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헨리] Frankenstein 05

- Kingsman/Full-length 2015. 8. 3. 16:20 posted by Jade E. Sauniere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with Henry Hart

- Written by. Jade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05. 왕국 탈환






  킹스맨의 전통적인 탁자는 오래간만에 그 고전적인 쓰임을 발휘하고 있었다. 도합 네 사람의 눈동자가 아날로그의 최전방을 달리는 마른 봉투에 집합해 있었다. 


  “사마리아인이 우리한테 이런 걸 왜 넘겨줬을까요?”


  가장 먼저 록시가 의문을 제기했다. 


 “그 양반도 과로 직전인가?”


  에그시는 멀린의 눈초리와 그보다 더 싸늘한 퍼시벌의 눈길을 받고는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소리 없이 에그시를 혼쭐낸 퍼시벌이 멀린에게로 주의를 돌렸다. 


  “그가 하필 우리에게 제네바의 UN 본부가 습격당할 거라는 정보를 줬는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 같은데.”


  “동의하네. 편지에 우리 정체를 누설할 가능성이 있는 표현은 넣지 않았으니까.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하는 일을 정확히 알고 있어.”


  “뭐라고 쓰셨는데요?”


  “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고생하는 사마리아인에게 후원을 해주고 싶다 했지.”


  에그시는 순간 그게 더 수상하지 않느냐는 코멘트를 달려다가 생각을 고쳐먹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은 간접적으로나마 세계 사법 기관들의 후원 아닌 후원을 받고 있었다. 


  “에그시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 자는 아마 해리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꽤 있을 거야. 사마리아인에 대해 심층적인 조사를 감행해야겠네.”


  “제네바 일은 어떻게 하죠?”


  “믿을 만한 정보인지 확인을 해야지. 만약 우리가 나설 만할 수준으로 신뢰도가 충분하다면 맡아야겠고. 그는 제네바가 아닌 다른 곳을 선택했을 테니까.”


  사마리아인이 대신 처리해달라며 던져준 것 같은 일감이라는 딱지와는 별개로 킹스맨들은 정보의 가치를 이해하는 위인들이었다. 멀린의 정리는 이의 없이 받아들여졌다.  


  “조만간 자네들이 배치될 곳을 알려주겠네. 오늘은 여기까지.”


  그렇게 멀린은 만찬장에 혼자 남아 생각할 시간을 벌었다. 

 

  봉투를 분석실에 보내긴 했지만 지문이나 기타 생체 정보를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했다. 게다가 멀린은 다른 데에 의지하고 있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킹스맨에 관해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았다.


  멀린은 뒤늦게 자신의 목소리가 기억났다는 사마리아인의 태도라든가 해리라면 사용하지 않았을 대명사, 딱 잘라서 해리를 모른다고 말하지는 않았던 어조 등을 곱씹으면서 이상한 가설 하나를 만들어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은 해리지만 해리는 아닌 그 누군가일 것이다.


  화면을 여러 개 띄워놓을 수 있는 컴퓨터가 절실했다. 멀린은 루프에 탑승했다. 


  그 자체로 풀 수 없는 모순을 품고 있는 명제를 해부하기 위하여 멀린은 자리에 앉았다. 그는 제일 먼저 리치몬드 발렌타인이 사적인 용도로 굴렸다는 계좌 정보를 다운로드했다. 계좌 안의 자금이 증발되었다한들 이체 기록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멀린은 다른 수사 기관에서 취합 및 정리를 마친 발렌타인의 계좌 내역을 모두 읽었다. 


  문제의 USIM 칩마저 당당한 사업의 일환으로 취급했던 발렌타인이 굳이 취리히 계좌를 끌고 온 건수가 있었다. 멀린은 발렌타인으로부터 꽤나 거금을 받은 숫자 속 인물의 정체를 들쑤셨다. 


  멀린은 의자에서 꼼짝도 않고 시어도어 라일리라는 한 미국인을 찾아내었다. 조사에 집중한 멀린의 손이 빨라졌다. 해리 하트이나 절대로 해리 하트가 될 수 없는 존재는 실체를 가진 그림자이다. 


  시어도어 라일리가 어떤 일을 했는지 알게 된 멀린이 혼잣말했다. 


  “…제대로 미친놈이었군.”





  저녁 식사가 서서히 간절해지는 시각이었다. 에그시가 어슬렁거리며 양복점에 등장했다. 멀린은 상점 쪽으로 나와 있는 법이 없었으므로 에그시는 늘 그랬듯이 2층으로 올라갔다.


  “저한테도 일 주실 거예요? 록시는 퍼시벌이랑 같이 제네바에 간다던데.”


  탁자 위로 파일 하나가 스륵 미끄러졌다. 에그시가 손바닥으로 탁 파일을 잡았다.


