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eDetective/마티러스트] All of VIsions Ⅲ

- True Detective 2015. 2. 11. 11:09 posted by Jade E. Sauniere




- True Detective, Martin Hart & Rustin Cohle

- Written by. Jade


All of Visions

05. 선홍의 비전Crimson Vision






  마티는 운전대를 잡은 채 자신이 취하고 있는 경로가 옳은 것인지 몇 번이고 자문했다. 마티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눈을 감았다가 뜨는데 갈수록 오랜 시간을 소모하고 있는 러스트의 눈은 살짝 먼지가 낀 차창보다 더 탁했다. 러스트가 다시 눈을 닫았다. 


  2분 뒤 둘은 러스트가 건네받았던 주소지에 다다랐다. 러스트는 초 단위로 꿈이라도 꾸는 모양인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마티는 진지하게 차를 돌릴 것을 고민했다. 아쉽게도 러스트가 곧 정신을 차리고는 안전벨트를 풀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러스트가 엉성해 보이는 목재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마티가 유리창이 뚫어져라 그의 등을 주시했는데 러스트는 어떤 비틀거림 없이 무사히 마티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티는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마티는 핸드폰으로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것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마티는 욕심을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러스트가 멜랑콜리안의 집결지로 들어가고 나서 핸드폰을 반납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마티는 그의 핸드폰에 발신 장치를 부착해서 러스트가 도착하는 최종적인 위치 정보만을 얻기로 했다. 그런데 하필 마티의 발신 장치가 제 기능을 수행한 첫 날에 러스트가 의식을 잃는 바람에 마티는 자신이 파트너의 뒤를 캤음을 거의 잊고 있었다.


  마티는 손 안에서 핸드폰을 계속 굴리다가 창밖을 훑었다. 액정의 한 구석을 누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티는 건물이 별 낌새 없이 잠잠하다는 걸 두 번이나 체크한 뒤에 미리 설치해 두었던 프로그램을 작동시켰다. 러스트의 발자취가 그의 작은 화면 안에 담겼다.


  마티가 눈에 힘을 주고 지도를 들여다보았다. 그에게도 익숙하지 않은 곳이었다. 마티는 조수석의 서랍 속에서 수첩을 꺼내 주소를 적어놓으려다 러스트가 자신의 소행을 눈치 챌 빌미를 제공하게 될 것 같아 일단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그는 대신 방향 잃은 손을 자신의 이마로 가져다댔다. 찜찜한 기분이 마티의 목 아래를 콕콕 찔렀다.


  마침 바깥에서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딱 봐도 쫓겨난 모양새인 러스트가 다리를 펴고 있었다. 마티는 입술을 말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별로 좋지 않게 끝났나 보네.”


  러스트는 머릿속을 지혈하듯이 관자놀이를 누르며 말했다.


  “이미 약을 소규모 업자들에게 넘겼다더군.”

  “그럼 벌써 산 사람이 있겠네?”

  “그걸 알아봐야지.”


  러스트는 팔을 내리자마자 침착하면서 자신만의 이론을 확고히 다져놓은 수사관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티는 일단 차를 돌렸다. 


  “…오늘 안에 병원에 들어갈 생각은 있냐? 너 아직 퇴원한 거 아니거든?”

  “난 괜찮아.”

  “웃기네.”

  “넌 어디에서 누굴 찾아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거야 네가 알려주면 되지. 아픈 사람은 가서 잠이나 자고, 멀쩡한 사람은 돌아다니면서 일하고. 얼마나 상식적이냐.”


  러스트는 대꾸할 필요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마티는 저도 모르게 운전대를 잡고 있는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네 행동거지에 비해서 네가 지금까지 숨이 붙어있다는 게 참 놀라운 일이긴 하다만, 그게 평생을 가진 않는다는 것만 알아둬라. 조금만 재수가 없었어도 넌 심장 마비로 죽었어.”


  러스트는 굳어버린 조각 같았다. 마티는 러스트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고 있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결국 러스트가 함께 했던 많은 파트너들과 다를 바 없이 혼자 성을 냈다. 


  “빌어먹을, 약물 과용으로 죽고 싶으면 그렇게 하든가.”


  러스트는 마티가 굳건히 정면을 노려보는 순간을 골라서 그의 측면에 시선을 주었다. 러스트는 그런 방식으로 죽고 싶지는 않다는 말을 하려다가, 덮쳐온 어지럼증을 수습하는 데 신경을 쏟은 나머지 입을 여는 걸 잊어버렸다.





