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성자와 죄인Saint and Sinner
Chapter 3. 신념의 유산A Legacy of Faith
디케이 코퍼레이션이 독자적으로 사용하는 건물의 최상층에는 창립자 에드윈 디케이의 펜트하우스가 조성되어 있다. 본디 그곳은 에드윈이 혼자서 자신의 주거지처럼 애용되다가 최근 개조를 거듭하여 에드윈이 더욱 더 좋아할 만한 공간으로 변모했다.
그 중 키패드와 철문으로 비밀스러운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는 곳은 에드윈이 대단히 아끼는 연구실이었다. 그 안에는 발렌타인이 제공해 주었던 증폭 장치가 보관되어 있었다. 다만 그것은 일종의 프로토타입이라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작동했고 휴대도 불가능하여, 에드윈이 곧 휘하의 엔지니어들을 통해 업그레이드를 받을 예정이었다. 만약 개량 작업이 끝난다면 해리 하트는 근방의 범죄자를 소탕하고 다니는 게 아니라 에드윈이 쓸모없는 바이러스로 낙인찍은 인간을 소거해야 할 것이었다.
에드윈의 연구실의 오른편에 있으며 그의 개인실과는 마주보는 자리에 있는 것은 해리의 방이었다. 가뜩이나 해리 혼자 쓰기에는 넓은 크기였는데 배치되어 있는 가구도 없어 차갑고 공허한 장소였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해리는 지친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몇 분 후 그는 책임감과도 같은 기력을 짜내서 문고리를 한 번 잡아보았다. 문은 매끈하게 열렸다. 사실 해리는 처음에는 시술, 나중에는 신경파로 인한 후유증과 피로로 인하여 자신이 갇힌 곳조차 제대로 관찰한 적이 없었다.
해리는 거실에 홀로 섰다.
에드윈도 생활하는 집이라 일단 내부에 설치된 감시 카메라는 없었다. 출입구에 꽤나 험악해 보이는 잠금장치와 열리지 않는 강화유리를 배제한다면 펜트하우스 내에서 돌아다니는 건 어렵지 않았다. 해리는 차분히 자신이 열 수 있는 문들은 모두 열어보았다. 에드윈의 침실은 잠겨 있었으나 책장과 1인용 소파밖에 없는 서재는 개방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해리는 에드윈이 자신을 틀어쥐고 있는 목적을 봉인해두고 있는 패드의 테두리를 손가락 끝으로 쓸었다. 멀린만큼 기계에 해박하지 않은 해리는 키패드에서 느낄 수 있는 촉감만 감지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 키패드가 해리의 적이자 그가 반드시 넘어야 할 장애물이라고 알려주는 건 그의 이성이었다.
해리가 느릿하게 물러났다. 그에게 남아있는 게 고작 죄책감만은 아니었다.
⁂
에그시는 미국 지부에서 임시로 지급해준 노트북 화면 위에 디케이 코퍼레이션의 공식 홈페이지를 뛰어 놓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록시는 삼촌 하나가 록히드 마틴의 CFO와 친분이 있다면서 메릴랜드 행을 자청하는 바람에 건물에 없었다.
에그시는 터치패드에 붙인 손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일에 집중하려 자세에 힘을 주고 있으면 원인 모를 답답함이 에그시를 툭 치고 가버려서 여간 성가신 게 아니었다. 에그시가 자신의 머리를 때렸다.
“으이구, 진짜!”
“무슨 일인가?”
제퍼슨이었다. 에그시가 놀라서 두 팔을 파닥거렸다. 제퍼슨은 뒤로 넘어갈듯 하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는 청년의 부산스러움이 재밌다는 듯 웃고 있다가 비어 있는 그의 옆자리를 가리켰다.
“어, 그럼요. 앉으세요.”
에그시가 제퍼슨 쪽으로 닿지 않게 다리를 모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갤러해드가 자네의 추천자라는 얘기를 들었네.”
