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with Henry Hart
- Written by. Jade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07. 순수한 지식
헨리 하트는 피를 보고 있었다. 그것의 색깔 자체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향기 또한 독특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의 눈앞에는 피가 없었다.
헨리는 반복해서 해리 하트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다.
자신이 깍듯하게 찬미했던 주인의 살결이, 자신이 쏜 총알의 열기에 의해 일그러지고 구멍이 뚫려서 마침내는 두 손으로 받아도 아까울 소중한 체액을 토해내는 광경은 파리가 들끓는 동물의 썩은 머리를 하나의 작품이라 칭하며 그것을 갤러리에 전시해 놓은 것과 같았다. 해리 하트의 모든 것은 헨리에게 예술이다. 그러나 헨리에게는 맹세코 해리를 가지고 불쾌한 창조를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해리가 총을 맞은 뒤 헨리는 극도로 불안해하면서 떨었다. 감전된 인간만이 그 경련을 따라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건 확실히 에그시가 아무렇게나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무언가는 아니었다. 에그시는 자신도 정의내리지 못할 눈빛으로 헨리를 쳐다보았다. 헨리의 손끝은 지금도 바들거리고 있었다. 에그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도 자신이 복제인간의 비통과 죄책감을 이겨낼 감정을 끌어낼 수는 없음을 용인해야만 했다.
에그시와 함께 헨리를 킹스맨 본부까지 데려온 록시는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록시는 자리를 비켜주는 게 맞는 건지, 아니면 두 사람을 감시하고 있어야 하는 건지 헷갈렸다. 해리가 총상을 입은 시점부터 인간의 중요 구성 성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헨리 하트는 그나마 록시의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록시는 줄곧 헨리를 보고 있는 에그시를 살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퍼시벌의 부름으로 록시가 방에서 나갔다. 헨리와 에그시에게 변화는 없었다.
에그시의 심리 상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첫 번째 단계는 분노다. 합당한 이유도 없이 살해당할 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느끼게 되는 당혹스러움으로 에그시는 헨리 하트에게 분노했다. 게다가 에그시가 무력한 청년에서 탈피해 듬직한 사람 구실을 하게 된 건 해리 덕택이었다. 해리 하트가 현재의 에그시를 만들었다. 에그시는 해리의 절망이라든가 모멸감에서 완벽하게 멀다고 확언할 만한 사례였다.
여기서 그 분노가 기묘한 의구심으로 이어진다. 해리의 복제라는 작자가 해리는 자신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한 탓이었다.
헨리가 지칭한 그 애정이라는 건 자신이 손수 발굴한 후보생에 대한 아버지적인 애착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헨리 하트는 해리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를 수도 있었다. 복제인간의 가치관은 흐린 안개와 뒤엉켜 있다. 그런데 해리가 헨리의 그 말을 직접적으로 부정한 일이 없어 에그시는 자신의 생각을 자꾸만 부풀리고 말았다.
그렇게 세 번째 단계까지 가면 앞서 존재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에그시는 마땅한 본뜻도 없이 그저 헨리를 응시하게 되는 것이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며 영국 국회의사당을 날려버린 테러범인 자는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생명체가 되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에그시는 자신이 빈정댈 수 있게 헨리가 눈물이라도 한 방울 흘리길 바랐다. 대주교조차 모방할 수 없는 숭고함으로 헨리는 해리를 걱정하고 있었다.
무너진 궁전에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소리를 다 써버리기라도 한듯 헨리는 조용했다. 두 사람은 묵언했다.
한참 뒤에 나타난 멀린은 방문을 열자마자 뿜어져 나오는 압박적인 공기에 미간을 좁혔다. 에그시가 그나마 멀린을 맞이했다.
“어떻게 됐어요?”
“수술은 끝났어. 치명상은 아니었으니 수일 내에 깨어나겠지.”
“그럼 지금은 회복실에 있다는 거죠?”
“…난 가면 안 되는 건가?”
많이 가라앉은 목소리였으나 멀린과 에그시 모두 헨리의 발어를 알아들었다.
“얌전히 있겠다. 해리가 일어날 때까지만 그의 옆에 있게 해 줘. 그 이후에는 날 어떻게 처분하든지 상관 안 해.”
에그시는 이번에야말로 헨리 하트의 눈자위에 수분이 차오르길 기대했다. 아쉽게도 헨리의 눈은 바싹 말라 있었다. 이쯤 되니 에그시는 헨리 하트에겐 눈물샘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부슬부슬 가루로 흩어질 듯한 비탄이 더 위태로운 법이었다.
