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칸스캇] Becoming an Exciting Body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1. 29. 15:02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Montgomery Scott

- Plot from 'The Man from Mars' by Margaret Atwood

- Written by. Jade


Becoming an Exciting Body




  NO. 1 : E 소위의 증언

  "어유, 글쎄요.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실 저는 꽤나 복잡한 상태에요. 왜, 사람들은 잘 모르는데 나만 아는 실력 좋은 가수들이 하나씩은 있잖아요. 이 가수가 이런 노래를 부른다는 걸 안다는 거 자체로 굉장히 으쓱해지고,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싶으면서도 뭔가 나만 즐길 수 있는 목소리라고 생각하는 이중적인 심리요. 제 기분이 딱 그래요. 소령님이 다른 선원들의 관심을 끄는 것 자체는 좋다 이거에요. 그러길래 진즉부터 소령님의 매력을알아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장난 섞인 핀잔을 주는 일도 재밌거든요. 그런데 그 정도가 서서히 극한으로 치닫고 있다 보니까…. 솔직히 다른 사람이 시작했다면 이 정도는 아니었을 거에요."


  NO. 2 : S 대위의 증언

  "저는 소령님을 꽤나 오랫동안 봐 왔다고 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납니다. 붉은 셔츠와 엔진이 주는 유대감은 상상 이상이거든요. 그것들이 저에게 많은 시간과 꽤 큰 경험을 준 바, 단언컨대 소령님은 다른 사람들이 기피할 만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술을 좀 독하게 마실 줄 알고 거친 언사를 일삼는다는 게 소령님의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걸 왜 하필 그 놈이 맨 처음 봐서… 이건 좀 미안한 말이기는 하지만 아직도 고운 소리가 나오질 않네요. 하여튼 그가 문제입니다. 더더욱 문제인 건 뭐랄까요, 그가 외적으로 가지는 분위기나 여러 요소들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다는 겁니다."


  NO. 3 : A 소위의 증언

  "다들 거 참 멀리 돌려서 말씀하셨네요. 그러니까 이게 다 존 해리슨 때문이라니까요?"




* * *




  아마 엔터프라이즈호의 휴게실을 중심으로 퍼졌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는 이러한 얘기들을 몽고메리 스캇 소령이 들었다면 소리를 빽 지르면서도 후에는 납득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함 내의 인기 구역이 된 기관실에는 오늘도 빨간 옷을 입지 않은 여장교들이 몇몇 무리지어 눈동자를 굴려대고 있었다. 그녀들이 힐끗대는 상대는 바로 스캇이었다. 


  스캇보다는 뻔뻔한 면모에서 더 나은 모습을 보이는 킨저는 이미 이름 모를 그녀들의 침입에 익숙한 듯 기관실 주변을 여기저기 잘도 누볐다. 킨저 역시 가끔씩 스캇에 대해 물어오는 여인들의 침입을 받은 바가 있었지만 말이다. 저 먼 설원에서도 스캇의 옆을 가장 잘 지켰던 무뚝뚝한 생명체는 모종의 눈빛을 보내오는 스캇을 땡그랗게 한 번 바라보고는 공구 상자를 챙겨 정리했다. 


  킨저가 떠나는 발소리가 끊어지지가 무섭게 누군가가 작게 웃었다. 결코 거슬릴 음량은 아니었는데도 그 음색이라든가 그 안에 공공연히 숨어있는 의미, 무엇보다 웃음을 흘린 장본인의 정체는 스캇이 결코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스캇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외부인들과 기관장실의 눈치를 보는 데에 익숙해진 동료들 틈에서 기어코 목소리를 높였다.  


  "웃지 마!"

  "이젠 내가 웃을 권리도 박탈하는 건가?"


  여인들은 사실 이 때를 고대하며 오기도 했다. 과묵한 검은 옷의 중령이 자신의 목소리를 흘리는 시간과 소소한 표정 변화를 보이는 걸 옆에서 감상할 수 있다는 건 그녀들의 기쁨이기도 했다. 마치 시트콤에서 웃을 준비를 하는 관객들마냥 여장교들의 시선이 두 남자에게 번갈아 닿았다. 이에 스캇은 눈썹을 세차게 휘었고 존 해리슨은 한 번 더 미소 지었다. 구석에서 여자들이 소근댔다. 


  "너 솔직히 재밌지?"


  어느 순간이 되면 스캇은 자신을 둘러싼 관객들이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존 해리슨과 담판을 지을 것 같은 표정으로 기관실장이 입술을 비죽였다. 물론 누구도 긴장하거나 걱정하는 기색은 내비치지 않았다. 존 해리슨이 되찾은 지위가 스캇보다 높은 게 첫째 이유고, 물리적 역학관계 또한 스캇이 월등하게 밀린다는 게 둘째였다. 셋째 이유는 제 3자들 사이에서만 도는 가설로 몽고메리 스캇 소령은 종국에는 존 해리슨을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것이었다. 해리슨은 기관실 곳곳에 널려있는 묵직한 컴퓨터에 살짝 손을 짚었다. 


  "정말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싶은 거라면 얘기해주지."


  스캇은 이를 갈면서 물러나야만 했다. 




* * *




  사실 그 자초지종을 따지고 들어가자면 스타플릿 심장부에서 은밀히 벌어졌던 각종 회의들부터 공개 재판장, 숱한 언론사들과 광장을 돌고 돌아야겠으나 직접적인 시작점은 존 해리슨 중령이 엔터프라이즈의 기관실에 도착했던 사건이었다. 중령이 입을 붉은 셔츠를 기관실장이 전달받았다는데도 그의 유니폼이 사라진 일은 소소한 환영식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해리슨은 불평하지 않았다. 이후 몇 번이고 함장이 내려보낸 셔츠가 없어졌다는 풍문이 돌았지만 해리슨은 가만히 있었다. 그는 맨 처음부터 뚱하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듯한 스캇의 표정을 간파했는지도 몰랐다. 스캇의 개인적인 시선으로는 바로 이것 때문에 일이 악화되었다.


  간신히 사람들이 편안하게 여길 만한 가명과 자리를 되찾은 잠재적 범죄자에서, 일 하나만큼은 믿음직한 목소리 좋은 중령님으로 해리슨에 대한 시각이 발전될 무렵이었다. 스캇에 따르면 그는 '서서히 본색을 드러내고' 기관실장에게 접근했다. 코어를 향한 사명감 하나는 최고라 할 수 있는 스캇은 각오를 단단히 하고 해리슨을 내쳤다. 스캇은 그의 관심사가 코어에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스캇의 확신이 맞았다면 존 해리슨은 일찌감치 엔터프라이즈에서 쫓겨났을 것이었다.


  보통 인간들보다 몇 배는 뛰어나다는 그의 방식은 과연 주도면밀했다. 스캇에게 무언가를 건네주면서 마치 긴 손가락 탓인 것처럼 스캇의 피부를 한 번 쓸고 지나가는 일로 시작해, 객관적으로도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목소리를 더 꾸며서 스캇의 귓가에 흘리지를 않나, 스캇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그를 부드럽게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를 선점했다. 물론 그것은 해리슨이 기관실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보고를 거쳤다. 덕택에 스캇은 부담스러워하면서도 해리슨이 다가오는 걸 막지 못했다. 이 상황을 가리켜 누군가는 '기관실장님만 모르는 능구렁이의 은밀한 작전'이라고 평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존 해리슨의 관심 대상은 명백해졌다. 그는 스캇 앞에서 자주 눈웃음을 지었고 유려한 말을 쏟아냈다. 스캇이 높은 곳에 갈 일이 있으면 꼭 해리슨이 그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 스캇은 말이 없는데 기관실 바닥으로 가볍게 내려앉는 해리슨의 희미한 음성은 다른 이들을 되려 설레게 했다. 언제든지 스캇의 손가락 마디를 낚아챌 수 있는 해리슨의 크고 긴 손은 자신만의 어드밴티지를 가만히 놀려두는 법이 없었다.


  존 해리슨은 티가 날 정도로 스캇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제 아무리 사교성이 떨어지고, 남들의 120% 험악해지는 표정보다 코어의 미세한 이상을 더 잘 감지한다는 스캇이라 해도 느끼는 바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스캇은 해리슨을 불렀다. 이 때만 해도 스캇은 그에 대해 조금 엇나간 판단을 갖고 있었다. 

 

  "…네 유니폼 빼돌린 거 내가 잘못했으니까, 이제 수상한 짓은 제발 관둬주라. 응?"

  "당신이 나에게 엔지니어의 표식을 주기 싫어한다는 건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지."

  "그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 또한 소령에게 접근하기 위한 하나의 빌미란 걸 모르겠나?"


  스캇은 말문이 막혀 눈을 껌뻑거렸다. 


  "당신이 당장 나한테 원하는 게 없어 보인다는 게 애석할 지경이로군."


  그러면서 해리슨은 인간들은 늘 자신에게 무언가를 원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서늘하면서도 집요한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 스캇의 주변에서 흩날리는 손가락 때문에 스캇은 그 말뜻을 엄하게 오해해버리고는 전속력으로 해리슨에게서 도망쳤다. 해리슨은 고개를 숙이면서 웃었다. 이 모든 것이 누군가의 개인실에서 벌어진 일이 아니라 기관실 한복판에서 발생한 광경이라 이후 상황은 더더욱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 * *




  지구인으로서 존 해리슨에게 편향되지 않는 시선을 보낸다는 건 무척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일반적인 입장이 슥슥 빗겨가는 지점이 있으니 바로 그의 외양이었다. 


  여성들은 특히 존 해리슨에게 관대했다. 자신의 한계를 스스로 설정하는 타입인 해리슨은 얼마든지 그들이 호의를 느낄 만한 행동을 자아낼 수 있었다. 함선에서 유일하게 검은 옷을 입고 다녀 더욱 돋보이는 육체와 하루에 한 번 정도는 듣고 싶어진다는 목소리와 말투, 무엇이든 훌륭하게 해내는 그의 유능한 행적들에 그녀들은 중령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게 되었다. 이건 남성 장교들 또한 느끼는 바였다. 성별을 막론하고 무시할 수 없는 그의 여러 부분들은 이따금씩 이야깃거리를 넘어서는 어떠한 목표가 되었다.


  그런데 존 해리슨이 목표로 하는 인물은 스캇이었다. 스캇은 여성들만이 표현할 수 있는 호기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공학적 감각과 두뇌가 매우 뛰어난 나머지 그게 전부처럼 보일 때도 많았다. 체구는 군인에 준하는 청년들이 모여 있는 스타플릿 소속의 소령 치고는 작은 축에 속했고 험악한 어휘는 거의 그의 입술에 붙어 사는 형편이었다. 엔지니어의 지적 능력이 새로운 어필 수단이 되지 않는 이상 언제까지고 기계와 친분을 쌓을 것 같다는 건 스캇 자신도 설득력 있게 여기는 평이었다. 그러고 보니 스캇도 다른 사람들도 존 해리슨의 행동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했다. 오죽하면 기관실장이 보통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을 가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그를 타겟 삼고 있는 게 존 해리슨이라 오해는 더욱 커져갔다.


  스캇은 사람의 매력이 그러한 분위기에서 형성되어야 하는 거냐며 일갈할 여유도 없었다. 해리슨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더 부드럽고 위험해지는 방식으로 스캇의 사방을 휘젓고 다녔다. 스캇은 자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녔다. 존 해리슨을 갖은 수법을 동원하여 내치지는 않았다. 그게 제대로 먹혀들 지도 의문이거니와, 어느 구석에서 스캇 역시 해리슨의 푸른빛 시선에 잡히는 자신의 잔영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너 이리 와봐."


  결심을 굳힌 스캇이 해리슨을 콕 집어 불렀다. 그 날도 여전히 기관실 주변에는 푸른색, 노란색 셔츠 무리들이 향연처럼 퍼져 있었다.


  언제나 기관실장의 근처에 있는 중령은 즐거운 듯 고개를 가웃했다. 스캇이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한 번 더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해리슨이 스캇 앞에 섰고 스캇이 뻣뻣하게 얼굴을 들었다. 겨우 해리슨의 눈동자가 시야에 들어왔다. 딱딱하고 차가워 보이는 피부와는 달리 아래에서 보니 흥미롭게 긴장한 해리슨의 입꼬리가 적나라했다. 


  "에라이, 젠장! 그래, 네 놈이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제발 그것 좀 가져가고 나한테 무섭게 달라붙는 일은 그만 둬!"


  오, 소령님이 드디어! 입은 열고 있지 않았지만 구경꾼들은 눈으로 그렇게 외쳐대고 있었다. 해리슨이 시선을 아래로 끌어당겨 스캇과 마주했다.


  "…지금 나한테 가져가라고 했나?"

  "그래! 내 속도 좀 시원해지고 네 속도 제대로 들어보자고. 대체…."


  엉뚱하게 기관실 안에는 스캇이 아닌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 * *




  NO. 4 : S 소령의 한탄 

  "제엔장,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니까…. 자세한 사항은 나한테 묻지 마쇼! 내가 일종의 피해자라는 건 다 알려진 사실 아닌가? 배 전체도 아니고, 기관실 안에서 기관실장이 스토킹 비슷한 거나 당한 신세를 보여주고 있었으니 사실상 기가 찰 노릇이지. 나는 정말 내가 할 수 있는 걸 다 했다고 생각해. 아닌 것 같아? 당신이 사람 머리는 한 주먹에 박살내는 놈한테 시달려보라고! 그래, 그것도 문제였어. 그한테는 인간 한 명은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거. 그런데 말이지, 어, 음, 그러니까… 문득문득 떠오르는 위협의 가능성만 없었으면 내 태도는 한층 부드러웠을 거야. 솔직히 그 놈 목소리 듣기 좋아. 그런 발음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지 여자들 기분을 다 알겠더라니까. 체온도 의외로 딱 닿기 편안한 수준이고. 알맹이가 살인 병기라서 그렇지 겉은 괜찮아. …젠장, 지금 내가 대체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야? 하여튼 난 피해자야, 피해자라고! 웬 사이코한테 찍힌 피해자란 말이야!"


  NO. 5 : H 중령의 한 마디

  "언어의 중의성에 능통하다면 소령의 말을 잘 곱씹어 볼 필요가 있을 거야. 예를 들어 살인 병기라는 표현이라든가."




  …뭐에요, 당신이 그 말을 어떻게 알아. 

[STID/커크스캇] Fix Your Heart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1. 25. 21: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ames Kirk/Montgomery Scott

- Based on Falling by Morisot99

- Written by. Jade


Fix Your Heart




  지금 손을 움직여 커튼을 살짝 밀어내면 그가 원하는 정도의 빛 정도는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빛은 위중한 환자를 위해서 최대한 공간을 넓히고 잡동사니는 줄인 방 안을 다 비출 수는 없다. 그러나 실상 그 안에 있는 것들에는 별다른 특성이 없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침대와 의자와 창문, 아무데서나 찾을 수 있지는 않지만 병원에서만큼은 흔한 바이탈 디스플레이들에게 당장 빛이 필요하지는 않다. 심지어 그에게도 빛은 필요가 없다. 커튼이 한 마디 정도만 물러나도 얻을 수 있을 그 좁고 얇은 하얀색 반경이 닿아야 할 곳은 아마 사물보다도 빛을 원하지 않을 존재였다.


