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커크] The Third Memory 06
- Star Trek Into Darkness, John Harrison/Leonard McCoy/James Kirk
- Written by. Jade
Chapter 6
“함장님!”
마침 커크를 수소문하고 있던 스캇이 잽싸게 그를 불러 세웠다.
“저희가 탐사를 나간다면서요, 그것도 5년이나 말이에요.”
“아아, 그건 좀 미뤄지게 됐어.”
커크가 가볍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5년을 우주에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당장 나가? 준비 기간도 좀 가져야 하고, 전쟁 아닌 전쟁을 겪은 승무원들 상태도 생각해 줘야지.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하기로 했어. 그건 그렇고.”
“예?”
“엔터프라이즈도 나름 대비를 해 둬야지.”
반쯤은 장난스럽게 거리를 좁히는 커크를 향해 스콧이 눈을 껌뻑였다.
“내가 위에다 미리 말해놨거든. 벤전스호의 워프 기술을 우리 수석 기관사가 조금 배워갈 수 없겠느냐고 말이야. 그 함선의 속도라든가 그런 게 굉장한 건 맞는 얘기니까.”
워프 코어와, 나아가서는 우주를 항해할 수 있는 함선이라면 뭐든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스캇이 순간 눈썹을 치켜 올린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함장과 수석 기관사 간에 짧지만 또렷한 신호가 오고갔다.
“근데, 별 일은 없는 거죠?”
“무슨 일? 5년 탐사보다 더 큰 일이 어딨다고!”
알찬 경험에 비추어 너스레로 대화를 마무리하는 함장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직감한 스캇이 입을 양쪽으로 당겼다. 하지만 곧 그는 평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짐 커크가 앞뒤를 헤아리지 않고 무언가를 감행한다는 것은 그 의도가 그만큼 선하다는 의미와 같았기 때문이었다.
* * *
단지 경첩이 접히는 소리가 났을 뿐이지만 생도들은 전부터 꼿꼿하게 펴고 있던 허리에 더 힘을 주면서 자세를 고쳤다. 앞문으로 들어온 인물은 책을 들고 있지 않았지만 모두가 그를 교관이라고 인식했다. 그가 모자를 벗으며 생도들을 응시했다.
“공식적으로 한 번 공표된 사실이지만 혹시라도 듣지 못한 생도들을 위하여 알린다. 본관의 함선과 승무원들의 개별적인 정비에 따라 하달 받았던 임무가 늦춰진 바, 그동안 임시 교관으로서 여러분들의 수업 일부를 담당하게 되었다.”
장황하지는 않지만 빈틈없이 이어지는 어구들과 생도들만큼이나 올곧은 태도, 무엇보다도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 나온 뾰족한 귀가 그의 정체를 암시했다.
“다들 나를 알고 있는 눈치니 소개는 생략하고 수업에 들어가도록 하지.”
스팍이 버튼을 누르며 스크린을 내렸다. 부팅된 컴퓨터가 그의 명령에 따라 사진을 올려놓았다.
“모두들 이 사진이 눈에 익을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는 재건 중인 켈빈 기록 보관소가 폭탄에 의해 파괴당했던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사진을 휙 돌린 스팍이 스크린과 연결된 디스플레이 장치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특정 부분이 확대된 사진이 검은 코트를 입은 남자를 전면에 드러냈다.
“이 자가 당시 테러 사건의 범인이었다. 마커스 제독으로부터 존 해리슨이라는 이름을 받았지만 칸 누니엔 싱이라는 본명을 갖고 있지. 그는 직후 데이스트롬 회의실에 무차별적인 폭격을 가해 상당수의 희생자를 냈으며 마커스 제독을 살해하여 그의 함선 벤전스 호를 빼앗아, 샌프란시스코에 추락시킨 전력도 보유한 범죄자이다.”
그다지 낯설지는 않은 장면이었으나 생도들은 집중하여 화면을 보고 스팍의 말을 들었다.
