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ngsman/해리에그시] Public Evil 04
- Kingsman: The Secret Service, Harry Hart & Eggsy
- Written by. Jade
공공의 악
Public Evil
* 에그시Eggsy
호텔과 남의 집을 전전하면서 생활한지 아마 나흘쯤 된 기분이었다. 나는 아침부터 꽤나 중대한 사실을 깨닫고야 말았다. 아무리 실내에만 있었다지만 나는 갤러해드에게 새 옷을 받고 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옷을 갈아입은 적이 없었다. 해리가 좋아하지 않을 상태였다. 물론 해리는 여기에 없었지만, 의식은 꼬리를 늘리면서 심지어는 내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는 듯한 이상한 감각까지 지어냈다. 당장 빨래를 해야 했다.
지금 입고 있는 옷을 벗어버리면 완전히 알몸이 되니, 피부를 그럭저럭 가려줄 천조각이라도 찾으려고 나는 용기 있게 갤러해드의 옷장을 열었다. 다행스럽게도 서랍 밑바닥에 석궁이나 독이 묻은 바늘이 붙어 있어서 나를 찌르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옷장 안은 평범했다. 색깔들이 좀 우중충해서 그렇지 사람들이 그런대로 입고 다닐만한 정장 종류가 많았다. 나는 재킷과 조합이 되지 않은 하늘색 셔츠를 꺼내서 상체에 대보았다. 팔은 지나치게 길었고, 어깨도 맞지 않았으며 옷자락은 거의 내 엉덩이를 가릴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한눈에도 몸이 좋다는 게 보이기는 했는데 이렇게 직접적으로 비교를 해보니 입맛이 씁쓸해졌다. 나는 셔츠를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가 기를 쓰고 옷장이며 서랍을 뒤져도 그가 입는 옷은 나에게 맞을 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나는 도로 하늘색 셔츠를 꺼냈다. 바지까지 입었다가는 걸어 다니지도 못할 게 뻔해서 나는 일단 상의만 고민을 했다. 침대 위에 펼쳐진 셔츠는 짜증나게 컸다.
한 십 분쯤 뒤에 나는 하늘색 상의를 입고 토스트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빨래를 미룰 수가 없었다. 나는 기름기가 거의 묻지 않은 접시를 세제를 사용하지 않고 닦은 뒤, 토스트를 다 먹고 화장실로 갔다. 이불만 빼면 손으로 뭐든지 빨 수 있는 노하우를 가진 나에게 상하의 한 벌은 전혀 어려운 과제가 아니었다. 나는 쪼그려 앉아서 부지런히 비누거품을 냈다. 향이 꽤나 좋은 비누였다.
내가 끼니를 때우자마자 다소 서둘러서 빨래를 감행한 건, 해가 떠 있을 때는 갤러해드가 오지 않을 거라는 추측 탓이었다. 내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때를 빼낸다 하더라도 정오까지 빨랫감과 씨름을 하진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다리부터 가렸다. 열쇠를 가지고 있는 갤러해드가 노크를 할 리는 없으니 바깥에 나타난 인간은 내가 정체를 모르는 자다. 나는 화장실에서 무기로 쓸 만한 것이 있는지 뒤져보았다. 그렇지만 욕실 캐비닛에는 면도날 하나 들어있지 않았다. 나는 문이라도 재빨리 잠가보려고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노크 소리가 멎었다.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는데도 밖은 조용할 뿐이었다. 나는 일단 수건으로 허리 아랫부분을 가리고 슬그머니 얼굴부터 내밀어보았다. 창문이 깨져나간다거나 문이 크게 흔들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대신 현관 근처에 문틈으로 밀어 넣은 듯한 쪽지가 있었다. 나는 아무도 없는 집에서 눈치를 홱홱 살피며 쪽지를 집어서는, 창문에서 나를 볼 수 없도록 싱크대 밑에 숨었다.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1시간 뒤에 집 뒤쪽의 수영장에 가 있을 것.’ 뒤편에 수영장이 있는 줄 몰랐다는 건 두 번째로 취급할 사항이었고, 일단 난데없이 수영장으로 나를 불러내는 의도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처음 보는 필체의 글씨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갤러해드가 직접 썼든 아니든 이것은 그의 지시로 비롯된 명령문이었다. 그는 참 종잡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수영장으로 가라고 하면 나는 그 말을 따라야 하는 처지였다. 나는 쪽지를 주방에 두고 헹구지 못한 옷을 처리하러 돌아갔다. 그 생각만 들었다. 나는 샤워기를 틀고 옷에 묻은 비누거품을 쭉 씻어냈다. 빨래에 집중하다보니 시간이 금방 갔다. 나는 물기를 꼼꼼하게 짜낸 셔츠와 바지를 옷걸이에 끼워서 화장실의 양쪽 문고리에 각각 걸었다.
