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Saint and Sinner 01

- Kingsman/Full-length 2015. 5. 13. 21:25 posted by Jade E. Sauniere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성자와 죄인Saint and Sinner

Chapter 1. 오리엔테이션The Orientation







  멀린이 얕은 한숨을 쉬면서 귓가로 손을 가져갔다.


  “…언제 끝나. 록시도 여기 왔어. 잊어버린 것 같아서 한 마디 해 주자면, 아마 거기에 그 공주님 말고도 다른 많은 사람들도 있을 거거든?”


  그러자 통신기를 멀리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로 멀린의 귓구멍을 자극하던 격렬한 숨소리가 멎었다. 멀린이 고개를 저으면서 보이지 않게 접어두었던 모니터를 펼쳤다.


  —오, 이런. 진즉 말씀하시지!

  “네가 귓등으로라도 그 말을 들었을까.”

  —알았어요. 음, 거의… 끝났어요. 옷만 입고 나갈게요. 


  록시가 무슨 일이냐는 눈빛을 지으며 멀린의 뒤에서 몸을 흔들거렸다. 바닥으로 떨어져 있었던 게 분명한 카메라가 각도를 되찾자 열심히 속옷을 끌어올리고 있는 북유럽 출신 공주님의 등판이 보였다. 록시가 입을 벌렸다.


  “얼씨구.”


  록시가 서서히 팔짱을 꼈다. 에그시가 안경을 쓴 모양인지 카메라 화면은 더 이상 흔들거리지 않았고, 두 사람은 안정적인 각도를 확보한 대신에 에그시가 공주와 입을 맞추는 장면을 견뎌야 했다. 한순간 동굴처럼 확대되어 보였던 공주의 콧구멍에 록시가 놀랐다가 이내 헛웃음을 지었다.


  “저 제정신이 아닐 것 같은 놈 좀 거들어 주고 와.”


  록시는 멀린의 지시에 따라 비행기를 나가면서 셀 수도 없는 사람들을 구한 에그시의 공과, 일도 다 마무리 짓지 않고 공주와 달콤한 시간부터 보낸 허물의 무게를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대는 때려줘야 속이 시원할 것 같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에그시는 닫힌 감옥들을 여는 내내 비틀거리면서 걸어야 했다.


  “아, 진짜 아파 죽겠다고! 내가 무슨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통신기 너머 록시는 대답이 없었다. 대신 멀린이 말했다.


  —다음 방 비밀번호는 4835야.


  에그시는 손바닥 끝으로 이마를 연신 문지르면서 숫자를 입력했다. 일주일 내내 못 먹은 사람처럼 마른 이기 아질리아가 눈을 깜빡거리며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에그시는 열린 문 쪽을 휙휙 가리키면서 다음 방으로 넘어갔다. 에그시가 맡았던 왼쪽 열의 가장 끄트머리에 위치한 감옥이었다.


  “멀린, 번호는요?”

  —잠깐만 있어봐. 아무래도 기존 방들과는 보안 장치가 다른 것 같은데.


  비로소 정신을 차린 듯한 에그시가 잠긴 문을 살폈다. 출입구는 안쪽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구멍조차 없는 두꺼운 철벽과도 같았다. 에그시가 문을 두드렸다.


  “저기요? 안에 누구 있어요?”


  에그시가 눈썹을 올리면서 귀를 기울였다.


  —일단 비밀번호로 열리는 시스템은 아니군. 

  “그냥 쏴버리면 안 돼요?”

  —쏜다고 열릴 것 같이 생겼어?


  에그시는 할 말이 없어졌다. 그는 멀리 떨어진 비행기에서 열심히 양 손을 움직이고 있느라 정신이 없을 멀린을 대신해 생각했다. 그가 구한 사람들 중에는 왕족뿐만 아니라 정치인, 예술가, 작가, 노벨상을 받은 대학 교수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그시는 그 모두를 제쳐두고 리치몬드 발렌타인이 꽁꽁 숨겨두고 싶었던 인물의 정체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됐어!


  멀린이 외침과 동시에 주변의 벽과 한 몸인 것만 같았던 문이 슬그머니 비켜섰다. 에그시는 열린 틈으로 일단 발을 한 쪽 집어넣고 온 몸으로 문을 밀었다. 빈 공간은 거북이가 한 발짝 내딛는 만큼 넓어졌다가 갑자기 확 늘어났다. 순간 중심을 잃은 에그시가 휘청거렸다. 그 때문에 에그시는 눈앞에 있는 사람을 조금 늦게 알아보았다.


