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James Kirk
- Request confirmed.
- Written by. Jade
Emancipate From the Sector
칸은 잠들기 전에 자신의 선원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샌프란시스코의 거리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비슷한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손에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도 나타났고, 라디오로도 들려왔으며 가전제품들을 전시해 놓은 판매장에서도 보였다. 머리를 양갈래로 얌전히 땋은 흑인 소녀가 화면에 자주 나왔다.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을 초빙해 놓고 아나운서 혹은 인터뷰어가 저마다 떠들어댔다.
“박사님, 사실 소녀의 병은 그 발견 사례조차 많지 않았다는 희귀병 아니었습니까?”
“그랬지요. 당장의 기술로는 원인을 파악하기도 급급했을 겁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소녀의 아버지는 스타플릿의 고급 장교로, 존 해리슨의 협박을 받고 켈빈 기록 보관소에서 폭탄을 터뜨려야 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저희는 존 해리슨이 딸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무언가를 넘겨주고 거래를 했다고만 추측할 수 있는데요..”
“이쯤에서 우리는 과연 존 해리슨에게 수혜를 받은 인물이 그 소녀 하나뿐인지를 의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이상 존 해리슨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극이었다.
대중보다 더 고급스러운 정보를 먼저 받아볼 수 있는 스타플릿에서는 사실 누구도 쉽게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을 뿐, 오싹하리만치 놀라운 칸의 또 다른 가치에 대해서 소문이 많았다. 함장의 죽음을 똑똑히 목도했던 엔터프라이즈의 대원들은 다시 살아나 거동하는 제임스 커크를 보면서 속으로 적잖이 놀라워했다. 레너드 맥코이가 혈청을 합성하는 데에 일부 도움을 주었던 의사나 연구원들은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도 했다. 일반 교관부터 제독까지 모두 남몰래 관심을 반짝이고 있었다.
덕분에 바깥으로 돌아다니기만 하면 질문을 던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모르는 이들의 눈치를 받는 맥코이는, 이마를 몇 번 문지르면서 어느 병실에 당도했다.
“오늘은 가만히 있네?”
커크가 침대에 앉아 있다가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무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이 머무는 병실이라 쾌적하긴 해도 운동을 할 만한 공간은 아니었는데, 커크는 재활 훈련이랍시고 방 안에서도 부산하게 움직일 때가 많았다. 나름대로 맥코이에게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걸 어필하는 그만의 방식이었다.
“사실은 심심해 죽겠다.”
“왜, 그래도 내가 종종 와 주잖아.”
“요새 스팍은 바쁜가? 통 얼굴을 못 보겠네.”
맥코이가 주머니에 있던 트라이코더를 꺼냈다.
“외계인보다 더한 놈의 혈청을 맞은 함장이 이리저리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데, 엔터프라이즈한테만 떨어진 일도 좀 많아야지. 요새는 전투 상황에서 죽은 승무원들의 유가족을 챙기고 있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더라.”
커크가 인상을 구기면서 궁시렁거렸다. 마커스가 워프 궤도에서 빔을 발사하는 바람에 밖으로 날아간 승무원들은 구조할 수도 없었다. 그동안 트라이코더가 커크의 눈앞을 지나갔다.
“그리고 엔터프라이즈 재조선 결정됐잖아. 환자 신세만 아니었다면 너도 엄청 불려 다녔을 거야.”
“내가 무슨 환자라고 그래?”
“너 환자 맞아. 그것도 엄청난 주의가 필요한 요주의 인물이지.”
맥코이가 슬쩍 눈썹을 올리며 던지자 커크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맞받아쳤다. 두 사람이 동시에 짧게 웃었다.
“..요새 라디오에서 칸 얘기가 자꾸 나와.”
꼼꼼하게 진찰 기록부를 적어가던 맥코이가 멈칫했다.
“설마 스타플릿에 마커스 같은 인간이 또 있지는 않겠지?”
칸이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존 해리슨이었을 때부터 그에게 대항한 것은 커크와 엔터프라이즈였고 일종의 승리를 따내기도 했다. 그럼에도 커크는 다시 칸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거기에 그의 예술적인 폭력성에 매료된 사람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치켜드는 건 더더욱 싫었다.
