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Carol Marcus
- Written by. Jade
To My Vulnerable Spirits
캐롤은 집에 들어와서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왼쪽에 정리해 둔 남성용 구두는 그녀의 아버지가 선택할 법한 스타일이 아니었다. 구두의 주인이 그녀의 집에 출입하는 이유는 사실 한 가지였는데, 인정할 수는 있으나 한편으로는 신경 쓰고 싶지 않은 이유라 캐롤은 묵묵히 신발을 벗고 가방을 내려놓았다. 방음 시설은 철저하게 준비된 집이라 남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의 집이 자랑할 만한 음향 장비와 늘 새것처럼 반짝거리는 서랍장, 고상함을 자아내는 장식품들이 고정된 자리에서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캐롤은 그것들을 모두 지나쳐 지하로 내려가는 통로를 바라보았다. 얼마 되지 않는 계단을 내려가면 그녀도 애용하는 공간 하나가 나온다. 캐롤은 아슬아슬하게 지하의 그림자를 비껴가 주방에서 손을 씻었다. 온수가 나오는 방향으로 돌아간 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캐롤의 손을 저 아래 지하 공간과 충분히 어우러질 수 있는 온도로 덥혔다. 아침에 둥그런 빗으로 예쁘게 빗었던 금발이 뺨을 향해 흘러 내려왔다. 캐롤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지만, 캐롤은 어떤 노래에 이끌리듯이 아래로 내려갔다.
열 개도 되지 않는 계단을 걸어왔을 뿐인데 빛이 줄어들었고 소리는 커졌다. 캐롤은 세 발자국이면 다 훑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 가만히 놓아 둔 겉옷을 보았다. 푹신한 재질로 덮여 있는 문만이 소리와 캐롤을 가로 막은 상황에서, 캐롤은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검은 재킷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문을 밀었다.
드러난 것은 녹음 장비도 없이 피아노와 몇 종류의 간단한 가구들만 놓여 있는 방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곳 때문에 마커스라는 성을 달지도 않은 남자가 캐롤의 집에 들어올 수 있었다. 악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그 풍경과 걸맞은 피아니스트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를 모르는 사람이 드물 정도로 유명했다. 여전히 그의 집에 피아노가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인물이기도 했다. 말하자면 캐롤의 집에 그의 연습실이 위치해 있는 셈이었다.
캐롤은 조심스러운 기색도 없이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문이 열린 순간부터 연주는 중단된 상태였다.
"연습 중이었나요?"
"그다지. 그냥 손을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야."
캐롤은 불편하게 얼굴을 찡그렸다. 방금 전까지 그가 연주하고 있었던 곡은 다른 사람들이 머리칼과 땀을 휘날리면서 쳐야 한다는 종류였다.
"매번 그런 식으로 손을 푸는 것도 어려울 것 같은데요."
남자는 캐롤을 바라보지 않고 피아노의 하얀 건반을 손끝으로 쓸고 있었다. 부드럽고 애정이 느껴질 법한 동작이었으나, 캐롤은 그것이 몇몇 사람이 손톱을 물어뜯는 버릇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걸 알았다. 적어도 존 해리슨은 정성스럽게 피아노를 어루만져 줄 부류가 아니었다.
"…잔소리를 하러 온 거라면 이만 나가지 그러나."
"나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사람이에요."
"내 음악을 들을 권한은 없지."
"사람 신경 긁는 오만함은 어디서나 몸을 사릴 줄 모르는군요."
존 해리슨은 입으로만 짧게 웃었다. 캐롤의 말을 부정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튼, 맨날 그런 곡으로 손을 풀었다가는 나중에 건반 하나 제대로 누르지 못하게 될 거에요."
자신도 종종 연주해야만 하는 피아노를 상하게 할까봐 겁난다는 핀잔은 섞지 않았다. 캐롤의 아버지가 여전히 피아노를 들여 놓을 수 없는 집에서 사는 그에게 연습실을 내어주겠다는 말을 한 뒤 제공된 곳이었다. 그 피아노는 캐롤의 것이라기 보단 존 해리슨의 것에 가까웠다.
피아노 한 대 대신에 세상의 모든 곡을 가진 것 같은 피아니스트가 눈동자를 올렸다.
"당신은 날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로 아는데. 그저 한 번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면 내가 피아노를 시험해보는 곡이 부담스럽기라도 한 건가?"