멀린은 답지 않게 한참 뜸을 들이다가 답했다.
“…원한다면.”
헨리가 일어났다. 에그시는 또 헨리와 같은 방에 있어야 할 처지가 되었다.
⁂
본부에 있는 회복실이라 함은 해리가 아놀드 교수 건으로 피해를 입고 누워 있었던 그 방을 의미했다. 헨리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회복실로 들어갔다.
“에그시.”
멀린이 에그시를 잡아다가 출입문 옆쪽에 세웠다.
“계속 저 자와 있을 필요는 없어. 란슬롯이나 퍼시벌이 돌아가면서 그가 위험한 짓을 하는지 단속할 수 있으니까.”
“그게 전부는 아니에요. 저도 그냥 해리 곁에 있고 싶으니까요.”
문이 서서히 닫혀갔다. 에그시가 문의 옆면을 잡았다.
“그리고 저 인간은 제가 제압해야죠. 만약에라도 무슨 일이 생긴다면 말이에요.”
“…알았다. 해리가 깨어날 때까지 나도 본부 안에 계속 있을 테니 언제든지 연락해.”
에그시는 슬쩍 웃어보였다.
잠시 후 에그시가 방에 들어갔을 때 헨리 하트는 왼편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그 위에 앉아 있었다. 에그시가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헨리가 지정했던 시각은 자정 즈음이었고 해리의 총상을 봉합하는 수술은 3시간이 걸렸다. 에그시는 한껏 무르익은 새벽에 힘입어 간이침대를 꺼내고 그 위에 누웠다. 이 와중에도 건재한 피곤함이 성가셨다. 에그시는 핸드폰 액정을 슥슥 문지르다가 곧 잠에 빠졌다.
헨리는 절대로 눈을 감지 않았다.
⁂
에그시는 몸을 뒤척이다가 침대 위가 예전 같지 않고 딱딱하다는 걸 감지했다. 그 감촉과 더불어서 자신이 겪은 일들과 현재 자신이 누워 있는 장소가 하나씩 떠오르자, 에그시는 급격히 상체를 일으키면서 주변을 휙휙 돌아봤다.
해리의 오른쪽에는 여전히 헨리가 앉아 있었다. 그는 졸고 있지도 않았으며 비뚤어진 몸가짐으로 의자에서 살짝 미끄러지지도 않았다. 에그시는 머리 위를 더듬어서 핸드폰을 켰다. 그는 6시간 30분간 미동하지 않은 유사인간의 비정상성에 혀를 내둘렀다.
에그시가 기지개를 켜면서 침대 밖으로 나왔다. 헨리의 눈동자는 차가운 공기를 쐬고 있는 해리의 새끼손가락에 박혀 있었다.
“…당신, 혹시 뭐 먹기도 해요?”
높임말이 튀어나갔다. 에그시가 혼자서 부산하게 머리카락을 털었다. 헨리는 반응이 없었다.
“아침이니까, 뭐, 굳이 원한다면, 어, 그니까….”
“물 한 잔 부탁하지.”
간단하지만 기습적인 요구사항이 꽂혔다. 에그시가 눈꺼풀을 내렸다가 들어올렸다. 그는 해리의 외모를 보고 또 공손한 응답을 내뱉을 뻔한 입술을 틀어막으면서 자리를 떴다.
회복실에 온 뒤 처음으로 헨리의 얼굴이 움직거렸다. 그는 꽤나 오래 에그시가 나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에그시는 한쪽 팔로 해리의 이불자락을 붙잡은 채 잠자리에 들었다. 헨리는 그 애틋한 실천력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주시하기로 했다. 에그시가 침대에 눕고 나서 17분이 지나자 숨소리가 차분해졌다. 헨리는 분을 셌다. 해리가 일어나는 걸 목격할 때까지 자신의 안구는 혹사당해야 마땅했다.
에그시는 이제 깊이 잠들었지만 그의 왼팔은 해리의 이불과 붙어 있었다. 헨리는 40분을 예상했는데, 1시간이 지나도록 에그시는 똑바로 누운 자세와 쑥 올라가 있는 팔의 각도를 유지하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에그시 언윈에 대한 사고가 시작되었다.