“여기까지가 일반 교관들을 포함해 여러분들에게 알려진 진실의 일부다.”
크고 작은 건물이 무너진 샌프란시스코의 풍경을 마지막으로 슬라이드는 넘어가지 않았다. 디스플레이를 조작하려고 위치를 고정하고 있던 스팍이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칸은 몇 세기 전 유전적인 조작을 통해서 태어난 인간이다. 아마 그러한 과정으로 탄생한 무리들의 우두머리였을 거라고 판단되며, 자신의 과학적 우월함으로 독재와 전쟁을 일삼아 결국 기약 없이 동면되는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삼백년 뒤에 마커스 제독에 의해서 발견되었지.”
한낱 생도들에겐 누설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그 사건과 가장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몇몇은 열심히 필기를 했지만 대부분은 그럴 겨를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스팍을 쫓았다.
“그가 보통 인간들보다 뛰어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문제가 되는 건 제독은 이 사실을 가장 비도덕적으로 착취했다는 점이며, 다른 이들에겐 그의 정체를 숨기고 그로 하여금 온갖 무기들과 전함을 개발하게 만들었다. 아직까지 스타플릿의 유일한 전투용 함선인 벤전스호는 그런 역사 속에서 조선되었다.”
강단의 끄트머리에서 스팍이 멈춰 섰다.
“본관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사망하긴 했으나 유죄라고 판결을 받은 마커스 제독의 행동을 현 연방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블랙아웃 사태를 통해 뜻하지 않게 깨어난 그는 스타플릿의 명령에 따라 클링온과의 전쟁에 전면 투입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또 다른 목적을 위해 대기 상태에 놓여있다. 자세한 내막을 공개할 수는 없으나 그를 전투 요원으로 이용하면서 대단히 윤리적이지 못한 일이 발생했음은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스팍이 잠시 말을 끊는 동안 생도들은 저마다 그 비윤리적이라는 속사정을 상상하는 듯했다. 물론 스팍은 아니었다.
“교관이라는 위치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생도들에게 주관적인 가치관을 주입하는 행동은 옳지 않으므로 이 이상의 말은 아끼겠다. 여러분들의 이성과 도덕으로 현재의 칸과 스타플릿을 판단해 보길 바란다.”
자연적으로 눈을 깜빡이는 움직임은 분위기에 물들어 엄숙하게 보였으며, 미동마저 자제된 생도들의 자세는 쉽사리 풀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때로 진실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모습을 가진다는 진리를 견뎌내는 것,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장교가 갖춰야 할 하나의 덕목이라고 생각한다. 이상 수업을 마치겠다.”
* * *
존은 내심 맥코이의 호출을 반겼다. 레너드 맥코이는 수상할 정도로 깨끗한 자신의 머릿속에 처음으로 입력된 타인이었으며 그의 이름을 가르쳐 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존은 그에게 자신이 지난 날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물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며 몇 번이고 속으로 그렸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질문이 전제된 이후의 광경이었다.
“아주 영화를 찍으셨다니까. 지원 해달라는 연락도 없이 혼자서 클링온들을 쓰러뜨리는데, 스팍이 안 데리고 왔으면 계속 그러고 있었을 걸.”
맥코이가 먼저 주절주절 그가 전에 맡았던 임무의 내용을 늘어놓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존은 의아해하면서도 맥코이의 말을 경청했다.
특히 정치적인 면모에 있어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 제임스 커크 함장의 수완으로 맥코이는 약간의 시간을 얻을 수 있었다. 보통 사람도 아닌 존 해리슨을 한 번에 백지상태로 밀어 넣는 게 어디 그렇게 쉽겠냐며 또박또박 압박하는 젊은 함장이 대견해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머리를 쓰다듬을 뻔 했었다. 맥코이 역시 오래간만에 자신의 의학적 지식을 뽐내면서 당장 시술을 시행할 수 없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렇게 생긴 말미는 맥코이가 가장 중요하게 소비해야 하는 기간이었다.