캐롤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모든 면모에서 영악한 존 해리슨은 그녀의 속내를 알 만 하다는 것처럼 웃었다. 피아노 연주자로서는 커다란 강점이라고 할 수 있는 긴 손가락이 건반 사이를 사뿐사뿐 건너갔다. 존 해리슨은 고개를 내리고 검은 건반의 끄트머리를 만졌다.
"어차피 다 연습곡이라는 부제가 붙은 곡들이지 않나."
그는 살짝 짜증이 난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정도 소품들이 공연의 주요 프로그램으로 떠오른 것도 사실 난 못마땅해."
캐롤은 빠르게 반박했다.
"피아노 독주곡의 종류가 그렇게 다양한 건 아니잖아요. 그리고 그것들은 단순한 연습곡이 아니에요."
"그렇게 들리나?"
"…물론이죠. 가령 쇼팽이나 리스트의 에튀드들, 이것들을 가벼운 연습곡이라고 치부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요? 그 음악 하나에 정경과 섬세함과 기교와 아름다움이 들어있어요. 함부로 다룰 수 없는 곡이죠."
체임버 홀에서 조금씩 경험을 쌓고 있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젊은 피아니스트는 자극을 받은 듯이 바쁘게 낱말들을 쏟아냈다. 아직도 어떤 작곡가나 음악가를 동경해 음대로 들어온 학생 같기도 했다. 캐롤은 저도 모르게 커졌던 눈동자를 황급히 수습하고는 입술을 말았다. 존 해리슨이 잠깐 눈을 감았다.
"누굴 더 좋아하나?"
"뭐라고요?"
남자는 살짝 미간을 좁힌 채 책장 앞에서 시간을 때울 만한 책을 찾는 것만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방금 언급한 두 작곡가 중에서 누굴 더 좋아하냐는 뜻이었다."
"이상한 질문을 하는군요. 개인적으로는 쇼팽을 더 좋아해요."
눈을 뜬 해리슨이 자신의 팔을 치웠다.
"옆에 앉아 보겠나."
캐롤이 한 쪽 눈썹을 크게 올렸다.
"말을 제대로 알아듣질 못하는군. 내 옆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캐롤은 해리슨을 수상쩍게 바라보면서도 의자의 남은 구석에 엉덩이를 붙였다. 피아노 주변을 반쯤은 지루하게 돌아다니고 있던 그의 양 손이 예사롭지 않게 굳었다. 캐롤은 존 해리슨이 연주를 준비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갑자기 존 해리슨의 시선이 얼굴에 닿는 바람에 캐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불어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가락이 느릿하게 건반을 누르고 있었다. 약간의 도입부만으로도 곡의 제목을 알아버린 캐롤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뭐하는 거예요, 건반을 봐야…."
그러나 존 해리슨은 계속 캐롤을 보았고, 그 와중에 그의 두 번째 손이 올라갔다. 공연히 마음이 급해진 캐롤이 억지로 그의 시선을 돌려놓으려고 할 참이었다.
갑자기 그녀의 눈동자와 양 팔에 내려앉는 차가운 느낌이 있어 캐롤은 움직이지 못했다. 시야를 가리고 싶을 정도의 찬바람이 훅 지나간 것만 같았다. 존 해리슨은 무심하게 끊임없이 가라앉고 솟기를 반복하는 건반을 보다가 가끔 관찰하듯 캐롤을 힐끗했다. 존 해리슨은 난방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 방 안에 있는데, 캐롤 혼자 현관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으고 겨울의 찬 공기를 맞는 듯한 모양새였다.
존 해리슨이 분명히 자신의 손을 보라고 말했다. 반면에 캐롤의 두 눈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색깔이 가득한 하늘을 바라보듯 멀리 떠나 있었다. 그는 캐롤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 그녀를 몇 초 안에 눈이 떨어지는 어딘가로 밀어버리는 것이 그의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연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자를 챙겨야 하며 리듬을 잡아내야 했다. 실로 존 해리슨의 손은 빨라지기도 했고 속도를 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해리슨이 느긋하게 고개를 움직이는 탓에 피아노 주변의 시각적이고 청각적인 자극들이 기를 펴지 못하고 있었다. 캐롤은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수준으로 가까워진 해리슨의 얼굴을 보고 놀랐다. 그녀의 아버지가 모으는 장식품보다 더 값비싸 보이는 청록색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존 해리슨은 캐롤을 똑바로 보면서 곡을 마무리 지었다. 캐롤이 다시 온실 안에서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뭘 한 거예요."
해리슨이 허리를 살짝 돌려 캐롤과 마주보았다.
"당신이 연습곡 그 이상이라고 칭송한 것들이 정말로 연습용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준 것이다."