  바이스는 러스트에게 그가 처음으로 가야 할 약속 장소만을 알려줬을 뿐 다른 것에 대한 정보는 준 적이 없었다. 마약상과 구매자 사이의 연결 고리를 수색하고 추려낸 건 오직 러스트의 판단력이었다. 마티와 러스트는 부지런히 골목이나 일반인들이 기피하는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멜랑콜리아를 팔았을 법한 사람들을 만났다. 


  결론적으로 두 사람은 멜랑콜리아를 하나도 회수하지 못했다.


  멜랑콜리아는 체내에 흡수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 복용인에게 뛰어난 수준의 환각을 선사하는 약물이었다. 시험 삼아 멜랑콜리아를 맛본 상인들은 그것의 상품 가치에 만족했고, 새로운 자극을 원하는 고객들에게 멜랑콜리아를 추천했다. 멜랑콜리아는 이미 두 사람이 추적할 수 없는 곳으로 스며들었으며, 상인들은 기를 쓰고 자신에게 돈을 벌어다 줄 제품을 넘겨주려 하지 않았다.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잠겨가는 시각임에도 두 사람은 길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마티가 먼저 고요함을 깼다.  


  “이제 그만 경찰에게 알리는 게 낫지 않을까?”


  러스트는 마티의 말을 분명히 들은 것 같았지만 그를 돌아보지는 않았다. 마티는 조금 더 자세하게 자신의 의견을 펼쳤다. 


  “그 약이 퍼지는 게 문제라면, 마약상들을 싹 처넣어서 약을 못 팔게 하면 될 거 아냐.”

  “바이스의 목적에 비해 너무 한정적이야.”

  “뭐?”

  “마약상만 가지고는 그의 목표를 이룰 수 없어. 그가 생각하는 집단은 훨씬 커. 바이스가 원하는 건 마약이라곤 해본 적도 없을 사람들까지 데리고 이 땅에서 탈출하는 거니까.”


  몸이 무거운 남쪽의 태양이 자신의 둔함을 물결처럼 퍼뜨리고 있었다. 러스트는 그것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실낱 속에는 아무 것도 숨겨져 있지 않았다.


  러스트는 바이스를 생각했다.


  바이스는 자신의 방식대로 모든 사람들을 계몽시켜 그들을 선택받은 땅으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 움직임은 자유롭고 이성적이다. 그들 모두는 몇 가지 이유를 들어 인류가 걷잡을 수 없이 타락할 것임을 확신하고, 그것이 발생할 무대와 조건으로부터 벗어난다. 


  탈출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신이었다. 그리고 그 확신은 멜랑콜리아가 만드는 것이었다. 


  바이스는 확고부동한 도덕을 믿지 않는다. 러스트는 비관주의를 넘어 절망을 위한 절망만을 추구하는 자신의 머리에 덧입혔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을 볼 수 있는지 추론했다. 러스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다가 마티의 뒤통수를 응시하게 되었다.


  마티 하트는 자신이 맡은 바를 허투루 하는 부류는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남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죄를 저질러 봤으며 그로 인한 후회도 겪었었다. 한편 마티 하트는 동료를 보호하기 위해 제일 먼저 앞장설 수도 있었고 그런 경험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마티 하트는 그의 파트너에게는 꽤 좋은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한 판단은 도덕이라는 기준이 없으면 발생할 수 없다. 러스트는 자신의 곁에 있는 가장 편리한 예시를 통하여 바이스의 시각을 학습할 수 있었다. 바이스는 가정적 상황에서조차 마티를 거리에 나동그라진 패배자들과 다르게 생각하지 못할 것이었다.    


  “마티.”


  러스트가 자신의 파트너를 불렀다. 


  “병원에 가야겠어.”

  “…진짜로?”


  안 그래도 러스트를 병실에 데려다 묶어둘 심산이었던 마티가 반색하며 말했다. 러스트는 정말로 차 문의 손잡이를 잡은 상태였다. 


  “주 경찰 말고 더 관할 구역이 넓은 사람이 필요할 거야. 그러니까 날 병원에 데려다 준 다음엔 사무실로 돌아가.”


  유리가 반짝거렸다. 햇빛의 중심이 사라지고 있었다.


  “사무실에….”


  중심이 사라진다. 러스트는 그것을 아쉽게 여겼다. 그가 살아 있는 이성과 삐걱대는 육체 사이의 거리감을 완벽하게 좁히지 못했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러스트의 계산에는 오차가 있었다.


  그 불완전함이 러스트의 의식을 뺏어갔다.





  마티가 사무실의 전등을 켰다. 그는 혼자였다.


