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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 & Montgomery Scott

- Written by. Jade


Engineer's Log





Log 1


  23세기의 기술로 우주 내 도약이 가능한 함선을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50일 남짓이었다. 물론 이후 각종 기능들을 테스트하는 데 배를 건조한 만큼의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어쨌든 함선의 모양이 갖춰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50일이다.


  늘 대단할 정도로 짧다고 여겨졌던 그 50일에 스콧은 처음으로 화를 냈다. 엔터프라이즈호를 다시 만드는 일에 50일이 걸린다는 건 그만큼 그가 스타플릿이 던져준 임무에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이었고, 평화와 안락함이 가득한 요크타운이 아닌 무시무시한 샌프란시스코의 본부에 혼자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으며 전범 한 명을 무찔렀더니 더욱 극악무도한 범죄자와 같은 공간을 써야 한다는 말이었다.


  스콧은 정말로 열고 싶지 않은 문을 쳐다보았다. 문틈 아래에서 하얗게 응결된 한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스콧이 그 문을 열고 싶지 않은 데에는 안쪽이 춥다는 것 말고도 너무나 많은 이유가 존재했다. 얼굴이 거칠고 과묵한 스콧의 친구조차도 이 일에선 멀어지고 싶다면서 요크타운 어딘가에 숨어버렸다. 스콧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카드키를 바라보았다. 영광스럽게도 그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스타플릿에서도 몽고메리 스콧 한 명밖에 없었다.


  스콧은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면서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트레이닝을 잘 받은 장교가 10명쯤 있어도 열리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문이 고맙게도 스콧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스콧은 김이 서린 내부마저 이겨내고 윤곽을 드러낸 73개의 캡슐들을 무겁게 쳐다보았다.


  스타플릿은 하필 전범들의 수용소를 고칠 수리공으로 스콧을 골랐다. 이에 스콧을 비롯한 엔터프라이즈호의 주요 승무원들의 반응은 몹시도 뜨거웠다. 커크는 막말을 쏟아냈고 스팍은 함선이 파괴되는 위기와 생명의 위협을 간신히 지나온 장교에게는 충분한 육체적 및 정신적 안정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했으며, 맥코이는 인체에 해가 되지 않지만 아주 요란한 부작용을 일으키는 약물은 아주 많다며 스콧에게 귀띔했다. 스타플릿은 단 한 마디로 승무원들의 열의에 찬물을 끼얹었다. 스타플릿 최고의 엔지니어 자리를 다투면서 강화인간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험한 바 그들에 대한 환상을 품지 못할 인물이 스콧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말이다.


  그리하여 스콧은 극저온 캡슐들이 보관된 창고에 서 있었다. 인류를 멸망시킬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 사이에서 스콧은 말없이 컴퓨터를 켰다.





  ―…그게 다인가? 기계가 낡아서 그런 거라고?


  "엄밀히 따지자면 이 캡슐들은 300년이 넘는 시간을 버티고 있는 겁니다. 진즉에 망가졌어야 하는 물건들이에요. 이 시대에 캡슐과 맞는 부품이 있을 리가 없기 때문에 수리도 여의치 않습니다. 차라리 캡슐을 새로 제작하는 게 나아요."


  스콧은 개인 트랜스포터 장비에 오를 때 이미 예상했던 결과를 읊고 있었다. 극저온 캡슐도, 그 안에 들어있는 존재들도 너무나 오랜 시간을 견뎠다. 사실 이런 경우에서 엔지니어들은 가장 큰 무력감을 느낀다. 그들이 배운 학문은 시간을 초월하기 위해 형성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캡슐을 제작하기로 결정한다 하더라도 시간이 필요하네. 그 때까지는 캡슐들의 동결 시스템은 작동해야 해. 그렇게 만들 수 있겠나?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완벽한 수리는 불가능합니다. 전처럼 동결 온도를 유지하려면 물리적으로 냉매를 넣는 게 가장 안전할 겁니다."


  알아보도록 하지. 


  그 말과 동시에 스콧은 소리 내어 숨을 뱉으려다가 급히 입을 붙잡았다. 통신이 아직 종료되지 않았다. 


  그 자의 캡슐에는 문제가 없나?


  스콧은 부가적인 설명 없이도 질문을 이해했다. 


  "다른 것들과 비슷한 상태입니다. 이전보다 온도가 올라가 있는 상태이긴 하지만 다른 강화인간들도 그 온도에서 생명 반응을 보여주고 있진 않아요. 아직까진 버틸 수 있어요."


  알겠네. 그 부분은 특히 신경써주길 바라지. 그리고 앞으로 일지 형식으로 캡슐의 점검 상태를 기록해놓으면 네트워크를 통해 이쪽에서 확인하겠네. 수고하게. 


  화면이 꺼졌다. 스콧은 목구멍 아래에서 틀어막혔던 숨소리를 시원하게 흘렸다. 그의 호흡은 희미한 연기를 피우다가 사라졌다.


  잠시 후 스콧은 의자를 홱 돌리며 일어났다. 그는 맨 앞쪽에 놓인 캡슐을 마주본 자세로 멈춰 섰다.


  얄팍한 얼음이 맺힌 투명한 외관부를 통해 보이는 콧대와 입술이 있었다. 스콧은 그 선명도가 이전에 비해서 얼마나 옅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강화인간들을 가두지 않았다. 그들이 다시 봉인되는 일에도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다. 스콧은 이 공간의 진정한 주인이기도 한 칸 누니엔 싱의 불완전한 실루엣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캡슐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그 때 칸은 분명히 잠들어 있었다. 





Stardate 2262. 58


  캡슐 내부의 온도는 영하 180도였다.


  여전히 한기라는 단어로는 아우를 수 없을만치 냉혹한 환경 속에서 얼어붙어 있던 한 강화인간의 세포가 꿈틀거렸다. 고작 16도가 달라졌을 뿐인 혹한과 혹한의 변화를 기어코 감지한 육체는 소리 없이 한 번 펄떡였다. 하지만 캡슐 안은 여전히 추웠다. 고도로 섬세하게 빚어져 같은 종족들 사이에서도 그 완성도를 자랑했던 자질이 발생되기에는 일렀다. 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온도는 영하 179도로 내려갔다. 강화인간은 일어날 수 없었다.


 칸 누니엔 싱은 자고 있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는 깨어나고 있었다.





  커크는 스콧이 연락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잽싸게 통신을 받았다. 그는 스콧과 하나된 마음으로 엔터프라이즈호의 위대한 기관실장을 전범 수용소로 유배 보낸 스타플릿 간부들을 한참 욕해준 뒤에야 스콧의 안부를 물었다. 스콧이 할 말은 '목숨은 잘 붙어 있고 무지 춥네요' 정도 뿐이었다. 커크는 50일 내내 스콧이 잡혀있는 일은 없도록 힘을 쓰겠다고 약속했다. 


  다행스러운 사실이 있다면 커크가 즉시 스타플릿 제독들과 담판을 벌이지 않아도 잠은 원하는 곳에서 잘 수 있다는 점이었다. 스콧은 오늘의 할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모니터에 일지 프로그램을 띄워놓았다.


  "어, 으음…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1일."


  스콧은 자신이 빚어낸 표현이 낯설어 눈썹을 찡그렸다.


  "시설에 와서 극저온 캡슐을 처음으로 점검했다. 짐작했던 대로 캡슐의 하드웨어가 노후화되면서 핵심 기능을 완벽하게 구현시킬 수 없는 상태에 다다른 것이었다. 꼭 필요한 부품을 만들어볼 수야 있겠지만 고쳐야 하는 캡슐이 73개나 되니, 냉매를 억지로 주입해주지 않으면 한창 내가 수리를 하고 있는 도중에 깨어난 강화인간들이 내 등에 진을 치고 있는 상황을 보게 될 것이다. 일단 나는 엔지니어지 화학자가 아니라서 냉매에 대한 부분은 부탁을 넣어 놓았다. 스타플릿은 캡슐의 온도가 너무 많이 떨어졌다고 난리를 피우면서 나를 불렀지만 기록을 비교해본 결과 이전의 정상적인 온도와는 최대 15도가 차이났다. 그러니까 그렇게 호들갑을 떨 수준은 아니었다는 거다. 일단은 하루에 4번씩 온도를 체크하려고 한다."


  술술 일지를 녹음하던 스콧이 잠시 입술을 매만졌다.


  "윗사람들은 아직 그들을 더 재워놓고 싶은 모양이다. 캡슐이 새로 제작되기만 한다면 그들은 천 년은 지나야 깨어날 기회를 얻게 될지도 모르겠다."


  스콧의 입이 굼뜨게 움직였다. 스타플릿 간부들이 확인하게 될 일지에 사견을 집어넣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보고가 아닌 일지를 작성하는 자들은 탐험가나 역사가이지 타인의 가치관을 두려워하는 족속이 아니었다.   


  "나는 그걸 옳다거나 잘못 되었다고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지 종료."


  스콧이 모니터를 껐다. 극저온 캡슐은 지속적으로 구동음을 내지 않기 때문에 시끄러운 전자기기 하나가 꺼지자마자 내부는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스콧은 뒤를 돌아보았다. 하단부에 형광빛 표식을 단 캡슐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위급 상황 시 동일하게 생긴 캡슐들 사이에서 '가장 위험한' 분자를 찾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한 조치라는 설명이 있었다.


  원하지 않는 곳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것 같아 스콧은 시선을 거두었다. 그가 얼마 되지 않는 소지품들을 챙겼다.




* * * * *



Stardate 22**. **


  칸은 소리를 들었다.

  그가 들은 첫 번째 소리는 어떤 암호가 담긴 주파수나 의미가 담겨 있는 언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칸에게 여러 가지를 알려주었다. 칸은 몸이 꽁꽁 얼어붙은 상태로 자신이 의식을 되찾아버렸음을 깨달았다.

  의식이 활성화되는 느낌이 갈수록 뚜렷해지자 칸은 문득 현재의 날짜가 궁금해졌다. 어쩌면 300년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지도 몰랐다. 칸은 자신이 또 얼마나 오래된 유물이 되었는지 알고 싶었으나 자신의 의문을 해결할 방법이 없어 답답해했다.

  "…엔지니어 일지, 2262년 86일."

