘러댄 입술이 축 가라앉는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 책임감 있는 담당의의 숨결을 담고 있었다.

 

  “왜 인간들이 버거움을 호소하는지 모르겠군.”

 

  “무슨 뜻이야?”

 

  “인간들은 의자에 묶이지도, 공중에 목이 매달리지도 않는데 말이지. 눈엣가시 같은 적이 통쾌하게 사리지지 않아서 그런 건가.”

 

  “…누가 네 놈이 안 죽어서 힘들다고 그랬나.”

 

  일직선으로 침대에 몸을 묻고 있던 칸이 상체를 조금 들었다.

 

  “박사는 아닌가?”

 

  “다리 운동 좀 하면 되는 걸 가지고 뭘 힘들다고 불평해. 네 말대로 의사로서 내가 하는 일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답변이 조금 엇나갔군. 나는 비단 육체적인 피로에 한정하여 질문을 한 것이 아니다.”

 

  “나는 굳이 네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맥코이는 강화인간의 사고와 발맞추는 속도로 척척 대답을 내놓았다. 의사는 어떤 윤리적이고 감정적인 지끈거림에 시달리지 않는 듯한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죗값을 치룰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야. 솔직히 네 죽음이 얼마나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는데? 기껏해야 약간의 앙심이나 복수심 따위를 충족시켜 줄 뿐이겠지. 나 같으면 너처럼 튼튼한 놈은 사막에 던져놓고 오아시스를 파라고 시킬 거야.”

 

  사실 맥코이는 반쯤은 농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도 300년 동안 단단하게 얼어붙은 적대감이 어느 정도의 강도를 가지고 있을지 추측할 수 있는 감각은 있었다. 그런데 칸은 맥코이가 남들에게 드러내는 태연함을 고스란히 자신에게도 끌어와 자신을 달래는 용도로 사용한다는 걸 간파할 수 있는 배경 지식이 없었다. 

  

  칸이 대화를 이을 생각이 없어 보여 맥코이는 그만 병실에서 나가기로 했다. 맥코이가 물러난 의자가 조금 흔들리면서 옆으로 돌았다. 의사는 깊고 한가한 걸음걸이로 발을 내딛더니 곧 모습을 감추었다. 

 

 

 

 

  병실은 조용해야 마땅한 곳이다. 맥코이는 자신도 휘말린 거대한 사건 속에서 커크가 얼마나 불평을 하는지, 가뜩이나 딱딱했던 스팍의 표정이 화석으로 변해버릴 것처럼 갑갑하게 굳어가고 있다는 등 그가 접할 수 있는 현실의 이야기들을 병실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혈기 왕성한 함장보다 열 배는 더 날뛰는 기자들의 말은 메디컬 센터의 마당에서 일찌감치 버렸다. 전범 한 명 사형시키자고 샌프란시스코가 전력난에 시달려서야 되겠냐는 우스갯소리 역시 병실의 창문을 뚫지 못했다. 

 

  맥코이가 칸의 병실로 들고 오는 소리는 오로지 그의 발걸음 소리뿐이었다. 이따금씩 전화가 걸려 와서 ‘맥코이입니다’ 혹은 ‘무슨 일이야?’ 같은 상투적인 말을 할 때 말고는 입술도 제대로 달싹이지 않았다. 칸은 침대와 모니터 말고는 아무 것도 제공하지 않고 있는 의료 장교를 간간히 깜빡임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맥코이는 칸이 물어보기 전까지는 그가 언제 다시 죽으러 형장으로 끌려갈 지 대답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어느 날 맥코이가 병실 문을 열었을 때, 칸은 침대에서 벗어나 주로 문병객들이 이용하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맥코이는 눈썹을 꿈틀했지만 그가 침대를 이탈한 걸 지적하지는 않았다. 칸의 상태는 너무도 멀쩡해서 당장에 문을 뚫고 스타플릿의 헤드쿼터로 돌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맥코이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맥코이는 바이탈 모니터도 건성으로 힐끗거렸다.

 

  조용한 병실 가운데서 맥코이의 커뮤니케이터가 전자음을 냈다. 

 

  “아, 짐.”

 

  그러자 맥코이가 제임스 커크를 부르길 기다린 것처럼 칸이 말했다.

 

  “왜 너와 네 함장은 나를 사형장으로 보내지 않고 일을 키우는 건가?”

 

  커뮤니케이터를 귀에 대자마자 맥코이는 다시 통신기를 들고 있던 팔에 힘을 뺄 수밖에 없었다. 맥코이의 커뮤니케이터가 그의 턱보다 더 아래로 내려갔다.