그 뒤 몇 분이 흘렀을 때 누가 또 이 집에 찾아왔다. 나는 갤러해드는 어딜 갔는지 잠시간 궁금했다가, 내가 현관문을 여는 게 가능한지 확신하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문고리를 위아래로 젖히기도 해보고 열쇠구멍 안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에 문이 한 번 더 흔들렸다.
“아무도 안 계세요?”
적당히 어린 목소리였다. 나와 동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을 안쪽으로 당겼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그저 문이 열리고 하얀색 모자를 쓴 남자애가 나를 향하여 상체를 꾸벅 숙였을 뿐이었다. 청색 멜빵바지를 입은 그는 어떻게 봐도 청소부였다.
“수영장 청소가 다 끝났다는 걸 알려드리려고요. 물도 다 채워놨으니 들어가셔도 됩니다.”
“아, 예…. 혹시 제가 돈을 드려야 하는 건 아니죠…?”
“물론입니다. 비용은 완벽히 지불되었습니다.”
“아, 그리고, 저기.”
나는 어쩔 수 없이 청소부가 듣기에 참 수상쩍은 질문을 했다.
“수영장이 대체 어딨어요?”
내 나이또래인 그 청소부가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는 건 내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이 집에 사는 사람이 왜 수영장 위치도 모르는 거냐며 캐묻지 않았다. 바지가 없어서 엉거주춤하게 걷고 있는 내가 뒤쳐져도 재촉하지 않고, 수영장이 얼핏 보이는 위치까지 나를 안내해준 다음 돌아갔다. 하얀 타일이 새 것처럼 반짝거리는 게 벌써부터 훤히 보였다.
수영장은 한 열 다섯 명쯤 되는 사람이 들어가도 좁지 않을 정도로 컸다. 나는 입을 떡 벌렸다. 본래 인공적인 건축물 대신 나무들이 많은 곳이라 여기저기서 나뭇잎이 사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는데 그것이 또 상당히 운치가 있었다. 나는 쭈그려 앉아서 손으로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조금 더 따뜻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충분히 넓고 맑은 수영장을 앞에 두고, 나무 냄새가 섞인 바람을 맞고 있으니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나는 그 느낌을 그대로 살려서 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아무리 손과 다리를 뻗어도 걸리는 게 없었다. 바람이 가끔 강해져서 물 위에 나뭇가지의 그림자가 나타나는 건 차라리 장식 같았다. 나는 몸을 뒤집었다가 가만히 떠 있기도 하면서 마음껏 수영을 했다. 너무나도 자유로웠다. 물속에서 하늘과 나무와 바람을 감상하는 일이 이토록 좋은 것인 줄 처음 알았다. 오래간만에 멋지고 좋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으니 꼭 취한 느낌이 들었다. 약간 멍하기도 했다. 나는 간간이 손을 휘저으면서 수면 위를 떠다녔다.
일직선으로 누운 내 몸만큼 변화가 없던 수영장이 예고도 없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놀라서 몸에 힘을 주었다가 밑으로 가라앉았다. 열심히 다리를 휘저어서 얼굴을 바깥으로 빼 보니, 갤러해드가 물속에 들어와 있었다. 내가 머리를 흔드니까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는 신경 쓰지 않고 수영했다.
그는 아주 빠른 속도로 내 옆을 지나갔다. 그가 양팔로 물을 가르는 동작은 체육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처럼 틀이 꽉 잡혀 있었다. 나는 그를 멀뚱히 보고 있다가 배알이 뒤틀렸다. 나는 잽싸게 갤러해드의 발끝을 쫓아갔다.
