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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 & Montgomery Scott

- Written by. Jade


Engineer's Log





Log 1


  23세기의 기술로 우주 내 도약이 가능한 함선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0일 남짓이었다. 물론 이후 각종 기능들을 테스트하는 데 배를 건조한 만큼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함선의 모양이 갖춰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50일이다.


  늘 대단할 정도로 짧다고 여겨졌던 그 50일에 스콧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엔터프라이즈호를 다시 만드는 일에 50일이 걸린다는 건 그만큼 그가 스타플릿이 던져준 임무에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평화와 안락함이 가득한 요크타운이 아닌 무시무시한 샌프란시스코의 본부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전범 한 명을 무찔렀더니 더욱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같은 공간을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스콧은 정말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을 쳐다보았다. 문틈 아래에서 하얗게 응결된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스콧이 그 문을 열고 싶지 않은 데에는 안쪽이 춥다는 것 말고도 너무나 많은 이유가 존재했다. 얼굴이 거칠고 과묵한 스콧의 친구조차도 이 일에선 멀어지고 싶다면서 요크타운 어딘가에 숨어버렸다. 스콧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카드키를 바라보았다. 영광스럽게도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스타플릿에서도 몽고메리 스콧 한 명밖에 없었다.


  스콧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면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트레이닝을 잘 받은 장교가 10명쯤 있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 고맙게도 스콧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스콧은 김이 서린 내부마저 이겨내고 윤곽을 드러낸 73개의 캡슐들을 무겁게 쳐다보았다.


  스타플릿은 하필 전범들의 수용소를 고칠 수리공으로 스콧을 골랐다. 이에 스콧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승무원들의 반응은 몹시도 뜨거웠다. 커크는 막말을 쏟아냈고 스팍은 함선이 파괴되는 위기와 생명의 위협을 간신히 지나온 장교에게는 충분한 육체적 및 정신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으며, 맥코이는 인체에 해가 되지 않지만 아주 요란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은 아주 많다며 스콧에게 귀띔했다. 스타플릿은 단 한 마디로 승무원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스타플릿 최고의 엔지니어 자리를 다투면서 강화인간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한 바 그들에 대한 환상을 품지 못할 인물이 스콧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스콧은 극저온 캡슐들이 보관된 창고에 서 있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스콧은 말없이 컴퓨터를 켰다.





  ―…그게 다인가? 기계가 낡아서 그런 거라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 캡슐들은 3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진즉에 망가졌어야 하는 물건들이에요. 이 시대에 캡슐과 맞는 부품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수리도 여의치 않습니다. 차라리 캡슐을 새로 제작하는 게 나아요."


  스콧은 개인 트랜스포터 장비에 오를 때 이미 예상했던 결과를 읊고 있었다. 극저온 캡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들도 너무나 오랜 시간을 견뎠다. 사실 이런 경우에서 엔지니어들은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이 배운 학문은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캡슐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하네. 그 때까지는 캡슐들의 동결 시스템은 작동해야 해. 그렇게 만들 수 있겠나?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완벽한 수리는 불가능합니다. 전처럼 동결 온도를 유지하려면 물리적으로 냉매를 넣는 게 가장 안전할 겁니다."


  알아보도록 하지. 


  그 말과 동시에 스콧은 소리 내어 숨을 뱉으려다가 급히 입을 붙잡았다. 통신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그 자의 캡슐에는 문제가 없나?


  스콧은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질문을 이해했다. 


  "다른 것들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이전보다 온도가 올라가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른 강화인간들도 그 온도에서 생명 반응을 보여주고 있진 않아요. 아직까진 버틸 수 있어요."


  알겠네. 그 부분은 특히 신경써주길 바라지. 그리고 앞으로 일지 형식으로 캡슐의 점검 상태를 기록해놓으면 네트워크를 통해 이쪽에서 확인하겠네. 수고하게. 


  화면이 꺼졌다. 스콧은 목구멍 아래에서 틀어막혔던 숨소리를 시원하게 흘렸다. 그의 호흡은 희미한 연기를 피우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스콧은 의자를 홱 돌리며 일어났다. 그는 맨 앞쪽에 놓인 캡슐을 마주본 자세로 멈춰 섰다.


  얄팍한 얼음이 맺힌 투명한 외관부를 통해 보이는 콧대와 입술이 있었다. 스콧은 그 선명도가 이전에 비해서 얼마나 옅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화인간들을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봉인되는 일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스콧은 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이기도 한 칸 누니엔 싱의 불완전한 실루엣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캡슐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때 칸은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Stardate 2262. 58


  캡슐 내부의 온도는 영하 180도였다.


  여전히 한기라는 단어로는 아우를 수 없을만치 냉혹한 환경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한 강화인간의 세포가 꿈틀거렸다. 고작 16도가 달라졌을 뿐인 혹한과 혹한의 변화를 기어코 감지한 육체는 소리 없이 한 번 펄떡였다. 하지만 캡슐 안은 여전히 추웠다. 고도로 섬세하게 빚어져 같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그 완성도를 자랑했던 자질이 발생되기에는 일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도는 영하 179도로 내려갔다. 강화인간은 일어날 수 없었다.


 칸 누니엔 싱은 자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깨어나고 있었다.





  커크는 스콧이 연락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통신을 받았다. 그는 스콧과 하나된 마음으로 엔터프라이즈호의 위대한 기관실장을 전범 수용소로 유배 보낸 스타플릿 간부들을 한참 욕해준 뒤에야 스콧의 안부를 물었다. 스콧이 할 말은 '목숨은 잘 붙어 있고 무지 춥네요' 정도 뿐이었다. 커크는 50일 내내 스콧이 잡혀있는 일은 없도록 힘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다행스러운 사실이 있다면 커크가 즉시 스타플릿 제독들과 담판을 벌이지 않아도 잠은 원하는 곳에서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스콧은 오늘의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모니터에 일지 프로그램을 띄워놓았다.


  "어, 으음…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1일."


  스콧은 자신이 빚어낸 표현이 낯설어 눈썹을 찡그렸다.


  "시설에 와서 극저온 캡슐을 처음으로 점검했다. 짐작했던 대로 캡슐의 하드웨어가 노후화되면서 핵심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었다. 꼭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볼 수야 있겠지만 고쳐야 하는 캡슐이 73개나 되니, 냉매를 억지로 주입해주지 않으면 한창 내가 수리를 하고 있는 도중에 깨어난 강화인간들이 내 등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일단 나는 엔지니어지 화학자가 아니라서 냉매에 대한 부분은 부탁을 넣어 놓았다. 스타플릿은 캡슐의 온도가 너무 많이 떨어졌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불렀지만 기록을 비교해본 결과 이전의 정상적인 온도와는 최대 15도가 차이났다. 그러니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수준은 아니었다는 거다. 일단은 하루에 4번씩 온도를 체크하려고 한다."


  술술 일지를 녹음하던 스콧이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윗사람들은 아직 그들을 더 재워놓고 싶은 모양이다. 캡슐이 새로 제작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천 년은 지나야 깨어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스콧의 입이 굼뜨게 움직였다. 스타플릿 간부들이 확인하게 될 일지에 사견을 집어넣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고가 아닌 일지를 작성하는 자들은 탐험가나 역사가이지 타인의 가치관을 두려워하는 족속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옳다거나 잘못 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지 종료."


  스콧이 모니터를 껐다. 극저온 캡슐은 지속적으로 구동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시끄러운 전자기기 하나가 꺼지자마자 내부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스콧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단부에 형광빛 표식을 단 캡슐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위급 상황 시 동일하게 생긴 캡슐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분자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 같아 스콧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들을 챙겼다.




* * * * *



Stardate 22**. **


  칸은 소리를 들었다.

  그가 들은 첫 번째 소리는 어떤 암호가 담긴 주파수나 의미가 담겨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칸은 몸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로 자신이 의식을 되찾아버렸음을 깨달았다.

  의식이 활성화되는 느낌이 갈수록 뚜렷해지자 칸은 문득 현재의 날짜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30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도 몰랐다. 칸은 자신이 또 얼마나 오래된 유물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답답해했다.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6일."

  단서는 또 청각을 통해 들려왔다. 칸은 목소리의 주인을 추리하기에 앞서 날짜부터 헤아렸다. 2262년, 자신이 잠들고 나서 고작 3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이 확실해졌다. 벌써부터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여 소화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이 벌써부터 몇 가지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칸은 그것들을 다 제쳐두고 목소리 자체에 집중했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는 앞서 들었던 엔지니어 로그라는 말도 곱씹었다. 금세 정답이 도출될 것 같았다.

  "오늘은 맥코이 소령이 강화인간들의 심층적인 조사를 하기 위해 다녀갔다."

  칸은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맥코이도 현재 캡슐이 유지하고 있는 온도에서 생명체가 깨어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그의 일은 그것으로 다 끝나는게 아니란다. 의사 양반도 고생 좀 하실 것 같다."

  그가 내뱉는 특정한 어구들과 독특한 음색이 칸의 머릿속에 충분히 저장되었을 때 칸은 정답을 얻을 수 있었다. 캡슐 바깥에는 3년 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장교가 있는 것이었다. 칸은 기척의 정체 때문에 자신이 함선에 실려 우주를 유영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기 계속 있으니까 진짜 춥네. 이거 확인하시면 안에 난방기구 하나라도 들여놓을 수 있게 해주세요. 어우, 진짜."

  칸은 곧 자신의 가설을 폐기했다. 이곳이 엔터프라이즈호라면 남자는 '기관실장 일지' 라며 말머리를 열었을 것이었다. 칸은 지금도 재직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3년 전까지만 해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남자와 함께 지상의 어느 공간에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확인한 캡슐들의 상태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맥코이 소령이 캡슐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 오작동을 일으킨 캡슐이 하나 있긴 했지만 긴급한 부분은 보수를 해 놓았다. 소령에겐 굳이 밝히지 않았지만 하필 그 캡슐이 가장 온도 변화가 심한 요주의 녀석이라서 신경이 쓰인다. 빨리 냉매가 도착해야 할 텐데, 생명을 얼리는 용도로 쓰일 만한 냉매가 지금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역사 속 유물이기 때문에 애를 먹는 것 같다."

  칸은 남자가 언급하는 캡슐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칸의 캡슐에 문제가 생겼다면 인간들은 그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상황을 설명할 확률이 높았다. 강화인간 중에 이름이 알려지고 역사에 기록된 자는 칸이 유일했다.

  이름에 관하여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던 칸은 불현듯 일지를 녹음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제임스 커크가 그를 스콧이라고 소개했었다. 

