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PART 2. PRESENT

18. History of Coexistence

THE FINALE




  존 해리슨의 집무 구역이 되살아난 듯한 공간이었다. 끝을 모르고 떨어지는 승강기의 숫자와, 문이 열렸다는 것이 잘 구별이 가지 않는 까만 벽과 그것을 비추는 파란색 등불은 불쾌한 기억을 자극하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칸은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 때 레너드 맥코이가 불쑥 그의 눈앞으로 팔을 내밀더니 키패드를 가리켰다. 칸이 레너드를 보았다.


  자신이 유린하지도 미워하지도 않는, 그 모든 지위가 아직까지 칸에겐 낯선 인간이 뒤를 돌았다. 칸이 어떠한 암호를 누르는지 훔쳐보지 않겠다는 의사의 표현이었다. 그는 꿋꿋하게 등을 노출하고 있는 레너드를 응시하다가 패드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피부를 인식한 패드가 새로운 화면을 띄워 올렸다.


  칸이 자신만이 알게 될 패스워드를 입력했다. 문 너머의 공간이 나타나기 위한 절차가 완료되었다. 곧 안쪽에서부터 찬바람이 새어나왔고 두꺼운 문이 옆으로 밀려났다.


  센티넬은 인간들이 자신에게 처음으로 한 약속의 징표를 볼 수 있었다. 아무도 한 발 앞서거나 뒤쳐지지 않았다. 칸은 두 줄로 정렬된 극저온 캡슐들을 망막에 담고 그대로 눈꺼풀을 내렸다. 레너드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위인의 성취를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이드의 무엇을 빌려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공감으로 입 주변에 힘을 주었다.


  레너드는 문득 가운데에 의자가 놓여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칸이 200년간 헤어져 있었던 동료들 사이에서 더 편하게 있을 수 있었다. 레너드는 진지하게 의자를 찾아보려다 칸의 시선에 사로잡혀 발을 떼지 못했다. 가이드를 보는 센티넬의 눈빛에도 적합하지 않지만, 이태까지는 센티넬이 인간을 보는 데에도 똑같이 어울리지 않았던 모호한 안구가 레너드를 붙잡았다. 


  “나에게 정말로 이들을 깨울 권리가 있나?”

  “물론.”

  “지금 당장이라도?”


  레너드는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스타플릿은 내가 너를 곁에 두는 대신에 내 행동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었지.”

  “그것이 당신의 동료와 얽혀 있는 한 스타플릿은 잠자코 있을 거야.”

  “그렇다면 너는 내 행동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 거지?”

  “존중할거야.”


  레너드의 답변은 센티넬의 예측 범위도 벗어날 정도로 빨랐다. 칸은 그 간단한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하나씩 파헤쳤다. 센티넬과 가이드는 같은 자리에 선다.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이것은 또한 존중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가이드는 심각한 예외적 상황이 아닌 이상 센티넬의 의사를 존중한다.


  칸은 적어도 자신이 인간학적인 사고에는 익숙해지고 있음을 발견했다. 그는 다시 캡슐들에게 주의를 돌렸다.


  한편 덕분에 자유로워진 레너드는 은밀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었다. 레너드는 소리 없이 시선을 휙휙 옮기다가 슬그머니 옆걸음을 치면서 왼쪽으로 갔다. 끝내 의자를 가져오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결정한 모양이었다. 레너드가 최대한 소음을 줄이면서 의자를 끌어왔다.


  그런데 칸이 레너드를 힐끗 훑더니 작은 손짓을 보냈다. 레너드는 의자를 내려놓고 눈을 깜빡거렸다. 잠시 후 칸은 아예 캡슐 부근으로 걸어가 버렸다.


