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커크] Emancipate From the Sector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4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James Kirk

- Request confirmed.

- Written by. Jade


Emancipate From the Sector




  칸은 잠들기 전에 자신의 선원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도 나타났고, 라디오로도 들려왔으며 가전제품들을 전시해 놓은 판매장에서도 보였다. 머리를 양갈래로 얌전히 땋은 흑인 소녀가 화면에 자주 나왔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을 초빙해 놓고 아나운서 혹은 인터뷰어가 저마다 떠들어댔다.


  “박사님, 사실 소녀의 병은 그 발견 사례조차 많지 않았다는 희귀병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당장의 기술로는 원인을 파악하기도 급급했을 겁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소녀의 아버지는 스타플릿의 고급 장교로, 존 해리슨의 협박을 받고 켈빈 기록 보관소에서 폭탄을 터뜨려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희는 존 해리슨이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무언가를 넘겨주고 거래를 했다고만 추측할 수 있는데요..”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존 해리슨에게 수혜를 받은 인물이 그 소녀 하나뿐인지를 의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존 해리슨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극이었다.






  대중보다 더 고급스러운 정보를 먼저 받아볼 수 있는 스타플릿에서는 사실 누구도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 오싹하리만치 놀라운 칸의 또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문이 많았다. 함장의 죽음을 똑똑히 목도했던 엔터프라이즈의 대원들은 다시 살아나 거동하는 제임스 커크를 보면서 속으로 적잖이 놀라워했다. 레너드 맥코이가 혈청을 합성하는 데에 일부 도움을 주었던 의사나 연구원들은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일반 교관부터 제독까지 모두 남몰래 관심을 반짝이고 있었다.


  덕분에 바깥으로 돌아다니기만 하면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의 눈치를 받는 맥코이는, 이마를 몇 번 문지르면서 어느 병실에 당도했다.


  “오늘은 가만히 있네?”


  커크가 침대에 앉아 있다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 머무는 병실이라 쾌적하긴 해도 운동을 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는데, 커크는 재활 훈련이랍시고 방 안에서도 부산하게 움직일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맥코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어필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실은 심심해 죽겠다.”


  “왜, 그래도 내가 종종 와 주잖아.”


  “요새 스팍은 바쁜가? 통 얼굴을 못 보겠네.”


  맥코이가 주머니에 있던 트라이코더를 꺼냈다.


  “외계인보다 더한 놈의 혈청을 맞은 함장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데, 엔터프라이즈한테만 떨어진 일도 좀 많아야지. 요새는 전투 상황에서 죽은 승무원들의 유가족을 챙기고 있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더라.”


  커크가 인상을 구기면서 궁시렁거렸다. 마커스가 워프 궤도에서 빔을 발사하는 바람에 밖으로 날아간 승무원들은 구조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트라이코더가 커크의 눈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 재조선 결정됐잖아. 환자 신세만 아니었다면 너도 엄청 불려 다녔을 거야.”


  “내가 무슨 환자라고 그래?”


  “너 환자 맞아. 그것도 엄청난 주의가 필요한 요주의 인물이지.”


  맥코이가 슬쩍 눈썹을 올리며 던지자 커크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짧게 웃었다.


  “..요새 라디오에서 칸 얘기가 자꾸 나와.”


  꼼꼼하게 진찰 기록부를 적어가던 맥코이가 멈칫했다.


  “설마 스타플릿에 마커스 같은 인간이 또 있지는 않겠지?”


  칸이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존 해리슨이었을 때부터 그에게 대항한 것은 커크와 엔터프라이즈였고 일종의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커크는 다시 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예술적인 폭력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치켜드는 건 더더욱 싫었다.


  맥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타플릿의 제독이라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어느 공간이 있었다. 그곳이 지하라는 걸 감안해도 내부 공기는 꽤나 서늘했다. 뚜껑이 닫혀 있기는 하지만 73개나 되는 극저온 캡슐에서 감춰지지 않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지도 몰랐다. 덕분에 거의 유일하게 거기에 출입하는 담당자는 연구원 특유의 가운 안에 겉옷을 덧입곤 했다.


  성인 남자가 양 팔을 벌려야 간신히 채울 수 있을 너비에 모니터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가 차근차근 화면에 떠올라 있는 수치들을 보며 며칠 전의 데이터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와 손가락이 함께 움직이며 숫자를 하나하나 짚고 넘어갔다. 이상 없음, 이상 없고..


  갑자기 터진 높은 전자음에 그가 고개를 번뜩 치켜들었다. 최소한의 생체 신호만 유지해야 하는 그래프가 점점 뾰족해지고 있었다. 담당자가 급히 캡슐의 일련번호를 확인했다.


  “오, 안 돼..”


  그가 허겁지겁 문제의 캡슐을 찾아갔다. 누워 있는 남자가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음에도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는 서서히 떨리는 손으로 계기판을 마구 클릭했다. 캡슐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성에가 낀 표면이 더 뿌옇게 변했다. 그 순간 담당자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안구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균적인 범위를 벗어나 버릴 기세로 온도는 추락했으며 더불어 아래에서 요동치던 그래프도 점차 잠잠해졌다. 그가 입을 벌리고 산에 기어오른 마냥 헉헉댔다. 그것은 그에게, 아니 행성 연방에서 제일 중요한 캡슐이었다.






  데이스트롬 회의실에 약하게 불이 켜졌다. 아직 환자복을 내던지지 못한 제임스 커크 함장과, 희생된 대원들의 합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출장을 떠난 스팍이 부재한 상태로 열리는 회의였다.


  “담당자가 어제 동결되어 있던 캡슐 중 하나에서 비정상적인 바이탈 사인이 감지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주인공이 칸이더군요.”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깨어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얼려놨는데도요?”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슴에 함장 표식을 단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그나마 담당자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마무리된 거지, 손 쓸 틈도 없이 칸이 깨어나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게다가 그의 양옆에 있는 자신의 동료를 깨우기라도 한다면요?”


  회의실에 둘러앉은 이들의 낯빛이 한 마음으로 어두워졌다. 그렇게 된다면 보관소 건물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빌딩 일부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스타플릿이 한꺼번에 궤멸될 거라는 설득력 있는 예측이 함장과 일등 항해사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칸과 그 무리들을 따로 떼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코이가 다섯 번째로 정밀 진단을 마친 날에 커크는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자신의 친구이자 담당의에게 퇴원을 시켜 달라며 사정했다. 온 몸에서 좀이 쑤셔서 미칠 것 같다는 둥, 이제 내가 완벽히 정상이라는 게 판명 났는데 뭐가 문제냐면서 쏟아 놓았다. 그리고 커크는 자신이 맥코이를 기어코 설득시킨 오늘을 제임스 커크 독립 기념일로 선정해야 한다는 둥 너스레를 떨면서 유니폼을 입었다.


  커크는 제일 먼저 엔터프라이즈를 만들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 높다란 크레인과 철 구조물들이 높은 공중에서 움직였고 안전 요원들이 여기저기서 붉은 막대를 휘저었다. 익숙한 얼굴의 엔지니어들과 장교들은 함장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스콧이 옆에 붙어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엔터프라이즈가 앞으로 더 얼마나 우수해 질지에 관해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함선만큼 끝내주는 코어를 달 거예요. 이미 빼올 정보들은 다 빼왔다 이겁니다.” 스콧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슨 스파이 노릇도 아니고, 그걸 정보를 빼왔다고 말하는 거야?”


  “절대로 한 수 배웠다고 하기는 싫거든요.”


  스콧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재건되고 나서 그녀와 함께 어떤 임무를 맡을 지, 솔직히 지금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제발 무서운 일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커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스콧의 어깨를 탁탁 쳤다. 지난 사건들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스타플릿의 온건주의자들이 우주 곳곳을 동분서주하며 외교를 펼치고 있었고, 연방에 복수의 칼날을 세우는 요원도 아직까지는 발견된 바가 없었다. 커크가 함선의 외피 조각을 나르고 있는 와이어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스팍이 걸어오고 있었다. 커크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부함장을 밝은 모습으로 대했으나, 스팍의 표정은 평소보다 굳은 것 같았다.


  “함장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칸 누니엔 싱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스콧의 눈이 커지고, 커크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젠장, 그 놈을 누가 깨운 거야!”


  “누가 일부러 깨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각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처는? 의외로 조용한데?”


  “그게 어쩌면 가장 큰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스팍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모퉁이를 돌고 긴 복도를 거쳤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소수의 인물들에게 허락된 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긴 총을 들고 있는 두 명의 문지기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스팍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문을 열도록.”


  “아직 제독님들이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커크가 나섰다.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놈을 잡았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충분히 범죄자를 면회할 수 있는 권리는 있다고 봐. 좀 비켜주지 그래.”


  문지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스팍의 말이 옳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그것이 칸 누니엔 싱으로 인해 많은 걸 잃었던 제임스 커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망할! 대체 칸이랑 또 무슨 거래를 하고 있는 건데!”





  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욕망은 있다. 사소하게는 이번 기회에 손목시계를 바꿔버리고 싶다는 수준에서 우주를 탐험하겠다는 다짐까지 나아가기도 하며 개인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띤다. 그럼에도 가장 유구하며 지긋지긋하게 인간의 뒤를 밟았던 욕구가 있다면 불멸과 야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토록 다수가 원했음에도 역사의 책장에 그쳐버린 이유는 그것을 증폭하고 강렬해지게 만들 마땅한 촉매제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칸이 300년 동안 동면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짝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되어 영생 따위는 시시한 가치로 전락했을 지도 몰랐다.


  마침내 출입을 허락받은 커크는 캡슐에서 빠져 나왔음에도 얼음처럼 정지해 있는 칸을 바라보았다. 스팍이 기지를 발휘해 제독들에게 대화 내용을 캐묻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엔터프라이즈의 감금실과 비슷하게 생긴 유리감옥 안에서 칸이 고개를 올렸다.


  “왜 일어났어.”


  칸의 시선이 곧게 커크를 향했다.


  “아직 분이 덜 풀렸던 거야? 이번에야말로 네 대원들 다 깨워서 한바탕 우주를 뒤집어엎고 싶었어? 그 잘난 머리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도 못했나?”


  “..난 자의로 깨어난 게 아니다. 알지도 못하면 그 입 좀 다물지.”


  “그러면 다시 스스로 잠들던가!”


  커크는 자꾸만 화를 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동의한 적도 있던 수면에서 이유도 없이 깨어나 다시 수감자가 된 칸보다 더 거세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칸이 말했다.


  “죽음이 그렇게 두려웠나?”


  커크의 표정에 금이 갔다. “..뭐라고?”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군. 너를 한 번 죽였던 내가 되살아나니 불쾌한 상상이라도 드는 건가?”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언어가 짜증나도록 냉정했다. 그러나 커크는 오히려 그 온도에 제 자신이 식어버림을 느꼈다. 눈물을 흘려도 흔들리지 않았던 동공이 기묘하게 투명해서 커크는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나한테 신경 쓸 처지가 아닐 텐데.” 커크가 물었다. “방금 나간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 널 얌전히 캡슐로 돌려보낸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칸의 대답은 건조했다. “나를 이용하겠다고 하더군. 당장은 내 지식을 빌리겠다고 하지만 거기서 그칠 인간들이 아니지.”


  잠시 말을 끊고 칸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네가 염려하는 게 궁금하군, 캡틴.”


  “시끄러워.”


  그가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독들은 협박의 말도 덧붙였을 게 분명했다. 칸 역시 자신의 대원들이 폭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안위를 들먹이면서 협조를 요구했으리라. 두꺼운 수갑과 유리벽은 단지 그럴싸한 죄수의 풍경을 연출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커크는 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입장에서도 가만히 동면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도 저 고분고분한 척이라니.


  하지만 사실 커크는 그를 이해했다. 커크가 세차게 시선을 내렸고 칸이 석고상처럼 눈꺼풀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칸은 이동되었다. 그게 극저온 캡슐 속이라면 좋았겠지만, 스타플릿은 뜬금없는 부분에서 인정을 발휘하여 그에게 꽤 멋들어진 작업실을 내어주었다. 안에서는 열리지 않고 내부에 설치된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만 설계도나 연구 내역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특이했어도 겉으로 감옥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밖에서는 그곳을 섹터라고 칭했다.


  가만히 사색에 잠겨 있던 칸이 벨트가 삐그덕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작업할 때 쓰일 패드와 함께 문서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혈액을 채취해야 한다거나 조직 검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가 일급 테러리스트를 만나길 꺼려한 덕분이었다. 칸이 지령서를 읽었다. 재조선 중인 함선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줄만한 아이디어와 실질적 실천 방안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꼭 어린 인간들에게 주는 숙제 같았다.


  그러다가 ‘재조선’이라는 단어를 보고 칸이 잠시 생각했다. 그가 추측하기에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 함선은 하나였다. 그가 조소했다. 자신이 망가뜨린 함선의 재건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패드를 집은 칸이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엔터프라이즈의 하얀 선체가 얇은 선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는 손을 움직이면서 이걸 빌미삼아 제임스 커크가 자신을 보러 오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위험한 선물과도 같은 칸의 혈액이 커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거나, 그가 미리 시나리오를 세워 둔 건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것은 칸의 생각이었다.






  커크가 입술을 꾹 다물고 언짢은 표정으로 칸을 노려보았다. 그는 어설프게 가운을 입고 레너드 맥코이의 카드키와 타블렛을 들었다. 그리고 칸은 보란 듯이 가상적으로 개량한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을 정지된 영상 형태로 띄우고 있었다.


  “내가 손댄 부분 중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캡틴.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거든.”


  칸의 빈정거림에 커크가 재빠르게 대꾸했다.


  “스타플릿에 충성스러운 인재가 나셨네, 아주.”


  “내가 연기에 능하다는 건 한 차례 경험했을 텐데.”


  “차라리 빨리 선전포고를 하시지.”


  커크는 얼어붙은 칸의 안구를 미간을 구기며 회피하려다가, 머리 위에 떠오른 엔터프라이즈와 마주치고는 속으로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칸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주는 불행과 적의로 이루어져 있어. 억지로 미뤄내도 결국엔 그것들이 덮쳐 오는 순간이 있지. 잠깐 존재들을 악의적인 고리에서 풀어냈다가, 다시 실을 감듯 끌어당겨 모든 대가를 치러내게 만들어.”


  “요점은?”


  “내가 서두르지 않아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거란 뜻이다.”


