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with Henry Hart
- Written by. Jade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04. 신사적인 사마리아인
—그 신출귀몰한 사마리아인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나?
울퉁불퉁한 질감이 살아 있는 로마의 조용한 골목에는 가로등 불빛조차 드물었다. 에그시는 유독 멀린의 목소리가 크게 들리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아니요. 여긴 안 온 것 같아요. 대신 우리는 거의 다 왔어요.”
에그시가 옆에 있는 록시가 보내는 손짓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러고 보니 멀린이 그 별칭을 입에 올린 거 처음 들어보는 것 같네요?”
—내가 그렇다고 새 별명을 지어주는 건 더욱 우스운 꼴이지 않겠나.
에그시가 킥킥 웃었다. 록시의 입꼬리도 씰룩이고 있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Gentle Samaritan’이라는 명칭은 킹스맨 요원들 사이에서만 오르내리는 특수한 암호 같은 것은 아니었다. 기득권층의 결집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웅크리고 있던 세력과, 주류로 올라올 경우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게 뻔한 세력이 상층부를 향한 경쟁을 펼치면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어버린 일반인들이 자발적으로 한 남자에게 붙인 별명이었다.
온갖 추측과 가명 속에서만 존재하고 있는 그는 국제 사법 기관보다도 더 씩씩하게 반테러에 앞장서면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참이었다. 사람들은 영화 같은 자경단원을 비밀리에 칭송했으며, 유래 없는 소요 사태들에 휘둘리고 있는 각 정부마저 알게 모르게 그 사마리아인에게 의지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에그시는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면 모를까 느닷없이 교체된 형용사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타이밍 좋게 록시가 에그시의 주의를 환기시키어 에그시는 더 깊은 생각에 빠져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견 평범해 보이는 건물로 들어가 승강기에 탑승했다. 록시가 비상 단추 대신 달려있는 듯한 레버를 내리자 지문 인식기가 튀어나왔다. 에그시가 커프스단추를 풀어 록시에게 전달했다.
인식 패드에 정확히 들어맞는 크기의 커프스가 모양을 변환하더니 패드에 착 달라붙어 전자음을 내기 시작했다. 곧 인식기에 녹색 불이 들어오면서 엘리베이터가 하강했다. 록시가 잠깐 안경을 만졌다.
“멀린, 이제 저희 진입해요.”
에그시가 회수한 커프스를 들고 낑낑댔다.
“이거 어떻게 다시 끼우는 거야?”
“줘봐.”
두 사람은 이탈리아 마피아들이 은밀히 거래하는 신무기를 회수하러 온 스파이라는 직책과는 영 동떨어진 분위기를 연출했다. 록시가 단추를 마저 달아주었고 에그시가 헤실거리면서 고마움을 표시했다.
승강기가 멈추었다.
에그시는 내리면서 냅다 우산부터 폈다. 예고도 없이 내려온 엘리베이터에서 수상한 낌새를 감지한 마피아들이 저마다 애용하는 권총들을 꺼냈으므로 에그시의 선택은 옳았다. 무기를 회수하는 게 최우선이라 굳이 유혈 사태를 벌일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록시는 연막탄을 던졌다. 두 사람이 사이좋게 안경을 적외선 고글처럼 끼고 흩어졌다.
우산을 접은 에그시는 신나게 그것으로 마피아들의 명치를 찍어대며 그들의 어깨 위를 날아다녔다. 권총들이 사방으로 주르륵 밀렸다. 록시는 절도 있게 덩치들의 발목을 부러뜨렸다. 가운데의 테이블에 다량의 지폐가 들어있을 게 틀림없을 서류가방과 그보다 더 길쭉하고 무거워 보이는 보스턴백이 놓여 있었다.
목표물을 확인한 에그시가 가방끈을 잡으려 팔을 뻗었다.
“우왓!”
에그시는 테이블 모서리를 앞두고 왼쪽으로 넘어졌다. 가까스로 총알을 피한 그가 소리쳤다.
“록시, 하마터면 나 맞을 뻔했다고!”
“나 총 쏜 적 없는데?”
“뭐?”
소음기에 압박당한 총성이 다시금 울렸다. 에그시는 총탄이 파고 들어간 타깃을 보았다. 에그시에게 가슴을 맞고 끊어지는 호흡을 내쉬고 있던 남자가 완전히 숨을 놓아버렸다. 에그시의 머릿속에 저절로 하나의 이름이 부상했다.
