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Ⅱ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7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e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3. 세상을 멸망시킬 것들Things that Destroy the World






  알파벳 서너 개가 빛을 잃은 엉성한 간판 아래에 몰려 있는 사람들은 대개 그것만큼 위태롭고 사회적인 역할이 불안정한 자들이었다. 싸구려 색채와 혼란스러운 눈동자들이 담배 연기를 가장한 온갖 하얀 기체들이 스모그처럼 가라앉아 있는 구석으로 은밀하게 집결했다. 


  러스트는 피곤한 운전수들과 따분한 매춘부들의 표정을 훌륭하게 연기하며 그들의 중심부로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칙칙하다기보다는 유령처럼 창백한 얼굴을 한 번씩 훑었지만, 러스트가 입고 있는 광택 잃은 가죽 재킷을 보고는 이내 흥미가 없어졌다는 태도로 자신들의 용무에 몰두했다. 저 얼굴빛 이상한 남자도 쇠락한 영혼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실밥이 튀어 나온 모자를 쓴 남자가 러스트를 보자 묘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 짧은 순간 돈뭉치와 종이봉투가 서로의 손을 오갔다. 러스트는 자연스럽게 봉투를 재킷 속에 구겨 넣고 뒷문 쪽으로 빠져나갔다. 플라스틱으로 만든 진주 목걸이를 한 여자가 그의 옆에서 담배 연기를 뿜었다. 


  술집 뒤쪽에 떨어진 담배꽁초와 신비로운 교차로에 이정표처럼 남겨진 담배꽁초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간판과 여자에게서 멀어진 러스트의 눈동자는 이내 그것들과 전혀 비교할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러스트는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전에는 외관도 보지 못했던 멜랑콜리안들의 집합 장소가 시야에 크게 들어왔다. 남부에 펼쳐져 있는 흔한 숲 한 덩이와 목조 건물이었다. 그는 땅에 발바닥을 엇갈리게 내려놓으면서도 그곳에서 법원 경매를 통해 헐값으로 팔린 저택의 그림자를 잡아낼 수 있었다. 


  안내인이 그에게 찬물을 병째로 주었다. 추론 하나를 짜내자마자 지쳐버린 러스트는 조심성 없이 물병을 열었다. 물이 목구멍으로 흘러드는 순간 러스트는 욕을 내뱉었다. 젠장. 그러나 그 말은 실제로 표출된 적이 없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머리가 맑아질 겁니다.


  수면제에 이젠 안정제까지 먹여 놓고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러스트는 자신이 그 말을 소리 냈다고 믿었다.


  러스트는 비판력을 잃은 멜랑콜리안이 되어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러스트는 심하게 비틀댔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는 처지에서 그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었다. 러스트가 거의 옆으로 넘어질 것처럼 굴자 안내인들은 잠시 그에게 시간을 주었고, 그 귀중한 여유를 통해 러스트는 입구에 금속 탐지기가 설치되어 있음을 보았다. 


  —자리에 앉을 때까지 도와줄게요. 핸드폰은 나한테 줘요.


  러스트는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망할 놈들. 빨리 날 놔주기나 하라고. 


  그는 혼돈의 한가운데에 자리 잡았다. 러스트는 밑으로 자꾸만 고꾸라지는 팔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그를 구원할 약병이 손가락에 감겼다. 러스트는 이마를 무릎에 바짝 붙인 채 몰래 알약 하나를 삼켰다. 머릿속에 곧장 전류가 흘렀다. 


  시공이 용수철 위에서 발을 굴렀다. 눈꺼풀 안쪽에 맺힌 빛의 흔적들은 일종의 상징을 만들어 내려 애쓰는 것만 같았다. 모세혈관 속에서는 그가 소리치고 깎아내리고 싶은 것들이 최악을 겨루고 있었다. 러스트는 몹시도 어지러웠다.


  —우리는 운명이 우리에게 대탈출을 요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 받은 자들의 지식입니다.