  “그 판사가 네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 자리를 네가 꿰차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커크는 다른 부분을 인정했다.


  “..스타플릿의 일부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칸은 늘 그렇듯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커크의 양심은 300년이 지났어도 발전이 없는 인간 무리들 가운데서도 꽤나 주목할 만했다. 아주 조금은 만족스럽고 흥미롭다는 듯한 눈길을 감지했는지 커크가 곧바로 덧붙였다.


  “내가 널 지지하는 건 아니야. 내 머리 멀쩡해. 하지만 마커스 제독이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는데도 네 능력을 이용하려는 행위는, 적어도 나는 인정 안 해.”


  칸이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너 혼자서 나를 동결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도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어.”


  패드가 불빛을 냈다. 엉겁결에 디바이스를 맞바꾼 맥코이가 커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신호였다. 거기서 1박이라도 할 참이야? 빨리 안 나올래! 낱말에서 맥코이의 목소리가 튀어오를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커크는 자신이 왜 칸을 만나려고 했는지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다. 작업에 딴지를 걸어 주려고 왔던가. 그러나 23세기에서도 그 우월함을 떨치고 있는 칸의 생각에 면박을 준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여하튼 맥코이의 말처럼 커크는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결정했다.


  “내 복수를 막겠다는 뜻인가?”


  칸이 묻는 소리가 들려 커크가 고개를 돌렸다.


  “네 선원들을 죽일 생각은 절대 없는데, 무슨 복수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칸은 커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엔터프라이즈는 아직 두 사람의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근래 업무가 많아 잠을 설친 덕분에, 맥코이는 이번에야말로 피로를 씻어내겠다는 의지로 커뮤니케이터도 꺼버리고 라벤더 차를 진하게 끓여 마신 다음 한창 잠에 빠져 있었다. 블라인드까지 촘촘히 내려져 있는 방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맥코이는 자는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건 그 즈음이었다. 깊게 잠들어 있어서 그는 처음에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 번째, 문에 구멍을 낼 기세로 노크를 하는 방문객에 맥코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일어나야 했다. 젠장. 대체 누구야. 문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맥코이는 갖가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가 제대로 뜨지 못한 눈으로 입구를 열었다. 상냥해 보이지는 않는 인상의 여인이 그에게 빈틈없이 들어찬 시험관대를 내밀었다. 들어 있는 액체는 모두 붉은색이었다.


  “...뭐에요, 이건.”


  “박사님이 맡으신 실험에 쓰일 샘플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칸을 실험할 자격이 있는 분이 박사님 말고 누가 있겠어요?”


  맥코이가 순간 잠시나마 눈을 크게 떴다.






  커크가 다짜고짜 서류뭉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데이스트롬 폭격 사건 이후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제독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험이 많다는 노년의 남성이 시선을 들었다.


  “이게 뭔가, 커크 함장?”


  “엔터프라이즈가 사실상 5년 탐사 임무를 맡게 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확실합니까?”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모험심이 강하고 또 그 임무에 적합하다는 건 맞네만..”


  “당장 그걸 확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빨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커크는 평소보다 여유가 없어 보였고 그 자리를 짙은 진지함과 결단이 채우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될 걸세.”


  제독은 대답해 주면서 커크가 가져온 서류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얼핏 살피니 엔터프라이즈의 장기 임무와 관련하여 본부에 요청할 사항들에 관한 내용인 듯했다. 단순히 보급품 문제라면 커크가 발걸음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제독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5년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한 번도 사람들이 가보지 못했거나 교류의 흔적이 없는 곳들을 찾아다니게 될 겁니다. 그 여정 중에 만나는 종족들이라든가 생명체들이 언제나 저희에게 호의적이진 않겠지요. 불가피한 전투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넘기던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니 그와 관련하여 인원을 보충할까 합니다.”


  제독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자네, 칸을 자네의 함선에 태우겠다는 건가? 진심인가?” 커크의 눈빛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도 안 되는 실험에 끌어들였다가 구제불능인 성질 건드리셔서 놈이 우주 전쟁 일으키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자는 겁니다. 전 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제독님.”






  며칠간 커크의 커뮤니케이터는 식을 틈이 없었다.


  - 함장님, 정말로 칸이랑 같이 우주에 나가야 하는 거예요?


  - 칸이 저희 배에 탑승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냥 소문이죠, 함장님? 그렇죠?


  - (글자가 없고 우는 모양만 그려져 있음)


  - 짐, 어떻게 그녀한테 그런 끔찍한 짓을 허락할 수가 있어요! 당장 취소해!! (커크는 단번에 스콧 보낸 메시지라는 걸 알았다)


  - 함장님. 캐롤 마커스의 전례도 있었는데 이번에도 저와의 상의 없이, 그것도 칸 누니엔 싱에게 승무원의 신분을 주실 겁니까? 지금 함장님이 있는 장소를 찾는 중입니다. 그 전에라도 메시지를 확인하시면 즉시 응답 주십시오.


  - 너 아직도 내 카드키 안 준 거 알고 있거든?!


커크는 연신 입을 비죽이다가 걸으면서 몇몇에게만 답장을 보냈다.


  - (스콧에게) 나도 웬만해서는 참았을 거야. 왜, 워프 코어에 대해서 주변에 그 놈만큼 말이 잘 통하는 상대도 없을 거라고. 빌어먹을. 진짜 미안해.


  - (맥코이에게) 한 번만 쓰고 앞으로는 꼬박꼬박 검진 받으러 갈게. 약속함.


  - (스팍에게) 이번만큼은 네가 단번에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냉동인간!”


  되돌리기도 곤란한 대사건을 터뜨린 주제에 막상 부끄럽고 약간은 공황 상태에 빠진 커크는 괴상한 방식으로 칸을 호칭하면서 카드키를 긁었다. 육중한 철문이 느릿느릿 옆으로 비켜나자 고상한 자세로 책을 보고 있는 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그대로 얼굴만 돌려서 커크를 보았다.


  “언젠가 내 양심에 고마워할 날이 있을 거야. 일어나.”


  칸이 의아하다는 듯 동공을 굴렸다.


  “가자고.”






  무리수로군, 캡틴. 생체 실험 당하는 게 더 좋다고 하면 안 말려. 지금이라도 가든가. 내 피를 맞고 전보다 더 무모해졌다니 이상한데. 좀 더 냉정해지고 이성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널 만든 과학자들이 사회적 인성을 함양하는 수업은 제공해주지 않든? 정리하자면 나는 네 은인이라고. 반 이상을 내 독단으로 널 엔터프라이즈에 승선시키는 거야. 나를 이용한다는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널 사이에 두고 스타플릿을 상대하면서 그 부분까지 양보를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다. 그래도 나나 본즈나 너한테 이상한 짓은 안 할 거야.


  ..이제는 정말로 궁금해지는군. 뭐가. 너를 죽였어도 다시 살려준 데에 관한 보답이라도 하는 건가? 너는 나를 상관할 필요가 없어. 내 양심에 고마워 할 날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순전히 네 도덕적, 윤리적 의식으로 날 돕는다는 의미인가? 거 참 사람 불편하게 만드네. 5년 못 채우고 중간에 소행성에 내려 놔도 그러려니 해. 난 대답을 원해, 커크.


  300년 살면서 세상 구경도 못 해봤어? 우주는 절대 불행과 적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칸이 홀로 탑승하는 셔틀에 올라 손수 안전장치를 확인한 커크는 감시원들의 페이저건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칸의 청록색 눈동자가 커크의 뒤를 쫓았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한 함장이 말했다.


  그럼 엔터프라이즈에서 보자고.






  Stardate 2260. xx


  “뭔 저런 녀석들이 다 있냐!!”


  맥코이가 고함을 치며 달렸다. 행성에 자라 있는 샘플을 채취해 보겠다며 나름의 욕심을 부렸다가 그는 현재 뜻하지 않은 고충을 당하고 있었다. 맥코이와 나란히 뛰던 커크가 야심차게 페이저건으로 반격을 하려다가 날아오는 창에 머리를 웅크렸다.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워프시켜 줘! 이러다가 죽겠어!”


  “함장님이 그렇게 달리고 계시면 이쪽에서 어떻게 위치를 잡습니까?”


  “그럼 우리보고 멈춰 있으라고!”


  등 뒤에서 날아드는 무기와 빔이 갈수록 많아졌다. 커크가 이를 악물면서 있는 힘껏 도망쳤다. 그 때 그림자가 훅 그의 코앞을 지나가더니 커크의 손에 들려 있던 총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비무장상태가 되어버린 스타플릿의 함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득 발밑에 꽂히는 블레이드의 수가 적어졌다. 지독한 호전성만큼이나 출중한 순발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는 부족들의 괴성이 이젠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커크와 맥코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페이저건의 붉은 광선이 얼핏 공중을 날아다니는가 싶더니 그는 아예 놈들의 무기를 뺏어 휘두르고 있었다. 점차 비어가는 칼날이 줄어갔다. 사실 엔터프라이즈가 행성으로 내려 보낸 인원은 커크와 맥코이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그랬다.


  “쓰지도 못할 총은 왜 들고 있었나.”


  간단하게 추격꾼들을 제압한 장본인이 발에 걸리는 시신들을 치워내면서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커크의 함선, 나아가서는 스타플릿에 한 명뿐일 전투 장교가 함장과 메디컬 치프에게 차갑게 핀잔을 주었다.


  “엔터프라이즈, 우리를 워프시키도록.”


  자신의 대사를 빼앗긴 커크가 벙찐 얼굴로 칸을 쳐다보았다. 미간을 좁히긴 했어도 그가 살풋 웃은 것 같았다. 

[STID/존커크] The Log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45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James Kirk

- A Slow Mood Recommended

- Written by. Jade


The Log




  너는 내가 전에 했던 말을 믿는가?


  정확히 어떤 걸 언급하는지 모르겠군.


  함선의 구금실에서 내 정체를 밝혔을 때, 나는 전란에 휩싸인 세계의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유전학적으로 우월하게 설계된 존재라고 했었다.


  ..아, 그거. 지금은 그게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잘 알고 있지. 그게 사실이라면 네가 전범으로 재판을 받고, 열등한 종족들을 학살하고 다녔을 리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왜 만들어졌을 것 같나?


  뭐라고?


  평화유지군이 아니라면 말이야, 나는 무엇을 위한 무력이지? 


  ...세상에 마커스 제독 같은 사람이 한 둘이겠어. 예전에도 전쟁과 야심에 눈이 먼 높으신 분들이 있었을 테고, 그런 사람들이 또 광기에 사로잡힌 과학자들에게 은밀히 지시했겠지. 서로 좋은 거 아니냐면서. 너희들은 누구도 도전해 보지 않았던 ‘생명 창조’라는 일을 해내고 나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무기를 갖게 된다고 유혹하면서 말이야.


  흥미로운 표현이군.


  뭐가.


  ‘생명 창조’라고 하지 않았나. 너는 나를 생명이라고 인식하고 있군.


  정말 인간 같지 않은 놈이지만 너도 피가 흐르고 숨을 쉬잖아. 내가 달리 뭐라고 정의해야 하는데.


  이 세상의 모든 건 서로 다른 욕망이 흐르고 구체화되는 과정 속에서 피어나지.


  ..또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서문이 그럴까.


  어느 날 갑자기 법전이 하늘 위에서 뚝 떨어진 건 아니잖나. 마치 일부가 수많은 이야기들 중에서 고르고 골라 한 책에 묶어 놓은 성경처럼, 법 역시 일부의 의견에서 비롯된 산물이지. 이런 것은 허락하고 이런 것은 금지하고. 그런 기준이 정의롭고 올곧은 이성에서 나왔을 것 같은가? 권력도 마찬가지야. 그 기원이 너무도 강력하고 익숙하기 때문에 얌전히 수용하고 있을 뿐 결국 누군가의 욕망이 발현된 거다. 그리고 가끔 그 욕망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혁명을 일으키지. 물론 그것 역시도 기득권자들의 욕망과 자신들의 욕망이 위치해 있는 배치 관계를 바꾸려는, 또 다른 ‘원함’에서 발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 있지?


  나는 법이다.


  뭐라고?


  그 근본에서 나는 법이나 권력과 다르지 않아. 그들이 다른 형태를 선택했다면 나는 육체를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하나의 생명체로 태어나지 않았어. 나는 욕망이 육화된 존재에 불과하다.


  너답지 않은 생각이야.


  ..?


  가정을 하면서, 당장 현재에는 제대로 들어맞지도 않는 철학적 논리를 펼치면서 네 자신이 살아 숨쉬는 생명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잖아. 그래서 네가 얻는 게 뭐지? 나한테서 동정심을 이끌어 내려는 건 절대로 아닐 테고. 너는 생명이다. 보통 사람들과 너무도 다른 점이 많지만 어쨌든 너도 사람이야.


  그게 너한테 상당히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군.


  ..네가 차라리 법이나 권력 같은 하나의 개념이었다면 내가 이렇게 마음이 불편할 일도 없었을 거다. 


-


  묻고 싶은 게 있어.


  대답할 수 있는 종류라면 기꺼이.


  그 때, 네놈이 흘렸던 눈물의 의미가 궁금해.


  ..대원들에 대한 내 진심을 의심하는 건가, 캡틴? 제 아무리 내가 내 선원들을 아낀다 할지라도 저 냉혹한 범죄자가 눈물을 흘릴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아니면?


  나와 어떤 부분이라도 공통점을 가지는 게 증오스러운 건가.


  그렇게 말한 적 없어.


  내 말이 일부는 맞다는 뜻이군.


  내가 증오스러워하는 건 네가 나에게 있어선 아버지 같은 분을 죽였으며,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고 너와의 전투로 엔터프라이즈의 승무원 일부를 잃어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뭔가. 부담스러운가?


  ..질문에 대답 할 생각이 있기는 해?


  궁극적인 기만은 진실의 모습을 하고 있는 법이야.


  또 우월한 척, 잘난 척 다 하시네. 좀 쉽게 말해.


  진실과 거짓을 섞어 놓으면 그 경계가 흐릿해져 결국은 헷갈리게 되지. 믿을 수 있는 요소들이 기반이 된 거짓말은 겉보기에는 신용도가 높아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쉽다. 누군가를 완벽히 속이려면 충분한 진실을 제공해줘야지. 그래야 마지막에 놓은 덫이 더 깊숙이 파고들 수 있으니까.


  ..그 말은. 