  단서는 또 청각을 통해 들려왔다. 칸은 목소리의 주인을 추리하기에 앞서 날짜부터 헤아렸다. 2262년, 자신이 잠들고 나서 고작 3년밖에 흐르지 않았음이 확실해졌다. 벌써부터 이것을 어떻게 분석하여 소화할 것인지에 대한 방법론이 벌써부터 몇 가지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칸은 그것들을 다 제쳐두고 목소리 자체에 집중했다. 낯설지 않은 음성이었다. 그는 앞서 들었던 엔지니어 로그라는 말도 곱씹었다. 금세 정답이 도출될 것 같았다.

  "오늘은 맥코이 소령이 강화인간들의 심층적인 조사를 하기 위해 다녀갔다."

  칸은 소리를 주의 깊게 들었다. 

  "맥코이도 현재 캡슐이 유지하고 있는 온도에서 생명체가 깨어난다는 건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리긴 했지만 그의 일은 그것으로 다 끝나는게 아니란다. 의사 양반도 고생 좀 하실 것 같다."

  그가 내뱉는 특정한 어구들과 독특한 음색이 칸의 머릿속에 충분히 저장되었을 때 칸은 정답을 얻을 수 있었다. 캡슐 바깥에는 3년 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장교가 있는 것이었다. 칸은 기척의 정체 때문에 자신이 함선에 실려 우주를 유영하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여기 계속 있으니까 진짜 춥네. 이거 확인하시면 안에 난방기구 하나라도 들여놓을 수 있게 해주세요. 어우, 진짜."

  칸은 곧 자신의 가설을 폐기했다. 이곳이 엔터프라이즈호라면 남자는 '기관실장 일지' 라며 말머리를 열었을 것이었다. 칸은 지금도 재직중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3년 전까지만 해도 엔터프라이즈호의 기관실장이었던 남자와 함께 지상의 어느 공간에 있는 상황이었다.

  "오늘 확인한 캡슐들의 상태는 어제와 다를 게 없었다. 맥코이 소령이 캡슐을 관찰하고 있는 동안 오작동을 일으킨 캡슐이 하나 있긴 했지만 긴급한 부분은 보수를 해 놓았다. 소령에겐 굳이 밝히지 않았지만 하필 그 캡슐이 가장 온도 변화가 심한 요주의 녀석이라서 신경이 쓰인다. 빨리 냉매가 도착해야 할 텐데, 생명을 얼리는 용도로 쓰일 만한 냉매가 지금 시대에서는 그야말로 역사 속 유물이기 때문에 애를 먹는 것 같다."

  칸은 남자가 언급하는 캡슐이 자신의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칸의 캡슐에 문제가 생겼다면 인간들은 그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상황을 설명할 확률이 높았다. 강화인간 중에 이름이 알려지고 역사에 기록된 자는 칸이 유일했다.

  이름에 관하여 생각의 지평을 넓혀가던 칸은 불현듯 일지를 녹음하고 있는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제임스 커크가 그를 스콧이라고 소개했었다. 

  "만약 그 캡슐이 기어코 강제 배출을 일으킨다면 정말 큰일이 날 것이다. 강화인간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반 회복 캡슐에서도 강제 배출이 벌어진다면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반드시 쇼크를 겪게 된다. 몇 년 간 영하 196도에 갇혀 있다가 역시 영하 100도보다 훨씬 낮은 환경에서 강제로 밖으로 꺼내지게 된다면 아무리 우월한 생명체라고 해도 쇼크사를 면하긴 어려울 것이다."

  스콧의 음성이 살짝 아래로 꺾였다. 

  "그리고 오늘 맥코이 소령이 칸과 에디슨 함장은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했다. 전쟁이 있어야만 자신의 가치를 찾는 자들. 소령의 말을 듣고 나자마자 나는 그것이 적응력의 문제보다 윤리적인 문제에 더 가깝다고 단정했었다. 이성을 가진 존재에게는 자신이 처한 배경과 시대가 추구하는 목표라든가 사상에 대해 판단하고, 그것이 만일 옳지 않을 경우 거부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나는 에디슨과 칸 모두에게 그런 점이 부족하다고 여겼다."

  갑자기 노이즈가 줄어들었다. 변동을 거듭하던 내부 온도가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그 전부터 칸은 스콧의 말을 알아듣는 데 무리가 없었으나 덕분에 그는 더욱 쉽게 청각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 생각해보니 경우가 복잡했다. 에디슨은 아마 처음부터 스타플릿의 함장 역할을 맡은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행성에 불시착하여 선원들을 잃고 구조마저 받을 수 없게 되자 그를 그 행성까지 보낸 스타플릿과 행성연방이라는 시스템 자체에 분노한 것 같다. 이렇게 봐도 에디슨의 방향은 틀린 것이 맞다."

  에디슨이라는 자의 얘기는 생소했다. 칸은 일단 경청했다.  

  "반면에 칸은 모든 것이 인간에 의해 제작된 인공적인 존재다. 또한 나는 그가 가진 어느 부분까지 인간의 설계가 닿아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더 복잡해졌다. 인간이 칸의 파괴적인 사고에도 손을 댄 것이라면 내가 맨 처음 속단했던 대로 판단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스콧은 말이 없었고 칸은 입술을 움직일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했다. 불완전하게 정립된 화자와 청자와의 관계는 냉기와 침묵 사이를 몇 분간 떠돌았다.  

  "…하지만 뭐, 그렇게 따지자면 인간이 또 긍정적인 방향으로 그의 사고에 영향을 줄지도 모르지. 모쪼록 그 놈이 쭉 잘 잠들어 있으면 좋겠다."

 

 

  더 이상 길고 깊은 문장은 발화되지 않았다. 바퀴가 굴러가는 소리와 한 사람이 기지개를 켜며 흘리는 신음이 들렸다. 창고에서 홀로 의식을 가진 자가 되어버린 칸은 그 지위를 낭비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생각했다.




  19**년 **월 **일


  모든 생명들에게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이다. 순간순간이 기억으로서 뇌리에 남아도 그것이 최초이기에, 당장 그 생명에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에 가장 의미가 깊은 조각은 다신 헤집을 수 없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최초의 기억은 일종의 수수께끼지만 영원히 풀 수 없는 인생의 난제이기도 하다. 

  칸도 마찬가지였다. 그조차도 자신이 눈을 뜨고 나자마자 겪은 일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보통 아무도 손대지 못하는 문제를 해체한 것은 첫 번째 기억을 회상할 수 있을 정도로 머리가 좋은 탓이었다.

  신비로운 구경거리를 보듯 가운을 입은 연구원들이 칸의 인큐베이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군가가 예상했던 시간보다 7분이나 일찍 일어났다는 말을 했었다. 칸은 일부러 그 인간의 이름을 잊어버렸다. 그들은 아마도 7분쯤 칸의 얼굴이며 빛나는 눈동자 따위를 꼼꼼히 관찰하고 있다가 다른 인큐베이터들에서도 반응이 오자 서서히 흩어졌다. 

  한 남성이 중앙에서 느닷없이 목청을 높였다. 칸은 그의 이름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 남자의 이름과 존재까지도 없애버린 칸은 훗날 그의 말에 반대하기 위해서 그의 허영에 찬 연설을 기억하고 있었다. 칸의 머릿속에서 증오스러운 인간 남자가 소리를 내질렀다. 우리들이 창조한 생명체들의 행복은 연구원들을, 더 나아가서는 인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가장 영광스러운 역사의 부활이라는 대목에서 온 인간들이 열광했다. 

  부활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우고 나서 칸은 인간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제물의 희생이 뒷받침되어야만 부활의 기적이 발생했다. 어느 날 내몰린 전장에서 아무런 무기도 건네받지 못한 칸은 자신과 그의 동족들이 부활의 위업에 숨겨진 그림자라는 것을, 그리고 바로 그러한 목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자신들은 가장 야만적인 형태의 폭력을 허락받은 것임을 체득했다. 

  그 뒤로 인간과 강화인간은 서로 증오했다. 300년의 간극이 칸에게는 너무나도 무용해서 그는 줄곧 인간을 증오했다. 그의 기억력이 무뎌지지 않았듯이 인간도 변화하지 않았다.

  여기서 칸은 한 번이라도 자신을 비참하게 여긴 날이 존재하는 건지, 그것이 자연히 잊혀졌는지 혹은 억지로 감춰졌는지 확신하지 못했다. 




[STID/존본즈] Travelers in the Universe

- Star Trek Into Darkness 2016. 8. 31. 16:20 posted by Jade E. Sauniere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Travelers in the Universe




  모름지기 우주의 시선 아래 모든 생명들은 평등한 것이다. 존재들은 우주가 제공해 준 공간에서 자신의 생을 살아가려고 하는 이들이다. 자신들 각자의 시간과 모두에게 주어진 평등한 장소를 여행하는 타고난 여행자들이다. 


  우주와 시공을 넘나들 수 있는 기술이 만들어진 시대에서, 그와 같은 오래된 진리를 곱씹는 자들이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창밖만 보다가 별 한 개 보이지 않는 지독한 어둠에 질리다 못해 충격을 받은 신참 승무원에게 도움이 될 만한 안정제를 고르고 있었다. 항해 이틀만에 2주는 못 잔 사람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그 승무원에겐 의술의 힘이 절실했다. 맥코이는 작은 약병에 알약 몇 알을 나눠담은 뒤 복용법을 적은 스티커를 정면에 붙였다. 


  그 신참은 실제로 우주와 맞닥뜨리고 나니 그것이 예상처럼 낭만적인 곳은 아니라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고 했다. 긴장과 충격과 감수성이 뒤섞인 그는 그 외에 다른 이상한 말들도 해댔다. 은하수가 고작 새끼 손가락만한 크기로 보이는 우주에서 자신은 그야말로 지나가는 여행자보다 더 의미가 없을 것 같다는 둥, 신은 다른 게 아니라 그런 보잘것없는 위치에 있는 개별적인 존재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가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위대한 것 같다는 이야기도 했다. 맥코이에겐 심리상담사 자격증은 없었지만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다.


  우주는 그 어떤 존재도 재단할 수 없는 거대함과 위압감으로 차갑게 모든 것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약병을 전해주는 걸 잊어버리지 않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놓아둔 맥코이는 의자를 돌려 창문을 한 번 바라보았다. 