“네. 해리가 저에게 제안을 했었어요.”
“어쩐지 그럴 것 같았네.”
말똥말똥한 에그시의 눈동자에서는 무언가 딱딱한 게 굴러다니는 소리가 날 듯했다.
“갤러해드는 킹스맨들 중에서도 개혁파에 꼽혔지. 멀린도 그렇고. 두 사람은 이 조직 안에서 일종의 실험을 해보려고 노력했네.”
“실험이요?”
“귀족만이 큰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은 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이었지. 자네 동료 이전에 있었던 두 명의 란슬롯은 모두 귀족 출신이 아니었던 걸로 아네. 각각 멀린과 갤러해드가 추천했었지.”
에그시는 적응하고 배울 의지만 있다면 바뀔 수 있다던 해리의 단언을 되새겼다. 제퍼슨은 계속 이야기했다.
“아마 두 사람 중에서도 시작점은 갤러해드였을 거야. 그는 보통 사람들, 그 시대에는 심지어 비정상이라고 손가락질 받던 사람들이 가진 능력과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똑바로 직시할 수 있는 공평함을 가지고 있었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현실적이라서 주변인들에게 자신의 가치관을 전파해 일종의 정치력을 확보하는 것도 있지 않았지.”
“그렇게 해서 멀린도 해리 편이 된 거예요?”
“내가 알기로는.”
에그시가 흥미롭다는 뜻의 음성을 흘렸다.
“갤러해드가 자네한테 미국에서 활동했던 일도 얘기해줬었나?”
“펜타곤에서 무슨 스파이 조직을 잡았다고 했어요.”
제퍼슨이 눈썹을 으쓱거렸다. 에그시는 재주 좋게 그 미동이 뜻하는 바를 알고는 탄성을 내질렀다.
“오, 진짜요?”
“그 때 내가 갤러해드를 처음 만났었지. 두 지부의 합동 작전이었거든. 일이 끝나고 나서 그와 사적으로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미국은 처음부터 공화정으로 시작한 나라다 보니 미국인인 나한테 그런 이야기를 어렵지 않게 풀어놓더군. 그 안에 정치적 의도가 정말로 없었는지는 나도 장담할 수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네.”
제퍼슨이 에그시와 더 정확하게 눈높이를 맞추었다.
“해리 하트는 신념과 철학이 아주 뚜렷하다는 인물이라는 것. 그걸 건드리고 있는 무언가가 일종의 불가항력이라 하더라도 갤러해드는 계속 저항할 걸세.”
“…맞아요.”
자신이 겪었으면서 동시에 상상하는 해리 하트에 대한 서술이 나오자 에그시는 반사적으로 그에 호응했다. 덕택에 에그시는 제퍼슨이 해리에 관한 일화를 굳이 주제로 꺼낸 저의를 한발 늦게 파악했다. 에그시가 멋쩍게 이마를 문질렀다.
“이상한 잡생각은 그만 해야겠어요. 고맙습니다.”
제퍼슨이 빙긋 웃었다. 마침 멀린이 들어와 둘은 그에게 새로이 초점을 두었다.
“제퍼슨, 여기 있었군. 관련 기관으로부터 최근 위치 이동을 보고한 위성들이 있는지 그 기록을 내려 받을 수 있겠나?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말이야.”
에그시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멀린의 쏟아지는 사고를 견디지 못하고 양쪽 눈에 물음표를 세웠다. 반면에 제퍼슨은 멀린의 생각을 이해했다.
“맙소사.”
두 사람이 밖으로 뛰쳐나갔다. 에그시가 허둥지둥 그들의 뒤를 따랐다.
⁂
멀린의 묘안은 이랬다. 대기권을 도는 위성들이 임의대로 궤도를 변경하거나 자리를 이탈한다면 대규모 사고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만일 위성을 이동시키고 싶다면 관리 당국에 알리고 승인을 받아야만 한다. 록히드 마틴이든 디케이 코퍼레이션이든 법을 준수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이니, 위치 이동을 허락해달라는 쪽이 곧 발렌타인의 동료가 숨은 회사라는 게 멀린식 정리였다.