현대의 사마리아인이 범죄자들에게 즉각적인 심판을 내리러 온 것이었다.
에그시는 다리를 움직일 수 있는 틈만 남겨두고 몸을 말았다. 그가 바닥을 기면서 끈질기게 보스턴백을 아래로 당겼다. 가방과 덩달아 중심을 잃은 테이블이 기울었고 미처 잠기지 않은 서류가방의 입구에서는 유로화가 새어나와 공중에 휘날렸다. 에그시가 무기들과 함께 주르륵 미끄러져 록시 옆으로 왔다.
하안 연기는 거의 잦아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는 길을 빼면 나갈 도리가 없어 에그시와 록시는 가만히 짙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한 번 제압해 놓았던 무리들이라 사마리아인은 거의 수고를 들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마피아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는 재킷을 걸치지 않은 드레스 셔츠에 정장 바지를 입고 있었다.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이 이따금씩 위로 솟구치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소한 것들은 인간에 대한 존중 자체를 망각한 듯한 남자의 사격 앞에서 빛을 잃었다. 에그시에게 그 광경은 무척이나 낯익었다.
“혹시….”
록시가 에그시를 돌아보았다.
“해리?”
연기가 걷혔다. 에그시가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리? 정말로 해리에요?”
에그시의 말에 놀란 록시가 사마리아인의 뒷모습에 눈을 고정했다. 해리 하트와 만난 적은 많지 않았지만, 록시는 사마리아인의 체격이 해리와 일치한다는 점만큼은 확신했다.
사마리아인의 실루엣이 물러나고 그의 진정한 형태가 점차 드러났다. 에그시는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은 에그시가 자신의 모습을 시야에 다 포함시키기도 전에 발포했다. 에그시가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에그시의 귓바퀴 근처에 총알이 박혔다. 에그시는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예외 없이 사마리아인이 다녀간 자리에는 시신들이 즐비했다.
⁂
“당신을 가둬두겠다는 건 아니지만 내가 왔을 땐 당신이 보였으면 좋겠어. 당신이 없으면 화가 나서 견디지 못할 거야.”
헨리 하트는 그렇게 경고했다.
해리는 그 말을 의심하진 않았다. 자신이 맨 처음 눈에 띄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구원들을 모두 죽인 전력이 있는 유사인간이었다. 해리는 감시 카메라나 수갑 따위는 하나도 없는 일반적인 가택을 둘러보았다. 그를 가로막고 있는 건 회색 현관문밖엔 없었다. 허나 해리는 창문 밖을 응시하는 것에 그쳤다.
헨리는 단지 해리가 가장 편안해 할 것 같다는 구실을 들어 런던에 집을 마련했다. 아직 헨리가 자신의 기억을 얼마만큼 보유하고 있는지 모르는 해리는 그의 순진무구함을 분석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오늘의 대화는 더 길고 심오하게 이루어져야 했다.
헨리가 돌아와 소용을 다한 총을 던졌다.
“헨리.”
그것은 해리가 자신의 복제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요소들 중 하나였다. 헨리의 표정이 설핏 풀어지는 것 같았다.
“당신이 가장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남자애를 봤어.”
해리가 놀라서 물었다.
“…에그시를 말하는 건가?”
“당신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지, 해리?”
또 다시 문답은 불안해졌다. 헨리는 해리가 숙고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몰아붙였다.
“당신은 아마도 내가 대체 무엇인지 해부하면서 동시에 그 남자애와 당신의 과거를 그리워할 수도 있겠지. 나는 그렇게 못 해. 나는 단 한 가지를 위해 움직여. 당신이 속으로 바라왔던 이상향.”
헨리는 완벽하게 안정적인 해리의 발음을 따라하면서도 몹시 떨리는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의 가치를 시각화하는 것처럼 타인의 핏자국이 튄 드레스 셔츠에 이리저리 구김살이 잡혔다.
“내 이상향을 자네가 알고 있다고?”
“당신의 절망이 나한테 있어.”
해리는 연결고리가 빈약한 모더니즘 소설을 읽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졌다.
