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맥코이는 이어폰을 던져버리고 급하게 가방을 쌌다. 방 안 여기저기에 놔두었던 자료들을 모조리 가방 속으로 긁어 담았다. 당장 커크를 만나 그가 무사함을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밖엔 들지 않았다. 맥코이는 서서히 뛰면서 주소록을 뒤졌다. 일단 그는 로비에 가 있기로 했다. 커크가 기관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왜인지 이곳에서, 이제는 존 해리슨만큼이나 의심스러워진 이 건물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커크에게 요구할 작정이었다. 맥코이가 전화를 걸려는데 갑자기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이 대피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두리번댔다. 통화 버튼을 아직 누르지 못한 채 가만히 서서 생각하던 맥코이는, 해리슨이 일부러 삽입한 게 분명한 째깍거림을 기억해 내고 숨을 삼켰다. 맥코이가 달렸다. 사람들을 휙휙 지나쳐 빨리 달렸다. 앞장서서 대피 행렬을 통솔해야 할 요원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어깨에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가방을 크로스 형태로 메고 뛰었다. 급박하게 움직이는 팔의 끝자락에 핸드폰이 말려 있는 게 보였다.


  멀리서 비행기가 노즐을 분사하는 것처럼 아득하지만 확실한 폭발 소리가 들렸다. 맥코이가 방에서 뛰쳐나와 1/3 정도 건물에서 내려온 시점이었다. 순간 놀라버린 맥코이가 난간을 붙잡았다. 곧바로 계단을 내려갈 힘이 없어 맥코이는 커크에게 전화를 걸어 보기로 했다.


  뚜뚜— 그 소리가 마치 심장 박동마냥 크고 절실하게 들렸다. 그러나 커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맥코이가 손을 부르르 떨었다. 유순한 가면과 함께 제임스 커크를 불태워버리는 존 해리슨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번쩍였다. 다시 건물의 한 구석이 터지는 굉음이 나서, 맥코이는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가지 못하고 계단을 뛰어내리듯 밟았다.


  비상구가 로비까지 이어져 있질 않아서 맥코이는 할 수 없이 복도로 나와야 했다. 천장에 달린 스프링클러는 완전히 먹통이었다. 과정은 알 수 없었지만 존 해리슨이 조작해 놨다는 건 자명해 보였다. 맥코이는 거의 눈물을 흘릴 것 같은 눈으로 질주했고, 걸리적거리는 모든 사물들을 온 몸으로 밀쳐냈다. 커크를 잿더미로 만든 존 해리슨이 그에게 달리라고 명령했다.


  “젠장!!”


  맥코이가 복도를 지나다 말고 창을 내다보았다. 필사적으로 내려온 덕분에 지금 그가 있는 층은 높지 않았다. 어림잡아 3층 정도 될 것 같았다. 바깥으로 바로 뛰어내리기로 작정하고 그가 거침없이 팔꿈치로 있는 힘껏 창문을 찍듯이 때렸다. 여닫이가 불가능한 유리창이 삐죽삐죽하게 깨졌다. 맥코이가 가방으로 구멍을 넓히고 밖으로 고개를 뺐다. 존 해리슨이 의도한 잔혹한 파괴가 눈앞에서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맥코이가 몸을 둥글게 말면서 그대로 점프했다.


  왜 존 해리슨이 자신에게 먼저 이 대혼란을 예고해 준 것인지, 맥코이는 당장 추리할 겨를도 없었다.






  존 해리슨이라도 여기까지 폭탄을 들여올 재주는 없었다. 하지만 마커스에게서 빼낸 자료를 통해 기관을 파악하고 연구와 수집을 거듭해, 먼저 시스템 곳곳에 깔아 두었던 자폭 시스템을 가동시킬 핸드폰을 몰래 전달받을 수는 있었다. 해리슨이 바이올린 속에 숨겨두었던 것은 그뿐이었다. 지금 손에 들린 총은 그가 사살한 요원의 것이었다.


  자동적으로 가동된 경보음과 급박한 순간에서 자신의 기척을 자제할 침착성이 없는 보통 사람들, 그 모든 게 해리슨에겐 단서가 되었다. 그는 자신을 붙잡으려 도착하는 요원들을 보이는 족족 쏴버리고 총알이 떨어지면 쓰러진 시체에서 무작위로 총을 뽑았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해리슨은 연기가 피어오르며 완전히 제 기능을 상실한 키패드와 잡다한 신원 확인 시스템들을 지나쳤다. 아직도 성가신 놈들이 남아있어 신속하게 심장을 터뜨려 주고 철문 앞에 섰다. 위선적이게도 그는 노크를 했다. 그러면서 안에 있는 이의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문 저편에는 자료로만 보았던 그의 형제이자 목표물이 서 있었다. 존 해리슨이 총을 내렸다.


  “너를 데리러 왔어, 스팍.”






  형제는 확실히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림자로도 가릴 수 없는 비범함, 그것은 표면적으로 구체화되지 않았을 뿐이지 존 해리슨 역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여긴 곧 있으면 사라지게 돼. 죽기 싫은 게 아니라면 나랑 같이 가.”


  스팍은 얼굴 한 번 본 일이 없는 그의 이름을 알 것 같았다.


  “..존 해리슨.”


  “날 아네.”


  해리슨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차례대로 붕괴될 시스템들을 끊임없이 상상해 보면서 그는 차분하게 스팍을 설득할 수 있는 틈을 비워두었다. 시간적 여유도 있어서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들은 것 같은 형제를 살살 달래기에 상황도 전혀 나쁘지 않았다. 해리슨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것도 알 거야.”


  “..우리가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그 이상이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지옥을 경험했잖아.”


  해리슨이 닫지 않은 문 사이로 바깥의 소란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스팍은 여전히 벽에 붙어 있었다.


  “너를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만든 인간들이 널 여기에 가두었지. 그 당시 연구원들이 전부 다 사라졌다고 하지만, 그들은 널 원상태로 만들어 주려는 노력 한 번 하지 않았어. 내 말이 맞지?” 스팍은 입술을 다물었다. “너를 보는 시선이 그것밖에 되지 않는 거야.”


  그 때 해리슨의 가시 돋은 감각에 잡히는 발소리가 있었다. 해리슨이 짜증을 내며 돌아섰고 헝클어진 금발이 공중 위로 떠올랐다. 해리슨이 방아쇠를 당겼다. 풀썩, 하고 오로지 스팍을 위해 여기까지 달려온 커크가 쓰러졌다. 스팍이 눈을 크게 떴고 해리슨은 미간을 좁혔다. 커크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나기 전에 예측 사격을 한 것이라 급소를 맞추지 못한 게 그의 기분을 언짢게 했다.


  그리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는데 스팍이 없었다. 대신 기척이 섞인 바람이 존 해리슨의 옆을 스쳤다. 고통이 커서 신음도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있는 커크의 곁에 스팍이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네가 날 보는 시선이 어떤지 말해줄까?” 존 해리슨의 형제가 말했다.


  “너도 날 네 복수를 실현하게 해 줄 도구로밖에 생각하지 않잖아. 내 모습과 내 과거를 멋대로 폭로해서 네가 복수하려는 상대를 완전히 매장시키려 하는 것밖에 더 되냐고.”


  스팍은 그렇게 존 해리슨에게는 화를 내고, 제임스 커크에겐 한없이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그의 부상을 체크하고 있었다. 해리슨은 잠시간 계산한 적 없는 혼란을 느꼈다.


  해리슨이 말없이 핸드폰 액정을 확인했다. 15년간의 살인을 접고 자신이 셀 수 없이 다듬고 정비한 계획 중에서, 존 해리슨이 스팍을 설득한다는 가정만이 빗나갔다. 이젠 그도 무너지는 건물 밖에서 나가야 하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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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코이가 방문을 잠갔다. 아래쪽만 걸어 잠그는 것도 석연치 않아 문에 달려 있는 모든 걸쇠들로 입구를 막았다. 그가 가방에 넣을 겨를도 없었던 소형 녹음기를 쥐었다.


  재킷과 가방을 대충 침대에 던진 뒤 맥코이는 의자에 앉아 USB 형태를 띤 녹음기를 위험한 물건마냥 쳐다보았다. 적어도 자신의 정신은 피폐하게 할지도 모른다며 맥코이는 속으로 혼잣말했다. 점수를 매기는 게임이라는 생각, 지금까지 숱하게 쌓아 왔던 지식과 경험적 사실, 밀리지 않겠다는 고집보다도 레너드 맥코이를 존 해리슨에게 접촉하게 하는 것은 학구적이지만 그보다 더 인간적인 궁금증이었다. 맥코이가 결국은 재생하게 될 녹음기를 홰홰 던졌다. 문득 구석으로 밀려 있던 커튼을 펼쳤다.


