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with Henry Hart
- Written by. Jade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03. 경쟁하는 질서들
비행기가 동굴처럼 어두운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막히지 않은 입구로부터 햇빛이 들어와 비행기는 그럭저럭 다른 물체와 충돌하는 일 없이 바퀴를 내렸다. 멀린은 자신이 마지막으로 조종했던 승강기를 미세하게 빗겨나가도록 비행기를 세웠다.
파일럿 자격증을 따지 못한 두 명의 신입 요원과, 비행기 운전을 아주 귀찮아하는 다른 한 명의 기사를 대신해 발렌타인의 기지로 멀린이 재입성했다.
멀린은 총 한 자루를 챙겨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머리가 날아간 경비병들과 열려진 채 방치되고 있는 감옥들의 문짝으로 통로가 어지러웠다. 멀린은 어딘가에 숨어 있는 인기척은 없는지 감각을 곤두세우면서 장애물들을 넘어 다녔다. 발렌타인의 칩을 가동한 자가 필경 다녀갔을 이곳에서 멀린은 범인의 흔적을 찾아내야 했다.
발렌타인의 기지에 오려면 비행기를 타야만 한다는 제약이 버티고 있어서 대부분의 시신들이 처리되지 못한 채 부패되고 있었다. 멀린은 그 썩어가는 무리들 사이에서 살아 있는 자의 자취가 있을 리 없다고 판단한 듯 걸음 속도를 높였다.
멀린은 손 한 짝이 없어진 발렌타인을 지나치기 직전에 다리를 붙였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런.”
주변에 굴러다니는 오른손이 없었으므로 멀린은 바로 위쪽을 향해 내달렸다. 미미하게 남은 비상 동력이 유일하게 공급되고 있는 오퍼레이팅 룸에서 멀린은 냅다 던져진 발렌타인의 신체 일부를 포착하고야 말았다. 멀린이 고개를 저으면서 테이블과 일체된 형태의 스크린을 두드렸다.
/설치된 시스템이 없습니다./
“뭐?”
멀린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기록이 없습니다./
멀린은 당연히 그 메시지를 믿지 않았다. 멀린이 총을 세워두고 본격적으로 스크린을 조작해갔다. 그리고 그는 8분 만에 시스템 안에 찌꺼기처럼 남은 디렉토리를 끄집어냈다.
/최종 변경 사항: 생체 보안 시스템에서 음성 인식 보안 시스템으로 설정 변경./
멀린은 디렉토리 창을 옆으로 제쳐두고 최초 입력 시에 남아 있는 음성 파일을 수색해보았지만, 저장 장치 안에 오디오 파일은 한 개도 없었다.
별 수 없이 멀린은 비행기 안에서 시스템과의 두 번째 힘겨루기를 기약했다. 그가 총을 챙겨서 서둘러 아래로 내려갔다.
⁂
만찬장의 중앙을 꿰찬 탁자의 반절이 비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서로를 믿을 수 있는 네 명의 킹스맨들이 엄숙한 자태로 모였다. 에그시는 퍼시벌과 평행하는 좌석에 엉덩이를 붙여야만 했다.
“발렌타인의 USIM 칩은 모두 폐기했어요.”
록시가 제일 먼저 멀린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며 말했다.
“헌 걸 줄 테니 새 걸 달라는 식으로 나온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라서 본부의 자금을 꺼내 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건 괜찮아. 수고했네, 란슬롯.”
숫자를 읽은 멀린의 눈썹이 살짝 구부러지는 듯했다가 평상시의 모습을 되찾았다. 습관대로 성가신 문서 작업을 생략한 퍼시벌이 자신이 조사한 사항들을 구술했다.
“일전에 발렌타인의 부탁으로 위성을 빌려줬다는 인물은 샌프란시스코에서 잡혔다고 해. 구속된 일자는 칩이 작동했던 시기보다 하루 전. 고로 그 사람은 용의선상에서 제외해도 무리는 없을 거야.”