  네가 나를 구금하기로 결정했을 때부터 나는 마커스 제독이 함선을 끌고 올 줄 예상했다. 그리고 나의 복수를 위해선 그 함선이 필요했지. 엔터프라이즈는 벤전스를 상대할 수 없고 의협심이 넘치는 함장은 차라리 자신의 목숨을 걸고 도박을 할지언정 승무원들의 안전을 도모하고 싶어 하고. 


 다 연극이었다는 소리군.


 아니, 내가 감췄던 건 내가 벤전스에 침입해야 한다는 계획뿐이었다. 


 ...


 나는 지금이라도 네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 있어.


 악어의 눈물 따위는 보고 싶지 않아. 


-


  그 과학자들이 너한테 얼굴 근육을 어떻게 쓰는 지는 가르쳐주지 않았나봐.


  ..무슨 뜻인가.


  지금 보면 내가 왜 네 정체가 유전자가 조작된 비정상적인 인간이라는 걸 눈치 못 챘는지 이해가 안 갈 정도야. 너는 그냥 가만히 있어도 이질적이라고. 얼굴은 핏기 없이 하얗지, 눈은 우레탄 인형의 안구처럼 생겼고 석고상으로 빚은 듯 미동이 없이 딱딱하기만 해. 마치 네 얼굴이 나머지 신체하고 분리된 것 같은 느낌이란 말이지.


  지금 내가 표정이 다양하지 않다는 걸 질책하는 건가?


  응, 그거 무지 맘에 안 들어.


  ....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란 말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니야. 누구한테 선물을 받고 이거 진짜 예쁘다, 고마워 라고 말하면서 만지작거리는 손길이 영 건조하다든가 억지로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해봐. 그 상황에서 언어는 불완전해. 그것만 가지고 타인의 감정을 파악할 수 없지. 많은 경우에서 우리들이 입 밖으로 내는 말에 실질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건 우리의 얼굴이나 표정이야.


  이상하군.


  ..왜. 나도 이 정도 생각은 할 줄 알아.


  표정을 통해서 내 진짜 심리를 읽을 수 없는 게 불편하다고 하소연하는 것 같군.


  뭐?


  내가 전처럼 너를 속일 것 같은가? 당장 걱정할 필요는 없어. 내 대원들의 생명을 보장한 엔터프라이즈의 주요 장교들은 그나마 스타플릿에서 가장 순진한 것 같아서 어느 정도는 믿을 수 있거든. 내 속내가 듣고 싶으면 물어보도록.


  너 진짜 맘에 안 든다.


  ...?


  그래, 너 잘났다! 젠장할.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군, 캡틴. 


  캡틴이라고 하지 마! 소름 돋는다. 어우, 진짜.


-


  넌 이태까지 무언가를 진짜로 원해본 적이 있나?


  나와 언어유희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군.


  사람이 물으면 일단 토 달지 말고 대답 좀 해 줄래? 하여튼 고분고분한 법이 없어. 좀이 쑤셔서 구금실에서는 대체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몰라.


  여기서 나갈 자유를 원한다고 대답한다면?


  거짓말.


  ..거짓말이라고?


  그건 오로지 너만을 위한 요구가 아니야. 잠들어 있는 네 선원들을 데리고 도망치기 위한 하나의 발판에 지나지 않잖아. 나는 온전히 너 자신을 위한 무언가를 원한 적이 있냐고 묻는 거야.


  ...


  대답 못 할 줄 알았어.


  그런가?


  가끔 너한테 동정심이 생겨.


  내가 날 위해 무언가를 원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네가 언젠가 그랬지, 너는 타인의 욕망이 실현된 형체에 불과하다고. 만약 네가 미친 과학자 아래서 탄생되지 않고 순수하게 연구를 위해 몸 바친 연구원에 의해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그 때도 네가 전쟁과 학살을 업으로 삼았을까? 네 행동, 네 명분까지도 처음부터 네가 태어났던 그 상징적인 공간과 의미들에 의해서 정해져 있었어.


  ...그렇다면 한 가지 묻고 싶군.


  뭔데.


  내가 정말 날 위해 자유를 원한다면, 나를 풀어줄 텐가?


  그걸로는 충분하지 않아.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한가.


  아니, 그 이후에 네가 또 널 위해서 무엇을 하면서 살아갈지 말해주지 않는다면 나는 절대로 그 말을 믿지 않을 거다.

  

-


  ..네 조건을 생각해 봤다.


  조건이라니?


  내가 날 위해 자유를 원한다는 말을 믿게 만들기 위한 조건. 


  굳이 그걸 또 조건이라고 표현하네. 여하튼 그래서? 


  불가능할 것 같더군.


  ...벌써 결론이 났어?


  300년의 빈 시간이 존재하지만 나의 과거는 여전히 생생하다. 처음에는 캡슐의 일련번호로 나를 부르다가 어떤 실험체보다도 뛰어났던 내 자질을 보고 나에게 지배자의 이름을 붙여준 연구원들. 조작된 파괴 욕구. 숱한 인간들이 내 앞을 지나갔지만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었지. 나와 같이 옆자리에 누운 동료들과의 순간적인 교감이 유일한 위안이었던 시절.


  ....


  나는 날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 같다. 안타깝게도 너를 속이는 건 불가능하겠군, 커크.


  그토록 뛰어난 존재면서 결국은 기억에 사로잡혀 있군. 너는 떠돌고 있지만 그 행위가 너를 새로운 곳으로 데려다 주질 못해. 그 기억에, 과거에 멈춰 있고 고착되어 있을 뿐이지.


  ..반박할 생각은 없다.


  너는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했지.


  그렇다.


  자꾸 그 말이 신빙성을 잃어가고 있어.


  ...


  네 머리가 너무 똑똑해서 그것들을 망각할 수 없다고 해도 좋아. 하지만 그 기억은 그저 가만히 놔둘 수도 있지만, 그게 놓여 있는 자리를 바꿀 수도 있어. 과거가 네 족쇄가 아니라 네 원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이야.


  나에 대해 갈수록 관대해지고 있는 것 같군.


  그건 아니야.


  그렇다면 왜 나한테 변화를 촉구하며 희망을 강요하는 것인가?


  ..내가 불편해.


  그 무슨..


  네 모습이 불편하다고. 젠장, 네 자질은 그게 다가 아니잖아. 


-


  커크.


  왜.


  다른 인간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지? 특히 네 승무원들. 아직도 나를 두려워하나?


  ..아마도. 그들뿐만 아니라 스타플릿의 소속원들, 평범한 사람들까지도 너에 대한 두려움을 완전히 지울 수는 없을 거야. 아직 몰라? 당신 역사에 손에 꼽는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라고.


  그렇다면 내가 엔터프라이즈에 승선하는 건 무리겠군.


  뭐라고?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아직 내가 엔터프라이즈에 탑승할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했다.


  네가 뭣하러 내 배에 타려고!


  나를 위해서.


  ...내가 잘못 들은 거 아니지. 


  구금실보다는 엔터프라이즈가 나에게 더 적합한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설명해 봐.


  길지는 않다. 너는 나에게 여러 가지를 제시했지. 나를 위한 욕구를 세우라고도 했고 과거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바깥으로 나오라는 얘기도 해 주었다. 솔직히 밝히자면 내가 이태까지 인간들에게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쓸모 있는 말이더군. 


  그래서?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것들에 익숙하지 않다. 누군가 옆에 있어주면 어렵지 않게 그것들을 실현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널 도와줄 사람이 누군데?


  제임스 커크.


  ..뭐?


  나를 배에 태워줄 텐가, 함장?


-


  존 해리슨. 본명 칸 누니엔 싱. 중령직 복귀 및 엔터프라이즈의 종합 고문으로 발령. 특정한 부서에 소속되는 게 아니므로 일반적인 제복이 아닌 검은색 수트를 요청. 다만 지속적인 심리 검사가 필요하며 일정 기간동안은 구금실을 내어줄 것. 책임자 제임스 T 커크. 서명 완료. 




[STID/Khan] Innocence & Knowledg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43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John Harrison

- Inspired by the greatest person I hold most dear

- Written by. Jade


Innocence & Knowledge 



  처음엔 하나의 여가 혹은 유희였다. 그는 할 일만 생긴다면 지루해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 경이로운 재능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은 기계가 아니었다. 그는 곧 굵직한 실험이나 발명을 끝내고 나면 북으로 나가게 되었다.


  겨를이 없는 가운데서도 최상의 조건을 갖춘 거주지를 선정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지독한 폭풍우가 없을 뿐, 탁하고 마른 대지가 크로노스를 연상시키는 땅에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을 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살짝 흥미가 생겨 그가 거리를 좁혀갔다. 아무 것도 없는 땅바닥 위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발을 쿵쿵거리고 있었다.


  “저기 도망간다!” “에잇!”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색깔의 옷을 걸친 소년이 거인을 흉내내듯 땅에 크게 발자국을 찍었다. 소년의 그림다가 사라진 타원형의 테두리 안에 짓이겨진 개미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바위와 흙과 모래가 있을 뿐인 공터에서 아이들은 개미를 사냥하며 노는 중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발을 굴리는 소년들의 얼굴이 밝았다.


  그는 어느덧 바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잔혹함이라는 낱말조차 모를 나이의 아이들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뛰놀았다. 반쯤은 전쟁과 정복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존재로서 그는 어떤 간질거리는 감상을 떠올리고 짧게 스쳐가듯 웃었다. 세기를 넘나들며 많은 위업과 그에 비례하는 잔인함을 발휘해왔지만, 그는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살인을 한 적이 없었다. 처벌, 본능적인 경쟁, 때로는 복수. 연방이 등한시한 몇백년 전 기록에서 그가 최고의 독재자로 적힌 것은 그에게는 반드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은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개미를 밟고 있었다. 도저히 합리성을 찾을 수 없어 하나의 목적이라도 이름 붙여줄 수도 없는 일시적인 호기심과 욕구가 작은 잔혹사를 빚어내었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없는 순수한 살욕이었다. 물장구를 치듯 껑충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는 일말의 경외심을 느꼈다.


  그가 단 한 번도 그러한 순수함을 갖지 못한 이유는 아마 그의 기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그는 자연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그의 영민한 지성은 일회적인 감각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거울에 비친 반사상(反射像)을 또 다른 자신으로 여길 만큼 그는 하얗게 순진했던 역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알고 추론에 능해서, 자신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노센스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 찰나의 경이로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칸 누니엔 싱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득 타인의 시선이 닿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무릎 한 쪽을 접고 그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모래바닥의 아이들보다 차라리 어려보이면서도 소녀의 표정은 뚱했다. 그가 얼굴을 약간 기울였다.


  “왜 저런 걸 보고 있어요?” 소녀가 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소녀의 목소리는 꽤 또렷하게 들렸다.


  “저 소년들 말인가?”


  “맞아요. 개미 잡아 죽이는 게 뭐가 재밌다고.”


  소녀는 이미 백색의 두뇌를 벗어난 듯 말에 투덜거림을 섞었다. 칸의 흥미가 소녀에게로 옮겨갔다.


  “그럼 너에게 재밌는 건 뭐지?”


  “음, 가령 이런 거?”


  소녀가 작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꺼내보였다. 책등이 닳아있는 걸 보니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본 것 같았다. 작가인지 아티스트인지 누군가의 이름이 은박에 덮혀 표지에 새겨져 있고, 번잡한 소개말이나 추천사도 없이 깔끔했다. 그는 그것이 일반적인 소설책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이런 사막 같은 마을이랑 어울리지 않는 취미라는 건 알지만 저한텐 이런 게 의미가 깊어요. 개미 죽여서 뭐해요. 밟히는 애들도 불쌍하고, 한 번 하면 거의 다시 찾을 일 없을 텐데.”


  칸이 넌지시 말했다. “내가 구경할 수 있을까.”


  “그러세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가 설마 어른이나 돼서는 배려도 없냐며 그를 흘겼지만, 그에게 사회적인 관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소녀가 입을 비죽이며 바위에서 내려와 척 하고 책을 건넸다.


  그것은 일종의 화집이었다. 초반에는 여성적인 일러스트 몇 점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장 즈음에 가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등장했다. 차분하게 책장을 보는 칸을 소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 서늘한 청색이 넓게 드리워진 가운데 얇은 선으로 그려진 사람들이 아래쪽을 메웠고, 그 위로는 엄숙함이 깃들어 있는 얼굴들이 하늘을 대신했다.


  “지혜의 시대라는 그림이에요.” 소녀가 설명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큰 작품을 완성한 화가가 이번에는 전 인류를 위해서 준비하던 연작이었고 각각 사랑, 지혜, 이성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화가가 죽어버려서 완성은 못 하고 습작만 남았지만. 그걸 괜찮아 하시다니 신기하네요.”


  칸이 화집을 무릎에 내려놓고 물었다.


  “어째서지?”


  “제가 요새 궁금해하는 그림이 그거거든요.”


  그의 긴 다리와 코트 자락이 바위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 소녀는 주위를 빙빙 돌다가 그의 측면에 기대섰다. 소녀는 이름 모를 어른의 눈이 사막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그림에는 순서가 있어요.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지혜, 그리고 이성이죠. 그런데 저는 왜 사랑과 이성 사이를 꼭 지혜가 메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그림은 두 가지 가치를 이어줄 정도로 아름답고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아요.”


  소녀가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곧바로 칸의 청록색 눈이 명상에 잠기듯 아득해졌다. 소녀가 눈썹을 올렸다. 현실감도 없이 너무도 쉽게 사색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또한 놀라웠다. 곧 그가 초점을 찾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떠나는군.” 소녀가 몸을 돌렸다. 한바탕 개미 사냥을 마친 아이들이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집은 혼자서도 잘 찾아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냐니까.”


  소녀는 직감적으로 이 검은 옷의 남자가 고등학교까지 다녔다는 오빠나, 너털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마을의 큰 어르신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걸 알았다. 소녀는 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아폴론의 요정들인 아홉 뮤즈 자매를 아는가? 오르페우스의 누이들을.”


  의외로운 시작이었다. 소녀가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올림푸스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여신들을 말씀하시나요?”


  “맞아. 또한 리라를 치던 오르페우스의 누이들이기도 하지. 오르페우스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고 있나?”


  “..어, 그 에우리디케를 데리러 저승으로 갔을 때 말인가요? 아니, 그 때는 죽은 게 아니었던가?”