“자료가 도착했네.”
제퍼슨이 서류를 흔들면서 문을 밀었다. 멀린이 그에게 손짓하면서 스피커폰을 켰다.
“란슬롯, 알아낸 게 있나?”
—아무래도 이쪽 사람들이 발렌타인을 돕진 않았을 것 같아요.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지 록시의 목소리는 약간씩 떨리고 있었다.
—발렌타인이 위성을 제작할 당시 록히드 마틴의 자문을 구하려고 했었나 봐요. 그런데 대략적으로 위성의 용도를 듣고 회사 측에서 그런 용도와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며 발렌타인을 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제퍼슨이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멀린에게 종이를 들이댔다. 멀린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이로군.”
제퍼슨이 입수한 미 항공우주국의 서류에는 까맣고 선명하게 디케이 코퍼레이션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멀린이 제퍼슨에게 고맙다는 고갯짓을 보내며 말했다.
“발렌타인이 썼던 위성은 디케이 코퍼레이션 소유야. 고생했어, 록시. 워싱턴으로 돌아와.”
멀린은 전화를 끊고 호흡을 골랐다. 그 때 에그시가 슬며시 팔을 들었다.
“어, 그런데요, 멀린.”
“응?”
“워싱턴 D.C하고 뉴욕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게 만만치는 않잖아요. 그 회사 뉴욕에 있던데, 저흰 이제 어떻게 해요?”
그러자 멀린이 살짝 눈동자를 위로 올리면서 제퍼슨을 쳐다보았다.
“제퍼슨, 잘 아는 부동산 업자 없나?”
⁂
에드윈이 발끝으로 문을 톡톡 밀었다. 세상의 모든 난제와 윤리적인 사유가 희미한 빛으로 화하여 해리 하트의 어깨 위로 쏟아지고 있었다. 에드윈이 과장된 몸짓으로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샌드위치?”
해리의 몸은 전혀 달싹이지 않았다.
“이 집의 칠면조 샌드위치는 뉴욕에서 제일 뛰어난 맛을 자랑하지. 아무리 먹어도 안 질린다고.”
에드윈이 해리 앞에 서서 봉지를 팔랑거렸다. 그렇지만 그 정도로 정원의 조각상처럼 반짝거리기만 하는 해리를 자극할 수는 없었고 에드윈은 입매를 비죽이며 샌드위치를 한입 물었다.
“오, 해리. 이 정도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솔직히 당신이 이태까지 죽인 사람들 숫자에 비해서 그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잖아.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한 것처럼 굴지 말란 말이야.”
내가 없으니 밥도 안 챙겨 먹는다며, 세상에서 제일 비실비실한 살인 병기가 될 참이냐는 말을 에드윈은 뻔뻔하게 사족으로 덧붙였다. 기어코 해리가 입술을 뗐다.
“…오늘은 날 무슨 용도로 이용하려고 그러는 거지.”
에드윈이 아주 반갑게 손가락을 튕겼다.
“당신이 잘만 처신한다면야 누굴 죽일 일은 없을 거야. 뭐 좀 가져와주면 돼.”
샌드위치가 들어있던 봉투 속에서 하늘색 파일이 뽑혀져 나왔다. 해리가 에드윈을 똑바로 보았다.
“당신한텐 간단하겠지?”
에드윈은 샌드위치를 오물거리면서 20분 뒤에 나오라는 명령을 던졌다. 해리는 일어나면서 침대 밑으로 무언가를 숨겼다.
⁂
맨해튼 거리는 뉴욕 중에서도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몰려드는 곳이라 매끈한 세단에서 내리는 양복 입은 남자는 시시하다고 단정해도 좋은 모양새였다. 실제로 해리는 누구의 눈총도 받지 않고 발을 디뎠다. 록펠러 센터의 아이스 링크를 아쉽다는 듯 맴돌고 있는 관광객들을 지나 해리는 서쪽으로 걸었다.
