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존본즈] Haze and Gold 01
- Star Trek Into Darkness, Khan Noonien Singh/Leonard McCoy
- Written by. Jade
Haze and Gold
안개와 황금
Nothing Else Matters Piano & Cello Cover by Brooklyn Duo
Originally sung by Metalica
레너드 맥코이는 끝없이 사람들의 발길에 걷어차이던 라이플이 끝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걸 보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저주받은 물건과도 같은 그 라이플을 만지지 않았으나,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라이플은 몇 초 만에 자취를 감추었다. 샌프란시스코의 바닥에 남아있던 가장 적나라한 전쟁의 흔적 중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한 존재가 차근차근 인류를 몰살해가던, 세상에서 제일 끔찍한 횡단의 종착점에 있었다는 이유로 인하여 운 좋게 살아남은 사람들이 건물의 잔해들을 치워내고 잠시 바닥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의 뒤편으로 무너지지 않은 금문교가 서 있었다. 맥코이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미 사라졌으나 한때는 너무나도 사악했던 라이플을 바라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주인이었던 남자가 커다랗게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한 표정으로 다리를 바라보던 모습까지 기억할 수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랫동안 일해 온 맥코이는 그 다리가 어떻게 충격을 줄 수 있는지 잘 알지 못했다.
한동안 다리를 보고 있던 맥코이가 어깨와 목을 풀었다. 그는 의사였으나 부상자는 거의 없고 사망자들의 숫자가 압도적이라 그만의 기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은 맥코이도 다른 사람들과 비슷하게 부서진 건물들과 씨름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속보에요, 속보! 모여보세요!”
누군가가 종이 한 장을 급하게 흔들면서 소리쳤다. 맥코이는 약간 느리게 사람들의 무리에 합류했다.
“무슨 일인데?”
“그 미친놈의 재판 일정이 벌써 잡혔대요.”
“남아있는 법원이 있었나?”
“전범한테 뭐 얼마나 거창한 법원이 필요하다고. 대충 재판장 하나만 있으면 되지 않겠어요? 어차피 사형일 텐데.”
“그런데 그 놈은 그렇게 금세 항복을 해 버렸나 봐요? 혹시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건 아닌가 몰라. 아무튼 재판은 언제래요?”
“이틀 뒤요.”
호들갑스럽게 가져온 정보가 알려지자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칸 누니엔 싱에 대해 분노를 표출하고 싶어 해서 화제는 아주 빠르게 통일되었다.
맥코이는 혼자 맨 처음 소식을 물어왔던 사람에게 접근했다.
“가져오신 종이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럼요.”
그는 맥코이에게 종이를 넘겨주고 곧장 파렴치한 전범을 깎아내리는 일에 동참했다. 맥코이는 사람들을 등지고 종이를 읽었다.
급하게 찍어낸 공문 같은 종이에는 별 내용이 없었다.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칸 누니엔 싱으로 알려진 전범을 엄격하게 구금하고 있으며 이틀 뒤 그에 대한 공개 재판을 행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전부였다. 인간이 살고 있는 대륙은 모조리 쑥대밭으로 만들 것만 같았던 존재가 어떻게 항복을 하게 되었는지, 그가 항복한 자리에 누가 있었고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그래서 레너드 맥코이는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뒤졌다.
맥코이는 그때 한 명이라도 살리고자 의사로서 바깥에 나가 있었다. 과연 단신으로 여러 국가들을 소멸하고 다녔던 자의 무력은 악마적이었다. 의사가 굳이 살리려 하지 않아도 악착같이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는 사람들일수록 다시 한 번 살해되는 자비 없는 현장에서 맥코이는 그저 가만히 있었다. 비무장인 그가 살 수 있는 확률은 어차피 낮았다. 전쟁이 시작되었던 영국과 반대 방향의 땅에 살고 있었던 덕택에 지금까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거라면, 맥코이가 자신의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렇게 맥코이는 얼핏 초연한 듯하나 사태를 너무도 명확하게 인식하는 바람에 오히려 무기력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후퇴! 후퇴해!”