  "만약 그 캡슐이 기어코 강제 배출을 일으킨다면 정말 큰일이 날 것이다. 강화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회복 캡슐에서도 강제 배출이 벌어진다면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드시 쇼크를 겪게 된다. 몇 년 간 영하 196도에 갇혀 있다가 역시 영하 100도보다 훨씬 낮은 환경에서 강제로 밖으로 꺼내지게 된다면 아무리 우월한 생명체라고 해도 쇼크사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스콧의 음성이 살짝 아래로 꺾였다. 

  "그리고 오늘 맥코이 소령이 칸과 에디슨 함장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 있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찾는 자들. 소령의 말을 듣고 나자마자 나는 그것이 적응력의 문제보다 윤리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고 단정했었다.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자신이 처한 배경과 시대가 추구하는 목표라든가 사상에 대해 판단하고, 그것이 만일 옳지 않을 경우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에디슨과 칸 모두에게 그런 점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갑자기 노이즈가 줄어들었다. 변동을 거듭하던 내부 온도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 전부터 칸은 스콧의 말을 알아듣는 데 무리가 없었으나 덕분에 그는 더욱 쉽게 청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생각해보니 경우가 복잡했다. 에디슨은 아마 처음부터 스타플릿의 함장 역할을 맡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행성에 불시착하여 선원들을 잃고 구조마저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를 그 행성까지 보낸 스타플릿과 행성연방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분노한 것 같다. 이렇게 봐도 에디슨의 방향은 틀린 것이 맞다."

  에디슨이라는 자의 얘기는 생소했다. 칸은 일단 경청했다.  

  "반면에 칸은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제작된 인공적인 존재다. 또한 나는 그가 가진 어느 부분까지 인간의 설계가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인간이 칸의 파괴적인 사고에도 손을 댄 것이라면 내가 맨 처음 속단했던 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콧은 말이 없었고 칸은 입술을 움직일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했다. 불완전하게 정립된 화자와 청자와의 관계는 냉기와 침묵 사이를 몇 분간 떠돌았다.  

  "…하지만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이 또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모쪼록 그 놈이 쭉 잘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길고 깊은 문장은 발화되지 않았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한 사람이 기지개를 켜며 흘리는 신음이 들렸다. 창고에서 홀로 의식을 가진 자가 되어버린 칸은 그 지위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생각했다.




  19**년 **월 **일


  모든 생명들에게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순간순간이 기억으로서 뇌리에 남아도 그것이 최초이기에, 당장 그 생명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장 의미가 깊은 조각은 다신 헤집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지만 영원히 풀 수 없는 인생의 난제이기도 하다. 

  칸도 마찬가지였다. 그조차도 자신이 눈을 뜨고 나자마자 겪은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통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문제를 해체한 것은 첫 번째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탓이었다.

  신비로운 구경거리를 보듯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칸의 인큐베이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7분이나 일찍 일어났다는 말을 했었다. 칸은 일부러 그 인간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아마도 7분쯤 칸의 얼굴이며 빛나는 눈동자 따위를 꼼꼼히 관찰하고 있다가 다른 인큐베이터들에서도 반응이 오자 서서히 흩어졌다. 

  한 남성이 중앙에서 느닷없이 목청을 높였다. 칸은 그의 이름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 남자의 이름과 존재까지도 없애버린 칸은 훗날 그의 말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의 허영에 찬 연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칸의 머릿속에서 증오스러운 인간 남자가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들이 창조한 생명체들의 행복은 연구원들을,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부활이라는 대목에서 온 인간들이 열광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우고 나서 칸은 인간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제물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만 부활의 기적이 발생했다. 어느 날 내몰린 전장에서 아무런 무기도 건네받지 못한 칸은 자신과 그의 동족들이 부활의 위업에 숨겨진 그림자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은 가장 야만적인 형태의 폭력을 허락받은 것임을 체득했다. 

  그 뒤로 인간과 강화인간은 서로 증오했다. 300년의 간극이 칸에게는 너무나도 무용해서 그는 줄곧 인간을 증오했다. 그의 기억력이 무뎌지지 않았듯이 인간도 변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칸은 한 번이라도 자신을 비참하게 여긴 날이 존재하는 건지, 그것이 자연히 잊혀졌는지 혹은 억지로 감춰졌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2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5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현대를 기준으로 손꼽히는 진보의 첫 번째 사례가 달 표면에 사람의 발자국을 찍은 것이라면, 이어 두 번째라 할 만한 사건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캡슐 안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두 손을 모으거나 옆 동료의 어깨를 붙잡으면서 캡슐이 무사히 열리길 바라고 있었다.


  켈빈 연구소도 처음엔 그러했다. 그곳은 전범 배양 시설이 아니라 자본금을 대는 정부의 요구를 최대한 반영하여 연구를 진행하는 평범한 국가 부설 연구소였다. 연구원들의 너무나도 순수한 표정이 캡슐의 표면에 어렸다. 누군가가 캡슐이 배출되는 소리에 맞춰서 마개를 딸 샴페인을 들고 왔다.


  자동 카운트다운에 돌입한 캡슐이 하나씩 꿈틀댔다. 샴페인을 든 연구원의 어깨가 들썩였다.


  곧 가장 왼쪽에 있는 캡슐부터 하얀 연기를 내뿜기 시작했다. 샴페인의 마개가 퐁 위로 튀어 올랐고 연구원들은 주먹을 움켜쥐며 기뻐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잔을 나눠주며 샴페인을 즐겼다. 칸의 탄생은 그토록 행복한 분위기 속에서 발생하였다. 


  캡슐에서 태어난 인조인간들은 눈을 뜨기 전부터 이름이 있었다. 작명에 조예가 있다면서 일을 자청한 4명의 연구원들이 심혈을 기울여 지었다고 하는데, 칸이라는 이름은 시뮬레이팅에서 나온 이미지가 상당히 고압적이기에 생겨났다. 


  “어때, 동의해?”


  연구원이 칸에게 물었다.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칸은 그 당시에 8천 개의 영단어를 알고 있었음에도 짧게 대답했다.


  “…그다지.”


  연구원은 입을 한 번 내밀고 말았다. 칸의 그 대답이, 그의 눈에는 모두가 명암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인간에게 특별히 상냥하거나 고압적인 이미지를 부여하기는 어렵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켈빈 연구소가 영국 정부로부터 돈을 받아 만든 캡슐은 36개였고 칸을 포함한 36명의 인조인간들은 이를테면 1차 테스터들이었다. 연구소 측은 3개월간 그들을 인조인간 그 이상의 강화인간으로 제련한 뒤 작업이 성공적이면 한 차례 더 캡슐을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한창 각국의 언어를 학습하고 있는 인조인간들은 자유 시간에 독서를 할 것을 권장 받았다. 연구원들은 일부로 연구소 곳곳에 작은 책장을 설치해 책을 깔아두었고, 비판적 사고력이 다 발달하지 않은 생명체들은 꽤 고분고분하게 연구원들의 권고를 따랐다. 


  칸은 3일 만에 개수가 늘어난 책꽂이를 바라보았다. 지나가던 하얀 연구원들이 칸을 보고 아는 체를 했다. 칸은 자신에게서 멀어져가는 연구원들이 잡담을 하는 걸 들었다. 그들은 칸을 볼 때마다 그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눈동자에 관해 한 마디씩을 남기곤 했는데, 그들은 주로 칸을 우주의 무엇과 자주 비교했다. 


  마침 천체를 다룬 책이 새로 책꽂이에 입성한 참이었다. 칸은 그것을 펼쳐 읽었고 1시간 뒤 독서를 그만두었다. 저자가 객관적으로 글을 쓰지 못했다는 판단이 들어서였다. 인간들은 다각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전혀 없는 것에도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온갖 주관적인 성질을 부여하는 습성이 있는 게 분명했다.


  연구소에 있는 가장 큰 창문으로부터 하얀 햇빛이 들어왔다. 칸은 굳이 그 너머가 궁금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조각들은 어차피 전부 단조롭기 때문일 것이었다.





  “…색깔을 보는 게 잘못된 거라고 생각했단 말인가?”   


  재판관은 지극히 인간답게 질문했다. 단순히 두 개의 색깔을 구분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모든 색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존재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사실 엄격한 재판관이라면 지양해야 할 태도였겠지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결국 모두 일반인에 불과했다. 구경꾼들은 소리 없이 재판관의 질문에 그들의 의문점을 실었다. 


  “그렇다.”

  “어째서?”

  “세계는 흑과 백인 게 더 잘 어울리니까.”


  재판관은 그만 품위 없이 벙찐 표정을 짓고 말았다. 


  “신을 추앙한다면서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교회를 짓기도 하고, 아무런 대가도 없이 오지로 나가 복음을 전파하는 인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나 같은 존재를 만들어서 생명 창조라는 영역에 도전하는 게 또 인간들이지. 이런 모순에 장식은 필요 없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가장 깨끗한 진실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고, 고작 그런 이유로 전쟁을 일으켰다고?”


  “너희들의 입장에서는 전쟁이었을지 모르나 나에겐 일종의 정화 작업이었다. 본질을 흐리는 것들은 닦아내야지. 너희도 틀린 건 수정을 거치지 않던가.”


  인간들은 칸의 언행에 분노했다. 당장 저 파렴치한 전범에게 돌덩이를 던지고 싶어서 엉덩이를 들썩이는 사람들이 수두룩했다. 울타리 역할을 맡고 있는 사람들이 팔을 들어 군중을 진정시켰다.


  레너드 맥코이만 칸 누니엔 싱처럼 미동 없이 눈을 치켜뜨고 있었다. 


  맥코이의 눈에는 지극히 정상적인 세상이 들어오고 있었다. 의자는 낡았다는 느낌이 드는 갈색으로 칠해져 있고 천장은 조금 때가 타긴 했지만 아이보리 빛을 띠고 있었다. 재판관이 팔을 올리고 있는 책상과 칸이 앉아 있는 단상은 명암과 채도 모두가 다른 색깔이었으며, 격식을 갖춘다고 검정색 옷을 빼입은 사람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어느 한 구석은 다른 옷들을 입고 있었다. 맥코이는 아무래도 그것들이 모조리 획일화되는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맥코이가 그렇게 가장 아름답지 못한 오류를 실감해보려 애쓰는 동안 전범의 진술이 이어졌다.


  “연구원들은 처음엔 몇 번 내 안구를 교체했다. 그들과 같은 걸 보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하면 다른 존재들보다 좋은 성적을 내고 있는 날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물론 나는 내가 보는 게 맞는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내 태도만큼이나 그들이 노력한 결과도 완고하게 바뀌지 않으면서 연구원들은 점차 지쳐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 2차 생산에 돌입하기 전에 날 폐기하려고 했다.”