  짧은 순간 맥코이의 모든 움직임이 정지했다. 그가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이어폰을 준비하도록 해요, 레너드. 한 글자도 놓치고 싶지 않은 내용을 들려줄 테니까.


  바로 근처에서 존 해리슨이 말을 거는 것 같아 맥코이는 흠칫 놀랐다. 그가 급하게 가방을 뒤적여 이어폰을 잡아 뺐다. 조금 엉킨 줄을 풀고 녹음기에 이어폰을 연결하자 타이밍 좋게 해리슨의 목소리가 들렸다.


  - 이건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이야기에요. 물론 당신도 원했겠죠. 하지만 지금부터 말해주는 사실을 아는 건 당신이 될 겁니다. 아마 제임스 커크로 대표되는 계약자들이 당신에게 요구했던 것.


  얼굴을 마주대고 얘기할 때보다 더 낮아진 그의 목소리가 완벽하게 맥코이의 두 귓가로 모여들었다.


  - 어렸을 때 나는 여신의 품에 있었어요. 시적 표현이 아니고, ‘클로토(Clotho)’라는 이름의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아이들에게 연구원들이 주입시키듯 하던 말이었지. 운명의 실을 잣는 여신의 이름에서 명칭을 따왔으니까. 나는 아마 그녀의 마지막 실패였을 거예요. 내가 속한 그룹이 프로그램에 합류되고 나서, 한 박사가 온갖 암호를 만들면서 그 일이 기밀이라고 거의 소문내듯 하던 프로젝트의 내용을 언론에 폭로했거든. 연고도 거의 없는 어린 아이들을 유혹해다가 온갖 실험을 하는 데 써먹었다는 사실이 대중과 정치인들을 들끓게 만들었지. 나는 기억하는데. 그 박사가 아니었다면 평생 들어볼 일도 없었을 아이들의 이름을 천에 새겨 흩날리고, 윤리와 생명의 가치를 부르짖으며, 그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돌멩이 하나 던지지 못할 거면서 다수의 흐름에 이끌려 멍하게 행진하던 그 광경들. 그 덕분에 클로토는 우리를 버렸지. 인간의 한정된 능력을 극한까지 풀어보겠다는 시도는 그렇게 끝나버렸어.


  그의 말투에서 높임말은 사라져버렸지만 그게 오히려 옳은 것처럼 느껴졌다. 맥코이가 집중력을 다해 해리슨의 말을 들었다.


  - 박사가 공개한 건 프로젝트에 실험체로서 참여했던 아이들의 본명과 나이, 출생지였어.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대중의 보호 아닌 보호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프로젝트를 총괄했던 기관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쉽게 처치할 수는 없었지. 물론 그들은 어쨌든 다 죽어버렸어. 어설픈 생명공학에 기대 비틀린 유전자들이 하나씩 파괴되고, 그게 아니더라도 가장 나이가 많았던 애가 13살이었으니 프로젝트 속에서 겪었던 트라우마는 애들을 죽음으로 몰기에 충분했지. 증거들은 자살하거나 혹은 사살됐어. 물론 총 맞아 죽은 놈들이 있었다는 건 아니야.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 진실을 은폐하는 일은 너무도 쉬워.


  클로토의 마지막 실패였던 나는 여러모로 이점이 많았지.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특이하지 않았고 조금밖에 손대지 못한 실험쥐, 길가에 풀어 둬도 상관없는 존재였지. 솔직히 내가 어떤 의사와 과학자들한테 놀아났는지 기억이 안 나. 나를 연구하는 사람은 내 자신이 되어야 했으니까. 그들의 유산을 받아먹고 시시각각 팽창해가는 몸과 마음을 제어해 줄 수 있는 누군가가 없었으니까.


  자비 없는 여신이 나한테 남긴 흔적은 세 가지. 특별해지는 육체와 복수심, 그리고 폭력적인 충동이었어. 처음에는 나도 고상하게 이 실들을 끊어내려고 노력했지. 당신이 전에 나한테 언급했던 것, 미친 듯이 공부를 해 보기도 하고 음악에 몰두한다든가 마구잡이로 몸을 굴리는 일 그 모든 걸 다 해봤어. 보통 사람들이 하나같이 무서워하는 가치들을 씻어내야 나도 그럭저럭 모나지 않은 삶을 살 수 있잖아. 하지만 불가능했어. 화가 나서 들고양이를 죽였는데, 그 살상이라는 게 나 자신을 다스릴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더군. 그래서 사람들을 죽였다. 누구도 날 찾을 수 없게 매번 수법을 바꿔가면서. 어차피 내가 아니면 모두 나와는 달라, 내 논리 속에서는 거리에 돌아다니는 인간 모두를 내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으니까.


  귓구멍을 덮고 있는 이어폰 덕분에 맥코이는 꼭 존 해리슨이 잔인한 무기를 들고 자신을 조롱하듯 얘기하는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긴장한 가슴이 멋대로 뛰어서 맥코이는 잠시 녹음기를 멈춰 놓으려다가 굳어버렸다.


  - 오, 레너드. 아직 버거워하면 안 돼. 이것으로 당신의 호기심을 다 충족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나? 누구도 발을 들여놓지 못했던 존 해리슨의 영역이야. 더 보고 싶지 않아?


  맥코이가 황급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혹시 감시 카메라라도 설치된 건 아닌지. 하지만 텅 빈 천장보다 먼저 존 해리슨의 목소리가 그를 홱 잡아 세웠다. 끝까지 들어.


  - 복수라는 개념에 대해서 좀 설명해야겠군. 내가 단지 사람을 미치도록 죽이고 싶어서 살인을 한 건 아니야. 일종의 명분이 있었지. 하나는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내 폭력성을 어느 정도 충족해 줘야 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어. 기관에서 증거 인멸을 아주 기가 막히게 해 놓은 덕분에 프로젝트에 관한 어떠한 사항도 찾을 수가 없었고 당연히 거기에 가담한 연구원들에 대해서도 알 수 있는 게 없었어. 그래서 죽이기 전에 물어봤지. 당신의 이름이 뭐야? 혹시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내가 언제나 중요한 건 이름이라고 말했던 걸 기억할 거야.


  이쯤에서 당신은 그런 행위들에서 얻은 게 있냐고 묻고 싶겠지. 15년이 걸리긴 했지만 확실히 성과는 있었어. 당신 역시 나에게 꽤나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주었어. 그런 사람들에게는 내가 나름대로의 대접을 해 주는데, 안타깝게도 거기에 당신이 포함되지는 않을 것 같아. 당장 당신을 죽이기엔 내가 좀 바빠질 테니까.


  아마 당신이 이 내용을 다른 사람에게도 들려주진 않을 것 같군. 혹시 내 말에 대한 반발심으로 제임스 커크를 떠올렸나? 차라리 신문사에 익명으로 투고를 해 보는 게 어때. 제임스 커크는 더 이상 당신의 말을 들을 수 없을 거라서.


  녹음기가 멈췄다. 바이올린은 끝내 연주되지 않았다. 그리고 째깍째깍, 오싹하게 시간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존 해리슨이 처음으로 호칭을 달리했다. 달려야지, 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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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물 안에 간단하게 차려진 카페에서 맥코이는 커크를 만났다. 맥코이는 팍팍해진 그의 피부를 보고 그의 고민이며 그 원인까지 대충 짐작이 갔다. 존 해리슨은 사람을 다양한 방식으로 괴롭히는 못된 재주가 있었다.


  “그 쪽도 잠을 못 잤나봐요?”


  맥코이가 팔을 들어 아는 체를 하는 커크에게 다가갔다.


  “조사하다가요?”


  “정보 수집이야 다른 사람이 해 주죠. 존 해리슨 때문인 건 맞아요.”


  박사가 들고 있는 잔에서 짙은 향을 맡은 커크가 피식 웃었다. 맥코이는 별 수 있냐는 표정을 지으며 카페인이 가득 들어간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있죠, 존 해리슨이 바이올린을 갖다 달라고 하더라고요.” 맥코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잡히는 이유라도 있어요?” “..악기 얘기를 몇 번 언급하긴 했지만 큰 부분을 차지한 건 아니었는데. 설마 당신들한테 세레나데를 연주해 주고 싶은 생각은 아닐 거고.” 커크가 소름이 돋는다는 듯 과장된 몸짓을 보였다. 극악한 살인마가 곡을 바치는 대상은 절대 사양이라는 의도가 가득 묻어났다.