아무도 모르게 한 빌딩 안으로 잠입하여, CCTV 신호가 끊어진 4분간 건물 내에서 보안 수준이 최고로 높은 시설에 들어갔다가 감쪽같이 나오는 일은 스파이의 기본 소양이나 마찬가지였다. 해리는 조금도 주변을 두리번거리지 않고 로비의 금속 탐지기를 통과했다.
해리는 인포메이션 센터로 갔다. 퇴근 준비를 하던 여인이 가방을 잽싸게 밑으로 내리면서 웃는 낯을 띄웠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여기서 제프리 씨와 미팅이 약속되어 있었습니다만, 제가 연락도 없이 뉴욕에 늦게 도착을 하여 혹시 제프리 씨가 퇴근하셨을까 걱정이 앞서는군요.”
해리가 눈꼬리를 어정쩡하게 내리면서 불안함과 쑥스러움이 골고루 묻어나는 미소를 지었다. 여인은 흔쾌히 위기에 처한 신사를 도와주기로 했다.
“출입증 기록을 확인해 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여인의 손이 한차례 키보드를 오갔다.
“제프리 씨는 아직 사무실에 계십니다. 오셨다고 미리 연락을 드릴까요, 성함이….”
“괜찮습니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해리는 눈인사를 지으며 데스크와의 거리를 벌렸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24층까지 쾌속으로 올라갔다. 에드윈의 전문 분야는 산업 스파이 노릇을 할 때 필요한 기술들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어 해리는 많은 부분을 오롯이 감당해야 했다.
미리 외워둔 건물 내 시설 배치도에 따라서 해리는 주저 없이 왼편으로 돌았다. 열 걸음 떨어진 지점에서 사무실 문을 잠그고 나오는 이가 있었다.
“…감시 카메라 정도는 끌 능력이 있길 바라지.”
해리는 에드윈이 부착해 놓은 초소형 통신기에 대고 내뱉었다.
“제프리 씨?”
제프리라는 이름의 남자가 카드키를 챙기며 측면을 향해 몸을 틀었다.
“누구십니까?”
—앞으로 4분이야, 미스터 하트.
해리는 제프리의 등 뒤에서 반짝이고 있던 카메라의 빨간 불이 꺼진 것을 목격하자마자 순식간에 복도를 가로지르더니, 제프리가 아직 손에 들고 있던 카드키를 낚아채면서 그의 팔을 꺾었다. 남자의 온 신경이 팔의 고통에 몰리면서 휘청할 즈음 해리가 압박을 풀고 두 손을 모았다. 해리의 주먹에 뒷머리를 강타당한 제프리 씨가 쿵 하고 엎어졌다.
해리는 카드키로 보안을 해제하고 곧장 제프리의 사무실에 입성했다. 그가 잠입해야 하는 곳은 매일 바뀌는 패스워드를 회사 내 극소수에게만 알려준다는 정책이 적용되는 중요 연구실이었다. 해리는 의자에 앉지도 않고 제프리의 컴퓨터를 켰다. 그는 모니터에 불이 들어오는 찰나도 허투루 쓰지 않고 주변 검색을 통해 비밀번호를 알아냈다. 해리는 흔들림 없이 사내 네트워크에 접속했다.
1분 50초 만에 연구실에 침투할 수 있는 방책을 마련한 해리는 여전히 쓰러져 있는 제프리를 뛰어넘고 다시 엘리베이터에 탔다. 버튼을 누르는 것조차 제한된 층은 제프리 씨의 카드키로 쉽게 함락되었다. 해리는 그동안 시간을 한 번 체크했다.
에드윈이 노리는 것은 본 회사가 상용화를 앞두고 있는 미래형 고밀도 집적 회로였다. 에드윈이 그것의 사용처를 밝히지 않아도 해리는 그 회로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옭아맬 요소들을 직접 모으고 있는 처지에 대고 짧게 조소하며 승강기에서 빠져나왔다.