첨벙거리는 소리가 두 배로 커진 걸 감지했는지 앞만 보던 그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 때 입술을 앙다물고 있었다. 그는 속력을 더 높였고 나도 최선을 다해 그를 추적했다. 수영장을 한 번 가로지르고 나서 또 반을 왔을 때에 그가 잠수를 했다. 헤엄은 꽤 치는 편이었지만 그렇다고 잠수를 해본 적은 없어서 나는 우물쭈물했다. 사각형에 갇혀 있는 물의 표면 어디에도 그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다. 일단 나는 전진했다. 하지만 목표를 잃은 추적은 점차 그 동력을 잃어갔다. 나는 참지 못하고 양 볼에 공기를 빵빵하게 채운 다음 머리를 물속에 처박았다.
갤러해드는 나보다 밑에, 그리고 나보다 뒤에 있었다. 나는 황급히 방향을 돌렸다. 급하게 손을 저으면서 수면에서는 그래도 안정적이었던 나의 수평선이 오르락내리락 했다. 그는 꼭 자신은 물속에서 서 있을 수 있다는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나는 어떻게든 그를 잡고 싶었지만 점점 숨이 부족해 패배를 선언하듯이 위로 올라가서 산소를 마시고 말았다. 나는 헉헉댔다. 그가 유유히 내가 볼 수 있는 곳으로 올라왔다.
“더 할 건가?”
나는 몇 번 더 헉헉댔다.
“당신은요?”
“나갈 거야.”
그의 선택은 옳은 것이었다. 하늘의 색깔이 변하고 있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보니 나는 곧장 나갈 수가 없었다.
“…먼저 나가요.”
“더 있을 건가?”
“당신이랑은 같이 못 나가요. 입고 나갈 옷이 없다고요.”
“아니.”
그 말만 남기고 그는 붙잡고 올라갈 수 있는 계단 쪽으로 나아갔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그러다가 나는 그가 이번에도 어떤 쇼핑백을 들고 왔음을 발견했다. 나는 얼른 그의 옆으로 헤엄쳐갔다.
“내 옷 사왔어요?”
그는 대답을 건너뛰었다.
“대체 내 치수는 어떻게 알고요?”
“안아봤으니까.”
내가 그 의미심장한 답을 완벽히 이해가기까진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내가 빨간 불빛을 보고 별 수 없이 침대로 다시 기어들어갔던 밤에, 꼭 잠결에 뒤척이듯이 팔로 나를 막았던 날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 잠을 자지 않았다, 이건가? 나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뒤를 돈 상태에서 수건으로 몸을 닦고 있었기에 내 표정을 보지 못했다. 나는 수영장에서 반쯤 나왔다.
“수건 또 있어요?”
아이보리색 수건이 휙 날아왔다. 나는 수건 사이에 머리카락을 넣어서 톡톡 쳐가며 물기를 닦았다. 갤러해드와 나는 서로 등을 돌리고 옷을 입었다. 이번에도 그가 사 온 옷은 기가 막히게 잘 맞았고, 활동적인 움직임에 적합한 소재를 써서 무척 편했다. 아마도 그는 일반인보다 사람의 몸에 더 잘 알 수도 있었다. 그런 지식이 있어야 어딜 찌르면 피가 많이 나고, 어느 부위로 다른 사람의 공격을 막았을 때 충격이 덜 가는지 계산을 하고 싸움질을 할 테니 말이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여서 한 번 안아본 것만으로도 내가 어떤 치수의 옷을 입어야 하는지 파악한 그의 괴상한 능력을 납득할 수 있었다.
나는 갤러해드의 뒤에서 걸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가 집에 들어올 때까지 문을 잡아주었다. 그 때문에 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저녁 먹는 거예요?”
“오늘은 갈빗살 요리를 하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을 것 같았다.
“근데 요리는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는 냉장고에서 식재료를 꺼내며 이번에도 일상적인 어투로 말했다.
“해리는 너에게 음식을 만들어준 적이 없나?”
“당연하죠.”
대화가 끊겼다. 그는 답변을 해야 할 순번을 자연스럽게 나에게 넘기면서 내가 먼저 한 질문을 무시했다. 참 이기적인 화술이었으나 그것에도 이제 좀 적응이 된 모양이었다. 나는 주방에 진을 치고 관찰로써 그가 어디서 요리 실력을 쌓았는지 알아내기로 했다. 그는 역시나 나를 한 번 곁눈질하는 것에 그쳤다.
