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에서 나오는 완결성과 메시지 : <다크 나이트> 3부작을 중심으로


Themes and Messages from the Structure

: Focusing on The Dark Knight Tri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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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배트맨 비긴즈> : 타락한 도시에 찾아온 불완전한 영웅

  2. <다크 나이트> : 영웅이 만난 가장 지독한 한계와 추락

  3. <다크 나이트 라이즈> : 평범한 사람들이 올라선 보편적 영웅의 위치

Ⅲ.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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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서론


  뤼미에르 형제(The Lumiere brothers)가 촬영기와 영사기를 발명한 이래 나타나기 시작한 영화는 이제 콘텐츠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되었다. 국적을 논하지 않더라도 영화에는 다양한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관객이 진지하게 고민을 하면서 보는 영화란 베니스, 베를린, 칸 영화제와 같은 세계 3대 영화제에서 각광받는 각종 예술 영화들이라든가 난해하고 작가주의적인 감독들의 작품들, 혹은 저예산 독립영화들이라고 오랫동안 받아 들여져왔다.


  그러나 2000년에 메시아사상과 동양의 호접지몽 등을 끌어들인 워쇼스키 남매(The Wachowskis)의 작품 <매트릭스>(The Matrix)가 등장하면서 상업적 자본과 손잡은 영화도 놀랄 만한 깊이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국내에는 아예 이 영화 하나만을 가지고 여러 각도에서 분석을 시도한『철학으로 매트릭스 읽기』같은 단행본이 나와 있을 정도이며, 해외에서는 <매트릭스>를 플라톤(Plato)의 동굴의 우화와 데카르트(René Descartes)의 이론을 끌어들여 해석한 흔적도 찾을 수 있기도 하다.[각주:1] 이후 대형 배급사와 협력하면서도 메시지를 놓치지 않는 할리우드 영화가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마침내 2008년, 크리스토퍼 놀란(Christopher Nolan) 감독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가 등장하여 철학적 블록버스터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열었다. 이에 관하여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로 유명한 샘 맨데즈(Sam Mendes) 감독은 가상의 배경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스릴 넘치고 오락적이면서도 우리의 현재에 대해 많은 걸 말해줄 수 있게(thrilling and entertaining and has a lot to say about the world we live in)” 되었다고 평하기도 했다.[각주:2]


  이 글에서 다루게 될 배트맨(Batman)은 시작부터 보통의 히어로들과는 달랐다. DC 코믹스(DC Comics)가 처음으로 탄생시킨 슈퍼맨(Superman)이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두면서 슈퍼맨과 비슷한 캐릭터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는데, DC는 이러한 상황에서 슈퍼맨과는 차원이 다른 또 하나의 캐릭터를 만들어 시장을 선도해나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슈퍼맨이 과거에 일구어놓았던 긍정적인 이미지를 완전히 뒤엎는 ‘초능력 없는 영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작품이 워낙 인기를 얻어 만화책을 보는 주요 독자층인 어린 아이들을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배트맨은,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정도로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두르고 있었다.[각주:3] 그러나 코미디와 과장된 만화적 요소를 섞은 1960년대 <배트맨 TV쇼>(Batman, 1966)가 인기몰이를 했고, 만화들을 사정없이 비판하는 데에 초점을 두었던 프레드릭 웨덤(Fredric Wertham) 박사의 『순수에의 유혹』(Seduction of Innocent) 이라는 책에서 배트맨이 희생양처럼 집중포격을 받는 등 여러모로 배트맨의 노선을 변경해야 할 상황들이 벌어지게 된다.[각주:4]


