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ossover/다수] Human and Being 上
- Benedict Cumberbatch Filmography Crossover,
Stephen Hawking, Khan Noonien Singh, Sherlock Holmes and Julian Assange
- 인물만 크로스오버 주의!! 개연성 및 타임라인 무시 주의!!
- Written by. Jade
Human and Being
(Common Sense between Human and Being)
순진한 청년이 무서워하지 않는 것 중 하나는 불 꺼진 실험실의 풍경이다. 달빛을 받은 삼각 플라스크나 시험관이 빛나고 이따금씩 그 안에 남은 시약들이 빨갛고 보랏빛으로 반짝일 때도 있고, 인간의 피부를 벗겨 놓은 모습을 재현한 마네킹이 있는 데도 그러했다. 청년이 전공 교수들만큼 연구실에 자주 출입한다는 학생이란 별칭을 달고 다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열쇠로 문을 열고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책상 밑바닥에 붙어 있는 간이 서랍을 뒤졌다. 그의 손에 그가 두고 갔던 파일이 잡혔다. 청년은 뿌듯하게 그것을 손에 쥐고 일어섰다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불부터 켰다. 스티븐 호킹이 어떤 구실로든 연구실에 들어온 이상 책상 한 번 어지르지 않고 물러날 리가 없었다.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빈 방을 슥 훑었다.
하지만 오늘 청년은 번쩍번쩍 떠오르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험해 볼 의향이 없는 듯했다. 사실 그는 연구실의 자세하고 소소한 정경을 늘 궁금해 했다. 그가 한데 묶어서 들고 다니는 복사키로 열지 못할 서랍이나 상자는 없었으므로, 스티븐은 호기심에 십분 충실한 청년으로서의 정체성을 덮어쓴 뒤 내부를 샅샅이 탐색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의 손에 잡히는 것은 기껏해야 공책, 수첩, 여러 메모지가 붙은 종잇더미들이 대부분이었으나 뭐가 그리 재밌는지 스티븐은 시종일관 싱글거렸다. 이것도 석학들의 자료를 모조리 이해할 수 있는 두뇌를 가진 자의 특권이라면 특권이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스티븐의 짙은 눈동자가 멈췄다.
디지털 인쇄물이 아니었다면 진작 잉크가 날아가 알아보기 어려운 자료로 전락했을 게 뻔한 파일이었다. 종이 끝자락이 바래 있었는데 최근까지 교수들이 손댄 적이 없는지 옅은 먼지가 손에 묻어났다. 아마 교수들은 서랍의 틈새 어딘가에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던 게 뻔했다. 스티븐은 의자를 빼 엉덩이를 붙이면서도 자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제일 처음 알아볼 수 있는 건 DNA를 형상화한 그림들이었다. 그것들은 일반적인 합성과 분열이 아니라, 청년으로서는 생각해 보지도 못한 방법으로 복제되고 다듬어졌다. 유전 공학은 스티븐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분야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자료를 외면하지 못하고 본래 가져가려던 파일에 끼워 넣었다.
스티븐이 들고 떠난 자료의 맨 위에는 놀랍게도 이름이 붙어 있었다.
* * *
그가 처음에 눈을 떴을 때 스티븐이 한 말은 혹시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느냐는, 다소 허무맹랑한 질문이었다.
뽀얗고 호리호리한 청년의 몸보다 창백하고 단단한 자신의 육체를 그는 말없이 응시했다. 손가락으로 그가 호흡하고 있는 시간을 셀 수도 있는 입장인 그에게 당장 육체적인 미를 품평할 감각은 모자랐다. 그는 별 불만이 없다는 뜻으로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러자 안경 쓴 청년이 화사하게 웃었다. 이어진 그의 대답 또한 놀라웠다.
자신의 유전 형질을 이것저것 변형시킨 부분이 많아서, 그가 자신의 외양이 마음에 안 든다면 그것은 자신의 탓이라 무척 슬플 것 같다는 말이었다.
파일에 적혀 있던 대로 칸 누니엔 싱이라는 이름을 받은 그가 자신의 창조자인 스티븐 호킹을 처음 만난 날의 이야기였다.
* * *
주욱 하고 탁자가 밀리는 소리가 났다. 부탁한 책을 가지러 잠시 방에 들어갔던 칸은 소리를 듣고 빠르게 방으로 나왔다. 몸을 지탱하기 위한 탁자가 도리어 움직이면서 완전히 균형을 잃은 그의 창조자가 엎어져 있었다. 칸이 묵묵히 스티븐을 일으켜 세웠다. 팔이 당기고 무릎이 아플 텐데도 스티븐은 칸에게 미안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유전공학자가 아닌 불치병에 걸린 케임브리지 대학원생이 탄생시킨 유사인간은 창조자를 소파에 부드럽게 앉히고 황급히 바닥에 내려놓았던 책을 주웠다.
스티븐이 손을 쓰기 어려워진 이후로 집안에 있는 펜이나 연필들은 대부분 처분되었다. 행여나 스티븐이 넘어지면서 펜이 떨어지거나 굴러다니면 그에게 큰 상처를 입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칸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뭉툭한 연필과 공책을 남겨두었을 뿐이었다. 스티븐은 무슨 말이 떠올랐는지 칸에게 연필을 달라고 눈짓했지만 그가 말했다.
"쓰지 않아도 네 뜻은 다 보인다. 책은 그 정도면 됐는가."
