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Chapter 6. 불길 뒤에서Behind the Fire



  “…이 날이 오기 전까지 위와 같은 일이 있었던 것이다. 커크는 세상을 송두리째 바꿔 놓을 거면서 이렇게 조용하게 획책되고 실행된 사건은 없을 거라며, 세상에서 제일 조용한 혁명일 거라고 멋들어진 타이틀을 붙이고 혁명 일지도 나눠 썼었다.”


  더불어 제임스 커크는 므네모시아와 전혀 궁합이 맞지 않는 인물 중 하나였다. 맥코이는 잠시 속으로 방금 소리 냈던 어구를 되새겼다.


  “내가 겨우 벌려 놓은 일에 그런 멋진 이름을 붙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 정도로 포장할 수 있는 정도의 일이니 기왕 하는 거 성공했으면 좋겠다. 예상으로는 300년가량을 거슬러 올라갈 것 같은데 그 때 누군가에게 이 파일을 보여주길 바란다. 커크인 게 제일 편하겠군. 해리슨에게 가감 없이 들려주긴 부끄러운 이야기니까….”


  그 뒤로 무슨 말을 덧붙여야 할지 몰라 맥코이는 녹음을 마쳤다. 


  그는 액정을 접어 얇은 판에 넣었다. 보관을 위한 덮개라는 기능에도 충실했지만 배터리로 액정을 작동시킬 수 있는 접속 장치이기도 했다. 맥코이는 그것 옆에 놓아두었던 주사기의 유리관에 약물을 채웠다. 므네모시아의 기원과도 같은 레너드 맥코이의 첫 번째 발명품이 안으로 흘러들었다. 정확히는 그것을 토대로 변형을 가해 뇌의 일정 영역을 보존시키는 역할을 하는 물질이었다.


  블랙홀에 대해서는 그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저 일정 규모의 블랙홀을 발생시키면 몇 백 년 정도는 넘어 다닐 수 있다는 것만 그나마 뚜렷했다. 맥코이는 부디 그 초자연적인 통로를 넘어도 자신의 약물이 효력을 발휘하여 26세기의 기억을 유지할 수 있길 소망했다. 이태까지 유예해 왔던 책임감이 한꺼번에 밀려와 맥코이의 행동을 촉구하고 있었다.


  간소한 차림이었지만 그의 걸음은 영영 리서치를 향한 이별을 준비했다. 맥코이는 일부러 옆에 면한 연구실을 개방해 놓았고, 현관 사이에는 책을 끼워두어 문이 닫히지 못하게 했다. 


  맥코이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리서치의 로비에 내려앉자 늘 그렇듯 연구원들이 닥터를 향해 경의를 표했다. 맥코이는 딴에는 신경 써서 그들의 인사를 하나씩 받았다.


  레너드 맥코이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자신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마커스가 부여한 위선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었다. 수도를 가장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차량을 후련한 마음으로 제공받았으며, 차에 탑승하고 얼마 되지 않아 리서치의 정경이 차창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기사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기분으로 맥코이를 목적지에 데려다주었다. 닥터의 상징을 당당하게 과시하면서 맥코이는 신속히 생추어리의 사제들을 비집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제들이 하얀 가운의 닥터를 보고 놀랐다.


  “화형장이 어디지?”

  “형이 집행되고 있을 겁니다. 혹시나 둘러보러 오신 거라면 조금 기다렸다 가시는 것이….”

  “함부로 추측하지 마. 화형장이 어디야?”

 

  존 해리슨에게 단련된 사제도 작정하고 고압적인 목소리를 내는 닥터의 초월적인 요구 앞에서는 맥을 못 췄다. 사무적인 태도 따위는 모조리 잊어버린 사제가 더듬더듬 위치를 설명했고 맥코이가 날카롭게 돌아섰다. 생추어리를 뜻대로 누비고 있는 하얀 가운에 젊은 사제들 몇몇이 놀라 닥터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조금이라도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맥코이는 지나가던 사제 한 명을 붙잡았다.


  “잠깐 나 좀 안내해 주지.”


  고동색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사제는 느닷없이 들이닥친 닥터의 손가락에 동작을 멈췄다. 화형장이라는 곳이 아무래도 계단을 몇 번 내려가거나 엘리베이터의 버튼만 누르면 쉽사리 닿을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생각이 미친 탓이었다. 위대한 닥터의 목적지를 들은 사제의 안색이 곤란함으로 물들었다. 닥터는 눈빛으로 그를 독촉했다. 


  맥코이에게 지목 당했던 사제는 아예 담당자를 불러왔다. 담당자는 정중한 태도로 닥터를 안내하려다가 자꾸만 걸음 속도를 높이는 맥코이보다 앞서가기 위해 발을 놀리는 데 열중하게 되었다. 맥코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 많은 임무가 남은 것은 아니었지만 가장 본질적인 마무리가 레너드 맥코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뒤편에는 자신이 변절자로 고발한 제임스 커크도 포함되어 있으리라.


  물론 그것은 맥코이의 독단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출입이 제한되어 방해받을 일이 없고, 크게 넓지 않은 밀폐된 공간이어야 하며 곧바로 블랙홀을 봉인할 수 있는 장소가 화형장 밖에 없었다. 그리고 해리슨은 절대로 닥터를 구금해 불에 태우는 일은 상상하지 못할 것이므로 대신 커크가 곤욕을 치러줘야 했다. 맥코이는 늦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걸었다.


  아직 맥코이가 도착하지 못한 집행장에서, 두 손이 묶인 제임스 커크는 사제들이 떠미는 대로 위치를 이동했다. 묵직하게 맞물려 있는 석문 너머에서 넘실대고 있을 열기가 커크의 일직선의 틈을 거쳐 얼굴에 번졌다. 범죄자를 통제하고 있던 사제들이 곧 넘실댈 불길을 피해서 하나 둘씩 옆으로 물러났다. 처음부터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존 해리슨은 수상한 미동이라도 잡아낼 것 같은 눈빛으로 커크의 뒤를 차갑게 응시하고 있었다. 커크의 오른편에 선 사제가 해리슨을 대신해 말했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이 있다면 지금 할 기회를 주겠다.”


  신경을 분산시키고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커크가 시선을 돌려 존 해리슨을 마주했다. 해리슨이 미간을 좁혔다. 그는 범죄자의 기묘한 행동의 저의를 추측했지만, 커크가 해리슨의 안구를 인공적이라고 단정 짓고 있다는 감상을 떠올리고 있다는 속내를 파악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리슨은 서서히 불편해졌다.


  그 때 화형장의 문이 열렸다. 해리슨이 드물게 짜증스러운 몸짓으로 등 뒤를 확인했다. 레너드 맥코이가 안내인을 돌려보내고 있었다.


  “…닥터?”

  “사제장 빼고 다 나가.”

 

  해리슨이 맥코이의 앞을 가로막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사람 태울 불꽃 하나 피우는 데 구경꾼이 이렇게 많이 필요해? 내가 나가라고 했잖아. 빨리 나가.”


  점점 온도가 낮아지는 해리슨의 얼굴을 단호히 외면하고 맥코이는 직접 문을 붙잡고 사제들을 내보냈다. 커크는 맥코이가 들어옴에 안도했다. 단지 그가 레너드 맥코이이기 때문에 여태까지 그의 모든 행동을 묵인해 주었던 존 해리슨도 이번만큼은 총을 뽑았다. 서늘한 청록색 안구와 두렵도록 깊고 어두운 총구가 동시에 맥코이를 노렸다.


  “더 이상 집행을 방해했다간 당신의 권위를 맹신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겁니다.”


  커크가 더 크게 몸을 돌렸으나 맥코이는 그의 지원을 받을 생각이 없어보였다. 만일에라도 커크가 죄인들의 경계선을 넘어버리면 동시에 존 해리슨은 그를 쏴버릴 게 분명했다. 커크는 자신의 소중한 동료이자 누구보다 믿을 수 있는 은인이기에 빼놓을 수 없었고, 해리슨은 자신이 반드시 책임져야 하는 속죄의 대상이기에 맥코이는 둘 중 누구라도 다치지 않길 바랐다.


  “당신은 끝내 나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어.”


  맥코이는 일생에서 제일 중요한 뒷걸음질을 시작하고 있었으나, 존 해리슨은 여전히 지원을 요청해야 하는지 가늠하고 있을 뿐이었다. 해리슨과 차츰차츰 거리를 벌린 맥코이가 끝내 기계의 계기판에 닿았다. 며칠 전 그가 직접 설치해 놓았던 새로운 버튼이 옅게 빛나고 있었다. 