“보이지 않는 무기질의 벽으로 나누어져 있는 인간들, 그 쪼개진 원자 같은 족속들은 자신들의 무한한 불완전함을 모면하고자 끊임없이 접붙이기를 감행해. 그렇지만 그건 진화가 아니지. 변화하지도 않아. 당신이 수 십 년 동안 그들을 위해 노력했어도 바뀐 게 없어. 당신도 깊은 곳에서는 지쳤던 거야. 학습 능력 따윈 관심도 없이 무지한 번식과 자가 복제만을 거듭하는 헛된 존재들에게.”
해리는 순간 오싹해졌다. 자신의 얼굴을 통째로 가져다 옮겨 놓은 존재가 리치몬드 발렌타인이나 할 법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었다. 그러다가 해리는 그것이 곧 헨리 하트가 상징하는 바라는 걸 깨달았다. 제 아무리 고상한 해리의 무의식이라도 그 안에는 이성이 부재하는 게 지당하다. 헨리가 구조와 논리가 없는 욕망을 하나의 목표의식으로 착각하는 걸 해리는 어리석다고 비난할 수는 없었다.
“그런 당신의 체념이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거야, 존경하는 나의 해리.”
인정 따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유사인간의 낯빛이 너무도 연약했다. 해리가 잠시간 눈을 감으면서 생각을 정돈했다.
“자네가 나의 어두운 측면을 대변하기라도 한다는 건가? 내 본능적이고 편협한 측면들을 자네가 다 가져갔다고?”
“빛은 당신이야. 그 외의 모든 건 내가 감당해.”
헨리는 단언했다.
“날 여기 두고 혼자서 범죄자들을 무찌르고 다녔지. 그것도 자네의 그러한 성질이 발현되면서 나타난 결과의 일부인가?”
“그런 것들은 당신의 이상향에 머물 자리가 없잖아. 필요 없어. 죽어도 괜찮아.”
“헨리, 나는 자네에게 죽음을 요구한 적이 없어.”
“당신이 해리 하트니까. 근본은 고귀한 거야.”
헨리는 자신이 해리에 대해 더 심오한 시각을 가지고 있다는 말투로 내뱉었다. 해리가 미간을 좁혔다. 그러자 헨리가 고통스러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왜 내가 하는 일이 전부 당신을 위한 거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아? 오, 해리. 존경하며 사랑하는 해리. 당신 대신 손을 더럽혀줄 사자가 바로 나야.”
온실 속에서 결함 없이 보존된 깨끗한 향기와, 굳이 파멸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친 화약 냄새가 섞였다. 이전보다 두 사람은 가깝게 서 있었다. 해리는 전직 특수 요원의 눈썰미가 아니더라도 훤히 읽을 수 있는 헨리의 경련을 목도하는 것과는 별개로 덤덤히 질문을 던졌다.
“내가 자네와는 달리, 자네에게만 몰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자넬 화나게 만드는 건가?”
헨리는 소년처럼 입을 꾹 닫았다. 해리는 함축적이거나 축약되어 얼핏 널을 뛰는 듯한 헨리 하트의 화법과 사고방식을 조금씩 쫓아가고 있었다. 해리가 시선을 기울이며 자신의 절반을 불렀다.
“헨리.”
헨리가 성큼성큼 해리에게 다가가더니 해리의 머리칼과 뺨과 어깨를 차례대로 쓸었다. 별다른 안정화 작업도 거치지 않은 유사인간의 신체는 자신의 본체에 기대 요동쳤다. 헨리가 해리의 귓가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부디 날 지켜봐. 나는 당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들을 죽일 수 있으니까.”
⁂
거실은 비어 있었다.
헨리는 이상하게도 자신이 피신할 곳으로 용도가 정해져 있지 않은 선택했다. 그는 미닫이문이 달린 옷장에 기대서 핸드폰 액정을 읽고 있었다.
그는 해리와 있을 때는 아무 것에도 주의를 뺏기고 싶지 않아 핸드폰을 껐었는데, 방에 들어와서 전원을 켜자마자 핸드폰은 칭얼대듯이 온갖 알람들을 쏟아내었다. 엄격히 따지자면 그것은 모두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을 부르짖는 외침들이었다.
헨리가 바깥의 소리를 듣고자 귀를 세웠다. 조용했다. 그가 거실로 나왔다. 해리에게 넓은 공간을 양보하고 싶었던 건데 해리는 거실에 없었다. 헨리는 조금 시무룩해졌다.