  배트맨 실사영화 시리즈도 원작의 변화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호러적인 분위기와 그로테스크한 소재에 능했던 팀 버튼(Tim Burton)이 1989년 처음으로 배트맨 영화의 메가폰을 잡을 수 있었던 건 모두 그와 어울리는 어두운 배트맨이 원작에서 존재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영화에서 등장하는 악역인 조커(The Joker)가 배트맨의 부모님을 죽인 범인으로 나오는 등 만화책과 일부 다른 점이 있으나, 시종일관 칙칙하고 컴컴한 공간적 배경에서 진행되는 배트맨과 악당의 대립은 원작과 잘 맞아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다. 반면에 원작 자체가 방향 자체를 틀어버리게 된 배경 속 등장한 조엘 슈마허(Joel Schumacher)의 1995년작 영화 <배트맨 포에버>(Batman Forever)나 1997년 <배트맨 앤 로빈>(Batman & Robin)에서 등장하는 배트맨은 다소 유치하고 희화적인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흘러 1986년 프랭크 밀러(Frank Miller)가 『다크 나이트 리턴즈』를 발표하면서 본래의 무겁고 어두운 배트맨의 정체성을 부활시켰다. 범죄를 소탕하는 일에서 은퇴한 주인공이 55세의 나이에 다시 배트맨으로서 가졌던 자신의 의무와 본성을 억누르지 못하여 다시 배트맨으로 부활한다는 얘기를 담고 있는데, DC 코믹스에서는 이 작품이 가진 무거운 분위기와 메시지를 아예 “사고를 자극하는 액션 스토리(thought-provoking action story)”라는 문구를 달아 부각시켰다. 2005년에는 타임지(Time)가 “영어로 쓰인 최고의 그래픽 노블 10선(the 10 best English language graphic novels ever written)”에 선정될 정도로 그 작품성을 인정받았으며[각주:5] 원래 배트맨 특유의 어두운 분위기를 좋아했던 팬들의 큰 지지를 받은 밀러의 작품은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에도 많은 영향을 주게 된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의 수퍼 8mm 카메라를 가지고 놀면서 자라긴 했지만, 영화를 전문적으로 공부한 적은 없으며 영문학을 전공한 본인의 대학인 유니버시티 칼리지 오브 런던의 필름 소사이어티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흑백 단편영화 몇 개를 비롯, 저예산 독립영화를 만들던 인물이었으며 여전히 독립영화를 찍듯 모든 촬영 현장에 있으면서 자신의 눈으로 카메라를 확인하는 감독이다. 그는 스스로도 “7살 때 카메라를 가지고 찍던 것과 독립 영화, 블록버스터 영화 등 어떠한 규모의 영화도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고 밝혔듯[각주:6] 영화를 만드는 데에 있어서 방법론의 차이가 없다고 여기기도 한다. 처음부터 남달랐던 슈퍼히어로, 그리고 예술 영화의 감각이 몸에 밴 감독이 만나 탄생한 배트맨 3부작은 상업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얻어내면서 다른 감독들과 작품의 영감이 되었고 현재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감독이 밝히기를 “모든 배우들과 제작진이 첫 영화에 그들의 역량을 쏟아 부었다(The entire cast and crew put all they had into the first film)”며 “남겨둔 것이 없었던(Nothing saved for next time)” 만큼[각주:7] 애초부터 배트맨 영화를 3부작(Trilogy)으로 만들 계획은 없었다지만, 결국 그의 배트맨은 3부작의 구성을 갖추면서 각각의 영화도 훌륭하면서도 전체적으로 묶어 보았을 때도 빼어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실 3부작 형태는 상당히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 문학 쪽을 살펴보자면 고대 그리스 시대에 쓰인『오레스테이아』(Oresteia)가 3부의 형태를 갖춘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음악에서는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가 있고, 영화사로 눈길을 돌려 보자면 조지 루카스(Geroge Lucas)의 <스타워즈>(Star Wars) 시리즈가 오리지널 3부작과 프리퀄 3부작으로 남아 있다. 이론적으로는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가 『시학』(Poetics)에서 처음, 중간, 끝으로 짜이는 3막 구조를 주장한 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세 가지 조각으로 이뤄지는 구조는 주요한 상황 혹은 액션의 전과, 그 도중, 그리고 그것의 후에 일어나는 일들 혹은 상황이 해소된 마무리를 요긴하게 연결시킬 수 있게 하며 그만큼 안정감이 있고 유려하다.[각주:8]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은 첫 편에서 남다른 한 사람이 창조해낸 영웅의 탄생을 알리고 이후는 이 영웅이 위기와 한계에 맞닥뜨리며, 최종장에서는 이에 대한 하나의 해결책으로서 보편적 영웅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구조에서 비롯된 거대한 테마를 완성해 나가는 데 여러 캐릭터들이 적절한 특징과 역할을 가지고 이야기를 구현하고 있다.



Ⅱ. 본론

1. <배트맨 비긴즈> : 타락한 도시에 찾아온 불완전한 영웅


  1997년 <배트맨 앤 로빈>이 그야말로 처참하게 실패하고 난 뒤 배트맨 프랜차이즈를 소유하고 있던 워너브라더스 사(Warner Bros. Pictures)에서는 유아적인 분위기를 탈피한 새로운 배트맨을 구상하게 되었다. 다른 쪽에서는 1998년 첫 장편영화 <미행>(Following)에서부터 로테르담 국제 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한 크리스토퍼 놀란이 2000년에 완벽하게 새로운 비선형적 구조를 선보인 <메멘토>(Memento)를 내놓으면서 더욱 주목을 받게 되었고, 처음 워너브라더스에 의해 배급된 2002년 작품 <인썸니아>(Insomnia)로 워너사의 눈에 띄어 배트맨 영화에 참여하게 된다. 당시 겨우 33살에 불과하던 놀란은 독립 영화 세계에 익숙했기 때문에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리즈물에 대한 특별한 열망은 없었긴 했으나, 2005년에 모습을 드러낸 그의 <배트맨 비긴즈>(Batman Begins)는 국내에서 아주 큰 조명을 받지는 못했던 것과는 다르게 북미에서는 2억 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리는 등 호평을 얻으며 차기작의 가능성을 열게 된다.


  <배트맨 비긴즈>는 그동안 다른 배트맨 영화가 집중하지 않았던 배트맨의 탄생 자체에 초점을 맞추었다. 여기에 코믹스에서 주인공인 브루스 웨인(Bruce Wayne)의 부모님이 사망하고 난 뒤 갑자기 몇 십 년이 흐른다든가, 박쥐 하나가 창문을 깨고 들어왔다고 ‘박쥐가 되어야겠다!’ 라고 단정 짓는 등 원작에서 개연성이 떨어지는 부분에 대해서도 연구를 놓치지 않았던 감독의 리얼리티 중시 성향이 곁들여져, 영화는 배트맨의 현실적인 기원과 발전을 다루게 되었다.