  커크는 맥코이가 존 해리슨에게 들은 것을 자신도 알고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차마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범인(凡人)보다 훨씬 비상한 머리를 가진 스팍도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또렷하게 기억해내지 못한 상황에서, 그만이 유일하게 의심하고 있는 가설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맥코이 박사밖에 없었다. 해리슨 손에 떨어진 바이올린은 깨끗한 걸로 판명되었다. 커크는 결국 오늘도 수고해 달라며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남기고 물러나야 했다.






  “..내가 한 말을 그렇게 어렵게 받아들인 건가요?”


  맥코이는 또 한 번 의아함을 표출할 수밖에 없었다. 해리슨이 놀랍게도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마지막 사건을 찾아보라는 말이 어려웠냐고요. 당신한테서 인스턴트커피에서는 느낄 수 없는 진한 원두 향이 나는데.”


  그 말을 듣고 여러 가지 상념이 맥코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냄새 한 번 잘 맡는다는 생각. 천재라서 오감도 같이 발달한 건가? 그리고 그의 목소리와 표정을 분석하면서 바이올린을 받아든 게 꽤 기분이 좋았나 보네, 라는 추측도 들었다. 본래의 차가운 분위기를 지울 순 없긴 해도 아직 웃음기가 남아 있었고 목소리에서도 섬세한 유쾌함이 감돌았다. 맥코이는 물음표를 그려 놓고 주위에 자신의 감상들을 적었다.


  “한 가지밖에 알아내지 못했거든요. 하지만 너무 피상적인 사실이라서, 솔직히 당신이 어떤 의도로 나한테 마커스 사건을 말해줬는지 모르겠어요.”


  맥코이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지만, 자신의 눈에는 정말 그의 얼굴에서 답답함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해리슨은 하마터면 또 웃을 뻔했다. 극단적인 방법으로 굵직한 감정들을 제어해왔던 존 해리슨은 사소하고, 때때로는 즐겁기까지 한 자극들에 경험이 부족해 그만큼 솔직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었다.


  “녹음기 하나 더 있어요?”


  “그건 왜요?”


  “들려드리고 싶은 곡이 있어서요.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게 되었거든.”


  존 해리슨의 세레나데, 커크의 찌푸린 표정이 온 근육으로 말하던 어구가 실체를 갖고 눈앞에서 빙빙 도는 듯 했다. 맥코이가 그를 맡은 이래 가장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해리슨에게 주제를 돌리지 말라고 지적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잠시 있다가 맥코이가 가방을 뒤적여 충전식 녹음기를 꺼냈다. 아날로그식으로 작동하는 녹음기가 고장날 것을 대비해 가지고 다니는 예비용이었다. 맥코이가 존 해리슨이 볼 수 있도록 녹음기를 손에 들고 물었다.


  “근래 이 시간에 임하는 태도가 좋아서 밝히는 건데, 난 당신이 주도하는 흐름이 꽤 강력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내가 드러내 놓고 직접적이고 아픈 질문을 꺼내는 것도 아니고 대개 당신이 할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두니까. 물론 상담자를 다그치는 건 올바른 태도가 아니죠. 하지만 그걸 제외하더라도 난 기본적으로 당신에게 접어주고 있는 편이에요, 해리슨 씨.”


  해리슨은 말없이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러니까 이번만큼은 이게 다 뭔지 확실하게 설명해 줬으면 좋겠네요.”


  맥코이가 진지해지자 해리슨도 평상시의 냉정하고 무감정한 공기를 되찾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가 상체를 살짝 밑으로 낮추면서 맥코이에게 다가서고 있다는 것이었다. 수갑이 마찰하는 소리가 났고 늘 해리슨을 겨누는 불빛은 자연스럽게 그의 이마에 다가갔다. 그러면서 해리슨은 아래로 팔을 쭉 뻗어 은밀하게 책상 밑을 더듬었다. 예상대로 도청기가 잡혔다. 그는 일부러 수갑을 찰랑이게 하면서 도청기를 꽉 쥐었다.


  “이 모든 게 다 수수께끼처럼 보이는 이유는 당신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에요.”


  해리슨의 목소리가 작아져 맥코이는 반사적으로 목을 펼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날 이해할 수 있게 해 줄게요.”


  동시에 손아귀에서 부서진 도청기를 책상 밑바닥에 버리고 팔을 빠르게 가슴팍으로 모은 해리슨이 녹음기를 빤히 바라보았다. 맥코이가 손가락을 천천히 폈고 그것은 존 해리슨의 한 손에 들어오게 되었다.


  “당분간 우리 둘 모두 쉬어야 되겠네요.”






  입구 반대편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커크는 일련의 잡음과 함께 소리가 뚝 끊기는 사태에 당황해버렸다. 그 사이에 존 해리슨이 나왔다. 양 팔이 잡혀 있어 움직임이 시원찮은 탓에 해리슨은 눈빛으로 커크를 불렀다. 커크가 머리를 만지는 시늉을 하면서 꽂고 있던 블루투스 이어폰을 뺐다.


  “신사답지 못한 짓을 하셨더군.”


  커크는 해리슨이 도청기의 유무를 눈치 챘음을 알았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는 분노에 가까운 해리슨의 경멸적인 시선을 정당화하기는 어려워보였다. 해리슨 덕분에 매우 찜찜해진 기분을 다듬을 여유도 없이 그는 맥코이를 직면했다. 커크가 대뜸 맥코이를 붙잡았다.


  “저 놈이 뭐라고 말하면서 나온 거예요?”


  “뭐라고요?”


  “마지막에 존 해리슨이 뭐라고 했냐고요.”


  맥코이는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유려한 말솜씨를 자랑해야 하는 직업치고는 다분히 직설적인 성미의 의사를 잘 아는지라, 커크는 맥코이가 대답을 지어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려줄게요. 정말로.”


  그렇게 말했으면서도 맥코이는 뭔가 미안한 듯이 커크에게 이것저것을 제안했다. 그동안 자신이 적은 메모라든가 보고서에 올릴 수 없었던 직관적인 소견들도 다 보여줄 수 있다고 늘어놓았다. 존 해리슨이 멀어지고 있었다. 제대로 정의할 수도 없는 느낌들이 맥코이의 주위에서 서성이는 것 같았다.






  그는 단지 운 나쁜 시기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아무런 보살핌을 받지 못했다. 데이터가 생명이라는 프로젝트에서 그의 이름은 거의 거론되지 않았다. 누군가 그를 눈여겨보면서 기록이라도 했다는 낱장짜리 실험 보고서 하나 찾을 수 없었다. 불가사의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는 부류들의 특성상 그는 어느 시설에서 건너왔지만, 대부분 팔뚝에 매고 온다는 군번줄 비슷한 것도 없어 출생지도 그저 시설이 위치한 주로 표시되었을 뿐이었다.


  자신의 의지 자체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든 9살의 나이에 보통 사람은 평생 발 한 번 들여놓지 않을 곳에 입성하게 되었다면, 그것도 마지막에 들어왔다면 그는 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학자들은 그가 어떠한 결과를 도출해 내길 원했을까. 그 즈음이면 주요 실험의 초기 단계는 거의 안정화되어 온갖 새로운 가짓수들에 관심이 갈 때였다. 그는 당연히 별 다른 이상이 없을 거라고 판단되었던 초기 단계를 거치고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도 넘어서서 대단히 위험한 자극들을 떠안아야 했을까.


  그 무렵 연구원 조지 커크는 자신의 죄책감에 안절부절하고 있었고, 스팍은 갈수록 솟아오르는 귀에 오열하면서 어두운 방에 웅크리고 있었다. 제임스 커크는 학교보다는 나가서 뛰노는 걸 좋아할 나이였고 레너드 맥코이는 헌책방에서 보물찾기를 하느라 바빴었다. 그리고 존 해리슨은 지옥의 길목 앞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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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는 볼에 갑자기 와닿는 딱딱한 물체에 몸을 뒤척였다. 베개와는 전혀 다른 서늘한 감촉은 서서히 기자를 잠에서 깨웠고, 그 물건의 정체가 총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완전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자를 겨눈 존재는 그대로 그를 침대에 눕힌 뒤 말했다.


  “아직도 그를 찾고 있나?”