  “그러니 그냥 지금 말해줄게.”


  맥코이의 손이 버튼과 거리를 좁혀갔다.


  “당신을 새로운 출발지에 세워 놓고 싶어.”


  레너드 맥코이가 발산하고 있는 진중한 울림이 단추가 작동하면서 짧은 시험관 하나가 들어가면 적합할 구멍이 튀어나오는 소음을 가렸다. 해리슨의 총은 아직까지 평정을 유지했고, 커크는 얼음 같은 존 해리슨의 눈동자를 살피면서도 자신의 등 뒤의 뜨거운 느낌을 잊지 않았다. 


  “나는 처음부터 내 고통에만 집착했지. 므네모시아의 발단이 된 초기의 약물도 결국 내 트라우마를 없애기 위한 시도였으니까. 자이가이스트가 형성되고 므네모시아가 완벽히 만들어 졌을 무렵에도 나는 겨우 20대였어. 누구보다 개인적 성취에 목을 맬 시기지.” 


  해리슨은 그의 말을 끊지 않았다. 맥코이가 챙겨온 시약을 끼워 넣고 장치를 닫았다.


  “그 뒤로 나는 갑자기 모든 학자들의 우상이 됐고 모든 게 부담스러워졌어. 기념으로 가지라면서 나를 위한 교과서를 받았을 때 다섯 페이지를 못 넘겼어. 나는 마커스를 탓했지. 내 생각을 용케 읽고 므네모시아를 만들 수 있게 지원해 준 것도, 갑자기 나한테 리서치를 넘기고는 레너드 맥코이를 찬양하라고 시민들에게 명령과도 비슷한 짓을 한 사람이 마커스니까.”


  안타깝게도 해리슨은 맥코이의 말을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해리슨은 그를 쏘지는 못할망정 적어도 중앙 통제 센터로 넘겨야겠다고 결정 내렸다. 사실 그것조차 사제장에게 허락되는 건지는 미지수였지만, 해리슨은 이번만큼은 법의 방법론을 존중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불완전하긴 했지만 그 순간이 바로 그가 법전이 육화된 성직자의 정체성에서 탈피한 최초의 자유였다.


  “더 이상 당신이 여기 있는 걸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나가시죠.”


  해리슨의 총구가 그의 눈동자 대신 움직였다. 맥코이가 쌉쌀하게 웃었다.


  “아직 가장 중요한 말 못 했는데.”


  벽문 뒤에서 열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커크가 문에 몸을 붙였다. 해리슨은 맥코이가 기계를 작동시키는 레버를 잡고 있음을 보았다. 그것은 아래로 내려가야만 하는 레버였다. 해리슨은 반사적으로 맥코이의 의도를 쫓아보려다, 예고없이 들린 그의 진심에 멈칫했다.


  “지금 내가 처음으로 내 책임과 이타성을 발휘하는 중인데.”


  해리슨의 표정에 균열이 갔다. 이것이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인상을 풀었을지, 맥코이는 긴장을 풀려고 영양가 없는 상념을 마구잡이로 떠올렸다. 그 와중에 계기판에 어떻게든 끼워 넣는 게 급급했기 때문에 다소 조악하게 설치되었던 맥코이의 버튼은 위로 튕겨져 깨끗하게 빈 시험관을 내보냈다. 


  제일 먼저 커크가 눈을 감았다. 맥코이가 불길이 튀어오를 곳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해리슨은 둘 중 누구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맥코이와 커크의 공간과 유일하게 거리를 두고 있는 해리슨은 검은 소용돌이가 불길을 삼키는 장면을 목격했다. 두 사람에게는 그것을 두려워할 찰나도 없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약간의 여유가 있었다 한들 그들은 자이가이스트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걸 편안하게 받아들였으리라.


  존 해리슨의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Silent Revolution, Part 1 : Zeitgeist Fin.

and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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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5. 그는 소망한다He Wishes



  23세기에서 엔터프라이즈라는 배의 함장인 커크는 디스플레이 안에 함께 저장되어 있던 문서를 열어보았다. 공유 폴더를 통해서 레너드 맥코이와 제임스 커크가 공동으로 관리하던 파일이었다.


  제임스 커크의 혁명일지, 2525년 59일.

  아직 닥터에게 이 멋진 타이틀을 알려 주지는 않았지만, 일단 나부터 시험 삼아 써 본다. 그러니까 오늘이 언제냐면…. 닥터 레너드 맥코이에게 편지를 보내고 답장에 덧붙여 그의 초월적인 계획을 받고 이에 동참하기로 한 지 열흘이 지난 날이다. 리서치에 들어왔다고는 하지만 당장 그를 거들 수는 없었다. 연구원이 되는 일이야 2.5순위 정도로 미뤄두고 있던 내가 곧장 블랙홀을 생성해 보이고 말겠다는 닥터에게 도움을 줄 리가 만무하다. 어쩔 수 없이 공부를 해야겠다. 솔직히 나는 여전히 닥터가 추상적이었던 나의 질문에 이토록 성실하게 대답해 주었음을 믿을 수 없다. 내 눈으로 블랙홀을 보기 전까지는 실감하지 못할 지도 모르겠다. 


  다시 제임스 커크의 혁명일지, 2525년 62일.

  따지고 보니 이거 언젠가는 닥터와도 공유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막 써도 되는지 모르겠네. 내가 나름대로 추리해본 닥터의 속마음 등은 과감하게 생략하도록 하겠다. 이것만은 독파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섹션의 책들을 거의 다 끝마치고 있다. 블랙홀이라든가 평행 우주라든가 시간 여행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머리가 트이고 있는 듯하니, 조만간 닥터와 전문 용어들을 들먹이며 차원의 문을 열 장소를 논의해봐야겠다. 차원의 문이라니, 표현 한 번 끝내주네.  


  레너드 맥코이의 혁명일지, 2525년 65일.

  액상 형태, 아니면 작은 고체 형태의 촉매제를 연구 중이다. 휴대도 간편하고 숨기기도 쉬워야 한다. 기계 장치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불가능하니까 어딘가에 원래 설치되어 있던 것에 필요한 부품을 덧붙이는 형식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사제장을 통해서 마커스의 므네모시아를 중단한 이후의 동태를 파악할 수 없어진 이후로 오히려 이 작업의 속도에 불이 붙었다. 사실 그가 부작용이라고 말할 것이야 사람들이 예술을 감상할 안목을 되찾는 게 다일 테니까. 

  추신 : 제임스 커크에게, 도대체 나에 대해 얼마나 괴상망측한 생각을 하고 있으면 여기에 제대로 적지도 못해? 조만간 추궁할 것이니 그렇게 알 것. 


  제임스 커크는 오늘 혁명 일지를 생략하겠음. 닥터 무서워요.


  커크는 남겨진 글만 봐도 파일 속의 제임스 커크와 자신이 닮은 점이 참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커크는 이따금씩 웃으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레너드 맥코이 혁명일지, 2525년 70일.

  커크와의 상의 끝에 발탁된 장소는 화형장이다. 리서치가 아닌 생추어리에 마련된 그 곳에 잠입하는 일은 내 몫이다. 개량 작업에 더욱 힘써야겠다. 커크가 꿈에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은 무시무시한 사제장에게 잡혀가야 할 거라며 옆에서 울상을 짓고 있다. 이제 커크를 설득시킬 거리가 하나 더 남았는데.  

  

  제임스 커크도 혁명일지, 같은 날짜.

  마커스는 여러모로 골칫덩이에 나쁜 놈이다. 하필이면 닥터에게 온갖 항목에 적용될 수 있는 면책특권을 줘서는 그를 사제장의 영역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는가? 덕분에 내가 그 놈 손에 끌려가게 생겼다. 무서운데. 닥터가 옆에서 뭐라고 중얼중얼. 닥터는 어쨌든 그와 얼굴 맞댈 일이 많아 나름 면역이라도 기르신 모양이지만 반역자도 선량한 시민도 사제장의 검은 코트가 무서운 건 똑같다. 그리고 닥터, 일지 봐서 미안해요. 까짓거 블랙홀 탐험도 찬성한 판에 뭐가 더 어렵겠어요? 언제든지 말해요.


