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James Kirk
- Written by. Jade

Chapter 7
“본즈, 괜찮아?”
물속에서 막 구조된 듯이 맥코이가 헉 하고 몸을 움찔했다. 약기운이 많이 잦아들어 군데군데 힘을 불어넣을 수 있었다. 맥코이는 상체를 낮추고 있는 커크의 옷자락을 쥐었다.
“존이 약을 다 가지고 도망갔어.”
“알아.”
“젠장. 어떻게 하지? 그가 어디까지 기억했는지도 모르겠어. 이제 두 번이었는데, 이렇게 빠를 줄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존한테 아무런 설명도 못 했다고!”
커크가 아예 자신의 상의를 붙잡고 흔들 것 같은 맥코이의 손등을 잡았다.
“진정해. 아직 심각한 일은 없었으니까.”
맥코이는 퍼뜩 자신이 얼마동안 잠들어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휘저으며 시계를 탐색했다. 존 해리슨에게 무력하게 제압당하고 나서 반나절이 넘게 흐른 시간이었다. 안정제가 다량으로 주입됐으니 당연한 결과였지만 기운이 쭉 빠졌다.
“어, 일단 전과가 워낙 대단했던 인간이라 곧바로 수배령이 떨어졌어. 이건 나도 막을 생각 안 했고. 어쨌든 너를 협박했다는 건 이쪽에 대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렸다는 거니까, 다시 적군 행세를 해도 이상할 게 없잖아.”
그러다 커크가 말꼬리를 흐렸다.
“그리고, 으음…. 어찌됐든 우리가 스타플릿이 허락하지 않은 일을 한 거라서….”
“그냥 나 혼자 한 걸로 하자.”
맥코이의 단언만큼이나 커크의 대답도 빨랐다.
“그럴 순 없어.”
“네가 이태까지 사고 친 건수가 얼만데, 또 함장 자리를 잃게 되면 어쩔 거야?”
“그렇다고 어떻게 혼자 책임지게 해! 나도 스타플릿 행태 맘에 안 들었고 네 주장에 동감했었어.”
“당장 존 해리슨의 적은 나 하나면 돼.”
맥코이가 최대한 차분하게 이었다.
“약을 필요로 했던 걸 보면 아직 기억을 다 찾은 게 아니야. 하지만 회복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다면 그가 가장 쉽게 화를 낼 수 있는 상대가 나야. 다시 그의 적을 스타플릿 전체로 만들지는 말자고.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씩이나 되는 네가 끼어들면 존이 어떤 오해를 하고 위선을 들먹일지 몰라.”
커크는 근래 맥코이의 순도 높은 진지함을 많이 겪는다고 느꼈다. 존은 그 정도의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맥코이의 뜻을 존중하기로 한 그가 한숨을 섞으며 말했다.
“…내가 뭘 하면 되는데.”
“크로노스에 나가지 않는 거 확실해?”
“지금쯤 스팍이 그 짜증나는 논리로 회의실을 구워삶고 있을 테니 확실할 거야.”
“수석 의료 장교의 위법 행위로 인해 보건 총책임자는 부재중일 수밖에 없는 상태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승무원들의 심적 동요가 어쩌고저쩌고 뭐 이렇게?”
정말로 근거 있는 말이라서 커크는 피식 웃어버렸다. 정작 맥코이는 스팍이 자신을 들먹일 가능성에 대해 언짢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네가 조금만 시간을 끌어줬으면 좋겠어.”
반역이라는 게 한 번 저질러 보니까 계속 는다, 그렇지? 맥코이가 커크의 가슴팍을 치려다가 손을 허공에 휘휘 내저었다. 그 어울리지 않은 너스레를 통해 맥코이는 자신의 친구이자 함장이 또 한 번 어려운 결심을 이뤄냈음을 알았다.
주인의 허락 없이 문이 열렸다. 딱딱하게 무기를 쥔 스타플릿의 집행자가 척 봐도 긴급 처벌을 시행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맥코이가 살짝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가 느리지만 미련 없이 자신의 패드를 넘겼다.
* * *
스타플릿이 처한 총체적 난국을 정리하자면 이러했다.
먼저 공식적으로 클링온들의 잔여 세력이 반란군을 조직하였다. 덕분에 스타플릿 함대 다수가 진압을 위해 크로노스로의 배치를 명령받았고, 이제야 실력 발휘를 하는가 싶던 연방의 전투함 벤전스호는 교묘한 고장을 일으키는 바람에 지상에 남아 있으려던 함선들마저 밖으로 내보내는 데에 일조한 꼴이 되었다.
과거 클링온보다도 더 큰 위협이었던 존 해리슨의 사진이 들어간 수배지는 거리낌 없이 샌프란시스코 곳곳에 붙었다. 일반인들도 다 아는 테러리스트의 재림을 조금이나마 설명해야 했던 수뇌부의 작은 고충은 레너드 맥코이가 모조리 감당했다. 그는 기한이 정해지지 않은 정직을 받고 물러났으며 덕택에 엔터프라이즈는 메디컬 치프를 잃었다는 핑계를 대고 지구에 남았다.
