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Scientific Tragedy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Request confirmed, with the music 'I am the day' by Libera
- Slowly and Carefully
- Written by. Jade
Scientific Tragedy
제 아무리 만물의 영장이라고 해도, 300년 전부터 그들이 우주를 꿈꿨던 것은 아니었다. 주인이 명확하지 않은 땅과 강하지 못한 자가 주인으로 있는 땅이 많았다. 인간들의 첫 번째 목적지는 자신들의 대지였다.
그들 중에서도 레너드 맥코이는 무너지지만 않으면 그만인 땅에 욕심이라는 걸 가질 줄 모르는 인물이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름이 실로 수놓인 하얀 가운 한 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주로 밟는 땅은 특수했지만 이따금씩 햇볕이 들었으니 상관없었다. 가장 고압적인 상아탑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햇살이 닿아 사람이 살 수 있는 장소에 지나지 않았다.
레너드 맥코이의 단순한 생각에서부터 우리는 태양이라는 자연물이 얼마나 자비심이 깊은 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하늘이 찔려도 상관없다는 듯 높고도 높게 솟은 탑은 야망으로 번들거리는 과학자들의 모임 장소였다. 눈과 비를 뾰족한 머리로 양단하고 먹구름도 우습게 여기는 그곳은 과연 주인들을 닮았다. 그러나 태양과 그의 짝꿍인 새벽은 한낱 적대감으로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 훌륭한 존재들이다. 박사의 눈에 상아탑을 사람 사는 곳답게 만드는 이른 여명이 안으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가로로 정렬된 그것들은 옆으로 누운 기둥처럼 보였고, 멀찍이서 보자면 하나로 뭉쳐져 마치 과학의 제단을 쌓는 것처럼 보였다. 스테인드글라스 대신에 플라즈마 패널이 설치되어 있지만 지금은 전원이 들어와 있지 않아 투명한 덕에 바깥 하늘이 드러났다. 레너드 맥코이는 잠깐 하늘을 보았고 다른 이들은 모두 누운 기둥들을 주시했다. 그것들이 미세한 생체 반응을 감지하고 오퍼레이터의 기계음을 내주길 바랐다.
가장 이성적인 화신은 최초로 일어나면서 캡슐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를 냈다. 맥코이도 그 순간만큼은 하늘에서 눈을 뗄 수밖에 없었다. 제단에서 그림자가 몸을 일으켰다. 지루한 기상 현상에 관심을 쏟을 리가 없는 과학자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으나 시각이 새벽이었다. 그들의 시야에서 현실의 햇살과 뒤틀린 계시가 동시에 팔을 활짝 폈다.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몸이 자신의 근원보다 앞서서 빛을 받아들였다.
오직 레너드 맥코이만이 그 광경을 인류의 진화로 받아들였다.
"내가 너한테 존중받길 원하는 건 아니지만,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냐?"
상아탑에서 맥코이가 맡은 직책은 그들이 만든 유사인간들의 정기 검진이다. 유전 공학이나 생물학이 아닌 의학을 심도 있게 배운 그에게 주어질 수 있는 가장 당연한 임무였다. 그리고 맥코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방 저 방에 흩어져 있는 피검사자들을 방송으로 부르는 게 보통이었는데, 이태까지 그의 방송을 모조리 무시한 경이로운 기록을 세운 남자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었다. 그나마 그가 실험실이나 검사장 말고 갈 곳이 정해져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맥코이에 의해 퉁명스럽게 불린 남자는 여전히 그를 돌아보지 않고 일어났다. 맥코이는 그럴 때마다 가장 훌륭하게 빚어진 입상이 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을 목격한다. 그가 처음 태어났을 때 과학이 현신하듯 새벽을 입고 꿈틀댔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맥코이가 그에게 손짓했다.
"칸, 어서."
유사인간들은 바깥으로 나가는 게 금지되어 있었다. 덕분에 상아탑의 꼭대기에서 잠시라도 인간들이 섞이지 않은 바람을 맞는 게 전부인 생명체는 탈색된 푸른 눈을 짜증스럽게 빛냈다가 다시 무심해졌다. 그가 다소 억지스러운 반항을 부리는 이유를 둘은 알고 있다. 레너드 맥코이는 대개 인성 개조 및 강도 높은 실험을 겪은 유사인간들을 그 다음 날에 검사하고 있었다. 그리고 맥코이가 오늘 받은 보고서에 의하면 칸은 전날 마비된 신경이 얼마나 빠르게 치유될 수 있는지 측정하는 실험에 사용되었다.
칸은 손을 내젓는 맥코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맥코이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한 번 더 크게 손짓했다. 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맥코이가 소리 내어 투덜댔다.
"할 거 있으면 빨리 하고 끝내."
맥코이가 기어코 칸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유사인간들은 대개 과학자에게 쉽게 끌려간다. 상아탑의 중심부에서는 그러하다. 그러나 몸의 반 정도는 탑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에서도 칸은 다만 빛나는 하늘을 향하는 눈빛을 땅에 내려찍었을 뿐, 가만히 맥코이에게 이끌려 갔다.
칸은 레너드 맥코이가 유사인간들의 세뇌 교육에 참여하지 않는 몇 안 되는 박사 중 하나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맥코이가 이마를 긁었다.
"어제 이것들이 눈이라도 돌아갔었나. 전달 경로 일부가 아예 새것으로 바뀐 모양새네. 느닷없이 번쩍거리는 인공 관절을 끼워 넣게 된 거나 마찬가지일 텐데. 불편한 점은 없어?"
"…그다지."
"원한다면 훈련 명목으로 며칠은 휴일을 받을 수 있어."
