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ID/Khan] Narcissistic Cannibal #1
- Star Trek Into Darkness, For Khan Noonien Singh
- A Slow mood recommended
- Written by. Jade
그가 태어난 인큐베이터의 구석에 써져 있는 일련번호가 HFX-1500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름이 정해질 때까지 다소 복잡한 그 시리얼 넘버로 불리고 있었다. 앞의 알파벳은 그뿐만이 아니라 숱한 존재들이 공유하고 있었으므로 아예 앞을 생략하고 번호로만 지칭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에게 배정될 이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들의 부모가 되는 연구원들은 프린터에서 뽑혀져 나오는 실험이나 반응의 결과를 기다렸다.
자신들이 뱉어내는 데이터만 게걸스럽게 흡수하는 하얀 가운 무리들 사이에서, 그는 자신에게 꽤나 살갑게 대해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가운들 중에서도 그와 수월하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꽤나 영리한 듯했다. 또 여자는 그의 대답이 무척 짧고 공격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에게 자주 말을 걸었다.
“당신은 이곳에서 가장 우리들을 열심히 관찰하는 것 같아요.”
“내가 볼 수 있는 대상에 집중하는 것뿐이다.”
“당신만큼 우리들에게 서슴없이 반말을 하는 사람도 없어요.”
“존중심을 발생해 내는 DNA는 찾지 못했나 보군.”
“여기서 타인을 존중하는 걸 모르는 건 당신뿐인데요?”
안구를 위로 치켜뜨며 그는 차라리 자신에게 실험을 하라는 듯 여자를 외면했다. 그러자 그의 눈에 여자의 이름이 새겨진 명찰이 보였고 그는 더 표정을 구겼다. 여자가 언급한 것들 말고도 그에게는 다른 이들보다 특별한 점이 많았다. 그는 누구보다도 인큐베이터의 일련번호를 혐오했다.
“내가 존중을 배우길 바란다면 나에게 이름을 줘 보지 그러나. 박사들이라면서 이름 짓는 소질은 형편없나보군.”
여자는 그를 보고 짧게 웃었다.
“당신의 이름은 예전에 정해졌어요.”
기술자들이 섬세하게 설치하고 매끈한 윤기를 불어넣은 청록색 눈동자가 여자를 향했다. 순수하게 발생한 인간들의 눈동자보다 아름다운 그것이, 자신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날카롭고 지적으로 빛나는 것이 여자는 좋았다.
“내가 당신의 이름을 주는 것으로 무엇을 원할까요?”
“..날 불구덩이에라도 집어넣을 건가?”
“내가 당신을 가르칠게요.”
태어나서 단 한 번도 햇빛을 받지 않아 기이할 정도로 하얀 그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여자는 직접 손가락을 올려 그의 미간을 펴 주면서 눈앞에 클립으로 묶인 종이 뭉치를 들이밀었다. 여자는 그것이 그의 특별 수업에 사용될 첫 번째 교재라고 했다.
HFX-1500의 담당을 자처하고 있는 여자는 당직도 자주 섰다. 나이는 많지 않아 보였지만 머리로 연구원들의 리더라도 꿰찬 모양인지, 그녀는 연구소를 마지막까지 지키면서 동료들의 책상에 놓인 보고서도 힐끗거리며 돌아다녔다. 그들의 피조물들은 그 시간에는 반드시 수면을 취하게 되어 있었다. HFX-1500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그가 지금까지도 눈을 깜빡이고 있는 것은 문제의 보충 수업 때문이었다. 그는 여자가 준 40페이지짜리 소논문을 62분 만에 읽었다.
“당신이 아마 배워본 적 없는 분야의 글이었을 텐데요. 재밌지 않았어요?”
여자는 1451번을 담당하는 남자 연구원의 책상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그는 두 손가락으로 소논문을 집어 팔락거리면서 자신의 요람인 인큐베이터에 걸터앉았다.
“나한테 고백하고 싶은 건가?”
그의 입술이 전혀 사용할 것 같지 않았던 단어가 흘러나오자 여자는 놀라서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채집한 벌레를 들어 올리듯 논문을 앞으로 가져와 특정 페이지를 펼쳤다.