  재판장은 꼭 칸의 강연실이 된 듯했다. 샌프란시스코의 사람들은 유럽에서 벌어진 일을 자세히 알진 못했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흥미가 가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진보라는 것은 색깔 있는 천이 아니라 형이상학적인 사고와 다양한 차원에서의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인간들이 나를 만들면서 이루고자 했던 가치는 이른바 나의 결함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연구원들을 보면서 나는 내가 아니라 그들이 완벽하게 잘못된 존재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고 날 태우기 위해 지펴 놓았던 불을 역이용했다.”


  맥코이는 켈빈 연구소가 불에 타버렸다는 뉴스를 읽었던 걸 기억했다. 그 날 오후에 영국은 켈빈 연구소가 어떤 일을 벌이고 있었는지 발표했고 최초로 칸 누니엔 싱이라는 이름이 사람들에게 퍼졌었다.


  칸의 입이 다시 부드럽게 열렸다.


  “바깥으로 나오니 나는 요주의 인물이 되어있더군. 내가 인간들이 결점이라고 여기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는 반쯤 무력행사를 강요받았다. 나는 박멸당해야 했다. 정신 나간 색맹이었으니까. 그걸 뒤집으면 나에게도 똑같은 논리가 있는 거였으니 나는 싸움을 수락한 것이다.”


  “설마 전쟁을 본인의 정당방위라고 포장하고 싶은 건가? 인간들이 먼저 자신을 죽이려 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인간들을 죽였다고?”


  “당신이 나에게 일을 벌인 경위를 물었으니 그에 맞는 대답을 한 거다. 내 행동에 대해 내가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앞서 말했다.”


  사람들이 다시 왈칵 뒤집어졌다. 이번엔 바리케이드들의 노력에도 진정되지 않아 재판관이 법봉을 휘둘렀다. 


  “조용, 조용!”


  법봉이 다섯 번 책상을 꽝꽝 내려 친 다음에야 주변이 가라앉았다. 재판관은 눈썹을 엄하게 굽히고 피고를 쳐다보았다. 반면 칸은 한 번도 재판관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


  “그럼 왜 여기서는 항복한 거지? 이 땅에 오니 색깔이 보이기라도 했나?”

  “그렇다.”


  그러면서 칸은 손을 꺼내지 않고 눈으로 맥코이를 가리켰다.


  “정확히는 저 인간을 목격한 순간부터 내 업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멈춘 것이다.”


  맥코이에게 순식간에 조명을 다 넘겨버린 칸의 안면이 살짝 일그러졌다. 맥코이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본 칸이 인상을 찡그렸다. 레너드 맥코이는 우쭐해하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았다. 칸이 보기에 맥코이는 그가 최초로 색의 혼란에 빠졌을 때 보았던 것과 똑같은 낯빛을 띠고 있었다.


  그 날 재판은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다.





  겨울의 궁전은 황량했다. 정원의 풀은 모두 죽었고 찬 기운을 내뿜고 있는 짙은 구름 때문에 출입구나 조각품, 분수 등은 본래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곧 비나 진눈깨비가 내릴 것 같은 날씨였다. 칸은 거대한 캐논을 내리고 돌로 꾸며진 화단에 앉았다.


  대륙 중부의 겨울은 그가 제일 긴 시간을 할애했던 영국과 비슷한 측면이 있는 것 같았다. 차가운 안개가 자주 끼면서 생명력이 넘칠 때와 그렇지 않을 때가 지나치게 판이했다. 반사적인 분석 작용을 자극하는 환경 속에서 칸은 얼어붙은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아래로 휘어지는 나뭇가지처럼 슬그머니 몸을 숙이고 싶었다. 


  칸의 얼굴이 까만 땅바닥과 가까워졌다. 그렇게 되자 칸은 땅의 진동과 그것이 전해주는 소음을 더욱 선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전차들이 궁전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칸은 캐논을 걸치고 걸음을 옮겼다. 궁전 안에는 그가 밟거나 타고 오를 수 있는 것들이 많았다. 칸은 정원을 벗어나 궁전 입구 앞에 서 있는 동상의 어깨에 걸터앉았다. 인간들이 사용하는 전차들은 그 성능이 뻔한 데다가 포신을 들어 올릴 때 굉음을 내는 멍청함까지 갖고 있었다.


  전차가 쿵쿵 달려왔다. 칸은 전차의 정면을 겨냥해 캐논포를 쐈다. 광선은 무척 아슬아슬하지만 대신 깔끔하게 포탄이 날아가는 부분만을 도려냈다. 전차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자 칸은 캐논을 손에 쥔 상태로 동상을 밟고 뛰어올랐다.


  전차들은 사이좋게 커다란 구멍을 나눠가졌다. 칸은 자신이 처음으로 내려앉게 될 전차의 위쪽에 다시 한 번 캐논을 날려준 뒤 자신의 몸을 통째로 내부로 내리꽂았다. 안에 있던 두 인간 군인이 삽시간에 절명했다. 칸은 뒤를 돌면서 그들의 기관총을 메고 캐논에 의해 뚫린 옆면을 이용해 곧바로 사격에 돌입했다.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오려던 군인들은 족족 이마에 총을 맞고 반대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번에 칸은 그가 포구처럼 쓰던 자리를 통해 지상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전투기가 굵은 구름덩이들을 뚫고 날아오는 중이었다. 칸은 묵묵히 캐논을 주웠다. 


  비행기의 아랫배 부분이 열리면서 미사일이 튀어나왔다. 칸은 왼쪽 어깨에 멘 기관총을 반동을 이용해 왼손에 쥐고 방아쇠를 당겼다. 미사일이 공중에서 조각났다. 더불어 미사일을 내려놓을 때 날개를 아래로 내려 살짝 비껴 비행하는 인간 조종사들의 전통적인 습성을 알고 있는 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캐논으로 다른 쪽보다 아래로 내려온 날개를 쏴 부러뜨렸다. 


  거짓말처럼 신속하게 전투기가 추락하며 궁전을 들이받았다. 하얀색 연기는 꼭 구름을 닮아 있었다. 촉촉한 자연의 상징과 핏기 어린 음울함 사이에 차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칸은 그렇게 세상을 인식했다.


  비행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멎었다. 칸이 출력이 다 떨어진 캐논을 밟았다. 오늘도 그는 그 자신을 이해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잠시 눈을 붙일 것이었다. 


  그 나날들이 가끔 지루했어도 고통스럽지는 않았기에, 칸은 지금 와서 온갖 종류의 혼돈을 끌어안고 있었다. 


  재판장이 닫히기 직전 재판장은 칸과 맥코이 중 누구를 특정하지도 않고 서로를 아냐고 물었다. 아마 재판장은 그것보다는 대체 상대가 다른 이에게 어떤 존재냐고 묻고 싶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칸은 그 숨겨진 맥락에 따라 맥코이의 의미를 모른다고 했다. 실상 칸은 맥코이의 이름조차 들은 적이 없어 그를 ‘저 인간’이라고 칭할 만큼 그를 몰랐다. 


  멀리서 아득하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부르짖는 인파들의 외침이 전해져 왔다.


  레너드 맥코이도 그 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는 잠깐 창밖을 보다 커튼을 쳤다. 맥코이가 관심과 힘을 쏟아야 할 건 칸 누니엔 싱의 목숨을 논하는 일이 아니라, 그 자신을 탐구하는 일이었다. 그를 포함하여 아무도 레너드 맥코이의 의미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맥코이는 무언가를 찾는 노력이라도 하고 싶어 서재로 들어갔다. 서재에는 온통 그가 의사라는 직업을 가졌음을 증명해주는 서적들로 가득했다. 맥코이는 입술에 힘을 주고 그곳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Nothing Else Matters by David Garrett

Originally sung by Metalica


Original Date 2015. 11. 07.



[STID/존본즈] Haze and Gold 01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6. 6. 23. 15:48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Nothing Else Matters Piano & Cello Cover by Brooklyn Duo

Originally sung by Metalica



  레너드 맥코이는 끝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걷어차이던 라이플이 끝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물건과도 같은 그 라이플을 만지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라이플은 몇 초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닥에 남아있던 가장 적나라한 전쟁의 흔적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 존재가 차근차근 인류를 몰살해가던,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횡단의 종착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물의 잔해들을 치워내고 잠시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으로 무너지지 않은 금문교가 서 있었다. 맥코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졌으나 한때는 너무나도 사악했던 라이플을 바라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커다랗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바라보던 모습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맥코이는 그 다리가 어떻게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동안 다리를 보고 있던 맥코이가 어깨와 목을 풀었다. 그는 의사였으나 부상자는 거의 없고 사망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라 그만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맥코이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부서진 건물들과 씨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속보에요, 속보! 모여보세요!”

 

  누군가가 종이 한 장을 급하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맥코이는 약간 느리게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무슨 일인데?”

  “그 미친놈의 재판 일정이 벌써 잡혔대요.”

  “남아있는 법원이 있었나?”

  “전범한테 뭐 얼마나 거창한 법원이 필요하다고. 대충 재판장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사형일 텐데.”

  “그런데 그 놈은 그렇게 금세 항복을 해 버렸나 봐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몰라. 아무튼 재판은 언제래요?”

  “이틀 뒤요.”


  호들갑스럽게 가져온 정보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칸 누니엔 싱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해서 화제는 아주 빠르게 통일되었다. 


  맥코이는 혼자 맨 처음 소식을 물어왔던 사람에게 접근했다. 


  “가져오신 종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는 맥코이에게 종이를 넘겨주고 곧장 파렴치한 전범을 깎아내리는 일에 동참했다. 맥코이는 사람들을 등지고 종이를 읽었다.


  급하게 찍어낸 공문 같은 종이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칸 누니엔 싱으로 알려진 전범을 엄격하게 구금하고 있으며 이틀 뒤 그에 대한 공개 재판을 행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인간이 살고 있는 대륙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존재가 어떻게 항복을 하게 되었는지, 그가 항복한 자리에 누가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다. 


  맥코이는 그때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의사로서 바깥에 나가 있었다. 과연 단신으로 여러 국가들을 소멸하고 다녔던 자의 무력은 악마적이었다. 의사가 굳이 살리려 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는 사람들일수록 다시 한 번 살해되는 자비 없는 현장에서 맥코이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비무장인 그가 살 수 있는 확률은 어차피 낮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영국과 반대 방향의 땅에 살고 있었던 덕택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맥코이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렇게 맥코이는 얼핏 초연한 듯하나 사태를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후퇴! 후퇴해!”


  전범은 검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전진했다. 맥코이는 전장에 나간 의사면서 한 명도 살리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때마침 총성이 울렸고 맥코이는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도 맥코이의 몸은 멀쩡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맥코이는 눈을 떠야 했다. 그가 눈을 뜨는 동안 도시는 참으로 조용했다. 더 이상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고 총탄도 발사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전범이 무기를 내린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저절로 탄식 같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당신, 지금….”