“가장 의심스러운 쪽이 깨끗한 걸로 밝혀지고 말았군.”
“그 와중에 발렌타인이 사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자금들이 상당 부분 증발했대요. 발렌타인의 주변 인물들도, 계좌를 관리해주던 직원들도 모두 금시초문이었다고 해요.”
에그시가 순서에 맞춰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모든 일에는 돈이 필요하지. 아마 그 놈이 칩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 말고 다른 속셈이 있나본데.”
“시스템 분석은 어떻게 됐나?”
퍼시벌이 멀린에게 물었다.
“발렌타인의 손을 잘라서 생체 보안을 해제했더군. 음성 인식 시스템으로 보안 방식을 바꿨는데 분석할 만한 파일도 없어서 이쪽도 막힌 길이야.”
“그럼 어디서 한바탕 또 학살이 벌어질까요?”
에그시가 대뜸 흘린 한 줄에 세 사람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록시가 가장 활발한 표정 변화를 드러냈고 퍼시벌은 눈꺼풀을 살짝 내리까는 걸로 에그시의 추측에 신빙성이 있다는 뜻을 나타냈다. 잠시 예상되는 경우를 떠올려본 멀린이 입을 열었다.
“발렌타인의 칩을 건드린 이유는 하나밖에 없겠지. 대규모 테러가 발생한다는 첩보에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겠어.”
“테러 예보는 지금도 충분히 많은데요?”
“그건 권력과 일부 유명 인사를 노린 거지, 불특정 다수의 목숨을 목표로 한 것들이 아니잖나.”
에그시는 멀린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이윽고 멀린이 새로운 주제를 제시하면서 각 킹스맨들에게 임무를 하달했다.
⁂
마드리드의 스페인 광장은 스페인에서도 최고로 번화한 지역을 알리는 얕은 녹지였다. 언제나 집중 배치되는 경찰들의 수보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의 출신 국가 개수가 더 많을 그곳은 자신을 한 번에 어필하고자 하는 과격분자들이 꿈꾸는 장소이기도 했다.
그것은 해리 하트가 반기지 않을 무가치한 망상이었다. 해리가 자신을 불러줌으로써 완벽한 생명을 얻은 헨리 하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섬길 이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 모든 걸 용인할 수가 없었다. 그는 스튜디오형 방들과 상점으로 설립된 좁은 건물의 꼭대기 층에 도착해 문을 두드렸다. 건물을 통틀어서 딱 한 개만 뚫려 있는 창문 너머로 스페인 광장의 상징인 동상이 얼핏 보였다.
우악스러운 말씨들이 스페인어로 투덜대는 소리가 복도까지 들려왔다.
피부가 탄 남자가 뒤쪽을 향해 큰 소리를 내지르면서 현관문의 고리를 열고 눈동자 하나를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헨리가 문을 발로 찼다. 삽시간에 뜯겨져 나간 나무문에 깔린 남자는 버둥대다가 자신의 미간이 뚫리는 걸 막지 못했다. 헨리가 총을 들어올렸다.
어울리지도 않는 묵직한 라이플을 들어 올리던 일당들은 헨리 하트의 정확한 사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두더지처럼 쪽방마다 불쑥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던 잠재적 테러리스트들이 개성적인 방향으로 쓰러졌다. 헨리는 그들을 굳이 피하려고 하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밟으면서 총을 쏴댔다.
놀랍게도 매복을 준비하고 있던 놈이 있었다. 헨리는 일부러 먼저 다리를 맞춘 뒤에 놈을 넓은 곳으로 끌어냈다. 고통과 공포가 가득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헨리가 표정을 구겼다. 그는 몹시도 시끄러운 주둥이를 발뒤꿈치로 짓누른 다음 양쪽 눈에 한 발씩 총알을 박았다. 비로소 고요함이 찾아왔다.