그가 오늘 밤 마지막으로 외출했다.
⁂
멀린이 미심쩍다는 듯이 얼굴을 기울였다.
“사마리아인이 해리라고?”
“전 그렇게 생각해요.”
“얼굴을 봤나?”
그 말에 에그시는 우물쭈물하다가 대답했다.
“그건… 아니긴 한데 록시도 그 자가 해리랑 닮았다고 그랬어요!”
엉겁결에 에그시의 구원투수가 된 록시가 에그시에게 입모양으로만 뭐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멀린이 묵묵히 시선을 거두고 있지 않는 게 느껴져서 록시는 결국 목소리를 냈다.
“…실루엣은 얼핏 비슷해 보였어요.”
“무엇보다 총을 쏘는 폼이 해리였다니까요? 그 때 그 교회에서….”
마지막의 평범한 단어는 에그시의 음성을 끊어놓았으며 멀린의 눈썹을 한 번 비틀었다.
“아, 젠장. 아무튼요! 그 사마리아인이랑 접촉 안 해볼 거예요?”
에그시는 억지로 짜증을 내면서 자신의 실수를 묻어버리려고 했다. 에그시가 해리 하트의 사격 솜씨를 본 것은 한 번뿐이었다. 그 거대한 폭력은 분명히 해리와 어울리지 않는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에그시는 그것을 바탕으로 해 사마리아인과 해리를 연결 지었음에 불편해 했다.
멀린이 대화의 흐름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안 그래도 한 번은 대면을 해야 하지 않나 재고 있던 참이다. 사법 기관들이 익명의 제보자로 둔갑해서는 그에게 자기네들이 해야 할 일을 떠미는 거 같더군.”
“일을 떠밀어요?”
“번거롭거나 대처법이 여의치 않은 테러나 습격을 그 사마리아인이 대신 막아주기를 기대하면서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거야. 사마리아인이 소유했다고 알려진 우편 사서함 하나가 있거든. 사법 기관들이 애용하는 고객 센터로 변질되는 중이지.”
에그시가 코웃음을 쳤다.
“뭐, 거기로 편지를 보내면 그 자가 읽는대요?”
멀린의 안색이 진지해졌다. 놀랍게도 멀린이 서랍에서 편지봉투 하나를 꺼냈다. 킹스맨 마크가 찍히지 않은 일반적인 편지지에 인쇄된 글씨를 붙여 수신자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배제한 형태의 서한이 에그시와 록시 사이에 놓였다.
“한 번 시도해보겠나?”
록시가 먼저 편지를 받았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의 우편함은 런던에 있었다.
⁂
무인으로 운영되는 우편 사서함들의 집합소에는 입구가 꼭 다물려 있는 일종의 서랍장들로 그득했다. 중간 크기의 전등이 충분히 수상쩍은 이 장소의 분위기를 밝게 바꿔보려고 용을 쓰고 있었다. 에그시의 콧잔등에 주름이 갔다.
우편함들은 열쇠가 있어야만 열리는 구조를 토대로 똑같이 만들어져서 에그시는 열과 행에 의존해 사마리아인의 상자를 골라내야 했다. 사마리아인의 우편함은 꽤 높이 있었다. 에그시가 최대한 팔을 뻗었다.
문뜩 에그시는 해리 하트와 비슷한 키를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상자를 여닫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에그시가 봉투를 손끝으로 톡톡 밀어서 우편함 안으로 집어넣었다. 편지는 딱딱한 철바닥에 떨어지지 않았다. 에그시는 구멍이 숭숭 뚫린 물컹물컹한 치즈 덩어리가 되어버린 이 땅에 견고함을 부여하려는 이의 흔적을 한동안 응시했다.
에그시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자세로 나왔다. 그림자 속에서 헨리 하트의 안구가 번뜩였다.
우편함을 비우라는 알림 메시지를 받고 온 그는 에그시가 대로변에 발을 들이고 나서 내부로 들어가 상자를 열었다. 헨리는 고심할 것도 없이 제일 위쪽에 있는 봉투를 뜯었다.
멀린은 사마리아인에게 정보를 주지 않았다. 한 장짜리 종이에 적힌 것은 어떤 장소와 시간이었다.