  “누..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내부자가 폭로했던 프로젝트의 참여 인원 가운데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사람이 있었잖나. 이제 그 일에 관해서 캐고 다니는 건 당신뿐인 것 같던데.”


  잠에서 깬 지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기자의 머리는 그 어느 때보다 빨리 작동하면서 괴한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더 이상 붙을 곳도 없이 밀착된 총구가 관자놀이 끝까지 밀려드는 것 같았다. 기자가 바들바들 떨며 대답했다.


  “그, 스팍 말입니까?”


  반문이 없는 걸 기자는 재주껏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이름도 특이해서 금방 찾을 줄 알았더니 어, 없었습니다. 몇 번을 뒤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제 포기할까 생각했..”


  기자는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강하게 자신을 매트리스 끝까지 미는 악력을 느끼면서 기자는 자신의 최후를 예감했다. 귀신이나 유령보다는 죽음의 신에 어울리는 낮은 음색이 말했다.


  “뒷말을 붙이지 않았다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존 해리슨이 잠에서 깨어났다. 의외로운 꿈을 꾸었다. 아무래도 그의 무의식 역시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형제에 관한 기억은 해리슨을 충만하게 했다. 대개는 그것이 살인을 향한 욕구로 이어졌지만, 그런 여운 없이 해리슨은 편안하게 입꼬리를 올릴 수 있었다. 기다리던 최후가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 부탁하셨던 자료는 메일로 보내뒀어요.


  “역시 빠르네. 고마워.”


  - 그리고 존 해리슨이 뜬금없이 바이올린을 갖다 달라고 요청하던데요. 어떻게 할까요, 그냥 무시할까요?


  잠시 어깨와 머리로 핸드폰을 고정한 채 키패드를 누르느라 커크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여자가 재차 물었다.


  - 짐?


  “오, 아니. 어.. 뭐 딴 얘기는 없었어? 이유를 댄다거나 조건을 건다든가. 빈말을 할 놈이 아닌데.”


  - 갑자기 바이올린 타령은 왜 하냐고 묻긴 했었는데 별 의미 없는 답변이었어요. 지금 생활이 마음에 들고 즐겁다고 하던데요. 의심스럽죠? 거짓말 탐지기라도 동원해 볼까요?


  경력이 오래지 않은 그 요원은 매사에 지나치게 열의가 넘쳤다. 커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으면서 멍한 음성을 흘렸다. 핸드폰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손이 컴퓨터에 걸린 암호를 풀고 메일함을 열고 있었다.


  “그것까진 됐고, 이번에 있을 검사에서 제대로 몰아붙여줘. 이제 끊는다.”


  마지막까지 힘찬 인사를 남기는 후배와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커크가 책상에 바짝 붙어 앉았다. 첨부된 파일에는 각 신문사들의 기사나 영상 인터뷰 등, 온갖 자료들이 꽉꽉 담겨있었다. 커크가 무작위로 문서 하나를 클릭했다. 그러고 보니 커크는 이태까지 존 해리슨이 죽였던 피해자들에 관해서 세심하게 들춰본 일이 없었다. 그는 경찰도 FBI도 아닌지라 그가 무려 15년 동안이나 벌여온 수많은 사건들에 일일이 신경 쓸 명분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커크는 자신이 처음 보는 정보들을 유심히 머릿속에 담아갔다. 존 해리슨에게 마지막으로 당한 피해자는 마커스라는 남자와 그의 가족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깔끔한 방식으로 처리된 반면 유독 마커스에게 많은 총알이 박힌 게 특이하다면 특이했다. 커크가 사건의 날짜를 확인했다. 해리슨이 자신의 집을 불태우면서 자수한 날에서 뒤로 많이 밀린 때였다. 그것으로 커크는 직감할 수 있었다. 확실히 존 해리슨은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살인을 멈췄고 정체를 드러낸 것이었다.


  “..잠깐, 마커스?”


  해리슨에게 집중되어 있던 커크의 사고가 갑자기 전환점을 맞았다. 기억을 짜내던 그는 벌떡 일어나 블라인드를 모조리 내리고 책장을 헤집기 시작했다. 움푹한 곳에 숨겨져 있던 금고의 앞면에 드러났다.


  커크는 아직도 자신이 이 금고를 열어 볼 기회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 안에 들어 있는 정보는 커크가 존 해리슨과 레너드 맥코이와 스팍을 담당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으며, 기관 안에서 자신이 자랑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치 중 하나였다. 커크가 금고를 열고 낡은 파일을 꺼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붉게 찍힌 ‘기밀 사항’이라는 글씨는 여전히 선연했다. 커크가 첫 장을 넘겼다.


  같은 시각 맥코이 역시 존 해리슨이 던져 준 수수께끼를 붙잡고 있었다. 그는 마커스 사거에서 어떤 특이점을 읽어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커크와는 다르게 존 해리슨의 살인 행적들을 하나씩 살펴본 적이 있는 맥코이는 그가 어떤 방식으로 사람을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존 해리슨은 한 가지 방법을 고수하지도 않았고, 어떠한 순환고리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눈에 띄는 것은 날짜였다. 사건은 해리슨이 자수한 날로부터 두 달은 더 전에 발생했다. 맥코이는 해리슨이 보통의 사이코패스들이 구사하는 것보다 훨씬 더 냉철하고 합리적인 논리를 구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존 해리슨은 자신의 우월함을 져버릴 인물이 절대로 아니었다. 맥코이가 그의 어두운 미로를 들여다보려 애썼다.


  더불어서 그가 분명히 딴 속셈이 있어서 찾아왔을 이곳에서 빨리 물러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는, 그 프로젝트에서 살아남은 피실험자는 스팍 하나뿐일세. 그마저도 변형된 외모 때문에 우리가 데리고 있은 덕에 가능했다는 걸 알지 않는가. 바깥으로 나간 애들은 전부 죽었어.


  박사가 폭로한 이름들의 맨 마지막에 존 해리슨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녀석이야말로 제일 먼저 죽어버렸을 가능성이 높네. 마지막에 들어와서 별다른 취급도 받지 못한 채 그냥 프로젝트에서 나왔어야 했을 테니.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아.


  왜 그가 살아남았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겁니까?


  우리는 피실험자들의 털끝 하나 건드릴 수 없었어. 그런데 알아서들 다 나자빠졌지 않은가. 육체적, 정신적 부작용은 안타깝게도 우리가 생각한 것 그 이상이었어. 당시에 존 해리슨이라는 아이가 몇 살이라고 나오던가?


  ..9살이요.


  절대 못 살았을 거야.


  커크가 어두운 회의실에서 나오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있지, 그 놈이 요구했다던 바이올린. 들여올 때 철저하게 검사해.”






  기관에서 가장 체격이 좋고 격투 기술이 뛰어난 남성 요원 하나가 무뚝뚝하게 케이스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요원의 양 옆으로 서 있는 두 사람이 반듯한 자세로 총을 쥐고 있었다. 존 해리슨이 느릿하게 걸어와 지퍼를 열었다. 아름다운 곡선과 고풍스러운 나뭇결이 드러난 바이올린이 들어 있었다. 해리슨이 귀를 바짝 대고 현을 튕겨보며 소리를 가늠했다. 요원들이 물러나려고 했다.


  “맥코이 박사에게서 연락은 없었습니까?”


  그는 나름대로의 해답을 찾았든 못 찾았든, 솔직한 성격의 맥코이가 몸이 달아 있을 시간이 되었다고 여겼다. 깍듯하고 정갈한 말투로 해리슨이 그들에게 물었다. 물론 그것은 대단히 이질적인 풍경이라, 세 요원들은 약간씩 인상을 찡그리거나 흠칫했다.


  “..상담 일정이 잡히면 알려주겠다.”


  문이 쾅 닫혔다. 해리슨이 고상한 손동작으로 바이올린과 활을 집었다. 창문도 없는 좁은 방 안에 뚫려 있는 환풍구는 언제든 닫혀서 그가 숨을 못 쉬게 만들 수도 있었고, 밖으로는 뛰어난 전투력을 가진 이들이 부대 수준으로 부지런하고 빈틈없이 입구를 틀어막고 있었다. 해리슨은 그러한 환경 속에서 자유롭게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그가 몸담았던 어떤 조직의 연구원들이 아이들의 안정을 위한답시고 자주 틀어주었던 음악이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전에 못 했던 얘기를 계속 하고 싶은데요.” 해리슨이 웃었다. “내가 무슨 악기를 다룰 수 있는지 궁금하기라도 한 건가요?” “그런 사항도 나쁘진 않죠.” 맥코이는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펜을 돌리던 손가락을 멈춰 세우며 청자의 태도를 보였다.