  이후 촘촘한 간격으로 이어진 일지들은 커크가 대부분 이해할 수 없는 과학적이고 학문적인 내용과 정리가 주류여서, 그는 빠르게 디스플레이를 넘겼다. 길게 화면을 채우고 있던 검은 글자들이 사라지고 밑바닥에 한 줄이 남았다.

 

  레너드 맥코이 혁명일지, 2525년 97일. 

  존 해리슨에게 진실을 말했다. 그와 함께한다.  




* * *




  커크는 이젠 자신의 선임이기도 한 맥코이에게 또 다시 반론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상상 외로 막무가내시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사제장한테 확답 받은 거 아니죠? 계획의 상세 사항을 말해줬을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이제 해리슨을 보면서 무슨 생각 하는 줄 알아?”


  갑자기 화제가 달라져 커크가 눈을 멀뚱히 떴다. 


  “예전에는 뭐 저런 놈이 있나 싶었지. 어쩌다가 지나가는 헤드라인의 소재에서 그치다가 네 편지 받은 이후로 이것저것 알아봤는데 행적이 가관인거야. 합법적으로 잔혹극을 벌이고 다니는 놈이었잖아? 내가 사제장의 므네모시아를 한 번 뺏은 이유도 너를 내가 제대로 이용해보겠다는 심보였다고. 지금도 참 저런 놈은 세상에 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해. 태어나면서부터 무언가를 감상하고 느끼는 능력을 잃어버린 셈이잖아. 세상의 어휘 중 반은 그에게 쓸모가 없을 거야.”


  커크는 특별한 교육을 받으며 자랐기에 완벽히 공감하지 못하고, 맥코이는 마커스의 므네모시아를 입에 댄 적이 없었기 때문에 존 해리슨의 입장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엑소시즘 같은 거 못 해. 그러니까 그에게 새로운 출발점을 줄 거야. 내 첫 번째 희생자에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어차피 혁명의 주체는 레너드 맥코이였다. 커크는 존 해리슨을 개입시키는 데에 찬성했다.




* * *




  “…다시는 안 찾아올 것처럼 나가버리더니.”

  “그런 말을 한 적은 없습니다.”


  맥코이는 주방 쪽에서 커피를 젓고 있었다. 사실 그 안에는 설탕이나 우유가 들어가지 않아 휘저을 이유는 없었다. 


  “이 임무를 포기하겠다는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주장에 무리가 없다면 순조롭게 수리되겠고 더 이상 리서치에서 당신이 내 얼굴을 볼 일은 없을 겁니다. 첫 번째로는 이걸 통보하려고 왔고, 다음으로는.”


  쓱 주변 풍경을 둘러보고 시집이 사라진 걸 파악한 해리슨이 여전히 커피를 숟가락으로 젓고 있는 맥코이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 책은 생추어리가 보관해야 하니 넘기십시오.”


  맥코이는 딴소리를 했다.


  “그 때 왜 굳이 시를 읽었지? 이태껏 한 번도 그런 적 없었을 텐데.”

  “…원한다면 어디서 책을 얻었는지 추궁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소지할 수 없는 물건을 처리하는 건 생추어리의 소관입니다.”

  “그것마저도 궁금해 하지 않는 거야? 당신은 왜 내가 당신이 평생 알 일도 거의 없을 이야기들을 해 줬는지, 그 이유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어.”


  실질적으로는 12년을 육체 안에서 왕복운동하고 있던 존 해리슨의 혈액 속 므네모시아가 약간이라도 희석되었다면, 해리슨은 당신의 사정을 고려할 형편이 아니라는 냉소적이지만 진실한 말을 할 수 있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해리슨은 그저 책을 넘기라고 눈으로 요청하고 있는 게 전부였다. 자이가이스트의 사제장을 구원하기에 맥코이의 자각은 너무도 늦었다. 


  맥코이는 종이뭉치들로 가리고 있던 시집을 빼냈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이름은 전과 같이 빛났다. 맥코이는 시집을 집으면서 의도적으로 페이지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엄지로 책등을 받치는 방식을 취했지만, 해리슨은 다섯 손가락으로 냉정하게 책을 덮었다. 맥코이가 나직이 말했다. 


  “그거, 제임스 커크가 준 거야.”


  해리슨이 끊어지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리서치에서 일해. 그를 찾아가.”


  존재 자체가 법전이고 영장과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사제장인지라, 범죄자가 아래에 있다면 곧바로 잡아 성지로 끌고 갈 수도 있는 인물이 존 해리슨이었다. 해리슨이 평소보다 좀 더 길게 맥코이를 바라보았지만 내 집에서 소란 피우지 말고 나중에 해결하라는 말은 그의 입에서 나오지 않았다. 맥코이는 주방으로 돌아가 커피를 저었다.


  해리슨은 오전에도 오후에도 시간을 가리지 않고 맥코이의 방으로 침입했었다. 그 나날들 중에서 해리슨은 맥코이가 커피를 끓인 모습을 처음 보았다. 달콤함은 전혀 섞이지 않은 씁쓸한 향이 맥코이가 커피를 휘젓는 움직임에 맞춰 투명하게 피어올랐다. 해리슨은 과거를 조합하는 것에서 그쳤지만 사실 맥코이는 커피를 잘 마시지 않았다.


  해리슨은 인사말도 없이 정중한 동작만 보이고 사라졌다. 맥코이는 해리슨이 자신의 명분을 묻기를 기다리다가 때를 놓쳐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맥코이는 혼자서 웃다가 컵을 비웠다. 

  

  그럼에도 그가 존 해리슨을 자신의 블랙홀에 반드시 초대하려고 하는 것은, 맥코이만은 어느 쪽에게 책임을 묻지도 못하고 제 자신의 혼란을 하나의 역사처럼 묻어 놓으려는 해리슨을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커크는 맥코이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읽고 방으로 들어갔다. 중요한 연락은 다 이루어졌다. 커크는 방문을 열어두고 책상 앞에 앉아 플레이어의 전원을 켰다. 그는 자신에게 익숙한 음악을 들었다.


  한 토막의 시간이 지나고, 커크는 음악을 짓누르고 현관문이 뜯기는 소리에 놀랐다가 곧 호흡을 가다듬었다. 커크는 남은 재생 시간을 확인했다. 초인종 한 번 누르는 법도 없이 입구를 부수고 들어오는 무리들이 익히 짐작이 가능한지라 돌아볼 필요도 없었으니, 커크는 조금 더 음악을 즐기기로 했다. 커크가 이어폰의 하얀 줄을 붙잡았다. 


  이번에는 현관 쪽이 아니라 방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커크는 혼자서 숫자를 세고 있었다. 음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바닥을 밟는 발걸음은 진중하고 깔끔하고, 금욕주의자를 수식할 수 있는 온갖 낱말을 다 가져다 붙일 수 있을 듯했다. 커크는 줄을 아래로 내리면서 이어폰을 빼냈다. 동시에 존 해리슨의 총이 커크의 관자놀이에 닿았다.


  “심문을 위해 생추어리로 연행하겠다.”


  커크는 대답하지 않고 막 꺼진 플레이어를 어깨 너머로 넘겼다. 무척 낡았지만 72분짜리 CD를 재생시킬 힘은 남아 있는 기기였다. 커크의 아버지가 그를 교육시킬 때 사용했을 때만 해도 그것은 붉은 낙인이 찍히지 않았었다. 


  “다른 금지 품목도 보유하고 있나?”


  플레이어에 연결되어 있던 이어폰이 바닥에 길게 끌렸다. 해리슨이 줄을 끌어 당겨 플레이어 위에 모았다. 


  “2523년 이전에는 그걸로 베토벤을 듣는 게 아무렇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그건 아버지가 나한테 남긴 물건 중 하나에요. 내가 보관하는 게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커크가 등을 돌려 해리슨을 바라보았다. 사제 몇몇까지 그의 방 안에 들어와 있었다. 해리슨이 지시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부지런히 커크의 방을 뒤집어놓기 시작했다.


  “레너드 맥코이에게 준 물건도 그와 비슷한 이유로 가지고 있었나?”


  사제장 앞에서 커크는 감히 씩 웃었다. 

  “그냥 연행하시죠.”


  커크가 손목을 붙여 해리슨에게 내밀었다. 해리슨의 손가락 마디에 걸린 수갑이 찰랑이면서 한 바퀴를 돌다 단단히 자세를 고치고 커크의 손목을 물었다. 그는 절차대로 커크의 죄목을 밝혔다.