  에그시는 바닥을 향했던 시선이 위를 향하여 그가 구출해야 할 주인공을 보여주자마자 그를 붙잡았다. 마치 사람 열 명이 에그시의 등 뒤를 떠밀기라도 한 것처럼 매우 불안정한 모습이었으나 감옥에 있는 남자는 눈을 감고 있었기에 에그시의 움직임을 뭐라고 품평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를 확인하지 않아도 에그시는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해리 하트가 죽음과 삶 어딘가에 누워 에그시를 맞이했다.





  해리는 머리카락 한 쪽이 다른 쪽에 비해서 많이 잘렸다는 것 빼고는 멀쩡해 보였다. 고급스러운 양복을 입지 않고도 기품을 발휘하는 모습도 여전했다. 지금도 그는 아주 반듯한 자세로 앉아 새하얀 공기층밖에 보이지 않는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풍경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 것인지, 해리는 비행기에 탑승하기 전부터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청년의 눈빛에 어떠한 반응도 주지 않았다.


  자동항법 시스템을 켜 놓은 멀린이 조종실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해리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데 온 신경을 쏟고 있던 에그시와 록시가 그를 따라 조종실로 들어갔다. 물론 그 때도 해리는 창문만 내다보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해리가 맞긴 맞는 거예요? 발렌타인 그 놈이 무슨 미친 짓을 했을 지도 몰라요!”


  해리의 이름을 발음하는 순간 에그시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아져서, 마침내는 정지해 있던 해리를 살짝 조종실 쪽으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멀린이 에그시의 어깨 너머를 힐끗 살폈다.


  “에그시, 일단 진정하고. 장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나도 정확히 해리의 상태를 파악할 수는 없어. 하지만 해리는 거의 정면으로 발렌타인의 총에 맞았었지. 누가 봐도 죽는 게 맞았어.”


  “그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적이라는 건가요?”


  “그도 그렇지만, 그 총상으로 인해 해리가 겪을 수 있는 여러 후유증이라든가 증세도 생각을 해봐야 한다는 거야. 머리가 거의 날아갈 뻔 했는데 어떻게 예전과 똑같을 수 있겠어? 해리라고 해서 온 몸이 티타늄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란 말이야.”


  에그시는 입술을 깨물었다. 대신 그의 온 몸이 멀린에게 해리의 상태에 대해 묻고 있었다. 


  “…일단 기억이 꽤 날아갔다는 건 확실하고. 발렌타인이 그에게 부차적인 실험을 가했을 수도 있어. 아주 세심하게 살펴봐야 할 거야.” 


  에그시가 뒤를 돌았다. 그가 큰 소리를 냈을 때 해리는 그야말로 몇 초간 에그시 쪽으로 눈길을 주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에그시의 눈에 보이는 해리는 여전히 누군가가 일으켜 세워주지 않으면 움직일 수 없는 인형 같은 모습이었다. 에그시는 대체 해리가 왜 창밖의 풍경에 집착하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도를 줄이지 않아 구름의 실루엣마저 찾을 수 없는 하얀 하늘은 꼭 지금의 해리 하트를 닮아 있어 에그시를 더욱 답답하게 했다.



  ⁂



  에그시의 놀라운 기지는 그로 하여금 세상을 구원할 기회를 준 대신 각국의 주요 인사들의 상반신을 그 대가로 가져가버렸다. 멀린은 해리가 부활한 발렌타인으로 진화하지만 않는다면 세 달간은 자신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은 적이 있었으며 그에게 끌려간 록시 역시 덩달아 소식이 없었다. 기사들이 사방에서 자신들 모두 1면에 오를 가치가 있다고 주장해댔다. 미사일을 내리 꽂는 나라도 없는데 세상이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에그시는 그 소란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의 주변에는 소리가 없었다. 그랬기에 에그시는 자신이 귀로 들을 수 있는 무언가가 그리웠다.


  발렌타인은 USIM 칩보다 더 인간에게 밀착될 수 있고 영구적인 내구도를 가진 무언가를 고민했던 모양이었다. 멀린은 자신의 미숙함으로 살아나게 된 킹스맨을 이참에 그의 두 번째 계획을 시험해 보는 무대로 삼자는 발렌타인의 생각을 그가 남긴 자료가 아니라 해리의 몸을 통해서 알아냈다. 그는 총상과 더불어 각종 실험이 해리에게 미친 영향이 기억 상실에서 그친 게 그야말로 신의 은총이라고 표현했었다. 