  그는 정말로 간신히 숨만 쉬고 있는 어떠한 그림자가 빛을 꺼려할 것을 알고 있다. 단번에 많은 것을 알아버렸다는 걸 자랑하면서 섣불리 추측하는 건 아니었다. 그 그림자는, 사실 그림자로 표현하고 싶지도 않은 그림자는 그 자신 속에서도 얼굴을 가리고 숨어 있었다. 빛을 끌어당기고 싶어 하는 건 이기심이다. 지금은 그림자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위치인 더 짙은 그림자인 주제에 그를 마주하고 싶어 하는 가슴의 고동이다. 


  한편으로 그 곳은 의지라는 게 참으로 부재한 공간이었다. 두 사람이 있는데 한 명은 커튼도 걷지 못하고 목소리도 내지 못하며, 무엇보다도 자신이 얼굴을 들여다보고 싶은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한 명은 다행히도 죽음을 맞을 만한 위기에 자신의 의지를 불어넣지는 않았어도 삶과 죽음 어느 쪽에서나 대체로 멍하니 손을 내리기만 했던 존재였다. 하나의 숨소리는 디스플레이의 실선 그래프로 나타났다. 또 하나는 소리 나게 숨을 쉴 정도로 호흡에 집중하지 않았다.


  가장 따뜻한 곳은 침대였다. 누군가가 어쩔 수 없이 거기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던 탓이었다. 앉아 있는 그림자는 침대의 낭떠러지를 붙잡고 조금씩 혼자서 그 온기를 나누었다. 디스플레이에는 환자의 수치화된 생체 활동과 더불어 시간도 표시되어 있었다. 얼굴, 적어도 눈가만이라도 비추어 줄 수 있는 빛을 기대하기도 점차 어려워질 것이었다. 


  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의 이기심을 던져 버리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혹시나 그가 원할지 아닐지 애매모호한 자신의 손도 침대에서 치워버렸다. 더 확실하게 설명할 순간이 오겠지만, 그는 아마 자신이 기다리고 있는 이가 제일로 허락하지 않을 일에도 끼어든 처지이기 때문에 최대한 조심하기로 했다. 그는 손을 치웠고 기척을 지웠고 커튼을 닫힌 상태로 가만히 놔두었다. 


  그렇게 되니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언가를 바라는 일뿐이었다. 그는 아마 동이 트기 직전까지 여기에 앉아 있을 듯했는데, 그 때 기가 막히게 운이 좋아서 새로운 햇빛이 들어오고 그것이 안타까운 환자의 눈썹에 내려앉고 그것을 환자가 거추장스럽게 여기지 않기를 첫째로 바랄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떼어낼 수도 없는 눈동자를 한 사람이 부담스럽게 여기지 말기를 또한 바랄 수 있었다. 어쨌든 바라기만 하는 것이니 그는 감히 이런 것도 바랄 수 있을지 몰랐다. 커크는 스캇이 현기증도 폐병도 다 털어낸 뒤에, 자신이 얼떨떨하고 무지한 상태로 들이받고 말았던 그의 가슴을 꼼꼼하게 존중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고 나자 커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앉은 그림자가 불규칙적으로 숨을 삼키면서 고개를 세게 젖혔다. 디스플레이는 비상 상황이 아니면 소리를 내지 않기 때문에 커크의 기척을 가려줄 수 없었다. 한 번 스캇의 침대를 함부로 잡지 않기로 결심하자, 커크는 얼굴이 뜨거워지고 입가가 떨려도 자신의 얼굴을 무릎에 숨겼다. 빛과 이름과 목소리에 싣고 싶은 모든 것들이 아직 잠잠한 밤이었다. 




How can I fix your heart, if you never drop your guard? 

네가 날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내가 네 마음을 고쳐 놓을까

How can I fix your heart, if you never fall apart? 

네가 흔들리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네 마음을 고칠지

And How can I, how can I scare your ghosts away? 

어떻게 해야 너의 유령들을 쫓아내 버릴 수 있을까

How can I fix your heart, if you don't let me in? 

네가 마음을 열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너를 치유할 수 있겠니


Music : Fix your Heart by Lasse Lindh



[STID/칸캐롤] Family the Chain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1. 24. 13:31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Carol Marcus

- Written by. Jade

 

Family the Chain



 

 캐롤은 언제부턴가 단화를 신었다. 제임스 커크 함장이 그의 부함장과 논의하여 칸 누니엔 싱이 다뤄질 재판에 제출할 증거에 마커스 제독과의 대화록을 포함시키게 되면서 부터였다. 제독이 테러리스트와의 전투 도중 사망했다고 어영부영 발표해버렸던 스타플릿의 입장을 뒤흔들 만한 자료가 출현한 뒤, 캐롤은 또 한 명의 마커스로서 벌떼처럼 모여드는 기자들의 습격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녀에게는 달리기 편한 낮은 굽이 필요했다.

 

  캐롤은 며칠 전에 모친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장 한 번 보러 나가는 게 힘들구나. 당분간 집은 멀리 하는 게 좋겠다. 그래도 스타플릿 본부는 벽이 좀 높을 거 아니겠니. 그 이후 캐롤은 죽은 아버지의 집무실에서 며칠을 살았고, 일주일을 넘겨 열흘을 보내고 있었다.

 

  그녀가 있어서 온전하게 지켜진 제독의 방이었다. 그곳에서 캐롤은 한참을 창틀을 붙잡고 서 있었다. 이중 창문 사이의 작고 평평한 틈에 놓인 커뮤니케이터의 플립은 올라가 있었다. 캐롤이 전화를 받지 않자 커크는 문자를 남겼다. 칸의 공개 재판 날짜가 정해졌어. 갈 생각 있으면 다 같이 가자.

 

  두 개의 메시지가 캐롤의 머릿속을 돌아다닌다. 월리스의 작아진 그림자와 마커스의 불어난 압박감이 예쁘게 섞이지 않는 수채 물감처럼 엉켰다. 캐롤은 커뮤니케이터를 그대로 놔두고 창가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상한 곳에서 허점을 보였다. 사실 그것은 캐롤에게만 허점으로 보이는 것이었다. 제독의 컴퓨터를 분해할 각오까지 하고 결연하게 패스워드를 몇 번 눌러 보았던 캐롤은 세 번 만에 허탈해졌다. 그녀 딴에는 생각나는 순서대로 입력했던 것인데, 부녀가 제일 자주 읽었던 작가의 이름으로 컴퓨터의 봉인은 풀렸다. 캐롤에게 끝까지 아버지라는 흔적을 남긴 알렉산더 마커스는 그 뒤에도 어렵지 않게 숨겨져 있던 자료들을 다 내주었다.

 

  존 해리슨은 고작 로봇 한 대와 함께 일했었다. 스타플릿에 있으면서 캐롤도 한 번씩 혀를 내둘렀던 고급 무기들을 만들면서, 존 해리슨은 이따금 저주가 걸린 피를 쏟아낼 듯한 눈동자로 감시 카메라를 노려보았다. 최초의 드레드노트 급 함선이라는 완제품에 가려져 있던 크고 작은 그의 노고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자료들은 안타깝게도 마커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캐롤은 일단 데이터들을 USB에 옮겨 담았다. 꺼진 모니터에서 그것만큼 어두운 공간에 갇혀 있었던 존 해리슨의 얼굴이 보이는 것만 같아 캐롤은 의자에 앉았다. 단화를 신어도 캐롤의 다리는 자주 지쳤다. 맥코이가 한참 전에 붙여준 다리는 지금도 가끔씩 아렸다.

 

  캐롤은 집무실을 바라보았다. 딸과의 추억 중 하나로 잠가 두었던 컴퓨터 안의 자료 말고는 특별히 악랄해 보일 것도 없는 방이었다. 책장에는 캐롤도 제목을 아는 책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었다. 캐롤은 눈가에 바람을 훅훅 불어 넣었다.

 

  몇 시간 뒤 커크는 캐롤의 답장을 받았다. 저랑 가시면 복잡할 거예요. 법원에서 뵙겠습니다.

 

 

 

* * *

 

 

 

  늦은 밤 어떤 남자가 골프장의 카트를 연상케 하는 수레를 끌고 다녔다. 날짜가 지난 일간지를 수거해 가면서 그 자리에 새 신문을 놓는 일을 하는 사람이었다. 캐롤은 근래 날짜가 다른 신문의 차이점을 쉽게 파악하지 못했다. 신문은 하루가 지나도 이틀이 지나도 마커스와 칸에게 얽매여 있었다.

 

  법원 입구에는 막 교대 시간을 맞아 자리를 잡은 듯한 청년이 나와 있었다. 캐롤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청년은 당연하게도 그녀를 알아보았다.

 

  “이 시간에 법원은 무슨 일이십니까?”

  “만날 사람이 있어서요. 혹시 들어갈 수 있을까요?”

 

  법원의 문지기는 의외로 눈치가 빨랐다.

 

  “칸의 재판은 고작 내일 오전부터 시작되지 않습니까. 그 때 만나도 괜찮으실 것 같은데요.” 

 

  캐롤은 슬며시 웃었다.

 

  “그렇다고 법정에서 그 놈 뺨을 때릴 수는 없지 않겠어요? 전 재판장을 존중하는 사람이거든요.”

 

  몇 번의 말이 오가고 나서 캐롤은 기어코 법원의 내부로 입성했다. 청년은 간단히 길을 일러주면서 스타플릿에서 나온 무장 요원에게 잘 부탁을 하면 칸을 만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을 남겼다. 캐롤은 곧장 승강기로 향했다.

 

  재판 날짜가 목전에 놓인 범죄자들에게 그럭저럭 있을 만한 공간을 제공해주고 있던 법원의 하층부는 단 한 명을 위해서 통째로 해당 구역을 비워놓고 있었다. 캐롤은 하프 코트를 더욱 여미고 안으로 들어갔다. 끝없이 빈 방만 나왔다.

 

  찰랑, 하고 멀리서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캐롤이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었다. 그녀는 바삐 걸어서 300m 정도의 통로를 통째로 막고 있는 장교들과 맞닥뜨렸다. 그들에게 지급된 라이플이 최신식 모델이라는 게 캐롤의 눈에 들어왔다.

 

  “캐롤 마커스 대위입니다. 수감자를 만나러 왔어요.”

  

  장교들은 잠깐 침묵했다.

 

  “…그 수감자가 누구를 뜻하는 건지 확실히 알고 계시길 바랍니다.”

  “물론이죠. 나는 내 아버지를 죽인 놈을 보러 온 거에요. 잠시만 안으로 들어가게 해 줘요.”

 

  아버지에게 마지막으로 한 말이 마커스라는 이름이 부끄럽다는 선언일 수밖에 없었던 그녀는 아버지의 방과 영원히 작별하면서도 USB 말고 다른 걸 챙겨오는 게 불가능했다. 제독의 잔인함은 그곳에, 알렉산더 마커스의 유품은 그녀의 집에 있었다. 캐롤은 압박감에 시달려 자주 깜빡이게 되는 눈으로 장교들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 총은 갖고 오셨습니까.”

  “…그런 건 없는데.”

  

  장교가 무거운 숨을 내쉬었다.

 

  “창살에는 절대 손대지 마십시오. 강한 전류가 흐르고 있어 잘못하면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캐롤의 시야에 이태까지 그녀가 걸어왔던 복도와 별로 다르지 않은 어둑한 통로가 열렸다. 그녀는 적어도 몇 달 동안은 구두를 신고 뛸 수 없는 발을 한 뼘 내딛었다. 빛이 많이 사라진 길은 벤전스호 여기저기에 펼쳐져 있는 까만 벽과 발판 같았다. 캐롤이 멀어졌을 무렵 장교들은 한 가지를 더 알려주는 걸 까먹었다는 사실에 머리를 긁적였다. 

 

 

 

* * *

 

 

 

  캐롤을 들어가면서 점점 커지고 다양해지는 알파벳의 나열을 보았다. 손전등이 없어 그녀는 커뮤니케이터를 열고 날개 모양의 불빛으로 앞을 비췄다. 흔들거리는 빛이 닿지 못한 곳에서 누군가는 차게 웃고 있었다. 그리고 캐롤은 점차 벽에 파인 홈을 읽을 수 있었다.

 

  “당신은 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혈관으로 퍼지는 독처럼 목소리가 캐롤을 마비시켰다.

 

  “왜냐하면 진실은 어디에나 존재하거든.”

 

  캐롤은 입술을 깨물며 심호흡을 했다. 전류가 터진다는 창살 저편에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있는 칸이 엉망이 된 정면의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칸은 이단적인 복음서를 읽는 것처럼 노래했다.

 

  “그래서 행복할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게 그토록 멀리 있는 듯 보이는 거지. 불쌍한 일이야. 어떤 존재도 저 진리를 지울 수는 없어. 괴롭다면 자기 자신을 지워야지. 네 경우라면… 마커스라는 고통이 너를 삼키기 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되겠군.”

  

  칸의 발밑에는 그가 숱하게 끊어버렸던 강철 사슬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들은 이후 칸이 감옥을 꾸미는 데에 사용된 게 분명했다. 캐롤은 빛나는 커뮤니케이터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무릎은 자꾸 구부러져 주저앉고 싶어 하는데 상체는 기묘하게 식어가 그녀의 눈가를 완전히 말려버렸다. 

 

  “당신은 내일 사형 선고를 받을 거야.”

  “그러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나?”

 

  칸은 미간을 찡그리며 웃었다.

 

  “나는 마커스를 꽤나 고통스럽게 죽인 것 같은데도 만족하지 못하겠더군. 너는 나처럼 네가 미워하는 대상을 직접 죽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칸이 다리를 돌려 땅바닥에 닿게 했다. 공연히 캐롤의 다리가 움찔거리면서 그 긴 다리에 조각났었던 고통을 떠올렸다.

 

  “내가 사형수가 되는 꼴로 만족할 수 있을까?”

 

  캐롤은 적어도 칸의 잔혹한 성미 말고, 그에게도 다른 명분이 있었음을 사람들에게 알려줄 모든 게 들어 있는 USB를 주머니 끄트머리까지 꺼내 올렸다. 재판 전날까지도 증거물로 제출하겠다고 신고하지 못한 물건이었다.

 

  칸은 점차 걸어와 캐롤과 눈을 맞추었다. 창살 근처에서 스파크가 튀었으나 그는 눈썹을 살짝 굽혔을 뿐이었다. 캐롤이 두 눈동자에 바짝 힘을 주었고 칸은 곁눈질로 주머니 안에서 경직되어 있는 캐롤의 손을 훑었다. 

 

  “내 손을 부러뜨릴 기회를 주는 건 어떻겠나?”

 

  칸이 옷깃을 걷었다. 캐롤이 시선을 치켜 올렸다.

 

  “전깃불에 타죽을 지도 모르는 두려움보다 나에 대한 복수심이 더 강하다면.”