  “소유가 금지된 물품들로 부당한 감정이 자극될 수 있는 행위를 저지른 바, 법률에 의거하여….”

  “그는 천국의 옷감을 소망하니.”


  해리슨의 말을 끊고 커크가 중얼거렸다. 해리슨은 순간 완전히 잠겨 더 이상의 손길이 필요 없는 수갑을 놓지 못했다.

 

  “그 말만 놓고 보면 닥터와 어울려요. 그도 그만큼 굉장하고 절실한 것을 바랐거든요.”

  “수색을 마쳤으나 더 압수할 것은 없습니다.”

  “당신이 그걸 밟고 나가면 되는 거예요.”


  정 반대의 성질을 가진 말들이 해리슨의 양쪽 귀로 흘러들었다. 해리슨은 어느 쪽에도 대답하지 않고 커크에게 나가라면서 고갯짓했다. 성직자들이 아무렇게나 엎어 놓고 넘어뜨린 가구의 일부들을 피하면서 커크는 천천히 걸었다. 사제장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의 뒤에서 총을 겨누었다. 


  그리고 존 해리슨은 걸으면서 자신의 발아래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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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과학자의 꿈The Dream of Scientist



  “그러고 보니 이태까지 그걸 물어본 적이 없네.”


  제임스 커크가 자신만의 여행과 더불어 레너드 맥코이와의 비밀스러운 만남을 마치고 리서치에 들어온 날이었다. 약품 한 번 묻지 않은 깨끗한 가운을 벗어 팔에 걸친 커크가 눈썹을 올리며 닥터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넌 어떻게 용기를 낸 거야? 어쩌다 므네모시아를 쉬게 되어서 안 사실들을 분석하고,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 마침내는 나한테 편지를 보낼 수 있는 용기를 말이야.”

  “되게 대단한 것처럼 말씀하시네. 저한테는 당연한 일이었어요.”

 

  자이가이스트의 닥터와 친분을 맺은 덕분에 커크는 요란한 신고식 대신 고요한 밤에 리서치의 옥상 정원을 누릴 수 있는 행운을 얻었다. 커크는 다리를 모아 앞뒤로 흔들기도 했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하늘을 보기도 했다. 


  “저에겐 좋아하는 화가가 있어요.”


  맥코이는 검은 하늘에도 기죽지 않는 커크의 파란 눈동자를 응시했다.


  “작곡가도 있고 시인, 소설가도 있어요. 연유야 어찌되었든 어렸을 때부터 그런 분야에 익숙했던 탓이죠. 요새는 저 같은 사람 없을 걸요? 피부 껍데기만을 걸치고 사람들이 모든 것에 무관심해지고 있으니까.”


  그 말에 맥코이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굴렸다. 자신이 저서를 독파한 생물학자의 이름이라든가 훌륭하다고 평가하는 의사들은 있어도, 즐겨 듣는 음악가나 유독 그 작가의 책을 모은다거나 하는 경우는 하나도 없었다.


  “그들에겐 너무 낯선 것들이 저에겐 당연해요. 이 일은 제가 알던 땅을 복원하는 작업이랄까요, 그래서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요. 누구에게나 자신이 사는 세상은 소중하지 않겠어요?”


  표현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맥코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닥터는요?”


  가볍고 부드러운 어투로 이었지만 커크의 표정은 그만큼 들떠있지 않았다. 


  “솔직히 그 때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닥터는 내 편지를 너무도 빨리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였고 처음 만난 자리에서 놀라운 비밀을 공유해주셨죠. 마치 이러한 기회를 기다린 사람처럼.”


  리서치에 그의 책상을 놓게 되면서 후배가 되어버린 커크였지만, 맥코이는 어느 면모에서는 자신보다 뛰어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제임스 커크가 레너드 맥코이에게 현실적인 계몽의 기회를 준 것을 순순히 인정했다. 언제나 밖으로 튀어나오기 전 꽉 깨물린 입술에 가로막혔던 그의 진심이 찬찬히 흩어졌다.


  “내가 원하던 것을 되찾아야 했거든.”




* * *




  “…당신이 이렇게 골치 아픈 부류일 줄은 몰랐습니다.”

  “레너드 맥코이의 입에 강제로 약을 넣을 수 있게 명령해 달라고 마커스한테 부탁하면 되잖아.”

  “나는 왜 당신이 당신의 발명품을 피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리슨이 오늘도 보란 듯이 약병들이 늘어서 있는 선반에 잠시 눈길을 두었다. 사제들을 접한 경험이 풍부하지는 않았지만 존 해리슨에게서는 유독 인공적인 냄새가 났다. 맥코이는 어떠한 욕망이 살려낸 조각상이 움직이는 것처럼 표정 없이 자신이 남겨둔 므네모시아를 손에 잡는 사제장을 보았다. 그의 큰 손은 무엇을 쥐어도 그것을 삼켜버리듯 흔적도 없이 덮어버렸다. 


  “딱 하루만 당신이 므네모시아를 중단한다면.”


  바람에도 휘날리지 않을 것 같은 모래처럼 무겁고 건조하게 정지하고 있던 해리슨이 눈동자를 돌렸다.


  “당신 앞에서 약을 삼킬게.”

 

  빠르게 두 문장을 조합한 해리슨이 미간을 좁혔다.


  “…그걸 거래라고 내거는 겁니까, 지금?”

  “마커스한테 언제까지고 레너드 맥코이 앞에서 가로막혔다는 보고서를 올리기엔 사제장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아? 사실 하루 쉰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겠어?”


  해리슨을 외면하기 위해 방 안 곳곳에 흩어 놓은 책을 일단 무시하고 맥코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슨의 뒤로 므네모시아가 장식품처럼 줄을 짓고 있었다. 사제장은 그 자신의 자존심이 아닌 다른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 번도 므네모시아를 투약한 일이 없는 닥터에게 단 한 번 그 경이로운 약물을 경험할 기회를 준다면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 실마리가 잡힐 지도 몰랐다.  


  “혈액 검사만 하면 당신이 나와의 약속을 지켰는지 아닌지 알 수 있으니까. 그건 사실 사제장이 제일 잘 알고 있겠지만.”


  해리슨이 검은 유니폼에서 은색 케이스를 꺼냈다. 그는 가볍게 엄지손가락을 튕겨 케이스 뚜껑을 열고 그것이 보관하고 있는 내용물을 맥코이에게 보여주었다. 사제장의 빈틈없는 성미만큼이나 깔끔하게 정렬된 므네모시아가 하얀 빛을 내고 있었다. 해리슨이 케이스를 맥코이에게 넘겼다.


  “내 앞에서.”


  맥코이가 케이스를 받고 뚜껑을 닫았다. 사제장의 영광스러운 이름이라든가 프리스트의 상징이라도 새겨져 있을 줄 알았던 표면은 기이할 정도로 깨끗했다. 맥코이가 사제장의 눈에 대고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오전에 오겠습니다.”


  해리슨은 순순히 맥코이의 방을 떠났다. 그의 사고는 놀랍도록 민첩해서 자이가이스트의 유일한 닥터조차 따라가기 힘든 경우가 종종 있었지만, 맥코이로서도 자신의 계획을 순조롭게 시작한 셈이었으니 그는 만족했다. 


  해리슨이 최상층을 벗어나자마자 맥코이는 약병 하나를 모두 비우고 안에 외양은 같지만 마커스가 임의로 손대지 않은 순수한 므네모시아를 채웠다. 맥코이는 속을 바꾼 약병을 헷갈리지 않게 선반의 맨 앞에 두고 살짝 다른 것들과 거리를 달리 했다. 


  맥코이는 사제장의 므네모시아를 잠시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아직 그는 사제장을 낡은 다트 판에 끊임없이 꽂히는 바늘과 같이 여기고 있을 뿐, 존 해리슨에게 자신의 호의를 발휘할 정당성을 찾지 못했다. 맥코이는 책상에 케이스를 방치해 두고 일지를 작성하는 일에 집중했다.




* * *




  핀셋이 세포질을 섬세하게 들어 올리듯 맥코이의 두 손가락이 므네모시아를 집어 명백히 해리슨의 앞에 선보였다. 해리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맥코이가 므네모시아를 입 안으로 집어넣은 뒤, 목젖까지 움직여 약을 삼키는 장면을 주시했다. 곧바로 캡슐을 뱉어 내는 행위를 방지하기 위해 해리슨은 그 이후로도 약 5분 간 눈동자를 날카롭게 빛내고 있었다. 


