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The Importance of Honesty (Incompleted)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Eggsy
- Written by. Jade
The Importance of Honesty
정직의 중요성
* 본 작품은 <성자와 죄인> 후속작으로 구상되었습니다.
인쇄용지들이 공중으로 날아다니고 사무용 의자들이 이리저리 엎어졌다. 에그시는 자신의 발 앞으로 떨어지는 의자의 등받이를 피해 뛰어오르다가 건물을 벗어나려던 연구원의 머리를 들이받을 뻔했다. 연구원은 기겁을 하면서 에그시에게서 멀어졌다.
“이 사람들은 왜 대피하지 않은 거야?”
에그시보다 앞쪽에서 달리고 있는 해리가 짜증을 냈다. 비록 해리가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에그시는 자신이 그 말에 대답해야 한다는 걸 알고 헉헉대면서 말했다.
“테러리스트의 침입을 방금 알아서요?”
“젠장, 정말 맘에 들지 않는군.”
해리가 다시금 총을 겨누려고 하는 사이에 이번엔 책상 모서리가 해리의 무릎으로 달려들었다. 덕분에 해리는 또 방아쇠를 당길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사람도 사물도 우왕좌왕하고 있는 그곳은 미국 국방부에 소속된 연구 기관 중 하나였다.
에그시가 큰 소리로 연구원으로 위장한 테러리스트를 지목하기 전까지 평소처럼 업무에 빠져있던 직원들은 아직도 해리와 에그시의 주변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테러리스트가 순간순간 설치하는 바리케이드보다 민간인들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에그시는 여전히 제 쓸모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피스톨의 무게감을 느끼며 달렸다. 테러리스트는 기를 쓰고 그가 목표로 하는 데이터베이스와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해리가 갑자기 총을 쐈다. 에그시가 놀라서 휘청거렸다.
“뭐하시는 거예요, 해리?!”
“다른 사람들이 빨리 나가야지.”
실제로 연구원들은 엉덩이에 채찍을 맞은 말처럼 놀라운 속도로 출구를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테러리스트도 총성이 멎기를 기다리면서 코너에 숨어 있는 모양이었다. 해리는 일부러 형광등 하나를 깼고 에그시는 고개를 저었다. 과격하기는 해도 확실한 효과를 자랑하는 해리의 조치로 인해 드디어 에그시도 총을 뽑아들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완벽히 비워진 연구소를 가로질렀다.
간발의 차로 범죄자가 지하 서버실로 가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걸 본 에그시가 입술을 씹으면서 하행 버튼을 눌러댔다. 그런데 해리가 고개를 저었다.
“엘리베이터로는 갈 수 없어.”
“어째서요?”
“지하 서버실로 가려면 전용 카드키가 있어야 해.”
“…설마 CIA에서 그런 것도 안 줬어요?”
“연구실의 모든 동력을 끊고 오거라. 보조 동력까지 전부.”
엘리베이터는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고, 미국 중앙정보국의 신임을 온전히 받지 못하는 영국인 스파이 둘에게 다른 대안은 없었다. 에그시는 발을 구르면서도 동력실을 목표로 방향을 틀었다. 해리는 불빛으로 이루어진 숫자가 변하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연구소로 들어오면서 로비의 안내판을 봐 두었던 에그시는 어렵지 않게 동력실을 찾았다. 그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로비에서 사용했던 카드를 동력실 앞에 달린 패드에 갖다 댔다. 녹색 불빛이 막혀 있던 에그시의 가슴을 뚫어주었다. 에그시는 힘차게 몸으로 문을 밀었다.
해리는 손으로 피스톨을 돌리면서 건물이 캄캄해지길 기다리고 있었다. 곧 있으면 엘리베이터가 멈출 것이었다. 해리는 맞물린 엘리베이터의 문 사이를 잡았다. 동력실에서는 에그시가 열심히 모든 전선들을 뽑아대고 있었다.
에그시가 양손으로 전선을 한 움큼 잡았다. 연구소 구석구석에 퍼져 있던 불빛들이 삽시간에 증발했고, 전력을 잃어버린 엘리베이터의 문을 해리가 수동으로 열었다. 그는 어떠한 망설임도 없이 한 가닥의 밧줄만이 존재하는 캄캄한 공간 속으로 뛰어들었다.
고작 몇 초가 부족해서 서버실에 들어가지 못한 테러리스트는 광이 나는 구두가 엘리베이터의 천장을 뚫어버리는 기괴한 광경을 목격했다.
“해리, 거기 있어요?”