 

  캐롤이 기어코 USB를 주먹에 감춘 채 손을 빼냈다. 칸이 거리를 좁히자 번쩍거리는 스파크가 심해졌다. 캐롤은 표정을 찌푸리면서도 칸이 하얗게 내놓은 손목과 부드럽게 하늘거리는 손가락을 보고 말았다.

 

  “난 너에게 아무 것도 감춘 적이 없다.”

 

  칸의 감옥이 그녀의 옆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너는 진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어, 세상에 널린 모든 게 다 진실이야YOU CAN'T HIDE FROM THE TRUTH BECAUSE THE TRUTH IS ALL THERE IS그 때문인지 칸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런데 너는 무엇을 가리려 하는 거지?”

 

  전류가 갈수록 거세게 요동쳐 캐롤은 아예 눈을 감아버리고 말았다. 그 상태에서 캐롤은 말문이 막히는 따끔거림을 느끼면서 쓰러졌다. “아악!”

 

  칸이 홱 팔을 뻗어 캐롤이 주먹 쥐고 있던 손을 끌어당긴 것이었다. 창살 사이를 직접적으로 통과했던 부분은 칸의 두꺼운 피부에 덮여 있었는데도 캐롤은 팔을 부여잡고 뒷걸음질쳤다. 그 수치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를 강한 전류를 맞은 칸의 옷이 타들어가고, 보이는 살갗에서는 하얀 스파크가 번쩍대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비명을 들은 장교들이 급하게 달려왔다. 캐롤은 너무 놀라서 말을 못 하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오… 오, 맙소사.”

 

  캐롤은 칸에게 잡혔던 손을 펴 보았다. 그 사이에 USB는 칸의 감옥 안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것은 타들어간 곳 없이 멀쩡하게 벽면에 부딪혀 회전을 멈추었다. 캐롤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나는….”

 

  불가피했던 내출혈로 인해 입가로 피를 내보내면서 칸이 말했다.

 

  “아마 너는 내 얼굴을 보면서 나에 관한 판단을 확실히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장교들 둘이서 캐롤을 일으켜 세웠다. 칸은 전류가 잦아들지 않고 있는 오른쪽 눈가를 눌렀다. 하얀 불꽃과 붉은 피와 청록색 안광을 흘리는 그의 모습은 다신 잊지 못할 정도로 선명하고 짙었다.

 

  “내가 너를 증오하듯이 너 또한 나를 미워하면 된다. 너도 결국엔 마커스니까.”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피를 다시 삼킨 칸이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캐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에 의해 상처받은 온 몸을 장교들에게 내맡긴 채 그 곳을 벗어나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칸의 몸은 회복되었다. 그는 입 안에 남아 뭉친 피를 혀로 긁어내었다.

 

  캐롤은 다음 날 재판장에 가지 못했다. 칸이 마커스 제독의 자료를 폭로해 사형 선고를 받지 못했다는 소식만 침상에 누워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너는 진실로부터 숨을 수 없어, 진실은 어디에나 존재하니까

행복하다는 시간들이 너무 적고 멀리 있는 것 같다고 해도
우리는 안타깝게도 우리가 봐 왔던 것들을 지울 수 없어
원한다면 차라리 사라져버려
네가 고통에 삼켜지지 않았던 시절로 가는 거야

지금 네 상황이라면 여기에 아예 오지 않는 게 나았을 텐데
너는 두꺼운 가장을 두르고서 바로 네 자신으로부터 숨고 있지
우리를 봐, 우리는 추락을 향해 나아가고 있잖아

BGM : The Truth by Handsome Boy Modeling School 



[STID/칸스캇] Captain's Shadow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1. 23. 12:13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Montgomery Scott

- Written by. Jade

 

Captain's Shadow


 

  그 딴에는 누군가 분명히 없을 시간이라고 생각하여 발걸음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것은 수갑처럼 서로 연결된 사슬만 없을 뿐 안쪽에 손목뼈를 가루로 만들 수 있는 바늘이 장착되어 있는 두꺼운 팔찌를 두르고, 목 뒤에는 GPS 장치가 달린 칩을 이식당한 대가로 얻은 약간의 자유를 소모하겠다는 뜻과도 상통했으니 그야말로 신중한 결정이었다. 굵직한 쇠줄과 기둥으로 고정된 함선이 드리우는 그림자로 그는 걸어 들어갔다.

 

  그의 입가로부터 마치 내출혈의 증거처럼 차가운 숨이 흩어졌다. 딱 하루를 잡아 코가 비뚤어질 정도의 일탈을 결심한 자들도 비틀거리며 들어온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던질 새벽이었다. 밤에서 멀어진 어둠 속 그는 무거운 소리를 내며 열린 채 고정되어 있는 해치를 올라 내부로 들어갔다.

 

  의외로 그의 행동의 첫째가는 원칙은 본능이거나 감정적 반응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단지 그것을 합리화하는 이유들이 워낙 견고하고 짜임새가 있어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하나의 기계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열정(Passion)으로 태어난 그에게는 지옥보다 붉은 불꽃이 태워버릴 대상을 호시탐탐 기다리고 있다.

 

  큼직한 전등은 대부분 꺼졌고 희미한 빛의 줄들이 복도 끄트머리를 휘감고 있었다. 그는 이 하얀 함선에 두 번째로 들어온 경험을 치르는 중이었지만 어렵지 않게 길을 찾아갔다. 마무리가 덜 된 철판들과 아직 시커멓게 갈라진 균열들이 곳곳에서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는 듯했다. 감수성을 키우는 훈련 따위는 받은 적도 없는데, 그는 이따금씩 사물에게서도 자신을 향하는 분노를 느꼈다.

 

  지금까지 그는 예상대로 한 명의 인간과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제 몇 분만 다리를 움직이면 목적지라 그는 조금 마음을 놓았다.

 

  “어유, 추워 죽겠다.”

 

  그 때 사람 목소리가 들려서 그는 미간을 좁혔다.

 

  “담요 좀 더 갖고 올 걸 그랬네.”

 

  두 번째였다. 그는 각각 길지도 않은 누군가의 혼잣말 때문에 일그러지는 안면 근육을 붙잡지 않았다. 그는 마저 걸어가 엔진실의 컴퓨터 앞 의자를 연결해 놓은 조촐한 간이침대에서 콧등을 비비고 있는 빨간 셔츠의 남자를 만났다.

 

  “…아니, 당신이 왜 여깄어?”

 

  재조선에 가까운 수리를 거치는 중인 함선의 곁도 떠나지 못하는 열혈 엔지니어는 추위를 불평하던 몸을 퍼뜩 펴서 다짜고짜 삿대질을 해댔다.

 

  “여기가 네 놈이 들어올 수 있는 곳인 줄 알아?!”

 

  엔터프라이즈의 기관실장인 스캇 소령은 애써 동여매고 있던 담요마저 옆으로 치워내고 일어섰다. 신장도 체격도 월등히 차이가 나는지라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눈앞의 남자를 막을 순 없겠지만, 스캇은 붉은색 셔츠와 엔지니어의 배지를 걸고 눈을 부라렸다.

 

  “당장 여기서 나가.”

 

  스캇은 그렇게 말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두꺼운 팔찌와, 그것에도 굴하지 않고 핏줄을 드러낸 손이 보여 스캇은 속으로 자신의 직함을 다시 새겼다. 스캇이 쓰는 컴퓨터는 늘 대기 모드인 상태로 버튼만 눌러주면 즉시 가동되어 스팍 부함장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연락할 수 있다는 점도 상기했다.

 

  물론 스캇이 무엇을 떠올리고 중얼거리든 남자는 관심이 없었다.

 

  “이 곳은 내 이동 범위에 해당되는 장소다. 너네들도 이건 보장해 주기로 하지 않았나.”

 

  누가 들으면 스타플릿의 딱딱한 관료로 착각할 말투였다. 실상은 스타플릿에 절대 소속될 수 없는 인간 아닌 인간은 옆으로 돌아가지 않고 스캇의 판단을 기다리겠다는 듯 그를 보았다. 

 

  “그래도 말이야, 양심상 피해 갈 곳이 있는….”

 

  스캇은 말하다가 뚝 입을 닫았다. 이름과 얼굴, 전적 모두가 시민들에게 기가 막힐 대항마로 기억된 범죄자 앞에서 양심을 운운하는 건 어불성설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가 스캇의 속내를 제대로 지적해냈다.

 

  “나에겐 그러한 의식이 없다고 생각하나보군.”

 

  거짓말에는 도무지 재주가 없는 스캇은 차마 대답을 지어내지 못했다. 칸은 그 때 스캇의 옆을 지나쳐 기관실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저, 저 인간이!”

 

  스캇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몇 초나마 무기 구실을 할 수 있는 물건을 바쁘게 찾았다. 페이저건은 없었고 나사를 조이는 드라이버 하나가 겨우 발견되었다. 스캇은 급한 대로 그걸 들고 칸의 뒤를 쫓았다.

 

  “저 망할 놈이, 허튼 짓 하면 가만 안 놔둬…!”

 

  스캇이 번쩍 든 드라이버와 더불어 높아졌던 목소리는 동시에 사그라들었다. 어쩐지 따라 들어가는 길에서 꺼림칙한 느낌이 든다 싶었더니, 코어의 핵심이 방사능 에너지와 함께 봉인되어 있는 장소로 향하는 통로였다. 스캇은 닫혀 있는 게 미덕인 문으로 접근하며 혹시 칸이 저 안으로 들어가 온 주변에 방사능이라도 뿌리려고 하는 건 아닐까 추측했다. 스캇으로선 그것이 열릴 가능성조차 생각해 본 적 없는 투명한 문이 칸의 검은 등에 가려졌다. 스캇이 칸의 뒤에서 멈춰 섰다.

 

  “여긴 왜 왔어.”

 

  제임스 커크가 여전히 코마 상태로 일주일가량을 넘긴 무렵이었다. 칸은 스캇의 말을 무시하고 근처의 모니터와 계기판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스캇은 더욱 세게 드라이버를 쥐었다.

 

  “저 문을 열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밖에서 아예 가둬버릴 테니까.”

  “왜 그걸 멍청한 생각이라도 단정하나?”

 

  칸의 답변은 늘 인간들이 고려하지 못했던 지점에서 튀어나왔다. 이태까지 미묘하게 스캇을 벗어나 있던 칸의 시선이 순식간에 모여들었고 스캇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의 언어와 눈빛 모두 스캇이 들고 있는 드라이버보다 괜찮은 무기였다.

 

  “…뭐라고?”

 

  결국 스캇은 되묻고 말았다.

 

  “내게는 저 문으로 들어가는 일이 차라리 영광스러울 것 같군.”

 

  말하면서 칸은 냉소했는데 그것이 스캇을 겨냥하지는 않았다. 스캇이 눈썹을 위로 올렸고 칸은 다시 투명한 문을 응시했다.

 

  그 순간에 스캇은 살며시 발을 옮겨 칸과 조금 엇나간 자리를 차지했다. 문에 칸의 얼굴은 완벽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칸은 제임스 커크가 명예롭게 주저앉았던 유리문 너머를 바라보았고 스캇은 그가 했던 말과 불분명한 눈길을 함께 곱씹었다.

 

  스스로 저 안에 들어갔던 커크도 마지막에는 두려워하며 눈물 한 방울을 떨궜었다. 칸의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인 스캇은 저 안에서 칸은 과연 눈물이 아니라 웃음을 자아낼 수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비록 스캇이 석회굴을 가장 오랜 친구로 두고 있고, 한때 직장에서 거의 쫓겨나는 신세를 당하기는 했어도 누군가의 생명에 대해서만큼은 상식인이었다. 스캇은 절대 다수를 위해 소수가 희생하는 일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사능에 타죽는 게 영광스러울 것 같아?”

 

  문득 스캇이 물었다. 칸은 예상을 깨고 답했다.

 

  “그래서 내 동료들에게 생명의 자유를 줄 수 있다면.”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은 총 700명이 넘어가는 반면 칸이 거느리던 숫자는 72명이 전부라고 들은 적이 있었다. 허나 양적인 숫자가 모든 우위를 결정하는 건 아니리라. 스캇은 소령이었고 코어 다루는 일이 제일 쉬운 기관실장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스캇은 언젠가 커크의 주변에서도 발견한 적 있었던, 당당하나 위독한 그림자를 칸에게서도 찾아내었다.

 

  칸은 끝까지 그 문에 손조차 대지 않았다. 어느 함장이 함선과 승무원을 위해 죽었던 자리에 들르는 일로 자신의 짧은 자유를 다 써버리고 그는 몸을 돌렸다. 스캇은 저도 모르게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칸이 계단을 내려갔다.

 

  스캇이라고 그곳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다. 엔터프라이즈의 무덤이기도 했으며 의자도 담요도 없는 추운 구역은 여전히 반갑지 않았다. 몇 시간이라도 더 눈을 붙이려면 서둘러 칸의 뒤를 쫓아가는 게 맞았다. 그러나 자신이 불현듯 잊고 있으면 스쳐 지나가고, 때로 자신을 감싸고 마는 함장만의 의식이 남아 있어 스캇은 발을 떼지 못했다.

 

  닫혀 있는 문은 안타깝게도 계속 닫혀 있었다. 




Inspired by 'Restless Heart Syndrome' by Green Day


[STID/존본즈] The Example about Falling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1. 14. 19:19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The Example about Falling




  레너드 맥코이는 이 순간 우주의 온갖 불확실성에 대해 불평할 정신이 없었다. 당장 자신의 온 몸을 빠르게 벗어나는 중력에 덜컥 겁이 났다. 팔을 휘저어도 무엇을 잡을 수 없다는 것에 공포심이 치솟았다. 그의 발밑에는 바닷속에 몸을 감춘 엔터프라이즈도 없었다. 맥코이는 진실로 순간을 두려워하며 발버둥 쳤다. 맥코이는 추락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우주를 견디지 못하는 데에는 일정 부분 높은 장소에 대한 거부감이 일조하는 바가 있었다. 지구도 벗어난 까마득한 곳은 멀기도 하고, 또 인간이 지어낼 수 없는 높이에 위치한 어딘 가처럼 느껴졌다. 맥코이는 병원 중에서도 응급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절 유독 추락 사고를 겪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었다. 자연 법칙이 잡아주지 못한 그들의 모습은 겉으로 보기에 그 어떤 환자들보다 처참했다. 깨지고 찢어지고, 종종 어딘가가 꺾여서 들것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그들은 대개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지면과 확 충돌하면서 돌이킬 수 없는 중상을 입고 왔다. 맥코이에게 추락은 한 마디로 죽음이었다.


  떨어지면서 맥코이는 빠른 속도에 짓이겨진 주변 풍경을 보는 것도 너무 무서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대신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이 펼쳐졌다. 맥코이는 그나마 사람들이 견딜 만한 형태로 땅에 머리를 박으려면 어떻게 몸을 돌려야 하는지 고민했다. 추락한 사람들은 대개 머리에서 난 피로 얼룩져 있었다.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차라리 빨리 정신을 놓아버렸으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 때까지도 레너드 맥코이에게 추락이란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다.




