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6. 부재와 실재Absence and Presence






  설리반은 마티의 얼굴을 몰랐지만, 나무에 기대고 서 있는 마티 하트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설리반은 큰 가방을 하나 들고 택시에서 내렸다. 마티가 팔을 들었다.


  “꽤나 급하셨던 모양이군요.”


  마티는 설리반이 짐을 넣을 수 있게 뒷좌석 문을 열면서 대꾸했다.

 

  “그 쪽도 이 일을 대충 받아들이는 것 같지는 않던데, 뭘.”


  이윽고 마티가 앞서 걸었고 설리반이 그 뒤를 따랐다. 동부에서 온 FBI 요원은 흔하지만 울창한 남부의 숲을 유의 깊게 바라보았다.


  “일단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게 뭐요?”

  “별로요.”


  설리반의 대답은 간단했다. 그는 모종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지도 모르는 낯선 땅을 파악하고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 데에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러스트한테 어느 정도 얘기를 들었으니까 내가 전화했을 때 곧장 온 게 아니었어요?”


  마티는 조금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설리반을 돌아보았다. 반면에 설리반은 이상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다는 태도로 응대했다. 


  “콜은 저에게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니 연락하면 얌전히 오라는 말만 했을 뿐입니다.”


  마티는 하마터면 중요한 것을 잊어버리고, 연방 요원씩이나 되는 사람의 성격이 의외로 고분고분하다고 생각할 뻔했다.


  “그래서 러스트와는 대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그가 위장조사를 하고 있을 당시에 만났습니다. 범죄 조직에 숨어들었으면서 FBI인 거 티내고 다니지 말라더군요.”

  “러스트가 혼자서 알아봤다고, 그럼?”

  “그러게 말입니다.”


  마티가 숲의 그늘에서 햇빛이 있는 쪽으로 발을 뻗었다. 설리반이 재킷 한 쪽을 젖히며 총을 뽑아들 준비를 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수수한 저택이 드러나자 설리반의 손이 멈칫했다. 그가 물었다. 


  “…저깁니까? 저기에 뭐가 있는데요?”


  오히려 마티가 먼저 총을 쥐고 팔을 내렸다.  


  “나도 몰라요. 러스트가 미친 짓을 해서라도 버텨가며 알아내고 싶었던 게 있다는 거 말고는.”


  탐정과 연방 요원은 천천히 우울한 망상이 창궐한 곳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나 보군요.”

  “마지막으로 있던 사람이 나가는 걸 확인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총은 들고 있는 게 나을 겁니다.”


  마티는 고개를 한 바퀴 빙 돌리면서 주변을 훑었고 설리반은 입구에 버티고 있는 금속 탐지기를 곁눈질했다. 커튼이 젖혀진 창문으로 들어온 빛이 떠다니는 먼지를 비추었다. 


  “러스트는 여기에서 최대한 정보를 얻어내고자 각성제를 먹고 다녔어요.”


  설리반이 몸을 돌려 마티를 쳐다보았다.


  “여긴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안정제를 먹이나 봐요. 여기까지 차에 태워올 때는 약한 수준의 수면제를 주는 것 같고. 그렇게 사람들을 약에 취하게 만드니 인류는 다 끝난다는 둥 그런 얘길 지껄이게 만들지.”


  마티가 엄지손가락으로 자신과 가장 가까운 방문을 가리켰다. 두 사람은 문은 열어둔 채 각자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마티가 들어간 곳은 도서실이었다. 마티는 미간에 주름이 잡힌 표정으로 천천히 방 안을 조사했다. 카운터마냥 입구와 가까이 붙어 있는 책상에 명부처럼 보이는 것이 있어 마티는 그것부터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 때 설리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보아하니 그런 생각이 꽤 인기를 얻고 있나 봅니다.”

  “거긴 뭐가 있는데요?”


  마티가 슥슥 파일을 넘겼다. 러스트의 이름은 없고, 대신 애나벨이 책을 빌려갔다는 기록이 많이 보였다.


  “무슨 강연장 같은데요. 원형으로 배치된 테이블과 의자, 이동이 손쉬운 화이트보드도 있습니다. 그쪽은요?”

  “여긴 책밖에 없어요.”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로비에 모였다. 둘은 각기 다른 곳을 바라보느라 잠시 말이 없었다. 


  “보통 중요한 것들은 꼭대기 아니면 지하에 있는 법이죠.”


  설리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위쪽과 아래쪽 모두에 뻗어 있는 계단을 응시하고 있었다. 설리반이 고갯짓했다. 


  “지하부터 살펴볼까요?”





  병실에 들어와서 러스트는 처음으로 눈을 떴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이자마자 호출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간호사가 들어왔다.


  “일어나셨네요? 어디 불편하신가요?”


  간호사는 직업적이지만 또한 자연스러운 눈길로 러스트를 본 반면, 러스트는 간호사를 자신이 원할 때까지 붙잡아야만 하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전화기를 쓰고 싶은데… 내 소지품은 어디 있습니까.”

  “아직 마취가 다 풀리지 않았을 텐데요. 무리하시면 안 돼요.”

  “누워서 입 좀 벙긋거리는 건 무리하는 게 아닙니다. 부탁이니 전화기 좀 갖다 줘요.”


  러스트는 눈을 한 번 질끈 감고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팔을 움직였다. 간호사는 그에게 살짝 시선을 보낸 뒤 침대 옆에 있는 서랍장을 열었고, 러스트는 핸드폰을 건네받자마자 자판을 눌렀다. 간호사는 꽤나 다급해 보이는 그를 두고 병실에서 나갔다. 


  러스트가 가만히 숨을 내뱉으며 신호음을 들었다. 


  —러스트?

  “마티, 어디야.”

  —네가 노트에 남겨놓은 걸 보고 멜랑콜리안의 본거지에 왔어. 설리반도 왔고. 이제 깬 거야?


  누구한테 전화가 왔냐고 물어보는 설리반의 목소리가 작게 들렸다. 러스트의 눈꺼풀이 조금 늦게 물러났다. 


  “네가 곧 발견하게 될 약물이 있을 거야. 그건 거기에만 있는 게 아니야. 마약상들만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곧 모든 사람들에게 퍼지게 돼.”

  —뭐라고? 확실해? 

  “바이스가 그걸 원해.”


  러스트는 생각나는 대로 말을 뱉었다. 


  “설리반한테 도움을 구해. 빌어먹을, 멜랑콜리아의 성분 분석을 아직 안 했군. 샘플을 가져가서 분석해. FBI를 통한다면 그 자료를 가지고 제약회사들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거야.”


  그의 귓가에 마티의 음성이 직접적으로 닿지 않았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마티가 설리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러스트는 순간 자신이 마티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아주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없었다는 것만 아스라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러스트가 핸드폰을 놓았다. 무척이나 졸렸다. 





  “러스트가 약을 챙겨서 분석을 하랍니다. 놈들이 이걸 제약회사에 팔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둘은 어느덧 지하에 몸을 걸치고 있었다. 차가운 공기 끄트머리에도 전직 경찰과 현직 연방 요원을 미심쩍게 만드는 무언가는 묻어 있지 않았다. 마티는 양옆으로 총을 쥔 팔을 한 번씩 휘둘렀고 설리반은 주머니에서 얇은 손전등을 꺼냈다. 


  “마약 종류가 아니었습니까?”

  “나도 모릅니다. 사람 정신을 빼 놓는 건 확실해 보이더군요.”


  설리반이 비춘 길을 나아가기 전에 마티는 시간을 확인했다. 낯선 곳이었고 추가적인 지원이 없었으므로, 수색에 신중을 기하다가 시간을 많이 소모한 상태였다. 마티는 설리반에게 조금 더 빨리 움직이자는 눈짓을 보냈다. 두 사람은 다시 가깝게 붙어 섰다.


  지하실조차 초반에는 평범했다. 여기저기 먼지가 끼어 있는 가운데 여분의 의자들이 포개져 쌓여 있었다. 화학 약품이라든가 조악한 실험 도구 같은 건 보이지 않아서, 마티는 그만 위층으로 올라가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때 설리반이 손전등과는 정 반대방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혹시 콜이 저걸 말하는 걸까요?”


  어딘가에 숨기려는 기색도 없이, 오히려 그것이 일종의 위장술인 것처럼 긴 목재 책상에 유리병들이 늘어서 있었다. 마티는 병의 밑바닥에 미세하게 어떤 가루가 가라앉아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샘플을 어떻게 챙겨가죠?”


  증거물을 담는 봉투는 있었지만 작은 병까지 챙겨오지는 않은 설리반이 눈을 깜빡이며 마티를 돌아보았다. 마티의 해결책은 몹시도 확실했다.


  마티는 지체 없이 유리병 하나를 들어올렸다. 


  “이제 어디서 성분 분석을 하면 좋을지나 생각해 봐요.”

  “탐정 사무소라고 해서 그런 장비까지 있지는 않겠죠?”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젠장.”

  “그럼 그런 장비가 있을 만한 곳을 가도록 합시다.”


  설리반이 배지를 흔들었다. 마티는 그것 참 편리하다는 눈빛으로 앞서가는 설리반의 등을 바라보았다. 





  멜랑콜리안은 흩어졌다. 그들은 늘 흩어졌다가 모이는 족속이었다. 그렇지만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해왔던 자들은 아니었다. 


  아직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달팽이관을 달아줄 사도들을 파견해 놓고, 악이자 동시에 현자인 남자는 자신의 몫으로 남겨둔 이를 찾아갔다. 계몽되어야 할 대상은 완벽하게 자신의 목소리에만 집중할 수 있는 상태로 누워 있었다.   


  “얼굴을 들지 말아요. 많이 어지러울 텐데.”


  러스트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떴으나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도 뚜렷하게 인식할 수 없었다. 마취제는 끈질기게도 그의 뒤통수에 붙어 있었다.


  “당신이 지금 어떤 상태일지 상상이 갑니다. 감각기관의 신경과 대뇌가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 듯한 느낌이랄까? 약간 일방통행처럼 느껴질 겁니다. 바깥에서 들어오는 자극을 자신의 방식대로 소화할 수가 없으니까요.”


  그것은 사실이었다.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 기억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스트는 그에게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그가 자신의 귀에 주입하듯 불어넣는 언어들을 떠안아야만 했다.


  “그러니까 그냥 듣기만 해요, 러스틴.”


  바이스는 안정감 있는 음성으로 러스트의 제대로 된 이름을 발음했다.


  “일단 당신이 이런 꼴이 된 건 내 탓도 있다는 걸 알려주지요. 내가 당신한테는 약을 좀 세게 썼거든. 그런데 그렇다고 각성제를 먹고 다니다니,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어요.”


  바이스의 말에 살짝 웃음소리가 섞였다. 부드럽고 어떤 따뜻함마저 깃들어 있어서, 꼭 바이스가 부드럽게 소중하지만 말썽을 부리기 일쑤인 자신의 친구를 타이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말입니다, 러스틴. 그래서 당신이 얻어낸 게 있었습니까?”


  러스트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당신은 익히 알려진 비관주의자입니다. 95년도부터 시작된 당신의 발자취를 찾는 것도 대단히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내가 기밀로 분류되어 있는 당신의 다른 파일까지 읽어봤다는 건 아닙니다만, 당신에 대해 알고 싶었던 건 다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당신에게 많은 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 계획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시작될 때 당신을 내칠 수 있기만을 바랐죠.”


  바이스의 어투는 시종일관 온정이 묻어있는 형태를 취했다. 물론 그것이 러스트를 기만하지는 못했지만, 그렇다고 러스트로 하여금 바이스를 비판하게 만들지도 않았다.   


  “나는 내가 원하던 작은 걸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더 큰 완성이 꿈틀대고 있습니다.”


  일찌감치 주 경계를 벗어난 바이스의 야망쯤이야 러스트도 잘 아는 바였다.   


  “잘 자라는 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러스틴.”


  바이스 또한 러스트가 잠이 아니라 꿈과 환영 속에 산다는 것마저 다 알고 있다는 태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때 러스트의 입술이 달싹였다. 





  루이지애나 주 경찰을 구석구석 꿰고 있는 사립 탐정이 연방 요원의 배지를 등에 업자 출입이 통제되는 방과 복도들이 허리케인을 만난 나무들처럼 쭉쭉 쓰러졌다. 설리반이 선택한 연구소의 직원들은 그의 얼굴만 봐도 무언가를 반드시 열어줘야 하는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 모습을 보며 마티는 연방 요원과 친분을 가지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최종적으로 그들 앞에 펼쳐진 방에는 이미 연구원 한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연구원은 마티가 통째로 내민 병을 살짝 당황스럽다는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40분 정도 걸립니다.”


  설리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구원과 한 방에 있는 건 옳지 않은 듯하여 두 사람은 밖으로 나왔다. 복도는 그저 통로로서의 기능만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앉을 자리는 없었다. 마티와 설리반은 등을 벽에 붙였다.


  “결과가 나오면 그걸 워싱턴으로 보내서, 루이지애나 외 다른 지역에 그 약이 퍼져나갔는지 아닌지 조사하게 만들 작정입니다.”


  설리반이 조용히 있을 줄 알았던 마티는 조금 늦게 그의 말에 반응했다. 


  “…어, 그래요. 그래야겠지.”

  “그 약이 벌써 시중으로 넘어갔을 리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늦은 것도 아니고. 수거할 수 있을 겁니다.”


  마티는 고갯짓으로 설리반에게 동의했다. 설리반이 벽에서 물러나 마티의 표정을 슥 훑었다. 


  “당신이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었군요.”


  마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콜이 걱정되나요?” 


  마티의 눈썹이 휙 올라갔다가 제자리를 되찾았다. 설리반은 굳이 음성을 내지 않아도 그의 행동들에서 답을 찾을 수 있다는 듯이 부드럽게 시선을 뗐다. 그러나 마티는 입술을 열었다.


  “그 놈도 결국은 인간이니까.”