에그시가 안경을 톡톡 치면서 해리에게 통신을 걸었다. 보조 동력까지 끊어진 건물은 밤의 대기실과 같았다.
“해리?”
—동력실에 있거라.
해리의 그 짧은 한 마디 뒤에 이어진 소리들은 아주 혼잡하고도 걱정스러운 것들이었다. 에그시는 멍하게 방금 뽑은 선을 들고 눈을 깜빡였다. 사람의 몸통이 요란스레 벽에 부딪히는 소음이 났다.
“어… 해리?”
두 자루의 총이 바닥의 모서리로 밀려나 사이좋게 대각선을 그렸다. 아슬아슬하게 멈춘 승강기 안에서 두 남자는 서로 바닥에 등을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난 듯한 모양새였다. 해리는 탈출하려는 테러리스트의 발목을 붙잡고 그의 몸 위를 아예 기어 다녔다. 그가 오른팔을 접어서 힘껏 팔꿈치를 날렸다.
—해리,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예요?
해리가 이마를 쓸면서 의식을 잃은 테러리스트를 앞으로 뒤집었다.
“오늘도 CIA를 대신해 미국을 구했지.”
타이밍 좋게 엘리베이터가 덜컹댔다. 해리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서버실이 모습을 드러냈다.
⁂
CIA 국장실에서는 며칠간 또박또박한 영국식 발음이 새어나왔다. 미 중앙정보국의 마크가 새겨진 카드키를 목에 건 사람들은 그 주변을 지나갈 때마다 한숨을 쉬었고, 발급된 날짜에만 사용할 수 있는 방문객용 출입증을 허리에 찬 에그시는 묵묵히 발끝으로 호선을 그렸다.
해리가 맺은 계약에는 어떠한 안전장치가 없었다. 그것은 해리가 자신의 과오를 몹시도 겸허하게 받아들이면서 생겨난 일종의 함정과도 같았다. CIA에게 있어 해리 하트는 생존율을 꼼꼼히 따져가면서까지 반드시 살려야 하는 그들의 인재가 아니었다. 그 맹점은 해리의 죄책감과 책임 의식이 나름의 정당성과 위로를 얻으며 잠잠해지면서 그의 의식 위로 떠올랐고, 해리는 결국 자신이 겪는 부당함을 하나의 절차라고 정당화하는 일을 포기했다.
에그시는 볼을 부풀리면서 67번째 호선을 지웠다. 그는 몇 개의 선을 그리면 신발코가 다 닳아서 없어지게 될지 영양가 없는 추측을 했다. 에그시는 자신의 발짓에도 지워지지 않는 그림자를 발견하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해리가 에그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해리는 말을 아끼는 대신 새롭게 받아온 서류를 에그시에게 보여주었다. 에그시는 제목을 본 뒤 맨 끝에 위치한 서명 란을 확인했다.
“이거 진짜에요?”
“그래.”
해리의 안면에는 분명한 만족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당분간은 미국에 오지 말자꾸나.”
해리와 에그시는 닫혀있는 방문 너머로 중앙정보국의 국장 역시 같은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둘은 나란히 안내 데스크에 일회용 출입증을 내던졌다.
근처에 택시가 멈춰 서는 소리를 듣고 해리는 현관문을 고정했다. 그는 에그시가 자신의 허벅지를 거의 다 가리는 큰 폭의 가방을 낑낑대면서 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에그시는 가방을 거의 내던지듯이 땅에 내려놓았으면서도 연신 해리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손짓을 보냈다.
가방을 옮기던 에그시는 기어코 험한 말을 중얼거렸다. 결국 해리와 에그시는 끈을 한 쪽씩 잡고 에그시가 일전에 사용했던 2층의 빈 방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이제 정리는 제가 해야 하니까 내려가 보세요.”
에그시가 멋쩍은 미소를 들이밀면서 해리를 출입구로 몰아넣었다. 그는 지퍼를 여는 동작으로 짐정리의 시급함을 더하려고 했으나 하필 가장 먼저 등장한 게 속옷이라 에그시는 필사적으로 가방을 끌어안았다.
“정말 가셔도 된다니까요.”
“그렇지만 에그시, 네가 이런 수고를 자청할 필요는 없단다.”
추대식을 위해 잠시 런던에 들렀을 때만 해도 해리에게는 자신의 집에 진을 치겠다는 에그시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멀린의 지시도 확고했고, 해리도 며칠 이내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으니 이태까지 자신의 뒤를 성실히 쫓아다녔던 에그시의 일상이 연장된 거라고 받아들이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에그시는 그의 하루하루를 기약 없이 해리에게 바치려 하고 있었다.