  “사마리아인이 누군지 알려줄 사람을 만나고 와.”

  “네?”


  에그시가 되물었다. 멀린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발렌타인은 켄터키 사건 이후 시어도어 라일리라는 자에게 거액을 줬어. 그 자의 전문 분야는 발렌타인의 목적과는 그다지 겹치는 점이 없어. 복제 인간의 현실성을 주창하는 과학자거든.”

  “복제 인간이라고요? 세상에.”


  에그시는 턱 주변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발렌타인이 그런 인간한테 왜 돈을 줘요? 우리처럼 후원자 핑계라도 댔나?”

  “후원자 혹은 동업자를 들먹였겠지.”


  멀린의 말투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살짝 건조하면서도 명확했다. 인간을 복제한다는 표현에서부터 확 거부감이 올랐던 에그시는 고개를 저을 뻔했다.


  “…대박. 그럴 리가요.”

  “사마리아인은 해리가 아니야. 그렇지만 외부인치고는 이쪽을 수상할 정도로 훤히 알고 있잖나. 정황을 무시하지는 말아야지.”


  에그시는 착잡하게 파일을 젖혔다. 네이선 라일리라는 남자의 신상 명세가 적힌 인쇄용지들과 사진이 철심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라일리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자들은 모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연구소도 폭발해버리는 바람에 증거조차 제대로 모을 수 없어 경찰은 손을 놓은 것 같더군. 그런데 연구소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지만 비공식적으로 라일리를 돕던 그의 동생이 있다.”


  네이선 라일리는 플로리다에 사는 생물학자 겸 교수였다. 에그시는 그의 얼굴과 주소 정도만 보고 파일을 위로 밀었다. 


  “사마리아인이 해리의 복제라고요.”


  “이 일을 누구에게 맡겨야 하는지 고민을 꽤 했다만, 퍼시벌은 은근히 타인을 부추기는 화술에는 약하고 란슬롯이 너보다 더 절박함을 발휘하지는 못할 테니 너에게 주는 거다, 에그시. 타인으로부터 정보를 끌어내는 데에 있어 진실한 절박함은 꽤 중요한 요인이라서.”


  사마리아인은 그에게 주인이 있다고 말했다. 신질서라는 칭송 아래 독자적인 위업을 쌓고 있는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는 글자 그대로 그를 탄생하게 만든 사람일지도 몰랐다.


  에그시는 그 문맥 속에서 해리 하트의 생존을 점쳤다. 그가 대답했다. 

 

  “…제가 다녀올게요.”

  “비행기는 3시간 뒤다. 준비해.”


  에그시의 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헨리는 잠에 빠져 있었다. 그는 해리의 기척이 있으면 곧잘 숙면을 취했다. 해리는 동질감과 혼란스러움, 적대 의식을 비롯하여 아무도 공감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 숟가락씩 섞여서 도무지 정의내릴 수 없는 덩어리를 눈동자에 안고 자신의 복제를 내려다보았다. 


  해리는 할 수 있는 대로 최대한 소음을 자제하면서 팔을 아래로 내렸다. 손바닥이 바닥에 닿는 걸로는 모자라서 해리의 몸은 어쩔 수 없이 미끄러졌다. 숨겨져 있던 총의 손잡이가 잡혔다. 


  헨리의 안구가 깨어났다.  


  “가지 마, 해리.”


  해리가 그늘 속에서 다 빠져나오지 못한 총을 놓았다. 헨리는 해리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우린 서로가 있어야 완벽해져.”


  그 순간 두 사람은 모두 감춰둔 무언가를 꺼내려 하고 있었다. 해리는 탈출을 위해 반드시 한 자루는 필요할 무기를, 헨리는 강력한 안정제가 들어 있는 주사기를 뽑아들 타이밍만 노리고 있었다. 


  “좀 더 자두게.”


  해리가 헨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갑자기 방향을 바꾼 헨리가 해리를 향하여 얼굴을 붙였다. 두 사람의 콧대가 찌그러졌고 헨리는 비인간적인 안광을 번뜩이면서 해리의 윗입술을 놓지 않았다. 


  헨리 하트는 자신이 이해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지길 싫어한다. 어느 누구도 왜 자신의 몸속에 콩팥이 두 개가 있는지, 머리카락이 검은색인지 파헤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그토록 해리 하트에게 있어 당연한 무언가로 간주한다. 해리는 헨리의 사고방식을 좇아 이 접촉이 그저 손가락을 깍지 끼는 것과 크게 엇나가는 점이 없다고 속으로 읊조렸다.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헨리가 침대 위에 누웠다. 해리에게도 평생 미지의 영역으로 남을 복제 인간의 메커니즘이 날카롭고 뜨거운 감각을 남겼다. 해리가 헨리를 살폈다. 그는 순식간에 잠이 든 것 같았다.