맥코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도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타플릿의 제독이라도 쉽사리 들어가지 못하는 어느 공간이 있었다. 그곳이 지하라는 걸 감안해도 내부 공기는 꽤나 서늘했다. 뚜껑이 닫혀 있기는 하지만 73개나 되는 극저온 캡슐에서 감춰지지 않는 냉기가 흘러나오는 지도 몰랐다. 덕분에 거의 유일하게 거기에 출입하는 담당자는 연구원 특유의 가운 안에 겉옷을 덧입곤 했다.
성인 남자가 양 팔을 벌려야 간신히 채울 수 있을 너비에 모니터들이 정렬되어 있었다. 그가 차근차근 화면에 떠올라 있는 수치들을 보며 며칠 전의 데이터들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동자와 손가락이 함께 움직이며 숫자를 하나하나 짚고 넘어갔다. 이상 없음, 이상 없고..
갑자기 터진 높은 전자음에 그가 고개를 번뜩 치켜들었다. 최소한의 생체 신호만 유지해야 하는 그래프가 점점 뾰족해지고 있었다. 담당자가 급히 캡슐의 일련번호를 확인했다.
“오, 안 돼..”
그가 허겁지겁 문제의 캡슐을 찾아갔다. 누워 있는 남자가 눈을 감고 있는 게 보였음에도 두려움이 치솟았다. 그는 서서히 떨리는 손으로 계기판을 마구 클릭했다. 캡슐의 온도가 내려가면서 성에가 낀 표면이 더 뿌옇게 변했다. 그 순간 담당자는 심장이 멎어버릴 것처럼 차가운 안구를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평균적인 범위를 벗어나 버릴 기세로 온도는 추락했으며 더불어 아래에서 요동치던 그래프도 점차 잠잠해졌다. 그가 입을 벌리고 산에 기어오른 마냥 헉헉댔다. 그것은 그에게, 아니 행성 연방에서 제일 중요한 캡슐이었다.
데이스트롬 회의실에 약하게 불이 켜졌다. 아직 환자복을 내던지지 못한 제임스 커크 함장과, 희생된 대원들의 합동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하여 출장을 떠난 스팍이 부재한 상태로 열리는 회의였다.
“담당자가 어제 동결되어 있던 캡슐 중 하나에서 비정상적인 바이탈 사인이 감지되었다고 보고했습니다. 하필이면 그 주인공이 칸이더군요.”
“어떻게 됐습니까? 혹시 깨어난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아닙니다.”
누군가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한 겁니까? 얼려놨는데도요?”
“그는 보통 인간이 아니지 않습니까.”
가슴에 함장 표식을 단 남자가 조심스럽게 발언했다.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지도 모릅니다. 이번에는 그나마 담당자가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마무리된 거지, 손 쓸 틈도 없이 칸이 깨어나 버리면 어떻게 합니까? 게다가 그의 양옆에 있는 자신의 동료를 깨우기라도 한다면요?”
회의실에 둘러앉은 이들의 낯빛이 한 마음으로 어두워졌다. 그렇게 된다면 보관소 건물이나 샌프란시스코의 빌딩 일부가 무너지는 게 아니라 스타플릿이 한꺼번에 궤멸될 거라는 설득력 있는 예측이 함장과 일등 항해사들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칸과 그 무리들을 따로 떼어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맥코이가 다섯 번째로 정밀 진단을 마친 날에 커크는 잔뜩 불쌍한 표정으로 자신의 친구이자 담당의에게 퇴원을 시켜 달라며 사정했다. 온 몸에서 좀이 쑤셔서 미칠 것 같다는 둥, 이제 내가 완벽히 정상이라는 게 판명 났는데 뭐가 문제냐면서 쏟아 놓았다. 그리고 커크는 자신이 맥코이를 기어코 설득시킨 오늘을 제임스 커크 독립 기념일로 선정해야 한다는 둥 너스레를 떨면서 유니폼을 입었다.