해리 하트는 그 모든 환경적 요인을 소거하고 에그시라는 청년 자체를 아꼈다. 그는 해리가 킹스맨이라는 조직에 일으키려하는 파문의 지향점이 옳음을 증명하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면서, 그런 거창한 위치를 다 떼어내 버리고도 그가 독립적으로 가진 명랑함과 순수함과 존경심으로 해리를 빛나게 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헨리는 지워지지 않는 살육 직후 해리가 제일 먼저 그 장면을 꼼짝없이 보았을 에그시의 충격을 상상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에그시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타자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는 헨리는 그것을 가능케 한 해리의 심리를 추측할 수도 있었다.
헨리는 자신이 에그시 언윈을 쏜다면, 해리가 기를 쓰고 그것을 막으리란 걸 시나리오에 포함시켰어야 했다. 그는 꼭 자신의 눈높이에 맞춘 듯한 강렬함으로 자신을 질책한 주인에게 쓴웃음으로 화답했다.
에그시가 돌아왔다. 에그시는 아이보리색 컵을 쭉 내밀면서 엉겁결에 상체는 뒤로 뺐다. 헨리는 컵을 받으면서 동시에 작은 열쇠를 건넸다.
“이게 뭐에, 아니, 뭐야?”
유사인간의 무심함은 오락가락하는 에그시의 말투를 지적하지 않았다.
“내 집 열쇠. 각국에서 보내준 첩보들이 보관되어 있으니 알아서 가져가. 주소는 그레이코트 스트리트 31번지.”
“사서함 폭파시켰다면서?”
“그러니까 그 안은 내가 비워놨을 거 아닌가.”
에그시가 수긍한다는 뜻으로 양 눈썹을 으쓱였다. 그는 평범하게 울퉁불퉁하고 금속 특유의 향이 나는 열쇠를 만지작거렸다.
“…그럼 테러하는 짓은 그만 둘 거야? 해리의 이상향을 만들어주고 싶어서 한 일이라며.”
“지도자 없는 왕국은 필요 없다.”
그 말이 진심으로 주군을 잃고 좌절한 기사의 언사로 들리는 바람에 에그시는 복잡한 심경을 다잡는 데 몇 분을 소비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아련히 공간에 머물다 갔다.
에그시는 본부를 벗어나기 전 멀린을 만났다.
“멀린, 저 가볼 데가 있는데 회복실 좀 지켜봐주실 수 있어요?”
“마침 나도 만날 사람이 있어서. 퍼시벌을 부르도록 하지. 그런데 어딜 가나?”
“그가 자기 집에 가보라고 해서요. 사마리아인 노릇은 관두려나 봐요.”
멀린은 그럭저럭 납득했다는 눈치였다. 그가 보통 서류가방보다는 조금 작은 크기의 손가방에 타블렛 PC를 챙겼다.
“누구 만나러 가시는지 물어도 돼요?”
“네이선 라일리. 복제인간에 대한 공부가 필요해서 말이다.”
멀린은 그러면서 안경으로 퍼시벌에게 전언을 넣었다. 에그시는 멀린의 치밀함에 박수를 보내며 그를 뒤따랐다.
⁂
“FBI 요원을 만난 일은 그렇다 쳐도 제 형의 연구가 영국에까지 영향을 끼쳤을 줄은 몰랐군요.”
네이선 라일리의 눈 밑이 어두웠다. 시차 적응이 완료되지 않은 피곤함을 역력히 토해내면서 네이선은 진한 커피를 마셨다. 헨리 하트의 소행을 가감 없이 쏟아놓으면 이 피로한 미국인이 쓰러질 지도 몰랐으므로 멀린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유래가 없었던 일이니까요.”
“그래서인지 문제도 많이 일어나는 것 같고요. 여하튼 용건을 말씀해주신다면 제가 아는 선에서 자세히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멀린은 내심 네이선의 태도를 반겼다.
“그렇다면 교수님, 이런 가정은 어떻습니까. 후처리 작업이 끝나지 않은… 어떤 표현을 써야 적절할지 모르겠군요. 허나 복제인간이 눈을 떴다고 해서 그가 곧장 활동을 해도 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깨어난 이후가 더 중요합니다. 계속적인 테스트를 통해서 장기라든가 신경은 잘 작동하는지, 부적합을 일으키는 부위는 없는지 등을 알아봐야 하니까요. 안정화 단계라고 이름 붙이면 되지 않을까 싶군요. 그리고 연구소가 불타버렸기 때문에 형이 만든 복제인간은 안정화를 거치지 못했겠죠.”
