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Chapter 3. 제임스 T. 커크James Tiberius Kirk



  제임스 T. 커크는 자이가이스트의 모든 소년소녀들이 그러하듯 법에서 지정한 가정교육 기간을 마치고 대학에 입학했다. 그는 책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책과 미운 정을 쌓을 줄 아는 융통성을 갖고 있었고, 완벽하게 정화되지 않은 세계의 청회색 하늘도 나름 멋이 있다며 읊조릴 수 있는 낙천적인 가치관도 보유하고 있었다. 대학에서 몇 번이고 강조할 전쟁의 위험성과 끔찍한 잔해를 벌써부터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그의 부모는 대신 다른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는 안목을 길러 주었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기술만큼이나 각기 다른 시대의 차이점을 파악하기 좋은 분야가 바로 미학적인 측면이었다. 대통합체가 치켜세우는 요소들이란 아무래도 수많은 나라가 존재하면서 각각의 풍경을 키워 왔던 것과는 달랐다. 덕분에 커크는 지금은 모두 동질화된 런던과 파리, 마드리드가 어떻게 달랐는지 따위의 독특한 지식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의도치 않게 그에게 일종의 창조성을 심어준 입장이 되었다.


  제임스 커크는 머리가 나쁜 학생은 아니었다. 그 역시 입학하면 대개 좋은 성적을 받아 가장 견고하고 지적인 두 기관인 대학과 리서치에서 한 자리를 꿰차는 게 여러모로 낫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졸업과 동시에 구직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이태까지 받았던 성적이 하락하거나 효력이 사라지는 것도 아님을 인지했다.




* * *




  비죽한 금발이 돋보이는 남자가 게시물을 읽고 중얼거렸다. 


  “리서치는 가면 갈수록 들어가기 어려워지네.”


  정작 그는 연구보다는 교관 일을 우선시하고 있으면서도 굳이 입으로 주절주절 자신의 감상을 소리 냈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게시판을 한 번씩 쳐다보았지만 이내 짧은 정보만 취하고 가버렸다.


  그는 그 곳에 서 있으면서 아는 교우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안녕, 짐. 혹은 거기서 뭐해, 짐? 정도의 가벼운 말들을 툭툭 던진 그들은 남자의 대답을 듣고 그에게서 벗어났다. 제임스 커크라는 제대로 된 이름보다는 애칭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여전히 게시판 앞에 서서 엉뚱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하면 한 번 여행을 다녀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그는 무턱대고 눈을 굴리다가 생추어리에서도 사람을 뽑는다는 걸 발견했다. 생추어리 덕분에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더 다양하게 고려할 수 있었지만 제임스는 그보다도 생추어리 역시 수도에 있음을 떠올렸다. 대학이나 리서치, 사제들의 성역까지도 모두 수도에 위치해 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가 아니라면 자이가이스트의 중심부를 벗어날 일이 거의 없을 거라고 강력하게 확신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창의적이었던 제임스 커크는 이번에도 독특한 아이디어를 마음에 담아두면서 스스로 만족했다. 그가 이런 저런 계획을 떠올리는 사이 한 여학생이 그의 옆에서 게시판을 눈여겨보았다. 그녀의 진지한 눈동자로 미루어보건대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여학생은 이내 제임스의 곁을 떠났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여학생을 비롯하여 강의실로 흩어지는 학생들의 걸음걸이가 비슷비슷했다. 시간표를 떠올리다가도 제임스는 그들의 발에 저도 모르게 집중했다. 언제부턴가 학생들은 비슷해지고 있었다.




* * *




  커크는 처음에 티켓박스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안내원이 고개를 쏙 내밀고 있어야 할 아치형 구멍에는 자주색 천이 드리워져 있고 다 떨어진 팜플렛은 오래 전부터 공급되지 않은 듯한 모양이었다. 현대적인 무채색으로 덧칠되어 있기는 했지만 고전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는 주 건물의 사정도 다르지 않았다. 커크는 애써 찾아온 박물관을 한동안 서성였다.


  출입구가 밀리는 소리가 나자 측면을 돌고 있던 커크가 잽싸게 돌아왔다. 긴 코트를 입은 남자들이 직물에 싸인 물건들을 짝을 지어 이동시키고 있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으나 대부분 반듯한 사각형이었다. 커크는 고정된 출구에서 조금씩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미처 기다리지 못하고 가장 앞서 있는 두 남자에게 물었다.


  “혹시 박물관 직원들이신가요? 그림을 옮기시는 것 같은데.”


  커크의 태도가 의아하다는 듯 한 명이 눈썹을 올렸다. 그제야 검은색 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줄을 잇는 걸 보고 커크는 그들이 박물관 직원이 아니라 사제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경영난으로 인하여 이 박물관은 문을 닫았습니다. 저희는 작품을 중앙 통제 센터로 회수하는 중이고요.”

  “통제 센터로요? 거기서 회화가 쓸모 있을 일은 없을 텐데….”


  두 남자는 캔버스를 들고 준비된 큰 트럭을 향해 가버렸으므로 커크의 발언은 순식간에 청자를 잃고 공중으로 떠돌게 되었다. 커크가 가만히 사제들을 뱉어내고 있는 박물관의 어두운 정경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에 책의 귀퉁이에서나 간신히 볼 수 있던 작품들을 만날 기회가 성직자들에 의해 조금씩 흩어지고 있었다.


  그가 방문하길 벼르고 있던 이곳은 사실 자이가이스트에서 얼마 남지 않은 규모 있는 박물관이었다. 충분히 사람들의 발길을 모을 수 있는 장소가 경영난에 빠졌다는 것이 커크는 용납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역사적인 예술에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린 게 아닌 이상 거뜬히 유지가 될 시설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제들의 행렬이 갈수록 커져 커크는 몇 걸음을 물러나야 했다. 조각상이 분명한 실루엣이 사제들의 손에 들려 아슬아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커크가 반사적으로 조각상의 정체를 유추하려 했다. 그의 시야를 벗어난 곳에서 청록색 눈동자가 그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조각상을 보고 있었다. 




* * *




  내가 편지를 보낸다니까 요청해 불렀던 배달원이 굉장히 의아한 표정을 지었어요. 하지만 레너드 맥코이의 소인이 찍혀 있으니 사제들이 검사하는 일은 없겠지. 마침 당신 편지를 읽고 있었을 때 사제장이 내 므네모시아도 확인하더군. 그 날 자이가이스트에서 배포한 법전을 받아서 밤새 읽었어요. 체질에도 안 맞는 법률 용어며 마커스가 떠들어 대는 것과 다르지 않은 신문들을 번갈아 보느라 진땀을 뺐지. 그러면서 내가 당신에게 줄 수 있는 해답을 생각했어. 


  혹시 리서치에 올 수 있을까? 편지지를 채우는 일이 힘들기도 하고, 여기에 쓸 수는 없지만 당신이 알아야 하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요. 연구원들이 다 퇴근하고 나면 리서치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찾아와도 괜찮을 거야. 내가 정하는 날짜가 괜찮다면 답장은 보내지 않아도 돼, 그럼 조만간 볼 수 있길. 레너드 맥코이. 