* * *




  맥코이가 일어나는 모습은 자신이 얕은 물에 빠졌음을 모르고 있다가, 퍼뜩 정신이 들어 지상으로 헤엄치기를 시작한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숨을 확 들이키는 소리까지 내면서 침대에서 일어난 맥코이는 주변부터 둘러보았다.


  “오, 맙소사.”

  “살아난 걸 감사하고 있나.”


  자신이 망자가 아니라 환자의 처지에 놓인 것을 소박하게 기뻐하던 맥코이는 갑자기 끼어든 목소리에 한바탕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건 어디서 난 거야?”


  검은 티셔츠에 하얀 가운을 덧입으니 뭔가 멋들어진 패션 같다며 엉뚱한 생각을 피어 올리던 맥코이는 곧바로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파란 상의를 받지 못한 이가 가운을 걸쳤다는 건 아주 이상한 일이었고, 그 주인공이 스타플릿에서 유일하게 검은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인물이라면 더더욱 의문을 가져볼 법했다.


  “설마 그거 내 거야?”

  “당분간은 입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전사가 아니라 의료 행위를 하는 의사가 입는 유니폼이라고.”


  그것을 담는 목소리에 섞인 개인적인 감정의 수준은 다를지 몰라도, 어쨌든 칸 누니엔 싱의 위치는 스타플릿에서 한 명의 전사로 굳어져 가는 형편이었고 칸 역시 그것에 대해 왈가왈부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는 맥코이에게 추측을 독촉하는 표정을 보내며 동그란 의자를 끌어왔다. 맥코이는 눈썹을 찡그렸다가 순순히 눈동자와 머리를 같이 굴려보기 시작했다.


  “너, 수술에 동참했어? 다른 장교들은 어디 두고….”

  “한 번만 더 해보면 그들보다 내가 나을 것 같던데.”


  병상에 누워 있는 처지에, 강화인간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근거 넘치는 잘난 척까지 떠안은 맥코이는 콧잔등을 찡그리면서 가벼운 반감을 표출했다. 물론 그가 자신을 살리는 데에 동참했다는 자각은 뚜렷하게 생겨나 맥코이의 표정은 곧 풀어졌다.


  “어쨌든 그럼 덕분에 산 거네.”

  “…죽을 줄 알았나?”

  “당연하지. 사람이 떨어졌으면 죽는 법이잖아.”


  이에 칸은 맥코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을 꺼냈다.


  “왜 추락이 꼭 죽음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하나?”


  맥코이는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밑으로 떨어진다고 해서 반드시 그게 죽음으로 이어지는 건 아니야. 아래에서 누군가가 받아줄 수도 있고, 나무 같은 구조물에 걸릴 수도 있지. 떨어진 높이가 의외로 하찮을 수도 있다. 사람을 향한 추락을 경험한 인간들의 수가 헤아릴 수 없는데, 그들이 다 죽은 건 아니잖나.”

  “그게 무슨 소리야?”


  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여받은 성정이 친절하지 못해 그에게 답안을 얻어내려면 노력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도, 맥코이는 또 다른 의문에 사로잡혔다.


  “…그러고 보니, 나 누가 잡은 거야?”


  어쩐지 물음표를 남발한다는 느낌이 뿌옇게 일었지만 맥코이는 최대한 궁금하다는 눈빛을 꾸며내 보았다. 그러나 칸은 그를 한 번 본 뒤에 병실에서 나갔을 뿐이었다. 맥코이는 한바탕 또 툴툴댔다.


  그런데 이윽고 강화인간의 인정을 반이나마 얻어 냈다는 영리한 레너드 맥코이는 거기에서 대답을 얻어냈다.


  뒤이어 맥코이는 문제시되는 사람을 향한 추락이라는 것까지 파악했다. 그 대가로 맥코이는 공연히 화끈거리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James Kirk

- Written by. Jade





The Finale


  의료 실장 개인 일지, 우주력 2260. 55


  항해 중인 것도 아니고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진 것도 아니지만 문득 직위가 복원된 이후로 한 번도 일지를 작성한 적이 없다는 게 생각났다. 사실 배멀미만 제외한다면 스타플릿에서 일하는 건 꽤 괜찮은, 아니 굉장히 멋진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짐이 행여나 이걸 읽는다면 장족의 발전을 했다고 낄낄거리겠군. 


  확실히 오랜만에 일지를 쓰는 게 맞긴 맞는지, 그동안 적어두지 못한 많은 일이 있었다. 엔터프라이즈가 임명된 새로운 임무를 위해 의료 물품이나 추가되어야 하는 장비들을 승인했다. 주삿바늘에 도무지 정을 붙일 줄 모르는 대원들을 달래서 정밀 검진을 받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정도는 특별할 게 없는 업무고 당장 그걸 기록하려는 건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래, 재판소에서 있었던 일들이다. 


  칸 누니엔 싱은 스타플릿이 자신을 착취하기 위해 벌였던 만행들을 남김없이 고발했고 이에 일부 책임이 있는 인물들을 증인으로 내세워 자신의 진실을 꽉꽉 메웠다. 짐과 스팍, 내가 잇따라 지목되었고 모두가 증언하길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복수는 그가 설명했던 것과 한 치도 어긋남이 없었다. 다시금 욕심에 눈이 먼 자들을 철저하게 처벌하고, 이제 스타플릿에 휘둘릴 만한 마지막 족쇄도 풀어진 자신을 제 손으로 냉동시켜 다시는 인간들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까지. 그리고 칸은 그가 그러한 결심을 내린 과정을 수많은 사람들에게 감췄다. 


  그가 피해자의 입장으로 스타플릿의 수뇌부를 심판대에 올린 것과는 별개로, 오늘 켈빈 기록 보관소의 폭발에 휘말려 사망한 희생자들과 다른 사망자들을 기리는 추모 행사가 있었다. 


  흐트러짐 없이 제복을 차려 입은 이들이 스타플릿을 상징하는 엠블럼이 새겨진 하얀 기를 접었다. 절도 있지만 그렇다고 냉철하지는 않은 동작이 고요하게 엄숙함을 자아냈다. 장교들은 오늘만큼은 서로의 부서를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한 단체에 소속되어 있음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단상에 선 제임스 커크 함장에게 모여 있었다.


  “때로 적을 막아내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과 다를 것 없는 우리 자신의 악을 끌어내는 위험을 감수하기도 합니다.”


  레너드 맥코이는 행사에 참석하기 전에 본부의 통제 구역에 들렀었다.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소수가 그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임무를 묵묵히 격려했다. 최후의 자유를 머금고 있는 칸 누니엔 싱이 그를 돌아보았다. 칸은 대법원 근처로 이송되어 감시를 받느라, 맥코이는 증언을 마치고 탐사 준비에 시간을 뺏기느라 둘은 이제야 재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우리는 다시금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대기하고 있던 과학자 하나가 조금은 안절부절하게 곁눈질을 하고 있어 맥코이는 그를 내보냈다. 이치대로 모든 걸 되돌리는 일에는 의외로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았다.


  맥코이가 말없이 캡슐의 전원을 켰고, 칸이 누울 슬라이드가 위로 튀어나왔다. 그가 슬라이드 위로 올라갔다.


  칸의 적법한, 혹은 잔인한 숙청으로 뼈대만 남은 스타플릿의 모든 구성원을 향하여 커크 함장은 그들이 본래 가져야 마땅한 가치를 역설했다. 동정 받아야 할 사람은 동정 받고, 잠들어야 할 사람은 잠든다. 맥코이는 커크의 말을 들으면서 의사이지만 또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유지하고자 했던 바를 회상했다.


  “이제는 정말로 네가 깨어날 여지는 없을까.”


  계기판의 버튼을 하나씩 짚어가는 맥코이의 움직임이 느렸다. 맥코이의 목소리도 느렸다.


  “나에게 아무런 거짓 없는 자유를 주고 싶어 하는 인간이 생긴다면 가능할 지도 모르지만, 기대는 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절차만 거치면 영영 닫혀 버릴 칸의 청록색 안구가 평온하게 맥코이를 응시했다. 맥코이는 마지막 버튼을 누르지 못했다. 그러자 칸이 먼저 눈을 감았다.


  이것은 죽은 이들을 위한 모임이자 연설이었으므로 박수나 함성은 허락되지 않았다. 다만 미동을 멈춘 저마다의 눈동자가 더욱 성숙해질 스타플릿과 그 중심을 맡을 제임스 커크에게 신뢰를 보냈다.


  칸은 그것을 끝으로 완전히 잠들어버렸으므로, 맥코이는 어둠밖엔 회상할 것이 없었다. 


  어떠한 정치적 맥락도 없이 엔터프라이즈는 탐사선으로서의 제 위치를 회복했다. 나를 비롯한 함선의 승무원들은 5년간 지구가 아닌 행성들을 디디며 우주의 수많은 생명체들과 공존할 길을 꾀할 것이다. 실상 그 여정은 칸의 요구를 포용하며 시작된 거나 다르지 않지만 말이다.


  불현듯이 앞으로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의 자유를 인정할 존재가 나타나지 않을 것인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5년이 누군가의 변화를 자극할 수 있을까. 


  …일지 기록 종료.





* * *






  눈을 뜨는 행위는 오히려 그에겐 비정상적으로 다가온다. 300년 동안 어둠을 바라보는 일에 익숙해 빛이 오히려 백색의 꿈같다. 캡슐 속으로 복귀하면서 이 동결 만큼은 죽음 뒤의 진공 상태가 될 것임을 순순히 받아들였던 그는 다시 무언가를 응시할 수 있게 된 현실에 다소 의아해했다. 칸은 새파란 매입등을 가리는 인간의 그림자를 보았다.


  세 번째로 맞이하는 각성은 유독 특이했다. 그는 맨 처음에 값어치 있는 유물을 발견한 듯한 마커스를 만났고, 그 다음은 자신이 소멸시키려 했던 스타플릿의 핵심 인원이 겨누는 총구와 직면해야 했었다. 칸이 남아 있는 몽롱함을 떨쳐내기 위해 눈을 닫았다가 열었다. 개폐장치가 기지개를 켜면서 바깥으로 퍼지는 서늘한 연기를 뚫고 따뜻한 손이 그의 코앞에서 왕복운동을 했다.


  벌써 차원 높은 사고를 하기엔 버거운 상태인 그는 가만히 뿌옇게 번져 보이는 물체를 보기만 했다. 치료와 검사가 거의 불필요한 육체를 하얗고 동그란 것이 꼼꼼히 훑었다. 그는 오랫동안 굳어 있던 고개를 움직였다. 그를 묶어둘 구실이 될 수 있는 대원들의 캡슐은 모두 사라졌으며, 형식적으로라도 그를 위협하는 페이저건도 자취를 감추었다. 오로지 의료 기기를 닮은 하얀 제복이 그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칸은 그것의 이름이 트라이코더라는 걸 기억해냈다.


  다수의 요소가 낯선 의식 속 작동하기 시작한 칸의 두뇌가 눈앞의 인물을 읽어냈다. 그는 칸이 세 번째로 잠들기 전 마지막으로 본 사람이기도 했다. 칸은 자신의 차가운 얼굴에서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조소를 마지막까지 발휘하며 그에게 단언했었다. 이것은 자신의 사형 선고다. 자신에게 최면 같은 복종이라도 강요할 수 있게 만드는 동료들마저도 사라졌으니 겁이 나서라도 인간들은 자신을 영영 봉인하리라. 누군가 순수하게 그의 자유를 소망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는 칸을 이용할 수 없을 거라는 예측에는 동의하는 것 같았었다.


  “그 어떤 이유에서든 나를 깨운 걸 후회하게 될 거다.”


  기체가 다 배출되지 않았는데도 칸의 세포는 벌써 안광을 번뜩이며 인간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자 불쑥 튀어나온 얼굴이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강대한 지성을 가진 그에게,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겠냐는 눈빛을 보냈다.


  “인간은 죽지 않는 이상 누구나 깨어나는 법이야.”


  2265년, 엔터프라이즈가 장기 탐사 임무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의 일이었다. 레너드 맥코이가 가리고 있던 정경이 훤히 드러났다. 공간은 평온하게 비어 있었다. 트라이코더가 전송한 수치들을 모두 읽은 맥코이는 여느 환자를 앞에 두었을 때처럼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세 번째라는 숫자는 더 이상 늘어나지 않았다. 칸은 그 이후로도 잠들지 않았다. 



The End




[STID/존본즈] Doctor's Ideal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0. 30. 18:27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Doctor's Ideal




  레너드 맥코이에 대해 칸이 배운 점이 있다면 그가 진심을 말하는 걸 어려워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느 누구나 절박하고 진실해지는 순간을 직업적으로 많이 겪은 탓인 듯했다. 대부분이 그러하지만 칸은 일생을 결심과 판단으로 소모해야만 했던 삶을 살았다. 그는 모든 것의 근거를 찾을 수 있었고,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가 현실적이면서도 감성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마친 그것을 직접 당사자의 입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때가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해가 게을러지는 계절의 일이었다.


  “늦어서 미안.”


  급하게 걸친 가운의 주름을 손으로 툭툭 펴내면서 맥코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별 의미 없이 파래지고 비둘기가 날아다니던 인공의 천장이 순식간에 백지화되고 칸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간 옷깃을 잡아 빼는 담당의의 모습을 짧게 평했다.


  “그냥 내일 오지 그랬나.”


  의사에게서는 소독약이라고 넘겨 짚을 수 없을 정도의 알코올 향이 났다. 맥코이는 눈가를 문지르면서 어쩐지 민망한 표정으로 도구들이 놓여 있는 은색 카트를 밀었다. 칸이 검사대 위에 앉았다.


  “다른 거면 몰라도 너랑 관련된 걸 어떻게 미룰 수 있겠어? 좋은 직장에서 내쫓길 일 있나.”


  맥코이가 디스플레이를 길게 끌고 왔다.


  “그리고 나 몇 잔 안 마셨거든.”

  “그래봤자 담당의가 자신의 예약 일정에 음주 상태로 임하고 있는 거 아닌가.”


  할 말이 없어진 맥코이는 버릇 같은 중얼거림으로 자신의 부끄러움을 일단락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현재 지상 근무직을 수행하고 있었고 이는 그가 병원에서 일하는 일반적인 의사로서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의사들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만나는 극한의 상황을 나누는 벗으로 동료에 술을 첨가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 저번에 어디였더라.”


  칸이 식은 눈빛으로 맥코이를 바라보았다. 그를 여러 차례 겪은 맥코이는 거기에 강화인간의 섬뜩한 서늘함보다는, 약간의 어이없음과 인간에 대한 한심함 등이 섞인 복합체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읽어낼 정도의 경험이 있었다. 맥코이는 결국 빽 소리쳤다.


  “됐어! 기억났거든!”


  칸은 잠시 웃었다가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맥코이가 그의 등으로 다가섰고 칸이 옷을 아래로 내리자 맥코이가 펜으로 표시해두었던 부분이 나타났다. 두 선분이 교차된 형태의 상징은 맥코이가 조직을 채취해야 할 정확한 지점을 가리켜주었고 맥코이가 카트 위를 뒤적여 도구를 수색했다. 본래 생검은 마취를 하고 진행하는 게 정석이었음에도 검사자가 그것을 매우 귀찮아했기 때문에, 맥코이는 본의 아니게 보통 의사가 하면 안 될 행동을 벌이고 있었다.