해리가 문가에 계속 서 있는 느낌이 들어 에그시는 가방을 깔고 앉은 뒤 해리를 바라보았다. 뒤로 빠진 해리의 왼손이 문고리를 잡고 있었다.
“나는 괜찮으니 집으로 돌아가렴.”
“해리는 곁에서 지켜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해요.”
해리는 그 말을 듣자마자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소량의 기억 중 일부를 떠올렸다. 자신의 곁에서 떠나지 않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인물로 에그시를 지명한 건 해리였다. 해리는 여전히 밑바닥에 고여 있을 뿐 불어나지 않는 자신의 과거를 가장 신속하게 자극하는 청년에 관해 깊이 생각했다. 어쩐지 사고의 끝이 오묘해졌다.
해리가 마침내 서서히 물러나려고 했다.
안경이 통신을 수신하면서 내뱉는 단조로운 효과음이 났다. 에그시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해리는 간단한 몸짓으로 에그시의 동작을 거둬들였다.
“멀린.”
—에그시와 같이 있죠? 데리고 본부로 오세요.
멀린은 자신이 에그시의 이동 경로를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해 하는 건 사치나 다름없다는 듯이 통신을 종료해버렸다. 안 그래도 주로 옷이 많이 들어간 가방이 갈수록 주저앉으면서 몸이 기울고 있던 에그시가 더 명확하게 얼굴을 옆으로 눕혔다.
두 사람은 본부로 이동했다.
멀린의 동선은 굉장히 효율적이었다. 그는 우선 해리를 검사실 안에 집어넣고 스캔 장비를 작동시킨 뒤 남은 시간에 에그시에게 파일 하나를 건네주었다. 오래간만에 자신의 직분에 맞는 지령이 떨어졌다는 것에 신이 난 에그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일단 읽어봐. 이번엔 좀 색다른 경험을 하게 될 거다.”
“그래요?”
에그시가 휙 소리가 나게 표지를 넘겼다. 첫 장부터 클립으로 연결된 사진의 주인공이 여성인 걸 확인한 에그시의 눈이 커졌다. 멀린이 의자에 착석하며 말했다.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드레스를 가지고 오면 된다.”
사진 속 여인은 전형적인 프랑스 미인이었다. 에그시는 제일 먼저 여인의 얼굴을 본 뒤에 그녀가 신고 있는 구두를 보고 입을 떡 벌렸다가, 마지막으로 그녀의 나이를 확인했다. 그녀는 에그시보다 한 살이 많았다.
“마리 아네트. 유명 화장품과 의류 브랜드를 다수 소유하고 있는 프랑스계 그룹의 후계자다. 경영 현장보다는 사교적인 행사에 더 자주 나타나지만 재벌 2세치고는 얌전한 아가씨지.”
“그럼 갖고 있는 드레스가 한두 벌이 아닐 것 같은데요.”
“그건 걱정할 거 없다. 네가 가져와야 할 드레스는 임무에 투입되는 날 그녀가 입고 올 거야.”
“…뭐라고요?”
멀린은 에그시의 배낭에 낙하산을 숨겨 놓았을 때처럼 극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은 반면 에그시는 멀린에게 자신이 발휘할 수 있는 태연함을 모두 뺏겨버린 듯했다. 그가 파일을 통째로 펄럭거리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저보고 지금 재벌 아가씨를 벗기라는 소리에요, 지금?”
멀린의 눈썹이 움찔했다.
“…틀린 표현은 아니다만 기왕이면 옷 안에 있는 최첨단 광섬유를 회수하는 일이라고 이해해주면 좋겠군.”
“에? 그게 뭐에요?”
“다음 장에 이 임무의 진정한 목표와 네가 참석해야 할 파티에 대해 잘 나와 있다. 제대로 숙지하고 현장에 나가도록. 이런 종류의 임무가 처음이라서 걱정이 된다면 아서에게 조언을 구해.”
멀린의 미간에 압박감을 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던 파일이 물러나다말고 세차게 날갯짓을 했다. 에그시는 이제 온몸을 파닥대고 있었다.
“아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에요? 여자 옷을 벗겨서 가져오라는 걸로도 모자라 해리한테 여자를 꾀는 법을 배우라고요?”
“해리는 특히 이런 종류의 임무에 강했어. 기왕 배울 거라면 최고로부터 비법을 전수받는 게 낫지 않겠나.”