“뭐 자기 잘난 건 알아가지고 다른 대원들이랑 크로노스에 내려갔을 때도 남들 벙찌게 했다더라.”
“…그랬습니까.”
맥코이는 당장 그의 정체성에 진입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존이 몰랐던 사건들을 최대한 많이 얘기해 줄 심산이었다. 이미 트라이코더의 불이 꺼지고 몇 분이 지났으나 맥코이는 모른 척했고 존은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스타플릿에 너 같은 함선도 있어. 알아?”
“…함선이 저와 닮았다는 겁니까?”
“전투 최적화라서. 외관부터 다른 함선들하고는 비교도 안 되고 온통 새카맣지. 스캇은 그걸 세련되게 두려운 검정색이라고 표현하더라고. 뭐, 너도 까만 옷만 입고 다니잖아.”
맥코이가 이었다.
“너 때문에 그 함선이 움직이고 있는 거야.”
존은 완벽히 이해가 되지 않은 얼굴이었다.
“…내가 탑승한 적이라도 있습니까?”
“언젠가 크게 부서졌는데 그걸 네가 고쳤거든. 또 혼자서.”
귀중한 이야기를 들은 존이 눈동자를 내리며 몇 가지 정보들을 외웠다. 그는 맥코이가 천연스럽게 흘린 전투에 특화되었다는 자신의 일면을 당장 의문스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닥터, 그런데.”
“왜?”
“거절한다는 뜻은 아닙니다만 왜 나한테 그런 말들을 하는 겁니까.”
원활한 암기를 위해 무작위로 사물 하나를 보고 있던 존이 맥코이를 보았다.
“네 얘기를 너한테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잖아.”
“타당하지만 낯선 호의입니다.”
맥코이는 짐짓 높은 목소리로 떨림을 가리면서 자신의 감정을 흘려보냈다.
“나쁠 건 없잖아. 나중에 너한테 도움이 될 지도 모르고 말이야.”
알맞게도 패드에 알림 표시가 떠서 맥코이가 잠깐 기기를 만졌다. 존은 그 때 자신의 시뮬레이션을 상기하고 있었다. 이 뒤에도 자신이 수동적인 청자의 입장을 고수한다면 의사의 소중한 수다는 끊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맥코이가 고개를 돌렸다.
“내가 당신으로부터 내 과거를 조금 더 듣고 싶어 하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라고 유추하겠습니다.”
드디어 청록색 눈동자가 무언가를 원하기 시작했다. 더불어서 맥코이 역시 절대 죄를 벗어나기 위한 이 은밀한 계획을 멈추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 * *
“닥터는 그 누구보다 나에 대해 많은 걸 알려주었습니다.”
일주일이 흐른 뒤 존이 꺼낸 말이었다.
“아마도 그랬겠지.”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에게 가장 가치 있을 단 한 가지는 들려주지 않았습니다.”
“…가장 가치 있는 것?”
“설마 내 이름이 ‘존’이 전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보통은 성과 함께 간략한 경칭을 붙여주는 게 일반적으로 누군가를 호명하는 방법 아닙니까. 그럼에도 누구도 내 성을 불러준 적이 없습니다. 제임스 커크 함장도, 당신도.”
자신의 완전한 이름, 직접적인 요구사항 보다는 맥코이의 이야기에 간간히 끼어들어 흐름에 어울리는 물음을 던지던 그가 처음으로 요청한 것이었다.
당연히 맥코이는 그가 존 해리슨이라고도, 칸 누니엔 싱이라고도 이르지 못했다. 거짓으로 둘러대지는 못하고 겨우 기회를 미룬 그는 마개가 닫힌 유리관과 주사기를 바라보았다. 이론만 있으면 조합할 수 있는 물질에 불과한 신약의 발명에 몇 년의 시간이 걸리는 건 대부분 임상실험 때문이었다. 그리고 맥코이가 보관하고 있는 약물은 그에 적합한 피실험자가 오직 한 명뿐이라, 그의 손에 얌전히 있으면 더 이상의 발전을 기대할 수도 없었다.
