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arcissistic Cannibal, Khan Noonien Singh/Elizabeth Heren/Katherine Hastings

- Written by. Jade



The Moment of Failed Passing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생화학적 복수를 견딘 강화인간은 칸 누니엔 싱을 포함하면 73명이었다. 그럼에도 헤이스팅스 박사는 그들을 멸종시키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맞물려 있는 유전 염기를 떼어내는 방법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죽일 수 없다면, 더 이상 어떤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과학자들과 캐서린은 부산하게 회의를 했고, 이 일에 숟가락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권력자들은 생명과학에 밀려났다.


  강화인간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칸 누니엔 싱의 처지는 특히 가혹했다. 최악의 전범 따위는 철심이 가득 박힌 고문 기구 같은 곳에 가둬 놓아야 한다는 캐서린의 발악마저 잠깐이나마 고려될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게 대륙을 걷고 산맥을 짓밟던 남자는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에 홀로 갇히게 되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철문에는 겨우 일자 구멍이 얇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창문도 환풍구도 없는 곳이라 그 구멍으로만 유일하게 공기가 통했다. 그는 대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안이 워낙 좁아 문이 코앞이었다. 그러면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을 두께의 구멍으로 강화인간의 파리한 안광이 빛나는 것이다. 실로 그것을 보고 놀란 가슴을 붙잡을 수 있는 노련함을 가진 건 캐서린 헤이스팅스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칸 누니엔 싱을 찾아오는 사람은 캐서린 헤이스팅스밖에 없었다.


  캐서린은 그의 방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간이 너무 비좁은 탓이었다. 불가피하게 칸과 대화를 나눠야 할 때면 그녀는 분노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은 청록색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거나, 틈새로 통신기를 던져주고는 수화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오늘 박사는 후자를 이용할 것 같았다.


  까만 통신기를 손에 쥐고 캐서린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사정도 모르는 정치가들은 아무렇게나 칸 누니엔 싱과 그 집단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과학자들은 차선책으로 온갖 종류의 약물을 실험해 보고 있었으나 신통치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살아남은 강화인간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생성한 상태였다. 캐서린은 그녀가 조금만 시간을 끌었더라도 칸이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칸을 향했다.


  새카맣던 감금실에 청록색 불빛이 켜졌다. 칸은 캐서린의 발소리를 듣고 눈을 떴고 캐서린이 구멍 사이로 통신기를 내밀었다. 


  "오늘은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서 있고 싶지 않아. 그냥 받아."


  그리고 캐서린은 복도의 차가운 벽을 대고 앉았다. 칸이 아무리 눈동자를 내려도 보이지 않을 사각지대였다. 캐서린이 플립을 열고 번호를 눌렀고, 칸은 전화를 받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지독하도록 흉악한 전범의 감옥을 지키는 이도 없어 캐서린은 편하게 다리를 뻗었다. 멸망의 문턱에 서 있는 인류는, 어차피 그가 마음만 먹으면 목을 꺾을 수 있는 경비병조차도 아까웠다. 


  "넌 대체 왜 죽지 않지?"


  철문 뒤에서 칸이 웃는 소리가 났다. 캐서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목에서처럼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화인간을 괴멸시키는 데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는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듯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캐서린은 자신의 적에게 하소연했다. 칸에게 말하는 것은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을 행동이었다.


  "왜 다른 인간들에게 얘기하지 않았지?" 

  "뭐를?"

  "나를 봉인해 준다는 전제 하에 내가 너한테 잡혔다는 걸 계속 숨길 생각인가?"


  캐서린은 일부러 목소리에 날을 세워 답했다.


  "내가 내건 전제는 아니야. 난 반드시 널 죽이고 말 거야."

  "우리를 가둬놓은 지역에 원자 폭탄이라도 떨어뜨려 보지 그러나."

  "지구 다 망칠 일 있어? 가뜩이나 네놈들 때문에…."

  "내가 망친 건 행성이 아니다. 인간들이지."


  풀어야 할 문제집의 페이지를 지적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낮고 작은 그의 음성에서는 이따금씩 숨소리가 섞였는데, 캐서린은 단언코 그것이 그의 비인간적인 눈동자만큼 버티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허리를 기대는 것도 어려운 사방의 벽 사이에서 칸은 똑바로 통신기를 잡았다. 


  "네가 만들었던 그 바이러스가 가장 그럴 듯한 방책으로 보이겠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걸 다시 이용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인간은 도저히 가질 수도 없는 우수한 형질이 만들어 낸 항체를 뚫으려면 백 단위의 실험이 필요하겠지. 한 번 시도해 봐.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너희들을 다시 소멸시킬 여유를 찾을 테니 꺼려할 이유가 없지, 캐서린."


  인류에게는 저주와 같은 발언들 말미에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이름이 붙었다. 물리적인 파괴에만 능한 것이 아닌 칸은 캐서린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캐서린은 순간 자신의 가운 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지금 밤인가?"


  달을 베어버릴 듯이 날카롭게 솟았던 언어가 뜬금 없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캐서린이 수상쩍다는 듯 반문했다. 


  "뭐라고?"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밤이지. 10시가 되기 직전이야." 


  칸은 그녀의 대답을 만족스럽게 여긴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밤이 오기 전에 그녀는 다시 나를 사랑하고 칭송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마저 없다면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런던의 연구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국식 악센트를 쓸 뿐이었지만, 그는 역사 깊은 땅의 문학적 가치마저 모조리 음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풍겼다. 덕분에 캐서린의 귀에도 그의 뜻 모를 말은 아름답게 들렸다. 캐서린이 미간을 좁혔다. 


  "엘리자베스 헤렌의 이야기를 해 줄 존재가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 인식하고 있었나?"


  그리고 칸이 허리를 유연하게 비틀어 철문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그의 손에 있던 통신기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강화인간에게 대항하는 무리 중 유일하게 인류의 생존이 아니라,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 애쓰고 있는 캐서린은 칸 누니엔 싱이 발음하는 그녀의 이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통신을 끊어, 캐서린. 여기서 얘기하도록 하지."


  그의 육성이 철문을 뚫었다. 캐서린이 통신기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으로 가려진 통신기에서, 그녀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의 근처에서 동시에 칸이 그녀에게 말할 것이었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통신기의 플립을 끝까지 열어 놓았다. 그것이 캐서린의 저항이었다.




  "네 놈한테는 호의를 발휘하는 것도 아깝지만, 이건 인간적인 전통이니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허락하겠다."


  칸은 그의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여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정확히는 밤이 오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칭송하며 찬미했다. 하루를 꼬박 도는 그 시간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순간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녀는 반복했지. 그것이 그녀에게는 자신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지성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어쨌든 그녀는 나의 창조자였으니까."


  캡슐의 뚜껑이 닫히고 그의 얼굴 부분에만 간신히 덮개가 내려앉지 않았다. 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눈을 보여줄 인간은 근방에 없는 것 같았다. 인류를 구원한 박사이자 섬김 받아 마땅한 여왕이 된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되어야 그의 안구를 감상할 자격이 있었다. 과학자 하나가 성급하게 캡슐을 봉인하려다가 누군가에게 제지당하고 황급히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적을 사랑했다. 이런 짓에 익숙해져 마침내는 자신의 파멸마처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 역시 그다지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진실이 포함되겠군. 그리고 결국에 그녀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벗들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군."


  그가 캐서린 헤이스팅스를 위해 웃었다. 


  "내가 이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알았던 여자가 몇이나 될까."




BGM : Linkin Park - The Requiem

God save us 
신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Everyone will be burn inside the fires of a thousand suns 
인간은 천 개의 태양이 들끓는 화염 안에서 타오르게 되리라

For the sins of our hand 우리들의 손으로 저지른 죄를 위해
Sins of our tongue 우리가 언어로 빚은 죄를 위해
Sins of our father 우리의 아버지와
Sins of our young 우리의 젊은 날이 저지른 죄악을 위해서



[NC/칸월터] The Brave Knight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30 posted by Jade E. Sauniere

- Narcissistic Cannibal, Khan Noonien Singh/Walter

- 오리지널 캐릭터 페어링 주의.