  해리가 신속하게 총을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금방이라도 멎을 듯한 유사인간의 두근거림만 들렸다. 툭 끊어졌다가 부르르 떨면서 연장되는 그 소리를 들으면 종잡을 수 없는 헨리의 품행을 다 포용할 수 있을 거라는 부질없는 가능성이 생겨났다.


  허나 자신의 반쪽을 위험하다고 규정한 해리는 행동을 미룰 수 없었다. 해리는 여길 나가는 즉시 킹스맨 본부로 가서 헨리 하트를 붙잡는 작전에 동참할 것이었다. 


 그 때 무섭게 눈을 뜬 헨리가 주삿바늘의 뚜껑을 내던졌다. 


  해리가 노련한 감각으로 뒤를 돌자마자 예리한 통증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약물이 비정하게 해리의 혈관을 채웠다. 


  “떠나지만 않으면 된다고 했는데.”


  주사기의 피스톤에 있던 안정제가 거주지를 다 옮긴 뒤에도 헨리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주삿바늘을 깊게 찔러 넣었다. 헨리가 해리의 총을 뺏어 던졌다. 휙 뽑혀진 주사기가 그리는 호선은 딱 피 한 방울이 나타날 만한 빨간 빛을 띠었다. 





  해리는 바로 눕혀져 있었다. 그의 목에는 동그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해리가 살던 집은 여전히 해리의 것이었다. 해리의 후임이 그를 추모하느라 갤러해드의 의자에도 앉지 못하는 판에 그의 재산이 처분되었을 리가 만무했다. 


  그 안으로 헨리 하트가 들어왔다.


  집의 구조를 꿰고 있는 헨리는 거칠 것 없이 해리의 침실과 면한 드레스룸의 붙박이장을 열었다. 20년이 넘게 가장 고귀한 원탁의 기사로 활약했던 인물의 갑옷이 헨리의 손가락에 힘입어 살랑거렸다. 헨리는 해리의 정장들 중에서 진회색 색깔이 나는 것을 골랐다.


  붙박이장에 내장된 서랍에는 시계와 반지를 위시해서 해리가 구비하고 있던 장비들이 있었다. 헨리는 해리 하트의 동작들을 그대로 따라해 옷을 입고 시계를 찼으며 반지를 착용했다. 과학자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던 복제 인간의 눈동자에서는 인간적인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는 목적의식이 뚜렷한 한 명의 기사로 탈바꿈했다. 헨리는 구두끈 하나 다시 묶지 않고 위대한 일이 발생할 곳으로 향했다. 





  “라일리 씨? 연락 드렸던 챈들러 요원입니다.”


  에그시가 능숙하게 가짜 신분증을 들이대면서 말했다. 네이선 라일리는 의심 없이 옆으로 비켜났다. 


  “아, 들어오시죠.”


  플로리다 특유의 따뜻한 햇볕이 집안을 밝히고 있었다. 연구하는 이의 흔적이 거실 테이블부터 시작해서 식탁에까지 뻗친 모습이 훤히 드러났다. 


  “형에 대해 알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요. 경찰은 연구소가 파괴되었다는 소식만 전해주고 가버리던데.”

  “시기가 시기이다보니 경찰들이 진이 다 빠졌던 거겠죠.”


  네이선 라일리는 짧은 웃음으로 에그시의 재치를 받았다. 


  록시와 퍼시벌이 잠복하고 있는 시트로앵은 플로리다의 태양뿐 아니라 스위스 제네바의 아련한 햇빛과도 멀어진 채 지하 주차장에 움츠리고 있었다. 


  퍼시벌은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와도 제네바의 UN 사무소 상공에 헬리콥터 같은 건 띄울 수 없을 거라고 단정 지었다. 주변에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공중 곡예를 부리기도 여의치 않은 환경인 고로, 범죄자들은 지하 주차장을 거쳐 가는 것 외엔 방도가 없으리라는 뜻이었다.


  조수석에서 록시는 사이드 미러를 주기적으로 힐끗거렸다. 아직 유달리 큰 밴이나 SUV가 발견되지는 않고 있었다. 


  네이선 라일리는 되는대로 오렌지 주스를 에그시에게 내밀었다. 에그시는 드라마에서 본 FBI 요원의 행동거지를 되새겼다. 


  “최근에 라일리 씨의 형이 큰 프로젝트를 맡은 적이 있는지 아는 바가 있으신지요?”


  네이선은 어렵지 않게 답했다. 


  “제가 최근에 좀 거들었던 일을 말씀하시는 것 같군요. 큰 지원금을 받고, 형 말로는 자신의 이론을 실체화할 기회를 얻었다고 했습니다. 저도 거기에는 동의합니다.”

  “그 말씀은 진짜로 라일리 박사가 복제 인간을 만들었다는 건가요?”