  그리고 서문을 열고 나자, 밖으로 내뱉고 싶은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마티는 입술을 쉬게 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자기한테는 목숨이 몇 개씩 달려 있어서, 그만큼 세상을 살아본 것처럼 떠들지만 러스트도 결국 사람이에요. 그나마 자기 인생에도 관심이 없는 듯이 보이는 단계는 지나간 것 같아서 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괴상한 머릿속을 다 이해하게 된 건 아니거든. 나는 러스트가 이 일에 왜 그렇게 충실히 몰입했는지 몰라요. 비관론자들끼리 한판 붙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 일이 러스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건 확실히 압니다. 도라 랭 때도 그랬죠. 그런데 가끔 그럴 때가 오면 그 놈은 자신의 몸뚱이가 총알 한 방에 날아가고, 약 잘못 먹으면 터져버리는 그런 평범한 인간의 몸뚱이라는 사실을 뒷전으로 미뤄두는 것 같단 말입니다.”


  설리반이 마티를 물끄러미 보았다. 그는 마티의 말에서 자신도 전에 느꼈던 부분과, 자신이 미처 가져보지 않았던 관점 모두를 끌어낼 수 있었다. 


  “콜은 지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지 않습니까. 거기 얌전히만 있으면 차차 나아질 거예요.”


  “…성격은 거지같지만 일은 잘 한단 말입니다. 능력 있는 수사관 구하는 게 얼마나 힘든데.” 


  설리반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을 참지 못했다.  


  “왜 당신이 콜의 파트너로 남아있을 수 있는지 알 것 같군요.”


  마티의 입가가 주름을 그렸다. 그는 뭐가 웃기냐며 설리반을 추궁하려 했으나 연구원이 불쑥 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미는 바람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분석이 끝났습니다.”





  러스트가 바이스의 이름을 소리 냈다. 바이스는 반쯤 돌아섰다.


  “나는 이태까지 당신의 주장을 들었지.”


  바이스는 진리란 주장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되는 것이라고 러스트의 말을 수정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잠자코 있기로 했다. 바이스는 자신도 러스트의 주장을 들어줄 수 있는 만큼의 인내심은 있다는 듯이 자리를 지켰다.


  “당신 말대로 도덕적 사실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아. 적어도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어떤 기관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존재하는 것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꼬리표를 붙여주는 건 놀랍게도 인간의 몫이지.”  


  러스트는 조금씩 바이스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약기운이 자신의 말과 함께 내뱉는 공기를 통해 배출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러스트의 눈과 입술은 더 이상 멍청하게 정지해 있지 않았다.


  “그런데 당신은 없는 것만 얘기하는군. 무엇이 실재하는지는 말하지 않아. 부재와 실재에 영향을 받지 않으면서도 그 자신은 늘 실재하는 것.”

  “그게 뭡니까?”

  “인간의 언어.”


  러스트는 자유롭게 말했다.


  “언어가 환상을 기술할 수 있는 것처럼 도덕적 사실에 구애받지 않고 도덕적 언어는 언제나 존재해왔지. 당신의 눈에는 아무런 효력이 없어 보일 테고 많은 경우에는 나 역시 그런 말들을 개소리로 들어. 하지만 우두머리만 달라지면 그 모양을 바꾸는 법률과 어떤 사회적 윤리와는 달리 특정 언어는 역사적으로 그것이 영향력이 있음을 증명해왔어. 그건 도덕적 사실에 기초하지는 않아. 역사적인 사실이지.”


  바이스의 얼굴이 처음으로 평범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마주하고 있는 러스트는 처음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또한 그건 당신의 주장보다 위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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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진정한 비관주의True Pessimism

(The Finale)






  기계들은 쉴 새 없이 불빛을 내뿜고 소리를 냈다.


  빌 설리반은 어깨 위에 아슬아슬하게 핸드폰을 올린 채 팩스 머신에서 뽑혀 나오는 자료를 받고 있었다. 성분 분석을 끝낸 연구원은 사라진 상태였고, 설리반은 팩스로 도착한 목록을 보면서 수화기 너머의 상대방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공중으로 떠맡겨질 것 같은 종이는 마티 하트의 손에 안착했다. 마티는 목록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빌 설리반은 그들이 아주 늦지는 않았다고 단정했지만, 두 사람이 있는 힘껏 펼칠 수 있는 범위는 예전에 지나버린 듯했다.


  설리반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마티는 그의 옆에서 한 손엔 워싱턴으로부터 도착한, 멜랑콜리아를 구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사들의 목록이 적힌 인쇄용지를 들었고 다른 한 손에는 러스트 콜의 그림을 든 채 그것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마티는 서서히 러스트의 그림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설리반이 손가락 마디를 내밀면서 조금만 기다려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마티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마티는 자신이 이름을 모르는 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는 무언가 결심한 듯한 걸음걸이로 방을 돌아다녔다. 검사실 안에서 복사기를 찾아낸 마티는 러스트의 그림을 기계 안에 넣었다. 그림이 복사되는 동안 마티는 주변에 있는 종이를 찢었다.


  “설리반.”


  겨우 통화를 마친 설리반이 마티를 바라보았다. 마티가 메모지 크기의 종잇조각을 건넸다.


  “이게 뭡니까?”


  “이젠 흩어져도 될 것 같아서요. 그, 워싱턴 쪽에서 보내준 회사 명단은 어차피 우리가 못 가는 곳들이 태반이잖아요. 당신 동료는 뭐랍니까?”


  “사태의 심각성을 확실히 깨달은 것 같더군요. 환각이라든가 기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효과가 크다는 분석 결과를 받아들었으니 말입니다. 담당 팀을 꾸리고, 각 지부들과 연합하여 약물을 회수할 겁니다. 우린 일단 루이지애나를 맡아야지요.”


  그 말에 마티가 설리반의 손 안쪽을 가리켰다.


  “그러니까 이제부턴 흩어지자는 겁니다. 쪽지 안에 루이지애나에서는 규모가 크다는 회사들의 이름을 적어놨어요. 택시를 타면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어요.”


  마티는 러스트가 그린 얼굴의 복사본을 설리반 앞으로 내밀었다. 설리반은 손목을 집게처럼 아래로 꺾어 그림을 들고 눈을 들이댔다.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이것도 챙겨가요. 그렇게 생긴 사람 본 적 있냐고.”

  “당신은요?”


  마티는 대답 대신 러스트의 그림을 팔락였다. 종이가 흔들리는 가벼운 소리와는 다르게 마티의 표정에는 어떤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바이스는 다 헤아릴 수도 없는 개수의 가닥으로 갈라져 있었다. 그의 조각은 텍사스에도 있었고 캘리포니아에도 있었으며 일리노이의 중심부에도 있었다. 


  그것들 모두는 어느 한 지점에 안정되어 있지 않고 진동하는 중이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아의 강력한 덫이 그를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 떨림이 빚어낼지도 모르는 일종의 불완전함을 고려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계산의 결과로 그는 러스트 콜을 위한 차가운 전령이 되기로 한 것이었다. 바이스는 다시금 그것을 상기했다.


  “허술하군요.”


  바이스는 순간 움찔대려는 자신의 발끝을 엄하게 훈계했다. 


  “얄팍하고 추상적이며 심지어는 허상처럼 들리기까지 합니다. 당신이 말하는 특정 언어란 대체 무엇입니까? 그리고 객관적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언어에 어떤 실체적인 힘이 있다는 거지요?”

  “아주 근본적이고 친밀해서 인간에게 하나의 가족적인 명제로 자리 잡은 말들이 있지.”


  바이스는 러스트의 화법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래서 바이스는 일견 어떠한 형태도 없는 듯한 러스트의 어휘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러스트가 그의 첫 번째 질문에 더 이상 긴 답변을 주지 않는 이유이기도 했다.


  뒤이어 러스트는 두 번째 답을 주었다.


  “그리고, 반드시 객관성에서 실체가 도출되는 건 아니야.”


  러스트는 무표정하게 단언했다. 그는 드디어 논리에 사로잡혀 현실로부터 유리된 몽상가를 비판할 수 있었다.


  바이스는 정지했다. 더 이상 질문도 해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바이스는 러스트의 침대보다는 병실의 문과 더 가까운 곳에 서 있었지만, 복도 밖으로 나갈 것 같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러스트를 움켜쥘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환각으로 세운 파괴적 비관주의가 요동치고 있었다. 러스트는 바이스가 쉽사리 움직일 수 없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러스트는 이불 속에 있는 손을 움직였다. 러스트는 그림자 밑에서 숨을 죽이고 있던 핸드폰의 빛을 불러들이고 그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사실 그는 간호사에게 핸드폰을 받은 뒤로 그것을 누구에게도 준 적이 없었다. 


  핸드폰의 작은 구멍에서 수화음이 새어나왔다. 러스트가 조용히 볼륨을 내렸다. 전화를 받은 이의 목소리는 바이스에게 닿지 않았다.





  인간은 도덕적 사실을 지각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때론 자신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 일을 설득력 있게 상상하게 만드는 것을 가졌다. 그것은 대개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마티는 러스트가 그림 속의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을 직관했다.


  러스트가 마치 무언가에 사로잡힌 듯이 필사적으로 분석하고 묘사한 갈색 눈의 남자는 우울증을 휘몰고 다니는 핵심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남자는 저 멀리 뉴욕이나 워싱턴 D,C에서 큰일을 성사시키고 있는 중일 지도 몰랐다. 그런데 마티는 러스트의 다른 그림들도 같이 보았다. 


  해석 그 이상의 서사가 함축되어 있는 것은 오직 그 갈색의 눈뿐이었다. 그 정도는 마티가 유추하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인 것이었다.  


  간결하면서도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서 마티가 거침없이 속도를 높이는 와중에 벨이 울렸다. 마티가 핸드폰의 액정을 슥 보았다. 그는 핸드폰을 잡지 않고 정면을 보며 소리쳤다.  


  “나 지금 병원으로 가고 있어. 좀만 더 잡아놓으라고!” 


  마티의 손가락이 핸드폰 위를 휙휙 날아다녔다.


  “다 때려치우고 병원으로 와요!”

  —뭐라고요?


  설리반의 목소리는 어쩐지 원치 않은 일이 반복되고 있어 짜증이 난다는 투였다.


  “러스트가 있는 병원! 탐정한테는 체포권이 없어요. 우두머리를 잡을 기회를 줄 테니까 꾸물거리지 말고 오라고!”

 —젠장, 택시비 청구할 테니 그리 알아요!


  설리반이 처음으로 내뱉은 험한 말에 자극을 받은 듯이 마티가 페달을 밟았다. 그는 설리반이 투덜거리면서도 주 경찰들에게 권위 있는 명령을 내릴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빛과 그림자가 어우러졌다. 혼란이 시작되는 것 같기도, 질서가 정립되는 것 같기도 한 공간 속에서 러스트는 바이스의 목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러스트는 조심스럽게 바이스를 추측했다. 그는 약물로 부식된 이성에 아주 최소한의 껍질만 두른 물컹물컹한 메시지를 심으면서 이것은 인간을 위한 또 다른 구원이라는 확신밖에 가지지 못한 자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악으로 칭하는, 자존심과 허영심 사이를 매 순간마다 스쳐가는 사람이다. 그래서 러스트는 바이스가 친절하게 자신의 실패를 알려주러 온 것이지 자신을 죽이려고 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과연 바이스에게는 총이 없었다.


  바이스는 아무 것도 꺼내지 않았다. 러스트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바이스를 인내심 있게 응시해주고 있다가 피로감이 밀려와 잠시 눈을 감았다. 눈꺼풀의 일부가 아직 뻐근했다. 러스트는 손가락으로 눈꺼풀을 문지르면 한결 나아질 거라고 느꼈다.


  러스트의 눈에 무엇인가가 내려앉았다. 그 때 러스트는 이불 속에 있는 팔을 꺼내지도 않은 상태였다.


  “당신의 진리는 적어도 날 위한 건 아닙니다.”


  러스트는 본능적으로 주삿바늘이 꽂혀 있는 부분을 가렸다. 바이스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세상 모든 종류의 환각이었다.


  러스트의 팔에 달린 십자가 모양의 밸브는 세 방향으로나 열려 있었다. 러스트는 상체를 크게 일으키며 바이스가 자신의 혈관에 직접적으로 치사량의 멜랑콜리아를 주입하려는 걸 저지했다. 팔을 워낙 세게 움직이느라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던 바늘이 그의 피부 속에서 흔들렸다. 


  바이스는 비석 같은 표정으로 러스트를 우울함 속에서 질식시키려고 했다. 평범했던 그는 필사적으로 비범해졌다. 갈색 눈동자가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결국 러스트는 바이스를 막지 못했다.


  “그에게서 떨어져!” 


  바이스의 동작을 묶은 것은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병실 안으로 들어온 마티였다. 병원 입구에서부터 꾸준히 높여온 가속도를 조금도 줄이지 않은 채 마티가 바이스에게 달려들었다. 러스트의 팔을 꽉 잡고 있던 바이스의 손이 아래로 미끄러졌고, 덕분에 러스트는 애매하게 꽂혀있는 바늘이 부러져 그대로 혈관 속으로 들어갈 뻔한 위기를 맞기도 했다. 


  마티에 이어서 들어온 빌 설리반이 휘릭 수갑을 꺼냈다. 


  “음, 당신 이름을 알지는 못하지만 어쨌든 체포하겠습니다. 당신의 죄목은 알고 있거든요.”


  설리반은 범죄자의 눈앞에 FBI의 로고가 선명한 배지를 갖다 댔다. 마티가 설리반이 남자를 포박하기 쉽게끔 옆으로 비켜났고, 그러다 그는 러스트가 주삿바늘과 튜브를 내던지는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어쩐지 러스트가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다는 듯해 마티는 날숨 섞인 실소를 흘렸다. 


  병실에 가둬놔도 무언가에 휘말리는 그의 파트너는 이번에도 살아남았다.