"별로 효용이 있을 것 같지는 않군."
호의는 전혀 섞여있지 않은 짧은 대답들이 툭툭 꽂혔다. 맥코이는 무언가가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소견서를 작성해갔다. 그래도 맥코이는 대부분 유사인간의 편의를 최대한 도모할 수 있는 말들을 적었다.
그것이 레너드 맥코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는 유사인간들을 만든 집단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게 인류의 진화에 기여하고 싶은 학자였으나 그 역시 어떤 사회에 속한 사람이었다. 맥코이에게는 자신의 동료를 막을 만한 명분이 없었다. 동료들에게 매도당하고 몰매를 맞는 일을 의연하게 견딜 정도로 유사인간들에게 애정이 깊지도 못했다. 맥코이는 소견서를 채우다 말고 눈동자를 살짝 올렸다. 교육받은 침묵은 유사인간들의 공통된 특징이었지만 유독 칸에게서 어둡고 무겁게 발현되었다.
맥코이는 결국 칸에게 개인적인 시간이 필요할 거라는 의견을 덧붙였다. 하지만 맥코이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열흘간 맥코이는 칸을 보지 못했다.
유사인간들의 캡슐이 처음으로 놓였던 자리는 아직 보존되어 있다. 물론 캡슐들은 다 치워졌지만 그 터에는 디스플레이 하나 올라가 있지 않았다. 복잡한 상아탑에서 유일하게 비어있는 그 자리를 보면서 몇몇 박사들은 우쭐해했고 다가올 여정에 자신감을 가졌다. 맥코이는 아주 가끔 그 근처에 앉아 있거나 서서 뾰족한 각을 이루고 있는 투명한 천장을 응시했다. 빛을 감상하기 좋은 자리였다.
일찌감치 맡았던 일이 끝나서 이른 시간에 잠에 들었더니 그만큼 빨리 눈이 떠졌다. 맥코이는 가운을 걸치고 오래간만에 그곳으로 향하였다. 상아탑을 신전처럼 만드는 그들만의 제단으로 갔다.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그림자가 보였다. 가장 가슴이 벅차는 탄생의 순간처럼 순결한 육체가 아니라, 소매의 일부가 찢어지고 긁힌 옷을 입은 누군가였다. 새벽빛을 감상하러 왔던 맥코이는 느닷없이 맞닥뜨린 실루엣에 발을 멈췄다. 은색, 은회색, 혹은 박사들의 하얀색을 혼란케 하는 검은 형체가 제단의 끝자락을 붙잡고 끓는 소리를 냈다. 맥코이는 눈동자를 보고 그가 칸이라는 걸 알았다.
맥코이는 저편으로 치워진 캡슐을 덮고 있는 검은 천을 끌어당겨 가슴에 모은 뒤 칸에게 다가갔다. 전기 스파크나 불길이 아니라 순전히 몸싸움에 의해 옷들이 너덜너덜했다. 맥코이는 대체 무슨 일이냐며 그에게 물으려고 했다. 건장한 성인 남성 한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캡슐을 감싸고 있던 천이 점차 바닥으로 끌리는데, 보호구를 착용한 박사들과 그 조수들이 몰려왔다. 칸은 마치 등 뒤에서 무자비한 날개라도 돋아날 것처럼 괴로워하며 팔을 뻗어 자꾸 등 한 부분을 파내려고 애썼다. 맥코이는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천으로 칸을 곱게 휘감아주지 못했다. 박사들과 조수들이 달라붙어 칸의 팔을 양쪽으로 잡아당기고 약물을 놓았다.
신전의 자랑이었던 완벽한 조각상이 수없이 구르면서 무너져갔다. 칸은 악에 받힌 비명을 지르면서 팔을 움직이려고 애썼다. 상아탑의 옥상에서 햇빛을 보는 게 고작인 하얀 피부가 파진 부분에 검은 것이 박혀 있었다. 맥코이는 멍하게 그 자리에 섰다.
부지런한 새벽은 오늘도 밝아온다. 동시에 유사인간의 희망이 저문다.
"…스트레스 수치가 평균보다 훨씬 높아."
유사인간은 말이 없었다.
"의사의 재량으로 이틀 정도는 여러 실험들에서 빼줄 수 있어."
몇 달 만에 만난 칸은 아직도 말이 없었다. 맥코이가 조심스럽게 그의 눈빛을 살폈다. 지친다는 것, 이따금씩 분노를 삭이기 위해 태양을 바라본다는 것, 진행 중인 그의 모욕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인간이 있다는 것까지 모조리 잊어버린 것 같은 구슬 같은 눈동자였다. 제어 칩은 수거되었고 피부는 재생되었지만 그것의 흔적은 다른 데에 있었다.
맥코이는 최대한 변하지 않으려 애쓰면서 소견서를 쓸 종이를 집어 들었다. 칸 누니엔 싱에게 약간의 휴식이 필요하다고 적었다. 어렵지 않게 내용을 볼 수 있을 텐데도 칸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았고 전처럼 그런 건 필요 없다는 투의 반발 섞인 한 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맥코이가 잠시 의자를 돌리면서 그에게 등을 보였다. 푸른 불꽃이 갑자기 치솟아 올라 주변의 공기를 태웠으나 사실 그것은 칸에게만 나타나는 모습이었다. 제어 칩이 남겨 놓은 스위치가 다시 그의 눈동자를 죽였다.
레너드 맥코이는 현대의 모든 것인 칸이 인간들의 세뇌를 끝내 이기지 못했다고 단정했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입맛대로 인간들의 세뇌마저 이용할 줄은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