  러스트는 자꾸만 고개를 수그렸다.


  —인간은 이미 20세기 초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사상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모더니즘 이래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패배감에 젖은 아마추어주의를 좋게 포장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습니다. 인간의 이성이 짜낼 수 있는 마지막 위대함은 1900년대에 이미 등장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린 사상적으로 더 발전할 수가 없습니다.


  러스트는 그 말을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아주 독특한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의 푸른 선구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러스트는 생각했다. 그렇게까지 길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또한 이 행성은 아주 깊은 구석까지 다 개간되어 버렸습니다. 이 땅에서 인간이 밟아보지 못한 곳이 존재합니까? 누군가에게 소유되어 착취를 예고 받지 않은 조각은 더 이상 없습니다. 머리가 자랄 대로 자란 인간이 이제 그들의 발전을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곤 자연밖에 없지만 우린 그것마저 다 소모해버리고 만 것입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 수많은 국가들은 지난 몇 년간 그 사실을 증명해오고 있습니다. 성장은 끝없이 정체된 상태에 머물 것입니다. 비참한 자들의 박탈주의는 이성이 계산한 끝에 내놓은 결과물입니다. 


  정수리 속이 찌릿찌릿했다. 구원의 약물이 안정제의 뒷목에 찰싹 달라붙었다. 멜랑콜리아의 속임수가 흔들렸다. 그리고 러스트는 드디어 그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우리를 이끌어주는 마지막 표식은 무엇입니까?


  “…끝없는 분열.”


  기둥들이 더 이상 물결치지 않았다. 러스트는 마이크도 없이 말하고 있는 바이스를 보았다. 


  “현대 사회의 개인은 실상 현미경으로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원자입니다. 다른 누군가가 매력을 느낄 만한 요소도 갖추고 있지 못한 볼품없고 흔해빠진 덩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됨으로써 우리의 희망은 완전히 사라진 것입니다. 더 나은 무언가를 낳을 수 있는 협력이 발생하는 환경은 고대의 신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남은 것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목이 터져라 인류의 대탈출을 부르짖었다. 바이스는 이 모든 우울한 진리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멜랑콜리안들을 칭찬했고, 멜랑콜리안들은 자신들을 특별하게 만들어 준 진리를 속삭여준 바이스에게 환호했다. 


  바이스는 어느새 유리잔 하나를 들고 있었다. 러스트는 무표정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새로운 악마숭배의 현장에서 그는 각성제를 찬미하며 약물에 입술을 적셨다.





  러스트는 맨 처음에 바이스가 있는 방을 찾고자 했다. 기이하게 작동하는 신진대사가 자꾸 휘청거렸기 때문에 러스트는 남은 시간 동안 손에 잡히는 문고리는 모조리 당겨대기로 했다. 그는 저택 안에 토론장과 휴게실을 찾아냈고 네 번째 시도 만에 멜랑콜리안들의 도서실이 있다는 정보와 더불어, 바이스와 약기운에 휘둘린 나머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을 얻어냈다.


  애나벨은 혼자 입꼬리를 들썩여대는 것 말고는 그럭저럭 멀쩡한 자세로 책을 고르고 있었다. 그녀는 휙휙 책을 뽑아댔는데 그 수가 적지 않았다. 러스트는 그걸 보고 그녀에게 정당하게 다가갈 수 있는 구실을 생각해냈다.  


  “여기 책은 바깥으로 가져갈 수 없지 않습니까?”


  애나벨은 과장된 몸짓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는지 잊어버렸다는 표정으로 러스트를 빤히 보다가 정신을 차렸다.


  “물론이죠. 이건 토론할 때 쓸 책이에요.”


  러스트는 자신이 토론장을 두 번이나 엿봤다는 걸 감추었다.


  “토론도 합니까?”

  “그럼요. 여긴 처음이신가 보네요. 제가 진행하는 토론은 꽤 인기가 많은데.”