- Written by. Jade



The Brave Knight



  안타깝게도 과학자들은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소홀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강화인간들에게 맑은 공기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본질적인 기회를 박탈했고, 수면욕을 대폭 축소시켰으며 변질된 유전자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후대를 이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인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를 모조리 잃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칸의 복수심을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월터의 복종을 이끌어 낸 원인도 아니었다.


  그가 용기를 내어 추대한 위대한 지배자이자 동족들의 제왕은 기어코 수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다 채울 작정인 모양이었다. 선잠이 들었던 월터는 곧 자신의 우두머리를 기억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동료가 부스럭거리더니 눈빛으로 물었다. 


  ‘어딜 가는 건데.’ 

  사실 동료도 월터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그 분에게 쉴 여지를 줘야겠어.’ 

  동료는 희미하게 웃으며 월터를 보내주었다.


  실상 월터는 칸의 방을 딱 한 번 찾아간 경력이 있을 뿐이지만 영특한 머리는 금세 길을 기억해냈다. 태양이 휘휘 물러가고 밤이 차가운 입김으로 투덜대는 시각이었다. 칸은 대개 문을 열어 놓는다. 월터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그는 동족들을 자신의 피지배자가 아닌 동등한 동료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월터의 발자국 소리가 이미 하나의 노크로 다가왔을 것이므로 그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목소리를 냈다. 


  “주무시지 않는 거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월터의 옆자리에 있었던 동료는 단번에 이렇게 평했을 것이었다. 누가 귀족 출신이 담당자가 아니랄까봐 기사도가 제대로 몸에 박혔구만.


  칸의 책상은 전략가의 그것처럼 크게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월터는 책상 대신 두뇌에 의지하여 칸이 온갖 생각을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맨손의 악력만으로도 전장을 지배하지만 그 이전에 철저한 준비를 잊지 않는 침착한 사령관이다. 월터는 감으로 그가 추대한 지배자가 70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음을 추측했다. 이제 칸은 고작 2시간을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칸이 특별히 그를 물리지 않았으므로 월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은 2시간을 다 채우려고 하셨다가는 재생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겁니다.”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는 그에게 월터의 목소리는 마치 3층 정도 위에 있는 이웃이 속삭이는 것처럼 아련하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월터는 칸의 사고를 짐작했다. 기실 그의 방 주변에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고, 밤이 깊어 수면을 취하는 동족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깨어 있는 이들은 차라리 밖에 나가는 걸 선호하는 시각이다. 월터는 아주 고귀하지만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러 향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주군에게 다가갔다.


  월터의 담당자는 귀족의 후손이었고, 몇몇 이들이 장난삼아 부르기는 했지만 기사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담당자의 유전자가 월터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음에도 월터는 박사의 그러한 일면을 닮았다. 그는 어렵지만 옳은 말을 꺼낼 줄 아는 심지가 곧은 기사였다. 그리고 그는 무기도 잘 썼다. 월터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그의 촉감이라든가 온도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칸은 월터에게 관심을 두었다. 청록색 안구의 초점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월터는 기다렸다. 기사가 신중하게 귀중한 육체에 손을 올렸다. 칸의 생각이 끝났다.


  “당신은 쉬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월터는 드러나 있는 칸의 피부를 손끝으로 꼼꼼하게 짚는 것이었다. 칸이 조용히 물었다. 


  “그 말과 행동의 상관관계는…?”

  “당신에게 깊고 진한 휴식을 드리기 위함이지요.”


  지금은 가만히 멈춰 있지만 칸이 평소보다 반 정도만 힘을 불어 넣더라도 월터는 손가락 마디가 어긋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의 손길을 편히 받아들였다. 낡은 의자가 딱딱한 움직임으로 돌아가면서, 월터는 완전히 칸을 마주했다. 전등이 증발한 밤의 달빛보다 뚜렷한 칸의 눈동자를 월터가 손으로 닫아 내렸다. 칸은 이제 눈을 감은 채 월터가 전해주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차분하게 풀어주다가, 온갖 사고에 신경을 집중하는 통에 경련을 억누르고 있던 다리가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고, 기사가 무릎을 굽히는 각도를 재듯 정확하고도 정중하게 올라가는 접촉 속에 칸은 월터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호흡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동족의 움직임은 눈꺼풀 뒤로도 훤히 보였다. 월터는 막판에 입술을 움직여 말소리를 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자 칸이 월터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나를 불러봐.”

  “어떻게 말입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편히 계십시오, 왕이시여.”


  기사에 의해 왕이라 불린 자는 정말로 미동도 없었다. 전장에서 누구와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긴장하는 월터의 팔다리가 아릿하게 떨고 있었다. 월터는 제 나름대로 이 행동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수면을 미뤄왔을 경우, 제 아무리 강화인간의 육체라도 낯선 휴식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축되는 일이 종종 있다. 월터는 순전히 자신이 스스로 받들고 싶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올린 이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할 말을 마친 월터의 입술이 다른 목적을 위해 벌어졌다. 칸은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칸은 경력이 있어 낯설지 않았지만 월터는 달랐다. 담대한 마음가짐으로 주군에게 농도 짙은 접촉을 시도했던 월터는 막상 순간이 다가오자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월터는 미숙한 기사 때문에 피식 올라가는 왕의 입꼬리를 느끼고 말았다. 월터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가, 그 때까지도 가만히 무릎 위에 정지해 있던 칸의 손이 월터를 잡았다. 장난스럽게 문을 연 그가 월터를 끌어당겼다.


  입술은 소리를 낼 수 없어 대신 손이 칸의 의사를 전달했다. 위치를 고수하게. 월터는 그리하여 피할 수 없었다. 절제된 동작으로 칸은 월터의 등을 한 뼘씩 건너면서 옷에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월터는 자신이 더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칸이 슬며시 눈을 떴다. 청록색의 동공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성될 수 없는 차분한 시선에 월터도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올려 칸을 마주했다. 피부가 하나의 얼굴처럼 보이는 거리는 월터에겐 너무도 생소했다. 붙어 있는 입술을 거쳐 다시금 올라가는 칸의 입꼬리가 닿았다. 그 사이에 월터의 목에 손바닥을 댄 칸은 조금 더 오래 기사를 품었다.


  “…죄송합니다.”


  월터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무엇이 말인가?”

  “의도만 가상했을 뿐 제가 원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천성처럼 달라붙은 기사적인 말투는 가시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칸은 월터의 얼굴을 편하게 바라보기 위해 힘을 실어 등받이를 젖혔다. 


  “내가 효율적인 휴식을 취하길 원하지 않았나?” 

  월터는 끝내 더듬거렸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목표는 성취되었어.”


  칸이 월터의 가슴팍에 대뜸 손가락을 올린 덕분에, 월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원하는 대로 잠을 청할 수 있겠어. 수고가 많았군.”


  칸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침대처럼 사용하고 있는 소파에 앉았다. 월터는 자신이 왕이 눕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얼른 인사를 올렸다. 칸이 피식 웃었다. 내가 눕는 것조차 마주할 수 없으면서, 방금 전에는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군. 다행히도 기사가 섬기는 주군은 놀랍도록 혜안이 깊어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칸이 소파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등 뒤로 힐끗 그것을 확인한 월터가 자리로 돌아갔다.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Theme from 'End of an Era' by Zack Hemsey

- Slowly and Carefully

- Written by. Jade






  칸 누니엔 싱은 오늘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마지막 날임을 직감했다.


