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hen Bruce Wayne meets a reflection of himself named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8. 03

- Written by. Jade


At the edge of deadly skepticism


 천둥을 동반한 번개를 내리꽂을 것 같은 하늘이 멀고 깊은 곳에서 부글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위를 올려다보지 않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하늘은 대체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은 남자는 곧장 근처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꼭 환풍기가 하나도 달려있지 않은 것처럼 답답했다. 브루스 웨인은 문이 닫히기 직전 짧게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를 마셨다. 소매를 열거나 타이를 밑으로 끌어내리지는 않았다. 그는 건물 안의 무리들 중에서 가장 초연한 얼굴을 띠고 걸음을 옮겼다. 


  온갖 소리들이 섞여 거대한 고함이 탄생하고 있는 공간이 있었다. 그가 시선을 힐끗했다. 두 차례를 기다리면 그가 주시해야 할 격투가의 순서가 오게 되어 있었다. 과연 브루스 웨인은 그에게 가장 적절한 시간에 그가 원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이었고, 그는 시작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주변을 살폈다. 정작 주먹을 휘두르는 이들이 다 갖지도 못하는 지폐 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의외로 빨리 끝나는 편이었다. 브루스 웨인이 노리는 자는 그보다 훨씬 이 도박에 대해 잘 알고 있으므로 이미 이 자리에 도착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러시아인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이 더욱 시끄러워졌다. 다른 방향에서 싸움꾼들이 입장한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격정이 피어오르는 곳을 보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찰나의 행운과 다른 사람들의 피를 즐기는 동물적인 정열이 아니었다. 브루스는 한 번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외면하며 러시아인을 찾아다녔으나 수확을 얻지 못했다.


  환호하는 자와 격분하는 자들 사이에서 브루스는 입을 다물었다. 그가 고개를 돌렸다. 이 자리에 있을 의미를 잃어버린 그가 마지막으로 미련처럼 실행한 행동이었다. 아주 오래 전부터 브루스 웨인은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게 되었다. 그는 믿을 만한 정보를 가지고 러시아인을 찾은 것이었지, 어떤 믿음이나 희망을 가지고 여기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바람은 현실에 아무런 영향력도 끼치지 못한다. 브루스 웨인의 눈동자가 사선으로 꺾여갔다.


  표정이 없는 남자가 나타나 자리를 잡았다.

 

  갑작스럽게 번쩍이는 반사광이 터졌을 때 미간을 찡그리며 그 빛의 근원지를 자연스레 확인하게 되듯이, 브루스는 기울어 가라앉으려고 하던 시선을 끌어올렸다.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동작은 분명히 격투를 준비하는 일련의 과정인데 그걸 실행하는 이에게서는 투지와 흥분이 완벽하게 결여되어 있었다. 브루스는 또 어떤 추상적인 반사광을 본 것 같았다. 그의 발이 미끄러지는 바닥은 빛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문득 자신이 강화수트를 입을 때 어떤 태도로 그 변신에 임하는지를 돌이켜보았다. 책임과 체념의 경계를 열고 닫으면서 이제는 이 일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희열은 없었다. 단 한 번도 기뻐할 수 있는 순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정과 미래를 잃어가는 것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희생을 감행하는 모순 속에서 건강한 무언가는 결코 자라나지 않았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낯설게 브루스 웨인의 머리를 찔렀다. 


  러시아인은 오늘 아예 오지 않을 듯했다. 그런데 브루스는 그에 대해 아무런 감상도 느끼지 못했다. 작고 피상적인 느낌마저도 이성에 녹아들어 버린 듯했고 이성은 느낌이 아니라 인식을 위한 장치였다. 붕대를 다 감은 남자 역시 비정상적인 초연함을 펼쳤다.    


  "곧 격투가 시작됩니다! 더 거실 분 안 계십니까?"


  격투장의 심부름꾼이 지폐를 팔랑거리는 소리가 나게 흔들었다. 브루스는 조용히 손을 들었다. 


  "저 남자에게 걸겠소."