전범은 검고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전진했다. 맥코이는 전장에 나간 의사면서 한 명도 살리지 못한 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워했다. 때마침 총성이 울렸고 맥코이는 눈을 감았다.
1분이 지나도 맥코이의 몸은 멀쩡했다. 그 믿을 수 없는 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맥코이는 눈을 떠야 했다. 그가 눈을 뜨는 동안 도시는 참으로 조용했다. 더 이상 건물이 무너지지 않았고 총탄도 발사되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죽어가는 소리를 내지 않았다.
맥코이는 전범이 무기를 내린 걸 보고 크게 놀랐다. 저절로 탄식 같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당신, 지금….”
전범은 맥코이가 서 있는 쪽으로 계속 다가오고 있었다. 맥코이는 급히 물러나려다 그가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음을 눈치채고 움직이지 못했다. 게다가 전범은 경악하고 있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평범한 의사일 뿐이고, 그를 둘러싸고 있는 풍경 또한 특별할 것 없는 전쟁의 일면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맥코이는 전범을 응시했다. 그는 새하야면서 동시에 새카맸다. 그리고 진리를 본 회의주의자, 혹은 신을 본 무신론자의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맥코이만의 감상이긴 했지만 어쨌든 맥코이는 전범이 싸움을 지속할 마음이 없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용감하게 팔을 뻗어본 것은 그러한 점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전범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사람들이 더 죽지 않을 것이고, 그러면 맥코이는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의사가 되어 누구보다 직업에 대한 소명을 충실하게 이행한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전범은 맥코이의 정체를 물으며 무기를 놓았다. 하얀색 가운이 그를 부드럽게 가려주듯이 휘날렸다.
맥코이는 그 나름대로의 충격을 받고 정지했다.
멀찍이서 최후의 전선을 짜려던 군이 웅성거렸다. 무시무시한 전범이 의사 가운을 팔에 걸친 남자 한 명에게 쩔쩔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군인 하나가 돌격을 제안했다. 비로소 전범이 전투 의지를 상실했다는 걸 안 인간들이 그를 덮쳤다.
즉 칸 누니엔 싱은 레너드 맥코이를 직면한 순간부터 무력해진 것이었다.
맥코이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는 걸 원하지는 않았지만, 칸의 이상 행동에 대해선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공개 재판장에 가봐야겠다고 결정을 내리고 종이를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거리에는 아직 멀쩡한 쓰레기통 하나 서 있지 않았다.
“레너드 맥코이?”
군용 재킷으로 자신이 관료임을 증명하고 있는 남자가 맥코이에게 손짓했다. 맥코이는 당국이 자신의 존재를 잊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수정했다.
“잠깐 저와 동행하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전범 재판과 관련하여 당신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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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켈빈 연구소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칸 누니엔 싱이 태어난 곳이라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요.”
“그 외에 켈빈 연구소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없습니까?”
“없습니다.”
“그곳의 연구원들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연구소의 관계자들과 한 번이라도 접촉한 적은?”
맥코이는 그쯤에서 발끈했다.
“없습니다. 이거 뭔가 취조당하는 기분인데요, 왜 자꾸 저에게 켈빈 연구소에 대해 물어보시는 겁니까? 전 샌프란시스코에서 10년 넘게 의사로 일해 왔어요. 런던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단 말입니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겠습니다. 칸에게 말을 건넨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자신의 중얼거림도 질문자의 물음에 포함이 되는 것인지 잠시 생각했다.
“아뇨.”
“그 반대의 경우는요? 칸이 당신에게 말을 걸었었습니까?”
“제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을 했습니까?”
“아니요. 너무 놀랐고 당황스러워서 대답할 생각조차 못 했습니다.”
“왜 그가 당신이 누군지 알고 싶어 했는지 짚이는 점이 있습니까? 혹은 그것에 관하여 한 번이라도 깊게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맥코이는 그 질문을 듣고 속으로 놀랐다. 그는 칸이 자신을 보고 공격을 멈췄다는 결과에만 집중했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맥코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강력하게 의문을 품어야 했다.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본 일이 없습니다.”