불이 피어오르고 양파껍질이라든가 반으로 자른 키위의 알맹이 등이 등장했다. 반쯤 남은 와인이 슥 조리대 주변을 긁기도 했다. 보는 사람이 있으니 멋이라도 내려는 작정인가 싶었는데, 그가 하는 동작들은 요리에 다 필요한 것들이었다. 그는 실용적이었다. 껍질을 싱크대로 던지는 것에도 그저 조리대가 난잡해지는 걸 막기 위함이었다. 그가 멋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 혼자였다. 내 자세는 조금씩 늘어지고 있었다.
“와인 잔 꺼내서 식탁에 올려놔.”
내가 반응이 늦자 그는 손가락으로 와인 잔이 보관되어 있는 곳을 가리켰다. 나는 유리잔 두 개를 꺼내서 그것들이 마주보도록 놓았다. 갤러해드는 여전히 바빴다. 요리를 대하는 태도에 들어 있는 집중도가 너무 크지 않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러나 난 요리를 수영보다도 몰랐다. 해리 밑에서 일을 하지 않을 때는 간신히 계란이나 부쳐 먹었고, 번듯한 일자리를 가지고 나니 바깥을 돌아다니거나 사무실에 박혀 있어야 할 때가 많아서 주방과 친하게 지낼 수가 없었다.
갤러해드는 완성된 요리가 올라간 접시를 가져가라고 했다. 그동안에 그는 와인을 골랐다. 따뜻한 김에 섞인 냄새가 달콤해서 군침이 돌았다. 내가 의자에 앉으니 그가 내 눈엔 신기하게 생긴 도구로 마개를 제거한 와인을 따라주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내 기분에 상관없이 와인의 색깔은 예뻤다.
구운 다음에 조린 것인지, 소스를 부어서 볶은 것인지 나로서는 구별이 잘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요리는 맛있었다. 수영을 하고 나서 알게 모르게 허기가 졌던 것도 같다. 나는 음식도 다 먹어치우고 갤러해드가 맨 처음에 따라준 와인도 다 마셨다.
“맛있네요.”
“남은 고기는 없지만 와인은 있어. 더 마시겠나?”
“좋죠. 병만 줘요.”
처음 잡아보는 와인 병은 의외로 무거웠다. 나는 한 손으로는 병의 목을 붙잡고, 다른 손으로는 밑바닥을 받친 채 다소 불안정하게 잔에 와인을 채워 넣었다. 와인은 서서 따라야 근사한 모양이 나오는 술인가 보다. 아까 갤러해드가 와인을 따르는 폼은 썩 괜찮았는데 말이다.
와인을 두 잔째 마시고 나니 배가 꽉 찼다. 나는 슬슬 설거지는 내가 하겠다고 나서야 하는지 갤러해드의 눈치를 살폈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워낙 징글징글한 방식으로 깨달은 터라, 이런 데에서도 얻어먹은 입장으로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압박감이 드는 것이었다.
“…배 잘 채웠으니까 설거지는 내가 할게요.”
“그렇게 해.”
그의 잔에는 아직 술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와인 잔을 제외한 그릇들을 가지고 가서 닦았다. 재료들을 손질하면서 버려진 껍질이 설거지에 방해가 될 것 같아 껍질들은 마침 주변에 있던 봉지에 모았다. 나는 그릇을 씻었고 그는 남은 와인을 마셨다. 그에게서 직접 건네받은 잔까지 다 씻고 나자 주방과 식탁이 다 같이 깨끗해졌다.
“내일 널 풀어줄 거다.”
손에 있던 물방울들을 탁탁 털던 나는 난데없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놀랐지만 동시에 내가 말해야 하는 대사를 생각해낼 수 있었다.
“정말이죠? 내일이면 난 자유로운 거예요?”
“넌 지금도 자유로워. 내가 신임하는 운전수가 배에 총을 맞아서 당장 데려다주지 못할 뿐.”
무시무시한 범죄자다운 구실이었다. 어쩐지 기가 눌려서 당신은 운전도 할 줄 모르냐는 도발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도 자유롭다는 말이 내 신경을 부드럽게 가꾼 건지도 몰랐다.
갤러해드는 세 번만 따르면 없어질 듯한 양의 와인을 신중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현실적인 한가로움이었다. 아끼는 운전기사가 총에 맞았다는데 그는 총알들이 날아다녔을 그 현장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그는 입을 옷이 한 벌밖에 없어서 전전긍긍하고 있던 내 옷을 사려고 쇼핑을 했으며, 사람을 시켜 수영장을 청소하게 하고는 나와 같이 고기를 먹고 와인을 들이켰다.