  에그시는 신문을 읽고 있는 해리를 바라보았다. 해리는 TV나 라디오보다는 신문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스타일이었다. 그것은 신사적이며 그 행동 양식이 때때로는 고전적으로 다가오기까지 하는 해리 하트에게 딱 맞았다. 


  [해리에게 예전에 있었던 일을 말할까요? 기억을 되찾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요.]


  [지금은 아니야. 어느 정도 물리적인 상태가 회복이 되어야 잠재의식을 자극해 보든가 하지. 지금 해리에게 이전 일을 얘기하는 건 그의 마음만 복잡하게 만들고 말 걸.]


  [그 잠재의식이라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몰라요.]


  [그렇다고 해리를 미치게 만들 수는 없잖아.]


  해리는 이제 신문의 마지막 면을 읽고 있었다. 


  “…있잖아요, 해리.”


  에그시가 한껏 목소리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말했다. 


  “방에 붙어 있는 신문 기사 있잖아요. ‘더 선’ 지의 1면들. 혹시 궁금하게 생각한 적 없어요?”


  해리는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에그시는 인내심 있게 해리가 신문을 정리할 때까지 기다렸다. 기억을 잃었어도 품위와 신사성까지 지워진 건 아니라서 해리는 에그시의 말을 무시하지는 않는 편이었다.


  “왜 그림 같은 거 대신 신문지를 붙여 놓았을까, 그 생각을 해 봤냐고 물어보는 건가?”

  “그런 쪽일 수도 있죠. 아니면… 그 기사들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닐지 상상해보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잖아요.”

  “자네는 알고 있나?”

  

  이태까지 해리는 에그시에게 무언가를 물어본 적이 없었다. 에그시는 놀라서 영양가 없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지금 저한테 물어보신 거예요?”


  “자네는 여기로 날 데려다 준 직후부터 나에게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거든.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는 몰라도 그걸 직접적으로 나에게 얘기할 수가 없어 답답해했고. 내가 자네가 알고 있는 것에 호기심을 보이길 기다리기로 결심을 했으면서도 조급한 마음을 완전히 막지도 못한 채 말이지.”


  그 말을 듣고 에그시는 이상하게 발끈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제 속을 그렇게 잘 알고 계시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한 마디도 안 했어요?” 


  해리는 곧장 대답하는 것 대신 신문을 반으로 잘 접어 빈 의자에 내려놓았다. 우아하게 자신의 일에 집중하는 그 자세가 전설적인 킹스맨 요원을 닮아 있어서 에그시는 눈을 깜빡이지도 못했다. 


  과연 해리는 자신이 할 일을 다 마친 뒤에 에그시에게 대답을 주었다.


  “자네가 진실만을 말한다고 확신할 수 없었으니까.”

  “뭐라고요? 아니, 내가 당신에게 무슨 거짓말을… 잠깐.”


  에그시는 손까지 올리면서 사고를 진전시키려 애썼다. 해리는 그 여유를 놓치지 않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럼 이제는 저 믿으세요?”


  그러자 해리가 에그시를 보았다. 그의 눈빛을 읽을 수 없던 에그시는 그가 신문에게 제공했던 의자를 뺏어버리고 해리 옆에 붙었다. 에그시의 충동적인 행동을 판단 회로 속에 넣으면서 해리는 더욱 자신의 결정을 굳혔다.


  “제가 하는 말, 제가 보여주는 거 이젠 다 믿으실 수 있겠냐고요.”


  해리가 일견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한테 보여줄 게 있나?”



 ⁂



  해리는 택시가 멈춰 선 지점을 살폈다. 오른쪽으로 양복 입은 마네킹 세 개를 세워 놓은 상점이 보였다. 해리는 스스로 택시에서 내리려다가 손을 들어 올리는 에그시를 보고 다시 등을 붙였다. 날렵하게 생긴 구석이 있는 청년은 울컥 하는 성격이 나오지 않는 한 기본적으로 해리를 예의 바르게 대하려고 했다.