  영화에서는 브루스 웨인이 하필 박쥐를 자신의 이미지로 삼은 것을 어렸을 때 받은 트라우마로 설정하고 있다. 숨바꼭질을 하던 어린 브루스가 우연히 우물 밑에 숨었다가, 거기서 박쥐가 튀어나오는 일이 있었는데 그 뒤로 브루스는 그 사건을 지속적으로 떠올리거나 악몽을 꾸는 등 박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린다. 브루스의 부모님이 강도를 만나 살해당한 것도 브루스가 오페라를 보다가 다시 박쥐 생각이 나서 공연을 보기가 힘들어졌기 때문이다. 후에 장성한 브루스 웨인은 고담 시(Gotham City)의 범죄자들에게 대항할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갖추어야 할 또 다른 모습을 고민한다. 극본의 초안에서는 웨인이 “선을 지원해줄 수 있고 악당들을 두려워하게 할 만한 무엇”이 필요하다며 박쥐의 의미를 부각시켰는데 영화에서는 그보다 간단하게 나왔다.


ALFRED : Why bats, Master Wayne?

WAYNE : Bats frighten me. It's time my enemies shared my dread.


알프레드 : 왜 하필 박쥐입니까, 주인님?

웨인 : 내가 박쥐를 무서워하니까요. 내 공포를 다른 악당들도 맛봐야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즉 자신의 공포를 악당들을 제어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겠다는 아이디어를 떠올리면서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배트맨’으로 설정하게 된다. 본래 박쥐는 배트맨이 수정하고자 하는 타락한 도시 고담의 몫 말고도 박쥐에 대한 기억 때문에 공연장을 나오겠다고 부모님을 부추겨서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가게 된 웨인의 과오의 상징이지만, 스스로 그것이 됨으로써 자신의 죄책감을 의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점을 나타내기도 한다. 유독 이 영화에서 박쥐가 푸드덕대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초반에 그것이 브루스가 떠올리는 공포에서 비롯되었다면 후반부에서는 특수 장비를 가지고 박쥐들을 이용하는 모습이 나와 박쥐에 대한 브루스의 내적 변화를 짐작하게 한다.


  여기에 범죄자들을 두려워하게는 만들겠지만 영화 상 설정으로는 탄생 처음부터 살생을 하지 않는 배트맨은 무척이나 선한 모습을 안에 담고 있다. 영화에서는 웨인의 강력한 선을 애써 증명하려고 하지 않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헌신적으로 실천했던 아버지의 영향과 그의 가문이 이룬 고담 시를 솔선수범하여 수호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이 작용했을 수도 있으리라 판단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배트맨이 극단적인 폭력으로서 도시를 휘어잡으려고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가 도시를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 그의 도덕적 의식을 잘 드러내 주는 장면이 있다.


WAYNE : I'm no executioner.

RA'S AL GHUL(HENRY DUCARD) : Your compassion is a weakness your enemies will not share.

WAYNE : That's why it's so important. It separates us from them.

RA'S AL GHUL(HENRY DUCARD) : As Gotham's favored son... you will be ideally placed to strike at the heart of criminality. Gotham's time has come. Like Constantinople or Rome before it... the city has become a breeding ground for suffering and injustice. It is beyond saving and must be allowed to die.

WAYNE : I will go back to Gotham and I will fight men like this... but I will not become an executioner.


웨인 : 전 처형관이 아닙니다.

라즈 알 굴(헨리 듀카드) : 악인들은 너한테 그런 동정 따위 베풀지 않아.

웨인 : 그래서 중요한 겁니다. 그 사실이 우리와 악인을 구별하게 해요.

라즈 알 굴(헨리 듀카드) : 고담 시의 황태자로서 너는 그 곳의 악을 응징하기에 적격이야. 고담은 이제 끝났어. 그 옛날 콘스탄티노플이나 로마처럼, 온갖 고통과 부당함의 온상이 됐지. 구제하기엔 너무 늦었다.

웨인 : 저는 고담으로 돌아가서 범죄자와 싸우겠지만, 처형관은 되지 않을 겁니다.


  웨인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은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굵직한 악역으로 등장하면서 그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기도 한 헨리 듀카드(Henry Ducard), 곧 라즈 알 굴(Ra's al Ghul)이다. 웨인은 그에게서 공포심을 이용하는 법을 배웠으나 죄인을 처형하라는 명령은 거부하고 그 곳에서 도망쳐 나온다. 구제할 길 없는 쇠락한 도시를 정화하겠다는 명분으로 고담 시를 파괴하고 시민들을 공포로서 결속시키겠다는 그의 출현으로, 브루스 웨인은 오히려 자신의 신념과 도시를 향한 믿음을 공고히 하게 된다. 또한 무차별적 폭력을 거부하면서 제왕적이지 않고 인간적으로 선한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을 다지게 된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공포에 의지하는 불완전한 캐릭터가 또 하나의 권력이자 강자로 부상하게 됨으로써 발생하는 개인적인 영웅[각주:9]에 대한 한계가 후편 <다크 나이트>에서 다뤄지게 된다. 배트맨은 여기서부터 명백히 훌륭하나 복수를 위한 욕구를 간직하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일단 ‘시작(Begins)’이라서 배트맨의 정체성 확립에 초점을 두었으므로 그러한 성질이 명백하게 나타나지는 않는다.