  강화인간들은 여간해선 죽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세포를 재생하는 것보다 몇 백 배에 달하는 회복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민첩함과 날카로운 악력과 비범한 두뇌를 갖고 있다. 칸이 끊임없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강화인간들의 특징을 십분 이용한 덕택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괴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박사들의 보고서를 훔쳐본 뒤로 그것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심지어 칸은 자신이 어디서 추출하고 어떻게 접붙인 유전자로 탄생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약 그들이 패배를 맞이한다면 이런 방식일 줄을 예감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이제 인류도 강화인간에게 검은 무기를 들이대는 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화인간들이 하나씩 무너진다. 이제 한낱 동료가 아니라 동족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된 칸은 타의에 의해 뒤로 밀렸다. 도시의 차가운 바람이 더 날을 세워 그의 뺨을 할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황제가 장대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세운 도시이며, 황제들은 대개 자비가 없기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뼈로 도로를 닦아 만들어진 도시였다. 칸은 그 의미에 미소 지었다. 


  적이 없는 가운데 칸을 벽으로 밀어낸 강화인간들이 쓰러졌다.


  엘리자베스 헤렌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은 없지만, 줄리안에게 보낸 적은 있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캐서린에게 연락했다. 자신의 연인에게 말하지 못한 창피한 사실을 박사는 친구에게 모조리 털어 놓고 울었다. 자신이 숨 가쁘게 가슴을 내어 놓았던 칸 누니엔 싱에게는 속 시원히 보일 수 없었던 깊은 눈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지독하게 귓가에 달라붙어 있는 피조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떼어 내려 애쓰는 캐서린의 음성에서 위안을 찾았다. 칸의 복수는 누군가 알아차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캐서린의 복수는 그 자신을 불태울 기반을 찾지 못했기에 잠잠했고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잭 브리지스가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메시지를 내밀었다. 그는 인류의 패배를 기록했고, 정복자의 복수를 기록하다가 인류의 기사회생을 기록할 역사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칸은 쪽지를 받지 않았다. 펼쳐보지 않아도 캐서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기에 지금도 무사할 수 있는 잭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몸뚱이로 패배의 경계선을 그어 내리고 있는 동료들을 응시하고 있는 칸을 물끄러미 보았다. 잭은 곧 쪽지를 땅바닥에 버렸다.


  복수호가 태평양을 잔혹하게 찢어놓고 있을 때,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마침내 자신의 복수를 성공시켜 줄 열쇠를 찾아냈다. 조작된 염색체를 분리하는 바이러스가 그녀의 손 안에서 꿈틀댔다. 그들의 지도자가 가장 잔인하게 자신의 창조자를 지배하면서 캐서린은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확신했다. 캐서린은 가운을 입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엘리자베스 헤렌이라고 새겨진 명찰이 달랑거렸다. 연구소의 모든 것은 칸 누니엔 싱이 파괴했기에, 그것은 캐서린이 스스로 만든 명찰이었다.


  칸은 이곳의 이름이 한때 레닌그라드였음을 기억했다. 그는 그것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잠시 거점으로 삼았던 땅은 하필 성인의 도시였다. 칸은 이태까지 한 번도 논리적이지 못한 상징을 믿은 일이 없었지만, 다른 곳에 발걸음을 세워두는 게 더 나을 뻔했다고 조소했다. 성인의 도시에서 올바르게 태어나지 않은 피조물이 스러지는 건 당연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잭은 칸의 웃음을 보면서 그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잭은 캐서린을 찾으러 나갔다.


  칸은 혹시나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강화인간은 산소를 호흡하지 않지만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바이러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공격할 것이었다. 칸은 문을 열려고 했다. 누군가 그 앞을 무너지는 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칸은 옅은 웃음으로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칸은 조심스럽게 문 근처에서 월터를 치워냈다. 월터가 입을 벙긋거렸다. C, A, P…. 복수를 조선한 뒤 무리들 사이에 유행처럼 돌았던 호칭이었다. 칸은 자신의 얼굴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둬들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반대로 흩날리는 하얀 가운에서 칸은 엘리자베스와 캐서린을 동시에 보았다.


  표정은 아직 굳건했지만, 그는 아주 조금씩 자신의 몸이 내부에서부터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잭 브리지스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사가의 녹색 상의를 가져오거나 필기구를 가져오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세포가 정지할 듯한 격통 위로 얼어붙으려 하는 대기가 내려앉았다. 칸도 캐서린도 입을 열지 않은데 주위가 오히려 부산했다. 


  "캐서린." 


  그가 드물게 엘리자베스를 불렀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팔락이는 가운 속 옷은 얇아보였다. 캐서린은 분명히 추울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때때로 연구실에서 추위를 호소했다. 칸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섰다. 아득히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칸은 저절로 검은 파편을 사방으로 튀어 올리는 복수를 떠올렸다. 칸이 캐서린에게 말했다. 


  "복수를 얻은 것을 축하한다."


  빙결한 하늘 위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잭 브리지스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종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움직였다. 캐서린은 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좁혔다. 그는 아파 보이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쓰러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캐서린이 말했다. "왜 무너지지 않지?" 


  본능에 이끌려 잭은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다. 


  칸이 대답했다. "나한테 정말로 확인하고 싶은 걸 얘기해." 


  이번에 잭은 곧바로 칸의 말을 받아 적지 못했다. 


  캐서린이 결국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눈앞에서 칸 누니엔 싱의 위태로운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잭 브리지스는 그녀의 걸음이 헛될 것을 알았다. 


  캐서린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만일 칸이 웃었다면 캐서린은 그의 허세에 차가운 조롱을 날려주었을 거고, 찡그리고 있었다면 네 놈도 고통에서는 무사하지 못한 모양이라며 그에게 독한 비수를 꽂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모두를 빗나가 캐서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칸은 자신이 다섯 걸음 정도 밖에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방도가 없어 멈추었을 뿐이지만, 캐서린은 그 행동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서린은 결국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인공적으로 박힌 안구에서 읽을 게 없었다. 캐서린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게 빛나는 칸의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긴급하고 훌륭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동족들은 대부분 살아나지 못할 것이며, 칸 역시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당장 강화인간들이 유전자가 터져 나가며 죽을 줄로 예상했다. 그녀가 빠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복수를 얻었다면서."


  칸이 작게 대답했다. 


  "복수는 실행한 그 순간 얻어지는 것이다." 


  캐서린은 그에게 화를 냈다.


  "왜 죽지 않아? 네 놈한테 죽은 놈들이 몇인데, 그 유령들은 네 발을 잡아 지옥으로 끌고 갈 힘도 없나? 왜 서 있어? 왜 당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아!"


  칸은 일일이 대응해주지 않았다.


  "네가 엘을 유린하고 이용하고 죽였어. 네가 신경도 쓰지 않은 사이에 줄리안도 그런 식으로 죽었겠지. 난 그들을 위해 복수했어. 내가 복수를 얻었다고 했잖아!"


  칸은 이번엔 어떠한 진실도 응용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복수하기 위한 자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방법을 말해주겠다."


  캐서린의 눈동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빨개졌다. 칸은 자신의 밑에 놓여 있던 엘리자베스의 눈을 그 위에 덧대 보았다. 똑같았다. 


  다섯 발자국밖에 걸을 수 없던 기력을 온 몸으로 분산시켰다. 그러고도 칸은 자신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를 몰랐다. 그가 이용할 실질적 증거들이 없었으므로 그는 거짓을 지어냈다. 


  "내 목숨을 가져가야 네 목표가 이뤄지는 거라면 너는 평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다."


  캐서린은 이제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나를 봉인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해라. 그러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그녀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죽었으니 적어도 억울함은 없을 거다."

  "줄리안은?"

  "난 그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모든 인간에게 저마다 죽은 이유를 붙여줄 수 없는 것처럼." 


  추운 성인의 도시에서는 태양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해는 빨리 저물고 하늘은 밤이 올 것처럼 변했다. 잭 브리지스의 자세도 변했고,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표정도 변했지만 칸 누니엔 싱만이 고고했다.


  캐서린은 끝내 눈물을 흩뿌리며 손을 거두었다. 뿜어져 나오던 바이러스가 멎었다. 곧바로 동족들이 일어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칸은 그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칸은 살짝 눈동자를 좁히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은 더 이상 그를 마주하지 못했다. 온몸을 보호구로 꽁꽁 감싼 덩치 큰 남자들이 그를 붙잡으러 나왔다. 굳어버린 잭의 펜은 종이에 구멍을 낼 것 같았다. 잭 브리지스는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과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눈물, 마지막으로 칸 누니엔 싱의 올곧음을 어떻게 버무려야 할지 골똘히 고민했다. 