“총상이 하루면 나아요?”
“그렇지는 않지.”
나는 그가 말장난을 하는 건가 싶었다.
“그런데 어떻게 날 내일 보내주겠다는 거예요?”
“가능해.”
“장난하는 거 아니죠?”
“그래.”
갤러해드는 남은 와인을 냉장고 같은 곳에 넣지도 않고 주방의 실온에 방치했다.
“넌 이제 가도 돼.”
가버린 것은 그였다. 나는 어리둥절했고, 별 생각 없이 그를 따라갔다. 그는 침실과 붙어 있는 욕실에서 몸을 씻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문득 어떤 일이 생각났다.
“어, 잠깐만요!”
나는 날쌔게 갤러해드를 추월해서 욕실의 문고리에 걸어 놓았던 내 상하의를 수거했다. 빨래를 마친 직후와 옷의 상태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일 오전안에 마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태워버리면 되잖아.”
나는 무의식적으로 되물으려다가 내가 “가져가려고 했는데 내일까지 안 마르겠네.” 하고 다소 궁상맞은 혼잣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태워버리고 와.”
그가 욕실 문을 닫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내가 이 옷을 두고 가도 그는 입을 수 없다. 불을 좀 쬐고 있으면 빨리 마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옷은 탈 것 같았다.
“아니, 근데 불이 어딨는데요? 성냥이나 라이터가 어디에 있는지는 알려줘야지.”
욕실로부터 뭐라 소리가 들렸다. 화장대 서랍을 열어보라는 말 같았다. 화장대 서랍을 여니 화장품이나 미용도구가 아닌 시곗줄이나 탄창이 가득했고, 나는 살짝 진저리를 치면서 은색으로 빛나는 라이터를 꺼냈다. 옷을 태우면 재가 꽤 쌓일 것이므로 수영장 물을 뜰 수 있는 용기도 주방에서 하나 챙겼다. 나는 수영장 근처에 앉아서 젖어 있는 옷들을 한 번 더 짜고 난 뒤에 불을 붙였다. 하늘보다 옷을 흡수하고 있는 불꽃이 더 밝았다.
캠프파이어도 아니고, 불장난도 아닌 애매모호하고 실용적인 불이 꺼졌다. 훅 하고 찬 공기가 몰려왔다. 나는 수영장에서 떠온 물로 재를 씻어내고 서둘러 실내로 들어갔다. 갤러해드는 생활하면서 자연스레 엉킨 머리칼을 빗고 있었다.
“그 사람은 오늘 다쳤어요?”
“누굴 말하는 거지?”
“운전수 말이에요. 오늘 총 맞았어요?”
그가 빗을 내려놓았다.
“오늘 이른 시각에 있었던 일이고, 그건 그의 불찰이야.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모하게 영웅심을 발휘해서 그 꼴이 된 거지.”
웬일로 설명이 길었다. 나는 덥석 그의 말꼬리를 잡았다.
“설마 그 사람이 당신을 구해주려다가 다친 거예요?”
“나는 그런 걸 바라지 않았어.”
“그래도 그 사람 때문에 당신이 이렇게 멀쩡하게 집으로 돌아온 거잖아요. 그 운전수가 대신 총을 맞지 않았더라면 당신은 오늘 나랑 수영을 하지도 못했을 거고, 와인도 마시지 못했을 거라고요.”
“내가 방금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고 했지?”
“총알이 날아오는데 그 순간에 무슨 대책을 세워요?”
“그는 총격전이 벌어질 게 뻔한 자리에 오면서도 만용을 부렸다. 방탄조끼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야. 놈이 쓸데없이 나서지 않았더라도 내가 죽는 일은 없었을 거다. 그 총상은 놈의 잘못으로 인해 탄생한 거고, 너도 나도 그를 동정해줄 필요는 전혀 없어.”