  살짝 비뚤어졌던 침대도 본래의 위치를 되찾고 러스트의 팔에도 새로운 바늘과 튜브가 꽂혔다. 약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난 러스트는 자신의 처지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옆에서 마티는 술이든 담배든 몸에 그다지 좋지 않은 무언가를 한 모금 들이키면 기분이 나아지겠다는 속내를 은은하게 내비치고 있었다. 


  그 중 마티가 먼저 풀리지 않은 문제를 한 번 해결해보겠다고 나섰다.  


  “뭐 좀 물어보자.”


  러스트는 마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동작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마티가 말을 이었다. 


  “각성제 들이킨 이유가 혹시 그 노트에 적어 놓은… 지도랑 얼굴 때문이었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려야 길도 외우고 사람도 기억할 수 있으니까?”

  “그래.”

  “그 방법밖에 없었냐?”


  러스트는 마티가 아직도 자신이 몸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에 짜증이 나 있는 건가 싶어서 차근차근 대답했다. 


  “내가 버틸 수 있는 수준까지만 하려고 했어. 오차가 좀 있었을 뿐이지.”

  “아니, 내 말은 물론 그런 뜻도 있지만 내가 진짜로 물어보고 싶은 건 따로 있어.”


  적어도 마티는 무언가에 화가 나 보이지는 않았다. 러스트는 까딱거린 정도였던 얼굴을 조금 더 움직여서 마티와 제대로 시선을 맞추었다. 


  “왜 네가 그 모든 걸 떠안아야 했는지, 네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왜 그랬는지 알고 싶다고. 언젠가도 너는 이 일이 네가 해야 하는 거라고 말했었어.”


  러스트는 그 말을 듣고 머릿속에서 과거를 끌어냈다. 러스트는 똑같이 진실의 위치를 점하는 말들에도 단계를 매기곤 했다. 그리고 러스트는 멜랑콜리안에 관하여 자신이 마티에게 모든 단계의 이야기를 들려주진 않았음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모두 솔직해졌다. 


  “의뢰인이 멜랑콜리안에 대해 말하는 그 순간 그걸 가만히 놔두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

  “왜?”

  “비관주의는 인간의 재앙이 아니야. 세상을 파괴하는 데 목적이 있는 사고 체계가 아니라고.”


  러스트 콜과 다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완벽하게 지울 수는 없는 순간이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무슨 의도로 그러한 말을 한 것인지 따져보는 걸 미루고 반사적으로 물었다.


  “…그럼 비관주의는 어때야 하는데?”

  “세상에 대한 가장 날카로운 성찰을 행해야 하지.”


  러스트는 그것이 자신의 비관주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것이 옳아야 한다는 말을 했을 뿐이었다.  


  마티는 알쏭달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전에도 그랬듯이 러스트 콜은 난해함을 선택할지언정 거짓을 즐기는 부류가 아니었고, 그래서 마티는 이것 역시 머릿속에 잘 저장해두고 있다가 적당한 양의 시간과 그에게 실마리를 줄 수 있는 몇 가지 사건들을 거치고 나면 러스트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알게 될 거라고 믿었다. 


  더군다나 러스트는 기죽지 않는 빛에 깃발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므로, 마티는 전처럼 러스트를 이해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밤이 찾아왔으나 그것은 특별히 어둡지 않았다.






2015. 01. 01 ~ 01. 27 연재



[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Ⅲ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9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5. 선홍의 비전Crimson Vision






  마티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경로가 옳은 것인지 몇 번이고 자문했다. 마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갈수록 오랜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러스트의 눈은 살짝 먼지가 낀 차창보다 더 탁했다. 러스트가 다시 눈을 닫았다. 


  2분 뒤 둘은 러스트가 건네받았던 주소지에 다다랐다. 러스트는 초 단위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인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티는 진지하게 차를 돌릴 것을 고민했다. 아쉽게도 러스트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러스트가 엉성해 보이는 목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티가 유리창이 뚫어져라 그의 등을 주시했는데 러스트는 어떤 비틀거림 없이 무사히 마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티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티는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티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러스트가 멜랑콜리안의 집결지로 들어가고 나서 핸드폰을 반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티는 그의 핸드폰에 발신 장치를 부착해서 러스트가 도착하는 최종적인 위치 정보만을 얻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마티의 발신 장치가 제 기능을 수행한 첫 날에 러스트가 의식을 잃는 바람에 마티는 자신이 파트너의 뒤를 캤음을 거의 잊고 있었다.


  마티는 손 안에서 핸드폰을 계속 굴리다가 창밖을 훑었다. 액정의 한 구석을 누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티는 건물이 별 낌새 없이 잠잠하다는 걸 두 번이나 체크한 뒤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러스트의 발자취가 그의 작은 화면 안에 담겼다.


  마티가 눈에 힘을 주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마티는 조수석의 서랍 속에서 수첩을 꺼내 주소를 적어놓으려다 러스트가 자신의 소행을 눈치 챌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 같아 일단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는 대신 방향 잃은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다댔다. 찜찜한 기분이 마티의 목 아래를 콕콕 찔렀다.


  마침 바깥에서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딱 봐도 쫓겨난 모양새인 러스트가 다리를 펴고 있었다. 마티는 입술을 말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별로 좋지 않게 끝났나 보네.”


  러스트는 머릿속을 지혈하듯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이미 약을 소규모 업자들에게 넘겼다더군.”

  “그럼 벌써 산 사람이 있겠네?”

  “그걸 알아봐야지.”


  러스트는 팔을 내리자마자 침착하면서 자신만의 이론을 확고히 다져놓은 수사관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티는 일단 차를 돌렸다. 


  “…오늘 안에 병원에 들어갈 생각은 있냐? 너 아직 퇴원한 거 아니거든?”

  “난 괜찮아.”

  “웃기네.”

  “넌 어디에서 누굴 찾아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네가 알려주면 되지. 아픈 사람은 가서 잠이나 자고, 멀쩡한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얼마나 상식적이냐.”


  러스트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마티는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네 행동거지에 비해서 네가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다는 게 참 놀라운 일이긴 하다만, 그게 평생을 가진 않는다는 것만 알아둬라. 조금만 재수가 없었어도 넌 심장 마비로 죽었어.”


  러스트는 굳어버린 조각 같았다. 마티는 러스트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러스트가 함께 했던 많은 파트너들과 다를 바 없이 혼자 성을 냈다. 


  “빌어먹을, 약물 과용으로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러스트는 마티가 굳건히 정면을 노려보는 순간을 골라서 그의 측면에 시선을 주었다. 러스트는 그런 방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려다가, 덮쳐온 어지럼증을 수습하는 데 신경을 쏟은 나머지 입을 여는 걸 잊어버렸다.





  바이스는 러스트에게 그가 처음으로 가야 할 약속 장소만을 알려줬을 뿐 다른 것에 대한 정보는 준 적이 없었다. 마약상과 구매자 사이의 연결 고리를 수색하고 추려낸 건 오직 러스트의 판단력이었다. 마티와 러스트는 부지런히 골목이나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멜랑콜리아를 팔았을 법한 사람들을 만났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멜랑콜리아를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멜랑콜리아는 체내에 흡수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복용인에게 뛰어난 수준의 환각을 선사하는 약물이었다. 시험 삼아 멜랑콜리아를 맛본 상인들은 그것의 상품 가치에 만족했고,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멜랑콜리아를 추천했다. 멜랑콜리아는 이미 두 사람이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스며들었으며, 상인들은 기를 쓰고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줄 제품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잠겨가는 시각임에도 두 사람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티가 먼저 고요함을 깼다.  


  “이제 그만 경찰에게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러스트는 마티의 말을 분명히 들은 것 같았지만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티는 조금 더 자세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그 약이 퍼지는 게 문제라면, 마약상들을 싹 처넣어서 약을 못 팔게 하면 될 거 아냐.”

  “바이스의 목적에 비해 너무 한정적이야.”

  “뭐?”

  “마약상만 가지고는 그의 목표를 이룰 수 없어. 그가 생각하는 집단은 훨씬 커. 바이스가 원하는 건 마약이라곤 해본 적도 없을 사람들까지 데리고 이 땅에서 탈출하는 거니까.”


  몸이 무거운 남쪽의 태양이 자신의 둔함을 물결처럼 퍼뜨리고 있었다. 러스트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실낱 속에는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았다.


  러스트는 바이스를 생각했다.


  바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모든 사람들을 계몽시켜 그들을 선택받은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 움직임은 자유롭고 이성적이다. 그들 모두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인류가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할 것임을 확신하고, 그것이 발생할 무대와 조건으로부터 벗어난다. 


  탈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멜랑콜리아가 만드는 것이었다. 


  바이스는 확고부동한 도덕을 믿지 않는다. 러스트는 비관주의를 넘어 절망을 위한 절망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머리에 덧입혔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추론했다. 러스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가 마티의 뒤통수를 응시하게 되었다.


  마티 하트는 자신이 맡은 바를 허투루 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남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죄를 저질러 봤으며 그로 인한 후회도 겪었었다. 한편 마티 하트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제일 먼저 앞장설 수도 있었고 그런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마티 하트는 그의 파트너에게는 꽤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판단은 도덕이라는 기준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러스트는 자신의 곁에 있는 가장 편리한 예시를 통하여 바이스의 시각을 학습할 수 있었다. 바이스는 가정적 상황에서조차 마티를 거리에 나동그라진 패배자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티.”


  러스트가 자신의 파트너를 불렀다. 


  “병원에 가야겠어.”

  “…진짜로?”


  안 그래도 러스트를 병실에 데려다 묶어둘 심산이었던 마티가 반색하며 말했다. 러스트는 정말로 차 문의 손잡이를 잡은 상태였다. 


  “주 경찰 말고 더 관할 구역이 넓은 사람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까 날 병원에 데려다 준 다음엔 사무실로 돌아가.”


  유리가 반짝거렸다. 햇빛의 중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무실에….”


  중심이 사라진다. 러스트는 그것을 아쉽게 여겼다. 그가 살아 있는 이성과 삐걱대는 육체 사이의 거리감을 완벽하게 좁히지 못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러스트의 계산에는 오차가 있었다.


  그 불완전함이 러스트의 의식을 뺏어갔다.





  마티가 사무실의 전등을 켰다. 그는 혼자였다.


  마지막에 병원에 돌아가겠다고 한 걸 보면 그의 파트너는 극단적으로 무모한 인간은 아니었다. 러스트는 분명히 극단적인 두 약물에 시달렸던 심장이라든가 신경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할 걸 짐작했다. 허나 이번에도 그 약간의 부족함이 저절로 채워질지는 알 수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의 책상으로 갔다. 러스트는 마티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그런 고로 마티는 러스트의 책상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안은 무척 간소했다. 마티는 괜스레 서랍 끝에 저장되어 있던 담배들부터 압수하고 혹시 서랍 밑바닥에 이중 장치가 있는지 더듬어보았다. 러스트는 의외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몇 가지 메모들이 있었지만 크게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티는 한바탕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신이 확인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마티가 책상 위의 작은 책꽂이에서 검은색 공책을 뽑았다. 루이지애나 경찰국에서 러스트와 함께 일을 했을 때도 들춰본 적이 없었던 그의 노트였다.


  마티는 주저하지 않고 표지를 넘겼다. 색깔 없는 그림들이 건조한 냄새를 풍겼다. 그 중에 마티의 눈길을 붙잡아 둔 것은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그 그림들에는 간단하게나마 색이 들어가 있었다. 아주 자세해서 실제로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갈색 눈동자가 많이 보였고 압축된 실루엣도 더럿 있었다. 그것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마티가 모르는 얼굴의 반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러스트가 사건을 위해 그리는 그림은 대개 기록이나 영감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마티는 어떤 의무감마저 느껴지는 단 하나의 얼굴을 의아하게 여겼다.


  다음 장에서 마티는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메모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마티는 그걸 보면서 절로 하나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한 번에 재생되지 않고 중간에 끊겼다가, 정지된 부분부터 다시 시작되고, 한 번 영상이 흘러가는 시간은 길지 않으나 어떤 완결점이 존재하는 영화 같은 경로였다. 그걸 보고 지도 하나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티는 공책을 끝까지 다 본 후에 경로의 현실성을 시험하기로 정하고 공책을 넘겼다.


  더 이상 명쾌할 수 없는 러스트의 메시지가 있었다. 마티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리는 동안 마티는 제발 자신이 도저히 추리할 수 없는 암호문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윽고 마티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정 반대의 것을 들었다.


  —네, 설리반입니다. 


  마티는 순간적으로 반문했다.


  “…누구요?”

  —FBI 특수 요원 빌 설리반입니다. 누구시죠?


  마티는 그제야 러스트가 말한 ‘관할 구역이 넓은’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설리반 요원은 의외로 마티에게 이것저것을 캐묻지 않았다. 러스트 콜의 공책에서 번호를 보고 연락했다는 말을 듣자 그는 곧바로 루이지애나 행 비행기를 예약하겠다고 답했다. 마티는 솔직하게 놀라버렸다.


  “당장 오겠다고요?”


  —지금 비행편을 검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D.C에서 루이지애나까지는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어요. 게다가 콜이 의식 불명이라면서요? 더더욱 시간 낭비를 할 수 없는 사건 같습니다만.


  “…러스트를 잘 압니까?”

  —그냥 과거가 있었다고 해두죠. 1시간 40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착 시간에 맞춰서 알렉산드리아 공항에 나오실 수 있나요? 


  마티는 모든 공무원의 귀감이 될 수 있을 만한 연방 요원의 추진력에 입을 벌렸다. 설리반이 조금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려서 얼떨떨한 기분은 더욱 오래 갔다. 마티는 설리반 요원을 직접 만나게 되면 러스트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물어볼 것임을 다짐했다.





  러스트가 있는 병실은 적막했다.


  그의 옆자리를 진득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마티 하트뿐인데, 마티는 러스트가 내준 반쪽짜리 과제를 해결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므로 러스트의 병실은 조용할 수밖엔 없었다. 담당 간호사가 러스트의 바이탈을 체크하려고 힐끗 방문을 열려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했다.