  “특별히 이상한 점은 없었어? 갑자기 체온이 상승했다든가….”


  제임스 커크 대령을 위시한 윤리적인 온건파들의 활약으로 칸은 부드럽고 뜻깊은 실험에 동참하게 되었다. 불치병에 대한 치료제 개발에 합류하게 된 것이었다. 다만 세포를 채취해 보관 후 이용하려 하면 특유의 재생 작용으로 조직이 세 배가 불어나는 기괴한 상황을 거듭 겪고 나서, 칸은 독감 주사를 맞듯 직접 피부층에 병균을 주사당해야 했다. 그렇지만 레너드 맥코이가 희석한 것들만 사용되었고 무엇보다 칸이 그러한 처사에 나름대로 만족하였다. 그는 이것을 자신이 거쳐본 가장 고통스럽지 않고 시시한 실험이라고 일축했다.


  “매번 묻는군.”

  “절차니까. 별 일 없었다는 대답으로 알아들을게.”


  맥코이가 어깨까지 내려진 칼라를 위로 올려주자 칸이 앞섶을 여몄다. 칸이 자리를 이동하는 맥코이를 응시했다.


  “술 때문인가.”

  “거 참, 또 뭐가.”

  “표정이 편안해 보이는군. 박사는 이 실험의 시작부터 전보다 훨씬 안색이 좋았지만.”


  맥코이가 유리관 안으로 곧 정밀 검사에 쓰일 칸의 조직을 흘려 넣었다. 유리와 금속이 맑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전보다?”

  “박사가 날 가지고 행했던 첫 번째 연구보다.”


  칸이 의미하는 바를 알아챈 맥코이가 눈썹을 찡그렸다.


  “그 때는 시간도 없었고 마음도 무거웠던 데다…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었으니까.”

 

  칸의 안색이 의아하다는 빛을 품었다.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잖나. 성취감이 느껴지지 않던가? 게다가 박사는 의사지 않은가.”

  “그래서 더 문제지. 의사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면 되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족속들이 아니라고. 그런 일은 의사의 이상이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돼. 아주 위험한 거야.”


  인간들 중에서 칸 누니엔 싱과의 대화를 가장 부담 없이 견딜 수 있는 레너드 맥코이는 이렇게 그의 앞에서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맥코이는 곧 기계를 돌리기 위해 책상으로 갔는데, 칸은 그가 다시 돌아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뭐가 다르지?”

  “이건 현실적으로 이상적인 무엇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이야. 아픈 사람 없으면 좋잖아?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지 않고 자연사로 죽는 거. 의사들은 파리 좀 날리겠지만 모두를 위해선 그게 더 건설적이지.”


  역시나 맥코이는 의자를 느릿하게 끌고 와서는 검사대 근처에 앉았다. 등받이도 없는 간소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 의사는 오래간만에 때를 만난 것처럼 천천히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이 일을 하다보면 말이야, 좀 이상한 생각이 머리에 박히게 돼. 인간의 가장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면서 비관론에 빠져들다가도 기적을 바랄 수 있기에 눈을 부릅뜨게 되거든. 그래서 의사들이 신봉하는 말이 뭔지 알아? 현실적인 이상이야. 사람이 죽는 걸 완전히 막을 순 없어. 그러니 그 과정에 기대를 걸고 인생을 바치는 거야.”


  맥코이의 문장을 하나씩 들을 때마다 분석을 완료하던 칸은 말을 멈춘 맥코이를 흘끗 살폈다. 칸이 짧은 논평을 던져도 괜찮은 차례였다. 


  “내가 박사를 본 시선이 틀리지 않았군.”


  맥코이는 입술을 살짝 내밀어 비죽였을 뿐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사가 그것을 위해 하고 있는 일은 이 실험에 전념하는 것인가?”

  “아니, 네 앞에서 성질 죽이는 거지.”


  왼발과 오른발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의자를 돌리고 있던 맥코이는 그 상태에서 툭 한 마디를 던졌다. 반면 휘적거리는 의사가 내뱉은 말이 제대로 사고의 톱니에 걸려버린 칸이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무슨 뜻인가?”


  맥코이는 슥 고개를 들었다가 아무렇게나 눈동자를 고정했다. 칸의 시선을 피하는 움직임은 아니었다. 


  “비극과 거짓말하는 일 없이 모두가 영원히 할 수 있는 일을 이렇게 시작하는 거야.”

  “…전공이 정신의학이었나.”


  칸은 맥코이가 술기운에 이상한 소리를 했다고 단정해 농담처럼 대꾸했다. 그런데 맥코이는 갑자기 승리의 미소를 닮은 밝은 표정을 안면에 가득 씌우면서 입꼬리까지 씨익 올렸다.


  “내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지?”


  그것은 명백히 계획과 의도가 있는 자의 즐거운 음흉함이었기에 칸은 미간을 좁히고 말았다. 그럼 달리 의미가 있는 것이었냐며 물을 뻔했다가, 최고의 강화인간이란 자신의 위치에 걸맞지 않는 언행이라는 느낌에 간신히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나 칸은 자타공인 현실적 이상주의자라는 의사의 말뜻을 파악할 수가 없었다.


  타이머가 종료되어 맥코이가 기계로 돌아갔을 때에도 칸은 부지런히 머리를 굴렸다. 다양한 표정 연출이 자연스럽지 못한 딱딱한 성격이 알게 모르게 큰 도움이 되어주고 있었다. 맥코이는 칸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는 채 돌아가려고 했다.


  “대체 무슨 술을 마신 거지?”


  맥코이가 눈썹을 쑥 올렸다.


  “뭐라고?”

  “원활한 추리를 위해서 현재 박사와 비슷한 상태를 유도해야겠어.”


  맥코이가 소리 내어 웃었다. 칸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정체성 중 하나인 학자로서의 면모가 엉뚱하게 자극을 받은 모양이었다. 맥코이는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아무도 이해 못할 거야. 신경 쓰지 말고 쉬어. 그리고 어차피 알코올 따윈 들어가자마자 분해해버릴 거 아냐.”


  그리고 맥코이는 끝까지 웃으면서 사라졌다. 칸은 검사대를 떠나지도 못하고 수많은 가설들을 떠올렸다.


  아직 레너드 맥코이는 알코올의 힘을 빌려도, 비극과 거짓이 곁에서 물러나줬으면 좋겠다는 대상이 칸이라는 걸 말할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강화인간의 이상적인 보편성을 꿈꾸는 그는 잠깐 본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에 쑥쓰러워하면서도 칸이 어울리지 않게 궁리하는 장면에 다시 깔깔 웃어버리고 말았다.


  조만간 레너드 맥코이는 문제의 단계에 진입할 지도 몰랐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James Kirk

- Written by. Jade




Chapter 8



  커크는 임시적으로 칸을 헤드쿼터의 빈 방에 데려다 주었다. 감옥마냥 창살이 드리워져 있지는 않고, 말 그대로 쓸모를 찾지 못해 텅 비어 있었다.


  “…의자라도 갖다 줄게. 일단 네가 저지른 일이 있어서 그럴싸한 곳에 못 놔둔다는 건 이해하겠지?”


  그러면서 커크는 결박된 그의 손을 풀어줄 수 있는 열쇠를 굴렸다. 조금 더 고민하면 수갑은 수거해 갈 수 있었을 텐데 칸은 조용히 커크에게서 떨어졌다.


  “닥터는 여기 없나? 그 역시 죄가 있어서 징계라도 받았나.”


  커크는 내심 칸이 맥코이를 찾는 것에 놀랐다.


  “당장은 정직 받고 쫓겨났어.”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요구를 던져 놓고, 칸은 휑한 벽을 무슨 영문인지 꼼꼼히 살피는 듯한 행세를 취했다. 주의를 최대한 분산시키려는 행동인 것도 같았다. 금방이라도 그를 추궁할 듯 달싹이던 커크의 입술이 툴툴거렸다. 


  “…기다려.”


  커크가 방에서 나갔다. 밖에 경비원 두어 명 정도는 서 있겠지만 방 안에서 칸은 혼자였다. 하나로 모아져 있던 그의 두 팔이 서로 떨어져 허공에 내려앉았다. 칸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천장 끄트머리에 달린 작은 환풍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 * *




  칸이 짐작했던 것보다 맥코이는 훨씬 일찍 도착했다. 가볍게 맥코이의 거처와 스타플릿 본부 사이의 거리를 계산한 그는 맥코이가 비행정이라도 타고 왔거나, 아니면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고 답을 내렸다. 


  의자는 도착하지 않았다. 바쁜 일이라도 떨어졌는지 커크가 명령을 내리는 걸 잊은 모양이었다. 범죄자의 다리는 편하게 쉴 가치도 없다고 생각하는 고지식한 스타플릿의 생도나 장교를 가정하는 건 신빙성이 떨어졌다. 이제 완벽히 맥코이가 헤드쿼터 주변에 있었음을 확신한 칸은 가느다란 의문을 느꼈다. 장교라는 타이틀도 뺏긴 의사가 본부를 어슬렁거릴 동기는 많지 않았다.


  맥코이는 벽에 가까이 붙어 서 있는 칸의 두 손을 곁눈질했다. 매끄럽지 않게 끊어진 수갑의 표면이 어두운 가운데서도 선명했다. 오싹한 흔적이었지만 맥코이가 한 뼘 정도 칸에게 다가서는 걸 막지는 못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그 순간이 되어서야 완전히 칸 누니엔 싱을 마주한 것이었다. 별이 태어나기도 하며 행성이 폭발할 수도 있는 우주처럼 복잡한 안구가 매끈한 청록빛을 띠었다. 그것은 맥코이가 찾아준 빛깔이었다.


  “나랑 할 얘기가 있다면서.”


  맥코이가 먼저 말을 텄다. 벽에 등을 붙인 칸이 가까스로 가시적인 밝기를 띠고 있는 맥코이의 얼굴을 훑었다. 


  “더불어 닥터 역시 나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할 수 있지.”

  “나랑 기싸움 해서 뭐하게. 네 요구 사항은 짐한테 다 확인받았을 거 아냐.”

  “닥터의 속내를 알 수 있지 않은가.”


  이제 칸은 맥코이의 죄책감을 발생시키진 못했으나, 능수능란한 자의 언어는 늘 다른 공략지를 찾아내기 마련이었다. 비꼬지 않은 솔직함이 아직도 혼란에서 말끔히 벗어나지 못한 맥코이를 흔들었다. 맥코이는 순순히 자신의 질문을 꺼냈다. 


  “…왜 돌아왔어?”

  “복수를 완료하기 위해서.”

  “캡슐에 들어간다고 했잖아.”

  “내 기억을 지우는 데에 동의한 스타플릿의 인물들을 모두 심판대에 올리고 나서의 일이다.”


  맥코이는 자신이 상상하지 못한 경우의 수에 입을 다물었다. 


  “마음에 드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그가 물어야 하는 짧은 어구만이 번쩍였다. 크고 작은 떨림에 자세를 뒤척이고 있는 맥코이의 얼굴은 자주 불빛의 범위를 벗어났다. 


  “나라고 해도 나에게 동조할 무리가 없이 연방을 정복할 수는 없어. 그것이 내가 스타플릿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이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들의 욕망에 벌을 내리고, 사욕을 채울 수 있는 지름길을 끊어버리는 것.”

  “언제부터.”


  갑자기 진한 온도를 휘감은 흐름이 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칸이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무슨 뜻이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한 거야.”


  그리고 맥코이만큼이나 칸은 맥락 없는 말을 건넸다. 


  “내가 닥터한테 하고 싶은 말이 뭐였을 것 같나.”


  정교하게 조립된 저장 장치 같은 두뇌에는 미치지 못하는 맥코이는, 칸에게만 명백할 뿐 자신에겐 막막한 문맥을 잡아내 보려고 인상을 찌푸렸다. 칸이 담담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언제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칸 누니엔 싱은 자연스럽게 우세를 거머쥐는 인물이다. 그는 듣고 싶은 말을 뽑아내며 정작 자신은 침묵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가 맥코이의 집을 불시에 방문했을 때처럼 말이다.


  한순간 맥코이는 그가 보통 사람들의 방식을 의도적으로 벗어날 뿐, 대부분의 것에 반응하고 답한다는 걸 깨달았다. 


  맥코이가 다시 그의 얼굴과 불빛을 일직선상에 놓았을 때 칸이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가 본래대로 방향을 내렸다. 자신이 더 이상 설명할 건 없다는 표정이었다. 


  “나가지 않을 건가.”


  칸은 자신의 거듭되는 동결을 모두가 반기지 않는다는 측면을 굳이 밝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맥코이도 충분히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코이가 등을 돌려 방에서 나갔다. 칸은 눈을 깜빡였다. 반사적으로 일어나는 미동도 크게 필요하지 않은 육체는 드물게 다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 * *




  커크가 후련하다는 동작으로 맥코이에게 그가 전에 반납했던 의복과 패드를 돌려주었다.


  “정직 풀린 거 축하해.”


  맥코이가 찡그린 미소를 지으며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사람들에겐 스타플릿의 젊은 지도자까지 격상된 제임스 커크는 굳이 노고를 들이는 발걸음을 감행했다. 맥코이는 제일 먼저 패드를 켜 보았다. 동료들이 언제 읽게 될지도 모를 메시지들을 수신함에 가득 쌓아둔 상태였다.


  “고마워.”


  커크가 의자를 넓게 당겨서 앉았다.


  “잠시 내가 맡고 있던 물건의 주인을 찾아준 건데, 뭐.”


  커크는 말하면서 손가락 마디로 눈가를 문질렀다. 종횡무진 날뛰기 일쑤였던 생도가 업무의 피로함을 토로하는 함장으로까지 발전한 것에 맥코이는 괜히 웃음이 났다.


  “법원 나올 때 제복 차려 입어야 하는 거 알지?”


  맥코이가 아, 하고 목소리를 흘렸다. 


  “…그 일도 일이지만, 그것 때문에 정직 빨리 풀어준 건 아니야. 그니까….”

  “나 안 불편해.”


  맥코이가 의료 장교이자 엔터프라이즈의 메디컬 치프 직위를 회복한지 5분이 지났을 뿐인데 벌써 패드가 반짝이면서 수신음을 냈다. 하필 칸 누니엔 싱의 기억 삭제술과 관련해 증언을 하려는 명령서가 도착한 거라서 커크는 민망하게 눈살을 구겼다. 


  “아, 진짜 괜찮다니까. 어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어? 갑자기 왜 그러시나 모르겠네.”


  맥코이는 패드의 액정을 끄고, 가끔씩 자신의 앞에서 풀죽은 강아지 흉내를 내는 함장을 향해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말이야, 본즈. 나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정말로 칸이 왔었어?”


  맥코이가 고개를 까딱했다. 


  “뭐랬어?”