창조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대하는 말씨를 스티븐은 수정하려 하지 않았다. 스티븐이 칸에게 시종일관 보였던 것은 미소였다. 손이나 발보다 그가 그나마 더 잘 움직일 수 있는 얼굴로 여러 가지 표정을 통해 의사소통을 하고자 했던 그의 의도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덕분에 유사인간은 얼핏 비슷해 보이는 스티븐의 표정을 잘 읽는다.
누군가가 옥스퍼드의 연구실에 남겨 놓았던 유전자 지도는 각 형질의 우성화를 꾀하고 있었고, 그것을 충실히 이행해 스티븐이 빚은 존재는 설계도의 목적을 훌륭하게 체화했다. 그런데 하필 칸 누니엔 싱이 처음으로 본 인간은 다른 이들보다 아픈 모습이었고, 덕분에 그는 애초에 지도의 제작자들이 바랐던 것과는 다른 특징들을 몸에 익히게 되었다. 칸은 어렵게 고개를 좌우로 젓는 스티븐을 보고 가만히 몸을 움직였다. 그가 스티븐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스티븐이 고른 두꺼운 과학 서적을 함께 읽었다. 반짝거리는 사진들 주변에 온갖 숫자들과 다양한 모양의 기호들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이따금씩 칸을 바라보는 스티븐의 눈동자는 사진의 별과 달보다 더 반짝거렸다. 그것은 유사인간을 유사인간으로 보지 않는 눈빛이었다.
* * *
칸이 태어나고 나서 일 년도 지나지 않았을 무렵, 그러니까 스티븐이 아직 글씨를 쓸 수 있고 말을 수월하게 할 수 있을 당시였다. 그는 활달하게 여러 제스처를 섞으면서 설명하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까 이 부분에서는…."
요청받지도 않았는데 스티븐은 열심히 칸에게 그가 살과 뼈를 가지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스티븐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지도에 그려져 있던 낡은 나선들과 알파벳들을 짚었다. 가만히 창조자의 말을 듣고 있던 존재가 물었다.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설명해주는 건가?"
"응?"
"어쨌든 내가 당신에 의해서 태어난 건 명백하지 않나.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면서까지 네가 나를 만들었다는 걸 증명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스티븐은 다소 의아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게 아닌데."
이후의 말을 스티븐은 아무렇지도 않게 툭 던졌다.
"나는 내가 아니라 너를 확실하게 해주고 싶어."
그 이후 창조자의 손가락은 파일의 자료를 다 넘길 때까지 칸의 이중나선들을 세세하게 훑어 주었고, 그 다음엔 창조자와 거기서 비롯된 존재, 마지막에는 그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가리켰다. 점점 근육이 오그라들고 생기를 잃어가도 언제나 자신이 모험적으로 만든 존재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움직임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티븐의 손가락이 자신을 보고서도 자신을 가리키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협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 * *
온 몸을 통해 희미하게 전달되는 감각이 푹신했다. 스티븐은 자신이 쓸 휠체어의 세세한 부분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의자에 앉아있었던 걸 명백하게 기억하고 있었기에 무언가 단단히 잘못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체적 제약에 걸려 스티븐의 몸은 머리가 명령하는 것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닫힌 문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가 있어 스티븐은 정신을 집중했다. 그가 제일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먼저 교양 없는 처사에 대해서는 사과하도록 하겠네. 몇몇 친구가 좀 성급했어."
스티븐이 차근차근 분석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의 음성은 그가 처음 듣는 종류였다.
"그런 실속 없는 말을 듣기 위하여 이 자리에 앉은 게 아니다."
이건 스티븐이 아주 잘 아는 칸의 목소리였다. 스티븐이 몸을 조금 뒤척였다. 가끔 그와 외출을 할 때 어쩐지 불만족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발견할 때가 심심찮게 있어 칸이 낯선 인간 혹은 대부분의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걸 고려하더라도 그는 꽤나 날을 세운 언어들을 내뱉고 있었다.
"먼저 어떻게 그러한 무례를 저지르게 되었는지 자초지종이나 듣지."
"국내 유수의 대학원들은 사실 어느 정도 상층부와 연결되어 있는 점이 있다네. 인재들과 그들의 결과물을 주시하면서 발 빠르게 지원을 해주려는 것도 있고, 아예 정부 산하 조직으로 초대를 하거나 특별히 중요한 것들은 국가적으로 보안을 하기 위함이지."
"아마 개인들은 그 사실을 모를 테고."
"인간들은 이러한 부분에서는 은밀한 걸 좋아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스티븐은 자신이 누워 있기 전에 발생한 일을 한 가지 더 기억해 냈다. 그가 얼굴도 한 번 본 적 없는 이들이 집 안에 들어왔었다. 하필이면 휠체어 제작에 필요한 자재들이 생겨 칸에게 부탁을 맡긴 시간이었다.
"그가 나에 대해 보고서나 논문을 제출한 적이 있던가?"
"그렇지는 않았네. 순진한 청년이라고 들었지만 그 정도로 허술하지는 않아. 아마 학생들에게 지급되는 PC를 확인하면서 자료가 발견된 것 같네."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군."
스티븐이 침대 위에서 애를 쓰면서 몸을 뒤척인 결과 그는 상체를 일으킬 수 있었다. 이즈음 스티븐은 칸을 불러야 하나 생각했지만 침대에서 출입문까지 나아갈 기력 정도는 있었다. 걷는 일이 몹시도 힘든 그는 바닥을 몸에 밀착시켜 최대한 소리를 줄이면서, 벽 여기저기에 설치해 놓은 고리들을 붙잡고 일어난 다음 문을 열었다.
자신의 창조주 말고는 다른 이와 말을 섞는 것도 짜증내는 존재의 앞에 양복을 입은 낯선 이가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