  에그시는 살짝 과장된 몸짓으로 해리에게 정면을 보라는 신호를 주었다. 해리는 아무리 뜯어봐도 귀한 손님만 취급하는 듯한 양복집으로 보이는 상점이 왜 청년을 싱글벙글 웃게 하고 있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에그시가 해리 옆으로 붙었다.


  “저게 뭐인 것 같으세요?”

  “…양복점 아닌가.”

  

  에그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저도 맨 처음 여기 왔을 때 그런 생각 했어요. ‘아니, 도대체 여기가 뭐가 어떻다고?’ 그렇지 않으세요?”


  지금 해리가 에그시에게 춤을 춰 달라고 하면 에그시는 가로등에 붙어 노래까지 부를 지도 몰랐다. 해리는 침묵하는 자신의 입술을 연신 살피면서 우울하게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에그시를 떠올렸다. 그가 조금 더 일찍 속내를 밝혀도 나쁘지 않았을 뻔 했다. 


  그 때 허공에서 탭댄스를 추기 일보 직전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가던 에그시가 갑자기 해리를 돌아보았다. 해리는 능숙하게 발 한 쪽을 한 칸 아래의 계단에 붙이고 에그시와 눈을 맞췄다.


  “아, 근데요.”

  “음?”

  “제가 막 이것저것 얘기하고 보여드리면, 머리가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 것 같으세요? 혹시 그럴까요?”

  “…그걸 지금 물어보면 어쩌자는 건가?”

  “그, 그러게요.”


  멋쩍게 머리를 매만지는 에그시는 아직도 배울 점이 많은 풋내기로 보였고, 입가에 약간 힘을 주고 그를 보고 있는 해리는 에그시보다 경험 많은 베테랑으로 보였다. 그리고 에그시가 어색하게 얼굴 구석구석을 만지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듯하자, 해리가 아이디어를 냈다. 


  “그럼 간단한 테스트를 해보도록 하지.”  

  “어떻게요?”

  “추상적인 형태로 자네가 나에게 얘기하고 싶은 진실 한 가지를 표현해보게.”


  에그시가 자신도 모르게 목을 앞으로 뺐다. 해리는 무슨 소리인지 한 톨도 못 알아듣겠다는 의미의 에그시의 제스처를 이해하고 나서도 입을 다물었다. 에그시는 결국 옛날처럼 끙끙대며 머리를 굴렸다.


  “어, 어, 아 진짜, 저보고 무슨 당신 인생을 한 줄로 요약하라고요?”

  “그런 접근법도 괜찮을 것 같은데.”

  “제가 어떻게 그래요!”

  “나에 대해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게 어렵다면 문장에 자네를 포함시켜봐.”


  에그시가 끙 하는 소리를 냈다. 지나가던 커플이 양복집 앞에서 머리를 싸맬 일이 무엇이 있냐는 눈빛으로 그들을 슥 훑고 지나갔다. 


  “당신은 저한테 어떻게 세상을 구하는지 알려줬어요.”


  해리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에그시는 지금 당장 자신이 지어낼 수 있는 가장 멋진 문장을 평가받는 학생의 심정으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그 말을 들어도 머리가 아프거나 하진 않군. 그만 들어가면 안 되겠나?”


  그러면서 해리가 발걸음을 옮겼다. 긴 다리가 계단 위를 비행하듯 솟구치더니 해리는 아예 에그시를 앞서가 버렸다. 에그시가 허둥대면서 이미 해리가 놓아버린 문의 손잡이에 매달렸다. 


  에그시가 정신을 차렸을 때 해리는 이미 카운터를 지키는 노신사와 눈빛을 주고받고 있었다. 그리고 에그시는 누굴 보아도 온화한 미소를 유지할 줄 아는 그가 처음으로 눈을 부릅뜬 걸 목격했다. 에그시는 재빨리 해리 등에 붙어 노신사에게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는 모습을 전달하려 애썼다. 


  “안녕하십니까. 잠시 안을 둘러봐도 괜찮을까요?”


  그 와중에 해리는 정중하게 노신사에게 허락을 요청하고 있었다. 


  “예…. 물론입니다.”

  “해리, 이쪽으로 와요. 이쪽.”


  에그시가 겨우 해리의 앞을 다시 점유해 그를 데리고 코너 쪽으로 들어갔다. 노신사는 자신이 마지막까지 아껴두고 있는 멀린과의 연결 노선을 사용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따져보기 시작했다. 