  “그 놈은 별 말 안 해. 늘 떠들고 추스르지 못하는 건 내 쪽이지. 내 하소연 듣다가 그냥 갔어.”


  커크가 입을 비죽였다.


  “…그게 다야?”

  “칸이 있는 동안 내가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다는 거 빼고는 별 거 없었는데.”


  내심 맥코이가 칸의 심경 변화에 일조하지 않았을까 추측하던 커크는 김샌다는 표정으로 알았어, 라면서 중얼거렸다. 


  맥코이는 테이블 위에 방치되어 있던 자신의 물품들을 무릎 아래로 내려 조심스럽게 가져갈 채비를 했다. 아래를 보고 있던 그가 순간 입술을 안으로 말았는데, 그 모양새가 취향에 따라서는 살짝 독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냥 쌉쌀하지는 않은 계피가루라도 머금은 듯했다. 




* * *




  사람은 가득 들어찼지만 모두가 엄숙하게 입을 다물고 있는 가운데, 절차가 부여한 권한으로 대질을 맡은 인물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그 시술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처음으로 대답하는 이는 레너드 맥코이였다.


  “기본적인 원리는 전류가 흐르는 유리막대를 가지고 기억을 활성화시키고 저장하는 세포를 죽이는 겁니다. 하지만 뇌의 각 신경들과 부위가 서로 맡는 분야가 다르다는 게 알려졌다고 해도 그것을 또 다시 세심하게 분류하기에는 기술의 수준이 그 단계까지 미치지는 못했지요. 그래서 기억 세포들을 선별적이 아니라 모두 다 없애버려야 했습니다. 한 마디로 칸 누니엔 싱은 배정받은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과거를 잃어버리게 됐죠.”


  다음 차례인 스팍은 증인석의 무게감에 전혀 눌리지 않은 것처럼 평소대로 길게 말했다. 


  “레너드 맥코이 박사의 시술이 가지는 현실적인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들은 그를 대하면서 반드시 지켜야 하는 사항들을 매뉴얼 형태로 전달받았습니다. 칸이 스타플릿의 충성스러운 장교라는 사실을 주입하고 그의 정체를 본인이 알게 하지 못하는 게 목적이었습니다.”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된 법정에 울리는 구두굽 소리는 선서를 해야만 발언할 수 있는 단상 위 좌석에 오르는 이의 것이었다. 커크가 마지막으로 증인석에 앉았다. 그는 맥코이와 스팍이 했던 말들을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알려야 할 진실을 골랐다. 


  “…그의 처분을 논하면서 문제의 기억 제거술을 비롯해, 결국 그를 스타플릿의 입맛에 따라 이용하기 위한 방법들에 지나지 않은 숱한 안건들을 반대한 건 저와 부함장 스팍뿐이었습니다.”


  말을 마친 커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다.


  “증인이 칸 누니엔 싱의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그런 셈이죠.”

  “어떻게 보면 증인의 선택은 스타플릿에 속한 함장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배반한 거라고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단정적으로 말해볼까요? 전 스타플릿의 본질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부패한 스타플릿의 일부라면 모르지만요.”


  참관인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에 앉은 맥코이는 강인하게 굳은 얼굴로 커크와 법정에서 호흡하고 있었다. 이어 커크는 맥코이와 비슷한 질문을 받았다.


  “칸이 요구하지 않았어도 이 사건이 물밑으로 올라올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자신이 앞서서 했던 대답을 소리 없이 번복했다. 남자는 맥코이에게 손수 지우던 칸의 기억을 되살리기로 한 동기를 물었었다. 


  “내가 레너드 맥코이 박사의 계획에 동참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 사람인 이상, 반드시 가슴에서 머리를 쳐들 수밖에 없는 결정이었습니다.




* * *




  샌프란시스코의 본부에서 우주 연방의 대법원까지 칸을 옮긴 인원들은 모두 헛수고를 한 셈이었다. 그는 자신이 피고로서 출두해야 하는 날짜에도 구치소의 작은 방 안에 앉아 있었다. 칸은 앞을 봉쇄하고 있는 강화 물질의 철문 너머에서 접근하고 있는 인기척을 감지했다.


  군청색의 유니폼을 입은 남자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 있었다. 일찍 끝났군. 칸이 종이를 받았고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그에게서 멀어졌다. 


  칸은 연방에 대한 깊은 불신과 언짢음 때문에 법정에 서길 거부한 게 아니었다. 그의 이유는 대개 효율적이면서 합리적이었다. 판사의 육성을 듣지 않아도 칸은 자신에게 떨어질, 곧 자신이 원했던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가 가볍게 판결문을 집어 읽었다. 형식상 그의 전과를 장황하게 서술한 많은 문단들은 뛰어 넘었다. 마침내 칸은 판결문의 끄트머리에서 기간을 정해 놓지 않은 동결을 명하는 문장을 발견했다. 소용을 다한 종이가 팔락거리면서 차가운 철제 바닥에 내려앉았다. 



Next Chapter will be the last chapter of this work.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James Kirk

- Written by. Jade




Chapter 7




  “본즈, 괜찮아?”


  물속에서 막 구조된 듯이 맥코이가 헉 하고 몸을 움찔했다. 약기운이 많이 잦아들어 군데군데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맥코이는 상체를 낮추고 있는 커크의 옷자락을 쥐었다.


  “존이 약을 다 가지고 도망갔어.”

  “알아.”

  “젠장. 어떻게 하지? 그가 어디까지 기억했는지도 모르겠어. 이제 두 번이었는데, 이렇게 빠를 줄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존한테 아무런 설명도 못 했다고!”


  커크가 아예 자신의 상의를 붙잡고 흔들 것 같은 맥코이의 손등을 잡았다.


  “진정해. 아직 심각한 일은 없었으니까.”


  맥코이는 퍼뜩 자신이 얼마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휘저으며 시계를 탐색했다. 존 해리슨에게 무력하게 제압당하고 나서 반나절이 넘게 흐른 시간이었다. 안정제가 다량으로 주입됐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어, 일단 전과가 워낙 대단했던 인간이라 곧바로 수배령이 떨어졌어. 이건 나도 막을 생각 안 했고. 어쨌든 너를 협박했다는 건 이쪽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거니까, 다시 적군 행세를 해도 이상할 게 없잖아.”


  그러다 커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으음…. 어찌됐든 우리가 스타플릿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한 거라서….”

  “그냥 나 혼자 한 걸로 하자.”


  맥코이의 단언만큼이나 커크의 대답도 빨랐다.


  “그럴 순 없어.”

  “네가 이태까지 사고 친 건수가 얼만데, 또 함장 자리를 잃게 되면 어쩔 거야?”

  “그렇다고 어떻게 혼자 책임지게 해! 나도 스타플릿 행태 맘에 안 들었고 네 주장에 동감했었어.”

  “당장 존 해리슨의 적은 나 하나면 돼.”


  맥코이가 최대한 차분하게 이었다.

 

  “약을 필요로 했던 걸 보면 아직 기억을 다 찾은 게 아니야. 하지만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가 가장 쉽게 화를 낼 수 있는 상대가 나야. 다시 그의 적을 스타플릿 전체로 만들지는 말자고.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씩이나 되는 네가 끼어들면 존이 어떤 오해를 하고 위선을 들먹일지 몰라.”


  커크는 근래 맥코이의 순도 높은 진지함을 많이 겪는다고 느꼈다. 존은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맥코이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그가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크로노스에 나가지 않는 거 확실해?”

  “지금쯤 스팍이 그 짜증나는 논리로 회의실을 구워삶고 있을 테니 확실할 거야.”

  “수석 의료 장교의 위법 행위로 인해 보건 총책임자는 부재중일 수밖에 없는 상태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승무원들의 심적 동요가 어쩌고저쩌고 뭐 이렇게?”


  정말로 근거 있는 말이라서 커크는 피식 웃어버렸다. 정작 맥코이는 스팍이 자신을 들먹일 가능성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네가 조금만 시간을 끌어줬으면 좋겠어.”

 

  반역이라는 게 한 번 저질러 보니까 계속 는다, 그렇지? 맥코이가 커크의 가슴팍을 치려다가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었다. 그 어울리지 않은 너스레를 통해 맥코이는 자신의 친구이자 함장이 또 한 번 어려운 결심을 이뤄냈음을 알았다. 


  주인의 허락 없이 문이 열렸다. 딱딱하게 무기를 쥔 스타플릿의 집행자가 척 봐도 긴급 처벌을 시행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맥코이가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가 느리지만 미련 없이 자신의 패드를 넘겼다.




* * *




  스타플릿이 처한 총체적 난국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먼저 공식적으로 클링온들의 잔여 세력이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덕분에 스타플릿 함대 다수가 진압을 위해 크로노스로의 배치를 명령받았고, 이제야 실력 발휘를 하는가 싶던 연방의 전투함 벤전스호는 교묘한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지상에 남아 있으려던 함선들마저 밖으로 내보내는 데에 일조한 꼴이 되었다. 


  과거 클링온보다도 더 큰 위협이었던 존 해리슨의 사진이 들어간 수배지는 거리낌 없이 샌프란시스코 곳곳에 붙었다. 일반인들도 다 아는 테러리스트의 재림을 조금이나마 설명해야 했던 수뇌부의 작은 고충은 레너드 맥코이가 모조리 감당했다. 그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정직을 받고 물러났으며 덕택에 엔터프라이즈는 메디컬 치프를 잃었다는 핑계를 대고 지구에 남았다. 

 

  몇몇 부분이 커크와 맥코이, 그리고 암암리에 그들에게 동조한 엔터프라이즈의 주요 승무원들에 의해 짜였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존 해리슨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수 없는 가치관을 가졌던 함장과 부함장들이 크로노스로 흩어진 후, 당분간 본부의 책임자 격이 된 커크가 신뢰할 만한 인물들을 확보했다는 것도 좋았다. 


  격납고가 다시금 긴박함으로 술렁였다. 비행 허가를 받은 대규모의 셔틀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커크는 그 소음 속에서 수색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눈에 담아둔 맥코이는 준비된 차량에 탔다. 데이스트롬에서 맥코이를 신랄하게 물고 늘어졌던 스팍의 사과 아닌 사과였다. 맥코이는 잠깐 웃었다가 멀어지는 헤드쿼터를 응시했다.


  그는 일체의 변호도 않고 최대한 빨리 집에 오려 노력했다. 스타플릿에 남아 있고 그 위치가 높은 커크 함장보다 자신을 만나는 게 훨씬 만만하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것과 비슷했다. 맥코이는 바깥보다 더 서늘한 것 같은 내부의 공기에 볼을 부풀려 한숨을 짓고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풀어 놓을 짐은 적었지만 한바탕 집안 청소를 해야 할 분위기였다. 맥코이가 겉옷을 벗었다. 오랜만에 환하게 전등도 켜고 창문도 열었다. 


  맥코이는 제발 존이 건물 하나라도 날려버리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 주길 바랐다.




* * *




  한편 존은 스타플릿의 유능한 중령에서 지명수배자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장 밀폐된 공간이 필요했던 그는 대충 정한 임시 거처에서 집착적으로 촉진제를 주사했다. 단번에 아득해진 청록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감겼다.


  단지 그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스파크를 조명하기 위한 장막들이 두꺼운 벽을 형성했다. 존은 자신이 태동하고 있는 기억 세포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봉인된 상자를 연상시키는 그 빈틈없는 어둠도 과거의 하나였다. 빛이 허락되지 않은 그 속에서 존은 막연한 비탄과 분노를 느꼈다.


  자신은 금지된 구역에서 엔지니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쉽게 이분될 수 있는 사고는 어떠한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그가 아직 정체를 모르는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그는 특정 부서를 의미하는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정제된 야심과 근원적인 책임감이 푸르스름한 조명으로 가시화된 것 같은 복도가 삽시간에 그의 앞을 지나갔다. 기억이 아니라 단순한 난상(亂想)에 가깝게 느껴지는 급속한 흐름이었지만, 존은 자신의 시야에서 붕괴되고 있는 구조물이 그 복도까지 아우르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제임스 커크, 스팍, 레너드 맥코이, 진실을 은폐하는 선봉장이었던 이들이 또 다시 보였다. 순순히 정체성을 밝히는 자신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존은 본명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던 맥코이를 떠올렸다가 이내 기억에 몰두했다. 


  차가웠다가, 건조했다가, 절규하는 외침 모두가 오로지 한 무리를 향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의 곁에 있어야 마땅한 무엇인 것 같았다. 폭군마냥 함장석을 차지했다가 흐트러진 얼굴로 낙하하는 상반된 모습에서 그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연관성을 찾았다.


  기억의 전경이 갑자기 뚝 끊겼다. 존은 약물을 더 주입해야 하는가 싶어 팔을 뻗으려다 동작을 그쳤다. 그는 실제로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의식의 저편에서는 눈꺼풀을 들었다가 올리는 기분이었다. 한줌의 배려도 없는 하얀 빛에서 그는 과학자들의 강박적인 눈동자를 목도하고는 치를 떨었다. 잠시 쉬어가는 듯한 암흑, 이후 나타난 건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레너드 맥코이의 씁쓸한 눈길이었다.


  심연의 외부에서 발만 걸치고 있던 존 해리슨이 수면을 벗어났다. 그는 제일 먼저 남아 있는 약병을 체크했다. 한 번 주사기를 꽉 채우면 완전히 소모될 양이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반복적으로 기억을 제거시키는 대상이 우주연방의 충성스러운 인재일 리가 없다는 의심은 적중했다. 엔터프라이즈로 대표되는 연방에 옅게나마 배신감을 느꼈던 자신을 비웃어줘야 할 지경이었다. 그는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 그 무엇도 아닌 검은색 상의를 흘끗 보았다. 그 옷부터 자신은 절대로 스타플릿에 녹아들 수 없다는 상징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칸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는 한낱 장교들로 구성된 추격대에 덜미를 잡힐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지 않은 처지라 주기적으로 머물 장소를 바꿔야겠다는 필요성은 들었다. 그가 명상하듯 눈동자를 닫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짧은 섬광처럼 과거의 파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벌써 난폭한 충동들이 가슴에 익어가며 그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떠오르는 맥코이의 얼굴은 익숙하게 여길 수 없었다.


  코트를 집다 말고 그가 라디오를 켰다. 타이밍 좋게도 뉴스가 흘러나왔다.


  “현재 연방에서는 켈빈 기록 보관소를 폭파시켰으며, 주요 함장들과 부함장들을 살해한 바 있는 범죄자 존 해리슨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오니 그를 발견할 시 시민들은 즉시 신고하시길 바라며….”


  뻔한 내용이었지만 존은 잠자코 들었다.


  “…그럼 첫 번째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크로노스에서 발생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연방에서 출병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출병에 포함된 함선을 읊었다. 존의 손가락이 라디오의 전원을 끄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이름 두 개가 빠졌다. 원체 묶여있지도 않았던 지성이지만 기억을 회복한 이후에는 더 빛나는 위력을 발휘했다. 존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면서 짧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의외로 여유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나가면서 그는 팔에 마저 약을 흡수시킨 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진득한 그림자에 의지해 몸을 감추고 있던 그가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려 하는데, 고글을 끼고 무기를 든 추적대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한 번은 마주쳐야 재미가 있겠지. 비무장이면서도 존은 여유로웠다.


