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vS/클락브루스(숲뱃)] Beyond Guilt
- Batman v Superman : Dawn of Justice, Clerk Kent/Bruce Wayne
- Written by. Jade
Beyond Guilt
“요새는 꿈자리가 괜찮으신가보군요.”
알프레드에게 그런 말을 들었을 때 브루스 웨인은 놀라면서도 그걸 부정하지는 못했다. 알프레드는 버릇처럼 자신에 대한 짐을 만드는 도련님 특유의 표정을 간파해내고는 얼른 덧붙였다.
“전보다 더 바빠지셨으니 당연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한가했던 적이 없어요.”
“그래도 일이 한 가지 늘긴 했지 않습니까.”
알프레드는 계속 사실만을 말하고 있어 브루스가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또 입을 다물었다. 호수의 표면 위에서 반짝이는 햇빛이 유리로 만든 집까지 무사히 들어오는 밝고 아름다운 시각이었다. 브루스 웨인은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오랜만에 빛이 그를 성가시게 굴지 않았다.
그 날은 브루스 웨인이 악몽을 꾸지 않고도 7일간의 밤을 편히 보냈던 놀라운 하루였고, 다른 세계의 별이 떨어진 지는 보름이 지나지 않은 시기의 한 단면이었다. 그리고 브루스 웨인은 당연히 슈퍼맨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쩌다보니 슈퍼맨은 그의 주요 활동지가 아닌 고담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 때문에 고담에는 반드시 슈퍼맨을 기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야 했는데, 고담시에 무언가를 만들고 구축하는 일은 언제나 브루스 웨인의 몫이었다. 그는 도시의 한 부분을 떼어 슈퍼맨을 위해 꾸몄다. 그곳에서 짤막하게 연설까지 한 것이 고작 이틀 전의 일이었다. 그러니 브루스 웨인은 슈퍼맨을 잊을 수 없는 게 당연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모든 것이 없어도 그는 슈퍼맨을 잊을 수 없었다.
알프레드가 브루스의 앞에 쟁반 하나를 두고 사라졌다. 그는 최선을 다해 브루스의 안색을 살피길 외면하였다. 알프레드의 움직임은 정말이지 노련한 집사답게 신속하고 고요했으나, 알프레드가 언제나 브루스의 기만을 알아채듯이 브루스는 그가 자신을 염두에 두면서 발휘하는 조심스러움을 느꼈다. 브루스는 아주 짤막한 순간동안 입꼬리를 올렸다. 꿈속에서 슈퍼맨을 보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양심에 심각한 구멍이 났다는 소리는 아니라고 단언하는 알프레드의 목소리를 벌써 들은 것 같았다.
브루스 웨인은 늘 자신을 올바르게 평가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가져야만 하는 죄책감을 과대평가하면서 그것에 부응해 자신이 하는 모든 일들의 가치를 낮게 잡았다. 그에게 브루스 웨인은 언제나 월리스 버논 키프의 다리를 구제하지 못했고, 고작 그를 비롯해 그와 비슷한 사람들에게 연금밖에는 줄 수 없는 사람에 머물듯이 말이다. 브루스 웨인은 어렸을 적 아버지가 총을 맞고 어머니가 강도를 말리는 상황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으므로 늘 그에 대한 악몽과 부채감에 시달려야 마땅한 자였으며, 모든 사람들을 구해야 하지만 결코 그럴 수 없는 인간이었다. 동시에 그는 브루스 웨인이 어떻게 그 무거운 자리에 올라야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상기하지 않았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놓고 간 쟁반을 보았다. 알프레드는 그에게 절대로 술을 가져다주지 않는 대신 아침에 커피 한 잔은 마실 수 있도록 해 주었다. 브루스는 알프레드가 허락해준 커피를 한 번 마시고 매일같이 테이블에 준비되어 있는 노트북을 펼쳤다. 브루스 웨인보다도 잠을 덜 자는 여인이 그에게 남겨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브루스는 조금 시간을 끌다가 답장을 보냈다.
한동안 조용하던 브루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가 익숙한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겉옷을 한쪽 팔에 끼워 넣으면서 말했다.