* * *




  직업의식이 투철한 리서치의 경비원도 집으로 돌아가는 자정이었다. 새벽의 리서치는 완전히 레너드 맥코이의 저택이었다. 십 분마다 시계를 보던 맥코이는 기다렸다는 듯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의 엘리베이터는 언제나 작동했다. 그리고 불이 꺼진 리서치의 나머지 영역은 레너드 맥코이가 작동시킬 수 있었다. 


  1층으로 내려와서 맥코이는 제일 먼저 경비원이 잠그고 갔을 입구를 열었다. 줄무늬가 곱게 그어진 두꺼운 기둥에 몸을 숨기고 있던 남자가 금발을 들었다. 맥코이가 문을 붙잡고 말했다. 


  “제임스 커크?”


  남자는 대답 대신 벌떡 일어났다.


  “들어와요. 지금은 외출 금지 시간이잖아.”


  커크가 안으로 잽싸게 파고들자 맥코이는 제어실로 들어가 잠금장치를 작동시키고 희미하게 켜놓았던 로비의 전등을 내렸다. 레너드 맥코이를 위한 반짝이는 길은 달빛만 있어도 충분히 빛났으므로 그들은 헤매지 않았다. 상행 버튼이 맥코이의 손끝을 기존에 저장되어 있던 데이터로 확정지은 뒤 엘리베이터가 문을 개방했다.


  “들어가.”


  닥터의 전유물에 입성한 상황이 놀라워서 커크는 한동안 눈을 껌뻑였다. 맥코이는 목적지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층위를 표시하기보다는 단지 아름다운 불빛만을 내뿜는 작은 패널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마자 맥코이는 잽싸게 앞서나가 잠긴 입구를 열었다. 커크가 속도를 높여 맥코이의 등에 붙었다.


  “먼저 말해두지만 나는 당신의 책망하는 듯한 말투를 견딜 이유가 없어요. 나는 므네모시아를 인간의 반쪽을 지워버릴 지우개로 만들지 않았어. 내가 그걸 결과적으로는 방관한 꼴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신을 지적할 위치는 되지 않겠지만. 편지 쓸 때도 그랬는데 존댓말이 영 어색하네, 말 놔도 돼요?”

  “아, 예. 닥터가 저보다 나이도 많을 텐데.”

  “오만하게도 나는 마커스 말고는 말을 높일 사람이 없거든. 다들 불편해하더라고. 내가 레너드 맥코이라는 게 자신을 하대해도 된다는 가장 강력한 증거라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서.”


  맥코이가 서랍 하나를 끝까지 뺐다. 서랍의 뒷면에 저장 장치로 쓰이기도 하는 얇은 디스플레이가 붙어 있었다. 커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어를 구사할 힘만 있으면 법률 문서도 밀어낼 수 있는 레너드 맥코이가 저토록 은밀하게 보관해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맥코이가 디스플레이와 동기화할 패드를 집었다.


  “편지에 쓴 내용, 누구한테 얘기한 적 있어?”

  “아니요.”

  “앞으로도 얘기할 생각은?”

  “아직은 없어요.”


  가늘게 뚫린 패드의 구멍에 디스플레이가 쏙 들어갔다. 


  “이렇게 닥터를 만난 것, 그리고 곧 닥터가 저에게 보여주실 내용은 웬만해서는 누구한테 알려주고 싶다는 기분이 안 들 것 같아요.”


  맥코이가 눈치는 있다면서 칭찬처럼 중얼거렸다. 디스플레이가 보관하고 있던 데이터가 하나씩 시각화되어 패드에 바쁘게 떠올랐다. 커크가 조심스럽게 상체를 기울였다. 


  “대학을 다녔으면 이 정도는 무리 없이 이해할 거라고 봐.”


  커크가 패드를 받아들었다.


  “이게 뭔데요?”

  “사람들이 먹고 있는 므네모시아와 본래 므네모시아와의 차이.”


  커크는 양 손으로 패드를 붙잡고 화면을 두 갈래로 분할하고 있는 자료들을 한 줄씩 번갈아 읽었다. 리서치보다는 대학에서 일하려는 마음이 더 컸던 커크였지만, 데이터가 너무도 확실해서 막힘없이 제 나름의 이해를 세워갈 수 있었다. 그러다 커크는 도중에 몇몇 부분을 읽고 또 읽었다. 자연스럽게 패드가 코앞까지 가까워지기도 했다. 


  “마커스가 배포하고 있는 므네모시아는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누군가 개량했어. 그것도 아주 나쁜 방식으로.”

  “…인간의 감정 그 자체가 무뎌지도록 말이죠.”


  커크가 스르르 패드를 내려놓았다. 


  “존 해리슨이 누군지는 아시죠?”

  “내가 약 안 먹는다고 요새 날 벼르고 있는 사람이지.”

  “당신이니까 그의 엑소시즘을 그 정도에서 받아내는 겁니다. 당신이 자이가이스트의 유일한 닥터가 아니었다면 당신도 죽었을 거예요. 다 태워져서 살갗의 일부만 남았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맥코이는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제 3차 세계대전 이전에 살았던 그는 현재에 와서 변질된 단어들의 효용이 씁쓸할 정도로 우스웠다. 독재자의 조건 없는 무력은 성직의 칭호를 받고, 그들의 민간인 살해는 일종의 정화 행위로 포장되었다. 알렉산더 마커스는 꼭 2523년을 기다려온 것 같았다. 


  “내가 당신의 책망을 들을 이유가 없다고 했잖아.”


  커크는 맥코이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 잠자코 그를 보았다.


  “하지만 그까짓 거 인정 좀 하면 어때.”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그러자 맥코이는 커크가 편지에서부터 원했던 닥터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 * *





  “지금 한 말, 거짓말이죠?”

  “왜 그렇게 생각해?”


  “그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을뿐더러,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제 아무리 닥터라도 그렇지 너무 멀리 나갔잖아요. 마커스가 손 댄 므네모시아를 전부 회수해서 폐기한 뒤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져야 할 감성을 찾아주면 그만이라고요. 그 과정에서 마커스의 앞잡이나 다름없는 사제들을 혼내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닥터가 말한 그 계획은 정말이지 말도 안 돼요.”


  “그럼 네가 말한 건? 차라리 우리 둘 중 누가 사제였으면 그마나 편했을 거야. 일단 우리는 존 해리슨을 비롯한 성직자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어. 게다가 자이가이스트는 이제 지구 전체야. 우리가 그들 모두를 감당하는 게 쉬울 것 같아? 지금은 자이가이스트의 시민들보다 인류에 시선을 돌리는 게 훨씬 승산 있어.”


  “…나 아직 아무데도 안 들어갔어요. 생추어리에 도전해 볼 수 있다고.”

  “넌 그냥 리서치로 와. 그게 더 도움 돼.”


  커크는 뭐라고 확 몰아붙이려다 입술을 비죽이고 한숨만 쉬었다. 대학을 마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레너드 맥코이에 대한 환상을 가질 법했다. 최소한 그가 차분하고 어딘가 무신경한 현자의 분위기는 가지고 있으리라 상상했던 커크는 아무리 재 봐도 터무니없는 이론을 제시하고 있는 닥터에 못 이겨 옆머리만 긁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리지만 닥터는 지금 시간 여행을 하자는 거예요.”