  여행자라는 비유는 생각 외로 더 적절했다. 여행자는 자신이 가는 여행지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여행지를 변화시키지도 않는다. 어떤 여행자가 오지 않아도 그곳을 방문할 많은 사람들이 있으므로 여행지는 존속되며 관광업에 몸 담고 있는 사람들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없었다. 여행자들이 주로 하는, 사진을 찍고 길을 걷고 여행지가 주는 경험을 곱씹어보는 일들은 그 자신에게만 영향을 줄 뿐이다. 공간은 건재하다. 맥코이가 몇 번을 오가도 똑같기만 한 우주와 비슷했다.


  그러한 평범한 여행자에 자신의 위치가 고정되는 걸 원하지 않던 존재가 있었다.


  맥코이는 그를 떠올리면서도 특별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모두는 일정한 시간과 특정한 공간을 받고 태어난다는 일정한 시작점을 가진다. 그가 자신을 탐색하고 자신이 이루어내는 약간의 변화에 만족하며 살아가지 못했던 것에는 그 시작점을 무효화시킬 만한 깊고 끈질긴 역사가 있었던 탓이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이제 그걸 알고 있었다. 각자의 것인 일생을 탐하면서 영원한 관조자인 우주에 군림하려고 했던 이의 과거를 이해했다. 


  맥코이는 무릎 위에 놓아두었던 개인용 패드를 켰다. 평화로운 항해 속에서 덩달아 평온했던 그 기계에 잠시 파문을 일으켰던 메시지를 켰다. 맥코이는 자신이 그걸 받았다는 걸 함장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비록 소령이었으나 한편으로는 이 세상의 모든 존재들과 같았다.


  메시지는 5일 전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 날 맥코이는 지구에서 발행하는 소식지를 통해 스타플릿 측에서 개발하던 초고속 소형 비행정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보았다. 


  ―아마 우리 존재들의 목표는 상대방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것일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하는 일. 


  "…그렇게 해서 서로가 대립하면서도 보완하는 관계가 성립되는 거지."


  맥코이는 자신도 모르게 메시지의 마지막 줄을 소리냈다.


  여행자들이 변화시킬 수 있는 건 여행지가 아니라 또 다른 여행자다. 길을 잃어 안절부절 못하는 누군가, 낯설고 험악한 자들에게 둘러싸인 사람, 소지품을 잃어버렸거나 다른 일행과 떨어지고 만 슬픈 여행자를 도와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여행자는 변하는 것이다. 무언가를 되찾고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하며 자신이 원하는 곳까지 안전하게 도달한다. 그들이 딛고 선 땅에 어떤 선이나 표식을 남길 수 없는 대신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는 거라고 맥코이는 생각했다. 


  자연스럽게 창밖에 한 번 더 시선을 던지게 된 맥코이는 자신의 생각을 확정했다. 우주는 우주 자신의 모양을 이리저리 바꿀 뿐 정작 우주를 살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별다른 영향력을 떨치지 못했다. 레너드 맥코이는 지난 항해에서도 입었던 제복을 입고 의무실에 있었다. 엔터프라이즈호는 쾌활한 함장의 지시에 따라 유영을 거듭하고 있고 수많은 승무원들이 함선을 떠나지 않았다.


  맥코이는 창문에 손가락을 가까이 대고 사선으로 그어보았다. 당연히 우주와 세계는 갈라지지 않았고 경계도 생성되지 않았다. 맥코이는 만족했다.


  한동안 조작하지 않은 패드가 꺼졌다. 여행자는 새로운 여행자가 결정한 여정에 행운을 빌어주었다. 아마 도움이 필요하다면 먼저 연락을 할지도 몰랐다. 그도 이제는 그런 행동을 실천해보는 법을 배웠다. 우주의 여행자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었다.


  맥코이는 약병을 들고 의무실을 나섰다. 여행지는 침묵으로써 자신을 제공했다.




Universe and U by KT Tunst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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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ossover/본브루스] Blue Ocean Floor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9 posted by Jade E. Sauniere

- When Bruce Wayne finds his hope

- Original Date 2016. 08. 18

- Written by. Jade


Blue Ocean Floor




Piano cover of Blue Ocean Floor originally by Justin Timberlake

Cover by The Theorist





  배의 머리에 매달린 작은 종이 흔들거렸다. 그러자 항구에는 맑은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브루스는 물길을 이용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물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한 생명의 씨앗은 물에 잠겨 있는 상태로 발생하며 그밖에도 숨을 쉴 줄 아는 모든 것들은 물에 뿌리를 내리는 법이었다. 하다못해 어린 브루스 웨인이 장례식장을 뛰쳐나오다 곤두박질친 곳도 우물 안이었다. 물은 시작점이었다.


  마치 그 진리의 연장선처럼 브루스 웨인이 맑은 눈의 암살자를 만난 것도 바다에 떠 있던 요트 안이었다.


  딴생각을 하다가 브루스는 자신이 종소리가 울린 횟수를 얼마나 세었는지 잊어버렸다. 물론 종소리를 헤아린 것도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한 장치였기에 그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이 소리 없이 열리며 종의 울림에 다시 숫자를 붙여 주었다. 하나. 브루스는 종소리 말고는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것은 종소리를 하나의 걸음처럼 삼고 있는 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물은 모든 것의 시작점이라기보다는 끝에 더 가까웠다. 물은 냉정하게 무언가를 죽이기도 한다. 그는 물 속에서 죽어간 사람을 보았고, 그 외에도 물이 아주 많은 걸 없앨 수 있다는 것도 경험했다. 바로 물 속에서 데이비드 웹이라는 남자가 지워져갔고 그의 기억이 부식되었다. 아무런 인정도 없이 반복되기만 하는 물의 흐름엔 너무나도 많은 종결이 묻어 있었다.


  그가 서 있는 판자 아래에서 찰랑이고 있는 물에는 데이비드 웹이 없었다. 거기에 흘러가지 않은 이름들이 몇 개 존재했지만 어떻게 보면 그것들은 모두 똑같았다. 그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배에 붙어 있는 종이 울리는 소리는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는 거기서 마땅한 의미를 찾아낼 수가 없었다.


  12년의 고뇌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한 이후로 본은 무엇의 의미를 수색하는 일을 쉽게 단념하게 되었다. 어떤 사물이 양면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이 사물의 존재나 형태 자체를 역전시키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12년을 돌아 본은 그것을 깨달았다.


  총을 쥔 자는 다시 배 위에 올랐다.


  브루스는 언젠가 선상 위의 암살 사건으로 대중들에게 퍼져나갔던 하루를 더듬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무게감도 없는 지루함이었다. 브루스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겠다는 생각에 잠을 자려고 비어있는 선실로 들어갔었다. 그는 확실히 어느 순간까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브루스는 자연스럽게 닫히려고 하던 눈동자를 열었다. 그 옛날과 다른 점이 있다면 브루스가 고개를 젖히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또 옛날과는 다르게 그는 똑바른 시야에서 자신을 향하는 총을 목격했다.


  종이 울렸다.


  브루스 웨인은 총을 보면서도 종을 생각했다. 어떠한 이유로 자신이 그걸 배에 매달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이 잃어버린 군번줄을 걸어둘 수가 없어 다른 금속성의 물체를 고른 것 같기도 했다. 본은 맨 처음에 브루스에게 군번줄을 잃어버렸다고 표현했다. 그 뒤에 자신이 기관의 프로그램에 들어가면서 스스로 버렸었다고 밝히긴 했지만, 본은 데이비드 웹의 증표를 잃어버렸다고 여기고 있었다. 전직 암살자가 털어놓은 최초의 인식이 브루스 웨인에게는 뜻밖의 희망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나서 브루스는 총을 지나 한 명의 사람을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을 전부 학습했으면서도 그걸 누군가를 죽이는 일에만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자가 보였다. 과거를 결코 자의에 의해 버렸다고 손가락질할 수 없는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이 순수를 엿보았던 몇 안 되는 남자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제이슨."


  두 사람의 거리가 좁아졌다. CIA가 키워낸 최고의 암살자라는 인물이 감행한 행동치고는 무척 비논리적이었다. 조금 전까지 브루스의 시야에 포함되지 않았던 총구가 불쑥 나타났으나 브루스는 개의치 않았다.


  약하게 종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든 모양이었다. 브루스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데이비드 웹의 군번줄과, 언제나 자신이 볼 수 있었던 제이슨 본의 노력을 떠올렸다. 


  "당신은 다른 길을 찾아보기로 했지. 나도 지금과는 다른 길을 찾고 있어."


  시작과 끝을 동시에 품고 있는 물의 표면에서 브루스 웨인은 길을 논했다. 그들이 최초로 만났던 요트는 다른 선택을 논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같이 걸을 수 있지 않을까."


  브루스가 손을 내밀었다.




물 속에서 그대는 크게 소리치지만 침묵이 그대를 감싸고 있지

하지만 나는 그걸 들었어

그대가 깊이 낙하해도 나는 그대를 찾으리

나의 붉은 눈동자가 더는 그대를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백색 소음 속에서 그대를 듣지 못해도


그대의 맥박을 보내줘

그러면 나는 푸른 바다 층으로 가리

아무도 우리를 찾을 수 없는 곳

그 푸른 바다 층으로

[Crossover/본브루스] In a Dreamy Mission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8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in the dream of Bruce Wayne

- Original Date 2016. 08. 16

- Written by. Jade


In a Dreamy Mission




  꿈의 내용은 상상력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제이슨 본이 새로운 프로그램에 발탁되고 나서 참가했던 첫 트레이닝 시간에 들었던 말이었다. 꿈은 상상력이 발현되는 장소가 아니다. 잠들기 전 경험했던 가장 강렬한 현실이 꿈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므로 꿈은 어떻게 보면 과거가 된 현실을 추적하기에 가장 효율적인 단서이다. 꿈은 비현실적이지만 또한 현실적이다. 그 모호한 경계를 구분하고 양쪽을 넘나들며 필요한 정보를 추출할 수 있다면 요원은 최고의 자산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본은 이제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 말들을 읊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본은 조용히 튜브를 꺼내 한 남자의 팔에 둘렀다. 만약 꿈이 상상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것이었다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재미 없는 꿈을 꾸었을 남자였다. 아니, 꿈이 마지막 현실의 반영이라고 해도 남자가 신나는 꿈을 꿀 것 같지는 않았다. 신문에 실리는 그의 얼굴에는 언제나 지루함이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한 팔을 통째로 본에게 내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제이슨 본에겐 그저 읽혀야 하는 대상이었다. 


