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5/이단벤지]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1)
- Mission Impossible: Rouge Nation, Ethan Hunt & Benji Dunn
- Written by. Jade
Mission: Impossible - Doe's Agency
미션 임파서블: 도스 에이전시
[1. 신념을 도둑맞은 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무언가를 보려 하지도 않는 비목적성이 이단의 눈앞을 떠다녔다. 그것은 이를테면 극단적인 허무주의의 씨앗이었다. 개별 의식이라는 차이점을 가진다 하더라도 무기는 무기에 지나지 않는 법이었다. 이단은 자신이 제대로 시선을 준 적조차 없는 길들이 너무나 많았다는 것을, 세상에 선과 악을 점유할 존재들이 그토록 넘쳐난다면 자신은 그저 탄창이 채워지길 기다리는 총에 지나지 않았어도 손가락질을 받지 않았을 것이라는 상념들에 사지를 붙잡혔다. 너무나 많은 가능성들이 오히려 그를 무력하게 했다.
일사 파우스트는 이단에게 신념의 상대성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지금 이단의 머릿속에는 일사의 언어만 남아 있었다. 자신의 의지가 묶여버리는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서 어떻게든 선택과 판단의 영역으로 향해야 했던 일사의 배경은 희미하기만 했다. 대신 상대주의로 만들어진 밧줄로 묶인 회의주의의 합판을 지나서 얄팍한 무력함에 도달하는 길이 유래 없이 빛나고 있었다. 이단은 점차 고민을 할 수 있는 기력마저 잃어갔다. 가장 밝은 빛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나쁘냐면서 한바탕 팔을 휘두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이단은 이동을 준비했다. 그는 먼저 구두를 벗어던졌다. 요원들 중에 가장 활동량이 많은 이단의 신발은 늘 연구원들의 리허설 무대였다. 새로 개발된 소재들이 한데 모인 그 신발 한 켤레는 최고의 요원을 향한 IMF의 독특한 헌신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이단에게는 밑바닥이 거슬릴 정도로 무거운 구두에 지나지 않았다. 이단은 신발을 벗은 채 두 걸음을 더 걸었다.
그의 발목이 유난스럽게 피로감을 호소했다. 이단은 별수 없이 양말을 벗었다. 그런데 아무리 양말을 벗어도 맨발이 드러나질 않았다. 이단의 어깨가 늘어졌다. 평화롭고 피곤하지도 않은 허망함이란 과연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단은 누구보다 강인한 목적을 가지고 세상을 뛰어다녔던 발바닥에 전가(轉嫁)의 대지를 닿게 해 주려고 수도 없이 양말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이단의 피부에 붙어 있는 것은 작은 열매가 그려진 양말이었다.
비행기 표가 들어 있는 봉투나 받을 뿐인 이단의 책상에 열매가 걸린 날이 한 번 있었다. 이단이 3개국을 돌아야 했던 일정 끝에 귀국한 날짜가 성탄절이었던 건 그 당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동료들은 조직에서 제일 순수하고 성실한 이단 헌트가 임무를 마친 뒤의 보고를 올리러 본부로 돌아올 것임을 다 예측하고 있었다.
그들은 빨간색과 초록색 실을 엮은 철사를 곳곳에 건 다음 나무집게로 종이라든가 지팡이 모양의 사탕 따위를 고정해 놓았다. 센스가 있는 이는 50달러가 충전된 스타벅스 선불카드를 준비했고 유머감각이 있는 자는 이단이 절대 신지 않을 호랑가시나무열매가 촘촘히 박힌 신발을 널었다. 이단은 웃으면서 다음 날 그것을 벤지의 모니터에 걸었었다. 당시에도 벤지는 이단과 비교하면 경험이 부족한 요원이었기에 어떻게 내 선물을 돌려보낼 수가 있냐며 솔직하게 노발대발하는 태도를 보이고 말았다.
이단은 팔을 늘어뜨리고 가만히 서 있었다. 사고가 없는 영역으로 그를 안내할 로프와 판자가 썩어가는 중이었다. 이단은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형체가 없는 것이 부서지고 있었으나, 부서지고 있는 것이 하필 형체가 없어서 이단은 하릴없이 손을 펼쳤다.