  맥코이가 눈썹과 어깨를 동시에 으쓱거렸다. 해리슨이 코트의 소매를 걷었다. 무기로서 법을 집행하는 인물의 피부는 의외롭게도 흉터의 흔적도 없는 창백한 빛깔이었다. 맥코이는 잠시 해리슨의 팔을 보다가 주사기를 가져왔다. 사제장의 피라고 해서 위험한 독극물처럼 파랗거나 특이한 색을 띠지는 않았다. 오래간만에 의사의 손길이 조심스레 혈액이 들어찬 주사기를 회수했다.


  “오늘 방문은 여기까지로 마치겠습니다.”

  “중요한 임무라도 있나봐?”

  “사제들이 압수해야 할 회화들을 훔쳐간 집단들의 아지트에 대한 정보가 입수되어 확인해야 합니다.”


  맥코이는 순간 제임스 커크의 편지를 떠올렸다. 특이한 부문에서 예리했던 청년이 위대한 닥터를 계몽시키면서 언급했던 정보가 머릿속에서 커크의 설명과 결합되었다. 맥코이는 지나가듯 물었다. 


  “…그런 걸 사제들이 해?”

  “모든 예술품들이 평화와 번영을 그린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법전이라도 읽어봐야겠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세상에 불법으로 낙인찍힌 것들이 너무나 많네. 설마 회화만 잡겠어?”


  본래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드문 사제장의 얼굴은 이번에도 작은 흔들림조차 표출하지 않았다.


  “생추어리에 와서 자료를 열람하고 싶으시다면 직접 안내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표정은 나를 감옥으로 연행하고 싶다는데. 맥코이는 무심결에 떠오른 감상이 행여 입 밖으로 빠져나갈까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맥코이가 챙겨준 거즈로 바늘 자국을 몇 번 문지르던 해리슨이 거즈를 버릴 곳을 찾아 눈을 굴렸다. 므네모시아를 버린 게 발각될까봐 맥코이는 얼른 그가 사용한 거즈를 뺏듯이 거둬갔다. 


  발신기가 울리는 소리가 났다. 닥터가 어딘가로 호출 받을 만한 일은 없었으므로 그것은 해리슨을 향한 신호였다. 그는 침묵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섰다. 검은 옷을 잠시 거쳤던 그의 손이 익숙하게 총을 점검하는 모습이 비죽 튀어나와 맥코이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가 습관처럼 익은 동작으로나마 허리춤을 뒤적이는 것을 보지 못해서, 해리슨이 비무장 상태라고 착각하고 있었던 맥코이가 눈을 껌뻑였다. 해리슨은 맥코이에겐 한 번도 총을 들이댄 적이 없었다.




* * *




  실험 도구들을 늘어놓기 위하여 최대한 정리된 책상의 위를 과학자이자 의사인 남자의 손이 휘저었다. 그는 주사기에서 사제장의 혈액을 적당량만 빼내고 나머지는 빈 시험관에 보관한 뒤 현미경과 원심 분리기 등을 준비했다.


  사제 일행이 도착한 곳은 일반 공장과 같은 외형을 갖추고 있었다. 사제 하나가 벽돌담 대신 철조망으로 가려져 있는 입구를 직사각형의 장비로 꼼꼼히 훑었다. 장치가 은밀하게 흘리는 전자파가 철조망 주변을 이중으로 덮고 있었던 감시 시스템을 무력화시켰다. 문은 안전하게 열렸고 적외선 고글을 낀 성직자들이 발소리를 죽이며 앞장섰다. 뒤편에 선 사제장이 먼저 전력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샘플이 들어 있는 시험관이 타원형으로 뚫린 아이보리색 기계 안으로 쏙 들어갔다. 맥코이가 타이머를 설정하고 기계가 완수해야 할 작업의 종류를 입력했다. 십 분 정도가 소요될 것 같았다.


  공장 주변을 크게 돈 팀이 사제장의 명령대로 전력 장치를 찾아낸 뒤 통신을 보냈다. 그들은 해리슨이 지시할 때까지 자리를 지키기로 했다. 해리슨은 그 때까지 장착하지 않던 고글을 검지에 걸치면서 총을 굳건히 잡았다. 사제들의 공무를 방해하고 저항하는 죄목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경우에 포함되었다. 사제장이 눈짓하자 선두에 선 남자들이 입구를 부쉈다.


  해리슨은 안으로 들어선 순간 죄인들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 모조리 외웠다. 검은색 고글이 해리슨의 눈을 가렸다. 전력을 끊어. 밖에 있던 사제들이 전선을 뽑아버려 단숨에 공장의 내부가 어두워지자, 해리슨은 자신이 파악한 반동분자들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그의 팔은 복잡하게 엇갈렸지만 한 번도 타깃을 놓치지 않았다. 앞서가는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보호 수트를 입은 사제들이 옆에 붙었다.


  회전하는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양옆으로 움직여가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맥코이가 고개를 기울여 원심 분리기를 쳐다보았다. 초 단위로 상승하는 숫자가 점점 예약된 시간을 채워갔다. 프린터는 아직 노란 빛을 내며 대기 중이었다.


  난간에 있던 반란자들이 거꾸로 떨어지면서 종이 상자가 찌그러지고 위장을 위해 여기저기 세워 두었던 물건들이 덩달아 엎어졌다. 총성을 비롯하여 온갖 잡음이 공간을 가득 메웠다. 해리슨이 다시 통신기를 켜자 눈치 빠른 대원들이 내부에 다시 전력을 공급했다. 용케도 성직자들의 총알을 피해가던 청년이 홀로 남아 부들부들 떨면서 소총을 품에 안았다. 사제장은 애써 그를 처형하려 하지 않고 공장을 자세히 둘러보았다. 청년은 존 해리슨의 사방을 맡고 있던 사제 한 명에 의해 사살되었다. 남은 사제들이 자연스럽게 범죄 집단이 숨긴 미술품을 찾으러 흩어졌다. 


  딩동. 맥코이에겐 반가운 소리였다. 잠겨 있던 원심 분리기가 살며시 열리면서 연달아 프린터가 작동했다. 종이를 토너 쪽으로 끌어당긴 프린터가 존 해리슨의 혈액을 분석한 결과를 인쇄해나갔다. 맥코이가 주섬주섬 움직여 종이를 뽑았다. 잠잠하던 그의 눈이 차츰차츰 커지더니, 종국에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인쇄된 데이터를 다시 읽었다.


  공장에 있는 모든 방과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 그들은 은폐되어 있던 유화와 판화들을 적발해냈다. 양이 꽤 많았다. 고글을 잠시 이마 위로 들어 올린 사제가 해리슨에게 물었다. 옮길까요? 해리슨은 대답했다. 태워버리는 게 낫겠군. 


  므네모시아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투약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빠른 시간 내에 체내 안에서 모조리 분해되기 때문이었다. 맥코이가 해리슨의 므네모시아를 갖고 있었고, 존 해리슨이 협약을 어기면서까지 약을 새로 받아 복용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맥코이는 그의 혈액 안에 남아 있는 므네모시아의 성분을 보면서 어떻게 이것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존경하는 리더가 불쾌하지 않도록 몇몇이 나서서 해리슨을 공장 외부로 인도했다. 그가 탑승하고 왔던 차량에 가까워지자 창문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해리슨은 차체에 등을 대고 탄창을 갈아 끼웠다. 그는 대개 휴대가 편리한 핸드건 종류를 선호했다. 엄숙하고 훈련 받은 걸음걸이로 해리슨의 성직자들이 공장을 빠져나왔다.


  맥코이는 여전히 데이터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가 존 해리슨에게 다소 우스운 제안을 걸었던 것은, 마커스가 조작한 므네모시아의 투약을 일시적으로 중단했을 때의 변화를 알아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닥터가 처음 실험 대상으로 삼은 사제장은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것처럼, 므네모시아를 혈액 속에 품고 있었다.




Chapter 4-2




  커크가 옆구리에 끼고 왔던 인쇄물들을 차근차근 펼쳐 놓으면서 읊었다. 맥코이는 며칠 전 그에게 사제장에 대한 거라면 뭐든지 긁어모아 오라는 부탁을 한 적이 있었다.