  캐서린이 등을 돌린 뒤에야 칸은 웃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마무리된 것은 오로지 20세기의 여정이었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9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23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잭 브리지스가 작게 접힌 편지를 건넸다. 제 딴에는 가장 우직해 보이면서 지위도 높을 것 같은 사람을 고른 거였다. 그는 몰랐지만 월터가 그것을 가지고 정복자의 거처로 사라졌을 때에도, 잭은 자신이 글 쓰는 시간을 방해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세 장의 종이를 빼곡하게 채웠을 때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잭은 의아했다. 잭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코트 자락만 봐도 잭은 남자가 인류를 멸종 직전까지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뒤편에서 문을 닫아주었다. 잭은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방은 단출했고 무시무시한 복수호가 잘 보인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점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일단 남자를 세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잭은 책상 앞 의자를 비워 주었다.


  "일단 여, 여기라도 앉으시죠."


  칸 누니엔 싱은 인간을 힐끗 쳐다보고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잭은 살짝 떨어져서 섰는데 마치 갑판 아래의 선실 같은 공간이라 천장이 그의 머리에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지금 잭이 잔뜩 움츠러든 것은 아니었다. 잭은 칸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려다가도 그의 차가운 안구를 보고는 잽싸게 시선을 내렸다. 그 때 칸이 입을 열었다.


  "이건 언제 받았나?"

  

  그의 긴 손가락에 잭이 전했던 편지가 끼어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베개 옆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창문 틈을 이용해서 몰래 흘려 넣은 모양입니다."

  "읽어봤나?"

  "아, 아니요."

  "저항군 무리에는 얼마나 끼어 있었지?"

  "예? 아,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1년은 조금 넘긴 것 같군요."

  "당시에 캐서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그로서는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얼떨결에 그 모든 것들을 고분고분히 답하고 있다가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닥터 캐서린입니까?"

  

  이번엔 칸이 조금 표정을 바꾸었다. 근본 자체는 바뀔 수 없다는 것처럼,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닥터들이 맴돌았다. 칸은 전장에서 녹색 옷을 나풀거리고 다니는 기록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추리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고차원적인 첩보전을 벌이기에 대륙은 넓었고 바다는 깊었다. 칸은 잭 브리지스에게 지시했다.


  "아는 대로 얘기해."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는 아마 인류에 남은 몇 안 되는 최고의 지식인 중에 하나죠. 사실 당신들…이 태어난 연구소에 합류하려다가 전에 있던 곳의 프로젝트가 길어져서 일정이 맞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로서는 아마 행운이었겠죠."


  말 많은 문필가 특유의 버릇을 못 버리고 잭은 벌써 몇 번의 실언을 했다. 다행히 칸의 안색이 잠잠했으므로 잭은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지금은 거의 인류 저항군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워낙 바쁜 분이라 저 같은 역사가가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요. 무기 만드는 곳에는 거의 출입하는 걸 못 봤고, 아무래도 전용 연구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칸은 잠시 생각했다. 강화인간을 만드는 데 참여하려고 했다면 유전공학에 밝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미묘한 경고의 뉘앙스를 품고 있던 편지의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 정복자와 그들의 동족들에겐 살상 무기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도 아는 영특한 여인이었다. 그 순간 잭이 막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엘리자베스 헤렌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더라고요."


  칸이 눈동자를 곧게 떴다. 덕분에 역사가는 움찔해버렸다.

  

  "…확실한가?"

  "저한테 언젠가 부탁을 했습니다. 쓰는 책에 그녀에 대한 내용을 넣어 달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의 친구라고 짧게 말해주더군요."


  제 아무리 역사가라도, 칸과 엘리자베스 사이에 있었던 일 등을 알 리가 없는 잭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정복자는 꼭 회상과 더불어 급박한 사고를 돌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제 아무리 인간을 복수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칸 누니엔 싱이라고 해도 자신의 박사와는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역사가는 가정과 추측에 익숙하지 않다. 대신 잭은 슬그머니 물었다.


  "대체 닥터 캐서린이 무슨 편지를 보냈기에…?"


  칸은 대답 대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의 함선을 발견했다. 복수의 이름이 빛났다.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 역시 진하게 언급했던 단어가 검은 선체 위에 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복수와 복수가 맞붙는다. 여러모로 잘 어울렸다. 일조량이 3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도시의 공기는 차갑다. 그도, 엘리자베스 헤렌도 상징과 은유를 좋아했다. 사실 닥터 헤렌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은유적 가치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칸은 형식적으로나마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 역사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흘려주었다. 잭이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놀라버렸다. 잭 브리지스는 정말로 고마운 일을 해 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는 빨리 저물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인간이 빚어낸 가장 위대하고 잔혹한 정복자가, 그 자신의 이름Khan에 맞게 반도를 뛰어넘어 단숨에 유럽의 대륙을 휩쓸면서도 그는 바다로 나오지는 않았다. 그가 영국을 나오고,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나오고 이베리아 반도를 나오긴 했지만 적어도 해전은 없었다는 얘기다. 인류 공동체의 입장에서는 혹시 그가 그 이름값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바다에서의 싸움에 약점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궁리를 할 수밖에 없는 맥락이다. 그의 특징이라 한다면 그는 지금까지 정복한 땅을 제대로 지배한 적이 없었다. 계속 영토를 넓혀 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닿은 땅에 존재하는 인간들은 모조리 말살시켰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표현하는 게 더 맞다. 정복자가 다스릴 만한 존재들은 오로지 그의 동족뿐이었으며, 그의 동족은 마치 수족처럼 그를 따랐다.


  그들이 옛 러시아 땅에 잠시 발을 붙이고 있었을 무렵 인류는 모든 상황을 고려하여, 그를 바다로 끌어내 보기로 했다. 인류는 태평양을 곧바로 건너 인조인간들을 공격할지, 아니면 멀리 돌아 지중해 등을 끼고 급습할 건지 고민했다. 먼저 그들은 전자를 선택했다. 인류의 전함은 각자의 국적에 맞는 깃발을 달지 않았다. 이미 그들의 조국은 무너졌으며, 나라보다는 그들이 살아갈 지구의 대지 그 자체를 탈환하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와 똑같은 이름을 지녔던 칸이라는 제왕이 유독 바다와 폭풍에 약했던 역사를 위안 삼으며 인류의 저항군은 항해했다.


  필자가 녹색 옷을 입고 태평양을 건너는 배 중 하나에 승선할 수 있었음은 대단한 행운이었다. 물론 인류의 승리를 지켜보진 못했다. 하지만 나는 멀쩡한 사지로 칸 누니엔 싱과 인조인간들이 누구보다도 노련하게 바다를 휘젓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이 정박했던 것은 말 그대로 다음 항해를 위한 정비 탓이었다. 그는 자신의 무차별적인 정복을 계속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고, 태평양이 서서히 코앞으로 다가오자 함선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었다. 휴식이 필요 없고 시행착오 없이 완벽한 설계도를 만들 수 있는 그들의 속도는 감히 인류가 따라잡을 수 없었다. 


  이제 녹색 옷을 입고 종군 기자처럼 전쟁터를 따라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다. 아마 그들은 훨씬 발달된 시각으로,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인간 역사가에 대한 자비를 베풀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마치 나의 초록색이 중립지대임을 표시하는 것처럼, 모든 포격이 나를 제외한 곳으로 떨어졌다. 인류가 자신이 만들어낸 존재들에 의하여 안타까이 터져 나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같은 인간으로서 가슴이 아프기도 했지만 그보다 필자의 시선을 사로잡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갑판의 끄트머리에서 그들의 빛나는 함정을 보았다. 배들은 피겨헤드도 없었고 멋들어진 이름도 없었다. 다만 단 하나, 원근법에 의하여 그것은 작게 흔들리는 하나의 천 조각처럼 보였으나 칸 누니엔 싱이 분명한 검은 자락이 마치 선심 쓰듯 보여준 듯한 글씨는 '복수Vengeance'였다. 그의 배에만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의 복수호를 보면서 나는 순수한 의미로 몸을 떨었다.