* * *
벤지는 카드키를 휙 던지듯 리더기에 올려놓았다. 마닐라의 CIA 지부가 습격 받았다는 소식을 접한 뒤부터 벤지에게 복귀하라고 협박 같은 부탁을 남발했던 브랜트가 본다면 이마를 짚을 광경이었다. 벤지는 승강기 버튼부터 계단에 이르기까지 거치적거리는 모든 것들에게 묘하게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래도 자각 있는 요원이자 친구이기도 한 벤지는 부국장실로 들어가면서 태도를 정돈했다.
“나 왔어.”
“잠깐, 벤지.”
브랜트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벤지는 입술을 한 번 오물거렸다가 입고 있는 옷에 달려 있는 모든 주머니들을 뒤집었다. 가지고 있던 스마트폰은 덮개와 배터리를 한 번 분리하고 별도의 검사 과정을 거쳤다. 벤지에게 성가신 요소가 들러붙어있지 않다는 걸 확인한 브랜트는 벤지에게 의자를 내주었다.
“네가 비행기를 타고 있던 18시간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
“뉴스에 특별한 얘기는 없던데?”
“당연히 매스컴엔 실리지 않았지. 어느 나라가 자기들의 정보국 지부가 습격 받았다는 걸 소문내고 싶겠어.”
브랜트가 벤지가 보기 좋도록 타블렛을 돌렸다. 빨간 점들을 본 벤지의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무슨 뜻이야, CIA 말고 털린 데가 또 있다고?”
브랜트가 화면을 가볍게 눌렀다. 한 곳에 빽빽하게 모여 있는 장소들 위로 주소와 그것이 숨기고 있는 실제 명칭이 나타났다.
“마닐라에 기지를 두고 활동하고 있던 첩보 기관은 CIA를 합쳐서 모두 네 개였어. 그리고 20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쑥대밭이 됐지. 생존자는 아마 없을 거라더군.”
“뭐야, 그럼 도스 에이전시가 CIA만 노리고 있다는 게 아니네? 전 세계의 정보부를 상대로 한 판 붙겠다는 거야?”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지.”
“맙소사. 아니, 그럼 날 왜 불렀어? 현지 경찰이 입수하는 정보들로는 해결이 불가능할 게 뻔한데!”
“표면적으로는 모두 반군의 자살 폭탄 테러야. 너보고 24시간 안에 내전이 발생할 수도 있는 나라에 있으라고 할 수는 없어. 게다가 각국의 첩보 체계 자체와 전쟁을 선포한 놈들이라면 우리가 따로 조사를 나간다고 해서 건질 수 있는 증거는 당연히 남겨놓지 않았을 거고. 여기서 시작하는 게 맞아, 벤지.”
벤지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속이 두꺼운 정치인 일당들을 상대하면서 나날이 견고해지고 있는 브랜트의 설득력에 구멍을 낼 수가 없었다. 벤지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짝이 없다는 점만 뺀다면 거의 모든 것이 동일할 자신의 오래된 위치를 그렸다.
벤지의 생각은 자연스럽게 이단의 마지막 좌표로 옮겨갔다. 마닐라의 CIA 지부는 서브코프 오피스 빌딩으로부터 5km 가까이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첫 번째 폭탄은 오롯이 이단에게 선물된 것이었다.
“그런데 놈들의 첫 번째 타깃은 왜 이단이 된 거지?”
브랜트의 고개가 움찔했다. 벤지는 브랜트의 주의를 사로잡으려는 것처럼 팔을 저었다.
“이단이 IMF 국장인 것도 아니고, 타격이 크긴 하겠지만 이단이 없다고 해서 곧장 CIA나 IMF가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왜 놈들은 제일 먼저 이단을 노렸을까?”
브랜트가 홀린 듯 벤지의 말을 받았다.
“…이단이 누군가에게 굴복당할 타입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얘기 같지 않아?”
영리한 브랜트와 벤지는 솔로몬 레인이 빚은 사태로부터 얻은 교훈을 잊지 않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곧장 방을 나가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나의 키워드를 떠올린 그 순간부터 둘은 서로에게 적합한 임무가 무엇인지 정한 것이었다. 잠시 후 벤지는 다짜고짜 헌리의 방문을 두드렸고 브랜트는 영국 정보부와 교신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 * *
솔로몬 레인은 의도적으로 구성된 고독의 중심부에 앉아 있었다. 그가 갇혀 있는 독방의 앞에도, 양옆에도 분명히 문은 존재했지만 그 안에서는 찬 공기만 흘러나왔다.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면 간수나 그 구역의 당번조차 내려오지 않았다. 과거를 반추하는 대신 이기적인 전복을 선택한 남자는 그곳에서 천 년을 더 지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레인은 몇 번이고 시간의 흐름에 무뎌지려고 애썼으며 최근에는 나름의 성과를 얻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단 한 줄기의 소음이 그동안 레인이 쌓아 왔던 모든 노력을 무너뜨렸다. 레인은 눈을 날카롭게 떴다. 누군가가 레인과 MI6가 공유하는 규칙을 뒤흔들고 있었다. 레인은 일어나서 철문에 달려 있는 작은 덮개를 옆으로 밀고 미지의 반항인을 맞을 채비를 했다.