  고담시의 모든 것에 신경을 기울인다는 도시의 황태자는 그 지역의 살아있는 명물이자 논란의 여지가 너무나도 많은 자경단원에 대해서는 유독 불분명한 태도만을 보여주고 있었다. 경찰청장조차도 은근히 '배트맨'의 편을 들고 있는 가운데 브루스 웨인만이 그를 비난하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다. 공권력이 아닌 경제력을 가지고 있는 기업인이라는 웨인의 위치를 고려하더라도 어딘가 수상쩍었다. 


  CIA는 배트맨이 출현한지 1년이 넘어가던 해에 그 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고담은 CIA가 지부를 두지 못한 미국 내 유일한 도시였다. 기관을 중동에서 벌어지는 사건들도 6시간 이내에 알아낼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지고도 유일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암흑 지대를 언제까지고 내버려둘 수 없었다. 중앙정보국이 고담의 두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을 주시해온 이유였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옆에 자신이 누울 만한 공간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그와 한 침대에 눕기가 껄끄러워 본은 이불을 바닥으로 적당히 끌어내렸다. 가구를 사용하면 후에 정리를 하기가 불편했다. 본은 두툼한 이불을 최대한 고르게 펼치고 자신의 팔에도 튜브를 연결했다. 


  제이슨 본은 브루스 웨인의 마지막 현실을 볼 것이다.


  필름이 순간적으로 튕기면서 발생하는 약간의 번뜩임이 되어 브루스 웨인의 꿈으로 흘러들어갈 때, 제이슨 본은 트레이닝에서 배운 것들을 다시 떠올렸다. 특정 개인들은 자신이 필사적으로 숨기려 하는 비밀로 꿈을 빚어내기도 한다. 비밀을 꿈의 재료로 삼는 부류는 그곳에서 아무에게도 들려줄 수 없는 혼자만의 메아리를 듣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 자들이다. 메아리는 자신의 목소리이지만, 또 다르게 따지면 완벽하게 그 자신의 목소리는 아니다. 자기와 타자가 반씩 섞인 공간에서 안정을 찾아야만 하는 이들의 꿈은 그래서 정보의 천국이다. 꿈에 흡수되어 꿈을 흡수하는 요원들은 그런 곳에서 가장 짜릿하게 임무를 수행할 수 있다.


  본은 자신이 브루스 웨인의 꿈에 안착했음을 느꼈다. 질량은 사라졌으나 감각은 더욱 깨어났다. 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지하 도시의 설계도를 연상케 하는 배경이었다. 서늘하면서 습한 공기가 공중을 떠다녔고 빛은 결핍되어 있었다. 하지만 도시가 발전했다는 증거로 꼽히곤 하는 뮤지컬 극장이 있는 것 같았다. 본은 누렇고 까맣게 번뜩이는 간판을 보았다. 간판이 광고하는 것은 조로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뮤지컬이었다.


  그러나 뮤지컬이 행해지고 있어도 그곳의 본질은 지하였다. 본은 어떤 구석으로도 빛이 들어올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태양이 아닌 불빛으로 깨어나는 도시는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영원한 밤에 시달리는 땅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것들이 무엇을 상징하는지 생각해보았다. 엉뚱한 뮤지컬과 기대할 수 없는 낮은 브루스 웨인의 현실인가, 망상인가, 혹은 비밀인가.


  신중하게 걷던 본은 박쥐가 푸드덕대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빈 손으로 어디로 날아가는지 모를 박쥐를 바라보았다. 타인의 꿈에 흘러들어온 요원은 자신이 방문객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었다. 본은 무기를 꺼내들지 않았다. 박쥐도 그에게 달려들지 않았다. 박쥐는 아주 먼 곳으로 날아갔다. 이후 더 많은 박쥐들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갇힌 것처럼 나타나고 날아가길 반복했다.


  제이슨 본은 이제 그만 브루스 웨인을 찾아야 했다. 꿈의 주인은 어떤 형식으로든 그 안에 존재하는 법이었다. 본은 혹시 날아가버린 박쥐 중에 브루스 웨인의 의식이 섞여있지는 않았기를 바라면서 지하도이자 대로이자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길을 걸었다. 그 와중에도 박쥐들은 날아올랐다. 본은 그 광경을 쳐다보고 있다가 박쥐들이 나타나는 방향이 다 똑같다는 걸 간파하고 움직임을 수정했다.


  브루스 웨인은 박쥐들이 탄생하는 곳에서 그 까만 날갯짓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본은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꿈 속에서는 자신이 한 번도 만나보지 않은 인물이 등장하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꿈에 속한 요소처럼 보여야 하는 본은 브루스 웨인이 자신을 알아채주길 기다려야 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을 주시했다. 그런데 그는 허망할 뿐 시끄럽기만 한 반복에서 무슨 의미를 찾는 것인지 박쥐들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그가 본을 발견한 건 조금 시간이 흐른 뒤였다.


  "의자가 필요한가?"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말하자마자 본의 옆에 가죽 의자가 등장했다. 꿈에서는 자신이 원하는 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건 상식인 한편 타인의 꿈에 침입하는 CIA의 기술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사장이라고 해도 알 수 없는 극비 사항이었다. 본은 당황하지 않고 의자에 앉았다.


  브루스 웨인이 본을 보았다. 본은 별로 걱정스럽지 않았다. 기관에서도 인정받은 평범한 인상이었다. 본은 브루스 웨인의 의심을 사지 않았다. 꿈은 으레 그런 식으로 진행되었다.


  "질문할 게 있어서 나타난 게 아닌가?"

  "…왜 그렇게 생각하지?"

  "그런 식으로 사고를 하면 도움이 된다고들 하니까. 내 머리가 그런 흔한 조언을 새기고 있을 줄은 몰랐군. 하지만 질문자를 만들어내야 할 정도로 내가 나약하다는 건 인정할 수 있으니, 어디 한 번 질문해봐."


  여러 사람의 꿈에 출입해봤지만 이런 식의 흐름은 처음이었다. 본은 놀라면서도 침착하게 피상적인 질문을 골라보았다.


  "왜 그렇게 박쥐들을 보고만 있는 거지? 시끄럽지 않나?"

  "…날카로운 질문이군."


  본이 의아해했다. 혼자만의 흐름을 갖는 남자가 중얼거렸다.


  "저것들은 사실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아. 그저 우연하게 마주쳤던 기억이고 스쳐 지나가는 영감이었지. 여기에 박쥐가 있어야 할 타당한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군."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인정함과 동시에 박쥐들이 사라졌다. 본은 아무렇지도 않게 박쥐를 다루는 브루스 웨인을 바라보았다.


  "여기는 왜 어둡지?"

  "내가 빛을 잃어버린지 오래니까."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이 철학적이라는 정보를 받은 적이 없는 본은 자신의 대응 전략을 바꿔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그러다 본은 자신에게 머물러 있는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매우 특이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그는 꼭 애증했던 선생님이나 잃어버린 부모님을 보고있는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을 연민하고 있었다. 


  본은 혼란스러웠다.


  "꿈에서조차?"

  "그 어느 곳에서도."

  "…힘들겠군."

  "그래서 살아있는 거야. 내가 하는 모든 행동들은 나에게 조금이라도 빛을 뿌려주기 위함이지."


  본은 조금씩 이 대화가 진행되고 있는 목적을 알았다. 브루스 웨인은 본의 질문을 빌려 그 자신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꺼내고 있었다. 본의 전략은 틀리지 않았다. 그것 하나만 입증되면 아무리 입을 여는 게 어색한 성격의 사람이라도 올바른 말을 할 수 있었다.


  "당신이 한 행동은?"

  "내 정신을 제외한 모든 걸 희생했다. 기부를 하고 수많은 자선사업을 벌이고, 무법지대와 폐허에 뛰어들어 사람을 구했어. 한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이타성을 모조리 끌어내서 변화를 만들어보려 했지…."

  

  브루스 웨인은 마지막 문장을 말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야."

  "거짓말을 했나?"

  "나는 실패했어. 그래, 나는 이 말을 들어야 했던 거군. 실패했다고."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다른 곳을 보는 것 같아 본이 얼굴을 돌렸다. 뮤지컬 간판이 아까보다 더 요란하게 번쩍거리고 있었다. 웨인 부부가 어린 아들과 함께 뮤지컬을 보고 나오던 도중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브루스 웨인만이 알고 있었다. 대중들에게 웨인 부부는 그저 고담 시민들의 바닥난 도덕성에 희생당한 불행한 위인들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도 구하지 못했어."


  그 말을 들었을 때 본은 최후의 질문을 던질 차례가 왔음을 직감했다. 


  "당신은 배트맨인가?"


  꿈 속에서나 가면을 벗을 수 있는 배트맨이 차갑게 웃었다.


  "내가 언제까지 그런 존재로 남을 수 있을까." 


  하룻밤의 자조를 마친 그가 눈을 감았다. 의미를 다한 꿈이 무너져내리기 시작했다.


  제이슨 본은 노련하게 꿈에서 빠져나왔다.


  본은 배운대로 꿈에서 깨어난 즉시 튜브를 거두고 자신이 있었던 흔적을 지웠다. 아직 잠들어 있는 브루스 웨인의 얼굴엔 표정이 없었다. 얼핏 보면 꿈 하나 꾸지 않고 잠에 빠져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본은 배트맨이 그런 모습으로 자기 자신의 모든 걸 폄하한다는 걸 배우고 말았다.


  본은 들어올린 이불 자락을 브루스의 몸에 덮어 주었다. 제이슨 본은 그 날 처음으로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Crossover/본브루스] The Cat Doesn't Forget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7 posted by Jade E. Sauniere

- Ex-CIA Agent and Strange Black Cat

- Original Date 2016. 08. 07

- Writeen by. Jade


The Cat Doesn't Forget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아무리 괴짜에 정신 나간 인간처럼 보이는 작자들에게도 사람다운 점이 있다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악당들이 펄펄 끓는다는 고담시에서도 아주 고약한 악질을 담당하고 있는 조커라는 자에게도 물론 그러한 점이 있습니다. 박쥐 인간과 숨바꼭질을 하는 게 인생의 낙이지만, 그 친구가 워낙 인기가 많아져서 자신과의 데이트에 소홀해지자 이 이상한 악당이 그만 질투심을 느끼고 만 거죠. '내 귀염둥이를 넘보다니 용서할 수 없어!' 같은 심리라고 해둡시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박쥐 인간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조커는 온갖 과학자들의 주리를 틀고 손톱을 뽑은 끝에 약물 하나를 얻게 됩니다. 일주일간 사람을 아주 귀엽게 만들 수 있는 효능을 가졌다나요? 조커는 낄낄거리며 박쥐 인간과 일주일쯤 아주 오붓하고 재미난 시간을 보낼 생각을 했습니다. 인간이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는 때로 놀라움을 발휘합니다. 조커가 결국 그 박쥐 인간, '배트맨'애게 약물을 노출시켰거든요. 