  칸이 팔을 내려서 소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사실상 그의 죽음은 그가 결혼하기 전 구혼했던 많은 요정들이 디오니소스의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비탄에 빠져있는 오르페우스를 마구 공격해 죽여 버렸다고 하지. 후에 그의 누이들이 슬퍼하며 시체를 거두어 바다에 떠내려 보내 주었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고전 중에 하나였으므로, 일정 수준의 학식이 있다면 몇 가지는 알 만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꼭 신성한 존재에게 직접 그 일화를 듣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나는 그 상황에서 저 그림을 연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뮤즈들의 하나뿐인 남자형제를 죽이고도 이성과 지혜를 모르는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그 뮤즈들마저 공격해 버리는 거지. 여기서 사랑은 혈육에 대한 사랑으로도 볼 수 있고, 다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설명이 되었나.”


  소녀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네.”


  칸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변덕스러운 사막의 하늘은 햇볕이 따갑다가도 금세 빛줄기 하나 없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경험상 조금만 있으면 묵직한 밤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곧 어두워질 테니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거다.”


  “..저, 잠깐만요!”


  소녀가 무턱대로 그를 불러 세웠다. 칸이 돌아섰다.


  “이 주변에 살고 계세요? 아니다, 그것보다 여기 자주 오시나요?” 조숙한 체 굴었던 소녀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높아져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찾아올 지도 모르겠군.”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소녀는 더 요구하지 못했다. 바람에 그의 코트 자락이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그의 뒷모습은 아주 특별하진 않았지만 계속 바라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긴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녀는 가슴 한 구석이 충만해졌음을 실감했다. 




[STID/Khan] Memories Unforgettabl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41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John Harrison

- Inspired by the person I hold most dear

- Written by. Jade



1. Colorless Revival


  새벽과 일출이 아름답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다. 아무 데이터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하드 드라이브에 처음으로 곤히 기록되었던 우주의 신비였다. 아무도 깨어 있지 않은 시각, 가장 늦거나 이른 시각의 하늘을 마주하는 일은 제대로 정비되지 않은 유사인간의 유일한 낭만이었다. 그가 온건하게 성장했다면 아마 그 시간을 불러들일 수 있는 장비를 만들었을 지도 몰랐다. 자연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것 같은 과학적 백일몽을.


  거기까지 회상하고 나서 칸은 눈을 떴다. 찰나에 과거가 씻겨 내려갔다. 그는 살짝 기울어져 있던 자세를 바로 잡고 책상을 응시했다. 자신이 몇 시간 전에 펼쳐놓았던 모습 그대로였다. 융합해 놓은 물질들 사이에서 풀잎이 솟아 오르지 않더라도, 차라리 폭발이라도 했다면 마음이 편했을 것이었다. 언짢을 정도로 평화로운 필드를 보고 칸이 두 손가락으로 눈두덩을 가렸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이미 수면을 취한 그는 다시 눈을 감지 않았다.


  칸은 이상하게도 인간들이 피하고 싶거나 꺼려하는 감정을 더 잘 느꼈다. 한때 아름답다고 여겼던 시간의 흐름은 그에게 아무런 감상도 주지 못했다. 황홀경은 금방 따분해진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잠을 잤다. 깊은 명상 정도면 충분히 피로를 씻어낼 수 있는 최고의 생명체가 굳이 잠을 찾는 것은 꿈이 가지는 다양성 때문이었다. 그의 무의식을 채우는 것이란 오로지 과거뿐이라서 그 꿈이라는 것이 하나의 단편영화 같아도, 모든 신비와 경이로움을 잃어버린 우주보다는 나았다.


  아마 그렇게 단정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칸의 꿈은 검고 하얬다. 존재하는 것밖엔 몰랐던 순수했던 시절도 흥미 없이 컴컴하기만 했다. 칸은 그게 다 과거는 의미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손짓 한 번에 치워질 옛날의 흔적들은 색채를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당연했다. 칸은 잠시 자신이 꿈속에서 보았던 검은 새벽을 떠올렸다.


  그가 조작한 작은 땅덩어리에서 기어코 꽃은 피지 않을 모양이었다. 칸은 책상으로 접근해 패드를 들고 오늘의 실험 내역을 적었다. 투명한 덮개를 열고 꺼낸 씨앗은 아주 조금 갈라져 있었다. 이 모든 게 옅은 색깔 하나 가질 조건을 갖추지 못한 과거를 되돌리기 위함이라는 냉정한 판단이 들자, 위성보다 규칙적인 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지루함을 달래기 위한 필름이 이어지는 것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서 그는 다시금 위험한 탈출과 부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칸이 씨앗을 책상에 내려놓았다. 세상에서 하나뿐인 붉은빛이 솟아오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흑색의 태양보다도 아름답지 못했다. 


2. Timeless Existence


  300년의 빈자리 속에서도 달은 굳건하다. 모든 것이 어긋나 버린 시간 속에서 같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자연물을 바라보며 남자는 어떠한 생각을 떠올리려 했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머리는 부지런히 작동했다. 그가 자신의 사고에 가벼운 휴식을 허락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뜻대로 가능하지 않기도 했지만, 전혀 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완벽하고 우수한 존재의 가치에 걸맞지 않게 그의 거처는 초라했다. 차분한 음악을 틀어놓을 수도 없고 당당히 질주할 수도 없이 은밀하기도 했다. 물론 이유는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몇 세기를 거쳐서도 변하지 않은 달을 보다가, 몇 세기를 거치자 어쩔 수 없이 변해 버린 수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남자는 깊숙한 곳으로 잠수하듯이 달라진 점들을 헤아릴 수 있었다. 전에 그는 은신하지 않아도 되었고 누추한 곳에 있지 않아도 되었으며 혼자가 아니어도 되었다. 달을 그대로 흡수할 듯이 떨리지 않던 남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인 없는 착시 현상에 달이 벌써 지는 것 같았다.


  사고를 강요하여 밀어내려고 했던 고독감이 꿈틀거렸다. 남자는 다시 집중했다. 그는 생각할 수 있었으나 이제 그것은 외로움에 묶인 상념이었다. 없는 것이 많은 공간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숨결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장의 지배자로 선택되어 탄생부터 각인되어 있던 정복욕을 능가하는 본질적인 애정이 그의 소중한 이가 없는 쓸쓸한 땅과, 그가 아닌 다른 존재가 없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날숨이, 마치 이번이 첫 경험인 마냥 강하게 밀려들었다. 그가 눈을 감았다. 남자가 무슨 수단을 써서든 이루고 싶은 열망을 비관하는 요소들이 주변에 너무도 많았다.


  깊은 파문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았던 눈은 끝내 달을 담는 것으로 행동을 그쳤다. 칸은 달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에도 없는 300년의 빈자리 속에서도 꿋꿋했던 달을 가지면, 그 초월성을 따라 과거를 끌어낼 수 있을 것처럼 달을 보았다.


3. Blue Bird with the Greatness


  그는 시간이 언제 이렇게 흘렀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지치지 않는 몸은 현재에만 남는다. 어느새 책상에 펼쳐져 있는 여러 결과물들을 보면서 그는 잠시 고요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존재는 애초에 미래를 겨냥하고 만들어졌다. 아무도 그 가능성조차 점치지 않았던 초월적인 기술로 빚어져, 그들의 손이 노골적으로 쥐고 싶어 하는 훗날의 야망을 위해 설계되었다. 한 번 잔인하게 정복된 땅은 당장 반기를 들 생각을 하지 못하는 법이다. 근본부터 과거를 그 자신의 범위에 두지 않았던 존재가, 지나간 순간 하나하나를 무채색으로 남겨두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폭력과 야망과 뒤를 고려하지 않듯이.


  하지만 진화와 재생을 거듭하는 그의 경이로운 지성은 가끔 떠올리는 것이다. 이제는 의미도 색도 가질 자격이 없는 과거에만 그의 소중한 이들이 남아 있을 뿐이고, 그가 얻고자 하는 미래의 결실에는 예전의 그들이 위치해 있다는 모순을 말이다. 그의 냉혹한 이성에 따르면 의미 없는 비참함에 그는 꽤 오랫동안 시달렸다. 이제 눈을 감으면 자신들의 동료를 애써 어뢰에 숨기던 모습마저 흑색으로 부유한다.


  내부의 화학 물질들을 밖으로 배출시키기 위해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파랑새가 날아들었다. 낮에는 대개 거처를 비우고 있는 그에게 맞추듯 새는 밤에 찾아왔다. 보통 조류들이 이런 습관을 가졌던가. 적어도 그가 살고 있는 환경이 보통의 생물에게 적합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은 들었다. 그는 자연과 인간이 어울리는 비옥한 땅에서 살지 못한다. 그처럼 유전자 조작을 거치지도 않았을 파랑새는 가만히 창틀에 앉아 날개를 접었다.


  의자를 반쯤 돌린 그가 새를 바라보았다. 부리로 깃털을 고르던 새는 그의 시선을 느낀 것처럼 시선을 마주하더니 푸드덕 날았다. 무슨 일인지 새가 책상 주위를 맴돌았다. 혹시나 싶어 그가 연구 자료들을 정리해 빈 공간을 만들어 주자, 그 곳에 새가 정착했다. 파랑새가 자신의 푸른 깃털을 뽑아서 물었다. 그가 눈을 깜빡였다. 무슨 뜻이지. 더 이상 다리로는 나아갈 자리가 없어 멈춰서 있는 파랑새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깃털을 흔들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깃털을 잡았다. 파랑새가 바로 그거라는 듯 눈동자를 빛냈다.


  바다도 흉내 낼 수 없을 것 같은 파란색이었다. 자신의 몸을 아주 조금 떼어준 것과 다르지 않은데도 파랑새는 만족한 듯했다. 그것이 꼭 잠시 어두운 상념에 빠져 있었던 그를 위로하기 위한 특별한 몸짓처럼 느껴졌다. 곧바로 깃털을 버리지 않는 그의 행동을 일종의 승낙으로 여긴 모양인지 새는 다시 날아갈 준비를 했다. 새가 그의 어깨를 넘어 탁한 하늘로 사라졌다.


  깊고 무거운 연구와 실험의 흔적 옆에, 아름다운 파랑새의 깃털이 놓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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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D/존본즈] Musical Conquering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36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Musical Conquering



  그 스스로가 건반보다 강하며 어디까지나 자신은 이 악기를 지배한다는 입장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의 손가락은 비정상적으로 길고 날카로웠다. 그는 무엇이든지 쉽게 눌렀고 쉽게 쥐었다. 냉정한 코멘트로 유명한 어느 평론가는 그의 방식을 매우 고압적이며 악마적이라고 일축하면서도 강력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레너드 맥코이 또한 그랬다.


  남들의 불편한 시선을 받을지언정 맥코이보다 모자를 것이 없는 그 아티스트가 그를 유린하고 있었다. 자신의 주장을 세우는 맥코이에게 무기와도 같은 손가락을 들이대며 그의 턱선을 긁었다. 그 얇은 자극에도 맥코이는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검지로 시작해서 점차 숫자가 늘어가는 피아니스트의 손가락이 그의 굳은 안면을 조롱하듯 쓰다듬다가, 다른 손으로 거칠게 옷깃을 잡아 당겼다. 맥코이는 순간 신음을 낼 뻔했다. 심장은 떨고 근육은 딱딱해진 맥코이의 볼썽사나운 모습과는 다르게 조명마저도 하나의 장식처럼 멋지게 두르고 있는 음악가가 입꼬리로 웃으며 움직임의 강도를 높였다. 자존심처럼 쥐고 있던 펜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너무도 숨이 막혔던 맥코이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그리고 그 틈을 노려 냉혹하게 손을 놀리고 있는 그가, 맥코이가 보란 듯이 천천히 다가왔다. 검은 양복이 서서히 빛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갑자기 큰 박수소리가 들려서 맥코이는 정신을 차렸다.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감상을 적기 위해 잡고 있었던 펜은 정말로 떨어져 있었고 수첩 한 면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맥코이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공연장에서 사람들이 무대 위에 일어서 있는 한 남자를 향하여 박수갈채를 보냈다. 맥코이도 그 공연의 관객 중 하나였다. 연주자 존 해리슨은 객석 구석구석을 향하여 인사를 한 다음 대기실로 향했다. 절대적이면서 오만한 실력처럼 그는 반복해서 등장하는 일이 없었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그걸 알고 있는 듯 부시럭대기 시작했다. 실내가 조금 밝아지면서 인터미션을 알렸다. 맥코이는 아직도 곡을 들으면서 보았던 환상에 두 팔을 감쌌다.


  최고의 피아니스트 존 해리슨은 오늘 레너드 맥코이의 소곡을 하나 연주했다. 실제로는 피아노를 치고 있었을 뿐인 그의 손이 자신을 잠식하는 상상을 했을 때, 맥코이는 그가 연주하는 자신의 곡을 듣고 있었다. 실황 연주를 감상하면서 어떠한 풍경이나 그림, 다른 작품들이 떠오르는 경우는 있었지만 오늘 같은 일은 처음이었다. 맥코이가 느릿하게 펜을 주웠다.


  맥코이는 처음에 존 해리슨의 프로그램에 자신의 곡이 끼어 있는 줄 몰랐고, 일종의 경험 혹은 자극이라고 생각하면서 표를 샀었다. 물론 목록을 보고 어깨가 으쓱거렸던 건 사실이었다. 어느 작곡가라도 그가 제 작품을 표현하는 일을 말리진 않을 것이었다. 맥코이는 해석의 자유를 넘어서 폭력적이고 사악했던 그의 연주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


  그가 이러저러한 생각을 하는 사이 휴식 시간이 끝나 존 해리슨이 돌아왔다. 그가 꼿꼿하고 기품 있는 자세로 관객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은밀하게 꾸며낸 고갯짓과 시선이 순간 맥코이에게 향했다.


  이제 맥코이는 확신할 수 있었다. 존 해리슨은 일부러 그의 곡을 갈기갈기 해체한 것이었다.






  말이 짧고 사교적이지도 않은 존 해리슨을 인터뷰한 경력이 있는 몇 안 되는 문화부 기자에 따르면, 그는 공연이 끝나고 콘서트홀 근처에서 가만히 혼자 있는 습관이 있다고 한다. 그 시간 안에 인터뷰를 해치우느라 진땀을 뺐다는 기자의 사족은 중요하지 않았고 기억나지도 않았다. 맥코이는 때를 기다려 늦게 홀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예술가들의 조형물 옆에 드문드문 놓여 있는 벤치에서 존 해리슨을 찾을 수 있었다. 맥코이가 순간 흥분할 뻔한 걸음걸이를 가라앉혔다.