커크는 제일 먼저 엔터프라이즈를 만들고 있는 현장을 찾았다. 높다란 크레인과 철 구조물들이 높은 공중에서 움직였고 안전 요원들이 여기저기서 붉은 막대를 휘저었다. 익숙한 얼굴의 엔지니어들과 장교들은 함장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스콧이 옆에 붙어서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엔터프라이즈가 앞으로 더 얼마나 우수해 질지에 관해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 무시무시하게 생긴 함선만큼 끝내주는 코어를 달 거예요. 이미 빼올 정보들은 다 빼왔다 이겁니다.” 스콧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무슨 스파이 노릇도 아니고, 그걸 정보를 빼왔다고 말하는 거야?”
“절대로 한 수 배웠다고 하기는 싫거든요.”
스콧이 잠시 미간을 찡그렸다.
“재건되고 나서 그녀와 함께 어떤 임무를 맡을 지, 솔직히 지금부터 기대가 됩니다. 이번에는 제발 무서운 일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커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스콧의 어깨를 탁탁 쳤다. 지난 사건들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스타플릿의 온건주의자들이 우주 곳곳을 동분서주하며 외교를 펼치고 있었고, 연방에 복수의 칼날을 세우는 요원도 아직까지는 발견된 바가 없었다. 커크가 함선의 외피 조각을 나르고 있는 와이어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저편에서 스팍이 걸어오고 있었다. 커크가 오랜만에 보는 자신의 부함장을 밝은 모습으로 대했으나, 스팍의 표정은 평소보다 굳은 것 같았다.
“함장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응?”
“칸 누니엔 싱이 깨어났다고 합니다.”
듣고 있던 스콧의 눈이 커지고, 커크의 눈동자가 한순간에 가라앉았다.
“젠장, 그 놈을 누가 깨운 거야!”
“누가 일부러 깨운 것이 아니라 스스로 각성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대처는? 의외로 조용한데?”
“그게 어쩌면 가장 큰 문제가 될지도 모릅니다.”
스팍이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그들은 몇 번이고 모퉁이를 돌고 긴 복도를 거쳤으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소수의 인물들에게 허락된 층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긴 총을 들고 있는 두 명의 문지기가 입구를 막고 있었다. 스팍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문을 열도록.”
“아직 제독님들이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커크가 나섰다.
“실질적으로는 우리가 놈을 잡았다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충분히 범죄자를 면회할 수 있는 권리는 있다고 봐. 좀 비켜주지 그래.”
문지기는 물러서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스팍의 말이 옳았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터지고 있었다. 그것이 칸 누니엔 싱으로 인해 많은 걸 잃었던 제임스 커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망할! 대체 칸이랑 또 무슨 거래를 하고 있는 건데!”
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욕망은 있다. 사소하게는 이번 기회에 손목시계를 바꿔버리고 싶다는 수준에서 우주를 탐험하겠다는 다짐까지 나아가기도 하며 개인의 성격만큼이나 다양한 양상을 띤다. 그럼에도 가장 유구하며 지긋지긋하게 인간의 뒤를 밟았던 욕구가 있다면 불멸과 야망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토록 다수가 원했음에도 역사의 책장에 그쳐버린 이유는 그것을 증폭하고 강렬해지게 만들 마땅한 촉매제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칸이 300년 동안 동면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랫동안 짝을 찾지 못하고 있던 그 모든 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성취되어 영생 따위는 시시한 가치로 전락했을 지도 몰랐다.
마침내 출입을 허락받은 커크는 캡슐에서 빠져 나왔음에도 얼음처럼 정지해 있는 칸을 바라보았다. 스팍이 기지를 발휘해 제독들에게 대화 내용을 캐묻겠다고 말하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엔터프라이즈의 감금실과 비슷하게 생긴 유리감옥 안에서 칸이 고개를 올렸다.
“왜 일어났어.”
칸의 시선이 곧게 커크를 향했다.
“아직 분이 덜 풀렸던 거야? 이번에야말로 네 대원들 다 깨워서 한바탕 우주를 뒤집어엎고 싶었어? 그 잘난 머리로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도 못했나?”
“..난 자의로 깨어난 게 아니다. 알지도 못하면 그 입 좀 다물지.”
“그러면 다시 스스로 잠들던가!”
