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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e] Creation

Jade E. Sauniere 2013. 10. 18. 16:40


  마지막 잎새가 나풀거리다 강둑에 가라앉았다. 이 땅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생명이 지금 주저앉았다. 르네상스 시대 화폭의 주인공처럼 천을 두른 남자는 온갖 생각들로 가득차 오히려 공허해질 지경인 머리를 이고 바람을 맞았다. 거대한 어머니이신 땅이 잉여의 생명력으로 빚어낸 그에게 남은 몫은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 전에 태어난 형제들이 비옥한 평지와 아름다운 산과 바다를 다 점찍은 다음, 단지 땅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근근히 밑바닥까지 추락하지 않은 마지막 판이 그의 발밑에서 먼지를 일으키고 있었다.


  모든 땅은 결국 신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하므로 그 곳에도 미리 지어 놓은 신전이 하나 있긴 했다. 탁한 강물을 앞에 둔 건축물은 황량함이 이리저리 돌리고 괴롭혀 놓은 듯이 처참했다. 황무지를 맡게 된 신은 일단 자신의 신전보다는 먼저 생명이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강변을 걷던 그는 발밑을 유심히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모를 얇은 나뭇조각, 잿더미 사이에 마른 뼈들이 화석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신은 잠시 흙과 땅 중 어느 것을 먼저 정화시킬지 고민했다.


  곧 그가 창조의 언어로 속삭였다. 


  ―달콤한 강물이여, 고이 흘러라. 


  바람이 가져온 먼지만 켜켜이 쌓이고 있던 강물이 갑자기 솟구쳐 올랐다. 표면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맑고 푸른 물줄기가 화산처럼 공중에서 터지며 물방울을 뿌렸고, 그것이 닿는 족족 푸른색이 퍼져나가 강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솟은 물줄기는 허리를 크게 젖혀야 눈에 다 담을 수 있을 정도로 높았기 때문에 강변 바깥까지도 물을 흩뿌렸다. 물론 신은 조금도 젖지 않았다. 


  깊은 곳에서부터 깨끗한 물을 부르고 있는 신비한 힘 덕분에 강물은 얕은 둑을 금세 덮어버릴 지경으로 불었다. 그는 강이 범람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가 특별히 조정하지 않아도 바람이 부는 대지의 특성에 힘입어 양옆으로 넘쳐 흐른 강물이 파도처럼 말라 있던 땅바닥을 훑었다. 신을 만나 잠시 갈라졌던 물이 등 뒤에서 다시 합쳐졌다. 그는 잠시 팔을 아래로 씻긴 뼈 하나를 손에 들었다.


  황급히 수분을 빨아들인 땅은 몰라볼 정도로 말끔했다. 물이라는 반가운 자극을 만나 거세게 요동치던 땅이 신의 격려를 받으니 더욱 신이 나서는 땅 위에 있던 모든 것들을 거름처럼 집어 삼켰기 때문이었다. 크고 작게 융기한 흙의 그림자 아래로 부서진 풀잎과 작은 절지동물의 잔해들이 흡수되었다. 


  이것은 사실 그의 형제들이라면 다 할 수 있는 일들이었다. 하늘과 땅이 낳은 그들이 세상에서 못할 일은 없었다. 신은 말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어머니를 떠올렸다. 모든 것의 어머니는 남은 생명력이 겨우겨우 엉겨 붙어 탄생한 그에게 이곳만큼 어울리는 곳이 없다고 생각했거나, 형제들에게도 쉽사리 낄 수 없는 처지이니만큼 차라리 자신이 일굴 수 있는 땅에서 조용히 존경을 받는 게 낫다고 생각했는 지도 몰랐다.


  신은 들고 있던 뼈를 공중으로 한 바퀴 휙 돌렸다. 그리고 뒤로 던졌다. 


  그는 이 땅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생명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초자연적인 존재 치고 그는 꽤나 논리적이었다. 태어나서 첫 번째 권능을 휘두른 순간 여기에 떨어진 자신의 처지에도 어떠한 맥락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과 함께 살아갈 이들도 황무지와의 인연을 기억하기를 원했다. 아주 오래 전에 그의 형제들이 이미 인간이라는 형상을 서로 공유하면서 널리 퍼뜨렸기 때문에 그가 달리 힘을 들일 일은 없었다.


  강물이 한차레 휩쓴 땅에 부는 바람에 습기가 묻어 있었다. 조금 차갑기도 했다. 신은 예의 없이 자신의 머리칼을 휘젓는 바람을 진정시키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뼈를 던질 때 미처 인간이 어떠한 옷을 입으면 좋을지 상상하지 않았다. 신은 자신이 두르고 있던 천을 손날로 찢었다. 그가 목을 감은 천을 아래로 내리자 천이 찢어졌던 흔적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머리 색깔이 자신과 지나치게 다르지 않으면 했고 키가 너무 작으면 안 된다는 게 신이 고려한 전부였다. 그것을 참작한다면 황무지에 여기저기 버려져 있던 뼈에서 태어난 첫 생명은 수려한 모습이었다. 다만 신이 자신과 두드러지게 다른 인간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명은 남성성을 갖고 완성되었다.


  심호흡을 하듯 눈을 꼼꼼하게 깜빡이고 있는 인간에게 신이 천을 내려주었다.  


  ―내가 첫 번째로 만든 인간에게 어떠한 임무를 내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신은 실제로는 입을 열지 않고 있었으나 인간에게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낡은 신전을 가꿀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을 뜨자 마자 나를 섬길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러면 안 되는 것입니까? 당신도 이 세계에 존재하는 여러 신들과 다를 바 없이 하늘과 땅이 고루 섞인 산물이십니다."


  신이 처음으로 손질했던 강과 멀지 않은 곳에 여전히 볼품 없는 신전이 있었다. 천을 두른 것만으로 사제의 형태를 갖춘 인간은 한 쪽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신의 손등에 입을 맞추았다. 인간은 설마 자신을 만든 게 창조의 전부라고 여기지는 않는 모양인지, 처음에는 뒷걸음질을 치다가 잠시 후 등을 돌리고 폭신한 땅을 밟아 신전으로 향했다.


  뼈를 하나밖에 들고 있지 않던 신은 고개를 숙였다. 이윽고 대지가 스스로 삼켰던 뼈들을 인간의 형태로 뱉어내었다. 빛이 빚어내는 것도 아니고 땅에서 자라듯 사지를 내밀고 있는 인간들의 광경은 괴상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첫 번째 인간은 신전의 바닥을 쓸고 있었다. 신은 인간의 손길을 타고 있는 자신의 신전을 멀리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