맥코이가 오래지 않은 시간을 회상했다. 하늘이 까만 밤이었다. 오늘만큼은 그것이 맥코이에게 특별한 의미를 가졌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름 좀 알려달라는 그 기본적인 요청에도 차마 화답하지 못하고 맥코이가 존을 돌려보냈을 때, 그는 존에게 그것을 합쳐 자신이 말로 채워줄 수 없는 사실들을 알려줄 수 있는 길이 있다고 했다. 두 번 노크를 한 존은 그 이상의 기척 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존은 밤이 되어 자신을 불러도 소리가 없다면 준비가 덜 된 것으로 알라는 맥코이의 당부를 기억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유리관을 잡았다. 온 몸에 힘이 들어가서 유리마저 깨뜨릴 것 같던 그가 이윽고 주사기에 약물을 채웠다.
“그래, 들어 와.”
조금씩 자신을 알아가는 만큼 존의 눈빛은 모호해졌다. 맥코이는 어울리지 않게 텅 빈 것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문은 이미 닫혀 잠겼을 텐데도 존은 입구 근처에서 버티고 있었다.
“당신의 답은.”
입을 열지 않는 맥코이를 쳐다보다가 존은 일주일간 모습을 드러낸 바가 없었던 주사기가 책상에 놓여 있는 걸 알아챘다. 맥코이는 뭐라고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존이 먼저 다가왔다. 그가 팔을 걷었다.
맥코이는 마음속으로만 쓰게 웃었다. 이와 똑같은 구도가 먼저 발생했을 때 맥코이는 존 해리슨의 비밀이 고스란히 담겨 있던 피를 가져갔었다. 오가는 액체의 색은 달랐으나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은 같았다. 맥코이는 자신이 느릿하게 약물을 채우고 있다고 체감했지만 그 틈에도 존은 침묵했다.
맥코이가 눈길을 올렸다. 파문 없이 반짝이는 존의 눈동자가 보였다. 기뻐해야 할지 두려워해야 할지 헷갈렸지만 맥코이는 존이 기억을 찾을 거라 직감했다.
존으로서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약을 모조리 그의 혈관에 밀어 넣고서 맥코이는 가급적 방에서 꼼짝 말고 쉬라는 지시를 내렸다. 질문을 걸어도 아무 것도 말해주지 않을 얼굴이라서 존은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리고 새벽에 예상치 못한 선잠에 들었다가 존은 전에 원했으나 얻지 못했던 꿈을 손에 넣었다.
기억 세포가 전기 충격에 터져버리기 직전, 최후의 본능처럼 짜냈던 과거가 살아났다. 주인 몰래 벌어졌던 기억의 스파크는 존의 절반짜리 의식에서 하나의 영화 같은 장면으로 펼쳐졌다. 전면에서 적들을 처리하는 존의 움직임은 자연스러웠고 상처 없이 건재했다. 그 와중에도 존은 관객이 된 것처럼, 엔터프라이즈가 이번 소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더니 자신도 한 몫을 했던 모양이라며 꼬리말을 붙였다.
배경이 바뀌어도 생채기 하나 없는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존이 마지막으로 본 건 분명히 환자들에게나 내줄 법한 이동식 침대의 평평한 각도에서 마주친 레너드 맥코이의 복잡한 표정이었다.
* * *
요새 커크는 초빙 교관으로 선정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플릿 아카데미에서 좀처럼 벗어나질 못했다. 실력과 경험을 갖춘 고급 장교들의 처지가 그와 같았다. 전쟁을 대비해서 급하게 차출했던 선원들의 자질 문제가 뒤늦게 대두되면서 대대적인 재시험과 적성검사가 시행되고 있었다. 수뇌부에서 이제라도 함선과 격이 맞는 승무원들을 뽑아내려는 데에는 다 사정이 있었다.