2. <다크 나이트> : 영웅이 만난 가장 지독한 한계와 추락


“Batman” isn’t a comic book anymore. Christopher Nolan’s “The Dark Knight” is a haunted film that leaps beyond its origins and becomes an engrossing tragedy. It creates characters we come to care about.


배트맨은 더 이상 단순한 만화책이 아니게 됐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는 그 기원을 뛰어넘고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비극이 된,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는 영화이다. 이 작품은 우리가 관심을 두게 된 인물들을 창조했다.


  로저 에버트(Roger Ebert)가 이 영화를 평하면서 붙인 말이다. 이뿐만 아니라 2008년에 등장한 <다크 나이트>는 끝없는 찬사와 사랑을 받았다. 전 세계 영화팬들이 애용하는 사이트 IMDb(The Internet Movie Database)에서 자체적으로 매긴 순위에서는 아직도 상위 250개의 영화들 중 7위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으며, 미국 유명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Rotten Tomatoes)에서는 시사회 직후 신선도 100%를 달성했다. 아직까지 그 지수는 94%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워너브라더스 사에서 준비 중인 슈퍼맨 리부트 영화인 <맨 오브 스틸>(Man of Steel)의 방향 설정에도 <다크 나이트>가 큰 영향을 미쳤다(아예 이 영화의 원안과 제작을 크리스토퍼 놀란이 맡았다). 이것 외에도 <다크 나이트> 이후 다소 무겁고 심각한 블록버스터들에게 당연히 영향을 주었으며[각주:10] 김종철이 <혹성탈출 : 진화의 시작>을 평할 때는 아예 “원숭이의 <다크 나이트> 버전”이라고 함으로써 영화 자체가 일종의 기준이자 패러다임으로 굳혀졌을 정도이다.


  배트맨의 등장으로 확실히 고담 시는 다소 안정을 찾은 듯이 보인다. <배트맨 비긴즈>에서도 악당으로 등장했던 스케어크로우(Scarecrow)가 이 영화의 초반 마약을 거래하면서 “배트맨 때문에 남은 마약상은 나밖에 없다(Assuming Batman left anyone else to buy from).”고 말한 것처럼 배트맨 덕분에 마약상들은 거의 사라져가는 처지이며, 조직 폭력배들은 제대로 기를 못 펴는 상황이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등장한 캐릭터가 바로 조커라는 악당이다. 조커의 등장은 <배트맨 비긴즈>의 마지막에서 배트맨의 조력자이자 경찰인 제임스 고든(James Gordon)이 조커 카드를 보여줌으로써 이미 예고된 바가 있는데, 배트맨이 악당들을 잠재우기 위한 올바른 공포로서 행동하며 범죄는 위축되었지만 오히려 활동이 곤란해진 다른 범죄자들은 배트맨을 퇴치하기 위해 조커라는 최악의 캐릭터를 끌어들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트맨의 존재가 조커만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며, 배트맨(The Dark Knight)과는 다르게 고담 시의 백기사라고 불리는 지방 검사 하비 덴트(Harvey Dent)가 나타난 상황이 본 영화의 배경이다.


  조커와 하비 덴트는 그 성격은 매우 다르지만 결국은 배트맨으로부터 비롯된 존재들이다. 먼저 조커의 경우, 배트맨이 발생시킨 공포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대항악이다. 그래서인지 조커는 논리적이지 않으며[각주:11] 아나키스트적 자유분방함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즉 작용(배트맨)이 있으면 반작용(조커)이 있다는 명제로 존재 자체를 입증할 수는 있지만 그의 법칙을 끌어낼 수는 없다는 것이다. 배트맨과 직면하고 나서 조커는 “네가 나를 완전하게 만들어(You complete me)”라는 대사를 던지면서 배트맨과 자신의 경계를 모호하게 해 선과 악의 밀접성을 드러내는가 하면[각주:12], 각종 말들로 배트맨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THE JOKER : Don't talk like one of them― you're not, even if you'd like to be. To them you're a freak like me... they just need you right now. Their morals, their code... it's a bad joke. Dropped at the first sign of trouble. They're only as good as the world allows them to be. You'll see― I'll show you... when the chips are down, these civilized people... they'll eat each other.


조커 : 경찰들처럼 말하지 마. 네가 원해도 넌 절대 그들처럼 될 수 없어. 보통 사람들에게 너는 나 같은 별종이야. 지금 당장 널 필요로 할 뿐이지. 저들의 도덕심, 윤리? 다 질 낮은 농담에 불과해. 말썽이 난다 싶으면 바로 손을 떼 버려. 그들은 세상이 허락한 만큼만 선할 수 있을 뿐이야. 보여줄게. 입장이 난처해지기라도 하면 소위 문명인이라는 인간들이 서로를 잡아먹을 거야.


  이처럼 조커는 그가 간직하고 있는 고담 시에 대한 믿음에 더해 배트맨을 고고한 영웅의 자리에서 끌어 내리고 그를 끊임없이 시험하려고 든다. 조커의 언행뿐만 아니라, 조커가 끼어들게 된 상황 자체가 이른바 배트맨식 공포정치의 한계를 기반에 두고 있기 때문에 그는 전편에서 다져진 배트맨의 근간을 무섭게 뒤흔드는 막강한 적수라고 할 수 있다.