  오래 복수를 바라볼 수는 없었다. 내가 타고 있던 연합군의 배는 이내 크게 흔들렸고, 살기 위해서 나는 뛰어내려야 했다. 마침 갑판의 끝자락에 있어 위치도 좋았는데, 그 때 나는 꼭 칸 누니엔 싱이 나를 향하여 고개를 젓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가만히 둬도 가라앉을 배에 작은 보트가 접신했다. 나는 옷차림만 보고서 그들이 인조인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마 생존해 있는 유일한 역사학자가 아닌가 싶은 필자는, 그 타이틀에 더불어 최초로 칸 누니엔 싱에게 구조된 인간이라는 꼬리표를 얻게 되었다.


  그는 멀리서도 내 시선이 자신에 닿지 않고 복수라는 글씨에 닿았으며, 그래서 내가 경악한 이유가 자신이 아닌 배의 명칭이라는 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지만 내가 할 일을 하라는 듯 필기구들이 준비된 방에 나를 넣었다. 창문 너머 부두에 매인 복수가 보인다. 내 주위에는 없지만 복수의 함장은 어디서든지 느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약간의 경이로움마저 갖고 이렇게 쓰는 것이다. 


  자신의 배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이지 않은 것은 그에게도 상징성과 극적인 효과를 즐기는 안목이 있다는 증거다. 실로 그가 이름을 담아 지휘해야 하는 것 복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는 '복수'가 아닌 그 어떤 배도 가지지 않는 게 맞으며, 그에게 어울리지도 않으리라. 손을 쉬기 위하여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나는 놀랍게도 복수에 잠시 승선하는 칸 누니엔 싱과 눈이 만났다. 인류를 향한 공격적인 항해에 앞장 서는 우두머리로서 그는 더없이 모범적인 형상이었고, 그가 딛고 있는 배 또한 그러했다. 태평양 너머 살아 있는 인간들의 미래만큼 어둡고 탁한 선체가 차가운 공기를 받고 빛나고 있다.


  만약 인류가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찾고 싶다면 복수의 함장을 복수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 같다. 여전히 칸 누니엔 싱이 왜 나를 살려 놓았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그것은 필자의 내일보다 더 확실한 명제이다.  


- 『세상의 마지막 역사서가 될 뻔한 책』 중에서. 원저 잭 브리지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7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2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HFX-1500, 감히 그 인큐베이터의 일련번호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고 그저 모두 칸 누니엔 싱이라고 부르는 강화인간이 자신의 동족들을 이끌고 인류를 향해 벌인 복수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영국에서 출발한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와 이베리아 반도를 모조리 휩쓸고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의 주변까지 점령한 다음, 흔히들 옛날 명칭을 가져와 중앙 아시아라 불리는 지방까지 그 마력을 뻗치고 있었다. 산소도 애정도 없이 캡슐 안에서 수면 상태로 인도하기 위한 기체를 마시고 살았던 이들은 이동할 때마다 바뀌는 기후에도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사막 가운데서도, 만년설이 쌓인 산맥의 끝자락에서도 그들의 리더 칸 누니엔 싱은 변함 없이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고고할 뿐이었다.


  다만 제 아무리 강화인간들이라고 할 지라도 약간의 휴식은 필요했으므로, 밤 중에 그들은 대개 조용한 편이었다. 몇몇은 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눈과 몸을 쉬게 했다. 그것은 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신은 특별히 요청한 적이 없지만, 오히려 동족들이 그에겐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면서 언제나 아지트 일부를 떼어 준 덕분에 아늑한 고독을 더불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칸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각성 상태에 있었는지 헤아렸다. 50시간을 갓 넘었을 뿐인데 피로한 기분이 들었다. 사막처럼 건조하면서 설원을 흉내내듯 차가워지는 변덕스러운 기후 탓인지도 몰랐다. 칸은 그럭저럭 멀쩡한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이제 북극을 닮은 얼어붙은 땅만 점령한다면 그에게는 바다 건너 몇 개의 대륙밖에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다. 그 거대한 규모가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적막한 밤에는 희열도 잦아들어 정복자가 누릴 수 있는 충만함도 기를 펴지 못했다. 다만 약간의 피로를 느끼고 있던 칸은 손을 내렸다. 다가오는 방문자에게 완전히 얼굴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오늘 무리가 거처로 삼은 곳은 심하게 낡지는 않은 한 건물이었다. 예민한 그에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너무도 컸다. 문이 열려 있어 울림은 배가 되었다. 칸은 자신과 비슷한 검은 머리칼과, 태양이 화창한 오후의 하늘색을 동공에 칠한 자신의 동족에게 짧게 고갯짓했다. 월터라고 불리는 남자는 영특한 두뇌와 날랜 몸짓으로 리더를 성실하게 돕는 전사이기도 했다. 


  "아직 잠들지 않았나."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있어야 그 조용함을 만끽할 수 있는 법이죠."


  칸이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월터는 그곳에 앉지 않았다.


  "…계속 서 있을 건가?"

  "제가 앞으로 할 말을 고려하자면, 서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칸의 얼굴에 짧지만 월터가 무슨 말을 할지 추리해 보는 표정이 지나갔다. 동족들 중에서도 꽤나 예리한 눈초리와 감각을 가진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따금 형제들이 그러듯이 당신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지극히도 정당한 당신의 설명이나 명분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감성을 이끌어 내려 온 것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부탁 드리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월터는 주군을 앞에 둔 기사처럼 경건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칸은 침묵과 눈짓으로 이어질 어떠한 발언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월터는 더욱 자세를 다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받으신 이름의 뜻을 저희도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슨 뜻인가?"

  "저희들도 지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칸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월터의 말이 언짢아서가 아니라, 그의 부연 설명을 들었음에도 정확한 의미와 그 의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조합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리더를 잠시나마 혼란에 빠뜨리는 기염을 토한 월터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인간과는 다르며, 당신과 그보다 더 소중할 수 없는 기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당신이 저희들을 평등하게 대하려 노력하시는 점은 십분 이해합니다. 저희의 리더로서 가지신 더없이 고상한 성품이십니다. 하지만 평등은 아무런 차이 없이 찍어내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칸은 중간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월터는 계속 말했다.


  "아마 당신은 깨어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파악하고, 당신 앞에 들이밀어지는 첫 번째 불빛과 의료 기기를 증오하셨을 겁니다. 저희는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지만 당신과 같을 수 없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당신의 생각과 대답을 들었지요. 그들이 하나같이 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마치 성경을 전해 들은 기분이라더군요."


  행여나 고귀한 리더가 사고를 작동할 에너지를 소모할까봐, 차라리 한 쪽 무릎을 꿇는 게 나을 정도로 공손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고 있는 월터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신의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 왜 하필 성경을 들먹였겠습니까. 그것은 저희가 귀가 닳도록 들은 인간들의 지식 중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경이롭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저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경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한 그것은 굳이 진실 여부를 따져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중 하나이지요."

  "…월터."

  "당신이 저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평등은 저희에게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 출발지만 같았을 뿐, 그것도 찰나로 지나가 버리고 당신은 그 모든 존재 중에서도 가장 우월함이 확실합니다. 난폭한 지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권고가 아닌 명령을 받게 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며, 그것이 저희를 평등하게 대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닌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말까지 들어 놓고 계속 앉아 있는 자세를 고집한다는 것은, 적어도 행동으로는 월터의 말에 동감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므로 칸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월터가 서서히 자세를 낮추는 바람에 칸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칸이 일어난다면 그는 월터를 오만하게 내려다 보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었다. 칸은 살짝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신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차라리 간단하고 받아들이기도 쉬운 명령을 바라는 이들이 집단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류를 벌하고 짓누르고 싶었을 뿐 자신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동족들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던 칸은 나름대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거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칸은 월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월터의 눈동자는 칸이 거울 속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색채를 넘어선 차이가 칸 누니엔 싱에게 혼란스러운 요청을 붙들었다. 칸은 월터를 일으켜 세울 것인지 고민했다. 월터에게 무슨 말을 해 줄 것인지도 고민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칸과 꼭 닮았으나 하늘색 눈동자는 너무도 달랐다.