“본인도 왜 자신이 칸을 멈추게 만들었는지 모르는군요.”
“맞습니다.”
샌프란시스코 안전보장 위원회의 위원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알겠습니다. 일단 맥코이 씨는 자리를 마련해 놓을 테니 이틀 뒤 열리는 재판에 꼭 참석해주길 바랍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번 더 호출할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기억해주시죠. 나가셔도 좋습니다.”
맥코이는 엉덩이로 의자를 밀고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그가 방을 나서는 움직임은 무척 신속했지만, 뒤이어 맥코이는 상념에 사로잡혀 느릿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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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재판장으로 채택된 곳은 한때 창고형 매장의 일부였던 건물이었다. 재판을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주최 측은 다소 품격이 떨어지긴 하나 최대한 사람을 많이 수용할 수 있는 곳에 재판장을 꾸밀 수밖에 없었다. 이틀이 조금 못 되는 시간동안 철제 진열대며 남아있는 상품들이 치워졌고 의자와 작은 단상이 설치되었다. 그렇지만 성한 의자들의 숫자가 턱없이 부족해 일반 관람객들은 바닥에 앉아야만 했다. 주최 측은 사람을 바리케이드처럼 세워놓고 의자가 마련된 구역과 그렇지 않은 구역을 구분했다.
참으로 어수선하고 형편없는 재판장이었으나 맥코이는 차마 혀를 차진 못했다. 범죄자는 한 번쯤은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대단히 문명화되고 이성적인 사고는 오히려 박수를 받을 만했다. 맥코이는 재판장을 한 번 더 바라본 뒤에 바리케이드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댔다. 그러자 그는 맥코이를 의자가 있는 쪽으로 안내했다.
거대한 무리가 웅성대면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이해는 되지만 불편한 광경이었으므로 맥코이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모두 자리에 앉아주세요. 곧 재판관님이 들어오십니다.”
그 말이 있은 뒤 5분이 지나자 검정색 가운을 입은 사람 세 명이 나타났다. 군중들이 환호했다.
“사형!”
“그 놈을 빨리 죽입시다!”
바리케이드들이 군중들을 진정시키고자 바삐 돌아다녔다. 맥코이는 의자에 앉은 사람들을 힐끗했다. 귀한 의자를 배정받아서인지 그들은 꽤나 조용하게 눈으로만 칸 누니엔 싱의 사형을 외치고 있었다.
“정숙하세요! 자, 피고 입장.”
순식간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칸 누니엔 싱은 전장에서 입었던 것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걸어 나왔다. 그의 발이 내는 소리는 깨끗하고 위압적이었다. 칸을 인도하고 있는 두 사람은 그야말로 형식적으로 그를 붙잡고 있었고, 칸은 누구에게도 불편함을 받지 않으며 도리어 모두에게 불편함을 끼치는 자태로 피고석에 앉았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 몇몇이 진저리를 쳤다.
“기록을 위하여 피고는 이름을 정확히 대시오.”
칸은 조잡한 질서의 주인공으로서 단상을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고요하게 음미하기라도 하듯이 천천히 대답했다.
“칸 누니엔 싱.”
“그럼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군중들이 또 괴성을 내지르려다 멈칫했다. 칸은 재판관보다 더 곧고 위엄 있는 자세로 주변을 살폈다. 맥코이는 그걸 보고 순간적으로 몸을 앞으로 살짝 내밀었다. 그는 칸이 자신을 발견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칸은 맥코이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는 것처럼 그를 노려보았다.
“피고는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경위를 밝히시오.”
칸은 입을 열기 전에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보통 인간들은 그것이당연한 생리적 미동인줄로 알았지만 칸은 몇 초에 한 번씩 눈을 깜빡이지 않아도 되었다. 그것은 그 자신을 향한 일종의 자극이었다. 그리고 칸이 레너드 맥코이를 시선의 중앙에 두고 눈꺼풀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세상의 온갖 색채들이 물결처럼 번져갔다.
칸이 말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자들이 세상을 잘못 인식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 오류를 수정하려고 했다.”
맥코이는 입술을 닫았다.
Original Date 2015. 11.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