몇몇 부분이 커크와 맥코이, 그리고 암암리에 그들에게 동조한 엔터프라이즈의 주요 승무원들에 의해 짜였다는 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존 해리슨에 대해서 그들이 납득할 수 없는 가치관을 가졌던 함장과 부함장들이 크로노스로 흩어진 후, 당분간 본부의 책임자 격이 된 커크가 신뢰할 만한 인물들을 확보했다는 것도 좋았다.
격납고가 다시금 긴박함으로 술렁였다. 비행 허가를 받은 대규모의 셔틀이 하늘 위로 날아올랐고 커크는 그 소음 속에서 수색대를 편성하고 있었다. 거기까지 눈에 담아둔 맥코이는 준비된 차량에 탔다. 데이스트롬에서 맥코이를 신랄하게 물고 늘어졌던 스팍의 사과 아닌 사과였다. 맥코이는 잠깐 웃었다가 멀어지는 헤드쿼터를 응시했다.
그는 일체의 변호도 않고 최대한 빨리 집에 오려 노력했다. 스타플릿에 남아 있고 그 위치가 높은 커크 함장보다 자신을 만나는 게 훨씬 만만하다는 사실을 어필하는 것과 비슷했다. 맥코이는 바깥보다 더 서늘한 것 같은 내부의 공기에 볼을 부풀려 한숨을 짓고는 가방을 내려놓았다.
풀어 놓을 짐은 적었지만 한바탕 집안 청소를 해야 할 분위기였다. 맥코이가 겉옷을 벗었다. 오랜만에 환하게 전등도 켜고 창문도 열었다.
맥코이는 제발 존이 건물 하나라도 날려버리기 전에 자신을 찾아와 주길 바랐다.
* * *
한편 존은 스타플릿의 유능한 중령에서 지명수배자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당장 밀폐된 공간이 필요했던 그는 대충 정한 임시 거처에서 집착적으로 촉진제를 주사했다. 단번에 아득해진 청록색 눈동자가 소리 없이 감겼다.
단지 그가 눈을 감고 있기 때문에 어두운 것이 아니었다. 하나의 스파크를 조명하기 위한 장막들이 두꺼운 벽을 형성했다. 존은 자신이 태동하고 있는 기억 세포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봉인된 상자를 연상시키는 그 빈틈없는 어둠도 과거의 하나였다. 빛이 허락되지 않은 그 속에서 존은 막연한 비탄과 분노를 느꼈다.
자신은 금지된 구역에서 엔지니어 노릇을 하고 있었다. 쉽게 이분될 수 있는 사고는 어떠한 작업에 집중하면서도 그가 아직 정체를 모르는 무언가를 그리워했다. 그는 특정 부서를 의미하는 셔츠를 입고 있지 않았다.
정제된 야심과 근원적인 책임감이 푸르스름한 조명으로 가시화된 것 같은 복도가 삽시간에 그의 앞을 지나갔다. 기억이 아니라 단순한 난상(亂想)에 가깝게 느껴지는 급속한 흐름이었지만, 존은 자신의 시야에서 붕괴되고 있는 구조물이 그 복도까지 아우르고 있었음을 확신했다.
제임스 커크, 스팍, 레너드 맥코이, 진실을 은폐하는 선봉장이었던 이들이 또 다시 보였다. 순순히 정체성을 밝히는 자신의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존은 본명을 되찾을 수 있을 거라던 맥코이를 떠올렸다가 이내 기억에 몰두했다.
차가웠다가, 건조했다가, 절규하는 외침 모두가 오로지 한 무리를 향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의 곁에 있어야 마땅한 무엇인 것 같았다. 폭군마냥 함장석을 차지했다가 흐트러진 얼굴로 낙하하는 상반된 모습에서 그는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연관성을 찾았다.
기억의 전경이 갑자기 뚝 끊겼다. 존은 약물을 더 주입해야 하는가 싶어 팔을 뻗으려다 동작을 그쳤다. 그는 실제로 눈을 감고 있다. 하지만 의식의 저편에서는 눈꺼풀을 들었다가 올리는 기분이었다. 한줌의 배려도 없는 하얀 빛에서 그는 과학자들의 강박적인 눈동자를 목도하고는 치를 떨었다. 잠시 쉬어가는 듯한 암흑, 이후 나타난 건 그 당시에는 알 수 없었던 레너드 맥코이의 씁쓸한 눈길이었다.
