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Khan] Innocence & Knowledge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John Harrison
- Inspired by the greatest person I hold most dear
- Written by. Jade
Innocence & Knowledge
처음엔 하나의 여가 혹은 유희였다. 그는 할 일만 생긴다면 지루해하지 않고 언제까지고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 경이로운 재능을 지탱하고 있는 형상은 기계가 아니었다. 그는 곧 굵직한 실험이나 발명을 끝내고 나면 북으로 나가게 되었다.
겨를이 없는 가운데서도 최상의 조건을 갖춘 거주지를 선정한 그였다. 그래서 그는 지독한 폭풍우가 없을 뿐, 탁하고 마른 대지가 크로노스를 연상시키는 땅에서 한 무리의 어린아이들을 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살짝 흥미가 생겨 그가 거리를 좁혀갔다. 아무 것도 없는 땅바닥 위에서 아이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발을 쿵쿵거리고 있었다.
“저기 도망간다!” “에잇!”
다른 무리들과 마찬가지로 수수한 색깔의 옷을 걸친 소년이 거인을 흉내내듯 땅에 크게 발자국을 찍었다. 소년의 그림다가 사라진 타원형의 테두리 안에 짓이겨진 개미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바위와 흙과 모래가 있을 뿐인 공터에서 아이들은 개미를 사냥하며 노는 중이었다. 우스꽝스럽게 발을 굴리는 소년들의 얼굴이 밝았다.
그는 어느덧 바위에 걸터앉아 그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잔혹함이라는 낱말조차 모를 나이의 아이들은 진심으로 순수하게 뛰놀았다. 반쯤은 전쟁과 정복을 추구하도록 설계된 존재로서 그는 어떤 간질거리는 감상을 떠올리고 짧게 스쳐가듯 웃었다. 세기를 넘나들며 많은 위업과 그에 비례하는 잔인함을 발휘해왔지만, 그는 아무런 이유나 목적 없이 살인을 한 적이 없었다. 처벌, 본능적인 경쟁, 때로는 복수. 연방이 등한시한 몇백년 전 기록에서 그가 최고의 독재자로 적힌 것은 그에게는 반드시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아이들은 한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 개미를 밟고 있었다. 도저히 합리성을 찾을 수 없어 하나의 목적이라도 이름 붙여줄 수도 없는 일시적인 호기심과 욕구가 작은 잔혹사를 빚어내었다. 그것은 그의 기억에 없는 순수한 살욕이었다. 물장구를 치듯 껑충거리는 아이들을 보며 그는 일말의 경외심을 느꼈다.
그가 단 한 번도 그러한 순수함을 갖지 못한 이유는 아마 그의 기원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그는 자연적인 성장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그의 영민한 지성은 일회적인 감각을 허락하지 않았으며 늘 무언가로 가득 차 있었다. 거울에 비친 반사상(反射像)을 또 다른 자신으로 여길 만큼 그는 하얗게 순진했던 역사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알고 추론에 능해서, 자신이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않은 이노센스를 머릿속에 그리며 그 찰나의 경이로움을 가늠할 수 있었다. 칸 누니엔 싱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문득 타인의 시선이 닿는 느낌에 고개를 돌리니 무릎 한 쪽을 접고 그와 마찬가지로 바위에 앉아 있는 소녀가 보였다. 모래바닥의 아이들보다 차라리 어려보이면서도 소녀의 표정은 뚱했다. 그가 얼굴을 약간 기울였다.
“왜 저런 걸 보고 있어요?” 소녀가 물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소녀의 목소리는 꽤 또렷하게 들렸다.
“저 소년들 말인가?”
“맞아요. 개미 잡아 죽이는 게 뭐가 재밌다고.”
소녀는 이미 백색의 두뇌를 벗어난 듯 말에 투덜거림을 섞었다. 칸의 흥미가 소녀에게로 옮겨갔다.
“그럼 너에게 재밌는 건 뭐지?”
“음, 가령 이런 거?”
소녀가 작은 옆구리에 끼고 있던 책을 꺼내보였다. 책등이 닳아있는 걸 보니 옆에 두고 자주 펼쳐본 것 같았다. 작가인지 아티스트인지 누군가의 이름이 은박에 덮혀 표지에 새겨져 있고, 번잡한 소개말이나 추천사도 없이 깔끔했다. 그는 그것이 일반적인 소설책은 아닐 거라고 판단했다.
“이런 사막 같은 마을이랑 어울리지 않는 취미라는 건 알지만 저한텐 이런 게 의미가 깊어요. 개미 죽여서 뭐해요. 밟히는 애들도 불쌍하고, 한 번 하면 거의 다시 찾을 일 없을 텐데.”
칸이 넌지시 말했다. “내가 구경할 수 있을까.”
“그러세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움직이지 않았다. 소녀가 설마 어른이나 돼서는 배려도 없냐며 그를 흘겼지만, 그에게 사회적인 관습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결국 소녀가 입을 비죽이며 바위에서 내려와 척 하고 책을 건넸다.