  “존 프레스턴 해리슨, 2500년에 런던에서 출생했고 전쟁으로 가족들을 모두 잃었다고 하는군요. 미성년자 포용 정책으로 자이가이스트에 들어왔는데 입양이 된 것 같지는 않아요. 위탁 시설에 머물렀다는 흔적이 남아 있고 그 다음에는…. 18살에 대학에 입학했다는군요. 대학 졸업부터 사제장이 되기 직전까지의 행적은 거의 텅 비어있고 사제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는, 뭐 알려진 대로죠.”


  커크가 두 손을 펼쳐 보였다.


  “제가 사제장에 대해서 알아낸 건 여기까지예요.”

  “…나랑 다른 게 없네.”


  맥코이가 중얼거리자 커크는 의아하다는 듯이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요? 그래도 저보단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으실 텐데. 자이가이스트에서 유일하게 마커스와 비견할 만한 사람이 닥터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마커스랑 똑같은 사람인 건 아니지.”


  맥코이가 문득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마커스만 볼 수 있는 자료도 있어.”


  맥코이는 차분하게 떠올렸다. 과학자들에겐 신적인 존재로 추앙받는 레너드 맥코이가 자신의 신분증을 들이 밀어도 출입할 수 없는 곳이 있다면, 마커스가 지배하는 중앙 통제 센터 중에서도 푯말조차 붙어 있지 않은 최하층이었다. 맥코이의 표정이 갈수록 진중해지자 커크가 자신의 머리를 들이밀면서 의문을 표했다.


  “사제장의 과거가 그렇게 중요하다고요?”

  “내가 아는 거라고는 므네모시아가 그의 몸에서는 제대로 분해되지 않았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맥코이는 커크가 가져온 자료들을 손끝으로 쓸었다. 듬성듬성 비어 있는 칸들이 맘에 걸렸다.


  “나는 내가 망쳐버린 세계도 어느 정도 수습할 책임이 있어. 존 해리슨에게, 그 일과 관련된 뭔가가 있는 지도 몰라.”

  “…그러면 당신도 못 들어가는 곳에 들어가서, 어떻게 해리슨에 대해서 캐낼 생각인데요?”

  “마커스가 좋아하는 걸 갖다 주면 되지 않을까?”


  커크가 눈을 깜빡거렸다. 맥코이가 또 네 머리를 빌려야 할 것 같다면서 커크를 끌어당기더니 자신의 계획을 전달했다. 모종의 이유로 리서치에 입성했지만 연구원을 천직으로 삼을 만한 성미는 못 되는 커크는, 앞으로 자신이 리서치에 엉덩이를 붙여야 할 날을 가늠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 * *




  오늘은 무슨 연유인지 해리슨이 잠금장치를 해제하기도 전에 맥코이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맥코이의 머리는 호흡기가 달린 단단한 헬멧으로 가려져 있었다.


  “당분간 여기 오지 않는 게 좋을 걸. 지금 내 방에 온갖 유해 물질과 인화성 물질들이 떠다녀.”


  해리슨이 가만히 눈꺼풀을 깜박였다.


  “보호구 없이는 못 와. 아니, 그냥 그런 거 챙겨오지 말고 당분간 좀 쉬면 안 돼? 설마 사제장이 할 일이 나 감시하는 것만 있을 리는 없잖아. 약 잘 챙겨 먹고 있을 테니까 나중에 봐.”


  맥코이가 얼른 문을 닫았다. 큰 소리로 서 있지 말라고 빨리 가라고 소리쳐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맥코이는 평소의 움직임도 고요한 사제장의 발소리를 듣기 위해서 정신을 바짝 집중했다.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해리슨은 확실히 돌아갔다. 


  “…둘러대는 게 수준급이시네.”


  커크가 멍하게 평했다. 맥코이가 얼른 헬멧을 벗고 후 하고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이런 식으로도 사제장을 다룰 수 있는 내가 좀 자랑스럽긴 해. 이제 잔소리 그만 하고 성과나 내시지.”

  “후배 연구원을 이렇게 착취하는 법이 어딨어요?”

  “너도 거들어야지!”


  커크는 투덜거리면서도 곳곳에 널브러진 패드며 모니터에 다양한 자료들을 띄워 놓고 생각에 몰두했다. 맥코이는 아예 공중에 홀로그램을 띄워 놓고 수없이 조작하면서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커크는 가끔 오색으로 빛나는 뉴런의 입체 영상을 훔쳐봤다. 맥코이는 정통 과학자에 가까웠지만, 오랫동안 자이가이스트에 속해 있으면서 마커스의 취향을 잘 아는 영리한 박사이기도 했다.


  “근데 궁금한 게 있어요.”

  “응?”

  “…아무리 유일무이한 닥터라고 해도 말이죠, 인간의 지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단서를 이렇게 빨리 발견하는 일이 가능해요?”


  맥코이가 피식 웃었다.


  “제 아무리 잘난 천재라도 그건 불가능하지. 사실 평생 마커스한테 알려주지 않으려고 했던 거야. 이렇게 써먹게 되네.”


  대답을 듣고 리서치의 연구원은 한참 닥터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전공 이외의 분야에서는 다소 매끄럽지 못한 그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커크가 다시 펜을 돌리면서 맥코이가 내준 과제를 해결하려 애썼다.




* * *




  마커스는 맥코이가 휙 던지듯 책상에 내려놓는 파일에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던졌다. 마커스는 근래에 그에게 아무 것도 의뢰하지 않았다. 게다가 맥코이의 표정이 억울하다거나 언짢다거나 경직되어 있지도 않아서, 마커스는 머릿속에 그려지는 물음표들을 지우지 못하고 일단 파일을 열었다. 적어도 그것을 봐야 맥코이가 말문을 틀 것 같았다.


  “당신이 그걸 받고 나에게 줄 수 있는 게 있어요.”


  닥터의 자신감에 찬 발언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던 마커스는 갈수록 눈을 좁히거나 크게 뜨면서 내용을 읽었다. 특정한 뉴런만을 활성화시켜 성취될 수 있는 인간의 물리적 발전이 흥미롭게 적혀 있었다. 들뜬 기분으로 종이를 넘기던 마커스는 갑자기 뚝 끊겨버린 보고서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맥코이가 두 번째 파일을 내보였다.


  “법이 날 비껴가도록 만들었으니, 이 정도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뭘 원하는데 그러나?”


  맥코이가 파일을 반쯤 책상에 걸쳤다.


  “당신의 성역을 열어요.”




* * * 




  자이가이스트의 과학을 지배하는 레너드 맥코이가 유일하게 모르는 실험은 실제로 존재했다. 그것은 존 해리슨에 관한 것이었다.


  금고가 끝없이 증식한 것처럼 사방이 잠긴 문으로 감싸여 있는 그 곳은 마커스의 가장 지독한 비밀을 보관하고 있다는 가치와 분명 어울렸다. 맥코이는 그곳에서 주인 몰래, 마커스가 예상할 수 없는 기록을 열람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첫 번째로 존 해리슨의 출생증명서를 보고 있었다.


  그것은 보통의 출생증명서가 갖추는 형태와는 전혀 달랐다. 존 해리슨은 법적 보호자의 유전자를 이어받지 않았으며 의사들의 정교한 손짓에 의해 조합된 태아였다. 그의 출생증명서는 그를 구성하는 형질이 얼마나 철저한 검사를 받았는지 빼곡하게 적힌 서류들과 붙어 있었다. 맥코이는 제법 규모 있는 도시의 통제 센터를 감독하고 있는 인물들이 해리슨의 부모로 나와 있는 걸 확인했다.


  맥코이는 이어지는 내용을 가만히 볼 수가 없었다. 그는 몇 번이고 경악에 찬 숨을 뱉으면서 자주 얼어붙었다. 알렉산더 마커스에게 아이에 대한 모든 권리를 넘긴다는 서약서 다음으로는 해리슨에게 가해진 실험 자료가 뒤따랐다. 이미 인공적으로 짜 맞춰진 세포는 인큐베이터 안에서 자라나며 몇 가지 조정 작업을 거치더니, 급기야는 액상 형태의 므네모시아를 주입 당했다. 마커스가 인류를 입맛대로 고치기 위해 인간의 감성 자체를 말살하도록 개조된 므네모시아였다. 보고서의 끝자락을 잡고 간신히 다음 장을 넘기고 있던 맥코이의 손가락이 완전히 움직임을 멈춘 것은 그 무렵이었다. 