⁂
영국의 상징과 성스러움을 모두 함축하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그 묵직한 맥락과는 별개로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쌓여 있는 장소였다. 정원과 고풍스러운 조각상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우러러보는 단 하나의 웅장한 건축물의 틈바구니에 멀린이 서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비었고 특수 안경을 통해 주변 정경을 분석하듯 읽어 내리는 있는 눈동자만이 간간히 움직였다.
에그시는 슈트를 입고 막대사탕을 우물거리면서 사원의 테두리를 돌고 있었다. 사탕은 정장을 빼입은 남자가 사진 한 장 찍지 않고 관광 명소를 어슬렁거린다는 걸 스스로 수상하게 여긴 에그시가 짜낸 일종의 위장이었다.
“오긴 오겠죠?”
에그시는 사원의 오른쪽 측면을 훑고 있었다.
—사마리아인을 해리라고 생각한 건 너다, 에그시.
“반 이상은 그냥 제 기대 심리죠.”
익히 알려진 명칭보다는 성채에 가까운 건물을 걸으면서 에그시는 중얼거렸다.
“어쨌든 해리가 살아 있었으면 좋겠으니까요.”
멀린은 침묵했다.
그는 서원의 정면에서 포즈를 취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짧은 시선을 주었다. 기념 촬영을 하려고 멀린의 옆에 잠시 자리 잡는 사람들은 많았다. 허나 그들은 곧 사원 안으로 들어가 버리거나 계속 사진을 찍는데 몰두하기만 했다.
그럴 즈음 한 여성이 멀린에게 다가왔다.
“저기.”
멀린으로서는 예상하지 못한 접근이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여자일 거라는 가능성을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던 멀린이 속으로 당황해하고 있을 때 여성이 핸드폰 하나를 건넸다.
“어떤 신사분이 건네주시라고 하던데요.”
“저한테 말입니까?”
“네.”
멀린이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이건 제 것이 아닙니다만.”
“하지만 그 신사분은 분명히 당신을 가리키면서 이게 당신 거라고 그랬어요.”
여성은 평범한 시민이었다. 옷차림으로 추정컨대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는 정부 부처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일 확률이 높았다. 멀린은 꺼림칙해하면서도 핸드폰을 받았다.
“에그시, 근처에 사마리아인처럼 보이는 사람이 없나?”
—다 관광객들뿐인데요.
멀린이 핸드폰의 뒷면을 벗기면서 한 번의 손짓으로 통신 채널을 변경했다.
“란슬롯, 퍼시벌. 그 쪽은 어떤가?”
사마리아인이 어수룩하게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하여 록시와 퍼시벌은 사원에서 반경 네 블록을 수색하고 있었다. 각각 북쪽과 서쪽에 있는 두 사람 역시 사마리아인으로 의심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멀린이 안에 소형 폭탄이 장착되어 있지는 않는지 배터리를 분리하려는 찰나 핸드폰이 진동했다. 멀린이 사원의 중앙 입구의 움푹 들어간 부분으로 자리를 옮겨갔다.
“얼굴을 보여주기는 싫었던 건가.”
—그 남자애가 아니로군.
멀린은 그 한 마디로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영국식 발음에 정통하거나, 애초부터 그런 발음을 구사하는 인물임을 파악했다. 멀린은 그의 음색까지는 단정하지 않았다.
—아, 기억났다. 당신 혼자는 아닐 텐데. 에그시는 어딨지? 가까이에 있어?
사마리아인의 말이 길었다. 멀린은 사마리아인이 해리와 똑 닮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정말 해리, 당신입니까?”
—에그시를 바꿔줘.
그야말로 복병을 만난 멀린이 인상을 구겼다. 사마리아인은 해리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물어보지도 않으면서 에그시의 행방을 물었다.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해리가 아니라면 더욱 문제가 심각해지는 상황 속에서 멀린은 전화기의 마이크 부분을 손으로 가렸다.
“사마리아인은 사원으로 오지 않았네. 대신 나한테 전화를 걸었어. 핸드폰을 붙잡고 있는 사람들을 눈여겨 봐주게.”
멀린이 다시 핸드폰을 입가에 가져갔다.
“잠시 기다려주겠나.”
대답 대신 거리의 소음이 들려왔다. 멀린은 통화가 끊어지지 않은 걸로 만족했다.
멀린의 통신을 듣고 눈치 좋게 에그시가 정문 방면으로 돌아왔다. 멀린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봐.”
“해리에요?”