  러스트는 떨림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꿈을 꿀 기력이 남아 있는 의식도 없어서 그는 강제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러스트 주변은 한동안 캄캄한 밤처럼 잠잠했다. 





  마티는 비행기가 곧 이륙할 거라는 설리반 요원의 문자를 받았다. 들었던 대로 빌 설리반 요원이 있는 워싱턴 D.C에서 루이지애나에 오기까지 걸리는 비행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었다. 마티는 그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을 골랐다.


  마티가 책상에 러스트의 노트와 깨끗한 종이 한 장을 펼쳐놓았다.


  시작점의 위치는 굉장히 정확했다. 또한 마티가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티는 조금 신기해하면서 멜랑콜리안이 러스트를 데려가는 지점을 종이 맨 아래쪽에 동그랗게 그렸다.


  첫 번째 커브 이후 러스트가 길을 설명하는 방식이 급속도로 달라졌다. 이를테면 10분을 달려서 왼쪽으로 돌라는 말을 약자를 동원해 ‘직진 5분, 직진 5분, 왼쪽으로 화살표(S5min*2, left↰)’라고 적어 놓는 식이었다. 마티는 눈썹을 으쓱하면서도 부지런히 러스트가 가르쳐주는 대로 지도를 그렸다. 종이의 왼쪽 꼭짓점에서 출발한 마티의 펜이 어느덧 중간까지 뻗어나갔다.


  “…음?”


  마티가 러스트의 노트를 펄럭였다.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그의 펜이 까만 자국을 남겼다. 


  마티는 러스트의 흔적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후반부에 가서 러스트는 무슨 까닭인지 글자가 아닌 일종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림으로 길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마티의 눈에는 몇 세기 전에 사용되었던 암호문 같이 보였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혹시 다른 페이지에 힌트로 삼을 수 있는 게 적혀있지는 않을까 노트를 뒤적거려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마티가 뒷머리를 문질렀다. 


  마티는 8분쯤 고민하다가 펜을 놓았다. 아직 2시간 30분은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어떤 묘책이라도 떠오른 듯이 마티가 그리다 만 지도를 들고 일어났다. 마티는 루이지애나 지도를 표시해 주고 있는 인터넷 페이지를 모니터 한가득 펼친 다음 출발점의 주소를 입력했다. 그는 자신의 손끝을 대표자로 삼아 러스트가 안내하는 길을 한 번 다녀올 셈이었다.


  그런데 문득 마티는 러스트가 남겨준 것들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뽑아냈다. 일관적이지 않은 설명법이 지배하는 페이지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 비로소 마티에게 의아함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티는 왜 출발 장소가 러스트와 멜랑콜리안의 차량이 만나는 곳인지에 관해서도 궁금증을 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마티가 다섯 번째로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였을 때 드러났다. 마티가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놈.”


  마치 일부러 숨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아는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한 러스트의 경로가 멜랑콜리아의 본거지에 이르는 길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마티는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의 노트 안에 완성하지 못한 지도를 끼워 넣고 핸드폰을 챙긴 후에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의 핸드폰에는 러스트를 추적하면서 쌓아 놓았던 데이터가 아직 저장되어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시계가 같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어도, 그 순간에조차 세상에는 걷는 사람과 달리는 사람,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마티의 차는 치열하게 달리고 있었다. 전화기와 핸들 모두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완전히 손바닥에 붙인 마티는 누군가 조금만 등을 밀어줘도 어딘가로 튀어나갈 것처럼 보였다. 바퀴가 거칠게 선회할 때마다 자잘한 입자들이 흩어졌다.


  빌 설리반은 비행기에 탑승 중인 상태였기에 날아다니는 사람에 속할 수 있었다. 설리반은 서류들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의 앞쪽에 달린 작은 모니터에는 비행 정보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가 빠르게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멜랑콜리안들은 급한 기색 없이 걷고 있는 자들이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안들이 늘어선 차에 탑승하기 직전 한 번씩 그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꼭 바이스의 의지를 각지로 전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도들 같았다. 바이스는 그들을 배웅하던 자세 그대로 저택의 출입구에 서 있었다.


  마티는 열성적으로 속도를 높여댔고, 바이스는 차분했으며 설리반은 아직 지상에 떠도는 정보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승객 여러분, 이 비행기는 잠시 후 알렉산드리아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을 바르게 해 주시고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을 듣자 설리반이 자세를 조정했다. 서류는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활자에 집중되던 신경이 잠시 허공을 떠도는 듯하더니 천천히 하강하는 비행기에 집중되면서, 설리반은 자신의 발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뒤에 설리반은 발끝이 부드럽게 내려가는 기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당황스러움에 사로잡혔다.


  마티가 게이트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기대했던 설리반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마티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이 마티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도 맞았다. 다만 메시지의 내용이 공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이었다.


  —조사하러 갑니다. 아래에 적힌 주소로 재주껏 와요.


  설리반은 마티가 러스트 콜의 안 좋은 측면을 배웠다며 이마를 짚었다. 설리반은 택시 정차장 쪽으로 뛰었다.





  마티는 목적지와 약간 거리를 남겨두고 차를 세웠다.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줄지어 있는 남부의 나무와 풀숲들 덕택에 차를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티는 핸드폰의 소리를 꺼놓고 총과 쌍안경을 챙겼다. 설리반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마티는 지금쯤이면 그가 루이지애나에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올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마티는 슬그머니 움직일 수 있었다.


  방향을 꺾을 것 없이 직진 경로만을 남겨두고 멈춰선 것이었기 때문에 마티는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마른 풀들이 그의 날쌘 신발코를 맞고 휘청거렸다. 마티는 숨도 한 번 고르지 않고 빠르게 발을 놀리다가 저택의 지붕 끝자락이 보이는 지점에서 몸을 낮췄다.


  겉으로는 꽤나 멀쩡해 보이는 집이었다. 마티는 총과 쌍안경 중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쌍안경을 들어올렸다. 사립탐정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들 중에서도 쌍안경은 아주 중요하면서 값비싼 위치를 점한다. 마티는 새삼 자신이 몇몇 장비에 대해서는 결단력 있게 돈을 썼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마티는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면서 저택의 외관을 훑었다. 척 봐도 무시무시하고 음흉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티는 설리반을 기다리지 않고 내부에 한 번 들어가 볼 것인지 고심했다. 마티와 저택 사이에 놓인 거리가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순간 쌍안경에 잡히는 인영이 있어 마티가 급히 상체를 수그렸다. 무장하지 않은 평범한 남자였다. 마티가 렌즈의 배율을 조절하면서 발바닥을 앞쪽으로 비볐다. 


  마티의 눈썹이 쌍안경 밖으로 튀어나왔다. 남자는 평범했지만 몹시도 낯익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공책에 그렸던 섬세하고도 집요한 곡선과 다른 여러 그림들이 모두 눈앞의 남자를 겨냥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티는 자신의 총을 믿고 조금 더 접근했다. 남자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부드럽고 정겨운 나무의 살갗을 닮은 갈색 눈동자가 마티의 시선에 잔영을 남겼다. 


  마티는 남자가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마티가 쌍안경을 내렸다. 이제 총을 쥐어야 할 때였다.





'Flickers' by Son Lux



[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Ⅱ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7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e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3. 세상을 멸망시킬 것들Things that Destroy the World






  알파벳 서너 개가 빛을 잃은 엉성한 간판 아래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것만큼 위태롭고 사회적인 역할이 불안정한 자들이었다. 싸구려 색채와 혼란스러운 눈동자들이 담배 연기를 가장한 온갖 하얀 기체들이 스모그처럼 가라앉아 있는 구석으로 은밀하게 집결했다. 


  러스트는 피곤한 운전수들과 따분한 매춘부들의 표정을 훌륭하게 연기하며 그들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칙칙하다기보다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번씩 훑었지만, 러스트가 입고 있는 광택 잃은 가죽 재킷을 보고는 이내 흥미가 없어졌다는 태도로 자신들의 용무에 몰두했다. 저 얼굴빛 이상한 남자도 쇠락한 영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실밥이 튀어 나온 모자를 쓴 남자가 러스트를 보자 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 짧은 순간 돈뭉치와 종이봉투가 서로의 손을 오갔다. 러스트는 자연스럽게 봉투를 재킷 속에 구겨 넣고 뒷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진주 목걸이를 한 여자가 그의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술집 뒤쪽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신비로운 교차로에 이정표처럼 남겨진 담배꽁초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간판과 여자에게서 멀어진 러스트의 눈동자는 이내 그것들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러스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전에는 외관도 보지 못했던 멜랑콜리안들의 집합 장소가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남부에 펼쳐져 있는 흔한 숲 한 덩이와 목조 건물이었다. 그는 땅에 발바닥을 엇갈리게 내려놓으면서도 그곳에서 법원 경매를 통해 헐값으로 팔린 저택의 그림자를 잡아낼 수 있었다. 


  안내인이 그에게 찬물을 병째로 주었다. 추론 하나를 짜내자마자 지쳐버린 러스트는 조심성 없이 물병을 열었다. 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순간 러스트는 욕을 내뱉었다. 젠장. 그러나 그 말은 실제로 표출된 적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맑아질 겁니다.


  수면제에 이젠 안정제까지 먹여 놓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러스트는 자신이 그 말을 소리 냈다고 믿었다.


  러스트는 비판력을 잃은 멜랑콜리안이 되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러스트는 심하게 비틀댔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러스트가 거의 옆으로 넘어질 것처럼 굴자 안내인들은 잠시 그에게 시간을 주었고, 그 귀중한 여유를 통해 러스트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음을 보았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도와줄게요. 핸드폰은 나한테 줘요.


  러스트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망할 놈들. 빨리 날 놔주기나 하라고. 


  그는 혼돈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러스트는 밑으로 자꾸만 고꾸라지는 팔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를 구원할 약병이 손가락에 감겼다. 러스트는 이마를 무릎에 바짝 붙인 채 몰래 알약 하나를 삼켰다. 머릿속에 곧장 전류가 흘렀다. 


  시공이 용수철 위에서 발을 굴렀다. 눈꺼풀 안쪽에 맺힌 빛의 흔적들은 일종의 상징을 만들어 내려 애쓰는 것만 같았다. 모세혈관 속에서는 그가 소리치고 깎아내리고 싶은 것들이 최악을 겨루고 있었다. 러스트는 몹시도 어지러웠다.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대탈출을 요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 받은 자들의 지식입니다.


  러스트는 자꾸만 고개를 수그렸다.


  —인간은 이미 20세기 초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사상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모더니즘 이래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패배감에 젖은 아마추어주의를 좋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짜낼 수 있는 마지막 위대함은 1900년대에 이미 등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린 사상적으로 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러스트는 그 말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푸른 선구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러스트는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또한 이 행성은 아주 깊은 구석까지 다 개간되어 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밟아보지 못한 곳이 존재합니까?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착취를 예고 받지 않은 조각은 더 이상 없습니다. 머리가 자랄 대로 자란 인간이 이제 그들의 발전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곤 자연밖에 없지만 우린 그것마저 다 소모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수많은 국가들은 지난 몇 년간 그 사실을 증명해오고 있습니다. 성장은 끝없이 정체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비참한 자들의 박탈주의는 이성이 계산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정수리 속이 찌릿찌릿했다. 구원의 약물이 안정제의 뒷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멜랑콜리아의 속임수가 흔들렸다. 그리고 러스트는 드디어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마지막 표식은 무엇입니까?


  “…끝없는 분열.”


  기둥들이 더 이상 물결치지 않았다. 러스트는 마이크도 없이 말하고 있는 바이스를 보았다. 


  “현대 사회의 개인은 실상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원자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도 갖추고 있지 못한 볼품없고 흔해빠진 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더 나은 무언가를 낳을 수 있는 협력이 발생하는 환경은 고대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인류의 대탈출을 부르짖었다. 바이스는 이 모든 우울한 진리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멜랑콜리안들을 칭찬했고, 멜랑콜리안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진리를 속삭여준 바이스에게 환호했다. 


  바이스는 어느새 유리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러스트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악마숭배의 현장에서 그는 각성제를 찬미하며 약물에 입술을 적셨다.





  러스트는 맨 처음에 바이스가 있는 방을 찾고자 했다. 기이하게 작동하는 신진대사가 자꾸 휘청거렸기 때문에 러스트는 남은 시간 동안 손에 잡히는 문고리는 모조리 당겨대기로 했다. 그는 저택 안에 토론장과 휴게실을 찾아냈고 네 번째 시도 만에 멜랑콜리안들의 도서실이 있다는 정보와 더불어, 바이스와 약기운에 휘둘린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얻어냈다.


  애나벨은 혼자 입꼬리를 들썩여대는 것 말고는 그럭저럭 멀쩡한 자세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휙휙 책을 뽑아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러스트는 그걸 보고 그녀에게 정당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구실을 생각해냈다.  


  “여기 책은 바깥으로 가져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애나벨은 과장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잊어버렸다는 표정으로 러스트를 빤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물론이죠. 이건 토론할 때 쓸 책이에요.”


  러스트는 자신이 토론장을 두 번이나 엿봤다는 걸 감추었다.


  “토론도 합니까?”

  “그럼요. 여긴 처음이신가 보네요. 제가 진행하는 토론은 꽤 인기가 많은데.”


  러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애나벨이 이른바 ‘인기 많은’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에서 그녀가 멜랑콜리안에 상상 이상으로 열정적이며, 이 모임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나도 없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애나벨은 다시 즐겁고 기복이 심한 그녀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러스트는 의미가 없어진 도서실 밖으로 나왔다.


  러스트는 이후에도 계속 저택을 돌아다녔지만 바이스는 그가 들어갈 수 있는 방 어디에도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책상 위에 탁탁 내려놓는 파일들을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새로 들어온 의뢰들에 관한 기초 조사.”

  “너 어제 여기 안 왔잖아.”

  “밤에 들렀었어.”