“그러한 필수적인 과정을 건너 뛴 그의 훗날에 대해 예상되는 바가 있으십니까?”
“그건 저도 알 도리가 없지요.”
네이선이 커피 잔을 반 정도 비웠다. 카페인으로 머리를 깨우면서 네이선은 계속 읊었다.
“아마 그가 가진 것 중에서 제일 멀쩡한 건 두뇌와 중추 신경계일 겁니다. 거길 가장 먼저 설계했고 시간도 많이 들였습니다. 골격과 피부는 복제도 쉽고 관리도 어렵지 않으니 큰 문제를 일으킬 것 같진 않고, 장기들이 말썽을 부리겠죠. 특히 심장이요.”
설명에 몰입한 네이선이 손동작을 곁들이기 시작했다.
“이론상 복제인간이 의식을 차리면 심장부터 심혈을 기울여서 다듬습니다. 그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해서 시험적으로 본체의 뇌파로 작동하는 보조 장치를 달긴 했는데 영구적일 수는 없습니다.”
증폭되는 집중력을 발휘해가던 멀린의 얼굴에 살풋 주름이 갔다. 그가 물었다.
“본체의 뇌파로 작동을 한다고요?”
“본체와 복제인간 사이의 연결성이 높게 측정된 걸 보고 짜낸 아이디어였지요. 보다 규칙적인 파동을 끌어오는 겁니다.”
“…그렇다면 보조 장치를 달고 있는 복제인간은 본체가 죽으면 생명이 위태로워지겠군요.”
“시한부 선고나 다름없죠.”
멀린이 한 박자 쉬면서 한편으로는 빠르게 사고력을 구동했다. 복제인간은 해리가 없으면 알아서 스러져버릴 확률이 높다. 헨리 하트를 꽤 정확하게 정의내린 멀린에게 남은 궁금증은 한 가지였다.
“반대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네이선은 아까보다는 자신이 없는 듯이 말했다.
“복제인간이 죽을 경우 본체가 받는 영향 말입니까? 물리적인 측면은 없을 겁니다. 본체 시점에서 보자면 복제인간과 관련된 부분은 심리적 혹은 무의식적 영역에 있으니까요.”
멀린은 그걸 듣고도 답답함이 풀리지 않은 기분을 맛봤다.
⁂
헨리 하트가 머물렀던 집의 현관이라고 해서 잠금 장치가 풀리는 효과음이 다르진 않았다. 어떤 무시무시한 방해 공작이나 장애물이 에그시의 앞을 가로막는 사태도 없었다. 에그시는 싸구려 그림 한 점 걸려 있지 않아 공기만큼 무미건조한 거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서랍장들은 모두 건설 초기부터 내장된 타입들이었다. 에그시는 손잡이 달린 것이라면 뭐든지 다 열어보았다. 아주 중요한 정보가 들어 있을 법한 봉투라든가 상자는 찾을 수 없었다. 에그시가 뒷머리를 문질렀다.
사람이 오갔다는 자취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은 침실이었다. 에그시는 매트리스까지 들어 올려가며 수색에 몰두했으나 먼지만 먹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에그시는 최후의 희망을 갖고 침실과 면한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하얀색 셔츠들이 늘어서 있었다. 특이하게도 셔츠의 칼라에 넥타이가 둘러져 있는 게 있었고 그렇지 않은 게 있었다. 에그시는 그 가운데서 검은색 박스를 발견했다. 뚜껑을 슬쩍 들춰보니 각양각색의 파일들이 들어 있었다.
에그시는 박스를 가지고 깔끔하게 돌아서려다 넥타이의 여부로 구분된 셔츠들의 무리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궁전에서 맞닥뜨렸을 당시에 헨리 하트는 넥타이를 매지 않았었다.
에그시는 방정맞지 않게 침실을 봉인했다.
⁂
노크 소리에 퍼시벌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와 방에 같이 있던 헨리는 퍼시벌이 노크에 반응하다는 게 당연하다는 것처럼 손가락을 움찔거리지도 않았다. 퍼시벌이 에그시를 보고 회복실에서 나왔다. 만찬장까지 갈 이유가 없어 두 사람은 본부 내 간소한 공간에서 멀린을 만났다.
“라일리가 굉장한 얘기를 해준 모양이군.”
퍼시벌은 멀린을 본 즉각 그가 속으로 갖추고 있는 이야기의 성격을 파악해버리고 말았다. 멀린은 사람 김빠지게 하는 퍼시벌의 언동에 아무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라일리 덕에 해리와 그 복제에 대한 관계를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네.”