  마지막에 병원에 돌아가겠다고 한 걸 보면 그의 파트너는 극단적으로 무모한 인간은 아니었다. 러스트는 분명히 극단적인 두 약물에 시달렸던 심장이라든가 신경이 과부하를 견디지 못할 걸 짐작했다. 허나 이번에도 그 약간의 부족함이 저절로 채워질지는 알 수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의 책상으로 갔다. 러스트는 마티에게 무엇이 필요할지 정확하게 말해주지 못했다. 그런 고로 마티는 러스트의 책상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서랍 안은 무척 간소했다. 마티는 괜스레 서랍 끝에 저장되어 있던 담배들부터 압수하고 혹시 서랍 밑바닥에 이중 장치가 있는지 더듬어보았다. 러스트는 의외로 숨기는 것이 없었다.


  몇 가지 메모들이 있었지만 크게 중요해 보이지는 않았다. 마티는 한바탕 머리를 긁적이다가 자신이 확인하지 않은 아주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마티가 책상 위의 작은 책꽂이에서 검은색 공책을 뽑았다. 루이지애나 경찰국에서 러스트와 함께 일을 했을 때도 들춰본 적이 없었던 그의 노트였다.


  마티는 주저하지 않고 표지를 넘겼다. 색깔 없는 그림들이 건조한 냄새를 풍겼다. 그 중에 마티의 눈길을 붙잡아 둔 것은 완성되지 않은 그림들이었다. 


  그 그림들에는 간단하게나마 색이 들어가 있었다. 아주 자세해서 실제로 누군가가 가지고 있을 것 같은 갈색 눈동자가 많이 보였고 압축된 실루엣도 더럿 있었다. 그것들은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마티가 모르는 얼굴의 반쪽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러스트가 사건을 위해 그리는 그림은 대개 기록이나 영감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에, 마티는 어떤 의무감마저 느껴지는 단 하나의 얼굴을 의아하게 여겼다.


  다음 장에서 마티는 더욱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메모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마티는 그걸 보면서 절로 하나의 영상을 떠올렸다. 그것은 한 번에 재생되지 않고 중간에 끊겼다가, 정지된 부분부터 다시 시작되고, 한 번 영상이 흘러가는 시간은 길지 않으나 어떤 완결점이 존재하는 영화 같은 경로였다. 그걸 보고 지도 하나를 그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마티는 공책을 끝까지 다 본 후에 경로의 현실성을 시험하기로 정하고 공책을 넘겼다.


  더 이상 명쾌할 수 없는 러스트의 메시지가 있었다. 마티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적혀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수화음이 울리는 동안 마티는 제발 자신이 도저히 추리할 수 없는 암호문만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윽고 마티는 그가 예상했던 것과 정 반대의 것을 들었다.


  —네, 설리반입니다. 


  마티는 순간적으로 반문했다.


  “…누구요?”

  —FBI 특수 요원 빌 설리반입니다. 누구시죠?


  마티는 그제야 러스트가 말한 ‘관할 구역이 넓은’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설리반 요원은 의외로 마티에게 이것저것을 캐묻지 않았다. 러스트 콜의 공책에서 번호를 보고 연락했다는 말을 듣자 그는 곧바로 루이지애나 행 비행기를 예약하겠다고 답했다. 마티는 솔직하게 놀라버렸다.


  “당장 오겠다고요?”


  —지금 비행편을 검색하고 있는 중입니다. D.C에서 루이지애나까지는 2시간 30분이면 갈 수 있어요. 게다가 콜이 의식 불명이라면서요? 더더욱 시간 낭비를 할 수 없는 사건 같습니다만.


  “…러스트를 잘 압니까?”

  —그냥 과거가 있었다고 해두죠. 1시간 40분 뒤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착 시간에 맞춰서 알렉산드리아 공항에 나오실 수 있나요? 


  마티는 모든 공무원의 귀감이 될 수 있을 만한 연방 요원의 추진력에 입을 벌렸다. 설리반이 조금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어버려서 얼떨떨한 기분은 더욱 오래 갔다. 마티는 설리반 요원을 직접 만나게 되면 러스트와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상세히 물어볼 것임을 다짐했다.





  러스트가 있는 병실은 적막했다.


  그의 옆자리를 진득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마티 하트뿐인데, 마티는 러스트가 내준 반쪽짜리 과제를 해결하려 동분서주하고 있었으므로 러스트의 병실은 조용할 수밖엔 없었다. 담당 간호사가 러스트의 바이탈을 체크하려고 힐끗 방문을 열려면 한참 시간이 지나야 했다.