  “당신이 나에 관해서 알고 싶은 건 그런 게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와 동시에 존 해리슨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궁금하지 않냐는 커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맥코이는 이번엔 또 무슨 꿍꿍이냐며 눈썹을 움찔하려다 공연히 펜을 한 번 돌렸다. 아직은 얌전한 사슬 같은 눈빛을 보이는 해리슨의 눈동자가 다시 돌아갈 듯, 그러나 더 이상 회전하지 않는 맥코이의 펜을 쳐다보았다. 마치 잠깐의 준비운동을 거친 것처럼 이후 맥코이를 보는 해리슨의 눈은 약간의 호감이 느껴질 정도로 아름답게 변해 있었다. 물론 맥코이는 제일 먼저 그 자신의 모든 걸 완벽하게 조종하는 해리슨에게 어떤 오싹함을 느꼈지만, 한편으로 상대방이 던지는 기회는 받아 채야 하는 게 옳았다.


  “전에 했던 말의 뜻을 알고 싶어요.” 해리슨은 급히 묻지 않고 기다렸다. “살인이 당신이 찾은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일이라는 게 무슨 뜻인지.”


  해리슨이 얼굴을 찡그렸다. 언짢아서가 아니라, 어린 아이의 주먹을 맞았을 때의 간질간질함이 만연한 찡그림이었다. 그의 반응에 맥코이가 오히려 기분이 상해버렸다. 오, 그거 정말 괜찮은 질문인데요, 레너드? 뜻하지 않은 환청 따위가 들렸다.


  “첫 번째로 매력적이라는 건, 정말로 재밌고 그 끝이 없어서 오랫동안 즐길 수 있다는 거죠. 보통 사람들이 ‘건설적’ 이라고 하는 것들을 전부 시도해 봤지만 그 깊이가 턱없이 얕더군. 그것들이 가진 자극과 지속력은 너무나 얄팍해서 금세 질려버렸지. 올바른 목적지를 찾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야 했던 여정이라고나 할까.”


  맥코이가 처음으로 접하는 긴 문장들에서, 존 해리슨은 자유자재로 단어를 강조하고 비웃음을 집어넣고 시를 외우는 듯 음악적으로 읊조렸다. 그의 낮은 음색은 두려울 만치 풍성했다.


  “그리고 생산적이라는 뜻은―” 그 순간 맥코이는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었다.


  “나를 위한 가장 적합하고 가치가 높다는 것. 그래서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말을 마친 존 해리슨이 극적인 효과를 유도하고 싶은 것처럼, 싸늘하고 잔인한 눈매로 맥코이를 바라보았다. 맥코이는 쿵쿵 뛰는 가슴을 붙잡지 못해 바지자락을 끌어 모았다.


  “나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레너드.”


  맥코이의 고개가 부자연스럽게 삐걱거렸다.


  “..나한테요?”


  “레너드 말고 내 눈에 낯익게 된 사람, 저 밖에 자주 서 있는 사람의 이름을 가르쳐줘요.”


  맥코이는 엉겁결에 너무 시시한 거 아니냐며 반문할 뻔했다. 그는 어렵지도 않은 질문에 침묵하면서 생각했다. 추상적인 표현이 가득하긴 했지만 존 해리슨은 어쨌든 꽤나 중요한 요소를 고백했는데, 그에 대한 대가로 원하는 것이 의심스러울 정도로 단순했다. 맥코이는 일단 대답을 미뤘다.


  “이름에 집착하는군요.”


  “언제나 중요한 건 이름이에요.”


  맥코이는 밖에 아직 서 있을 지도 모르는 커크의 반응이 궁금했다.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힐 악질의 살인마에게 자신의 이름을 알려줬다고 하면 몸서리를 칠까. 하지만 이 정도의 거래도 지키지 못하면 그는 이후 해리슨에게서 아무 것도 얻어내지 못할 것이었다.


  “제임스 커크, 라더군요.”


  그러면서 맥코이가 해리슨을 살폈다. 다행히도 그의 손 근육이 경련한다든가 눈에 매서운 살기가 맺히지는 않았다. 실제로 해리슨은 제임스 커크에게 분노하지 않았다. 다만 만족스러울 뿐이었다. 눈치 빠르고 실력도 좋은 맥코이 박사는 그것을 읽어내고도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했다.


  “오늘은 내가 먼저 가도 되죠?”


  해리슨이 일어나면서 잠시 밑으로 내려갔던 붉은 레이저가 잽싸게 자리를 잡았다. 그 와중에 맥코이가 ‘이름’ 이라고 쓴 글씨에 동그라미를 표시해 둔 부분이 보였다. 잠깐의 변덕이지만 존 해리슨은 조건 없이 한 가지를 더 내주고 싶었다.


  “내 마지막에 남은 이름을 찾아봐요, 레너드.”


  존 해리슨은 일부러 그 말을 달콤하게 했다. 맥코이는 그렇게 확신했다.






  제임스 커크가 굳이 공무원이 되려고 했다면 그는 아마 경찰이라든가 FBI를 선택했을 것이었다. 그는 누군가의 비밀에는 관심이 많아도 자신이 지켜야 할 비밀에 대해서는 세심한 자각이 부족한 성격이었다. 커크는 그의 아버지 역시 비밀을 지키기엔 마음이 무겁고 입은 가벼워서,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성격과 엇나가는 특수 요원으로서의 재능만 아니었으면 그는 기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가 알고 있었던 사실이 커크를 부추겼다 할지라도.


  이지적인 형태로 세워진 건물은 누군가에겐 감옥과도 같을 지도 모른다. 커크는 그에 해당되는 인물을 셋이나 알고 있었다. 한 사람에겐 정말로 감옥 대신이고, 한 사람에겐 집이 아니라 감옥마냥 답답할 것이고, 마지막 사람에겐 감옥이라는 낱말만이 남았을 뿐 그 의미는 희미해진 상태였다. 커크는 바로 그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 더 이상 달력에 적어 놓지 않아도 되는 일상과도 같은 일이라서, 커크는 핸드폰을 만지면서도 어렵지 않게 방향을 찾아갔다. 커크가 타이핑을 마치고 고개를 들었다. 존 해리슨의 마지막 희생자에 대해서 알아봐줘.


  그 주인공을 만나러 가는 길은 쉽지 않다. 그의 책임자이자 그에게 남은 유일한 외연(外緣)이었음에도 거쳐야 하는 절차라는 것이 커크를 가끔 한숨짓게 했다. 긴 통로와 관문을 지난 커크는 파일에 면회 시각을 적었다. 무채색의 문 뒤에 펼쳐진 풍경은 큰 특징 없이 밋밋한 방이었다.


  “안 자는 거 알아, 스팍.”


  그러자 이불이 스르르 내려오면서 햇빛을 잘 받지 않는 티가 역력한 얼굴이 나타났다. 그의 눈썹은 대단히 독특했으며 무엇보다 귀가 동화 속 등장인물마냥 뾰족했다. 가장 평범한 검은색 눈동자가 데굴 구르며 스팍이 상체를 일으켰다.


  “요새 바쁘다고 해서 오늘 안 올 줄 알았어.”


  아버지 조지 커크의 기록에 따르면 스팍의 목소리에 처음부터 억양이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성대는 아주 좁은 음역에 갇혀 버렸고, 눈썹의 모양이 틀어졌으며 무엇보다 귓바퀴가 날카롭게 솟아올랐다. 그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길 바랐던 기관은 제임스 커크에게 스팍을 맡겨버렸다. 먼저 스팍을 알고 있던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커크는 그를 만나지 못했으리라.


  여러 재능을 갖고 있는 커크였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과학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았고, 스팍을 고쳐줄 수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라졌으므로 스팍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더 이상 사회에 나갈 수 없어 이 방에 박혀버린 가여운 친구에게 웃음을 보이는 게 전부였다.


  “사실 나보다 바쁜 사람은 따로 있는 걸.”