철창 너머로 모자를 쓰지 않은 남자의 얼굴이 나타났다. 레인은 웃음과 한숨과 경멸을 모두 참아냈다.
“더 일찍 올 줄 알았건만 못 보던 새에 인내심을 기른 모양이지.”
“이단 헌트가 내 손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하러 왔다는 걸 고려하면 이르다고 생각하는데.”
그 말을 듣고 레인이 철창을 붙잡지 않은 것은 순전히 그의 성격 탓이었다. 레인이 보란 듯이 팔을 아슬아슬하게 걸치고 서 있는 문 밖의 상대방은 간수의 유니폼을 하나도 갖춰 입지 않았다. 물론 그 팔이 철창 사이의 빈틈 대부분을 가려주어 레인은 상대에게 자신의 표정을 감출 수는 있었다. 그것으로 남자는 레인에게 작은 배려를 제공해주는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당신이 원하던 일들이 실현될 거야. 하지만 당신을 꺼내줄 수는 없어. 당신이 죽었다는 소식이 알려져야 당신에게 마음이 남아있던 인재들이 희망을 버릴 거고, 나도 사람들을 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
남자는 평이하게 레인의 죽음과 그가 가지고 있던 가장 그럴듯한 재산이 강탈당했음을 선언했다. 레인은 그의 검은색 팔이 물러나면서 그 빈자리를 작은 유리병이 채우는 것을 지켜보았다. 레인의 입술에서 웃음이 샜다.
“내가 왜 이걸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실패한 인생을 계속 살고 싶진 않잖나.”
“여기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야.”
“그렇지만 당신이 계획했던 그 교활한 완벽함은 다신 이루어질 수 없어. 당신은 당연히 이단 헌트를 위해서 당신의 몸을 바치지 않을 거지만, 동시에 그토록 중요한 위치를 자기 자신 말고 누구한테 맡길 성미도 못 되니 당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이이제이는 불가능한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특정한 방법론이 그저 방법론으로 그치지 않는 때가 종종 있다. 레인은 전쟁으로 비대해진 나라와 그것의 모체가 이끄는 연합체를 물리치고자 나선 자신의 역사를 돌아본 순간, 단순한 수단에 머무르지 않는 방법론의 매력과 그것의 의의를 먼저 실감했다. 레인은 일그러진 거울상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무리 그 모양이 흉해도 그것이 거울이라는 본질 자체를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인은 약병을 손에 쥐었다.
“…한 가지만 묻지.”
상대방은 레인이 그 말을 해주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발조차 떼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면 네가 이단 헌트를 위해 희생시킨 사람은 누구지?”
“없어.”
솔로몬 레인은 굳었다. 남자의 말에 충격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미래상을 끄집어내는 데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레인은 눈동자를 움직인 뒤에야 바깥쪽에서 먼저 덮개를 닫았음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소리도 다 듣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레인은 다시 고독해졌다. 사실 그는 애초부터 다른 사람과 무엇을 공유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 * *
MI6에 있는 한 유선전화의 벨소리가 울리며 사건은 시작되었다.
일상적으로 수화기를 들었던 영국 정보부의 국장은 책상을 창문 끝까지 밀어버릴 기세로 일어나면서 급하게 겉옷을 챙겼다. 국장은 손가락을 튕겨 요원 몇 명을 차출했다. 그들은 솔로몬 레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턱을 있는 힘껏 아래로 떨어뜨렸다. 이미 레인이 갇혀 있었던 감옥은 CCTV 영상을 확인하고 입구를 봉쇄하느라 야단법석을 떠는 중이었고, 거기에 정보부 특유의 냉철함을 더하고자 세단 한 대가 MI6 헤드쿼터를 부리나케 빠져나갔다.