“요새 크로노스가 또 뒤숭숭하다며?”
“어쩐지. 벤전스호에 탈 사람들을 뽑는다는 소문이 들리더니.”
생도 둘이 심각한 대화를 나누며 복도를 걸었다.
“그런데 아마 거기 지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걸.”
“왜? 가장 좋은 함선인데.”
“하지만 전투 전용이잖아. 백이면 백 전방에 설 텐데 보통은 다들 꺼리게 되지 않겠어?”
이제 막 강의실에서 나오는 둘을 지나쳐서 모자를 눌러쓴 남자가 안으로 들어갔다. 유독 많은 생도들이 빠져나오고 있었다. 남자를 알아본 여생도가 눈을 크게 뜨더니 허겁지겁 인사했다. 아카데미 업무로 인하여 사소한 회의에는 얼굴도 내밀지 못하고 있는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이 교탁을 정리 중이었다.
“시험 감독하기 전까지 조금 여유 있지?”
스팍이 커크를 알아보고 대뜸 말했다.
“저도 함장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습니다.”
여생도가 가장 늦게 강의실을 나가고, 커크가 낮은 계단을 밟아 내려가면서 스팍을 향했다.
“제가 반대할 거라고 생각하셨습니까.”
평소보다 더 진지하게 들리는 목소리였지만 커크는 아직 화제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뭘 말이야?”
“닥터 맥코이가 칸의 기억 세포를 활성화시키는 약을 만드는 걸 눈감아주시고도 저에게는 아무 언질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커크가 별안간 주위를 살폈다. 아카데미의 강의실에 도청장치가 있을 리는 만무했고, 그가 몰랐던 사이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지도 않았기에 누설의 위험은 없었지만 가슴이 철렁할 수밖에 없었다.
“그건 어떻게,”
“왜 저한테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너뿐만 아니고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
다섯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커크가 정지했다.
“이건 사실 본즈가 개인적으로 밀어붙이려고 했던 일이야. 정치적으로 내가 함장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나한테는 그걸 얘기해준 거고. 연방에서 절대 허락하지 않을 일인데 여기에 연루되면 연루될수록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지니까 본즈도 나도 웬만해선 퍼뜨리지 말자고 합의를 봤었어. 근데 너는 예외라고 생각하거든.”
객관적인 상황들이 이어지다 갑자기 커크의 속마음이 불쑥 튀어나오자 스팍의 눈썹이 올라갔다. 커크가 찡그린 표정을 지었다.
“…이라고 말해주려고 왔는데.”
가장 가까운 동료만이 감지할 수 있는 미세한 뉘앙스를 풍기던 스팍이 눈빛을 달리했다.
“너한테는 뭐가 더 와 닿을지 모르겠다. 치졸한 속셈이 다 들여다보이는 스타플릿의 장단에 맞춰줄래, 아니면 이제 비양심적인 짓은 청산해 버릴까. 반역하자는 건 절대 아니야.”
“…연방의 판결은 다를 것 같습니다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장님과 닥터 맥코이의 도덕적인 명분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는 칸을 돕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측면이든지 스팍의 지적이 날아올 것을 예상하고 왔음에도, 벌칸의 지독한 논리는 적응을 거듭해봤자 청자를 발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커크가 결국 빽 소리쳤다.
“나 그냥 가?”
스팍이 평온하게 대꾸했다.
“제가 합류할 작전은 말씀해 주시고 가셔야지요.”
* * *
―그가 정말 기억을 다 찾으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우리를 위해서라도 의결기관에 속한 함장이나 부함장들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으면 좋을 거야. 마침 크로노스 문제 때문에 한바탕 스타플릿이 움직여야 할 순간이 와. 엔터프라이즈는 무슨 일이 있어도 못 나가게 할 거니까, 대신 다른 함선들이 자리를 비워줘야 해.