  지상에서 둘은 없을 방탄 슈트를 차려입은 헨리 하트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궁전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는 킹스맨 측에서 접선 장소를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잡았을 때 내심 짜증이 났다. 헨리는 애초부터 그곳에 가지 않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가장 중요한 임무를 위해 사전 답사를 할 작정이었었다. 그가 올리버 크롬웰의 조각상 앞에 있었던 건 사원 주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있는 킹스맨 요원들의 동태를 신경 써서가 아니었다. 


  영국 상원의원들은 십오 분 전에 하원에서 제출한 법안들을 형식적으로나마 심사 및 수정하기 위하여 웨스트민스터 궁전에 모두 착석했다. 그들은 멋들어진 허울을 뒤집어쓴 구시대의 유물들이었다. 해리 하트의 다듬어지지 않은 급진성이 그들에게 그런 낙인을 찍은 날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헨리 하트 속에서 숨을 쉰다.


  앞머리를 내려서 흉터를 가리고 색안경으로 사람 같은 눈매를 연출한 헨리의 자태를 의심할 자격을 갖춘 이는 아무도 없었다. 헨리는 궁전으로 입성하면서 아무런 제제도 받지 않았다.


  “퍼시벌, 저기.”


  퍼시벌은 무릎 위에 얌전히 대기 중이던 스탠다드 피스톨을 잡았다. 승용차보다 높이가 높은 밴들 세 대가 연이어 들어오려고 했다. 록시는 열린 창문에서 소음기가 달려 길어진 총구가 튀어나오는 걸 분명하게 목격했다. 


 주차장 입구를 지키는 문지기들이 간단하게 제압되었다. 록시가 퍼시벌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 엘리베이터는 한 곳에만 설치되어 있으니 테러범들의 목적지는 뻔했다. 록시가 쭈그린 자세로 시트로앵의 꽁무니에서 머리를 내밀듯 말듯 간을 보고 있었다. 퍼시벌이 상체를 펴면서 그녀에게 신호했다. 


  록시의 총이 첫 번째로 불을 뿜었다. 방탄 고글이라도 쓴 것처럼 거리낌 없이 얼굴을 노출한 퍼시벌이 순식간에 방아쇠를 두 번이나 당겼다. 소란은 제네바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네이선 라일리의 안면은 굳어 있었다. 에그시는 멀린의 조언을 떠올렸다. 대중 매체가 정교하게 조작한 이미지 따위는 내버리기로 했다.


  “전 여기에 윤리적인 문제를 들이밀러 온 게 아니에요.”


  에그시는 테이블에 깔린 유리에 비친 자신의 형상을 바라보지 않았다. 


  “진짜 사람들이 죽어나갔어요. 만약 라일리 씨의 형이 성공했다면 한창 보살핌을 받아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도 확실치 않은 무엇이 세상 밖을 떠돌고 있다는 거고요. 말다툼 거리는 필요치 않아요. 해결이 시급한 문제에 대한 단서가 필요한 거죠.”


  에그시가 겉옷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뒤집었다. 네이선 라일리가 눈을 깜빡였다.


  “…그건 뭡니까?”

  “라일리 씨가 한 번 봐주셨으면 하는 거예요.”


  록시가 총알이 바닥난 탄창을 버렸다. 테러범들이 껴입은 보호구에는 빈틈이 없었다. 록시는 일반적으로 가장 취약하다는 발목 윗부분을 공략하고 있었으나 효과가 극적이지 않았다. 


  “퍼시벌, 가지고 있는 수류탄 몇 개나 돼요?”

  “…여기서 폭탄을 쓴다고?”


  퍼시벌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저 인원들 다 쓰러뜨리기 전에 우리 탄약이 바닥날 것 같은데요?”


  퍼시벌이 헬멧의 유리 부분을 또 맞추었다. 두 번은 총알이 박혀야 투명한 쪽이 깨져나가면서 적의 숫자가 줄어드는 형편이었다. 퍼시벌이 총을 바꿔 쥔 뒤에 오른손을 폈다.


  “내가 할 테니까 줘.”


  록시가 잽싸게 라이터를 전달하더니 퍼시벌의 등 뒤를 지나갔다. 퍼시벌이 미간을 좁혔다.


  “던져요!”


  록시의 금발이 칙칙한 주차장의 중심에서 휘날리며 테러리스트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퍼시벌에게 몰려들던 총탄들이 흠칫거렸다. 


  퍼시벌에 손 안에 가득 든 휴대용 수류탄들을 투척했다.


  킹스맨 본부에 홀로 남아 있는 멀린이 폭탄 터지는 소리에 목가에 힘을 주었다. 여러 개가 겹쳐서 발생하는 연쇄적인 폭발음은 통신을 듣고 있던 멀린마저도 마이크를 끌어당기게 했다.


  “두 사람, 괜찮나?”