빗의 플라스틱 손잡이가 원통에 부딪히면서 나는 소리가 꼭 나를 비웃는 것처럼 들렸다. 오늘 하루는 정말이지 이상했다. 빨래에 집중할 때만 해도 평온했던 마음은 수영을 하면서 한껏 들떴다가 맛있는 요리의 힘을 받아서 더욱 만족스러웠다. 내일이면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까지 듣게 되어 또 좋았다. 그렇지만 지금 내 기분은 순식간에 가라앉아서는 갈팡질팡해댔다. 와인을 더 마시기 전에 도수를 미리 봐뒀어야 했다.
나는 침대를 출렁거리게 하면서 그 위에 앉았다. 그가 나를 응시했다.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했는데 은근히 끈질겼다.
“왜요.”
“씻지 않을 건가?”
나는 순간 고민했다. 수영을 하고 나서 씻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오늘 사람들이 붙어서 새로 청소한 수영장에 오늘 갓 받은 물속에서 논 것이니 하루쯤 씻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게으름이 내 뒷목을 잡아당겼다.
“…귀찮아서.”
나는 픽 침대에 누웠다. 묵직한 술기운이 잠깐 동안 베개를 휘젓고 내 몸을 늘리는 것 같더니 금방 잠잠해졌다. 싸고 독하기만 한 술에 익숙해져 있다가 고급스러운 포도주를 먹으니 몸이 당황했던 듯하다. 나는 비로소 건재하게 돌아온 것 같은 내 주량에 뿌듯해하면서 깍지를 낀 두 손으로 뒷머리를 받쳤다.
갤러해드가 침대로 들어오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는 몇 가지의 화장품을 발랐고 그 뒤에는 거실로 나가서 전화를 몇 차례 했다. 내일 입을 정장을 미리 꺼내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기도 하는 등 사소하지만 알찬 일들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어찌 보면 그에게는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일이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그는 분해한 총을 빈틈없이 닦고 있었다. 그는 가끔 이런 식으로 자신이 해리 하트가 아니라는 걸 내가 인식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사실 도와준다는 건 내 관점에서 붙인 표현이기는 했지만, 어떤 점에서는 내게 이로운 것 같긴 했다. 해리 하트는 나를 꺼내주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사람이고 갤러해드는 나를 가두고 있는 사람이다.
맞다. 해리는 진실하게 나를 위해 노력했다.
“나를 더 이상 잡아두지 않아도 된다는 건, 해리가 당신이 원하는 걸 줬다는 뜻이에요?”
조금이라도 그의 목소리를 더 빨리 듣고 싶어서 나는 연거푸 질문을 던졌다.
“로버트가 숨은 장소를 해리가 알려줬냐고요.”
“이 일에 관해서 너와 해리 하트가 할 수 있는 건 다 사라졌어. 그것만 알면 되는 거 아닌가?”
“해리를 죽였어요?”
그가 미간을 찡그렸다. 몇 일간 여기 있으면서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내가 왜 그를 죽이나?”
내가 보기에 그는 정말로 내 질문이 가당치 않아서 되묻고 있었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어지면서 굉장히 무안해졌다. 갤러해드가 침대에 앉자 나는 재빨리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아까 마셨던 와인이 좀 남았는데, 마저 들겠나?”
술기운과 더불어서 졸음도 달아난 기분이라 나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그는 오른손에는 병을, 왼손에는 교차시킨 유리잔 두 개를 끼고 돌아왔다. 왠지 모르게 와인의 향이 더 강렬해진 것 같았다. 저절로 눈이 감기면서 나는 향에 집중하게 되었다.
뜨겁고 큰 손이 나에게 서늘한 잔을 쥐어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향은 말도 안 되게 좋았다. 더 이상 뜸을 들이는 건 필요치 않았다. 나와 갤러해드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갤러해드가 먼저 편하게 누웠고, 나는 잔 바깥으로 흘러내리는 와인 방울까지 핥아 마시면서 술과 밤을 즐겼다. 해리가 죽지 않았고 나 역시 살아있다. 내일이면 돌아갈 수 있기에 어쩌면 더 지루할 수 있는 날은 훌륭한 요리와 와인 덕택에 멋지게 끝났다. 이것은 일종의 행복이었다.
⁂
“에그시.”
머리가 베개에 폭삭 파묻혔다. 미약하게 숙취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것이 뒤통수에 붙어 있는 것 같았다.
“일어나. 떠날 시간이야.”