  존이 코트 주머니 안에 든 기폭단추를 쥐었다. 동선을 스스로 내보이는 꼴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가 천천히 길가로 나왔다.


  건물의 한 층에서 별안간 폭발음이 터지면서 깨진 창문으로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추적대의 눈이 자동으로 폭발이 발생한 건물을 훑었다. 존 해리슨이 그들을 기습해 한 명을 쓰러뜨리면서 페이저건까지 뺏기에 충분한 빈틈이었다. 


  “…?!”


  존이 곧바로 다른 한 명을 노려 총을 쐈고 붉은 광선이 튀어나왔다. 이들이 자신을 죽일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게 명확해졌지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무기를 한 번 쓸 겨를도 없이 추적대는 괴멸 당했고, 그는 쓰러진 대원의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챙겼다. 소란을 들은 시민들 몇몇이 창을 열고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그가 제압한 대원의 수는 다섯이었다. 존은 이 정도 인원이면 근처에 차량 한 대는 있을 거라 추리하고는 역방향으로 걸어 인근을 살폈다. 상황을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존의 등을 주시하고 있었고, 검은 코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요주의 범죄자라는 걸 깨닫는 데에 3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발견한 모터사이클에 몸을 실었다.


  - 21구역 탐색중이다. 존 해리슨은 보이지 않는다.

  - 34구역도 마찬가지다. 한번만 더 순찰하도록 하겠다.


  맥코이가 부탁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총책임자인 제임스 커크가 지시한 건 일단은 의례적인 순찰이었다. 존은 간간히 들리는 잡음을 무시하고 양 손잡이 사이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을 몇 번 클릭해보았다. 


  의문의 남성에 대한 고민을 마친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소방차인지 경찰차인지 사이렌이 요란했다. 존이 탑승한 사이클이 거칠게 뒤척이며 달렸다.




* * *




  본부의 고층에 꾸며진 관제실은 작지만 다양한 목소리와 분할된 화면으로 채워져 있어서, 고도로 디지털화된 작전 회의실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지상에 남은 통신 장교들이 헤드셋을 쓰고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어때?”

  “수적으로 우세해 진압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벤전스호의 수리가 언제쯤 완료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 쪽에서 지원을 요청할 때까지는 끝난다고 해.”


  장교가 제임스 커크의 단호한 대답을 그대로 전했다. 


  “디파이언스에서 영상을 전송하겠다는 신호입니다, 캡틴.”

  “승인하도록.”


  관제실의 네트워크는 크로노스에 배치된 각 함선들과 샌프란시스코 전역으로 흩어진 별동대, 거기에 벤전스의 상태를 보고받기 위하여 우주 정거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든 알림들을 소화하고 있는 커크의 안색이 더없이 진중했다. 직접적인 전투에 합류하지 않은 디파이언스호에서 보낸 크로노스의 광경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점령 직후 욕심을 부리지 않고 클링온들의 무기고부터 정리한 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대로 갖추긴 했지만 다수의 함선을 운용하고 있는 아군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준은 못 되었다. 빔이 폭풍우 치는 땅으로 빗발쳤다.


  “캡틴, 신고가 하나 접수되었는데….”


  테러리스트 특별 대응팀에 소속되어 민간인들의 신고를 처리하고 있는 장교가 의자를 틀었다.


  “존 해리슨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추격대를 무력화시키고 차량을 훔쳐 도주했다고 합니다.”


  커크는 동요하지 않았다.


  “발견된 장소는?”

  “27구역입니다.”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팀을 보내서 현장을 점검하게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원들은 그냥 수색을 이어가라고 해. 그의 목적지를 모르니 최대한 많은 곳을 감시해야 하니까. 20번대 지역에 있던 팀을 소집해.”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꺼냈다. 그는 정말로 존이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가 가 줬으면 하는 곳은 한 군데 있었다. 커크가 작성한 메시지를 레너드 맥코이 앞으로 보냈다.




* * *




  [ 존이 움직이고 있음. ] 


  문자를 확인한 맥코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쫓겨난 전(前) 의료 장교의 거주지를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닐 테고, 문제가 되는 것은 존의 의향이었다. 맥코이가 커튼을 끌어 당겨 유리창을 가렸다. 읽다만 책은 그냥 귀퉁이를 접어놓고 덮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스타플릿을 나오면서 그나마도 거의 써 본 적이 없던 페이저건을 반납했기에 맥코이에겐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그가 거실에 있는 서랍장들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존 해리슨을 어떻게든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저번처럼 볼썽사납게 안정제를 맞고 기절하는 꼴은 면하기 위함이었다. 


  현관문을 열어둬야 하나. 얌전히 문을 두드릴 리가 없는데. 맥코이는 결국 도어락을 풀었다. 존이 철문을 구겨버리기 전에 한번이라도 손잡이를 돌려주길 바라며 그는 소파로 돌아왔다.


  사실은 개인적인 바람에 가까웠다. 맥코이도 존이 자신을 방문해 줄 지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단언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코이는 우수하게 합성된 존의 두뇌를 믿는 것이었다. 과연 누구로부터 가장 쉽게 진실을 얻을 수 있을지 판단해보길 바라면서. 맥코이가 괜히 덮었던 책을 만지작거렸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조심성 없는 행동을 삼가야 하는 그가 불편하지 않게 불빛은 약하게만 남겨두었다. 맥코이는 차분하고 편견 없는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보다 짙은 윤곽이 달칵 문을 잠갔다.


  “날 기다렸나.”


  아직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와주길 기대하기도 했고.”


  맥코이는 탁자 끝으로 책을 밀었다. 굳이 기척을 죽이지 않아 존 해리슨의 무뚝뚝한 걸음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가져갔던 약을 다 썼으면 네 기억 정도는 다 찾았겠네.”

  “꼭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

  “너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잖아.”


  이 순간에도 약효로 인하여 존의 기억 세포는 거듭 재생되고 있었다. 존은 맥코이의 앞에 나타나길 거부하면서 대신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맥코이가 바짝 긴장했다.


  “내 선원들의 행방은 묘연하고, 예기치 못하게 깨어난 나를 너희들은 억지로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이용했다.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이 또 있나.”


  분노가 새겨진 음성과 더불어 칸이 맥코이의 머리를 일그러뜨릴 듯 세게 잡았다. 맥코이가 두려움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스타플릿의 모든 사람들이 그걸 찬성하진 않았어. 커크와 스팍은 아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맥코이의 입술이 절로 떨렸다.


  “물론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못한 건 우리가 너한테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 놈이 지구를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 널 깨우자는 의견에 발끈했던 탓이겠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네가 짜증나고 싫어서.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면 네 기억을 되살려 주려고 하지도 않았어.”


  여전히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악력이 풀릴 기미가 없자 맥코이는 버럭 내뱉고 말았다. 


  “네 놈이 나쁜 건 맞는데, 네가 진짜로 위험한 인물인 건 맞는데! 너에게 이런 식의 형벌을 바라진 않았어. 적어도 나는 아니야.”


  칸은 반응이 없었다. 맥코이가 눈동자를 슬금슬금 위로 올렸다. 

 

  “…할 말 남았긴 한데 손에 힘 좀 빼 주지. 금방이라도 내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상상이 자꾸 떠올라서.”

  “그렇다고 입을 못 놀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계속해.”


  맥코이가 이 와중에도 버릇대로 젠장, 하면서 궁시렁댔다. 하지만 아주 조금 머리 위쪽이 편해진 것도 같았다.


  “내가 왜 네 기억을 찾아준 줄 알아?”

 

  칸은 말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뇌부가 널 다시 지하에 처박아두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널 백지상태에 가둬두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자고 했지. 사람이 무슨 비상식량도 아닌데.”

 

  ‘물론 널 보통 사람에 끼어주기에 무리기는 하겠지만’ 같은 합당한 사족은 붙지 않았다. 


  “…내가 네 기억을 지워야 했으니까, 나는 도저히 그 악명 높은 칸과 어울리지 않는 너를 많이 봤단 말이야. 자신의 본질이 소거된 누군가를 본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 의사로, 아니 한 인간으로서 그게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였는데 스타플릿이 내 마지막을 건드렸지.”

  “…날 백치로 만들겠다는 명령 말인가?”

  “네가 교화될 거라는 오만은 부리지 않아. 너는 잠들어야 해. 다만 칸인 모습으로 잠들어야 하는 거야. 그 망할, 웃기지도 않은 중령 따위가 아니라.” 


  뒤통수가 다른 의미로 따가웠다. 맥코이는 미동도 없는 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단지 따갑다고밖에 인식할 수 없는 시선에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지도 궁금했다.


  끝까지 칸이 침묵하는 관계로 맥코이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네 선원들 말인데.”


  맥코이가 볼 수 없는 그늘 뒤에서 칸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 죽었어. 우리가 죽인 건 아니고 블랙아웃 때문에 극저온 캡슐들이 한꺼번에 꺼져버려서…. 너만 살아남았어.”


  맥코이는 칸이 크게 동요했음을 알았다.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신을 옥죄고 있는 힘이 줄어들었다.


  “또 본부 쳐들어가서 내 대원들 내놓으라고 삽질 하지 말라고.”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 양쪽이 다시 답답해져서 맥코이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험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정리하자면 너는 나를 다시 동결시키기 위해 내 정체성을 복원시켜 준 거로군.”

  “왜 거기에 제일 중요한 걸 빼먹어.”


  제일 중요하다면서, 맥코이는 제법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쨌든 내가 네 반쪽짜리 모습을 못 견딘 거야.”


  칸이 물러났다. 밧줄 더미에서 풀린 듯한 해방감을 맛보며 맥코이가 크게 호흡했다. 그가 소파를 짚으면서 허겁지겁 상체를 틀었다. 칸이 나가려 하고 있었다.


  “또 복수할 거야?”


  탁 하고 문이 닫혔다. 응답을 얻지 못한 맥코이의 질문은 허망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나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털어 놓은 것 같아서 맥코이는 속이 편했다. 공연한 충동에 그는 발코니까지 나가 아래를 둘러보았지만 칸을 보지는 못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 * *




  일격에 고글이 벗겨지면서 마지막으로 의식이 남아 있던 수색대원이 고꾸라졌다. 팀의 대부분이 실력 있는 장교로 구성되어 있음은 칸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스타플릿 장교들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격투기를 구사한들 그의 상대는 못 되지만,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그들이 꽤 괜찮은 인재였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고 있는 사항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칸이 수색대원을 땅바닥에 풀어 놓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동분서주하고 있는 장교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필요가 없어져 칸은 무전기를 버리고 남자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의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헤드쿼터 출입증이 잡혔다. 칸은 수송선들이 대기하고 있는 격납고만 가면 되었다. 


  잠시나마 집중력이 떨어지면 되살아난 영상들이 활개를 치며 칸의 사고를 가렸다. 과학자들, 자신의 승무원들, 마커스. 육체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무기질마냥 끓어오르는 폭력적인 자극들에 칸이 인상을 구겼다. 곧 레너드 맥코이가 나타날 순서였으므로 칸은 지체하지 않고 스타플릿 본부로 나아갔다. 




* * *




  셔틀 다수가 우주에 나가 있어서 격납고는 한적했다. 물론 남은 셔틀이 한 대도 없다거나, 의무적으로 상황실을 지키는 안전요원도 없이 한산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귀찮은 일은 미리 방지하고자 칸은 상황실부터 습격했다. 그는 예의 있게 노크를 했고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닌지라 요원 한 명은 일어나서 방문객을 확인해야 했다. 


  문틈으로 안전요원을 확 잡아당긴 그가 팔을 비틀고 명치를 찍었다. 화들짝 놀란 동료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태평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칸을 보며 더욱 다급하게 무기를 찾았다. 칸이 요원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조이스틱으로 카메라의 여러 각도를 엿본 그가 자신이 탑승하기에 알맞은 수송선을 골랐다. 중요한 건 직선거리였다. 적막한 격납고를 울리며 단숨에 조종석에 오르자마자, 그는 엔진을 웜업시켰고 동시에 우주 정거장을 목적지로 하는 경로를 입력했다.


  벤전스와 엔터프라이즈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확정했던 계획이었다. 스타플릿의 유일한 전투 군함은 언제나 칸의 복수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였다. 


  칸은 자신의 함선을 되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 * *




  맥코이는 기어코 외출을 감행했다. 그는 걸으면서 페이저건을 찬 스타플릿 장교들을 여럿 보았다. 자신의 집에서 나온 뒤 칸은 무사히 어딘가로 장소를 옮긴 모양이었다. 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잡히지 않겠지, 맥코이의 추정은 정확했지만 뒷맛이 좋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가 잡히진 않지만 맥코이는 그가 스타플릿으로 들어가서 커크와 대화를 나눴으면 했다. 


  문득 맥코이는 커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정 기간 동안 스타플릿을 통째로 맡을 정도로 무게감이 커진 젊은 함장은 틀림없이 크로노스 사건으로 바쁠 게 뻔했다. 


  맥코이가 생각하다 자신보다 살짝 앞서 있는 추격대원의 등을 톡톡 쳤다.


  “내가 방금 존 해리슨을 봤는데.”


  눈동자만 힐끗 움직였던 대원이 맥코이의 말을 듣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아주 정확한 지점을 알려드릴 테니 스타플릿 본부까지 나 좀 데려다 주시면 안 되나? 꽤 괜찮은 거래 같은데.”


  제임스 커크처럼 유명 인사가 아니고서야,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스타플릿의 장교들이 엔터프라이즈의 전직 메디컬 치프의 얼굴을 알 턱이 없었다. 맥코이를 낯짝 두꺼운 거주민쯤으로 파악한 그가 인중을 좁혔다. 


  “확실합니까?”


  맥코이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설마 내 집도 모르려고.”


  얼떨떨해하는 장교의 등을 밀면서 맥코이가 길을 재촉했다. 칸이 헤드쿼터에 갔다는 보장은 없다. 대단한 행운이 그를 격려하지 않는다면 맥코이는 칸을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어떻더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강한 느낌이 맥코이를 행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수송선에는 비상용으로 스턴건이 구비되어 있었다. 무기를 들고도 적을 사살할 수 없다는 건 그에게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지만, 당장은 신속하게 계획을 실행하는 게 우선인 고로 칸은 스턴건을 하나 뽑아 쥐었다. 구석에 셔틀을 세우고 그가 정거장을 가로질렀다.


  칸은 곧장 벤전스에게 가지 않고 먼저 쓸 만한 컴퓨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커스 제독은 그에게 꽤나 다양한 일을 시켰었다. 스타플릿의 중령이자 비밀 요원으로서 칸은 실제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었고, 그로 인해 제독은 그의 대원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칸은 처음부터 탈출을 도모했으며 알게 모르게 제독에게 일시적으로 받은 권한을 임의대로 이용했다. 