  전범은 맥코이가 서 있는 쪽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맥코이는 급히 물러나려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전범은 경악하고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평범한 의사일 뿐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전쟁의 일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맥코이는 전범을 응시했다. 그는 새하야면서 동시에 새카맸다. 그리고 진리를 본 회의주의자, 혹은 신을 본 무신론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맥코이만의 감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전범이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용감하게 팔을 뻗어본 것은 그러한 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전범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이 더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맥코이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의사가 되어 누구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전범은 맥코이의 정체를 물으며 무기를 놓았다. 하얀색 가운이 그를 부드럽게 가려주듯이 휘날렸다.


  맥코이는 그 나름대로의 충격을 받고 정지했다. 


  멀찍이서 최후의 전선을 짜려던 군이 웅성거렸다. 무시무시한 전범이 의사 가운을 팔에 걸친 남자 한 명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군인 하나가 돌격을 제안했다. 비로소 전범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는 걸 안 인간들이 그를 덮쳤다. 


  즉 칸 누니엔 싱은 레너드 맥코이를 직면한 순간부터 무력해진 것이었다.


  맥코이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칸의 이상 행동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공개 재판장에 가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아직 멀쩡한 쓰레기통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레너드 맥코이?”


  군용 재킷으로 자신이 관료임을 증명하고 있는 남자가 맥코이에게 손짓했다. 맥코이는 당국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수정했다.


  “잠깐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켈빈 연구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칸 누니엔 싱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그 외에 켈빈 연구소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곳의 연구원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연구소의 관계자들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은?”


  맥코이는 그쯤에서 발끈했다. 


  “없습니다. 이거 뭔가 취조당하는 기분인데요, 왜 자꾸 저에게 켈빈 연구소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10년 넘게 의사로 일해 왔어요. 런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단 말입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자신의 중얼거림도 질문자의 물음에 포함이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아뇨.”

  “그 반대의 경우는요? 칸이 당신에게 말을 걸었었습니까?”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했습니까?”

  “아니요.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워서 대답할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왜 그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는지 짚이는 점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에 관하여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그 질문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는 칸이 자신을 보고 공격을 멈췄다는 결과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맥코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문을 품어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본인도 왜 자신이 칸을 멈추게 만들었는지 모르는군요.”

  “맞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안전보장 위원회의 위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맥코이 씨는 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이틀 뒤 열리는 재판에 꼭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호출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죠. 나가셔도 좋습니다.”


  맥코이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고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는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지만, 뒤이어 맥코이는 상념에 사로잡혀 느릿하게 걸었다.

  




  임시 재판장으로 채택된 곳은 한때 창고형 매장의 일부였던 건물이었다. 재판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주최 측은 다소 품격이 떨어지긴 하나 최대한 사람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곳에 재판장을 꾸밀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조금 못 되는 시간동안 철제 진열대며 남아있는 상품들이 치워졌고 의자와 작은 단상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성한 의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일반 관람객들은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주최 측은 사람을 바리케이드처럼 세워놓고 의자가 마련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을 구분했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형편없는 재판장이었으나 맥코이는 차마 혀를 차진 못했다. 범죄자는 한 번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대단히 문명화되고 이성적인 사고는 오히려 박수를 받을 만했다. 맥코이는 재판장을 한 번 더 바라본 뒤에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는 맥코이를 의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무리가 웅성대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해는 되지만 불편한 광경이었으므로 맥코이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곧 재판관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말이 있은 뒤 5분이 지나자 검정색 가운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나타났다. 군중들이 환호했다.


  “사형!”

  “그 놈을 빨리 죽입시다!”


  바리케이드들이 군중들을 진정시키고자 바삐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힐끗했다. 귀한 의자를 배정받아서인지 그들은 꽤나 조용하게 눈으로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외치고 있었다. 


  “정숙하세요! 자, 피고 입장.”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칸 누니엔 싱은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걸어 나왔다. 그의 발이 내는 소리는 깨끗하고 위압적이었다. 칸을 인도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고, 칸은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모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자태로 피고석에 앉았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 몇몇이 진저리를 쳤다. 


  “기록을 위하여 피고는 이름을 정확히 대시오.”


  칸은 조잡한 질서의 주인공으로서 단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고요하게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칸 누니엔 싱.”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군중들이 또 괴성을 내지르려다 멈칫했다. 칸은 재판관보다 더 곧고 위엄 있는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맥코이는 그걸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는 칸이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칸은 맥코이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피고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를 밝히시오.”


  칸은 입을 열기 전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보통 인간들은 그것이당연한 생리적 미동인줄로 알았지만 칸은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향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그리고 칸이 레너드 맥코이를 시선의 중앙에 두고 눈꺼풀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세상의 온갖 색채들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칸이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다.”


  맥코이는 입술을 닫았다.



Original Date 2015. 11. 06.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Writing's On The Wall Violin Cover by JuNCurryAhn
Originally sung by Sam Smith
 

  ‘다름’이라는 것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틀림’과 혼동되어왔다. 그 유구한 착각은 어쩌면 사고력을 가진 생명체라면 피해갈 수 없는 일종의 감별 시험인지도 몰랐고, 이성이 발전하면서 넘어야 할 하나의 과제물일 수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것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사고력과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까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으리라. 


  그토록 공평한 시험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존재를 가리지 않고, 마침내 칸 누니엔 싱에게까지 다름과 틀림 사이에 놓인 갈림길에 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는 27일째에 문제의 시험지를 받아들었다. ‘만들어진’ 존재로서 교육받아야 할 것이 아주 많았던 그가 30일간의 언어 습득 프로그램을 마치기 직전이었다. 칸의 과제를 들여다보게 된 인간 연구원은 그는 온갖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조인간이 자꾸만 사물의 색깔에 대해서 제대로 된 언급을 하지 않는다는 걸 수상하게 여겼다. 연구원은 왜 저 꽃의 색깔이 빨갛다는 사실은 무시하는지 물었고 칸은 그 꽃은 빨간색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거기서 갈림길은 태동했다.


  아무도 칸과 같은 증상을 보이지 않았다. 시력 저하의 원인이 되는 요소들을 모두 배제한 최고급 안구를 낀 다른 이들은 한 사물을 보고 그것의 색깔을 디지털 색상표에서 골라내기도 했다. 인간인 자들도, 인간이 아닌 자들도 그에 대해서 부지런히 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에서 칸은 검고 하얀 숨을 내쉬었다. 그가 선 갈림길의 한쪽은 끝없이 하얗고 다른 한쪽은 끝없이 까맸던 것과 비슷했다.


  칸은 명암으로 인식되는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모두가 까만 길을 선택했다. 인간 연구원들이 보기에 칸은 잘못 만들어진 실패작이었으며, 한 가지 측면만 빼고 칸과 거의 모든 게 같은 존재들도 조금씩 그에게 의문을 가졌다. 그렇지만 칸이 보기에는 다른 자들이야말로 세상의 건조한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인간이 또 다른 인간을 빚는 역설적이고 오만한 세계에 축복과도 같은 다채로운 아름다움이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세상의 본질은 흑과 백이어야 마땅했다.


  그리고 칸이 그러한 결론을 내린 뒤에 이어질 수 있는 당연한 일들이 발생되었다. 그 어떠한 색과 만나더라도 타자를 없애버리는 검은 길에 들어선 이들이 중재될 방도는 없었다. 칸은 자신을 소각장에 집어넣으려는 인간 연구원들을 제치고 시설을 통째로 불태웠다. 이제야 학문적 지식들을 배워나갈 참이었던 인조인간들은 칸의 급격한 사고를 이해하지 못하여 그에게 외면당했다. 


  틀린 것을 바로잡는다는 강령은 곧 타자에 대한 말살전으로 심화되었다. 역사적인 관점에서는 흔한 일이었으나, 한 인공인간의 시선에서는 너무나도 처절한 사투였다.


  칸은 여전히 그 전쟁 속에 있었다. 


  그가 보는 건물들은 높이만 다를 뿐 색깔은 회백색으로 동일했다. 태양이 똑바로 서 있지 않아 몇몇 지붕과 창문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는 건 그 건물들이 본질적으로 회백색이라는 사실을 없애버리진 못했다. 그것이 칸의 진실이었다. 그것에 대해 달리 표현을 하는 존재들은 틀렸다. 홀로 명암의 진리를 주창하는 칸에게 끝없는 승리를 제공한 요인은 바로 그 고독한 부정이었다.


  칸은 조금씩 바닥에 끌려 먼지를 일으키고 있는 라이플의 총구를 들었다.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는 것은 라이플의 느릿한 움직임밖에 없었다. 그림자는 라이플보다 더 더디게 움직였으므로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몇 번이나 갈아 끼워졌던 그의 안구에 무채색의 증오가 모여 반짝거렸다. 칸이 라이플을 고쳐 잡았다.


  회백색의 건물들이 회백색의 연기를 내뿜었다. 그가 미리 설정해 놓았던 타이머의 숫자가 바닥나 폭탄이 작동한 것이었다. 칸은 사실 자신이 아무도 서 있지 않은 곳에서, 몇 번이나 그래왔듯이 혼자서 그 버석한 우매함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자신이 목표물에 한 걸음씩 다가가고 있는 와중에 자신을 응원이라도 해 주듯이 도시가 무너져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실상 칸에게는 볼품없이 서 있던 기둥들이 사라지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기에 그는 자신이 지나간 도시들은 전부 무너져 내렸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둥그런 연기와 먼지가 뭉쳐서 칸에게 더 짙은 회백색을 제공했다. 칸은 이제 라이플의 방아쇠를 당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그가 있는 곳은 바다와 가까운 항구 도시라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덕분에 회백색은 금세 날아가 버렸고, 칸은 너무나 낯선 파란색을 목격해버리고는 그도 모르게 라이플을 조금 아래로 떨어뜨렸다.


  또렷한 파란색 점이 힘차게 회백색의 장막과 검은 그림자를 헤치고 칸에게 다가왔다. 칸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고 사격했다. 총성은 건물이 부서지는 굉음에 묻혔지만 칸은 탄환이 아무것도 맞추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는 총을 다시 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라이플로 너무나 가까운 대상을 노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지식은 당장 그의 머릿속에 자리 잡을 수 없었다.


  부서진 도시의 가루들이 거의 다 날아갔다. 칸의 시야는 전례 없이 깨끗해졌으며 또 혼란스러워졌다.