“이 글이 의미하는 바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속내를 나에게 우회적으로 전하는 동시에 나에게 사랑을 하라고 촉구하는 것 같은데.”
그가 펼친 쪽을 읽었다.
“강한 이기주의는 병에 걸리는 것을 막아주는 하나의 보호막일 수 있다, 그러나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결국엔 사랑을 해야 한다고.”
여자는 이제 동료의 책상에서 완전히 관심을 잃어버렸다. 그는 마치 여자에게 기회를 주듯 그녀를 한 번 곁눈질했다가, 잔인한 입꼬리로 노골적인 구절 몇 개를 읽으려는 일을 접고 대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서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마도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렇겠지. 나는 내가 흠잡을 데 없이 만들어졌다는 걸 잘 알고 이에 대한 자신감이 강하지만, 이걸 표현하는 방식은 부모를 조롱하고 경멸하면서 나와 같은 처지의 형제들에게 감정을 소모하는 것으로만 드러난다고. 당신에겐 아마 내 방식을 정확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어떠한 개념어가 있겠지. 당신이 준 글과 은연중에 암시된 의도와 사사로운 느낌을 종합해 보니 당신이 나에게 어떤 이름을 줄지 대충 짐작이 되는군.”
그는 시선이 고정된 것만큼이나 흔들림 없는 걸음걸이로 여자에게 다가왔다. 석고 같은 그의 손에서 종이 뭉치가 아무렇지도 않게 반으로 접혔고, 그것을 여자의 가운 주머니 속에 넣어주면서 그는 처음으로 눈을 깜빡였다.
“한 가지 더 말해주자면 전혀 낯설지 않았어. 내가 매번 하는 일이니까.”
어떤 연구원도 자신이 맡은 실험체에게 공공 윤리라든가 도덕적 감성을 가르친 적이 없었다. 아무런 예시도 들지 않은 이론서를 받아든 태도로 그저 몇 가지 어휘들을 학습했을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만든 존재가, 자신이 선택한 색깔의 눈으로 자신의 마음을 난도질하는 걸 느꼈다. 당신이 나한테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어. 인간의 근본적인 유치함에 치가 떨리는군. 한낱 실험체 따위와 우두머리격인 위치를 공유하고 싶었던 건가? 여자는 그를 피하기 위해서 공연히 그가 돌려준 소논문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드러난 구절이 이것이었다.
너무도 감동적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유치한 속성을 지닌 부모의 사랑이란 결국 부모의 나르시시즘이 대상애로 변모되어 그 과거의 속성을 그대로 내보이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다시 살아난 부모의 나르시시즘, 이것이 바로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여자의 손을 잠시 감상하다가 그는 돌아섰다. 그는 태연하게 인큐베이터를 조작해 뚜껑을 열었다. 스스로 안으로 들어가면서 HFX-1500은 다시 한 번 여자와 눈을 마주했다. 여자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이대로 잠들어 버리는 걸 선택한다면 그것을 평생의 증오로 돌려주겠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부터 모두를 미워하고 있었으므로 웃으며 눈을 감았다. 피조물의 거부할 수 없는 비웃음을 담은 창조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바늘을 찔러 넣으면서 이번에는 절대로 잠들지 말라는 메시지를 받은 실험체는, 오늘도 자청해 당직을 선 자신의 박사와 밤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오늘 그에게 이름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신들만이 누리고 있던 불을 뺏고 자신의 간을 쪼아 먹으라고 보내진 독수리를 길들인 존재와 같았다. HFX-1500은 남들과 전혀 다른 게 없는 하얀 가운만으로는 자신의 가치를 내보이기엔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여인을 그대로 읽어 차라리 그녀의 가운을 죄인처럼 아래로 끌어내렸다. 여자는 자괴감 섞인 들뜬 표정으로 그의 귓가를 끌어당기려 애썼다.
그가 밀착해 있는 주인 모를 책상 위에는 알맞게도 시계가 놓여 있었다. 그는 시계를 보려고 고개를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것은 바로 그의 박사가 고대하던 움직임이었다. 시, 분, 초가 모두 표시된 액정이 자정을 향해 빠르게 숫자를 넘기고 있었다.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그는 상징성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그가 의도한 자정에 HFX-1500은 자신이 예상한 의미를 지닌 이름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