  러스트는 떨림도 없이 가만히 누워 있었다. 꿈을 꿀 기력이 남아 있는 의식도 없어서 그는 강제적으로 잠을 자고 있었다.


  러스트 주변은 한동안 캄캄한 밤처럼 잠잠했다. 





  마티는 비행기가 곧 이륙할 거라는 설리반 요원의 문자를 받았다. 들었던 대로 빌 설리반 요원이 있는 워싱턴 D.C에서 루이지애나에 오기까지 걸리는 비행시간은 약 2시간 30분이었다. 마티는 그동안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생산적인 일을 골랐다.


  마티가 책상에 러스트의 노트와 깨끗한 종이 한 장을 펼쳐놓았다.


  시작점의 위치는 굉장히 정확했다. 또한 마티가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마티는 조금 신기해하면서 멜랑콜리안이 러스트를 데려가는 지점을 종이 맨 아래쪽에 동그랗게 그렸다.


  첫 번째 커브 이후 러스트가 길을 설명하는 방식이 급속도로 달라졌다. 이를테면 10분을 달려서 왼쪽으로 돌라는 말을 약자를 동원해 ‘직진 5분, 직진 5분, 왼쪽으로 화살표(S5min*2, left↰)’라고 적어 놓는 식이었다. 마티는 눈썹을 으쓱하면서도 부지런히 러스트가 가르쳐주는 대로 지도를 그렸다. 종이의 왼쪽 꼭짓점에서 출발한 마티의 펜이 어느덧 중간까지 뻗어나갔다.


  “…음?”


  마티가 러스트의 노트를 펄럭였다.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그의 펜이 까만 자국을 남겼다. 


  마티는 러스트의 흔적을 해석할 수가 없었다. 후반부에 가서 러스트는 무슨 까닭인지 글자가 아닌 일종의 상징물이라 할 수 있는 그림으로 길을 표현하고 있었는데, 마티의 눈에는 몇 세기 전에 사용되었던 암호문 같이 보였다.


  “젠장, 대체 이게 무슨 뜻이야?”

 

  혹시 다른 페이지에 힌트로 삼을 수 있는 게 적혀있지는 않을까 노트를 뒤적거려봤지만 수확은 없었다. 마티가 뒷머리를 문질렀다. 


  마티는 8분쯤 고민하다가 펜을 놓았다. 아직 2시간 30분은 흐르지 않은 상태였다.


  갑자기 어떤 묘책이라도 떠오른 듯이 마티가 그리다 만 지도를 들고 일어났다. 마티는 루이지애나 지도를 표시해 주고 있는 인터넷 페이지를 모니터 한가득 펼친 다음 출발점의 주소를 입력했다. 그는 자신의 손끝을 대표자로 삼아 러스트가 안내하는 길을 한 번 다녀올 셈이었다.


  그런데 문득 마티는 러스트가 남겨준 것들에서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뽑아냈다. 일관적이지 않은 설명법이 지배하는 페이지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고 있는 것이 비로소 마티에게 의아함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심지어 마티는 왜 출발 장소가 러스트와 멜랑콜리안의 차량이 만나는 곳인지에 관해서도 궁금증을 품었다.


  그에 대한 해답은 마티가 다섯 번째로 마우스 포인터를 움직였을 때 드러났다. 마티가 중얼거렸다.


  “이런 미친 놈.”


  마치 일부러 숨겨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아는 바를 있는 그대로 표현한 것 같기도 한 러스트의 경로가 멜랑콜리아의 본거지에 이르는 길을 그리고 있음을 알게 되자 마티는 더 이상 사무실에 앉아있을 수 없었다. 마티는 러스트의 노트 안에 완성하지 못한 지도를 끼워 넣고 핸드폰을 챙긴 후에 사무실을 박차고 나왔다. 그의 핸드폰에는 러스트를 추적하면서 쌓아 놓았던 데이터가 아직 저장되어 있었다.





  존재하는 모든 시계가 같은 숫자를 가리키고 있어도, 그 순간에조차 세상에는 걷는 사람과 달리는 사람, 날아다니는 사람이 있다.


  마티의 차는 치열하게 달리고 있었다. 전화기와 핸들 모두를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완전히 손바닥에 붙인 마티는 누군가 조금만 등을 밀어줘도 어딘가로 튀어나갈 것처럼 보였다. 바퀴가 거칠게 선회할 때마다 자잘한 입자들이 흩어졌다.