심연의 외부에서 발만 걸치고 있던 존 해리슨이 수면을 벗어났다. 그는 제일 먼저 남아 있는 약병을 체크했다. 한 번 주사기를 꽉 채우면 완전히 소모될 양이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반복적으로 기억을 제거시키는 대상이 우주연방의 충성스러운 인재일 리가 없다는 의심은 적중했다. 엔터프라이즈로 대표되는 연방에 옅게나마 배신감을 느꼈던 자신을 비웃어줘야 할 지경이었다. 그는 파란색, 붉은색, 노란색 그 무엇도 아닌 검은색 상의를 흘끗 보았다. 그 옷부터 자신은 절대로 스타플릿에 녹아들 수 없다는 상징이었다.
아직 완벽하게 칸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는 한낱 장교들로 구성된 추격대에 덜미를 잡힐 일은 결코 없을 거라고 자신했다. 다만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지 않은 처지라 주기적으로 머물 장소를 바꿔야겠다는 필요성은 들었다. 그가 명상하듯 눈동자를 닫았다.
노력하지 않아도 짧은 섬광처럼 과거의 파편들이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벌써 난폭한 충동들이 가슴에 익어가며 그를 충동질했다. 하지만 이유 없이 떠오르는 맥코이의 얼굴은 익숙하게 여길 수 없었다.
코트를 집다 말고 그가 라디오를 켰다. 타이밍 좋게도 뉴스가 흘러나왔다.
“현재 연방에서는 켈빈 기록 보관소를 폭파시켰으며, 주요 함장들과 부함장들을 살해한 바 있는 범죄자 존 해리슨을 추적하고 있습니다. 대단히 위험한 인물이오니 그를 발견할 시 시민들은 즉시 신고하시길 바라며….”
뻔한 내용이었지만 존은 잠자코 들었다.
“…그럼 첫 번째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크로노스에서 발생한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연방에서 출병을 승인했다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출병에 포함된 함선을 읊었다. 존의 손가락이 라디오의 전원을 끄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가 아는 이름 두 개가 빠졌다. 원체 묶여있지도 않았던 지성이지만 기억을 회복한 이후에는 더 빛나는 위력을 발휘했다. 존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면서 짧게 제자리에 서 있었다.
의외로 여유가 많지 않을 것 같았다. 나가면서 그는 팔에 마저 약을 흡수시킨 다음 계단을 내려갔다. 진득한 그림자에 의지해 몸을 감추고 있던 그가 빠른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려 하는데, 고글을 끼고 무기를 든 추적대원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한 번은 마주쳐야 재미가 있겠지. 비무장이면서도 존은 여유로웠다.
존이 코트 주머니 안에 든 기폭단추를 쥐었다. 동선을 스스로 내보이는 꼴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고 했던 물건이었다. 그가 천천히 길가로 나왔다.
건물의 한 층에서 별안간 폭발음이 터지면서 깨진 창문으로 연기와 불길이 치솟았다. 추적대의 눈이 자동으로 폭발이 발생한 건물을 훑었다. 존 해리슨이 그들을 기습해 한 명을 쓰러뜨리면서 페이저건까지 뺏기에 충분한 빈틈이었다.
“…?!”
존이 곧바로 다른 한 명을 노려 총을 쐈고 붉은 광선이 튀어나왔다. 이들이 자신을 죽일 생각을 품고 있었다는 게 명확해졌지만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무기를 한 번 쓸 겨를도 없이 추적대는 괴멸 당했고, 그는 쓰러진 대원의 허리춤에서 무전기를 챙겼다. 소란을 들은 시민들 몇몇이 창을 열고 목을 길게 빼고 있었다.
그가 제압한 대원의 수는 다섯이었다. 존은 이 정도 인원이면 근처에 차량 한 대는 있을 거라 추리하고는 역방향으로 걸어 인근을 살폈다. 상황을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존의 등을 주시하고 있었고, 검은 코트를 입은 장신의 남자가 요주의 범죄자라는 걸 깨닫는 데에 3분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존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 발견한 모터사이클에 몸을 실었다.
- 21구역 탐색중이다. 존 해리슨은 보이지 않는다.
- 34구역도 마찬가지다. 한번만 더 순찰하도록 하겠다.
맥코이가 부탁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총책임자인 제임스 커크가 지시한 건 일단은 의례적인 순찰이었다. 존은 간간히 들리는 잡음을 무시하고 양 손잡이 사이에 설치된 내비게이션을 몇 번 클릭해보았다.
의문의 남성에 대한 고민을 마친 누군가가 신고를 한 모양이었다. 소방차인지 경찰차인지 사이렌이 요란했다. 존이 탑승한 사이클이 거칠게 뒤척이며 달렸다.
* * *
본부의 고층에 꾸며진 관제실은 작지만 다양한 목소리와 분할된 화면으로 채워져 있어서, 고도로 디지털화된 작전 회의실의 풍경이 겹쳐 보였다. 지상에 남은 통신 장교들이 헤드셋을 쓰고 끊임없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크로노스는 어때?”
“수적으로 우세해 진압에 큰 무리는 없을 것 같다고 합니다. 다만 벤전스호의 수리가 언제쯤 완료될 것인지 묻고 있습니다.”
“그 쪽에서 지원을 요청할 때까지는 끝난다고 해.”