  본래 지배하는 자인 그는 단호한 위험으로 전사를 제 다리로 일어서게 만들었다. 달빛, 혹은 별빛이 교회의 성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 마냥 안으로 치달았다. 월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칸은 자신의 소중한 동족들을 수식하는 어구에서 자신과 닮았다는 표현을 삭제했다.


  월터는 간신히 칸을 리더라고 칭하지 않았다. 칸은 마침내 부정하지 않았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6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09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줄리안에게,

  아직까지 내가 하는 일이 성공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내가 오랫동안 꿈꿔 왔던 목표였는데. 내가 밝히고자 하는 생명의 비밀은 언제쯤 내 손에 들어올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연구소로 돌아왔어. 이 짧은 편지를 내 방에서 쓸 여유도 없어서.


  줄리안에게,

  아직도 너한테 마땅히 말해 줄 내용이 없네. 그래도 저번에 편지를 보냈던 때보다는 힘을 내고 있어. 내가 이따금씩 편지를 보내는 걸 잊어버려도 이해해 주길 바라. 이 망할 연구소에는 보고서 용지만 날아다닐 뿐 마땅한 편지지도 없네. 



  Blank

  Blank

  Blank



  줄리안! 나 곧 시간이 날 것 같아. 무슨 일이 있어도 틈을 내고 말 거야. 이건 편지로 얘기할 수가 없어. 조만간 만나. 대신 근사한 곳을 예악해 준다면 좋고! 

  

  “일생의 업을 달성한 위인들이 아마 이런 마음이었을까?”

  정말로 성공한 거야? 난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누리고 있는 것들 중 수많은 부분은, 전에는 모두 말도 안 되는 거였어. 예전에 누가 두렵기만 한 태양빛을 끌어 모아 동력을 만들려는 생각을 했겠어?”

  그럼 우리가 더 만나기 힘들어지는 거 아냐? 앞으로 너는 최고의 과학자로 대우받으면서 온갖 러브콜을 받을 텐데. 아마 거기에는 나보다 훨씬 말도 잘 통하고 매력적인 남자가 있을 지도 모르지.

  “오, 줄리안. 나보고 과학자를 애인 삼으라고? 난 절대 그런 짓은 못 해. 걱정하지 마.”

  하지만 네가 그… 만들어낸 인간에게 정이 들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해. 어머니 같은 감정을 품을 지도 모르고, 다른 쪽일 수도 있겠지.

  

  —줄리안은 지금 집을 비운 상태입니다. 남기실 말이 있으시다면 삐 소리가 난 이후에 말씀해주세요.

  “바쁜 거야? 그동안 내가 편지도 잊어버리고, 전화도 잘 받지 않았지. 미안해. 네가 이 시간에 집에 없을 줄은 몰랐네…. 어, 일단 먼저 알려줄 게 있어. 더 이상 연구소 앞으로 편지를 쓰거나 보내는 일은 어려울 것 같아. 갈수록 보안 등급이 높아져서 우편물 하나 밖으로 넘기는 데도 이것저것 거쳐야 하는 일이 너무 많거든. 내가 자주 쓰는 메일 알지?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거기로 보내 줘. 정말 급한 일은 핸드폰을 통하면 되지만, 꼬박꼬박 받지는 못할 거야. 줄리안, 정말로 미안해. 조만간 어떻게 해서든 휴가를 내 볼게. 너랑 샴페인을 마시고 싶어.”



  Blank

  Blank

  Blank

  Blank

  Blank



  띠링, 띠링. 발신자 이름 줄리안. 띠링, 띠링. 조용히 벨소리가 낮아진다. 


  …내 조롱이 정당하다는 걸 알고 있겠지. 

  벨소리는 없이, 핸드폰의 불빛이 반짝. 엘리자베스가 눈물을 흘리며 웃는다. 


  줄리안에게.

  너에게 내 마음을 주고, 그것보다 더한 걸 너에게 주고 이제야 그걸 가져가려 하는 건 분명 나의 잘못이겠지. 혹시 전에 내 편지를 받고 테탱저를 사 놓기라도 했다면, 정말로 미안해. 나보다 그 샴페인을 더 멋있게 즐길 수 있는 파트너를 머지않아 만나게 될 테니까. 내가 앞으로도 영영 연구소에 묶여서, 행여나 너를 만나 상처주는 일이 없기를. 너를 감히 사랑하지 못하는 엘리자베스가.


  …줄리안….

  닥터.




  차라리 이걸 누구한테 보내면 좋을 텐데, 그래서 누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나누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너에게 보내진 않을 거지만 정말로 생각나는 사람이 없어서…. 너에게 이걸 감당하게 하진 않을 거야, 줄리안. 그래도 만약 이 세상에서, 이 끔찍한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면 아마 너일 거야. 그래서 너의 이름을 함부로 빌려서 고백을 하려고 해. 

  나는 영영 이 굴레를 벗어나 자유롭게 되지 못할 거야. 첫째로는 나에겐 그럴 자격이 없고, 둘째로는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도 알면서, 마지막으로는 적어도 나의 반은 여전히 이렇게 묶여 있길 원하고 있기 때문이야. 오류가 난 보고서를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는 것처럼 모든 게 그렇게 손쉽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무래도 나는 욕심 많은 과학자로서 너무 긴 시간을 산 것 같아. 이곳에 와서 지나간 계절의 변화가, 너에게 편지를 보냈던 횟수와 비슷해지고 있지. 그 시간동안 현미경과 핀셋으로 세운 왕국이 무너지는 모습을 봤어. 내가 채우려 하던 궁금증과 못된 속내에 뒤섞이게 된 공포도 봤고. 너는 자주 내가 머리가 좋아서 부럽다는 말을 했지만 이건 전혀….


  엘리자베스 헤렌이 다이어리에 어렵게 적었던 메모 뒤에 펜으로 그은 줄이 길게 남아 있다. 펜을 놓쳤거나 누군가가 펜을 잡은 손을 밀어낸 것 같다. 


  이것이 우리의 마지막이 될 것 같군. 


  그 순간 칸은 여자에게 속삭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커졌고, 인간들은 자신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연약한 존재의 머리가 잔인하게 으깨지는 것을 목격했다. 아주 작은 소음에 지나지 않았을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잔뜩 증폭되어 그들의 귀에 꽂혔고 여자의 머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가장 기괴한 방식으로 드러났다. 납작해진 여자의 윗부분이 스르르 내려앉았다.




  칸이 자신이 첫 번째로 죽인 여자와의 기억을 떠올린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막 그가 정복한 지역에서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인간들이 우수수 끌려나왔는데, 그 무리에 이름이 적힌 ID카드를 목에 걸고 있는 남자의 이름이 익숙했다. 엘리자베스 헤렌이 그의 앞에서 언급하길 피하면서도 가끔 죄를 짓는 듯한 눈빛을 보내던 인물과 똑같은 이름이었다. 칸은 줄리안의 얼굴을 몰랐으므로 눈앞의 남자가 엘리자베스의 줄리안인지 알 길이 없었다. 


  엘리자베스 헤렌이 마무리 짓지 못한 메모에 다른 글씨체로 몇 마디가 쓰여 있다.

  당신의 운명에는 절망이 예고되어 있었어.


  리더의 사살 명령이 늦어져 대원 하나가 칸을 조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칸은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이 줄리안에 대해서 더 알고 있는 사실이 있던가? 그의 눈동자 색깔이라든가 출신 지역이라든가. 하지만 그는 줄리안에 대해서라면, 엘리자베스 헤렌이 사랑했으며 자신과의 관계를 맺고 난 뒤부터는 죄책감을 가지고 사랑한 인물이라는 것밖엔 몰랐다. 회상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그의 두뇌는 엘리자베스가 줄리안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자신의 업을 토로한 것을 훔쳐본 기억을 끄집어냈다. 