  마티가 잔뜩 미간을 좁혔다.


  “나도 어제 꽤 늦게까지 있었는데?”

  “내가 왔을 땐 없던데.”

  “몇 시였는데?”

  “3시 45분. 아, 그리고 루시아였나? 언니는 거기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런 방법도 없다고 전해줘. 나보단 네가 알려주는 게 낫겠지.”


  러스트는 태연하게 말했으나 그가 말한 시각이 오후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마티는 러스트를 붙잡아 세우고 진지하게 얼굴을 들이댔다. 러스트가 귀찮아하며 팔을 흔들었다.


  “왜.”

  “혹시 너한테 그 멜랑콜리안이라는 데가 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거나 아니면 거기서 끝내주게 말 잘 통하는 동지를 만났다거나….”

  “무슨 개소리야.”


  기어코 신경질이 난 마티가 잡고 있던 러스트의 팔을 세게 아래로 던졌다. 


  “너야 말로 지금 상태가 아주 개 같거든? 뭐야, 대체? 왜 그렇게 그 일에 집착해? 둘러대려고 하지 마. 여기서 나가면 너 또 거기 갈 거 뻔히 알고 있으니까.”


  러스트는 이를테면 커튼 자락이 가리고 있지만 그 뒤편에 분명히 존재하는 유리창의 균열을 표정에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티는 폭로의 가능성에도 의연한 흠집에 경의를 던져주지 않았다. 


  “거울이나 한 번 봐봐. 내가 본 것 중에 지금 네 얼굴빛이 제일 거지같아. 당장 거품 물고 뒈지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라고!”


  러스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 떠올린 것은 자신이 거울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도 환각 및 진정 성분이 들어 있는 약과 각성제를 동시에 섭취한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몰랐다. 그의 상상력은 그보다 중요한 곳에 집중되어야 했다.  


  “네 멍청한 생각을 좀 정정해주지.”


  마티가 그 자리에서 의자를 넘어뜨리고 싶을 정도로 러스트의 음성은 건조했다. 


  “첫째, 난 멜랑콜리안에 매력을 느끼지 않아. 둘째, 거긴 일반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약에 찌든 미친 것들밖에 없어. 곧 내가 동지라고 생각할 만한 작자도 없다는 거지. 마지막으로 집착은 아냐.”


  마티는 순간적으로 물었다.


  “그럼?”


  러스트는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All of Visions

04. 극단적 독창성Extreme Originality






  마티가 차를 세웠다. 칠이 벗겨진 붉은색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마티의 숨이 진득진득했다.


  마티는 사무실 문을 열면서 제일 먼저 안의 공기를 맡았다. 서늘한 온도와 결합된 담배 냄새가 났다. 자신의 시선에 대해 며칠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러스트의 책상에 구두 자국을 찍어 놓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면서 마티가 가방을 던졌다. 


  파일 몇 개가 서류가방에 밀려났다. 마티가 천천히 가방을 들어올렸다. 마티는 어젯밤 7시 30분에 퇴근했으며 그 때만 해도 그의 책상엔 아무 것도 없었다. 마티는 대충 파일을 넘겨보다가 혼자 화를 냈다. 파트너가 남겨 둔 조사 자료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의 파트너는 잠을 자지 않고 다만 꿈을 꾼다.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하루를 준비하는 것조차 너무도 권태롭게 여기는 듯했던 그의 파트너는, 마침내 잠을 자는 시도마저 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발을 뻗으려했다. 평생 꿈을 꿀 수 있는 세계가 바로 그의 지척에 있었었다. 마티는 그의 파트너가 그 기회를 달콤하게 여긴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그 당시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승리를 장담했던 순간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한 고군분투로 변모해버린 게 분명했다.


  마티는 잠시 서 있다가 러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마티는 그것을 러스트의 대답으로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포를 태우는 담배꽁초가 수풀 사이에 차츰 쌓여갔다.


  러스트는 약한 수면제를 탄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혀 밑에 숨겨 놓았던 알약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의 온 몸이 비정상적으로 불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고꾸라질 것 같은 상태에서 러스트는 자신의 몸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걸 막지 못했다. 러스트가 차에 오르면서 매번 느꼈던 첫 번째 커브였다. 그는 안대 위에 강제로 환영을 펼쳤다. 출발 지점에서 한 번 크게 돌고, 차가 직진을 시작했다. 


  “전화했었는데.”


  러스트는 마티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한참 늦게야 깨달았다. 그는 가까스로 멍청해 보이는 반복을 피하고 마티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태도를 취했다.


  “왜?”

  “네가 준 자료에서 물어볼 게 있었거든.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


  러스트의 눈동자가 느리게 돌았다. 


  “멜랑콜리안에 있었을 때 전화했나보군. 안으로 들어가려면 핸드폰을 반납해야 해서. 금속 탐지기도 거치지.”

  “별걸 다 하네. 그래도 차 안에서는 안 뺏나보네?”


  러스트는 별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마티는 겉으로는 가볍게 고갯짓을 하면서 그 사실을 단단히 머릿속에 입력해놓았다. 혼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러스트는 평소답지 않게 마티에게 하려던 질문이 무엇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우울하게 시들어버린 나무들이 러스트가 헤아리는 5분마다 뚝뚝 끊겨 나타났다. 하늘에는 구름 대신 세포가 터져 나가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떠 있었고 까만 차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보다 더 절망적인 숲 속을 달렸다. 


  러스트는 두 번째 커브까지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한바탕 더 휘청이고 나자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려 애썼다. 수면제와 각성제가 그의 양 팔을 잡고 어서 옆에 앉으라며 소란을 떨어대고 있었다. 러스트는 차라리 꿈을 꾸고 싶었다.


  순간 눈을 감은 러스트의 곁으로 마티가 조용히 다가왔다. 마티가 러스트의 핸드폰을 뒤집었다.  


  러스트가 만들어낸 오솔길이 끊겼다.





  “어, 왔어.”


  러스트는 잠시 멍하게 입구에 멈춰 섰다. 마티가 모니터 위로 머리를 힘껏 빼들고 그에게 눈짓했다. 


  “…아직도 일하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의뢰가 들어와서. 일하러 온 거면 한 번 봐주고.”


  러스트가 마티 쪽으로 걸어갔다.


  러스트는 바깥 환경을 인식하길 거의 포기한 듯한 시각을 흩뿌렸다. 바이스가 스탠드의 밝기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바이스의 얼굴을 얹은 러스트의 몸뚱이가 의자에 앉았다.  


  “내용이 뭔데.”

  “전에 내가 한 말은 맘에 들었습니까?”


  바이스는 엉거주춤 책상 앞에 앉으려던 자세에서 다시 등을 폈다. 구석에 서 있는 스탠드가 흐물흐물 바이스에게 다가왔다. 


  “시시한 설교더군.”

  “그래서 다음에는 좀 덜 시시한 ‘설교’를 해보려고요. 원래는 연설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만.”


  러스트가 찡그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슴을 꽉 쥐고 싶은 욕구를 옷자락을 구기는 행동으로 달랬다.


  “사람들이 네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고 생각하나?”

  “이 곳은 믿음이 없으면 올 수 없는 곳입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난 아니야.”


  마티가 오른쪽에 쌓아 두었던 파일 뭉치들을 뒤적거렸다. 마티의 손이 하마터면 멜랑콜리안의 잔을 건드릴 뻔했다. 환상과 현실 모두에게 덤덤한 태도가 움찔하려는 러스트의 손을 막아 세웠다.  


  “상사를 조사해 달라는 의뢰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조금 하다가 경찰에 넘겨야 할 수도 있겠어. 이런 걸 왜 신고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요새 경찰이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지.”


  러스트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손짓으로 파일 덮개를 넘겼다. 그가 짧게 분석했다. 


  “내부자 거래가 의심된다고.”


  “자기는 조금이라도 상사의 뒤를 캐는 것 같은 질문을 하면 목이 날아간다면서 우리에게 약간의 증거라도 가져다준다면 아주 좋을 거라고 하더군. 찾아보니 요새 벌이는 일이 많기는 하더라고. 근래 북부를 오가는 일이 많아졌고 정치인 한 명을 열성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중이야.”


  러스트는 입술을 달싹이려고 했다.


  “당신은 인류가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마치 동작 스위치가 눌린 기계와 같이 러스트는 반 정도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의 이성은 사실 바이스의 물음표만 간신히 인식했을 뿐이었다. 


  “주변에 변수가 없는 독재적 동족은 자연스레 스러지기 마련이지. 너의 그 모더니즘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인간은 자신들 스스로 의미를 생산할 능력을 잃어버렸어. 낡아 빠져서는 아무도 뚜껑을 열어보지 않는, 먼지 낀 우편 사서함 같은 인격신에 의존하는 족속들의 훗날이야 뻔하지.”

  “러스트?”

  “당신은 참 독창적인 사람 같습니다, 러스트.”


  러스트는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했다. 한 면이 유리창으로 채워진 열린 구조 속에서도 바이스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스트는 곧 그 생각을 정정했다. 바이스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러스트는 미간을 좁혔다. 왼쪽 눈에는 바이스가 보였고 오른쪽 눈에는 마티가 보였다. 


  “…러스트?”


  마티가 재빠르게 러스트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마티의 행동이 약물에 부식되어버린 그의 의식을 받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티는 쓰러진 러스트를 안아 들고 책상 위 핸드폰을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멜랑콜리안들은 바이스를 ‘푸른 선구자(Blue Visionary)’라고 칭했다.


  바이스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에 기반을 두고 붙여진 별칭이었다. 우울함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본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바이스의 눈은 갈색이었다.


  멜랑콜리안들은 자주 축배를 들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주 멜랑콜리아를 마셨다. 그것은 일종의 안정제로, 인간의 사고력을 급속도로 떨어뜨리면서 기억을 단편화시키는 지독한 약물이었다. 복용량에 따라 몸에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의 본질은 안정제였기 때문에 각성제와 동시에 복용하는 일은 아주 위험했다.


  멜랑콜리안들이 모이는 장소는 아주 폐쇄적이다. 거기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조차 차 안에서는 잠이 들어야 할 정도이다. 푸른 선구자의 이론에 육체와 열정을 바치는 강도에 따라 그런 과정이 생략되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멜랑콜리안들은 그러한 부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멜랑콜리안의 수면제를 이겨내고 그들이 감추려 했던 경로를 폭로하고자 한 자는 러스트 콜이 유일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멜랑콜리안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그것 이상이었다.


  러스트는 기력 없이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이 깨끗한 거즈로 닦인 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고, 들쑥날쑥한 두근거림이나 현기증도 없이 몸 구석구석이 전부 안정된 상태였다. 러스트가 주의 깊게 시선을 돌렸다. 마티가 그의 옆에 있었다.  


  “깼냐.”


  러스트의 눈꺼풀이 정상적으로 움직인 걸 본 마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미친 놈.”


  러스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마티의 말에 아예 근거가 부재한 것도 아니었으며, 가벼운 욕설 정도는 인사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연륜이 러스티로 하여금 평온한 눈짓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네가 왜 쓰러졌는지 알고 있냐?”


  러스트는 눈 주변의 근육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마티는 그가 정신은 차렸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혼자 말을 이었다.


  “세상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안정제랑 각성제를 연달아 먹냐. 거 참 어이가 없어서. 하여튼 뒈지는 방법도 가지가지에요.”

  “마티.”


  이 기회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핀잔을 있는 대로 늘어놓으려던 마티가 멈칫하며 러스트를 돌아보았다. 마티는 평상시에는 염세주의에 습기를 다 빼앗긴 것처럼 보이는 안구에 이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빛이 어려 있음을 목격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21일.”

  “빌어먹을.”


  러스트가 몸을 일으키면서 주삿바늘을 뽑으려 하자 마티가 펄쩍 뛰었다. 


  “뭐야, 미쳤어? 어딜 가려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밀쳐 내려는 러스트의 손과 이불을 아예 러스트의 몸에 감아버리려는 마티의 손이 교차했다. 러스트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바이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주입하려고 해.”

  “무슨 개소리야? 바이스는 누군데?”

  “멜랑콜리안이 그들이 사용하는 약물을 퍼뜨렸어.”

 

  러스트는 마지막 어구를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듯 발음했다.


  “하루 전에.”





  러스트가 약물 남용으로 인한 의식을 잃어버리고, 나아가 이틀이라는 시간마저 통째로 잃어버리기 몇 시간 전에 그는 바이스를 만났었다. 바이스는 러스트를 불러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러스트.”


  두 사람은 의자보다는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내가 전에 당신이 참 독창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당신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해 내지 못한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무슨 대단한 일을 부탁하려고?”

  “멜랑콜리아를 내가 알려주는 사람들에게 전해줬으면 합니다.”


  러스트는 진흙 속에서 불씨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러스트가 바이스를 보았다. 이제 바이스의 얼굴은 그런대로 러스트의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이스는 늘 그러했듯이 그 자신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달만 하면 되는 건가?”

  “네. 그리고 그 쪽에서 보내주는 것이 있으면 받아 오면 돼요.”


  바이스가 쪽지를 가지러 책상 근처로 이동했다. 러스트는 그림자 속에 머물기로 했다. 문득 그는 바이스가 루이지애나 경찰관들도 잘 알지 못했던 90년대의 자신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간단한 일 치곤 서론이 길었군.”


  바이스의 입술 사이로 묘하게 웃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해야만 해요.”


  바이스는 직접 러스트의 손에 종잇조각을 쥐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리가 없다는 강력한 확신이 모든 것을 퇴색하게 만들어버려서 러스트가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경우에 속했다. 


  “당신의 독창성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을 구제해줄 테니까.”


  그래서 러스트는 바이스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안의 장소에 거주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빠짐없이 열었다. 진리에 들떴던 열기 어린 숨들이 너무나도 쉽게 사라져갔다. 바이스는 힘껏 커튼을 걷었고 맑은 공기가 내부로 들어오게 했다. 멜랑콜리안들의 집합지는 일반적인 저택이 되었다.