  청년은 브루스가 쥐어주는 액수에 놀랐다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으쓱였다. 모두가 성이 나 있었다. 격투가들보다 더 뜨거운 콧김을 뿜어대는 구경객들 사이를 유연하게 빠져나간 청년은 관객들을 재미있게 여길 터였다. 기대와 탐욕과 호기심이 없는 자들은 자신의 이질성을 감추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반사광이 눈을 가리는 기분은 사라졌다. 올바른 위치에서 상을 응시할 때 시야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법이었다. 그는 장애물이 사라진 그 자신의 시야 속에서 많은 걸 목격했다.


  죽음을 바랐던 적이 있었다. 실제적인 것과 형이상학적인 것을 가리지 않고 죽음을 경험한 일은 많았다. 브루스 웨인은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죽음 또한 독립적일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연과 신념과 소망이 연거푸 스러져가다 보면, 그 부스러기들이 지상에 깔려 생에 대한 의지를 땅보다 더 깊은 곳으로 미끄러지게 할 수 있음을 배웠다. 그 때조차 브루스 웨인은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다만 눈물로 만들어진 웅덩이에 발을 담근 듯이 자꾸만 균형을 잃는 자신을 발견했을 뿐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덤덤하게 되짚었으나 그 시절 그는 아주 날카로운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힘을 불어넣으려고 시도만 하면 도리어 휘청이는 관념에 화가 났던 그는 자신을 괴롭히는 물웅덩이를 얼려버렸다. 그리하여 그의 발밑은 더욱 미끄러워졌지만 환상 같은 두께와 강도를 가지게 되었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서서 걸을 수 있었다. 물론 자신이 물이 얼어있는 지점에 서 있다는 건 잊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는 몹시도 조심하면서, 자신의 발바닥 아래를 깨뜨릴 수 있는 건 뭐든지 의심하면서 움직이게 되었다.


  절망과 회의주의로 빚은 절벽으로 한 남자가 몰리고 있었다. 브루스 웨인은 눈을 깜빡여 현실을 직시했다.


  그가 선택한 남자는 두들겨 맞고 있었다. 브루스가 보기에 그는 오직 그간의 경험에 이끌려 두 팔을 올리고 있었고, 단련된 육체가 있어 아직 쓰러지지 않은 것이었다. 광기와 욕설이 피 흘리는 남자에게 꽂혔다. 밀리기만 하던 남자는 급기야 브루스가 서 있는 곳까지 다가와서 비틀거렸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잡았다.


  자신의 무력함을 중력에 휘감아 위장해보려던 남자는 또 다른 인력에 가로막힌 자신을 한 번 보았다가 뒤를 돌았다. 브루스는 자신의 양 손이 남자의 땀에 밀려나지 않도록 힘을 주고 있었다. 브루스가 남자를 세웠다. 그에겐 일종의 반사광이었던 남자의 동공은 의외로 탁해 브루스는 자신의 얼굴이 어떻게 비쳐 보이는지 몰랐다. 그 찰나의 브루스 웨인은 오직 남자만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남자는 일어섰다. 동시에 그는 싸웠다. 브루스는 마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인 양 남자가 처음으로 내뻗은 주먹의 의미를 추측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남자는 덤덤하게 승리를 가져왔다. 구경꾼들이 이건 말도 안 된다면서 발악을 해댔다. 일회용에 지나지 않는 붕대가 스르르 떨어졌다.  


  브루스는 천천히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남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소중히 다루는 자신의 소지품마저 아무렇게나 방치하는 듯했다. 남자는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는 가방 하나를 옆에 두고 옷을 꺼내는 중이었다. 조금 전 브루스의 돈을 걷어갔던 청년이 눈을 찡긋하며 그에게 지폐 뭉치를 건넸다. 


  남자는 지폐를 세지도 않고 무심하게 가방 한 구석에 쑤셔넣었다. 그의 등에는 총알을 대보면 딱 맞을 것 같은 크기의 상흔들이 있었다. 브루스는 그제야 남자의 외양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훈련을 받았으며 총을 맞아본 적도 있는 데다 저급한 자들의 파괴성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브루스가 의식적으로 눈을 깜빡였다.


  남자가 브루스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세상에는 소리로 전달되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브루스 웨인이 가장 털어놓고 싶은 것들이 한 번도 그의 음성에 실린 적이 없는 것처럼. 둘은 서로의 소리를 공유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사실 브루스는 남자에게 이것 저것을 묻고 싶었다. 그의 발 밑은 자신과 같은지, 혹은 그런 걸 일일이 따지지 않고 당신은 자신과 같은 사람인지를 확인하고 싶었다. 현실과 닮았지만 그것과 평행하고 있는 위치에서 브루스 웨인은 한 번도 자신 이외의 인물을 본 일이 없었다.