  제네바는 몇 분 더 시끄럽다가, 퍼시벌의 낮은 응답이 깨끗하게 전해지는 수준까지 조용해졌다. 


  —이쪽은 정리됐어. 

  “다행이로군.” 

  —알아냈어요!


  한동안 잠잠하던 에그시가 전언을 보내왔다. 멀린은 뒷수습 단계에 돌입한 록시와 퍼시벌의 화면을 체크하곤 제네바 쪽은 마음을 놓기로 했다. 


  “라일리가 뭐라던가?”


  에그시는 급한 걸음걸이로 네이선 라일리의 뜰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시어도어 라일리의 작업물은 해리를 기반으로 해서 디자인되었다고 해줬어요. 멀린,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은 해리의 복제품이에요. 


  멀린은 별안간 대답을 주는 걸 잊어버렸다. 중앙 모니터로 들어온 긴급 메시지가 멀린의 시야를 독점했다.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폭발 사고. 부상자 집계 중.>


  교회의 첨탑처럼 아름다웠던 국회의사당의 꼭대기가 콘크리트 바닥과 부딪히면서 자욱한 먼지를 일으켰다. 그나마 멀쩡한 정문으로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궁전의 왼쪽은 연기와 무관하게 그 타격을 짐작할 수 있을 듯이 보였다. 


  헨리 하트는 그 무리에서 유일하게 동정심이 없었다. 그는 조용히 솟구쳐 오르는 화염을 감상했다. 총을 놓을 심산은 없는 모양이었다. 헨리는 추락하는 구조물 더미에서 차근차근 물러났다. 소방관들과 경찰들이 당도하면서 우렁찬 사이렌 소리를 내고 다녔다. 


  그가 몸을 돌렸다. 쌍권총을 든 신사의 안구에서 불길이 일었다. 





  해리의 손이 절로 올라가더니 머리를 부여잡았다. 안정제가 아직 온몸을 순환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일 듯했다.


  목 뒤편에서 까칠한 게 만져졌다. 주사를 맞은 어린 아이들에게 간호사들이 붙여주는 거즈 달린 테이프였다. 해리는 테이프를 떼 내면서 침대에서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돌아본 창밖 풍경은 안개가 아니라 인위적인 연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발생지가 빅 벤 근처라는 걸 파악한 그는 그 주변에 모여 있는 중요한 건축물들을 헤아려보곤 몸을 제대로 일으킬 수가 없었다. 안개도 구름도 아닌 무엇에 헨리 하트의 비논리적인 분노가 섞여 있었다. 해리는 충격과 약물 성분을 이겨내면서 거실로 나왔다.


  헨리 하트는 자신이 사라질 시에 닥칠 수 있는 비극에 대해 똑똑하게 언질을 했었다. 그런데 만약 해리가 여기 계속 머무르면서 헨리의 악행을 방관한다면, 그 과정에서 속출하는 폭력 또한 거대할 게 틀림없었다. 


  해리는 자신의 반절을 막아야 했다. 그에겐 도움이 필요했다.


  그렇게 해리가 자신에게 필수적인 것을 찾으러 떠나자, 헨리 하트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거실의 서랍장이 죄다 입을 벌렸다. 그 안에 들어있던 것은 포스트잇이나 카페 혹은 레스토랑에서 주는 쿠폰 따위가 아니었다. 


  붉은 기가 섞인 물방울들이 주방 바닥에 떨어졌다. 현관문이 단단히 잠겼다. 최소한의 자각이라는 것이 있어 두 손에 살기 어린 물건은 잡지 않았지만 짙은 색의 정장 바지까지 물들인 자국을 연하게 만드는 섬세함은 그의 범위를 벗어났다. 


  헨리는 그저 탄약을 아껴두고 있을 뿐이었다. 지금부터 그는 총알만 있으면 언제든지 방아쇠를 당길 채비가 되어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다세대 주택을 향하는 그의 구둣발에서 형태가 없는 얼음이 깨진 조각들이 묻어났다.


  벗겨진 흉터 딱지와 골목의 먼지를 두루두루 묻힌 소년들이 깡통을 갖고 장난을 치고 있었다. 돌멩이로 깡통을 넘어뜨리며 놀던 아이들은 이 근방에선 흔하지 않은 옷차림의 남자를 보고 경계했다. 


  “너희 중에서 가장 발이 빠른 게 누구지?”


  남자가 집게손가락으로 지폐를 뽑자 아이들의 눈이 흔들렸다. 소년들에겐 별보다 멀리 떨어진 금액의 돈이었다. 집에서 머리를 잘랐는지 앞머리의 균형이 어긋난 남자애가 친구들의 눈치를 보며 나섰다. 


  “…전데요.”

  “1시간 뒤에 알렉산드라 로드로 나오는 사람들에게 내가 모두 20파운드씩을 준다고 알려.”