  “엄밀히 말하면 시간 여행이 아니라니까. 수없이 갈라진 우주의 어느 한 틈을 파고드는 거라고.”


  커크가 작게 궁시렁댔다. 어느 쪽이든 자신에겐 뜬구름 잡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맥코이가 그의 이마 앞에서 손가락을 튕겨대며 그의 시선을 불렀다. 


  “네가 나와 함께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나 혼자서라도 할 거야. 물론 마지막 순간에 제임스 커크라는 청년이 회의론자처럼 굳어 있던 나를 자극시켰다는 사실 정도는 회상할 수 있겠지만.”


  그 말을 하면서 맥코이는 나름대로 강인한 눈빛을 지어보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커크는 겨우 진동을 붙잡고 있는 닥터의 동공이 인간적으로 떨리고 있음을 목격했다. 맥코이가 자신을 과장하고 있어서도 아니었고, 거짓을 말해서 경련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 * *




  사제들을 끌고 리서치를 흡수할 듯한 무시무시한 등장을 보일 것 같았던 존 해리슨은 의외로 순순히, 이번에는 손으로 직접 노크까지 하면서 맥코이를 방문했다. 사제장이 총을 뽑아 방아쇠를 당기는 데에 몇 초가 걸리는지 맥코이는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당장 사제장은 그에게 무기를 들이댈 것 같지는 않았다. 해리슨의 동공에서 그의 정화 작업을 묘사하는 냉혹한 글귀를 목격한 맥코이는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굳혔다. 자신을 둘러싼 논리적인 환상을 모르는 해리슨은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당신을 구금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습니다.”


  이어진 맥코이의 물음은 자연스러웠다.


  “그럼 여긴 왜 왔는데?”

  “당신이 법률을 준수하도록 감시 및 교정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사제들의 우두머리인 그에게 명령을 하달할 만한 인물은 기껏 추려봐야 알렉산더 마커스 정도였다. 맥코이는 사제장을 통해 전달된 마커스의 의중이 살짝 의아했다. 어쩌면 단순히 자이가이스트의 닥터를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강제로 나한테 약이라도 먹이겠다는 건가?”

  “아직 그런 극단적인 방식을 감행할 지는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해리슨은 정갈하고 또박또박하게 대답했다. 맥코이는 그것과 더불어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라면 정말 자신의 목구멍이라도 벌릴 것만 같은 사제장의 태도에 속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예고 없이 여길 찾아오는 날이 많을 겁니다. 닥터의 외출 시간은 알아서 피할 테니 그 점은 염려하지 마시고 부디 법을 지키는 데에 집중하셨으면 좋겠군요.”


  그러면서 해리슨은 므네모시아 한 알을 주방의 빈 공간에 놔두었다. 맥코이는 자신의 발명품이었으나 마커스의 무기가 된 알약을 쳐다보지도 않았고, 해리슨은 대신 자신에게 쏟아지는 맥코이의 시선을 묵묵히 받아내다가 물러났다. 총격 없이 평화롭게 남겨진 므네모시아가 마음이 무겁도록 거슬렸다.


  역시 그의 입장에서는 존 해리슨의 엑소시즘보다는, 제임스 커크의 편지를 기억하기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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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2. 사제장High Priest



  이것은 어떤 역사서에도 기록된 바가 없는 이야기이다.


  각 국가의 정치인들이 은밀하게 자이가이스트에게 협상을 시도하고 몸을 위탁하기 위해 갖은 공작을 펼쳤던 때였다. 기어코 전란에서 살아남은 영국의 고위 지도자 내외가 알렉산더 마커스 위원장을 만났다. 자이가이스트라는 통합체를 구상한 장본인인 마커스는 당시에도 목숨과 권력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이 만남을 청하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


  아직 부서진 잔해들이 정리되지 않아 난잡했으나 짐작컨대 아마 카페였을 것 같은 곳이었다. 대부분이 그렇듯 귀중품 따위를 기대한 마커스에게 그들은 웬 아기를 내밀었다. 남자는 아이를 마커스에게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유하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 건 여자의 몫이었다. 


  내외 모두는 불임을 유발하는 요소를 갖고 있어 원초적인 의미의 후손을 가질 수 없었다. 자신들의 핏줄을 키울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한 그들은 차라리 누구보다 뛰어난 아이를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심산을 품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영국 내에서 가장 명망 높은 과학자와 인문학 교수의 세포를 받아 체외수정으로 아이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여자는 이 아이가 크면 당신이 어느 분야에서든 활용할 수 있는 인재가 될 것이라며 마커스를 구슬렸다. 마커스는 능력 있는 이들을 아주 좋아했다. 마커스는 내외에게 아이를 구성하고 있는 DNA의 이전 주인들을 물었다. 마커스가 익히 들어본 지식인들이었다.


  마커스는 아이를 받고 두 사람의 망명을 허락했다. 남자는 아직 아명만 있을 뿐이니 그가 원하는 대로 이름을 지어줄 수 있을 거라며, 그것이 마치 커다란 이점이라도 되는 듯 속삭였다. 


  후에 마커스는 아이에게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 * *




  리서치에서 근무하는 이들에게만 허락된 가운 자락을 휘날리면서 한 여인이 부랴부랴 정류장을 향해 달렸다. 버스가 여태 도착하지 않은 모양인지 줄이 길었다. 여인은 가지런히 서 있는 사람들의 뒤꽁무니에 자리 잡고, 아무렇게나 묶었던 머리를 단정하게 한 갈래로 정리한 뒤 가슴팍에 달린 명찰을 바로잡았다. 리사 콜린스라는 글씨가 파랗게 새겨져 있었다.


  줄은 계속 길어지기만 하고 있었다. 리사가 왼쪽으로 상체를 틀었다. 정렬에 벗어나 있는 검은 코트의 사제가 보여 그녀는 깜짝 놀랐다. 사제들은 도움이 필요 없을 때도 불쑥불쑥 나타난다는 우스갯소리는 진실이었다. 리사는 버스에 탑승하면 복용하려고 했던 므네모시아를 꺼내 얼른 입 속으로 넣었다.


  생추어리의 사제들은 자이가이스트의 법전에 맹세코 자신의 청렴결백함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도 고개를 젓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법의(法衣)와 흡사하지만 훨씬 고압적인 복장과 사제들만이 소유할 수 있는 총기는 부차적 이유들이고, 제들이 자이가이스트가 반역으로 지정한 행위를 저지른 시민들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게 시민들을 제일 거북하게 만들었다. 리사는 서서히 가까워지는 실루엣을 주시하면서 빨리 므네모시아가 체내로 흡수되길 바랐다. 시민들이 가장 쉽게 저지를 수 있는 반역 행위가 바로 법으로 지정한 므네모시아의 복용량을 지키지 않는 것이었다.


