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Theme from 'Glory and Gore' sung by Lorde
- Written by. Jade
The Gladiator Is Satisfied
맥코이는 어렸을 때 나무로 깎은 병정들이나 먼지를 휘날리는 솜인형들이 싸우는 모습을 왕왕 보았었다. 아무리 큰 장난감이라도 혈기왕성한 소년을 감춰줄 수는 없거늘, 비좁은 그림자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자신의 음성이 아닌 소리를 내면서 팔을 내뻗는 건 그에게도 낯설지 않은 유년기의 일상이었다. 그가 처음부터 거즈와 소독약 병을 잡은 것은 아니었다. 비슷하게 그는 먼지와 나무 부딪히는 소리가 아니라 땀과 피를 뿌리는 사람들이 장난감처럼 부딪히는 광경을 익숙하게 여기게 될 줄 예상하지 못했다.
맥코이가 가방을 끌면서 택시에서 내렸다. 가로등과 간판 모두 부족한 골목이었다. 맥코이는 이 근방에 올 때 꼭 하얀 가운을 챙겼다. 그것은 앞으로 맞닥뜨리게 될 철문에 던져줄 입장료를 지불할 용의도 여유도 없는 그가 가진 일종의 자유이용권이었다. 명찰을 달지 않아도 문지기들은 가운만 보면 문을 열어주었다. 맥코이의 얼굴은 이쪽에서는 많이 알려져 있어, 그의 존재 자체가 걸어 다니는 신분증이긴 해도 가운은 여러모로 편리했다. 아무도 흥분으로 번들거리지 않는 맥코이의 표정에 의구심을 갖지 않았다. 다 하얀 가운 덕분이었다.
“그렇게 안 늦었슈.”
바람에 꺾인 가운 자락을 급하게 부여잡는 맥코이를 보며 문지기가 한 소리 했다. 문지기는 이곳에 자주 불려오는 의사와 몇 마디를 섞곤 했다.
“시작한 지 몇 분 됐는데요?”
“1분 15초.”
문지기는 딱딱하게 대답하면서도 친히 힘을 써서 맥코이의 앞길을 터주었다. 허리를 빼곡하게 감은 총이며 칼 손잡이를 굳이 가리려 하지 않는 우락부락한 문지기는 말하자면 이곳의 마스코트였다. 맥코이는 아직 이곳의 문지기만큼 몸집이 좋고 무기를 잘 갖춘 사람을 보지 못했다.
문지기가 열어준 문틈으로 밤공기처럼 서늘한 기류가 흘러나왔다. 인간들이 뿜어내는 입김만으로도 습해지는 어둑한 공간이 그를 맞이했다. 맥코이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문지기는 맥코이에게 늦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경험상 맥코이는 자신에게 고작 1분 45초만큼의 시간밖에 남아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맥코이는 빛이 모자란 내부에서 유독 밝은 곳을 잽싸게 지나갔다. 그곳은 빛도 함성도 광기도 가득가득 들어차 있는 곳처럼 보였다. 맥코이는 바쁘게 발을 움직이면서 멀어져가던 소음이 한 순간에 커지는 걸 듣고 다급해졌다. 1분 45초를 다 쓰지도 못한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맥코이가 벌컥 열어젖힌 문 뒤로 벌써 몇몇 사람들이 도착해 있었다. 붉은 옷을 입은 듯 헐벗은 상체 구석구석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남자가 떨고 있었다.
“맙소사.”
깨끗한 시트 하나 없는 너저분한 방에서 맥코이는 의료 용품들을 꺼냈다. 그러자 남자를 옮겨온 두 장정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잠깐만요.”
맥코이가 방 안에서 유일하게 쓸 만한 물건인 수건을 쓸어 담으며 말했다.
“오늘 몇 경기나 예정되어 있죠?”
“셋이요.”
맥코이는 한숨을 지을 생각도 못하고 그들을 내보냈다. 의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병실로 옮겨진 남자가 울부짖으며 고통을 토해냈다. 갈수록 이곳에서 만나는 환자들의 상태가 심각해졌다. 멀리서 인간의 성대가 내뿜는 동물적인 포효가 들려왔다.
건물 전체를 울리는 소리는 앞으로도 두 명의 패배자가 더 들이닥칠 대기실의 반대편에서 터져 나오고 있었다. 네온사인의 조도마저 규제하는 덩치 큰 법전이 얼떨결에 놓아버린 소요의 장이었다. 물론 이런 어려운 이름으로 불리지는 않고, 그곳은 대개 ‘경기장’으로 통했다. 중앙을 둥글게 둘러싼 관중석이 있었고 형광색 줄로 표시된 중심부는 얼핏 경기장처럼 보였다. 다만 가운데를 장악한 것은 피였으며 그 주변으로는 지폐와 술이 솟구쳤다.
이 모든 혼돈을 그대로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남자는 조용히 자신의 이마를 닦았다. 그는 땀을 닦아내는 대신 이마에 피를 묻혔다. 사람들은 마치 세리모니 같은 그의 동작에 더욱 핏줄을 세웠다. 그들은 확실히 남자를 위해 격분하고 있었다. 남자는 승패에 따라 누군가의 든든한 돈뭉치가 되어줄 수 있는 그들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자의 시각은 옳았다.