에그시의 안면이 심하게 요동쳤다. 그러나 멀린은 그것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도리어 그를 놔두고 검사실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에그시는 등을 책상에 붙이고 클립에 끼워져 있던 사진을 뺐다. 목표는 약간 아찔한 신발의 도움을 받으면 에그시의 키를 넘어설 듯했고, 갈색 머리카락은 지속적인 관리를 받고 있다는 티가 뚜렷하게 났다. 에그시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해리 하트가 시카고에서 에그시에게 술과 야경과 그 자신의 시간을 선물해 주지 않았다면 에그시는 틀림없이 쾌재를 내질렀을 것이었다.
본래 자신에게 자연스러운 행동을 삼가고 있는 건 해리도 마찬가지였다. 해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회복되겠지만 성격상의 후유증이 남을 수 있다는 멀린의 분석을 무겁게 소화했다.
“말이 후유증이지 본인은 잘 느끼지도 못할 겁니다. 지금과 큰 차이점은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알겠네.”
“에그시도 아직 본부에 있으니 함께 귀가하시죠.”
해리는 스캔 장비에 앉은 채로 반응했다.
에드윈 디케이의 첨탑에서 에그시를 지켰던 최후의 기제는 그 발현 조건을 확신할 수도 없고 누군가의 상처를 요구하기까지 하는, 찌그러진 마지막 탄환과 비슷한 것이었다. 해리는 그것을 남용해서는 안 되었다. 그가 반가워하는 온기를 가진 이라면 더더욱 그 충동적인 제어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했다.
각자를 버겁게 하는 결정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것을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다.
⁂
에그시는 거실의 소파를 독차지하고 있었다. 해리가 에그시와 멀리 떨어진 공간에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언제든지 자신을 찾아도 좋다면서 에그시도 몇 번 출입해본 적이 있는 서재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에그시의 발은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밟고 싶어 꼼질대고 있었다. 다만 해리가 용건이 있냐고 물었을 때 온갖 여자들을 공략할 수 있었던 전술을 공유해달라는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어 에그시는 엉덩이만 들썩여댔다.
해리는 꽤 오래 서재에서 나오지 않고 있었다. 에그시의 입술이 물고기처럼 벌어지더니 쓸쓸하게 안으로 숨어버렸다. 에그시는 하릴없이 거실을 뱅뱅 돌았다.
불현듯 해리가 아래층으로 기척을 던질 때까지 할 만한 일을 생각해낸 에그시가 부산스러워졌다. 에그시는 거실 곳곳에 일종의 장식품처럼 흩어져 있는 낮은 책꽂이를 손가락으로 훑고 다녔다. 마침 커뮤니케이션을 집중적으로 다룬 심리학 서적이 하나 있었다. 에그시는 호기롭게 목차를 넘겼고 1분 만에 책을 제자리에 꽂았다.
에그시는 가장 큰 서랍장 앞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해리는 책을 읽다가 잠에 빠지기라도 했는지 통 소식이 없었다. 에그시는 푸스스 소리가 나게 숨을 내쉬며 발끝으로 서랍 하나를 당겼다.
“어?”
에그시의 몸짓이 날렵해졌다. 얇은 가죽으로 앞뒤를 덮고 그 위에 금박을 입힌 글씨가 적힌 모양새가 꼭 앨범을 연상케 했다. 에그시는 계단 쪽을 슥 돌아본 뒤 그것을 꺼내 종아리 위에 얹어놓았다. 그가 두 손으로 첫 번째 페이지를 넘겼다.
“헐, 진짜 앨범이잖아.”
에그시는 천천히 페이지를 들었다. 뜻하지 않게 그는 이성을 사로잡는 임무에 능했다던 해리 하트의 노하우를 알게 되었다.
“…뭐야. 얼굴이 다 해먹었네.”
에그시는 어쩐지 황망해져서 앨범을 덮고 서랍을 밀어 닫았다. 요령 없이 하얗게 밀린 색채 속에도 온전하게 빛을 발하고 있던 해리 하트의 젊은 얼굴이 스르르 사라졌다.
무엇을 위한 고뇌인지도 확실치 않은 추상적인 답답함이 집안에 고요를 내렸다. 일상적인 생기를 가진 소음들이 거실을 채운 건 저녁 무렵이었다. 두 사람은 식탁을 가운데에 두고 앉아 있었다.
“멀린은 너를 왜 불렀던 거니?”
“새 임무를 줬어요.”
“어떤 일이지?”
에그시가 들고 있던 포크가 잠깐 접시 위로 미끄러졌다.
“무슨 광섬유를 빼내오래요.”