커크는 자꾸만 화를 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이 동의한 적도 있던 수면에서 이유도 없이 깨어나 다시 수감자가 된 칸보다 더 거세게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인 칸이 말했다.
“죽음이 그렇게 두려웠나?”
커크의 표정에 금이 갔다. “..뭐라고?”
“굉장히 예민하게 반응하는군. 너를 한 번 죽였던 내가 되살아나니 불쾌한 상상이라도 드는 건가?”
무심하게 내뱉는 그의 언어가 짜증나도록 냉정했다. 그러나 커크는 오히려 그 온도에 제 자신이 식어버림을 느꼈다. 눈물을 흘려도 흔들리지 않았던 동공이 기묘하게 투명해서 커크는 눈썹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나한테 신경 쓸 처지가 아닐 텐데.” 커크가 물었다. “방금 나간 사람들이 뭐라고 했어? 널 얌전히 캡슐로 돌려보낸다고 하지는 않았을 거야.” 칸의 대답은 건조했다. “나를 이용하겠다고 하더군. 당장은 내 지식을 빌리겠다고 하지만 거기서 그칠 인간들이 아니지.”
잠시 말을 끊고 칸이 비스듬히 고개를 꺾었다.
“네가 염려하는 게 궁금하군, 캡틴.”
“시끄러워.”
그가 드러내 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제독들은 협박의 말도 덧붙였을 게 분명했다. 칸 역시 자신의 대원들이 폭발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므로 그들의 안위를 들먹이면서 협조를 요구했으리라. 두꺼운 수갑과 유리벽은 단지 그럴싸한 죄수의 풍경을 연출할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커크는 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제 입장에서도 가만히 동면하는 게 훨씬 나을 텐데도 저 고분고분한 척이라니.
하지만 사실 커크는 그를 이해했다. 커크가 세차게 시선을 내렸고 칸이 석고상처럼 눈꺼풀을 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칸은 이동되었다. 그게 극저온 캡슐 속이라면 좋았겠지만, 스타플릿은 뜬금없는 부분에서 인정을 발휘하여 그에게 꽤 멋들어진 작업실을 내어주었다. 안에서는 열리지 않고 내부에 설치된 컨베이어 벨트를 통해서만 설계도나 연구 내역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 특이했어도 겉으로 감옥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밖에서는 그곳을 섹터라고 칭했다.
가만히 사색에 잠겨 있던 칸이 벨트가 삐그덕대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작업할 때 쓰일 패드와 함께 문서 하나가 배달되어 왔다. 혈액을 채취해야 한다거나 조직 검사를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가 일급 테러리스트를 만나길 꺼려한 덕분이었다. 칸이 지령서를 읽었다. 재조선 중인 함선의 기능을 향상하는 데 도움을 줄만한 아이디어와 실질적 실천 방안을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꼭 어린 인간들에게 주는 숙제 같았다.
그러다가 ‘재조선’이라는 단어를 보고 칸이 잠시 생각했다. 그가 추측하기에 처음부터 다시 만들어져야 하는 함선은 하나였다. 그가 조소했다. 자신이 망가뜨린 함선의 재건에 이바지한다는 사실에 웃음이 나왔다.
패드를 집은 칸이 허공에 홀로그램을 띄웠다. 엔터프라이즈의 하얀 선체가 얇은 선의 형태로 구현되었다. 그는 손을 움직이면서 이걸 빌미삼아 제임스 커크가 자신을 보러 오게 될 거라고 짐작했다. 위험한 선물과도 같은 칸의 혈액이 커크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거나, 그가 미리 시나리오를 세워 둔 건 아니었다. 순수하게 그것은 칸의 생각이었다.
커크가 입술을 꾹 다물고 언짢은 표정으로 칸을 노려보았다. 그는 어설프게 가운을 입고 레너드 맥코이의 카드키와 타블렛을 들었다. 그리고 칸은 보란 듯이 가상적으로 개량한 엔터프라이즈의 모습을 정지된 영상 형태로 띄우고 있었다.
“내가 손댄 부분 중에 마음에 들지 않은 부분이 있다면 지금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캡틴.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거든.”
칸의 빈정거림에 커크가 재빠르게 대꾸했다.