 

  “뭐라고?”

 

  “이 병실의 목적은 며칠 전에 이미 퇴색되었다. 아무래도 네가 제임스 커크와 주치의의 권위를 들먹이면서 나를 여기에 붙들어두고 있는 것 같은데, 어차피 네놈들도 나를 죽이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가? 그런데 왜 번거롭게 기한을 늦추는 거지?”

  —음? 왜 그래, 본즈?

 

  커뮤니케이터가 접힘과 동시에 커크의 목소리는 멀어져, 이제 맥코이를 사로잡고 있는 것은 소파 위에서 죽음 말고는 그 어떤 주제에 관해서도 생각하기 싫은 듯한 얼굴을 짓고 있는 칸의 눈동자였다. 

 

  “죄수를 사형시키는 게 인간들에겐 그토록 어려운 일이었던가?”

 

  앞선 질문에 관해서는 대답을 빠르게 지어내지 못하던 맥코이는 칸의 마지막 말을 듣고 세차게 눈꼬리를 굽혔다. 

 

  “누구를 죽이는 건 예상 외로 쉬워. 젠장, 아무데서나 잘난 척 하지 말라고!”

 

  맥코이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형식적으로나마 병실을 돌거나 칸의 이모저모를 살폈던 의사는 이번만큼은 자신의 짜증을 표출하는 데 집중했다. 쿵쿵대며 방을 나가버린 것도 전과 다른 모습이었다. 맥코이가 씩씩대며 남긴 음파와, 우주와 지상을 누비며 활동하는 의사로서의 경험이 깃들어 있는 듯한 한 마디가 병실 안을 잠시 소란스럽게 했다. 

 

  칸은 일 분 정도 출입구를 보다가 뒷목을 소파에 기댔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죽음이 조금 더 빨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인지 아침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진하고 차가운 하늘이 칸의 등 뒤로 만연했다. 상체를 세우고 눈만 감고 있던 그는 쉽게 시야를 닦고 앞을 바라보았다. 그와는 전선이 아니라 영양제가 흐르는 튜브로 이어진 유일한 의사가 바늘이 반짝거리는 주사기를 들고 다가왔다. 칸은 주사기 안에 어떤 약물이 들어 있는지 몰랐다. 주사기의 내부를 물들이지 않는 약물은 너무나 흔했다. 칸은 아마 그것이 진정제거나 근육 이완제의 일종일 거라고 추측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떤 종류든지 자신을 죽음으로 인도할 첫 번째 관문임을 확신했다.

 

  시작이 일어나지 않은 순간과 이미 벌어진 순간 그 언저리에 위치한 애매한 빛이 병실 안을 침투해 칸의 정수리와 그의 팔과 그에게 접근 중인 주사기를 비추었다. 칸은 저항하지 않고 자신의 두꺼운 피부를 꿋꿋이 뚫고 있는 바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바늘의 위쪽에는 빛이 닿지 않았다. 의사의 손만 서늘하고 하얀 공간에 잠깐 머물고 있었다. 칸은 의사의 정체보다는 그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레너드 맥코이는 자신의 눈동자를 내어주면서 칸을 깊은 잠으로 몰아넣었다. 맥코이가 주사한 것은 수면제였다. 효능이 강력하긴 해도 치사량에 달하지는 않아 정말로 칸을 편안하게 잠들 수 있게 만들 약이었다.

 

  맥코이가 침대의 양옆을 대충 정리했다. 모니터가 꺼졌고 빈 비닐 팩이 쓰레기통으로 떨어졌다. 맥코이는 환자가 반쯤 누워 있는 침대를 서서히 밀기 시작했다. 문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커크가 맥코이에게 길을 열어 주었다.

 

  자신을 운반하는 이가 주치의라는 걸 알았다면, 칸은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은 길고 아득한 잠에도 언젠가 끝이 있으리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을 터였다. 하지만 맥코이가 영리하게 배합한 수면제는 맥코이에겐 여유를 줄 것이며 칸에게는 그저 백지와도 같은 잠을 선사할 것이었다. 마지막에 중요한 진실을 다 움켜쥔 맥코이는 동행을 자처한 커크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도중에 맥코이는 침대 앞으로 쑥 고개를 내밀었다. 잠시 후 맥코이가 민 침대 위에 칸은 똑바른 자세로 누워 있었다.