그것은 일종의 화집이었다. 초반에는 여성적인 일러스트 몇 점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장 즈음에 가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등장했다. 차분하게 책장을 보는 칸을 소녀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소 서늘한 청색이 넓게 드리워진 가운데 얇은 선으로 그려진 사람들이 아래쪽을 메웠고, 그 위로는 엄숙함이 깃들어 있는 얼굴들이 하늘을 대신했다.
“지혜의 시대라는 그림이에요.” 소녀가 설명했다. “자신의 만족을 위한 큰 작품을 완성한 화가가 이번에는 전 인류를 위해서 준비하던 연작이었고 각각 사랑, 지혜, 이성의 시대라는 이름이 붙었어요. 화가가 죽어버려서 완성은 못 하고 습작만 남았지만. 그걸 괜찮아 하시다니 신기하네요.”
칸이 화집을 무릎에 내려놓고 물었다.
“어째서지?”
“제가 요새 궁금해하는 그림이 그거거든요.”
그의 긴 다리와 코트 자락이 바위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어, 소녀는 주위를 빙빙 돌다가 그의 측면에 기대섰다. 소녀는 이름 모를 어른의 눈이 사막과 닮은 듯하면서도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그림에는 순서가 있어요. 사랑이 있고 그 다음에 지혜, 그리고 이성이죠. 그런데 저는 왜 사랑과 이성 사이를 꼭 지혜가 메워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 그림은 두 가지 가치를 이어줄 정도로 아름답고 대단하게 보이지도 않아요.”
소녀가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곧바로 칸의 청록색 눈이 명상에 잠기듯 아득해졌다. 소녀가 눈썹을 올렸다. 현실감도 없이 너무도 쉽게 사색으로 빠져드는 모습은 이질적이면서도 또한 놀라웠다. 곧 그가 초점을 찾고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들이 떠나는군.” 소녀가 몸을 돌렸다. 한바탕 개미 사냥을 마친 아이들이 마을로 향하고 있었다.
“신경 쓰지 마세요. 집은 혼자서도 잘 찾아가요. 어떻게 생각하시냐니까.”
소녀는 직감적으로 이 검은 옷의 남자가 고등학교까지 다녔다는 오빠나, 너털웃음을 흘리고 다니는 마을의 큰 어르신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걸 알았다. 소녀는 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혹시 아폴론의 요정들인 아홉 뮤즈 자매를 아는가? 오르페우스의 누이들을.”
의외로운 시작이었다. 소녀가 눈꺼풀을 깜빡이다가 대답했다.
“올림푸스에서 음악을 연주하던 여신들을 말씀하시나요?”
“맞아. 또한 리라를 치던 오르페우스의 누이들이기도 하지. 오르페우스가 어떻게 죽음을 맞았는지는 알고 있나?”
“..어, 그 에우리디케를 데리러 저승으로 갔을 때 말인가요? 아니, 그 때는 죽은 게 아니었던가?”
칸이 팔을 내려서 소녀에게 책을 돌려주었다.
“사실상 그의 죽음은 그가 결혼하기 전 구혼했던 많은 요정들이 디오니소스의 술에 취해 이성을 잃고 비탄에 빠져있는 오르페우스를 마구 공격해 죽여 버렸다고 하지. 후에 그의 누이들이 슬퍼하며 시체를 거두어 바다에 떠내려 보내 주었고.”
그리스 로마 신화는 여전히 영향력 있는 고전 중에 하나였으므로, 일정 수준의 학식이 있다면 몇 가지는 알 만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소녀는 꼭 신성한 존재에게 직접 그 일화를 듣는 듯한 기분을 받았다.
“나는 그 상황에서 저 그림을 연출해낼 수 있다고 본다. 뮤즈들의 하나뿐인 남자형제를 죽이고도 이성과 지혜를 모르는 인간들은 멈추지 않고 그 뮤즈들마저 공격해 버리는 거지. 여기서 사랑은 혈육에 대한 사랑으로도 볼 수 있고, 다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제대로 설명이 되었나.”
소녀는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네.”
칸이 바위에서 내려왔다. 변덕스러운 사막의 하늘은 햇볕이 따갑다가도 금세 빛줄기 하나 없이 캄캄해지기도 했다. 그리고 경험상 조금만 있으면 묵직한 밤이 찾아올 시간이었다.
“곧 어두워질 테니 들어가 보는 게 좋을 거다.”
“..저, 잠깐만요!”
소녀가 무턱대로 그를 불러 세웠다. 칸이 돌아섰다.
“이 주변에 살고 계세요? 아니다, 그것보다 여기 자주 오시나요?” 조숙한 체 굴었던 소녀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높아져 어린아이 같은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가끔 찾아올 지도 모르겠군.”
딱딱한 대답이었지만 소녀는 더 요구하지 못했다. 바람에 그의 코트 자락이 불규칙하게 흩어졌다. 그의 뒷모습은 아주 특별하진 않았지만 계속 바라보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긴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니었는데 소녀는 가슴 한 구석이 충만해졌음을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