  다행히 배트맨에게 조커라는 골칫덩이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공적인 정의가 그럭저럭 기를 펼 수 있는 고담 시를 일구어낸 배트맨의 활약에 힘입어, 투철한 정의감으로 무장한 하비 덴트는 배트맨에게서 비롯된 선으로 배트맨과 뜻이 같은 동료 격의 캐릭터이다. 브루스 웨인 스스로도 그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WAYNE : The day you once told me about, the day when Gotham no longer needs Batman. It's coming. It's happening now- Harvey is that hero. He locked up half the city's criminals, and he did it without wearing a mask. Gotham needs a hero with a face.


웨인 : 네가 언젠가 말했던, 고담에 더 이상 배트맨이 필요 없는 날이 오고 있어. 바로 지금 벌어지고 있다고. 하비가 그 히어로야. 그는 마스크를 쓰지 않고도 이 도시의 범죄자 반을 감옥에 넣었어. 고담 시에는 그런 영웅이 필요해.


  “가면을 쓰지 않고도” 수 백 명에 달하는 범죄자들을 감옥으로 몰아넣은 그가 있어 브루스 웨인은 배트맨이 없는 고담을 꿈꾸게 되었고, 덴트가 고담 시의 시장 선거에 출마하게 되면서 그 가능성은 커질 것 같았다. 공포스러운 배트맨의 존재가 어느 정도 효과가 있을 수는 있으나 배트맨이 도시를 통치할 수는 없으므로 배트맨은 더욱 하비 덴트같은 인물을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하비 덴트의 의미는 그가 조커의 계략으로 연인과 얼굴의 반쪽을 동시에 잃으면서 ‘투 페이스(Two-Face Harvey)’로 변모하게 될 때 더 깊어진다. 하비 덴트는 배트맨조차 인정한 가장 선한 사람이고, 조커도 그걸 알고 있었기에 덴트의 타락을 부추겼다. 심지어 투 페이스가 된 덴트는 본래 양면이 같았으나 화재사고로 인해 한쪽 면이 새카맣게 변한 동전을 가지고 사람의 목숨을 좌우하는데, 밝고 어두운 동전과 더불어 그의 표면적 모습 자체도 선악의 공존과 그 밀접함을 드러내 조커와 비슷한 특성을 갖게 되었다.


  영웅과 악당이 모두 절대선이라고 단정했던 그가 복수심에 사로잡혀 범죄와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배트맨의 이상을 뒤흔드는 일이며 고담 시와 그 시민들에 대해 배트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마저도 흔들리게 만들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다. 비록 배트맨은 끝까지 백기사로서의 덴트의 위치와 이제 막 피어나기 시작한 고담의 도덕성을 지키려고 덴트가 저질렀던 죄를 모두 뒤집어쓰기로 하지만, 이러한 행동 자체가 하비 덴트가 표현하는 상징과 가능성을 보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배트맨이 어떤 식으로든 인정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자신이 아닌 변절한 인물을 선의 아이콘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는 그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영화에서 덴트는 가장 직접적으로 배트맨을 범죄자로 끌어내리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 배트맨이 완벽한 영웅으로 발돋움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했다.


  한편 하비 덴트는 배트맨으로부터 발전한 인물이지만 또한 배트맨의 미래상이 될 수도 있는 캐릭터였다.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굳게 밀어 붙일 의지가 있다는 점, 게다가 웨인과 같은 여자를 사랑했다는 점이다. 조커의 음모로 소중한 여인을 잃은 건 배트맨도 마찬가지이고 그로 인해 배트맨은 잠시 위축되기도 한다. 하지만 배트맨은 자신의 영웅적 정체성을 고수했고, 그렇기에 덴트는 또한 배트맨이 가진 위대한 면모가 돋보이게 해준다. 하지만 고든이 평한 것처럼 마땅히 존재해야 하나 당장은 받아들여지지 않는 영웅(He's the hero Gotham deserves but not the one it needs right now)으로 남아 배트맨은 씁쓸하게 뒤돌아 설 수밖에 없었다.



3. <다크 나이트 라이즈> : 평범한 사람들이 올라선 보편적 영웅의 위치


  이후 4년 만에 등장한 놀란 감독의 마지막 배트맨, <다크 나이트 라이즈>(The Dark Knight Rises)는 개봉 전부터 어마어마한 기대감을 모았고 3부작이라는 구성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야기를 훌륭하게 마무리 지었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크 나이트>에서 고담 시에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걸 증명하기 위해 하비 덴트의 백기사적 이미지를 살리고, 스스로 범죄자가 된 배트맨은 8년간 잠적했다. 물론 배트맨의 희생으로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하비 덴트의 죽음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리고 있으며(이 행사의 후원자는 다름 아닌 브루스 웨인이다) ‘덴트 특별법(The Dent Act)’이라는 것이 만들어져 조직범죄나 흉악한 범죄자들은 고담 시에서 거의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영화의 초반, 이 추모식에 참석한 경찰청장 제임스 고든은 배트맨을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덴트에 관한 진실을 아는 인물인데[각주:13] 연설 자리에서 진실을 밝히려다가 말을 바꾼다. 그러나 후에 이것이 이 영화의 악당인 베인(Bane)에 의해 악용되면서 개인(배트맨)이 강제적으로 주도한 평화가 깨지고 만다. 8년의 은둔 생활과 맞바꿨던 평화의 소멸과, 세월이 흘러 악당 베인과의 전투 도중 허리가 부러지는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육체적인 면모에서까지 밀려버린 배트맨은 그야말로 최악의 위기를 맞는다.