  결국 칸의 대원이 그에게 심문할 사람이 있느냐며 물어왔다. 칸은 대원을 바라봤다가 자신의 위치와 역사를 따라 차갑게 고개를 저었다. 무릎이 꿇려진 인간들에게 총격이 쏟아졌다. 처음으로 칸은 자신의 전쟁에 대해 연기처럼 희미한 불편함을 느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의미를 찾길 꿈꿔왔어요

그것은 생명의 비밀, 나는 왜 또 다른 시도를 위하여 여기 있는 걸까요?

진실이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내가 그것을 똑똑히 바라볼 수 있을지,

내가 이 사슬들을 끊고 내 자신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을까요?


*


내 심장을, 내 영혼을 당신에게 주었어요.

이제 그걸 돌려주도록 하지. 그건 당신의 잘못이야.

당신의 운명은 황폐했고, 자신의 일을 되돌릴 때까지 살고자 발버둥 치라고 정해져 있었지

나는 나를 당신에게 주었었어요

이제 그걸 돌려줄 테니 나는 내가 가야 할 여정을 시작할 것이다


*


내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이야기와 영광이 모두 끝나버렸어요

그건 오래 전에 끝난 거였어




Theme From 'Jillian' by Within Temptation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그의 이름과 걸맞지 않게 칸 누니엔 싱은 조악한 유리 감옥 안에서 말했다.


  아마 그들의 책임자였던 것 같군, 그가 말했지. 그는 실험체 중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들을 거라고는 예상도 못했지만 과학자들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나는 7분 정도를 일찍 일어났다고 한다. 내가 들었던 최초의 언어는 여전히 생생해. 그는 들을 수 없는 관객을 앞에 두고 마치 연설하듯 목소리를 냈다. 새로운 종들은 나를 자신의 창조주요 근원으로 축복하지 않겠는가? 행복하고 뛰어난 수많은 생명체들이 나로 인해 지금 탄생하게 돼. 그 어떤 아버지도 나만큼 자식으로부터 크나큰 감사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는 못할 것이네. 깨어나고 나서 제일 먼저 배운 것이 언어였기 때문에 나는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었던 박사의 말뜻을 금방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그 모든 말에 반대하게 되는 데에도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


  칸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가 무엇을 근거로 행복을 들먹였는지는 글쎄, 아마 우리가 뛰어나므로 자연스럽게 행복이 따라 온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지. 처음으로 우리를 만들었던 과학자들이 아닌 인간들에게 내보여졌을 때가 있었다. 온갖 유니폼들이 늘어서 있었고 그들의 만족해하는 눈동자가 있었다. 기억하기로는 내가 완벽하게 깨어나고 나서 한 달이 겨우 지났을 때였다. 


  그들의 만족은 곧 두려움으로 바뀌었지. 첫 번째 전투를 거치고 난 다음에 나타난 변화였다. 내가 인간들을 증오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은 도무지 책임감이라고는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맞섰던 적도 결국은 다른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들의 사지가 완전히 관통되어 으스러지고 흉하게 뜯긴 모습에 감정이입이라도 한 모양이었는지, 그 때부터 인간들의 억압과 그릇된 유희가 벌어졌다. 나는 예전에도 쉽게 잠들지 않았다. 그래서 동족들이 수면제에 못 이겨 겨우 잠에 빠졌을 때 약물로 나의 형제를 죽이는 인간을 볼 수 있었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아는가? 어찌 생명을 가지고 장난을 칠 수 있느냐면서, 피조물에 대한 의무를 다 하라고 했다. 


  유리 감옥은 매끈했지만 그의 미소는 왜곡되어 보였다.


  우리들에겐 그 어떠한 것도 인간들보다는 더 친절하게 다가왔다. 처음으로 내몰렸던 전장에서 사실 인간들은 우리에게 무기를 건네주지 않았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았으니 가장 극한 상황에서 그것이 발휘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거지. 그 때 우리는 이미 가장 야만적인 형태의 폭력을 허락 받은 것이 아닌가?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인간들은 우리를 만든 것만큼이나 우리를 멋대로 증오했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적대적인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그 어떠한 종족도 믿을 만한 근거 없이 적들과 손을 잡지는 않는다. 


  칸은 순식간에 바늘 자국을 먹어치워 버리는 자신의 피부를 보며 다시 웃었다.


  나를 증오해도 상관없어. 그것이 순리다. 우리는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닮은 존재들이니까. 하지만 내가 벌이는 행동을 멋대로 악으로 규정하지 마. 내가 잔인한 건 내가 너무 비참하기 때문이야.  


  냉소 짓는 칸의 앞에서 레너드 맥코이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식으로든 웃고 있던 칸 누니엔 싱과는 달랐다. 칸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곧 누군가를 해칠 수 있는 물건이란 아무 것도 들지 않는 의사의 눈에 맺히는 수분 같은 감정을 보고 그는 의아해졌다. 레너드 맥코이는 단 한 번의 깜빡임으로 눈동자를 깨끗이 만든 뒤에 젠장, 이라는 한 마디를 내뱉고는 그쳤다. 투명한 유리를 피해서 맥코이가 고통스럽게 입술을 물었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4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05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칸 누니엔 싱의 집단을 만든 연구원들은 그들의 무리에 드물게 소년과 소녀를 섞었다. 그들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면서 관찰을 계속 이어가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봤자 20살 이하의 미성년은 딱 두 명 뿐이었는데, 과연 소년 쪽이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경이로움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행동력을 발휘했다. 아지트에서 몸을 말고 있던 조그마한 유사인간은 그의 리더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들은 무언가를 파괴하는 것만큼이나 재건과 적응도 빨랐다. 전투 도중에 약간은 상했을 도로는 적어도 핏자국은 닦인 채 깔끔했으며 피어올린 서늘한 연기가 화약 냄새와 먼지를 식혔다. 소년은 그들 사이에서는 전투복으로 통하는 검은 강화수트를 입은 이웃들을 지나, 입구가 완전히 으스러진 한 기관의 건물 앞에서 거대한 콘크리트 조각을 의자로 삼고 있는 칸을 발견했다. 소년이 자근자근 다가왔으나 그는 금방 소년이 왔음을 알아챘다.


  “라이언.”


  그의 목소리는 어느 가족들보다 부드럽고 듣기 편했다. 소년은 그 음성에 자신의 이름이 흘려 담겼다는 것에 흠칫했다가 부서진 돌조각들을 넘어 그의 위대한 지도자에게 다가왔다. 라이언이 칸의 옆에 앉기 전 그가 들고 있는 패드 쪽으로 목을 쑥 내밀었다.


  “그건 뭔가요?”

  “안에서 발견한 것이다. 대개 이런 장치에는 우리들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들이 들어 있는 편이지.”


  라이언이 크게 쪼개진 건물 조각을 딛고 일어났다. 칸이 자연스럽게 소년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라이언은 가족이자 이웃인 그들의 정당한 원정에는 아직 참여할 수 없었으나, 모두의 리더에 관해서는 들은 말이 많았다. 칸은 전투에 나서는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수트를 입지 않는다던데,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피에 젖어서 금세 입기가 곤란해진다는 게 그 이유라고 들었다. 라이언은 슬그머니 칸의 눈동자를 살폈다. 타블렛에 나타나 있는 글씨를 읽고 있는 모습 자체는 썩 고압적으로 보이진 않았다.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칸이 고개를 들었다. 라이언은 그의 동작에 힘입어 말을 들었다.


  “저는 사실 이 정도 되었으면 인간들도 저희에게 호의나 친절을 베풀어 줄 것 같거든요. 인간들이 저희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라이언은 고민하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사실 누굴 죽이는 게 바람직한 일은 아니잖아요.”