  빌 설리반은 비행기에 탑승 중인 상태였기에 날아다니는 사람에 속할 수 있었다. 설리반은 서류들을 주의 깊게 읽으면서 손가락을 두드렸다. 그의 앞쪽에 달린 작은 모니터에는 비행 정보가 반복해서 나타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가 빠르게 그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멜랑콜리안들은 급한 기색 없이 걷고 있는 자들이었다. 바이스는 멜랑콜리안들이 늘어선 차에 탑승하기 직전 한 번씩 그들과 접촉했다. 그들은 꼭 바이스의 의지를 각지로 전달하기 위해 길을 떠나는 사도들 같았다. 바이스는 그들을 배웅하던 자세 그대로 저택의 출입구에 서 있었다.


  마티는 열성적으로 속도를 높여댔고, 바이스는 차분했으며 설리반은 아직 지상에 떠도는 정보들과 분리되어 있었다.


  —승객 여러분, 이 비행기는 잠시 후 알렉산드리아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좌석을 바르게 해 주시고 안전벨트를 착용해주시기 바랍니다.


  안내방송을 듣자 설리반이 자세를 조정했다. 서류는 잠시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활자에 집중되던 신경이 잠시 허공을 떠도는 듯하더니 천천히 하강하는 비행기에 집중되면서, 설리반은 자신의 발끝이 내려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조금 뒤에 설리반은 발끝이 부드럽게 내려가는 기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일종의 당황스러움에 사로잡혔다.


  마티가 게이트에 도착했다는 문자를 기대했던 설리반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며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마티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온 것은 사실이었고, 그것이 마티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도 맞았다. 다만 메시지의 내용이 공항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 뿐이었다.


  —조사하러 갑니다. 아래에 적힌 주소로 재주껏 와요.


  설리반은 마티가 러스트 콜의 안 좋은 측면을 배웠다며 이마를 짚었다. 설리반은 택시 정차장 쪽으로 뛰었다.





  마티는 목적지와 약간 거리를 남겨두고 차를 세웠다.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줄지어 있는 남부의 나무와 풀숲들 덕택에 차를 숨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마티는 핸드폰의 소리를 꺼놓고 총과 쌍안경을 챙겼다. 설리반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마티는 지금쯤이면 그가 루이지애나에 도착했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누군가가 올 거라는 사실만으로도 마티는 슬그머니 움직일 수 있었다.


  방향을 꺾을 것 없이 직진 경로만을 남겨두고 멈춰선 것이었기 때문에 마티는 앞으로 곧게 나아갔다. 마른 풀들이 그의 날쌘 신발코를 맞고 휘청거렸다. 마티는 숨도 한 번 고르지 않고 빠르게 발을 놀리다가 저택의 지붕 끝자락이 보이는 지점에서 몸을 낮췄다.


  겉으로는 꽤나 멀쩡해 보이는 집이었다. 마티는 총과 쌍안경 중에서 무엇을 잡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일단 쌍안경을 들어올렸다. 사립탐정이 가지고 다녀야 하는 물건들 중에서도 쌍안경은 아주 중요하면서 값비싼 위치를 점한다. 마티는 새삼 자신이 몇몇 장비에 대해서는 결단력 있게 돈을 썼음을 자랑스러워했다.


  마티는 천천히 옆으로 움직이면서 저택의 외관을 훑었다. 척 봐도 무시무시하고 음흉한 것은 눈에 띄지 않았다. 수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티는 설리반을 기다리지 않고 내부에 한 번 들어가 볼 것인지 고심했다. 마티와 저택 사이에 놓인 거리가 차근차근 줄어들었다. 


  순간 쌍안경에 잡히는 인영이 있어 마티가 급히 상체를 수그렸다. 무장하지 않은 평범한 남자였다. 마티가 렌즈의 배율을 조절하면서 발바닥을 앞쪽으로 비볐다. 


  마티의 눈썹이 쌍안경 밖으로 튀어나왔다. 남자는 평범했지만 몹시도 낯익었다. 마티는 러스트가 공책에 그렸던 섬세하고도 집요한 곡선과 다른 여러 그림들이 모두 눈앞의 남자를 겨냥했었다는 걸 깨달았다. 마티는 자신의 총을 믿고 조금 더 접근했다. 남자의 눈동자를 자세히 보기 위함이었다.


  부드럽고 정겨운 나무의 살갗을 닮은 갈색 눈동자가 마티의 시선에 잔영을 남겼다. 


  마티는 남자가 저택을 떠나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마티가 쌍안경을 내렸다. 이제 총을 쥐어야 할 때였다.





'Flickers' by Son Lu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