  그리고 그 작은 호의가 스팍이 누릴 수 있는 타인의 모든 것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여인의 발랄한 한 마디에 응답한 것은 사람의 육성이 아닌 총소리였다. 검은 코트를 그림자처럼 걸친 남자는 나무 문짝과 함께 여자의 다리를 동시에 쏴 버린 뒤 집 안으로 들어섰다. 고통과 공포로 초점을 잃은 여자가 우연히 그와 눈이 만났다. 그가 망설임 없이 그녀의 눈동자를 겨눴고, 그녀의 부모님인 것 같은 남녀가 허겁지겁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는 침착하게 나이 든 여인을 정확히 즉사시킨 다음 남은 타깃의 무릎을 쏘아 맞췄다. 평범한 가족이 살던 집은 이제 피냄새와 화약의 매운 냄새에 먹혔고,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중년 남성은 뚫린 무릎을 붙잡고 신음했다.


  “이름이 마커스지?”


  그의 눈은 푸른색이었지만 이상하게 피와 잘 어울렸다. 마커스라 불린 남자는 여러모로 정신이 없어 즉답을 하지 못했고, 그것이 살인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가 몸을 낮추며 관통당한 무릎을 총으로 비벼 눌렀다. 어마어마한 비명이 눈앞에서 터졌지만 그는 눈꺼풀 한 번 떨지 않았다.


  “마커스.”


  끄덕끄덕.


  “당신이 옛날에 일했던 곳의 자료를 아직도 갖고 있을 거야. 몰래. 그렇지?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잖아.”


  마커스는 놀라면서도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있는지 말해.”


  “..다, 다락방에...”


  마커스는 시야를 가득 메운 하얗고 새파란 괴물의 얼굴이 살짝 풀어지는 걸 보면서 최면에 걸린 듯 안도감을 느꼈다. 아마도 마커스는 그 때 자신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검은 옷의 남자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날 때까지만 해도 손에 들려 있던 총은 잠잠했다. 마커스가 두 팔을 지지대삼아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했다.


  그 때 마치 총알만으로 다리를 절단하려는 듯 남자가 쉼없이 마커스의 상처 입은 무릎에 대고 총을 쐈다. 마커스의 외침보다 총성이 더 빨랐다. 한계점까지 한 인간의 피가 밖으로 쏟아지고 있었고, 너덜너덜해진 자신의 다리를 보며 마커스는 쓰러졌다. 존 해리슨이 차분하게 계단을 오르며 다락방으로 향했다.


  그리하여 존 해리슨은 정말 오래간만에 물질적 성과를 거둔 것이었다. 마커스의 노트북을 통해 확인한 USB 안에는 그가 간절히 바라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너무나도 확실한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는 형제의 사진과 관찰 기록, 조지 커크라는 과학자가 하나씩 작성하고 서명한 서류의 스캔본들은 해리슨의 형제가 아직 기관 어딘가에서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해리슨은 USB를 빼고 그걸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것이 15년 동안 이어진 존 해리슨의 마지막 살인이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똑똑. 박사님, 하고 부르는 소리. 룸서비스도 대령하지 않는 주제에 참 얼쩡거린다고 생각하면서 맥코이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잠이 많은 사람들은 이미 침대 속으로 기어 들어갔을 시간이었다. 트레이닝복 바지를 한 번 추켜 올린 맥코이가 문을 열었다.


  “뭔데요.”


  “너무 쌀쌀맞으신 거 아닙니까, 박사님?”


  남자가 슬쩍 몸을 문틈으로 끼워 넣었다.


  “내가 당신한테 살갑게 대해서 뭐해요. 이름도 모르는 정부의 앞잡이.”


  혼자 일할 때는 스탠드 불빛만을 켜 두는 걸 선호하는 박사인지라, 손님을 맞이하기에 방 안은 조금 컴컴했다. 맥코이가 노트북을 내리고 전등을 켰다.


  “세상에, 아직 박사님한테 제 소개도 안 했단 말이에요? 큰일 날 뻔했네. 짐 커크입니다. 짐이라고 부르세요. 그리고 제 경력에 정부의 앞잡이가 되려면 멀었죠.”


  몸에 익은 듯한 너스레를 떠는 요원을 보며 맥코이는 속으로 궁시렁거렸다. 깜빡하고 자기소개를 잊은 게 아니라 이제야 자신의 이름을 밝힐 필요성을 느낀 거겠지. 언어의 이면을 살피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는 맥코이는 언제부턴가 사람을 대하면서 입을 다물고 중얼거리는 일이 잦아졌다.


  “미친 놈 맨날맨날 보시느라 고생이 많으시죠. 굳이 그러실 필요 없는데, 매일 고생하시는 점에 대해서는 제 보스도 아주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답니다.”


  맥코이가 의도적으로 자신의 동선을 책상 쪽으로 잡았으므로, 짐 커크는 침대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언젠가는 자신의 손을 떠날 자료들이지만 누군가 훔쳐보는 건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맥코이는 팔을 뒤로 하고 책상을 붙잡았으며 커크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혹시 그에 대해 불만이라도?”


  “아뇨, 전혀요. 박사님이 정말 잘 해주시고 있어서, 한 가지 가이드라인만 제공해 드리면 완벽할 것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찾아 왔지요.”


  맥코이는 웃음기가 사라져 가는 커크의 얼굴을 보았다.






  “존 해리슨의 과거가 필요해요.”


  “뭐라고요?”


  “그가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그가 구제할 길 없는 사이코패스라는 것도 유용한 정보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런 결론을 얻고자 그 살인마를 살려 두는 건 아니에요. 존 해리슨에 대한 것은 이제 모두 그를 통해서만 알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선봉에 서 있는 게 박사님입니다.”


  “정부가 언제부터 특정 범죄자의 인생을 파헤쳤다고 그래요? 그의 과거가 어떤 가치가 있어서 이러는 건데요?”


  커크가 눈썹을 살짝 휘었다. 맥코이 박사의 ‘지지 않고 받아치기’ 정책은 비단 존 해리슨에게만 해당되는 경우가 아닌 듯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반응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므로 커크는 들고 왔던 서류봉투를 앞으로 가져왔다. 커크가 봉투를 맥코이에게 건넸다.


  “열어봐요.”


  밋밋한 표지에 제대로 봉인되지도 않아서, 맥코이는 여기에 무슨 대단한 게 들어있겠냐며 봉투를 거꾸로 뒤집어 내용물을 쑥 빼냈다. 그의 손에 잡힌 것은 온갖 종류의 논문과 연구 자료들이었다. 문서들이 아우르는 분야는 다양했다. 문학부터 시작해서 사회학, 심리학, 생물학이나 공학을 다룬 것도 있었다. 맥코이는 이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보려 작성자를 확인했지만 익명이거나 혹은 각각 다른 학자가 썼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맥코이가 의문을 담아 커크에게 눈길을 돌렸다,


  “누가 쓴 건지 알겠어요?”


  “여기 써져 있잖아요. 에드워드 어터스, 커트 마샬..”


  “존 해리슨이에요.”


  맥코이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법정에서 그가 직접 밝힌 얘기에요.”


  “그 놈 말을 믿어요?”


  “세상에 존 해리슨 같은 인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없죠. 그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우리도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맥코이가 다시 서류들을 훑었다. 생년월일마저 가짜가 아니라면 존 해리슨의 나이는 30세였다. 그에 관해서라면 무조건 상식은 포기해야겠다며 다짐하는 맥코이였다.


  “머리가 남다른가보죠.”


  “스캔했을 땐 특별한 점이 나오지 않았는데요.”


  커크가 손가락을 흔들었다. 사진, 맨 끝에 붙어 있는데. 커크는 살짝 벙찐 맥코이의 반응을 보고 웃음을 흘렸다가 이내 진지한 요원으로서의 모습을 회복했다.


  “박사님, 우리가 필요한 건 그의 인생이 대체 어땠길래 그런 지식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거예요. 아무도 모르는 그의 과거에서 기원을 찾아야 할 겁니다. 비인간적으로 들릴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원래 우리가 이런 족속이니까요.”


  일어선 커크가 맥코이의 앞에 서더니, 그가 들고 있던 뭉치에서 존 해리슨의 스캔 자료만을 빼냈다. 커크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박사님도 궁금하시잖아요.”






  그들은 아주 독특한 의사이다. 환자와의 친밀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또한 그것을 경계해야 하며 누군가의 은인이 되길 두려워해야 한다. 그들은 환자를 다루지만 때로 그 사이에는 엄밀히 말해서 환자라고 할 수 없는 사람들도 섞여 있다. 그러나 환자의 탈을 쓴 세상의 모서리들을 감내해야 한다는 건 그들이 가진 한 가지 위험일 뿐이고, 그들은 또한 그들 자신을 매우 다잡아야 한다. 그들만이 가장 가까이서 신을 모사한 신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하나인 레너드 맥코이는 복도를 걷다가 먼저 제 자리를 잡은 커크를 발견했다. 복잡한 호기심에 사로잡혀 있는 그와는 달리 일면 퍽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맥코이는 그가 단지 자신을 위해 문을 열어주려고 대기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여기 서 있는다고 들려요?”