  파랗기만 하던 것이 거리가 좁혀짐에 따라 형태를 갖추었고, 그러면서 더 많은 색깔도 함께 갖추었다. 손가락 한 마디도 채우지 못할 것 같은 양의 갈색과 검은색이 있었다. 은색이 신기루처럼 반짝거리기도 했다. 은은한 살구색이 군데군데 펼쳐져 있었으며 무엇보다 강렬한 파란색이 칸의 눈을 찔러댔다. 비정상이라는 끊임없는 판단에도 의연했던 그의 안구는 그것에 몹시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칸은 결국 걸음을 멈추었다. 주변에 더 이상 무너질 건물이 없었다. 쌓이고 다져져 하나의 법칙이 될 뻔했던 경험이 최초의 반례를 맞았다. 미리 마련되어 있던 고독의 시간은 끝났다. 칸은 아주 오래간만에 누군가를 마주했다. 그는 파란색이 너무나도 강렬한 존재였다.


  라이플이 고개를 숙였다.


  ‘다름’과 ‘틀림’이 그 명백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랜 옛날부터 서로 혼동되면서 심지어 반목해 온 것은, 한 쪽이 절대적인 명분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명분은 그것의 허점을 인식해야 할 집단들에게는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해 보일 때가 많다. 


  칸은 그의 세상이 무채색이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전쟁을 끌어 왔다. 그는 세상의 색채를 틀리게 보는 자들을 용납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 대한 해석은 수만 가지일지언정 그것의 형태는 하나다.


  칸은 라이플을 들지 못했다. 그는 이미 라이플이 목표를 맞추기에 최적화된 간격을 지났다. 회백색으로 분화된 덩어리들이 바람에 완벽하게 쓸려나갔다. 수없이 반복되는 사례로 보강되어 왔던 진실의 회백색이 칸의 눈앞에서 사라져갔다.


  라이플의 총구가 거의 바닥에 박힐 지경임을 알아본 파란빛의 존재가 움직였다. 타자를 마주할 때 간격은 좁으면 좁을수록 좋은 법이었다. 칸은 그가 다가오면서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을 보았다. 그 검은색은 다른 색들과 함께 있어서 아름다웠다. 심지어는 칸에게 가장 익숙한 검은색마저도 그의 기반을 산산이 해체하고 있었다.


  충분히 칸과 가까워졌다고 판단한 파란 존재가 그에게 손가락을 뻗었다. 칸이 팔을 쭉 펴면 모자람 없이 닿을 수 있는 간격만이 남았다.


  칸은 팔을 뻗으면서 눈을 감았다. 코끝에 스치는 공기가 더 이상 건조하지 않았다.


  온기가 칸을 눈 뜨게 만들었다.


  어느새 익숙해져버린 것 같은 파란색과,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검은색과, 낯설어서 더욱 다가가고 싶은 온순한 살구색과 정직하게 반짝이는 은색, 마지막으로 단순한 오차에 의해서 파괴의 위기를 면한 어느 다리의 금색이 칸의 온 몸을 덮쳤다. 칸은 그도 모르게 천천히 라이플을 놓았다.


  칸은 그 자신의 갈림길에서 드디어 고개를 한 번 돌릴 수 있었다. 자애로운 흰색이 그를 반겼다. 칸은 그 때 미처 발견하지 못했지만, 파란 존재의 한 팔에는 하얀색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Original Date 2015. 11. 05.



[NC/Khan] The Great Pawn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37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The Great Pawn




 이것은 캐서린 헤이스팅스가 강화인간들의 동결 이후 감방을 하나씩 수색하다가 찾은 기록이다. 


  누군가 그의 모습을 봤으면 아마 고상하게 전략을 짜고 있다고 말했으리라. 하얗고 검은 체스 판을 펼쳐다 놓고 혼자서 말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남자는, 그 지위부터가 군단의 우두머리였기 때문에 평범한 이들의 추측에는 비논리적인 점이 없었다. 월터 역시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내 체스판 위의 말들이 대단히 불완전한 것을 알고는 의문을 표했다.


  "다른 말들은 다 어디 있습니까?"


  판은 분명히 누구의 차례도 거치지 않은 첫 번째 시작점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다만 킹과 폰밖에 없는 점이 특이했다. 심지어 치워진 종류들은 책상 위에도 없었다. 질문을 던진 이에게 곧바로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월터는 혼자서 여러 가지 이론을 펼쳐보았다. 월터의 시선을 거치면 모든 것이 합당한 구석이 있는 시험일 수 있었다. 그 즈음에 칸이 입을 열었다.


  "예상외의 질문을 하는군."

  "제 질문에 잘못된 점이라도 있습니까?"

  "아니, 이런 구도가 가능한 지부터 먼저 묻지 않았다는 게 의아했을 뿐이다."


  월터는 쉽게 답했다. 


  "대단히 작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면 불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의 평대로 칸은 일부러 체스판 위에 왕과 병사만을 허용했다. 그는 그것으로 전쟁을 구상하지는 않았지만 대신 세상을 엿보았다. 전진과 동시에 인간을 무너뜨리는 강화인간의 리더가 보기에 자신과 인간들의 관계가 그러했다. 체스 판에 설 수 있는 말들 중에 가장 수가 많은 폰과 승패를 좌우하는 킹 사이에서, 그의 눈동자는 폰에 더 오래 머물렀다. 월터가 그 눈길을 쫓아 가봤지만 무언가를 얻지는 못했다. 


  그 짧은 에피소드 아래에 결국 시험으로 탄생하고, 시험을 업으로 삼는 월터의 상념이 적혀 있었다.


  같은 강화인간이 표현하는 칸 누니엔 싱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밑바닥도 모르고 야만적인 인물이 아니었다. 자신의 의미와 미래를 모르는 단순한 전쟁기계로 살아갔으면 오히려 그는 인류를 상대로 반기를 들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의 우월한 두뇌가 결코 자신에 대한 숙고를 멈추지 않았던 탓이었다. 월터가 칸의 체스 판을 받아들이는 방식 역시 여기에서 기원하였다.


  교묘한 플레이어가 다루는 폰은 자신보다 등급이 높은 말도 척척 잡을 수 있는 휘광을 얻게 된다. 월터는 킹과 폰만이 남을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고 칸도 크게 부정하진 않았으나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도 없었다. 용맹한 병사는 말을 탄 귀족도 벨 수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월터는 고민 끝에 게임의 후반부에 가서도 폰이 하나 정도는 남아 있는 광경이 흔하게 연출될 수 있음도 깨달았다. 한편으로 수가 많아 소모품으로 전선에서 버려질 수도 있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게 낮은 이의 생명력이었다. 


  칸의 똑똑한 기사는 그들의 리더가 체스에서 가장 흔한 존재와 자신을 동일시했음을 발견하고 나서 안타깝게 글을 마쳤다.


  헤이스팅스 박사는 월터가 쓰던 방을 둘러보았다. 감옥과 다름없는 곳이라 물건을 몇 개 놓을 수도 없이 좁았지만 그 점을 고려해도 깨끗하고 온순했다. 굵고 뭉툭한 펜과 얇은 공책이 그가 만졌던 전부처럼 보였다. 박사는 종이를 앞으로 넘겼다. 공책이 작아서 글씨를 줄인 흔적이 있었고, 간간히 쓰인 내용은 전부 그의 동족과 그가 신실하게 섬기는 리더에 관한 것이었다. 


  캐서린은 강화인간들이 영리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캐서린이 여기에 첨언한다면 칸은 용맹하고 요긴하지만 결국엔 부러질 수밖에 없는 용사의 애검과도 같은 존재였다. 어느 이야기에서도 검이 최종 장을 장식하지는 않는다. 캐서린은 칸 누니엔 싱과 그의 군대가 봉인된 현재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 즈음에서 캐서린은 흑색의 왕과 백색의 왕에 대해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 Narcissistic Cannibal, Khan Noonien Singh/Elizabeth Heren/Katherine Hastings

- Written by. Jade



The Moment of Failed Passing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생화학적 복수를 견딘 강화인간은 칸 누니엔 싱을 포함하면 73명이었다. 그럼에도 헤이스팅스 박사는 그들을 멸종시키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맞물려 있는 유전 염기를 떼어내는 방법으로도 그들을 완전히 죽일 수 없다면, 더 이상 어떤 방도를 생각해 내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는다는 기색이었다. 얼마 남지 않은 과학자들과 캐서린은 부산하게 회의를 했고, 이 일에 숟가락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 권력자들은 생명과학에 밀려났다.


  강화인간들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격리되어 있었지만, 그 중에서 칸 누니엔 싱의 처지는 특히 가혹했다. 최악의 전범 따위는 철심이 가득 박힌 고문 기구 같은 곳에 가둬 놓아야 한다는 캐서린의 발악마저 잠깐이나마 고려될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게 대륙을 걷고 산맥을 짓밟던 남자는 터무니없이 좁은 공간에 홀로 갇히게 되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은 철문에는 겨우 일자 구멍이 얇게 뚫려 있을 뿐이었다. 창문도 환풍구도 없는 곳이라 그 구멍으로만 유일하게 공기가 통했다. 그는 대개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안이 워낙 좁아 문이 코앞이었다. 그러면 기껏해야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을 두께의 구멍으로 강화인간의 파리한 안광이 빛나는 것이다. 실로 그것을 보고 놀란 가슴을 붙잡을 수 있는 노련함을 가진 건 캐서린 헤이스팅스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칸 누니엔 싱을 찾아오는 사람은 캐서린 헤이스팅스밖에 없었다.


  캐서린은 그의 방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공간이 너무 비좁은 탓이었다. 불가피하게 칸과 대화를 나눠야 할 때면 그녀는 분노하는 것인지 조롱하는 것인지 확실치 않은 청록색 눈동자를 언제까지고 바라보고 있거나, 틈새로 통신기를 던져주고는 수화기를 통해 이야기했다. 두 가지 방법 중에서 오늘 박사는 후자를 이용할 것 같았다.


  까만 통신기를 손에 쥐고 캐서린은 복도를 걷고 있었다. 사정도 모르는 정치가들은 아무렇게나 칸 누니엔 싱과 그 집단을 죽이라고 아우성이었다. 과학자들은 차선책으로 온갖 종류의 약물을 실험해 보고 있었으나 신통치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살아남은 강화인간들은 바이러스에 대한 항체를 생성한 상태였다. 캐서린은 그녀가 조금만 시간을 끌었더라도 칸이 죽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몰랐다. 그래서 그녀는 칸을 향했다.


  새카맣던 감금실에 청록색 불빛이 켜졌다. 칸은 캐서린의 발소리를 듣고 눈을 떴고 캐서린이 구멍 사이로 통신기를 내밀었다. 


  "오늘은 얼굴을 보고 얘기하고 싶은데." 

  "…서 있고 싶지 않아. 그냥 받아."


  그리고 캐서린은 복도의 차가운 벽을 대고 앉았다. 칸이 아무리 눈동자를 내려도 보이지 않을 사각지대였다. 캐서린이 플립을 열고 번호를 눌렀고, 칸은 전화를 받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기다렸다. 지독하도록 흉악한 전범의 감옥을 지키는 이도 없어 캐서린은 편하게 다리를 뻗었다. 멸망의 문턱에 서 있는 인류는, 어차피 그가 마음만 먹으면 목을 꺾을 수 있는 경비병조차도 아까웠다. 