  러스트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애나벨이 이른바 ‘인기 많은’ 토론을 진행하고 있다는 말에서 그녀가 멜랑콜리안에 상상 이상으로 열정적이며, 이 모임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나도 없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애나벨은 다시 즐겁고 기복이 심한 그녀만의 세계로 빠져들었고 러스트는 의미가 없어진 도서실 밖으로 나왔다.


  러스트는 이후에도 계속 저택을 돌아다녔지만 바이스는 그가 들어갈 수 있는 방 어디에도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책상 위에 탁탁 내려놓는 파일들을 의문이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뭐야?”

  “새로 들어온 의뢰들에 관한 기초 조사.”

  “너 어제 여기 안 왔잖아.”

  “밤에 들렀었어.”


  마티가 잔뜩 미간을 좁혔다.


  “나도 어제 꽤 늦게까지 있었는데?”

  “내가 왔을 땐 없던데.”

  “몇 시였는데?”

  “3시 45분. 아, 그리고 루시아였나? 언니는 거기서 나올 것 같지도 않고 그런 방법도 없다고 전해줘. 나보단 네가 알려주는 게 낫겠지.”


  러스트는 태연하게 말했으나 그가 말한 시각이 오후일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마티는 러스트를 붙잡아 세우고 진지하게 얼굴을 들이댔다. 러스트가 귀찮아하며 팔을 흔들었다.


  “왜.”

  “혹시 너한테 그 멜랑콜리안이라는 데가 뭐,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거나 아니면 거기서 끝내주게 말 잘 통하는 동지를 만났다거나….”

  “무슨 개소리야.”


  기어코 신경질이 난 마티가 잡고 있던 러스트의 팔을 세게 아래로 던졌다. 


  “너야 말로 지금 상태가 아주 개 같거든? 뭐야, 대체? 왜 그렇게 그 일에 집착해? 둘러대려고 하지 마. 여기서 나가면 너 또 거기 갈 거 뻔히 알고 있으니까.”


  러스트는 이를테면 커튼 자락이 가리고 있지만 그 뒤편에 분명히 존재하는 유리창의 균열을 표정에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티는 폭로의 가능성에도 의연한 흠집에 경의를 던져주지 않았다. 


  “거울이나 한 번 봐봐. 내가 본 것 중에 지금 네 얼굴빛이 제일 거지같아. 당장 거품 물고 뒈지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라고!”


  러스트가 그 말을 듣는 순간 처음 떠올린 것은 자신이 거울을 눈여겨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도 환각 및 진정 성분이 들어 있는 약과 각성제를 동시에 섭취한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몰랐다. 그의 상상력은 그보다 중요한 곳에 집중되어야 했다.  


  “네 멍청한 생각을 좀 정정해주지.”


  마티가 그 자리에서 의자를 넘어뜨리고 싶을 정도로 러스트의 음성은 건조했다. 


  “첫째, 난 멜랑콜리안에 매력을 느끼지 않아. 둘째, 거긴 일반적인 대화가 불가능할 정도로 약에 찌든 미친 것들밖에 없어. 곧 내가 동지라고 생각할 만한 작자도 없다는 거지. 마지막으로 집착은 아냐.”


  마티는 순간적으로 물었다.


  “그럼?”


  러스트는 그 질문에 답을 주지 않았다. 






All of Visions

04. 극단적 독창성Extreme Originality






  마티가 차를 세웠다. 칠이 벗겨진 붉은색 트럭은 보이지 않았다. 땅바닥으로 가라앉는 마티의 숨이 진득진득했다.


  마티는 사무실 문을 열면서 제일 먼저 안의 공기를 맡았다. 서늘한 온도와 결합된 담배 냄새가 났다. 자신의 시선에 대해 며칠째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러스트의 책상에 구두 자국을 찍어 놓고 싶은 심정을 억누르면서 마티가 가방을 던졌다. 