  칸은 방금 의자를 사양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자신의 뜻을 제대로 못 박기 위해 자리까지 이동해버렸다. 레너드는 적잖이 얼떨떨해져서 의자만 붙잡고 있었다. 종국엔 끌어온 의자를 가만히 방치해두는 것도 이상할 듯해 레너드가 털썩 엉덩이를 붙였다. 그는 칸이 캡슐 안에 있는 센티넬들을 천천히 확인하는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기다림은 생각처럼 길지 않았다. 레너드는 내친 김에 칸에게 시간을 더 주었다. 서로 자세는 달랐지만 같은 위치에서 둘은 잠들어 있는 센티넬들을 바라보았다.    

 






  뒤늦게나마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들은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한 점을 토대로 장기 휴가를 받았다. 많은 이들은 이 기회를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 본가라든가 휴양지로 떠나는 데 사용했다. 그 점에서 폴 브라운은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학자답게 이번 휴가를 원고를 마감 짓는 데 투자하기로 한 것이었다. 폴은 커서를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단어를 덧붙이고 문장을 수정했다. 스타플릿에게 있어 지난 전쟁은 등골이 서늘해지는 공포였지만 인간학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영감의 보고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한 측면에서 폴은 자신의 글을 대폭 고쳐야 하는 것에 억울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폴과 친분이 있는 편집자는 원고를 되도록 빨리 넘겨달라며 성화를 부렸다. 편집자는 인간학 서적이 그 어떤 때보다 주목받을 수 있는 대목이라는 논리로 폴을 압박했다. 그것은 기어코 폴이 자판 치는 속도를 높이는 데에 3할 정도를 차지하게 되었다. 실상 폴은 첫 번째 독자가 되어줬으면 하는 누군가에게 빨리 글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서두르고 있는 것이었지만 말이다.


  긴장한 상태로 구부러져 있던 손가락 끄트머리부터 뻐근한 감각이 올라올 때 즈음 폴은 노트북 위에 두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고 있자니 문득 폴의 머릿속에 그만큼이나 재미없게 휴가를 보내고 있는 동료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침 폴이 진전을 중단시킨 문단이 그 동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폴은 희미하게 웃었다. 첫 장 혹은 마지막장에서 언급하고 끝날 줄 알았던 그의 이름은 폴의 글에서 꽤 빈번하게 등장했다. 하지만 학자의 마음에 들기 어려운 몇 안 되는 돌발 상황은 희귀한 만큼이나 가치가 깊은 법이었다. 







  현관문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칸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햇빛이 잘 드는 자리에 긴 의자를 펴 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묘하게 이질적인 태양이었다. 칸은 그것의 빛을 보려고 했다.


  그의 가이드가 옅은 그림자를 끌어와 칸의 시야에 덮었다.  


  “폴이 이번에 낼 책이래.”


  칸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자신이 폴 브라운의 저서를 받아야 하는 이유를 용납하기 전까지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듯했다. 


  “전부터 폴이 일반인도 쉽게 읽을 수 있으면서 체계적인 인간학 입문서를 쓰겠다고 했었거든. 그런데 어쩌다보니 우리 얘기가 많이 들어간 모양이야. 그래서 한 번 읽어봐 달래. 사실과 맞지 않거나 불편한 점이 있으면 고치겠다고. 당연히 내가 당신보다 읽는 속도가 느릴 테니까 먼저 봐.”


  칸이 의문을 가질 만한 부분에 대해 미리 답변을 달아 주고 레너드는 상자를 버리러 갔다. 하나같이 자연스러운 움직임들이었다. 칸은 잠시간 레너드를 보다가 그가 준 책과 자신이 보고 있던 태양빛을 서로 만나게 했다. <인간의 가장 어두운 거울>이라는 책 제목이 눈에 띄었다.


  인간에게 가장 짙은 어두움을 상기시켜줄 수 있는 살아 있는 거울 중 가장 우수한 자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와 함께 지내는 인간은 사소한 일로 호들갑을 떨거나 바빠하는 일이 있었다. 사다 놓은 과일이 상했다든가 여분의 제복 단추를 놔두었던 곳을 잊어버렸다든가. 