  결국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남자가 가방을 들었다. 뒷문으로 빠져나가기 위해 브루스를 지나쳐야 할 필요도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브루스를 등지고 반대편으로 벗어났다. 브루스는 그 뒤 돈을 걷는 청년에게 남자의 이름을 물어봤지만, 그는 이 주변에서는 누가 들어도 가명으로 생각될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 후 브루스 웨인이 자신은 그림자를 본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결말을 내려버리는 건 당연했다. 그는 진심으로 남자가 자신을 찾아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 When Bruce Wayne meets Jason Bourne

- Original Date 2016. 07. 24

- Written by. Jade


 

Essence of Justice




 

  브루스 웨인은 어디를 들어가든지 그 장소의 테이블 위부터 확인하는 버릇이 있었다. 마치 오래된 구전처럼 도시를 돌아다니는 그의 버릇은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그가 반드시 읽어봐야 하는 무언가를 테이블에 펼쳐놓는 매너를 발휘하게 했다.


  브루스 웨인은 투명한 유리처럼 빛을 내뿜을 것 같은 책상에 붙은 쪽지를 발견했다.


  —그의 이름은 제이슨 본입니다.


  브루스는 고개를 돌렸다. 새로 건설한 시설의 모든 구석구석이 깨끗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오직 자신을 위하여 조성된 공간인 만큼 브루스는 앉은 자리에서 자신과 조금이라도 반대될 수 있을 만한 요소를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곳에 그를 바라보았던 작은 스코프는 분명 존재했었다.


  브루스 웨인은 회상했다.


  그는 여기서 알프레드에게 온갖 실없는 소리를 했었다. 이런 일을 시작하게 될 줄 알았다면 경영학이 아니라 공학이나 신소재 학문을 전공했을 거라는 얘기부터 자신은 미술에 소질이 없다며 손수 그린 설계도를 팔락거린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자신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같은 사람이 되었어야 했다는 소리를 했다가, 알프레드에게 역사적으로 내려오는 그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당장 집사 일을 그만두었을 거라는 일격을 당했었다.


  물론 끝없는 번뇌와 고통도 있었다. 아무것도 떠올라 있지 않은 모니터 화면 위에 이제는 자신의 비틀린 동력이 되어가는 과거를 출력하며 스스로를 짜냈다. 울진 않았어도 기이하게 신음한 일은 한 두 번 있었다. 브루스는 자신이 마지막에서야 발견했던 스코프가 어떠한 모습들을 보았는지 알 수 없었다.


  브루스 웨인의 시선이 넓은 호선을 그렸다. 아무리 봐도 저격용 스코프 같은 게 숨어 있을 만한 위치가 눈에 띄지 않았다. 자신이 어느 건물 옥상에서 그것을 결국엔 발견하게 된 사건이 신기하게 여겨질 지경이었다.


  어쩌면 그의 관찰자는 그 자신의 임무를 종료하고 싶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브루스 웨인은 쪽지를 힐끗했다. 그조차도 스코프를 쥐고 있던 장본인에 대해 고작 메모지 한 장에 들어가는 정보를 얻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사실 그는 적힌 이름이 그 자의 본명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고담시의 뒷골목 서늘하게 얼어붙게 만드는 암살자 같은 족속들도 그토록 은밀하고 비밀스럽지는 않았다. 브루스 웨인은 대체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어둠보다 조용하고 은닉의 화신들보다 비밀이 많은 관찰자가 붙게 되었는지 여전히 궁금해 했다.


  그래서 브루스는 그의 관찰자에게 사연을 물었었다.


  바람이 참 요란스럽게 불었던 날이었다. 고층 건물의 옥상이라는 공간적 특징으로 인하여, 평소에는 별로 경험해 볼 일도 없는 온갖 대기의 성질들을 몸소 체험하며 브루스 웨인은 남자를 응시했었다. 남자의 얼굴은 평범했다. 특징도 없이 그저 짧게 자르기만 한 머리칼에 짙은 색의 옷을 입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에 말이 없었다.