세단이 훑은 굴곡에 방금 전까지 없었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림자는 전화를 걸고 있는 국장과 운전 중인 요원 하나, 그리고 창밖을 살피는 또 다른 요원까지 무사히 따돌리고 전등 불빛이 제대로 닿지 않는 곳을 파고들었다. 그림자는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굳이 피하지는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카메라들은 그림자가 렌즈의 눈앞을 지나갈 때마다 이상 반응을 보였고, 그것이 사라지면 다시 정상적으로 고개를 돌려댔다.
MI6 본부가 위치한 런던 램버스 지역을 가까스로 벗어나는 블랙 프린스 로드에는 일사 파우스트가 희미하게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먼 곳에서 운반되는 강물의 냄새와 지척에 널린 커피 향기가 그럴듯하게 섞인 곳에서 일사는 책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팔꿈치를 대고 있는 테이블 위에는 두툼한 책이 두어 권 놓여 있었고, 맞은편 의자를 바짝 끌어와 거기에 가방을 보관하고 있는 모양새가 영락없는 학도의 자태였다. 또한 그녀는 일반인이 가질 수 있는 형태 중 하나를 뽐내고 있었다.
야외 테이블 주변을 돌던 점원이 일사가 끄트머리에 놔둔 빈 잔을 수거했다. 일사는 변함없이 책장을 넘겼다.
국장은 발 빠르게 차에서 하차했다. 교도관은 일부 관리자들만 사용할 수 있는 통로로 그를 안내했다. 몇 번 꼬이고 꺾어진 뒤에는 계속 곧은 길이 이어져 국장은 성큼성큼 교도관을 앞질렀다. 이동하면서 그에게 언제쯤 경찰에 신고하게 해 줄 거냐고 물으려던 교도관은 입술만 툴툴 털었다.
허상 같은 장식들 틈바구니에서 유일하게 기능할 수 있는 문 한 짝이 영국 정보국의 정상을 반겼다. 국장은 조용히 핸드폰의 불빛을 켰다. 사람이 원체 다니지 않은 곳이라 그런지 백색의 불빛이 허공을 휘젓는데도 포착되는 먼지가 거의 없었고, 한 남자가 죽은 현장임에도 공기 중에는 악취가 아닌 차가움만 흘렀다. 국장이 출입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솔로몬 레인은 앉은 채로 뒤통수를 벽에 살짝 기대고 있었다.
“내부를 더 밝게 할 수는 없나?”
“손전등을 가져올까요?”
“아니, 됐네.”
교도관은 우물쭈물하면서 뒷걸음질 쳤다. 국장을 제외한 나머지는 그 배타적인 독방 안으로 들어갈 수조차 없었다. 국장은 핸드폰을 왼손으로 바꿔 쥐고 오른손에는 장갑을 꼈다. 그가 레인의 옷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었다.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을 수 있는 공간에는 현장에서 뛰는 요원들과 분석가들, 일반 사무직 직원들이 저마다 무리를 지어서 솔로몬 레인의 죽음에 대해 입방아를 찧고 있었다. 본부는 누가 범인이며 그가 왜 레인을 죽였을지 추정해보는 목소리들로 들썩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한 사람이 최선을 다해 조절하고 있는 진동이 그들에게 전해질 리 만무했다. MI6의 침입자는 쉽게 코너를 돌았다. 국장실이 코앞이었다.
한편 위협받고 있는 방의 주인은 솔로몬 레인의 옷에서 기어이 쪽지 하나를 찾아냈다. 그의 눈썹 위로 얇은 주름들이 그어졌다.
“…이단 헌트를 찾아라?”
다리를 굽히고 있던 국장이 똑바로 일어섰다. 국장은 한결 몸을 편하게 가누고 고차원적인 사고에 돌입하려다가 핸드폰이 울려 멈칫했다.
“네.”
—IMF의 윌리엄 브랜트입니다. 지금 통화 가능하십니까?
국장이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놀라운 타이밍이로군. 일단 그쪽의 용건을 듣도록 하지. 무슨 일인가?”
—솔로몬 레인 쪽에서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영국의 교도소 시스템을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만, 어떤 식으로든 레인이 연결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 일이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솔로몬 레인은 죽었네.”
브랜트는 노련하게 기침이나 공기를 잘못 들이켠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브랜트가 당분간 말을 잇지 못할 것임이 자명했기에 영국 정보부의 수장은 거침없이 브랜트에게 질문했다.
“이제 내 차례로군. 왜 레인은 죽으면서 IMF의 요원을 찾으라는 말을 남긴 건가?”