[STID/존본즈] The Gladiator Is Satisfied

- Star Trek Into Darkness 2014. 4. 26. 00:04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Theme from 'Glory and Gore' sung by Lorde

- Written by. Jade


The Gladiator Is Satisfied




  맥코이는 어렸을 때 나무로 깎은 병정들이나 먼지를 휘날리는 솜인형들이 싸우는 모습을 왕왕 보았었다. 아무리 큰 장난감이라도 혈기왕성한 소년을 감춰줄 수는 없거늘, 비좁은 그림자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자신의 음성이 아닌 소리를 내면서 팔을 내뻗는 건 그에게도 낯설지 않은 유년기의 일상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거즈와 소독약 병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비슷하게 그는 먼지와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땀과 피를 뿌리는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부딪히는 광경을 익숙하게 여기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맥코이가 가방을 끌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가로등과 간판 모두 부족한 골목이었다. 맥코이는 이 근방에 올 때 꼭 하얀 가운을 챙겼다. 그것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철문에 던져줄 입장료를 지불할 용의도 여유도 없는 그가 가진 일종의 자유이용권이었다. 명찰을 달지 않아도 문지기들은 가운만 보면 문을 열어주었다. 맥코이의 얼굴은 이쪽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어, 그의 존재 자체가 걸어 다니는 신분증이긴 해도 가운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아무도 흥분으로 번들거리지 않는 맥코이의 표정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다 하얀 가운 덕분이었다.


  “그렇게 안 늦었슈.”


  바람에 꺾인 가운 자락을 급하게 부여잡는 맥코이를 보며 문지기가 한 소리 했다. 문지기는 이곳에 자주 불려오는 의사와 몇 마디를 섞곤 했다. 


  “시작한 지 몇 분 됐는데요?”

  “1분 15초.”


  문지기는 딱딱하게 대답하면서도 친히 힘을 써서 맥코이의 앞길을 터주었다. 허리를 빼곡하게 감은 총이며 칼 손잡이를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 우락부락한 문지기는 말하자면 이곳의 마스코트였다. 맥코이는 아직 이곳의 문지기만큼 몸집이 좋고 무기를 잘 갖춘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지기가 열어준 문틈으로 밤공기처럼 서늘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인간들이 뿜어내는 입김만으로도 습해지는 어둑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맥코이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는 맥코이에게 늦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경험상 맥코이는 자신에게 고작 1분 45초만큼의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맥코이는 빛이 모자란 내부에서 유독 밝은 곳을 잽싸게 지나갔다. 그곳은 빛도 함성도 광기도 가득가득 들어차 있는 곳처럼 보였다. 맥코이는 바쁘게 발을 움직이면서 멀어져가던 소음이 한 순간에 커지는 걸 듣고 다급해졌다. 1분 45초를 다 쓰지도 못한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맥코이가 벌컥 열어젖힌 문 뒤로 벌써 몇몇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듯 헐벗은 상체 구석구석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가 떨고 있었다. 


  “맙소사.”


  깨끗한 시트 하나 없는 너저분한 방에서 맥코이는 의료 용품들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를 옮겨온 두 장정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맥코이가 방 안에서 유일하게 쓸 만한 물건인 수건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오늘 몇 경기나 예정되어 있죠?”

  “셋이요.”


  맥코이는 한숨을 지을 생각도 못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병실로 옮겨진 남자가 울부짖으며 고통을 토해냈다. 갈수록 이곳에서 만나는 환자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멀리서 인간의 성대가 내뿜는 동물적인 포효가 들려왔다. 


  건물 전체를 울리는 소리는 앞으로도 두 명의 패배자가 더 들이닥칠 대기실의 반대편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네온사인의 조도마저 규제하는 덩치 큰 법전이 얼떨결에 놓아버린 소요의 장이었다. 물론 이런 어려운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고, 그곳은 대개 ‘경기장’으로 통했다. 중앙을 둥글게 둘러싼 관중석이 있었고 형광색 줄로 표시된 중심부는 얼핏 경기장처럼 보였다. 다만 가운데를 장악한 것은 피였으며 그 주변으로는 지폐와 술이 솟구쳤다.


  이 모든 혼돈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이마를 닦았다. 그는 땀을 닦아내는 대신 이마에 피를 묻혔다. 사람들은 마치 세리모니 같은 그의 동작에 더욱 핏줄을 세웠다. 그들은 확실히 남자를 위해 격분하고 있었다. 남자는 승패에 따라 누군가의 든든한 돈뭉치가 되어줄 수 있는 그들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자의 시각은 옳았다.