  파일 몇 개가 서류가방에 밀려났다. 마티가 천천히 가방을 들어올렸다. 마티는 어젯밤 7시 30분에 퇴근했으며 그 때만 해도 그의 책상엔 아무 것도 없었다. 마티는 대충 파일을 넘겨보다가 혼자 화를 냈다. 파트너가 남겨 둔 조사 자료가 하나도 반갑지 않았다.


  그의 파트너는 잠을 자지 않고 다만 꿈을 꾼다. 잠을 통해 휴식을 취하고 하루를 준비하는 것조차 너무도 권태롭게 여기는 듯했던 그의 파트너는, 마침내 잠을 자는 시도마저 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발을 뻗으려했다. 평생 꿈을 꿀 수 있는 세계가 바로 그의 지척에 있었었다. 마티는 그의 파트너가 그 기회를 달콤하게 여긴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그 당시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빛의 승리를 장담했던 순간은 다시 잠을 청하기 위한 고군분투로 변모해버린 게 분명했다.


  마티는 잠시 서 있다가 러스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마티는 그것을 러스트의 대답으로 여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폐포를 태우는 담배꽁초가 수풀 사이에 차츰 쌓여갔다.


  러스트는 약한 수면제를 탄 물을 마시면서 동시에 혀 밑에 숨겨 놓았던 알약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그의 온 몸이 비정상적으로 불타고 있었다.


  가만히 서 있어도 고꾸라질 것 같은 상태에서 러스트는 자신의 몸이 한 쪽으로 치우치는 걸 막지 못했다. 러스트가 차에 오르면서 매번 느꼈던 첫 번째 커브였다. 그는 안대 위에 강제로 환영을 펼쳤다. 출발 지점에서 한 번 크게 돌고, 차가 직진을 시작했다. 


  “전화했었는데.”


  러스트는 마티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걸 한참 늦게야 깨달았다. 그는 가까스로 멍청해 보이는 반복을 피하고 마티의 다음 발언을 기다리는 듯 보이는 태도를 취했다.


  “왜?”

  “네가 준 자료에서 물어볼 게 있었거든. 그런데 핸드폰이 꺼져있더라.”


  러스트의 눈동자가 느리게 돌았다. 


  “멜랑콜리안에 있었을 때 전화했나보군. 안으로 들어가려면 핸드폰을 반납해야 해서. 금속 탐지기도 거치지.”

  “별걸 다 하네. 그래도 차 안에서는 안 뺏나보네?”


  러스트는 별달리 부정하지 않았다. 마티는 겉으로는 가볍게 고갯짓을 하면서 그 사실을 단단히 머릿속에 입력해놓았다. 혼자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공간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러스트는 평소답지 않게 마티에게 하려던 질문이 무엇이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가 창가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우울하게 시들어버린 나무들이 러스트가 헤아리는 5분마다 뚝뚝 끊겨 나타났다. 하늘에는 구름 대신 세포가 터져 나가는 모습이 형상화되어 떠 있었고 까만 차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보다 더 절망적인 숲 속을 달렸다. 


  러스트는 두 번째 커브까지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이 한바탕 더 휘청이고 나자 새로운 정보를 흡수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려 애썼다. 수면제와 각성제가 그의 양 팔을 잡고 어서 옆에 앉으라며 소란을 떨어대고 있었다. 러스트는 차라리 꿈을 꾸고 싶었다.


  순간 눈을 감은 러스트의 곁으로 마티가 조용히 다가왔다. 마티가 러스트의 핸드폰을 뒤집었다.  


  러스트가 만들어낸 오솔길이 끊겼다.





  “어, 왔어.”


  러스트는 잠시 멍하게 입구에 멈춰 섰다. 마티가 모니터 위로 머리를 힘껏 빼들고 그에게 눈짓했다. 


  “…아직도 일하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의뢰가 들어와서. 일하러 온 거면 한 번 봐주고.”


  러스트가 마티 쪽으로 걸어갔다.