  “네?”


  남자아이가 얼이 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자 길고 매끄러운 손가락이 똑같은 지폐 4장을 더 꺼냈다. 남자아이의 식구들이 열흘은 집세 걱정 없이 매트리스에 누울 수 있는 양이었다. 남자아이가 일직선으로 뛰었다. 놀랍고 신난 아이들이 선봉장의 뒤를 쫓아갔다. 


  헨리는 경황이 없던 아이들이 미처 챙기지 못한 지폐를 골에 놔두었다. 적지 않은 파운드화를 땅에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음에도 헨리는 아쉬워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건 색깔 칠한 종잇조각이 아니었다. 


  해리 하트의 인도를 받기 전, 에그시 언윈이 살았던 주택 단지에 사람들이 우글거렸다. 근처 학교에서 소문을 듣고 구경을 온 청소년들부터 목구멍에 오래간만에 맥주를 들이부을 수 있길 기대하는 부랑배까지 갖가지 얼굴들이 인파를 이루었다. 


  “대체 누가 돈을 뿌린다는 거야?” 

  “아니, 어떤 놈이 그런 미친 짓을 해?”


  높고 낮은 목소리들이 수군거렸다. 헨리는 딱 한 번 그 음색들을 모두 귀담아 들었다. 해리 하트나 에그시 언윈의 것은 없었다. 


  헨리가 미적거릴 연유도 없었다. 그가 셔츠 자락에 가려져 있던 권총집의 덮개를 걷었다. 그런대로 정장 스타일을 살린 남자의 등장에 사람들의 관심이 쏠렸다. 


  눈동자의 움직임으로 치환된 그 호기심들이 사방으로 터지면서 피를 뿌렸다. 


  해리와 헨리가 다 같이 알고 있는 에그시의 주거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은 죽어야만 했다. 느닷없이 앞줄에 서 있던 남자의 머리가 터지면서 피를 뒤집어쓴 중년 여인이 비명을 질렀다. 헨리는 그걸 듣고 비위가 상했다. 그의 타깃이 순식간에 변경되었다. 


  고막을 찔러대는 외침에 타고난 신체 구조는 이 순간 헨리의 마음에 가장 거슬리는 무엇이었다. 어떠한 도의나 도덕보다 우월한 충동의 전이가 빚어내는 장관이란 너무도 강렬했다. 눈앞에서 무력하게 연인이라든가 아내를 잃은 남자들이 두려움과 분노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헨리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헨리만큼이나 무질서했다. 다만 그들에겐 세련된 기술조차 없었다. 


  헨리가 가운데에서 라이터의 뚜껑을 젖혔다. 수류탄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인간의 연약한 살결을 삼켰다. 객관적으로도 쓰레기라 부를 수밖에 없어진 물질들이 툭툭 뒹굴었고, 어떤 여인이 벗삼아 가져왔던 맥주캔은 이질적인 분홍색 거품을 뿌렸다. 헨리의 흉터를 앞머리 대신 사선으로 치솟은 핏자국이 가렸다. 그는 길가에 널브러져 있는 몸뚱이들을 넘거나 피하지 않았다. 그런 수고로움 없이도 헨리는 중심을 잃지 않았고, 오히려 발꿈치 밑으로 느껴지는 잔인한 감각에 머릿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실밥이 떨어져서 돌아간 인형의 입모양보다 기묘한 곡선이 유사인간의 입술을 쓸었다.


  주황색이 섞인 책가방에서 얇은 그림책들이 삐져나왔다. 하얗던 페이지들이 무시무시한 색깔을 입었다. 헨리는 꿈틀거리는 작은 뒷머리에 대고 총을 쐈다. 그 위로 떨어진 빈 탄창은 폭탄의 열기에 귀가 날아갔다가 피스톨의 총알에 입 안을 잃어버린 시신과 나란히 누웠다. 


  공짜로 술값을 벌 수 있다는 말에 급하게 뛰어온 로트와일러는 검열되지 않은 학살을 고스란히 봐 버렸다는 충격에 몸을 달싹이지 못했다. 헨리가 총 한 자루를 홀스터에 집어넣었다. 로트와일러가 뒷걸음질을 쳤다.  


  “거기 가만히 있어.”


  인간은 도무지 순종적이질 않았다. 헨리는 빗나갈 총알을 날렸다. 로트와일러는 부들거리면서도 양 발을 땅에 밀착시켰다. 헨리가 그에게 접근했다.


  “얼굴이 낯익군.”

  “사, 살려 주세요….”


  헨리는 뒤늦게 저자세를 취하는 생물이 자신의 빛에게 모욕을 주었던 걸 기억해내고는 총부리로 그의 정수리를 내리찍었다. 로트와일러의 양다리가 풀썩 꺾였다. 


  “앞에 주소 있어. 찾아가서 전해줘.”


