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Public Evil 03

- Kingsman/Novelette 2015. 8. 3. 16:26 posted by Jade E. Sauniere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공공의 악

Public Evil




* 에그시Eggsy



  어느샌가 가슴팍을 짓누르던 타인의 압력이 사라졌다. 나는 벌떡 깨어났다. 방안을 휘적휘적 돌아다녀도 빨간 불빛이 따라오거나 하지는 않았다. 나는 안심하면서 거실로 나갔다. 넓은 창문에서 들어오는 아침의 하얀 빛을 받으면서 놈이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는 잠깐 몸을 돌렸다가 나를 발견했는데, 별다른 반응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나는 물을 마셨다. 그가 전화를 받으면서 간간이 내뱉는 말들은 아주 일관적이어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넣은 그가 나를 쳐다보았다. 그 무감한 눈빛은 내가 물을 마시고 있기 때문에 형성된 게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눈을 보고서 내가 궁금증을 가져야만 하는 주제를 떠올리게 되었다.


  “해리하고는 또 언제 만나요?”


  목마름은 채워졌지만 나는 또 물을 따랐다. 놈은 빛을 받고 있었다.


  “해리가 뭐라고 전해준 거 없었어요?”

  “어제 봤는데.”


  그는 간단하게 대답하고 나에게 다가왔다. 그도 잔을 꺼냈다. 나는 황급하게 물통을 잡고 있던 손을 뗐다. 내가 마실 생각이 없는 물이 출렁거렸다. 놈은 우아하게 입술을 적셨다. 나는 잠결에 들었던 해리와 그의 대화가 실제로 벌어졌던 것임을 깨달았다.   


  그는 태연하게 잔을 씻고 손을 닦았다. 소파에는 그의 코트가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전화를 받으면서 “조금 후에 보지.” 같은 말을 했었다.


  나는 갑자기 갤러해드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되었다. 


  “난 진짜로 로버트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요.”


  나는 이태까지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 로버트라는 것까지 함구했었다. 그런데 실은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그는 명백히 흥미롭다는 눈을 뜨고서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젠 해리도 그럴 수 있어요. 그가 해리 몰래 도망갔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으니까요. 인질이 교환되면 자기가 죽을 거라는 걸 설마 모르겠어요?”  


  나는 어제 들었던 두 개의 똑같은 목소리가 숨을 고를 틈도 거의 없이 말을 주고받았던 속도만큼 강박적이었다. 


  “해리에게 시간을 얼마나 줬어요?”

  “정확히 얘기해. 해리 하트에게 남은 시간을 묻는 건가, 아니면 너에게 남은 시간을 묻는 건가?”


  그는 가볍게 던져놓고 코트를 들었다. 예상하지 못한 대응이었다. 단순히 다급했고, 나도 가만히 손을 놓아서는 안 되겠다는 관념이 들었던 무질서함이 순식간에 정당화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와 해리의 처지가 얼마든지 분리되어서 생각될 수 있음을 실감했다. 놈은 아무렇지도 않게 코트를 입었다. 그는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는 당연히 흔들리지 않는다. 그는 애당초 혼자였고, 누군가를 빼앗아 그 자신과 밀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환영할 입장이었다. 


  나는 혼자 남았다.


  나는 순간적으로 물을 한 컵 더 마셨다. 뱃속에 물이 꽉 들어찼는지 배가 고프지 않았다. 그것이 원인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어쨌든 나는 당장 무언가를 더 먹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주방을 박차고 나와서 거실 구석구석을 뒤지기 시작했다. 소파 밑바닥을 손으로 전부 더듬기도 하고 바닥에 뺨을 딱 붙여서 눈을 굴렸다. 지퍼를 열어서 쿠션의 덮개 안쪽도 뒤졌다. 장식품처럼 놓여 있는 책도 수상해서 탈탈 털었다. 나는 혹시나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는 카메라를 찾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내가 호텔방에 있었을 때처럼 말이다. 나는 어쨌든 어제 하루 종일 정신이 멍했고 자다가 깨기를 반복했었다. 내가 좀 더 확실한 무언가를 얻으려는 행동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거다.


  카메라를 감춰 놓기에 아마 가장 적합할 화분 같은 것은 거실에 없었다. 사실 거실은 꽤나 탁 트여 있었다. 적어도 내 눈에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을 만한 장소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털썩 소리가 나게 소파에 앉았다.


  로버트가 해리의 사무실로 찾아왔던 첫 날이 떠올랐다. 로버트가 가고 나서 해리는 솔직하게 의자가 더러워진 것을 애석해했다. 당시 나는 그러한 해리의 태도가 신기했었다. 내가 “해리가 맡은 사건 중에 이번이 제일 무시무시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라면서 해리를 슬쩍 떠봤던 건 일견 태평해 보이기까지 하는 그가 놀라워서였다. 그 날 의뢰인이 꼴은 아주 심각했었고, 누구라도 그가 험악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걸 알 만했다. 그런데 해리의 답변은 이러했었다. “난 변호사지 형사가 아니야. 내가 그렇게 극적인 일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게 꽤 인상적이었던 지라 나는 아직도 해리의 그 말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담담했던 해리의 얼굴빛마저도 선명하다. 