  '아주 귀엽게 된다는 건 무슨 뜻일까? 뱃시가 어린애처럼 키가 줄어들기라도 하나? 너무 귀엽겠다! 아니면 애완용 박쥐로 변하는 거 아니야? 오, 뱃시. 뱃시. 우리 뱃시!'


  하지만 이런 귀여운 바람이 조커같은 악당의 것이기 때문이었는지, 조커는 온갖 종류로 구비해 둔 케이지를 하나도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배트맨이 사라졌거든요. 조커는 배트맨 대신 악당들을 족치면서 우리 뱃시를 어디로 감춘 거냐며 발악을 했지만 소득은 없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커도 허술한 구석이 있어요. 배트맨이 귀엽게 변하는 모습을 상상해본다면 당연히 고양이부터 떠올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직 배트맨에게 프로포즈를 하려면 멀었군요, 조커.


  네. 첨단 기술이 50가지쯤 적용된 거대한 수트를 입고 다니는 배트맨은, 대상이 아주 귀엽게 변한다는 약물의 효과에 따라서 조금 거대한 고양이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몸집 큰 검은 고양이요. 뚱뚱한 고양이라고 부르는 게 더 귀엽지 않겠냐고요? 좋을 대로 하시죠. 아무튼 고담을 비밀스레 수호하던 암흑의 기사는 지금 까만 고양이입니다.


  우리야 뭐 배트맨의 가면 속에는 브루스 웨인이 있다는 걸 다 알고 있으니 숨기지 않고 얘기하도록 하죠.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님이자 고담시의 황태자인 브루스 웨인은 참 완벽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두말할 것 없는 재력에 외모도 아주 훤칠하고, 부모님은 없지만 부모님처럼 그를 훌륭하게 챙겨주는 보호자도 있고 침대 한 구석이 서늘하면 남자든 여자든 가리지 않고 불러들일 수 있는 매력도 갖고 있습니다. 거대 기업의 회장님 노릇을 하고 있으니 머리도 좋고 행동력에 책임감도 가졌죠.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다보니 보통 사람이 그를 보면 숨이 턱턱 막힌다 이겁니다. 게다가 이런 사람이 배트맨이라니. 그렇지만 바로 이 순간 위대한 배트맨이자 빈틈없는 브루스 웨인인 존재는 너무도 인간다워서 몸이 배배 꼬일 것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담의 수호자 배트맨은 배가 고파요.


  통신기가 부착되어 있는 수트는 통통하고 동글동글한 체형으로 바뀌어버린지라 다른 사람에게 연락을 할 수도 없습니다. 가뜩이나 도움이 되지 않는 고양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뉴페이스를 경계하며 그를 밖으로 내쫓았어요. 고양이가 된 몸에 익숙하지도 않은 배트맨 겸 브루스 웨인은 그들을 이기지 못했죠. 그 와중에 그는 지금 배가 고프군요. 큰일입니다. 브루스 웨인께서 쓰레기통을 뒤져 먹을 걸 찾아낼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본래 그는 어떤 욕구도 잘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이 있지만 이 망할 몸뚱아리가 정신력에도 영향을 미치는 모양인지 서서히 허기를 참기가 힘들어지고 있습니다. 검은 고양이는 니야― 하고 힘없이 울었습니다. 귀엽긴 한데 좀 불쌍하네요. 그리고 이런 감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남자가 멈춰섰을 리가 없거든요.


  검은 고양이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의 정체도 참 귀여움이라곤 없을 것 같은 구석이 많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제이슨 본이라고 알고 있지만 본명은 다릅니다. 으음, 이건 몇몇 분들에겐 스포일러일 수 있으니 당장은 말을 아끼죠. 아무튼 그는 CIA의 일급 기밀 프로그램에서 훈련을 받은 프로 중의 프로이며, 지금은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인데도 그 훈련의 여파가 얼마나 강력한지 며칠 전에는 볼펜으로 칼 든 암살자를 때려잡았습니다. CIA의 기밀 프로그램이란 게 다 그렇죠. 


  그는 현재 자신을 노리는 정체불명의 적들과 거리를 벌리고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보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잠시 고담에 왔습니다. 고담시는 워낙 괴팍한 곳이라서 CIA도 쉽게 건드리지 못하는 데다, 미국 내에서 CIA 지부가 없는 유일한 곳이기도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게 없는 악당들이 지부에 들이닥쳐 기밀이라도 빼가면 답이 없으니까요. 그는 진짜로 기억을 잃은 상태인데 어떻게 그런 사실은 잘 느끼고 고담을 찾았습니다. 


  기억을 잃은 암살자와 고양이가 된 자경단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네요. 


  "……"

  ―…니야아.


  지금의 제이슨 본에 대해서 덧붙이자면 그는 현재 굉장히 순수한 상태입니다. 사람 죽이는 기술은 몸에 남았지만 인격을 지워버리는 CIA의 프로그램은 기억과 함께 그의 머릿속에서 날아가버렸거든요. 그리고 순수하고 착한 영혼들은 동물에 약한 법이죠. 


  "…같이 갈래?"


  배트맨에게 보호자가 생겼군요.




* * *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고양이를 바닥에 살짝 내려놓았다. 그는 제일 먼저 손을 씻고 냉장고에서 고양이가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고양이는 남자가 먹을 걸 찾아보고 있다는 걸 눈치채기라도 한 듯이 최대한 얌전하게 앉아 있으려다가 혼자서 중심을 한 번 잃었다. 생수를 꺼내던 남자가 그 모습을 보았고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높은 지붕에서도 끄떡없는 고양이가 바닥에 앉으려다 휘청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영락없는 고양이 생김새를 한 진짜 고양이를 의심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그는 두 개의 그릇에 물과 통조림의 내용물을 쏟았다. 고양이는 음식을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가 또 휘청했다. 남자는 고양이가 부상을 입은 게 아닌가 싶어 고양이의 다리를 진지하게 바라보았다. 다행히 고양이는 고양이다운 균형 능력을 되찾고 물을 할짝였다.


  골목길을 서성이던 것치고 고양이의 털은 꽤나 깨끗했다. 그는 당장 고양이를 씻길 필요는 없다고 판단하고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검은 고양이가 귀를 쫑긋 세웠다. 남자가 꺼낸 것은 중간 크기의 상자였다.


  고담으로 도망쳐온 남자는 자신이 본능적으로 선택한 피난처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곳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오죽하면 그가 들어본 적도 없는 박쥐 옷차림의 자경단원이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는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도 자신이 다시는 잡고 싶지 않았던 무기를 하나쯤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판단을 내리게 되었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근처에 놓아두고, 조금 전 뒷골목에서 산 총을 꺼냈다. 그가 총의 상태를 재차 확인했다.


  발끝이 간지러워 밑을 내려다봤더니 고양이가 있었다. 총에서 난 찰칵거리는 소리에 반응한 듯했다. 남자는 무언가 부끄러웠다.


  "…누굴 쏘려고 산 건 아니야."


  고양이는 눈을 멀뚱멀뚱하게 뜨고 남자를 보았다. 참 사람 같은 시선이었다.


  "난 아무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


  고양이가 갑자기 그의 다리를 타고 오르려 했다. 남자는 묘하게 고양이 같지 않은 고양이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고양이를 들어 침대 위에 올려놓았다. 동시에 고양이가 총을 만질 수 없도록 총을 잡은 손을 머리까지 들었다. 고양이가 가만히 꼬리를 흔들다가 침대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고양이는 뚜껑이 열린 상자에 관심을 보였다. 그 안에는 일반인이 소지하기 쉽지 않은 여러 개의 여권과 다량의 현금 다발, 그리고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를 몇 가지 종이 쪽지들이 들어 있었다. 고양이가 발로 슬금슬금 가장 앞에 있는 여권을 건드렸다. 여권의 표지를 들어올리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

  ―야옹.

  "왜 거기에 관심을 갖는 거야?"

  ―야아옹.

  "……"   


  남자가 여권의 앞면을 펼쳐 보여주었다. 남자에게도 고양이에게도 낯선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고양이는 곧 그의 미국 여권에서 관심을 끊고 나머지 여권들을 이리저리 발로 밀었다. 브라질, 러시아, 프랑스, 파리 등등 온갖 나라들의 여권이 모습을 드러냈다. 고양이가 가만히 발을 뗐다.


  "…너도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고양이가 남자를 돌아보았다.


  "나도 그것들이 뭘 의미하는지 알아보려고 하는 중이야."


  남자가 상자를 회수했다. 고양이는 동그란 눈동자를 남자에게 고정하고 있었다. 남자는 여권을 한 뭉치로 모은 다음 그 위에 총을 올렸다. 


  "…내가 처음 봤던 금고 안이랑 똑같아졌네."


  남자가 상자를 침대 밑으로 다시 감췄다. 고양이는 여전히 눈동자를 굴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더 안 먹어?"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훈련을 받은 고양이를 대하듯 물었는데, 고양이는 용케 그것을 알아듣고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점프하는 모양새가 아주 깔끔했다. 남자는 자신이 정말 특이한 고양이를 데려왔다고 생각했다. 


  밥을 다 먹고 고양이는 남자를 관찰하듯이 바라보기만 했다. 물건을 가지고 놀지 않으려는 행동은 독특했으나 대신 고양이는 조용했다. 그 덕에 남자는 자신의 작업, 즉 무언가를 메모하고 그것에 대해 골똘히 고민하는 일에 집중했다. 그가 일기를 적고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어딘가에서 수집해온 정보들을 모조리 암기하고 있다가 그걸 옮겨 적으며 머릿속을 정리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는 대체로 남자의 얼굴과 메모를 번갈아 보았다. 그 가운데 밑줄이 몇 번 그어진 부분이 있었다. 