“그래서?”
“해리 쪽은 몰라도, 그 복제인간은 해리에게 생명 자체를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것 같아. 몸속에 해리의 뇌파를 읽는 장치가 있다더군. 해리는 복제와 무의식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측면이 있으나 복제인간이 가진 페널티에 비하면 크진 않을 거라는 게 라일리의 소견이었어.”
그러자 퍼시벌이 팔짱을 꼈다.
“지금도 말라 죽어가고 있는 형편이라는 게 이상하지 않군.”
퍼시벌의 자세나 억양 모두 농담과는 거리가 멀었던지라 멀린과 에그시는 퍼시벌이 자신의 일시적 소임을 다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눈초리를 보냈다.
“난 아무 것도 안 했어. 그 자를 보면 내 말뜻을 알 수 있을 걸.”
퍼시벌에게서 떨어진 에그시의 눈길이 우연찮게 손목시계를 지났다. 헨리 하트는 에그시가 준 물 한 잔으로 24시간을 넘게 버티고 있었다.
“…중간에 흐름이 끊겼는데, 우리가 가장 걱정했던 일은 아마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얘기를 해주고 싶었네. 복제를 죽인다고 해리까지 죽지는 않을 거라는 소리지. 그러니 미뤄두었던 결정을 내려야 해.”
멀린은 그 결정이 무엇인지 낱낱이 기술하지는 않았다. 헨리 하트의 처분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받아들게 된 기사들의 안색이 가라앉았다. 의외로 가장 명확한 의견을 가지고 있을 법한 퍼시벌이 제안했다.
“해리가 의식을 찾으면 종합하는 게 어때.”
“나도 그게 맞다고 보네.”
에그시는 얼이 빠진 끄덕임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명했다. 그는 자신의 머리가 위아래로 움직였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지 짤막한 회의를 마치고 나가려는 퍼시벌의 뒤를 허겁지겁 쫓아서 그를 붙잡았다.
“제가 들어갈게요.”
회복실로 복귀하려던 퍼시벌이 에그시를 쳐다보았다.
“그렇게까지 네 정신을 혹사시키진 않아도 돼.”
“…그건 아니에요.”
에그시가 퍼시벌보다 앞서서 문고리를 잡고 반쯤 돌렸다. 퍼시벌이 물러났다.
컵 안의 물은 정말로 조금밖에 줄어들지 않았다. 에그시가 손가락을 대고 문지르면 머리카락부터 가루가 되어 부서질 듯한 헨리 하트의 안구는 해리의 침대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에그시는 헨리를 마주하기 위해 침대의 오른편으로 갔다.
“알고 있었어요? 해리가 죽으면 당신도 얼마 못 갈 거라는 거.”
에그시가 목소리를 내고 나서야 헨리는 비로소 움직였다.
“그는 내 근원이고 빛이며 대지다.”
그리고 헨리는 자신이 언급한 것들이 없어서 타들어가는 음성을 흘리고 있었다. 헨리의 화법에 적응하지 못한 에그시는 그 간결한 언어가 가리고 있는 무한한 의미를 완벽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그가 해리를 극진히도 받들고 있다는 것만 알았다.
에그시는 또 자신이 헨리에게 존댓말을 썼음을 깨닫고 입술을 말았다. 헨리 하트가 연관된 모든 게 복잡했다.
“당신이 나한테 했었던 말들을 좀 해석해줬으면 좋겠어.”
“…무슨 소리지.”
“내가 당신의 주인을 귀찮게 한다는 것부터, 해리가 나한테 가졌다는 애정까지 전부.”
헨리의 시선이 오롯이 에그시에게 쏠렸다. 그들 사이에 누워 있는 해리 하트가 놀랍게도 둘의 주의력을 뺏어가지 않았다.
“내가 계승했던 해리의 이상향은 정체된 자들에게 매우 엄격했다. 아무 것에도 이바지하지 않고, 자신을 어떻게든 지속시키려고 발버둥치기에 바쁜 족속들은 지금껏 보존되고 있는 인간이라는 종을 격하시키는 쓸모없는 먼지들과도 같다. 지성을 가진 자들의 노력조차 물거품으로 만드는 족속들은 탈락되어야 마땅해. 그것이 해리가 바라던 거였고 내가 이루어야 할 목표였다. 그리고 너는 내가 척결해야 할 대상이었지.”