“스타플릿에 충성스러운 인재가 나셨네, 아주.”
“내가 연기에 능하다는 건 한 차례 경험했을 텐데.”
“차라리 빨리 선전포고를 하시지.”
커크는 얼어붙은 칸의 안구를 미간을 구기며 회피하려다가, 머리 위에 떠오른 엔터프라이즈와 마주치고는 속으로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는 다시 칸을 바라보게 되었다.
“우주는 불행과 적의로 이루어져 있어. 억지로 미뤄내도 결국엔 그것들이 덮쳐 오는 순간이 있지. 잠깐 존재들을 악의적인 고리에서 풀어냈다가, 다시 실을 감듯 끌어당겨 모든 대가를 치러내게 만들어.”
“요점은?”
“내가 서두르지 않아도 너희는 심판을 받게 될 거란 뜻이다.”
“그 판사가 네가 되지는 않을 거야.”
“그 자리를 네가 꿰차겠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커크는 다른 부분을 인정했다.
“..스타플릿의 일부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칸은 늘 그렇듯 자신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제임스 커크의 양심은 300년이 지났어도 발전이 없는 인간 무리들 가운데서도 꽤나 주목할 만했다. 아주 조금은 만족스럽고 흥미롭다는 듯한 눈길을 감지했는지 커크가 곧바로 덧붙였다.
“내가 널 지지하는 건 아니야. 내 머리 멀쩡해. 하지만 마커스 제독이 그렇게 험한 꼴을 당했는데도 네 능력을 이용하려는 행위는, 적어도 나는 인정 안 해.”
칸이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너 혼자서 나를 동결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누구도 선을 넘지 못하게 만드는 일은 할 수 있어.”
패드가 불빛을 냈다. 엉겁결에 디바이스를 맞바꾼 맥코이가 커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는 신호였다. 거기서 1박이라도 할 참이야? 빨리 안 나올래! 낱말에서 맥코이의 목소리가 튀어오를 것 같았다.
이쯤 되니 커크는 자신이 왜 칸을 만나려고 했는지 이유를 기억하지 못했다. 작업에 딴지를 걸어 주려고 왔던가. 그러나 23세기에서도 그 우월함을 떨치고 있는 칸의 생각에 면박을 준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여하튼 맥코이의 말처럼 커크는 그만 일어나야겠다고 결정했다.
“내 복수를 막겠다는 뜻인가?”
칸이 묻는 소리가 들려 커크가 고개를 돌렸다.
“네 선원들을 죽일 생각은 절대 없는데, 무슨 복수를 말하는 건지 모르겠네.”
다소 엉뚱한 대답이었지만 칸은 커크가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엔터프라이즈는 아직 두 사람의 위에서 빛나고 있었다.
근래 업무가 많아 잠을 설친 덕분에, 맥코이는 이번에야말로 피로를 씻어내겠다는 의지로 커뮤니케이터도 꺼버리고 라벤더 차를 진하게 끓여 마신 다음 한창 잠에 빠져 있었다. 블라인드까지 촘촘히 내려져 있는 방은 저녁처럼 어두웠다. 맥코이는 자는 동안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문을 두드린 건 그 즈음이었다. 깊게 잠들어 있어서 그는 처음에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 다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 번째, 문에 구멍을 낼 기세로 노크를 하는 방문객에 맥코이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일어나야 했다. 젠장. 대체 누구야. 문까지 걸어가는 그 짧은 거리 동안 맥코이는 갖가지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가 제대로 뜨지 못한 눈으로 입구를 열었다. 상냥해 보이지는 않는 인상의 여인이 그에게 빈틈없이 들어찬 시험관대를 내밀었다. 들어 있는 액체는 모두 붉은색이었다.
“...뭐에요, 이건.”
“박사님이 맡으신 실험에 쓰일 샘플입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칸을 실험할 자격이 있는 분이 박사님 말고 누가 있겠어요?”
맥코이가 순간 잠시나마 눈을 크게 떴다.
커크가 다짜고짜 서류뭉치를 책상에 내려놓았다. 데이스트롬 폭격 사건 이후 숫자가 급격히 줄어든 제독들 가운데서도 가장 경험이 많다는 노년의 남성이 시선을 들었다.