장교가 제임스 커크의 단호한 대답을 그대로 전했다.
“디파이언스에서 영상을 전송하겠다는 신호입니다, 캡틴.”
“승인하도록.”
관제실의 네트워크는 크로노스에 배치된 각 함선들과 샌프란시스코 전역으로 흩어진 별동대, 거기에 벤전스의 상태를 보고받기 위하여 우주 정거장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그 모든 알림들을 소화하고 있는 커크의 안색이 더없이 진중했다. 직접적인 전투에 합류하지 않은 디파이언스호에서 보낸 크로노스의 광경이 스크린에 펼쳐졌다.
점령 직후 욕심을 부리지 않고 클링온들의 무기고부터 정리한 게 큰 도움이 되고 있는 듯했다. 그런대로 갖추긴 했지만 다수의 함선을 운용하고 있는 아군에게 치명적인 위협을 가할 수준은 못 되었다. 빔이 폭풍우 치는 땅으로 빗발쳤다.
“캡틴, 신고가 하나 접수되었는데….”
테러리스트 특별 대응팀에 소속되어 민간인들의 신고를 처리하고 있는 장교가 의자를 틀었다.
“존 해리슨으로 추정되는 남자가 추격대를 무력화시키고 차량을 훔쳐 도주했다고 합니다.”
커크는 동요하지 않았다.
“발견된 장소는?”
“27구역입니다.”
“가장 가까운 지역에 있는 팀을 보내서 현장을 점검하게 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대원들은 그냥 수색을 이어가라고 해. 그의 목적지를 모르니 최대한 많은 곳을 감시해야 하니까. 20번대 지역에 있던 팀을 소집해.”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꺼냈다. 그는 정말로 존이 어디로 갈지 몰랐지만 그가 가 줬으면 하는 곳은 한 군데 있었다. 커크가 작성한 메시지를 레너드 맥코이 앞으로 보냈다.
* * *
[ 존이 움직이고 있음. ]
문자를 확인한 맥코이가 소파에서 일어났다. 쫓겨난 전(前) 의료 장교의 거주지를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닐 테고, 문제가 되는 것은 존의 의향이었다. 맥코이가 커튼을 끌어 당겨 유리창을 가렸다. 읽다만 책은 그냥 귀퉁이를 접어놓고 덮었다. 활자가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스타플릿을 나오면서 그나마도 거의 써 본 적이 없던 페이저건을 반납했기에 맥코이에겐 아무런 무기가 없었다. 그가 거실에 있는 서랍장들을 꼼꼼히 들여다봤다. 존 해리슨을 어떻게든 제압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저번처럼 볼썽사납게 안정제를 맞고 기절하는 꼴은 면하기 위함이었다.
현관문을 열어둬야 하나. 얌전히 문을 두드릴 리가 없는데. 맥코이는 결국 도어락을 풀었다. 존이 철문을 구겨버리기 전에 한번이라도 손잡이를 돌려주길 바라며 그는 소파로 돌아왔다.
사실은 개인적인 바람에 가까웠다. 맥코이도 존이 자신을 방문해 줄 지에 관해서는 완벽하게 단언하지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코이는 우수하게 합성된 존의 두뇌를 믿는 것이었다. 과연 누구로부터 가장 쉽게 진실을 얻을 수 있을지 판단해보길 바라면서. 맥코이가 괜히 덮었던 책을 만지작거렸다.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조심성 없는 행동을 삼가야 하는 그가 불편하지 않게 불빛은 약하게만 남겨두었다. 맥코이는 차분하고 편견 없는 표정을 지으려 노력하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보다 짙은 윤곽이 달칵 문을 잠갔다.
“날 기다렸나.”
아직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와주길 기대하기도 했고.”
맥코이는 탁자 끝으로 책을 밀었다. 굳이 기척을 죽이지 않아 존 해리슨의 무뚝뚝한 걸음이 발끝으로 전해졌다.
“가져갔던 약을 다 썼으면 네 기억 정도는 다 찾았겠네.”
“꼭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처럼 말하는군.”
“너도 그렇게 추측하고 있잖아.”
이 순간에도 약효로 인하여 존의 기억 세포는 거듭 재생되고 있었다. 존은 맥코이의 앞에 나타나길 거부하면서 대신 그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맥코이가 바짝 긴장했다.
“내 선원들의 행방은 묘연하고, 예기치 못하게 깨어난 나를 너희들은 억지로 기억을 지워가면서까지 이용했다. 내가 알아야 할 사실이 또 있나.”
분노가 새겨진 음성과 더불어 칸이 맥코이의 머리를 일그러뜨릴 듯 세게 잡았다. 맥코이가 두려움에 아득해지려는 정신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스타플릿의 모든 사람들이 그걸 찬성하진 않았어. 커크와 스팍은 아니었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맥코이의 입술이 절로 떨렸다.