에그시는 의도적으로 그 광섬유가 한 여자의 오트 쿠튀르 드레스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은 숨기고, 멀린이 준 자료에 의하면 그것이 이러이러한 용도로 쓰일 수 있다면서 엉뚱한 정보들을 늘어놓았다. 해리는 차분하게 에그시의 주절거림을 귀에 담았다.
“해외 출장이니?”
“아, 네. 그렇지만 프랑스니까 가깝죠.”
“잘 하고 돌아오렴.”
“…네, 해리.”
에그시는 부끄러움을 잔뜩 담아 대답했다. 상류층에다 미인인 여성과 접촉할 수 있다는 건 더는 에그시가 동경하거나 흥분할 만한 대상이 아니었다. 해리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웃었다. 에그시가 그 날 마지막으로 본 해리의 모습이었다.
⁂
마리 아네트가 이 사건에 휘말린 건 그야말로 우연에 의해서였다. 주기적으로 이름 없는 의류점이나 소규모 런웨이 행사를 도는 그녀는 오래간만에 자신의 심미안을 만족시키는 신예 디자이너를 발견했다. 그녀는 그 디자이너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며 디자이너의 실력을 모두 쏟아 부은 드레스를 보고 싶다고 말했다. 소스라치게 놀라는 디자이너의 표정은 마리에게 하나도 낯설지 않았다. 마리는 디자이너에게 일반적인 작업 기한을 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디자이너가 실은 모 범죄 조직에게 약점을 붙잡혀 그들의 장물을 옮기는 일에 이용당하고 있다는 건 행사를 연 주최자도, 그 디자이너를 소개했던 사회자도 모르는 일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범법을 저지르는 데 사용되는 걸 더 참을 수 없었던 디자이너는 독단적으로 마리 아네트에게 보낼 드레스에 가장 값비싼 장물을 숨겼다. 마리 아네트가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력이 그녀를 범죄 조직으로부터 지켜주는 동시에 정의의 구현에도 이바지할 거라 짐작한 것이었다. 그래놓고 디자이너는 마리가 준 의뢰비를 들고 해외로 도피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오늘 에그시가 해리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집에서 나와야 했다는 점이었다. 에그시는 자신이 억지로 읊고 있던 정보들이 단번에 흩어지는 걸 맛보며 입을 내밀었다.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것들은 에그시의 눈앞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따갑기만 한 빛무리 속에서 에그시는 마리 아네트를 찾을 수 없었다. 그는 꾸역꾸역 쿠키만 씹었다.
“이상한 얼굴빛이네요.”
에그시는 의욕 없는 자세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가 화들짝 놀랐다. 마리 아네트가 에그시에게 미소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장소에서 자기만의 생각에 푹 빠져 있잖아요. 파티장이 사색하기에 좋은 곳인 줄은 몰랐네요.”
“…그렇게 우울해 보였어요? 죄송해요.”
“나한테 왜 사과를 해요. 사람이 늘 헤실대면서 살 수는 없는 걸.”
마리는 에그시의 왼쪽에 서서 샴페인을 마셨다. 에그시는 그녀가 꼭 그 자리에 오래 붙어있을 것처럼 벽에 몸을 기대는 걸 멍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기계보다 정교한 장인이 자르고 꿰맨 붉은색 드레스가 부드럽게 흩날렸다. 곱씹어 보니 마리 아네트가 먼저 접근해온 것은 에그시에게 굉장한 기회였다. 에그시는 그녀의 흥미를 끌 수 있는 이야깃거리를 지어내려다 그만 푸념을 하고 말았다.
“걱정되는 게 한 가지 있는데 요새는 온통 그 생각뿐이에요. 제가 풀기에는 너무 어려운 문제 같아서요.”
“뭔데 그래요?”
예상외로 마리는 에그시가 정직하게 내뱉은 사정에 관심을 보였다. 덕분에 에그시는 자신이 엉겁결에 선택한 방향을 바꿀 이유를 찾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에그시?
에그시는 당황한 멀린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직접적으로 말을 한 적은 없어요. 제 딴에는 다른 방식으로 많이 표현을 했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그 사람 곁을 지켰고 제 모든 걸 던져 도와준 적도 있죠. 정말 고백 말고는 다 해준 것 같은데 그 사람은 제 심정을 몰라요. 아마 모를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런 답답함에 지쳐서 물러나고 싶지도 않고 계속 그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어요.”
마리가 느릿하게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녀는 웃는 낯으로 물었다.
“본인 마음은 확고하네. 근데 뭐가 문제에요?”