헨리는 탄창을 교체하면서 테러리스트들이 제조한 폭탄을 살폈다. 그것이 안전성보다는 위력에 치중하여 다소 조잡해진 폭발물임을 확인한 그가 갑자기 타이머를 만지작댔다. 이 건물에는 테러리스트의 거점 말고도 핑거푸드를 파는 가게와 작은 레스토랑 따위가 있었다.
헨리는 그것을 모두 상기한 뒤에 주저 없이 타이머의 버튼을 눌렀다. 타이머가 급박하게 3분을 헤아려갔다.
스페인 광장을 향하여 북쪽으로 올라가고 있던 록시가 스페인 신진 디자이너의 샵을 거칠 무렵이었다. 거대한 폭발음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가, 자신이 스페인에 온 목적을 기억해내고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지점을 쳐다보았다. 록시가 막아야 했던 테러리스트들이 숨어 있다는 그 거리였다.
⁂
“조만간 괜찮은 집을 찾을 거예요. 그 전까지는 나가면 안 돼.”
해리는 거울상이 자신에게 이야기하는 듯한 기분을 맛보았다.
“…어째서?”
“더러운 것들이 좀 있거든. 당신한테 해로울 텐데.”
“더러운 것?”
“당신 목소리는 내 목소리보다 훨씬 아름다워.”
헨리 하트는 문맥에 맞지 않은 소리를 했다. 해리가 그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자신의 거울상이 매끈하고 흠집이 없는 종류와는 거리가 멀다는 걸 직감했다.
“당신이 굳이 입에 담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야. 그런 데에 당신을 낭비하지 마, 해리.”
“그럼 자네에 대한 얘기를 하면 될까?”
그러자 헨리가 웃었다. 해리조차 자신의 얼굴로 그런 미소를 지어본 적이 없었다.
“5시간 뒤에.”
헨리 하트는 해리가 보기에는 모두 똑같아 보이는 머리칼에 굳이 그리움 가득한 감촉을 묻혀주고 떠났다.
해리는 병실에 면해 있는 작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자신의 껍질을 자청하는 자가 스치고 지나갔던 머리카락은 부식되거나 색이 변하지는 않았다. 해리는 자신의 얼굴이 그런대로 멀쩡해 보인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심지어 그의 턱에는 수염도 없었다.
자리로 복귀한 해리가 시곗바늘을 읽었다. 헨리 하트가 예고한 시간까지는 90분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의식을 되찾았을 때 옆에 있었던 또 다른 인물은 허겁지겁 나가서는 아직도 오지 않고 있었다. 해리는 그가 영영 떠났음을 짐작해냈다. 남자는 무척이나 겁에 질려 있었었다.
해리는 자신과 일치하는 외양과, 자신을 향한 폭주와도 같은 애정을 두루 갖춘 자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하늘은 해리의 사고가 진전되는 속도보다 느릿하게 어두워졌다.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해리에게도 아주 잘 어울리는 흰색 드레스 셔츠를 입은 헨리 하트가 건조한 분노를 띤 눈빛으로 바닥을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었을 때 헨리는 침대에 앉아 있는 해리를 향해 웃어주고 있었다. 해리가 짧게 미간을 좁혔다.
“늦지 않았는데. 아니에요?”
헨리는 순수하게 물었다. 그는 해리가 잠깐이나마 인상을 찡그렸다는 걸 본 모양이었다.
해리는 푸석한 화약 냄새를 맡고 있었다.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왔는지 솔직히 밝혀주게.”
“스페인에서 광장 테러를 꾀하고 있던 놈들을 죽였어요.”
헨리는 너무도 쉽게 대답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해리 하트가 원하는 건 무조건 제공해야 한다는 명령어라도 입력된 듯했다. 해리는 꽤나 오랫동안 적합한 답변을 짜내야 했다.
“어째서?”
“당신의 뜻과 반대되는 인간들이니까.”
해리가 멈칫했다.
“나는 오늘 자네와 처음 이야기하는 건데.”
“이름 불러줘요, 내 이름.”