  에그시가 해리를 끌고 들어온 곳은 평범해 보이는 피팅룸이었다. 두 번 접을 수 있는 거울이 펼쳐져 있었고 품위 있게 세월을 머금은 목재 물품이라든가 고리 같은 것들이 미묘하게 흩어져 있었다. 에그시가 해리를 안으로 들여보내 놓고 문을 닫았다.


  짧은 시간 동안 시각적 탐색을 하면서 아무런 특이점도 찾아내지 못한 해리는 에그시에게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비켜서려고 했다. 그런데 에그시는 해리를 잡고 그를 거울 앞에 세웠다. 단추로 잠그는 간편한 셔츠를 입은 해리 하트의 상반신이 유리에 가득 담겼다. 


  “아마 멀린이 정보를 지우진 않았을 거예요.”

  “멀린?”

  “저희 다 태워줬던 조종사분 기억하세요? 그 분이 멀린이에요.”

  “영국 신화에 나오는 마법사 이름이 아니고?”


  에그시는 어느새 당황스러움과 멋쩍음을 표정에서 지워내고 웃고 있었다.


  “사실 말이죠, 당신 이름은 그보다 더 멋졌어요. 저한테 팔 하나 줘 보실래요?”


  에그시가 그렇게 말하면서 해리의 팔을 끌어당겼다. 해리가 양 팔에 힘을 빼고 있어서 에그시는 손쉽게 그의 팔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혹시 내 이름이 해리 하트가 아닌가?”

  “그건 아닌데 다른 이름이 있거든요.”


  에그시가 직접 해리의 손바닥을 펴서 거울에 붙였다. 에그시는 현재와 아주 닮은 기억 하나를 꺼냈다. 그 당시의 해리 하트는 친절함을 발휘하되 노련하게 그 수위를 조절하며, 자신이 주어야 할 것과 에그시가 직접 누려야 할 것을 구분할 줄 아는 지혜도 지니고 있었다. 에그시는 그 모든 것을 흉내 내려고 하지 않았다. 


  “현대판 기사만이 가질 수 있는 아주 멋진 이름이요.”


  대신 에그시는 해리에게 무조건 진실하기로 했다. 해리의 손바닥을 인식한 거울 표면 일부가 붉게 빛났다.


  불현듯 해리는 거울에 손을 대고 있는 자신이 낯설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더불어 자유로운 팔 한 쪽을 올려 있지도 않은 안경을 고쳐 올리고 싶어졌다. 그는 혼자서 거울에 붙은 손을 떼며 에그시가 종종 쓰던 뿔테안경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에그시는 안경 없이도 책이라든가 주변에 있는 간판 글씨들을 잘 읽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그 말에 대답한 것은 뜻밖에도 에그시의 핸드폰이었다. 에그시가 눈썹을 으쓱거리며 살짝 옆으로 돌았다.


  “멀린? 아니, 나한테는 연락도 하지 말라면서요?”  


  느닷없이 바닥이 흔들렸다. 해리는 당황하여 에그시를 보았으나 에그시는 태연하게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해리는 차마 전화기를 붙잡고 있는 상대방의 신경을 분산시킬 수가 없었고, 흔들리던 바닥이 아예 벽에서 떨어져 나와 아래로 내려가자 안경 얘기 따위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해리는 거짓말처럼 멀어져가는 양복점의 한 피팅룸을 올려다보았다.


  “지금요? 아니, 어, 아뇨, 다른 일은 없는데…. 록시는 뭐하는 데요? 아… 그래요? 음, 그건 좀 곤란한데요.”

  —왜, 해리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어디 아프대?

  “…어쩌면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일 수도 있죠. 지금은 멀쩡해 보이긴 해요. 아니, 괜찮을 거예요. 그럼요.”

  —너 대체 해리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멀쩡한 바닥이 승강기마냥 하강하고 나서 처음으로 에그시는 해리의 눈동자를 살폈다. 그럭저럭 침착해 보였지만 궁금한 것이 아주 많다는 기색이었다.


  “지금 해리가 본부로 가는 캡슐을 보고 있거든요.”

  —뭐라고!


  마침 하강이 완료되어 에그시는 잠시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냈다. 멀린이 소리를 지르는 소리가 핸드폰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어, 해리?”


  다시 전화에 집중해야 하지 않겠냐며 입을 열려던 해리가 눈을 깜빡였다.


  “킹스맨의 세계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