  여기서 감독은 단지 영웅의 우울함을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의 해결책을 보여준다. 바로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을 넘어선 ‘보편적 영웅’의 등장이다. 이것이 이 영화를 채우고 있는 희망적인 도약(Rising)이며, 각 캐릭터들은 그 나름의 입장에서 일종의 새로운 진화 혹은 도약을 경험했다. 놀란이 인터뷰에서 ‘라이즈(Rise)’라는 단어가 “몇몇 요소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로 사용된다(There are several aspects to the significance of the term RISES to the film).”고 밝혔던 것처럼[각주:14], ‘라이즈’는 이 영화를 해석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이며 영화에서 드러나는 주제 의식과도 밀접하다. 또한 <배트맨 비긴즈>에서 브루스의 아버지가 우물 밑으로 떨어진 아들을 구해내면서 던졌던 질문, 즉 “우리는 왜 아래로 떨어질까(Why do we fall?)”에 대한 대답을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먼저 배트맨의 상황을 살펴보자. 놀란의 3부작에서 배트맨의 추락은 실로 지속적이었다. <배트맨 비긴즈>에서 비극적으로 부모님을 잃고 사랑하는 여인 레이첼 도스(Rachel Dawes)에게 일종의 거절과 비슷한 말을 들었던 브루스 웨인은, 절망으로부터 고담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다크 나이트>에서 자신을 끔찍한 살인마로 격하시키기에 이른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도 배트맨은 끊임없이 당하기만 한다. 2005년부터 추락을 거듭한 배트맨이 날아 오른(Rise) 것은 고작 영화의 후반부, 한 20분 남짓밖엔 되지 않는다. 이토록 배트맨은 안타까울 정도로 추락하지만 베인이 시민들과 죄수들을 선동하기 위해 하비 덴트의 이면을 밝힌 일 덕분에 역설적으로 고담 시의 영웅은 배트맨밖에 남지 않는 상황이 되었으며, 자신이 시민들에게 거짓된 희망을 심었으므로 그것을 대체할 새로운 상징이 필요해졌기 때문에 자신의 목숨을 내어 주는 연출을 통하여 배트맨은 고담 시의 유일하고도 진정한 영웅으로 격상되었다. 영화 속에서 배트맨이 기체에 자동 비행 기능을 이미 추가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폭탄을 끌고 간 것은 그가 고담에게 주어야 하는, 손상되지 않은 진정한 도시의 선을 주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다(영화에서 그가 “아직 내 모든 것을 주지 않았다(Not everything, not yet)”라고 말하는 장면도 있다). 그리고 브루스 웨인을 배트맨과 분리시킴으로써 그는 자신을 정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요란하게 치장해 왔던 인생에서 진정성을 담은 삶으로 이끌 수가 있었다.


  한편 보편적인 상징이 된 배트맨을 계승할 인물로 우뚝 선(Rise) 인물이 있는데 바로 존 블레이크(Robin John Blake)이다. 엔딩에서 <배트맨 비긴즈>에서 보여줬던 장면을 그대로 가져와, 즉 불빛 하나만 들고 박쥐들의 무리에서 서서히 일어나는 존 블레이크의 모습을 나타낸 크리스토퍼 놀란은 명백하게 존 블레이크가 영웅으로서의 상승을 결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배트맨 코믹스에서는 등장한 바가 없는 평범한 젊은 형사 캐릭터이다. 물론 고든에게 당신의 손도 더럽다고 말한 냉정한 선언, 부모님을 모두 잃었다는 과거, 아이들을 다시 버스에 태우면서 거짓일지언정 그들에게 실낱같은 희망은 허락해야 한다는 모습까지 여러 요소를 종합해 봤을 때 영화상에서는 존 블레이크가 배트맨의 유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이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복선들이 엿보이기도 한다.[각주:15] 그러나 배트맨이 범죄를 처단하고자 과거에 했던 고군분투를 알면서도 배트맨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켠 부청장 옆에서 운전만 해야 했던 한 명의 경찰 존 블레이크는 법이 밝힐 수 없는 진실의 영역을 깨닫고 능동적으로 영웅의 길을 다짐한다. 존 블레이크는 개개인이 영웅으로 올라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대표하면서, 동시에 영원히 지속될 히어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훌륭한 심볼이며 감독의 주제의식을 느낄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여기서 바다로 곤두박질친 배트맨의 추락(Fall)이 존 블레이크로 대표되는, 바로 평범한 인간이 영웅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을 영화에서 보여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그야 말로 전작에서 언급되었던 문제점들에 대한 해법이다. 배트맨이 마지막에 건넨 말로써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임을 알게 된 고든 청장도, 이미 그것을 알고 있었던 존 블레이크도 ‘브루스 웨인=배트맨’ 이라는 사실을 밝히지 않으며 오히려 고든은 고담 시의 영웅을 오직 브루스 웨인이라는 특정 인물이 아니라 “배트맨(It was Batman)”으로 한정시킨다. 아마 이후에 고담 시에 다시 박쥐 가면을 쓴 자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존 블레이크다. 하지만 배트맨은 말한다.