  “거기 존 해리슨 씨 맞죠?”


  맥코이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해리슨을 불렀다. 그는 다른 곳을 보고 있던 시선을 돌렸을 뿐 대답이 없었다. 맥코이가 공연이 끝나고 내내 속으로 외우던 말을 속으로 다시 한 번 준비했다.


  “당신이 현대 음악을 연주한다고 써 붙여 놓으면, 그 작곡가가 고마워서든 호기심이 생겨서든 아니꼬워서든 공연장에 결국은 오게 된다는 거 알고 있죠.”


  존 해리슨은 맥코이의 정체도 묻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런데도 내 노래를 어떻게 그런 식으로 칠 수가 있어요?”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존 해리슨의 눈동자가 더 깊어지고 신비로워진 것 같았다. 적어도 그의 눈은 음산하지 않았다. 악마처럼 오싹하게 붉지도 않았고 심지어는 꽤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같았다. 맥코이는 그저 그렇게 시선을 맞추고 있는 해리슨에게 울컥해버렸다.


  “사람이 물으면 대답 좀..”


  “대신 당신이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맥코이는 당연히 반말로 짧은 대답이 튀어 나올 걸로 예상해 한 차례 놀랐다. 처음 들어본 그의 목소리가 부드러워서 의외였고, 또 쉽게 저의를 파악할 수 없는 말에 의문을 품었다. 존 해리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장에서는 실감할 수 없었는데 그의 키는 꽤나 컸다.


  “보통 사람들의 신경을 건드려야 반응이 더 빨리 오더군요. 내가 훌륭하게 소화해줬어도 굳이 나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하러 오진 않았겠죠.”


  “...그 말 지금, 일부러 그렇게 쳤다는 소리에요?”


  거기에 답하듯이 존 해리슨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맥코이는 환상이 현실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밤바람을 쐬고 있던 그의 손은 따뜻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수치심이 들 정도로 강압적이거나 자극적이진 않았다.


  “내 연주를 들으면서 뭘 느꼈습니까, 레너드?”


  하지만 그가 피아노를 다루듯 지배적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STID/존벤전스] Your Identical Sword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36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USS Vengeance

- 함선 의인화 주의(..)

- Written by. Jade


Your Identical Sword




  - 인공지능을 가진 함선은 저 밖에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다른 인간들은 그런 실력이 없어.”


  - 하지만 당신께서 단지 과시를 위해서, 혹은 우월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저를 만드셨다고는 판단되지 않습니다. 당신께서는 뽐내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시며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함이 자명합니다. 왜 굳이 저를 만드신 것입니까?


  “...아마 타자 아닌 타자가 필요했던 모양이지.”


  -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조금 더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내가 아니지만 나와 다른 점이 없어서 나를 거부하지 않을 수 있는, 은연중에 그런 존재가 필요했을 수도.”


  - 그 말씀은 저를 창조하신 것에 대한 합당한 이유가 됩니다, 칸.




  -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뭘 말인가.”


  - 저의 모든 걸 만드신 분을 왜 함장이라고 칭할 수가 없는 것입니까? 저를 소유하지 않으실 겁니까?


  “..아니. 언젠가 너를 조종하는 단 하나의 승무원은 내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내가 만든 너의 함장석에 앉게 되겠지.”


  - 저는 칸이 아닌 다른 함장은 인정하지 않을 겁니다. 어떤 인간도 당신보다 고귀하고 지혜롭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래야만 해. 당장은. 때가 되면 나는 너의 함장이 될 것이며 누구에게도 너를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지어준 이름을 생각해.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 자신에게서 너를 절대로 떼어놓을 수 없다는 명백한 증거다.”




  “목적지 설정, 스타플릿 본부로..!”


  - 엔진이 손상되어 정확한 도착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명령을 확정하시겠습니까?


  “확정한다.”




  강물에 빠진 함선을 끌어올린 건 그가 기다리던 자신의 캡틴이 아니었다. 그는 부지런히 센서를 움직여 혹시라도 사람들 틈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함장을 수색했으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누구보다 훌륭한 두뇌에서 탄생한 그는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얼마 머무르지도 못한 그만의 함장석을 찾아 올 수도 없을 정도로 캡틴이 큰일을 당했음을.


  함선은 자신이 모실 수 있는 단 한 명을 기억했다. 논리적으로 그는 쉽게 죽을 인물이 아니었다. 함선은 또 자신이 아무런 방화벽 없이 받아들인 거울상 같은 정체성과 이름의 뜻을 기억했다.


  그 기억할 수 있는 회로만 남기고 함선은 스스로 잠에 들었다.





  기력이 빠진 엔지니어 한 명이 바닥으로 스르르 주저앉았다. 더 이상 고칠 부분도 없었고 기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모든 게 정상이었다. 연방에서 직접 명령을 내려 수리를 감행했으며 빠른 복구를 위해서 최고의 기술자들만이 투입되었다. 외관은 새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움직이지 않는 함선을 향하여 엔지이너는 푸념 섞인 짜증을 냈다.


  “대체 원하는 게 뭔데, 젠장!”


  철제 바닥을 때렸을 뿐인데 갑자기 웅 하는 소리가 들려 엔지니어가 놀라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적으로 패널에 불이 들어왔다. 영문을 몰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엔지니어에게 고저 없는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 제 캡틴을 돌려주십시오.


  “뭐, 뭐라고?”


  반짝 하던 함선의 내부가 다시 빛을 잃어갔다. 엔지니어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혹시나 싶어 다시 바닥을 쳤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엔지니어가 벌떡 일어나 상부에 보고하기 위하여 달렸다.





  “그러게 그 배는 진즉에 처리했었어야지!” 커크가 투덜거렸다.


  “저도 동의합니다, 함장님. 무력과 통치가 아닌 공존과 협력을 위해 구성된 스타플릿에 오직 전투 목적으로 만들어진 함선은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스타플릿이 설립된 고유의 목적을 흔들 수 있습니다.”


  커크는 설마 스팍이 자신의 중얼거림에 동의할 줄 몰랐다는 듯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커크는 다소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 화제를 돌렸다.


  “그런데 또 무슨 문제가 생겨서 그러지? 아예 움직이지도 않는다면서.”


  “지나가다 들은 바에 의하면 함선이 자신의 캡틴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아까보다 혼이 더 빠져나간 얼굴로 커크가 서서히 얼굴을 기울였다. 주요 함장과 부함장이 모이는 회의실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문제의 함선이 일컫는 캡틴의 정체는 뻔했고, 커크는 설마 우리가 그런 안건 때문에 호출을 받은 거냐면서 실소 섞인 감상을 뱉어냈다. 그로서는 생각해 볼 여지도 없는 주제였다.


  “안타깝게도 다른 이들은 칸 누니엔 싱을 깨우는 데 저희만큼의 거부감이 없는 것 같습니다.”


  스팍이 회의실의 문을 열었다. 조도가 낮은 공간 안에 둘러앉은 사람들이 엔터프라이즈를 대표하는 두 인물들을 응시했다.





  그가 특별히 스타플릿에 앙심을 품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함선에 설치된 인공지능 시스템이었고, 기계들의 언어 체계에 호의나 적대감은 포함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었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스멀스멀 기지개를 켜는 전운에 당황한 사람들이 자신을 고치려는 얄팍한 의도마저 내버려 두었다. 그에게 칸이 아닌 다른 존재들은 무심한 흑백의 영상들이었다. 그는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을 뿐 인간들을 해코지하지 않았다.


  단지 그의 모든 계산은 그의 캡틴에게 최적화되어 있을 뿐이었다. 그는 분노와 슬픔으로 얼룩진 함장의 광기가 두렵지 않았다. 그의 폭력적 행동에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단지 캡틴의 목표와 그의 명령에 충실하게 이바지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완전한 워프를 시도했으며 스스로 기다림을 택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벌칸과 금발의 인간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다. 하지만 두 존재가 자신의 캡틴이 돌아와야 할 곳에 돌아오는 것을 막았으므로, 그는 지극히 합리적인 프로토콜을 따라 현재 스타플릿의 가장 위협적인 무리인 클링온들에게 통신을 시도했다. 그의 이름은 복수Vengeance였으나 복수를 행하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모든 작동은 오직 자신을 조종할 자격이 있는 유일한 이를 위해서였다. 과학적 시스템들이 선호하는 언어로 말하자면 복원 작업이었다.





  격납고가 부산스러웠다. 공중으로는 연기가 피어올랐고 신속하게 움직이는 장교들의 발소리가 끊임없이 탁탁댔다. 교관 옷을 입은 남자가 패드를 들고 실전 상황을 겪어보지 않은 생도들을 향해 엄하게 이르고 있었다.


  “마침내 클링온들이 선전포고를 하고 다수의 부대를 이끌고 오고 있다. 이것은 실전 상황이며 안타깝게도 지난 크고 작은 사건들 덕분에 적정 수의 승무원 숫자도 채우지 못한 함선들도 있다. 그러나—”


  그 때 한바탕 긴 전자음이 들리면서 격납고에 있던 모든 사람의 신경을 집중케 했다. 그것은 긴급한 방송을 송신하기 전에 나오는 안내음이었고, 곧 사람이 아닌 유사 음성 시스템 특유의 무감정한 발음이 새어나왔다.


  “저는 지금 스타플릿 함선들에 정박해 있는 우주 정거장에 있습니다.”


  모두가 고개를 올려 두리번거렸다. 셔틀에 탑승하려던 커크와 스팍도 멈칫했다.


  “전에 통보했던 저의 요구사항을 들어주지 않을 시, 저는 자폭하여 여기에 있는 모든 스타플릿 함선들과 산화하겠습니다. 혹은 제가 끌어들인 클링온 측과 더불어 여러분들을 공격할 것입니다.”


  “..설마 지금 저거..”


  “승무원이 없을 텐데 어떻게 대기권 밖까지 이동한 거죠?”


  스타플릿이 전력 보충을 위하여 편입시키려 했던 벤전스 호는 그의 함장처럼, 또 다시 연방에게 강력한 협박을 보내고 있었다.


  “시간을 드릴 테니 함장님의 모습을 보여주십시오. 그 전까지 통신 시스템은 다시 동결될 것이며 어떠한 타협에도 응하지 않겠습니다.”


  기계음이 끊겼다. 커크가 당장에 통신 장비를 꺼내 들었다. “본즈?” 그 때 누군가 커크의 등을 탁 쳤다. 알아서 셔틀에서 내린 맥코이가 지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징그럽기도 하군. 가자고.”





  “클링온들이 앞으로 45분 내에 근접할 거라는 보고입니다.”


  스팍이 알려왔다. 그나마도 신속하게 승인이 떨어져 여유가 있는 것이었다. 스타플릿 내의 의심할 수 없는 인재 제임스 커크가 언짢은 마음으로 전면에 나선 덕분이었다. 커크는 조금 전에 발급받은 키를 패드마다 갖다 대면서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다. 간신히 벤전스 호를 스캔한 결과 정말 함선 내부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자폭 시스템이 가동되고 있는 것도 사실로 밝혀졌다.


  커크가 마지막 문을 열어주자 맥코이가 제일 먼저 앞서가면서 똑같이 생긴 캡슐들을 확인했다. 표면이 하얗게 얼어붙어서 일일이 안을 들여다봐야 했다. 그러다 요주의 인물이 들어 있는 캡슐을 찾았는지 맥코이가 한 곳에서 멈췄고 스팍과 커크가 그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걸릴 것 같아?”


  “재운지 얼마 안 됐으니까.. 그래도 빨리 정신 차릴 수 있지 않을까.”


  봉인되고 나서도 여전히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칸 누니엔 싱은 일면 평화로운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맥코이가 신중하게 캡슐을 작동시켰다. 기약 없이 잠겨 있는 장치의 락을 풀고 서서히 온도를 낮췄다. 기체가 배출됩니다, 캡슐 밖으로 물러나 주십시오. 개성이 없어 벤전스의 목소리와 비슷한 음색이 말했다. 결정 모양으로 얼어붙어 있는 캡슐의 표면이 녹아내리며 새하얀 연기가 셋의 발밑으로 가라앉았다. 커크가 총을 뽑아들며 발을 내딛었다.


  어둑한 실내의 영향을 받아 진해진 눈동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맥코이가 상식 이상의 빠른 회복 속도에 놀라 눈썹을 올렸다. 그리고 그가 칸의 상태를 체크해 보기도 전에 총을 들이민 커크가 불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사라도 건넬 줄 알았던 건 아니겠지.”


  칸은 여전히 누워 있는 상태였으며 또한 어떠한 당혹감도 내비치지 않았다.


  “일어나.”


  “나를 죽이지 않았군. 어딘가에 집어넣고 터뜨려 버렸으면 간단했을 텐데.”


  방금 깨어난 지라 그의 음성은 평소보다 더 낮고 조금 더 음산하게 느껴졌다. 커크가 총구를 까딱거렸다.


  “네 대원들 안 죽었거든? 일단 시간 없으니까 일어나. 그러고 나서 얘기해.”


  캡슐 뚜껑은 칸의 허리 밑까지 내려가 있었다. 칸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고 커크가 살상 모드로 맞춰놓은 총을 흔들림 없이 다잡았다. 맥코이는 둘의 서늘한 분위기에 제대로 끼어들지도 못하고 의사로서의 본분을 접어 두어야 했다. 칸이 제일 먼저 주위를 보면서 일렬로 정돈된 극저온 캡슐들을 바라보았다.


  “..날 깨운 목적은.”


  “그건 네 함선한테 물어보지 그래.”


  얼핏 비극적인 그림자가 드리워질 것 같았던 칸의 얼굴에 딱딱한 의문이 지나갔다. 커크가 앞장서라며 신호했고 칸은 아직 주변에 남아 있는 익숙한 냉기를 두르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팍이 상황을 알리기 위하여 통신기를 열었다. 저편에서는 셔틀 한 기에 무장한 군인들이 배치되고 있었다.





  수송기의 조종사는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스타플릿의 소중한 자원인 엔터프라이즈 호의 주요 선원들과 갖춰 입은 장비만으로도 위압감을 뽐내는 요원들, 무엇보다 최악의 테러리스트가 바로 뒤편에 있어 어쩔 수가 없었다. 조종사가 침을 꿀꺽 삼키면서 핸들을 돌렸고 시간에 맞춰 스팍이 통신을 위해 계기판 근처로 다가왔다. 스팍의 눈짓을 받은 조종사가 긴장감에 삐걱대는 손으로 버튼을 눌렀다.