카드 인식 장치는 해리에게 악의 없는 초록 불빛을 내어주었다. 앞으로도 해리의 곁을 떠나서는 안 되는 소중한 신호였다.
⁂
식탁 위에 영국에 손꼽히는 신사가 제조한 마티니 두 잔이 은은한 향을 내뿜고 있었다. 에그시는 이렇게 맛있는 술은 생전 처음 마셔본다면서 쭉쭉 잔을 비웠다. 해리가 희미하게 미간을 찡그렸다.
“해리는 못 하는 게 없나 봐요.”
“방법만 알면 돼.”
“보드카가 아닌 진을 쓰고, 10초간 따지 않은 상태에서 흔든 베르무트만 있으면 된다고요? 헤에.”
에그시는 그 와중에도 해리가 가르쳐준 건 잊지 않았다는 걸 과시하듯 흥얼거렸다. 해리는 그런 에그시를 별달리 지적하지 않고 잔을 싱크대 안에 내려놓았다.
“해리, 실은요…. 전 아직도 잘 모르겠어요.”
“뭘 말이지?”
“제가 당신처럼 될 수 있을지 말이에요.”
그새 에그시의 발음이 뭉개졌다. 잔을 미리 씻으려던 해리는 생각을 고쳐먹고 에그시의 맞은편으로 돌아왔다.
“네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증거를 만들기엔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이로군.”
해리는 나름대로 그가 지금까지 해낸 일에 박수를 보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꺼낸 대사였으나, 에그시는 그걸 정 반대로 이해한 것 같았다. 에그시가 고개를 수그리고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해리 말마따나 언제까지고 뒷골목을 전전할 필요는 없죠. 벗어날 수만 있다면 누가 그 기회를 마다하겠냐고요.”
해리는 침묵 속에서 에그시에게 착지한 눈빛을 거두지 않는 것으로 사려 깊은 청자의 자세를 연출했다. 영양가 없이 머리카락을 뜯던 에그시가 탁 소리가 나게 팔을 내렸다.
“그런데 록시는 말이에요, 찰리나 다른 놈들처럼 자기 배경만 믿고 콧대 높게 구는 그런 애가 아니에요. 성실하고 자기 할 일 똑 부러지게 잘 하고, 그러면서 또 얼마나 착한데요. 록시는 정말 좋은 애에요.”
마티니가 에그시의 마음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진실 하나를 밖으로 툭 내보냈다.
“…만일 다른 게 다 똑같다면 저는 록시보다 뒤질 수밖에 없어요.”
에그시는 할 말을 끝내고도 해리를 직시하지 못했다. 에그시는 손가락을 꼼지락대거나 입술을 축이는 등 온갖 부산한 동작을 이어가면서도, 자기 자신보다 더 자신을 신뢰해주는 은인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해리는 바로 앞에서 그 모든 것들을 포용하고 있었다.
“에그시, 날 봐.”
에그시가 더듬더듬 얼굴을 들었다.
“모든 성자에게도 과거는 있는 법이지. 모든 죄인에게도 미래가 허락된 것처럼.”
예의와 규칙과 임무에 묶여 있는 신사로서의 정체성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해리는 다양하고 감정적인 표정을 짓는 법을 많이 잃어가고 있었다. 이번에도 해리의 눈매와 입술은 담담했다.
“죄인에게도 있는 미래가 너에게 없을 리가 없단다, 에그시. 아직 다가오지 않은 시간을 속단하지 말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그시는 해리로부터 세상 모든 존재에게 공평한 빛만큼이나 영롱한 선의를 한 아름 안을 수 있었다.
에그시는 그 말을 충실히 실현시켜 세계를 구했다. 이제 그것은 해리 하트의 머릿속에 되살아났으며, 그의 몫으로 내려온 절대적 이정표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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