BATMAN : A hero can be anyone. That was always the point. Anyone. A man doing something as simple and reassuring as putting a coat around a little boy’s shoulders to let him know that the world hadn’t ended...


배트맨 : 영웅은 누구나 될 수 있어. 아무나, 그게 제일 중요한 거야. 세상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면서 어린 소년을 안심시키면서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는 간단한 행동을 한 사람도 영웅이 될 수 있어.


  이처럼 “부모님을 잃은 아이에게 아버지의 코트를 건네며 작은 위로를 전한” 어느 경찰(제임스 고든)부터 시작하여 모든 사람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혹은 누군가에겐 영웅으로 라이징(Rising)할 수 있음을 크리스토퍼 놀란은 보여주었다.


  소소하게 덧붙이자면 영화에서 등장한 또 한 명의 유명한 캐릭터, ‘캣우먼(Catwoman)’ 셀리나 카일(Selina Kyle)도 다뤄볼 수 있다. 엔딩에서 브루스와 함께 피렌체에서 누구보다 자유로운 모습으로 앉아 있던 셀리나의 형상은 그녀 역시 발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새 인생을 시작하고 싶어도 자신의 전과 기록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며, 결국 개인의 과거 기록을 모두 지울 수 있는 프로그램 ‘클린 슬레이트(Clean Slate)’로 자신의 과거를 모조리 청산한 다음에야(영화에 직접적으로 나타나진 않지만 정황상 추정이 가능하다) 새로운 출발을 이루어 낸 셀리나의 라이징은 다소 불완전하게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녀 역시 나름의 진전을 이루어낸 것은 사실이다.


  그 정도에 상관없이,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슈퍼히어로의 위치가 격상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웅 배트맨은 사회에서 죽은 인물이 되었다.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전보다 고귀한 가치를 갖게 된 것은 가면을 쓰고 어느 순간 나타나 범죄자들을 소탕하는 배트맨이 아닌 한 남자, 경찰, 도둑으로 살아가던 여인이다. 게다가 영화 후반부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육탄전에서 베인의 수하들과 전력을 다해 싸우는 것은 고담 시의 경찰들이다. 배트맨 대신 전면으로 등장하게 된 이들의 모습이야말로 감독이 첫 편에서부터 서서히 끌어오던 위기와 절망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이자 가능성이다. 비록 <다크 나이트>보다는 조금 완성도가 부족하다는 평을 받는 영화지만, 3부작이라는 거대한 틀에서 마지막을 맡은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구조적인 측면에서 충분히 깔끔한 마무리를 보여주었다.



Ⅲ. 결론


  정리해 보자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은 구조를 충실하게 존중한 덕분에 더욱 그 가치가 빛을 발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3부작의 첫 번째 단계인 <배트맨 비긴즈>에서는 처음부터 메시지와 스펙터클에 대한 욕심을 부리기보다는, 배트맨의 탄생 과정을 차분하게 짚어 나가고 앞으로 활약할 배트맨이라는 캐릭터의 특성과 의미를 차곡차곡 쌓았다. 죄책감을 극복하고 도시를 구원하겠다는 의지에 휩싸인 한 인간이 비범한 결심과 신념으로 영웅이 되었지만, 통일되지 못한 이중성과 아무리 굳은 의지의 개인이라도 가질 수밖에 없는 균열을 교묘하게 파고드는 악당을 만나면서 그는 몰락하고 말았고 그 과정이 <다크 나이트>에서 상세하게 그려졌다. 그리고 시간의 경과로 인하여 몸도 약해지고 사회적 입지는 더더욱 약해진 영웅이 마지막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그 한계와 절망에 맞서고, 옛날의 브루스 웨인이 그랬던 것처럼 평범한 이들이 그의 빈자리를 대신할 또 다른 영웅의 삶을 결심하면서 영웅이라는 상징 자체는 순환하면서 영원하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전달했다. 3부작의 마지막을 담당한 <다크 나이트 라이즈>는 위와 같은 결말을 훌륭하게 이끌어 감독의 배트맨 시리즈를 더 돋보이게 하였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구조적인 측면에서 작품을 살펴본 것이기 때문에 보다 더 깊게 파고들 수 있는 부분, 예를 들어 흔히 프랑스 혁명과 월가 점령 시위와 비교되는,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베인이 시민들을 선동하고 감옥을 개방하는 장면 등은 다루지 못했다. 다만 이 글에서 첫 번째로 밝히고 싶었던 것은 단지 흥행을 이끌어내기 위한 배급사의 전략으로 이 시리즈가 3부작이 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웅의 탄생과 그의 몰락, 그리고 이에 대한 또 다른 전망으로 보편적인 인물들이 영웅으로 성장했다는 3부작이 가장 이상적으로 견인할 수 있는 스토리가 기반이 되었기에 이 영화는 학술적으로도 논의될 만한 자격이 있는 작품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훌륭한 메시지와 구조에 힘입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3부작은 팝콘 무비처럼 여겨졌던 기존의 블록버스터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바꿔 놓았으며, 상업 영화 그 이상의 상업 영화를 찍고 싶은 감독들과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면서 한편으로 그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이 영화로 신선한 충격과 뜻밖의 진지한 성찰의 기회를 얻게 되었다. 덕분에 이제 얼핏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영화를 깊게 바라보는 시각은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영화를 좋아하는 일반인들에게까지 널리 퍼지게 되어 이런 글을 쓸 수 있을 정도의 변화가 일어났다는 점을 보여주고자 했던 게 이 글의 두 번째 목적이다.