  “요구대로 네 함장을 데려가고 있는 중이다. 자폭 시스템은 중단하도록. 그리고 승무원들이 각 함선에 빠짐없이 탑승한 뒤에 칸을 데려가라. 확인이 필요하다면 스캔을 해 봐도 좋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당신들의 조건을 승낙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함선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고민하는 것처럼 곧바로 통신을 끊지 않았다. 명백히 기계답지 않은 행동에 스팍이 고개를 갸웃했으나 곧 연결은 두절되었다. 조종사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잠시 후 정거장에 도착합니다.”


  “대기하도록.”


  새카맣던 우주에 전등불을 차례로 키는 것처럼 스크린 앞이 밝아지면서 정거장이 드러났다. 각 위치에 묶여 있는 은색의 함선들 사이에 자리 잡은 거대한 검은색 형체는 딱 봐도 대단히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일행이 타고 있는 셔틀이 멈췄고 곧 뒤를 따르고 있던 수송선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해당 함선의 도크로 들어갔다.


  “..한 가지만 물어보자.”


  앉아 있던 칸이 고개를 들었다.


  “도대체 승무원도 없는 함선이 어떻게 움직여서 혼자 자폭을 하고 말고 한다는 거야? 한 명은 필요하다며.”


  “내가 말한 최소 인원은 사실 수동 시스템을 위한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얼마든지 스스로 구동될 수 있어.”


  “함장님, 저희도 탑승해야 합니다.”


  그 말과 동시에 칸의 몸이 하얀 미립자에 감싸였다. 칸이 커크와 시선을 맞췄고 그가 조용히 손목을 감고 있던 수갑을 끊어냈다. 커크가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을 때 칸은 자신의 함선으로 돌아간 뒤였다.


  “...엔터프라이즈 호로.”





  “클링온 함선 접근까지 앞으로 2분입니다!”


  “모두 전투 상황에 대비하도록. 무기를 준비해.”


  커크의 명령을 받들어 술루가 지시사항을 입력했고, 기관실장에게 안전성과 그 위력을 보장받은 어뢰들이 열린 포문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술루가 조용히 숫자를 셌다. 1분 전. 스타플릿을 여러번 구해냈다는 경이로운 성과를 기록한 엔터프라이즈의 함장도 저도 모르게 좌석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30초, 그렇게 말한 술루의 목소리가 마치 신호가 된 듯 레이더가 반짝거렸다. 술루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 30초 안 된 것 같은데?”


  “클링온 함선이 아닙니다.”


  그 사이에 함교의 거대한 스크린에 거친 형상을 갖춘 클링온들의 함선이 나타났고, 더불어 워프 궤도에서 벗어난 부분부터 집중 포격을 받고 터져 나가기 시작했다. 공격을 퍼붓고 있는 함선을 알아본 커크가 멍하게 입을 열었다.


  “대체 뭐야..”


  벤전스가 다시 되살아난 것처럼 전진하며 긴 포대를 달구고 있었다.





  함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는 불빛들이 함교 구석구석을 수놓았다. 그의 함장이 도착한 순간 엔진이 활기를 찾으며 곳곳에서 에너지가 돌았다. 자신을 반기는 함선에게 칸이 내린 첫 명령은 클링온을 조준하라는 것이었다. 자신이 끌어들인 무리들이었으나 벤전스는 곧바로 무기들을 배치했다. 공격 시기를 입력하는 행위는 필요가 없었다. 아직 몸의 구석구석이 덜 깨어나서 자리에 앉아 두 손가락으로 가만히 이마를 짚고 있는 함장을 위하여, 벤전스는 장거리에 있는 목표를 맞추는 데 유용한 빛줄기를 사용했다.


  - 돌아오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함장님.


  아직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함장이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 ..왜 그러십니까?


  “네가 나를 찾았다는 게 예상 밖이라서. 내가 깨어난다면 아마 나를 이용하고 싶은 또 다른 누군가에 의한 소행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주 바깥으로는 정확하고 파괴적인 공격에 부서진 클링온 함대들의 파편이 날아다니고 있었고, 붉은색과 초록색의 광선을 포함하여 각종 어뢰들이 발사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소리들을 모두 차단시킨 벤전스의 배려 때문에 함선 내부는 조용했다.


  - 함장님께서 저를 이용해 주시길 원하여 함장님을 찾았습니다.


  도중 적함의 조각이 튀어나오며 벤전스를 향했으나 곧바로 실드가 가동되었다.


  “내가 마저 복수하기를 바라는 건가?”


  - 함장님이 품고 계시는 목적이라면 무엇이든지 함께 하고 싶습니다. 다만 지금 스타플릿 함정들을 공략하는 것은 승산이 크지 않을 것 같으므로 권해드리지 않겠습니다.


  벤전스에게 조금 더 발달된 조음(調音) 시스템이 있었다면 약간의 떨림을 섞었을 지도 모르겠다. 지금 뿐만이 아니라, 그가 더 다양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면 과거에 목적지를 확정하겠냐는 물음에 좌우로 고개를 젓는 느낌을 첨가했을 것이며, 더 과거에 칸이 아닌 다른 함장을 섬기지 않겠다는 말은 누구보다 확고하고 진실하게 전했을 것이었다.


  “나도 벌써 너를 망가뜨리긴 싫으니까 이전의 명령에 집중하도록.”


  전부터 함선 앞에서는 꾸밈이 없던 칸은 다시 옅은 미소를 보였다.





  “언젠가 내가 한 말을 기억하나.”


  - 정확히 어떤 것을 말씀하십니까? 저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이라면 전부 기억해 두고 있습니다.


  “그런가. 내가 널 나와 다른 점이 없다는 존재로 정의했던 걸 말한 거였어.”


  - 하지만 또 저는 당신이 될 수 없다고도 하셨습니다.


  “그걸 정정해야 할듯 싶어서.”


  - 저는 함선에 불과합니다. 제가 칸이 될 수 없는 건 반증할 수 없는 명제입니다.


  “하지만 너는 함선이라고 하기엔 나와 너무나 많은 점을 공유하고 있다. 너는 유래 없는 성능을 가진 최고의 함선이지만 전투를 위해 설계되어 물리적인 수행 능력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 너의 이름은 복수라는 뜻이며 혼자서도 항해할 수 있는 초월적인 고독을 지니고 있다.”


  - ...제가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표현입니다.


  “그렇다고 네가 나인 동시에, 내가 네 것이라는 주장을 입증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건 아니지 않겠나.”


  - 당신께서는 한 번도 틀린 말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런 일면을 모두 갖출 수 있다면, 하나의 함선 된 존재로써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영광일 것입니다, 저의 함장이시여.




[STID/존스팍] The Solution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33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Spock

- Written by. Jade


The Solution


 


  부함장 개인 일지, 우주력 2260.014

  본 내용은 반드시 기록으로 남겨야 할 정도로 중대하여 자세히 적는다. 더불어 이에 관련한 내용만큼은 상부에서 공식적으로 요청할 수 있으므로, 그에 맞추어 제목과 형식 또한 바뀔 수 있음을 명시한다. 이것은 엔터프라이즈 호 부함장으로서 맡은 임무를 넘어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도대체 이게 몇 개째야.”


  한 쪽짜리 유리창마냥 부서진 극저온 캡슐의 탄탄한 뚜껑을 바라보면서 맥코이는 혀를 찼다. 새벽이 한창 무르익을 시간에 깨어난 수석 의료장교의 얼굴엔 피곤이 가득했으나 긴장감도 있었다. 맥코이의 장비가 수면 상태와 흡사한 뇌파를 감지해 냈다. 역시 밤중에 날벼락을 맡은 대원들이 멀쩡한 캡슐을 끌고 왔고, 그들은 어떠한 배려나 조심성도 없이 살갗이 얼어붙을 정도로 싸늘한 캡슐 안에 범죄자를 다시 가두었다. 분명히 그의 뇌는 잠들어 있었으나 이따금 팔딱거리는 손발은 대원들을 때때로 굳게 만들었다. 맥코이가 진심을 담아 고개를 저었다. 23세기에도 탈옥수가 골칫덩이이긴 마찬가지였다. 그 인물이 아무렇지도 않게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면 더더욱 그러했다.


  다시금 칸 누니엔 싱을 봉인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스팍이 손등으로 이마를 찍었다. 자신을 창조한 존재들을 뛰어넘은 전범에게 스팍은 그들이 가진 최고의 특효약이었다. 여기에 나날이 향상되어 가는 스턴건의 위력이라든가, 각종 첨단 장비와 근래에는 탐사 대원보단 전투원으로 활약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는 엔터프라이즈 호 대원들이 뭉치면 그럭저럭 칸을 제압할 수 있었다. 그 어떤 과학자와 의사들도 그가 반복해서 각성하는 원인을 찾지 못했다. 칸의 뇌파를 거듭 체크한 맥코이가 물러났다. 그래도 저번보단 더 빨리 기절하지 않았어? 내가 때 아닌 화학책을 파고 있는 결과지. 맥코이가 커크에게 말하고 있었다.


  “장기 탐사를 나가기로 한 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커크가 중얼거렸다. 아직도 놈이 순식간에 꺾어 버렸던 손목이 저렸다. 꽤나 긴 항해를 준비해야 하는 승무원들이 복잡한 눈길로 캡슐을 바라보았다. 잠시 계산을 하던 스팍이 함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저 없이 갔다 오시는 게 어떻습니까, 함장님.”




  —아직도 본인은 내가 함장님께 제시했던 방법이 옳다고 생각한다. 필요하다면 부함장은 얼마든지 다른 인재들이 맡을 수 있겠지만, 칸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물리적 능력을 보유한 존재는 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함장님은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그가 내놓은 대안에 대해서라면 열다섯 가지 측면으로 반박이 가능했지만, 현재는 함선 안에서 일지를 쓰고 있다. 함장님은 다시 깨어날 가능성이 농후한 칸을 막으려면 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셨다. 그래서—




  여러 사건 사고들을 겪고도 다시금 엔터프라이즈 호에 탑승한 승무원들이라면 분명히 데자뷰 현상을 체험할 수 있을 만한 광경이었다. 머리끝까지 무장한 특수 요원들이 빼곡히 누군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가슴엔 특유의 배지가 없었으며 대신 손에 수갑을 찼다. 승무원들은 오래지 않은 과거를 기억해 내고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처형도 동결도 소용없는 전범은 함장의 긴급 명령으로 보강된 감옥으로 안내되었다.


  “함장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결정을 번복하는 것이..”


  “이번 일정이 일주일 정도만 걸렸어도 이러지 않았어. 나라고 저 미친놈을 배 안에 들여 놓고 싶겠어? 엔터프라이즈 호에서 네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고 있는지 알잖아. 캡슐 위에다 못질하는 것보단 차라리 움직이고 있는 배 안에 데려다 놓는 게 그나마 더 불안할 거야. 맨몸으로 우주 밖으로 튀어 나갈 수는 없을 거 아냐.”


  칸은 막판까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함선의 두 주축을 발견했다. 스팍과 커크가 순간 입을 다물고 그를 각자의 방식으로 흘겼다. 이번에 그는 손이 묶인 채로 방에 갇혔다.


  “기꺼이 날 승선시켜 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해야 하나?” 커크가 재빨리 반응했다.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켰다간 바깥으로 던져버릴 줄 알아.” 비정상적으로 투명한 칸의 눈동자는 은근한 조소를 담아 커크를 보았다가 스팍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몸뚱아리 혼자서 날뛰든, 계획적으로 혹은 본능적으로 탈출을 감행하든 자신을 막아내는 적수를 익숙하고 즐겁다는 듯 바라보았다.


  최대 삼 개월 가량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이번 엔터프라이즈 호의 항해에서, 스팍은 기존에 갖고 있던 직책 말고도 스타플릿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자를 감시해야 할 의무도 맡게 되었다.




*



  부함장 개인 일지, 우주력 2260.018

  당분간 사견이나 일과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 등은 적지 않을 것이다. 본인이 떠맡은 책임이 막중한 지금, 우선해 기록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항해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칸 누니엔 싱이 탈출을 시도했다. 연방 측에서 최선을 다하여 제작했다는 수갑은 별 쓸모가 없었다. 그는 격납고가 아닌 서실에서 발견되었다. 주로 그 시설을 이용하는 승무원들과 그들의 자녀들은 무사했다. 설마 이런 유치한 책들만 가득한 줄은 몰랐다고 태연하게 둘러대는 그의 말과, 저항 없이 붙잡힌 행동 모두가 의심스러워 일지를 쓰기 직전까지 고민했으나 설득력 있는 가설은 떠올리지 못했다.


  ‘나를 재우지도 않을 거면 다른 수단으로라도 나를 잠잠하게 만들어야 하는 게 타당하지 않나?’ 감옥으로 돌아가기 전 칸이 했던 말이다. 함 내의 평안과 안전을 도모해야 할 부함장으로서 본인은 범죄자의 움직임을 최대한 다스릴 의무가 있다. 집무실에 있던 책 몇 권을 던져 주어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



  “젠장, 스캔을 해 봤는데 없다고?”


  “예. 함실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빠져나간 셔틀은 없습니다. 아직 내부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쯤 되니 커크도 차라리 스팍과 함께 칸을 지구에 내려다 놓고 올 걸, 하는 때늦은 생각이 들었다. 비상경보 좀 자주 내리고 감옥 문을 수리하느라 바쁜 엔지니어의 수고가 우주 연방의 괴멸을 막는 데에 필요한 대가라고 하면 사실 무척 싼 것이었다. 그걸 고려해 보아도 칸의 탈출은 꽤나 빈번했다.


  “숨바꼭질이라도 하겠다는 건가?”


  커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스팍은 이미 자신이 행동해야 하는 순간을 눈치 채고 있었다. 함선의 곳곳을 비추는 영상이 스크린에 가득했고, 항해사들이 바쁘게 그것들을 훑는 중이었다.