나는 홱 이불을 치웠다. 내가 그렇게 늦잠을 잔 건 아니었는데 갤러해드는 어느 장소를 가도 괜찮을 멋들어진 차림을 갖춘 모습이었다. 나는 물을 잔뜩 마시고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대충 정리했다. 갤러해드는 현관 쪽에서 나를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운전수는 겉만 봐서는 정상적인 건강 상태를 보유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고 뒷좌석에 탔다. 갤러해드는 내 옆에 앉았다. 차가 출발했다. 나는 집과 수영장이 멀어지고, 차가 갖가지 나무가 서 있는 길로 진입하고 있는 상황을 모두 볼 수 있었다. 나는 창문에 딱 붙어서 계속 밖을 쳐다보고 있었지만 매우 위험한 범죄자의 안전가옥으로 갈 수 있는 길을 외우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길이 예뻐서 구경하는 게 재밌었을 뿐이었다.
자연에 가득 휩싸인 길은 끝날 줄 모르고 이어졌다. 나는 혹시나 싶어서 차창을 열고 닫을 수 있는 버튼을 눌러보았다. 유리는 내려가지 않았다. 갤러해드가 뭘 하는 거냐며 날 슬쩍 쳐다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그 행동에도 사실 별 의미는 없었다.
나무들의 숫자가 줄어갔다. 나는 빛에 잠겨 있는 한 대의 승용차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차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는 해리이었다. 나는 입을 벌렸다. 나도 그 이유는 잘 몰랐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나는 해리가 볼 수 있도록 크게 팔을 흔들었다.
“해리!”
해리는 간단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그의 얼굴은 꼭 하늘같았다. 멋지고 아름답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없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이는구나.”
“네.”
“그 때 다리를 찔렸다고 하지 않았니?”
“낫고 있는 중이에요.”
해리는 그렇게 나의 근황을 확인하고는 내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갤러해드는 날 따라오지 않았다. 그저 같이 내려준 게 전부였다. 나는 목을 힘껏 위로 치켜들었으나 해리의 턱 끝과 목젖만 보았다.
“고생 많았다. 돌아가자.”
나는 해리의 차에 올랐다. 거대한 수수께끼 같았던 인질 신세에서는 탈출했다. 범죄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일을 제일 잘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탈출이다. 나는 내가 오랫동안 있었던 자리를 되찾았다. 더 이상은 그걸 꾸미는 게 불가능했다.
⁂
해리는 곧바로 나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당분간은 집에서 쉬어도 돼. 필요하면 부를 테니. 혹시 생각해 둔 기간이 있다면 얘기하고.”
“아니에요. 그냥 하루나 이틀 정도 놀면 될 것 같은데.”
“그걸로 충분하겠어?”
나는 두 팔을 자신 있게 폈다.
“물론이에요. 거기서 정말 큰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사실 내일도 일거리가 있다고 하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고요.”
해리가 시선을 내렸다. 대개 해리의 그런 동작은 응답을 제대로 접수했다는, 일종의 끄덕임과도 같은데 이번에는 무엇인가 의심스러웠다.
“해리야말로 협상한다고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니에요?”
해리는 조용하게 내 말을 부정했다. 그는 신속하게 차를 타고 떠났다.
해리가 가고 나자 나는 팍 식어버린 나의 작은 집을 밝혔다. 냉장고에 먹을 것이 얼마나 들어있는지 기억나지가 않아서, 가장 먼저 간식거리를 넣어두는 서랍과 냉장고를 열어본 건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는 근처 마트에서 푸짐하게 장을 봐 온 다음에 안에서만 맴돌고 있던 공기를 확 풀어주었다. 커다란 감자칩 봉지며 음료수들이 들어차 있는 모습을 보니 뿌듯했다. 나는 감자칩을 먹으면서 TV 채널에서 틀어주는 영화를 감상했고, 근처에 수영장이 없다는 현실에 대한 위안을 만들고자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그랬더니 시간이 빠르게 흘러 저녁을 먹을 때가 되었다.
오늘은 접시에 담기면 그럴듯한 모양이 나오는 요리를 해보고 싶었다. 나는 핸드폰으로 레시피를 찾아가면서 면 요리를 하나 만들었다. 프라이팬을 통째로 뒤집어서 음식을 옮겼더니 면이 접시 바깥으로 삐져나왔다. 비록 예쁘게 담지는 못했지만 그런대로 맛은 있어서 밤에도 배고프지 않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놀랍게도 아늑함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일을 나가지 않아도 된다면 침구류 매장을 둘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오전은 그렇게 보내고, 사력을 다해 청소를 하면 하루를 또 빨리 보낼 수 있을 터였다. 나는 쉽게 내일의 일정을 정했다.