  그렇지만 앞에서 죽 늘어놓은 깊이 있고 때때로는 사상가들의 이론까지 접목시키는 해석들은, 결국 인문학을 전공했고 현실성과 서사성을 중시하는 감독이 다른 히어로도 아니고 배트맨을 건드렸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말이 나올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영화 작품을 가지고 다져진 사고는 전직 무기상이자 자아도취적 성격의 소유자인 플레이보이 히어로를 통해서도 자기 정체성을 깨닫는 여정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며(<아이언맨>), 숱한 초능력자들이 대립하는 영화에서도 마이너리티에 대한 대우와 편견 문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엑스맨> 시리즈). 모두 서양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보고 자란 만화책을 원작으로 했고, 세계적인 배급사들의 지원이 뒷받침된 화려한 볼거리와 액션으로 가득 채운 블록버스터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들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앞으로도 더 좋은 상업영화 그 이상의 상업영화들이 관객들과 바람직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는 일이 잦아지길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 이 글은 제이드가 수업을 활용하여 작성한 졸업논문 예비작입니다. '예비작'이라는 건 아직 제가 졸업논문을 제출할 시기가 아니기 때문. 어쨌든 졸업장 받는 데 아주 중요한 구실을 하게 될 것이므로 어디로 가져가거나 하지 마세요. 조금이라도 걱정스러운 상황이 발생할 것 같다 싶으면 비밀글로 돌리겠습니다.


  1. 자세한 내용은 http://www.sparknotes.com/film/matrix/section1.rhtml 참조. [본문으로]
  2. http://blogs.indiewire.com/theplaylist/sam-mendes-says-he-was-not-at-all-interested-in- bond-at-first-took-direct-inspiration-from-christopher-nolans-dark-knight-films-20121018 [본문으로]
  3.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75&contents_id=10639&leafId=175 [본문으로]
  4. 특히 배트맨과 관련하여 책에서는 배트맨과 로빈의 관계가 동성애적이라고 단정 짓기도 했다. http://blog.naver.com/boomer27?Redirect=Log&logNo=100052879604 [본문으로]
  5. http://en.wikipedia.org/wiki/The_Dark_Knight_Returns [본문으로]
  6. http://motion.kodak.com/motion/Publications/InCamera/ONFILM_Interview_Christopher_Nolan.htm [본문으로]
  7. Jody Duncan Jesser and Janine Pourroy, The Art and Making of The Dark Knight Trilogy. Abrmas, 2012. Foreword 챕터에서 따옴. [본문으로]
  8. http://www.clown-enfant.com/leclown/eng/drama/additions.htm#Threeactstructure. 이 페이지는 Yves Lavandier의 Writing Drama; a Comprehensive Guide for Playwrights and Scriptwriters를 그대로 옮겨온 것임. [본문으로]
  9. 굳이 ‘개인적인’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영화 속에서도 배트맨이 자신을 단지 사람(Someone)이라고 칭하는 탓도 있으며, <다크 나이트 라이즈>에서 반전되는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함이다. [본문으로]
  10. 그러나 크리스토퍼 놀란은 어둡고 철학적인 영화를 만들려고 처음부터 생각하지는 않았으며, <배트맨 비긴즈> 이후 배트맨의 위기가 나타나야 하는 스토리를 따라가다 보니 <다크 나이트>가 만들어졌다고 밝혔다. 영상 인터뷰 http://www.youtube.com/watch?v=EgxPw9EboOU 참조. [본문으로]
  11. 조커는 배트맨 때문에 곤혹스러워하는 범죄자들 앞에서 배트맨을 죽이겠다고 선언하지만 후에 배트맨에게는 내가 너를 왜 죽이겠냐며 반문한다. 또 그의 얼굴에 난 흉터에 얘기가 두 가지 나오는데,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본문으로]
  12. 이는 선과 악의 밀접한 관련성을 지적한 니체의 철학과도 일부 통하는 점이 있는 부분이다. 이정국. 『슈퍼 히어로 액션 스릴러 <다크 나이트>의 연출 분석』.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11 (2011) 144p 참조. [본문으로]
  13. 하비 덴트가 전편에서 연인 레이첼의 죽음에 관한 책임을 묻기 위해 고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인질극을 벌인 적이 있기 때문에, 고든은 덴트의 변절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이처럼 사실을 아는 인물들이 많지 않아 배트맨과 고든의 거짓말은 고담 시를 8년간 평화롭게 이끄는 ‘권력’으로 작용했다. 최영진. 『부유하는 기표로서의 영웅 - 다시 보는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배트맨 3부작』208p 참조. [본문으로]
  14. <다크 나이트 라이즈> 개봉을 기념하여 한국 팬들과 채팅 인터뷰를 가진 자리에서 감독이 직접 한 발언. [본문으로]
  15. 추가로 영화의 마지막에서 그의 이름이 ‘로빈 존 블레이크’임이 밝혀지면서 원작에서 배트맨의 조수로 활동했던 ‘로빈’과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더 깊게 파고들자면 브루스 웨인 이후 2,3대 배트맨으로 활동했던 캐릭터들과의 공통점도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