  헨리가 쪽지 하나를 로트와일러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머리에 구멍이 나진 않았나 가르마를 더듬던 로트와일더가 헨리를 올려다보았다. 로트와일러가 대하는 자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가 금세 젖어들 것만 같은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줄행랑을 쳤다. 


  로트와일러의 민첩함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계책이었다. 헨리도 비슷했다. 그는 살아서 해리 하트의 이상을 건축해야 했다. 헨리는 자신의 사격과 허우적대는 남자의 다리 놀림에서 차이점을 찾지 못했다. 





  양복점을 지키던 노신사는 조심성 없는 손님의 요란함에 만년필을 쥐고 있던 손을 잠시 정지시켰다. 잠시 뒤 그는 아예 만년필을 놓고 눈꺼풀을 껌뻑였다.


  “하트 씨?”

  “본부에 멀린 있으면 불러주십시오. 제 지문으로는 통로를 열 수 없습니다.”


  노신사는 비품 창고처럼 보이지만 쓰임새는 정 반대일 공간으로 들어갔다. 노신사가 묵혀 둔 통신기의 먼지를 털어버릴 즈음 로트와일러가 용케 쓰러지지 않고 등장했다. 로트와일러는 해리를 보자마자 기겁을 했다. 


  “망할! 나한테 심부름 시켰으면서 여긴 왜 있어?”

  “자네….”

  “나, 난 몰라. 시키는 대로 했다고!”


  로트와일러는 카운터 쪽에는 그림자도 들여 넣지 못한 채로 입구와 멀지 않은 테이블에 쪽지를 툭 던졌다. 해리가 급하게 그를 부르면서 물었다. 


  “내가 자네에게 이걸 줬나?”


  로트와일러는 마네킹한테 얘기했다. 


  “그, 그렇다니까! 젠장, 전 갈 겁니다. 갈 거야!”


  유리창이 달린 문짝이 몇 번 왕복운동을 했다. 해리가 피가 묻은 편지를 열어보았다. 


  해리를 24시간 안에 돌려보내.


  해리는 그에게 익숙한 단어를 하나도 발음하지 못했다. 무사히 비상 회선을 이용한 노신사가 해리에게 알렸다. 


  “멀린께서 올라오시겠답니다. 만찬장에 계시라더군요.”


  해리가 노신사에게 정중한 고갯짓을 건넸다. 노신사는 약속 시간에 자주 늦는다는 걸 빼면 흠 잡을 구석이 없을 듯한 과거의 갤러해드와 현재의 해리 하트를 동일선상에 놓아보았다. 양복점으로 위장한 첩보 조직의 첫 번째 수위와 다를 것 없는 직책에 있으면서 노신사는 자신의 관찰력이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리고 해리 하트와 갤러해드는 일치했다. 그래도 멀린의 명령을 어길 순 없어 노신사는 개인 물품을 챙겼다. 해리가 만찬장 안으로 들어간 뒤 노신사는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루프에서 내린 멀린은 권총의 안전장치가 풀려 있는지 확인했다. 미국과 스위스에 있는 세 명의 킹스맨들은 당장 그를 지원해주러 올 수 없었으니 멀린이 믿을 거라고는 한 자루의 피스톨뿐이었다. 멀린이 맞물려 있는 만찬장의 양쪽 문 사이로 틈을 만들었다. 


  멀린은 팔꿈치로 문을 열면서 그가 매우 잘 아는 얼굴을 겨누었다. 겨냥 당한 인물이 접힌 양 팔을 들었다. 


  “이대로 설명하면 되겠나? 자네 도움이 시급하네.”


  해리는 초연했고 멀린은 당황하였다. 





  —진짜 해리에요?

  —갤러해드가 확실한가?


  해리의 복제인간이 실존한다는 걸 아는 에그시와 퍼시벌이 똑같은 의문점을 제시했다. 해리가 낮은 숨을 내쉬었다. 


  “환영 인사들이 대단하군.”

  “간단하게나마 검사를 했으니 일단은 믿어. 해리를 의심하는 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그 말에 해리가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화면 위에다 하나의 바둑판을 그리고 있는 창들을 살펴본 해리의 동공에서 점점 떨림이 잦아들어갔다.


  “해리의 복제인간이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반을 날려버렸고 캠든에서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학살을 벌였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에그시, 네가 살던 동네야.”


  에그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제 엄마랑 동생은요?!

  “두 사람은 해를 입지 않았어.”

  “…내가 에그시의 새 주소를 몰랐으니까.”


  해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음소거가 된 영상에서는 까맣게 그을리고 부서진 웨스트민스터 궁전의 흉상(凶相)이 반복적으로 나오고 있었다. 