스팍은 그날 밤 벤전스호에 몰래 잠입했다. 아직 벤전스의 워프 기술을 엔터프라이즈에 맞게 개량하는 작업에 몰두하느라 자주 함선에 출입하는 스캇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사유를 묻자, 커크는 전에도 한 번 반역 아닌 반역을 감행한 사람한테 또 살얼음판을 걷게 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너스레를 늘어놓았다. 그럼 왜 저는 중죄가 될 만한 일에 끼워 넣은 겁니까. 에이, 솔직히 네가 제일 부탁하기 편한 거 알잖아. 스팍은 엉뚱하게도 그 말을 납득해버렸다.
마커스 제독이 확보해 두었던 목성의 격납고가 폐쇄되고 그 덩치를 마땅히 가눌 곳이 없었던 벤전스는 정거장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함선의 출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정거장에는 최소 인원만이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스팍은 속도를 내어 벤전스호에 접근할 수 있었다.
원체 승무원이 많이 필요치 않은 함선의 분위기는 극도로 적막했다. 스팍은 커크의 지시에 가장 교묘하면서 훌륭하게 부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구상하다가 동선을 돌렸다.
항법 시스템을 점거한다거나 눈에 띄는 물리적인 손상을 입히기는 부적합하다는 판단 하에 스팍이 찾은 곳은 기관실이었다. 과학 장교로서 스팍은 엔지니어는 아니라도 함선에 대한 기술적인 지식은 다 갖추고 있었다. 미묘한 오작동을 일으킬 만한 최적의 표적을 구상하던 그는 기계 근처에서 웅크리고 있는 실루엣을 보았다.
그림자는 잠을 자고 있지도 않았다. 스팍은 입술을 오물거리면서 무언가를 깊이 궁리하는 듯한 그와 눈빛을 교환하고 말았다.
“…거기서 뭐합니까, 스캇?”
멀뚱하게 눈을 빛내던 스캇이 툭 던졌다.
“그러는 부함장님이야말로…?”
워프 코어에 대한 강력한 학문적 관심과 각 함선에 대한 수석 기관사의 애정이 상상 외의 변수를 불러왔다. 스팍이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함장님의 부탁을 받고 왔습니다.”
다리를 접고 있던 스캇이 슬금슬금 일어났다.
“짐이 부함장님을 왜 여기까지 보냈대요?”
“어떤 이유일 것 같습니까.”
벌칸 혼혈의 포커페이스에서 어떠한 의미를 추출해낸다는 건 몹시도 힘든 일이었지만, 제임스 커크라는 키워드만으로 스캇이 조심스럽게 대답을 내놓았다.
“…이번엔 또 뭔데요.”
“벤전스가 항해 시 살짝만 오작동을 일으키면 됩니다.”
“망할 함장. 하여튼 사고뭉치에요, 아주."
코어 기술을 배우러 가라면서 은근히 자신의 등을 떠밀었을 때부터 스캇은 희미하게 함장의 머릿속을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다. 스캇이 코어를 손으로 한 번 훑더니 등을 돌렸다.
“어느 정도로 하면 되려나?”
스캇은 벤전스의 출현을 지연시켜 다른 함선들이 상대적으로 다수의 승무원을 데리고 지구 밖으로 나가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커크의 계획은 묻지도 않았다. 엔터프라이즈의 함장을 향한 믿음이란 이런 것이었다.
* * *
며칠 기간을 두고 맥코이와 존은 다시 만났다.
“닥터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더군요.”
이번에도 맥코이의 책상에는 라벨이 붙어 있지 않은 액체가 길쭉한 관에 담긴 채 놓여 있었다.
“내 과거를 되찾아주려는 게 아닙니까. 정확한 원리는 모르겠지만 그 약물이 회복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역할일 테고.”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효과는 있었나봐. 뭘 봤는데?”