  [취리히 은행]


  고양이가 눈길을 올렸다. 남자는 온 힘을 다하여 절박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고양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남자는 정말 놀라운 집중력으로 자신의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가, 고양이가 서서히 피로함에 젖어갈 즈음에 주변을 정리했다. 남자가 고양이를 들고 욕실로 갔다. 


  그는 옷이 젖는 걸 방지하기 위해 상의는 바깥에 벗어두고 물을 받았다. 고양이는 남자의 등을 보았다. 잘 짜여진 몸에 미세한 상처들이 있었고 총자국처럼 보이는 동그란 흔적도 있었다. 고양이는 눈을 크게 떴다가 남자가 뒤를 돌아보자 참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는 모든 것을 익숙하게 해치우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몸집도 큰 고양이를 요령 있게 씻겼다. 몸 구석구석을 슥슥 밀어주는 감촉이 좋아서 고양이는 눈을 감고 고개를 흔들었다. 남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길고양이는 원래 너처럼 다 사람 같니?"


  고양이는 이번에도 부자연스럽게 울었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었다.    




* * * 




  고양이 배트맨과 CIA 출신 킬러의 일상을 왜 좀 더 보여주지 않는지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서 말씀드립니다. 실은 말이죠, 이른바 집사와 고양이들이 서로 하는 일은 놀랍도록 똑같습니다. 고양이는 집사에게 귀찮은 일거리과 애교를 반반씩 섞어 던저주고 집사는 당근과 채찍에 휘둘리면서 고양이를 간지럽히죠. 그렇다고 청년 제이슨 본이 벌써 '집사' 단계까지 올랐다는 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고양이가 좀 까칠해서요. 그래도 둘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물론 제이슨에게 핸드폰이 있었다면 배트맨은 더욱 행복해했을 테지만요. 그 자신은 정체도 모르는 집단에게 쫓겨다니느라 제이슨 본은 주변에 어떠한 전자 기기도 두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이 꼭 필요한 경우에는 PC 카페를 갔죠. 브루스 웨인은 고담시에 그런 시설이 남아있다는 것조차 몰랐는데 말입니다.


  아,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날로그식 삶을 고집하는 제이슨에게 짜증이 나서 한 번은 고양이 배트맨이 그의 손가락을 물었죠. 안타깝게도 고도로 훈련받은 정보부의 암살자는 별다른 위해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 심심해?

  

  그리고 배트맨은 성심성의껏 자신과 놀아주는 그에게 휘말려 배를 뒤집고 야옹거리다가 진한 자괴감을 느끼고 저녁 내내 구석에서 고개를 박고 있었답니다.   


  한편 바깥에서는 큰 사건이 벌어졌지요. 고담의 모든 악당들을 다 쓸어버리고도 배트맨을 찾지 못한 조커가 결국 엉엉 울면서 기자회견을 가졌습니다. 조커는 훌쩍이며 자신이 배트맨에게 이러이러한 약을 썼는데 그가 어떤 모습으로 변했는지 도저히 모르겠다면서, 뭔가 배트맨 같은 분위기가 나는 생물체를 발견하면 즉시 연락을 달라고 번호까지 남겼습니다. 악당이 자기 혼내주는 놈을 이렇게까지 좋아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조커가 그리운 뱃시를 잊지 못해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면서 엉겁결에 득을 본 쪽은 배트맨의 유일한 지원군이라 할 수 있는 알프레드였습니다. 배트맨과 브루스 웨인에 대해 모든 걸 알고 있는 그는 과연 은밀히 사람을 풀어서 몸집이 평균 이상인 검은색 고양이를 끌어모으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입니다. 이걸 보면 조커는 아직도 멀은 것 같지요. 


  그리고 조커의 기자회견을 들은 배트맨 역시 원거리에서 알프레드와 호흡을 맞추기에 이릅니다.




* * *




  ―니야옹, 니야아아….


  검은 고양이는 몇 번 힘 없이 울더니 바닥에 철푸덕 누웠다. 침대에 올라갈 힘도 없다고 시위를 하는 것만 같았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남자가 상체를 숙였다.


  "며칠새 힘이 없네."


  남자는 고양이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별로 좋아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어디 아파?"

  ―니이야.

  "이 주변에 동물 병원이 있을 리가 없는데."

 

  남자가 그 말을 하자마자 고양이의 귀가 아래로 축 내려갔다. 꼬리는 미동도 없었고 뜨다 만 눈은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남자라 할지라도 그냥 외면하지 못할 가련한 동물이 보내는 신호였다. 남자가 결국 재킷을 챙겼다. 남자의 품에 안긴 고양이는 묘하게 흡족해 보였다.


  남자와 고양이는 주변의 대로에서 택시를 타고 고담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남자는 이제 그 곳에서 동물 병원을 찾아야 했다. 그는 고담의 사방 어디에서도 접근할 수 있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건물을 등지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고담시에 와서 제일 먼저 도시의 지도부터 외운 남자는 이곳의 토박이들만큼이나 길을 잘 알았지만 그가 외운 지도에는 동물 병원의 위치가 나와있지 않았다. 남자는 일단 걸어보기로 했다.


  옷에 말려 남자의 가슴 속에 쏙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움찔대기 시작했다. 그는 고양이를 살살 달래가며 은색 빌딩들을 지나쳤다. 둘은 횡단보도의 신호등 앞에서 멈춰섰다. 무엇이든지 살피는 버릇이 있는 남자는 신호등의 기둥에 무언가가 붙어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그걸 읽었다.    


  [고양이를 찾습니다. 약 6일 전 실종. 검고 몸집이 다소 큼. 교육을 잘 받아 얌전하고 사람을 많이 경계하지 않아 다른 길고양이들과 구분됨. 아래의 주소로 연락 바랍니다.]


  남자의 동공이 조금씩 커졌다. 어느새 머리를 내밀고 있는 고양이도 놀라움을 표현하듯이 목을 빼고 있었다.


  "주인이 있었어?"


  고양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자는 신호등의 불빛이 초록색으로 바뀐 것을 외면하고 방향을 돌렸다. 그는 공중전화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 앞에 서 있었다. 고양이는 울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얌전히 웅크리고 있어서 얼핏 보면 남자가 그냥 옷가지를 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남자는 자신이 전화를 건 이를 기다리면서 그 주인이 정말 고양이를 잘 훈련시켰다고 여겼다. 그러다가 자신에게도 많은 걸 가르쳐준 사람이 분명 존재할 거라는 데에 상념이 닿자 남자는 무겁게 숨을 쉬었다. 그 순간 고양이가 살짝 몸을 뒤척였다.


  "전화를 주신 분이십니까?"


  남자를 맞이한 건 훌륭한 양복을 입은 노신사였다. 검은 고양이와 잘 어울린다는 감상이 단번에 들었다.


  "예."

  "확인해볼 수 있을까요?"

  

  남자가 옷을 걷었다. 얼굴을 드러낸 고양이가 필사적으로 꼬물거렸다. 


  "고양이가 먼저 주인을 알아보는 것 같군요."

  "…네, 제가 키우던 아이가 맞습니다."


  남자가 서서히 팔을 풀자 고양이는 곧장 노신사에게 뛰어들었다. 남자의 표정이 약간 어색해졌다. 그가 짐이 되어버린 옷을 팔에 걸었다.   


  "감사합니다. 답례를 하고 싶은데 성함이라도…."

  "괜찮습니다."


  남자는 노신사가 그를 붙잡을 여유를 주지 않았다. 노신사는 빠르게 사라져가는 남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마 좋은 사람을 만나셨군요, 도련님."

  ―야옹.

  "약물을 만든 당사자에게 물어보니 약효가 지속되는 데 한계가 있다고 합니다. 며칠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독된다고 하더군요."

  ―야옹.

  "수트와 장비들은 벌써 점검을 다 마쳤으니 나중에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는 조커를 꼭 붙잡으셔야겠군요.

  ―…야옹. 




* * * 


 


  거처로 돌아가는 제이슨의 손에는 가판대에서 사온 신문이 들려 있었다. 간밤에 터진 소식들은 고담시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어야 할 일들이었다. 그는 본질적으로 이방인이었지만 최대한 그걸 감추는 법을 알았다. 신문을 옆구리에 낀 그가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비죽 튀어나온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이 인쇄되어 있었다.


  [돌아온 배트맨, 조커를 체포하다]


  제이슨 본은 다양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는 자신이 들어갈 공간의 문틈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침입자의 그림자부터 부비트랩의 여부까지 많은 걸 확인할 수 있는 현관의 틈새에서 그는 하얀색 봉투를 발견했다. 훈련받은 요원이 자신의 미간을 좁혔다. 아직까지 얇은 편지봉투에 장착할 수 있는 폭탄은 발명되지 않았다. 제이슨 본은 복도의 양쪽을 한 번씩 살핀 뒤에 봉투의 앞면을 확인했다. 뜻밖에도 웨인 엔터프라이즈 사의 로고가 찍혀 있었으며, 봉투의 안에 들어있는 쪽지엔 본이 더욱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신의 과거에 대해 알아낸 것이 있어. 날 만나러 와주길. - 브루스 웨인]


  제이슨은 봉투를 그대로 갖고 방으로 들어갔다. 2분 뒤 그는 옷 속에 무기를 감추고 밖으로 나왔다. 




* * *




  그 날은 브루스 웨인 회장을 위해 일하는 비서가 너무나도 기다린 하루였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적힌 웨인 회장의 공식적인 일정이 최근 두 달간 가장 적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기대했던 대로 웨인 회장은 그녀에게 일찍 퇴근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오늘도 웨인 엔터프라이즈에 충성을 맹세한 사원이 한 명 늘었다.


  고요해진 빌딩의 최상층에서 브루스 웨인은 홀로 서류를 읽고 있었다. 신중하게 서류를 나누던 그가 문득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기다리는 손님은 어쩌면 노크를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의 경력을 고려하자면 기대하기 어려운 매너였다. 브루스는 양쪽이 모두 편할 수 있게 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그 후 보육기관 지원 사업과 관련된 서류를 집중해서 읽던 브루스 웨인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자신의 손님이 서 있음을 눈치채지 못했다. 브루스가 그를 보고는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제이슨."

  

  제이슨 본이 순간적으로 권총을 들었다.


  "날 어떻게 알지?"

  "우린 만난 적이 있어."