  "넌 대체 왜 죽지 않지?"


  철문 뒤에서 칸이 웃는 소리가 났다. 캐서린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길목에서처럼 그에게 고함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강화인간을 괴멸시키는 데에 가장 가깝게 접근했던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는 다른 사람들이 예상하듯 모든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모순적이게도 캐서린은 자신의 적에게 하소연했다. 칸에게 말하는 것은 밖으로 새어나갈 염려가 없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히 뒷받침되지 않을 행동이었다.


  "왜 다른 인간들에게 얘기하지 않았지?" 

  "뭐를?"

  "나를 봉인해 준다는 전제 하에 내가 너한테 잡혔다는 걸 계속 숨길 생각인가?"


  캐서린은 일부러 목소리에 날을 세워 답했다.


  "내가 내건 전제는 아니야. 난 반드시 널 죽이고 말 거야."

  "우리를 가둬놓은 지역에 원자 폭탄이라도 떨어뜨려 보지 그러나."

  "지구 다 망칠 일 있어? 가뜩이나 네놈들 때문에…."

  "내가 망친 건 행성이 아니다. 인간들이지."


  풀어야 할 문제집의 페이지를 지적해 주는 듯한 말투였다. 낮고 작은 그의 음성에서는 이따금씩 숨소리가 섞였는데, 캐서린은 단언코 그것이 그의 비인간적인 눈동자만큼 버티기 어렵다고 말할 수 있었다. 허리를 기대는 것도 어려운 사방의 벽 사이에서 칸은 똑바로 통신기를 잡았다. 


  "네가 만들었던 그 바이러스가 가장 그럴 듯한 방책으로 보이겠지. 인정한다. 하지만 그걸 다시 이용하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거야. 인간은 도저히 가질 수도 없는 우수한 형질이 만들어 낸 항체를 뚫으려면 백 단위의 실험이 필요하겠지. 한 번 시도해 봐. 그렇게 된다면 나 역시 너희들을 다시 소멸시킬 여유를 찾을 테니 꺼려할 이유가 없지, 캐서린."


  인류에게는 저주와 같은 발언들 말미에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이름이 붙었다. 물리적인 파괴에만 능한 것이 아닌 칸은 캐서린이 볼 수 없는 곳에서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고, 캐서린은 순간 자신의 가운 자락을 세게 붙잡았다. 


  "…지금 밤인가?"


  달을 베어버릴 듯이 날카롭게 솟았던 언어가 뜬금 없는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캐서린이 수상쩍다는 듯 반문했다. 


  "뭐라고?"

  "여기서는 시간의 흐름을 가늠하기 어렵다."

  "…밤이지. 10시가 되기 직전이야." 


  칸은 그녀의 대답을 만족스럽게 여긴 것처럼 입을 열었다.


  "밤이 오기 전에 그녀는 다시 나를 사랑하고 칭송하게 될 것이다. 그런 어리석음마저 없다면 그녀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단지 런던의 연구소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영국식 악센트를 쓸 뿐이었지만, 그는 역사 깊은 땅의 문학적 가치마저 모조리 음성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오만함을 풍겼다. 덕분에 캐서린의 귀에도 그의 뜻 모를 말은 아름답게 들렸다. 캐서린이 미간을 좁혔다. 


  "엘리자베스 헤렌의 이야기를 해 줄 존재가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 인식하고 있었나?"


  그리고 칸이 허리를 유연하게 비틀어 철문에 바짝 몸을 붙였다. 그의 손에 있던 통신기는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강화인간에게 대항하는 무리 중 유일하게 인류의 생존이 아니라, 친구의 복수를 위해서 애쓰고 있는 캐서린은 칸 누니엔 싱이 발음하는 그녀의 이름에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통신을 끊어, 캐서린. 여기서 얘기하도록 하지."


  그의 육성이 철문을 뚫었다. 캐서린이 통신기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으로 가려진 통신기에서, 그녀가 등을 대고 있는 벽의 근처에서 동시에 칸이 그녀에게 말할 것이었다. 캐서린은 눈을 가늘게 뜨며 통신기의 플립을 끝까지 열어 놓았다. 그것이 캐서린의 저항이었다.




  "네 놈한테는 호의를 발휘하는 것도 아깝지만, 이건 인간적인 전통이니 잠들기 전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면 허락하겠다."


  칸은 그의 눈앞에 보이지도 않는 여인에게 말했다. 


  "그녀는 정확히는 밤이 오기 전부터 나를 사랑하고 칭송하며 찬미했다. 하루를 꼬박 도는 그 시간이 비로소 결실을 맺는 순간은 너무도 짧았지만 그녀는 반복했지. 그것이 그녀에게는 자신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녀의 지성을 폄하할 의도는 없다. 어쨌든 그녀는 나의 창조자였으니까."


  캡슐의 뚜껑이 닫히고 그의 얼굴 부분에만 간신히 덮개가 내려앉지 않았다. 칸은 눈을 감았다. 자신의 눈을 보여줄 인간은 근방에 없는 것 같았다. 인류를 구원한 박사이자 섬김 받아 마땅한 여왕이 된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되어야 그의 안구를 감상할 자격이 있었다. 과학자 하나가 성급하게 캡슐을 봉인하려다가 누군가에게 제지당하고 황급히 물러났다. 


  "그녀는 자신의 적을 사랑했다. 이런 짓에 익숙해져 마침내는 자신의 파멸마처 덤덤하게 바라볼 수 있었던 데에는 그녀 역시 그다지 정상적이지 못했다는 진실이 포함되겠군. 그리고 결국에 그녀는 엉뚱하게도, 자신의 벗들에게 복수를 하게 되었군."


  그가 캐서린 헤이스팅스를 위해 웃었다. 


  "내가 이 정도의 판단을 내릴 수 있을 정도로 알았던 여자가 몇이나 될까."




BGM : Linkin Park - The Requiem

God save us 
신은 우리를 구원하시고
Everyone will be burn inside the fires of a thousand suns 
인간은 천 개의 태양이 들끓는 화염 안에서 타오르게 되리라

For the sins of our hand 우리들의 손으로 저지른 죄를 위해
Sins of our tongue 우리가 언어로 빚은 죄를 위해
Sins of our father 우리의 아버지와
Sins of our young 우리의 젊은 날이 저지른 죄악을 위해서



[NC/칸월터] The Brave Knight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30 posted by Jade E. Sauniere

- Narcissistic Cannibal, Khan Noonien Singh/Walter

- 오리지널 캐릭터 페어링 주의.

- Written by. Jade



The Brave Knight



  안타깝게도 과학자들은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굉장히 소홀했다. 이를테면 그들은 강화인간들에게 맑은 공기에 대한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본질적인 기회를 박탈했고, 수면욕을 대폭 축소시켰으며 변질된 유전자는 정상적인 방식으로 후대를 이을 수도 없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인간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 가지를 모조리 잃은 것이다. 물론 그것이 칸의 복수심을 자극한 것은 아니었다. 또한 그것이 월터의 복종을 이끌어 낸 원인도 아니었다.


  그가 용기를 내어 추대한 위대한 지배자이자 동족들의 제왕은 기어코 수면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을 다 채울 작정인 모양이었다. 선잠이 들었던 월터는 곧 자신의 우두머리를 기억하고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동료가 부스럭거리더니 눈빛으로 물었다. 


  ‘어딜 가는 건데.’ 

  사실 동료도 월터의 대답을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을 터였다. 

  ‘그 분에게 쉴 여지를 줘야겠어.’ 

  동료는 희미하게 웃으며 월터를 보내주었다.


  실상 월터는 칸의 방을 딱 한 번 찾아간 경력이 있을 뿐이지만 영특한 머리는 금세 길을 기억해냈다. 태양이 휘휘 물러가고 밤이 차가운 입김으로 투덜대는 시각이었다. 칸은 대개 문을 열어 놓는다. 월터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여전히 그는 동족들을 자신의 피지배자가 아닌 동등한 동료로서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완전히 거두지 못했다. 월터의 발자국 소리가 이미 하나의 노크로 다가왔을 것이므로 그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가만히 목소리를 냈다. 


  “주무시지 않는 거 알고 있습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월터의 옆자리에 있었던 동료는 단번에 이렇게 평했을 것이었다. 누가 귀족 출신이 담당자가 아니랄까봐 기사도가 제대로 몸에 박혔구만.


  칸의 책상은 전략가의 그것처럼 크게 복잡하지는 않았지만, 월터는 책상 대신 두뇌에 의지하여 칸이 온갖 생각을 동시다발적으로 떠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맨손의 악력만으로도 전장을 지배하지만 그 이전에 철저한 준비를 잊지 않는 침착한 사령관이다. 월터는 감으로 그가 추대한 지배자가 70시간 동안 잠을 자지 않았음을 추측했다. 이제 칸은 고작 2시간을 버틸 수 있을 뿐이었다. 칸이 특별히 그를 물리지 않았으므로 월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남은 2시간을 다 채우려고 하셨다가는 재생력이 급속도로 떨어질 겁니다.” 


  칸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은 생각에 몰두해 있는 그에게 월터의 목소리는 마치 3층 정도 위에 있는 이웃이 속삭이는 것처럼 아련하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월터는 칸의 사고를 짐작했다. 기실 그의 방 주변에 많은 이들이 돌아다니는 것은 아니고, 밤이 깊어 수면을 취하는 동족들을 배려한다는 이유로 깨어 있는 이들은 차라리 밖에 나가는 걸 선호하는 시각이다. 월터는 아주 고귀하지만 어려운 임무를 수행하러 향하는 듯한 걸음걸이로 자신의 주군에게 다가갔다.


  월터의 담당자는 귀족의 후손이었고, 몇몇 이들이 장난삼아 부르기는 했지만 기사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담당자의 유전자가 월터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는 없음에도 월터는 박사의 그러한 일면을 닮았다. 그는 어렵지만 옳은 말을 꺼낼 줄 아는 심지가 곧은 기사였다. 그리고 그는 무기도 잘 썼다. 월터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그의 촉감이라든가 온도를 느낄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칸은 월터에게 관심을 두었다. 청록색 안구의 초점이 완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월터는 기다렸다. 기사가 신중하게 귀중한 육체에 손을 올렸다. 칸의 생각이 끝났다.


  “당신은 쉬셔야 합니다.”


  그러면서 월터는 드러나 있는 칸의 피부를 손끝으로 꼼꼼하게 짚는 것이었다. 칸이 조용히 물었다. 


  “그 말과 행동의 상관관계는…?”

  “당신에게 깊고 진한 휴식을 드리기 위함이지요.”