  센티넬과 누구보다 가까운 인간은 그랬다. 칸은 책장을 주르륵 넘겨서 끝부분을 펼쳤다. 



  자신의 이름을 뛰어넘은 존재와 기억 그 이상이 된 존재 사이의 우열을 논할 수 있을까?


  전자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자. 모든 이들은 아주 근사한 이름을 받는다. 지혜 그 자체를 의미하는 이름, 신을 찬미하고 그 축복을 얹은 수많은 성스러운 이름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역사상 최초의 인간이었던 자와 이름이 같고 심지어 천사들의 이름을 그대로 받은 사람들도 적지 않다. 개개인의 이름은 남들에게 뒤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뜻을 가지고 있는 게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이름을 뛰어넘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혜라는 개념 자체를 초월한 현자의 탄생을 의미할 수도 있고, 영리한 것보다 더 민첩한 기지의 소유자를 은유할 수도 있으며 어쩌면 신의 벗이 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하나같이 굉장한 일들이다. 


  그렇다면 기억 그 이상이 된 존재는 어떨까? 먼저 기억이라는 게 나와 당신이 공유하는 사적인 역사라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도출되는 기억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당신이라는 타자가 있어야 한다는 것, 잘 팔리는 역사서가 아니라 머릿속에만 기록된 사적인 이야기라는 것. 그리하여 기억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곧 내 존재가 단지 당신과 당신의 기억에 머무르지 않게 된다는 것이며 폐쇄적으로 한정되어 있던 나의 실존을 뛰어넘는다는 뜻이 될 수 있다. 다수가 아는 이야기가 아닌 이상 그 안에 등장하는 인물은 많은 이들에게 추상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역시 위대한 일처럼 보인다.


  아마 이 두 가지 중 무엇이 우월하고 더 추구할 만한 가치인지는 쉽게 정할 수 없을 듯 보인다. 만약 자기집중적인 계발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름을 뛰어넘길 더 바라겠고 야심이 있는 자라면 기억을 넘어서길 바랄 가능성이 높다. 당신의 기억을 뛰어넘으면 나는 당신만이 독점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게 된다. 그리고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려 하는 건 야심 있는 자들의 특징이다.


  이 모든 말들은 사실 내가 한 사람을 추억하기 위한 과정이다. 그는 누군가가 ‘그 사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자리에서 곧장 이러이러하다며 대답하기 곤란한 축에 속한다. 그 덕분에 나는 단 한 사람을 말하고자 꽤나 복잡스러운 사고를 거쳐야 했던 것이고, 책을 마무리하는 장에서조차 그 흐름을 버리지 못하고 말았다. 지배자의 기표와 200년을 넘나드는 기억을 가진 자를 상기하는 일이니, 내가 겪고 있는 무게감에 대해 한번만 더 이해해 주길 바란다. 


  알렉산더 혹은 빌헬름 같은 이름 역시 큰 업적을 세웠던 왕들이 썼던 것이고 이와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지배자의 기표를 가졌다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는 그들보다 더 보편적인, 지배자라는 위치를 점유한 자의 이름이 알렉산더와 빌헬름, 라파엘이라도 상관없는 하나의 개념 혹은 지위를 이름으로 가지고 있다. 그는 정복이라는 맥락 그 자체를 타고나버렸다. 고로 그가 자신의 이름을 뛰어넘기란 정말로 힘든 일이다. 사전에 실려 있는 문제의 단어에 자신을 의미하는 새로운 의미를 추가시키는 양상이 가장 현실적이고 납득할 수 있을 만한 수로 보이기는 하는데, 사전을 뒤집어엎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이 그리 쉽던가. 