“이게 뭔가, 커크 함장?”
“엔터프라이즈가 사실상 5년 탐사 임무를 맡게 될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확실합니까?”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자네가 모험심이 강하고 또 그 임무에 적합하다는 건 맞네만..”
“당장 그걸 확인하는 게 목적이 아니니까 빨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커크는 평소보다 여유가 없어 보였고 그 자리를 짙은 진지함과 결단이 채우고 있었다.
“아마도 그렇게 될 걸세.”
제독은 대답해 주면서 커크가 가져온 서류의 정체를 파악하려 했다. 얼핏 살피니 엔터프라이즈의 장기 임무와 관련하여 본부에 요청할 사항들에 관한 내용인 듯했다. 단순히 보급품 문제라면 커크가 발걸음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제독은 좀 더 주의를 기울였다.
“5년 동안 엔터프라이즈는 한 번도 사람들이 가보지 못했거나 교류의 흔적이 없는 곳들을 찾아다니게 될 겁니다. 그 여정 중에 만나는 종족들이라든가 생명체들이 언제나 저희에게 호의적이진 않겠지요. 불가피한 전투 상황이 발생할 지도 모릅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를 넘기던 남자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러니 그와 관련하여 인원을 보충할까 합니다.”
제독이 눈을 치켜떴다. “..지금 자네, 칸을 자네의 함선에 태우겠다는 건가? 진심인가?” 커크의 눈빛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여기서 말도 안 되는 실험에 끌어들였다가 구제불능인 성질 건드리셔서 놈이 우주 전쟁 일으키지 않도록 사전에 방지하자는 겁니다. 전 꽤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제독님.”
며칠간 커크의 커뮤니케이터는 식을 틈이 없었다.
- 함장님, 정말로 칸이랑 같이 우주에 나가야 하는 거예요?
- 칸이 저희 배에 탑승한다는 말이 있던데. 그냥 소문이죠, 함장님? 그렇죠?
- (글자가 없고 우는 모양만 그려져 있음)
- 짐, 어떻게 그녀한테 그런 끔찍한 짓을 허락할 수가 있어요! 당장 취소해!! (커크는 단번에 스콧 보낸 메시지라는 걸 알았다)
- 함장님. 캐롤 마커스의 전례도 있었는데 이번에도 저와의 상의 없이, 그것도 칸 누니엔 싱에게 승무원의 신분을 주실 겁니까? 지금 함장님이 있는 장소를 찾는 중입니다. 그 전에라도 메시지를 확인하시면 즉시 응답 주십시오.
- 너 아직도 내 카드키 안 준 거 알고 있거든?!
커크는 연신 입을 비죽이다가 걸으면서 몇몇에게만 답장을 보냈다.
- (스콧에게) 나도 웬만해서는 참았을 거야. 왜, 워프 코어에 대해서 주변에 그 놈만큼 말이 잘 통하는 상대도 없을 거라고. 빌어먹을. 진짜 미안해.
- (맥코이에게) 한 번만 쓰고 앞으로는 꼬박꼬박 검진 받으러 갈게. 약속함.
- (스팍에게) 이번만큼은 네가 단번에 이해해 줄 줄 알았는데.
“냉동인간!”
되돌리기도 곤란한 대사건을 터뜨린 주제에 막상 부끄럽고 약간은 공황 상태에 빠진 커크는 괴상한 방식으로 칸을 호칭하면서 카드키를 긁었다. 육중한 철문이 느릿느릿 옆으로 비켜나자 고상한 자세로 책을 보고 있는 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가 그대로 얼굴만 돌려서 커크를 보았다.
“언젠가 내 양심에 고마워할 날이 있을 거야. 일어나.”
칸이 의아하다는 듯 동공을 굴렸다.
“가자고.”