  창문을 다 열고 나자 그는 반갑게 햇빛을 맞이했다. 남부의 태양이 언제나 사람에게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따갑지 않고 적당히 따뜻한 빛을 온몸에 두르며 바이스는 소박한 품성을 지닌 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바이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신이 사는 집을 환기시키고, 잠깐 햇빛을 즐기며 화창한 날씨에 만족해하는 그의 뒷모습은 몹시도 평범했다. 그의 입술 역시 러스트 콜을 향해 도덕의 비(非)실재를 주창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사로웠다.





  “생각해 봐요, 러스트.”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러스트의 재킷과 가까워져갔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어떻게 해서 의미를 갖고, 심지어는 권위를 갖기도 하는 겁니까? 그 말 뒤편에 대체 무엇이 존재하길래? 왜 누군가의 말은 인정할 수 있고, 또 누군가의 말은 단순한 지껄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겁니까?”


  러스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바이스가 어차피 정답을 정해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아는 편이었다.


  “어떤 말이 사실을 등에 업고 있으면 그걸 부정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누가 사실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사실이 발생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지탱하는 건 사실이에요.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말들은 존중받을 필요가 없어요. 무의미한 개소리니까.”


  러스트는 자신이 각성제 반 알을 더 삼키지 않은 걸 실수로 여겼다. 정신이 침식하는 속도가 전보다 빨랐다. 바이스가 러스트에게 주입한 약물의 양을 늘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러스트. 세상에 ‘도덕적 사실(Moral Fact)’이라는 건 없어요.”  


  바이스가 러스트의 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의 손등이 러스트의 재킷에 숨겨진 약병의 곡선을 스쳤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라는 게 이해가 됩니까?”


  문이 열렸다. 러스트가 바이스의 방에서 나갔다.


  러스트는 기어코 마티의 차에 탔다. 두 극단 사이에서 찢겨져 나가던 그의 몸을 치유해주던 고귀한 액체가 방바닥에 고였다. 

[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Ⅰ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6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1. 수상한 모임Strange Group






  마티는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많은 경우에 마티가 맘에 들어 하지 않는 짓을 일삼는 러스트는 아침부터 담배 연기를 뿜으며 마티를 한숨짓게 만들었다.


  “그렇게 죽고 싶냐.”

  “꺼져.”


  마티는 한결같은 성격을 자랑하는 파트너를 지나치면서 단호하게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뺏었다. 러스트는 꽤나 무감해 보이는 표정으로 담배를 납작하게 누르는 마티를 바라보았다. 그들만의 방식으로 서로의 안녕을 확인한 두 사람은 조용히 파트너가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눈동자를 돌렸다. 


  하트 탐정 사무소에 근무하는 사람은 여전히 적었다. 마티가 혼자서 사무소를 꾸리고 있던 시기에는 고객이 많지 않아 직원이 많을 필요가 없었고, 마티가 명성을 얻고 그와 비슷한 수준의 지명도가 있는 러스트가 들어오고 나서는 유령 같은 비관주의자의 기세에 눌린 직원들이 허겁지겁 짐을 싸서 나가버렸다. 세기를 헤아리는 숫자가 달라져도 러스트 콜의 옆자리를 지킬 수 있는 위인은 늘어나지 않았다. 마티는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 있는 러스트에게 시선을 한 번 주고 커피를 끓이려 움직였다.


  희미하게 어려 있던 담배 냄새가 커피 향에 밀려 비틀거렸다. 


  러스트는 그 모든 변화들에도 불쾌하지 않은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총알보다는 담배와 술이 네 숨통을 끊어 놓을 거라는 마티의 오지랖 넓은 예측과 그로부터 비롯된 여러 행동들에도 러스트는 특별히 언짢아하지 않았다. 그는 세상에서 담배라는 존재를 잊어버린 것처럼 유리창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무실 출입구로부터 스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의뢰인 한 명이 서성거렸다. 모자가 달린 점퍼를 입은 여성이었는데, 그다지 크지도 않은 건물을 고개를 꺾어가며 몇 번이고 살피는 중이었다. 러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머그잔을 든 마틴이 눈썹을 서서히 올리면서 그의 뒤를 눈으로 쫓았다.


  “거긴 왜?”

  “의뢰인 오잖아.”


  러스트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멀리 떨어져 있는 두 개의 문이 번갈아 열렸다가 닫혔다.


  “여기가… 하트 탐정 사무소 맞죠?”


  마티가 회의실 너머를 바라보았을 때 러스트는 그만의 노트를 펼치고 있었다.





  루시아라는 이름의 의뢰인은 의자에 앉자마자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도저히 경찰에다 얘기할 사안은 아니라서 이럴 때엔 진짜 사립탐정에게 기댈 수밖엔 다른 방법이 없겠더라고요. 사실 누군가가 다친 것도, 사라진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런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정말 걱정돼요. 제 언니 때문에요.”


  그녀는 마티가 준 커피를 이리저리 돌려 잡았다.


  “제 언니 애나벨은 성격은 착하지만 알 수 없는 구석이 있어요. 왜,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얘기를 자신에게는 정말 의미가 깊다는 듯이 구구절절 늘어놓는 사람들 있잖아요. 애나벨이 좀 그렇거든요.”


  “확실히 그런 사람들이 있죠.”


  마티는 위치상 옆에 있는 러스트를 노골적으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러스트는 겉으로 봐선 마티의 말을 아예 듣지도 못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게 다른 사람들한테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않잖아요? 그냥 듣고 흘러 넘기면 그만이지요. 그런데 두 달 전인가, 언니의 그런 말들이 걱정스러울 수준이 됐어요. 세상을 지배하는 어떤 거대한 법칙 같은 건 하나도 없고 이 땅의 모든 생명들은 무작위적이라는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더니 그런 사실들이 사람의 심리 상태를 극한으로 몰고 가서, 인류가 마침내 진정한 진리로부터 비롯된 우울함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릴 거라는 소릴 하는 거예요!”


  마티는 결국 참지 못하고 러스트를 힐끗거렸다. 마티가 자신의 얼굴에서 재미난 요소를 찾는 일에 집중하고 있음을 확인한 러스트가 입을 열었다.


  “루시아 양, 여긴 상담소가 아니라 조사할 만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 목적을 둔 탐정 사무소입니다.”


  “아… 물론이죠. 죄송해요. 그러니까 제 용건은, 여러분들이 애나벨이 그런 이상한 말을 꺼낸 무렵부터 다니기 시작한 어떤 모임에 대해서 좀 알아봐주셨으면 좋겠어요. 애나벨이 잘 얘기해주지도 않고, 인터넷에 검색해 봐도 아무 것도 없는 홈페이지 빼고는 나오는 게 없더라고요. ‘멜랑콜리안’이라는 모임이에요.”


  “모임이요?”

  “직설적인 이름이네.”


  개성적인 감상들이 마티와 러스트의 입에서 각각 튀어나왔다. 마티는 신속하게 러스트를 무시했다.


  “특별히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 있습니까?”


  러스트의 손가락은 살짝 구부러진 채 긴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 러스트는 펜을 잡지 않았다. 


  “대체 그 모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싶어요. 언니가 거기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주신다면 더욱 고맙고요.”


  루시아는 마티가 눈치를 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곧장 계약금을 꺼내들었다. 마티는 의뢰인이 감당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태도로 루시아를 배웅해주었고, 러스트는 마티를 따라가는 것 같더니 방향을 틀어 파트너의 컴퓨터를 깨웠다. 


  사무실을 빠져나간 루시아가 모자를 썼다. 눈을 대신해 남부의 겨울을 장식하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내가 그 모임에 들어가면 되겠네.”

  “뭐?”


  마티는 의자를 빼면서 슬그머니 모니터를 확인했다. ‘멜랑콜리안(Melancholians)’이라는 이름 아래에 몇 개의 입력창만 떠올라 있는 까만색 홈페이지가 흉흉하게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그새 커서를 가져다 놓은 입력창의 용도를 확인하더니 짧게 감상평을 남겼다.


  “별 꼴이로군. 시험도 본다고?”


  문제의 하얀 흔적들은 정식으로 멜랑콜리안에 가입하기에 앞서 테스트를 거쳐야 하므로, 그 시험에 필요한 인적사항들을 적기 위해 마련된 부분이었다. 마티는 특히 모든 건 지원자가 개인적인 정보를 넘긴 뒤에야 알려주겠다는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드시 둘 중 누가 여기 가입해야 하는 거야?”


  “의뢰인이 원하는 정보를 가장 빨리 얻을 수 있는 경로니까. 물론 내가 정신병자들 틈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다면 얘기해.”


  “…그런데 꼭 네가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데?”


  “이런 족속들은 보통 니체를 비롯해서 네가 들어본 적도 없는 책들에 환장하니까.”


  마티는 그 논리적인 문장 속에 숨어 있는 몇 가지 지적들, 이를테면 인간의 우울증이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족속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다는 러스트의 핀잔 따위를 읽어냈다. 니힐리즘과 독일 철학과 비관주의를 모조리 꿰고 있는 수사관은 패스트푸드의 배달 시간을 설정하는 듯한 태연함으로 멜랑콜리안에 자신의 연락처를 전송했다.


  멜랑콜리안의 홈페이지는 더더욱 새까매졌다.





All of Visions

02. 멜랑콜리안Melancholians






  마티는 그 날 러스트를 딱 두 번 보았다. 처음에 그를 봤을 때 마티는 은은하게 밝아진 얼굴빛을 감추느라 진땀을 뺐었다. 러스트가 머리를 자르고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내려갈 줄 모르는 그의 흡연율을 저지하는 데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마티가 제대로 관심을 두지 못한 사항이었지만, 어쨌든 파트너의 모습이 한결 깨끗해진 걸 보는 일은 전혀 나쁜 게 아니었다. 러스트는 터틀 사건 덕분에 알려진 자신의 얼굴과 비교해 뚜렷한 차이점이 생긴 것에 만족하고 있었기에 둘은 나름대로 화기애애한 아침을 보냈다.


  그러나 밤이 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 어떤 악마적인 재앙을 보아도 굳건했던 파트너의 얼굴에 마티는 조금도 긍정적인 변화를 주지 못했다. 





  러스트는 한 길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람이 미처 신경 쓰지 못한 남부의 자투리에 남아 있기 마련인 황량함과 미미한 질서가 바람 섞인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러스트는 다소 지루함을 느끼며 담뱃재를 털었다. 그는 노골적으로 비어 있는 자신의 등 뒤로 대체 언제 수상쩍은 차량이 나타날지 헤아려보기로 했다. 속으로 느리게 셈하는 숫자 위에 무거운 날개를 편 권태가 올라탔다. 그는 이 순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시간과 미래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었다.


  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났다. 러스트는 남은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양 손을 자신을 위한 안내자들이 휘어잡기 쉬운 위치에 놓았다. 안대를 쓰고 손목은 단단히 잡힌 채 러스트는 차량에 탑승했다. 곧 꺼질 담배 연기처럼 얄팍하고 자명한 것들 사이에서 러스트는 숨을 내쉬었다. 


  자동차가 최초로 코너를 돌았을 때 러스트는 정신을 잃었다. 러스트에겐 그다지 낯선 일이 아니었다.


  다만 눈을 뜨고 나서 자신이 아직도 앉아 있는 상태임을, 하지만 주변 환경은 완전히 달라져 있음을 발견한 러스트는 슬그머니 눈썹을 으쓱였다. 예상했던 것보다 약의 효과가 강했다. 러스트는 결박된 구석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시원하게 눈가를 문질렀다. 방의 모서리에 처박혀 있는 길쭉한 스탠드의 불빛은 연극적으로 어두웠고 공기로부터 느낄 수 있는 미각은 초록색 사과처럼 떫었다. 


  러스트는 정면을 바라보았다. 가면 따위는 쓰지 않은 순수한 실루엣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까딱이고 있었다.


  “약이 좀 세군.”

  “그랬군요.”


  목소리는 특별할 것 없는 억양을 구사했다.  


  “안녕하세요, 러스트.”

  “당신은?”

  “바이스.”

  “유치하군. ‘바이어스(bias; 편견이라는 뜻)’같은 세련된 단어도 많잖아.”

  “악(vice)이라는 뜻이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당신 이름이 욕망(lust)을 말하는 게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바이스라는 가명의 남자는 살짝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욕망을 상징하지 않는 남자와 스스로 악덕이 된 남자는 잠시간 잘 보이지도 않는 서로의 얼굴을 응시했다.  


  “세상의 마지막을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러스트는 일 분도 망설이지 않고 그 질문에 답할 수 있었다. 

 

  “아마 어떤 멍청이가 사고를 치겠지.”

  “그게 답니까?”


  “내가 무슨 말을 해주길 바라지? 인간은 아무런 계획도 없이 세상에 던져져서 평생 얼떨떨한 상태로 사회를 부유하는 먼지 가닥이야. 세상을 멸망시키기에 인간만큼 얼이 빠졌으면서 위험한 동물은 없어.”


  “그런 추상적인 주장 말고, 내가 인류의 타락을 예견케 하며 궁극적으로는 종말을 암시하는 증거를 댄다면요?”


  “이름값 한다고 말해줄까?”


  바이스가 헛웃음을 흘렸다. 러스트는 바이스의 시선이 정확히 자신의 눈을 향하지 않고 머리카락 끝부분이나 의자의 팔걸이에 자주 닿는다는 걸 느끼고 그에게 질문했다.


  “그 쪽에서도 내가 보이지 않나보지?”

  “맞습니다.”

  “왜?” 

  “한 번 대화를 나누고 끝낼 상대의 얼굴을 굳이 확인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이스는 마치 체계적인 점수표가 존재하는 것처럼 소리 나게 펜으로 공책을 두드렸다. 사방에 극적인 요소들이 가득했다. 러스트는 이 공간 안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관심을 기울일 가치가 있는 것이라곤 바이스의 평범한 어조뿐임을 굳건하게 인식하고 바이스의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당신과 나는 정식으로 인사할 기회가 있을 겁니다.”