  경기장에서 제일 값나가는 좌석에 앉은 중년들이 잔을 부딪치다가 껄껄 웃었다. 힘을 너무 세게 주는 바람에 샴페인 잔이 깨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힐끗거리면서 또 웃었다. 어찌나 그들의 웃음이 호쾌한지 잔이 깨진 게 그들이 의도한 행위 같았다. 경기장의 관객들에게는 패배자의 신음과, 잔이 깨지는 난잡한 음이 경쾌한 음악이었다. 이것들은 경기장에 두 번만 들어오면 혼돈이 아니라 하나의 규칙이나 계산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상이었다. 남자는 예전에 이것에 익숙해졌다.


  남자는 아래로 내려가려다 관객들의 흥분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음을 느끼고 제 자리에 섰다. 그는 무질서가 사랑하는 모델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이 모든 것들에도 다 익숙한 나머지 피로함을 느낄 줄 몰랐다. 휴식 시간이라며 관리자가 종을 울리고 나서야 남자는 어둑한 휴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처 난 곳이 없어 남의 피 냄새를 향수처럼 흘리고 다니던 남자는 하얀 가운을 만났다. 그는 벌써 지친 기색이었다. 의사는 담배를 물고 있으면 딱 어울릴 듯한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다 옆을 돌아보았다. 


  맥코이는 한 번도 남자를 돌봐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다치질 않았다. 맥코이는 이번에도 핏자국만 씻으면 멀쩡해질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의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고 생각하고 잠시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은 상대를 안 죽이고도 잘만 이기던데.”


  맥코이는 패배자를 살리지 못했다. 일시적으로 할 일이 없어진 의사는 습한 공기를 태우면서 승자를 흘겼다. 남자는 자신이 일으킨 죽음을 질책하는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먼저 대기실로 내려가는 자들은 대부분 죽음을 맞으러 가는 거다. 아무도 상대를 살리고 싶어서 싸우지는 않아.”


  맥코이가 순간 눈썹을 굽혔다. 그러나 남자는 오점 없는 자신의 살인 기록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경기장과 도무지 호흡이 맞지 않는 의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한 것이었다. 남자는 이름 없는 인간이 맞붙는 경기장에 출몰하는 이 의사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관객들이 들고 오는 돈뭉치는 승자를 위한 것이다.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 줄 돈은 없었다. 남자는 차림만 멀쩡할 뿐 자신보다 실속이 없는 의사에게 무뚝뚝한 시선을 붙여주었다.


  그동안에 시신을 치울 사람들이 등장했다. 조금 전에 환자를 운반했던 한 쌍이었다. 맥코이는 방에서 새어나오는 찬 공기와 죽어버린 혈향을 맡았다. 대기실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보다 생에 불타올랐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간 맥코이는 벽에 높이 매달린 TV를 켰다. 전파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심부름꾼들 몇몇이 나와서 피가 묻은 경기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관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주경기장과 패배자들이 사용하는 대기실 말고는 아는 곳이 없어서 관객들이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유리 조각을 치우는 심부름꾼, 지폐를 주워 담는 심부름꾼, 꼭 자신의 감정들을 관객들에게 모조리 이양한 듯이 창백한 얼굴을 한 심부름꾼들이 경기장을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가만히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이번엔 청년 둘이 사다리를 끌고 왔다. 그들은 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현수막을 교체했다. 지저분한 습기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헌 천조각이 땅으로 추락했다. 맥코이는 완전히 펴지지 않은 현수막의 왼편에 써져 있는 글씨를 읽었다. 승률이 좋은 싸움꾼의 이름은 대개 왼쪽에 놓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누가 봐도 가명 같은 칸Kha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경기장이 정리되고 관객들이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기가 재개되는 걸 보며 맥코이는 눈을 부릅떴다. 스스로에게도 버림받은 패배자들을 돌보면서도 경기에 관해 세세한 걸 알길 피했던 그에게는 낯선 충격이었다. 한편 그 짧은 시간 동안 목소리를 가다듬은 관객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의사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잔인하고 검은 남자가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맥코이는 문득 자신이 싸움꾼과는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대부분 패배자와 함께 있었고, 패배자들은 가라앉는 자신의 의식을 붙잡기에도 급급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얼마나 빨리 끝내는지 보자고!

  —빨리 시작해! 


  흥분한 관객들이 육성을 내질렀다. 맥코이 역시 3분 안에 검은 남자가 두 발로 경기장에서 내려올 줄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얘기를 이어보는 게 나쁘지 않을 지도 몰랐다. 경기장에서 의사보다 더 이성적으로 보이는 남자라면 자신의 푸념보다 더 깊은 걸 받아들일 자격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카메라가 비춘 그의 눈동자를 보고 맥코이는 마음을 바꿨다. 경기를 즐기지 않는 건 오로지 의사였다. 아마 남자는 경기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하늘을 다 가리는 법전도 눈동자를 힐끔대며 한 생명이 2분을 넘기지 못하는 비극을 주시하고 있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About Khan Noonien Singh

- Original Date 2014/3/21

- Written by. Jade

 

Sympathy for Vengeance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하도록.”