  라이언이 부지런히 눈동자를 굴리며 칸의 안색을 살폈다. 아직 소년은 지도자의 수많은 면모를 헤아리기 어려웠다. 칸은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소년의 얄팍하지만 순수한 희망을 존중했으므로 유연한 표현을 고심했다. 그가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지자 라이언이 차츰 얼굴을 숙였다.


  “지금부터 내가 왜 이런 잔혹한 여정을 선택했는지 설명할 거다.”


  라이언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동족들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인간들을 접할 기회가 훨씬 많았다. 그 중에는 나를 가르치려 하는 인간도 있었고 나를 질투하는 인간도 있었으며, 나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숱한 시간들 중에서 나는 가장 중요한 부류를 만나지 못했다.”

  “어떤 부류요?”

  “우리를 동정하거나 도와줄 사람들.”


  라이언은 냉정하고 견고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지도자가 입에 담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던 단어들을 듣고 잠시 얼떨떨했다. 소년은 감히 그의 청록색 눈동자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어떠한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존재하는 무수한 사람들 중에서 우리들과 그들이 사회 속에서 자주 그러는 것처럼, 동등하고 너그러운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인간들은 우리를 가르쳐서 자신의 발밑에 두려고 애쓰거나, 질투와 두려움을 앞세워 우리가 사라지길 소망하거나 억지로 우리 앞에 무릎을 꿇고 싶어 했다. 결국 나는 그들과의 공존을 단념했지. 이런 이들은 우리와 화해를 약속해도 결국엔 그것을 어기고 만다.”


  칸은 무릎 위에 내려놓았던 패드를 집었다.


  “애초부터 인간의 호의는 우리와 어울릴 수 없는 성질의 것임을 기억해라.”


  살짝 일그러지는 그의 눈썹과 눈동자 사이에서, 라이언은 칸 누니엔 싱의 진득한 우울함을 본 것만 같았다. 칸은 떠났으나 소년은 그 자리에서 이젠 지도자가 앉았던 콘크리트의 한 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라이언은 내심 경우의 수에 포함시켰던 그의 원한이라든가 허점을 하나도 발견하지 못하고 칸의 정제된 명분에 사로잡혔을 뿐이었다.


  한편 칸은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도 막을 수 없이 인간들이 심어 놓은 것이라면 무엇이든 뿌리채 뽑아버리고 파괴하면서, 자신이 그린 폐허를 감상하며 쾌감을 느끼고 싶은 은밀한 본성을 감췄다. 모든 걸 밝히지 않아도 그는 일부의 진실만을 응용하는 데에 능했다. 칸은 그들의 거처로 들어가면서 아직 일어서지 못하고 있는 소년을 힐끗 보았다.


  언젠가는 소년에게도 복수를 이해시킬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무인 행성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하지 않은 그들은 사실 시작부터 죄를 품고 있었으나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었다. 집단의 유일한 소년도 시간이 지나면, 그들을 태어나게 했다는 이유만으로 인간들을 소멸시킬 권리가 있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었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3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04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박사는 오래 전에 바닥에 처박힌 그녀의 가운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가운을 끌어 당겨 주머니에서 밴드를 찾아내 느슨하게 머리카락을 묶었다. 아무리 책상을 옮겨 다녀도 연필이나 펜, 숱한 종이들밖에 없다. 박사는 오늘도 영광스러운 하얀 가운을 자신의 예민해진 살갗을 가리는 데 썼다. 어떤 자극이 이어져도 조각상의 재료처럼 하얗기만 한 타인의 다리에도 그녀가 볼 수 없는 안구가 붙어 박사를 만족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잔뜩 흐트러진 박사와는 달리 감쪽같이 깔끔한 남자는 사실 그녀의 가운이 그렇게 사용되는 것을 즐겼다.


  “여전히 당신은 사랑 없이 사랑을 나눠.”


  책상에 기대어 있는 남자가 자신의 박사를 내려다보았다. 여자는 정교하게 깎인 보석 같은 그의 청록색 안구를 마주하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흥미롭다는 아찔한 미소가 지나갔던 그의 눈빛을 떠올렸다. 더불어 그것보다 적나라하게 목젖을 드러내면서 자랑스럽게 풀어 헤친 머리를 흔들던 자신의 모습이 거의 무감했던 남자의 눈동자를 가렸다. 


  “이건 당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야.”


  그녀가 가만히 가운을 끌어 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역사상 유명한 여왕과 같다. 그녀는 인간을 뛰어 넘은 존재를 창조한 집단의 일원이었고,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인물을 담당하는 박사였다. 닥터 엘리자베스 헤렌은 그러한 자신의 특성을 일종의 설득력 있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녀는 표현대로 부탁하듯 자신을 의탁하는 피조물을 향해 풀죽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걸 몰랐다.


  “…하지만 적어도 나를 보고 배울 수는 있잖아요.”

  “자신이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당신은 내가 가지고 있는 가치와 동화되길 원했다. 난 당신에게 배울 것이 없어.”


  자신이 망설임 없이 지배자의 칭호를 붙여준 남자의 머리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갈색 머리칼에 애써 묻히는 다양한 향기에서 시작하여, 대개는 가운으로 덮고 있어야 하지만 날을 거듭할수록 다채로워지는 상의에 무엇보다도 그녀의 눈동자는 자신의 피조물에게 더 근원적인 것을 바라고 있었다. 엘리자베스는 더 이상 말하지 않는 칸에게서 살짝 물러나 자신의 옷을 모았다. 


  “전부터 그런 생각을 했지.”


  엘리자베스가 손을 멈췄다. 칸은 자정이 지난 뒤에는 박사를 제대로 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들이 사랑할 수 있는 건 그들의 DNA에 그러한 성분이 들어 있기 때문이라고. 그 깊이에 상관없이 인간들은 사랑의 과정을 거쳐서 탄생하니까.”


  잠시간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연구소는 인큐베이터들이 작동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다. 소리도 숨결도 빛도 모자란 공간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가운의 가슴팍 부분을 저도 모르게 꼭 쥐었다.


  “당신들은 나와 같은 존재들을 만들면서 무엇을 생각했지?”


  각기 다르게 빚은 유전자들이 맞물리면서 혹시 부적합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그녀를 비롯한 모든 연구원들이 노심초사하던 시기에, 다른 기술자들은 강화인간들의 눈동자라든가 머리카락의 색깔을 고민했었다. 엘리자베스는 어느 엔지니어가 칸 누니엔 싱에게 청록색의 동공을 부여할 결정을 내렸는지 몰랐다. 그의 창조자 중 하나면서도 그에 대해 모르는 점이 많다는 것은 자주 엘리자베스가 칸을 감당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엘리자베스가 대답할 마음이 없어보이자 칸이 대신 냉정하게 결론지었다.


  “당신이 나를 애정하여 만들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없어.”


  모든 연구원들이 그러했었다. 그들 개개인의 독특한 기질을 모조리 삼켜버린 중대하고도 역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전까지, 연구원들은 사소한 감정과 연관된 것들은 전부 뒤로 미루어 두었었다. 그 특별한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자를 모욕하기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며, 마침내는 절망으로 몰아넣기에 이른다. 


  “오늘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일은 전부 끝낸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다.”


  칸은 책상에서 벗어나 그의 인큐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엘리자베스는 칸의 뒷모습을 보면서 그의 속내를 추측하려 애썼다. 처음부터 자신이 인큐베이터에 갇혀 살아갈 존재는 아니라는 것은 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엘리자베스는 얌전한 칸의 등에서 묵과할 수 없는 위선을 느꼈으나 곧 애틋해져버렸다. 순간적인 충동에 그녀는 박사의 가운을 던져버리고 자신의 몸을 보았다.


  인큐베이터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엘리자베스가 고개를 돌려 칸을 바라보았다. 엘리자베스는 그가 잠들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칸 누니엔 싱이 순종적인 자세를 포기하게 되면, 자신은 함부로 그를 빚고 그를 마음에 품었던 인생을 포기하게 되리란 예감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 뒤 엘리자베스는 칸과 딱 한 번의 자정을 더 보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