캐롤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내 옆에서 직접 보고 들었을 테니 별다른 설명은 필요하지 않겠지."
"그러고도… 그러고도 당신이 피아니스트라고 할 수 있나요?"
존 해리슨은 몰랐겠지만 그는 캐롤이 정말로 좋아하는 곡을 밑바닥으로 떨어뜨렸다. 캐롤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해리슨을 맹렬히 노려보았다. 존 해리슨은 방금 행동이 틀림없이 눈물을 밀어내려는 얄팍한 수작이었을 거라 생각했다.
"내가 남들에게 인정을 받고 있기 때문에 너도 내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이 아닌가? 네 아버지는 나보고 너에게 영감과 이상의 원천이 되라고 말하면서 나를 이 안으로 불러들였어."
"당신은 방금 그 연주로 그 곡의 작곡가는 물론 그것을 연주하고 녹음한 수많은 피아니스트들을 모욕했어요!"
"그것 참 안타까운 일이군. 하지만 그들에게 낯선 일은 아닐 거야."
캐롤의 빨개진 눈이 더 감상적인 눈빛을 흘려대기 전에 존 해리슨은 내치듯 내뱉었다.
"여기는 콘서트홀도 아니고 관객도 없지. 나는 어떠한 준비를 하고 방금 곡을 친 것이 아니야. 그 정도로 형편없이 가벼운 환경 속에서 흘러나온 곡에서조차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들은 내가 연주회를 가질 때마다 손목을 내려치고 싶을 것이다."
캐롤은 되는 대로 의자의 모서리를 부여잡았다. 의자를 덮은 쿠션은 그녀의 손에 밴 땀을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당신은 그 작곡가가 원했을 방식으로,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방식으로 연주할 수 있잖아요. 왜, 왜 그렇게 하지 않죠?"
해리슨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캐롤은 그가 그림자 뒤에서 조소를 짓는 걸 똑똑히 보고 말았다. 캐롤은 순간적으로 존 해리슨의 팔을 잡아당겨 그의 상체를 바로 세웠다.
"내가 당신만큼의 재능과 능력을 가졌다면 나는 절대로, 절대로 이런 식으로 피아노를 다루고 악보를 난도질하지 않았을 거예요! 당신은 그 위대한 재능을 당신의 우월함을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에 그치지 않아요. 당신은 진정한 예술가가 아니에요."
인상을 찡그린 존 해리슨이 낮게 물었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군."
"뭐죠?"
"내가 왜 음악을 한다고 생각하지?"
캐롤은 어떻게 해서든 대답을 지어내 보려다가 입만 벙긋거리고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존 해리슨은 눈살을 좁히면서 말했다.
"내가 진정한 예술가 같은 소리를 듣고 싶어서 피아노를 치는 줄로 착각하는 건가? 내가 피아노를 선택한 이유는 그것이 내가 제일 완벽하게 다룰 수 있었던 악기였기 때문이야. 그게 아니었더라면 나는 바이올린을 킬 수도 있었고 팀파니를 두들겼을 지도 모르지."
존 해리슨의 표정이 더 싸늘해졌다.
"내 연주 방식이 불만스럽나? 하지만 애석하게도 네가 바꿀 수 있는 건 한 구석도 없겠군. 나는 그런 진부한 고정관념을 따르고자 연주를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캐롤은 절실히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지만 물러날 자리가 없었다. 존 해리슨이 캐롤에게 바짝 다가왔다. 얼마 동안 피아노를 쳤는지는 몰라도 그에게서는 아직까지 도회적인 향수 냄새가 났다.
"방금까지 네 자신이 얼마나 한심한 소리를 했는지 깨닫길 바란다. 그 말은 하늘에 낀 비구름을 보고 왜 자신의 집 지붕 위에서 떠날 줄 모르냐고 악을 써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 말을 마치고 존 해리슨은 일어날 듯한 태도를 취했다가, 잠깐 웃더니 허리를 폈다.
"조금 더 연주해도 괜찮을 것 같군. 더 듣고 싶으면 들어도 상관없어. 근처에 의자가 있을 테니까."
그러더니 그는 시간을 재듯이 탁탁 피아노를 두드렸다. 어떤 하늘이, 혹은 악마가 선택했는지 모를 천재의 제안을 평범한 인간은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해리슨이 좀 더 자리를 내주었고 캐롤은 더듬더듬 그의 옆에 붙었다. 존 해리슨은 웃으면서 그 자리에서 캐롤이 주문하는 모든 곡을 다 연주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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