경기장에서 제일 값나가는 좌석에 앉은 중년들이 잔을 부딪치다가 껄껄 웃었다. 힘을 너무 세게 주는 바람에 샴페인 잔이 깨져 바닥에 흩어졌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힐끗거리면서 또 웃었다. 어찌나 그들의 웃음이 호쾌한지 잔이 깨진 게 그들이 의도한 행위 같았다. 경기장의 관객들에게는 패배자의 신음과, 잔이 깨지는 난잡한 음이 경쾌한 음악이었다. 이것들은 경기장에 두 번만 들어오면 혼돈이 아니라 하나의 규칙이나 계산처럼 받아들여지는 일상이었다. 남자는 예전에 이것에 익숙해졌다.
남자는 아래로 내려가려다 관객들의 흥분이 전혀 가라앉지 않았음을 느끼고 제 자리에 섰다. 그는 무질서가 사랑하는 모델이었다. 그럼에도 남자는 이 모든 것들에도 다 익숙한 나머지 피로함을 느낄 줄 몰랐다. 휴식 시간이라며 관리자가 종을 울리고 나서야 남자는 어둑한 휴게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상처 난 곳이 없어 남의 피 냄새를 향수처럼 흘리고 다니던 남자는 하얀 가운을 만났다. 그는 벌써 지친 기색이었다. 의사는 담배를 물고 있으면 딱 어울릴 듯한 자세로 천장을 바라보다 옆을 돌아보았다.
맥코이는 한 번도 남자를 돌봐준 적이 없었다. 남자는 어찌된 영문인지 다치질 않았다. 맥코이는 이번에도 핏자국만 씻으면 멀쩡해질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의사가 자신과 대화를 나누길 원한다고 생각하고 잠시 멈춰 섰다.
“다른 사람들은 상대를 안 죽이고도 잘만 이기던데.”
맥코이는 패배자를 살리지 못했다. 일시적으로 할 일이 없어진 의사는 습한 공기를 태우면서 승자를 흘겼다. 남자는 자신이 일으킨 죽음을 질책하는 말에는 면역이 없었다.
“먼저 대기실로 내려가는 자들은 대부분 죽음을 맞으러 가는 거다. 아무도 상대를 살리고 싶어서 싸우지는 않아.”
맥코이가 순간 눈썹을 굽혔다. 그러나 남자는 오점 없는 자신의 살인 기록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라, 경기장과 도무지 호흡이 맞지 않는 의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려 한 것이었다. 남자는 이름 없는 인간이 맞붙는 경기장에 출몰하는 이 의사가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관객들이 들고 오는 돈뭉치는 승자를 위한 것이다. 치료를 받은 환자에게도 의사에게 줄 돈은 없었다. 남자는 차림만 멀쩡할 뿐 자신보다 실속이 없는 의사에게 무뚝뚝한 시선을 붙여주었다.
그동안에 시신을 치울 사람들이 등장했다. 조금 전에 환자를 운반했던 한 쌍이었다. 맥코이는 방에서 새어나오는 찬 공기와 죽어버린 혈향을 맡았다. 대기실에는 죽음을 상징하는 것보다 생에 불타올랐던 흔적이 더 많이 남아 있었다. 방으로 돌아간 맥코이는 벽에 높이 매달린 TV를 켰다. 전파가 들어오지 않는 이곳에서 볼 수 있는 영상은 하나밖에 없었다.
심부름꾼들 몇몇이 나와서 피가 묻은 경기장을 열심히 닦고 있었다. 관객들은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주경기장과 패배자들이 사용하는 대기실 말고는 아는 곳이 없어서 관객들이 어디로 숨어버렸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유리 조각을 치우는 심부름꾼, 지폐를 주워 담는 심부름꾼, 꼭 자신의 감정들을 관객들에게 모조리 이양한 듯이 창백한 얼굴을 한 심부름꾼들이 경기장을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가만히 그것들을 지켜보았다.
이번엔 청년 둘이 사다리를 끌고 왔다. 그들은 긴 사다리를 세우고 올라가 현수막을 교체했다. 지저분한 습기가 뚝뚝 떨어질 것만 같은 헌 천조각이 땅으로 추락했다. 맥코이는 완전히 펴지지 않은 현수막의 왼편에 써져 있는 글씨를 읽었다. 승률이 좋은 싸움꾼의 이름은 대개 왼쪽에 놓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누가 봐도 가명 같은 칸Khan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경기장이 정리되고 관객들이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경기가 재개되는 걸 보며 맥코이는 눈을 부릅떴다. 스스로에게도 버림받은 패배자들을 돌보면서도 경기에 관해 세세한 걸 알길 피했던 그에게는 낯선 충격이었다. 한편 그 짧은 시간 동안 목소리를 가다듬은 관객들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의사가 개입할 틈을 주지 않는 잔인하고 검은 남자가 경기장 위에 올라섰다. 맥코이는 문득 자신이 싸움꾼과는 대화를 제대로 나눠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대부분 패배자와 함께 있었고, 패배자들은 가라앉는 자신의 의식을 붙잡기에도 급급한 탓이었다.
—이번에도 얼마나 빨리 끝내는지 보자고!
—빨리 시작해!
흥분한 관객들이 육성을 내질렀다. 맥코이 역시 3분 안에 검은 남자가 두 발로 경기장에서 내려올 줄을 직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와 얘기를 이어보는 게 나쁘지 않을 지도 몰랐다. 경기장에서 의사보다 더 이성적으로 보이는 남자라면 자신의 푸념보다 더 깊은 걸 받아들일 자격을 갖추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카메라가 비춘 그의 눈동자를 보고 맥코이는 마음을 바꿨다. 경기를 즐기지 않는 건 오로지 의사였다. 아마 남자는 경기장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을 것이었다. 하늘을 다 가리는 법전도 눈동자를 힐끔대며 한 생명이 2분을 넘기지 못하는 비극을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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