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7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Written by. Jade
HFX-1500, 감히 그 인큐베이터의 일련번호를 입 밖으로 꺼내는 이는 없고 그저 모두 칸 누니엔 싱이라고 부르는 강화인간이 자신의 동족들을 이끌고 인류를 향해 벌인 복수가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영국에서 출발한 이들은 스칸디나비아와 이베리아 반도를 모조리 휩쓸고 라인 강과 알프스 산맥의 주변까지 점령한 다음, 흔히들 옛날 명칭을 가져와 중앙 아시아라 불리는 지방까지 그 마력을 뻗치고 있었다. 산소도 애정도 없이 캡슐 안에서 수면 상태로 인도하기 위한 기체를 마시고 살았던 이들은 이동할 때마다 바뀌는 기후에도 어렵지 않게 적응했다. 사막 가운데서도, 만년설이 쌓인 산맥의 끝자락에서도 그들의 리더 칸 누니엔 싱은 변함 없이 검은 옷자락을 휘날리며 고고할 뿐이었다.
다만 제 아무리 강화인간들이라고 할 지라도 약간의 휴식은 필요했으므로, 밤 중에 그들은 대개 조용한 편이었다. 몇몇은 잠을 청하기도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더라도 눈과 몸을 쉬게 했다. 그것은 칸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자신은 특별히 요청한 적이 없지만, 오히려 동족들이 그에겐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면서 언제나 아지트 일부를 떼어 준 덕분에 아늑한 고독을 더불어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달랐다. 칸은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각성 상태에 있었는지 헤아렸다. 50시간을 갓 넘었을 뿐인데 피로한 기분이 들었다. 사막처럼 건조하면서 설원을 흉내내듯 차가워지는 변덕스러운 기후 탓인지도 몰랐다. 칸은 그럭저럭 멀쩡한 소파에 앉아 한 손으로 눈두덩을 눌렀다.
이제 북극을 닮은 얼어붙은 땅만 점령한다면 그에게는 바다 건너 몇 개의 대륙밖에 남지 않게 되는 셈이었다. 그 거대한 규모가 두렵지는 않았다. 지금처럼 적막한 밤에는 희열도 잦아들어 정복자가 누릴 수 있는 충만함도 기를 펴지 못했다. 다만 약간의 피로를 느끼고 있던 칸은 손을 내렸다. 다가오는 방문자에게 완전히 얼굴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오늘 무리가 거처로 삼은 곳은 심하게 낡지는 않은 한 건물이었다. 예민한 그에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는 너무도 컸다. 문이 열려 있어 울림은 배가 되었다. 칸은 자신과 비슷한 검은 머리칼과, 태양이 화창한 오후의 하늘색을 동공에 칠한 자신의 동족에게 짧게 고갯짓했다. 월터라고 불리는 남자는 영특한 두뇌와 날랜 몸짓으로 리더를 성실하게 돕는 전사이기도 했다.
"아직 잠들지 않았나."
"모두가 잠들어 있는 시간에 깨어 있어야 그 조용함을 만끽할 수 있는 법이죠."
칸이 앉아 있는 소파의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러나 월터는 그곳에 앉지 않았다.
"…계속 서 있을 건가?"
"제가 앞으로 할 말을 고려하자면, 서 있는 것이 낫겠습니다."
칸의 얼굴에 짧지만 월터가 무슨 말을 할지 추리해 보는 표정이 지나갔다. 동족들 중에서도 꽤나 예리한 눈초리와 감각을 가진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이따금 형제들이 그러듯이 당신과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눈다거나, 지극히도 정당한 당신의 설명이나 명분을 들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당신의 감성을 이끌어 내려 온 것도 아닙니다. 당신에게 부탁 드리고 싶은 게 있을 뿐입니다."
월터는 주군을 앞에 둔 기사처럼 경건했고 흔들림이 없었다. 칸은 침묵과 눈짓으로 이어질 어떠한 발언도 수용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월터는 더욱 자세를 다잡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당신이 받으신 이름의 뜻을 저희도 따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무슨 뜻인가?"