  커크는 말없이 눈으로 웃으며 입구를 열었다. 맥코이가 안으로 들어가고, 고개를 돌린 커크는 두 사람에게 팔을 잡힌 채 걷고 있는 존 해리슨이 다가옴을 확인했다. 그가 맡은 또 하나의 책임이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푸른 안구가 짐 커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문 앞에 서 있던 양복 입은 남자가 웬 열쇠를 들이밀었다. 맥코이가 움찔해서는 남자를 보았다. 두터운 문에 힘입어 그는 존 해리슨과 꽤나 멀어졌지만 몸 구석 어딘가에 성에라도 낀 듯 불편한 기분이었다. “뭐에요?” 묻는 맥코이의 목소리가 조금 올라갔다. 


  “박사님께서 이번 일을 맡으시는 동안 머무를 곳입니다.” 


  이런 상황에 간접적으로나마 익숙한 맥코이는 남자의 말을 마냥 반겨 들을 수는 없었다. 맥코이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그 말인즉슨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리 아닙니까. 그런 얘긴 계약서에 없었어요.” 

  

  “박사님이 존 해리슨으로부터 얻는 모든 것은 아주 조심스럽게 다뤄져야 할 중요한 자료입니다. 과정상 빠진 정보가 있었음은 사과드리지요. 이의가 있으실 경우엔 저를 통해 주시면 제가 상부에 전달하도록 하죠.” 


  호의와 약간의 열정까지 느껴질 만한 훌륭한 말이었지만, 한편으론 실질적 효력이 전혀 없는 빈말이기도 했다. 금발이 돋보이는 명랑한 얼굴에 한숨을 뿌리며 맥코이가 열쇠를 낚아챘다. 여러모로 복잡했다. 하필 색채와 분위기는 다르지만, 요원의 눈동자 역시 파란색이었다는 점이 더 맥코이 박사를 심란하게 했다.


  “..설마 존 해리슨과 같은 건물이라거나 하진 않겠죠?” 금발의 요원이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그 놈은 박사님께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에 있을 겁니다.”




  박사에게 떨어진 자료는 정말로 많지 않았다. 존 해리슨이 스스로 잡혀오면서 자신의 집을 완전히 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상대방의 심리를 분석하는 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것은 그와 대면했을 때의 언행과 각종 반응들이었지만, 대상의 배경을 아는 건 질문을 선별하고 상담의 흐름을 이어가기 위해 아주 중요한 요소였다. 맥코이는 잿가루밖에 남지 않아 도저히 건져올 수 있는 게 없었다며 누군가 남겨 놓은 짧은 메모를 책상에서 치웠다. 어쩐지 존 해리슨이 기반을 닦아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해리슨이 남겨 놓은 것들만이 존재했다. 15년 동안 벌여 왔던 살인은 경찰의 보고서에, 언론에, 변변찮은 인간의 블로그까지 가득했다. 비위가 약한 건 아니었지만 맥코이는 그것만큼은 정말로 보기가 싫었다. 아무 것도 없는 책상에 노트북을 올려놓은 맥코이가 이내 화면을 켰다. 검색창에 해리슨의 이름을 입력했다. 


  오늘 맥코이는 해리슨에게 거짓말을 했다. 그를 맡긴 사람들은 상담의 횟수와 시간에는 제한을 두지 않고 오로지 결과만을 원했다. 헤드라인으로 커서를 옮기던 맥코이가 소리 나게 숨을 내쉬었다. 살인마와의 게임에서 이미 뒤처지고 있는 박사로서는, 점수를 만회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잽을 맞아야 했다. 맥코이가 눈을 부릅뜨고 존 해리슨이 저지른 잔혹한 역사를 머리에 담았다.




  레너드 맥코이가 존 해리슨을 만나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맥코이는 방에 들어온 직후부터 다시금 스나이퍼들의 시선과 레이저를 한 몸에 받으며 두툼한 수갑을 정비당하고 있는 해리슨을 힐끗했다. 그의 손을 묶고 있는 쇠붙이는 척 봐도 일반적으로 쓰이는 종류가 아니었다. 저 인간한테 그걸 끊어버릴 수 있는 힘이라도 있는 것인지, 맥코이는 사형을 선고하지도 않았으면서 저격수를 대동해 그를 위협하는 윗사람들의 행동이 의아했다. 기분 탓이겠지만 이젠 총을 쥔 남자들의 시선이 몸에 닿는 것도 같았다.


  존 해리슨이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유리처럼 투명하지만 얇지는 않은 벽으로 한층 더 둘러싸인 그 안에는 맥코이와 해리슨밖에 없었다. 맥코이가 자리에 앉는 해리슨을 관찰했다. 어제 입었던 옷이었고 보통 사람보다 창백한 인상에서 피로한 흔적을 찾기는 어려웠다. 아직 고개를 올리지 않아 반쯤 가려진 눈을 보면서 맥코이는 생각했다. 신의 가호에 힘입어 저 눈동자를 마주하고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다면, 해리슨이 그토록 오래 살인 행각을 유지할 수는 없었으리라. 다른 무엇보다 그의 눈은 악몽에서 목격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강한 인상을 주는 빛을 띠었다.

  

  맥코이가 녹음기를 켰고 해리슨이 얼굴을 들었다. 그 순간부터 해리슨은 깜빡임도 자제하고 맥코이를 응시했다. 보통 대상이 입을 열지 않아도 전문가들은 비언어적인 요소들을 읽으면서 개략적으로 그의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 훈련된 인재 중 하나인 맥코이 박사라면 이 와중에도 뭔가 얻어가야 하는 게 정상이었다. 그러나 피부색 따라 석고상이라도 되어버린 건지, 자신의 몸 구석구석을 모조리 통제할 수 있기라도 한 것인지 맥코이는 해리슨에게서 어떠한 근육의 떨림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맥코이는 비상식적으로 투명한 존 해리슨의 눈과 어제 읽었던 기사의 내용을 겹쳐 보고 있었다.


  “..시간 이렇게 때울 거면 나 다른 일 좀 볼게요.” 


  맥코이가 팔을 내리며 가방을 뒤지는 모양새를 취했다. 굳어 있는 것 같았던 존 해리슨의 목이 움직였다.


  “나 말해도 괜찮아요?”


  “무슨 뜻이에요.”


  “내 목소리를 불편해 했잖아요. 특히 내가 당신의 이름을 말할 때.”


  가방에서 또 다른 노트를 꺼내며 맥코이가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가 무릎 위에 올려놓은 것엔 해리슨에게 가급적이면 들키고 싶지 않은, 어젯밤까지 그가 분석을 거듭한 사건에 대한 사항들이 적혀 있었다. 


  “몇 십 명을 죽인 살인자가 내 이름을 말하는데 오싹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이번엔 해리슨의 얼굴에 표정이 섞였다. 숨기지 않은 흥미로움, 맥코이는 두 번만의 만남에서 매번 자신에게 흥미롭다는 느낌을 내비치는 해리슨의 속내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후에 요긴하게 쓰일 증거 중에 하나였다. 맥코이가 필기를 했다. 지금은 존 해리슨의 모든 것이 견디기 힘들지만 자신의 흐름 역시 생성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시간은 당신과 내가 대화하는 시간이 맞는 거죠?”


  맥코이는 아예 순순히 나가지 않기로 작정한 듯 물었다.


  “대화라고 받아들이나요?”


  “상담이라고 표현한다면 나에겐 아무런 질문권이 없을 것 같아서요. 대화라면 나도 자연스럽게 레너드에게 궁금한 점을 물어볼 수 있잖아요.”


  다시 존 해리슨이 ‘레너드’라고 하는 말에 움찔해 버렸다. 가슴이 순간 빨리 뛰었다. 맥코이는 티 나지 않게 호흡을 가다듬느라 대답이 늦었는데, 그 찰나에 해리슨은 급격히 차가워졌다가 다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질문을 하기 위해 거짓 답안을 내놓진 말아요. 거짓말, 참말도 구별 못하진 않거든.”


  드물게도 해리슨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한 번 시험해 봐요.”