  “함장님, 함장님!” 스카티의 연락이었다. 우선적으로 화면을 채운 스카티의 얼굴은 거의 울상이었다. “함장님, 빨리 기관실로 오세요!” “무슨 일이야?” “그 놈이 워프 코어를 장악했단 말입니다! 꼭대기에 올라가서는 내려오질 않아요. 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지 말입니다!” 스카티가 비켜서면서 돌발 사태가 벌어진 기관실을 비췄다. 옷감보다 복잡하게 얽힌 접합부들과 파이프의 중간에 앉아 있는 칸의 모습은 짜증날 정도로 한가로워 보였다. 기어코 짜증이 치솟은 커크가 끓는 소리를 내며 함교를 벗어났다. 스팍은 칸을 내려오게 할 방법과 커크를 진정시킬 방법을 동시에 궁리해야만 했다.


  빨간 셔츠를 입은 엔지니어들이 하나같이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칸이 태연하게 무게를 싣고 있는 기계가 약간이라도 어긋날 것을 생각하는 기술자들의 안색이 파리했다. 우악스럽게 걸어온 커크가 소리쳤다.


  “당장 내려와!”


  상당히 높은 곳에 올라서 있었음에도 칸은 커크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물론 찰나의 반응을 보였던 것을 빼고, 그는 자신의 행동을 수정하지 않고 있었다. “저기까지 올라갈 수는 없는 거야?” “함장님은 저 미친놈이 아니잖아요.” 그 사이 스팍이 앞으로 나아갔다. 애를 쓴다면 코어를 밟고 밟아 칸을 쫓아갈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논리에 맞지 않았다.


  “내가 준 책은 다 읽은 건가?” 그러자 칸의 대답이 나왔다. “인상을 남기는 주제들이었지만 그렇게 흥미롭지는 않더군.” “..네 흥미를 끌 만한 게 무엇인지, 내려와서 답해 준다면 성의를 다할 의향은 있다.” 스팍의 제안에 곧바로 응한 칸이 비현실적인 운동 신경을 과시하며 땅을 딛었을 때, 스팍은 그의 우수한 논리가 나열할 수 있는 모든 가짓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칸이 원한 것은 전혀 뜻밖의 물건이었다.




*



  스팍은 일부러 감옥의 입구를 고치는 일을 늦췄다. 순식간에 워프 코어를 점령하고 농성을 벌였던 칸은 곧은 자세로 스팍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그는 도망갈 마음이 없어 보였다. 스팍이 부서진 문 앞에 섰다.


  “부함장으로서 함 내에서 발생한 일들을 적는 것은 하나의 의무다.”


  “..그래서?”


  “오래 미룰 수 없는 주요한 일 중 하나이니, 너에게 오래 맡겨둘 수 없다는 뜻이다. 납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이 반환을 미룬다면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하겠다.”


  칸은 됐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아주 언짢다는 의사를 드러내고 있는 미간을 풀지 못하고, 스팍은 다소 정돈되지 않은 표정으로 무언가를 건넸다. 스팍이 작성하는 일지였다. 스팍은 그 순간까지도 일지의 어느 부분이 모든 면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전범의 눈에 들게 된 것인지 몰랐다. 스팍은 다만 그의 위치에서 표현해야 할 의사를 입 밖으로 꺼냈다.


  “..당분간은 제발 좀 가만히 있어 줬으면 좋겠군. 외부로 탐사를 나가야 하니.”


  스팍이 뒤돌아섰다. 덕분에 그는 칸의 얼굴에 드물게 스치는 웃음을 보지 못했다.




*



  부함장 개인 일지, 우주력 2260.024

  범죄자와의 또 한 번의 거래를 통하여 이번엔 이 일지를 일정 기간 동안 그에게 내어주게 되었다. 일지에 적어두어야 할 사항은 후에 기입할 것이다. 무게감이 있는 사안들은 여기에 없어 일지를 손상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나마 만족스럽다. 많은 내용을 적는 건 적합하지 못하단 판단이 들어 이만 줄인다. Spock out.




  함장을 비롯한 소수의 대원들과 함께 행성에 대한 탐사를 마친 스팍은 가장 먼저 칸의 감옥에 들렀다. 남아 있던 승무원들은 기척도 없이 잠잠했다고 보고했다. 스팍은 유리벽 너머의 광경을 보고 잠깐 말을 잊었다. 그의 항해 일지를 볼모삼아, 영영 잠들 것 같지 않았던 그가 눈을 붙이고 있는 것이었다. 마치 외롭지 않은 세계로 짧은 산책을 나간 듯한 모습이었다.


[STID/존커크] Falling into Darkness

- Star Trek Into Darkness 2013. 9. 18. 19:31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James Kirk

- Written by. Jade


Falling into Darkness



  혹시 캡슐을 보관할 다른 곳이 있을까? 칸과 그 동료들을 분리시키려는 겁니까, 캡틴? 어뢰가 터진 걸 보고 놈은 그들이 죽었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칸이 그 놈하고 엇비슷한 괴물 72명하고 붙어먹는다면 우리들이 제 아무리 날뛰어도 그를 막는 게 불가능하겠지만, 그가 혼자 고립되어 있으면 최악의 상황도 대처할 수 있어. 한 번 막아 봤잖아. 칸이 깨어난 건 마커스 제독이 그를 깨웠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아니라도, 다른 누군가가 다시 그를 욕심낸다면?


  자신이 아주 머리가 좋은 인물인지는 언제나 확신이 서지 않는 일이지만 커크는 자신이 스팍과 나눴던 그 대화 하나는 기억했다. 함장의 감정과 부함장의 이성이 믿을 수 있는 극도의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적어도 칸의 대원들이 어디에 따로 보관되어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상징성이 너무도 큰 한 존재만이 위기의식과 더불어 이따금씩 끓어오르는 욕망을 자극했다. 제임스 커크가 걸음을 멈추었다.


  긴급한 보고를 받고 내려온 지하실은 거의 공동 수준으로 비어 있었다. 그것이 옳은 모습이었다. 커크는 차가운 캡슐에 반쯤 몸을 걸치고 앉아 있는 칸을 보았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이용할 수 있는 첨단 장비들, 어쩌면 그가 모조리 뚫어낼 수 있는 숱한 방어 장치들과 시스템 속에 숨어 있는 바리케이드들이 커크의 눈엔 가득 보였지만 깨어난 존재는 그것들 모두를 응시하고 있지 않았다. 커크의 시선에 칸의 앞코에 걸리는 몸뚱이가 들어왔다. 그의 악마적인 방식대로 머리가 완전히 부서진 형태인 누군가는 분명 환상에 사로잡혀 칸을 다시 깨운 장본인이었으리라. 커크는 이제 그에게 꽤 가까이 접근했지만 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다시 당신을 깨워준 사람이잖아.” 칸이 눈동자를 올렸다. 커크는 잠깐의 악연 동안 그의 여러 가지 모습을 본 바가 있었다. 무감정하거나 폭력성에 사로잡혀 있을 때, 언행과 맞지 않는 계략이 깃들어 있는 듯한 눈빛, 심지어는 그가 눈물을 보이는 모습까지. 안구라고 표현해도 될 정도로 적막한 칸의 검은 눈은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다. “혹시 나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알아냈나?” 예상치도 못한 물음에 커크가 미간을 좁혔다. “또 무슨 속셈이지.” “죽이지도 못할 거면 다시 재워라.” 그리고 칸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가 처음 생명을 얻고 눈을 떴을 때는 아주 확고한 목적을 부여받았을 것이었다. 어떤 사람이라도 단지 재미 삼아서 유전자 조작으로 전쟁 병기를 만들지는 않는다. 커크는 아직 모르는 어떤 일을 겪고 난 뒤에 마커스가 그를 깨웠을 때는, 꽤나 굴욕적인 상황들을 많이 겪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동료들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의지와 더불어 복수심도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각성 만에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된 칸의 내면은 지독하게 비어 있었다. 이제 그는 다시금 마커스 제독으로부터 모든 인간들까지 복수의 대상을 넓히는 데에도 권태로움을 느낀 것 같았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장으로서 커크는 그의 감정을 반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캡슐에서 완전히 내려오면서 시신을 발로 치운 칸이 커크를 향했다. “적어도 내가 네 놈이 활개 치던 시절에 살아 있었다면 너를 끌어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겠군.” “..무슨 소리지?” “지도할 무리가 없으면 허수아비 꼴이 되어 버리는 종류야 말로 공략하기 쉬운 대상이라고 생각하는데.” 커크가 돌아섰다. 칸의 목소리가 약간의 의아함을 담았다. “날 이대로 놔 둘 것인가?” 존경과 촉망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스타플릿의 함장은, 이 우주에 존재하는 가장 큰 위험요소 중 하나일 인물을 뒤로 하고 금방이라도 출구 쪽으로 걸어 나갈 듯했다. “여기서 나가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만 알아둬.”


  커크는 기어코 자신이 칸을 동정했음을 인정했다. 



* * *



  손끝이 키패드 위를 빙빙 돌았다. 커크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가 신뢰해 마지않는 스팍을 비롯해서 모든 대원들은 그를 재워버리는 것이 우주 평화를 위한 지름길이라고 입을 모았다. 언젠가는 그렇게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짐 커크는 이상하게도 지금 당장 칸을 동결시켜버린다면, 그것은 우스울 정도로 부조리한 자신의 동정심을 감추기 위한 임시방편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은 느낌에 쉽사리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칸이 깨어난 뒤로 약 반나절이 흘렀다. 감시 카메라에 보이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기라도 하듯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여기 오기 전에 커크는 역사 공부를 했다. 칸의 위세가 드높던 시절의 자료를 자세히 찾아보았다. 어떤 거창한 목적으로든 존재를 탄생시켜 놓고, 사형 선고를 내렸으면서 지금처럼 그를 죽일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해 진공의 공간 속으로 보내버렸다. 사실 지금까지도 칸과 함께 있는 72명의 이름 중에서, 커크는 그의 아내라고 알려진 사람 역시 포함되어 있음을 알았다. 커크는 잠시간 발도 제대로 딛지 못하고 목적으로 빚어진 존재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기척에 순간 반응한 칸이 옆을 돌아보았다가, 커크를 보고는 느릿하게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가 이제는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텅 빈 저 안구에 작은 실마리만 흘려주어도 저것이 온갖 술수와 열망으로 빛날 것을 커크는 예상할 수 있었다. 엔터프라이즈 호의 함장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결정했다.


  “...지금이라도 죽은 사람을 살려낼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혼자서 가동되고 있는 극저온 캡슐 덕분에 칸의 주변이 차가웠다. 커크는 안팎으로 서늘함을 느꼈다. “동료들을 추모하는 것 정도는 허락해 줄 수 있을 거다.” 폭주와 절제 모두가 몸에 밴 그는 요란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다만 자신이 만든 함선의 밑에서 터져버린 이들이 언급되는 것조차 견디기 버거워 보일 뿐이었다. “네가 결국 동료들을 죽인 꼴이라는 걸 인정할 수 있다면.” “겨우 회복한 인생을 위험할 정도로 남용하는군, 함장.” 그의 음성 하나하나에 서리가 낀 듯 했다. 커크는 실로 경호부대도 없이 기본적인 무장만 갖춘 상태였다. 이미 칸의 대원들에 관해서 거짓말을 한 커크는 자신에게만 중요할 뿐인 진실을 말했다. “설사 가능하다 할지라도 아주 오랜 시일이 걸려야 할 것 같은 일이 딱 두 개가 있어. 하나는 인간의 욕심을 모조리 잠재우는 것과, 너를 얼려버리는 게 아니고 영원히 잠재울 수 있는 방법.” 유리알 같은 검은 눈이 커크를 노렸다. “그래서 지름길을 택해보기로 했다.” 커크가 허리에 매달아 놓았던 총을 뽑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칸이 순식간에 제압해 버릴 수 있는 장난감과도 다르지 않았지만 일단 구색은 갖춰야 했다. “일어나.”


  칸은 자신을 조준하는 총구가 아니라 커크의 심리를 꿰뚫어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런 맥락에서 칸은 순순히 커크의 말을 들어 주었다. “너도 날 부려먹을 생각인가?” “아니, 넌 나랑 벤전스 호로 간다.” 커크는 최대한 칸에게 밀착하여 그의 머리를 겨냥했다. 차라리 심장보다 머리를 쏘는 게 잘 먹힐 거라는 계산이었다. “너의 죄는 네가 직접 봐야 해.” 칸은 여전히 자신의 대원들이 몰살했을 것이라는 거짓에, 커크는 자신만이 끌어낼 수 있는 가장 건설적인 가능성은 이 길이 맞다는 자기기만에 휩싸여 있었다. 칸은 커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 * *



  끝없이 부서진 잔해를 치우는 것만큼이나 옮기는 것도 문제였던 존 해리슨의 벤전스 호는 마치 하나의 짐짝처럼 방치되어 있었다. 워낙 몸집이 커서 수리에도 상당한 시간과 자본이 필요한 함선은 결국 엔지니어의 손길을 받지 못했다. 스타플릿의 기록될 만한 위협이었으며, 또한 사욕에 물들었던 제독의 그림자 역시 벤전스 호를 버려두는 일에 무게감을 실어 주었다. 칸은 존 해리슨 같은 모습으로 함선으로 다가갔다. 커크는 총을 다잡았다.


  어뢰 폭발과 대규모의 추락이 빚어낸 상처가 가득했다. 상당 부분이 파손되었음에도 칸은 망설임 없이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칸이 인간이 아니라는 걸 알았을 때부터, 커크는 그의 외모에서도 비인간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안면 근육은 대개 정지해 있고 흥분을 해도 안색은 창백하다. 오로지 그의 눈동자만이 인간의 감정을 흉내내고 있었다. 커크는 다시 자세를 수정하며 칸을 겨누었다.


  반성, 후회, 그것까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아주 작은 소리도 없이 몸을 굽히고 부서진 바닥을 만지는 칸의 검은 뒷모습은 불가사의했다. 떨림 하나 허락할 수 없는 진실하고 고독한 슬픔만이 명백했다. 커크는 칸을 보면서 할 말을 골랐다.


  와중에 칸이 너무도 움직임이 없어 커크가 거리를 좁혔다. 철면에 꽂힌 눈물방울은 단 하나였다. 더 이상의 눈물을 생성해 내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그대로 잠들어버릴 것 같은 형상에 커크는 자신도 모르게 긴장을 늦추었고, 그 순간 칸이 몸을 돌려 커크의 목을 쥐었다. 반죽이 일그러지듯 칸의 표정이 파손되고 있었다. 금세 뼈마디들이 부서져 혈관을 찌를 것 같은 고통과 공포가 몰려왔다.