  "원하는 게 뭐야?"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하다가, 나보단 당신이 알아야 할 것들을 알게 되어서 공유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당신이 의문을 갖는 모습들을 창조해낸 사람들을 찾아냈어."


  브루스가 서류 밑에 있던 파일 하나를 들었다. 미 중앙정보국의 엠블럼과 함께 일급 기밀이라는 글씨가 선명했다. 제이슨이 눈을 좁혔다.


  "…CIA?"

  "저녁에 그 사람들을 만나러 갈 예정인데. 같이 가면서 보지 않겠나?"


  제이슨은 파일 하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아냈다. 그는 침착하게 마음을 가라앉혔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뭐지?"

  "당신과 나는… 무슨 관계지? 당신은 왜 날 도와주지?"


  브루스가 인상을 찡그렸다. 수상한 기운을 읽은 제이슨 본이 그의 미간을 조준했다. 브루스의 대답이 지체되자 암살자는 속으로 숫자를 셌다. 20초 뒤에는 모든 것을 함정이라고 판단할 작정이었다.  


  제이슨이 숫자 12를 셌을 때 브루스 웨인이 대답했다.


  "…은혜를 잊어버리는 동물은 없으니까."


  그의 목소리가 끄트머리에서 떨렸다. 그렇지만 제이슨 본은 그것이 거짓말에서 비롯된 긴장감 탓이 아니라는 걸 직감했다. 제이슨이 약간의 혼란에 빠진 사이 브루스는 홱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기나 해."


  브루스가 제이슨 본의 품에 파일을 안겨주었다. 제이슨은 영문을 모르는 순진한 남자가 되어 아무에게도 발설하지 못할 부끄러움에 시달리는 웨인 회장님을 따라갔다.


  "왜 얼굴이 빨개진 거지?"

  "…시끄러워."

  "아까 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어. 나랑 당신이 무슨 관계였냐고 물었잖아. 잠깐, 미스터 웨인!"

[Crossover/본브루스] Better Life

- Anything/Crossover 2016. 8. 31. 16:16 posted by Jade E. Sauniere

- Jason Bourne & Bruce Wayne Crossover

- Written by. Jade


Better Life




  브루스 웨인의 한쪽 눈동자는 조금 전에 확인해서 이미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버린 핸드폰에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다.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


  알 수 없는 이름unknown으로 자신을 표현하며, 그림자 속에서 자신을 자책하는 일밖에 알지 못하던 인물이 있었다. 브루스는 하필 그가 이 순간에 최고의 능동성을 발휘하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엘리베이터가 작동을 하지 않을 것은 뻔했으므로 브루스는 곧장 비상구로 향했다. 도중에 핸드폰을 한 번 켜보았지만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문을 크게 열고 난간을 잡은 브루스는 절실하고 정확하게 달렸다. 30층도 넘는 층을 계단만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다소 좌절스러운 사실은 브루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브루스가 핸드폰을 꺼냈다.


  "알프레드, 웨인 엔터프라이즈로 배트윙을 보내줄 수 있어요?"

  ―진심이십니까, 도련님?

  "이 시점에서 내 정체를 숨기는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보내줄 수 있죠?"

  ―…준비하겠습니다. 15분 정도 걸립니다. 하지만 드론 조종 모드로 수트까지는 배달해드릴 수 없습니다.

  "괜찮아요."


  브루스는 통화를 끊고 화면을 바라보았다. 새로이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브루스는 달리면서 부디 자신의 손이 기계의 진동으로 움찔하기를 바랐다. 다급한 인영이 비상계단에 온도와 숨소리를 남겼다. 지상 로비보다는 옥상에 더 가까운 그의 위치에서 아래의 혼란을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배트맨의 몫이었고, 브루스 웨인은 그러한 이유에 의해 계단을 올랐다.


  아직 배트맨이 오지 않은 지상의 소요에는 잿빛 머리칼의 남자가 있었다. 그는 브루스 웨인이 하나의 문자 메시지를 눈동자 위에서 완전히 지워내고 있지 못하듯이, 몇 개의 음성들을 귓가에서 떨쳐내지 못했다. 그 소리들은 그가 본래부터 사람을 죽이는 자라고 말하고 있었다.


  제이슨 본은 이번만은 반쯤 그 말에 동의해보기로 했다. 그가 코너 뒤로 사라지자마자 건물의 입구에서 폭발음이 났다. 무장경비에게 빌린 총이 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알프레드는 원격 조종으로 배트윙을 몰면서 배트케이브 밖에서 펼쳐지는 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차들이 적은 도로를 고른 경찰차들이 모여드는 중이었고 멀찍이서 보이는 웨인 엔터프라이즈 빌딩은 아직 성한 모양새였다. 알프레드는 고도를 조정하면서 빌딩을 스캔해보았다. 층마다 빼곡하게 있어야 하는 직원들의 열기가 감지되지 않았다. 알프레드는 그것을 조금 의아하게 여겼다.


  브루스 웨인은 난간을 잡은 자신의 팔로 몸을 밀어가면서 계단을 올랐다. 10층 정도만 더 올라가면 옥상에 있는 헬리콥터 착륙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의 핸드폰은 잠잠했다. 그가 단어 하나라도 찍어서 보내주길 바라고 있는 인물은 핸드폰이 아니라 다른 걸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제이슨 본의 손에 감긴 총이 처음으로 불을 뿜었다. 수제 폭탄을 의기양양하게 내던지려던 놈이 발목을 맞고 미끄러지면서 폭탄이 엉뚱하지만 적절한 폭발을 일으켰다. 본이 가지고 있는 이점이라고는 침착하게 발휘할 수 있는 사격 실력뿐이었다. 그는 속으로 자신이 쏠 수 있는 탄환의 갯수를 하나 줄이다가, 그 가운데서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배트맨이 있다고 알려진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는 악당들과 경찰들에게 겹겹이 싸인 꼴이 되었다.


  "경찰이다, 순순히 무기를 버리고―."


  모두가 그 말이 악당들에게 보내는 미란다 법칙처럼, 경찰 쪽에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대사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무시당했다. 악당들은 대답 대신 총알을 뿌리기 시작했고 경찰들도 당황하지 않았다. 마침내 자신과의 고리가 끊어졌다고 여겼던 총성을 태연하게 들으며 제이슨 본은 전진했다. 


  마침 그가 걷는 길에 소화기가 있어 본은 냉큼 그걸 들고 바닥에 던졌다. 알맞은 힘을 받은 소화기는 어려움 없이 총격전 현장까지 굴러가다가 어떠한 세련됨도 없이 그저 빗발치기만 하는 총알에 맞았다. 하얀 가루가 터져나오며 연기를 일으켰고 그 순간 본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가 두 팔을 들었다.


  한편 빌딩의 옥상에 배트윙을 앉히려던 알프레드는 뜻밖의 장애물을 만났다. 경찰 측에서 띄운 헬리콥터가 배트맨에게 경고를 보냈다.


  ―배트맨, 가까운 착륙장에 내려라. 지시를 어길 시 사격하겠다.


  알프레드가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 시점에 브루스는 마지막 문을 발로 차고 옥상에 막 당도한 참이었다. 착륙장에 배트윙이 보이지 않아 이리저리 주위를 둘러보던 브루스는 경찰 표식을 단 헬기 2대에 꽁무니가 잡힌 것처럼 보이는 배트윙을 발견했다. 


  "알프레드."


  알프레드의 목소리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옥상에 도착하셨군요. 그렇다면 지금 상황이 어떤지도 보이시겠지요.

  "일단 경찰이 원하는 걸 들어줘요. 내가 탈 때까지 조종간은 놓지 말고요."

  ―배트윙이 착륙하는 곳에 도련님이 계신다는 게 무엇을 의미할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게 밝혀진다고 해서 배트맨이 영영 활동을 못하게 되지는 않아요."


  브루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알프레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나서지 않으면 제이슨은 위험해질 겁니다."


  브루스는 핸드폰을 집어넣은 손을 밖으로 빼지 않은 채 움직였다. 배트윙이 서서히 빌딩에 내려앉으려 했다. 브루스는 이제 핸드폰에서 관심을 떼기로 했다. 그는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그를 위하여 그가 멀리 하라고 권했던 무기를 잡은 이를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것이었다. 


  브루스가 재킷 안감에서 박쥐 모양의 표창을 꺼냈다.   


  자신이 간수해야 하는 물건인 것만 같아서 일단 옆에 두고자 했던 남자에게 비밀이 탄로났던 당시를 생각하면 브루스 웨인은 늘 웃음이 났다. 고담 시에 반년도 머무른 적이 없다던 남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배트맨의 심판 현장에 나타나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 다음의 기억은 더욱 실소가 났다.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는 좀 궁금하군.

  ―서랍에서 무기 설계도를 찾았어. 그 이후에는 쉬웠고.


  잠금 장치에 위장까지 덧씌웠던 기억이 생생한 서랍을 열었다는 게 그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비밀을 갖고 있기 때문에 누군가의 비밀을 찾는 데 노련한 자들은 오히려 그 덕분에 편안한 마음가짐으로 브루스 웨인의 유리 별장으로 돌아갔었다.


  "웨인 씨?"


  그들은 다시 돌아가야 했다. 배트맨이 표창을 던졌고 잠자코 있던 배트윙이 승객 없는 헬리콥터의 날개를 쏴 맞췄다. 경찰들은 당황한 얼굴로 배트맨의 탈것에 탑승하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회장을 쳐다보았다.


  "배트맨은 우리 거야. 방해하지 마!"

  "저 놈들을 빨리 쏴버려!"


  킬킬 웃으며 동시에 화를 내는 악당들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지역의 특성상 그 어떤 차보다 단단하게 만들어진 고담의 경찰차에도 볼썽사나운 구멍이 났다. 기껏해야 45구경 권총을 소지하고 있을 뿐인 경찰들은 차를 방패 삼아 탄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으악!"


  기관총과 하나가 된듯 몸을 부르르 떨어대던 놈이 느닷없이 고개를 꺾었다. 차의 측면에 달라붙어 있느라 사격을 할 수 있는 경찰들은 아무도 없었으므로 제복을 입은 남자들은 서로를 보며 눈을 굴렸다. 경찰에게 고함을 지르고 있던 악당들도 비로소 고요한 빌딩 쪽에 관심을 두었다. 


  "뭐지?"

  "안에서 누가 우릴 돕나봐요. 진짜 배트맨이 저 건물 안에 있나본데요?"