  놀랍게도 바이스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바이스는 술병과 잔이 준비되어 있을 법한 서랍장으로 다가갔다. 러스트가 보란 듯이 팔다리를 쭉 폈다.   


  “작별인가보군.”


  바이스는 러스트가 잔을 선택할 수 있게 공평하게 팔을 뻗었다. 그는 변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수면제는 넣지 않았습니다.”


  바이스는 원한다면 잔의 밑바닥을 살펴도 좋다고 했다. 그러나 러스트는 잔이 아니라 바이스의 손가락을 보고 잔을 골랐다. 그는 천천히 악과 건배할 준비를 했다.


  “인간이 벗 삼을 수 있는 건 인간 밖에 없지요. 당신과 나는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러스트.”


  두 사람은 나란히 술을 마셨다. 


  러스트는 순식간에 세상의 최종장을 욕망하는 자가 되었다.

 




  마티는 쉽게 재킷을 들어 올리지 못했다. 원체 정상적인 구석이라고는 털끝만큼도 없는 파트너였지만, 다리 어디에선가 혈액이 뭉쳐 그대로 쓰러져버릴 것 같은 러스트의 올곧은 자세를 보고 있자니 걱정이 쌓였다. 러스트는 사무실로 돌아와서 몇 시간째 미동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아마 마티가 내일 출근할 때까지 그 모습을 고수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계약금이야 다시 돌려주면 돼.”


  결국 마티는 러스트의 책상 근처를 배회해보기로 했다. 마티는 러스트의 눈썹 모양을 살피면서 입을 열었다.


  “그 사건, 안 맡아도 된다고.”

  “아니.”


  석고상이 움직이는 듯한 동작으로 러스트가 입술을 달싹였다. 


  “내가 해야 해.”


  그 때 마티는 처음으로 러스틴 콜의 의무감이라는 것을 감지했다. 생명이 전혀 묻어나지 않을 것만 같은 피부와 음성이 표현하고자 하는 무언가는 그것 자신의 존중을 바라고 있었다. 마티는 이럴 때 그가 러스트를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것을 했다. 마티는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


  러스트는 끊임없이 생각했다. 


  세상과 인류의 쇠퇴가 너무나 자명하다. 그것은 진리이며 옳음 그 자체이다. 이 때 이미 의심할 수도 없는 이 명제를 더욱 강력하게 믿는다고 한다면,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간과 우리가 속해 있는 종에는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계몽된 선각자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들을 멸망이 예고된 세상으로부터 탈출시켜야 한다. 그들의 멸망 자체도 예견된 것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우울함을 조장하는 악의 의인화가 그렇게 말했을 때 러스트는 그것에 모조리 동의해버렸다. 그는 비판자인 자신이 바이스를 비판하지 못했다는 것을 몇 번이고 되짚으면서 눈을 감았다. 


[TrueDetective/마티러스트] Deadly Good Morning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3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Deadly Good Morning




  사람들은 러스트 콜에게 궁금한 것이 많다. 그의 파일은 왜 대부분 다른 동료들도 볼 수 없는 단계에 속해 있는지, 과거에 무슨 일을 겪었는지, 그가 죽인 사람의 숫자를 궁금해 하거나 심지어 그의 화법이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지를 묻기도 했다. 그 악의적인 의도들 사이에서 그나마 마티 하트의 궁금증이란 납득할 수 있었고 심지어 대답해 줄만한 가치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마티는 러스트가 용의자들의 자백을 받아낼 때 쓰는 수법을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러스트는 가장 순수한 성격을 가진 의문점에게도 등을 돌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러스트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는 건 아니었다. 러스트는 자신의 파일에 대해서는 상관을 찾아가라고 말해주었고 과거에는 알래스카 구석에서 백야를 맞고 있었다고 대꾸했다. 그는 자신이 죽인 사람들의 숫자를 세지 않는다고 대답했으며, 특히 마티 하트의 물음에는 모든 용의자들은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는 꽤 설득력 높은 답변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 어느 것에도 러스트의 심장으로부터 나온 진실은 없으므로, 러스트는 그러한 맥락에서 사람들이 자신에게 표명하는 모든 의문점에게 등을 돌렸다고 말할 수 있다.


  진리는 그것을 분석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거짓보다 더 값싼 평가를 받는다.


  죽음에 대한 모든 건, 그것을 박탈하는 것이든 부여하는 것이든 죽음을 주관하는 건 악한 존재들이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평가절하 하는 첫 번째 사실이다. 사유는 쉽게 부서지는 모래로 만든 미로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두 번째 사실이다. 시간은 존재에게 온갖 걸 가르쳐줄 수 있다. 이것은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 인정하긴 하지만, 자신에게 일어날 리는 없으므로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린 세 번째 사실들이다.


  러스트는 그러한 것들 속에서 숨 쉬고 있었다. 고로 그는 타인에게 들려줄 수 있는 진실이 없었다. 러스트는 자신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얼굴들을 묵묵히 외면하며 계단으로 향했다. 그 중 단지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네려 했던 마티는 멋쩍어 하는 표정으로 반쯤 들어 올렸던 팔을 감추었다.


  풀잎 향기가 진한 남부의 공기가 러스트의 신경을 누그러뜨렸다. 러스트는 트럭에 오르면서 마티 하트의 차를 바라보았다. 경찰서 바깥에도 카메라가 몇 대 있었고, 그가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마티의 차를 뭉개버리는 모습은 아주 선명하고도 확고하게 경찰서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될 것이었다. 하지만 러스트는 조용히 서를 빠져나갔다.


  이파리와 마른 흙 냄새가 섞인 공기가 러스트에게 안정을 주었다. 그에게 기꺼이 관여하고자 하는 유일한 인물에게서 멀어지자 러스트는 평범한 눈빛을 지을 수 있었다.  


  러스트는 일평생 평범함에 도달할 수 있는 굽은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가끔 계단에는 그의 발밑을 미끈거리게 만드는, 이를테면 여인이라든가 어린 아이라든가 바라봐주는 것 밖에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 사진들이 흩뿌려져 있기도 했다. 러스트는 그 모든 장애물들을 무사히 발뒤꿈치로 밀어내고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그가 너무나도 오래 기다려온 문이 보일 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앞에 마티 하트가 서 있을 것임을 러스트는 짐작할 수 있었다.


  비관주의 같은 사상적 갈래나 훌륭한 지식들도 결국은 바깥을 해석하는 틀을 쌓는 데 쓰이는 건축 요소에 불과했다. 최상의 비관론도 본디 그런 마음을 가질 생각도 기반도 없는 존재에게 생명을 업신여기라는 명령어를 입력할 수 없다. 만약 비관주의가 러스트의 성품마저 지배할 수 있었다면, 그는 현재의 괴로움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었다. 


  러스트는 나무마다 걸려 있는 마티 하트의 죽어버린 팔과 끊임없이 마주치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현관문을 잠그고 물을 틀었다. 이빨에 찔린 상처에서 난 피가 물과 함께 소용돌이치다 사라졌다.  


  러스트는 매트리스에 누웠다. 한 번 씻어낸 입 안에서는 계속 탁한 철분 맛이 났다. 러스트는 눈을 감았다. 그는 자신과 조금이라도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자들이 자신의 이빨에 뚫리는 환영을 보았다. 수풀처럼 양 갈래로 갈라지는 피부들 사이에서 나타난 마티 하트가 천천히 총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러스트는 마티가 들고 있는 것이 총이 아니라 은색의 성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찌감치 세상으로부터 추방을 예고 받은 존재는 낮밤을 가리지 않고 연약했다. 러스트는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원이라도 가보지 그래.”


  차에 타기 직전 마티가 러스트에게 말을 걸었다. 러스트는 차문의 손잡이를 응시했다.


  “어째서.”

  “네 얼굴빛이 날이 갈수록 최악이다. 그렇게 잠을 못 자면 약이라도 먹어야 하는 거 아냐?”


  러스트는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슬쩍 훑어보았다. 하나의 대상을 판단하는 잣대는 전지전능한 누군가도 손을 내젓고 싶을 정도로 많다. 러스트가 보기에 하얗고 푸른 얼굴빛은 나쁜 게 아니었으므로 그는 마티의 말에 동의하지 않기로 했다. 마티 역시 그가 행동하는 모습과 죽어 있는 모습 모두를 소중히 여길 수 있는 러스트의 심미관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었다.


  러스트가 차 안에 몸을 걸치면서 말했다. 


  “때로는 잠보다 꿈이 나을 때가 있지.”


  러스트는 또 다시 자신의 파트너에게 거짓말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것은 신도 사랑도 아니라 잠이다. 


  러스트는 매번 비상식적인 답변을 내놓을 뿐이라는 관념이 박힌 마티는 어깨 한 번 으쓱하지 않고 운전석에 앉았다. 러스트는 창밖을 보았다. 현재 자신과 가장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래서 가장 탐하고 싶은 향기를 내뿜는 인간이 그의 근처에서 피부를 자랑하기도 했고 심지어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러스트는 자신의 심장이 십자가가 된 마티 하트에게 뭉개지는 상상을 했다. 


  햇살에 타들어가며 죽어버리고 싶은 아침이 시작되었다. 




Death is the devil’s work 죽음은 악마의 작품
Love is a cheap card trick 사랑은 싸구려 카드 속임수
Truth is a poor man’s dream 진리는 가련한 인간의 꿈이며
Thought is a quicksand maze 생각은 헤어나오기 힘든 미로와도 같은 것

And all my years spent cursing up the stairs
그리고 내 모든 시간을 계단을 오르는 데 써버렸네
Good morning god get up, forget those bad dreams
좋은 아침입니다, 신이시여, 일어나세요, 나쁜 꿈들은 모두 잊어요
We been awake and waiting far too long
우린 너무 오래 깨어있었고 너무 오래 기다려왔어요
And thinking about death 그리고 죽음을 생각했죠

Sleep is a sick sad joke 잠이란 역겹고 슬픈 농담과 같은 것
Good morning god get up, forget those bad dreams
아침이 밝았으니 신이여, 일어나 그 나쁜 꿈들은 모두 잊어

'Done Haunting Houses' by The Republic of Wolves


[TrueDetective/러스트] On His Artistry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2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for Rustin Spencer Cohle

- 느리고 꼼꼼하게.

- Written by. Jade


On His Artistry




  세상이 서로 성질이 다른 학문 간의 융합을 외치기 훨씬 전에 러스트 콜은 그것을 이미 훌륭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가 그리는 그림의 표면적인 기능은 대개 정보 기록이라는, 그림의 가장 유구한 목적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가진 복잡성을 놓치기 쉽다. 소재를 가리지 않는 외적 강렬함이 더더욱 작품이 가진 미묘한 깊이를 가린다. 하지만 우리는 상기해야만 한다. 기괴하게 죽은 여인의 시체를 평범한 피사체로 다루면서, 동시에 해석적인 기교를 불어 넣는 자의 솜씨는 절대 범상한 것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예술가는 때때로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완벽하게 무효화시켜야 한다. 대상을 자신의 입장으로 완전히 끌어들여야 자신의 주제나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바가 더 잘 드러나게 되기 때문이다. 보통의 예술가들의 무리에서 자신을 제외시키고 싶은 예술가는 차갑고 담대하게 대상의 역사라든가 그것이 가진 독특한 무언가를 무시해야 한다. 


  러스트 콜에겐 위와 같은 특징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필요한 시각을 위하여 대상의 본래적 성질을 절개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냉정하고 전문가적인 태도는 어쩌면 그가 직업 화가가 아니기 때문에 길러진 것일 수도 있다. 러스트 콜은 살인이 빚어낸 여러 감성적 결과들에 공감하기에 앞서 그것을 하나의 문제로 받아들여야 하는 위치에 있다. 그는 세상에서 제일 객관화하기 어려워 보이는 문제를 객관적으로 해결하고 관찰해야 하는 자다.


  러스트 콜은 이러한 예술적 주관성 위에 과학적인 객관성을 결합시킬 줄 안다. 역시 그의 그림은 모든 것을 표현한다. 그는 일정 부분 기록을 위하여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대상이 가진 겉모습을 제대로 묘사해내야 한다. 시신의 흉한 흔적, 보기도 싫은 오싹한 물건들이 가진 물리적인 특징을 순수하게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흡수해야만 경찰이 기록으로 쓸 만한 그림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펜을 쥔 그의 손은 자신만의 온도를 갖고 있지 않은 사진기가 된다. 사진기는 피사체의 모습에서 어떠한 가치 판단을 하려 하지 않는다. 러스트 콜이 그리는 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러스트 콜이 살인 사건을 전담하는 형사이기 때문에 가능했는가? 오직 그의 직업적 경험들이 그의 예술성을 빚어냈는가? 사실 러스트 콜은 노트가 아니라 자신의 인생을 캔버스로 두고 두려우리만치 냉정하고 주관적인 그림을 그려왔다. 


  인간의 내면에 비관주의가 정립되기란 실상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지적해봐야 그 자체가 달라지지는 않으므로, 결국엔 우리가 던져진 세상이라는 걸 최대한 긍정적으로 해석하는 게 존재의 최선으로 남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세상은 어떤 곳인가? 노력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개인에 따라 비옥도가 달라지는 토지와도 같은 곳이다. 나의 소중한 사람이 어딘가에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설렘의 광장일 수도 있다. 누군가에겐 즐길 게 너무 많아 어지러울 정도인 세상에서 가장 큰 백화점일 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이 ‘세상’이라는 단어 앞에 적어도 한 가지는 긍정적인 수식 어구를 붙이려 애쓴다. 비관주의는 연속적으로 견딜 수 없는 경험을 한 덕분에 그러한 언어를 생성하려는 노력을 포기했거나, 그런 노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임을 직시해야만 발생한다. 