  마커스는 아버지라는 자신의 별명에 들러붙어 있던 온화한 이미지를 퇴색시키기 위해 10년이라는 시간을 소모하면서도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꾸밈없이 드러난 존 해리슨의 흔적은 마커스가 오래 전부터 자신이 휘두를 수 있는 사제 집단을 꿈꿔왔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존 해리슨은 2513년에도 신생아에 가까운 상태였으며 자이가이스트와 함께 성장했고, 마커스의 재산 노릇을 톡톡히 치르면서 예정대로 사제들의 리더가 되었다. 그가 사춘기에 해당하는 시기를 거칠 무렵에 시행되었던 정밀 검사와 훈련이 고스란히 맥코이의 동공 안으로 들어왔다.


  존 해리슨은 정말로 인간의 일부를 억누르는 약물과 시작을 함께 했던 것이었다. 그것은 레너드 맥코이가 아니라 알렉산더 마커스의 므네모시아였다. 끝으로 치달아가는 보고서의 페이지 중 하나가 그의 혈액에 있는 므네모시아 성분이 중화되지 않는 이유를 지나치게 이른 시기에 주입한 탓으로 짚고 있었다. 


  맥코이가 고개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감당할 수 없는 현기증이 밀려왔다. 그는 단순히 나약하게 죽어가던 부모의 모습과 병사들의 무서운 표정을 잊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소망이 변질되고 이용된 끝에 인류의 모든 반쪽과, 한 존재를 근원부터 더럽혔다는 현실이 레너드 맥코이의 뇌를 비틀고 쥐어짰다. 감은 맥코이의 눈꼬리가 떨렸다.


  안으로 들어올 때 받았던 시계가 삐빅 하고 울렸다. 곧 그가 나가야 한다는 의미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정말로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당장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맥코이는 존 해리슨의 기록에 손을 올리고 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그것은 그가 눈물을 밀어내려는 노력의 일환처럼 보였다. 그러나 레너드 맥코이에게 지금, 한낱 눈물을 참는 것보다 더 숙명적인 목표가 떨어졌다.  




Chapter 4-3




  맥코이는 아직도 존 해리슨의 은색 보관함을 갖고 있었다. 그의 므네모시아를 넘겨받고 나서 위험한 실험을 핑계로 그를 방 안으로 들여보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케이스가 없다는 이유로 약을 챙겨먹는 법적 의무를 게을리 할 사제장이 아니니 알아서 여분을 처방받았을 것이었다. 그것이 맥코이의 마음에 걸렸다. 언제까지 존 해리슨의 임무를 막아둘 수 없다는 것도, 이 은색 상자 덕분에 자신이 사적으로 사제장을 만날 기회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도 모두 맥코이의 머릿속을 배회했다.


  맥코이는 충동적으로 존 해리슨의 상자를 거꾸로 엎어버린 뒤 안에 있던 므네모시아를 폐기했다. 뒤집힌 상자는 몇 번 튕기는 일도 없이 평면에 착지했고 오히려 알약 몇 개가 쓰레기통에 안착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맥코이는 풀썩 팔을 내렸다.


  알약 몇 알이 떨어졌을 뿐인데, 그와 커크가 깨끗하게 치웠던 방 안이 금세 더러워진 듯했다. 맥코이는 아무리 관성을 등에 업어도 므네모시아가 굴러올 수 없는 창가로 멀리 도망쳤다. 창밖에서 잠시 의미 없이 점멸하던 스크린이 곧 므네모시아를 홍보하는 영상을 띄웠다.


  눈앞과 발밑에 모두 널려 있는 므네모시아를 피하기 위해서 안절부절하던 맥코이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 얼른 서랍을 열었다. 커크가 자랑하며 보여준 작은 책이 있었다.


  “여행 중에 찾아간 지역에서 어떤 분이 준 거에요.”

  “이게 뭔데?”

  “뭐긴요. 시집이잖아요.”

  “…사제들한테 총살당하고 싶어? 요새 사제들이 하는 일이 그거잖아, 과거의 예술을 적발하는 거.”

  “사실 그것부터 웃기는 거죠.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하는 게 반역 행위로 전락하는 게 말이 되는 일이냐고요. 여하튼 그 때문에 이건 그 사람들한테 정말 귀한 물건이었을 거예요. 제가 어디어디에서 사제들을 봤는데 그 곳이 아주 쑥대밭이 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해 준 보답으로 받은 거니까요. 이 시인 이름은 들어 보셨어요?”


  은박을 입은 W.B.예이츠라는 글씨가 이따금씩 빛났다. 앞뒤로 그것을 숨겨주던 학술지들은 훨씬 전에 커크에게 외면 받아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좋은 말들이 많아요. 닥터도 한 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서요.”


  커크는 시집을 맥코이의 패드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드리는 거 아니에요, 나중에 찾아갈 겁니다.”


  모서리만 스윽 훑어보니 접힌 자국이 남아 있는 종이가 손가락에 걸렸다. 자국이 깊고 진해서 커크가 만들어 놓은 흔적은 아닌 모양이었다. 맥코이는 표지로 돌아가려다 말고 접혀 있었던 페이지를 펼쳤다. 


  “…그는 천국의 옷감을 소망하니.”


  맥코이는 눈을 깜빡였다. 손바닥보다 조금 넓을 뿐인 종이의 반도 채우지 않는 시를 읽으면서 맥코이는 몇 번이고 눈을 더 깜빡였다. 맥코이는 창틀을 받침대 삼아 서 있으면서 시집을 오랫동안 쥐고 있다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그의 뒤통수에 자이가이스트의 모니터가 하루 종일 뿜어내는 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거슬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시와 함께 맥코이가 잊을 수 없는 상념 하나가 있었다. 


  존 해리슨은 므네모시아 투약을 영영 중단하더라도, 절대 이 시를 읽으며 감흥을 받지 못할 것이었다. 




* * *




  시민들이 거리를 배회하다 사제들에게 적발되어 강제로 귀가를 종용받을 늦은 시각이었다. 존 해리슨은 아파트를 목적지로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세련된 유선형의 차량이 리서치를 지났다. 원래는 중앙 통제 센터와 나란한 위치가 강조되다가 생추어리가 세워지면서 양쪽의 날개로 전락한 건물이었다. 해리슨은 코트의 안쪽 주머니가 평소보다 가볍다는 느낌을 재차 떠올렸다. 그는 자신의 소지품 중 하나가 아직 레너드 맥코이에게 맡겨진 상태라는 걸 잊지 않았다. 해리슨은 시계를 보고 리서치의 입구에 사다리꼴 모양으로 넓게 펼쳐진 계단 근처로 차량을 돌렸다. 사명감이 투철한 연구원들이라면 마지막 업무에 매달리고 있을 법한 시간이었다. 


  로비에 얼굴을 내밀자 듬성듬성 불이 켜진 내부가 보였다. 이제 경비원은 사제장이라면 두말없이 문을 열어주곤 했다. 해리슨은 익숙하게 인식 장치가 풀린 승강기에 탑승했다.


  해리슨은 며칠간 밟지 않았던 짧은 복도를 걸어 현관 앞에 도착했다. 사제장도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제 아무리 유해한 물질에 휩싸여 연구에 몰두했을 지라도 닥터가 잠들 시각에는 환기를 시켰을 거라는 추측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을 두드려도 맥코이는 답이 없었다. 안타깝게도 해리슨이 부여받은 카드키는 그의 아파트 서랍장에 있었다.


  결국 해리슨이 등을 돌리는데 달칵 하고 문소리가 났다. 과연 맥코이는 헬멧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표정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해리슨은 연구가 제대로 풀리지 않는 모양이라고 추측했다. 


  “…용건 있어서 찾아온 거 아냐?”


  맥코이가 느릿하게 물었다.


  “두고 갔던 물건을 받을 수 있을까 해서 들렸습니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라도 괜찮습니다.”

  “아니야.”


  필요 이상으로 닥터의 말은 단호했다. 해리슨은 순간 의아해했고 맥코이는 그 나름대로 당황했다. 맥코이가 얼굴을 감추면서 문을 홱 열었고 해리슨은 미묘하게 불편해하면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서자마자 해리슨은 쓰레기통 주변에 점점이 멈춰있는 므네모시아를 발견했다. 법에 충실한 사제장은 당장 형을 집행할 수는 없을지언정 맥코이에게 질문했다.