“가령 제가 이런 데에서 예쁘게 생긴 여자들이랑 어울리는 걸 그 사람이 본다고 가정해 봐요. 제가 그렇게 속내를 표출하고 다니는데도 제 진심을 모르는 양반인데, 제가 옆에 여자 한 명만 끼고 있으면 ‘그래, 아름다운 아가씨구나. 너랑 잘 어울린다.’ 라고 절 뒤집어 놓는 소리나 할 거라고요. 그 사람이 제가 누구를 마음에 담고 있는지 눈치챌 수 있는 기회는 그 날로 없어져 버리고 말 걸요. 어휴, 제가 어쩌다 그런 인간을 좋아하게 됐는지….”
에그시는 샹들리에보다 더 찬란한 사람들을 대충 가리키고는 소리 나게 팔을 내려놓았다. 마리 아네트는 샴페인 잔을 입술에 댄 채 에그시를 바라보았다.
“이거 갈수록 궁금해지네. 그 사람이 대체 누군지 좀 더 얘기해줄 수 있어요?”
“여기서는 누가 들을까봐 좀 겁나는데요.”
그러자 마리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럼 사람 없는 데로 가면 되지.”
“…네?”
마리에게 끌려가고 있는 에그시의 안경이 덜컹거렸다. 멀린이 겨우 좁아진 미간을 폈다.
“독특한 방법론이긴 해도 나쁘진 않군, 에그시. 우리가 필요한 건 어디까지나 그녀의 드레스라는 걸 명심해.”
빠르게 뒤바뀌는 파리의 건널목 신호에 익숙한 여인의 걸음은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모니터에는 벌써 의미심장한 방문들이 늘어서 있는 어두운 복도가 나타나고 있었다. 멀린이 슬그머니 의자를 돌렸다.
“자기보다 어린 남자를 좋아한다더니.”
멀린은 시간도 때울 겸 찻잔을 채우려 일어났다. 그때 하이퍼루프가 본부에 도착하면서 해리가 내렸다. 멀린은 해리가 일찍부터 각 지부에서 들어오는 보고서 및 첩보 자료들을 검토하고자 런던의 양복점에 출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에그시와 통신 연결되어 있나?”
“물론이죠. 아, 그렇지만 그에게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다면 조금 뒤에 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해리의 안면이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에그시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아뇨. 임무 중입니다.”
멀린은 화면을 가리키는 손짓으로 답변을 마쳤다. 해리가 차근차근 걸음을 옮겼다. 공교롭게도 에그시는 마리 아네트와 막 빈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해리의 오른쪽 눈썹이 치솟았다.
“멀린, 에그시가 맡은 임무의 내용이 뭔가?”
컵에 물을 붓고 있는 멀린은 음성을 조금 높였다.
“타깃이 입고 있는 드레스와 그 안에 있는 광섬유를 함께 회수하는 겁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해리는 빈 의자의 등받이를 두 손으로 꽉 잡고 화면을 노려보듯 응시했다. 에그시가 들어간 방에는 침대를 제외하고는 엉덩이를 붙일 만한 가구도 없었다. 에그시는 하는 수 없이 침대에 걸터앉았고 마리는 뒤돌아 문을 닫고 있었다.
“신기하네. 보통 이쯤 되면 알아서 날 침대에 눕혀주던데.”
문이 잠겼다. 에그시는 조용히 시계의 크라운을 잡아 돌렸다.
“…우린 그냥 조용한 공간이 필요해서 온 거잖아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컵을 들고 멀린이 복귀했다. 멀린이 의자에 편히 착석할 수 있도록 물러나주며 해리는 최대한 침착하게 질문했다.
“저기가 어딘가?”
“프랑스 파리입니다만.”
“그렇군. 격납고에 남아 있는 비행기가 있겠지?”
멀린이 그 두 문장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아주 허술하다는 걸 알아챘을 때 해리는 이미 격납고로 향하고 있었다. 멀린의 눈썹이 차츰차츰 구부러졌다.
“…에그시를 쫓아간 건가, 지금?”
프랑스에서도 영국 못지않은 돌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에그시는 목구멍을 가만히 두질 못하고 양손으로 긴 머리카락을 넘기고 있는 마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럼 나한테는 관심이 없다는 거야? 나는 네가 말했던 그 사람보다는 네 속이 상하지 않게 해 줄 텐데.”
에그시는 상체를 뒤로 빼면서 슬금슬금 시계를 찬 손목을 위쪽으로 틀었다. 머리칼을 정리하던 여인의 손은 곧장 앞으로 되돌아오지 않았다. 에그시가 바늘을 쏠 타이밍을 쟀다.
—에그시,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아도 되니 듣기만 해.