  러스트는 바깥 환경을 인식하길 거의 포기한 듯한 시각을 흩뿌렸다. 바이스가 스탠드의 밝기를 조정하고 있었다. 그림자에 반쯤 가려진 바이스의 얼굴을 얹은 러스트의 몸뚱이가 의자에 앉았다.  


  “내용이 뭔데.”

  “전에 내가 한 말은 맘에 들었습니까?”


  바이스는 엉거주춤 책상 앞에 앉으려던 자세에서 다시 등을 폈다. 구석에 서 있는 스탠드가 흐물흐물 바이스에게 다가왔다. 


  “시시한 설교더군.”

  “그래서 다음에는 좀 덜 시시한 ‘설교’를 해보려고요. 원래는 연설이라는 표현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만.”


  러스트가 찡그린 미소를 지었다. 그는 가슴을 꽉 쥐고 싶은 욕구를 옷자락을 구기는 행동으로 달랬다.


  “사람들이 네 얘기를 진지하게 믿는다고 생각하나?”

  “이 곳은 믿음이 없으면 올 수 없는 곳입니다. 당신도 그렇지 않습니까.”

  “난 아니야.”


  마티가 오른쪽에 쌓아 두었던 파일 뭉치들을 뒤적거렸다. 마티의 손이 하마터면 멜랑콜리안의 잔을 건드릴 뻔했다. 환상과 현실 모두에게 덤덤한 태도가 움찔하려는 러스트의 손을 막아 세웠다.  


  “상사를 조사해 달라는 의뢰인데, 아무래도 우리가 조금 하다가 경찰에 넘겨야 할 수도 있겠어. 이런 걸 왜 신고를 안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요새 경찰이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한 건지.”


  러스트는 어쩐지 위태로워 보이는 손짓으로 파일 덮개를 넘겼다. 그가 짧게 분석했다. 


  “내부자 거래가 의심된다고.”


  “자기는 조금이라도 상사의 뒤를 캐는 것 같은 질문을 하면 목이 날아간다면서 우리에게 약간의 증거라도 가져다준다면 아주 좋을 거라고 하더군. 찾아보니 요새 벌이는 일이 많기는 하더라고. 근래 북부를 오가는 일이 많아졌고 정치인 한 명을 열성적으로 밀어주고 있는 중이야.”


  러스트는 입술을 달싹이려고 했다.


  “당신은 인류가 퇴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마치 동작 스위치가 눌린 기계와 같이 러스트는 반 정도는 반사적으로 대꾸했다. 그의 이성은 사실 바이스의 물음표만 간신히 인식했을 뿐이었다. 


  “주변에 변수가 없는 독재적 동족은 자연스레 스러지기 마련이지. 너의 그 모더니즘 이론을 들먹이지 않아도 이미 인간은 자신들 스스로 의미를 생산할 능력을 잃어버렸어. 낡아 빠져서는 아무도 뚜껑을 열어보지 않는, 먼지 낀 우편 사서함 같은 인격신에 의존하는 족속들의 훗날이야 뻔하지.”

  “러스트?”

  “당신은 참 독창적인 사람 같습니다, 러스트.”


  러스트는 연거푸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혼란스러워했다. 한 면이 유리창으로 채워진 열린 구조 속에서도 바이스는 성공적으로 자신의 얼굴을 왜곡하고 있었다. 그러나 러스트는 곧 그 생각을 정정했다. 바이스를 왜곡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었다. 


  “당신이 마음에 들어요.”


  러스트는 미간을 좁혔다. 왼쪽 눈에는 바이스가 보였고 오른쪽 눈에는 마티가 보였다. 


  “…러스트?”


  마티가 재빠르게 러스트의 손을 잡았다. 그렇지만 마티의 행동이 약물에 부식되어버린 그의 의식을 받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티는 쓰러진 러스트를 안아 들고 책상 위 핸드폰을 향해 필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멜랑콜리안들은 바이스를 ‘푸른 선구자(Blue Visionary)’라고 칭했다.