“거의 크로노스에서 있었던 전투 장면들이었습니다.”
맥코이가 맘속으로 정리했다. 최근에 있었던 삭제술이 조금씩 효력을 잃어가는구나. 그는 멀쩡해 보이는 존의 신체를 기기로 또 검사한 다음 손으로 주사기를 끌어당겼다.
“네가 가장 알고 싶어 했던 이름은, 시간이 좀 걸릴 지도 몰라.”
“그것만큼 중요한 진실들도 있을 거라 생각하므로 조급하진 않습니다.”
맥코이는 존의 눈을 살폈다. 아직까진 그 청록색 동공에 칸 누니엔 싱 특유의 경멸이 없다. 맥코이가 드러난 핏줄 사이로 바늘을 찔러 넣었다.
* * *
평화로움은 신체를 피곤하게 만들지 못한다. 저번처럼 잠들어서 꿈이라도 꾸고 싶었던 존은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감각에 몸을 일으켰다. 밤을 새워도 피로는 찾아오지 않을 지도 몰랐다. 존은 차선책으로 예의 똑 부러지는 자세를 취한 다음 눈을 감았다. 깊게 사고하면서, 손가락 마디보다 작은 세포들이 꿈틀대는 곳까지 가라앉으려 애썼다.
잃어버린 조각을 찾아가고 있는 육체는 그 자신의 강대한 잠재력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정신을 밑으로 계속 끌어당겼다. 눈을 닫아도 아른거리기 마련인 뿌연 빛무리들이 삽시간에 멀어져갔다. 단지 원했다는 이유로 반절은 트랜스(trance) 상태에 빠진 존은 언젠가 자신이 수행했던 임무의 현장이 보이지 않을까 막연히 추측했다.
전처럼 눕혀진 시선에서 마주한 맥코이에게 자신의 목소리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여전히 특이한 맥락이다. 금방이라도 억울함을 내뱉을 것 같은 의사는 대답이 없었다. 그런 표정을 지은 주제에 다음 이미지에서 맥코이는 복도 한복판에서 그를 마취제로 눕혔다.
클링온들과 싸우고 있는데 엔터프라이즈의 부함장이 워프해 나타났다. 그는 열세에 몰리지도 않은 존을 굳이 함선으로 데려갔다. 아무런 인과관계도 없이 널을 뛰는 그림들에 존은 이제 헷갈리고 있었다.
시간이 완전히 엉킨 것 같았다. 존은 자신이 왜 또 의무실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양한 배경에서 그를 바라보는 레너드 맥코이의 안색은 매번 편치 못했다. 추상적인 감정을 구체적인 기억이라고 하는 건 비약입니다. 기억상실증 환자가 꺼낼 수 있는 가장 논리적이면서도 씁쓸한 언어를 뱉는 자신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기계실, 혹은 기관실에 우두커니 서 있던 인영이 현실감도 없이 눈물을 떨어뜨렸다. 존이 반사적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닦지도 않고 묵묵히 망가진 선체를 살피는 그에게 어디선가 존 해리슨의 서늘한 목소리가 핀잔을 주었다. 오, 이런 멍청한.
하나의 동영상 같은 반(半)의식에서 커크가 처음으로 얼굴을 보였다. 그가 말했다.
…큰 사고를 당했어. 동료들이 너를 살리려다 대신 죽었고, 당신은 목숨은 건졌지만 기억은 잃어버리게 됐어.
의지가 발휘될 수 없는 광경에서 시선 속 자신은 어딘가 동떨어진 태도로 커크가 주는 정보를 수용하고 있었지만, 존은 어딘가 단단히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함장이 말하는 사고라는 것에서 처음으로 깨어나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다면 왜 이 장면은 그동안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는가. 그는 겨우 찰과상 한 번 입어본 적 없는 임무들만을 거쳐 왔을 뿐이었다.