하필 마리가 드레스의 지퍼를 잡는 게 명백해지는 때 멀린이 속삭였다. 에그시가 움찔했다.
—해리가 방금 비행기를 타러 갔어. 네가 있는 곳으로 갈 것 같으니 일을 다 마쳐도 일단 거기서 대기하도록 해. 타깃은 알아서 잘 재우고.
“뭐라고요?!”
“…응?”
어느새 마리는 어깨를 드러내고 있었다. 난데없이 시야를 침범한 여인의 살결과 해리 하트가 오고 있다는 소식에 거의 의식을 잃을 지경이 되어버린 에그시는 아무렇게나 다트를 날렸다. 마리가 풀썩 쓰러지면서 에그시의 무릎에 이마를 박았고, 에그시는 기겁을 하며 그녀를 침대로 던졌다. 마리의 상체가 시트를 크게 눌렀다.
“…어이구, 세상에.”
빨간 드레스가 주르륵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그 순간 에그시의 머릿속에는 자신이 어영부영 임무를 성공했다는 자각이 전혀 솟구치지 않았다.
일단 해리가 오고 있다는 말을 들어버려서 에그시는 방에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한숨을 폭폭 내쉬면서 자칫하다간 침대 아래로 몸이 넘어갈 것 같은 마리를 안쪽으로 끌어당겨서 똑바로 눕혔다. 드레스를 벗은 그녀는 거의 완벽하게 찬 공기에 노출되어 있었다. 에그시는 임시방편으로 이불을 끌어 모아 마리를 가렸다.
“나 참, 생각해보니 옷이 없잖아. 여자한테 옷을 뺏어갈 작정이면 다른 거라도 준비를 해 줘야지, 신사라는 분들이….”
에그시는 꿍얼대면서 드레스를 집어 들었다. 그는 옷 안에 숨어 있다는 광섬유를 가져간 뒤 나머지는 마리에게 고스란히 돌려주려 했다. 에그시는 눈을 감고 드레스의 윗부분을 더듬기 시작했다.
에그시는 한 시간이 넘게 드레스를 놓지 못하고 있었다. 에그시의 눈가 위로 짙은 그늘이 드리웠다.
“멀린, 있어요? 대체 이 드레스 안에 뭐가 있다는 거예요? 만져지는 것도 하나도 없고, 안경 배율을 높이고서 옷을 뜯어봐도 광섬유 같은 건 없는데요.”
—그런 식으로 찾아낼 수 있었으면 내가 너에게 드레스를 가져오라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겠지. 그 안에서 광섬유를 발견하려면 다른 장비의 도움이 필요하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돼.
“…그런 건 좀 빨리 말해주면 어디가 덧나요?”
—좀만 더 있으면 아서가 도착할 거다.
통신이 끊어졌다. 안경을 두드리는 일은 소용이 없었다.
에그시는 배 위에 드레스를 올려놓고 풀썩 누웠다. 마리는 꾸물대지도 않고 곤히 잤다. 에그시가 모르는 사이에 기억을 지워주는 다트의 효력에 숙면을 돕는 요소라도 포함된 듯했다. 그 덕에 에그시는 긴장을 풀고 자신의 능력이 소화할 수 있는 일을 시작했다. 에그시가 손가락을 들었다.
에그시가 보이지 않게 그린 해리의 얼굴 아래로 팔다리가 생겨났다. 그는 심기가 불편한지 한껏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날씬한 미녀와 붙어 있는 에그시를 발견하고 손가락질을 해댔다. 그러자 에그시도 잠시 여인을 벗어나 해리에게 빽 짜증을 냈다. 에그시가 입을 벙긋거렸다.
‘정식 요원이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제가 어떻게 벌써부터 임무를 가려요? 하다못해 저한테 공식적인 애인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해리는 저 지적할 자격 없죠!’
‘내가 자격이 없어?’
‘해리는 그냥 아서일 뿐이잖아요. 아서한테 별 거 없다면서요?’
‘그래? 그럼 내가 네 애인이 되면 되겠구나. 네가 다른 여자랑 무슨 이유에서라도 놀아나지 않는 꼴을 보려면 말이다.’
‘네?’
‘좋아한단다, 에그시. 부디 너무 늦지 않았길 바란다.’
‘젠장, 늦기는 뭐가 늦었다고!’
에그시의 손이 허공을 잡아챘다. 에그시를 번쩍 안고 춤추듯이 한 바퀴를 돌던 해리가 사라졌다. 그가 푸스스 입술을 털었다. 에그시는 여자가 자발적으로 벗은 드레스를 덮은 채, 나체의 이성 옆에서 영문도 알려주지 않고 자신을 쫓아오는 중인 상관을 기다리는 용기 없는 청년이었다. 그 인식이 에그시로부터 모든 기력을 앗아갔다.