—…예?
“이단 헌트는 어디 있지, 브랜트 부국장?”
느닷없이 테이블이 흔들리는 바람에 일사는 고개를 들었다. 자리를 물색하고 있던 여성이 숄더백으로 일사의 테이블을 치고 간 듯했다. 여성은 재빠르게 사과를 했고 일사는 미소로 그것을 받았다. 그녀는 한동안 양손으로 테이블을 꼭 잡으며 남아 있는 진동을 억눌렀다. 일사가 그 자세로 시선만 옆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일사는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단?”
특수조직이 총애하는 요원은 과연 남달랐다. 이단 헌트는 일사의 혼잣말까지 들은 양 정말로 고개를 돌렸고, 일사는 이단의 눈동자가 자신을 담고 있음을 똑똑히 목격했다.
이단은 일사를 지나쳤다. 그는 일사가 있는 쪽을 한 번 더 돌아보는 법도 없이 인파와 차량을 방패삼아 사라졌다. 생사의 위기를 함께 넘나들었던 깊은 인연의 상대에게 무시당했다는 사실은 일사에게 불쾌함이 아니라 불길함을 가져다주었다. 그녀는 신속하게 짐을 챙겨 이단이 걸은 방향을 그대로 밟았다.
일반도로를 자동차처럼 자유롭게 넘나든 끝에 일사는 이단의 뒤통수를 볼 수 있었다. 그녀가 더 애를 쓴다면 이단의 옷자락 정도는 잡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일사는 몸을 옆으로 세우고 날렵하게 행인들의 틈새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단 헌트는 끝까지 일사를 향해 뜻 있는 눈빛을 주지 않았다.
어느새 일사는 켄싱턴 역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쉽게 횡단할 수 없는 넓은 차도들이 많아지는 걸 보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2개의 큰 보도를 더 넘어야 이단을 붙잡을 수 있었다.
그때 남쪽에서 올라온 검은색 SUV들이 잇따라 정차했다. 일사는 과거의 경험으로 미루어 차에서 내린 자들이 MI6 소속이라는 걸 눈치챘다. 일사에겐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거나 피할 이유는 없었지만, 정보부 사람들이 도심에 나타났다는 건 좋지 않은 신호였다. 일사는 어쩔 수 없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 그들이 출동한 원인을 분석해보았다.
이단 헌트가 불쑥 등장했던 방향은 남쪽이었다. 그리고 블랙 프린스 로드의 남쪽에는 MI6의 본부가 있다.
일사에겐 이제 이단 헌트를 쫓아가는 것만큼이나 IMF와 연락을 취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 * *
벤지는 보관소의 관리자가 자신을 계속 힐끔거리는 것을 2분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연장 근무를 견디지 못하는 성격의 관리자를 위해 위대한 IMF의 부국장과 국장이 동시에 서명한 명령서를 팔락였다.
“난 멀었으니까 먼저 가고 싶으면 가요!”
벤지는 책상 위에 펼쳐 놓은 파일을 읽어 내리면서 소리쳤다. CIA가 폐기했다는 온갖 종류의 프로젝트들을 검토하려면 없는 주의력도 끌어와야 할 판이었다.
“그럼 저 갑니다!”
관리자가 마찬가지로 크게 외쳤다. 벤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영화나 드라마 산업에 적극 협력하면서 시민들이 이해할 수 없는 임무만을 수행하는 걸로 알려진 기관의 이미지를 제고해보자는 내용의 프로젝트 제안서는 기어코 벤지의 콧구멍을 으쓱거리게 만들었다. 그는 나중에 시간이 나면 재미 삼아 읽어보려고 파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음 파일을 꺼내려던 벤지가 얼굴을 갸웃했다. 내용물이 한손에 다 잡히지 않았다. 두 손을 모두 써서 파일을 들어 올린 벤지는 그 두께에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건 뭔데 이렇게 두꺼워?”
표지에는 대문자로 ‘센티넬 프로젝트’라는 말이 적혀 있었다. 벤지의 눈동자는 지금껏 여기서 변형된 솔로몬 레인과 신디케이트를 탄생시켰을지도 모를 단서를 찾아 헤매왔듯이 고요하고 빠르게 굴러다녔다. 그러면서 벤지는 런던의 일이나 머리가 복잡해진 브랜트가 있는 지상층과는 분리되어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가장 중요한 정보를 탐독하고 있었다.
Original Date 2016. 08.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