  지금 나에게는 이상하게도 그 말이 내가 해리에게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목소리로 들렸다. 따지고 보면 나는 변호사의 심부름꾼이다. 대학교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으면서, 남들의 말을 잘 듣고 그걸 잘 기억하는 다소 딱한 처지의 남자애였기 때문에 해리가 호의를 베풀었던 상대다. 해리와 갤러해드의 대화는 내 머릿속에서 갈수록 친밀해져갔고, 물러날 순간이 오면 망설이지 않겠다는 해리의 자세는 점점 나와 대립했다.


  힘이 빠지자 배가 고팠다. 일어나기가 싫었다. 나는 몸을 쭉 늘어뜨리고 거실의 넓은 유리창을 보았다.


  “내 말 듣고 있는 사람 없어요? 한 명은 있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빨간 불빛은 나타나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울리는 목소리도 없었다.


  “당신네 보스 언제 오는지 아는 사람? 전화 좀 해봐요. 부탁합니다, 네?”


  나는 소파에 눕듯이 등을 붙이면서 중얼거렸다. 배가 고팠고 몸이 지쳤다. 대답은 없었고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래도 물이 아닌 이빨로 씹을 수 있는 걸 입에 넣어야 할 듯했다. 나는 몸통을 들이밀면서 냉장고를 열었다. 즉석식품이라든가, 이미 만들어진 상태에서 그야말로 가열만 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들어 있는 용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야채나 과일 같은 기본적인 식재료들만 가득했다. 나는 머리를 긁었다. 그나마 가장 만만한 게 감자였기에, 나는 감자 서너 개를 꺼내서 씻었고 껍질을 깎았다. 그런 다음에는 감자를 썰어서 이리저리 볶았다. 프라이팬에 소금을 살짝 뿌리고 접시에는 미리 토마토케첩을 짜 놨다. 나는 그런 식으로 대충 끼니를 때웠다. 감자를 먹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갤러해드의 리조또가 그의 온전한 요리 실력이었다는 게 아주 약간 인상적이었을 뿐이었다. 


  문득 시간이 궁금해졌다. 핸드폰이 없으니 아날로그시계에 의존을 해야 했는데, 당장 내 시야에 들어오는 시계는 없었다. 빛은 더욱 하얘졌다. 나는 그 빛이 넓어졌다가 바람에 흔들리는 걸 한참 지켜본 뒤에 설거지를 했다. 아마 오후쯤이지 않을까 싶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문소리가 났다. 문단속을 하고 있는 갤러해드의 손에는 진한 주황색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화사한 색깔의 봉투에는 피가 묻은 총이나 칼이 들어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잠깐 보았다가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가 걸어오는 방향의 끝에는 내가 서 있었다. 그가 거실 가운데에 자리 잡은 탁자 위에 봉투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해리의 손가락만 들어있지 않으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을 듯한 자신이 들어 나는 봉투 안을 힐끔거렸다. 귀여운 그림이 그려져 있는 하얀 상자에서는 부드럽고 달콤한 향이 났다. 먹을거리, 그 중에서도 디저트 종류인 모양이었다. 나는 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놈은 내가 잘 볼 수 있는 곳에 봉투를 놓았을 뿐 설명도 하지 않고 옷을 벗었다. 나는 그가 주방에서 손을 씻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런다고 내가 읽어낼 수 있는 건 전무했다. 어쩌면 그도 나를 해리나 자신의 처분을 얌전히 기다려야만 하는 멍청하고 수동적인 인질로 여기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위치를 참고만 있지는 못했다. 내가 해리와 특별한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려준 자는 그였다.


  “내가 무슨 짓을 하면 날 살려줄 거예요?”


  그는 아직 손을 닦느라 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그 노력은 해리 하트가 하고 있다. 그를 믿지 못하는 건가?”


  나는 순간 화가 났다.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선물부터, 자신의 말이 내 신경을 건드리든지 말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태도까지 견딜 수가 없었다. 마침 그의 얼굴도 눈에 보이지 않아 나는 목소리를 크게 냈다. 


  “나도 뭔가 용을 쓰게 해 달라고요! 젠장, 내가 무작정 해리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걸 당신이 가르쳐줬잖아.”


  그런데 머리가 말을 지어내는 속도가 워낙 빨라 나는 뒤늦게 평소의 드센 말투가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사람 피부터 내는 놈한테 말이다. 나는 혀끝을 깨물었다. 앞에 달려 있던 하얗고 작은 수건으로 손의 물기를 닦아낸 그가 돌아섰다. 