  “그새 복용량을 지키지 않으셨습니까.”


  맥코이는 무시하고 그의 케이스를 찾아 손에 쥐었다. 다시금 냉철한 사제장이 된 해리슨은 맥코이의 옆을 지나치며 창틀에 걸쳐져 있는 작고 얇은 시집을 노렸다. 맥코이가 잽싸게 몸을 돌렸지만 해리슨이 더 빨랐다. 


  “금지된 품목이로군요. 어디서 입수하셨습니까.”


  억압과 무력의 유니폼을 입고 방아쇠를 거는 손이 시집을 집는 광경은, 꼭 그 하얗고 긴 손가락이 시집을 우아하게 집어 삼키는 환상을 불러왔다. 맥코이가 시집의 윗부분을 덜컥 잡았다. 해리슨은 그의 악력을 이겨내고 최소한의 확인만 거치고 통제 센터에 넘기거나 불에 태웠을 불순물을 펼쳤다. 조금 전에 맥코이가 읽었던 시가 인쇄된 쪽이었다.


  “내가 만약 천국의 수놓인 옷감을 황금빛 은빛으로 수놓이고 밤과 낮, 여명의 푸르고 희미한 어두운 옷감을 가질 수 있다면―”


  맥코이는 드러내 놓고 눈썹을 움찔했다. 


  “나 그 옷감을 당신의 발 앞에 펼치리라.”

  “해리슨, 그만.”


  그 때 맥코이는 처음 사제장의 이름을 불렀다. 해리슨이 눈동자를 아래로 내려 마저 시행들을 외웠다. 덕택에 그는 맥코이의 안색을 읽으면서도 시를 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 가난해 그저 꿈만을 갖고 있으니, 내 꿈들을 당신의 발 앞에 펼치오.”


  맥코이는 몸을 가만히 놔둘 수 없을 정도의 전율을 가져왔던 작품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리 내고 있는 해리슨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사제장의 청록색 안구는 원래 물이 존재하지 않는 달의 표면 같았다.


  “그러니 부드럽게 밟으시라. 당신은 내 꿈을 밟고 있으니.”


  그와 동시에 맥코이는 시집을 놓쳤다. 


  “이 책은 압수하도록 하겠습니다.”

  “어째서? 그 시가 전쟁을 촉구하자고 말하는 것도 아니잖아.”

  “자이가이스트가 허가하지 않은 주제입니다.”


  시집을 가지고 물러나려던 해리슨을 맥코이가 확 붙잡았다. 해리슨은 휘청거리진 않았지만 맥코이를 직시할 수밖에 없었다. 맥코이는 꼭 울분에 휩싸인 듯이 보였다.


  “네 존재 자체가 자이가이스트의 전부인 것처럼 말하지 마. 법전을 외우고 죄인을 처벌하는 게 네 운명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그러나 사제장의 냉철한 사고는 이것마저 분석하고 뜯어보았다. 레너드 맥코이는 단순히 므네모시아 투약을 거부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위험한, 자이가이스트가 제일로 경계하는 그릇된 감정을 촉발하고 퍼뜨리려는 인물인지도 몰랐다. 맥코이는 입술을 깨물면서 해리슨에게 억지로 케이스를 돌려주었다. 우발적인 행동처럼 보였지만 맥코이의 의식의 반 정도는 그 안에 므네모시아를 바꿔 넣지 않았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 


  손바닥에 작은 케이스가 올라가 있는 게 전부였지만 해리슨은 어떠한 이질감을 느끼고 상자를 열어보았다. 은빛의 상자는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다. 해리슨은 차분하지만 날카롭게 시선을 올렸다.


  “이건 무슨 의미입니까?”


  몇 분 전 존 해리슨의 모습이 맥코이의 시각에 내려앉았다. 존 해리슨은 분명 레너드 맥코이의 꿈을 밟고 있는 것 같은데, 누가 해리슨의 발밑에 그의 꿈을 깔아 놓았는지는 불확실했다.


  “당신한테는 므네모시아가 필요 없어.”


  맥코이에게 확실한 것은 한 가지였다. 자신의 발명품이 초래한 가장 끔찍한 피해자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가을의 소용돌이만큼 강렬한 고뇌는 이제 하나의 추진력으로 변하고 있었다. 제 아무리 존 해리슨이라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던지고 맥코이는 그것을 뒷받침할 자료를 놓치지 않게 꼭 쥐었다. 맥코이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예이츠의 시집을 회수하는 대신 다른 걸 건넸다. 


  맥코이의 검지가 특정 페이지를 책갈피처럼 가로막았다. 마지막으로 해리슨의 눈동자를 본 뒤 시집을 쥐고 있는 감각에 집중했다. 그는 일부러 사제장이 마음껏 흔들릴 수 있게 배려했다.


  해리슨은 그 날 처음으로 손을 떨었다.




* * *




  이후 해리슨의 행선지는 엉뚱하게도 생추어리였다. 벽감처럼 비어 있는 아치형의 넓은 무늬들은 성소의 분위기를 조장하기 위해 새겨졌지만, 그 둥그런 공간을 채우고 있으면 안성맞춤일 성모나 성령의 조각상은 없었다. 태양빛을 상징하듯 위로 넓게 퍼지는 곡선들이 꼭대기에서 모였다. 존 해리슨은 맞은편에 서서 그 중심부를 바라보았다.


  맥코이는 자택으로 돌아가서 잘 살펴보라는 듯 그의 혈액을 검사한 자료를 넘겨주려 했지만 해리슨은 거절했다. 이런 부분에서 그는 레너드 맥코이를 의심하지 않았다. 닥터의 설명은 명쾌했고 데이터는 흠 잡을 곳이 없었다. 이제 그의 비밀을 짚어 준 맥코이가 그것보다 중요할 지도 모를 자신의 사연을 밝히려고 할 때 해리슨은 그에게서 벗어나 성지에 도착했다.


  해리슨은 공연히 머릿속으로 옷자락을 길게 늘어뜨린 성모를 상상하려 했다. 유화들을 압수하면서 몇 번은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어느 부분이든 풍성해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서도 자비로움이 묻어있을 것 같은 형상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책에서 지나가듯 본 구절에 지나지 않았고, 가꿔질 씨앗조차 담지 못했던 해리슨의 기반은 빈 아치형의 공간에 성모를 세우지 못했다. 


  사제장의 지위라면 마커스의 영역을 제외하곤 모든 통제 센터의 문을 뜯어낼 수 있었다. 거기서 타인의 세포를 사들여 자신을 조합하기로 결정한 남녀를 심문하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너무도 철저하게 교육받은 존 해리슨의 머리는 이 땅에 과학적인 축복을 내린 닥터를 의심할 생각을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비슷한 이유로 그는 알렉산더 마커스를 의심하지 못해 괴로웠다. 


  그는 상상도 추궁도 포기하고 다른 일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구제불능의 닥터는 앞으로도 영영 므네모시아를 복용하지 않을 것이므로, 쓸데없이 인력을 낭비하지 말라는 의견을 마커스에게 제출하는 걸 내일의 첫 번째 일과로 삼으면 좋을 듯했다. 그러나 곧 소지가 금지된 물건을 맥코이가 가지고 있음이 기억나 해리슨은 짜증스럽게 눈을 감았다. 해리슨은 손바닥만 한 시집을 외면할 사고도 발휘하지 못했다.


  어디서든 가로막힌다. 해리슨은 잔뜩 날 선 눈동자로 의미 없이 생추어리를 노려보았다. 밤은 갈수록 진해져 거리는 마치 봉쇄된 지역마냥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게 되었다. 해리슨은 맥코이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마커스에게 꺼내지 않을 것을 정하고, 맥코이로부터 시집을 받아내고, 여건이 된다면 입수 통로를 질문해보기로 결정했다. 그것들은 모두 존 해리슨이 아니라도 사제장이라면 입력할 수 있는 사항이었다.


  성지가 따르는 최고의 성직자임에도 해리슨은 편히 문을 열고 생추어리에서 쉬려고 하지 않았다. 해리슨은 아파트로 돌아갔다.


  베일에 싸인 리서치의 최상층에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지 바깥에서는 알 수 없다. 해리슨이 혼자서 차를 모는 곳에서 선명한 건 자장가를 속삭이듯 반복되는 므네모시아에 대한 찬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