“…내가요?”
“해리의 초대가 있기 전까지의 네 세상과 그 뿌리라는 걸 돌이켜 봐.”
에그시는 등골이 식는 걸 느꼈다. 폭발적인 근력을 펼칠 여력도 없어 보이는 유사인간의 마른 살갗이 금방이라도 자신의 눈과 숨구멍을 막아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헨리는 일어나서 에그시의 목을 조르지는 않았다. 헨리의 두 손은 작은 직물을 짜는 것처럼 엮여 있었다. 에그시는 피를 뭉치게 해서 살가죽에 붉은 자국을 낼 수 있을 억세고 투명한 줄이 헨리의 손톱으로부터 나와서 헨리 자신에게 형벌을 내리는 상상을 했다. 헨리의 내면은 실제로 그러했다. 그는 반복해서 뜯겨 나가는 중이었다.
헨리는 에그시에게 꼭 항복을 선언하듯이 말을 맺었다.
“그러나 다 내 오판이었어. 해리는 너를 지키려고 몸을 던졌으니까. 나 자신의 불완전함이 나의 진정한 밑바탕을 수용하는 것조차 막은 꼴이로군.”
유사인간은 가차 없이 자신을 자조했다. 에그시는 그와 비슷한 모습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문제는 내가 돌이켜보라던 시점을 가르는 사건 이후를 회상해보도록. 해리가 교회에서 나와 제일 먼저 널 떠올렸다는 사실 정도면 확실한 근거가 되겠지.”
해리의 바이탈 사인을 나타내는 모니터는 일정한 기계음을 내보내고 있었다. 에그시에게 그 소리는 어느 정도 희망적으로 다가왔다. 에그시는 헨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헨리는 굳이 에그시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헨리는 에그시의 고요한 행위를 토대로 에그시를 분석했다. 그는 에그시가 자신의 어느 부분을 보고 있는지 확인했다. 헨리 하트는 그 누구보다도 에그시를 기만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가진 존재이다.
헌데 에그시는 해리와 헨리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차이점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그시의 망막을 채우고 있는 건 헨리의 안구였다. 질병적 요인이 아니고서야 도저히 연출될 수 없는 색깔을 띠고 있는 유사인간의 핵심을 에그시는 피하지 않았다.
“우리가 당신을 죽이면 어떻게 할 거예요?”
“해리가 눈을 뜨는 걸 본 이후라면 괜찮아.”
“죽을 건가요?”
“그래.”
“해리가 원하지 않는 걸 고집하다가, 끝내는 해리를 다치게 만들었으니까?”
“…그렇다.”
“마지막까지 해리랑 엇나갈 거예요?”
막힘없이 대화를 짜맞춰가던 헨리가 자신의 차례에 맡겨진 그 호흡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내가 해리로부터 배운 수많은 것들 중에서 최고로 훌륭한 건 능동성이었어요. 얌전히 앉아서 어떤 처분을 기다리는 처지를 발로 뻥 차고 나와 버릴 수 있는 방법 말이에요. 환경의 처분, 조건의 처분, 망할 새 아빠나 누군가의 가장 미숙한 점만 가지고 태어나버렸다는 꼬리표의 처분 같은 걸 다 치워내는 모습을 해리는 더 좋아해요.”
에그시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자꾸 해리와 있을 때처럼 높임말이 튀어나간다면서 혼잣말을 해댔다. 헨리는 손가락 마디를 굽혀서 이마를 톡톡 치는 에그시의 몸짓을 주시했다.
“…당신과 내가 해리를 만나기 전이 닮은 것 같아서.”
어투는 분명 혼잣말의 그것과 일치했으나 그 내용은 헨리를 향했다. 다행히 헨리는 에그시의 중얼거림까지 경청하고 있어서 그 말을 귀에 담을 수 있었다.
얼떨결에 헨리 하트가 어떤 처벌을 받으면 좋을지 자신만의 결정을 내린 에그시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해리가 말한 대로 헨리에게 부재하고 있는 것이 역사라는 건 차라리 희망적이었다. 역사는 지식이며 누구나 머릿속에 입력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헨리는 하나의 순수한 지식으로서 에그시를 학습했다.
헨리와 에그시의 눈동자가 일시적으로 같아졌다.
부스럭거리지도 않고 눈을 뜬 해리는 오직 이 곳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서로 다른 두 천진함의 인사를 감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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