“난 오늘도 늦게 올 것 같으니 저녁 먹어요, 알았죠?”
그러자 알프레드가 휙 머리를 내밀었다.
“오늘 오후에는 공식적인 일정이 없으시지 않았습니까?”
“그랬는데 방금 만들었어요. 다음엔 안 피할 테니 한 번만 봐줘요.”
브루스가 집을 나섰다. 알프레드는 자신의 도련님이 여전히 자신과의 오붓하고 진지한 식사 시간을 일종의 상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는 마음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 * *
혼자서 석양과 바람을 함께 맞고 있던 브루스 웨인이 입을 열었다.
“…안 온다더니.”
그의 목소리가 완전히 흩어지고 나서 깔끔한 구두 소리가 차분하게 브루스의 뒤를 쫓아왔다. 다이애나가 가만히 그의 옆에 섰다.
브루스의 등을 향해 가면서 그녀는 그의 신발과 옷에 흙이 거의 묻지 않았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락 켄트의 무덤 주변이 아주 깔끔하다는 걸 이미 확인한 상태였다. 아직은 슈퍼맨뿐만 아니라 클락 켄트도 잊히지 않았다.
“여긴 왜 온 거야?”
“잡초라도 뽑을까 해서.”
다이애나가 시선을 올렸다. 브루스 웨인은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나는 한 발 늦었더군.”
“아마 그의 어머니나 애인이 정리를 해 준 거겠지.”
“그렇겠지.”
비죽 솟은 부분도 없이 매끄럽게 잘 깎인 무덤의 주변에서는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애정을 받는 공간은 그처럼 안정적이었다. 또한 브루스 웨인은 작정하고 그것을 감상하며 사색하기로 한 것 같았다. 결국 다이애나가 먼저 목소리를 내야 했다.
“정말로 여긴 왜 왔어?”
“아까 대답했지 않나.”
“그럼 이렇게 묻지. 왜 그를 보러 왔어?”
브루스의 시선이 슬쩍 틀어졌다.
“…그가 내 꿈에 나타나지 않아서.”
다이애나는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당신의 꿈에 나타나야 해?”
“내가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다 그랬어.”
그 순간 다이애나는 브루스의 대답을 듣기 위하여 그를 곧게 쳐다보고 있었으므로 그의 얼굴에 스치는 모든 걸 목격할 수 있었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단념했으나 한편으로 인간을 포기하지 않은 인간이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너무도 다양하고 무겁고 유구한 인간들이 한 사람 안에 비좁게 앉아 있다가 우수수 잠깐 자리를 피한 것 같았다. 다이애나는 그들 가운데서 100년 전의 자신도 찾을 수 있었다.
“당신을 믿긴 하지만 나는 당신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아. 시간은 충분히 흐르지 않았고 당신은 직접 나서서 그 흐름을 가속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으니.”
브루스는 그것을 부정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그렇지만 원래 책임감은 죄책감을 넘어서는 거야.”
“…뭐?”
“위대해진 책임감은 죄책감을 이겨버리지. 당신도 그 단계에 접어든 건 아닐까.”
다이애나가 팔짱을 끼면서 자신의 두 팔을 스스로 감싸 안았다. 해가 떨어지는 속도보다도 더 빠르게 바람이 차가워졌다. 브루스 웨인은 그녀의 몸짓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피부를 부여잡는 피부의 움직임에 꼭 어떠한 의미가 담겨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이애나는 점점 추워지는 것 같다는, 그야말로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을 남기더니 천천히 물러났다. 브루스 웨인은 말끔한 클락 켄트의 무덤과 멀어져가는 다이애나의 사이에 서 있게 되었다. 그는 오늘 여기까지 와서 무덤 주변에 있는 풀 한 포기조차 만지지 않았다. 뽑을만한 잡초가 없었다는 게 그 이유였지만 브루스는 자신이 클락 켄트의 무덤에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했으리라는 걸 알았다.
브루스가 무덤으로 마지막 시선을 보냈다. 그는 다이애나의 말을 완벽히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언젠가 자신이 클락 켄트의 무덤을 쓸어볼 수 있는 자격을 얻기를 소망했다.
Original Date 2016. 0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