“아마 아닐 거다.”
“…그런데 굳이 절 찾았다고요?”
핸드폰 화면은 아직 빛이 났고 초가 넘어가고 있었다. 에그시는 쉽사리 전화기를 넘겨받지 못했다. 입으로는 여지를 닫아두지 않은 답변을 했으면서도 멀린은 사마리아인이 해리가 아닐 거라는 눈빛을 짓고 있었다.
—난 일단 웨스트민스터 역으로 가보지.
—전 브로드웨이 쪽에 다 와가요. 정말 안 보이는데요?
란슬롯과 퍼시벌은 부지런히 런던의 중심가를 뒤지고 있었다. 에그시가 핸드폰을 귀에 붙였다.
“…여보세요.”
—로마에서 널 봤었어.
즐겨 쓰는 타블렛보다는 작지만 스마트폰보다는 큰 전자 장비를 꺼낸 멀린이 옆에서 사마리아인의 위치를 추적하는 중이었다. 멀린이 손가락 하나를 펴서 에그시에게 보여주었다. 멀린에게 필요한 시간은 1분이었다.
“당신은 해리가 아니죠?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아요?”
—네가 나와 내 주인을 동시에 귀찮게 해.
에그시가 혼란스러워하면서 물었다.
“…뭐라고요?”
—인간은 이성이 지시하는 바를 따라 살아가는 것 같지만 틀려. 이성은 얄팍한 구분선이야. 생물학적으로 인간과 동물을 구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붙잡고 있는 국경일 뿐. 너는 단숨에 찢어버릴 수 있는 그런 선분에 불과해.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의 언어는 별칭과 어울리지 않게 오싹했다. 에그시는 반항심보다는 위기감과 걱정을 따라 말했다.
“당신, 해리한테 무슨 짓 했어?”
멀린이 손바닥을 쫙 폈다. 5초만 더 끌면 사마리아인이 숨어 있는 곳을 알 수 있었다. 에그시는 저도 모르게 다급해져서 사마리아인을 재촉했다.
“대답해!”
발끈한 헨리 하트가 핸드폰을 부숴버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여기 있었군, 자네.”
등 뒤에서 해리의 기척을 느낀 헨리가 온 몸에서 피어오르는 경련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는 순간 해리에게 신경을 뺏겨서 통화 종료 버튼을 한 발 늦게 눌렀다.
멀린의 손바닥에서 작동하던 기기에 빨간 점이 찍혔다.
“됐어.”
연결이 끊겼다는 소식을 전하려던 에그시가 반색했다.
“진짜요?”
“의회 근처 크롬웰의 동상 쪽이었어.”
에그시가 뭘 망설이냐는 듯이 앞서 튀어나갔다. 멀린이 달리면서 흩어져 있는 록시와 퍼시벌을 불러 모았다. 영국 역사에서 최초이자 최후의 공화정을 달성해 냈던 위인의 조각상 아래, 섞일 듯 섞이지 않을 두 명의 신사가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
“당신이 날 따라올 줄은 몰랐어.”
“날 가둬둔 건 아니라고 자네가 먼저 그러지 않았던가.”
헨리는 초조했다. 자신의 위치가 발각되었을 거라는 직감이 들어서였다. 헨리는 해리가 자신을 미행했다는 것이 일단 놀라웠다. 마음만 먹으면 기뻐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자네를 이 이상 가만히 놔두는 건 옳지 않다는 판단이 섰네.”
해리의 그 말에는 정말로 헨리가 고대했던 것이 들어 있었다. 헨리는 순간 환희했으나 곧바로 다급해졌다.
“여기는 당신한테 위험해.”
“헨리?”
“이곳은 당신의 자애로움과 조화를 이루지 않아.”
헨리가 은밀히 핸드폰을 바닥에 버린 다음 그 손으로 해리의 손목을 쥐었다. 헨리가 부서질 듯한 표정으로 청했다.
“해리, 제발.”
헨리가 힘을 주어 해리를 끌어당겼다. 해리는 이번 한 번은 물러나기로 했다.
웨스트민스터 역에서 똑바로 내려온 퍼시벌이 가장 일찍 올리버 크롬웰의 동상 앞에 도착했다. 그는 액정이 깨진 휴대전화가 버려진 주변에서 마닐라 봉투를 포착했다. 퍼시벌이 새끼손가락을 넣고 풀칠된 봉투의 입구를 살살 뜯었다.