  삼각대가 달린 장총은 아직 옥상의 난간에 걸려 있었다. 그것은 앞으로도 영원히 브루스 웨인을 쏘지 않을 것처럼 그에게 등을 돌린 채였다. 그러나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브루스는 오직 그것만이 자신을 움직이게 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사고 속의 브루스 웨인은 목소리로, 그리고 현재의 브루스 웨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그렇게 물었다.


  알프레드는 두 사람이 케이브라고 부르는 기지와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본사, 브루스의 유리 별장에도 누군가가 침입하거나 감시 데이터를 읽은 흔적이 없다고 보고했었다. 달리 말하면 브루스는 그 남자가 언제부터 나타나 어느 곳까지 자신을 주시했던 건지 지금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상상해야만 했다.


  남자는 웨인 엔터프라이즈의 리더인 브루스 웨인을 본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물려받게 된 회사에 꽤 진지한 태도로 임하는 모양이었다. 성실한 기업인이라는 것 외에도 그는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자체에 꽤 깊은 책임감을 느끼는 듯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범죄 단신을 보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는 이번에 생긴 일 때문에 새로운 아이들 몇 명이 방문할지도 모르겠다며, 그들을 잘 대해달라는 당부를 그가 운영하고 있는 어린이 보호 시설에 전했다. 전화를 마친 그가 순간 얼굴을 차갑게 굳힌 것 같았다.


  추가적인 일정이 없으면 브루스 웨인은 퇴근 뒤에는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었다. 다양한 주제의 잡지나 책을 읽거나 집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일, 아니면 혼자서 한 잔의 와인을 즐기는 것으로 그는 밤을 흘려보냈다. 이 모든 수가 빗나간다면 브루스 웨인은 십중팔구 묘소에 있었다. 남자는 끊임없이 묘비 근처의 꽃을 갈아주고 그 앞에서 침묵하며 생각하는 브루스 웨인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비탄에 시달리는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남자는 고귀한 폭력이 되려는 브루스 웨인을 보았다.


  남자는 너무 오랫동안 브루스 웨인을 관찰하면서 할 말이 없어진 모양이지만 브루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말했다.


  —내가 당신을 발견했는데도 왜 날 쏘지 않았지?


  브루스는 아무런 변화도 없이 자신을 응시하던 남자의 모습을 기억했다. 바람이라도 불지 않았다면 그는 일종의 자연물처럼 움직이지 않고 브루스에게 시선을 보냈을 것 같았다. 그것은 고도로 훈련받은 이의 행동 양식이었을까. 그렇지만 브루스가 지금 거울을 봤다면 남자가 그 때에 자신의 몫으로 가진 회상과 추측을 진행하고 있었음을 알았을 터였다.


  남자가 아는 많은 것들이 순서를 지켜 부상했다.


  저 억만장자가 비밀리에 꾸미고 있는 시설을 발견했을 때 그가 받은 임무 저변에 깔린 요소들이 명백히 드러났다. 권력자들은 진실하고 충실한 자경단을 제일 두려워하는 법이었다. 그러니 억지와 같은 희박한 가능성을 들어 그 존재를 제거하려 드는 것이다. 저들이 더욱 성장하게 될 때, 권력과 법을 대체하고 소름 돋도록 민주적인 신임을 얻을 때를 세상에서 둘도 없는 공포로 여기면서 말이다. 더불어 그들의 궤변은 그들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변질되는 정의들 덕택에 힘을 얻었다.


  브루스 웨인은 그에 대해 자신의 정당성을 맹세하기보다는 반복적으로 고민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남자를 인식하고 있지도 못하면서 남자에게 그것을 증명하기라도 하는 듯이 굴었다. 브루스 웨인은 단 한 번도 총을 잡지 않았다. 그의 품은 펼쳐 보인 두 손바닥처럼 깨끗했다. 그 때도 그러하였다.


  정의로 인정받은 것은 더 이상 정의가 되려 하지 않고, 아직 정의가 되지 않은 것은 그 무엇보다도 정의에 가까워지려 한다. 남자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그 문장이 끝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셈인가?


  남자는 마침내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돌아가.

  —…나를 처리하는 게 당신의 임무였을 것 같은데. 날 돌려보내줘도 된다는 건가?