  바이스는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순전히 파란색이라는 단어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에 기반을 두고 붙여진 별칭이었다. 우울함 속에서 인류의 미래를 본 그의 업적을 칭송하는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관계없이, 바이스의 눈은 갈색이었다.


  멜랑콜리안들은 자주 축배를 들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들은 자주 멜랑콜리아를 마셨다. 그것은 일종의 안정제로, 인간의 사고력을 급속도로 떨어뜨리면서 기억을 단편화시키는 지독한 약물이었다. 복용량에 따라 몸에 내성이 생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쨌든 그것의 본질은 안정제였기 때문에 각성제와 동시에 복용하는 일은 아주 위험했다.


  멜랑콜리안들이 모이는 장소는 아주 폐쇄적이다. 거기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사람들조차 차 안에서는 잠이 들어야 할 정도이다. 푸른 선구자의 이론에 육체와 열정을 바치는 강도에 따라 그런 과정이 생략되는 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다수의 멜랑콜리안들은 그러한 부분에 크게 관심이 없었다. 


  멜랑콜리안의 수면제를 이겨내고 그들이 감추려 했던 경로를 폭로하고자 한 자는 러스트 콜이 유일했다.


  그런데 사실 그가 멜랑콜리안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그것 이상이었다.


  러스트는 기력 없이 눈을 깜빡였다. 


  머릿속이 깨끗한 거즈로 닦인 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새하얀 천장이었고, 들쑥날쑥한 두근거림이나 현기증도 없이 몸 구석구석이 전부 안정된 상태였다. 러스트가 주의 깊게 시선을 돌렸다. 마티가 그의 옆에 있었다.  


  “깼냐.”


  러스트의 눈꺼풀이 정상적으로 움직인 걸 본 마티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미친 놈.”


  러스트는 화를 내지 않았다. 마티의 말에 아예 근거가 부재한 것도 아니었으며, 가벼운 욕설 정도는 인사쯤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연륜이 러스티로 하여금 평온한 눈짓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네가 왜 쓰러졌는지 알고 있냐?”


  러스트는 눈 주변의 근육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을 반복할 뿐이었다. 마티는 그가 정신은 차렸지만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처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혼자 말을 이었다.


  “세상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안정제랑 각성제를 연달아 먹냐. 거 참 어이가 없어서. 하여튼 뒈지는 방법도 가지가지에요.”

  “마티.”


  이 기회에 그동안 하지 못했던 핀잔을 있는 대로 늘어놓으려던 마티가 멈칫하며 러스트를 돌아보았다. 마티는 평상시에는 염세주의에 습기를 다 빼앗긴 것처럼 보이는 안구에 이종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새로운 빛이 어려 있음을 목격했다.  


  “오늘이 며칠이지?”

  “…21일.”

  “빌어먹을.”


  러스트가 몸을 일으키면서 주삿바늘을 뽑으려 하자 마티가 펄쩍 뛰었다. 


  “뭐야, 미쳤어? 어딜 가려고?”


  이불을 사이에 두고 그것을 밀쳐 내려는 러스트의 손과 이불을 아예 러스트의 몸에 감아버리려는 마티의 손이 교차했다. 러스트가 순간 인상을 찌푸렸다. 


  “바이스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비전을 주입하려고 해.”

  “무슨 개소리야? 바이스는 누군데?”

  “멜랑콜리안이 그들이 사용하는 약물을 퍼뜨렸어.”

 

  러스트는 마지막 어구를 마치 자신에게 속삭이듯 발음했다.


  “하루 전에.”





  러스트가 약물 남용으로 인한 의식을 잃어버리고, 나아가 이틀이라는 시간마저 통째로 잃어버리기 몇 시간 전에 그는 바이스를 만났었다. 바이스는 러스트를 불러 강력하고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부탁이 있습니다, 러스트.”


  두 사람은 의자보다는 출입구와 가까운 곳에 서 있었다. 


  “내가 전에 당신이 참 독창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당신은 보통 사람들은 생각해 내지 못한 여러 가지를 구상하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무슨 대단한 일을 부탁하려고?”