  지금은 가만히 멈춰 있지만 칸이 평소보다 반 정도만 힘을 불어 넣더라도 월터는 손가락 마디가 어긋나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사의 손길을 편히 받아들였다. 낡은 의자가 딱딱한 움직임으로 돌아가면서, 월터는 완전히 칸을 마주했다. 전등이 증발한 밤의 달빛보다 뚜렷한 칸의 눈동자를 월터가 손으로 닫아 내렸다. 칸은 이제 눈을 감은 채 월터가 전해주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손을 차분하게 풀어주다가, 온갖 사고에 신경을 집중하는 통에 경련을 억누르고 있던 다리가 정상적인 상태를 되찾고, 기사가 무릎을 굽히는 각도를 재듯 정확하고도 정중하게 올라가는 접촉 속에 칸은 월터가 아주 가까이 접근하고 있음을 알았다. 호흡으로 상대의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지만 동족의 움직임은 눈꺼풀 뒤로도 훤히 보였다. 월터는 막판에 입술을 움직여 말소리를 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자 칸이 월터의 시름을 덜어주었다. 


  “나를 불러봐.”

  “어떻게 말입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편히 계십시오, 왕이시여.”


  기사에 의해 왕이라 불린 자는 정말로 미동도 없었다. 전장에서 누구와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게 긴장하는 월터의 팔다리가 아릿하게 떨고 있었다. 월터는 제 나름대로 이 행동에 대한 논리적인 이유를 갖고 있었다. 오랫동안 수면을 미뤄왔을 경우, 제 아무리 강화인간의 육체라도 낯선 휴식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고 위축되는 일이 종종 있다. 월터는 순전히 자신이 스스로 받들고 싶어 자신보다 높은 자리에 올린 이를 편하게 해 주고 싶었다. 할 말을 마친 월터의 입술이 다른 목적을 위해 벌어졌다. 칸은 살짝 눈을 떴다가 다시 감았다.


  칸은 경력이 있어 낯설지 않았지만 월터는 달랐다. 담대한 마음가짐으로 주군에게 농도 짙은 접촉을 시도했던 월터는 막상 순간이 다가오자 순간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월터는 미숙한 기사 때문에 피식 올라가는 왕의 입꼬리를 느끼고 말았다. 월터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나려다가, 그 때까지도 가만히 무릎 위에 정지해 있던 칸의 손이 월터를 잡았다. 장난스럽게 문을 연 그가 월터를 끌어당겼다.


  입술은 소리를 낼 수 없어 대신 손이 칸의 의사를 전달했다. 위치를 고수하게. 월터는 그리하여 피할 수 없었다. 절제된 동작으로 칸은 월터의 등을 한 뼘씩 건너면서 옷에 가려지지 않은 목덜미를 향해 나아갔다. 처음 느껴보는 감각에 월터는 자신이 더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칸이 슬며시 눈을 떴다. 청록색의 동공을 통하지 않고는 도저히 생성될 수 없는 차분한 시선에 월터도 어쩔 수 없이 눈꺼풀을 올려 칸을 마주했다. 피부가 하나의 얼굴처럼 보이는 거리는 월터에겐 너무도 생소했다. 붙어 있는 입술을 거쳐 다시금 올라가는 칸의 입꼬리가 닿았다. 그 사이에 월터의 목에 손바닥을 댄 칸은 조금 더 오래 기사를 품었다.


  “…죄송합니다.”


  월터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무엇이 말인가?”

  “의도만 가상했을 뿐 제가 원했던 성과는 거두지 못한 것 같습니다.”


  천성처럼 달라붙은 기사적인 말투는 가시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평소와 다른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칸은 월터의 얼굴을 편하게 바라보기 위해 힘을 실어 등받이를 젖혔다. 


  “내가 효율적인 휴식을 취하길 원하지 않았나?” 

  월터는 끝내 더듬거렸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렇다면 그 목표는 성취되었어.”


  칸이 월터의 가슴팍에 대뜸 손가락을 올린 덕분에, 월터는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원하는 대로 잠을 청할 수 있겠어. 수고가 많았군.”


  칸은 그렇게 말하면서 그가 침대처럼 사용하고 있는 소파에 앉았다. 월터는 자신이 왕이 눕는 모습을 볼 수가 없어 얼른 인사를 올렸다. 칸이 피식 웃었다. 내가 눕는 것조차 마주할 수 없으면서, 방금 전에는 어떻게 용기를 냈는지 모르겠군. 다행히도 기사가 섬기는 주군은 놀랍도록 혜안이 깊어 머릿속에 떠오른 마지막 한 마디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칸이 소파에 몸을 눕히고 잠을 청했다. 등 뒤로 힐끗 그것을 확인한 월터가 자리로 돌아갔다.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Theme from 'End of an Era' by Zack Hemsey

- Slowly and Carefully

- Written by. Jade






  칸 누니엔 싱은 오늘 자신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마지막 날임을 직감했다.


  강화인간들은 여간해선 죽지 않는다. 인간들이 자연적으로 세포를 재생하는 것보다 몇 백 배에 달하는 회복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필요 없을 정도의 민첩함과 날카로운 악력과 비범한 두뇌를 갖고 있다. 칸이 끊임없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강화인간들의 특징을 십분 이용한 덕택이었다. 그는 자신이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일종의 괴생명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박사들의 보고서를 훔쳐본 뒤로 그것을 달달 외우고 있었다. 심지어 칸은 자신이 어디서 추출하고 어떻게 접붙인 유전자로 탄생했는지조차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만약 그들이 패배를 맞이한다면 이런 방식일 줄을 예감했다.


  아무도 그들에게 총을 겨누지 않았다. 이제 인류도 강화인간에게 검은 무기를 들이대는 건 소용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총구도 두려워하지 않는 강화인간들이 하나씩 무너진다. 이제 한낱 동료가 아니라 동족의 절대적인 지도자가 된 칸은 타의에 의해 뒤로 밀렸다. 도시의 차가운 바람이 더 날을 세워 그의 뺨을 할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러시아의 황제가 장대한 목적을 위해 계획적으로 세운 도시이며, 황제들은 대개 자비가 없기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뼈로 도로를 닦아 만들어진 도시였다. 칸은 그 의미에 미소 지었다. 


  적이 없는 가운데 칸을 벽으로 밀어낸 강화인간들이 쓰러졌다.


  엘리자베스 헤렌은 캐서린 헤이스팅스에게 편지를 보낸 적은 없지만, 줄리안에게 보낸 적은 있었다. 그리고 줄리안은 캐서린에게 연락했다. 자신의 연인에게 말하지 못한 창피한 사실을 박사는 친구에게 모조리 털어 놓고 울었다. 자신이 숨 가쁘게 가슴을 내어 놓았던 칸 누니엔 싱에게는 속 시원히 보일 수 없었던 깊은 눈물이었다. 엘리자베스는 지독하게 귓가에 달라붙어 있는 피조물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떼어 내려 애쓰는 캐서린의 음성에서 위안을 찾았다. 칸의 복수는 누군가 알아차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다. 그것은 그만큼 강렬했다. 하지만 캐서린의 복수는 그 자신을 불태울 기반을 찾지 못했기에 잠잠했고 그래서 아무도 알지 못했다.


  잭 브리지스가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메시지를 내밀었다. 그는 인류의 패배를 기록했고, 정복자의 복수를 기록하다가 인류의 기사회생을 기록할 역사가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칸은 쪽지를 받지 않았다. 펼쳐보지 않아도 캐서린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사람이기에 지금도 무사할 수 있는 잭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몸뚱이로 패배의 경계선을 그어 내리고 있는 동료들을 응시하고 있는 칸을 물끄러미 보았다. 잭은 곧 쪽지를 땅바닥에 버렸다.


  복수호가 태평양을 잔혹하게 찢어놓고 있을 때, 캐서린 헤이스팅스는 마침내 자신의 복수를 성공시켜 줄 열쇠를 찾아냈다. 조작된 염색체를 분리하는 바이러스가 그녀의 손 안에서 꿈틀댔다. 그들의 지도자가 가장 잔인하게 자신의 창조자를 지배하면서 캐서린은 방법은 오직 이것뿐이라고 확신했다. 캐서린은 가운을 입고 그대로 밖으로 나왔다. 엘리자베스 헤렌이라고 새겨진 명찰이 달랑거렸다. 연구소의 모든 것은 칸 누니엔 싱이 파괴했기에, 그것은 캐서린이 스스로 만든 명찰이었다.


  칸은 이곳의 이름이 한때 레닌그라드였음을 기억했다. 그는 그것보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훨씬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잠시 거점으로 삼았던 땅은 하필 성인의 도시였다. 칸은 이태까지 한 번도 논리적이지 못한 상징을 믿은 일이 없었지만, 다른 곳에 발걸음을 세워두는 게 더 나을 뻔했다고 조소했다. 성인의 도시에서 올바르게 태어나지 않은 피조물이 스러지는 건 당연하다. 캐서린 헤이스팅스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잭은 칸의 웃음을 보면서 그의 옆에 있을 수 없었다. 잭은 캐서린을 찾으러 나갔다.


  칸은 혹시나 자신이 거추장스러운 총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닌지 확인했다. 강화인간은 산소를 호흡하지 않지만 공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바이러스는 어쩔 수 없이 그의 몸을 공격할 것이었다. 칸은 문을 열려고 했다. 누군가 그 앞을 무너지는 몸으로 가로막고 있었다. 칸은 옅은 웃음으로 그에게 고개를 저었다. 칸은 조심스럽게 문 근처에서 월터를 치워냈다. 월터가 입을 벙긋거렸다. C, A, P…. 복수를 조선한 뒤 무리들 사이에 유행처럼 돌았던 호칭이었다. 칸은 자신의 얼굴에서 마지막 미소를 거둬들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자신과 반대로 흩날리는 하얀 가운에서 칸은 엘리자베스와 캐서린을 동시에 보았다.


  표정은 아직 굳건했지만, 그는 아주 조금씩 자신의 몸이 내부에서부터 끊어지는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잭 브리지스는 재빨리 자신의 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역사가의 녹색 상의를 가져오거나 필기구를 가져오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세포가 정지할 듯한 격통 위로 얼어붙으려 하는 대기가 내려앉았다. 칸도 캐서린도 입을 열지 않은데 주위가 오히려 부산했다. 


  "캐서린." 


  그가 드물게 엘리자베스를 불렀을 때와 같은 목소리였다. 팔락이는 가운 속 옷은 얇아보였다. 캐서린은 분명히 추울 것이다. 엘리자베스도 때때로 연구실에서 추위를 호소했다. 칸은 두 팔을 위로 들어 올리는 짓 따위는 하지 않고 그저 멈춰 섰다. 아득히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들렸다. 칸은 저절로 검은 파편을 사방으로 튀어 올리는 복수를 떠올렸다. 칸이 캐서린에게 말했다. 