에그시는 45분 남짓 졸았다.
그 시간은 해리가 비행기에서 내려 에그시가 잠입한 파티장에 도달할 수 있는 어유를 제공해주었다. 해리는 불편하게 고개를 꺾고 있는 에그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붉은 드레스를 집으면서 순간적으로 에그시와 마리 아네트 사이의 거리를 쟀다.
“…해리?”
해리는 태연하게 눈길을 내렸다.
“오, 오셨어요? 그 드레스 안에 있다는 거 무지 꽁꽁 숨겨져 있나 봐요. 도저히 못 찾겠더라고요. 하하.”
“네가 그것까진 하지 않아도 된다. 수고했다. 이제 일어나렴.”
“어, 그럼 그 옷을 통째로 본부로 가져가야 한다는 거죠? 잠시만요.”
에그시가 반동을 실어 몸을 일으켰다. 방 안에 메모지가 없어 에그시는 티슈 위에 만년필로 살살 글씨를 썼다. 미안하다는 말이 팔랑거리며 빈 베게 위에 얹혀졌다. 해리가 에그시를 데리고 나갔다.
“그런데 여기까진 뭐하러 오셨어요.”
“네가 걱정돼서 말이다.”
“네?”
해리는 아주 잠깐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물론 네 실력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니고…. 그래, 아니다. 너는 괜찮니?”
“네? 네, 그럼요.”
해리가 자연스럽게 출입구를 붙잡고 에그시가 나갈 틈을 만들어주었다. 그는 계속 에그시보다 앞서 가면서 그를 뒤처지게 두지도 않았다. 그 신비로운 배려는 에그시가 비행기에 오르면서 끝이 났다.
국경을 넘어서 마지막 차량에 탑승하기까지 해리와 에그시는 너무나도 조용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눈을 뜨고 있었다. 에그시는 긴장한 동공을 확장시키면서 까만색으로 밀린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고, 반면 해리는 시선을 오묘하게 꺾고 있어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히 짚어낼 수가 없었다.
에그시는 차창 쪽으로 몸이 살짝 틀어진 자세를 유지하면서 눈동자를 쭈뼛쭈뼛 옆으로 밀었다. 해리의 손가락이 어떤 메시지를 입력하는 것처럼 규칙적이면서 또한 반복적으로 차 안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주로 움직이는 건 중지였으나 다른 손가락들도 예행연습을 하는 무용수들의 다리와 같이 해리의 정장 위에 자국을 냈다. 에그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궁금했다.
중지가 어떠한 지점을 정해주면 나머지 네 손가락들이 포위망을 만들었다. 밤이 아주 짙었음에도 에그시는 그림자가 주연인 작은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해리의 눈은 여전히 비밀스러웠다.
두 사람은 늦게 해리의 집에 도착했다. 에그시가 사용하는 방에는 욕실이 딸려있지 않아서 그는 갈아입을 옷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에그시는 지나가다가 해리가 타이를 푸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것은 우연이었다.
“고생했으니 씻고 자거라.”
해리의 어조에도 이것은 화장실을 사용하기 위해 1층으로 내려가야 하는 에그시의 동선으로 인하여 발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분석이 깃들어 있었다. 에그시는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사라졌다. 해리는 드레스 셔츠의 첫 번째 단추를 풀었다. 거실로 향하는 문은 열려 있었고, 해리가 혼자 쓰는 욕실의 문은 닫혀 있었다.
에그시가 벗어놓은 옷과 그가 곧 입을 옷이 흐트러져 있었다. 해리는 호흡을 가라앉히고 기척을 억눌러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 이후의 행위를 확정하지 못하여 해리는 무엇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정지해 있었다. 에그시가 아직도 물을 틀지 않고 있는 바람에, 해리는 머릿속에 질서 없이 지나가는 말들을 중얼거리며 다듬을 기회도 가지지 못했다.
에그시는 샤워기를 들고만 있었다. 해리의 미동을 감지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의무감에 사로잡힌 에그시의 신경은 계단에 어떤 무게가 내려앉으면서 나는 소리를 듣고야 말았다. 에그시는 미끄러질 것 같은 다리에 꽉 힘을 주고 문 너머로 귀를 모았다. 그는 해리의 음성을 놓칠 수 없었다. 오직 그것만이 에그시를 행동하게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활동적인 밤조차 끈끈하게 붙은 포장지가 뜯겨진 흔적을 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