“물론 끝까지 물고 늘어지지 못한 건 우리가 너한테 호의를 베풀고 싶어서가 아니라, 네 놈이 지구를 활보하고 다니는 모습을 참을 수 없어서 널 깨우자는 의견에 발끈했던 탓이겠지. 도덕이나 윤리가 아니라 네가 짜증나고 싫어서. 하지만 거기서 그쳤다면 네 기억을 되살려 주려고 하지도 않았어.”
여전히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악력이 풀릴 기미가 없자 맥코이는 버럭 내뱉고 말았다.
“네 놈이 나쁜 건 맞는데, 네가 진짜로 위험한 인물인 건 맞는데! 너에게 이런 식의 형벌을 바라진 않았어. 적어도 나는 아니야.”
칸은 반응이 없었다. 맥코이가 눈동자를 슬금슬금 위로 올렸다.
“…할 말 남았긴 한데 손에 힘 좀 빼 주지. 금방이라도 내 머리가 산산조각 나는 상상이 자꾸 떠올라서.”
“그렇다고 입을 못 놀리는 건 아니지 않은가? 계속해.”
맥코이가 이 와중에도 버릇대로 젠장, 하면서 궁시렁댔다. 하지만 아주 조금 머리 위쪽이 편해진 것도 같았다.
“내가 왜 네 기억을 찾아준 줄 알아?”
칸은 말하지 않았다.
“전쟁은 끝났지만 수뇌부가 널 다시 지하에 처박아두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널 백지상태에 가둬두고 필요할 때마다 이용하자고 했지. 사람이 무슨 비상식량도 아닌데.”
‘물론 널 보통 사람에 끼어주기에 무리기는 하겠지만’ 같은 합당한 사족은 붙지 않았다.
“…내가 네 기억을 지워야 했으니까, 나는 도저히 그 악명 높은 칸과 어울리지 않는 너를 많이 봤단 말이야. 자신의 본질이 소거된 누군가를 본다는 건 정말로 끔찍해. 의사로, 아니 한 인간으로서 그게 내가 참을 수 있는 한계였는데 스타플릿이 내 마지막을 건드렸지.”
“…날 백치로 만들겠다는 명령 말인가?”
“네가 교화될 거라는 오만은 부리지 않아. 너는 잠들어야 해. 다만 칸인 모습으로 잠들어야 하는 거야. 그 망할, 웃기지도 않은 중령 따위가 아니라.”
뒤통수가 다른 의미로 따가웠다. 맥코이는 미동도 없는 칸의 표정을 보고 싶었다. 지금은 단지 따갑다고밖에 인식할 수 없는 시선에 자신이 읽을 수 있는 감정이 깃들어 있는 지도 궁금했다.
끝까지 칸이 침묵하는 관계로 맥코이가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네 선원들 말인데.”
맥코이가 볼 수 없는 그늘 뒤에서 칸의 눈빛이 달라졌다.
“다 죽었어. 우리가 죽인 건 아니고 블랙아웃 때문에 극저온 캡슐들이 한꺼번에 꺼져버려서…. 너만 살아남았어.”
맥코이는 칸이 크게 동요했음을 알았다.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는 수준까지 자신을 옥죄고 있는 힘이 줄어들었다.
“또 본부 쳐들어가서 내 대원들 내놓으라고 삽질 하지 말라고.”
말이 끝나자마자 머리 양쪽이 다시 답답해져서 맥코이가 흡 하고 숨을 삼켰다. 험한 중얼거림이 튀어나왔다.
“정리하자면 너는 나를 다시 동결시키기 위해 내 정체성을 복원시켜 준 거로군.”
“왜 거기에 제일 중요한 걸 빼먹어.”
제일 중요하다면서, 맥코이는 제법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어쨌든 내가 네 반쪽짜리 모습을 못 견딘 거야.”
칸이 물러났다. 밧줄 더미에서 풀린 듯한 해방감을 맛보며 맥코이가 크게 호흡했다. 그가 소파를 짚으면서 허겁지겁 상체를 틀었다. 칸이 나가려 하고 있었다.
“또 복수할 거야?”
탁 하고 문이 닫혔다. 응답을 얻지 못한 맥코이의 질문은 허망하게 공중으로 흩어졌다. 그나마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은 다 털어 놓은 것 같아서 맥코이는 속이 편했다. 공연한 충동에 그는 발코니까지 나가 아래를 둘러보았지만 칸을 보지는 못했다.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울렸다.
* * *
일격에 고글이 벗겨지면서 마지막으로 의식이 남아 있던 수색대원이 고꾸라졌다. 팀의 대부분이 실력 있는 장교로 구성되어 있음은 칸에겐 오히려 잘 된 일이었다. 스타플릿 장교들이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격투기를 구사한들 그의 상대는 못 되지만, 일반인의 기준에서는 그들이 꽤 괜찮은 인재였기 때문에 이것저것 알고 있는 사항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원하는 정보를 모두 얻은 칸이 수색대원을 땅바닥에 풀어 놓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동분서주하고 있는 장교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필요가 없어져 칸은 무전기를 버리고 남자의 품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의 안주머니에 깊숙이 넣어둔 헤드쿼터 출입증이 잡혔다. 칸은 수송선들이 대기하고 있는 격납고만 가면 되었다.