불현듯 어떤 것이 궁금해져 나는 손거울을 꺼냈다. 누운 자세로 보는 얼굴은 실물보다 못생기기 마련이기에 나는 흠칫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뺨에서 눈 밑까지 차근차근 더듬었다. 피부는 매끈했고 눈 아래가 심각하게 거뭇하지도 않았다. 안색만 따져서는 내일 해리의 사무실을 나가지 않는다는 게 말도 안 될 지경이었다. 나는 대청소 한 번만 하고 출근하겠다고 말하기 위해 해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해리의 핸드폰은 꺼져있었다. 평소 그가 잠을 자는 시각은 아니긴 했지만, 해리도 노곤할 만하다는 생각에 나는 미련 없이 핸드폰을 놓았다.
다음 날이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나에 대해 잘못 판단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우유를 붓고 새 시리얼의 봉지를 뜯으면서도 휴대폰으로 해리에게 전화를 해댔다. 나는 부디 해리가 시리얼 그릇을 한 번 다 비울 때까지 연락을 주었으면 하고 바랐다. 전화기는 울리지 않았다. 나는 그릇과 숟가락을 대충 씻곤 점퍼를 꺼내 입었다.
길가에서 나는 절대로 가만히 멈춰 있거나 걷지 않았다. 나는 끊임없이 뛰었다. 해리는 아마도 내가 지금처럼, 긴장감과 압박감이 비정상적으로 높은 인질이라는 상태에 있으면서 생긴 후유증을 앓듯이 덜컥 겁부터 나는 내 심리를 짐작하고 나에게 휴가를 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결국은 내 추측이었고, 나는 놀라운 속도로 이미 해리의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해 있었다.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해리를 찾았다.
“해리?”
해리는 그가 업무를 처리하는 방에서 나타났다. 그가 내리고 있는 손에는 서류들이 몇 장 쥐어져 있었다.
“…에그시? 지금 출근한 거니?”
해리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전화한 줄 모르셨어요?”
“오, 아침에 핸드폰을 켜는 걸 잊어버렸었구나. 무슨 일이 있어서 전화한 거였니?”
해리가 문턱을 넘자 그의 전신이 드러났다. 해리는 그가 늘 고집하던 방식대로 선을 세운 정장을 입고 있었고, 잘 닦인 신발을 신었으며 실력 좋은 변호사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류를 들고 있었다. 나는 말이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부끄러워졌다.
“아, 아니에요.”
나만 떨고 있었다. 해리는 꾸준히 가라앉은 시선을 나에게 보냈다.
“해리랑 통화가 가능한 시간인데도 해리가 전화를 안 받으니까… 저도 맨 처음에는 전화를 안 받았었잖아요. 그게 시작이었잖아요. 사실 해리가 절 빼내기 위해서 뭘 했는지 모르니까 더 걱정이 되기도 하고, 혹시 그 놈한테 덜미가 잡혀서는 안 좋은 일을 당했으면 어쩌나 싶어서, 음, 그러니까요. 무슨 뜻이냐면….”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된다.”
해리가 빈 손을 아래로 내렸다. 신기하게도 그 방향을 따라 날뛰던 내 가슴도 침착하게 제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 자에게 납치되지 않았어.”
“…네, 보여요.”
“네 전화를 받을 수 없었던 건 그저 내가 실수로 핸드폰을 켜 놓지 않았기 때문이야.”
“네, 알아요.”
“이제 괜찮니?”
“네.”
희한하게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단어를 반복했을 뿐인 입술은 한 줌의 힘도 없이 축 쳐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동시에 머리를 털었다.
“출근한 게 아니고 그저 내가 여기 있는지 확인을 하려고 온 것이라면 다시 집으로 가도 좋아. 난 분명히 너에게 휴가를 줬고, 특별한 사건이 없는 이상 내가 공휴일 말고 네게 휴가를 주는 일은 없을 테니 이번 기회에 좀 즐기려무나.”
나는 해리를 향해 웃었다. 그리고 허겁지겁 해리의 사무실에서 나왔다. 해리는 시원스럽게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