  여기 몇 가지 경험들이 있다. 행복한 순간은 너무도 짧고 신비로운 어둠은 온 시간을 지배하며 자신의 재능은 워낙 특수하여 아무 장소에서나 뽐내기 어렵다. 따뜻함이 연상되는 감정은 애초에 부재했거나 혹은 빼앗겼다. 그 누구의 시선으로 봐도 장밋빛 인생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운 것들이다. 러스트 콜은 객관적이고 집단적인 과정을 거쳐도 나오게 될 결론을 자신의 해석으로 만들면서, 완벽하게 실제적인 토대 위에 그만의 비관주의를 세워 올렸다. 그것은 러스트 콜의 첫 번째 그림이었다. 


  그러므로 현실이 가장 칭송하는 가치를 이미 이뤄낸 그의 시선이 공허함을 우리는 비난할 수 없다. 때로 세상에는 일반적인 심미관으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명작이 존재하는 법이다.




'Done Haunting Houses' by The Republic of Wolves



[TrueDetective/마티러스트] Some Consistent Things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0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Some Consistent Things

 

 

 

  많은 경우 사물은 사람보다 더 일관적이다. 마틴은 당장 그 명제에 대한 증거물로 내놓을 수 있는 대상을 보고 있었다. 

 

  지금은 마틴에게 있어 드문 순간이었다. 상당 부분 거주지라는 기능을 수행하기 어려워보이던 집에서 나온 뒤 러스트는 실질적으로 마틴의 사무실에서 살고 있었다. 수중에 돈이 없어 방을 얻기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으며, 자신은 집이 제공하는 가장 큰 편안함인 수면을 잘 누리지 못하니 집이 필요가 없고, 잠을 못 자는 시간에는 아주 높은 확률로 일을 할 테니 차라리 사무실에 계속 있는 게 효율적이라는 러스트의 빈틈없는 논리를 마틴은 극복해내지 못했다. 결국 러스트는 마틴의 곁에 아주 오래 있게 되었다. 

 

  마틴이 처음으로 러스트가 없는 책상을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금연의 좋은 점과 더불어 금연에 성공한 사람들의 일화를 담은 책이 책상의 노른자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마틴이 진짜로 네가 불사신인 줄 아냐며 혀를 차는 동작을 담아 러스트에게 선물한 책이었다. 물론 마틴은 러스트가 그 책을 펴 본 적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사실 마틴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여러모로 더 이상 세무원이라는 별명이 어울리지 않게 되었음에도 러스트의 옆구리를 떠나지 않는 검은색 노트였다. 두께도 크기도 90년대에 그가 들고 다니던 공책과 똑같았다. 마틴은 얇게 긁힌 자국만 조금 났을 뿐 상한 구석이 없는 공책을 슬그머니 뒤집어 보며 관찰했다. 7년 전 러스트의 모습과 많이 닮은 깨끗함이었다. 마틴은 공책을 앞뒤로 살펴보다가 제자리에 놓았다. 그는 옛날에도 러스트가 먼저 보여주지 않을 때 말고는 러스트의 공책을 들춰본 적이 없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일관성이 공간을 흐르고 있었다.

 

  그러다 마틴은 러스트의 사건 노트 아래에 무언가가 깔려 있음을 발견했다. 노트보다는 크기가 작지만 그것만큼이나 딱딱한 표면을 가진 물건이었다. 마틴은 넓게 뚫려 있는 사무실의 유리창을 슬쩍 훑었다. 러스트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마틴은 휙 노트를 위로 들어올렸다. 그가 들고 있는 것과 비슷하게 까맣고, 형태는 사각형으로 일치하지만 보다 더 매끄러운 공책이 드러났다. 마틴은 순간적으로 그것을 러스트의 다이어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러스트가 일기를 끼적대는 모습을 상상하다 혼자 웃어버렸다.

 

  ‘세상 다 산 양반처럼 구는 주제에 일기?’ 마틴은 그 때까지만 해도 그것이 러스트의 일기장이라는 자신의 추론을 버리지 않았다. 크기도 일기장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쓰기에 적합해 보였고, 험한 여행길을 겪어보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는 광택 또한 마틴의 추측에 가능성을 실어주었다. 마틴은 날숨이 섞인 웃음을 흘리면서 다이어리의 책등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에게는 추정이 아니라 선택의 길이 열려 있었다.

 

  마틴은 다이어리를 펼쳤다. 

 

  검은 표지의 뒤편에는 글자가 없었다.

 

  나무와 펜과 종이 속의 종이가 하나의 비유 같은 질서에 맞춰 배열되어 있었다. 커피를 마신 자국이 찍힌 머그잔이나 뚜껑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상자도 볼 수 있었다. 마틴이 보기엔 화가가 되었어도 충분했을 듯한 재주가 무심한 선으로 빈 공간을 채운 모습이었다. 마틴은 또박또박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자 그가 가득해졌다.

 

  마틴은 눈을 크게 뜨고 러스트가 그린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는 어떤 생각이 들어 공책을 빠르게 넘겼다. 러스트가 그린 사람은 마틴이 유일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러스트의 집과도 같은 이 공간에 러스트가 관찰하면서 그릴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사무실에 머무르는 사람은 마틴뿐이었다. 마틴은 러스트가 들고 다니는 커다란 노트만큼이나 그가 찾을 수 있는 일관적이고 변함없는 대상이었다. 마틴은 그림을 보다가 화가가 될 생각은 안 해봤냐는 물음에 새로운 무언가를 시도하기에는 늦었다고 대답했던 러스트를 떠올렸다. 

 

  문이 열리면서 나는 개성 없는 소음에 마틴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러스트가 손을 뒤로 뻗어 출입문을 미는 자세 그대로 마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틴은 재빠르지만 의미 없는 동작으로 러스트의 작은 공책을 내려놓았다. 러스트의 표정은 덤덤했다.

 

  러스트는 의외로 별 말이 없었다. 마틴이 저도 모르게 노골적으로 러스트의 눈치를 살폈지만, 러스트는 본래의 자리로 안내받지 못한 공책을 사건 노트로 가릴 뿐이었다. 세상에서 러스트 콜을 다룬 경험이 가장 풍부한 마틴도 러스트의 표정을 읽는 방법을 몰라 하릴없이 눈썹만 움찔댔다. 

 

  러스트는 침묵했다. 마틴이 20분 째 자신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데도 가만히 있었다. 결국 마틴은 자신의 파트너가 어쩐 일로 이해심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마틴이 비로소 러스트에게서 시선을 떼고 서류를 펼쳤을 때, 러스트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공책을 펼쳐 마틴을 그리기 시작했다. 



[TrueDetective/러스트] The Light is Winning

- True Detective 2015. 2. 11. 10:57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for Rustin Spencer Cohle

- Written by. Jade

 

The Light is Winning

 

 

 

  이성과 본능이 물과 기름처럼 갈라졌다. 

 

  러스트는 자신의 배에 칼이 박혔으며 그러한 짓을 한 남자가 비정상적인 살인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런 놈은 그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오래된 자신의 윤리적 판단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러스트의 이성이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에 따라 러스트는 칼을 비틀고 끌어 올리면서 자신의 살가죽을 헤집어 놓으려는 남자에게 강하게 대항했다. 하늘의 눈처럼 뻥 뚫려 있는 천장이 러스트를 내려다보았다.

 

  러스트로 하여금 상처를 허용하게 만들었던 우주가 아직도 거기에 있었다. 별이 만든 소용돌이 같기도 하면서 회전하는 은하를 닮은 우주의 한 조각이 희미해질듯 말듯 러스트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곧 괴물 같은 표정을 한 살인자의 머리가 천장을 가리면서 러스트는 우주를 보지 못했다.

 

  배가 찢어지는 고통에 이성이 반응했다. 러스트가 힘겹게 숨을 들이켰다. 사고를 어지럽히는 우주가 사라지자 러스트는 민첩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해냈다. 러스트는 최대한 고개를 젖히고 반동을 실어 자신의 이마를 남자의 머리에 부딪혔다. 머리도 배도 깨져나갈 듯했다. 러스트는 박치기를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남자가 칼에서 손을 놓으며 떨어져나갔다. 세상이 다 기울었다. 러스트는 하늘의 눈을 채운 또 다른 하늘을 볼 수 있었다. 

 

  이성은 공격을, 본능은 응시를 바랐다. 러스트는 고통과 망상이 서로 싸우고 있음을 느꼈다. 존재를 소중히 여기지 않았던 인생이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해오는 것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 지경이었다. 러스트는 남자를 죽이거나, 적어도 쓰러뜨려야 한다고 인지했다. 동시에 러스트는 우주로 가라앉고 싶었다. 그는 바닥에 엎어졌다. 우주가 총소리를 꾸역꾸역 짓눌렀다.

 

  러스트는 뚫린 천장을 채우고 점차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별무리들이 언젠가 그가 보았던 알래스카의 밤과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다면 별들은 하얗거나 까만 하늘에 의해 조금씩 사라질 것이었다. 과연 그랬다. 러스트는 하늘이 어두워지고, 색감과 맛을 구별할 수 없었던 자신의 내면도 어두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죽음과 무를 즐겨 논하는 비관주의자였다. 하지만 자살이 체질인 타입은 아니라 간절하게 생을 포기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은 없었다. 러스트는 굳이 죽음을 원하지 않았었다. 

 

  지금에서야 러스트는 죽음을 원하고 있었다. 비로소 그가 죽음의 일면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감추고 있는 밑바닥에는 사랑이 가득했다. 애정과 따뜻함이 어려 있는 어둠이었다. 러스트는 죽고 싶었다. 그의 모든 부분이 그것을 원했다.

 

  단 한 가지가 그를 거스르고 텁텁한 공기가 흐르는 현재로 머리를 쳐들었다. 러스트는 죽음을 원했지만 마틴 하트는 그렇지 않았다.

 

  러스트의 이성이 방아쇠를 당겼다. 방금 전엔 그의 우주를 가리더니, 이번엔 그의 파트너를 가로막고 있는 거추장스러운 남자의 옆머리 일부가 날아갔다. 눈앞이 한층 트였다. 러스트는 마틴을 보았다. 파트너의 뒤편에는 별빛이 없었다.  

 

  죽음에서는 여전히 온기가 피어올랐다.

 

 

 

* * *

 

 

 

  러스트는 무심결에 자신이 울고 있다고 짐작했다. 피부로부터 느껴지는 온도가 눈시울이 붉어질 때 생성되는 정도와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잠깐 몸을 따뜻하게 해 주지만 금세 식어버려서는 귀찮은 일만 늘리는 아주 성가신 온도였다. 러스트는 손을 올려서 눈가를 문질렀다. 얼굴에서는 아무 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평생 몸을 묻고 싶었던 내면의 따뜻함이, 눈물이 마르면서 살갗을 차갑게 식히듯 비틀대고 있었다. 인간의 내면을 꿰뚫어볼 수 있고 공감각을 발휘할 수도 있는 그의 온갖 재주로도 그 따뜻함이 식어가는 걸 멈추지 못했다. 죽음이 러스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러스트는 다시 손을 움직이려고 했다.

 

  잠시 후 러스트는 자신이 손을 움직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특별한 감각보다는 특별한 관계를 통해 해석할 수 있는 모종의 메시지들이 러스트 주변을 조용히 맴돌았다. 러스트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추측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연약한 추측에 그치게 될 것임을 그는 또 알고 있었다. 러스트는 자신을 떠나고 있는 사랑과 죽음에게 작별했다. 그의 애정을 받았던 극소수의 존재들은 하필 현재에 없었다. 

 

  러스트는 자신이 사랑할 것 없는 삶으로 나아갈 준비를 했다. 인생의 본질은 꿈이다. 그의 시간 속에서는 폭력과 타락이 나란히 순환한다. 생으로 떨어진 존재에게는 아무런 혜택이 없다. 찬 공기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스트는 깨어날 준비를 했다.

 

 

 

* * *

 

 

 

  휠체어에 앉은 러스트는 문득 밤공기에서 안면이 있는 익숙함을 끄집어냈다. 목덜미에 도끼날을 맞았지만 러스트보다는 상태가 좋은 그의 파트너가 뒤를 지키고 있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몇 초 후 러스트는 자신이 마틴에게 무언가 대답을 했다는 걸 뒤늦게 감지했다. 유구한 자태를 유지하며 삐걱거리던 러스트의 두 측면이 마침내는 끝을 정하지 않은 퇴화를 선언한 모양이었다. 러스트는 한 쪽에선 마틴의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속으로는 마틴이 무슨 말을 했고 자신은 무슨 대답을 했는지 확인하며 마지막으로 가장 깊숙한 곳에서는 병원 밖이라는 공간이 어떻게 자신에게 익숙함을 가질 수 있는지 고심했다.

 

  밤이 있고, 검은색이 사방을 두르고 있으며 별이 무성했다. 우주가 떠올랐다. 러스트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우주는 아주 특별한 상황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단 하나의 비전이었다. 러스트는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까 했던 얘기 말이야.”  

  “음?”

  “그건 자네가 틀렸어.”

  

  마틴은 발끈하지 않고 부드럽게 물었다.

 

  “어떻게?”

 

  러스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가 깨어난 이후부터 그의 우주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처음엔 어둠만 있는 것 같지만….”

 

  러스트에게 알래스카는 너무 추운 곳이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 그는 남부의 습기와 열기를 반기지 못했었다. 한동안 두 온도 사이의 불균형은 계속되었고,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 같은 최면 같은 비판적인 언어들과 불면증에 힘입어 그것들은 러스트와 똑같이 기우뚱거렸다. 죽음이 따뜻했고 현실이 차가운 것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이어질 수 없는 두 세계가 서로를 노려보는 것만 같은 점에서 러스트는 타협을 제시했다. 그것은 러스트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보기엔 빛이 이기고 있거든.”

 

  마틴은 러스트의 결론을 오만하다고 말하지 않았다. 앉는 이가 사라진 휠체어가 뒤로 밀려났다.





'The Angry River' by The Hat ft. Father John Misty & S.I. Istwa
죽음의 사랑스러움을 그리면서도 빛의 승리를 장담한 그를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