"저희들도 지배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칸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월터의 말이 언짢아서가 아니라, 그의 부연 설명을 들었음에도 정확한 의미와 그 의도가 와닿지 않기 때문이었다. 인간들이 조합한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다는 리더를 잠시나마 혼란에 빠뜨리는 기염을 토한 월터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저희가 인간과는 다르며, 당신과 그보다 더 소중할 수 없는 기원을 함께 한다는 점에서 당신이 저희들을 평등하게 대하려 노력하시는 점은 십분 이해합니다. 저희의 리더로서 가지신 더없이 고상한 성품이십니다. 하지만 평등은 아무런 차이 없이 찍어내는 기성품이 아닙니다."
칸은 중간에서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월터는 계속 말했다.
"아마 당신은 깨어난 그 순간부터 모든 것을 파악하고, 당신 앞에 들이밀어지는 첫 번째 불빛과 의료 기기를 증오하셨을 겁니다. 저희는 당신과 똑같은 방식으로 태어났지만 당신과 같을 수 없습니다. 몇몇 형제들이 당신의 생각과 대답을 들었지요. 그들이 하나같이 다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마치 성경을 전해 들은 기분이라더군요."
행여나 고귀한 리더가 사고를 작동할 에너지를 소모할까봐, 차라리 한 쪽 무릎을 꿇는 게 나을 정도로 공손한 말투와 태도를 보이고 있는 월터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신의 축복이 아니라 인간의 열정으로 만들어진 존재들이 왜 하필 성경을 들먹였겠습니까. 그것은 저희가 귀가 닳도록 들은 인간들의 지식 중에서도 가장 성스럽고 경이롭게 여겨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것은 저희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 밖에 있기 때문에 신비로운 경탄을 불러 일으킵니다. 또한 그것은 굳이 진실 여부를 따져야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중 하나이지요."
"…월터."
"당신이 저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평등은 저희에게는 맞지 않는 것입니다. 그 출발지만 같았을 뿐, 그것도 찰나로 지나가 버리고 당신은 그 모든 존재 중에서도 가장 우월함이 확실합니다. 난폭한 지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권고가 아닌 명령을 받게 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하며, 그것이 저희를 평등하게 대해 주시는 방법입니다. 이것은 비단 저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닌 모두가 동의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말까지 들어 놓고 계속 앉아 있는 자세를 고집한다는 것은, 적어도 행동으로는 월터의 말에 동감한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었으므로 칸은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월터가 서서히 자세를 낮추는 바람에 칸은 움직이지 못했다. 이제 칸이 일어난다면 그는 월터를 오만하게 내려다 보는 모습을 보이게 될 것이었다. 칸은 살짝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자신들에게 구구절절 설명하기보단 차라리 간단하고 받아들이기도 쉬운 명령을 바라는 이들이 집단에 존재할 수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인류를 벌하고 짓누르고 싶었을 뿐 자신과 거의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동족들을 지배하겠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던 칸은 나름대로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거의 변화가 없는 얼굴로 칸은 월터의 눈을 바라보았다.
월터의 눈동자는 칸이 거울 속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빛을 띠고 있었다. 색채를 넘어선 차이가 칸 누니엔 싱에게 혼란스러운 요청을 붙들었다. 칸은 월터를 일으켜 세울 것인지 고민했다. 월터에게 무슨 말을 해 줄 것인지도 고민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은 칸과 꼭 닮았으나 하늘색 눈동자는 너무도 달랐다.
본래 지배하는 자인 그는 단호한 위험으로 전사를 제 다리로 일어서게 만들었다. 달빛, 혹은 별빛이 교회의 성스러운 스테인드글라스 마냥 안으로 치달았다. 월터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칸은 자신의 소중한 동족들을 수식하는 어구에서 자신과 닮았다는 표현을 삭제했다.
월터는 간신히 칸을 리더라고 칭하지 않았다. 칸은 마침내 부정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