  그러자 경찰 하나가 딱 봐도 그보다 다섯 살은 젊을 듯한 청년을 때렸다.


  "일단 앞에 있는 놈들부터 처리해! 그래야 배트맨을 체포하든 할 거 아냐! 뭐해, 갈기라고!"


  그제야 경찰들이 오리걸음으로 앞을 기어갔다. 


  본의 머릿속에는 두 개의 숫자만이 있었다. 그가 소모한 시간과 그에게 남은 총알의 갯수였다. 본은 빌딩의 최상층부에 있는 브루스 웨인을 밖으로 대피시키지 못했다. 그렇지만 똑똑하고 충성스러운 그의 집사가 어떤 식으로든 방법을 마련했을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살아남는다. 본이 정확히 날짜를 댈 수도 있는 어느 시간에 정해진, 결코 변할 수 없는 명제였다. 마음이 더욱 편해진 그는 남은 탄약을 소비하고자 모습을 드러냈다.    


  "저기 사람이 있어요! 배트맨이에요!"


  줄곧 배트맨을 언급하던 청년이 기어코 소리쳤다. 남자의 코트가 배트맨의 망토처럼 펄럭거렸다. 청년은 악당을 제압하는 일은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연신 자신의 앞에 있는 경찰의 어깨를 두드리며 배트맨의 이름을 읊조렸다. 참다 못한 경찰이 고개를 틀었다. 악당을 제압하고 생명을 위태롭게 만드는 일에 익숙한 자가 분명히 로비 안에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경찰의 머리 위에 악당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 한 명 더 존재했다.


  공중에서 쏟아지는 폭격에 악당들이 혼비백산하여 몸을 숙였다. 기관총이 고정되어 있던 차량에 불이 붙고 이리저리 흩어진 무기가 조각났다. 웨인 엔터프라이즈 내부에 배트맨이 있다고 믿었던 청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코트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이 청년의 앞에 있었다. 청년은 지상과 상공을 번갈아 보았다. 


  제이슨 본은 기묘하게 각도를 바꿔가며 조종석을 빛으로 가리는 배트맨과 기어코 눈을 마주쳤다. 가면이 없어 얼굴을 가릴 수 없고, 수트가 없어 목소리를 바꿀 수 없지만 어차피 본의 눈에는 누구보다 순수한 형상으로 보이는 그는 어느 정도는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본은 탄창이 빈 총을 던지고 핸드폰을 꺼냈다. 브루스 웨인의 이름으로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렇게 할 순 없어.]


  배트윙이 모두의 눈앞을 혼란하게 만드는 바람을 일으켰다. 그곳에서 제이슨 본만이 온전히 서 있었다. 본이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집으로 돌아가자.]


  바람이 전보다 더 거세게 부는 것 같았다. 악당들은 배트맨의 등장에 꼼짝하지 못했고, 경찰들은 두 배트맨 사이에서 어리둥절해하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 본은 빠르고 곧게 걸었다. 필사적으로 눈을 뜨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청년은 마침내 자신의 기체로 돌아가는 배트맨을 목격할 수 있었다. 배트맨이 훌쩍 날아올랐다.


  본은 콕피트가 열리자마자 조종석 안쪽으로 안전하게 떨어졌다. 브루스가 그의 상태를 슬쩍 확인했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잖아."


  브루스는 엉뚱한 말을 했다.


  "가서 나랑 기자회견에 발표할 내용이나 고민하지."


  본은 그 한 마디에 숨어 있는 많은 것들을 간파했다. 브루스는 자신이 한때 추억을 그리듯이 죽음을 상상했던 것처럼 본도 더 나은 죽음을 찾으러 다닌다는 걸 지적하는 한편, 불멸의 존재여야 하는 배트맨으로 지목당한 그의 위치를 상기시켰다. 본은 굳이 말로써 자신이 브루스의 의도를 이해했다는 걸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은 살아남는 것이 더 좋은 삶이었다. 본은 다시금 브루스 웨인의 곁에 자리잡았다.




There's no better love

That's laid beside me

There's no better love

That justifies me

There's no better love

So darling feel better love



Better love by Hozier

- When Bruce Wayne meets a reflection of himself named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8. 03

- Written by. Jade


At the edge of deadly skepticism


 천둥을 동반한 번개를 내리꽂을 것 같은 하늘이 멀고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대체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남자는 곧장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꼭 환풍기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것처럼 답답했다. 브루스 웨인은 문이 닫히기 직전 짧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소매를 열거나 타이를 밑으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건물 안의 무리들 중에서 가장 초연한 얼굴을 띠고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리들이 섞여 거대한 고함이 탄생하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가 시선을 힐끗했다. 두 차례를 기다리면 그가 주시해야 할 격투가의 순서가 오게 되어 있었다. 과연 브루스 웨인은 그에게 가장 적절한 시간에 그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고, 그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정작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이 다 갖지도 못하는 지폐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의외로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브루스 웨인이 노리는 자는 그보다 훨씬 이 도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 자리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다른 방향에서 싸움꾼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격정이 피어오르는 곳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행운과 다른 사람들의 피를 즐기는 동물적인 정열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한 번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외면하며 러시아인을 찾아다녔으나 수확을 얻지 못했다.


  환호하는 자와 격분하는 자들 사이에서 브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을 의미를 잃어버린 그가 마지막으로 미련처럼 실행한 행동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브루스 웨인은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러시아인을 찾은 것이었지, 어떤 믿음이나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바람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사선으로 꺾여갔다.


  표정이 없는 남자가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는 반사광이 터졌을 때 미간을 찡그리며 그 빛의 근원지를 자연스레 확인하게 되듯이, 브루스는 기울어 가라앉으려고 하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작은 분명히 격투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그걸 실행하는 이에게서는 투지와 흥분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또 어떤 추상적인 반사광을 본 것 같았다. 그의 발이 미끄러지는 바닥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문득 자신이 강화수트를 입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변신에 임하는지를 돌이켜보았다. 책임과 체념의 경계를 열고 닫으면서 이제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희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정과 미래를 잃어가는 것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희생을 감행하는 모순 속에서 건강한 무언가는 결코 자라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낯설게 브루스 웨인의 머리를 찔렀다. 


  러시아인은 오늘 아예 오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브루스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작고 피상적인 느낌마저도 이성에 녹아들어 버린 듯했고 이성은 느낌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장치였다. 붕대를 다 감은 남자 역시 비정상적인 초연함을 펼쳤다.    


  "곧 격투가 시작됩니다! 더 거실 분 안 계십니까?"


  격투장의 심부름꾼이 지폐를 팔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브루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남자에게 걸겠소."


  청년은 브루스가 쥐어주는 액수에 놀랐다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모두가 성이 나 있었다. 격투가들보다 더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구경객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간 청년은 관객들을 재미있게 여길 터였다. 기대와 탐욕과 호기심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이질성을 감추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사광이 눈을 가리는 기분은 사라졌다. 올바른 위치에서 상을 응시할 때 시야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장애물이 사라진 그 자신의 시야 속에서 많은 걸 목격했다.


  죽음을 바랐던 적이 있었다. 실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일은 많았다. 브루스 웨인은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죽음 또한 독립적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연과 신념과 소망이 연거푸 스러져가다 보면, 그 부스러기들이 지상에 깔려 생에 대한 의지를 땅보다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 때조차 브루스 웨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발을 담근 듯이 자꾸만 균형을 잃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덤덤하게 되짚었으나 그 시절 그는 아주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힘을 불어넣으려고 시도만 하면 도리어 휘청이는 관념에 화가 났던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물웅덩이를 얼려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밑은 더욱 미끄러워졌지만 환상 같은 두께와 강도를 가지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물이 얼어있는 지점에 서 있다는 건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몹시도 조심하면서, 자신의 발바닥 아래를 깨뜨릴 수 있는 건 뭐든지 의심하면서 움직이게 되었다.


  절망과 회의주의로 빚은 절벽으로 한 남자가 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눈을 깜빡여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선택한 남자는 두들겨 맞고 있었다. 브루스가 보기에 그는 오직 그간의 경험에 이끌려 두 팔을 올리고 있었고, 단련된 육체가 있어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것이었다. 광기와 욕설이 피 흘리는 남자에게 꽂혔다. 밀리기만 하던 남자는 급기야 브루스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 비틀거렸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중력에 휘감아 위장해보려던 남자는 또 다른 인력에 가로막힌 자신을 한 번 보았다가 뒤를 돌았다. 브루스는 자신의 양 손이 남자의 땀에 밀려나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브루스가 남자를 세웠다. 그에겐 일종의 반사광이었던 남자의 동공은 의외로 탁해 브루스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비쳐 보이는지 몰랐다. 그 찰나의 브루스 웨인은 오직 남자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일어섰다. 동시에 그는 싸웠다. 브루스는 마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인 양 남자가 처음으로 내뻗은 주먹의 의미를 추측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남자는 덤덤하게 승리를 가져왔다. 구경꾼들이 이건 말도 안 된다면서 발악을 해댔다.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붕대가 스르르 떨어졌다.  


  브루스는 천천히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소중히 다루는 자신의 소지품마저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듯했다. 남자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가방 하나를 옆에 두고 옷을 꺼내는 중이었다. 조금 전 브루스의 돈을 걷어갔던 청년이 눈을 찡긋하며 그에게 지폐 뭉치를 건넸다. 


  남자는 지폐를 세지도 않고 무심하게 가방 한 구석에 쑤셔넣었다. 그의 등에는 총알을 대보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상흔들이 있었다. 브루스는 그제야 남자의 외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훈련을 받았으며 총을 맞아본 적도 있는 데다 저급한 자들의 파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브루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브루스 웨인이 가장 털어놓고 싶은 것들이 한 번도 그의 음성에 실린 적이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의 소리를 공유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사실 브루스는 남자에게 이것 저것을 묻고 싶었다. 그의 발 밑은 자신과 같은지, 혹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당신은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현실과 닮았지만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위치에서 브루스 웨인은 한 번도 자신 이외의 인물을 본 일이 없었다.


  결국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가 가방을 들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브루스를 지나쳐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브루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벗어났다. 브루스는 그 뒤 돈을 걷는 청년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그는 이 주변에서는 누가 들어도 가명으로 생각될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브루스 웨인이 자신은 그림자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결말을 내려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진심으로 남자가 자신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