  “멜랑콜리아를 내가 알려주는 사람들에게 전해줬으면 합니다.”


  러스트는 진흙 속에서 불씨가 피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러스트가 바이스를 보았다. 이제 바이스의 얼굴은 그런대로 러스트의 눈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바이스는 늘 그러했듯이 그 자신에 대해 일말의 의심도 갖지 않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전달만 하면 되는 건가?”

  “네. 그리고 그 쪽에서 보내주는 것이 있으면 받아 오면 돼요.”


  바이스가 쪽지를 가지러 책상 근처로 이동했다. 러스트는 그림자 속에 머물기로 했다. 문득 그는 바이스가 루이지애나 경찰관들도 잘 알지 못했던 90년대의 자신을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간단한 일 치곤 서론이 길었군.”


  바이스의 입술 사이로 묘하게 웃는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이건 나에게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해야만 해요.”


  바이스는 직접 러스트의 손에 종잇조각을 쥐어주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릴 리가 없다는 강력한 확신이 모든 것을 퇴색하게 만들어버려서 러스트가 가장 파악하기 힘든 경우에 속했다. 


  “당신의 독창성은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당신을 구제해줄 테니까.”


  그래서 러스트는 바이스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안의 장소에 거주하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는 저택 안을 돌아다니며 창문을 빠짐없이 열었다. 진리에 들떴던 열기 어린 숨들이 너무나도 쉽게 사라져갔다. 바이스는 힘껏 커튼을 걷었고 맑은 공기가 내부로 들어오게 했다. 멜랑콜리안들의 집합지는 일반적인 저택이 되었다.


  창문을 다 열고 나자 그는 반갑게 햇빛을 맞이했다. 남부의 태양이 언제나 사람에게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따갑지 않고 적당히 따뜻한 빛을 온몸에 두르며 바이스는 소박한 품성을 지닌 이처럼 미소를 지었다. 바이스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자신이 사는 집을 환기시키고, 잠깐 햇빛을 즐기며 화창한 날씨에 만족해하는 그의 뒷모습은 몹시도 평범했다. 그의 입술 역시 러스트 콜을 향해 도덕의 비(非)실재를 주창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따사로웠다.





  “생각해 봐요, 러스트.”


  맞잡은 두 사람의 손이 러스트의 재킷과 가까워져갔다.


  “우리가 하는 말들은 어떻게 해서 의미를 갖고, 심지어는 권위를 갖기도 하는 겁니까? 그 말 뒤편에 대체 무엇이 존재하길래? 왜 누군가의 말은 인정할 수 있고, 또 누군가의 말은 단순한 지껄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겁니까?”


  러스트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바이스가 어차피 정답을 정해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는 많은 것을 아는 편이었다.


  “어떤 말이 사실을 등에 업고 있으면 그걸 부정하기가 힘들어집니다. 누가 사실을 뒤집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그 사실이 발생하지 못하게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의미를 지탱하는 건 사실이에요. 사실에 바탕을 두지 않은 말들은 존중받을 필요가 없어요. 무의미한 개소리니까.”


  러스트는 자신이 각성제 반 알을 더 삼키지 않은 걸 실수로 여겼다. 정신이 침식하는 속도가 전보다 빨랐다. 바이스가 러스트에게 주입한 약물의 양을 늘린 게 분명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러스트. 세상에 ‘도덕적 사실(Moral Fact)’이라는 건 없어요.”  


  바이스가 러스트의 손을 주머니에 넣어주었다. 그의 손등이 러스트의 재킷에 숨겨진 약병의 곡선을 스쳤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독창성이라는 게 이해가 됩니까?”


  문이 열렸다. 러스트가 바이스의 방에서 나갔다.


  러스트는 기어코 마티의 차에 탔다. 두 극단 사이에서 찢겨져 나가던 그의 몸을 치유해주던 고귀한 액체가 방바닥에 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