 

  그는 총을 꺼내면서 소파로 왔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온갖 짜증을 퍼붓고 있으면서도 바깥으로는 차분히 눈만 감았다. 해리든 누구든 뒤처리는 해 주겠지. 나는 내 심장에 박힐 총알을 기다렸다.


  “에그시.”


  그가 나를 향해서 처음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무의미했다. 나는 눈을 꼭 감고 도리질했다.


  “널 죽이지 않을 거야.”


  내 눈앞에서 놈이 손을 흔드는 게 느껴졌다. 그 느낌이 은근히 거슬려서 나는 결국 앞을 보았다. 그는 내 옆에 앉았고, 여전히 총을 든 채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에게서는 희미하게 뒷골목 냄새가 났는데 그보다도 향수가 아니면 화장품, 그것도 아니라면 섬유유연제의 향이 떠오르는 어떤 멋진 향기 때문에 뒷골목의 냄새가 묻혀버렸다. 


  갑자기 그가 내 턱 아랫부분을 눌렀다. 누구나 그런 일을 당하면 입술을 벌리게 된다. 


  “뭐, 뭐예요?”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줄 거다.”

  “그게 대체 뭔데….”


  놈이 총으로 나를 겨누었다.


  “이십오 분 전에 쓰고 왔던 거라서 총구 부분이 아직 뜨거워. 네가 그걸 식혀줘야겠어.”


  나보고 입김이라도 불라는 건가? 일단 나는 입술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그랬더니 그의 총이 통째로 내 입으로 들어왔다. 딱딱한 표면이 이빨에 부딪혀서 앞니가 얼얼했고 입 안을 꽉 채우는 총구 때문에 혀를 움직이는 것도, 심지어는 침을 삼키는 것도 불편했다. 나는 뒤로 몸을 빼려다가 그가 손잡이와 더불어 방아쇠에도 손가락을 붙이고 있다는 걸 목격했다. 내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물러난다 한들 내 미간은 무사하지 못할 게 뻔했다. 나는 한 가지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나는 놈을 똑바로 보면서 입을 오므렸다. 총구는 입 안쪽의 온도보다도 뜨거웠지만, 길거리에서 막 산 핫도그를 물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온도와 비슷해서 참을 만했다. 다만 입천장이 쓸리고 이빨과 총이 충돌하는 걸 막기 위해 총구를 혀로 감싸야만 하는 점이 달랐다. 놈은 총을 돌리지도 않았고 내 목구멍 깊이 찔러 넣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언제 총을 빼도 좋다고 말해주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빨리 끝내는 게 내 쪽에서도 득일 터다. 나는 열심히 총구를 혀로 휘감고 빨아댔고 한 2분 만에 그것을 뱉어냈다. 내 쪽에서는 총구에 침이 고여 있는 게 살짝 보였다. 그는 주황색 봉투를 뒤적이더니 음식점이나 카페에서 볼 수 있을 법한 네모난 휴지를 꺼내서 총의 앞부분을 닦았다. 그의 표정은 언제나 알쏭달쏭하다.


  쓸모를 다한 휴지를 테이블에 버리듯 내려두고 이번엔 그가 봉투 안에서 상자를 꺼냈다. 동그란 과자들이 안에 들어있었다.


  “먹어.”

  “…왜요?”

  “날 찾았다면서.”


  내 관점에서는 전혀 질문과 호응되지 않는 대답이었다. 그렇지만 갤러해드에서는 그보다 명쾌한 이유는 없었는지 그는 과자 상자를 두고 일어섰다. 나는 내 뒤편을 돌아가면서 그가 탄창을 분리하는 걸 보았다. 플라스틱인지 금속인지 모를 단단한 총의 표면은 사실 아무런 맛이 없었다. 내가 과자를 집어든 건 순전히 과자의 향과 생김새가 좋아서였다. 나는 과자를 한 입 깨물었다. 고급스러운 단맛이 혀를 타고 입 안 가득히 퍼졌다. 나는 두 번째 과자를 집어 들었다. 중독성이 강한 맛이었던 데다가 내가 이 집에 갇혀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걱정 없이 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


  그 날은 내가 입으로 그의 총구를 식혔다는 걸 제외하고는 평온하게 흘러갔다. 저녁 메뉴로 갤러해드는 볶음국수를 만들었다. 그의 요리 실력은 수상할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영양분이 꽉꽉 채워지는 기분이 들어서 나는 양배추 한 가닥까지 남김없이 접시를 비운 다음, 적당히 시간을 때우다가 침대에 누웠다. 나는 갤러해드가 욕실로 들어가는 모습을 마지막에 눈에 담았다. 하얀 셔츠를 입은 상태에서 백열전구의 강렬한 빛을 그대로 받고 있어 그의 안쪽이 조금 비쳤다. 신기하게도 거기에는 상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