  코너에서 버스가 정류장 쪽으로 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제의 검사가 끝나지 않는 한 승객들은 차에 탈 수 없었다. 리사는 앞에서 다섯 번째 서 있는 중년 남성이 사제의 추궁을 받는 장면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 남성이 목을 뒤로 꺾을 듯 젖혔다. 미처 챙기지 못했던 므네모시아를 삼킨 모양이었다. 그리고 리사는 이동하면서 살짝 각도를 바꾼 사제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고 입을 다물었다. 


  리사는 공연히 직장에서 진행할 프레젠테이션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리사가 늦네.”

  “아마 검사를 받고 있는 중일 겁니다.”


  닥터의 의미 없는 중얼거림을 재빠르게 받은 연구원 하나가 구구절절 설명했다.


  “요새 사제들이 불시에 므네모시아 투약 여부를 확인한다고 합니다. 장소를 가리지 않지요. 저희는 어느 길목을 가도 사제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지요.”


  리서치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맥코이는 직접 체험해 본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움찔했지만 곧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프레젠테이션에 늦지는 않을 겁니다.”


  연구원은 위대한 레너드 맥코이를 조금이라도 불편하게 할 수 없다는 듯 아주 부드러운 말투를 구사했다. 그는 동료를 기다리는 동안 닥터가 지루해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라도 한 것인지 이야기를 늘려갔다.


  “사실 시민들은 그들을 부담스러워합니다. 전쟁 이후에는 유물처럼 인식되던 총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해도 오싹할 판인데, 법을 어긴 사람들에게는 아주 가혹하니까요. 게다가 얼마나 조직적이고 신속하게 퍼져있는지 가끔은 버스 안에서도 검사가 이루어진답니다. 그들이 조만간 리서치에도 발을 들여놓지 않을까 슬그머니 걱정이 될 정도입니다. 특히 사제들의 리더 존 해리슨은 소문에 의하면….”

  “죄송합니다, 닥터! 제가 늦었죠?”


  헤어스타일이 한층 단정해진 리사가 급하고도 정중하게 브리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가 앉아 있는 동료들의 등을 종종걸음으로 지났다.


  “정류장에서 사제장의 검사를 받느라 지체했습니다.”

  “괜찮아.”


  리사가 미소를 보이면서 한 손으로 메고 있던 크로스백을 뒤적거렸다. 그녀의 허벅지 한 쪽을 다 가릴 정도로 큰 가방에서 레이저 포인터며 프레젠테이션 원고 따위가 불쑥불쑥 튀어나왔다. 그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 있던 동료가 대신 프로젝터를 작동시켜 주었다. 


  짧지만 활기찬 준비 과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동안 맥코이는 자신이 미처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던 사안을 곱씹고 있었다. 자이가이스트에서 유일하게 무장이 허락된 집단이 고작 약을 제대로 복용했는지를 검사한다는 게 의아했다. 이마 밑으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말끔히 넘긴 리사가 눈썹을 으쓱거리며 맥코이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갈색 눈이 닥터에게 발언권을 요청하고 있었다. 


  “아, 시작해.”


  리사가 환하게 웃는 바람에 방금 넘겼던 머리카락 하나가 다시 내려왔다. 맥코이는 그것을 보면서 연상했다. 사제들이 므네모시아의 투약 여부를 굳이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관한 의문이 저 머리카락과 같았다. 맥코이는 앞에 있던 종이에 메모를 휘갈겼다. 알약 분석하기. 이윽고 확실하지만 사소한 그 느낌은 연구원이 자료를 읊는 목소리에 자리를 내주었다.




* * *




  주택에서 줄줄이 사람들이 끌려 나왔지만 그것은 시작이었다. 신부의 의복을 본떠 제작한 유니폼의 뒷모습이 또 한 번의 선고를 마치자 곧바로 대문이 거칠게 열리고 주민 몇몇이 연행되었다. 생추어리의 권능을 피해 므네모시아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첩보가 심심찮게 쌓이는 걸 불쾌하게 여긴 사제장 존 해리슨이 대대적으로 그들을 숙청하겠다는 계획을 공표하고 고작 삼 일이 지났다. 그리고 사제들이 적발한 반역자들의 아지트는 벌써 3개를 넘어서는 중이었다. 


  검은 등은 이어 다음 칸을 노렸다. 그와 한 조를 이루고 있는 두 명 중 하나가 문고리를 해체하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그가 조용히 총을 잡았다. 미세한 소음이 그에게 정의를 실행할 것을 종용했다.


  문이 완전히 엎어져 열린 틈으로 그가 빠르게 내부 입성했다. 창살을 뜯어내고 밖으로 도망치려는 부부의 뒤에 대고 그는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어른들이 탈출구를 마련할 동안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소년은 멍하니 자신에게 다가오는 살인자를 보았다.


  “너는 정기적으로 므네모시아를 복용했는가.”


  부엌을 수색하다가 서랍 구석에 숨겨져 있던 다량의 므네모시아를 발견한 대원이 전했다.


  “약이 잔뜩 있습니다. 세 사람 몫의 분량인 게 분명합니다.”


  소년은 자신의 팔을 붙잡으려는 남자를 피해 고꾸라진 부모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것만으로는 즉결 처분을 집행할 수 없었다. 그는 대원들에게 소년을 데리고 나가라고 고갯짓했다. 


  “난 안 가요.”


  대원들이 멈칫했다. 검거를 속행하기 위해 복도로 나가려던 남자도 몸을 돌렸다. 


  “그러면 도망가도록.”

  “..사제장님?”


  그리고 소년이 창살을 말아 쥐는 순간 남자가 총을 쐈다. 소년은 죽은 부모의 등에 그대로 안착했다. 


  “명령에 불복종할 의사가 명백하게 드러나야 사살할 수 있다는 조항, 잊었나.”


  양장된 성경 대신 총을 든 사제장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으로 건너갔다.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다가가기 위하여 권위는 잃어버렸으나 친숙함은 여전한 종교적 단어들을 재활용한 마커스의 방책이 아니었다면, 그는 아마 집행관 혹은 심판자쯤의 명칭을 얻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제장이었다.


  압축된 총성을 용케 들은 주민들은 혼란에 휩싸였다. 복도로 나와 돌파구를 찾는 이들도 있었고 요란하게 유리창을 내리치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새어나왔다. 대원들이 양쪽으로 흩어져 고함을 쳤다.


  “협조하지 않으시면 즉결 처분이 감행됩니다! 진정하세요!”


  사제장은 소요 직전의 공간에서 오롯이 생각했다. 자신이 현재 어느 정도의 탄약을 보유하고 있으며 밖으로 도주하는 자들의 움직임은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거주민들의 대다수를 끌어낸 덕분에 다른 사제들이 인원 통제에 무리가 갈 시간까지 빼놓지 않았다. 


  옆에서 대원들이 숫자를 셌다. 셋을 셀 동안 동작을 멈추지 않으시면 발포하겠습니다, 하나! 사제장은 그에 맞춰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둘! 그가 양 손에 총을 쥐었다. 셋!