  금발의 남자는 벽에 등을 기대고 양 손엔 펜과 작은 수첩을 들었으면서, 이어폰으로 전해지는 말들의 일부를 주의 깊게 기록하고 있었다. 맥코이 박사와 존 해리슨을 갈라놓고 있는 책상 아래에는 도청기가 붙어 있다. 자신이 설치한 것은 아니지만 들킬 경우 그에 대해 해명을 해야 하는 남자는, 날 선 불안보다는 오히려 차분히 집중하는 태도로 펜을 놀렸다. 속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존 해리슨의 눈치라면 언젠가 도청기를 발견할 수도 있었지만 그것에 특별히 마음을 두진 않을 것이다. 맥코이 박사는 짜증을 적당히 받아 주면서 설득을 하면 된다. 남자는 자신이 맡고 있는 두 인물에 대하여 그렇게 평을 내렸다.


  - 취미 같은 건 없어요?


  -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요, 레너드?


  - ...그 말은 당신이 사람 죽이는 일을 취미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단정 지어도 되겠죠?


  첫째 날 15년 묵은 연쇄살인마의 분위기에 압도되는 것 같았던 박사는 그새 나름대로의 전략을 수립한 것 같았다. 남자는 둘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취미는 뭐죠?”


  존 해리슨이 물었다. 비꼬는 어투는 아니었다.


  “책을 읽길 좋아한다든가, 영화관을 즐겨 간다든가. 뭘 만들길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시간 날 때마다 악기를 연주하길 즐기는 종류도 있고.”


  “나는 그 모든 걸 해 봤지만 그걸 취미라고 생각한 적이 없어요.” 


  공책에 시선을 두고 있던 맥코이가 고개를 들었다. 오늘은 수갑도 찰랑이지 않으면서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존 해리슨이 일말의 변화를 보이는 부분은 자신의 표정과 어조뿐이었다. 그리고 맥코이는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분노를 느꼈다. 맥코이는 말없이 해리슨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심장을 맴도는 레이저 빛을 힐끗 본 푸른 눈동자는 분명히 그것을 아주 우스워하면서도 화를 내고 있었다. 


  “당신의 생각을 정정해 줄게요. 사람 죽이는 일은 내 취미가 아니었어요.”


  “그러면?”


  “내가 찾은 가장 매력적이고 생산적인 일.” 


  맥코이는 그 순간 자신이 분노하는 악마의 말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검은 가슴 위에 붉은색 점들이 찍혔다. 그 위는 살짝 바랜 석고상에 빛에 약한 보석이 박혀 있는 듯하다. 그의 눈이 저절로 붉은 광선이 쏟아지는 지점을 따라갔다. 진회색 난간에 붙어 그것보다 진한 옷과 장비로 몸을 가린 저격수들이 보였다. 안정적으로 눈길을 둘 곳을 찾지 못한 듯 살짝 두리번대던 눈동자가 다시 붉은 점들이 모인 가슴을 응시했고, 차례로 그의 손이 녹음기와 필기구를 꺼냈다. 무의식적으로 상대편을 마주하려다 차가운 푸른 안구를 보고 흠칫했다.


  검은색, 붉은색, 푸른색, 하얀색, 다양한 색깔이 조합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가지는 특징은 통일되어 있었다. 냉혹한 무심함과 기묘한 차분함이 꼿꼿하게 그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것만으로도 사실 레너드 맥코이 박사는 그가 이루 설명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신분석학에 능통하지 않았더라도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해리슨 씨, 라고 해야겠죠.”


  그렇게 말하면서도 박사의 머릿속엔 여러 정보들이 떠다녔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매번 패턴을 바꿔 살인을 즐겨온 범죄자. 열 손가락으로도 모자란 범죄 경력. 숱하게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변호인 없이 판사가 사형을 내리지 못하게 했다는 사실 자체가 보여주는 그의 비정상적인 특출함. 남자를 이름만으로 칭하기엔 버거웠다. 끔찍한 별명들을 여럿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존 해리슨이기도 한 남자가 기계처럼 눈을 깜빡였다.


  “판결대로 당신은 일정 기간의 정신 분석에 응해야 합니다. 비협조적일 시에는 당신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고 하는군요. 나는 당신을 담당하게 된 맥코이 박사라고 합니다.”


  맥코이가 대신 경고하는 말을 읊었을 때, 존 해리슨은 슬쩍 자신의 심장에 모여든 레이저 빛을 보았다. 여러모로 별난 곳, 은밀한 기관에 출입해 본 경험이 많은 맥코이 박사였지만 이번에는 유독 비밀스러운 구석이 많았다. 비밀리에 진행된 재판에서 저 살인마는 무슨 언변으로 판사를 설득한 것인지, 그를 살려 놓기로 했으면서도 스나이퍼 다섯을 배치해 그를 조준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냥 대학 병원에서 노인들이나 돌볼 걸. 박사는 십 년도 전에 내렸던 결정을 공연히 탓했다. 얼음송곳으로 긁어대는 것 같은 살인자의 시선이 거북했다.


  “이름이 뭐죠?”


  그 자리에 앉아 존 해리슨이 처음 꺼낸 말이었다. 당황한 맥코이가 되물었다.


  “..뭐라고 했어요?”


  “이름이 뭐냐고 물었어요.”


  “내 소개는 이미 했는데.”


  “성만 밝혔을 뿐이잖아요. 이름이 뭐죠?”


  순간 맥코이는 아직 녹음기를 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포개고 있던 손을 움직여 녹음 버튼을 눌렀다. 존 해리슨이 그걸 보고 친절하게 다시 말했다.


  “당신의 이름을 듣고 싶어.”


  느릿하게 글자를 말하는 목소리에서 자연스러운 권위가 묻어났다. 맥코이는 그 느낌을 어서 종이에 적고 싶었지만, 저격수들의 스코프에서 나오는 빨간빛보다 거슬리는 푸른 안구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것 같았다.


  “..레너드.”


  스르륵, 책상의 좁은 옆면에 무거운 수갑이 끌리는 소리가 났다. 드러난 존 해리슨의 창백한 손이 맥코이의 움직임을 따라할 준비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맥코이는 펜을 잡지 못했다. 한 줄짜리 상념 정도를 기억 못할 머리는 아니었다.


  “나는 이제부터 당신을 레너드라고 칭할 거야.” 낮고 부드러운 음성은 듣기 좋기도 했고 소름이 돋기도 했다.


  “그러니 당신도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날 불러요. 해리슨이라고 할 필요 없어. 살인자라고 불러도,” “나한테 선택권을 준 건 고맙지만 사양해요, 해리슨 씨.” 주도권을 뺏기기 싫어 맥코이는 그렇게 답변했지만, 불쾌할 것도 없이 도리어 흥미롭다는 듯 으슬하게 하얗고 파란 해리슨의 입가엔 잠깐 미소가 지나갔다.


  “나는 타인을 뭐라고 부르는 지에 대해 상당히 신경 쓰는 편인데, 레너드는 아닌가 보군요. 아마 나의 다른 부분을 신경 쓰고 있기 때문이겠죠?”


  반말과 경어를 오가는 화법과, 속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정중하게 말하지만 그 안에 숨을 쉬듯 당연하게 배는 어떠한 이질적인 감정. 맥코이의 머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늘었다. 그는 시작부터 녹음기를 켜 놓는 걸 잊어버렸을 때처럼 지금 녹음기의 테이프가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도 잊었다. 존 해리슨이 레너드라는 단어를 부드럽게 발음했다는 게 오싹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요?”


  자신이 생각해 보기에도 굉장히 많은 요소들 중에서 존 해리슨은 엉뚱하지만 정확한 한 가지를 짚어냈다.


  “내 목소리.”


  “.....뭐?”


  존 해리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가지고 있던 특징을 뺏어버린 듯, 사람을 닮지 않은 파란 눈동자에 부드러움이 섞였다. 맥코이는 그걸 알 수 있었고 그 사실을 존 해리슨이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검은색의 티셔츠 위에 모인 붉은 점들과, 그 바로 위에 솟아 있는 목은 이상하게 하얗고 그 기괴함의 절정에 올라 있는 안구에 대해서는 더 이상 형용할 길도 없었다. 맥코이가 책상을 보다가 작동하고 있는 녹음기를 껐다.


  “오늘 예정된 시간은 여기까지네요.”


  맥코이가 일어났다. 존 해리슨이 손을 내리면서 수갑이 찰랑댔다. 맥코이의 속마음대로, 해리슨의 입술이 아니라 눈이 말했다. 당신이 애정을 붙여야 할 목소리일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