  남자는 브루스 웨인을 죽이는 게 아니라 그를 그림자처럼 수호하듯 바라보는 용도로 쓰였던 총을 문득 떠올렸다. 슬프게 솟구친 물감처럼 무성하던 풀밭 뒤편의 묘소로 그를 따라 들어갔을 때 이미 그 쓸모가 없어진 물건이었다. 남자는 그것을 내버려두기로 했다.


  브루스 웨인은 기어코 또 말했다.


  —왜 당신은 나를 위해서 죽으려 하지?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을 총에 대해 알기라도 하듯이 브루스 웨인은 남자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줄곧 생명이었다. 모름지기 인간이라면 그래야 했다. 남자는 많은 걸 생각했으나 정작 그 안에는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은 한 마디를 꺼냈다.


  —괜찮아.


  브루스는 남자의 시선을 잃었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브루스의 표정이 남자의 눈동자를 사선으로 스쳐지나간 것 같았다.


  —아니!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던 두 사람은 브루스가 몸을 돌리면서 다시 하나의 선상에 서게 되었다.


  —세상에 죽어도 괜찮은 사람은 없어.


  남자는 그 짧은 말이 자신의 인생 대부분을 질책하였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당신이 준비하고 있는 일을 정말로 실현하고 싶다면 인간을 재단하는 법을 배워야 해. 이 자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살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모두가 남자를 향해 질릴 정도로 주입하던 법칙이었다. 정작 남자는 이태까지 그걸 자신의 것으로 소화해본 적이 없었지만, 그 역사는 이제 부정되었다. 남자는 혼자서 항이 비어있는 부등호를 채웠다.


  —그것이 정의의 본질이야.


  브루스 웨인은 어느새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이 적힌 쪽지의 모서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남자의 말을 끝으로 회상을 중단했다. 정체불명의 감시자가 던진 충격에 넋을 잃고 있다가 뒤늦게 지상으로 내려갔을 무렵에는 까맣게 타고 있는 자동차만 있었을 뿐이었다. 기름을 먹고 타오르는 불길이 너무 강렬해서 사고 현장에는 제대로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브루스 웨인은 허망하게 눈을 깜빡였었다. 그는 누군가를 구하기도 전에 어떤 남자를 죽인 꼴이 되고 말았다.


  자동차의 모든 것은 재가 되었다. 남자가 두고 갔던 총은 아마 누군가의 신고를 받고 경찰에 넘어갔겠지만 소유주를 확인할 수 있는 증거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브루스 웨인에게 남아있는 것은 본명인지도 확실치 않은 이름과 너무도 짤막하기만 했던 몇 마디의 말들이었다.


  브루스가 이름을 적은 부분을 손가락으로 밀어보았다. 잉크가 다 말라서 글씨는 번지지 않았다. 이상한 것이 선명했다. 세상의 모든 무거운 것들이 잠시 브루스의 표정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브루스 웨인은 일어섰다.


  오늘 그가 기지에 온 이유는 제이슨 본이라는 이름을 알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브루스는 벽면에 손을 갖다 댔다. 그의 모든 것을 가려주되 그에게 남은 것을 이루어줄 갑옷이 완성된 형태를 드러냈다. 회상을 마친 브루스 웨인은 현재에 다시 입성했다.




In Flames by Lungley


오늘 밤 천사는 죽을 것이고

천국은 그 죽음을 위해 슬퍼하는 걸 잊으리

불길 속에서 우리의 이름은 맹세된다

  불길로부터 우리 둘은 태어난다



[BvS/숲뱃(클락브루스)] Becoming God

- DC Movie Universe 2016. 8. 31. 16:11 posted by Jade E. Sauniere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Superman/Batman

- Original Date 2016. 08. 21

- Written by. Jade


Becoming God




  하얀 옷을 입고 붉은 날개를 단 천사가 말했다.


  "피란델로라는 작가를 알아요?"


  검은 옷을 입은 인간이 대답했다.


  "이탈리아 문학이라도 읽는 건가."

  "역시 알고 있었네요. 당신은 똑똑한 사람이니까 알 것 같았어요. 그 사람이 쓴 작품 중에 우리 둘 모두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책이 있어요."

  "한가로운가보군."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아요."