  건장한 남성의 외침이 순식간에 묻히고도 남을 괴성이 솟구쳤다. 심지어는 총을 가지고 있는 두 명의 사제들 또한 놀라서 몸을 수그렸다. 그 곳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고 차분히 걸어가는 것은 사제장뿐이었다. 탄환은 기둥 하나 건드리지 않고 오로지 위법자의 가슴에 박혔다. 필사적으로 비상구를 향해 달려 나가던 그들은 맥없이 쓰러져 피를 뿌렸고, 그 잔인한 집행의 현장에서 다른 사제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의 재판장을 더욱 넓혀주는 것뿐이었다. 잠긴 문고리를 끊어내고 현관을 개방하자마자 사제장의 총알은 어김없이 범법자들의 뒷목을 붙잡아냈다. 


  한 차례 탄창을 비운 사제장은 왼팔을 쉬게 하고 계단을 찾았다. 꿈틀거리는 죄인들의 숨을 깨끗하게 끊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나직하게 명령했다.


  “대기 중인 사람들도 모두 처분하도록 지시해.”


  사제 하나가 통신기를 꺼냈다. 과거에는 신을 대신해 가장 부끄러운 죄도 용서해 주었다고 하는 성직자가 내려서는 곳에 총성이 가득 울렸다.


  “임무를 종료한다.”


  누군가가 공동묘지가 된 건물과 광장에 불을 던졌다.




* * * 




  범죄자들에게는 더없이 가혹하다는 사제장이 직위를 받고 2년 만에 위트가 늘어 자신의 프로젝트에 엑소시즘(Exorcism)이라는 이름을 붙이진 않았으리라. 맥코이는 ‘존 해리슨의 엑소시즘, 반역자 집단 다수 퇴치’라는 표제를 진하게 내건 신문의 앞면을 읽었다. 천천히 문단을 넘어가면서 방치해 두고 있던 므네모시아를 서랍에서 꺼내려던 맥코이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연구실에 틀어박혀 있는 게 버릇처럼 굳어진 맥코이의 행동 범위는 원하지도 않던 면책 특권을 받은 뒤로 더 좁아졌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자신을 경외하는 눈길이 어색해 절로 움직임이 위축되었다. 차츰차츰 마커스에 대한 신뢰를 잃으면서 그가 진행시키는 사안들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반발 심리도 있었다. 게다가 므네모시아를 강제로 배부하는 마커스의 행적에 반발심을 키우고 있다가, 맥코이는 단순히 법관이라고 여겼던 사제들이 대규모의 사형을 집행하고 다닌 사실을 놓쳐버렸다. 


  서랍장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멈춰 선 맥코이가 계속 신문을 읽었다. 현대적인 엑소시즘에 의해 불타는 것은 악령이 아니라 므네모시아를 잊었을 뿐인 일반 시민들이었다. 맥코이가 신문을 천천히 내리고 팔을 뻗어 서랍을 열었다. 그는 늘어서 있는 약병들 중 하나를 무작위로 집었다. 누구도 자신의 부모님처럼 죽지 않길 바랐고, 자신과 비슷한 18세를 공유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탄생시킨 작품이 알알이 들어 있었다.


  맥코이는 브리핑실에서 적었던 메모의 내용을 지금 당장 해치우기로 맘먹었다. 그가 므네모시아 한 알을 꺼내 들고 옆방에 설치된 연구실로 들어갔다.




* * *




  현관문을 열면서 코트를 벗는데 확 피 냄새가 끼쳤다. 존 해리슨은 옷을 들고 욕실로 가서 일단 핏물이라도 빼려다, 앞으로도 기습해야 할 지역이 너덧 군데는 남았다는 걸 상기하고는 옷을 버리기로 했다. 그는 주머니를 비우고 소각할 쓰레기들을 넣어둔 봉지에 벗은 코트를 접어 넣었다. 


  사제장의 개인 소지품은 간소했다. 넉넉히 구비하는 통에 오늘도 다 소비하지 않고 남은 탄창과 두 자루의 총이 제일 먼저 나왔고, 군청색 손수건과 매끈한 통신기가 뒤를 따랐다. 해리슨은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귀에 꽂혀져 있던 이어폰을 제거했다. 삭막하리만치 특색 없는 물건들 가운데서 작은 공간을 차지한 상자를 우연히 보게 된 해리슨은 중요한 사실을 기억했다.


  그가 코너를 돌면서 상자 뚜껑을 열고, 주방에 설치된 찬장에서 므네모시아를 꺼냈다. 귀가하지도 않고 생추어리의 수면실을 이용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어 그는 여러 알의 므네모시아를 가지고 다녔다. 케이스에 들어 있던 마지막 약을 오늘 아침에 삼킨 고로, 상자 안은 비어 있었다. 해리슨이 약을 케이스에 옮겨 담았다. 사제장의 직함과 함께 동시에 받은 므네모시아는 존 해리슨과 유독 조화로웠다.


  몸을 씻기 위해 해리슨은 욕실로 향했다. 므네모시아로 꽉 채워진 상자는 어느새 그의 총 옆에서 가만히 입구를 다물고 있었다. 그것은 개인의 개성과 관계없이 반드시 지니고 있어야 하는 자이가이스트의 현명한 시민성이었다.


  레너드 맥코이가 므네모시아를 열어보기 전까지 므네모시아는 모두에게 그런 의미를 갖고 있었다. 




* * * 




  로비를 지키는 경비원은 하마터면 비상 단추를 누를 뻔했다. 사제장의 차가운 안구를 마주한 이들 치고 위기의식을 느낀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존 해리슨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아직 비상 단추에서 떼지 못한 경비원을 아무런 지시 없이 저지했다.


  “가운데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작동시킬 수 있겠나.”

  “그건 닥터께서 이용하는 엘리베이터입니다. 저희는 손을 댈 수가….”

  “보수나 점검할 때 부득이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있을 텐데.”


  실내의 어두운 빛을 송두리째 빼앗은 것처럼, 본래 청록색인 그의 눈동자는 새카맣게 변해 경비원을 똑바로 겨누고 있었다. 사제장에겐 리서치를 방문할 이유가 있었고 경비원에겐 그를 거부할 권리가 없었다. 경비원이 서랍 깊숙이 손을 뻗어 열쇠 하나를 꺼냈다.


  “가시면 버튼 아래에 열쇠 구멍이 있습니다. 거기에 꽂아 넣고 돌리시면 닥터가 아니라도 임시적으로 엘리베이터를 작동할 수 있게 됩니다.”


  사제장이 열쇠를 받아들고 나갔다. 로비 근처를 거닐던 연구원 하나가 그의 얼굴을 보곤 어깨를 잔뜩 굳혔다.


  구역 하나를 상대하는 규모의 임무가 아니라면 대개 존 해리슨은 수행원이 없이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사제들의 검은 코트는 특색이 없고 그들의 상징과 같은 무기가 옷자락 밖으로 쑥 튀어나온 것도 아니었다. 외관상 그가 두려운 존재라고 못 박을 증거는 전무했으나 그를 보는 사람들마다 반사적으로 커지는 압박감을 호소하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존 해리슨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고 곧바로 닥터의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과연 상행 버튼 아래에 조그맣게 열쇠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가 사라지자 곧바로 연구원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사제장이 성역이나 다름없는 곳에 들어갔다며 입방아를 찧어댔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엘리베이터 밖 여전히 부드러운 은회색으로 덮여 있는 곧은 입구에서도 존 해리슨은 검은색 거대한 이물질처럼 보였다. 자이가이스트의 가장 강력한 집행자로서 그는 특별히 맥코이의 방문을 열 수 있는 암호와 카드키를 임시로 발급받았다. 벽에 딱딱한 태도로 붙은 키패드가 그나마 존 해리슨과 가장 친화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는 고민하지 않고 암호를 입력하고 카드키를 인식시켰다. 