잠시나마 집중력이 떨어지면 되살아난 영상들이 활개를 치며 칸의 사고를 가렸다. 과학자들, 자신의 승무원들, 마커스. 육체 구석구석에 퍼져 있는 무기질마냥 끓어오르는 폭력적인 자극들에 칸이 인상을 구겼다. 곧 레너드 맥코이가 나타날 순서였으므로 칸은 지체하지 않고 스타플릿 본부로 나아갔다.
* * *
셔틀 다수가 우주에 나가 있어서 격납고는 한적했다. 물론 남은 셔틀이 한 대도 없다거나, 의무적으로 상황실을 지키는 안전요원도 없이 한산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귀찮은 일은 미리 방지하고자 칸은 상황실부터 습격했다. 그는 예의 있게 노크를 했고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닌지라 요원 한 명은 일어나서 방문객을 확인해야 했다.
문틈으로 안전요원을 확 잡아당긴 그가 팔을 비틀고 명치를 찍었다. 화들짝 놀란 동료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태평한 얼굴로 뚜벅뚜벅 걸어오는 칸을 보며 더욱 다급하게 무기를 찾았다. 칸이 요원의 어깨를 잡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았다.
조이스틱으로 카메라의 여러 각도를 엿본 그가 자신이 탑승하기에 알맞은 수송선을 골랐다. 중요한 건 직선거리였다. 적막한 격납고를 울리며 단숨에 조종석에 오르자마자, 그는 엔진을 웜업시켰고 동시에 우주 정거장을 목적지로 하는 경로를 입력했다.
벤전스와 엔터프라이즈가 남아있다는 사실을 듣자마자 확정했던 계획이었다. 스타플릿의 유일한 전투 군함은 언제나 칸의 복수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요소였다.
칸은 자신의 함선을 되찾으러 가는 것이었다.
* * *
맥코이는 기어코 외출을 감행했다. 그는 걸으면서 페이저건을 찬 스타플릿 장교들을 여럿 보았다. 자신의 집에서 나온 뒤 칸은 무사히 어딘가로 장소를 옮긴 모양이었다. 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잡히지 않겠지, 맥코이의 추정은 정확했지만 뒷맛이 좋지 않았다. 명확한 이유가 잡히진 않지만 맥코이는 그가 스타플릿으로 들어가서 커크와 대화를 나눴으면 했다.
문득 맥코이는 커크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정 기간 동안 스타플릿을 통째로 맡을 정도로 무게감이 커진 젊은 함장은 틀림없이 크로노스 사건으로 바쁠 게 뻔했다.
맥코이가 생각하다 자신보다 살짝 앞서 있는 추격대원의 등을 톡톡 쳤다.
“내가 방금 존 해리슨을 봤는데.”
눈동자만 힐끗 움직였던 대원이 맥코이의 말을 듣고 완전히 몸을 돌렸다.
“아주 정확한 지점을 알려드릴 테니 스타플릿 본부까지 나 좀 데려다 주시면 안 되나? 꽤 괜찮은 거래 같은데.”
제임스 커크처럼 유명 인사가 아니고서야,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든 스타플릿의 장교들이 엔터프라이즈의 전직 메디컬 치프의 얼굴을 알 턱이 없었다. 맥코이를 낯짝 두꺼운 거주민쯤으로 파악한 그가 인중을 좁혔다.
“확실합니까?”
맥코이가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설마 내 집도 모르려고.”
얼떨떨해하는 장교의 등을 밀면서 맥코이가 길을 재촉했다. 칸이 헤드쿼터에 갔다는 보장은 없다. 대단한 행운이 그를 격려하지 않는다면 맥코이는 칸을 만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결과가 어떻더라도 움직여야 한다는 강한 느낌이 맥코이를 행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 * *
수송선에는 비상용으로 스턴건이 구비되어 있었다. 무기를 들고도 적을 사살할 수 없다는 건 그에게 무척이나 어울리지 않았지만, 당장은 신속하게 계획을 실행하는 게 우선인 고로 칸은 스턴건을 하나 뽑아 쥐었다. 구석에 셔틀을 세우고 그가 정거장을 가로질렀다.
칸은 곧장 벤전스에게 가지 않고 먼저 쓸 만한 컴퓨터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마커스 제독은 그에게 꽤나 다양한 일을 시켰었다. 스타플릿의 중령이자 비밀 요원으로서 칸은 실제로 빛나는 성과를 거두었었고, 그로 인해 제독은 그의 대원을 볼모로 잡고 있다는 사실을 과대평가하게 되었다. 그러나 칸은 처음부터 탈출을 도모했으며 알게 모르게 제독에게 일시적으로 받은 권한을 임의대로 이용했다.