 

  엄숙한 자비가 눈을 찌를 듯한 불빛을 뒤통수에 두르고 칸에게 내리꽂혔다. 늘 전범이라는 타이틀을 안고 심판대에 오르는 자신의 처지가 대단히 한심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칸은 온몸이 전선에 묶인 와중에도 웃을 수 있었다. 300년 전에는 첨단과 잔혹함의 절정을 달리던 극저온 캡슐 앞에서도 입꼬리를 마음대로 움직인 경험이 있으니, 그에게 피부에 차갑게 와 닿는 죔쇠라든가 패드는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극악무도한 죄인에게 마지막으로 시간을 준 집행인이 물러났다. 칸은 유리로 가려진 위층에서 전범의 사형 집행을 참관하고자 착석한 인간들을 볼 수 있었다. 그가 알아볼 수 있는 인물들은 많지 않았다.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선원들이 간간히 보이긴 했다. 간부급들이 있는 대로 집합한 것일 텐데도 숫자가 많지 않은 모습과, 또 그것이 연출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복수극이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생각이 들어 칸은 또 다시 웃었다.

 

  “나는 오늘을 저주하겠다.”

  

  죄인에게서 물러나 있는 집행인의 표정은 여전히 엄숙했다. 무기가 없으면 그 여린 몸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 유리면 뒤에 숨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은 굳은 얼굴로 칸의 유언을 듣고자 했다.

 

  그런데 칸이 세상에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이용 가능한 가치를 지닌다. 칸은 끝까지 인간들을 유린할 칼날 같은 낱말들을 혀끝에 올렸다.

 

  “이 날로서 나는 안타깝게 너희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행할 기회를 잃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의 입장에서 내 죄목이란 입에 담기도 거북할 정도로 무겁고 불쾌하겠지만, 300년을 살아 왔음에도 내가 미처 저지르지 못한 죄는 너무도 많다.”

 

  칸은 현재 심장을 멎게 할 전기가 공급될 의자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그렇다고 그것이 그의 혀와 입술이 새빨갛게 빛나는 걸 막지는 못했다.

 

  “가령 살육만큼 사악한 욕구를 인간 여성에게 아낌없이 쏟아 붓는 일, 무고한 인간들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워 놓고 유유히 그들을 비웃어주는 일, 너희들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존재들과 억지로 찢어 놓는 일, 그리고 그들을 조각내 저마다의 문짝에 걸어 두면 아주 보기 좋은 광경이겠군. 오, 아직도 읊을 게 많군 그래. 일생을 바쳐 축적한 재물을 강변에 던지고 모든 인간들의 보금자리를 불에 태우는 일, 그 어떠한 눈물과 기도로도 잠재울 수 없는 재앙의 씨앗을 곳곳에 뿌리는 일.”

 

  칸은 누워서 연극을 펼치는 한 명의 배우 같았다. 그는 자유롭게 음조를 조정하면서 자신의 잔인한 언어를 마음껏 강조했다. 두 손이 전깃줄과 연결되어 있지만 않았더라면 몸짓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했을 지도 몰랐다. 입술을 천천히 축이면서 칸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만족했다. 300년 전 캡슐 속에 갇힐 때는 이런 얄팍한 쾌감조차 없었다.

 

  “너희들을 위한 불행과 음모가 이토록 많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를 다 이루지 못하니 오늘이 저주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칸은 눈을 감았다.

 

  “이제 집행하도록 하지.”

 

  그는 다른 사람의 사형을 진행하는 것처럼 말했다. 집행인이 유리벽 뒤편에서 침묵하고 있는 스타플릿의 권력층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누구도 집행인에게 고개를 끄덕여 죄인을 사형시키라는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스팍이 입 주변을 미세하게 떨고 있는 커크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독과 대령들이 넋을 잃었다고 해도 예정된 사형 집행이 취소되지는 않으므로, 집행인은 굳게 닫혀 있던 쪽문을 열고 사라졌다. 순식간에 내부가 어두워졌다. 집행인이 혼선을 막기 위하여 차단한 전등과 상관없이 아까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칸은 일말의 동요도 없이 누워 있었다.

 

  강화인간의 심장을 영원히 정지시킬 스파크가 하얗게 번쩍였다. 




- 칸의 저주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Titus Andronicus 중 Aaron의 독백에서 영감을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