  죽음의 천사이자 인간의 지배자인 남자의 얼굴은 희미하게 밝았다.


  "당신은 언젠가 나에게 나는 신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었죠. 당신의 그 통찰력이 얼마나 희귀하고 또 고귀한 것인지 그 때는 몰랐어요. 그래요,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봐야 해요. 그런데 당신을 제외한 거의 모든 인간들은 나를 신으로 봤어요. 태양만 있으면 그 누구보다 강력해지고, 하늘을 날아다니고, 이 행성을 초월한 세계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가보죠. 적어도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신들과 나는 어느 정도 닮은 점이 있어요."


  "그것으로 지금 자신의 위치를 정당화하겠다는 건가? 민주주의적 절차를 거쳐서 정권을 잡은 독재자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궤변이야." 


  "나는 당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의 공포정치에 대한 가장 든든한 벗으로 태양을 두고 있는 독재자가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기왕이면 좀 더 인간다운 존재가 되고 싶었어요. 그래야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과 더 가까워질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런데 나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죽고 나서 나는 물어야 했어요. 나는 누구지? 이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지? 당신의 시선은 논리적이고 모든 면에서 다 옳았지만 그래서 따뜻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당장 나에겐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 지극히 옳은 걸 외면하고 싶을 때가 종종 있는 법이잖아요? 그래서 다른 모든 사람들의 눈동자에게 물었고 대답을 얻었어요. 피델리오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인공적인 신이 말했다.


  "나는 당신들이 바란 그대로의 것이 되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파괴하는 신이 되기로 한 건 네 자신이 선택한 거야."


  밤의 영웅도 아니고, 이 순간엔 오직 한 명의 인간일 뿐인 남자는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녀를 잃은 바로 그 시점에서 너는 인간에 가까워지길 포기한 거야. 그렇게 되면 그녀를 죽인 자와도 닮아질 테니까. 일시적으로 해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다른 자들이 신이 되어달라는 소망을 보낸 건 너에겐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을 걸. 네가 납득할 수 있고 실현할 수 있는 거였으니까. 하지만 자비로운 신은 하나의 추억거리가 되었지. 네가 노력과 자비를 베풀어서 구해야만 하는 사람이 사라졌고 네가 반드시 없애야 할 자들만 남았으니."


  인간이 원하지 않은 신이 입술을 물었다.


  "나를 봐."

  "보고 있어요."

  "아니야."

  "당신을 보고 얘기하고 있잖아요."

  "클락, 나를 봐. 뭘 불안해하지?"


  파괴신과 천사와 외계인과 인간을 오가는 존재가 표정을 찡그렸다.


  "로이스 레인이 죽던 날 이후로 너는 나를 보지 않아. 그러나 넌 태양과 심판의 신이 될 수는 있어도 지혜의 신이 될 수는 없어. 피란델로가 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응시해보라고. 내가 너의 거울이 되어줄 테니."


  인내심과 자애로움이 있는 고목과 같이 인간은 계속해서 그에게 자신의 눈동자를 제공하려고 했다. 정의내리기 애매해진 존재는 결국 인간의 시선을 받아들고야 말았다.


  ―나의 육신이 거만한 나의 정신에서 분리되는 것을 저기 내 앞에 있는 거울 속에서 볼 수 있었다. 아, 마침내! 저기 그가 있구나! 


  존재는 책의 구절을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도 아니었다. 누군가 잡아주기를 기다리는, 한 가련하고 무기력한…

  "그 날 나는 너를 이렇게 보고 있었어."


  그를 정의내릴 수 있는 한 단어는 클락 켄트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클락 켄트가 입술을 떨었다.


  "아니…."

  "그 때 너는 나를 보지 않았어."

  "그렇지 않…."

  "너무 좌절스러워서 모든 걸 다 속단하기에 이르렀던 거야."

  "나는…."

  "그렇지만 나는 너를 차갑게 보지 않았다, 클락."


  인간에 의해 신이 된 자는 자신이 억지로 신이 되길 바라지 않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그는 십만 명의 시선이 되기에도 바빠 그 자신은 미처 느끼지도 못했던 비합리적인 무게감을 벗게 되었다. 






인용된 책은 루이지 피란델로의 <아무도 아닌, 동시에 십만 명인 어떤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