그는 복도 중간에 안내도를 보여주는 화면이 설치되어 있음을 기억했다. 그것은 단순한 디스플레이가 아니라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칸은 안내도를 바닥으로 내리고 창을 띄워 지금껏 사용해본 적이 없었던 명령어를 적었다. 다행히도 명령어는 효력을 발휘했다. 그는 한 손을 쉼없이 움직이면서 발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인기척을 겨누기 위하여 총을 꺼냈다.
엔지니어 특유의 붉은 유니폼을 입고 있던 여인이 두 팔을 굽혀 들었다. 칸은 여자를 슥 보고는 갈수록 숫자가 늘어가는 창에 집중했다. 당장 처리해야 하는 작전이 시급한 탓이었다.
스턴건을 들고는 있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지 않아 보여 여인은 눈치를 살피며 통신기의 버튼을 누르려고 했다. 느닷없이 빔이 쏟아진 건 그녀의 검지가 아슬아슬하게 통신기에 닿으려고 하는 찰나였다.
“…귀찮게 하는군.”
화면에는 어떤 작업이 완료되었다는 짧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칸은 쓰러진 여인을 쳐다보지도 않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가슴팍을 정통으로 맞은 그녀가 경련하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본부에 정거장의 침입자에 관하여 알리고자 애쓰고 있었다.
* * *
폭풍뿐인 크로노스의 기후는 험악했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스타플릿의 중위는 그래서 클링온들의 성미가 그토록 고약한 것이 아닌가 하고 영양가 없는 상념을 떠올렸다. 벤전스가 제외되어 계획보다 더 많은 숫자의 함선을 대동한 스타플릿의 화력은 아무래도 클링온들의 예측 범위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었다.
블레이드를 전부 수거당한 클링온 병사들이 반항적으로 입술을 물었다. 사지 곳곳을 페이저건으로 겨냥당한 그들을 스타플릿의 함선 한 대가 유유히 지켜보고 있었다.
“보고해도 될 것 같은데?”
노란색 유니폼의 장교가 커뮤니케이터의 플립을 젖혔다.
“여기는 크로노스, 함교 나오십시오.”
* * *
“캡틴, 크로노스에 있는 함선으로부터의 통신입니다.”
커크가 연결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무슨 일입니까?”
“어벤저호입니다. 혹시 다른 함선이 지원 요청을 보냈습니까?”
“아뇨, 그런 적은 없습니다만.”
“여긴 행성 쪽 상황이 대충 정리되어 가는 시점입니다. 근데 레이더에 워프 중인 함선이 잡힌다고 하는데요?”
어벤저호의 조타수로 짐작되는 남자의 목소리가 섞였다. 벤전스입니다, 함장님. 커크가 놀라 반문했다.
“잠깐, 지금 벤전스라고….”
통신이 끊겼다. 커크가 정거장과 접신하는 역할을 맡은 통신 장교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물었다. 마침 정거장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장교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큰일입니다. 존 해리슨이 벤전스를 탈취했습니다!”
* * *
크로노스 상공에 떠있던 함선이 위기감에 들썩였다. 주변에 정박하고 있는 배 모두가 돌발 상황을 맞아 부산스러웠다. 각 함선의 수석 기관사들이 하나같이 코어의 냉각수 흐름이 멈췄다고 알려왔다. 동시다발적으로 워프가 불가능해진 함대에게 통신 신호가 묵묵히 전달되었다.
“여러분들, 이쪽에서는 벤전스를 보낸 일이 없습니다.”
“그럼 누구란 말입니까?”
순간 다른 함선들이 외부에서 잡히는 통신 신호에 긴장한 듯 조용해졌다. 그것은 스타플릿의 관제실도 마찬가지였다. 커크는 떨리는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여장교의 입을 통하지 않더라도 그녀가 무슨 말을 할지 알았다.
“친절하게 그 정체를 알려줄 모양이군, 존 해리슨?”
커크의 수신호를 받은 여장교가 스크린에 새로운 영상을 올려놓았다. 자신이 탄생시킨 함장석에 앉은 칸의 모습은 자연스러우면서도 고압적이었다.
“함대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배에 오르기 전 시스템에 침입해 두었다가 악성 코드를 발동시킨 것뿐이다.”
“그렇게 빨리?”
“너희들의 예상보다 마커스는 나에게 많은 일을 하게 했지.”
커크가 눈썹을 비볐다. 아직 크로노스의 함대와 연결되어 있는 통신원들이 시시각각 소식을 전해왔다. 칸 누니엔 싱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그들은 이동을 할 수 없거나, 과열된 워프 코어가 터져 전부 방사능에 노출될 것이었다.
“내 요구사항은 간단해.”
듣는 사람은 다수였지만 칸은 커크에게 말하고 있었다.
“지구로 가서 너희가 저지른 죗값을 치러라. 그렇지 않으면 발이 묶인 함대들을 모조리 몰살시킬 것이다.”