  그는 복도 중간에 안내도를 보여주는 화면이 설치되어 있음을 기억했다. 그것은 단순한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칸은 안내도를 바닥으로 내리고 창을 띄워 지금껏 사용해본 적이 없었던 명령어를 적었다. 다행히도 명령어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는 한 손을 쉼없이 움직이면서 발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을 겨누기 위하여 총을 꺼냈다. 


  엔지니어 특유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던 여인이 두 팔을 굽혀 들었다. 칸은 여자를 슥 보고는 갈수록 숫자가 늘어가는 창에 집중했다. 당장 처리해야 하는 작전이 시급한 탓이었다. 


  스턴건을 들고는 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여 여인은 눈치를 살피며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느닷없이 빔이 쏟아진 건 그녀의 검지가 아슬아슬하게 통신기에 닿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귀찮게 하는군.”


  화면에는 어떤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짧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칸은 쓰러진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은 그녀가 경련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본부에 정거장의 침입자에 관하여 알리고자 애쓰고 있었다.




* * *




  폭풍뿐인 크로노스의 기후는 험악했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스타플릿의 중위는 그래서 클링온들의 성미가 그토록 고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영양가 없는 상념을 떠올렸다. 벤전스가 제외되어 계획보다 더 많은 숫자의 함선을 대동한 스타플릿의 화력은 아무래도 클링온들의 예측 범위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블레이드를 전부 수거당한 클링온 병사들이 반항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사지 곳곳을 페이저건으로 겨냥당한 그들을 스타플릿의 함선 한 대가 유유히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해도 될 것 같은데?”


  노란색 유니폼의 장교가 커뮤니케이터의 플립을 젖혔다.


  “여기는 크로노스, 함교 나오십시오.”




* * *




  “캡틴, 크로노스에 있는 함선으로부터의 통신입니다.”


 커크가 연결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무슨 일입니까?”

  “어벤저호입니다. 혹시 다른 함선이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까?”

  “아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여긴 행성 쪽 상황이 대충 정리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근데 레이더에 워프 중인 함선이 잡힌다고 하는데요?”


  어벤저호의 조타수로 짐작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섞였다. 벤전스입니다, 함장님. 커크가 놀라 반문했다.


  “잠깐, 지금 벤전스라고….”


  통신이 끊겼다. 커크가 정거장과 접신하는 역할을 맡은 통신 장교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마침 정거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큰일입니다. 존 해리슨이 벤전스를 탈취했습니다!”




* * *




  크로노스 상공에 떠있던 함선이 위기감에 들썩였다. 주변에 정박하고 있는 배 모두가 돌발 상황을 맞아 부산스러웠다. 각 함선의 수석 기관사들이 하나같이 코어의 냉각수 흐름이 멈췄다고 알려왔다. 동시다발적으로 워프가 불가능해진 함대에게 통신 신호가 묵묵히 전달되었다.


  “여러분들, 이쪽에서는 벤전스를 보낸 일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순간 다른 함선들이 외부에서 잡히는 통신 신호에 긴장한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스타플릿의 관제실도 마찬가지였다. 커크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여장교의 입을 통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친절하게 그 정체를 알려줄 모양이군, 존 해리슨?”


  커크의 수신호를 받은 여장교가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을 올려놓았다. 자신이 탄생시킨 함장석에 앉은 칸의 모습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압적이었다. 


  “함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배에 오르기 전 시스템에 침입해 두었다가 악성 코드를 발동시킨 것뿐이다.”

  “그렇게 빨리?”

  “너희들의 예상보다 마커스는 나에게 많은 일을 하게 했지.” 


  커크가 눈썹을 비볐다. 아직 크로노스의 함대와 연결되어 있는 통신원들이 시시각각 소식을 전해왔다. 칸 누니엔 싱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그들은 이동을 할 수 없거나, 과열된 워프 코어가 터져 전부 방사능에 노출될 것이었다. 


  “내 요구사항은 간단해.”


  듣는 사람은 다수였지만 칸은 커크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구로 가서 너희가 저지른 죗값을 치러라. 그렇지 않으면 발이 묶인 함대들을 모조리 몰살시킬 것이다.”


  발빠른 누군가가 스피커 너머에서 벤전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작동시키려 하고 있다며 속삭였다. 동력이나 남은 어뢰들의 개수에서는 어쨌든 클링온과 전투를 마친 스타플릿 측이 불리한 게 맞았다. 커크는 반강제적으로 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직감하면서도 물었다.


  “그리고 너는 우주의 지배자가 되겠다, 이건가?”


  칸은 어떤 맥락의 웃음도 지어내지 않았다. 


  “…그냥 내가 다시 잠들게 해줬으면 좋겠군.”




* * *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있던 장교들이 빠짐없이 정거장으로 몰려와 하나씩 도착하는 아군의 함선을 받아들였다. 함선이 클램프에 고정되자마자 승무원들이 밖으로 빠져나왔고 수많은 장교들이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듯이 삼엄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맨 앞에는 누구보다 빛나는 제임스 커크가 서 있었다. 정거장의 오퍼레이터가 특유의 기계음으로 도착하는 함선의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크로노스에 파견되었던 배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아직 하나 남았지.”


  커크가 까만 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차분히 시간을 셈했다. 워프하는 함선도 따라잡는 벤전스의 경이로운 속력이라면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커크의 등 뒤에서 미숙한 승무원들이 정거장의 안쪽으로 대피했다. 


  진공과도 공명하는 것 같은 워프 특유의 효과음이 우주에 퍼지면서 벤전스호의 검은 형태가 드러났다. 커크와 함께 엄선된 장교들이 움직였다. 거대한 함선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정거장의 빈자리에 내려앉았다. 


  커크가 입구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를 남겨두었을 때 해치가 아래로 열렸다. 오른쪽의 비상등만이 불이 켜지면서 마치 커크를 안내하듯 제 자신들을 밝혔다. 벤전스가 낯설지는 않아도 워낙 특이한 방식으로 처음 이 함선에 찾아왔던 커크를 위한 함장의 배려였다. 


  함교의 문은 여느 배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며 비켜났다. 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군.”


  칸은 자신이 기억을 잃었던 당시를 배제하며 말하고 있었다.


  “날 데리러 와줬나?”


  커크의 양옆으로 호선을 그리며 정렬한 인원이 정확하게 칸을 겨냥했다. 수갑을 들고 있던 남자가 발을 내딛자 커크가 잠시 그를 제지했다.


  “나는 너 안 믿어.” 

  “공평하군. 나도 스타플릿은 믿지 않아.”

  “하지만 네가 원하는 심판은 내가 정당하게 시행시킬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나서려고 하지 말라고.”


  커크가 고갯짓하자 남자가 칸에게 수갑을 채웠다. 


  “너도 날 견디지 못했나?”


  그것은 커크에게 기억의 단면이 현시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칸은 미묘한 말을 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육체를 맡기며, 자신은 개운하지 못한 기분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번에 그 느낌은 빨리 사라졌다.


  “너의 존재 자체가 자극하는 게 있었지. 그건 확실히, 견딜 수 없었어.”


  커크가 돌아섰다. 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




  크로노스로 파견된 이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본부는 비정상적으로 조용했다. 맥코이는 자신의 주소를 전해 듣고 신속하게 사라진 장교의 등을 한 번 보고 주위를 탐색했다. 그는 이제 스타플릿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본부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어 바깥을 맴돌았다. 맥코이가 커뮤니케이터를 몇 번이고 만지작대면서 커크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다.


  상공이 시끄러웠다. 맥코이는 전처럼 회색의 수송선이 수놓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어코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짐, 지금 얘기할 수 있어?”

  “안 그래도 알려주려고 했는데.”


  커크의 목소리에 여러 소음이 섞여 들렸다.


  “칸이 함선까지 훔치고도 순순히 잡혀 왔어. 그리고 캡슐 안으로 들어가겠다는군. 곧 착륙할 거야.”


  순간 말을 잊은 맥코이의 눈동자가 고도를 낮추는 셔틀의 무리를 쫓았다. 그는 격납고로 향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스타플릿에게 전쟁을 선포할 명분이 충분한 인물을 태운 기체가 평화롭게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데에 지루함을 느낀 것도 아니거늘 맥코이는 서서히 옆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칸이 무작위로 보고 있던 수갑에서 눈을 뗀 시점이었다.



[STID/존본즈] Knocking on Heaven's Door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10. 12. 23:11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이름이 나오지 않는데, 천사 존과 인간 본즈로 짤막한 글.

- Written by. Jade


Knocking on Heaven's Door




  상상은 자유다. 천사가 인간들을 보면서 자주 떠올리는 말이었다. 자애로운 신의 사자가 어린 양들을 굽어보면서 던지는 발언 치고는 냉정했지만 천사에게도 각각의 특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얀 날개의 천사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천국에서 연옥이 가장 잘 보이는 지점에 살았다. 그가 거기서 보는 연옥은 이탈리아의 대문호라든가 유명한 화가가 으스스하게 묘사해 놓은 곳과는 많이 달랐다. 그는 특히 보티첼리의 그림의 경우, 취미가 괴팍한 악마가 가꾸는 구렁텅이에 더 가깝다는 평가를 내렸다. 연옥은 망자들이 심판을 곳이 아니다. 이를 테면 사람들이 오가는 기차역에 설치된 만남의 광장에 더 가깝다는 뜻이다. 물론 천사가 서 있는 천국보다야 검붉고 깨끗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연옥의 풍경을 잘 견뎠다.


  그는 천국의 황금빛 문을 지키는 천사였다. 그는 날개를 펼치고 서서 천국과 연옥이 이어진 부분을 감시하며 문이 더 찬란하게 빛날 수 있게 장식들을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천국의 문은 처음에는 그토록 거창하지 않았는데, 인간들이 사는 곳 중에서 장화 모양을 닮은 반도에 사는 시민들이 지상에서 천국의 문을 짠 것에 감동한 신이 그것을 여기까지 끌어올렸다고 한다. 500년도 더 전에 땅 위에서 문을 만들었던 예술가는 그 소식을 듣고 기뻐 날뛰며 온 몸으로 찬송가를 빚어냈었다. 그러나 예술가가 천국까지 올라간 자신의 걸작을 본 건 딱 한 번뿐이었다. 천국의 문은 안으로 들어오는 자를 맞이하기 위해 서 있는 것인지 누군가를 내쫓기 위함이 아니다.

 

  천사는 그러한 문을 지키고 있었다.


  천국과 연옥의 경계는 대단하지 않다. 요정들이 눈을 부라리면서 날카로운 깃털을 던지고 있지도 않고 솟아오르는 불길도 없다. 연옥은 천국을 만나기 직전에 꼭 평평한 지구가 모서리를 만나듯 아무렇지도 않게 뚝 끊겨 있을 뿐이었다. 이후 천국의 문지기가 된 천사가 마지못해 거기에 누구도 깰 수 없는 투명한 벽을 설치했다. 검붉은 연옥과 하얀 천국 사이에 낀 그것은 마치 기름층 같았다.


  천사는 그 곳을 셀 수도 없는 나날 동안 지키면서 다리가 아픈 건 몰랐으나 이따금씩 씁쓸함을 느꼈다. 인간이 오래 전에 헌사한 문 두 짝이 천사의 벗이다. 그는 천사이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얀 날개가 뺏기지 않았어도 이쯤 되면 누구나 그가 신에게 탈락당한 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날 그는 문을 두드렸다. 비명 없이 오로지 쿵쿵대는 소리가 온종일 울리게 했다. 당시에는 유리벽이 없어서 연옥에서 대기 중인 영혼들이 모서리 끝에 옹기종기 모여 천사의 발악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을 사탄보다 무서운 눈초리로 노려보고 있던 천사는 뜯어져도 살아나는 부조의 일부에 단념해버리고 과묵한 문지기가 되었다. 천국으로 들어갈 이들이 처음 보게 될 천사로 자신을 선택한 신을 비웃으면서 말이다.


  때때로 그는 연옥 부근의 땅에 앉아서는 노래를 불렀다. 음의 변화가 거의 없는 단조로운 곡조였는데, 천사의 목소리가 진실로 아름다워 몇몇이 노래를 들으러 연옥 끄트머리까지 왔다. 그리고 두려워하면서 돌아섰다. 빛의 존재는 밤을 노래했다.


  그대가 받았던 양말과 신발들을 신어 보았던가?

  그대가 밤마다 앉아서 그것들을 신어 보았을 때마다

  신이 그대의 사도를 받아 가네

  모든 밤에 어린 불길과 함대와 촛불의 빛

  신이 그대의 사도를 데려가네

  매일 밤 불길이 그대를 오그라들게 하고 신이 그대의 사도를 데려가


  천사가 앉아 있던 어느 날 연옥의 절벽 위에 아직 인간 남성의 형상을 한 영혼이 왔다. 그는 절망이라기 보단 정당한 원망을 담고 천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남자는 이내 천국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를 발견했다. 신과 의절했다고 날개의 색이 칙칙하게 변하는 것은 아니라 천사의 날개는 하얬다. 그래서 남자의 눈에 그는 연옥에서 탈출할 길을 제공해 줄 것 같은 동아줄로 보일 테였다. 천사는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악취미적으로 드러내곤 했던 노래 실력을 발휘했다. 그렇게 하여 천사는 신이 자신의 종을 내칠 수 있다는 걸 여러 영혼들에게 알려준 바 있었다.


  신이 그대의 왕을 데려간다네


  기품 있게 눈꺼풀을 내리깔고 천사가 매력적인 목소리를 냈다. 이따금 팔락이는 날개는 노래를 부르고 있는 천사의 입술을 대신해 조소했다. 황금빛 문이 뒤편에서 풀이 죽는 것 같았다. 연옥의 남자는 어딘가에 묶인 듯 노래를 듣고 있었다.


  그대가 마실 것과 일용할 양식을 받았을 때 

  매일 밤마다 불길이 그대를 겁먹게 해

  그대의 왕을 거둬가는 전능하신 신이여


  천사는 우아하고 관능적인 목소리로 노래를 마무리 지었다. 


  남자의 반응은 다소 덤덤했다. 안색이 새파래지지도 않았고 천국으로부터 부리나케 멀어지지도 않았다. 남자는 감상이라도 전해줄 듯 뭐라고 입을 움직였다. 천사의 귀에는 다 들렸다. 남자는 맨 처음에 천사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칭찬하고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 사도여서, 나도 천국에 매달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천사는 자신이 문지기 이전에 천사라는 걸 오래간만에 깨달았다.  

  




if ever thou gavest hosen or shoon
then every nighte and alle, 
sit thou down and put them on; 
and Christe receieve thy saule. 
this ae nighte, this ae nighte, 
every nighte and alle, 
fire and fleet and candle-lighte 
and Christe receieve thy saule.
if ever thou gavest meat or drink 
then every nighte and alle, 
the fire shall make thee shrink
and Christe receieve thy saule. 

Voice Acting by. Benedict Cumberbatch
글에 인용된 가사와 영문의 뜻은 조금 다릅니다.

* 언급되었던 '천국의 문'은 기베르티의 산 조반니 세례당의 문입니다.
* 또 언급되었던 보티첼리의 작품은 지옥의 지도. 댄 브라운의 인페르노에 등장했던 그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