  더군다나 그는 순식간에 200년을 뛰어넘었다. 만일 그가 기억을 뛰어넘겠다는 각오를 한다면 그는 아무런 기반도 없는 상태에서 일일이 자신의 장애물을 만들고 그것을 향해 도약하는 이중적인 작업을 해야 한다. 200년을 건너 눈을 뜬 그에게는 ‘당신’이라는 게 없는 탓이다. 풀 한 포기와 나눠가졌던 기억을 초월하겠다고 해도 2세기를 버틴 식물은 많지 않을 거다. 기념물로 지정될 정도의 무생물, 혹은 자신과 그야말로 무관계한 사람들. 그가 넘어야 할 것들은 형체도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개념이나 형체를 잡는 게 불가능할 지경으로 너무나 많은 개별자들이었다.


  그가 무엇을 선택했을 것 같은가? 놀랍게도 그는 둘 중 어느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 다 넘어서지 않았다. 지배자의 틀에서 빠져나온 건 그것을 상징하는 자신의 이름을 넘어선 행위가 아니며, 기억을 가꾸기로 한 결정 역시 그것의 초월과는 거리가 멀다. 


  200년 전의 그였다면 아마 이름과 기억 두 가지를 목표로 했을 것이고 충분히 그것을 깨부수고 발로 짓밟아 흔적도 없이 만든 다음 그 너머를 유유히 걸어갔을 게 분명하다. 아직도 그는 가끔 그러한 성향을 드러낸다. 그런데 태어난 직후부터 성물처럼 떠받들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인간을 전복시킨 그가 누군가를 가두고 거느리는 익숙한 작업을 내려놓고 단순한 대표에 만족한다. 대의 정치라는 대단히 민주주의적인 낱말이 떠오를 정도다. 또 자신의 의도가 다수의 공리였기 때문에 오히려 타자나 당신이 필요치 않았던 그가 한 명과 나눌 수 있는 사사로움에 안착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 같다.

  


  “설마, 벌써 다 읽은 거야?”

 

  칸이 책을 잡고 있는 모양새를 보고 레너드가 쑥 목을 내밀며 물었다. 


  “마지막을 먼저 보고 있었다. 다 읽으면 부를 테니 나중에 오지 않겠나.”


  레너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의 접근을 일축해버리는 말을 가볍게 받아들였다. 그것은 인간을 친근하게 여기기엔 한참 짧은 역사를 가진 센티넬과 원만한 양립을 이루기 위한 묘책의 한 부분으로 보였다. 레너드는 자신의 센티넬이 독서에 집중할 수 있도록 물러나주었다. 칸은 이어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개혁시키지 못했던 거대한 패러다임과 같은 존재를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로 한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 가이드가 되는 과정에서 바뀌는 것이 거의 없다는 절차를 너무도 완벽히 이해한 나머지, 그것을 어떤 관계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응용력을 터득한 것만 같다. 그것은 가이드가 센티넬과 관계하는 이상적인 전략이기도 하다.


  한 존재가 위대해질 수 있는 몇 가지 경우의 수를 내던지고 200년간 변함없었던 자기를 내던지기를 선택한 자와, 누군가와 대화하고 손을 잡는데 있어서 가장 고르기 쉬운 길을 거절하고 대신 그 무엇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한 자가 이 순간 함께 한다.


  그것은 세상에서 제일로 위대한 만남이며, 레너드 맥코이와 칸 누니엔 싱은 내가 감히 인간학의 이름을 빌려 칭송하고 싶은 경이로운 존재들이다.




History of Independence

The End



* <독립의 역사>는 추후 외전 에피소드를 추가하여 12월 말에 열리는 본즈 오른쪽 온리전에 구간 3종과 함께 책으로 나올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 현재까지 본편은 미편집 상태로 260페이지로 집계되고 있습니다. 책으로 나올 시에는 당연히 몇 가지 부분이 수정되서 들어갑니다. 소소하지만 파트1에 삽입되어 있던 주석도 들어가고, 기타 필자가 실수했던 사항 등등이 혼신의 힘을 다해 고쳐질 예정입니다. 
* 기타 질문 사항은 애스크 http://ask.fm/jadeeseline 로 문의해주시기 바랍니다.
* 지금까지 <독립의 역사>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