발빠른 누군가가 스피커 너머에서 벤전스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무기를 작동시키려 하고 있다며 속삭였다. 동력이나 남은 어뢰들의 개수에서는 어쨌든 클링온과 전투를 마친 스타플릿 측이 불리한 게 맞았다. 커크는 반강제적으로 칸의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직감하면서도 물었다.
“그리고 너는 우주의 지배자가 되겠다, 이건가?”
칸은 어떤 맥락의 웃음도 지어내지 않았다.
“…그냥 내가 다시 잠들게 해줬으면 좋겠군.”
* * *
샌프란시스코에 남아 있던 장교들이 빠짐없이 정거장으로 몰려와 하나씩 도착하는 아군의 함선을 받아들였다. 함선이 클램프에 고정되자마자 승무원들이 밖으로 빠져나왔고 수많은 장교들이 금방이라도 전투에 돌입할 듯이 삼엄한 자세를 취했다. 그들의 맨 앞에는 누구보다 빛나는 제임스 커크가 서 있었다. 정거장의 오퍼레이터가 특유의 기계음으로 도착하는 함선의 이름을 차례로 호명했다.
“크로노스에 파견되었던 배들이 모두 돌아왔습니다.”
“…아직 하나 남았지.”
커크가 까만 하늘을 응시했다. 그는 차분히 시간을 셈했다. 워프하는 함선도 따라잡는 벤전스의 경이로운 속력이라면 그를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커크의 등 뒤에서 미숙한 승무원들이 정거장의 안쪽으로 대피했다.
진공과도 공명하는 것 같은 워프 특유의 효과음이 우주에 퍼지면서 벤전스호의 검은 형태가 드러났다. 커크와 함께 엄선된 장교들이 움직였다. 거대한 함선은 고분고분한 태도로 정거장의 빈자리에 내려앉았다.
커크가 입구로부터 열 발자국 정도를 남겨두었을 때 해치가 아래로 열렸다. 오른쪽의 비상등만이 불이 켜지면서 마치 커크를 안내하듯 제 자신들을 밝혔다. 벤전스가 낯설지는 않아도 워낙 특이한 방식으로 처음 이 함선에 찾아왔던 커크를 위한 함장의 배려였다.
함교의 문은 여느 배와 마찬가지로 부드러운 마찰음을 내며 비켜났다. 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오랜만에 보는군.”
칸은 자신이 기억을 잃었던 당시를 배제하며 말하고 있었다.
“날 데리러 와줬나?”
커크의 양옆으로 호선을 그리며 정렬한 인원이 정확하게 칸을 겨냥했다. 수갑을 들고 있던 남자가 발을 내딛자 커크가 잠시 그를 제지했다.
“나는 너 안 믿어.”
“공평하군. 나도 스타플릿은 믿지 않아.”
“하지만 네가 원하는 심판은 내가 정당하게 시행시킬 거야. 무슨 뜻인지 알지? 나서려고 하지 말라고.”
커크가 고갯짓하자 남자가 칸에게 수갑을 채웠다.
“너도 날 견디지 못했나?”
그것은 커크에게 기억의 단면이 현시된 것 같은 광경이었다. 칸은 미묘한 말을 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육체를 맡기며, 자신은 개운하지 못한 기분에 시달린다. 하지만 이번에 그 느낌은 빨리 사라졌다.
“너의 존재 자체가 자극하는 게 있었지. 그건 확실히, 견딜 수 없었어.”
커크가 돌아섰다. 칸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 *
크로노스로 파견된 이들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본부는 비정상적으로 조용했다. 맥코이는 자신의 주소를 전해 듣고 신속하게 사라진 장교의 등을 한 번 보고 주위를 탐색했다. 그는 이제 스타플릿 소속이 아니었으므로 본부 깊숙이 들어갈 수가 없어 바깥을 맴돌았다. 맥코이가 커뮤니케이터를 몇 번이고 만지작대면서 커크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는 지를 고민했다.
상공이 시끄러웠다. 맥코이는 전처럼 회색의 수송선이 수놓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기어코 통신기를 작동시켰다.
“짐, 지금 얘기할 수 있어?”
“안 그래도 알려주려고 했는데.”
커크의 목소리에 여러 소음이 섞여 들렸다.
“칸이 함선까지 훔치고도 순순히 잡혀 왔어. 그리고 캡슐 안으로 들어가겠다는군. 곧 착륙할 거야.”
순간 말을 잊은 맥코이의 눈동자가 고도를 낮추는 셔틀의 무리를 쫓았다. 그는 격납고로 향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스타플릿에게 전쟁을 선포할 명분이 충분한 인물을 태운 기체가 평화롭게 지상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는 데에 지루함을 느낀 것도 아니거늘 맥코이는 서서히 옆으로 발을 옮기고 있었다. 칸이 무작위로 보고 있던 수갑에서 눈을 뗀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