  잠금장치가 풀리는 소리가 곧 존 해리슨만의 노크였다. 그는 거슬리지 않도록 문을 밀었다. 창문가에 서 있던 레너드 맥코이가 고개를 홱 돌리면서 순간적으로 보고 있던 무언가를 가슴 아래로 내려 가렸다. 해리슨은 못 본 척했다. 


  “의례적인 검사입니다. 협조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어떻게?”

  “방 안을 수색할 수 있게 허락하시면 됩니다.”


  맥코이는 창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해리슨은 그의 방관을 허락이라 이해하고 곧바로 서랍을 뜯을 듯 열었다. 손을 세로로 세워서 들어갈 수 있는 틈은 빼놓지 않고 훑었으며 책장의 뒤편까지 확인했다. 맥코이는 정확하고 차별 없이 수색에 임하는 사제장의 행동을 말없이 눈으로 지켜보았다.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라고는 오로지 그가 가슴으로 가리고 있는 무언가 뿐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맥코이가 서 있는 창문가에는 침대와 가까이 붙은 낮은 서랍장이 있었다. 닥터의 므네모시아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리슨이 가라앉은 눈으로 맥코이를 응시했다. 맥코이가 비켜났다. 지극이 평상적인 손길에 끌린 서랍이 거의 빠질 듯이 돌출되어 나왔다. 해리슨은 거기에 숨어 있던 므네모시아의 개수를 세었다.


  늦게나마 마커스의 법률에 조목조목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맥코이는 단 한 번도 므네모시아를 삼킨 적이 없었다. 해리슨이 손으로 알약을 모았다.


  “한 번도 복용 수칙을 지키지 않으셨군요.”


  맥코이는 부정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알약을 굴리면서 다시 한 번 개수를 센 해리슨은 맥코이가 단 한 개의 므네모시아를 소비한 사실을 알아챘다. 그러나 그것이 레너드 맥코이를 숱한 위법자 중 하나로 인식한 존 해리슨의 판단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다.


  “당신은 즉결 처분이 불가능한 상대이므로, 먼저 당신의 처분을 중앙에 물은 뒤 다시 오도록 하겠습니다.” 


  최근에 각광받기 시작한 성직자들의 우두머리 역시 법률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법전보다 우월한 레너드 맥코이를 무정한 시선으로 동공에 담았다.


  “안녕히 계십시오, 닥터.”


  존 해리슨이 돌아서자마자 종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해리슨은 맥코이가 태연함을 유지하면서도 감추고 싶어 하던 것이 종이, 서류, 혹은 편지라는 것을 직감했다. 위법한 인물은 해부에 가깝게 파헤치는 게 사제장의 원칙이었고 성미였지만 그는 별 말 없이 박사의 방을 나갔다. 맥코이가 편지를 꼭 쥐었다.



  닥터 레너드 맥코이에게. 이 편지가 제대로 도착을 할지, 혹은 당신이 이것을 펼쳐 읽어 볼 아량과 여유가 있는 인물인지도 확신이 서지 않지만 당신이 므네모시아의 발명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난잡한 손글씨에 대해서는 양해 바랍니다. 여기는 전자기기가 없는데다가 모종의 이유로 지금 손이 떨리고 있거든요. 


  닥터는 사제장이 아니니까, 제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며칠간 므네모시아를 복용하지 못했다는 것을 굳이 비난하지 않을 거라고 믿습니다. 여행을 하고 있던 도중 약을 잃어버렸고, 여기는 외딴 동네라서 통제 센터와 멀리 떨어져 있거든요. 하지만 그 행운이 닥터에게 편지를 쓰게 하고 비극을 폭로할 용기를 주었군요. 


  근래 들어 박물관이나 영화관 등이 급속도로 손익이 떨어져 문을 닫는 경우가 속출한다는 현상에 대해 들어본 바가 있으신지 모르겠습니다. 조사해 보니 세상 모든 사람들이 므네모시아를 먹기 시작하고 두세 달이 지나고 두드러진 사건들입니다. 대학에 있을 시절 학생들의 걸음걸이가 점점 통일되어 간다는 것을 발견했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하루 한 번 므네모시아를 먹는 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사제들에 의해서 무참히 살해된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어떠한 동정도 표현할 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 또한 보았습니다.


  저는 이제 닥터에게 물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자이가이스트를 휘두르는 므네모시아라는 것에 대해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다리로 걷는 거친 여행길이 아니었으면 절대로 인식할 수 없었을 중요한 회의입니다. 이에 대한 닥터의 해답을 구합니다. 제임스 커크 드림.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Chapter 1. 법률에 우선하는 자The Man Beyond the Law



  인부들이 붙어서 스크린을 설치하고 있었다. 모든 주거 구역에서도 보일 수 있도록 스크린이 설치되는 지점은 하나뿐인 연구 기관인 리서치의 꼼꼼한 계산을 걸쳐 지정되었다. 이 시대에는 많은 것이 하나뿐이었다. 대륙을 숱하게 분할하던 많은 국가들도 하나로 대통합되었고, 그 숫자를 헤아리기도 어려웠던 ‘대학(University)’은 새로이 개편되어 이 시대의 유일한 교육기관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옛 국가들이 서로의 기술력을 자랑하며 앞 다투어 세우던 연구소들은 ‘리서치(Research)’라는 타이틀에 흡수되었다. 


  제일 먼저 스크린 설치를 마친 팀이 나왔다. 부지런히 기둥과 구조물에 붙어 있던 인부들이 내려오고, 안전모를 쓴 남자가 시범 삼아 스크린을 켰다. 하얀 불빛이 스파크처럼 화면을 지나간 뒤에 스크린을 제작한 회사의 명칭마냥 어떤 단어가 영상을 재생하기 전까지 한참이나 떠 있었다. ‘자이가이스트(Zeitgeist)’라는 단어를 한참 바라보고 있던 남자가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물었다.


  “화면이 왜 안 뜨는 거야?”


  그러자 모자를 벗고 머리카락에 묻은 땀을 닦던 갈색 머리가 내려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잊지 않고 흰색 안전모를 다시 챙긴 그는 스크린과 잠시 씨름을 하던 남자와 자리를 바꿨다. 갈색 머리는 아슬아슬한 난간을 밟듯 거대한 스크린의 테두리 주변을 맴돌면서 이것저것 손을 대고 만졌다.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다.


  “이제 나온다!”


  두껍고 위엄 있는 글씨체의 자이가이스트가 지나가고, 지금은 꽤나 보기 드물어진 꽃과 동화책 삽화처럼 맑은 이파리가 달린 나무가 나왔다. 무리들은 자신들도 처음 보는 그 영상을 말없이 지켜보았다. 