무리수로군, 캡틴. 생체 실험 당하는 게 더 좋다고 하면 안 말려. 지금이라도 가든가. 내 피를 맞고 전보다 더 무모해졌다니 이상한데. 좀 더 냉정해지고 이성적으로 변하는 게 아니라. 널 만든 과학자들이 사회적 인성을 함양하는 수업은 제공해주지 않든? 정리하자면 나는 네 은인이라고. 반 이상을 내 독단으로 널 엔터프라이즈에 승선시키는 거야. 나를 이용한다는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데. 널 사이에 두고 스타플릿을 상대하면서 그 부분까지 양보를 받아내는 건 불가능할 거다. 그래도 나나 본즈나 너한테 이상한 짓은 안 할 거야.
..이제는 정말로 궁금해지는군. 뭐가. 너를 죽였어도 다시 살려준 데에 관한 보답이라도 하는 건가? 너는 나를 상관할 필요가 없어. 내 양심에 고마워 할 날이 있을 거라고 했잖아. 순전히 네 도덕적, 윤리적 의식으로 날 돕는다는 의미인가? 거 참 사람 불편하게 만드네. 5년 못 채우고 중간에 소행성에 내려 놔도 그러려니 해. 난 대답을 원해, 커크.
300년 살면서 세상 구경도 못 해봤어? 우주는 절대 불행과 적의만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아.
칸이 홀로 탑승하는 셔틀에 올라 손수 안전장치를 확인한 커크는 감시원들의 페이저건의 출력을 최대로 올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칸의 청록색 눈동자가 커크의 뒤를 쫓았다. 잠시 그와 시선을 마주한 함장이 말했다.
그럼 엔터프라이즈에서 보자고.
Stardate 2260. xx
“뭔 저런 녀석들이 다 있냐!!”
맥코이가 고함을 치며 달렸다. 행성에 자라 있는 샘플을 채취해 보겠다며 나름의 욕심을 부렸다가 그는 현재 뜻하지 않은 고충을 당하고 있었다. 맥코이와 나란히 뛰던 커크가 야심차게 페이저건으로 반격을 하려다가 날아오는 창에 머리를 웅크렸다. 커크가 커뮤니케이터를 붙잡고 목소리를 높였다.
“빨리 워프시켜 줘! 이러다가 죽겠어!”
“함장님이 그렇게 달리고 계시면 이쪽에서 어떻게 위치를 잡습니까?”
“그럼 우리보고 멈춰 있으라고!”
등 뒤에서 날아드는 무기와 빔이 갈수록 많아졌다. 커크가 이를 악물면서 있는 힘껏 도망쳤다. 그 때 그림자가 훅 그의 코앞을 지나가더니 커크의 손에 들려 있던 총이 사라졌다. 순식간에 비무장상태가 되어버린 스타플릿의 함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문득 발밑에 꽂히는 블레이드의 수가 적어졌다. 지독한 호전성만큼이나 출중한 순발력과 전투력을 자랑하는 부족들의 괴성이 이젠 다른 의미로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커크와 맥코이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페이저건의 붉은 광선이 얼핏 공중을 날아다니는가 싶더니 그는 아예 놈들의 무기를 뺏어 휘두르고 있었다. 점차 비어가는 칼날이 줄어갔다. 사실 엔터프라이즈가 행성으로 내려 보낸 인원은 커크와 맥코이가 전부였다. 처음에는 그랬다.
“쓰지도 못할 총은 왜 들고 있었나.”
간단하게 추격꾼들을 제압한 장본인이 발에 걸리는 시신들을 치워내면서 두 사람에게 접근했다. 커크의 함선, 나아가서는 스타플릿에 한 명뿐일 전투 장교가 함장과 메디컬 치프에게 차갑게 핀잔을 주었다.
“엔터프라이즈, 우리를 워프시키도록.”
자신의 대사를 빼앗긴 커크가 벙찐 얼굴로 칸을 쳐다보았다. 미간을 좁히긴 했어도 그가 살풋 웃은 것 같았다.
'- Star Trek Into Darkness' 카테고리의 다른 글
[STID/존본즈] The Dream of Scientist (0) | 2013.09.18 |
---|---|
[STID/Khan] On Colors of the World (and Loneliness) (0) | 2013.09.18 |
[STID/존커크] The Log (0) | 2013.09.18 |
[STID/Khan] Innocence & Knowledge (0) | 2013.09.18 |
[STID/Khan] Memories Unforgettable (0) | 2013.09.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