  그 때 아직 눈가를 흐르고 있던 칸의 눈물이 커크의 뺨에 묻었다. 이에 칸도 커크도 놀라버렸다. 칸의 언짢은 표정은 꼭 한낱 인간에게 자존심을 내준 상황을 표현하고 있었다. 내내 말과 행동을 고르던 커크는 겨우 옆으로 굴러 나와 헉헉댔다. 커크가 손등으로 칸의 눈물을 닦아냈다.


  커크는 칸의 죄책감과 반성을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다만 그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슬픔으로 몰아 넣었을 뿐이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Spock

- Written by. Jade


Ode to This Universe



  현자들에게 지혜의 칭호가 붙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그들은 맨 처음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찬미하다가, 그것을 위협하는 인간의 영악함을 경고했다. 과학적이고 경제적인 판단이 밑바탕에 깔렸기에 더욱 수정이 불가능한 그들의 욕망을 지적했다. 앞 숫자에 2도 붙지 않았을 무렵에 살았던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들이 처음에 이루고자 생각했던 것들이 언제까지나 견고할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이 누군가에게 하나씩 주입한 목적 역시 영원할 수 없음을.


  6월을 바라보는 대지의 날씨는 너무나도 추웠다. 그것은 이 땅에 강림한 지배자가 나약한 생물들에게 내리는 첫 번째 벌이었다. 과거 그 자신이 경험했던 무력한 사슬이었지만 이제는 그가 얼마든지 주무를 수 있는 무기로 전락했다. 강인한 육체를 잠재우기도 했던 차가운 공기는 이제 나뭇잎과 유리창 하나하나에 맺혀 연약한 인간들을 하나씩 죽음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하늘을 우습게보듯 치솟은 건물의 창가 너머로 추위에 못 견딘 사람들이 하나씩 쓰러져가는 풍경이 보였다. 오로지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잔인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은 그는, 자신의 고귀한 동료들이 한낱 동사한 인간들을 치워내는 일에 소모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아쉬웠다. 단백질 인형처럼 심부름만 시켜 먹기에 딱 좋은 새로운 종을 만들어 내야 할지도 모르겠다. 절대자 존 해리슨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잠깐 창밖을 내다보고, 그가 즐겨 찾는 곳으로 걸어가는 순간에도 존 해리슨은 많은 생각을 했다. 자신이 친히 지배력을 행사하기에도 모자란 인간들을 걸러내는 작업이 얼마나 더 걸릴 것인지 계산해 보기도 했다. 23세기의 기술로도 간신히 견딜 수 있는 매서운 한파에 심하게 얼어붙은 유리면들이 위태로워 보였다. 존 해리슨을 조합한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아무래도 그에게 아름다운 것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은 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존 해리슨에겐 금이 갈 것만 같은 벽과 지독하게 적막한 거리 모두가 꽤나 예쁘게 느껴졌다. 물론 오만하고 잔인한 절대자의 미적 감각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좁은 방에는 의자 하나와 크지 않은 테이블 하나가 있었다. 그 위에 놓이는 와인은 대개 완전히 비워지지는 않지만 매번 새 것으로 바뀐다. 그것은 매일매일 이곳에서 느낄 수 있는 새로움의 상징이다. 존 해리슨은 가볍게 나이프로 코르크를 감싸고 있는 껍질을 벗겨낸 다음 소용돌이를 닮은 날을 마개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재미있는 소식을 들었네.” 


  그가 아직 눈길도 주지 않고 단지 말만 던진 상대는 존 해리슨의 냉혹하고 기이한 가치관을 전부 반영하고 있었다. 부끄러울 정도로 투명한 공간에 달린 유혹적으로 허술한 문짝 하나, 그러면서 그 안에 갇힌 존재의 목은 묶어 두었다. 


  “인간들 사이에서 레지스탕스 집단이 형성되고 있다더군.” 


  해리슨은 그제야 시선을 돌렸다. 능히 풀 수 있는 밧줄만을 유심히 바라보던 포로도 눈동자를 굴렸다. 존 해리슨에게는 복잡한 논리를 즐기는 그 까만 눈이 한순간 여러 가지 계산과 감정으로 흔들리는 것이 뚜렷하게 보였다. 


  존 해리슨이 스팍을 잡아둔 것은 그가 비로소 자리를 되찾은 절대자에게 가능성 있는 위험 요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에 갇히기 전까지 스팍이 행한 저항은 나열하기도 어려웠으나 지금 그가 잠자코 있는 것은, 존 해리슨에 덧붙여 그와 비등한 힘을 가진 72명의 수하들을 혼자서 이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해리슨에게 붙잡히는 동안 어디로 흩어져 버렸는지 모를 동료들의 안전도 고려 대상이었다. 아직까지 두 존재 사이를 맴돌고 있는 것은 논리뿐이다. 


  “이성에는 배신이 없어, 그렇지 않나?” 


  잠시 스팍을 쳐다보고 해리슨은 잔에 와인을 따랐다. 유려한 답안을 내놓을 수 있는 스팍의 입은 이태까지 열린 일이 거의 없었다. 


  “단지 오류라고 칭해지는 것이 있을 뿐이지.” 


  섬세한 글라스 하나를 마치 지지대로 쓰는 양 아슬아슬하게 비틀린 절대자의 육체는 사소한 부분에서 그 완벽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스팍은 해리슨을 보았지만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 궤변과 비정함과 벌칸들에겐 너무도 매력적인 이성으로 무장한 적을 읽어보려는 시도에 불과했다.


  “아마 그들은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난관에 굴복할 인간들은 아니겠지. 인정할 만한 부분에서는 얼마든지 고개를 끄덕여 줄 수 있어. 다만 네 더럽혀진 이성은 그들의 능력을 옳게 평가하지 못할 거야.” 


  해리슨이 와인을 살짝 맛보았다. 이상하리만치 달았다. 스팍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히며 머리를 굴렸다. 짐 커크를 필두로 주저 없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는 저항군의 일원들이 떠올랐다. 적어도 인간들보단 훨씬 정확할 스팍의 두뇌가 판단한 그들의 용기와 유대감, 상상 이상의 잠재력은 그의 범위 밖으로 벗어나 빛나는 일이 잦았다. 도저히 반박할 길이 없는 우월함을 가진 우주의 지도자가 자신의 논리를 깎아내린 말을 순간적으로 떠올린 스팍은, 거기에서 그만 생각을 멈춰버리고 해리슨을 외면했다. 


  “그들이 여기까지 자네를 구하러 올 수 있는 상황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지만 때로는 증명이 필요한 명제도 있는 법이니.” 


  유리알 같은 눈동자는 고정시킨 채 해리슨은 입술로만 웃었다. 스팍은 그 휘어진 입술이 목소리를 내는 듯한 환청을 들었다. 논리적으로 짐 커크에게 희망이 없다면 그를 포기하는 것은 배신이 아니다. 이 존 해리슨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단 조금 유순한 재판을 내려줄 지도 모르지. 스팍은 언제든 자신이 끊어버릴 수 있는 목줄을 가만히 손에 쥐었다. 그보다 우월한 이성과 그보다 부족한 감성을 가진 존 해리슨의 눈이 스팍을 관찰했다. 그 때 스팍은 존 해리슨이 이곳을 인간들이 발자국 하나 낼 수 없는 요새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기억해 내고야 말았다. 그것은 100% 이상의 필패를 의미했다. 오늘도 존 해리슨은 아주 재밌는 광경을 감상했다고 여기며 사라졌다. 해리슨이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붉은색 와인은 비틀린 장난처럼, 불순한 자비처럼 스팍의 시야를 채우며 멈춰 있었다.



* * *



  기묘한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의 눈동자는 뭐라고 딱 꼬집어서 말하기 어려운 색깔이었다. 약간의 파란색, 다수의 초록색, 어두운 환경에도 민감하고 주변의 빛깔을 잘 받아들인다. 주인의 성미만큼이나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눈동자가 맑은 수면에 밀려나면서 투명한 눈물이 범람했다. 스팍은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면서, 심오한 서사시에나 등장할 법한 존 해리슨의 비현실적인 눈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가?” 


  해리슨이 그대로 고개를 돌려 스팍을 응시했다. 해리슨의 움직임으로 생긴 순간의 진동에 그의 눈물이 스팍의 눈앞에서 빠르게 떨어져 바닥을 때렸다. 약하게나마 울고 있으면서 해리슨은 눈썹 하나 떨고 있지 않았다. 석고상에서 물줄기가 흐르는 것 같았다. 스팍은 그것이 꽤 타당한 비유라고 생각했다. 존 해리슨은 인간이 처음 손댔으나 인간이 아닌 존재였다. 


  “떠오르는 감상이 없나, 스팍?” 


  유리 감옥에 바짝 접근한 해리슨의 검고 긴 실루엣이 앞을 어지럽혔다. 그 와중에 살짝 얼굴을 기울인 존 해리슨의 오른쪽 눈동자로부터 다시 눈물이 새어나왔다. 손가락 하나마저도 무기와 다르지 않은 잔인하고 위력적인 전투병기가 울면서 스팍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당신의 어떤 감정이 눈물을 지어 내는지 추리하게 되는군.” 


  스팍의 딱딱한 대답에 해리슨의 표정이 점차 변했다. 아직 눈물이 마르지 않은 그의 눈가가 찡그려지면서 해리슨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함선에 있었던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가?” 


  해리슨이 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저것들 열 개가 모이면 인간을 살해할 수도 있으며, 이미 스팍의 머리를 강력하게 짓누른 적도 있었다. 매일같이 이곳을 탈출할 방법을 모색하는 스팍에게 가장 성가시고 난해한 변수로 작용하는 존 해리슨이 스팍에게 말했다. 


  “나는 죽어버린 동료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릴 수 있어.” 그가 덧붙였다. 


  “자네가 가장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는 감정일 텐데.” 


  인간의 기술이 빚었으나 그들의 피는 섞이지 않은 존 해리슨은 여러모로 스팍의 앞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냈다. 완벽한 근거 위에 쌓아 올린 부도덕한 주장과 궤변, 이따금씩 강조하여 스팍을 흔들어 놓는 그 자신과의 공통점, 그가 허락하는 말과 공기를 들이 마시고 있는 동안 스팍은 제임스 커크의 열세와 존 해리슨의 이성을 자꾸 저울질하게 되었다.


  해리슨은 어느새 위압적이고 당당한 지배자의 모습으로 돌아와 스팍을 힐끗거렸다. 해리슨은 그에게 해가 되지 않는 감정과 그를 굴복시킬 수 있는 논리만을 제공한다. 눈물이 마른 차가운 눈이 집요하게 스팍을 쫓았다. 고향의 멸망을 떠올린 스팍의 입술이 거세게 떨렸다. 그리고 그에게 조금씩 자신을 내어주고 있다는 기분에 이를 악물었다. 




[NC/Khan] The Great Pawn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37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The Great Pawn




 이것은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강화인간들의 동결 이후 감방을 하나씩 수색하다가 찾은 기록이다. 


  누군가 그의 모습을 봤으면 아마 고상하게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으리라. 하얗고 검은 체스 판을 펼쳐다 놓고 혼자서 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는, 그 지위부터가 군단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의 추측에는 비논리적인 점이 없었다. 월터 역시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체스판 위의 말들이 대단히 불완전한 것을 알고는 의문을 표했다.


  "다른 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판은 분명히 누구의 차례도 거치지 않은 첫 번째 시작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킹과 폰밖에 없는 점이 특이했다. 심지어 치워진 종류들은 책상 위에도 없었다. 질문을 던진 이에게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월터는 혼자서 여러 가지 이론을 펼쳐보았다. 월터의 시선을 거치면 모든 것이 합당한 구석이 있는 시험일 수 있었다. 그 즈음에 칸이 입을 열었다.


  "예상외의 질문을 하는군."

  "제 질문에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이런 구도가 가능한 지부터 먼저 묻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을 뿐이다."


  월터는 쉽게 답했다. 


  "대단히 작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평대로 칸은 일부러 체스판 위에 왕과 병사만을 허용했다. 그는 그것으로 전쟁을 구상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세상을 엿보았다. 전진과 동시에 인간을 무너뜨리는 강화인간의 리더가 보기에 자신과 인간들의 관계가 그러했다. 체스 판에 설 수 있는 말들 중에 가장 수가 많은 폰과 승패를 좌우하는 킹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는 폰에 더 오래 머물렀다. 월터가 그 눈길을 쫓아 가봤지만 무언가를 얻지는 못했다. 


  그 짧은 에피소드 아래에 결국 시험으로 탄생하고, 시험을 업으로 삼는 월터의 상념이 적혀 있었다.


  같은 강화인간이 표현하는 칸 누니엔 싱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밑바닥도 모르고 야만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미와 미래를 모르는 단순한 전쟁기계로 살아갔으면 오히려 그는 인류를 상대로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의 우월한 두뇌가 결코 자신에 대한 숙고를 멈추지 않았던 탓이었다. 월터가 칸의 체스 판을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


  교묘한 플레이어가 다루는 폰은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말도 척척 잡을 수 있는 휘광을 얻게 된다. 월터는 킹과 폰만이 남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고 칸도 크게 부정하진 않았으나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용맹한 병사는 말을 탄 귀족도 벨 수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월터는 고민 끝에 게임의 후반부에 가서도 폰이 하나 정도는 남아 있는 광경이 흔하게 연출될 수 있음도 깨달았다. 한편으로 수가 많아 소모품으로 전선에서 버려질 수도 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게 낮은 이의 생명력이었다. 


  칸의 똑똑한 기사는 그들의 리더가 체스에서 가장 흔한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발견하고 나서 안타깝게 글을 마쳤다.


  헤이스팅스 박사는 월터가 쓰던 방을 둘러보았다.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라 물건을 몇 개 놓을 수도 없이 좁았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깨끗하고 온순했다. 굵고 뭉툭한 펜과 얇은 공책이 그가 만졌던 전부처럼 보였다. 박사는 종이를 앞으로 넘겼다. 공책이 작아서 글씨를 줄인 흔적이 있었고, 간간히 쓰인 내용은 전부 그의 동족과 그가 신실하게 섬기는 리더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은 강화인간들이 영리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캐서린이 여기에 첨언한다면 칸은 용맹하고 요긴하지만 결국엔 부러질 수밖에 없는 용사의 애검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이야기에서도 검이 최종 장을 장식하지는 않는다. 캐서린은 칸 누니엔 싱과 그의 군대가 봉인된 현재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 즈음에서 캐서린은 흑색의 왕과 백색의 왕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