  아름다운 꽃과 나무는 점점 검은 연기와 붉은 피에 젖어 시들어갔다. 몇몇이 작게 진저리를 쳤다. 화면 귀퉁이에서 쑥 튀어나온 총구가 꽃잎의 수술과 암술을 비비면서 짓이겼고,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싸늘하게 색깔이 증발해가는 영상에서 다시금 고개를 든 것은 꽃과 나무와 총과 탄피가 널브러진 땅바닥에서 피어난 노란 식물이었다. 


  므네모시아, 인간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 줄 최고의 선택입니다. 노란 식물은 그 안에서 하얀 알약을 탄생시켰다. 하루 한 번 복용하는 것을 잊지 마세요. 자이가이스트의 시민이라면 누구나 도시의 통제 센터에서 므네모시아를 배급받을 수 있습니다. 


  곳곳에서 그들과 비슷하게 스크린을 설치한 뒤, 기기를 작동시켜 보는 팀들이 생겨났다. 그들이 켠 스크린에서도 똑같은 이미지와 문구가 되풀이되었다. 




* * *




  2512년부터 2513년까지 제 3차 세계대전은 고작 1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1년간 소모된 첨단 무기들과 그것들을 자극하고 또 자극을 받았던 이기적인 음흉함은 20세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더 이상 되풀이될 수도 없는 초유의 사건들이 폭발했고 그 모든 여파를 고스란히 떠안고 사라진 사상자들의 수는 집계조차 불가능했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이라고 평가 받았던 국가들이 끝을 모르고 추락했다. 그 정치 체계와 관계없이 붕괴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무너졌으며 수상이나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달고 다니던 인물들의 서거 소식은 너무도 흔해 대중들의 조명을 받지 못했다. 


  자이가이스트는 그 무렵, 정확히는 2519년에 생겨났다. 새롭게 세상을 지칭하기 위해서 고개를 든 자이가이스트는 모든 족속들의 기대를 받기 시작했다. 지독한 카오스를 통해 고삐 풀린 인간들이 얼마나 무시무시한지 깨닫게 된 보통 사람들부터 전통적인 지도자, 지도자가 되고 싶은 과거의 비주류 세력 모두가 모여 자이가이스트를 구심점으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전쟁이 마무리 된 이후 자이가이스트는 본격적으로 그 모양새를 갖춰갔다.


  자이가이스트의 설립을 서술하는 내용을 지나고 나면, 대학에서 사용하는 역사 교재가 두 갈래로 분권된 이유가 드러난다.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허락된 단 한 명의 정치적 지도자 알렉산더 마커스를 다루는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전쟁의 위험을 뿌리 뽑은 레너드 맥코이를 다루는 가에 따라 깊게 다뤄야 할 사항들이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20세기의 인물들이라면 주저 없이 독재자 혹은 파시스트라고 손가락질을 알렉산더 마커스는 26세기의 자이가이스트에서는 ‘아버지(Father)’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전쟁에 굴복하며 깊은 절망과 자괴감에 침몰한 과거의 종교는 몇몇 단어와 개념들을 남기고는 모조리 사멸했는데, 마커스는 남은 과거의 흔적들을 이용할 묘책을 궁리하다 그것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 덕택이었다. 아버지라는 말은 이제 알렉산더 마커스의 상징이지만, 그것이 옛날부터 자아내던 인자하고 믿음직한 고해실의 신부 이미지는 소멸되지 않고 도리어 마커스에게 입혀지는 것이다. 물론 마커스는 유구한 개념과의 괴리감을 잠재우기 위하여 일정 기간 동안은 유순한 태도를 보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마커스가 추대한 과학적 성인(聖人)이었다. 그는 자이가이스트를 설립하는 데에 일조하지도 않았으나 마커스는 그에게 전 영역을 아우르는 면책 특권을 부여하면서 파격적인 대우를 아끼지 않았다. 그의 존재 가치가 급속도로 팽창한 건 그의 발명품인 므네모시아 때문이었다.


  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당시 레너드 맥코이는 18세였다. 인간이 빚어낼 수 있는 최악의 비극으로 평가받는 전쟁 속에서, 그는 부상의 고통을 이기지 못해 총알받이로 전장에 뛰어들었던 부모님의 모습과 참전 병사들의 광기를 목격했다. 이후 그는 인간들의 파괴적 욕구 그 자체를 두려워하게 되었다. 레너드 맥코이를 위한 교과서는 18세 청소년의 트라우마를 ‘과학적이고 도덕적인 영감’의 양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초창기의 자이가이스트가 유망한 인재들을 흡수하기 위하여 조건 없이 미성년자들을 받아들이겠다는 정책을 발표하자, 레너드 맥코이는 곧장 자이가이스트에 흘러들어 그가 유년기부터 재능을 보였던 과학에 몰두했다. 맨 처음에 그는 혼자서 자신의 충격적인 기억을 머릿속에서 소거하기 위한 약을 조합했다. 약물이 실패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그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음을 인정한 시기에 마커스가 맥코이의 능력을 알아보았다. 마커스는 젊은 맥코이에게 평화를 위한 지름길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를 설득했다. 몇 년 뒤 자이가이스트의 지원을 받으며 연구를 거듭한 레너드 맥코이는 인간들의 본질적인 광기를 중화시킬 수 있는 므네모시아를 발명하였다.


  자이가이스트가 그들의 슬로건을 발표할 무렵에 때마침 완성된 므네모시아는 더할 나위 없이 반가우면서도 이용하기 쉬운 도구였다. 생존을 위한 배경으로서 대통합체로 인정을 받긴 했지만 자이가이스트는 보통 사람들의 감정적인 명분을 얻는 작업에서는 미흡함을 보였다. 그래서 그들이 앞세운 것이 통제되어야 마땅한 인간의 악성(惡性)과 이에 대항하는 므네모시아였다.


  마커스의 계획적인 독려로 므네모시아의 놀라운 효능과 그 쓰임새가 곳곳에 알려졌고 공무원들이 므네모시아의 복용에 앞장섰다. 이와 더불어 그것을 제조할 기술이 있는 자이가이스트란 조직의 중요성과 위상을 드높일 문구들이 차츰차츰 시민들의 눈과 귀를 자극했다. 교육을 받아야 하는 나이의 남녀는 레너드 맥코이의 일생과 기적을 동시에 배우면서 그에게 경외감을 가졌고, 연구 기관 리서치는 그에게 헌정되었다.




* * *




  리서치의 내부는 대개 하얗거나 회색이었다. 감상을 돋굴 만한 빛깔도 부족하고, 흥분할 이유가 없는 숫자와 과학을 다루는 연구소가 한순간 들뜰 때가 있다면 그것은 한 명에 의해서만 작동할 수 있는 문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미로의 최종장 같은 석판의 형태를 띤 매끈한 문은 매끈함이나 가공된 솜씨가 차라리 신전을 지을 때나 어울릴 법했다. 눈치가 있다면 거기서 마커스의 속셈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컨베이어 벨트가 책상 단위로 뚝뚝 끊긴 것처럼 정렬된 학자들이 열리는 문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실루엣은 다른 이들과 비슷하게 팔락이는 가운을 입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보고 한 마디씩 했다.


  “안녕하세요, 닥터.”