“…이런.”
퍼시벌이 딴에는 대단히 값진 탄식을 흘렸다. 뒤이어서 멀린과 에그시가 달려왔고, 정 반대방향에 있던 록시는 양 무릎을 잡고 갈라지는 숨을 내뱉었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큰일이 있을 모양이야.”
퍼시벌이 한 줄로 신사적인 사마리아인이 킹스맨들에게 위임한 첩보를 요약했다.
⁂
“자네의 설명은 완벽하지 않았네.”
“당신이 부족한 게 있으면 만족시켜 줄게요.”
헨리는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해리도 그가 없는 동안 많은 걸 준비했으므로 꾸물대지 않았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 이상향이라는 것을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헨리의 동공에 균열이 갔다. 해리 하트 곁에서는 언제나 충만한 겸손함에 휩싸여 있던 그가 처음으로 해리 앞에서 경외감이 아닌 혼돈으로 인해 떨었다.
“범죄자가 들끓는 세상은 당연히 바람직하지 못하지. 그렇다고 규율과 일관성 없는 독자적인 살인으로는 범죄자들의 씨를 말릴 수도 없고, 그게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런 사고방식은 지양해야 할 대상이 되네.”
“아니야.”
헨리는 강하게 반발했다. 그는 이를테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과 판이하게 다를 때처럼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에 몸서리를 치듯이 해리의 말을 부정했다.
“내가 당신을 오해한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난 당신에게서 비롯됐다고. 이해가 안 돼요? 당신이 욕망하는 것에 관한 한 나는 틀리지 않아. 그게 내가 가진 단 하나의 동력이니까. 피하지 마요.”
“침착해. 난 자네의 불완전함을 이해할 수 있어. 아직은 변변찮은 수준이겠지만 노력할 자신도 있고. 자네가 날 끔찍이 존중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해도, 자네가 상처 받지 않도록 부드러운 개혁을 제안하겠네.”
해리가 최초로 먼저 손을 내밀었다. 헨리는 눈으로는 그것을 보았고, 그 외 모든 부위로는 해리의 위대한 사유를 느꼈다.
“오, 해리. 상냥하고 아름다운 내 해리 하트.”
헨리가 전율하며 해리와 닿으려고 했다.
밝고 명랑한 청년이 그 성스러운 교접에 끼어들었다. 오벨리스크를 만들 고급 대리석에 잘못 파고든 티끌이, 손상될 수 없는 신성성에 감히 마수를 뻗쳐댔다. 헨리가 바람 소리가 나게 팔을 내렸다.
“그 놈한테 가려는 거야.”
해리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띠었다.
“…헨리?”
헨리는 차츰차츰 분노했다.
“해리, 나는 당신의 모든 것을 존경하고 경배해. 지금도! 그런데 왜 당신은 나를 타협할 대상으로만 보지? 타협은 조화가 아니야. 왜곡된 억누름에 지나지 않는데.”
두 사람의 간격이 벌어졌다. 해리는 지끈거리는 머리로 올라가려는 손을 힘껏 끌어내려서 다시 헨리를 감싸려 했다.
“진정하게, 헨리. 개혁은 타협과는 달라. 자네는 나를 위해 손을 더럽히겠다고 했지만 자네가 애써서 어둠 속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어. 그런 걸 원하지도 않아.”
헨리는 고통스러움에 몸부림을 쳤다. 원하지 않는다는 표현은 헨리가 거부하기 너무나도 어려운 주문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해리가 간과한 부분이 한 가지 있었다. 해리 하트라는 존재 하나에게 깃들어 있던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는 오롯이 해리의 것이지 헨리에게까지 나누어진 것이 아니었다. 헨리 하트를 구성하는 요소는 대개 선천적이며, 선천성은 곧 정체하는 성질과 맞닿아 있다.
헨리에게는 해리가 흔치 않게 애정을 쏟아 부은 청년에게 맨 처음 실패의 딱지를 붙였던 해리의 케케묵은 편견만이 존재했다.
“…나도 당신을 변화시킬 수 있어, 해리.”
헨리의 내면을 알 수 없는 해리는 의혹에 잠겼다.
“당신을 완벽히 진실하게 만들어 줄 거야.”
두 사람의 진리는 서로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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