  “해리를 24시간 안에 돌려보내지 않으면 동시다발적인 테러를 벌이겠다고 경고를 해왔어. 이건 거짓이 아닐 가능성이 다분하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었어. 그가 각지에서 흘러드는 첩보들 중 일부만 손을 쓴다면 대대적인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


  헨리 하트의 메시지는 설핏 구부려진 모양새로 책상에 올려져 있었다. 헨리의 필체는 해리의 것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날카롭게 구분되는 획에는 희망이랄 것이 없었다.  


  “에그시, 넌 미국에 있으니까 CIA에 들러. 거기서 사마리아인에게 넘겨준 정보가 뭔지 빠짐없이 알아와. 록시랑 퍼시벌은 리옹의 인터폴로 가고. 나는 MI6를 다그칠 테니까.”

  —인터폴은 록시 혼자 가도 괜찮아. 나는 BND(독일 연방정보국)을 맡지.


  퍼시벌의 제안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좋아. 다들 최대한 빨리 보고해주게.”


  통신을 끝낸 멀린은 안경을 벗었다. 그는 해리가 아까부터 자신이 발언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음을 알았다. 멀린은 이전보다 창백해진 듯한 해리를 응시하였다. 


  “말씀하세요, 해리.”

  “현실적으로 그를 예측하기란 불가능해, 멀린. 세계에 사법기관이나 정보부가 그 세 종류만 있는 건 아니잖나.”

  “하지만 그 네 곳만 뒤지면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 반 이상은 파악할 수 있습니다.”

  “확률에 기댈 셈인가.”

  “할 수 있는 건 해보자는 거죠. 그리고 해리,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압니다.”


  멀린이 루프에서 내리면 자연스레 눈길이 닿게 되는 위치에 걸린 시계를 또렷한 동작으로 읽었다. 


  “당신이 여기 돌아온 지 1시간이 약간 지났군요. 그런데도 그 위험천만한 복제인간 곁으로 가겠다는 마음이 듭니까?”


  궁전이 또 폭발했다. 기사 속 사진에서 흑백으로 처리된 피의 줄기는 하나의 고함이었다. 한 뼘의 그림자도 흘리지 않은 자신의 복제가 모든 인간들의 멱살을 붙잡으면서 해리를 원하고 있었다. 


  “자네들이 날 도와줄 거잖나. 그걸로 상황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해리는 멀린의 물음표를 부드럽게 넘겼다. 


  “헨리는 날 되찾지 못하면 멈추지 않을 거야.”


  멀린의 눈썹이 꿈틀댔다. 


  “맙소사, 이름도 있습니까?”

  “내가 지어준 건 아니니 그런 표정 짓지 말게.”


  두 사람은 오래된 옛날같이 웃음을 지으려다 만 애매하면서도 솔직한 낯빛을 공유했다. 멀린이 안경을 손아귀로 쓸어 담았다. 


  “양복점은 이번 사건이 정리될 때까지 닫아두기로 했으니 되도록 위로는 올라가지 마세요. 당신의 복제인간이 잠입할 수도 있어서 생체 정보는 지워둔 채로 놔둘 겁니다.”


  멀린은 서랍을 열어서 몇 가지 소지품을 꺼냈다. 컴퓨터 앞 의자가 비었다. 그 옆에 서 있던 해리가 몸을 기웃했다.  


  “어디 가나?”

  “사마리아인의 우편사서함이요. 새로 도착한 정보들이 있는지 한 번은 가봐야 하니까요. 꼼짝 말고 기다리세요.”


  멀린이 자신에게 배속된 것이라 단언해도 좋을 자리를 가리켰다. 해리는 군소리 없이 멀린의 손가락이 지시하는 바를 이행했다.


  “자네만큼은 아니라도 요원들이 지원을 요청하면 힘 써보겠네.”


  멀린은 루프에 오르기 전 해리를 돌아보았다.


  “당신이 살아있어서 기쁩니다, 해리.”


  해리가 기어코 짧게 웃었다. 멀린까지 퇴장하고 나자 킹스맨 본부에는 해리만 남아있게 되었다. 


  해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의자를 당기더니 화면을 켰다. 그는 킹스맨 요원들에게 지급되는 안경들의 고유 네트워크를 검색했다. 해리는 그 중에서 전원 공급이 아예 차단된 것이 아니라 발신 기능만이 비활성화 되어 있는 네트워크를 골라냈다. 해리는 자신의 추리가 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탭을 클릭한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헨리, 내 목소리가 들리나?”


  해리는 한 마디만 던졌다. 약간의 기다림은 필수적이었다. 


  네트워크 신호에 초록불이 들어오면서 헨리 하트가 입을 열었다. 


  —…해리.


  헨리의 본질은 그 이름에 분노를 쑤셔 넣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해리는 자신이 귓가로 직접 들었던 부름과 흡사한 음성에게 덤덤하게 제의했다. 


  “이야기 좀 나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