그 즈음에서 끝날 줄 알았던 영상은 조금 더 이어졌다. 아직은 모두가 의심스럽게도 그를 존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더 거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존은 자신이 반복적으로 기억을 뺏겨 왔음을 알았다.
그는 단칼에 의사의 호의도, 약간이나마 유대감이 흐를 수 있을 것 같았던 제임스 커크 함장과 그의 함선을 불신하기로 했다. 그것은 존이 통성명을 알고 인연을 맺은 모든 인물들에게서 벗어나겠다는 선언이었다.
방금 의식을 회복했을 뿐이지만 존은 빠르게 행동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방을 나갔다.
* * *
“스캇까지 알았단 말이야? 젠장, 왜 갑자기 여기에 끼어든 인원이 두 배가 되는데!”
- 스캇이 벤전스에서 아예 숙식까지 처리하고 있을 줄 내가 어떻게 짐작했겠어? 다른 사람이 아닌 게 어디야. 스캇은 믿을 수 있잖아.
“물론 믿을 수 있지. 그래도 미안한 건 미안한 거라고.”
- 아무튼 그거 빼고는 다 순조롭다는 얘기 해 주려고. 약은 좀 효과가 있는 것 같아?
“확실히. 아마 그 대단한 치유력도 한 몫 한 것 같지만. 잠깐 있어봐.”
노크 소리를 들은 맥코이가 커뮤니케이터를 놔두고 문을 열었다. 뜻밖의 방문객에 그가 멈칫했다. 존이 차분하게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냐며 고갯짓했다.
맥코이는 존을 들여보내 놓고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하기 위해서 통신기를 집었다. 존이 뒤에서 냉담한 안구를 빛내며 맥코이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짐, 내가 이따가….”
단단한 팔이 목젖을 강하게 누르는 압박감에 맥코이가 놀라 입을 벌렸다. 급속도로 숨이 막히면서 벌어진 입에서는 곧 신음을 대신하는 켁켁대는 소리가 흘렀다. 의혹이 서린 커크의 부름을 무시하고 존이 통신기를 껐다.
“그 약물은 어딨지.”
맥코이를 제압하기 위해서 존은 한 팔만 쓰고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의사에게는 위력적인 장애물이었다. 존이 책상 서랍을 하나하나 열었다. 맨 밑에 그가 종종 불면증 증세를 가라앉히기 위해 사용하는 가벼운 안정제가 있다는 걸 아는 맥코이는 힘껏 저항했으나, 존은 쉽게 약병과 하이포를 꺼냈다. 병 안에 있는 양을 모조리 주사당한다면 그대로 주저앉고 말 것이었다.
“어디 있는지 말해준다면 이 주사기로 그치겠지만, 끝까지 저항한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어.”
존 해리슨의 음성이 경고했다.
“약물을 내놔.”
맥코이가 오른쪽으로 눈짓했다. 확인해보자 서랍 한 칸을 잠긴 상자가 꽉 채우고 있었다. 존은 원통 안에 안정제를 채운 주사기를 맥코이의 팔에 갖다 댔고, 그가 상자 뚜껑을 열어주자 곧바로 피스톤을 눌렀다. 바늘이 꽂힌 채 맥코이가 스르르 바닥으로 미끄러졌다.
간신히 제 손으로 주사기를 빼내 던졌지만 거기까지였다. 맥코이는 물건을 챙기는 존을 저지할 수가 없었다. 맥코이가 늘어지는 의식을 붙잡고 고개를 돌렸다.
말할 힘도 없어서 맥코이는 그저 존을 바라만 봤다. 그가 기억을 완벽히 찾아도 알 수 없는 자신의 진실을 말해주고 싶은 마음이 뒤늦게 샘솟았지만 맥코이는 끝내 눈을 감았다. 존은 바르르 떨리던 입술과 눈동자가 부질없이 닫히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았다.
통신기 너머로 커크가 계속 맥코이를 부르고 있었다. 존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