  "복수를 얻은 것을 축하한다."


  빙결한 하늘 위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잭 브리지스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는지 반쯤 주저앉아 있었다. 그는 종이를 내려다보지도 않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을 움직였다. 캐서린은 칸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좁혔다. 그는 아파 보이지도 않았고 오랫동안 쓰러지지도 않을 것 같았다. 


  캐서린이 말했다. "왜 무너지지 않지?" 


  본능에 이끌려 잭은 그녀의 말을 받아 적었다. 


  칸이 대답했다. "나한테 정말로 확인하고 싶은 걸 얘기해." 


  이번에 잭은 곧바로 칸의 말을 받아 적지 못했다. 


  캐서린이 결국 걸음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눈앞에서 칸 누니엔 싱의 위태로운 모습을 똑똑히 눈에 담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그러나 잭 브리지스는 그녀의 걸음이 헛될 것을 알았다. 


  캐서린은 웃지도 찡그리지도 않은 칸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만일 칸이 웃었다면 캐서린은 그의 허세에 차가운 조롱을 날려주었을 거고, 찡그리고 있었다면 네 놈도 고통에서는 무사하지 못한 모양이라며 그에게 독한 비수를 꽂을 수도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 모두를 빗나가 캐서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칸은 자신이 다섯 걸음 정도 밖에 움직일 수 없다는 걸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별다른 방도가 없어 멈추었을 뿐이지만, 캐서린은 그 행동이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캐서린은 결국 그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인공적으로 박힌 안구에서 읽을 게 없었다. 캐서린은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답게 빛나는 칸의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긴급하고 훌륭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그의 동족들은 대부분 살아나지 못할 것이며, 칸 역시 이대로 잠들어 버릴 것이었다. 그리고 캐서린은 당장 강화인간들이 유전자가 터져 나가며 죽을 줄로 예상했다. 그녀가 빠르게 말을 걸었다. 


  "내가 복수를 얻었다면서."


  칸이 작게 대답했다. 


  "복수는 실행한 그 순간 얻어지는 것이다." 


  캐서린은 그에게 화를 냈다.


  "왜 죽지 않아? 네 놈한테 죽은 놈들이 몇인데, 그 유령들은 네 발을 잡아 지옥으로 끌고 갈 힘도 없나? 왜 서 있어? 왜 당신의 시대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아!"


  칸은 일일이 대응해주지 않았다.


  "네가 엘을 유린하고 이용하고 죽였어. 네가 신경도 쓰지 않은 사이에 줄리안도 그런 식으로 죽었겠지. 난 그들을 위해 복수했어. 내가 복수를 얻었다고 했잖아!"


  칸은 이번엔 어떠한 진실도 응용하지 않고 거짓을 말했다. 


  "복수하기 위한 자의 도움을 받아 완벽한 복수를 하고 싶다면, 방법을 말해주겠다."


  캐서린의 눈동자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빨개졌다. 칸은 자신의 밑에 놓여 있던 엘리자베스의 눈을 그 위에 덧대 보았다. 똑같았다. 


  다섯 발자국밖에 걸을 수 없던 기력을 온 몸으로 분산시켰다. 그러고도 칸은 자신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이유를 몰랐다. 그가 이용할 실질적 증거들이 없었으므로 그는 거짓을 지어냈다. 


  "내 목숨을 가져가야 네 목표가 이뤄지는 거라면 너는 평생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을 거다."


  캐서린은 이제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나를 봉인하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해라. 그러면 모두가 만족할 수 있어."

  "엘리자베스는?"

  "그녀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죽었으니 적어도 억울함은 없을 거다."

  "줄리안은?"

  "난 그 인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내가 모든 인간에게 저마다 죽은 이유를 붙여줄 수 없는 것처럼." 


  추운 성인의 도시에서는 태양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한다. 해는 빨리 저물고 하늘은 밤이 올 것처럼 변했다. 잭 브리지스의 자세도 변했고,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표정도 변했지만 칸 누니엔 싱만이 고고했다.


  캐서린은 끝내 눈물을 흩뿌리며 손을 거두었다. 뿜어져 나오던 바이러스가 멎었다. 곧바로 동족들이 일어설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칸은 그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칸은 살짝 눈동자를 좁히고 캐서린을 바라보았다. 캐서린은 더 이상 그를 마주하지 못했다. 온몸을 보호구로 꽁꽁 감싼 덩치 큰 남자들이 그를 붙잡으러 나왔다. 굳어버린 잭의 펜은 종이에 구멍을 낼 것 같았다. 잭 브리지스는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공간적 배경과 캐서린 헤이스팅스의 눈물, 마지막으로 칸 누니엔 싱의 올곧음을 어떻게 버무려야 할지 골똘히 고민했다. 


  캐서린이 등을 돌린 뒤에야 칸은 웃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여정이 마무리되었다.

  마무리된 것은 오로지 20세기의 여정이었다. 

[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9

- Star Trek Into Darkness/Novelette 2013. 9. 18. 17:23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잭 브리지스가 작게 접힌 편지를 건넸다. 제 딴에는 가장 우직해 보이면서 지위도 높을 것 같은 사람을 고른 거였다. 그는 몰랐지만 월터가 그것을 가지고 정복자의 거처로 사라졌을 때에도, 잭은 자신이 글 쓰는 시간을 방해받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그래서 세 장의 종이를 빼곡하게 채웠을 때 들리는 노크 소리에 잭은 의아했다. 잭은 눈앞의 남자를 보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했다. 제대로 얼굴을 본 적은 없었지만 코트 자락만 봐도 잭은 남자가 인류를 멸종 직전까지 몰아넣고 있는 장본인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군가가 뒤편에서 문을 닫아주었다. 잭은 어쩔 줄 몰랐다. 그의 방은 단출했고 무시무시한 복수호가 잘 보인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이점이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일단 남자를 세워둘 수는 없었으므로 잭은 책상 앞 의자를 비워 주었다.


  "일단 여, 여기라도 앉으시죠."


  칸 누니엔 싱은 인간을 힐끗 쳐다보고는 순순히 자리에 앉았다. 잭은 살짝 떨어져서 섰는데 마치 갑판 아래의 선실 같은 공간이라 천장이 그의 머리에 닿을 듯 아슬아슬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지금 잭이 잔뜩 움츠러든 것은 아니었다. 잭은 칸의 모습을 찬찬히 살피려다가도 그의 차가운 안구를 보고는 잽싸게 시선을 내렸다. 그 때 칸이 입을 열었다.


  "이건 언제 받았나?"

  

  그의 긴 손가락에 잭이 전했던 편지가 끼어 있었다.


  "정확한 시간은 잘 모르겠습니다. 자고 일어나보니 베개 옆에 떨어져 있더라고요. 아무래도 창문 틈을 이용해서 몰래 흘려 넣은 모양입니다."

  "읽어봤나?"

  "아, 아니요."

  "저항군 무리에는 얼마나 끼어 있었지?"

  "예? 아, 오래 되진 않았습니다. 1년은 조금 넘긴 것 같군요."

  "당시에 캐서린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 있나?"


  그로서는 어떠한 연관성도 찾을 수 없는 질문들이 쉴 새 없이 쏟아졌고, 얼떨결에 그 모든 것들을 고분고분히 답하고 있다가 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편지를 보낸 사람이 닥터 캐서린입니까?"

  

  이번엔 칸이 조금 표정을 바꾸었다. 근본 자체는 바뀔 수 없다는 것처럼, 그의 주변에는 언제나 닥터들이 맴돌았다. 칸은 전장에서 녹색 옷을 나풀거리고 다니는 기록자가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을지 추리해 보았다. 안타깝게도 고차원적인 첩보전을 벌이기에 대륙은 넓었고 바다는 깊었다. 칸은 잭 브리지스에게 지시했다.


  "아는 대로 얘기해."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는 아마 인류에 남은 몇 안 되는 최고의 지식인 중에 하나죠. 사실 당신들…이 태어난 연구소에 합류하려다가 전에 있던 곳의 프로젝트가 길어져서 일정이 맞지 않았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녀로서는 아마 행운이었겠죠."


  말 많은 문필가 특유의 버릇을 못 버리고 잭은 벌써 몇 번의 실언을 했다. 다행히 칸의 안색이 잠잠했으므로 잭은 말을 이을 수 있었다.


  "지금은 거의 인류 저항군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있는 걸로 압니다. 워낙 바쁜 분이라 저 같은 역사가가 자주 얼굴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지요. 무기 만드는 곳에는 거의 출입하는 걸 못 봤고, 아무래도 전용 연구실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칸은 잠시 생각했다. 강화인간을 만드는 데 참여하려고 했다면 유전공학에 밝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미묘한 경고의 뉘앙스를 품고 있던 편지의 내용이 이해가 되었다. 정복자와 그들의 동족들에겐 살상 무기가 제대로 먹혀들지 않는 것도 아는 영특한 여인이었다. 그 순간 잭이 막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아, 그리고 엘리자베스 헤렌 박사와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더라고요."


  칸이 눈동자를 곧게 떴다. 덕분에 역사가는 움찔해버렸다.

  

  "…확실한가?"

  "저한테 언젠가 부탁을 했습니다. 쓰는 책에 그녀에 대한 내용을 넣어 달라고. 이유를 물었더니 자신의 친구라고 짧게 말해주더군요."


  제 아무리 역사가라도, 칸과 엘리자베스 사이에 있었던 일 등을 알 리가 없는 잭은 다소 어리둥절했다. 정복자는 꼭 회상과 더불어 급박한 사고를 돌리는 듯한 기색이었다. 제 아무리 인간을 복수의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는 칸 누니엔 싱이라고 해도 자신의 박사와는 특별한 일이 있었던 것인가? 하지만 역사가는 가정과 추측에 익숙하지 않다. 대신 잭은 슬그머니 물었다.


  "대체 닥터 캐서린이 무슨 편지를 보냈기에…?"


  칸은 대답 대신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의 함선을 발견했다. 복수의 이름이 빛났다. 캐서린 헤이스팅스 박사 역시 진하게 언급했던 단어가 검은 선체 위에 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복수와 복수가 맞붙는다. 여러모로 잘 어울렸다. 일조량이 3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도시의 공기는 차갑다. 그도, 엘리자베스 헤렌도 상징과 은유를 좋아했다. 사실 닥터 헤렌은 그가 가지고 있던 은유적 가치들을 너무도 사랑하여 그의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었다. 칸은 형식적으로나마 귀중한 정보를 알려준 역사가에게 고맙다는 말을 흘려주었다. 잭이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놀라버렸다. 잭 브리지스는 정말로 고마운 일을 해 주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해는 빨리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