“나는 자네에게 내 속마음을 얘기해준 적이 없어, 헨리.”
“아니.”
해리는 자신의 상이 무엇을 바탕으로 저러한 유아적인 단호함과 왜곡된 순진함을 발휘할 수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당신은 나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내가 해야만 하는 일들을 알려줬어요.”
“…말해봐.”
헨리는 기쁘게 자신의 탄생을 보고했다.
⁂
해리 하트는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가슴에 달라붙은 곱슬머리를 한 번 쓸었다. 헨리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그는 태어난 지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므로, 해리는 헨리의 모습을 머리로나마 이해하려고 애썼다.
해리는 곧 실패했다. 반면 헨리는 누구보다 안정적으로 해리의 소리를 들으면서 잠을 자고 있었다. 헨리는 자신의 심장 박동이 매우 불규칙하다고 고백했다. 그것은 복제 인간의 한계였다.
해리는 발렌타인의 극단적 실용주의와 몇몇 과학자들의 눈먼 성취욕으로 빚어진 이 질서 없는 존재를 어떤 식으로 포용해야 할지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다. 일단 해리는 은근히 자신의 칭찬을 바라는 듯한 헨리를 나무라지는 않는 것으로 대화를 일단락 지었다. 한낱 신경파에 휘둘려 이성을 잃고 폭력을 남발한 자신이 테러 집단을 처단하고 왔다는 이에게 훈계를 줄 입장도 아닌 듯했다.
해리가 시선을 내렸다. 헨리 하트는 한동안 깨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불완전한 생명 덕에 한 가지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반쪽짜리 인간과는 다르게 해리의 머릿속에는 너무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에그시는 해리가 자신의 의사조차 물어보지 않은 채 던진 작별을 떠안은 날 이후 처음으로 해리와 자신과의 연결 고리를 손에 쥐었다. 17년 전에 해리가 에그시에게 주었던 펜던트였다. 에그시는 최종 단계를 앞두었던 하루 동안 왜 기념사진 하나를 찍자는 요청을 하지 않았던 건지 후회했다. 해리가 그에게 가시적으로 남긴 것은 오직 그 목걸이뿐이었다.
하마터면 록시가 폭발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에그시가 반사적으로 떠올렸던 것은 동료의 부재였으며, 그것은 자연스럽게 현재 그의 곁에 부재한 해리 하트에게로 이어졌다. 해리는 정말 그에게 펜던트 말고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자신의 은인을 정식적으로 추모할 공간도 없어 에그시는 그저 손바닥에 펜던트 자국만 냈다.
해리를 추도하는 것에서 그치지 못하고 자꾸만 살아 있는 해리 하트의 모습을 바라는 욕심이 에그시가 기를 쓰고 정립한 갤러해드의 질서를 뒤흔들었다.
⁂
멀린은 마치 혼잡한 교차로를 지켜보는 심정으로 각 지부에서 보내온 첩보들을 읽었다.
멀린은 마드리드에서의 사건이 우연일 지도 모른다고 점쳤던 자신의 추측을 잘 구겨서 멀리 던져버렸다. 터키에서 폭동을 주도한다는 세력은 멀린이 분석을 거쳐 요원을 파견하기도 전에 괴멸 당했으며,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의 파리에서 예고되었던 테러도 그와 비슷하게 무산되었다. 붕괴된 각국의 의회가 재건되는 속도보다 범죄자들이 나동그라지는 게 빠를 지경이었으니, 멀린은 이에 반색해야 하는 건지 뒷조사를 시행해야 하는 건지 헷갈려했다.
때마침 멀린의 호출을 받은 에그시와 록시, 퍼시벌이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안색이 심각하군, 멀린.”
퍼시벌이 평했다. 멀린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늘 자네들과 논의해야 할 안건 때문이겠지. 다들 앉게. 이른바 ‘신질서’사마리아인에 대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자네들의 의견을 듣고 싶군.”
해리 하트가 히스로 공항을 통해 영국으로 입국한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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