  연구소에서 일하는 모든 학자들이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물들이었지만 그들은 닥터라는 말을 마치 남자의 이름인 양 불렀다. 남자가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인사를 받았다. 그가 사는 리서치의 꼭대기는 오로지 로비의 가운데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닿을 수 있었는데, 이후 엘리베이터의 문부터 리서치의 출입구까지 이어진 길이 마치 하나의 상징성을 자랑하듯 반짝였다. 그는 그것을 자각할 때마다 부담스러워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닥터.”


  로비를 가로지르는 방향으로 걸어가던 여자 연구원이 친절한 미소를 띠었다. 한낱 연구원이 리서치의 주인인 레너드 맥코이 박사의 목적지를 알 리가 없건만, 여자는 진심으로 그의 여정에 성원을 보내주었다. 맥코이는 이럴 때마다 마커스가 자신을 위인으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과소평가한 것을 후회했다. 알렉산더 마커스는 레너드 맥코이를 법률보다 상위에 위치시킴으로써 그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이끌어내는 기염을 토했다. 


  맥코이의 승강기가 작동할 때마다 호출을 받는 차는 어김없이 출입구의 코앞에 대기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차에 탑승했다.


  “중앙 통제 센터(Prime Control Center)로 가요.”


  차량이 출발했다. 가장 빠르게 설치된 수도의 스크린이 맥코이의 발명품을 광고하고 있었다. 맥코이는 표정을 굳혔다. 두 거물 사이의 직선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아 맥코이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앙 통제 센터에 도착했다. 차가 주로 마커스의 연설 무대로 쓰이는 센터 뒤 커다란 공터를 둥글게 지났다.


  맥코이는 마커스를 만나는 데 아무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곧장 그의 집무실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가 들고 다니는 주머니 속 카드키는 오늘도 쓰이지 않았다. 


  “근래 방에서 나오는 일이 없더니, 어쩐 일인가?”


  마커스는 자연스럽게 맥코이를 관찰한다는 사실을 밝히며 말했다. 


  “내 생각에 당신은 처음부터 날 속였던 것 같아요.”

 

  맥코이는 앉지도 않고 마커스의 앞에 서서 툭 내뱉었다. 마커스가 맥코이에게 집중하는 척 하면서 앞에 두고 있던 서류를 뒤집었고, 서류의 내용을 들여다보려던 맥코이는 짧게 미간을 좁히고 다시 마커스를 보았다. 


  “내가 또 자네가 싫어할 만한 일이라도 했나?”

 

  마커스는 아예 뒤집힌 서류에 두 팔을 내려놓았다. 


  “시치미 떼시는 게 수준급이시네요. 오늘 지적할 것만 해도 여러 개인데. 도대체 스크린은 왜 설치한 겁니까? 노골적인 선전의 대상 정도로 내 므네모시아를 추락시키고 싶었습니까? 게다가 애초에 모든 사람이 그걸 사용할 필요는 없어요. 므네모시아 복용을 법으로 못 박아 놓은 것은 분명히 옳지 못한 일입니다.”


  마커스가 맥코이에게 웃음을 보냈다. 마커스는 레너드 맥코이의 위대한 능력은 오로지 과학자의 영역에 국한되는 것 같다며 속으로 조소했다. 


  “자네의 의견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하도록 하겠네. 첫째로 나는 전쟁에 대한 자네의 두려움을 존중했네. 그러니 내가 므네모시아를 이용하는 방식 역시 존중해야 해. 그리고 지적하는 시기가 너무 늦었다고 생각되지 않나? 자이가이스트의 선언식에 자네는 뭘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마커스가 말을 잇고 있을 무렵 맥코이의 표정은 그의 의견을 인정하기보다는, 그보다 더 고차원적인 분노에 휩싸여있는 것 같았다. 그가 들먹이는 6년 전의 선언식에서 마커스는 누구보다도 ‘아버지’였었다.


  “그리고 자네는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에겐 특별한 유전자라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인간이라면 누구나 포악해지고 한순간에 미칠 수 있어. 전쟁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모든 인간들이 그에 대한 생각은 할 수도 없어야 할 거 아닌가? 자네의 므네모시아는 광기의 뉴런에 가해지는 전기 충격과도 같지. 뇌 전체를 지져버리는 건 아니지 않나.”


  입을 다물고 마커스는 시계에 잠시 신경을 썼다. 그는 맥코이를 경시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업무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속 만년필이 대신 서류를 누르게 되었는데, 맥코이는 마커스와 만년필 모두에게 잠시간 주의를 기울일 수가 없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겠네.”


  마커스가 자리를 떴다. 집무실을 지키는 경비원은 주인이 없는데도 감히 그의 집무실에 남아 있는 레너드 맥코이에게 경고하지 않았다. 


  맥코이는 넓게 뚫려 있는 창문 바깥을 보았다. 그 곳에서도 스크린은 보였고 늘 위치해 있던 마커스의 연설장도 눈에 들어왔다. 다만 맥코이가 센터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공터는 길고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의 그림자로 가득 차 있었다. 


  다시 차를 타고 리서치의 거주지에 돌아올 동안 맥코이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관제 방송이 그의 기분과 상관없이 흘러나왔다.


  [ 오늘을 기점으로 므네모시아의 복용이 시민들의 의무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동안 므네모시아는 그 탁월한 효력을 통해 인간의 폭력성과 광기를 절제해 주었으며, 아버지 알렉산더 마커스는 제 3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주년을 기념하여 전쟁의 두려움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므네모시아 복용으로 평화와 안정을 도모할 수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만일 므네모시아 복용을 거부하는 이들은 전쟁에 준하는 소요를 자극할 수 있는 유발자들로 지목되어 법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도 전하셨습니다. ]


  아나운서가 원고를 이어 읽기 위해 숨을 고르는 사이에 희미하게 마커스의 음성이 깔렸다.


  [ 더불어 중앙 관제 센터에서 ‘사제(Priest)’ 집단이 출범하였습니다. 이들은 앞으로 자이가이스트의 정제된 무력집단으로서 공정하게 법을 집행하고 범죄자들을 처벌해 치안을 수호하며, 시민 여러분들의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앞장설 이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 출범식에서 발표되었던 연설문은 인터넷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으며…. ]


  다음 날 각 지역을 담당하는 통제 센터로 거대한 인파가 몰려들었다. 므네모시아를 받으러 온 시민들 덕분에 맥코이는 오랜만에 적당히 소란한 거리를 볼 수 있었다. 모두의 존경과 배려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박사에게는 직접 한 달 치 분량의 알약이 배달되어 왔다. 


  자신이 만든 발명품을 신뢰하는 것보다 마커스에게 고까운 감정이 컸던 맥코이는 약병을 서랍에 넣었다. 마커스가 예전에 자신이 했던 여러 발언들을 비롯하여 그를 의심하는 데 열을 올리지 않았던 과거가 씁쓸했으며, 고작 약병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의 후회를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맥코이와 반대의 행동을 취했다. 모든 사람들의 입 안으로 므네모시아가 한 알씩 들어갔다. 생추어리(Sanctuary)에 기점을 마련한 성직자들은 만일을 위한 총을 챙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